인식, 진리 그리고 관념에 관한 성찰(라이프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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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 진리 그리고 관념에 관한 성찰(1686)[편집]

요즘 주요 인사들 사이에서 참인 관념과 거짓인 관념에 관하여 격렬한 논잰이 일어나고 있고, 데카르트 조차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한 이 문제가 진리의 인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관념과 인식 사이에 차이와 구별 기준에 대한 나의 견해를 간단히 설명하려 한다.


인식은 애매하거나 명석하다.


인식은 다시 모호하거나 판명하다.


판명한 인식은 비충전적이거나 충전적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충전적인 인식은 상징적이거나 직관적이다.


가장 완전한 인식은 충전적이면서 동시에 직관적인 인식이다.


예를 들어 내가 전에 한번 본일이 있는 꽃이나 동물을 기억하려 하는데, 그것을 다시 인식하거나 나에게 나타나는 다른 비슷한 사물과 구별하는 것이 충분하지 못할때와 같이, 제시된 사물을 다시 인식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개념은 애매하다.


또는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나, 질료, 형상, 작용, 목적 들에 있어서 공통적인 한에 있어서의 원인, 그리고 우리가 긔에 대하여 어떠한 확실한 정의도 가지고 있지 않는 다른 이러한 종류의 개념들과 같이 학교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하나의 용어를 고찰할 때, 그러한 개념들이 사용되는 명제도 또한 애매하다.


따라서 하나의 인식은, 그것이 표현하는 사물을 다시 인시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내가 그 인식을 소유할 때, 명석하다.


그리고 이 인식은 다시금 모호하거나 판명하다.


어떤 사물이 그의 개념이 그 안으로 분해될 수 있는 특징들과 규정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사물을 달느 것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그 특징들을 개별적으로 열거할 수 없을 때, 그 인식은 모호하다.


따라서 우리들은 색, 냄새, 맛, 그리고 다른 특수한 감각 대상들을 충분히 명석하게 다시 인식하고 서로를 구별하긴 하나, 단순한 증거를 통하여 그렇게 할 뿐, 진술 가능한 특징들을 통하여 인식하고 식별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비록, 이 성질들이 그 개념들의 근거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성질들의 개념들이 복합되어 있고 분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실하기는 하지만, 그 사물을 보고, 냄새 맡고, 맞볼수 있도록 우리가 그들을 현존하는 사물 앞으로 인도하지 않거나, 또는 그들로 하여금 최소한 이전의 그와 유사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명백히 제시하지도 못한다.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는, 화가와 다른 예술가들이 가끔 자신들의 판단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예술작품에 있어서 무엇이 잘됐고, 무엇이 잘못돼 있는지를 적절하게 인식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에게 맘에 들지 않는 작품들 안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던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판명한 개념이란, 주화 감식가가 한 주화를 그의 특징들과 충분한 조사를 통하여 다른 모든 사물들로부터 구별함에 있어 금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는 수, 크기, 형태 등과 같이 여럭 감관들에 공통으로 관계되는 개념들과, 희망과 공포와 같은 영혼의 많은 정서들에 대하여, 즉 우리가 충분한 특징들의 열거에 다름 아닌 명목적 정의를 갖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흔히 그런 개념을 갖는다.


그렇지만 한 개념이 근원적이거나 또는 자기 자신의 특징일 때, 즉 그것이 분해될 수 없고 다닞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인식되고 어떤 다른 규정들을 가지고 잇지 않을 때는 정의가 불가능한 개념에 대해서도 판명한 인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금의 특징에 속하는 무게, 색, 왕수 [1] 그리고 기타의 특징들 처럼 복합 개념들 안에서는 개별적인 특징들이 종종 명석하기는 하지만 모호한 방식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에, 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판명하기는 하지만, 비충전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판명한 개념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시금 판명하게 인식되면, 따라서 분석이 끝까지 수행되면, 그 인식은 충전적이다.


이에 대해 사람들이 완전한 사례를 들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수에 관한 인식이 이러한 인식에 매우 가깝다.


그러나 대부분의 겨우에 특히 분석의 계열이 긴 경우에, 우리는 대상의 본질 전체를 한번에 조망하지 못하고, 대상 대신에 기호를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고할 때 이 기호는 간편함을 위해 잠시 동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데, 이때 우리는 그 기호들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알거나 믿는다.


따라서 내가 어떤 천각형 또는 천 개의 등변을 가진 다각형을 생각할 때, 나느 변, 동일성, 그리고 천이라는 수(또는 십의 세제곱)의 본질을 항상 고찰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이러한 사물들에 대해서 갖는 관념들 대신에 정신 안에 있는(그의 의미가 최소한 애매하고 불완전하게 정신에 떠오르는) 그 낱말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이 명칭의 의미를 알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현재 판단을 위해서는 필연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나는 맹목적인 또는 상징적인 인식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러한 인식을 우리는 대수학과 산술등 거의 모든 곳에서 사용한다.


개념이 매우 복합적일 경우 우리는 실제로 그 개념안에 들어 있는 모든 특징들을 동시에 사고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한 곳에서 또는 최소한 그것이 가능한 한에서 나는 그 인식을 직관적이라고 부른다.


판명하고 근원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직관적인 인식 외에 다른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대부분의 복합적인 개념들에 대한 인식은 직관적인 인식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상징적인 인식이다.


이로부터 이미, 우리가 판명하게 인식하는 사물일지라도, 직관적인 사고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관념을 지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어던 명칭들을 이미 설명했따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하여 가끔 사물들의 관념을 우리 정신안에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어떤 사물들에 대해 관념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물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며 말하지 못한다고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데, 이것은 참이 아니거나 또는 이의적이다.


왜냐하면, 가끔 우리는 개별적인 낱말들을 이해하거나 또는 그들을 전에 언젠가 이해한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내용이 없는 사고에 만족하고 개념의 분해를 충분히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복합적인 개념이 혹시 포함하고 잇을지 모를 모순이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이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유명해졌고 데카르트에 의해 수정된 신존재에 대한 논증이 언젠가 나로 하여금 이 문제에 대해 좀더 상세히 고찰하도록 하였는데, 이 논증은 다름과 같다.: 관념이나 사물의 정의로부터 추론되는 것은 그 사물에 관해 진술될 수 있다.


존재는 신, 즉 우리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완전한 존재의 관념으로 부터 도출된다.(가장 완전한 존재는 모든 완전성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존재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에 대해서 존재가 질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 실제로는 단지 다음과 같은 내용만이 도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이 가능하다면, 이로부터 신이 존쟇나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정의가 실질적 정의라는 것을 또는 그것이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그것을 추론하기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우리가 모순을 모함하는 개념으로부터 동시에 반대되는 것을 도출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불합리한 것을 포함하는, 가장 빠른 운동의 예를 들곤 한다.


왜냐하면 바퀴가 가장 빠른 운동으로 돌고 있다고 가정하면, 연장도니 바퀴살은 그 끝의 부분에서 바퀴 테 위에 있는 못보다 더 빨리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정과는 반대로 그 운동은 가장 빠른 운동이 아니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는 마치 우리가 가장 빠른 운동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를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사물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념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장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러한 존재의 사유를 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우리가 올바르게 추론하기 위해서 위에서 제시된 신 존재 증명 안에서 가장 완전한 존재의 가능성이 증명되거나 또는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완전한 존재가 가능하고 나아가 필연적이라는 사실보다 더 참인 것은 없다.


그렇지만 이 증명은 증거력이 부족하다.[2]


따라서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단지 그 사물의 특징만을 포함하는 명목적 정의와, 한 사물의 가능성에 대해 진술하는 실질적 정의를 구별하게 되었다.


정의의 실재성이 우리의 자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자의적인 개념들이 서로 결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고, 진리를 명목적 정의에 의존한다는 이유로 자의적인 것으로 간주하려 했던 홉스도 이와 같은 방법에는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3]


정의된 사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다른 근거로부터 확립되지 않는다면, 명목적 정의만으로는 지식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로부터 또한 무엇이 참된 관념이고, 무엇이 허위 관념인지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하나의 관면은 그 개념이 가능하면 참이고, 그 개념이 모순을 포함하면 허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물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인식하거나 또는 후험적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가 개념을 그의 요소들이나 가능성이 알려저 있는 달느 개념들로 분해하고, 그들 안에 어떤 서로 조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사물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한 사물이 어떻게 생성되는가에 대해 파악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인과적 정의가 유용하다.[4]


그러나 우리가 한 사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할 경우, 우리는 그 사물의 가능성을 후험적으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것은 어쨌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충전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또한 그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선험적으로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분석을 끝까지 수행했든데 어떤 모순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개념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초로 가능한 것과 더 이상 분해가 불가능한 개념들에 이르기까지 개념의 완전한 분석이 인간에 의하여 수행 가능한지,(또는 간틍 의미이지만)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을 사물의 최초의 원인이며 초종 근거인 신의 절대적 술어들에 이르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나는 지금 결정하자고 하지느 않겠다.


우리는 대개 추후에 그 개념들로부터 자연의 모범을 따라 다른 개념들을 합성하기 위해, 얻너 개념의 실재성을 경험을 토아여 제시한 것으로 만족한다.


따라서 나는 이로부터, 우리가 한상 확실하게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들의 많은 아름다운 명칭들은 얻너 상상들을 지지하기 위해 오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 가장 빠른 운동의 예를 통해 보여주었듯이,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고 잇다고 의식하는 사물에 대하여 항상 동일하게 관념을 소유하고 잇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여전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내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한 사룸에 대해서 파악한 것은 참이다, 또는 그 사물에 대하여 진술될 수 있다." 는 원리를 오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지 않게 본다.


즉 경솔하게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애매하고 모호나 거이 명석하고 판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급ㅎ나 명석하고 판명한 것의 기준이 제시되지 않고, 관념의 참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이 공리는 쓸모가 없다.


그 밖의 다른점에 있어서는 일반 논리학의 규칙들은, 정확한 경험이나 엄밀한 증명을 통하여 검증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기하학자들도 사용하는 진술의 진리에 대한 경시할 수 없는 기준이다.


그러나 확실한 증명이란, 그것이 항상(크리스찬 헤리누와 콘라드 다시포디우스가 유클리드의 처음 여섯 권의 책으로 만든 것과 같은) 통상적이고, 형식적인 삼단논법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자신의 형식을 통하여 추리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논리학에 의해 규정된 형식에 상응하는 증명을 말한다.


우리는, 모든 규칙에 따른 계산이 그렇게 엄밀한 형식으로 수행된 증명에 대한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필수적인 전제들도 생략해서는 안 되고, 모든 전제들은 이미 사전에 증명되어 있거나 최소한 가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결론도 또한 가정적이다.


이것을 조심스럽게 주목하는 사람은 허위의 관념에 속지 않도록 조심하게 될 것이다.


천재적인 파스칼이 기하학의 정신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아주 유명한 안토인 아르노의 올바른 사유의 기술에 관한 탁월한 책 안에 이에 대한 단편이 포함되어 있다), 단지 조금만이라도 애매한 모든 표현들을 다 정의하고 단지 조금만이라도 의심스러운 모든 진리들을 다 증명하는 것이 기하학의 과제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위의 사정과 매우 잘 일치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그가, 그 경계 너머에서는 하나의 개념이나 진술이 더잇아 조금도 애매하거나 의심스럽게 되지 않는 그런 경계를 설정하였기를 바랐다.


이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우리가 여기서 말한 것을 주의 깊게 숙고하면 알 수 있을 것이므로,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려 한다.


우리가 신안에 잇는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는가(이것은 오래된 명제이며 이성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전적으로 패기할 수는 없는 명제이다), 또는 우리가 자신의 고유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논쟁 문제로 말하자면, 우리가 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통찰한다 하더라도, 우리도 또한고유한 관념을, 즉 말하자면 작은 모사물이 아니라, 우리가 신 안에서 통찰하게 되는 것에 상응해야 할, 우리 정신의 특성들 또는 변형들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은 필연적일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우리의 정신 안에는, 끊임없이 달느 것을 뒤따라 일어나는 사유를 통하여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사물들의 관념들도 원석의 대리석 안에 있는 헤라클레스의 형태처럼 우리 정신 안에 있다.


그러나 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절대적이고 무한한 연장의 관념만이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연장의 변형에 다름 아닌 저 형태도 또한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다.


우리가 그 밖의 색채나 냄새 등을 감각할 때, 우리는 어쨌든, 우리 정신이 그의 현 상태 안에서 그들을 개별적으로 판명하게 고찰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다양하고 아주 작은 형태들과 운동들의 감각 외에는 다른 어떤 감각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정신은, 자신의 감각이 전적으로 아주 작은 형태들과 아주 작은 운동들에 댛나 감각들로 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노란색 입자와 파란색 입자들의 혼합으로 생겨난 녹색을 감각할 때,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 대신 그것이 얻너 새로운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노란색과 파란색의 음밀한 혼합 외에는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는다.


(끝)

해제[편집]

이 책은 원래 얀세니스트인 아르노와 데카르트주의자인 말브랑슈와의 사이에서 불붙은 관념의 본성에 관한 논쟁이 계기가 되어 서술되었는데, 라이프니츠는 이들과 논쟁하는대신에 책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아르노는 지각과 관념을 구분하지 않고 말브랑슈는 우리가 신안에 있는 관념을 통해 사유한다고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데카르트주의자이며,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 책에서 수 없이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직 데카르트의 사유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사유가 충분히 엄밀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비판과 보충은 데카르트 철학과 라이프니츠 철학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즉,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1. 금의 특징을 말하기에 왕수란 '왕수의 녹음'을 뜻하는 듯 보인다.
  2. 라이프니츠는 1684년경에 서술된 이 단편에서는 신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2년후에 저술된 <형이상학 서설>에서는 존재론 증명을 인정한다.
  3. 홉스는 경험주의적 관점에서 명목적 정의와 실재적 정의의 구별에 주목하지 않고, 모든 진리는 명목적 정의에 근거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진리는 자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재적 정의와 명목적의가 서로 구별된다면, 그도 진리가 자의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데 동의할 것이라고 라이프니츠는 생각하였다.
  4. <형이상학 서설>에서 라이프니츠는 어떤 사물이나 개면의 가능성을 선헙적으로 인식할 경우 그정의를 "인과적 정의" 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