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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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학동(五鶴洞)은 이씨촌(李氏村)이었다.

한 삼백 년 전에 이씨의 한 집안이 무룡(舞龍)재를 넘어 이곳으로 와서 살림을 시작한 것이 오학동의 시작이었다. 조상의 뼈를 좋은 곳에 묻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삼백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온 한 집안은, 삼백 년 뒤— 그때의 조상부터 십 오륙 대를 내려온 지금에는, 거기는 커다란 동네를 이루어 호구 일백 사십여 호 사람의 수효 육칠백 명, 항렬로 캐어서 어린아이의 고조부로 비롯하여 늙은 고손까지 촌수로는 이십 육칠 촌까지의 순전한 이씨와 그들의 아내들로서 커다란 마을을 이루었다.

오학동의 동쪽에는 무룡재라는 매우 가파로운 뫼껸이 있었다. 서편으로는 말령[마령(馬嶺)]이라는 역시 가파로운 뫼껸이 있었다. 그 무룡재와 말령은 오학동에서 오 리쯤 북쪽에 가서 겨우 작은 개울이 하나 흐를이만치 벌어지고 오 리쯤 남으로 가서는 서로 합하여서, 만약 하늘에서 그곳을 내려다볼 것 같으면, 그것은 마치 묏마루에 있는 한 구렁텅이와 같았다. 그러 므로 세상에서는 오학동과 그 근방 일대— 무룡재와 말령에 둘러싸인—를 가리켜 ○○골이라 하였다. 여자의 생식기를 따서 붙인 그 골짜기의 이름은 모양으로 보아서 그럴듯하였다.

○○골에는 마을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물론 오학 동이요, 또 하나는 정방(正坊)이라는 동네였다. 오학 동은 ○○골의 중앙에 있었고, 정방은 무룡재와 말령 이 남쪽에 합쳐진 그 산밑에 있었다. 두 마을의 거리는 한 오 리쯤 되었다.


오학동에서는 많은 선비가 났다. 첫번 오학동을 개척한 선조가, 세상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던 선비이니 만치, 그의 후손에도 많은 선비가 났다. 과거에 장원을 하여 그 이름이 근방 일대를 떨친 선비까지 있었다.

연년이 무룡재와 말령의 가파로운 길을 넘겨서 많은 며느리를 맞아 보고 많은 딸을 보내는 동안, 일가가 늘어가면 늘어가느니만치 선비의 수효도 늘었다.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글 읽고 이러는 동안에 연년이 늘어가는 그 일가는 가까운 장래에 이 ○○골에 차고 넘을 듯이 보였다.

다른 동네에서는 오학동을 양반의 동네라 하였다.

오학동 사람들도 그렇게 자처하였다.

〈사붓댁에 맞지 않는 며느리.〉 이런 이름 아래 많은 며느리가 친정으로 쫓겨났다.

치마를 벗고 뜰에 나선죄, 동네 어른께 인사를 못 드린 죄, 김을 맬 때에 웃고 지껄인 죄, 밤에 글을 읽는 새서방에게 빨리 자자고 채근한 죄, 이러한 죄명 아래 삼백 년래로 많은 며느리가 친정으로 쫓겨갔다.

근방 일대에서는 오학동과 통혼을 하는 것을 큰 명예로 여기고 있었다. 그곳으로 며느리를 보냈다가 쫓겨오더라도, 그 허물은 그들은 자기네의 자식 교양 부족에 돌렸다. 또 그만치 오학동에서는 지체가 나쁘다든가, 예절을 모른다든가, 품행이 나쁘다든가 하는 죄 이외에는 며느리를 버리는 일이 없었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든가, 사람이 좀 얼뜨다든가, 인물이 못났다든 가 한 것은 오학동의 며느리가 되기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오학 동서는 정방 사람에게는 결코 통혼하지 않았다.

정방 사람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정방이라는 동네는 본시 오학동을 개척한 조상이 들어앉은 지, 한 백 년쯤 뒤에 생긴 마을이었었다. 정 방은 오씨촌(吳氏村)이며, 정방서 자손을 퍼치기 시작한 첫번 오씨는 속량된 종이었었다. 더구나 그 종은 오학동 이씨와 사돈한 집안에 있던 종이었었다.

오씨도 조상의 산소를 잘 썼던지, 정방으로 온 뒤부터 차차 번식하여 이백 년 뒤—십여 대 뒤에는 백여 호의 커다란 마을을 이루었다.

이렇게 번식을 하였다 하나, 세력으로써 양반촌인 오학동을 우러러볼 수도 없었다. 같은 ○○골에 있는 두 동네였었지만, 오학동 사람들은 정방 사람을 (종을 면한 지 이백년 뒤에도) 역시 종으로 보았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정방 사람에게는〈오냐〉를 하였다. K 동이라는 동네에서 며느리를 맞아왔던 어떤 오학동 이씨는, 자기 며느리의 친정에서 정방과 통혼을 하였 다는 기별을 듣고 당장에 며느리를 쫓아보냈다.


○○골은 동서가 일리, 남북이십 리쯤 되는 골짜기였다. 그 골짜기의 사분의 삼은 이씨가 갈아먹었다.

나머지의 사분의 일— 그것이나마 북향한 산기슭이 정 방 사람이 갈아먹는 토지였었다. 첫번 그곳을 개척한 때에는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지금은 그 땅에 대하여 제각기 내 것, 네것의 소유권이 생겼다. 촌수로 근 삼 십 촌까지 벌어진 그들은 비록 일가라 하나 명색이 일가이 지 남이나 다른 데가 없었다. 대종계, 분종계, 지종계, 산종계, 육촌계가 제각기 갈려 있으며, 그 안에서도 우리 파이니 남의 파이니 당파가 생겼다. 재판까지 생긴 일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일가상피〉라는 불문율을 무시하고 일가끼리 연애와 음행까지 감행하였다. 그렇듯 자손이 퍼지고 멀어졌는지라, 제각기 소유권을 구획하여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오학 동서는 제각기 동네의 친척의 집을 부르기에 거기 적당한 대명사를 지어서 썼다. 가령 그 집 할머니가 대령골서 시집을 왔으면 그 집을 대령방이라 하였다. 그 집 할머니가 우물 있는 집에서 시집을 왔으면 그 집은 우물방이라 하였다. 우물방 할아버지, 대령방 할머니, 약천방 동서, 사슴묏방 큰애기— 만약 다른 곳 사람이 들으면 도저히 이해치 못할 기괴한 대명사를 그들은 서로 부르며 또한 이해하였다. 멀고 가깝고 간에 모두 일가가 되는 그들로서, 토꺼리 없이 〈할아버지〉〈할머니〉하면 누구를 가리킴인지 도저히 알 수 없으며, 그렇다고 웃어른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으므로 이런 편리한 대명사를 지어 낸 것이었다.

정방 오씨도 그 법을 배워서 자손이 번성한 뒤부터는 〈무슨 방〉〈무슨 방〉하고 서로 불렀다. 그러나 그렇게 부른 지 얼마 하지 않아서 오학동 이씨의 간섭으로 그 대명사에 얼마간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학 동서는 〈무슨 방〉〈무슨 방〉하며 〈방〉자를 쓰는 대신, 정방서는 〈무슨 집〉〈무슨 집〉하여 〈집〉자를 쓰게 되었다.


새로운 물은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서 조선에 흘러들어왔다. 도회에서는 상투가 차차 없어졌다. 서당 대신으로 학교가 섰다. 개혁과 문명의 불길이 사면에서 일어났다. 〈핫다라 맛다라〉로 들리던 일본말이 〈고자이마쓰〉〈곤니찌와〉등으로 구별되어 들릴 만 한 이해력이 촌촌까지 미쳤다.

그러나 오학동에뿐은 이 풍조도 흘러들어오지 못하 였다. 지리상 관계로, 두 가파로운 뫼 틈에 있는 오학 동은 다른 세상과는 온전히 구별되어 살았다. 무룡재 의 동쪽에서 말령의 서쪽으로 길을 가는 사람은, 좀 돌림길을 하여서라도 산을 휘돌아서 갔지 깎아세운 듯이 가파로운 무룡재와 말령의 두 고개를 넘기는 피 하였다. 문명은 ○○골을 에워싸고 그 근처에까지 퍼졌지만, 오학동에는 침범치를 못하였다. 무룡재와 말 령의 보호를 받은 오학동은 문명이라는 모진 바람에 쐬일 기회가 없었다.

그들은 역시 한학을 가르쳤다. 옛날의 예의와 도덕을 가르쳤다. 예의와 도덕이면 인생의 전부여니 하였다. 지식의 근원인 수학을 그들은 알려고도 안 하였다.

과학의 온갖 정확함을 보려 아니하였다.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글 읽고—이것이 그들의 생활의 전부였었다.

새로 오학동으로 들어온 며느리들에게서 그들은 새 학문의 자랑을 들었다. 물론 학교 출신의 며느리를 그들은 맞은 일이 없으되, 며느리들은 보고 들은 바로서 새 학문의 정교함을 때때로 비치었다. 오학동을 찾아 온 사위며 처남들에게서 그들은 새 학문의 오묘한 것을 실견도 하였다. 꼬불꼬불한 글자로써 수판보다도 정확하게 어려운 수를 푸는 것을 보았다. 암탉이 없이 도 달걀을 깨운다는 실화를 들었다. 벼락이라고 저퍼 하던 〈전기〉를 사람이 이용하여 온갖 방면으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며, 그(알기는 힘드나마) 이론도 들었다. 시계라는 오묘한 기계가 오학동의 몇몇 큰 집에는 걸리었다.

그러나 신학문에서 윤리와 도덕을 발견치 못한 그들은 역시 신학문을 경멸하였다. 벼슬이라는 것이 없어진 시대이니 이전과 같이 열심으로 학문을 할지라도 뒤에 활용할 곳은 없을망정, 신학문을 학문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상인이나 공인바치가 배울 재간이지 학문이 아니라 경멸하였다.〈농은 민지본이라〉 벼슬이 없어진 고약한 시대이니, 점잖은 사람은 농사나 짓고 윤리와 도덕이나 닦을 게지, 장인바치가 배울 재간은 배울 필요가 없다 하였다. 시대와 문명은 오학 동을 둘러쌌다. 그러나 오학동은 엄연히 그것을 초월하였다.

같은 ○○골 안에 있는 정방은 오학동과 달랐다.

본시 종의 자손으로 학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백 년을 내려온 그들은, 그동안 농사에만 열중하였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그들은 번식하며, 번식하느니만치 먹기에 분주하였다. 이백 년 동안을 오학 동 양반들에게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도, 그 수모를 수모로 여기지도 않고 먹고 살기에 급급하였다.

문명은 ○○골을 에워쌌다. 동으로는 무룡재 너머 서으로는 말령 너머까지 문명의 물결이 미쳤다. 신학문의 그림자는 좌우 재 넘어서 정방 동네를 에워쌌다.

그리고 오학동을 감히 침범치 못한 이 문명의 물결은 어느 틈에 정방에 새어들어왔다.

말령을 넘어서 시집을 갔던 딸이 외손주를 데리고 나들이를 왔다. 외손주는 학생이었었다. 무식한 외조부가 셈을 못하여 안달아 하는 것을 외손주가 연필로 써 꼬불꼬불한 글을 몇 자 써 본 뒤에 손쉽게 계산하였다.

이것은 동방 동리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학생은 신동 이라 하여 동네의 각 어른들이 불러 보았다. 그리고 그 재간이 신동인 탓이 아니고 신학문을 한 탓이라는 것을 안 뒤에, 그들은 학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백년래를 무식하게 내려온 그들은 학문이라는 것이 유난히도 귀하고 중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학문은 종 의 자식을 괄시하지 않았다. 학문 하나이면 그뿐 그 사람의 근본과 조상을 캐이자 안 하였다.

이리하여 정방 동네 안에는 사립학교가 하나 섰다.

신학문을 한 사위 두 사람을 동네로 불러들여서 학교의 선생을 삼았다.

돈냥이나 있는 집 자식은 그 사립학교서 몇 해를 한 뒤에는 감영으로 보내서 중등학교에 넣었다.

현대의 과학 문명의 승리를 자랑하는 기차는 이 ○○골을 상거한 삼십 리 밖 평원을 긴 소리를 치면서 매일 몇 번씩 왕래하였다. 하늬바람이나 살살 부는 날이면, 바람의 운반한 기차의 길다란 울음소리는 이 골짜기에서까지 들렸다. 무룡 재 꼭대기에 올라서면, 삼십 리 밖 수수밭이며 조밭 틈을 닫는 기차의 검은 연기까지 볼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학동의 할아버지며 할머니들이 무룡재나 말령의 가파로운 길을 사인교로 넘겨서 멀리 시집보낸 딸이며 혹은 그 딸이 낳은 외손주를 보기 위하여 문명의 이기(利器)인 기차를 이용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역시 현대의 문명을 거부하였다.

그 교묘함, 그 편리함, 그 빠름, 그 거대함— 이런 것을 모두 못 본 바가 아니지만, 그리고 또한 그 힘을 시인치 않음이 아니지만, 역시 학문으로서의 현대 문명은 당연히 거부하였다. 윤리와 도덕이 없는 물건을 학문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음이었었다.

「신기하더라.」

「교묘하더라.」

「왜놈 재간 있어.」

현대의 과학 문명에 대한 그들의 최대 인식이 여기 그쳤다. 모든 것이 한낱 재간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재간은 재간이지 결코 학문이 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점잖은 이의 배울 만한 것이 못되었다.— 이러한 견해 아래에서 그들은 더욱 더욱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학문을 자식들에게 배워 주기에 힘썼다.

더구나 정방동리에 신학문의 학교가 설립된 뒤부터는 오학동의 노인들은 더욱 신학문을 멸시하였다.

「그래, 전부터 신학문은 상놈이나 배울 게라고 그러지 않었나?」

노인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비웃은 뒤에는 자기네의 수염을 쓰다듬고 하였다. 그리고 무룡 재나 말령의 가파로운 뫼를 넘겨서 자기네의 딸들을 시집을 보내거나 혹은 며느리를 맞아 오는 데도 개화 한 집안이라는 것을 몹시 꺼리었다. 오학동의 어느 며느리는 절구질을 하면서(친정에서 주워들은) 노래를 한마디 콧소리로 부른 것이 탈이 되어 점잖은 집 며느리가 소리를 했느니 말았느니 큰 말썽이 일어난 일까지 있었다.

학도야 학도야
저기 청산 바라보게
고목은 썩어지고
영목은 소생하네.

창가라야 그때 도회 등지에 유행한 장학가의 일절이었었다.

오학동 인천방 할머니가 손주딸을 시집을 보냈다.

그 가을 손주딸을 보러 간 일이 있었다. 손주딸의 시집은 그 도(道)의 감영이었었다. 오학동에서 삼십 리 밖을 지나는 문명의 이기인 기차를 이용하면 두 시간쯤 걸리는 곳이었었다.

갈 때는 떡이다. 그밖에 음식 등으로 짐이 많았으므로 기차를 이용하였다. 도로 올 때도 사위가 차표를 사 주어서 역시 기차로 왔다. 이리하여 눈 깜짝하는 사이에 백여 리의 길을 가서 며칠 묵은 뒤에, 역시 눈 깜짝하는 사이에 돌아온 이 할머니는 너무도 쉽게 돌아왔기 때문에, 백여 리라는 숫자적 이정(里程)은 잊어버리고 손주딸의 사는 곳의 거리를 멸시하였다.

어떤 여름날 밤, 손주딸에게 관한 불길한 꿈을 꾼이 할머니는, 이튿날 조반 후에 생각다 못해서 손주딸의 집에를 잠깐 가 보기로 하였다. 백여 리라는 숫자 적 이 정보다도 과거의 경험이 증명하는 바의 경멸할 만한 거리라는 것은, 이 할머니로 하여금 잠깐이면 넉넉히 다녀오겠다는 자신을 가지게 하였다. 이리하여 할머니는 집안 사람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손주딸의 시집을 향하여 오학동을 떠났다.

이 할머니가 손주딸의 시집에 도착한 것은 오학동을 떠난 이튿날, 날이 저물어서였다. 인천방에서는 할머니를 잃었다고 야단법석한동안, 할머니는 손주딸의 시집에서 노독으로 병석에 넘어졌다. 그리고 앓는 동안도 할머니는 자기가 길을 헛들어서 그렇게 오래 온 줄 알았지, 기차가 사람의 발보다 그렇게 빠르리라고는 종내 이해치를 못하였다.

이 할머니가 겨우 오학동으로 돌아와서 한말은 〈기차의 편리〉보다도 오히려 〈신작로의 불편〉이었다. 예전의 길 같으면 백 몇 십 리를 걷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노독까지 날 리가 없는데 이번의 노독은 순전히 신작로의 탓이라 하였다. 예전의 길은 길에 풀이 깔려서 땅을 짚는 맛도 푸근하고 게다가 울툭둘툭해서 땅과의 접촉면도 발바닥의 일부분이지 전면이 아니며, 그 접촉면이 또한 매걸음마다 변하므로 길가기가 허스러웠는데 지금의 신작로라 하는 것은 돌멩이같이 굳고 반반해서 걸음마다 발바닥 전면과 접촉되므로, 십 리를 가기 전에 발 전면이 부르튼다 하는 것이, 이 할머니의 신작로에 대한 비평이었다.

「돌멩이 같은 길이 발바닥하고 딱딱 마주치는데 어디 견딜 수가 있더냐. 지금 길은 참 고약두 하더 라.」

이만치 그들은 새로운 사물에 대하여 악의와 시의와 경멸의 눈을 붓기를 그치지 않았다.

오학동에서는 새로운 것에 대하여는 통틀어 반항을 하는 데 반하여, 같은 ○○골짜기에 있는 정방에서는 새로운 학문을 흡수하기에 급급하였다.

이백 유여 년을 종의 자손이라는 명목 때문에 사람 의 가질 온갖 특권을 봉쇄당하였던 그들의 앞에 처음으로 학문의 길이 열렸다. 신학문은 종의 자식을 괄시를 안 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의 자식이라도 학문만 하면 넉넉히 출세를 하며 벼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한 예에 관한 보고도 연하여 들려왔다. 사람의 온갖 특권을 봉쇄당하기 때문에 할 일 없이 의식주에나 급급하던 그들에게, 꿈에도 생각 못하였던 출세의 길이 열렸는지라, 그들의 향학열은 맹렬하였다.

물론 수백 년래의 봉건사상에 젖고 또 젖은 그들이었다. 오학동을 눈아래로 본다든가, 오학동에 반항을 한다든가 하는 일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역시 오학동 사람들을 만나면 허리를 굽혔다. 길을 비켜 주었다.

신발을 털어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도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인제부터는 사람다이 살 수가 있다는 자랑이 보였다. 오학동 노인들의 점잖은 걸음 걸이를 본뜨려는 늙은이도 몇이 생겼다.

오학동 아이들이 무룡재에서 새를 보면서 타령을 부르는 데 반하여 정방 아이들은 말령에서 소에 꼴을 먹이면서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하고 창가를 불렀다. 오학동 아이들이 어른 앞에 꿇어앉아서 〈하늘천 따지〉며 〈대학지도는 재명명덕〉을 외울 동안, 정방 아이들은 자기네의 매부 혹은 고모부 되는 선생에게 〈기역 니은〉과 〈1234〉를 배웠다.

뿐만 아니라, 아직 어린만치 봉건사상에 젖지 않은 정방 아이들은, 때때로 오학동 아이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일이 생긴 때마다 부모에게 무서운 벌을 받곤 했지만, 정방 아이들은 그래도 오학동 아이들과 흔히 충돌을 하였다.


이리하여 ○○골 안에는 아직껏 ○○골을 지배하던 〈지벌〉의 세력을 대항하려는〈학문〉의 세력이 차차 움트기 시작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흐르는 세월은 온갖 것을 다 씻어갔다. 세월의 무서운 힘에 씻기어 없어진 것 가운데는 낡은 사람이라 하는 것도 있었다. 아무것도 용서치 않고 씻어 버리는 세월은, 낡은 사람도 씻어 가지고 흘러갔다.

세월과 함에 낡은 사람은 흘러갔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이 낡은 사람의 대신으로 들어앉기 시작하였다.

학도야 학도야
저기 청산 바라보게

의 시대를 건너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의 시대도 건너서,

「고꼬와 미꾸니 노난 바꾸리」
「하나레데 도 오꾸만슈노」(일본 군가)

의 시대가 이르렀다.


세월은 흘렀다.

시대는 변하였다.

그러나 오학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직도 기념품과 같이 몇 사람 남아 있는 오학동의 노인들이 그 동네의 지배자이었다. 삼강오륜과 옛날 성현들이 가르친 바로 온갖 도덕을 새 나오는 사람들에게 처박기에 온 힘을 쓸 뿐이었다. 남녀는 일곱 살에 자리를 같이하지 못하였다. 스승은 그 그림자도 밟지 못하였다. 여인에게도 역시 칠거지악을 준하였다. 출입에 반드시 어른에게 아뢰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꾸이고 따라서 새로운 사람이 났다 하지만 그 〈새롭다〉하는 것은 〈젊다〉하는 것을 뜻함이지, 결코 내적 변화를 말함이 아니었다. 사람은 바꾸이었으나 그 도덕관이며 인생관에는 조금도 흔들림이나 변화가 없었다.

「맹자 양혜왕을 보시니 왕 가로되……」

맹자는 〈하시〉고 왕은 〈하〉였다. 여기 만약 누가 있어서,

「맹자가 양혜왕께 배알하니 왕께서 가라사대 —」

라고 읽는 사람이 있으면, 오학동 전체에서 그런 불경함은 응징할 것이었다.

이리하여 오학동에서는 역시 낡은 사랄과 마찬가지 인 새 사람이 꼬리를 연하여 났다.

어느 춘기 대청결 날이었다.

오학동에서 가장 돈냥도 많고 점잖으며 학식도 많다는 익천방 할아버님은, 긴 담뱃대를 물고 뜰에서 머슴들에게 청결을 시키고 있었다.

거미줄도 다쳤다. 뜰의 돌 부스러기도 모두 내어놓고 방안도 먼지 하나 없이 쓸어내었다. 그런 뒤에 노인은 몸소 돌아다니며 부족한 곳이 없는가고 검분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타지를 잡자 하더라도 잡힐 곳이 없도록 청결은 충분히 되었다.

그것을 다 돌아본 뒤에 노인은 사랑으로 들어와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헌병들이 검문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봄날도 거의 저물어서야 헌병 하나와 보조원 하 나가 칼 소리를 제컥거리며 익천방 대문을 힘있게 열고 들어섰다. 벼슬에는 머리를 들지 못하고 권력을 저 퍼하고 세력을 두려워할 익천방 할아버님은, 아직 물고 있던 담뱃대를 황급히 놓고 뜰로 뛰어내려갔다. 헌병들은 이 노인이 황급히 나오는 것을 본체만체 곧 뜰 뒤로 돌아갔다. 노인도 따라 돌아갔다. 헌병들은 두리두리 살핀 뒤에 도로 뜰 앞으로 나왔다. 노인도 또 따라 나왔다.

앞뜰에서 유난히도 검문하고 있던 보조원은 문득 사랑 앞에 발을 멈추었다. 그러고 땅을 굽어보았다.

거기는 노인이 심은 몇 포기의 채송화가 꽃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보조원은 채송화를 내려다보면서 심술궂은 소리로 고함쳤다. 뒤에 섰던 헌병이 웃으면서 일본말로 보조 원에게 무어라고 하였다. 보조원도 일본말로 무어라고 웃으면서 헌병에게 말하였다. 그런 뒤에 다시 발로 꽃 을 가리키면서,

「이게 뭐야?」

고 고함쳤다.

노인은 망지소조하여 보조원의 앞으로 갔다. 손은 어느덧 읍하여졌다.

「그게 꽃이올시다. 채숭아라는……」

「꽃인 줄야 몰라? 꽃이라도 청결 때면 뽑아 버려야 하지 않냐 말이야? 청결이란 모두 깨끗이 하는 건 줄 모르냐 말이야? 낫살이나 먹은 게……」

「네……」

노인은 수그렸던 머리를 조금 들었다. 그리고 보조 원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 노인은 그 보조원의 얼굴에서 정방 동리 모줏집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무섭고도 또 무서운 보조원이, 뜻밖에도 이 같은 ○ ○골 안에 있는—더구나 자기네의 눈 아랫사람인 것을 발견한 때에, 노인은 이상히도 반갑고도 안심되었다.

조금 들리었던 노인의 얼굴은 온전히 들리었다.

「아! 자네……」

그러나 그 말을 맺지를 못하였다. 눈과 뺨에서 불이 나는 것을 느끼는 순간, 노인은 그 자리에 푹 꼬꾸라졌다. 꼬꾸라지는 것과 동시에 허리에는 무거운 구둣발길이 사정없이 내리찧는 것을 감각하였다.

「이 자식이—자네가 뭐야. 관리에게 향해서!」

그뒤에는 연하여 허리로 가슴으로 엉덩이로 구둣발이 내려왔다.

이러는 동안 노인은 몇 번을 손을 빌었는지 몰랐다.

「나리 살려 줍쇼.」

몇 번을 늙은 소리로 탄원하였는지 몰랐다. 친척 동 리가 모두 모여들어서 보조원에게 사죄사죄를 얼마나 하였는지 몰랐다. 좌우간 아직 해가 있을 때부터 시작하여 날이 어둡기까지 노인은 보조원에게 맞고 채이 고 한 뒤에야 겨우 놓였다.

오학동의 다른 집들의 청결은 내일 다시 본다고 가장집물을 뜰에 내놓은 채로 그 밤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이튿날 밤 오학동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헌병 보조원은 무서웠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관리니까…… 그러나 오학동에서 오 리 밖에 사는 정방 모줏집은 무섭지 않았다. 더구나 종의 후손인 모줏집이며, 그 집 늙은이는 지금도 오학동 사람들을 보면 허리를 굽신굽신하는데, 그 집 자식놈이 오학동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노인을 발길로 수없이 차고 때렸다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관리로 볼 때는 무서웠으나, 돌이켜 자기네가 어렸을 때부터 늘 보아 오던 종의 새끼로 볼 때에는 억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그냥 두지 못할 일이었다. 응징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다.

이리하여 의논이 일치된 결과, 이튿날 하인을 시켜서 정방까지 가서 모줏집 늙은이를 오학동으로 불러 왔다.

영문을 모르는 모줏집 늙은이는 하인을 따라왔다.

그러나 익천방 사랑에 줄줄이 모여 앉은 오학동의 늙은이들을 볼 때에, 아직 시대 변화를 이해치 못하는 모줏집 늙은이는 황공히 뜰 아래 읍하고 섰다. 그 늙은이에게 향하여 익천방 노인의 사촌 되는 노인이,

「이놈! 네 죄를 모르느냐?」

고 호령하였다.

모줏집 늙은이는 허리를 굽혔다.

「네, 소인의 죄가 무에 온지—」

「무얼?」

사촌 노인은 하인을 둘러보았다.

「저놈 단매에 살이 터지도록 때려라!」

거기서는 오학동 노인들의 머리에만 아직껏 남아 있던 형벌이 실행되었다. 호령은 연하여 내렸다. 호령의 틈틈이 모줏집 늙은이에게 오늘 지금 형벌하는 까닭을 알리었다. 상놈이 하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무서운 짓을 행한 보복의 아픔을 가르쳤다.

낮부터 시작되어 어둡기까지 매질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모진 매 때문에 거의 죽게 된 늙은이를 밤에야 들것에 담아다가 정방 동네어귀에 내버렸다.

청결 때에 채송화를 뽑지 않았기 때문에 매맞은 노인은 마침내 죽어 버렸다. 그 노인이 죽은지 조금 뒤에 모줏집 늙은이도 또한 죽어 버렸다.

이리하여 두 개의 죽음을 내었을지라도 사건은 여기서 끝이 난 듯싶었다.

그러나 일은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모줏집 늙은이의 죽음의 뒤에는 〈법률〉이라 하는 국가의 세력이 있었다. 모줏집 늙은이가 죽은 이튿날로 오학동의 사내는(늙은이 젊은이 하인들을 막론하고) 모두 그곳을 관할하는 주재소에 붙들려 갔다.

며칠 뒤에 태반은 놓여나기는 하였다. 그러나 놓여 나온 사람들은 모두 죽도록 매를 맞고 나왔다. 그 때문에 놓여나와서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못 나온 사람들은 경찰서로 감옥으로, 이리하여 살인범이라는 무서운 명목 아래 종신 혹은 십오년 징역으로 영어의 몸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전에는 정방의 어른이며 아이들이 때때로 오학 동 사람에게 숨은 반항을 하였지만 내놓고는 그래도 윗사람 대접을 하였는데, 그 사건 뒤부터는 노골적으로 반항할 뿐 아니라, 어떤 때는 부러 저 편에서 적극적 행동을 취하는 때도 있게 되었다. 그러면 오학동의 점잖은 이들이 오히려 저편을 피하고 하였다.

「개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게다.」

입으로는 비록 이런 호어를 한다 하나, 사실로는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었었다.

이리하여 ○○골에는 낡은 세력을 꺾으려는 새로운 세력이, 먼저 헌병 보조원이라는 형식으로 들어 왔다.

오학 동 사람과 정방 사람의 사이에 무슨 말썽이 생기면, 반드시 헌병 주재소에서 간섭하였다. 그리고 사리는 여하간 죄는 오학 동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이백 년을 두고 수모에 또 수모를 받아 내려오던 정방의 종의 자식들은, 새로운 학문을 흡수하고, 그 학문으로 자기네의 자식을 헌병 보조원에 붙인 덕에 그 수모를 면하게되었다.


새로운 학문의 힘은 무서웠다.

정방의 한 자식이 공부를 한 덕에 헌병 보조원에 들어서, 아직껏 자기네의 조상이 받아오던 수모와 그 원한을 풀은 일을 실마리 삼아 정방의 세력은 차차 높아갔다. 군서기, 군 고원, 면서기—멀리 감영까지 공부를 갔던 정방의 자손들은 형설의 공을 이루어 꼬리를 이어서 금의환향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정방과 오 학동을 합친 ○○골을 관할하는 군이나 면에 붙게 되면 반드시 오학동을 못살게 굴었다. 조그만 트집이라도 생기면, 반드시 오학동은 그 때문에 큰 손해나 봉변을 하고야 말고 하였다.

어떤 때 오학동에는 그곳 군청 서무주임이 시찰을 하러 온다는 통지가 이르렀다. 벼슬과 권력에는 무조건하고 머리를 수그리는 오학동 노인들은, 자기네의 동네의 가장 깨끗한 집을 택하여 만반 음식을 준비하고 서무주임 영감을 기다렸다.

주임이 이르렀다. 그런데 그 주임에 배행한 사람은 정방의—정방서도 가상 천대받던 어떤 집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주 임영감과 자리를 같이하고 술을 나누는 광경을 오학동의 노인들은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놈이 벼슬을 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과연 경이에 다름없었다.


〈상놈이 벼슬을 하였다.〉

이 한 가지의 사실은 오학동 노인들에게 커다란 충동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처세관과 인생관에 대하여서까지 변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들은 인제는 벼슬이란 없어진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벼슬을 한 사람이 있었다. 더구나 그 벼슬을 한 사람은 자기네가 아직껏 사람으로 보지도 않던 정방종의 자식이었었다. 그러면 그 종의 자식은 어떻게 벼슬을 하였나? 한 가지의 대답이 그들에게 울리었다. 그것은〈신학문을 하기 때문〉이라 하는 것이었었다.

자기네가 아직껏 벼슬이라는 것을 단념하고 자식들에게 농사나 가르친 것은 결코 벼슬에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벼슬에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학문이 고명하다 할지라도. 조선사람에게는 벼슬의 길이 없는 줄 믿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 조선사람으로도 벼슬을 한 사람이 생겼다. 더구나 상놈이 벼슬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신학문을 한 때문이었다.

한낱 재간 혹은 기술에 지나지 못하는 줄 알고 수모하던 신학문에 벼슬하는 길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과연 의외였다. 그리고 벼슬을 할 길이 있는 신학문인지라, 무조건으로 업신여기지 못할 것도 막연히 깨달았다.

〈벼슬 ! 벼슬 ! 〉 오랫동안 단념하고 있던 벼슬에 대한 욕망은 오학 동 사람들의 마음에 무럭무럭 일어났다. 더구나 자기네는 정방놈들보다 훌륭하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오학 동 사람들은, 자기내가 벼슬만 하면 정방 사람들 보다는 썩 나은 지위에 올라가겠다는 자신까지 있었다 이러하여 오학동에서도 아들 몇 사람이 그곳 감영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감영으로 유학을 갔던 오학동의 아이들은 그곳서 졸업을 한 뒤에, 멀리 또한 외국으로 갔다. 감영에서는 공부를 하고도 군주사 한 자리는 넉넉히 하는 시대인지라, 멀리 외국까지 보내면 성주(城主) 한 자리는 넉넉히 하리라는 굳은 믿음 아래서 용감스러이 만 리의 붕정을 떠난 것이었었다.

종의 자식들에게 수모를 받는 것은 치가 떨리도록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인제 또한 자기네의 자식들이 신학문을 닦고 돌아오면 또다시 이전과 같이 종의 자식들을 수모를 할 수가 있으려니, 이런 생각으로 오학 동의 어버이들은 자식들의 달라는 학비를 결코 많다 하지 않고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대는 더욱 변하였다. 시대가 변함을 따라서 미리 벼슬을 한 사람들의 세력은 더욱 커갔다. 세력이 커감을 따라서 오학동에 대한 압박도 차차 높아갔다.

토지를 관할하는 군청과 면소에 자리잡은 종의 자식들은, 지주이요 농사를 본업으로 하는 오학동 사람들을 곤란케 하기에는 가장 좋은 지위에 있는 셈이었 었다. 조그만 일에도 트집을 잡을 만한 일이 없으면 트집을 만들어 내었다. 이리하여 그 트집으로 오학동을 더욱 힘있게 내리눌렀다. 시달리었다.

증강되어 가는 세력과 쇠하여 가는 세력, 이 두 가지의 세력은 시시로 나날이 현저하여 갔다. 오학 동 사람의 토지가 하나 정방 사람에게 (본의는 아니지만) 팔려갔다. 그뒤를 연하여 또 하나 팔려갔다. 흥하여 가는 정방이며 자식들이 세도자리(? )에 있는지라, 비록 종의 자손일망정 정방에는 돈이 흔하였다. 거기 반 하여 시들어 가는 오학동에서는 온갖 일이 마음대로 안되었다. 멀리 유학을 보낸 자식들의 학비를 보내기 위하여 조상 전래의 땅을 연하여 팔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가파로운 뫼껸 사이에 끼어있는 ○○골의 땅을 살 사람은 같은 ○○골에 있는 정방 사람 밖에는 없었다.

땅이 연하여 정방 사람의 손으로 넘어갈 때마다 오 학동 사람들은 집이 무너지도록 탄식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탄식 가운데도 가까운 장래에 유학 보낸 자식들이 금의환향하여 도로 그 땅을 사들이고, 밉고 미운 정방놈들을 온전히 ○○골에서 내어쫓을 날을 예기하고 저으기 스스로 위로하고 하였다.


세월은 연하여 흘렀다.

〈고꼬와 미꾸니 노 난 바꾸리〉

가 낡아지고,

〈카츄샤가와 이야〉

가 생겼다가 없어지고,

〈고꼬와 죠셍 호꾸단노니 하꾸리아마리노 오오록 고〉

가 각 곳에서 들렸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는 동안, ○○골 안의 오학동과정방도 이전과는 그 지위가 온전히 반대로 되어 버렸다.

관리에 등용된 정방 자식들이 그새 이백여 년을 자기네의 조상이 받은 수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하여 오학동에 대하여 가한 압박 때문에 (수리라 측량이라 양잠이라 세금이라), 마치 술집 회계비와 비슷한 헤일 수 없는 명목으로 착취를 당한 오학동은 지금은 몇몇 집이 겨우 자활을 하는 뿐, 대개는 모두 땅을 정방 종의 자식에게 팔아 버리고, 그래도 굶어죽을 수는 없어서 이전에 종의 자식이라고 그렇게도 멸시를 하던 정 방 사람들의 소작인으로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천리는 순환하나니.〉 이전에 자기네가 세도를 잡았을 때는 생각도 않던 이런 격언을 서로 외우며, 인제 가까운 장래에 자기네의 자식들이 학문을 끝내고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아들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솟아날 길이 있으려니 단단히 믿고 있었다.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여 ○○골을 벗어나간 사람의 수효도 적지 않았다.

이전에는 종이라 업신여기던 정방동리로 소작 짐을 지고 가는 오학동 노인들의 얼굴에는 늘 하늘을 원망하는 기색이 있었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쬐인다는 말은 그들에게는 무의미였다. 오학동의 젊은이들은 정방 늙은이들에게 〈주인님〉〈나으리〉〈영 감〉이라는 존경사조차 놓이도록 변하였다.

신학문이 들어왔다. 들어오면서는 ○○골을 온전히 거꾸로 만들어 놓았다.

오학동 노인들이 기다리던 날이 이르렀다. 멀리 외국까지 유학을 보냈던 아들들이 형설의 공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러나 십여 년간을 오학동의 어버이들이 논밭을 모두 피눈물을 뿌리면서 정방 사람에게 팔아 가면서 학비를 보내줄 때의 그 기대와, 오학동의 자식들이 배워 가지고 돌아온 학문의 사이에는 너무도 차이가 컸다.

그들이 배운 학문이란 것은, 소위 〈붉음〉이라는 대명사로 알리어 있는 무서운 사조였었다.

〈두들겨라 !〉〈부수어라 !〉 이러한 적극적 의 무서운 잔인성을 가진 사조(思潮)— 이것이 논밭을 팔아 가면서 오학동의 늙은이들이 자기네의 자손에게 대어 준 학비의 대상이었다.


삼백 년의 영화도 한갓 봄꿈으로, 오학동의 늙은이들이 굴욕적 지위에서 만날 한숨만 쉬고 있을 때에, 새로운 세력—〈집합의 세력〉〈단결의 세력〉이라는 세력을 수입하여 가지고 오학동의 아들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학동의 늙은이들은 아들들에게 향하여, 어서 군청이나 도청에 가서 벼슬을 하기를 권하였다. 아니, 오히려 명하였다. 그러나 아들들은 거기 대하여 코웃음 만 하였다. 그리고 자기네끼리 모여서는 수군거리고 하였다. 늙은이들에게는 알지 못할 〈착취〉니 〈마르크스〉니 〈잉여〉니 〈투쟁〉이니, 이런 말들을 서로 수군거리며…… 그것은 오학동의 몇 아들이 학업을 끝내고 돌아온 이듬해 가을이었다. 그해는 몹시도 가물어서, 추수는 이전의 육 할밖에는 나지를 못하였다. 지주에게 소작료를 갖다 갚으면, 나머지는 금년도의 비료값은커녕 세금도 되지를 못하였다.

삼백 년래로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오학동 늙은이들의 거만한 마음은, 비록 이런 난경에 빠졌을지라도 종의 자식인 지주에게 가서 구차히 애걸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전부를 갖다가 바치자니 그들의 생활이 딱 막혔다.

애걸은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다 갖다가 바칠 일도 못되는 것이다. 이 양난의 처지에서 오학동의 늙은이들은 가을이 지나서 겨울이 되도록 지주에게는 가지를 못하고 꿈질거리고 있었다.

채근은 연하여 왔다. 그사이 십여 년간의 습관으로, 인제는 오학동 늙은이들을 턱으로 넉넉히 부릴 만한 관록을 가진 정방의 늙은이들은 하인을 연하여 오학 동으로 보냈다. 왜 안 가져오느냐, 안 가져오면 집달리를 보내겠다는 위협까지 하였다.

이렇게 안 가져갈 수도 없고 가져갈 수도 없어서 꿈질거리고 있을 때에, 그 사건을 맡아 가지고 일어선 것이 작년에 돌아온 오학동의 몇 아들이었다.

「저회들에게 맡기세요.」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에게 맡기면 너희들은 무슨 별수가 있느냐?」

「있습니다.」

「어떻게?」

「안 가져갑니다.」

「도조를 말이냐?」

「네.」

오학동의 늙은이들은 이 너무도 염치없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잘라먹는단 말이냐?」

「아니올시다. 안 갖다가 주는 게지, 왜 잘라먹는 게야요?」

「그게 그게 아니냐?」

「아니올시다. 우리가 실컷 우리 종자 뿌리고 우리 땀흘리고 우리 힘들이고 우리 돈 넣고 만든 곡식을 우리가 먹는데 그게 왜 잘라먹는 게야요? 우리가 넉넉히 먹고 남을 게 있으면 좀 갖다 줘도 무방하겠지만, 갖다 줬다는 당장 우리가 굶을 판에 왜 갖다부텀 줍니까? 그런 모순된 일이 어디 있어요? 갖다 주지 못하겠습니다.」

노인들은 이 아이들의 무지를 가련히 보아얄지 용기를 칭찬하여얄지 분명치 못하였다.

「너희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땅 임자가 그 놈들이 아니냐?」

「그것부터—하늘이 내신 땅에 네것 내것이 뭐야요?

공력 들인 사람이 먼저 먹어야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그 땅을 돈을 받고 팔지 않았느냐? 그러니깐 그 땅은 그자들의 땅이고 우리들은 작인이로구나. 소출이란 땅 임자가 먼저 먹는 법이니 라.」

이렇게 서로 이론을 다투는 동안 오학동 노인들은 머리가 요리조리 얽히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자식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싶기는 하였다. 그러나 자기네가 그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땅을 판 이상에는 인제 자기네 먹을 것이 없다 하여 소출을 안 갖다 주는 것은 너무도 자가당착이었다. 이것은 양반인 자기네로서는 도저히 못할 노릇이었다. 상놈인 정방 사람들도 이전에 노작료를 잘라먹은 일은 없지 않으냐?

거기 대하여 아들들은 또 반박하였다—

「체면요? 그럼 체면 때문에 소작료는 꼭 갖다 줘야겠습니까?」

「글쎄 말이다. 갖다는 줘야겠는데……」

「갖다 줬다는 우리가 굶겠단 말씀이지요?」

「그래!」

「안 갖다 줬다는 체면이 손상된다는 말씀이구요?」

「………」

「배부른 뒤에 예의를 안다는 것이 옛날 성현의 말씀 아닙니까? 배고픈데 들어서 체면이 뭐야요? 갖다 줬다는 당장에 오학동은 모두 굶어죽거나 거렁뱅이가 되거나하지 않겠습니까? 굶어죽는 게 체면에 낫습니까? 거렁뱅이가 되는 게 체면에 낫겠습니까? 어린 처자나 손자들이 배고프다고 울며 보챌 때에 그때도 그냥 체면을 돌볼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오학동의 늙은이들은 그래도 못마땅한 듯이 머리를 기울였다. 종의 자식의 것을 잘라먹는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창피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당장에 굶겠느냐 어떠냐 하는 커다란 문제에 직면한 그들은 안 갖다 주고라도 모면할 수만 있으면 하는 유혹을 또한 금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머리를 기울이며 역시 못마땅한 듯한 얼굴은 하면서도 모든 일을 자식들에게 맡겨 버렸다. 그해에 타작 채근을 온 정방 하인들을 오학동의 아들들은 나서서 호령하여 돌려보냈다.

「금년에는 소출이 한 알도 나지 않았네. 지주 영감인지 대감인지에게 그렇게 말하게.」

그리고 밭에 있는 곡식들을 손빨리 모두 팔아서 현금으로 잡아 두었다.

전 지주 전 양반들의 동네인 오학동과, 현재의 세력 가 현재의 지주들의 동네인 정방과는 드디어 선전이 포고되었다. 그해의 소출은 한 알도 지주들은 구경도 못하였다. 채근하는 하인을 보내면, 욕만 먹고 그냥 돌아오고 하였다.

정방서는 할일없이 권리를 보호하는 법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재판소의 원정이 지불 명령서를 가지고 오학동으로 갔다. 뒤이어 가차압이 갔다. 그러나 그때는 삼백여 년 간을 물려오고 또 물려온 오학동 각 집의 가보들이며 값진 물건들은 모두 그들의 사돈의 집으로 옳기고 엉성한 집에는 며칠 먹을 양식과 침구가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차압의 뒤를 이은 강제 집행에 집달리들은 할일없이 가옥(그것도 대개는 벌써 제이 저당까지 들어간)을 처리할 뿐이었다.

차압하였던 집은 수일 후에 공매를 하였다. 그러나 두 가파로운 뫼의 사이에 끼어서 교통이 지극히도 나쁜 오학동의 집을 사러 오는 호사객도 없는 모양으로, 공매에 붙이기는 하였지만 살 사람이 나서지를 않았다. 오학동 일백 사십여 호 중에 이번 공매에 붙은 집이 팔십여 호나 되었지만 그 팔십여 호 중에 한 집도 팔리지 않았다.

비록 집이 팔린다 할지라도 그 집을 내어 주지를 않으려는 배짱을 가지고 있었지만, 집이 팔리지 않으니 오학동 사람들은 더욱 마음놓고 있을 수가 있었다.

차압을 당하고 공매에 붙은(이전에는 자기네의 집이던 집에서) 오학동의 사람들은 쓴 얼굴과 쓴 마음과 쓴웃음으로써 그해의 거울을 보냈다. 며칠만에 한 번씩 와서 엿보는 집달리며 정방의 밀정들 때문에, 살림 가구 하나 벌려 놓지 못하고 휑뎅한 집에서 긴 겨울을 났다.


봄이 이르렀다.

새 농사의 절기가 그들의 눈앞에 당도하였다. 그러 나 이때 그들이 소작하던 땅은 모두 빼앗긴 때였다.

이전에는 소작인(정방 사람)을 두고 해먹던 자기네 땅, 그뒤에는 자기네가 자작을 하던 땅, 또 그뒤에는 자기 네가 소작을 하던 땅, 그것은 인젠 잃어버리고 그들은 농사 철기임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 무슨 꼬락서니냐?」

금년 가을의 호구에는 생각도 아니 두고 정방과의 싸움에만 열중하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오학동 늙은이들은 가슴을 두드리고 하였다.

그 봄, 오학동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던 집 몇 집안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네만 조상이 삼백여 년을 닦고 또 갈은 이 ○○골을 등지고, 만주로 향하여 길을 떠났다.

「형님, 안녕히 가세요. 참 모두가 꿈 같소이다.」

「응, 잘 있게. 내 가서 살기 좋으면 편지하지.」

이러한 작별로서 보퉁이 몇 개씩을 끼고 산 설고 물 설은 되 땅으로 향하였다.


방휼(蚌鷸)의 다툼은 차차 더 벌어졌다.

정방서는 금년의 농사를 위하여 소작인을 다른 곳에서 구해다가 오학동에 들여보냈다. 추수를 한 알맹이도 안 가져오는 오학동 소작인들을 다 떼고, 자기네의 사위 혹은 며느리의 친정에 부탁하여 몇 명의 새 소작인을 구하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오학동으로 가던 새 소작인들은 그날로 도 로 정방으로 돌아왔다. 옷이 모두 찢어지고 사면에 상처가 난 것으로 미루어 모두 매를 맞은 것이 분명하였다.

「왜 모두 왔나?」

하는 질문에 대하여 새 소작인들은 명확한 대답도 남기지 않고 ○○골의 땅을 부치지 않겠다고 하며 산을 넘어서 각기 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뒤에도 다른 소작인을 보내어 보았지만, 그 매번 을 모두 오학동 젊은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돌아오고 하였다. 물론 오학동 몇 젊은이는 폭행으로 검거가 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나는 폭행은 끊일 바를 몰랐다.


삼백 년래로 이 근방 일대에서 옥토로 소문났던 ○○골은 그 여름은 황무지로 변하였다. 모퉁이 모퉁이를 오학 동 사람들이 몰래 수수며 조를 심을 뿐, 그 널따란 평원의 옥야는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로 변하였다. 새 소작인은 올 수가 없고 낡은 소작인은 이미 뗀 이 주인 없는 넓은 평원은, 잡초가 나서 바람에 쏠리는 대로 그냥 두었다. 먹기 위하여 오학 동 사람들이 구석구석 도경을 할 뿐이었다.

보이콧은 이듬해도 그냥 계속되었다. 새 소작인은 들여보내는 족족 모두 두들겨맞고 쫓겨나오고, 그런 일이 몇 번 있은 뒤에는 다시는 그곳으로 가려는 사 람도 생기지 않으므로, 정방서는 종내 사람을 내어세워서 오학동에 화의를 교섭하였다. 그러나 그 중간에 나선 사람조차 두들겨맞고 돌아갔다. 그러고 ○○골은 역시 소작인을 못 얻어 만난 채 이듬해도 지났다.

정방서는 만 삼 년간을 소출을 한 알도 구경하지 못하였다.


그해도 또 기울고 이듬해 봄 춘경기가 가까워서 오 학동에서는 또한 도경의 준비를하는 때였다. 이 ○○ 골 안에는 뜻밖의 일이 생겼다.

양복장이 몇이 무룡재의 가파로운 뫼를 넘어서 ○ ○골에 들어왔다. 양복장이 가운데는 조선사람도 몇 있었다. 이 일행의 오륙 명은 오학동 근방의 땅들을 자기네가 가지고 온 지도와 대조하여 보면서 일일이 조사하였다. 그러고 동네 안으로 들어와서 집들도 일 일이 다 조사하였다. 그 밤을 그 일행은 정방서 묵고 이튿날 하루는 다시 조사를 거듭하고 석양에 다시 무 룡재를 넘어서 돌아갔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 몰라서 오학 동 사람들 (새 소작인이을 때마다 두들겨 좇던 젊은이들이며 그것을 방관하던 늙은이들이며 여인 아이들을 물론하고)은 서로 그 까닭을 연구하며 수근거릴 동안에, 사흘 뒤에 놀랄 만한 소식이 오학동에 들어왔다. 그것은 이 오학동뿐 아니라 정방까지 합친 ○○골 일대의 토지 전부가 어떤 커다란 회사의 손에 들어갔다 하는 것이었다. 그뒤를 이어서 정방 동네의 집 전부와 오학동의 집 태부분(삼 년 전부터 공매에 붙어 있는)이 역시 그 회사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이르렀다.

그 소식에 놀란 가슴을 진정할 겨를도 없이 색다른 옷을 입은 사람의 한 떼거리가 이 ○○골의 새 소작인이라는 명색을 가지고 무룡재를 넘어서 남부여대하고 ○○골로 몰려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무리들은 모두 각각 자기네가 들어갈 집을 적은 종이조각과 대조하여서 집을 찾아 가지고, 불문곡직하고 현재 오학동 사람들이 도경을 준비하고 있는 집으로 부득부득 들어들 갔다.

낡은 짐은 모두 뜰로 날라 나왔다. 그리고 새 짐이 낡은 짐 놓였던 자리의 먼지도 쓸기 전에 자리를 잡았다.


○○골은 파멸을 하였다.

지벌을 자랑하던 오학동이 파멸한 것은 벌써 과거의 일이로되, 군주사면서기 등의 약한 지위와 약한 세력으로써 그래도 근근히 어떤 정도까지의 자리를 쌓아 놓았던 정방 사람들도, 같은 ○○골 안에 있는 오학동과 다투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약하게 박혔던 그 뿌리에 흔들림을 받고 드디어 파멸하게 된 것이었다.

삼백 년 전에 이씨의 한 조상이 가파로운 무룡재를 넘어서—그리고 이백 년 전에 오씨의 한 조상이 가파로운 말령을 넘어서 들어온 이래, 몇 세기를 갈구고 갈고 하여 옥토를 만든 이 ○○골을 내버리고 그들은 실망과 함께 이씨는 말령을, 오씨는 무룡재를 넘어서 다시 표랑의 길을 떠났다.

○○골에 새로 들어온 소작인들이 농사를 지으려고, 그새 무성하였던 잡초의 뿌리들을 모두 들추어내어 버릴 때에, 그 잡초와 같은 운명을 지고 ○○골에서는 쓸리어 나와, 양반의 자손 이씨와 종의 자손 오씨는, 서로 동서로 갈리어서 밥을 구하러 새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뒤, 이씨의 남녀 노소 수백 명의 집단이, 만주 어떤 막막한 길에서 연해 길을 물어 가면서 오지(奧地)로 오지로 갈 때에, 오씨의 백여 명의 일행은 북간도 어떤 산간에 자리를 잡고 낫을 들고 무성한 풀을 베고 있었다.


주(註)=만주사변 직후에, 만주의 조선인의 생활상을 주제로한 장편소설을 하나 써 달라는 부탁을 어떤 신문사에게 받은 일이 있다. 이 《잡초》는 그 장편의 서편(序編)을 삼으려던 것인데, 이것 조차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단되었으니,《본편》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좋은 기회를 얻어 옛날 중단되었던 《서편》만 이라도 완성시켜 책에 편입하는 바이다.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5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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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