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10장
남대문 정거장 플랫포옴에서 백낙관을 보고 모자 두르던 사람은 과연 백낙관의 말한 바와 같이 사 년 동안에 생사존몰을 알지 못하던 이수일이라.
이수일은 그 후로 종적을 숨겨 친구의 심방도 즐겨 하지 아니하고 소식까지 끊었더라. 그러나 친형과 다름이 없이 알고 지내던 백낙관은 항상 마음에 잊지 아니하고 은근히 그 동정을 살피기에 게으르지 아니하여, 이날도 백낙관은 귀국 후에 즉시 진주 군수의 영직을 띠게 된 일도 알았고, 오후 네 시 급행열차로 떠나가는 줄도 알았으므로 마음에 잊지 못하는 친구의 여러 해 만에 얼굴도 보고자 함이요, 둘째는 고생하던 결과로 금일 출세한 백낙관의 모양도 보고자 하여 사람 틈에 섞여 홀로 그 벗을 작별함이러라.
이수일은 무슨 연고로 사 년 동안을 음신(音信)을 끊었으며, 무슨 연고로 항상 사모하고 잊지 못하던 친구를 반가이 만나보고 작별치 아니하고 몸을 숨기느뇨? 그 사람의 금일 신세와 경우를 생각하면 다시 누누이 해석할 필요도 없으리로다.
정거장 구내 플랫포옴에서 철로 타고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는 사람은 다만 이수일이 한 사람 뿐이 아니라 무리 무리로 모여 있던 남녀노약귀천(男女老弱貴賤)을 물론하고 모두 제가끔 마음으로 근심으로 작별하는 사람, 눈물로 작별하는 사람, 즐거움으로 전송하는 사람, 또는 아무 의미 없이 보통 인사로 전별하는 사람, 형형색색으 로 각각 정리로되 그 목적하는 바는 한 가지라. 기적 한 소리에 기차는 서서히 움직여서 떠나간 후 수분이 지나매 입장권 가진 사람은 한 사람 헤어지고 두 사람 헤어져서 모두 각각 돌아가되, 홀로 이수일은 돌아가기를 잊어버리고 기둥에 몸을 실리고 고개를 숙여 발아래만 내려다보기를 한참이더니, 무거운 짐을 벗어 내던지듯 몸을 뿌리치고 발끝을 돌이킬 때에는 떼떼로 모여 있던 사람은 모두 헤어지고 그림자도 없는데 역부 이삼 인이 비를 들고 땅을 쓸어낼 뿐이라.
이수일은 양협에 흘러내린 눈물을 수건으로 남모르게 씻어버리고 홀로 늦음을 비로소 깨달아 급히 돌아 나오는데 정거장 이등 대합실 문 앞을 지나 나오려 할 즈음에 그 안으로부터 어떠한 여자의 목소리로,
『이수일씨, 이수일씨.』
하며 부르는 사람이 있는 고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일위 미인이 문에 의지하여 섰는데, 손가락과 팔목에는 모두 금으로 장식하였고, 찬란한 양복을 회매하게 입었으며, 비단 수건으로 입을 가리우고 고운 태도로 눈에는 웃음을 띄웠더라.
『아, 최만경씨, 여기 웬일이요?』
그 부인은 어여쁜 웃음으로써 맞거늘 이수일은 극히 냉담한 태도로 대답을 한다. 그 부인은 쫓아나오며,
『잠깐만 저리로 들어가서 앉읍시다.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좀 뵈었으면 하였더니 예서 참 잘 만났소. 어떻든지 저 교의로 가서 앉아 이야기를 합시다.』
이수일은 마지못하여 그 여자에게 끌려서 대합실 교의에 걸터앉았더라. 최만경이라 하는 여자는 이수일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앉으며,
『다른 일이 아니라, 저어, 남촌서 장목전 하는 김영오의 사건으로 해서 의논을 좀 하려고…….』
하며 품속으로서 금시표를 내어 시간을 보고 다시 집어넣으며,
『수일씨도 아직 저녁은 아니 잡수셨지요? 여기서는 번잡하여서 조용히 이야기할 수가 없으니 어디든지 조용한 집으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요릿집이라도 관계치 아니하니…….』
이수일은 검은 손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걸터앉았는데, 최만경이라 하는 여자는 교의에서 몸을 일어서며,
『어서 일어서시오.』
이수일은 마땅치 못한 기색이 얼굴에 나타나며,
『어디로 가자는 말이요?』
『어디든지 가십시다그려, 낸들 알 수가 있소. 당신 좋으신 데로 가지요.』
『나 역시 어디가 좋은지 알 수 있소?』
수일은 그 여자와 한가지로 가기를 심히 꺼려하는 모양이라.
『여보, 어떻든지 밖으로 나가봅시다그려. 네, 수일씨.』
『글쎄.』
하며 수일은 그 여자에게 끌려 할일 없이 정거장 대합실에서 밖을 향하고 나오는데 문으로 좇아 들어오는 사람과 서로 마주쳐서 깜짝 놀래어 돌아보니 어떤 늙은 신사 하나이 최만경의 아름다움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
이수일과 최만경 두 사람은 정거장 밖을 나가서 향하는 곳도 없이 서서히 걸어온다.
『글쎄 여보, 어디로 가시려오?』
『나는 아무데라도.』
『수일씨는 노 그렇게만 말을 하시니까 어디 결말이 나겠소. 아무데든지 저녁밥 먹을 만한 데로 결정을 해야지요.』
『글쎄.』
최만경은 수일이가 마음에 즐겨 하지 아니함을 모르는 것도 아니언마는 억지로 자기의 마음에 따르게 하고자 생각하는 고로 마음을 받아주지 아니하는 수일의 몰풍미한 수작도 오히려 달게 여겨,
『그런에 당신은 일본요리에 스끼야끼라고 하는 전골을 잡수시겠지요?』
『스끼야끼, 응, 그것도 좋지요.』
『스끼야끼가 싫으시거든 양요리를 잡수시려오?』
『아무것도 관계치 아니하지요.』
『어찌해서 대답을 그렇게 하시오?』
『왜 대답을 어찌 했단 말씀이요.』
이때에 수일은 비로소 최만경에게로 눈을 향하여 자세히 보니 백태를 머금고 잔웃음을 항상 띄워 있는 눈꼬리는 더욱 아름다워 보이며, 그 위인이 온전치 못하다 하여, 가까이 마음을 주어 언어를 사귀는 법이 없고 항상 멀리하고 공경하던 이수일도 이제 다시 보매 과연 그 아름다운 태도는 어떻다 형용하기 어려움을 깨닫겠더라.
최만경은 자개 같은 앞니의 사이에는 금을 끼웠으니 웃을 때마다 자개 같은 흰 이와 금니가 번쩍번쩍 광채나며,
『그러면 아무데로나 가십시다. 일본사람의 스끼야끼집으로 가서 전골에 밥을 먹는 게 낫겠지요.』
『아무러나, 그래도 좋고.』
두 사람은 전기철도(電氣鐵道) 길로 좇아 남대문을 들어서서 다시 회동(會洞) 병문으로 돌쳐 들어서더니 동으로 향하여 한참 가다가 남으로 조그마한 골목으로 꼬부라져 두서너 집 지내며 모퉁이 길갓 집으로, 문 앞에는 붉고 푸른 유리로 만든 등에 화양요리(和洋料理)라 크게 써서 있고, 아직 황혼까지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으되 불을 혀서 영롱한 빛이 비추이는데, 이삼 층 되는 화양 절충제도(和洋折衷制度)로 지은 요리점이라. 다만 남녀 두 사람이 남 보기에는 무슨 까닭이나 있는 것같이 그 요리점으로 들어선다.
최만경은 뽀이에게 무엇이라 말을 하더니 이층 위로 올라가지도 아니하고 아랫층 따로 떨어져서 가장 종용하고 은근하여 남은 보기에 그곳에 손이 있는지도 알지 못할 만한 방으로 인도하여 들어간다.
최만경이라 하는 하이칼라 부인과 이러한 곳에 옴을 이수일은 재미없이 여기어 화평한 마음은 조금도 없고 괴로와하는 기색이 미우에 가득하여 수일은 말도 아니하고 다만 최만경과 향하여 쪼그리고 앉아 있다.
양인은 한참 동안은 말이 없고 서로 대하여 앉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남포의 불만 어두워가는 해에 점점 밝아진다.
『여보시오, 수일씨, 편히 앉으시구료. 왜 금방 달아날 사람 모양으로 그렇게 쪼그리고 앉으셨소?』
『아니오. 나는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편해요. 아무 염려 마시오.』
『아이고, 그렇게 섭섭하게 굴지 마오, 여보, 당신도.』
『나는 집에서도 일상 이 모양으로 앉아 있는 사람인 걸요.』
『아따, 그런 거짓말은 좀 고만두어요.』
이렇듯 말을 하되 이수일은 오히려 편안히 앉지 아니하고 두루마기 옆으로 손을 집어넣어 조끼에서 궐련갑을 내어 궐련을 한 개 피우려 하는데, 공교히 한 개도 남아 있는 것이 없는지라, 수일은 담배를 청구하려 손뼉을 쳐서 하인을 부르려 하는데 최만경은 급히 자기의 품속으로서 담배갑을 내더니 애급 궐련(埃及煙草) 한 개를 내어 불을 붙여주며,
『우선 담배 가져올 동안에 이것이라도 먼저 잡숫구려.』
그 사람의 주는 궐련이 입으로 무는 곳에는 금종이가 둘렸다. 등잔불에 그 금빛이 번쩍번쩍 광채가 난다. 이에도 금, 손가락에도 금, 팔목에도 금, 시계줄도 금, 시계도 금, 심지어 궐련에도 금이로다.
(금이로다, 이 세상이 모두 금이로다. 금, 금, 과연 그 마음속에도 금이 가득하리로다. 아, 금!)
하며 이수일은 홀로 탄식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아니오, 나는 그런 금물뿌리한 담배는 좋아하지 않아요.』
최만경은 수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가 붙였더니 더러워서 그러시오? 씻어드릴 것을 내가 그만 깜짝 잊어버렸지요.』
하며 수건을 내어 입에 물었던 곳을 씻고 씻는다. 수일은 황망히,
『아니오. 내가 결단코 더럽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런 궐련은 좋아하지 아니해요.』
최만경은 다시 수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응, 그렇지요. 내가 드리는 담배를 잡수시겠소? 그래서 애급 궐련은 도무지 잡수어본 일이 없지요. 정신을 좀 차려야지요. 요전에 내가 당신 주인 되는 김정연(金正淵)씨 집에 갔을 때에 당신 있는 건넌방에 가 보니까 책상 위에 애급 궐련을 통으로 놓고 잡숫던 생각은 하지 못하오? 그때는 그게 애급이 아니고 애급 같은 담배던가?』
하며 최만경은 수건으로 입을 가리우고 웃기를 마지 아니한다.
수일은 할릴없이 그 담배를 받아가지고 피운다.
조금 있더니 배반(杯盤)을 앞에 갖다 놓는데 최만경이든지 이수일이든지 모두 석 잔 술을 능히 먹지 못하는 사람이라. 최만경은 잔에 술을 부어 권하며,
『한 잔 잡수시오.』
『천만에, 나는 술이라면 접구를 못하는 사람이요.』
『왜 또 그러시오? 한 잔만 잡숫구료. 그러면 맥주를 가져오랄까요?』
『아니, 나는 술이라는 것은 맥주·약주를 물론하고 한 잔도 먹지 못해요. 당신이나 많이 잡수시오.』
술이라 하는 것은 비록 자기는 사양할지라도 남은 따라서 권하는 것이 의례의 일이라 그러나 수일은 술을 따라 권하는 일도 없고 다만 마음대로 많이 잡수라 하는 말뿐이라, 최만경은 수일의 하는 것을 미웁게도 생각하고 야속하게도 생각한다.
『나는 일상 이렇게 미친 것 같은 계집년이지요마는 모처럼 따라놓은 술을 한 잔도 아니 잡수면 내 마음에는 섭섭지 않소?』
수일은 마지못하여 한 잔을 마시었더라. 그러나 처음에는 급한 일이 있다 하여서 이곳까지 이르렀으되, 급하다 하던 말은 도무지 개구치 아니한다. 수일은 참다 못하여,
『여보, 만경씨, 아까 급한 일이라고 하던 것은 무엇이요? 장목전하는 김영오가 어찌하였다는 말이요.』
『인제 차차 말씀하지요. 한 잔만 더 잡수시오. 똑 한 잔만, 더는 권하지 아니할 터이니.』
수일은 눈살을 찌푸린다.
『글쎄, 나는 더 못 먹어요.』
『그러면 내가 먹겠소. 황송하지마는 술이나 한잔 따라 주시구료.』
수일은 마지못하여 술을 부어주며,
『그런데 김영오 장목전에 무슨 일이 있단 말이요.』
『녜, 그 일뿐이 아니라 그 외에도 또 다른 일이 있어요.』
『아따, 웬일이 그다지 많단 말이요? 어서 말을 하시구료.』
『녜, 인제 차차 말씀하지요. 그러나 좀 취해야지, 맑은 정신으로는 말하기 어려운 일이야요. 나는 조금 취할 터이니 괴로우시지마는 나 술 한 잔 더 따라 주시구료.』
『취하면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소? 취하기 전에 할 말은 다 해야지요』
『불가불 오늘밤에는 내가 좀 취할 터이야.』
애교가 듣는 듯한 눈 근처에는 홍조에 물들었고 주기는 전신에 돌아 쾌락한 마음으로 수일을 향하여 치어다보고 있는 얼굴은 화병에 꽂혀 있는 꽃가지로 잘못 보기도 쉬울지라. 흘러내리는 머리털을 귀치않아 하는 모양으로 왼편 손을 들어 끌어올리는 때에 분결 같은 손가락에 금반지와 보석반지가 두서넛이라. 수일은 이윽히 그 모양을 한참 보다가 다시 괴로운 눈살을 찌푸린다.
이수일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수일의 얼굴을 보고 괴이타 여기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나 수일의 얼굴은 전일과 전연히 딴사람의 얼굴이 되었더라. 사랑스럽고 온화하던 기운은 하나도 없어지고, 사년 동안에 슬픔과 근심과 괴로움이 서로 얽혀 풀리지 못하는 기색이 그 얼굴에 덮이었도다. 휘어도 꺾이지 아니할 굳고 강한 기운은 침울한 안색에 나타나되, 일찌기 심순애를 대할 때의 따뜻하고 다정하던 빛은 그 얼굴에 다시 나타나지 못한다.
보는 일도 냉담하고 하는 말도 근신(謹愼)하며 근래로 그것이 한 성품을 지었더라. 그러므로 사람마다 서로 친압(親狎)하기를 꺼리며 자기도 스스로 사람과 친하기를 즐기지 아니하여, 비록 동업자라도 사람마다 수일을 편벽된 무정한 사람으로 멀리하고 가까이하지 않는다. 어찌 알리요, 수일의 경우와 수일의 마음을!
신성(神聖)한 남녀의 연애를 잃은 몸으로 오히려 그 신세가 광인(狂人)에까지 이르지 아니함이 도리어 괴이하도다.
수일은 최만경의 홀로 흥에 올라 술잔을 거듭하는 모양을 심히 온당치 못하여 여기는 기색으로 바라본다.
『한 잔만 더 쳐주시구료.』
하며 만경의 웃음을 띄운 눈에는 백부용(白芙蓉) 한 송이가 붉은 빛에 반사됨과 같아여 더욱 다시 고운 태도 더하였더라.
『여보, 그만 자시오. 여자가 왜 술을 그렇게 많이 자시오?』
『당신이 그만 먹으라고 하시면 내가 안 먹지요.』
『내가 억지로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니 자량하여 자시구료.』
『그러면 나는 취하도록 더 먹을 터이야.』
하나 수일은 술을 쳐서 권하지 아니하는 고로 만경이는 스스로 따라서 반 잔이나 마시었는데 점점 두 뺨에까지 붉은 기운이 올라온다. 만경은 두 손을 들어 취한 얼굴을 만지며,
『아이고, 나는 퍽 취했소.』
수일은 못 들은 체하고 고개는 마당으로 향하고 담배만 피운다.
『수일씨…….』
『왜 그러시오?』
『나는 오늘 저녁에 꼭 헐 말씀이 있는데 당신이 들어 주시겠소?』
『듣고 말고 여부가 있소? 만경씨의 이야기 듣자고 여기까지 왔는데…….』
만경이는 다시 입을 가리우고 소리 없이 웃으면서,
『아마, 나는 대단히 취했나 보오. 취중에 혹시 실태하는 말씀이 있더라도 용서해 주셔야 하오. 혹시 미타히 알아들으시면 재미가 없소. 그러나 술 먹고 취담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 먼저 알고 들으시오, 녜? 알아들으셨소?』
수일은 대답이 없이 앉았는데 만경은 수일의 옆으로 바싹 가까이 들어와 앉으며,
『이 술 한 잔만 더 잡수시오. 이후에는 결코 억지로 권하지 아니할 터이니, 이번 한 잔만 받으시오.』
수일은 마지못하여 잔을 받는다.
『이제는 내 원이 다 풀렸소.』
수일은 속마음으로 원도 대단히는 허무하다 하며, 웃기를 마지아니한다.
『수일씨.』
『네.』
『당신은 김정연씨 집에 오래도록 계실 터이요? 언제든지 당신도 따로 나서 독립으로 밎놀이를 하실 터이지요.』
『암, 그야 물론 그렇지요.』
『그러면 어느 때쯤이나 따로 나실 터니까?』
『지금이야 내가 무슨 자본이 있소? 내 밑천이 좀 생겨야 독립을 하지요.』
최만경은 홀연 말을 멈추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수일의 두루마기 고름을 가지고 두 손으로 접었다 폈다 하다가 요릿집 계집 하인이 라이스칼(서양요리의 밥 이름)을 들고 들어와 두 사람 앞에 놓는 즈음에 만경이는 옷고름을 놓고 다시 사이가 뜨게 내켜 앉는다.
계집 하인은 두 사람의 동정을 이상하게 돌아보며 밖으로 나아간 후 만경이는 다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
『이런 말씀을 하면 수일씨는 어찌 알아들으는지 알지 못하겠읍니다마는 당신도 일생 김정연씨 집에서 남의 일만 하여 주실 생각만 말으시고 하루라도 일찌기 독립으로 생애하실 생각을 하시오. 내일부터라도 당신이 따로 나신다고 하시면 내가…… 이런 말씀을 하면 주제넘다고 생각하실 듯하지요마는…… 이러한 아녀자의 힘으로 넉넉히는 한달 수는 없더라도 내 힘에 되는대로는…… 돌려서 드릴 터이니 아무쪼록 그렇게 하셔요.』
『그것은 무슨 까닭으로 나같은 사람에게 돈을 돌려주시려오?』
하며 수일은 만경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 까닭을 말하라는 말씀이요?』
하며 만경은 또 한참은 말하기를 주저하더니,
『그렇게 꼭 집어서 말씀을 아니 하여도 알아들으시겠지요? 낸들 일생 찌레만의 집에만 있겠소? 나도 그러한 사정이 있으니까 말씀이지요.』
수일은 짐짓 못 알아듣는 체하며,
『지금 하시는 말은 그 뜻을 나는 자세히 알아들을 수가 없구료.』
『왜 이렇게 생 시치미를 떼고 이러오? 정말 못 알아듣는 체하고.』
하며 만경은 눈을 흘기어 수일의 얼굴을 보며, 손으로 수일의 어깨를 탁 친다.
『나는 시장하니 먼저 밥이나 먹겠소.』
하며 수일은 소반 위에 놓인 밥그릇을 앞으로 다가놓으며 사시를 들려 하는 것을 만경이는 사시를 빼앗으며,
『우리 같이 먹읍시다. 술 한 잔씩만 더 먹고.』
『나는 머리가 아파서 술은 더 못 먹겠소. 만경씨도 시장하실 터이니 밥을 자시구료.』
나도 시장은 하지요마는 내 청을 당신이 들어주지 아니하시면 밥 못 먹어서 배고픈 것보다도 내 마음이 더 고프니 내가 아까 한 말씀을 좌우간 대답을 하여 주어야지요.』
『대답을 하라니, 아까 만경씨가 하던 말의 뜻을 입대지 알아듣지 못하였는걸, 대답을 어찌하오.』
『어째서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신단 말이요?』
하며 책망하는 것같이 사나이의 얼굴을 바라보매 수일이도 준절한 기색으로 돌아보며,
『암만해도 나는 까닭을 알 수가 없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서로 정다이 교제하는 터이라 할지라도 나같은 사람에게 거래할 자본을 돌려줄 까닭이 없을 터인데, 우리는 사귄 정분이 그렇게 친밀치도 못한데, 내가 주인의 집에서 따로 나오면 자본을 돌려준다는 말이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이허(裏許)를 해석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니오? 밥이나 우리 먹읍시다.』
『알 수 없다니, 당신은 너무 심하시구료. 그러면 마음에 들지가 않아서 그러십니까?』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까닭 없는 당신에게 내가 왜 돈을 돌려달란단 말이요?』
『아이구머니, 내 말이 그 말씀 한 것이 아니야요.』
『아니, 나는 배가 대단히 시장하여졌소.』
『그러면 수일씨는 다른 이라도 얌전한 사람에게 언약하여 둔 데 있읍니까?』
만경이는 점점 노골적으로 말을 하는 데 이르매 수일이는 더욱 점점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체하며,
『별소리를 다 묻는구료.』
하며 나오지 아니하는 웃음을 지으매 만경이는 더욱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만일 언약하여 두신 데가 없을 것 같으면…… 내가 당신에게 청할 일이 하나 있어요.』
수일이는 이제야 비로소 알아듣는 체하고,
『네, 나도 알아들었소.』
『인제는 알아들으셨소?』
하며 만경이는 기꺼움을 이기지 못하는 모양으로 잔에 남아 있던 술을 한입에 들이마시고 다시 그 잔에 술을 부어 수일을 준다.
『아, 이것을 또 한 잔 먹으라는 말이요?』
『이것 한 잔만 꼭 잡수셔요.』
하며 들어서 권한다.
수일은 어찌 못하여 한 입을 받아마시매 만경이는 깔깔 웃으면서,
『그 술잔은 내가 먹던 잔인데.』
일일이 하는 말이 모두 속으로 딴마음을 가지고 하는 말이라.
『인제 알아들으셨으니 대답을 하셔야지요.』
『네, 대답하지요. 그 말씀은 내가 들을 수가 없소.』
수일은 그 말을 마치고 엄연히 앉아 있다. 만경이는 수일이가 한 마디 말로써 준절히 거절하고, 다시 말이 없으며 지금까지 취하였던 술이 별안간에 깨는 것 같아지며 사나이의 기색을 은근히 살펴본다.
『나도 계집으로 이러한 부끄러운 말을 입밖에 한번 내어놓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소. 계집 사람으로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여간 결심을 하고 말씀을 하였겠소. 당신의 말씀이 못 듣겠다고 하시니 못 들을 만한 까닭을 말씀하여 주시구료. 내 마음에 그러할 듯하게 생각이라도 가도록 말씀을 하여주시오. 내가 이 말씀은 술 먹고 농담으로 한 말도 아니니…….』
수일은 숙이고 묵묵히 있던 고개를 들며,
『그 말씀은 당연한 말씀이요. 나같은 사람도 사나이라고 어떻게 보셨든지 간에 이런 말씀을 하여주시니 나로 말을 하더라도 결단코 기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오마는, 그렇듯 간절한 말씀 하시는 데에 대하여서 어찌 낸들 내 마음속에 있는 말씀을 아니하겠소? 그러 나 나는 본래에 성품이 편협하여서 보통사람들과 같이 성품이 활발치를 못한 사람이요. 나는 평생을 늙도록 아내는 얻지 아니하고 홀아비로 살다가 죽기로 결심한 사람이요. 나는 본래 학교에 다니던 학생으로 중도에 학문을 내버리고 이 영업을 시작하였소. 내가 난봉을 부리다가 이 영업을 하는 것도 아니오, 학문을 하기가 싫어서 이 영업을 하는 것도 아니오, 무슨 영업이 없어서 하필 이것을 하겠소? 백주에 강도짓과 같은 극악한 일을 하여서 사람의 피를 긁어서 돈을 장만하겠소?』
최만경은 그 말을 들으며 더욱 술이 깨이고 정신이 난다.
『이 영업은 영업 중에도 더욱 부정한 영업이라고 하느니보다 오히려 사람은 하지 못할 악한 일이라 하겠소. 그러나 악한 일인 줄을 인제야 내가 안 것도 아니고 내가 처음에 이 영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그 사람도 죽이고 나도 그 자리에서 죽겠다고 할 만한 원통한 일이 있어서 그 일로 인연하여서 오늘날 내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그 원통하다는 일은 전일부터 내가 어떠한 사람을 마음으로 깊이 믿고, 그 사람도 나를 잊지 못하여서 서로 저버리지 못할 사이로 지내다가, 우연히 재물이 눈을 가리어서 언약도 저버렸고 의리도 없어지고, 나는 일개 속담에 이른바 개밥에 도토리로 깜박 속았구료.』
등불 빛을 피하여 얼굴을 돌리는 눈에는 새로 원망한 마음에 눈물을 띄웠더라.
『실상 믿을 수 없는 이 세상이요. 인정도 모르고 의리도 저버리고 나를 속인 것은 그 근원을 말하자면 모두 돈으로 하여서 그 모양이 되었구료. 아무리 못생겼기로 명색이 사나이 자식으로 생겨나서 돈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고 남에게 속은 생각을 하면 그 원통한 마 음이 어떠하겠소? 나는 일평생을 두고 이 원한은 이…… 잊어버리지 못하겠소. 경박하지 않으면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면 이욕만 있는 이 세상이니, 이 세상에 무슨 즐거운 마음이 있겠소? 그렇게 세상이 싫으면 어찌해서 진시 한 번 죽어서 잊어버리지를 못하느냐고 의심하실는지는 알 수 없지요마는, 나도 죽어서 이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도 열두시로 나지요마는, 하도 원통하니까 원통한 마음에 죽으려도 죽을 수가 없구료. 그렇지마는 나를 속이고 저버린 사람을 보복하자는 마음은 조금도 없고 다만 내 몸으로 그 원통한 일을 지원하도록 풀기 전에는 땅 속에 가서라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가 없소. 잠시라도 이렇게 고요히 앉아 있으면, 그 마음이 가슴에 솟아올라서 거의 미칠 지경이니까 빚장이 같은 포학한 일이나 하여서 사람을 세워놓고 말려죽이듯이 하지 않으면 잠시라도 가슴이 시원치가 못하오그려. 어떻든지 이 장사가 미칠 지경된 놈에게는 적당한 장사외다. 돈으로 하여서 남에게 속기도 하고, 돈으로 하여서 남에게 욕도 보았으니까, 돈 없던 것도 원통한 속에 한 조목이 되오. 만일 돈이 있으면 그 원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볼 수가 있을까 하고 인제는 나는 의리도 모르고, 인정도 모르고, 즐거움도 모르고, 명예도 모르고, 연애도 모르고, 단지 돈 밖에는 다시 바라는 것 없소. 또 다시 생각을 하여보아도 이 세상 사람을 믿느니보다 돈을 믿는 것이 도리어 낫겠소. 세상에 못 믿을 것은 사람의 마음이요. 대강 나는 이러한 생각으로 이 영업을 시작하였소.아까 말씀이 돈을 돌려주겠다 하시니 대단히 고마운 말씀이나 나는 이러한 사람이니까 치지도외(置之度外) 하시오.』
하며 수일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으나 얼굴은 대단히 격앙하였더라. 만경이는 수일의 하는 말을 일일이 귀를 기울여 들은 후에 필연 저 사람은 편협한 성품에 아직도 이 세상에 연애의 쾌락한 재미를 해석치 못하여 그러함이니 내가 한 번 달래어 그 마음을 돌리리라 생각하였더라.
『그러면 내 마음도 수일씨는 역시 믿지 못해서 의심이 있어 그러십니까?』
『아니오, 인제는 누구를 의심하고 말고가 없고, 나는 아주 실망한 사람이라, 이 세상이 싫고 모든 사람이 다 나는 싫어요.』
『그래 정 말씀이요? 죽기로써 자처하고 당신을 생각하고 바라는 사람이 있어두요?』
『물론 그렇지요.』
『당신을 진정 진심으로 생각하는 줄을 당신이 알더라도?』
『빚놓이하는 놈의 눈에는 눈물도 없읍넨다.』
이제는 다시 무엇이라 할 말도 없고 만경이는 무료히 앉아 있더니,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시 헐 말도 없고, 우리 밥이나 먹읍시다.』
수일은 밥을 먹자고 하는 말을 다행히 여겨 사시를 들고 옆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반 그릇이나 더 먹었더라. 그러나 만경이는 사시를 손에 들고 먹을 생각도 아니하고 밥그릇만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더니.
『이수일씨.』
하며 부를 때에 수일이는 밥을 입에 가득히 넣었는지라 대답은 이루지 못하고 다만 얼굴을 들어 부르는 사람의 얼굴만 치어다보고 있다.
『나도 당신께 이런 말을 하려고 결심하였을 때에 만일 당신이 불청을 하시면 어찌하나 하고 무한 염려를 하고 몇 달을 두고 벼르다가, 오늘은 모진 마음을 먹고 부끄러운 말씀을 하였다가 이렇게 두말없이 거절을 당하고 보니 내 얼굴은 무슨 꼴이…… 너무도 무안…….』
하며 품으로서 수건을 내어 야속한 눈물을 가리운다.
『여보, 수일씨, 나는 너무도 무안해서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구료. 사람이 어찌하면 그렇게 지독하게 말씀을 하신단 말이요?』
수일은 예사로 돌아다보며,
『그것은 모르는 말씀이요. 내가 만경씨 한 사람을 싫어한다 하였으면 그렇게 말씀하시기도 쉽겠지오마는, 나는 이 세상에 남녀를 물론하고 모든 사람을 다 싫어하니까 야속하게 알아듣지 마시고 다시 생각을 하여 보구료. 만경씨는 진지를 아니 잡수시오?』
울어서 벌겋게 된 눈을 수건으로 좌우로 씻으면서 만경이는 대답이 없다.
『그러나 아까 말씀하던 김영오 장목전에는 무슨 일이 있단 말이요? 그 말씀이나 하시구려.』
『그까짓 일은 천백날 있어도 관계 없어요. 수일씨, 그러나 나는 아무리 하여도 당신은 잠시라도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내 마음이 그렇게 간절한 줄이나 좀 알아 주시오, 당신 마음에 싫은 것이야 어찌할 수 있소마는 내가 진심으로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을 영원히 잊지나 말아 주시구로, 응?』
『녜, 아니 잊어버리지요.』
『대답이 왜 그러하오? 좀 정답게 대답을 하여 주시구료.』
『녜, 결단코 만경씨의 마음은 잊어버리지 않으리다. 이렇게 하면 정답게 대답이 되었소?』
만경이는 벌떡 일어서더니 수일의 옆으로 바싹 가서 앉으며,
『잊어버리지 마시오, 응, 정말.』
하며 왼손으로는 슬며시 수일의 다리를 두 손가락으로 꼭 꼬집는다.
별안간에 아픔을 못 이겨 그 손을 홱 뿌리치매 만경이는 모르는 체하고 벌떡 일어서며 손뼉을 탁탁 쳐서 하인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