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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몽/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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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서강 별장(西江別莊)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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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으로 좇아 배를 띄우고 가문 돌(玄石) 삼개(麻浦) 바른편으로 바라보며 한참 동안을 내려가면 서강(西江)에 이를지라. 그 곳에 배를 대고 인가를 치어다보면 강가의 언덕 위로 이삼 층 되는 집이 구소(九霄)에 솟아 있는 것 같아여 앞으로는 강색(江色)을 내려다보고 뒤로는 인가를 압시(壓視)하는 집이 있고, 강편으로 향하여는 일소정(一笑亭)이라 하는 큰 현판이 높이 달렸으니, 그 집 주인의 내력을 잠깐 말할지라. 그 부친은 전일에 지위가 보국(輔國)에 이르러 당시 세도가로 명망과 세록이 조선 일반도는 능히 좌지우지에 감히 누가 거느릴 사람이 없고, 성품이 정직무사하여 인민이 모두 외복(畏服)하던 터이라. 그런 고로 박보국(朴輔國)이라 하면 아동주졸(兒童走卒)이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일찍 한 아들을 두었으니 이름은 용학(容鶴)이라. 십오 세 때에 이르매 비로소 지개를 깨달아, 시세의 변천이 날로 더하여 문호를 개방하며 세계와 서로 교통함을 면치 못할 줄 알고 신문명(新文明)의 공기를 몸에 받고자 하나 완고한 부친이 항상 허락지 아니하는 고로 유의막수(有意莫遂)로 앙앙히 날을 보내더니, 하루는 마음을 결단하고 일본 동경으로 불고이주(不告而走)하여 유학하기를 사오 년 동안이나 하였는데 그때에 한 학교에서 서로 가까이 지내기는 김중배라. 그 후에 그 부친의 병보를 듣고 돌아와 인하여 그 부친의 상사를 당하였으니 박용학은 누대의 거부를 자기가 임의로 조종하게 되었더라.

서강에 있는 강정(江亭)은 거액의 자본을 들여, 삼 층으로 벽돌집과, 이 층으로 일본 제도와, 평집으로 조선 제도로 칠팔십 간을 동서양을 겸하여 일찌기 조선 천지에서는 보지 못하던 집을 건축하였으니 이는 모두 박용학이가 귀국한 후에 지은 집이라. 그 집 속에는 객실(客室)과 서재(書齋)와 침실(寢室)을 모두 구별하여 제반 오락으로 세월을 한가하게 보내니, 글도 읽으며, 그림도 그리며, 음악도 희롱하며, 또는 사진술(寫眞術)도 사랑하여 연령은 삼십을 겨우 넘었으되 아직 아내를 맞지 아니하고, 나가든지 들어오든지 항상 행동이 표현담박(飄然淡泊)하여 조금도 고귀한 사람의 용의(容儀)는 짓지 아니하고 소탈하게 세상을 지내되 스스로 그 부요함과 품격 얻는 바는 사람마다 우러러보지 아니하는 자가 없더라.

그러하므로 어진 인연이 사방으로 들어옴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스스로 취한 듯 미친 듯 다만 풍류에만 마음을 위로하고, 안으로는 무처주의(無妻主義)를 주장하여 용이하게 남의 권고도 듣지 아니한다.

박용학은 일찌기 일본 동경에 유학할 때에 그곳 육군 중좌(陸軍中佐)의 영양과 우연한 기회로 서로 사랑을 주고받아 장래에는 월하(月下)에 가연을 맺기로 언약하고 지구 애탕산(芝區愛宕山) 아래로 멀리 보이는 품천해만(品川海灣)을 서로 가리키며 저 바다의 물은 마를지언정 우리 사랑은 변할 날이 없으리라 굳게 서로 맹세하고 돌아온 후 그 모친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고하고 허락을 청하였더라. 그러나 그 모친은 놀라기를 마지 아니하고, 어려서부터 너의 배필로 정혼한 곳이 있거늘 이것이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뇨 하며 인하여 허락하지 아니하고 병을 일으켜 자리에 눕는지라, 그 모친의 이와 같은 모양을 보매 박용학은 하릴없이 간절한 마음을 억제하고, 자로 편지에 그와 같은 사정을 자세히 말하여 후일을 기다리고 안심하라고 간절히 편지하여 그 여자의 마음을 위로하였더라. 그 여자는 먼 곳에서 한 사람을 바라고 하루가 삼추 같은 날을 오늘 내일하고 기다리기를 어느덧 두 해를 지내었으니, 그 동안에 그 여자는 근심과 슬픔이 쌓여 그리하였든지 인하여 병을 이루어 다시 병석을 떠나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간신히 붓을 잡은 필적으로 그 남편 박용학에게 영결하는 편지 한 장을 우체에 부탁하고 인하여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묘연히 떠났더라.

그 편지가 박용학의 수중에 들어오고 연하여 세상을 버린 흉보를 접하며 박용학의 가슴은 천 가지로 만 가지로 터지는 것 같아여 일시는 거의 지각을 잃어버려 현세를 비관하는 마음이 더욱더욱 깊어지고 이제는 세상도 재미없고 산같이 쌓인 재물도 귀한 줄을 알지 못하며, 다만 없어진 사람을 생각하여 기념으로 그 사진 한 장을 서재 벽에 걸어놓았으니, 그 사진은 그 여자가 십구 세 때에 최후로 박용학에게 보낸 것이러라.

박용학은 이렇듯 실망한 이후로는 세상에 뜻이 없고 풍류와 오락에 침혹(沈惑)하여 몸과 집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다만 근심을 잊고자, 널리 노는 데 쓰는 재물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집에 부친 시대부터 세간을 맡아 보아주는 유원행(柳元行)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주인을 위하여 능히 재정을 정리하고 모사(謀事)하기를 정당히 하여, 이와 같이 재물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주인을 도와서 다행히 큰일에는 이르지 아니하게 하였더라

유원행이라 하는 사람은 재물을 아는 사람인 고로 주인의 재물을 맡아가지고라도 내 재물같이 절용하고, 그 사이에 은근히 자기의 수단으로 자기의 몸을 살지게 하는 것은 그 재물을 이용하며 비싼 변리로 돈 취리하는 일이라.

일이천 원으로부터 내지 이삼만 원까지라도 능히 출납을 용이히 하는 고로 그 외의 여러 돈놀이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은행이나 다름없이 알고 큰돈을 거래하는 데는 반드시 유원행에게 의뢰치 아니하는 자 없더라.

그러나 유원행이라 하는 사람은 본래 눈 밝고 영리한 사람인 고로, 다만 돈이 늘어가는 것만 중히 여겨 아무 사람이나 직접으로 거래하는 일이 없고, 그 중에도 가히 신용하고 착실한 사람 하나를 택하여 그 사람을 사이에 두고 비밀히 돈 왕래를 하여, 사람들은 유원행이가 돈장사하는 줄을 거의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유원행이가 가장 믿고 사이에 둔 사람은 김정연(金正淵)이라.

그러므로 동업자 사이에도 김정연은 어느 곳에 돈을 대어주는 곳이 있음은 대강 짐작하나 과연 유원행이가 김정연의 자본주 되는 줄은 자세히 아는 자 없더라.

이와 같이 김정연은 금전에 세력이 있는 고로 같은 동사(同事)하는 사람 사이에도 권리가 혁혁하여 모두 머리를 숙이게 됨은 전혀 유원행과 같은 전주가 뒤에 있어 염려 없이 말하는 대로 시행하여 주는 연고이라.

김정연은 본래 빈한한 사람으로 처음은 가옥 매매하는 데 거간으로 근근히 지내가다가 다시 순사에 뽑혀 여러 해를 근실히 다녔는 고로, 경부로 다시 승차하여 몇 해 동안을 지내는데 홀연 돈이라 하는 것이 이 세상에는 권리요, 권리가 즉 돈이라는 마음이 생겨, 벼슬 다니는 때에 규모 부리어 모은 돈 삼백여 원을 자본으로 하여 가지고 무전대금(無典貸金)이라 하는 명목으로 제반 부랑 방탕한 사람들을 꾸어주고 기한에 다다르면 위협도 하며, 달래기도 하며, 두드리기도 하며, 세간 집행도 하여 요행히 법망(法網)에 걸리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의 피를 긁어서 불과 기년에 칠팔천 원의 재산을 저축하였더니, 그 후에 다행히 유원행과 같은 대자본주를 얻어 등을 지고 있으매 이른바 호랑이가 날개를 더함과 같아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이십만 원의 재산은 능히 운용(運用)하게 되었더라.

이와같은 김정연의 집에 대리(代理) 겸 서사로 이수일이가 몸을 붙여 사년 동안을 주인 김정연과 한가지로 동사할 때에, 이름은 비록 서사라 할지라도 제반 일을 모두 겸하여 주인의 집 고문(顧問)이라 하여도 가할 터이요, 김정연의 신용도 두터웠더라.

이수일은 주인의 일을 근실히 보아주는 여가에, 자기의 조그마한 돈냥도 취리하여 일후에 큰 돈을 만들리라 자기(自期)하였더라.

이수일은 다만 그 집에 서사하는 사람으로 일을 잘하며 또는 고문으로 계책을 잘 꾸밈으로써 주인 김정연의 신용을 얻을 뿐 아니라, 수일은 삼십이 다 차지 못하는 소년으로 여색을 가까이하지 아니하며 술을 즐겨하지 않고 낭비하는 일도 없으며 게으르지 아니하며 책임을 다하고, 할 일은 근간히 하며 주인에게 거스르지 아니하고 사람을 평론하는 일도 없고 공손하며 정직하고 또는 기개와 의리가 없지 아니하므로 이 세상에는 둘도 없는 유명한 청년으로 생각하여 김정연은 그윽히 마음으로는 도리어 수일의 위인을 두려워한다.

김정연은 수일의 위인을 안 이후에는 홀로 생각하되, 저와 같은 청년이 어찌하여 이러한 사업을 하고자 마음을 두었는고 하고 의심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그러나 수일은 자기의 이력을 숨기고 어떠한 마음으로 몸을 이곳에 바치었다는 말을 발표하지 아니하였으나, 그 후에 이르러는 전일에 고등학교에 다니어 졸업 기한을 며칠 남겨두지 아니하고 퇴학한 일은 알았더라. 그러나 그 외에 따로 비밀한 일이 있음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지내왔으나 구태여 자세한 이유는 묻지 아니하고 다만 일후라도 수일을 위하여 독립으로 영업할 때에 뒤를 보아주고자 김정연은 은근히 속마음으로 수일을 신용하였더라.

김정연은 지금 나이 오십이요, 그 아내 되는 공씨는 사십칠 세라. 그 남편 김정연은 마음이 강박하고 혹독하여 남의 근심을 보기를 개의 하품 보듯 하며, 남의 곤란한 일 보기를 나의 즐거움같이 하여, 탐하고 욕심하기를 한이 없으되, 그 아내 공씨는 남편의 성질보다는 오히려 유순한 곳이 있어 악마 같은 사람의 계집으로도 능히 보통 사람의 마음을 가졌더라.

그러므로 이수일의 위인을 그 남편보다 더욱 사랑하여 나의 친자질이나 다름없이 친절히 한다.

이와같이 수일은 어떠한 곳에서든지 환영을 받고 있으나 가슴에 가득히 쌓인 원한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은 풀릴 날이 없고, 스스로 이와같은 사업을 구하여 천백 각지의 곤란을 잡고 세상 사람의 더운 피를 마시어 쌓인 한의 만분 일이라도 풀고자 함이러라.

김정연은 세상 사람은 어찌 되었든지 나의 재물만 번식할 목적으로 혹독하고 음흉한 수단으로 사람을 농락하는데, 그 김정연의 채무자 중에도 극히 악독하고 간흉하여 본전 변리를 합하여 삼 년 동안에 사천 원이 되었더라. 그러나 좌우로 칭탁하고 채무를 이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채권자를 간사한 지혜로 농락하는지라, 돈놓이에 노련한 수단을 가진 음특한 김정연의 힘으로도 능히 억제치 못하고 인순하여 금일까지 이르렀으나, 등한히 두고 볼 일은 아니라 하여 최후 수단으로 엄중한 담판을 하고자 하여 하루는 이수일을 자기의 대리로 그 집에 보내었더라.

이수일은 주인의 대신으로 그 집에 이르러 아침부터 석양 때까지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강경한 수단으로 채권을 독촉하매 채무자는 이수일의 아직 연치가 어림을 업수이 여기고 도리어 항거하여, 추호도 굴복하여 잘못됨을 말하지 아니하고 나중에는 삼척 장검을 빼어들고,

『만일 네가 돌아가지 아니하면 이 칼로 두 토막을 내어 징계하리라.』

위협하며 백인(白刃)을 눈앞에 번득이며 발로 차고, 손으로 때려 문 밖으로 축출하는지라, 이수일은 몸에 다소 상처를 받고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왔더니, 그 후로 수일은 돌아와 다시 자기의 신세를 생각하며 한탄하기를 마지 아니하다가 그 밤은 날이 밝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인하여 병을 이루었는지라, 이튿날도 몸을 수습하여 능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자기의 처소되는 한 간 방에서 이불을 덮고 드러누워 스스로 흐르는 눈물이 베개를 적실 뿐이라.

이날은 수일이가 주인의 일은 폐하고 분함과 원망과 슬픔으로 종일을 보냈더라.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당할 때마다 수일은 몸만 약하여지고 수척하여가며 홀로 생각하여도 자기의 성질로 이 사업이 적당치 못함을 깨닫지 못함이 라.아니

수일은 이 사업을 시작하던 처음에는 일 년 동안이나 일하던 날보다 성치 못하여 앓고 드러누워 있는 날이 많았더라. 그러나 그 이듬해부터는 조금 단련이 되어 처음보다는 익숙하였으나 그 마음속에는 이와 같은 악한 일을 행하기에 익숙함이 아니오, 다만 강잉하여 참고 억지로 행함이니, 수일의 이와 같이 마음에 없는 악한 일을 구태여 하고자 함은 전일에 가슴에 한 번 받은 한 하루 한시라도 잊을 수가 없고, 쌓이고 쌓인 분한 마음을 이 세상 사람에게 풀고자 함에 지나지 아니함이라. 그러나 수일은 때때로 자기의 잔인·혹독한 행동을 스스로 뉘우치지 아니하는 때가 없으며, 뉘우치는 때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공연히 신기 불평하면 하루 동안은 병을 일으켜 누워 있는 날이 적지 아니하다.

명랑하고 높은 가을 하늘은 담담하여 푸른 잎을 발라 놓은 것 같은데, 지붕 너머로 비치어 들어오는 햇발은 동남향으로 비친 영창에 쏘였으니 그 방안에는 자리 위에 수척한 얼굴로 수일이가 길게 누워 있다. 이불 위로 두 팔을 내어놓고 천정을 향하고 반듯이 누워 힘줄과 뼈만 남은 얼굴로 힘없이 무엇을 생각하다가는 홀연 한숨지으며 다시 이불을 머리까지 뒤켜 쓰고 벽을 향하여 돌아눕는다. 이 때에 밖으로 사람의 발자취 소리가 나더니 영창 앞에 이르러서는 신발 소리가 뚝 그치며 영창 문을 부시시 열며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 집 주인 김정연의 아내 공씨라. 수일은 안주인이 나음을 보고 황망히 일어나려 하는 것을 공씨는,

『왜 일어나려고 그리하나, 아픈 사람이 그대로 누워 있지.』

하며 손에 들고 나왔던 마음 그릇을 방안으로 들여놓으며,

『아침도 여태까지 아니 먹고 시장하지 않은가? 미음을 조금 쑤어 왔으니 조금 마시게. 그러나 어디가 아퍼서 그리하나?』

수일은 미음 그릇을 황망히 두 손으로 받으며,

『아니올시다. 그렇게 대단히 아파서 누워 있을 지경은 아니올시다마는 공연히 몸이 좀 찌뿌드드해서……. 그러나 이것은 손수 이렇게 가지고 나오셨어요.』

『여보게, 조미음은 식으면 좋지 않으니 식기 전에 마셔 두게.』

수일은 미음 그릇을 들어 두서너 입에 마시며,

『영감께서는 어느 때쯤 출입하셨습니까?』

『오늘은 전보다 더 일찌기 아침도 잡수시지 않고, 서강 박보국 집에 간다고 가시데.』

『네, 그러면 유원행씨 보러 가셨나 보오이까그려.』

『말은 거기를 간다고 하시데마는 어디를 가면서 그러는지 누가 아나.』

하며 공씨는 별안간에 성난 얼굴을 짓는다.

공씨는 지금 나이 사십을 겨우 넘었으되 초년에 고생을 많이 하여 그러하든지 오십이나 가까이 되어 보이도록 겉늙은 사람이라.

두 살쩍은 반백이나 되었고, 이마에는 두서너 곳에 주름이 잡혔다. 수일은 공씨의 의미 있는 것같이 하는 말을 듣고 이상히 생각하며,

『그것은 어떻게 하시는 말씀이오니까?』

공씨는 말하기를 심히 주저하는지라, 수일은 구태여 다시 묻고자 하지 아니하고 미음 그릇을 들어 나머지를 다 마시고 내려놓는다. 공씨는 치마자락을 들고 툇마루 위로 올라앉으며,

『여보게, 지금 자네더러 말일세마는 양인의 첩 노릇하는 최만경이라 하는 여편네 없나? 그 계집이 행실이 나쁘다는 소문이 있데그려. 자네는 여태까지 못 들었나?』

『행실이 나쁘다니오?』

『아따, 그렇게 못 알아듣나. 그 계집이 남의 사나이들을 모두 홀려다가는 돈을 빨아먹는대요.』

수일은 고개를 기울이고 놀라이 듣는 모양이니 전일에 자기가 그 여자에게 괴로이 구는 일을 당하던 때를 다시 생각함이라. 공씨는 다시 재우쳐서 말한다.

『그렇지, 자네도 벌써 그런 소문을 들었겠지?』

『나는 도무지 그런 말을 못 들었어요. 그 계집은 그런 것을 아니 하더라도 돈 없지 아니한데요. 그럴 리 없지요.』

『아따, 이 사람 보았나. 돈으로만 위해서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제 행실이 글러서 그렇지. 그런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어오는데 자네가 입때지 못 들었을 리가 있나?』

『글쎄올시다. 나는 인제 듣느니 처음이올시다.』

공씨는 무슨 말을 할듯 하다가는 도로 그치며 또 말할 듯하다가도 멈추고, 먼 산만 한참 바라보고 있더니,

『옷 입고 다니는 것과 모양을 보더라도 그리 보이지 아니하든가? 자네는 젊은 사람이라도 마음이 단단해서 그런 곳에 눈을 뜨지 아니하니까 관계치 않지마는 그런 계집하고 잘못 상종하였다는 참 큰일 나겠데.』

『그 계집이 그렇든가요? 나는 그런 소문은 언제 처음 들었어요. 하고 다니는 모양을 보면 딴은 그런 짓을 하는지도 알 수 없어요.』

공씨는 허리를 굽혀 미음 그릇을 끌어 잡아당겨 들고 한참이나 말이 없이 앉았더니, 다시 수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다른 사람더러는 이런 말을 당초에 할 리가 없지마는 자네는 말이 우리가 주객간이지 실상 여러 햇 동안 정든 것으로 말하면 친자질이나 다름없이 알고 있네. 그러니까 나도 믿고 하는 말일세마는, 정말 큰일이 한 가지 생겨서 어찌하면 좋을는지 걱정이 적지 아니한데…….』

하며 공씨는 미음 그릇을 들고 공연히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있다. 수일은 공씨의 말하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공씨는 다시 수일을 바라보며,

『내가 실상 자네를 믿으니까 밖에는 말이 나지 아니할 줄 알고 하는 말일세. 그러니 이 말은 자네만 들어주게.』

『염려 마십시오. 하지 말라시는 말을 입밖엔들 왜 내겠읍니까?』

수일이는 궐련 한 개를 붙이려고 손에 들고 성냥을 그으려 하다가 공씨를 향하여 말 나오기를 기다린다. 공씨는 혹시 다른 사람은 없는가 하여 좌우로 돌아보며 소리를 나직이 하며,

『요전부터 이상스러이 알았더니 차차 지내어보니까 암만 하여도 우리 영감이 그 계집하고 무슨 까닭이 있는 거야.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마 그러한 모양이야.』

수일은 성냥을 그어 담배를 붙이고 껄껄 웃는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것은 잘못 생각하신 말씀이지요?』

『아이고, 이 사람 보게. 내가 모르겠나? 내가 여간 탐지를 하고 이런 말을 할 리가 있나? 내가 다 안 일이 있으니까 말이지.』

수일이는 대답이 없이 한참 생각하더니,

『주인 영감이 지금 연세가 몇이시든가요? 쉰하나가 아니십니까? 노인이나 거의 되신 양반이 그럴 리가 있습니까? 무슨 증거 보신 일이 있습니까?』

『증거를 본 일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 짐작한 일이 있으니까 말이지.』

하며 공씨는 말을 그치고 다시 한참 동안은 묵묵한다. 수일이도 말이 없고 다만 궐련 연기만 피우고 있다. 공씨는 고개를 숙이고 정신없이 마당만 내려다보고 있더니 다시 수일의 얼굴을 향하며,

『사나이치고 누가 계집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렇지만 이 계집은 천하에 상관 못할 계집일세그려. 차라리 첩을 둔다든지 기생을 상관한다든지 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마는, 최만경이라는 계집은 어떠한 사람으로 알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이런 말을 하면 자네라도 듣기에 내가 샘을 내어서 하는 말인가 하겠지마는, 나도 나이 오십이나 된 것이 어린아이들 모양으로 샘을 내서 말을 할 리가 있나? 단지 집안 일이 딱해서 하는 말일세. 만일 그 계집하고 길게 두고 관계를 하다가는 그 흉측한 계집의 수단에 나중에 어찌될지 아는가? 나는 그 일이 염려가 되어서 하는 말이야. 집의 영감도 그것만은 알 만하고 똑똑도 한 양반인데 어째서 요새로 그리하는지 모르겠어. 오늘도 아침 일찌기 나갈 제도 말은 서강을 간다고 하였지마는 정녕 서강 가는 모양은 아니야. 그리고 요새로 버썩 모양도 내고, 호사도 하는 것을 자네도 보았겠지. 오늘도 서슬이 시퍼런 새 비단옷으로 입고 가시데. 언제 서강 가실 때에 그렇게 호사하고 가시는 것 보았나? 정녕 다른 데 갔느니.』

『글쎄, 정말 그러면 안 되었습니다그려.』

『저 사람은 예사로 알고 곧이듣지 않네, 정말 그러면 이 다 무엇인가? 나는 정녕 그런 줄을 아는데.』

이수일의 기색은 그 말을 조금도 곧이듣지 아니하는 듯하여 공씨는 더욱 마음이 초조하다.

『자네라도 얼핏 생각하면 내가 샘이나 나서 그리하는 줄 알겠네마는 실상 그 마음은 손톱 반머리만큼도 없네. 단지 나는 집안 하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지. 그 계집이 여간 계집인가? 어쩌자고 그런 것 하고 상통을 하는지 모르겠어.』

수일은 아무리 하여도 미덥지 못하는 모양으로,

『언제부터 그런 줄을 알으셨습니까?』

『바로 요새부터 그러하다네.』

『그러나 주인께서 설마 그러실 리는 없을 듯한데. 진정 그러하면 큰 걱정이올시다그려.』

『그러기에 내가 조용히 자네를 보고서 말을 하려고 하였던 것일세. 그러나 눈치만 알았지, 아직도 증거를 잡지 못하여서 바로 영감더러 말할 수는 없고, 언제든지 가는 데를 한 번 쫓아가서 보고 동시 포착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지마는 나는 여편네의 몸이 되어서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고, 나는 언제든지 자네더러 부탁을 하고 은근히 그 동정을 자세히 좀 탐지하여 보아 달라려고 하였더니, 이렇게 몸이 불편하여서 누워 있으니까 어디 말이나 하겠나? 그렇지만 않으면 오늘이라도 부탁을 하려고 하였더니 공교하게 일이 되었네.』

내 말대로 가서 보라고 명령은 하지 아니하나 그 하는 말이 명령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올시다. 그렇게 대단히 앓고 누워 있도록 병이 중하지는 아니하니까 무슨 말씀이든지 하시면 제 힘으로 될 일이야 못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너무 불안하지 않은가?』

『불안하다고 말씀하실 것이 아니라 어서 말씀합시오그려.』

『그러면 기운 차려 일어나겠나? 그럴 것 같으면…….』

수일이가 쾌히 허락함을 보고 공씨의 얼굴은 기꺼운 웃음을 띄우면서,

『그러면 정말 미안은 하지마는 서강까지 잠깐 다녀다 주겠나? 박보국 집에 있는 유원행씨 보러 간다고 했는데, 정말 갔든지 아니 갔든지, 갔을 것 같으면 어느 때 가서, 어느 때 돌아왔는지. 필연 내 생각에는 거기는 가지 않았을 듯하니까 그 이허(裏許)만 조금 알아 다 주게나그려.』

『아, 그것이야 어려울 것 있습니까? 그럼, 지금 곧 다녀오지요.』

하며 이수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 한다.

『아이, 여보게 걸어 나가려나? 내 인력거 하나 불러올 터이니 타고 갔다 오게.』

공씨는 급히 안으로 들어간다.

수일이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인력거 오기만 기다리고 앉았는데, 속마음으로는 신세 한탄이 스스로 나온다.

(이런 제기! 제 계집은 남에게 빼앗기고, 학교는 졸업도 못하고, 빚장이의 서사로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주인 여편네의 비밀 탐정(秘密探偵)이 되었든가.)

하며 생각할수록 홀로 하늘을 우러러 웃음 밖에 나오는 것은 없다.

저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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