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12장
이수일은 즉시 인력거를 몰아서 서강 박보국 집에 이르러 유원행을 찾았더라.
그 집은 외국 제도로 지은 집이라, 높은 곳에는 삼층 집으로 지은 집이 솟아 있고, 그 앞으로는 삼사천 평 되는 정원에 각색 나무와 화초를 심어 심수(深邃)한 경개는 가위 잠깐 동안 심산궁곡에 들어가서 있는 것 같은 감념(感念)이 스스로 일어날 만하다.
조산도 있고, 괴석도 있고, 연못도 있고, 그 사이로는 꼬불꼬불한 길이 있는데, 그 길로 좇아 한편 옆으로 행랑같이 칠팔 간 지어놓은 집이 한 채가 있으니 이 집은 즉 유원행이가 거처하는 집이라.
이 집에 이르러서는 김정연이든지 이수일이든지, 공변되이 감히 찾아서 묻지 못하고 김정연을 찾아보려 하면 은근히 그 사람이 거처하는 집으로 가서 종용히 담화할 뿐이라. 이날도 수일은 다른 사람이 알까 모를까 하며 유원행의 처소에 이르러 문 안에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본다. 그러나 바깥방에는 신발 한 켤레도 보이지 아니하고, 또는 자기의 주인 김정연의 신발도 없는지라, 수일은 혹시 그간에 김정연은 벌써 다녀갔나? 또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는가? 만일 오지 아니하였으면 과연 자기의 안주인 공씨의 말이 그러할 듯이 생각도 난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자세한 이유를 알지 못할 터이니 아무렇든 안으로 향하여 물어보리라 하고, 안으로 쓰는 방을 향하여,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쳐 부른다. 두서너 번 부르나 한참 동안이나 대답이 없더니, 바깥으로 쫓아 열사오 세나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반가이 좇아 들어오며,
『아이고, 오셨습니까? 멀리서 보고 나는 누구신가 하였지요.』
수일은 급히 모자를 벗고 인사한 후,
『아니, 여보게, 아무도 안 계신가? 오늘 아침에 우리 주인 김정연씨가 혹시 오시지 아니하였든가?』
『네, 못 뵈었는걸요. 오늘은 이 댁에 생신날이 되어서 손님도 여러분이 오시고 분주하여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모두 안에 들어가셔서 일 보살피느라고 틈이 없어요. 그러지 않아도 우리 아버지께서는 당신 오시기를 날마다 기다리시던데요.』
『그래, 우리 주인은 여기 오시지 아니하였어? 그러나 어르신네를 잠깐만 올 수 없을까? 긴히 의논할 말이 있는데.』
『그럼, 내가 가서 우리 아버지께 여쭈어볼 터이니 마루로 잠깐 올라와 앉으셔요. 잠깐 내가 다녀오리다.』
그 계집아이는 유원행의 딸이니 이름은 정희라 일컬으고 나이는 십오세라. 여러 해 동안을 저의 부친이 김정연과 이수일이는 매일 이와 같이 내왕이 빈번하고 또는 서로 정다이 지내는 고로 어린 마음에도 항상 이수일은 다른 사람보다 친절히 하는 줄을 알며, 또는 그 부친은 아무리 바쁘고 골몰하는 일이 있더라도 김정연이나 이수 일이가 온 줄을 알면 다른 일은 제치고라도 반드시 만나 보는 터이라. 그러므로 이날도 수일은 자기의 집에 앉혀 두고 그 부친을 청하러 갔더라. 수일은 홀로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혼자 생각하되,
(안주인의 청을 받아가지고 이에까지 이르렀으나 어찌한 수단으로 그 내용을 어찌 알리요.)
하며 장차 수단을 연구하며 있더니, 조금 있다가 정희라 하는 계집아이가 달음질하여 오더니 숨찬 목소리로,
『저, 가서 여쭈니까, 지금 어찌 바쁜지 여기까지 오실 틈이 없으니 저 위로 잠깐만 올라오시라고 하셔요.』
수일은 즉시 정희를 따라서 나무 사이로 이리저리 길을 좇아 한참 동안이나 나아가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반송(盤松) 아래에 정결·소쇄한 육모정 하나이 있는데 교의도 여기저기 놓여 있다.
수일은 그 정자에 기다리게 하고 정희는 그 부친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유원행의 딸 정희는 박용학의 집에서 바느질과 계집아이의 행실을 배우는 여가에 마루 위의 조촐한 심부름도 하고 있는 터이라. 이날은 특별히 새 옷을 갈아입고 여러 안손님을 접대하고 인도하는 직책을 맡았는 고로, 손님 중에 마침 정원과 집치레하여 놓은 것을 구경코자 하는 부인 하나이 있는 고로 우선 벽돌로 서양 제도로 지어놓은 삼층 집의 화려한 장식을 구경케 하느라 꼬불거리어 올라가는 층층대로 좇아 올라간다.
그 부인 손님의 뒤로는 정희가 따라 섰는데, 층층대를 반이나 올라갔을 때에 앞에 서서 올라가는 그 귀부인이 얼마큼 화려히 단장하고 극진히 사치하였는지 가만히 살펴 볼지라.
옻빛같이 검은 머리를 적도 크도 아니하게 얌전히 쪽찌어 금비녀·금귀이개를 좌우로 노르스름한 끝만 보이게 꽂았으며, 그 위에는 보석 박은 핀을 꽂았으며, 다시 그 옥결 같은 목도리는 가히 어디다 비할 데가 없다.
옥색 생고사 겹저고리에 같은 치마를 가는 허리에 둘렀는데, 치마를 왼편 팔로 접어 안고 기운없는 걸음으로 간신히 층대를 딛고 올라가는 모양은 연약한 버들가지가 가는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다.
뒤로 따라가는 정희는 이와같이 화려하고 어여쁜 태도에 눈이 홀려 좌우로 얼굴을 기울여 귀부인 모양을 보다가 다시 왼편 손에 금반지와 금강석 반지를 두 손가락에 끼어 있음을 보고 홀연 정신을 그곳에 빼앗겨 발끝에 주의치 아니하였다가 드디어 층대를 헛디뎌 모로 쾅 하고 넘어졌더라
뒤에서 정희가 넘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귀부인은 뒤를 돌아보며,
『아이고머니, 어디 다치지 아니하였어?』
정희는 넘어져서 나의 아픔보다 서투른 귀객의 앞에서 실수함을 심히 부끄러이 여겨 얼른 일어나며 얼굴은 붉어졌다.
『아니오, 관계치 않아요.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고 천연히 정희는 다시 그 부인을 인도하여 양옥 삼층 위에 이르러 회장과 창문을 열어 제끼고 가장 경치좋은 곳을 향하여 가리키며,
『여기서 구경합시오. 여기서 내다보는 경치가 좋아요.』
『참 경치가 좋아이. 색시, 강물이 바로 발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것 같애이 그려. 꽃향내도 나고 여기 꽃밭에 있는 꽃에서 나는 향내지.』
이 귀부인은 맑게 개인 하늘에 높이 삼층 위에 올라서 멀리 눈 가는 곳을 바라보고 있으매 고요한 마음은 완연히 꿈결 같다.
창문으로 좇아 비치어 들어오는 햇빛은 모로 그 부인의 몸에 비추이는데 손에 끼고 있는 금강석 반지는 영롱하게 빛이 난다.
티끌 하나 없고, 맑고 밝은 곳에 서서 있는 그 부인의 태도는 옥호에 백합꽃 한 가지를 맑은 물에 꽂아놓은 것 같아여 정희는 비록 여자이로되 그 부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정신없이 홀려 있다.
그 눈은 조그마하고 가느나 듣는 듯한 정이 가득하였고, 그 눈썹은 그려놓은 것 같으며, 그 입은 지금 피고자 하는 꽃봉오리 같아여 향기가 코에 맞추이는 듯하며, 오똑한 코는 밀가루로 반죽하여 이쁘도록 이쁘도록 만들어놓은 것 같다. 살결은 곱고 윤택하며 빛은 희고 머리는 검은데, 서양 머리를 하였다가 내려 쪽찌었는 고로 이마의 잔털도 뽑지 아니하고 천연한 태도로 지은 이마는 더욱 아름답다. 경치를 바라보고 서서 있는 모양은 바람에도 쓰러질 듯이 연약하여 보이는데, 얼굴은 적이 수척한 듯하여 적막하고 은은히 근심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와같이 이목구비에 한 가지라도 나무랄 곳이 없이 아름다운 사람은 지금껏 일찌기 본 일이 없음을 정희는 홀로 은근히 놀랐더라.
정희는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 부인을 바라보며 속마음으로는 그 귀부인의 팔자 좋은 것을 은근히 생각한다.
그 부인의 금시곗줄을 목에 걸어 들인 것과 좌우 손에 금강석 반지며 금반지를 사오 개씩 끼고 있는 것과 금비녀·금귀이개의 꽂은 것과 용모와 태도의 아름다움은 덩을 타더라도 가할 것이요, 마차를 타더라도 가할지니 뉘에게 향하여 부끄러움이 있으리요.
부덕(婦德)을 다하고 선연(嬋娟)히 태어나서 그 외에 또는 재산을 넉넉히 가진 바 됨은 하늘의 은혜, 세상의 행복을 겸하여 누리는, 이렇듯 세상에 다행한 사람이 어디 있으리요.
비록 여편네라도 이와같이 팔자를 타고나면 그 사람의 행복은 사나이보다 도리어 나으리라 하여 어린 계집 아이의 마음에 부러워하는 마음이 스스로 일어난다.
정희는 탁자 위에 올려 놓여 있던 천리경(千里鏡)을 내려 그 부인에게 보기를 권한다. 이것은 그 주인 박용학이가 동경에서 유학할 때에 사서 가졌던 것이라. 형상은 한줌 안에 들지마는 그 멀리까지 보이는 것은 가장 신기하다.
그 부인은 천리경을 받아들고 남북으로 멀리 바라보매 보이는 곳까지는 명백하여 그 물건의 정교함을 극히 놀라기를 마지 아니한다.
『여보게 색시, 저어기 강건너로 가무스름한 산꼭대기에 하이스름하게 이쑤시개 같은 것이 보이지? 그저 보면 그러한데 이 천리경으로 보니까 측량표가 완연히 보이네그려. 그 위에 솔개미가 올라앉은 것도 보이네.』
『네, 자세히 뵈지요? 천리경 중에도 이런 것은 일본에도 드물고 서양국에도 드물대요. 저도 이것을 가지고 보면 먼데 있는 것이 어찌 가까이 보이는지 말소리도 들리는 것 같아요. 말도 들리게 했으면 오죽 좋겠습니까?』
『말소리가 다 들리게 되면 사방에서 나는 말소리가 한꺼번에 모두 귀로 들어와서 복작복작하게.』
이렇듯 말을 하고 서로 함께 웃었더라.
『저는 처음에 이 천리경을 처음 보고는 우리댁 영감께 아주 깜빡 속았어요. 먼 곳에 있는 것이 바로 눈앞에 와서 있는 것같지 않느냐고 저더러 물으시길래, 네, 그렇습니다고 대답을 하였더니, 영감 말씀이 천리경으로 보고는 곧 귀에다가 대면 말소리까지도 들리는 법이니 그렇게 해보라고 하시겠지요.』
그 부인은 방긋이 웃으면서 정희의 하는 말은 듣고 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씀을 곧이듣고 보고서는 얼핏 귀에다가 대었지요?』
『그래서?』
『들리기는 무엇이 들려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길래 아니 들립니다고 영감께 말씀을 하니까, 네가 귀에다 대기를 잘못 대어서 그렇다고 하시고 영감이 손수 해서 법을 가르쳐주셨어요. 그때는 마님네, 아씨네가 여러분이 계셨었는데 모두 다 속으시고 한 번씩은 다들 귀에 대어보셨지요.』
그 부인은 참다 못하여 실소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아이고, 거짓말인 줄 아시고 자꾸 웃으시네. 그래서, 그래서 암만해도 아니 들리지요. 영감께서는 빨리 대야 들린다고 하셔서 어떤 아씨 한 분은 너무 빨리 하시다가 귓바퀴를 몹시 다쳐서 피가 다 나셨답니다.』
그 부인은 웃기를 마지아니하며 듣고 섰는데, 정희는 교의를 집어다가 부인에게 앉기를 권하고 다시 말을 시작한다.
『여러분이 아무리 들어도 아니 들린다고 하시니까, 나중에는 영감께서 친히 들어보시더니 말 아니 들린다고 하시면서 일본 있을 때는 잘 들리더니 어찌하여서 아니 들리는지 모르겠다고, 아마 풍토가 일본과 달라서 그러한가 보다고 하시니까 모두 그런 줄로만 곧이듣고 있었지요. 그렇게 속고 있기를 일 년 동안이나 지냈어요.』
손에는 천리경을 들고 귀로만 정희의 이야기를 들으매 이왕 여러 사람을 속이던 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주인 영감께서는 워낙 재미스러운 양반이시라 실없는 말씀을 잘 하시는게지요.』
『처음에 일본서 갓 나오셨을 때는 그렇게 재미스러우시더니 이삼 년째는 별로 웃으시는 모양도 뵈올 수가 없고 어찌 엄하신지 몰라요.』
그 부인은 교의에 한참 걸터앉았다가 서서히 일어나서 다시 천리경을 손에 들고 그 앞으로 있는 정원을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한편을 향하여 반송나무 아래에 육모정 있는 곳을 바라보니 그 정자 옆으로 두 사람이 서로 향하여 섰는데, 한 사람은 육십이나 넘어 보이는 반백이나 훨씬 넘은 노옹이요, 한 사람은 삼십이 넘을락말락한 젊은 사람이라. 정자 기둥에도 가리고 솔나무 가지에도 가리어서 자세히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이리저리로 가리는 물건을 피하고 젊은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이는 곧 이삼 년 동안을 두고 잊으려 하여도 잊지 못하고 은근히 마음을 태우던 그 남자의 얼굴이라. 우연히 이곳에서 그 남자의 얼굴을 보매 천리경 잡은 그 부인의 손은 홀연 벌벌 떨리어 나온다.
흐르는 물에 금을 긋는 것보다 오히려 미덥지 못한 연애는 아침 저녁과 밤과 낮을 물론하고 잠시라도 잊지 못하고 사 년 동안을 지내오던 오늘까지라도 부벽루를 비추이는 월색은 오히려 의연히 몽롱하건마는, 하룻밤에 눈물을 뿌리고 이별한 그 사람의 얼굴은 조금도 사라지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깊이깊이 맺히어 비가 오는 날이든지 바람부는 밤을 물론하고 다만 그 사람의 무사태평하기를 마음속으로 축수한다.
마음은 전일에서 조금도 변함이 없건마는, 그 사람의 쌓인 한을 받고 지내는 심순애는 이곳에 있도다. 다만 마음으로 그 사람을 생각할 뿐이요, 한 번 이별한 후에는 다시 소식을 알지 못하였더니, 그동안에 무슨 수고로운 일을 하였는지 나이는 많지 아니하였으되 그 얼굴은 초췌하여 삼십 이상이나 되어보이는도다. 곤궁하게 지내 는지 몸에 붙인 의복도 간신히 남루함은 면하였으나 전일과 같이 검소하여 그러한가, 곤란을 면치 못하여 그러한가? 어떠한 곳에 지금 몸을 의탁하여 있는지 지향없는 마음으로 천사만량(千思萬量)하매 생각할수록 가슴은 터지는 것 같다.
그 남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빙그레 웃는 얼굴이 천리경 안으로 완연히 비추이는데, 그 부인의 두 눈에서는 천리경 닿은 유리 밑으로 두 줄 눈물이 구슬같이 흘러 내려온다.
스스로 목이 메어 나오는 울음은 참기 어려워 울음소리가 입밖에 나오려 하나, 그 옆에는 정희가 있는 고로 간신히 입술을 깨물어 진정하였으나 흐르는 눈물을 할일없이 수건을 내어 씻는다. 정희는 눈물 흘리는 모양을 보고 깜짝놀라,
『아이, 왜 그리셔요?』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본대 안력이 신원치 아니하여서 무엇을 한참만 정신을 차려 보고 있으면 현기가 나고 눈물이 이렇게 흐른다네.』
『그럼, 그만 보시고 교의에 걸터앉으세요.』
『아니, 섰어도 관계치 아니하니 어렵지마는 나를 냉수 한 그릇만 떠다 주게.』
정희는 대답하고 곧 아래로 향하여 내려가려 하는 것을 다시 불러,
『색시, 아래 내려가거든 내가 현기나서 냉수 찾는다고 말하지 말고, 모르는 체하고 물만 떠가지고 올라 와.』
정희는 『녜』 대답하고 아래로 내려간 후 그 부인은 다시 천리경을 들고 그곳을 바라보더니, 솟아나오는 눈물이 눈을 가리어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천리경을 기운없이 던지고 교의에 쓰러져서 느껴가며 울고 있다.
이와 같은 귀부인은 전일의 심순애, 이수일과 평양에서 이별한 후 이미 네 번째 가을을 만났더라.
이날은 박용학의 생일이니, 그 남편되는 김중배와 한가지로 이곳에 이르렀는데, 김중배도 평양으로부터 전위하여 올라와 제반사를 주선하여 박용학은 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것을 김중배가 권하므로 지못하여 이날 생일 잔치를 배설함에 이르렀더라.
박용학은 전일 일본에서 유학할 때에도 서로 가까이 지냄은 멀리 친분이 있으므로 인한 일이라. 박용학은 오히려 김중배와 친밀히 지내기를 간절히 생각지 아니하되 김중배는 아무쪼록 박용학을 친절히 하며 가까이 상종하기를 원하는 고로, 박용학도 구태여 물리치기 어려워 서로 왕래는 있으나 결단코 마음을 허락함은 아니라. 그러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박용학은 재산이 많은 고로 일후에 그 사람을 이용할 음흉한 생각이 있어서 그러함이라 하나, 실상은 그러함도 아니오, 다만 박용학은 문벌 있고, 기구 있고, 명망 있고, 재산 있는 고로 여러 방면으로 보는 바이 있어서 친코자 할 뿐이라. 그런 고로 김중배의 친절하다는 붕우는 손꼽아 세어볼지라도 모두 주석 상의 일시적 희롱에 지나지 못하는 친절이요, 화복(禍福)을 같이하는 심교(心交)의 벗은 없는 사람이라, 김중배는 다만 붕우간에만 그러할 뿐 아니라, 현금에 한가지로 고락을 같이 하자 하는 그 아내되는 사람도 일개 비루한 영업하는 김정연의 집 서사에게 한 조각 붉은 마음을 향하여 잊지 못하는 눈물을 뿌리는도다.
순애는 이곳 교의에 의지하여 옆에 사람 없음을 다행히 여기고 울기를 마지 아니하다가 정신을 잃고 황연(晃然)히 다시 전일 부벽루 아래에서 이수일에게 발길을 맞고 넘어져서 슬피 울고 있던 시절을 다시 계속하였더라.
이때에 아랫층으로 좇아 층대로 올라오는 발자취가 울려 들리는 고로 순애는 얼른 눈물을 수습하고 천연한 태도를 짓고 벽에 걸린 그림과 사진 등을 치어다보고 있다. 정희는 물 그릇을 가지고 올라왔는지라, 받아 두서너 모금을 마신 후에 다시 창문으로 가까이 나아가서 아까 바라보던 곳을 보고 있더니 정희를 손짓하며 부르며,
『여보게 색시, 잠깐 이리 와. 저어기 정자 같은 것이 있는 곳에 웬 사람들이 둘이 서서 무슨 이야기하고 있지? 거기도 모두 이 댁에 딸린 정원인가?』
『어디요? 네에 저어기오니까? 거기도 모두 댁에 딸린 정자에요. 그리고 아래로 보이는 조그마한 집이 한 채 있지요? 그것은 저의 집이올시다.』
『그러면 색시네 집도 이 댁에 함께 딸리었구먼.』
『그 집은 모두 댁에 딸린 집이올시다. 그리고 이편 정자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늙은이가 저의 아버지올시다.』
『엉, 그래. 색시 아버지는 퍽 늙으셨구먼. 그러나 그 젊은 사람은 누군가?』
『그 사람은 새문밖 사는 김정연이라나요 하는 집 장사도 하고 돈놓이도 하는 사람의 집 서사하는 이수일이라든지요.』
『그러면 내가 잘못 보았군. 똑같은 사람도 있는 게야.』
하며 순애는 그곳을 바라보기를 마지 아니한다.
『새문밖 어디 사는 사람인구?』
하며 아직 세상 일을 분간치 못하는 정희를 달래어 자세한 동리 이름까지 묻고자 한다.
『새문밖 냉동이래요.』
『그런데 그 사람이 색시 집에는 가끔 오나?』
『네, 종종 옵니다.』
이 말을 들으매 순애가 비로소 이수일이가 새문밖 냉동 김정연의 집에 몸을 붙여 있는 줄 알았는 고로 이후에는 어떠한 기회를 타든지 한 번 만나보리라 하여 세상에 다시 없는 한 개 보배를 얻음보다도 더욱 기꺼운 마음이 난다.
한 번 이별한 후로는 만나 보기는 바라지도 못하려니와 소식까지 돈절하여 생사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라, 하늘에 빌고 부처에게 기도하더라도 힘이 능히 미치지 못할 오늘날 우연히 이곳에서 얼굴을 보고 주소까지는 알았으나, 홀로 바라보고 또한 다시 이별함은 진정으로 본심이 아니라. 비록 그 사람의 눈총을 만나더라도 서로 얼굴을 향하여 인사는 서로 바꾸지 못하더라도 두 사람이 서로 보고 얼굴이라도 알아보면 하여 삼 년 동안 사랑에 주렸던 순애의 마음은 초조하기를 마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남이 이상히 알까 두려워한 다. 남은 알지 못하고 다만 내 한몸에 수치가 되는 것 같으면 얼굴에 침을 배앝는 일이 있더라도 오히려 싫다 하지 아니할 마음이로되, 우연히 만난 일은 이 기회를 놓치기 어려우나 서로 만나보는 날은 오늘로 질정함이 아니라고 초조한 마음을 억지로 진정하면서도 오히려 정희를 달래듯 하여 정원을 구경코자 한다. 이때에 박용학과 김중배와 그 외에도 여러 빈객은 모두 한편 객실에 모여 술상이 벌어졌는데, 순애는 정희를 데리고 조용히 협문으로 좇아 남모르게 수목 사이로 몸을 숨겨가며 외면으로는 정원을 구경한다 하나 마음으로는 자연히 정자를 향하여 발길이 나아간다.
(그 사람이 지금 저 정자 앞에 있는 것을 보았으니 그 동안에 설마 이 문 밖을 나지는 아니하였으리로다. 만일 이곳에서 서로 만나면 한편으로는 반갑기는 하려니와 또한 가슴이 놀라우리니, 그때는 나의 몸을 어찌 처치하리요.)
하고 화초를 구경하려는 마음은 꿈결에도 없고, 정희의 뒤에 따라오며 이것 저것 가르쳐주며 하는 말은 조금도 귀에 들려오지 아니하고 가슴만 두근두근한다.
정원을 구경하자고 나오던 귀부인이 구경을 하고자 하는 모양은 조금도 보이지 아니하고 고개를 숙이고 혼자 무슨 말을 하는 듯, 또는 놀라는 듯하며 근심에 싸여 걸어가는 모양을 정희는 이상히 보았던지,
『그저 기운이 좋지 못하셔서 그러십니까?』
『아니, 지금은 아무렇지도 아니하나 가슴이 조금 울렁울렁하여서 그래.』
『아이고,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셔서 조금 누우셔서 진정을 하시지요.』
『아니, 관계치 아니해요. 방안에 들어앉았는 것보다 이렇게 바람을 쏘이고 행기(行氣)하는 것이 나아요.』
(이 길로 나아가다가 만일 그 사람을 서로 만나보면 피하려 하여도 좁은 길에서 능치 못할 터이요, 정녕코 어깨를 스치고 지나갈 터이니, 만일 이 뒤에 따라오는 사람만 없을 것 같으면 나의 진정으로 바라는 원이로되 아무리 지각없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남의 이목 이 있는데 어찌하리요. 나의 마음은 서로 만나더라도 모르는 사람 같이 천연히 하려니와, 그 사람을 만나서 어찌 놀라운 마음이 나지 아니하리요. 본대부터 이 몸으로 하여 한을 머금고 있는 사람이 비록 만나더라도 그 사람이 나더러 말을 하고자 하지는 아니하리라 생각하되, 아무리 생각하여도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 같이는 피차에 지나지 아니하리로다. 그 사람은 순애를 이곳에서 만나보면 그 놀라는 모양이 어떠하며, 원수를 만난 것같이 그 사람의 분통한 마음이 어떠하리요. 그 사람이 이 몸을 보고 분노하는 기색을 정희가 만일 보면 이 몸을 얼마큼 괴이히 여기리요?)
이와같이 여러 가지 생각이 가슴 속에 왕래하매 마음은 더욱더욱 수고롭고 걸음은 스스로 내키지 아니한다. 옆으로 빠져나가는 다른 길이 있으면 몸을 피할까 하고 정희더러 다른 길이 없느냐 물으매 따로 길이 없음으로 대답하는지라, 할일없이 사지로 들어가는 줄을 알면서도 스스로 그곳을 즐겨 향하여 감을 뉘우치고 진퇴를 어찌할 줄 모르는 순애의 얼굴은 점점 변하여 잿빛과 같이 된다. 옆으로 따라가는 정희는 귀부인의 기색을 살피기를 마지 아니한다.
순애는 정희가 자기의 행동을 이상히 여기는가 하여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걸음도 빨리하여 연못을 지나 육모정이 가까와지매 순애는 더욱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이곳만 무사히 지나가면 하는 생각에 빨리 그곳을 지나고자 하는 때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무 사이로 보이더니 홀연 칠팔 간 동안 되는 곳에 사람의 형체가 나타난다. 이때에 순애의 눈은 별안간에 그믐밤을 당한 것 같고 가슴 속에서는 방망이질을 한다.
이수일은 일로 좇아 돌아가서 주인의 일을 공씨더러 잘 꾸며대어서 일후에 확실한 증거를 잡은 후에 일을 처단함이 가하리라 생각하며 중절모자를 눈썹 위에 깊이 눌러 쓰고 걸음을 총총히 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홀연 앞으로 향하여 오는 두 사람의 여자는 수일의 눈에 띄었더라. 한 사람은 익히 보던 유원행의 딸인 줄 알았으나, 얼굴을 가리우고 찬란한 의복으로 귀부인 한 사람은 그 집에 다니러 왔던 부인 손님인가 하였을 뿐이라.
한편으로는 가고 또 한편으로는 오는 고로 서로 한 간 동안이나 격하여지고 수일은 정희를 향하여 가노라 하는 뜻으로 은근히 인사하는 것을 순애는 길 옆으로 바싹 비켜 돌아서서 가만히 옆눈으로 흘려보았더라.
그 얼굴빛은 박꽃이 달 아래에 비추이는 것 같아 그 참담한 기운은 외모에 나타나나 어느 곳이든지 익히 보던 사람의 모습이 있는 것 같다.
길 옆으로 비켜서서 있는 순애의 다리는 벌벌 떨리고, 가슴은 두근거리며 지금에 터질 듯하다. 몸의 떨리는 모양을 남에게 보일까 하여 억지로 진정할수록 더욱 다리는 떨리고 가슴은 두근거리며 눈물에 어리운 눈으로 수일의 얼굴만 운무중같이 보이고, 그 몸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수일은 모자를 다시 고쳐쓰고 지나가려 할 즈음에 우연히 지나가는 눈에 잠깐 그 귀부인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 그 부인과 서로 얼굴을 마주쳤더라. 수일은 비로소 그 얼굴을 알아보았더라.
『아! 순애로다. 간부(姦婦)로다. 돈동록 냄새가 촉비하는도다』
하며 처음은 놀라고 또는 분기 탱중하여 흘겨보는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여 만만한 손으로 훔켜잡을 듯이 살이 떨려나오는 것을 이를 악물고 간신히 참았더라. 반가움과 부끄러움과 슬픔이 함께 모여 있는 순애의 가슴 속은 어느 곳에다가 비유할 곳이 없고, 남의 이목만 없으면 그 사람을 붙들고 매달리어 내 가슴에 있는 회포를 마음대로 원정(原情)을 하련마는 마음만 수고롭고 이 몸은 마음대로 되지 못하니, 어찌하면 내 마음에 있는 진정을 저 사람에게 통하여 주리요. 다만 수일을 향하여 옆으로 바라보는 눈에는 한없는 마음이 머금어 있듯 할 뿐이라.
수일은 홀연 다시 달음질하듯이 걸음을 하여 지나갔더라.
순애는 자기의 얼굴을 정희가 볼까 하여 고개를 돌이키고 발끝만 바라보며 걸어간다.
정희는 수일과 순애의 하는 모양을 보고 자세한 이유는 알지 못하나 대강 괴이한 일을 생각하였는지 귀부인의 얼굴이 심히 변한 모양을 알건마는 다시 묻지도 아니하고 한참 동안이나 따라가다가,
『인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신색이 어디가 아프신 어른 같습니다그려.』
『그렇게 얼굴빛이 달라졌나?』
『아주 핼쓱하였습니다.』
『그렇게 얼굴이 변하였어? 그러면 저리로 돌아서 정자에 가서 잠깐 구경이나 하고 가세. 우리는 신기가 불편하면, 이렇게 바람을 쏘이면 좀 나으니까 천천히 들어가세. 오늘은 색시를 너무 끌고만 다녀서 너무 불안하이.』
『아니, 천만의 말씀을 하십니다그려.』
순애는 무명지에 끼었던 금반지 한 개를 빼어 정희의 손을 붙들고 끼어 주며,
『색시, 이것은 변변치 아니한 것이지마는 줄 것이 없으니 이거나 끼어두게.』
정희는 놀라기를 마지 아니하며,
『아니, 이것은 왜 주셔요?』
『그렇게 사양하지 말고 끼어 두게. 아무더러라도 이것을 내가 주더란 말은 하지 말게.』
정희는 몇 번을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받아 끼었더라.
순애는 다시 천연한 기색을 지으나 우연히 만나본 수일의 얼굴은 가슴 속에 새긴 것 같아여 잊으려 하여도 잊기 어려우며 사년 동안을 가슴 속에 쌓이고 쌓였던 생각이 오늘은 더욱 가슴 속에서 불일 듯 일어나며 금키 어려운 고통은 가슴이 터질 듯하다. 만일 내 집에 있어 이러한 일을 당하였으면 마음대로 울기라도 하였으련마는 이목이 번다한 남의 집에 와서 억지로 사람을 대하며, 억지로 웃으며, 억지로 쾌락한 기색을 짓고자 함이 진실로 괴롭고 심란하여 기운을 차리자 하는 모양이 스스로 고개는 기운없이 앞으로 수그러진다.
연못을 다시 내어놓고 화초나무 사이로 간신히 육모정 있는 곳까지 이르러 교의에 털썩 주저앉으며 길게 한숨을 한 번을 짓는다.
이때에 뒤로서 사람의 급히 달려오는 발자취 나더니 집 하인이 쫓아오며,
『아이그, 여기 계신 것을 그렇게 사방으로 찾으러 다녔습니다그려. 안에서 마님께서 들어오시래요.』
순애는 이곳까지 이르러서는 마음을 진정하려 하였더니 진정은 되지 아니하고 도리어 괴로운 심사를 진정치 못하여 정신없이 앉아 있다가 계집 하인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놀라 몸을 일어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다가 홀연 기색하여 땅에 펄썩 엎드러진다.
계집 하인 두 사람은 간신히 귀부인을 구호하여 정신을 차린 후에 좌우로 부축하여 내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