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13장
춘흥을 못이기어 죽창을 반개하니 저녁 이슬 붉은 꽃 날아드는 범나비야, 네 기상 좋을세라. 아침안개 푸른버들 왕래하는 꾀꼬리야, 네 모양 묘할세라. 고개를 건든 숙녀 방중을 돌아보니 금준미주는 춘색이 영롱하고, 옥안 미인은 추파가 은근하다. 유정한 사람 무정한 물건이 춘흥에 함께 겨워 태평기상이 완연컨만 알지 못게라, 이 봄이 장천이랴. 절기도 내 몰라라, 쾌락이 장구하랴. 내일도 내 몰라라.
장좌성(張佐性)이라 하는 사람은 전일에 시골 있을 때든지 서울 올라와 학교에 다닐 때든지 성품이 온공정직(溫恭正直)하여 붕우간에도 일컫던 사람이라 학교를 마친 후에 어떠한 회사에 근무(勤務)하여 상당한 보수(報酬)를 받는 터이라. 그러나 오히려 삼백 원의 돈을 고변(高邊)으로 얻어 쓰고 항상 채권자에게 졸리어 곤란받는 일은 그 친구되는 여러 사람들도 모두 아는 바이라. 그러나 여러 사람은 무슨 연고로 그와같은 돈을 취하여 썼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였더라. 어떠한 사람은 친구와 교제하느라고 진 빚이라는 사람도 있고, 어떠한 사람은 장가들 제 진 빚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로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 실상 내용을 탐지하여 보면 실상은 장솨성이 직접으로 썼던 돈이 아니라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어떠한 사람의 채무에 보증으로 연대채무(連帶債務)에 인(印)을 찍었더라. 그 후에 채무자는 채무를 이행할 힘이 없어지고, 채권자는 다만 연대채무자 장좌성을 독촉하여 곤란한 경우에 있는 것을 다만 사정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그 친구에 신장우(申章雨)와 조병권(趙秉權) 두 사람 뿐이라.
대범(大凡) 비싼 변리라 하는 것은 목마른 사람에게 물 파는 것과 같은 것이라. 만일 목마른 자가 아니면 달게 여겨 구하지 아니하느니, 목마름이 심한 자에 이르러서 조금도 사양치 아니하고 한 잔 물이 그 값은 옥로반(玉露盤)의 이슬보다 더욱 많으나 기갈이 심하여 전후를 돌아보지 못하게 되는 사람은 능히 이와같은 무전대금이라도 꿀과 같이 여겨 사는 사람이 있을지라. 처음에는 비록 옥로수(玉露水)와 같이 알고 사서 먹는 사람이라도 그 후에 이르러서는 수채구멍의 썩은 물보다 더욱 더러운 물인 줄을 깨달으나 이미 지은 일을 뉘우치나 미칠 곳이 없고, 나중에 이르러서는 살을 베고 피를 짜서 그 옥로수의 값을 갚지 못하면 아니될지라.
슬프다! 이 세상에 가장 몹쓸놈은 고변으로 돈놓이 하는 사람이요, 그와같은 고변을 달게 여기어 쓰는 놈도 더욱 몹쓸 사람이라. 그러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장좌성은 이렇듯 혹독하고 심한 채무를 몸에 지고 날로 가혹한 형벌을 받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이렇듯 불행에 빠졌으니 홀로 근심하고 남을 원망치 아니하는 사람이라.
이날 신장우와 조병권은 장좌성의 집을 찾아왔던 터이라. 마음을 서로 허락하는 세 사람은 술을 벌여놓고 회포(懷抱)를 서로 이야기한다. 신장우는 술잔을 서너너덧 번이나 기울인 후에 붉고 더운 기운이 얼굴에 가득히 올라 자기의 있는 기염(氣炎)을 홀로 토로(吐露)하며, 조병권과 장좌성도 술이 반취나 되었는데, 서로 권하며 서로 마실 때에 이 자리에는 천하에 다시 영웅은 따로 없고, 이 세상에 두려운 것도 또한 있지 아니한 것 같다. 그러나 홀로 주인 장좌성은 즐거워하는 사이에도 간간이 심란하여 한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주인의 곤란한 심사를 자세히 아는 고로 구태여 묻지도 아니하고 강잉히 즐거움을 구하여 하룻동안을 즐거이 지내려 함이러라.
이때에 밖으로서 사나이 하인 하나이 들어오더니 주인 장좌성은 여러 손과 한가지로 주안을 벌이고 있음을 보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말을 할 듯하다가 손이 있음을 꺼리는 모양 같은지라, 장좌성은 무슨 일이 있는가 하여 밖으로 나오며,
『너 왜 들어왔니, 무슨 일이 있니?』
그 하인은 목소리를 나직이 하여,
『서강 김정연이 집에서 또 왔어요.』
『지금 와서 있다는 말이냐?』
『지금은 손님이 계시니까 다음에 오라고 하여도 도무지 듣지 아니하고, 오늘은 꼭 뵈와야만 하겠다고 가지 않고 문간에 서서 있어요.』
장좌성은 그 하인의 말을 듣더니 홀연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이 미우에 가득하여 밖으로 나가보기도 어렵고 아니 보기도 어렵고 좌우가 난처하여 다만 머리만 긁고 있다.
방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손은 벌써 주인의 기색을 살펴보고 마루로 향하여 내다보며,
『여보게, 왜 그러나? 무슨 일이 있나?』
장좌성은 허허 웃고 방으로 다시 들어오며,
『하필 오늘 빚장이가 또 왔네그려. 취리하는 놈 중에도 어디서 도무지 말 못할 놈을 얻어 만나서 경우도 없고 인사도 없고 돈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찰거머리야.』
『그러면 어떻게든지 수이 말을 하여서 보내게나그려.』
『여간 말을 해서 듣고 갈 놈 같으면 좋겠지마는 한 번만 그놈에게 붙들리기만 하면 돈을 내기 외에는 당초에 가지 아니하니까 그래서 걱정이지. 오늘까지 벌써 몇 번을 왔는지 모르는데.』
신장우는 술기운이 얼굴에 알맞추 올라서 남하고 말하기 좋을 만하다.
『그렇지마는 좌우간 어떻게든지 말을 해서 보내야지 아니하나? 이리로 불러들여서 사이에 문을 닫고 웃간에서 이야기하여 보내게나. 정히 그놈이 아니 듣고 가지 아니하면 우리라도 조력을 하여서 줌세.』
장좌성이 머리만 득득 긁으며 얼굴을 찌푸리고 한참이나 대답이 없더니 할일없는 모양으로 종용히 그 하인을 눈짓하여 들어오라 말을 이르고, 사이에 있는 장지문을 닫치고 장좌성은 홀로 웃간에 앉아 빗장이의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조금 있더니 모직 두루마기에 중절모 쓰고 손에는 조그마한 가방 하나를 들고 천천히 들어오더니 댓돌 위로 올라서며 방안에 있는 주인의 얼굴을 보고 가벼히 인사한다.
장좌성은 억지로 반가이 하는 듯이 일어나 인사하며,
『어서 들어오시오. 이렇게 여러 번 수고하고 다니시니 너무 불안하구료.』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수고가 무엇이오니까? 내 일로 내가 다니는 것을…….』
하며 웃는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인사도 다 마치지 못하여서 먼저 돈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글쎄, 요전부터 말씀한 것은 어찌하실 터이오니까? 차일피일하고 아니하여 주려고만 하시니 그리 해서야 돈 주고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날마다 와야 일상 아니 계시다고 딱 기만하시더니, 대관절 어찌하실 의향으로 그리 하시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든지 그저 갈 수 없소.』
장좌성은 속으로는 분이 불꽃같이 일어나나 빚진 죄인이라고 간신히 참고 음성을 나직이 하여,
『요전부터 노형이 하시는 말씀은 정말 내가 대답할 수 없소. 돈으로 말하면 전수이 내가 쓴 돈도 아니오, 친구의 수형에 내가 보증만 하였을 따름인데, 지금 와서는 그 채무를 전수이 나더러 지고서 수형도 내 수형으로 다시 써서 달라니 아무리 친한 친구간의 일이라 하기로 억지의 일을 하라고 하면 내가 어찌 허락을 할 수가 있소? 아무리 빚놓이하시는 양반이기로 억지의 일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시리 조르면 어찌하자는 말씀이요.』
이때에 아랫간에서 숨도 크게 쉬지 아니하고 앉아 있던 신장우와 조병권은 죽은 듯이 서로 말이 없이 조용히 앉아서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수작하는 소리를 듣고 있더니, 조병권은 사이에 닫혀 있는 문틈으로 엿보아 동정을 살피다가 홀연 아랫목으로 얼른 내려오며 신장우를 향하여 가만히 말을 한다.
『아, 여보게, 빚 받으러 온 놈이 나는 누군가 하였더니 우리 학교에 같이 다니던 이수일일세그려.』
신장우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는 모양으로 눈을 둥그렇게 뜨며,
『그래 정말인가? 바로 이수일이란 말인가?』
『이 사람아, 문틈으로 자세히 내다보게나그려. 내가 잘못 보고 하는 말인가? 전부터 이수일이가 학교에 나온 후부터는 취리판으로 나돌아 다닌단 말은 들었지마는 색시같이 고운 성품으로 빚놓이를 어찌 하는가? 알 수 없는 말이라고 믿지 아니하였더니, 오늘 보니까 정말 그 말이 옳던 것일세.』
신장우는 오히려 의심하기를 마지아니하며 몸을 일어 문틈으로 한참이나 내다보더니, 과연 이수일이가 분명하던지 고개만 끄떡끄떡하며 내심으로는 무슨 결단한 바가 있는 것같이 옆에 치워놓았던 술상을 잡아당겨 술 두서너 잔을 한 번에 연하여 기울이고,
『그러나 여보게, 이수일이가 온 것이 오히려 다행일세. 이전에 서로 친근히 지내던 덕분으로 우리가 저리로 나아가서 한 번 단판을 하여보세. 우리가 말하면 제가 아무리 도척같이 되었더라도 설마 못한다구야 할 수가 있나? 이번에 다행히 기회를 잘 만났으니 좌우간 주인의 채무를 어떻게든지 결말을 내어주세. 이수일이 같으면 조금도 겁날 것이 없네.』
하며 옷을 다시 고쳐입으며 허리띠도 돌라맨다. 조병권은 깔깔 웃으면서,
『바로 큰 싸움이나 허러 가는 것같이 몸 단속을 하네그려.』
수일은 힘도 들이지 아니하고 조르는 말로,
『결단코 당신을 괴로이 조르느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변리는 주지 아니하시고 명의환서(名義換書)도 하여 주지 아니하시니 여간 돈냥 가지고 취리하는 놈이 버티어 나갈 수 있습니까? 오늘은 좌우간 결말을 내주셔야 하겠습니다. 명의환서를 한다 하여도 당신께 물려받자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명의만 빌려줍시사 하는 말씀이올시다. 당신으로 말씀하여도 친한 친구의 일에 그만 일도 못 보아주시겠다구야 말씀이 됩니까? 그만 일은 대답하실 듯하오이다그려. 우리가 당신은 신용하는 까닭으로 당신의 명의만 빌려주실 것 같으면 제가 집에 돌아가서라도 주인에게 대하여 할 말이 떳떳하오이다. 그렇지만 일후에 당신의 명의로 있으니까 당신에게 물리겠다는 생각으로 하는 말씀은 아니올시다. 그러하니 오늘은 정말 귀정을 내어주십시오. 저도 정말 다니기가 귀치않습니다.』
장좌성은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헐 수 없소, 그것은 정말 할 수 없소.』
『그렇게 못한다고 하시면 저희는 어찌하라는 말씀이오니까? 정 그리하시면 헐 수 없는 일이니까 당신 신분에 관계가 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최후수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후수단이라니, 어찌하겠다는 말이요?』
『무론 집행할 것 아니오니까?』
장좌성은 억지로 얼굴에는 웃음을 띄웠으나 심중으로 그 말이 반갑지 못하여 다소간 겁 있는 모양으로 윗수염만 좌우로 비비고 앉아서 대답이 없다.
『삼백 원쯤 되는 돈으로 하여서 당신의 명예를 상케 하여 전정에 방해가 되게 하는 일은 저희도 결단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올시다마는, 제가 청구하는 말씀을 들어주지 아니하시면 그때야 당신보다 더한 양반이라도 할 수 있습니까? 연고로 일이라 하는 것은 은편(隱便)하게 하는 것이 피차에 이익이 아니오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글쎄, 나도 어디까지든지 절대적 명의환서를 하여주지 못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노형의 요구하는 말은 본전 삼백 원에 일 년 동안 변리를 쳐서 모두 구십 원을 합하면 삼백구십 원 하고 그 외에 가변이 일백칠십 원 몇십 전이라니, 모두 합하면 오백 원 돈이나 되는데, 고것을 합하여 오백 원 증서를 내 명의로 하여달라니 한 푼도 나는 쓰지 아니한 돈을 변상가변을 하여서 나더러 표를 써놓으라니 너무 억울하지 않소. 노형도 내 몸이 되어서 좀 생각을 하여보시오. 한푼도 쓰지 않은 돈을 표를 하여놓으라면 어떠하겠소, 누구는 좋아하겠소?』
수일은 천정을 치어다보고 냉소(冷笑)한다. 장좌성은 은근히 분함을 참지 못하여 수일의 얼굴을 옆으로 흘겨보고 있다.
장좌성은 할 수 없는 경우를 당하여 어떠한 사람의 보증을 섰더니 불행히 그 사람이 채무를 이행치 아니한 연고로 이날 이와같은 곤란을 당할 뿐 아니라 명의환서한 후에 다시 어떠한 사람이든지 보증을 세우라 하여 남의 채무를 자기에게로 넘기고자 한다.
그러나 자기의 실책으로 남을 위하여 보증한 허물로 이 경우를 당함은 오히려 당연하려니와, 내가 만일 증서를 하여놓고 남으로 하여금 보증을 세웠다가 그 사람 또한 나와 같은 곤란을 받으면 어찌하리요 하고 수일의 무리한 청구는 거절하였더라.
그러나 그 청구를 시행치 아니하면 당장에 변리라도 주어야 될 것이어늘 그도 창졸에 실행키 어려우니 이는 진소위 진퇴유곡이라.
장좌성은 그물에 걸린 몸과 같아 한 치 앞으로도 몸을 뛰어나가기도 어렵고 금부차사 같은 흉악한 빚장이는 목전에 앉아서 핍박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가슴 속에는 분기 탱중하나 감노이불감노(敢怒而不敢怒)하여 터져나오는 노기를 간신히 진정하며,
『내가 오늘로 한한 일도 없는데 어찌하여서 오늘 와서 재촉이 이다지 심하단 말이요.』
『지난달 스무날이 한한 날인데 한이 넘어서 벌써 며칠이 지나도 보내지 아니하니까 아무 날이든지 재촉할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장좌성은 그 말에 와락 분이 더욱 치밀어 올라와서 두 주먹을 잔뜩 쥐고 벌벌 떨다,
『무엇이야, 기한이 지냈으니 아무 날이든지 재촉할 권리가 있다? 권리라 하는 것은 다 무엇이야, 주제넘게. 그러면 어찌하여서 기한 날에 돈을 못내니 연기료(延期料)라고 따로 내라고 하여 그 돈은 어찌하여 받아가고 지금 와서는 다시 또 딴 소리를 하오.』
『언제 내가 연기료라고 받았습니까? 기한날 돈을 주지 아니하니까 공연히 왔다갔다 한 인력거 삯과 그 당일 점심값으로 받아간 것이지요. 만일 연기로 받아갔다 하더라도 그날 당일 연기료로 받은 것이지, 그 돈 받았다고 며칠이든지 참고 있겠습니까? 생각을 하여보시구료.』
『그 말은 어떻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소마는, 요전에 기한날이 되었을 때에 변리중으로 우선 십 원만 주마 하니까 노형 말이 변리중으로 낼 것이 아니라 오늘 돈을 다 내지 못하겠거든 며칠 더 참아줄 터이니 연기료로 달라고 하여서 받아가지 아니하였소? 그리고 일전에 또 십원을 받아갔지…….』
『네, 그랬습니다. 돈은 정녕 받아갔습니다마는 지금 말씀한 것과 같이 그 돈은 그 당일에 공연히 왕래한 인력거 삯과 그날 점심값으로 받아갔으니까, 그날 하루만 지나면 그만 아니오니까? 그러하니까 그날 하루만 지나면 그 이튿날부터는 다시 재촉하여도 당신이 할 말씀 없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왕 지난 일 말하여 무엇합니까?』
『어찌하여서 지난 일을 말하지 말라 하는 말이요 노형은 내게 해로운 말은 하지도 말라 하는 말이오그려. 그래도 나는 말 아니할 수도 없소.』
『글쎄, 오늘은 그 일로 온 것이 아니니까 그 말씀은 그만두고, 지금 당장에 돈을 달라고 하는 말도 아니니 수표나 당신 이름으로 고쳐 써서 주시구료.』
장좌성은 분기가 미우에 가득히 올라 있으며,
『암만하여도 나는 할 수 없소!』
『그러면 돈도 못 주시겠소?』
『없으니까 못 주겠소.』
수일은 홀연 노기가 등등한 눈으로 장좌성의 얼굴을 치어다보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분을 머금고 대하여 앉아 있을 뿐이니 조금만 다시 격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구타하는 지경에라도 이를 듯하다.
그때에 홀연 사이에 닫혀 있던 장지문이 부시시 열리는데 수일은 눈을 들어 우연히 치어다보니 신사 두 사람이 서서 들어오는지라, 조용히 두 사람이 앉아 비밀히 이야기하는 곳에 외인 두 사람이 통기도 없이 스스로 들어옴은 필연 무슨 일이 있음이라 하여, 수일은 다시 자리를 고쳐앉으며 말이 없는데, 두 사람은 두루마기를 헤치고 좌우로 갈라 앉으며 천천히 입을 열어,
『아까부터 문틈으로 보느라니까 얼굴이 대단히 익더니 지금 자세히 본즉 자네가 이수일이 아닌가?』
조병권은 신장우의 말이 그치며 수일을 향하여,
『그 동안에 얼굴이 어찌나 변하였는지 나는 처음에는 몰라보았네그려. 우리가 얼마만에 만나는가?』
수일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다시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비로소 그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깨달았든지 홀연 얼굴이 붉어지며,
『이것 참, 웬일들이시오? 나도 누구신 줄을 몰랐구료. 오랫동안 우리가 못 만났지요마는, 연고들은 없으시오?』
전일에는 서로 벗을 하던 터이러니 이날은 홀연 수일이가 두 사람에게 대하여 극진히 존대함을 보고 조병권은 또한 자기도 언사를 고쳐,
『그래서 그 동안 재미가 어떠하시오? 들으니까 요사이는 상업에 종사를 한다지요? 그래서 돈이나 많이 벌어 계시오?』
수일은 천정을 향하여 허허 웃으며,
『모으기는 무엇을 모으겠소? 지각이 없어서 이것을 시작하였지요.』
하며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음을 보고 두 사람은 은근히 기가 막히는 모양으로 신장우는 수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건너다보며,
『돈만 생기면이야 무엇을 못하겠나? 그렇지마는 자네같은 성품으로 이런 영업을 해가는 것이 용한 일일세.』
『노형 말씀이 옳은 말씀이요. 사람으로는 할 일이 못 되지요.』
조병권은 비웃는 모양으로,
『그러면 자네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말인가?』
『나같은 놈이 무슨 사람값에 가겠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사람 노릇을 할 수가 없겠기에, 학교를 그만두고 나올 때에 사람 노릇까지 그만두고 나와서 이 영업을 시작하였소.』
신장우는 깔깔 웃으며,
『그러나 여보게! 이전에 자네가 정말 사람으로 있을 때 우리가 한가지로 정답게 지내던 생각을 하고 다시 한 번 사람이 될 생각을 하여보게나그려.』
수일은 짐짓 못들은 체하며 다시 주인 장좌성을 향하여,
『공연히 쓸데 없는 딴 이야기 하느라고 시간만 늦어가니 어서 수형에 당신 도장이나 찍어주시오?』
하며 수일은 가방 속으로서 수형지(手形紙) 한 장을 내어서 손에 들고 먹과 붓을 내어 금액을 쓰고자 한다.
옆에 앉아 있던 신장우는 수일의 붓대 잡은 손을 쥐고,
『여보게 잠깐만 참게, 그 수형은 어떤 까닭으로 쓰는 것인가?』
수일은 쓰기를 멈추고 자세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였더라.
『응, 옳지, 그 말 다 알아듣겠네. 그러나 내가 말 한 마디 할 것이 있네.』
하며 신장우는 궐련 한 개를 내어 피워물고 세계전쟁의 강화단판이나 할 듯이 점잖이 다시 자리를 고쳐앉으며,
『여보게 수일이, 주인 장좌성의 채무로 말을 하면 아무쪼록 특별히 좀 하여주게. 자네도 이생생리하는 터이니까 자네에게인들 손해야 가게 하겠는가? 전일 친구의 낯을 보아 한 번만 용서하게나그려.』
수일은 아무 대답이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
『그래, 어떠한가? 여보게 수일.』
『용서를 하라니 어떻게 하는 말씀이요?』
『가령 말하면 자네게 해만 가지 아니할 것 같으면 조금 감해달라는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이 주인의 빚이라 하는 것은 실상 자기가 쓴 돈도 아니오, 남의 보증 하나 섰다가 그 사람이 이내 내게 되지 못하니까 돈 준 사람으로 말을 하면 채무자가 내지 아니하면 보증인에게 받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마는, 우리가 그것을 구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간에 정의로 이 주인의 사세를 생각하면 대단히 원통하고 가엾다하는 말일세. 그러나 우연히 자네를 여기서 만났으니까 우리가 사이에 들어서 피차에 해롭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전 우리 친구 자네에게 억지의 일이지마는 청을 하자고 이리 하는 말일세. 들으니까 본전 삼백 원에 대하여서 정말 돈 쓴 사람이 그 동안에 변리로 이백칠십 원을 내놓았다 하고, 이 주인이 또 구십 원 돈이나 냈다 하니 그만하여도 벌써 삼백육십 원은 자네가 받아간 것이 아닌가? 그리하면 자네는 그만하여도 해 되지는 아니하였겠네그려. 그러하니 이 주인에게는 본전 삼백 원이나 받아가도록 하게.』
수일은 대답도 없이 다만 탄식하는 모양으로 웃기만 할 뿐이라.
『그렇게 하면 이 주인은 삼백구십원만 내놓는 셈이요. 자네는 전후 도합이 육백육십 원 받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자네는 손해날 것도 없고 주인은 한푼도 써보지도 못하고 삼백구십원을 물어놓는 것이니 아무리 취리하는 사람이기로 사정이야 모르는 법이 있나. 조만히 생각하여서 피차에 좋도록 하게.』
『그것은 당초에 말이 안되니까 들을 수 없소.』
하며 수일이 두 사람의 말을 귀치않이 여기는 모양으로 다시 돌아다보지 아니하고 수형에 금액(金額)을 쓴다.
신장우·조병권은 노한 눈으로 그 모양을 이윽히 보고 있는데 수일은 수형의 연월일까지 쓰기를 마치고 장좌성의 앞으로 향하여 놓으며,
『여기 성명 아래에 도장 하나 찍어주시오. 기한은 십육일로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수일의 방약무인하게 행동을 가지고, 전일 친구의 권하는 말은 귀 밖으로 듣지도 아니하고 돈만 가지고 이야기함을 밉게 보았다가 다시 노기를 이기지 못하여 음성을 높이고 눈을 부릅뜨고 신장우는 수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 앉으며,
『가만히 있어. 도장이 다 무엇이냐! 네놈은 도무지 돈셈만 할 줄 알았지, 친구의 얼굴은 조금도 돌아보지 아니하는 무례한 놈이다. 무슨 영업이든지 영업하는 놈은 제 자격을 생각하여서 누구에게든지 공손하여야지 도둑질을 하다시피 하는 부정한 영업을 하면서 오늘같이 구일 친구를 만나야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은 없고 도리어 승전고나 울린 것같이 거만을 부린단 말이냐? 돈냥이나 가지고 빚놓이하는 것이 큰 명예나 되는 줄로 알고 있니? 사람이 부끄럼을 알아야지. 수표 한 장을 가지고 장한 것이나 되는 듯이 우리까지 멸시를 할려고 네가 그리하여! 이 모양을 백낙관이나 보았드면 좋았을 것을…… 네놈같이 짐승같이 마음이 변한 것을 그래도 백낙관이는 역시 전일의 이수일이로만 생각하고 일전에도 나를 만나서 네 소식을 못 들어서 궁금하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친 아우 죽인 것보다도 더 섧다고 심란하여서 못견디어 하더라. 이런 말을 듣더라도 조금이라도 사람의 양심이 있으면 깨닫는 일이 있을 터이지…… 우리가 아무리 하여도 너같은 놈에게 손해는 입히지 아니할 터이니 오늘은 아무 소리 말고 그대로 가거라.』
『받을 것을 받아야지 가지요. 당신네가 그닥지나 장좌성씨의 일을 보아주시러 하거든 장좌성씨 수형에 당신 두분은 보증을 서주시면 오늘은 그대로 가겠습니다.』
신장우는,
『그러면 우리가 보증하마.』
하며 장좌성의 앞에 놓여 있던 수형을 솔개가 고기 채가듯이 와락 집어다가 네 조각 다섯 조각에 찢어버리고 다시 수일의 멱살을 잔뜩 훔켜잡고,
『이놈, 네가 이 맛이 어떠하냐? 뻔뻔한 놈 같으니……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들여다보니까 예전에 학교에 같이 다닐 때에 서로 지내던 모습이 남았구나. 마음은 짐승이 되었어도.』
조병권은 말리는 체하며,
『여보게 이수일, 우리가 이전 정으로 말하기로 자네에게 해로운 말이야 권할 리가 있나? 그저 듣겠노라고 대답을 하게.』
수일은 얼굴이 상기되어 목이 메어 목소리를 간신히 내며,
『친구의 정의는 정의요, 돈은 돈이지…….』
『그래도 이놈이 불이 되지가 못하여서 이런 소리를 하는게지.』
하며 신장우는 바른 손을 들어서 수일의 왼뺨을 목이 돌아가도록 한 번 때리고 다시 가슴을 주먹으로 지르매 수익은 방안 한가운데 쓰러졌다. 신장우는 수일을 엎쳐놓고 손으로 덜미를 누르며 무릎으로 허리를 밟고,
『이래도 또다시 주제넘은 소리를 할까?』
수일은 눈에 별이 보이며 정신없이 엎드러져서 사지를 버둥거리나 용이히 일어나기 어려운지라, 차라리 하는대로 맡겨둠이 가하다는 모양으로 가만히 엎드려 있다.
장좌성과 조병권은 놀라기를 마지 아니하며,
『여보게, 이게 무슨 짓인가? 말로 하지 점잖지 못하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신장우는 깔깔 웃으면서,
『여보게, 점잔이 다 무엇인가? 이러한 때는 금력(金力)보다 완력(腕力)이 제일이니라. 이런 놈은 주먹으로 판단을 해야지 항복을 하지, 경우로만 말을 하면 알아 듣나.』
『그만 용서하게, 대단히 괴로운 모양 같으이.』
신장우는 말리는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아니하고 더욱 단단히 누르며,
『이놈아, 대답하여라!』
『나를 이렇게 때릴 터이거든 주먹은 그만두고 오백 원짜리 지전뭉치로 때려주오.』
『이놈아, 그래도 돈이야. 금전은 못쓰겠니.』
『금전이라도 관계치 않소.』
『그러면 이놈, 금전 받아라.』
하며 주먹을 들어 좌우 뺨을 한 번씩 친다. 수일은,
『아이구!』
소리치며 다시 말을 못한다.
신장우는 옆에 놓여 있던 수일의 가방을 열고 그 속에 가득히 들어 있는 수형과 수표 등물을 함부로 집어내어 방바닥에 펼쳐놓고,
『장좌성, 여기 내놓은 수표 중에 자네가 보증 섰던 수표도 필경 있을 것이니 찾아서 찢어버리게.』
장좌성은 남의 얼굴만 돌아보며 겁을 머금고 감히 수표에는 손을 대지 못한다.
수일은 가방에서 수표 내놓은 것을 보고 일어나고자 몸을 좌우로 버리적거리는데 신장우는 수일의 허리에 걸터앉아 수일의 두 팔을 뒤로 틀어서 한 손에 쥐고 주저주저 하고 손을 대지 못하는 두 사람을 눈흘겨 바라보며,
『자네들은 왜 이리 어름어름하고만 있나? 어서 수표를 찾아 없애게. 염려말고 어서 찾아내게. 뒷일은 내가 담당할 터이니.』
조병권은 점잖은 체모에 너무 심히 힘을 염려하여 신장우의 손을 끌어내리려 한다. 신장우는 손을 뿌리치고 더욱 수일의 팔을 부러져라 하고 비틀어 올리니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아이고 아이고, 여보, 너무 이러지 마오. 좋도록 하여드리리다. 염려 말고 놓아주오.』
『이놈, 네 말 다 듣기 싫다. 너같은 놈은 이렇게 하여서 후일 사람까지라도 징계를 해야 하겠다.』
하며 흐트러진 수표를 뒤적거리며 찾고 있다.
수일은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제발 살려주오. 내가 좋도록 하겠다는데 왜 이리하오? 이 팔을 놓아 주오.』
『그러면 내 말대로 다 들을 터이지. 그러면 놓아주지.』
『그리 한다는데 왜 이러시오? 하시라는대로 하오리다.』
신장우는 비로소 수일의 팔을 놓고 자리에 내려앉는다.
수일은 얼굴을 찡그리고 간신히 몸을 일어 방안에 흩어진 수표 등물을 두 손으로 모아서 가방 속에 집어넣고 황망히 세 사람에게 인사하며,
『그러면, 오늘은 그저 가겠습니다.』
하며 일어서려 하는 것을 신장우는 하인을 꾸짖듯이,
『가만히 있어, 거기 앉아. 아까는 좋도록 하겠노라더니 아무 말 없이 간다 하여? 우리가 청구하는대로 다 시행을 하여주고 나야지, 이번에는 우리가 너를 보내지 아니할 터이다.』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와락 들어앉으며 하는 말이 다시 싸움을 하고자 하는 모양이라.
『노형 하시는 말씀대로 들어드리기는 하겠소이다마는, 아까부터 너무 얻어맞아서 몸도 아플 뿐 아니라 심사가 좋지 못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수가 없으니 오늘은 그저 집으로 가야하겠소. 오히려 여러분께 실례를 많이 하였소이다. 용서하시오. 그러면 장좌성씨는 이 다음 이삼 일 후에 다시 만나뵙고 말씀하겠습니다.』
홀연 수일의 기색이 수심이 쌓인 것같이 고개를 드리우고 말하는 모양을 보고 신장우는 냉소한다.
『만일 일후에라도 다시 와서 나 없다고 오늘 원수를 주인에게 갚으려 하였다가는 그때는 내가 또다시 나와서 오늘 솜씨를 또 쓸 터이니 정신차려!』
『녜, 다시 그리할 리가 있습니까?』
하며 문을 열고 나아간다.
조병권과 장좌성은 한가지로 대문까지 나아가서 수일을 보내고 들어오며, 장좌성이 허허 웃으며,
『오늘은 신군(申君)으로 하여서 잘 모면하였네. 그러나 벌써 저녁때가 되었네그려. 불이나 켜고 술이나 한 잔씩 더 먹지.』
하며 남포에 불을 켜고 술상을 잡아당겨 한 잔씩 마신 후에 신장우는,
『자네들 가만히 있게. 좋은 것을 하나 보여줌세.』
하고 조끼 속으로서 구겨 끼웠던 수지 두 장을 내어놓는다.
(조) 『그것은 무슨 종인가?』
(장) 『무엇을 가지고 그리하여?』
신장우는 한 장을 집어 펴서본즉 김정연이에게 빚을 쓴 수표이니 채무자의 성명은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신장우가 어느틈에 그런 수표를 훔쳤는지 서로 보고 놀라기를 마지 아니한다. 또 한 장을 펴며 세 사람은 머리를 한데 모으고 불 아래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증인에 장좌성이라 하였는지라, 신장우는 벌떡 일어나며 그 수표를 손에 들고 춤을 추며,
『옳다, 옳다. 바로 들어섰구나. 만세, 만세, 만만세.』
장좌성은 수표 찾은 것을 다행히 생각은 하나 포학한 행동으로 억탈(抑奪)함을 심히 마음에 좋지 않게 생각하였더라. 그러나 후사는 신장우가 담당한다 함을 한편으로 시원한 마음도 없지 아니하다.
『자, 인제는 경사가 생겼으니 술이나 먹고 부지동방지기백이나 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