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16장
머리와 어깨에 중상을 입은 이수일은 다행히 뇌막염(腦膜炎)에는 이르지 아니하고 그 외에 사오처에 있는 상처는 날로 평복되어가나 아직도 좌와기거(坐臥起居)를 임의로 하지 못하고 남의 손을 비는 몸이 되었는 고로 하룻낮 하룻밤을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병실 한편 와상 위에 누워 있어 고요히 병을 치료하고 있는 병원의 무료하고 적막함은 짐짓 살아 있는 주검이 한편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병원에 있는 의사든지 간호부든지 심지어 하인까지라도 모두 눈을 들어 수일과 한 가지로 가장 친밀하게 관계가 있음을 의심하는 최만경의 자주 문병을 하기 위하여 심방함을 이상히 여겼더
일이 삭이 넘도록 최만경이 아름다운 모양으로 하루도 걸르지 아니하고 내왕하는 소문이 병원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처음 얼마 동안은 저렇듯 아름다운 여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여 지내다가 병원 의사 중에도 최만경의 내력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있어서 자세한 소문을 들은 후에 여러 사람들은 놀라기를 마지 아니하며, 또는 수일과 여하한 관계가 있는지 비로소 알았더라.
그러함을 수일은 조금도 알지 못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최만경이가 한번 두번이 아니오, 발자취를 가까이하여 자주 찾아옴을 은근히 즐기지 아니하여, 수삼차나 최만경을 향하여 자주 찾아옴이 불가함을 말하였으나, 최만경은 고독한 신세로 병원에 홀로 있어 신음하는 심사를 위로한다 칭탁하고, 빈삭히 찾아오는 고로 이 몸을 위하여 생각하는 마음을 억지로 받지 아니함도 불가하며, 그러나 최만경은 다만 병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뿐 아니라 그 외에 다른 야심이 섞여 있음을 아는 고로 또한 달게 여겨 받을 수도 없는 터이라.
하물며 수일은 최만경의 위인이 어떠함도 알며, 또는 그 몸이 홀로 있는 몸이 아니어늘, 만일 그릇하여 자기의 몸과 최만경 사이에 좋지 못한 소문이 있을까 염려하여 최만경이가 찾아와서 문을 열고 들어올 제마다 스스로 눈살이 찌푸려지며 아프고 괴롭지 아니하던 몸도 공연히 전신에 고통이 생기는 것 같아여 중에도 더욱 마음을 수고로이 한다.
또 한 가지로 수일의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있으니 이는 과연 김정연과 최만경 사이에 괴이한 관계가 있음을 의심하였더라.
이날도 항상 꺼리는 최만경이가 병원으로 수일을 위하여 수일의 즐겨하는 음식을 친히 손에 들고 문병을 왔는데, 이미 한 시간이 넘도록 조금도 돌아가려는 기색이 없고 수일의 베개머리에 앉았다 섰다 하고 있다.
수일은 최만경을 등지고 돌아누워 벽을 향하고 누웠으며, 잠든 것도 아니언마는 눈을 감고 고요히 누워 있다. 옆에서 시중하던 간호부가 밖으로 나아간 후 최만경은 교의를 가지고 수일의 누워 있는 와상으로 가까이 앉으며,
『여보시오, 여보시오, 이수일씨.』
하며 이수일의 베개머리를 손으로 탁탁 친다. 그러나 수일은 못 들은 체하고 대답이 없는 고로 만경이는 수일의 누워 있는 편으로 돌아가서 수일의 잠들어 있는 듯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수일씨.』
오히려 대답이 없으매 만경이는 손을 들어 수일의 어깨를 가만히 흔든다.
수일은 비로소 잠이 깨이는 듯이 눈을 번쩍 뜨고 치어다본다.
그러나 만경이는 어깨에 얹은 손을 오히려 떼지 아니하고 그 얼굴은 수일의 베개머리에 대고,
『나는 당신께 말씀을 자세히 해둘 일이 있으니 들어 주시오.』
수일은 이제야 비로소 최만경이가 그저 앉아 있으므로 안 것같이,
『아, 그저 가지 않고 있었읍디까?』
『한번 오면 밑이 질기게 일상 오래 앉아 있으니까 아마 괴로우시지요?』
『……….』
『다른 일이 아니라오.』
하며 만경이는 수일의 누워 있는 몸에 가슴을 가까이 대는 고로, 수일은 짐짓 몸을 돌려 교의 있는 편으로 향하여 눕는다.
『이렇게 내 앞으로 좀 향해서 누우시구료.』
수일의 뜻을 깨달은 만경은 속마음으로 매정한 사람도 있다 하여 해상을 짚고 할일없이 일어서며, 이와 같이 홀대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그 사람을 사모하기를 마지 아니하는 자기의 마음을 부끄리나, 그 옆은 떠나지 못하고 서서 있다.
그러나 수일은 대답이 없는 고로 최경은 혼잣말과 같이 수일의 귀에 들리도록,
『아, 나는 당신의 홀대를 이렇게 받으면서도 제 마음을 제마음대로 못하고, 단념을 어찌해서 못하는지. 대체 너무도 당신은 내게 야박…….』
만경이는 수일의 베개머리를 짚고 몸을 떠는데, 수일은 모르는 체하고 자는 모양을 짓는다. 이는 참다 못하여 하는 말로,
『여보시오! 그렇게나 지독하시오! 사람이 어찌하면 남의 말을 듣고 대답 한 마디 아니하단 말이요.』
수일은 간신히 하기 싫은 말로 입을 열어,
『나는 별로 대답할 말이 없어요. 대관절 당신이 나를 위해서 찾아오는 것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진정…….』
『어떻게 하시는 말씀이요?』
『진정 재미없는 일이 있으니 이후는 문병도 그만 오시오. 당신도 집에 볼일이 많으신 터에 이렇게 여기만 와서 있으니 제일 남이 보기에도 이상스럽고…….』
만경이는 수일이가 자기를 소홀히 함을 처음부터 모르는 것은 아니로되, 이제 이르러서는 면박하여 등을 밀어 내 쫓듯함을 당하매 부끄러움과 분함과 원통한 마음이 일시에 얼굴에 올라 발그스름한 얼굴에 눈물을 띄우고,
『내가 오면 당신이 괴로와하시는 줄은 처음부터 알아 있어요』
『아니오, 나만 괴로울 뿐 아니라 요새로 그 외에 다른 걱정이 또 생겼으니까 그렇지요.』
『새로 걱정이 무슨 걱정이란 말씀이요?』
하며 만경은 고개를 기울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지, 당신 주인되시는 김정연씨로 하여서 말씀이요?』
『그렇게 명토박아서 말하지 않아도 아마 알걸.』
『그러니까 내가 할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내 말이라면 공연히 자세히 듣지도 아니하고 눈살부터 찌푸리지마는, 당신만 걱정 근심이 될 뿐 아니라 나도 여간 걱정이 아니야요. 그렇더라도 나는 아무 관계가 없지요마는 자연히 당신은 내 마음은 아시지 못하고 공연히 심려를 하실까 염려가 되어서 그 말씀을 하자고 그랬지요.』
수일은 듣지 못함이 아니로되 눈을 감고 대답이 없다.
『내 마음인즉 벌써부터 당신께 말씀을 하고자 노상 벼르기만 하고 이내 기회가 없어서 말씀을 못하였더니, 이제 말이 났으니 말씀이요마는, 김정연씨가 나더러 이러니저러니하고 말씀하던 일은 요새부터 시작한 일이 아니야요. 일상 만나면 별 망측한 소리는 그 양반이 다하지요마는, 나는 그저 점잖게 이 핑계 저 핑계 하여서 입때까지 속여서만 내려왔는데, 김정연씨도 지금까지 내가 당신께 이렇도록 된 줄은 알지 못하였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병원에 들어오신 후로 나도 이렇게 자주 찾아 오고 김정연씨도 가끔 들르시니까 자연히 여기서 서로 만나는 때가 많아서 김정연씨도 아마 이상히 생각을 하셨던 것이야요. 일전에는 나를 만나더니 첫째 하는 말이, 이수일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면서, 만일 수일이하고 까닭이 있거든 바른대로 말하라고 사람을 못 견디게 굴게시리 졸리다 못하여서 할 수 없이 이수일씨하고 백년을 언약하였노라고 대답하였지요.』
『응, 무엇이야?』
하며 수일은 붕대(繃帶)로 감은 머리를 번쩍 들고 노기가 가득한 눈으로 최만경의 얼굴을 바라본다. 만경은 자기의 실언함을 뉘우치는 모양으로 공연히 옷자락만 가지고 희롱하며 수일의 노한 눈을 피하여 모로 서서 있다.
『그러한 거짓말을 어찌하여서 함부로 한단 말이요. 참 고약한 버릇도 하는구.』
하며 무안에 취하여 시름없이 서서 있는 만경의 얼굴을 흘기어 보며,
『모두 성가시니, 어서 가오.』
수일은 소리질러 꾸짖으며 분한 기운에 반쯤 일어났던 몸을 다시 자리에 쓰러지는 서음에 상처가 닿아 다쳤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괴롭고 아픈 얼굴을 짓는다. 만경이는 어디를 과히 다쳤는가 놀래어,
『아이고머니 왜그리셔요, 어디를 다치셨소?』
하며 흘러내린 이불을 치켜 덮어주려 하는 손을 수일은 뿌리쳐 물리치며,
『글쎄, 그만 가요.』
하고 수일은 다시 만경을 등지고 돌아누워 고요히 잠든 것 같다.
『나는 아니 갈 터이야요. 그렇게 사람을 박대하면 내가 좀 더 아니갈걸. 내가 있으면 밤을 새울 터이요, 갈 때 되면 갈 것을, 그렇게 사람의 대접을 하는 데가…….』
이렇듯 만결의 하는 말이 마치지 못하여 문을 열고 밖으로서 들어오는 사람의 기색에 만경이는 깜짝 놀라 말을 뚝 끊이었다.
이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뇨? 의사도 아니오, 간호부도 아니오, 병원에 있는 하인도 아니라. 중절모자에 외투를 몸에 두르고 서서히 들어오는 늙은 신사 한 사람이라. 방안을 힐끗 살펴보고 홀연 그 신사는 쾌락치 못한 기색이 얼굴에 나타난다.
만경은 황망히 와상 옆을 떼어서며 다시 천연한 기색으로 그 신사를 향하여 공손히 고개를 숙여 예하며,
『아이고, 영감 오셨습니까?』
『허허, 날마다 이렇게 문병을 오는구려.』
하며 안경 쓴 위로 눈을 흘려 만경의 얼굴을 잠깐 보고 한편 옆에 있는 교의를 당기어 걸터앉는다.
수일은 그 주인 김정연씨가 왔음을 보고 몸을 간신히 일어 앉는다.
『응, 오늘은 좀 어떠하냐? 이런 귀부인이 문병을 다 왔으니까 마음을 위로하더라도 병도 좀 낫겠지, 허허허허.』
수일과 만경은 마음으로는 불쾌히 생각하였으나 무엇이라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여 주저하는데 김정연은 다만 허허 웃을 뿐이다.
무엇이라 대답하며 무엇으로 변명하며 어찌 처치할는지 심중으로 난처하는 수일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는데, 만경은 조금도 겁하는 기색이 없이 화롯가로 가까이 가서 불만 쪼이고 있다.
김정연은 만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러나 댁에도 요사이 일이 많으실 터인데 바쁜 때에 이렇게 틈을 타서 가끔가끔 수일의 문병을 와주시니 고맙기는 하오마는, 수일의 병세도 이제는 점점 차도가 있고 큰 염려는 없으니까 이후에는 바쁜 틈을 타서 문병 올 것도 없을 듯하오.』
만경이는 김정연의 하는 말을 심히 미흡히 생각하였는지, 다시 노기가 얼굴에 나타나며 말소리는 억지로 나직이 하여,
『아니오. 여기만 일부러 오는 것이 아니라 이 근처에 날마다 오는 일도 있으니까 역로에 잠깐씩 들러가는 길이지요. 그닥지 영감님이 염려하여 주실 일도 아니야요.』
김정연은 만경의 얼굴을 안경 너머로 다시 한 번 치어다 본다. 수일은 이때를 타서 주인의 말을 돕는 모양으로,
『날마다 문병을 저 부인이 와서주십니다마는, 도리어 괴로울 때가 많으니 영감께서 잘 말씀을 일러 보내 주십시오.』
김정연은 수일의 말을 듣고 더욱 다행히 여기어,
『병자도 너무 불안히 아는 모양이니 당신의 마음은 고맙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마는 이후에는 오기까지 할 것은 없소.』
『제가 문병을 와서 병에 해롭다든지 크게 방해되는 일이 있다 하실 것 같으면 이후에는 오지 않지요.』
하며 만경이는 정색을 하며 김정연을 원수보듯 얼굴을 훑어보고 고개를 돌린다.
『아니야, 아니야. 결단코 내가 그렇게 하는 말이 아니야.』
『참 너무 업수이 여기지 마시오. 내가 여편네 사람이라고 경홀히 보아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소마는 아무리 여편네라도 당신께 그런 지휘는 받지 아니하여도 관계치 아니해요.』
『그렇게 알아들으면 어찌하자는 말이요? 나는 그대의 몸을 위해서 한 말인데.』
『그것은 또 어찌 하시는 말씀이요. 아는 양반을 문병 좀 왔기로 내 몸에 무슨 좋지 못할 것이 있소?』
『생각을 그래도 못하겠소?』
하며 김정연은 빙긋 웃는다.
『나는 생각나지 않아요.』
『그는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그러하겠지. 그러하면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내 한마디 말을 하리까. 당신도 젊은 터이요 수일도 역시 젊은 터이니 젊은 남자가 있는 곳에 젊은 여자가 종종 내왕을 하면 실상 사정은 알지 못하고 보는 사람들은 이러니저러니 말들을 하기가 쉽다 하는 말이요. 그런 소문이 날 것 같으면 수일이는 사나이니까 오히려 관계치 않소마는 그대는 꽃같이 젊은 여자의 몸으로 어찌 수치가 되지 않겠소? 나는 단지 그러한 생각으로 당신을 권고하는 말이지, 허허허
(사람의 이목이 없을 때에는 자기는 더욱 심히 남의 몸을 더럽히고자 하더니, 사람의 입이라 하는 것은 임의로 마음에 없는 말도 능히 하는도다.)
하고 만경이는 홀로 심중으로 웃기를 마지 아니하며,
『이런 몸이라도 위하여서 말씀을 하여주시니 대단히 황감합니다. 내 몸은 어떠하든지 간에 이수일씨는 장래에 어진 아내를 맞아오실 몸인데 나같은 계집을 인연하여서 만일 방해가 될 듯하면 나는 미리 삼가서 방해가 안되도록 하지요.』
『허허, 내가 너무 미안한 말을 면박하여 말하였더니 두 말 아니하고 얼른 들어주니 너무 고맙소. 그러나 나같이 늙은 몸은 죽을 병이 들어서 턱을 까불더라도 최만경씨 같은 양반은 한 번이라도 찾아오지 아니하겠지.』
수일은 김정연의 온당치 못한 말을 짐짓 못 들은 체하고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영감이 병환드시면 문병 아니 갈 리가 있습니까?』
『정말 그러할는지 마치 모르겠소. 그렇지만 이렇게 자주 오지는 아니할걸.』
『영감은 마나님이 계시니까 나같은 사람이 너무 자주 가면 또…….』
하며 말끝을 다 마치지 못하고 웃음을 띄운 아름다운 눈초리와 수건으로 가리우고 부끄러운 태도를 머금은 듯한 모양을 김정연은 한없이 예쁘게 바라보다가,
『허허허, 그러니까 수일이는 마누라가 없어서 마음을 놓고 자주 찾아오는구료.』
『그런 것이 아니라오. 수일씨가 봉변하시던 날 밤에 마침 내 집에 오셔서 늦도록 계시다가 나하고 함께 진고개까지 가서 무슨 흥정을 좀 하고 수일씬 남대문 밖으로 가시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더니 오비이락으로 그날 마침 그 일이 났습니다그려. 그날도 수일씨가 일찌기 집으로 나가실 것을 내가 공연히 붙잡아서 늦게 하여놓았으니까 마음에 어찌 불안하고 가엾은지. 그렇지 않기로 가끔 찾아오지 아니할 리는 없지요마는, 더구나 내 죄로 하여서 날마다 와서 동정을 살피는 것인데, 남들은 속도 알지 못하고 별소리를 다 지어내지요. 당신만 하여도 이상스러이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수일씨나 고맙게 아셔야 할 터인데 내가 올 제마다 내 얼굴만 보면 눈살을 찌푸리시니까 속담으로 선행재하고 지벌 입는다는 모양이올시다.』
김정연은 드문드문 난 윗수염을 두 손가락으로 부비면서 최만경의 동작하는 태도와 재치있게 말하는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나같은 놈은 늙은 사람이라 남 듣기 싫어하는 말이나 항상 하지. 듣기 좋은 말을 하기로 젊은 사람들은 따르지를 않아. 그러니까 어차어피에 늙은 놈은 남 듣기 싫은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단 말이야. 아까 내가 한 말도 단지 그대의 몸을 위해서 한 말이니 조금도 어찌 알지마오. 사람의 집안에는 그래도 늙은 물건이 있어야만 집안이 되는 법이야.』
하며 김정연 최만경의 기색을 은근히 살펴본다.
『그렇고 말고요. 다시 또 하실 말씀이오니잇가? 나이 많으신 어른이 있어야 지각없는 젊은 아이들을 지도하여 주지요. 그렇지만 젊은 사람은 암만하여도 젊은 사람끼리 뜻이 맞고 좋아요.』
『아무리 그러하기로 늙은 사람을 옆에다가 앉혀놓고 어찌 그렇도록 박절하게 말을 한단 말이요. 나는 비록 늙었어도 최만경씨 같은 사람은 대단히 사랑하건마는…….』
『아이구, 또 실없은 말씀을 하시는구료.』
하며 반은 성을 내고 반은 부끄리는 얼굴로 와상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수일을 바라보며 은근하고 또는 정다운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여,
『오늘밤에는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은 좀더 나으시오. 내일 또 오리다.』
하며 김정연을 향하여는 지나가는 인사로,
『나는 먼저 갑니다. 안녕히 다녀가십시오.』
하고 문을 열고 나가려 하는지라, 김정연은 교의에서 급히 몸을 일며,
『여보, 벌써 가오? 나도 갈 터이니 같이 동행합시다그려.』
『나는 이 근처에 잠깐 다녀갈 데가 있어요.』
『그러하면 거기까지만 동행을 하지.』
『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하니까, 나 먼저 가겠습니다.』
김정연은 급급히 벗어놓았던 외투를 팔에 꼬이며 한 손으로는 모자를 집어 쓰며,
『입때까지 앉아 있다가 별안간에 급하단 말이요? 나도 그대를 한 번 만나면 의논하자 하면서 이내 만나지를 못하였더니, 요전 셈 조건에 조금 틀린 것이 있어서.』
『그러면 내일 찬찬히 하지요.』
『아따, 그렇게 사람도 용통하단 말이요? 내일 할 일 있고 오늘 할 일도 있지. 우리의 취리상에야 늙은이 젊은이를 구별할 것이 있소, 허허허.』
하며 서로 전후하여 밖으로 나간 후 수일은 악몽(惡夢)을 비로소 깬 듯이 시원한 마음이 나며 다시 베개를 베고 반듯이 누워 한숨만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