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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몽/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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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투신(投身)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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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떨어져 열매를 맺고 잎은 피어 녹음을 이루었는데, 김산은행 지점장으로 평양 대동강변에 집을 건축하고 있는 김중배는 평안 일도에 재정의 세력이 무지갯발 뻗치듯 하여 뉘 아니 첨을 하며, 아니 친코자 하리요.

오늘은 대동강 선유요, 내일은 부벽루의 시회라. 밤은 낮을 삼고 낮은 밤을 삼아 집에 들어오는 날은 드물고 청루주사(靑樓酒肆)에서 날을 보내고 몸을 타락하되, 순애는 조금도 말리지 아니하고 들어오든지 나가든지 관계하여 말을 하지 아니하니, 이른바 일개 여관의 주인과 같이 되었더라.

이날도 김중배는 부벽루 아래에 배를 띄우고 옥향과 한가지로 종일토록 즐기다가 석양에 이르러서 비로소 집에 돌아왔더라. 김중배는 순애를 맞아온 지 이미 사오 년이 넘었으며 한 번도 몸을 가까이하지 못함을 항상 한탄하던 터이라. 이날 주기(酒氣)가 반감에나 이르러서 집에 돌아오니 연래로 순애에게 향하였던 불만족한 마음이 일어나며 아니볼 때에는 밉고 분노하다가도 이미 돌아와 순애의 화려한 얼굴과 어여쁜 태도를 보면 처음에 먹었던 마음은 햇발에 눈녹듯하고 도리어 순애의 뜻을 거스릴까 겁하였더라.

이제 비로소 들어와서 저녁 밥상을 물리치고 술상만 앞에 놓였는데, 순애는 한편 옆에 앉아서 눈살을 찌푸리고 즐겁지 아니한 얼굴을 짓고 있다. 김중배는 술잔을 내밀며,

『여기 한 잔 따라주오. 밤낮 저렇게 모주 먹은 고양이상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집이라고 들어오니 무슨 재미가 있겠소? 자연히 좋아도 나가고 언짢아도 나가고 집에 있을 날은 없지. 마누라가 관상 좀 보는 날이 있으면 내가 춤을 추겠소.』

순애의 손목을 잡아 이끈다. 순애는 잡힌 손목을 뿌리치며 얼굴빛을 변하고,

『점잖은 터에 왜 이리 상없이 구시오. 그저 말씀은 못 하시고 천칙하게 하시니…… 내가 기생이요, 논단이요? 술은 자기가 따라 자시든지 하지, 번번이 나더러 따라 달라고 그리하여?』

『또 성내었나? 다른 말은 다 아니 들을지언정 손으로 따르는 술이야 못할 것이 무엇이요? 나는 그러기에 도무지 재미가 없어 오늘도 집안에서 잘 마음이 없으니까 지금부터 또 나갈 터이니 작별주로 한 잔만 쳐주구료.』

순애는 홀로 태우는 가슴이 누구를 향하여 말할 곳도 없고 다만 혼자 한탄이요, 혼자 근심이라.

사람이 오는 것도 귀치않고 남의 즐거워하는 것도 보기 싫다.

마음을 진정키 어려운 때에는 한숨과 눈물로 벗을 삼는 터이어늘, 김중배의 굳이 친압(親狎)히 구는 것을 진정으로 꺼리고 싫어하나 한 잔 술을 주면 나가겠다 하는 말에 다행히 여기기를 마지 아니하여 내키지 아니하는 손으로 마지못하여 주전자를 들고 한 잔을 가득히 부었더라.

『아따, 치는 솜씨도 잘은 배웠다. 엎지른 것이 두 잔이나 되겠네. 이러하니까 술 한 잔을 먹으려 하여도 집에서는 먹을 생각이 없고 밖으로만 나가고 싶지.』

『그런데 누가 여기서 잡수라고 합더니잇가. 나가서 많이 잡숫구료, 재미있게시리.』

『저것이 못쓸 말이란 말이야. 명색이 서방이라는 것이 집에 있지 아니하고 가끔 밖에 나가서 자면 아무쪼록 권하여서 그리 못하게 하는 것이 여편네의 도리요, 아무쪼록 나가서 방탕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내된 사람의 의무라 할 수가 있나? 그러나 이 술은 맛이 좋지 못하나 일전에 사서 두었던 삼판주를 두어 병만 꺼내어 오우.』

순애는 일어서서 벽장을 열고 삼판병을 내려놓는다. 김중배는 마개를 빼고 유리잔에 한 잔을 넘도록 부어 주며,

『여보, 이 술은 여편네라도 먹으면 그리 취하지도 아니하고 몸에도 유익한 것이니 한 잔 먹어보우.』

『먹을 줄 모르는 여편네에게 술은 왜 이리 권하시오?』

『글쎄, 이것은 술이라도 술이 아니라 하는 말이야요. 각항 실과로 만든 술이니까 취하지도 않거니와 설령 좀 취하면 무슨 상관이 있소. 죽지는 아니할 터이지, 그 청도 못 들어?』

하며 유리잔을 순애의 입에 대어준다. 순애는 김중배의 손이 자기의 몸에 가까이 오는 것같이 마음에 악수가 침노하는 것같이 싫은 감염이 일어난다. 마지못하여 술을 받아들기는 하였으나 어찌 이 많은 술을 다 마시라요 하며 주저하다가, 다시 김중배를 일분이라도 속히 내보내고자 하는 마음에 죽기를 한하고 한입에 다 마시어버렸더라.

『인제는 말씀대로 술을 한입에 다 먹었으니 어서 가실 데나 가보시오. 나는 요전같이 이 술이 취해서 반은 죽을걸.』

『이렇게 내쫓지 못해서 애쓰는 사람은 도무지 처음 보았네. 갈 때 되면 어련히 갈까. 그러나 술을 먹었으면 나를 또 따라주어야지.』

『나가서 재미있는 데 가서 잡숫지, 왜 여기서 이리 수선을 피오?』

김중배는 대답도 없이 다시 잔에 술만 따르면서 입으로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술 한잔 잡으시면 만수무강…….』

하며 잔을 들어 순애를 권한다.

순애는 깜짝놀라 몸을 피하려 하는 것을 사나이의 굳센 힘으로 허리를 껴안겼으니 그물에 걸린 고기의 몸이라 어찌 능히 벗어나리요.

『내가 다 권주가(勸酒歌)를 하였는데 이 술을 아니 먹으려고 한단 말이요? 이 술은 아니먹으면 놓지 아니할 테야.』

순애는 다시 신세의 한탄이 나온다. 부모도 다시 원망하며, 자기의 몸도 스스로 꾸짖으며, 어찌하여 이 몸이 이와같이 천인만인(千仞萬仞)되는 함정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하는고 하는 생각에 솟아나오는 것은 눈물이라.

『이 손을 놓으셔요. 그러면 내가 다 먹을 터이니.』

순애는 두 번째 잔을 받을 때에는 벌써 첫잔의 술기운이 얼굴에 오르기 시작하였거늘, 김중배의 억지로 결심코 권하는 술을 거의 삼사 배나 받았더라.

『어, 가위 장사로구. 아무리 여편네라도 이러한 술이야 두어 잔은 먹을 줄 알아야지.』

김중배는 흉중에 있는 무슨 계책이 성취한 것같이 허튼 웃음이 스스로 나온다.

순애는 뜨거운 얼굴을 두 손으로 기운없이 바치고 앉았다가 간신히 얼굴을 들어 김중배를 보며,

『가실 데가 있다더니 어째서 아니 가오?』

『차차 가지. 그리 급할 것이 무엇인가. 술이나 더 따라주오.』

김중배의 모양을 보건대 조금도 나갈 의사는 없고, 점점 술만 마시려 하며, 그 자리에 잠시라도 더 앉아 있으면 술을 또 먹이고자 할 터이니 차라리 몸을 피하리라 하고, 순애는 어지러운 몸을 간신히 일어 대청 건넌방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러나 김중배는 다시 붙들지도 아니하고 순애의 나아가는 뒷모양만 보고 빙긋이 웃고 있다.

순애는 간신히 방안까지 들어올 때는 정신이 있었으나, 문을 닫고 쓰러진 후는 정신이 없어지고 다만 향기로운 숨소리만 날 뿐이라.

아름다운 얼굴에는 홍조(紅潮)가 오른 듯하고 이마와 콧등에는 더운 땀이 솟아난다. 저고리의 옷고름은 반쯤이나 풀어져 백설 같은 가슴이 드러났으며 발목에 감기어 있는 치마 끝으로는 백합꽃봉오리 같은 버전 신은 발이 반이나 나타났다.

점점 어두워가는 방안에는 하인이 불을 켜서 놓았더라. 한 시간이나 지난 후에는 집안이 적절하여 다른 사람은 없고 한방에서는 김중배가 오히려 술잔을 놓지 아니하고, 또 한방에서는 순애가 술기운에 정신없이 몸을 흐트러치고 잠들어 있을 뿐이라.

밤은 이미 아홉시에 가까웠는데 김중배는 문을 고요히 열고 순애의 누워 있는 방으로 발길을 들여놓았더라.

밤은 어느 때가 되었는지 방안 등불빛은 침침한데 적적한 큰 집안에 사람의 기척은 조금도 없고 누웠던 곳에는 자리도 깔아 있지 아니하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옷은 어지러워졌는데 무거운 몸을 일어 부신 눈으로 방안을 돌아보니 꿈결인지 생시인지 분변키 어렵다. 몸은 이 방안에 확실히 있음을 알았으나 정신은 중천에서 방황하는 것 같다.

귀를 기울이고 듣건대 강가에서 어부의 뱃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문을 열고 마루끝으로 나아가보니 달은 벌써 중천에 높이 떠서 있다.

『아, 벌써 밤이 깊었나보다.』

하며 순애는 홀로 기둥에 몸을 의지하여 달을 향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슴 속으로는 저녁때에 지낸 일을 생각한다.


안방에서 김중배가 술을 권하므로 마지못하여 수삼 배를 먹었으며, 또는 김중배가 난잡히 하는 것을 진정으로 받기 싫고 한편으로는 술이 취하여 구역이 나고 현기가 나서 건넌방으로 몸을 피하여 왔는데 그때는 해가 아주 어둡지도 아니하고 방안에 불도 켜지 아니하였던 줄까지는 생각이 나나 누가 와서 불을 켜놓았으며 어느 때 어찌하여서 김중배가…… 여기까지 생각하며 순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가슴을 두드린다.

두 눈에서는 원통한 눈물이 양협으로 좇아 치마 앞에 떨어지는데 치맛자락으로 가리웠다 떼는 눈은 물들인 것같이 발갛게 되었더라.

(아, 내가 그물에 걸리었도다. 함정에 빠졌도다. 날개 부러진 새를 다시 그물로 건지고 총 맞은 노루를 함정에 빠지게 하는도다.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였는고! 오늘날 이러한 일이 날 것은 큰길같이 보이거늘 어찌하여 이 집을 떠나 몸을 피치 못하였던고.

여자의 몸으로 아무리 괴로이 권한다 하기로 술을 입에 댄 것이 이미 실책이어늘, 그 외에 또 이러한 부끄러운 일을…… 아, 지금 와서 한탄한들 돌아오지 못하리요, 다만 원통하고 분한 것은 김중배라.

지금에 이르러 아무리 후회한들 모두가 자기의 어리석은 연고요, 자기의 결심이 부족한 까닭이라. 스스로 생각하여도 그다지 어리석고 그다지 결심도 없지 않건마는, 어찌하여 오늘은 악귀가 몸에 침노하였던지 오륙 년을 두고 정결히 가지던 몸을 잠시 동안에 더럽혀놓았으니,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을 한들 한 번 묻힌 더러운 점은 다시 씻지 못할 것이니…… 부모도 믿을 수 없다. 수일의 몸을 부탁하여둔지 이미 오래되었건마는 다시 소식도 없으니, 만일 오늘날 이 지경을 당할 줄 알았더면 수일씨의 얼굴은 다시 보지 못하더라도 일찌기 자처라도 하여 수일씨에게 향한 의리라도 세울 것이요, 이 몸도 정결하게 지하로 돌아갈 것을, 어찌하여 이렇듯 슬기가 없었던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씻을 생각도 아니하고 달을 향하여 들고 있는 얼굴은 재빛같이 질리었다.

순애는 맥을 놓고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가 무슨 결심을 하였는지 눈물도 거두고 종용히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장문을 열고 새옷 한 벌을 갈아입고 다시 손그릇을 열고 하루도 몇 차례씩 내어보고는 울기도 하며 웃기도 하던 수일의 사진을 내어 품 속에 간수하고 고요히 뜰 아래로 내려서 집안인들이 알까 겁하는 듯이 발자취를 내지 않고 협문으로 좇아 강변길로 나왔더라. 강상으로 좇아 불어오는 바람은 얼굴에 다다치는데, 때때로 사공들의 처량한 소리는 더욱더욱 순애의 가슴을 산란케 한다.

강변길로 좇아 서서히 나아가며 고개를 드리우고 나아갈제 가슴 속으로는 여러 가지로 처량한 생각이 왕래한다.

(본래 서울 태생으로 연광이 불과 이십여에 죽을 곳이 그다지도 없어 평양 대동강을 바라고 왔던가? 이전 성인의 말씀에 천작얼은 유가활이어니와 자작얼은 불가활이라 하더니, 이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로다. 대동강 위에 부는 바람도 오늘이 마지막이요, 선인의 노랫소리도 오늘밤만 들으리라.)

하며 다시 솟아나오는 눈물에 앞길이 막혀 한참 동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

길가에 앉아 순애는 몸을 흐트러뜨리고 체읍하다가 깜짝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걸음을 빨리하여 부벽루 앞에 다다랐다. 달 아래 비치는 부벽루의 검은 그림자는 순애의 가슴에는 더욱 새로운 감동이 일어난다.

순애는 날마다 밤이면 기도하던 영명사 앞 부도 앞에 몸을 단정히 가지고 나아가 옆대이더니 울음에 섞인 목소리로,

『천지신명은 박명한 소첩의 신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소첩의 정성을 기특히 감동하사 소원을 맞추어주실까 하였삽더니 비록 소첩의 죄로 인연한 일이라 수원수구(誰怨誰咎)하오리까마는 관대하신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소첩의 박명을 구하여 주시고 이수일씨의 평안을 축수하던 마음이 이제는 물 위의 거품같이 되었사오니 이 세상에 살아 있다 한들 무슨 낙이 있어 구차히 생명을 보존하오며 하루라도 만일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날에는 점점 몸만 더럽힐 뿐이니, 차라리 이렇듯 무정·야속한 세상은 일찌기 이별하여 죽는 것으로써 전일 죄를 속하겠사오니 비명에 죽는 소첩의 몸을 천지신명은 긍칙히 여기사 이 몸이 죽은 후라도 은근히 명명지중(冥冥之中)에서 수일씨의 몸을 위하여 축원하겠사오니 대자대비하오신 부처님께서는 죽는 몸의 대신으로 이수일을 도와 주옵소서.』

하며 첩첩한 심회를 다 이르지 못하며 양협으로 흐르는 두 줄 눈물은 옷깃을 적시고 답답한 가슴은 목소리가 느껴 나온다.

몸을 일어 사방을 돌아보며 인적이 없음을 기다리는데 을밀대 아래로 불어 내려오는 솔나무 바람은 몸에 죽음을 재촉하는 듯, 다시 고개를 들어 부벽루를 바라보니 오년 전의 수일의 목소리가 지금도 오히려 완연히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삼월 십사일이 되거든 내 눈물로 이 달빛을 흐려놓을 터이니, 만일 이 달이 흐리거든 이수일이가 어느 곳에서 너를 원망하고 울고 있는 줄로 알아다고.』

하던 말이 귀에 쟁쟁하다.

(저 달은 필연 수일씨도 지금에 바라보고 있을지어늘, 이 몸이 오늘밤 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줄을 어이 생각하리요.

이 가슴에 쌓인 마음은 이러하건마는 지금도 오히려 이 몸을 원망하리로다.

그 사람은 이 몸을 원망하고 동녘 하늘에 붙이어 있고 이 몸은 그 사람을 사모하여 서녘가에서 수중의 외로운 혼이 되리로다.

대동강 흐르는 물에 이 몸은 잠길지언정 이 가슴에 쌓인 회포는 능히 씻을 기회가 없을지니, 지하에 돌아간 후라도 누가 이 몸을 위하여 무한한 심회를 그 사람에게 전하리요.

오 년 전 이곳 이 달 아래에서 이수일씨를 작별하던 때에 부르짖으나 다시 답이 없이 훌쩍 떠나간 후 소식이나 있을까 주소로 바라던 마음도 없어지고 영구히 이 몸을 원망하는도다.

만일 그때에 그 사람이 다시 한 번만 이 몸의 말 한 마디만 들었더면 이와같이 서로 가슴을 태우지 아니하였을 것이어늘…….

모두 이 몸의 지은 죄로 맺은 결과이니 이제 다시 한탄함도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로다.)

순애는 깜짝 생각이 나는 듯이 대동강 언덕으로 능라도에 걸쳐 놓인 수도철교(水道鐵橋)를 향하여 나아간다.

밤은 이미 열시에 가까왔는데 능라도는 몽롱히 안개가 덮여 월색같이 희미하다. 강중에 떠서 있는 어선에는 인적이 고요한데, 순애는 철교를 다다라 강중을 내려다보고 철교 난간에 의지하여 수건을 얼굴에 대고 소리 없이 눈물이 비오듯 한다.

순애는 무거운 머리를 들어 달을 바라고 다시 그 부모의 몸을 생각한다.

(앞길이 멀지 않고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늙은 부모를 끼쳐놓고 이 세상을 버리려 하니 이 몸이 없어진 후 부모의 마음이 어떠할꼬. 그러나 비록 여식이라도 이와같이 어리석고 미천한 줄은 모르시고 어려서부터 남의 아들 열을 부러이 여기지 아니하고 금지옥엽같이 기르시던 일을 생각할수록 금창이 메일 뿐이라.

이렇듯 부모의 은혜로 이십여 년을 지내었으나 큰 은혜를 다시 보답지 못하고 날이 가고 해가 지날수록 짓는 것을 불효 뿐이로다.)

순애는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재배삼배하며,

『아버님 어머님, 불초녀 순애는 인자하신 부모의 얼굴을 다시 뵈옵지 못하고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오니 처음부터 없었던 자식으로 아옵시고 과도히 상심치 마옵소서. 이와같은 자식은 세상에 살아 있어도 부모에 효도할 기망이 없을 터오니 차라리 일찌기 세상을 버리어 후일에 세상에 모든 불초녀 부정숙(不貞淑)한 여자 등을 경계삼아 거울을 짓고자 하옵나이다. 만일 수일씨를 만나거든…….』

하며 말끝을 맺지 못하여 몸은 벌써 철교 너머로 바람을 좇아 나무잎새와 같이 강중에 던졌더라.

월색은 몽롱하여 슬픔을 머금었고 물결은 잔잔하여 애원을 전하는데, 간간이 어선에서는 선인이 조용조용히 말하는 소리만 겨우 들릴 뿐이라.

교교히 중천에 솟아 있는 달은 전 세계를 지공무사(至公無私)히 비추는데, 대동강상에 일엽 편주를 띄우고 고기 낚는 배안에도 나머지 빛이 들어왔더라.

전일에 이수일과 동창으로 또는 형제같이 지내던 백낙관(白樂觀)은 그 후에 길주 군수를 사면하고 돌아와 사방으로 오유(遨遊)하며 시주(詩酒)로 벗을 삼아 소위 단원장취불원성(但願長醉不願醒)이라, 백낙관은 벼슬을 하직한 후 죽장망혜로 조선반도의 승경(勝景)을 찾 아 길을 떠났으니, 처음으로 다다른 곳은 평양이라.

석일구적(昔日舊蹟)을 두루 찾은 후에 마침 월흥을 띠어 술과 낚시를 배 위에 싣고 혹은 시도 읊으며 혹은 술잔도 기울여 스스로 즐기며 스스로 탄식하여 한 손으로는 노를 저으며 대동강 흐르는 물결을 좇아 내려온다.

배가 마침 철교 아래에 다다랐을 때에 홀연 다리 위로서 슬피 우는 여자의 목소리 들리면서 치어다볼 틈도 없이 날아내리는 새같이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일위 미인이 배 가운데로 내려진다.

배는 요동하여 출렁거리는 물결이 배 안을 적시는데 그 미인은 거의 기절하였더라.

백낙관은 의외의 일에 심히 놀라 그 여자의 몸을 붙들어 일으키며 물을 떠서 먹이며 사지를 주물러 정신을 차리도록 구호한다. 이윽하더니 그 여자는 잃었던 정신을 수습하여 간신히 눈을 조그마치 떠서 사면을 돌아보더니, 옆에 어떤 남자 한 사람이 앉아 있음을 놀라 몸을 벌떡 일어선다.

백낙관은 그제야 자리를 피하여 한편으로 앉으며,

『어, 어떠하신 부인인지는 알 수 없지마는 무슨 원통한 일이 있관데 지중한 인명을 강물에 던지려 하오?』

그 여자는 오히려 맑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사면을 살피고 있다.

몽중인가 생신인가 몸은 강중을 향하여 던지었거늘 어찌하여 배 안에 담기었는고 의심한다.

백낙관은 반취나 되어 있는 목소리로 허허 웃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정신을 차려 말씀을 하시오. 사람이 목숨을 내버리려 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은 여간한 결심이 아닌데 이 지경까지 이를 때에는 필연코 난처한 사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니, 만일 이 사람이 이곳에 마침 없었을 것 같으면 과연 목숨이 위태하였을 것을. 허허, 사람이라 하는 것은 어디를 가든지 구완하는 곳은 처처에 있는 법이야.』

그 여자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어 몸이 물에 빠짐이 아니라, 그 남자에게 구원을 입은 줄 짐작하고 도리어 부끄러운 모양을 짓는다.

『네, 나는 이 세상에 살지 못할 계집이야요. 누구신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죽으려 하는 사람을 이렇듯 힘을 써서 구완하여 주시니 감사하온 말씀은 어찌 이루 다 여쭙겠습니까마는 저는 죽어야 오히려 편안할 사람의 몸이올시다.』

『네, 나는 백낙관이라 하는 사람인데 서울서 우연히 이곳까지 내려왔다가 부인의 위급한 지경을 구하였으니 이것도 참 우연치 아니한 일이요. 그러나 나는 본래의 천성이 이렇듯 호협(豪俠)한 까닭으로 남의 가긍(可矜)한 사람을 보면 내 몸이 당하니보다 더욱 근심을 하고 동정을 표하는 사람이니까 조금도 은휘치 말고 이유를 말씀하여 주시오. 결코 해로운 일은 없으리다.』

그 여자는 다시 새로운 정신이 나는 듯이 백낙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함자가 백낙관씨라시지요? 그러면 혹시 이수일씨라고 하는 양반을 아십니까?』

『네, 알지요. 이수일이라 하는 사람은 내 예전 친구요. 그러나 부인이 이수일은 어찌하여서 아시는지요?』

『저는 심…… 심…… 심순애올시다.』

백낙관은 취하였던 얼굴을 높이 들며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보나 취한 사람의 눈이라 사람의 얼굴은 분명치 아니하다.

『응? 순…… 순애…… 심…… 심순애.』

『녜, 이수일씨와 한 집에 있던 순애올시다.』

『응, 순애씨!』

기이하게 만났을 뿐이 아니라 신기히 목숨을 구함을 백낙관은 다시 놀라 취하였던 기운도 반이나 없어지고 전일 여학교에 다니던 또는 이수일과 한가지로 있던 순애의 얼굴을 비로소 알아보고 한참 동안은 말이 없이 바라보고 있다.

『허허, 오래간만에 오늘 이곳에서 만나보오구료.』

두 사람은 이와같이 전일을 이야기하여 전일에는 시집동생과 같이 서로 알고 믿고 지내던 그 사람의 얼굴을 대하니, 순애의 처음에 자처코자 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오늘날 괴이히 서로 만남을 반겨하며 여자의 연약한 가슴으로 말보다 앞서는 것은 눈물이라.

순애는 백낙관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 눈물을 머금으며,

『전보다 신색이 대단히도 변하셨습니다그려.』

순애는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응, 여보, 내 얼굴도 많이 변하였겠지마는 순애씨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구료. 그러나 이마에서 피가 나니 무엇으로 씻으시오. 아마 아까 떨어질 때에 뱃널에서 다쳤나 보오.』

『그까짓 것은 관계치 않아요. 그러나 어쩐 일로 평양을 내려와 계셨으며, 무슨 인연으로 오늘 이 배 안에서 만나보게 되었습니까?』

『나는 본래 성질이 그렇게 미친 것 모양으로 사방으로 유락하는 사람이니까 다시 순애씨가 물어볼 필요도 없거니와, 그 후에 우리 친구 이수일은 어찌하여 계시오?』

순애는 홀연 가슴을 칼로 에이는 듯하다.

『글쎄, 차차 그 말씀도 여쭙고 의논도 하겠습니다.』

『글쎄, 지금 이수일씨는 어찌하고 있느냐 하는 말이요? 평안히 있는지, 평안치 못하게 있는지? 편안히 잘 있다 하는 말이요?』

『녜…….』

『나는 결단코 편안히 있지 못한 줄로 알고 있는데. 만일 오늘 저녁에 순애씨…… 아니 김중배씨의 귀부인이 빠져 죽으려 하는 줄을 알았던들 결코 이 백낙관의 손으로는 구하지 아니하였을 것을…….』

순애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대답이 없이 다만 느껴가며 울고 있을 뿐이라.

가슴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 수염은 맑은 바람에 흩날리며, 백낙관은 취하였던 얼굴이 점점 깨며 흰 달빛에 파랗게 비친다.

백낙관은 들고 있던 낚싯대를 뱃머리에 걸쳐놓으며 궐련을 피워물고 가장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감히 들지 못하는 순애의 모양을 들여다보며,

『순애씨, 내 말을 들어보오. 연전에 이수일이가 집을 버리고 거처없이 나갈 때에 나에게 마지막으로 부친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를 보고 나는 비로소 그때의 자세한 사실을 알았지마는, 그 편지를 처음 받아보았을 때에 나도 분한 마음이 어느 곳에 비할 수가 없었소.

그 당장으로 순애씨를 쫓아가서 보고 아무쪼록 망령된 마음을 돌이키도록 충고를 하다가 그래도 듣지 아니할 지경이면 그때는 사람으로 대접을 하지 아니하고 분한 가슴이 시원하도록 어떻게 하든지 분풀이를 하여서 일평생을 다시 시집도 가지 못가게 병신을 만들어놓으려 하였더니, 다시 가만히 생각하여본즉 이수일이가 그렇듯 말을 하는데도 듣지 아니한 순애씨가 황차 내 말을 들을 이치가 없고, 또는 수일이를 박대한 이상에는 그대는 김중배에게 팔려가는 일 개 물건인 고로, 남이 중가(重價)를 내고 사가는 물건에 험점을 내어서는 도리어 나의 구태여 할 일이 아니라고 돌려 생각하고 주먹같이 치밀어오르는 가슴의 분기를 억지로 참고 있었소.』

순애는 오히려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귀를 기울여 백낙관의 준절한 언론을 들으며 수건으로는 자주 눈물만 씻는다.

『여보, 순애씨. 나는 순애씨를 믿기를 그렇지는 아니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지요. 그와같이 서로 사랑하던 이수일이도 그대에게든 속았거든 하물며 나같은 사람이야 으레 속을 일이지. 나는 나대로 따로 그대를 원망할 뿐 아니라 이수일의 몸을 대신하여서라도 그대 를 원망하겠소. 어찌하여서 그대를 원망하지 아니하겠소? 삼생을 두고서라도 그대를 원망할 터이지.』

순애의 입을 악물고 참고 있던 울음은 드디어 느끼는 소리 배 안에 흐른다.

『이수일의 한 몸을 그르쳐놓은 것은 순애씨가 잘못한 죄외다. 또는 이수일로 말을 하더라도 명색이 일개 여자에게 속은 것으로 청년의 본뜻을 굴하고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이 몸을 타락하였으니 그와같은 몰지각한 행동에 대하여서는 따로이 이수일을 대하고 책망 아니치 못할 일이지마는, 이수일이가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다 하여도 그대의 죄는 여전히 그대의 죄가 아니오? 그뿐이 아니라 그대가 이수일을 버린 연고로 인연하여서 이수일이가 오늘날 저와같이 타락하였으니 그대는 여자의 몸으로 정절을 지키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남편되는 사람도 그대의 손으로 찔러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습디다.』

순애는 떨리는 몸으로 백낙관의 얼굴을 잠깐 치어다보니 백낙관의 노기가 가득한 목자로 순애를 흘겨보는 모양에 순애는 몸을 둘 곳이 없는 것같이 구축한다.

『순애씨도 가만히 생각하여 보오. 내 말이 조금이라도 그른 곳이 있는가? 이제 와서 그대가 전사를 뉘우쳤다 하니 그것은 가히 칭찬할 일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전에 잘못한 일을 뉘우치지 아니하면 사람이라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오늘날 그대의 뉘우친 일은 벌써 때가 늦었소. 이수일이가 몸을 타락한 일은 그 사람의 목숨이 없어진 것과 같은 것이야. 그대는 남편을 얻어서 동거한 지가 벌써 오륙 년이 되었으니 물은 엎질러지고 그릇은 깨진 셈이라, 이제 와서는 하나님의 힘으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일이니, 대단히 나는 순애씨를 위하여서 가엾은 마음은 간절하나 그대가 지은 죄라 그 보복은 당연히 그대가 받아야 옳을 일이외다.』

순애는 수건을 떼지 못하고 다만 느끼고 있을 뿐이다.

(슬프다, 이 몸의 지은 죄는 그와 같이 심한 줄은 알지 못하고 한 번 범한 이 몸의 죄를 그렇듯 크게 지었는지, 친히 당한 그 사람이 아니언마는 이와 같이 미이 여기며 이와같이 원망하니 친히 당한 그 사람의 마음은 어찌 나의 죄를 용서하리요.

슬프다, 나의 죄는 드디어 용서함을 받지 못하며, 나의 잊지 못하는 그 사람은 마침내 다시 만나보지 못하는가!)

순애는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이 샘솟듯하여 거의 맑은 정신을 잃었더라.

이익만 알고 당연한 도리는 알지 못하는 필부 순애를 밉고 또한 다시 밉게 생각하던 백낙관도 순애의 간절히 뉘우치고 슬퍼하는 모양에 동정을 표하는 마음이 움직인다.

순애는 말을 이루지 못하고 고개를 드리우고 우상같이 앉아 있다.

『그러나 순애씨, 잘 생각하였소. 잘 회개하였소. 비록 이수일이가 용서치 아니하며 또는 이 백낙관이가 용서를 하지 아니하더라도 그대의 이번 회개로 인하여서 스스로 자기의 마음은 용서할 줄로 아오.』

순애의 느끼는 소리는 오히려 그치지 아니한다.

『자기의 마음으로라도 용서를 받는 것은 남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느니보다는 얼만큼 나을는지 알지 못하는 일이요. 또는 스스로 자기 마음의 용서를 받는 것은 남에게 용서받을 장본이외다. 내 마음 같아서는 아직도 용서치 못하고 그대를 원망하고 또다시 원망하겠지마는, 오늘날 그대의 흉중은 내가 모두 살피고 있소. 순애씨의 마음도 자세히 모르는 것이 아니로되, 그보다 더한 이수일의 가슴 속을 내가 살펴보면 가엾고 불쌍한 마음이 아마 이수일을 향하여 더하다 할 수밖에 없소. 그러한 고로 나는 그 생각을 하면 순애씨의 고통하는 가슴 속은 오히려 가엾다 하는 마음이 적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요.

그러나 오늘날 우연히 이곳에서 만났고, 또는 위태한 지경을 구하였으니 오히려 우리가 전에 친절히 지내던 정분이 남아 있던 것인가 보오.

전일에 내가 순애씨에게 바라고 있던 마음은 누이와 같이도 여기고 계수(季嫂)와 같이도 알아서 수일에게 향한 마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장래에 가서는 서로 힘을 도와서 세상을 보내자고 태산같이 믿었더니 호사다마(好事多魔)로 모두 와해(瓦解)가 되고 몇 해만에 오늘밤에 만나보니 전사는 어찌하였든지 반가운 마음은 측량 없소.』

순애는 백낙관의 말마디가 그칠 제마다 느끼어 나오는 울음소리만 들리고, 대답을 하려다가는 다시 울음에 막혀 말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저렇듯 머리를 얌전히 쪽찌고 남의 부인이 되어 있는 모양을 보니까 조금도 가엾고 반가운 마음이 없어지오. 그대가 나더러 부득불 할 말이 있다 하기에 무슨 말을 하든지 들으리다. 저렇듯 이수일이도 속였으니 그 수단으로 나는 또 얼마나 속일는지, 대체 하는 말을 들은 후에 순애씨의 허물을 꾸짖어 주고자 하였더니, 순애씨의 말이 김중배에게로 출가한 후 오ㄹㄱ 년이 되었으되 한 번 몸을 허락한 일이 없고, 다만 수일을 위하여 절개를 지키고 있다가 오늘저녁에는 우연히 김중배의 음흉한 계책에 빠진 바 되어 드디어 몸을 더럽히고 수일에게 대하여 의리도 없거니와 원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상을 이별코자 결심을 하였더라니 그 마음은 내가 대단히 가상히 여기는 바이요. 그대의 회개함을 또한 나도 기꺼워하는 터이니 오늘밤 이 배 안에 있는 순애씨는 전일의 순애씨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소. 만일 그렇지 못하고 순애씨를 내가 만났던들 그대의 얼굴에 이보다 몇 배나 되는 상처를 내 손으로 내어서 집으로 돌려보낼 것을…….

그런 고로 스스로 마음에 용서를 받는 사람은 남에게도 용서를 받을 시초라 하는 것이요. 그러한데 순애씨의 말이 이수일을 만나게 하여 주오, 이수일씨를 보거든 내 속의 설운 사정을 말씀하여 주오 하지마는, 그것은 내가 하지 안하겠다는 말이요. 그 이유를 말하면 내가 아무리 말을 한다 하더라도 들을 리도 만무하고, 또 그대의 몸에 허물이 있는 줄을 알고 있으면서 그 부탁을 들어줄 나도 아니오. 내가 이수일이가 되었더라도 결단코 그대의 허물을 용서할 리 없지. 형제같이 친절한 친구의 원수와 같은 사람을 만나가지고도 손 한 번을 대지 아니하고 그저 두는 것은 그래도 백낙관이가 전일에 순애씨를 친히 알던 정분이 아직도 남아 있는 줄로 알아주시오.

오래간만에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반가운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듣기 싫은 소리만 하여서 대단히 불안하오마는 어찌 알지는 마시오.』

달빛은 점점 밝아지고 바람결은 더욱더욱 맑아지는데, 흘러 내려오는 배는 벌써 연광정(練光亭) 근처에 다다랐다.

백낙관은 노를 저어 한편 언덕으로 배를 대려 하며, 다시 순애의 얼굴을 돌아보아 엄숙한 언사로 경계하듯 이 말을 한다.

『밤은 점점 늦어가니 어서 집으로 도로 들어가시오. 이와같은 망령된 생각은 다시 내지 말고……. 남편이 있는 여자가 밤이 깊도록 밖에 나와서 외인과 서로 수작을 하고 있는 것이 온당치 못하거니와, 나도 내일 아침 술안주 할 고기잡기가 늦어가니 다시는 그러한 지각없는 행동을 하지 말고 김중배라 하는 남편이 있는 이상에는 아무쪼록 잘 받들어서 백년해로하시오.』

순애는 백낙관의 노젓는 소매를 붙들고 흐트러진 머리와 눈물에 어린 얼굴로 슬피 원정을 하는 듯이,

『잠깐만 참아주세요. 제 몸의 사생은 당신 말씀 한 마디에 달렸습니다. 지금 말씀이 집으로 속히 돌아가라 하시나, 저는 결심하고 나온 터이니까 이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다시 김중배의 집 문하에 발을 들여놓치는 아니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와서 무슨 면목을 들고 이런 말씀을 하겠습니까마는, 어떠한 사정을 말씀하더라도 도무지 수일씨께 말씀을 잘 하여주지 아니하겠다시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당신께서도 제 몸은 용서치 못하겠다 하시는 말씀이지요?』

『암, 그렇지요.』

하며 백낙관은 배를 다시 저으면서 언덕에 내리려 한다. 순애는 노를 붙잡고 초조하며,

『잠깐만 참아주세요. 또 한 마디 말씀할 일이 있으니 한 마디만 더 들어주십시오.』

『아무리 순애씨가 천언만어(千言萬語)를 하여도 되지 아니할 말을 하면 무엇을 하오?』

『아이고, 그렇게 심히 말씀하시지 말고 말씀 한 마디야 못 들어주실 것이 있습니까? 잠깐만 참아주십시오.』

순애는 강물을 향하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묵묵히 앉아 있는 모양을 백낙관은 보지 못하는 체하고 옆에 놓여 있던 술병을 끌러 한잔 두잔 마시고 있다.

『여보시오 영감, 그러면 다시는 용서하여 달라고 말씀은 아니하겠습니다. 수일씨도 말씀하여 달라지 아니할 터이올시다.』

백낙관은 눈을 돌려 순애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 다시 강가를 멀리 내다본다.

『한 번만 수일씨를 만나보고 그 앞에서 제가 잘못한 죄를 마음대로 실컷 자복(自服)을 하겠습니다. 단지 수일씨의 눈앞에서 자복만 하여 보았으면 나의 소원이 풀어지겠습니다. 제가 죄를 자복하기로 수일씨가 용서하여 주실 리도 없거니와, 저 역시 용서하여 주기를 바라지도 아니합니다. 바라야 소용없는 일이니까 용서하지 않으시더라도 관계는 없어요. 나도 결심한 일이 있습니다. 한 번만 다시 보고 이 원통한 가슴을 쏟아놓았으면…….』

순애는 다시 눈물을 흘린다.

『그러하오니 마지막으로 아무리 미운 계집이라도 소원을 한 번만 들어주셔서 저를 데리고 수일씨를 한 번만 만나게 하여줍시오. 당신께서 데리고 가시면 수일씨가 필경 만나보실 터이니 만나기만 하게 하여주시면 그때는 제가 수일씨의 손으로 죽더라도 좋습니다. 당신과 수일씨와 두 양반이 제 죄를 책망하시고, 또는 꾸짖다가 수일씨의 손으로 이 목숨을 끊어주십시오. 저는 이수일씨 손에 죽었으면 어떻게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소원은 이것이올시다.』

간절한 언사에 감동된 백낙관은 머리를 끄덕이며 긴 수염을 쓰다듬는다.

『응, 그것참 좋은 말이요 이수일이를 한 번 만나서 이수일의 손으로 죽여주기를 원한다 하니. 어, 그것은 참 잘한 말이요. 순애씨의 그 말 한마디는 진정 잘 생각한 말이요. 그래야만 사람이지. 그러나 지금은 그대가 김중배의 부인이 아니오? 김중배라 하는 남편을 가지고 있는 몸으로 될 수가 있는 말인가?』

『나는 아무리 하여도 관계 아니해요.』

『그것은 또 아니될 말이지. 이수일의 손으로 죽여주었으면 원이 없겠다 하는 말은, 그 회개한 마음이 대단히 좋으나 그렇게 말을 하고 보면 순애씨는 이수만 알았지, 김중배라 하는 남편 있는 줄은 모르는 말이요구료. 남편은 어찌하려고 그러한 말을 하오. 남편에게 대하여 의리가 벗어나지 아니하겠소? 좀 생각을 해보시오구료. 그러하고 보면 처음에는 김중배로 인연하여 이수일을 속였고, 지금은 또 이수일로 인연하여서 김중배를 속이는 것이니, 한 사람 뿐 아니라 두 사람씩이나 속이려 하는 셈이니, 한편으로는 전죄를 회개하고 또 한편으로는 죄를 지으면 일껏 회개한 본의가 없어지오.』

『그까짓 일은 상관 없어요.』

『상관 없다니? 그것은 어떻게 하는 말이요?』

『아니오. 아무래도 관계 없어요.』

『그것이 아니될 말이지.』

『나는 그까짓 일을 가지고서는 털끝만치도 마음에 거리끼지 않습니다. 내 몸 하나는 아무렇게 되든지 관계 아니하고 벌써 버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단 한 번만 수일씨를 만나보고서 내 가슴 속에 있는 말씀을 모두 속이 시원하도록 다 한 번 하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기가 원이올시다. 김중배야 어찌되든지 누가 압…… 차라리 그리하고 한 몸 죽어버리는 것이 상책이야요.』

『그게 무슨 지각없는 말이요? 그와같이 몰각한 사람하고는 나는 서로 수작하기도 싫소. 대체 그대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까닭으로 처음에 이수일이도 그러하여서 버렸지. 참 진실로 괘씸하오. 남의 아내가 된 몸이 남편을 속이면서 그대로 관계치 아니하다 하는 말이요? 그러한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나는 도리어 김중배를 가엾다 생각하고, 그대와 같은 의리도 없고 인정도 없는 아내를 얻어서 김중배 그 사람의 불행한 사정을 불쌍히 여기겠소. 과연 말이지, 김중배에게 동정을 표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고 점점 미운 사람은 순애씨 한 사람이요.』

순애는 격앙하고 무안한 모양으로 백낙관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어떻게 회개를 해야 좋겠습니까? 아무쪼록 당신께서 잘 지도를 해주셔야 아니합니까?』

『나는 가르칠 수 없소. 순애씨가 잘 생각하여 보시오.』

『아이고 영감, 너무도 야속하게 말씀을 하십니다그려.』

홀로 슬픈 마음에 순애는 백낙관의 소매를 붙들고 체읍한다.

백낙관은 순애의 하는 모양에 비창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순애의 파리한 얼굴을 이윽히 들여다본다.

『영감, 이토록 저는 회개를 하였는데…… 이전 순애로만 생각하시고 조금 도와주세요. 어찌하면 좋을는지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울음에 섞여 나오는 목소리는 자세히 들리지도 아니한다. 배는 스스로 흘러 대동문을 향하고 내려간다.

다시 노젓는 소리만 삐걱삐걱할 뿐이라.

배 안에 있는 두 사람은 서로 향하여 앉아서 묵묵히 말이 없다가 백낙관은 비로소 입을 열어 길게 탄식하며 순애를 돌아본다.

『여보 순애씨! 그대의 하는 말은 모두 내가 자세히 알아들었고, 결단코 억지의 말이 아닌 줄로 나도 아오. 아무쪼록 좋은 방법이 있으면 가르쳐주어서 순애씨 몸에 유익한 일이 있도록 하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 말을 가르치지 못한다 하는 것은 내가 만일 순애씨의 몸이 되었으면 이렇게 하겠다고 생각하겠지마는…… 그 말은 잠깐 말할 수 없소. 말해서 좋을 일 같으면 말을 할 터인데, 그 말이 남을 대해서 할 수가 없는 말이요. 더구나 남을 가르쳐주지는 못할 말이니까, 다만 나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일이요. 내 속으로만 생각할 일을 남에게 이야기하였다가 도리어 그르쳐 놓아서는 아니 가르치니만도 못할 일이니까 차라리 나도 더 깊이 생각하여 본 후에 좋은 방법이 생기거든 그때에 다시 순애씨를 만나서 가르쳐 드리오리다. 내 집이 서울 어디냐? 나는 대해의 부평초 같은 사람이니까 사해가 다 내 집이지요. 내가 의표도 이렇듯 추로하니까 그대도 아마 어떠한 일인고 하고 놀랐겠지마는, 내 몸에 대하여도 여러 가지로 사정이 있어서 그러하니까 그 이야기도 하고 싶지마는 그 이야기는 이 다음에 하지. 술은 너무 먹지 말라 순애씨가 권고를 하니, 오늘은 특별히 다른 날보다 더 취하였소. 이후에는 순애씨의 권고를 들어서 정신을 차리오리다. 아무쪼록 힘을 도와달라고 순애씨의 말이 그러하지마는, 나는 결단코 의리로 그대를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순애씨의 사정도 내가 다 알았으니까 그대의 몸에 유익한 일을 방해는 할 리가 만무하지요. 수일이도 그 후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는데 한 번 만나서 물어볼 말도 많이 있지마는 한 번도 찾아간 일이 없지요. 순애씨는 나더러 서울로 한가지 가서 이수일을 만나보게 하여달라고 하지마는, 나도 아무리 이렇게 한가한 듯하여도 대단히 바쁜 몸인데 한가하게 어찌 그리할 수가 있소. 순애씨도 이 세상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마는, 나 역시 마찬가지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한 번 무엇이 잘못된 일이 있으면 일상 그 일이 꿀리어서 아무것도 되지 아니하는 법이온데, 나도 요사이 같아서는 살아 있는 본의도 없지마는 공연히 죽을 수도 없는 일이요. 고생과 근심으로 세상을 지내려 할 것 같으면 죽어버리는 편이 물론 낫지요. 무슨 까닭으로 목숨이 아까우냐 하면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일이야.』

백낙관과 심순애를 실은 배는 벌써 대동문 밖 강가에 닿았는데 백낙관은 낚싯대와 술병을 한 손에 들고 몸을 일어 강 언덕으로 내려서며,

『오늘은 우연히 만나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그러면 나는 주인집으로 갈 터이니 다시 또 기회가 있으면 만납시다.』

『아이고 영감, 잠깐만 기다려 주셔요.』

하며, 순애는 백낙관의 두루마기자락을 붙들고 매달린다.

『그러면 내 일은 어찌하면 좋습니까?』

『결심하기에 달렸지.』

하며 백낙관은 비로소 가르쳐주는 것같이 말 한마디를 이르고 가려 하는 것을 순애는 오히려 옷자락을 놓지 아니하고,

『결심이라는 것은 어찌하는 것이오니잇가?』

『생각하여 보면 알 일이지.』

하며 순애의 팔을 뿌리치고 대동문 안으로 향하여 들어간다.

순애는 백낙관의 뒤를 바라보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느껴가며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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