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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몽/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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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적원(積怨)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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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 전부터 김정연의 집에는 등불을 켤 때에 이르면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나 늙은 부인 한 사람이 시각도 조금 어김이 없이 찾아온다

그 부인의 연기는 육십여 세나 되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잡혔으나 육색은 결백하고 모양도 단아하여 한번 보매 하등 인물의 가정에서 생장하는 사람 같지는 아니하나, 다만 괴이한 것은 남루한 의복을 광인같이 몸에 걸치고 이곳저곳으로 떨어지고 구멍이 나 있는 행주치마를 접침접침하여 머리 위에 얹고 옆에는 조그마한 보퉁이를 유지에 싸서 끼어들고 뒤축은 다 없어진 마른신을 질질 끌고 날마다 저녁때가 되면 김정연의 집을 찾아와서 부득이 주인을 보겠다 하나, 공교히 그때마다 마침 김정연은 출입하고 집에 있지 아니하였는 고로 마지못하여 집으로 돌아가니, 오히려 마지 아니하고 황혼에 이르러 매일 그 시간도 잊지 않고 오는 고로 김정연의 부인 공씨도 비로소 이상히 생각하였더라. 그 여자가 삼사 일을 연속하여 오는 날에는 그 거동이 심히 수상하며 그 눈에는 독한 기운이 가득하여 사람을 바라보며 때없이 웃는 웃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등에 물을 끼얹는 것 같으며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황혼이 되면 시간을 어기지 아니하고 찾아오는 우리 집에 무슨 작희를 하려 함이 아닌가 하여 공씨는 홀연 두려운 마음을 머금고 다시는 오지 아니하도록 김정연에게 그 말을 고하여, 이날은 김정연이가 바깥 일을 일찌기 마치고 일찌기 집으로 돌아와서 그 늙은 여자가 오기를 기다린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여편네가 성치 못하고 미쳤거나 무슨 병이 있거나 합디다. 그래도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상스럽게 지내던 사람은 아니던 게야요. 오며는 언제든지 마루에 걸터앉아서는 집안을 모두 휘휘 둘러보면서 주인 어디 갔느냐고 묻고는 다른 말은 하지도 아니하지요. 눈을 휘둘러 사면을 돌라볼 제는 꿈에 보이던 무슨 귀신의 눈같아서 날마다 여편네가 올 때가 되면 나는 공연히 겁이 나고 무서워서 못 견디겠어요. 어찌하여 그런 미친 것이 날마다 우리 집에만 올까요, 고약도 하지.』

하며 공씨는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니,

『아직 그 시간은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김정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한참이나 생각하며,

『그게 웬 여편네란 말이요? 이상한 일도 있고. 나는 도무지 그러한 여편네가 올 까닭이 없는데, 대체 웬 사람이냐고 물어보지.』

『물어보아도 대답을 아니해요. 그 모양을 보니까 정신없이 대답할 듯싶지도 아니합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에도 또 올 모양인가?』

『아무쪼록 아니 왔으면 좋으련마는 필경 또 올걸요. 그렇게 날마다 와서는 내가 제일 무서워서 못 살겠으니, 오늘 오거든 영감이 잘 일러보내요.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하여 주시오.』

『그것이야 낸들 어찌 장담할 수가 있나? 미친것을 가지고.』

『미친것이 날마다 오니까 나는 더 무섭지요. 수일이는 병원에서 나오지 않고 영감이라야 집에 계시는 때가 적고 나 혼자 있을 때 오면 진정 나는 못견디겠소.』

『아무리 하지마는 성한 사람도 아니요 미쳐서 그런 것을 낸들 어찌하느냐 말이오.』

남편더러 말을 하나 조금도 상쾌한 대답이 나오지 아니함을 보고 공씨는 더욱 낙심되어 고개를 한편으로 기울이고,

『여보, 영감도 그 여편네를 처치할 수가 없거든 순사에게라도 말을 하여서 데려다가 징치를 하게 하시구료.』

김정연은 허허 웃는다.

『그렇게 요란히 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글쎄, 내가 요란히 구는 것이요? 그 계집이 오면 실쭉한 마음이 나니까 그렇지요.』

『미친것을 좋아할 사람은 어디 있나?』

아침부터 종일토록 하늘이 흐려 엷은 햇발도 보이지 아니하던 날 점점 어두워지며 아직도 봄날의 추위가 바람에 섞여 사람의 몸을 핍박하며 집집마다 처마에는 불빛이 비로소 나타난다.

일진광풍이 땅 위에 모래와 티끌을 몰아가 일어나며, 그 바람이 지나간 후로 괴상한 늙은 부인 한 사람이 나타난다. 반백이 넘은 머리털은 흐트러지고 바람에 나부끼며 김정연의 집을 향하여 온다.

그 여자는 지치어 있는 대문을 열려 하다가 고리에 걸려 열리지 아니하므로 소리를 높이 하여,

『문 열어주오. 여보, 주인 없소, 주인이 없어요?』

바람은 그치지 아니하고 때때로 불어 지나가는 소리 들리는데, 그 여자의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공씨는 깜짝 놀라며 김정연의 무릎을 꾹 찌르며,

『여보 영감, 저 소리 좀 들어보우. 또 왔구료.』

『응, 그것인가?』

김정연은 마음에 좋지 못한 모양으로 등불을 켜 들고 문간을 향하여 가며,

『거기서 찾는 사람이 누구요?』

『주인이 계십니까?』

『녜, 주인은 여기 있소. 그러나 당신은 누구요?』

대답은 하지 아니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만 들린다.

『글쎄 누군데 대답이 없단 말이요?』

『얼굴을 보면 알지요. 그렇게 돈은 많이 벌어서 다 무엇을 하고 집은 밤낮 이러한가? 여보, 어서 문이나 열어주오.』

하며 대문을 두드린다. 김정연은 문을 열지 아니하고 그대로 쫓아 보낼까 하였으나 그 여자의 동작이 그저 돌아가지는 아니할 듯한 고로 좌우간 한 번 만나서 어떠한 사람인지 보리라 하고 문고리를 벗겨주매 과연 듣던 바와 같은 늙은 여자 한 사람이 들어온다.

『내가 주인 김정연이요. 그러나 무슨 볼 일이 있소?』

『옳지, 네가 김정연이로구나.』

하며 그 여자는 두 손을 얼굴에다 대고 흑흑 느끼며 운다. 김정연은 무슨 연고인지 알지 못하여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울고 있는 모양을 이상히 들여다보고 있다.

『알 수 없는 일도 다 있고. 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게 할 말이 있다 하는 말이요?』

그 여자는 울기를 마지 아니하다가 홀연 김정연의 앞으로 달려들며 소리를 높이 지르며,

『이놈아, 이 천하에 몹쓸 도적놈아.』

『이게 별안간 무슨 소리야, 응?』

『이 몹쓸놈아, 이 도적놈아, 나같은 늙은것이나 징역을 하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얌전한 우리 아들이 징역을 하니…… 나로 말하면 점잖은 집안이요, 잘 살던 협세로 인제는 후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내일 모래 며느리를 보려고 하던 것을 이 모양이 되었으니 누가 이런 집안에 딸자식을 며느리로 주겠느냐? 혼인한 후만 같더라도 관계치 아니할 것을…… 우리 아들 아남이가 나이는 지금 열아홉 살이 되었어도 아비 없는 과부의 자식으로 귀히 귀히 길러서 아직 세상 일도 알지 못하는 어린것을 속여서 징역을 하게 하니, 자, 인제는 내가 원수를 갚을 터이니 그런 줄 알아라.』

김정연은 그 부인의 위험한 행동에 놀라 옆으로 피하여 서며,

『아, 정말 참 미친 사람이구먼!』

늙은 부인은 노기가 점점 더하여 두 발로 땅바닥을 구르며 드문드문 빠져 있는 이를 드러내어 지금에 김정연의 살을 물고 피를 마실 듯이 원통한 마음이 가슴에 가득한 목자로 김정연을 쳐다본다.

『돌아간 우리 남편이 임종시에 눈을 차마 가지 못하면서 아무쪼록 나 죽은 후에 잘 기르라고 신신 부탁을 받은 남의 외아들을 속여서 징역 하게 만든 것이 네가 아니고 누구냐? 너는 내가 여편네라고 업수이 여겨서 네 마음대로 남의 집을 결단을 내어놓았지마는, 나도 칼 하나만 가지면 네 목숨 같은 것은 어느 틈에 없어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아마 너도 좀 무섭지?』

늙은 부인은 홀연 쾌활하게 한 번 웃는다.

『우리 며느리 감이 꽃 같은 얼굴로 침선방적(針線紡績)에 무엇을 못하는 것이 있나. 봉치를 받아놓고 그 이튿날은 신랑이 초례하러 오기를 기다리다가 초례는 하러 가지 아니하고 징역하러 갔단 말이냐? 아, 아남(雅男)아, 네가 이게 무슨 횡액이냐. 어서 사모 관대 입고 장가들러 가거라, 응. 내가 밤에 잠을 아니 자고 밤이면 네 장가들 제 입히려고 지어놓은 옷이 여기 있다. 어서어서 입어라. 어서 가서 색시를 데리고 오너라. 나도 늙어서 며느리를 보면 내 힘도 얼만큼 덜겠느냐? 이게 다 네 효도로구나. 늦게야 고부가 서로 의지하고 살아보자. 어서 어서 나는 며느리 얼굴이 보고 싶다.』

하며 혼잣말과 같이 중얼거리다가 홀연 허리에 차고 있던 보퉁이를 끄르더니 김정연의 앞에 펼쳐놓으며,

『자, 어서 네 모가지를 이 속에 담아놓고 뚝 떨어뜨려서 이 보퉁이 안에 떨어지면 얼핏 담아가지고 가지.』

하며 늙은 부인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가 다시 땅을 굽어보며, 또는 김정연의 얼굴을 치어다보며 악한 원귀 목소리 같은 괴이한 목소리로 울기도 하며 웃기도 하며 정신을 진정치 못하는 모양이다. 김정연은 처음에는 사실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였다가 징역을 하느니 아남이가 어찌 하였느니 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그 늙은 부인의 내력과 사실을 짐작하였더라. 그 늙은 부인의 아들 이아남(李雅男)은 일찌기 김정연의 채무자가 되었더니, 사서위조죄(私書僞造罪)로 김정연의 고소로 인하여 월여 전에 징역 육개월에 처하였으므로, 그 모친은 이로 인하여 어지러운 마음을 전정치 못하고 드디어 성광(成狂)하였더라. 그와같은 사람인 줄은 이미 김정연도 짐작하였으나, 김정연은 자기의 그릇한 일이 그 이면(裡面)에 은복(隱伏)하여 있음은 다시 생각지 아니한다.

이아남이가 사서위조죄로 징역에 선고됨은 진정한 사실이로되, 은연중에서 그 죄를 만들어 빠지게 하여놓은 사람은 김정연이라. 이아남이가 김정연의 악한 수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재물을 빼앗긴 후 또는 몸까지 버리게 되었으니, 법률의 조문은 조금도 용서함이 없고 어리고 경력 없는 이아남은 늙은 모친의 외로와함을 생각할 여가도 없이 옥졸의 밥이 되었더라.

슬프다, 아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홀로 집에 있어 그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그 모친의 마음이 어떠하리요.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척에게 돈목하여 인리(鄰里)가 모두 칭찬하여, 꽃같이 아름다운 규수가 있어 혼인날을 택하여, 택일한 날이 임박하매 하루만 지내면 초례를 이룰 것을 불행히 감옥에 신세질 몸이 되었으므로 이미 언약하였던 혼약은 자연 파의되고, 요사이로 아름다운 신랑재목이 있어서 통혼하므로 규수의 집에서는 반가이 여긴다 함을 듣고 그 모친은 여러 가지로 원통한 마음과 분한 마음과 슬픈 마음에 드디어 이르렀더라.

김정연은 무익히 실성한 사람을 발행하느니보다 오히려 공손히 대답하여 보냄이 가하리라 하여,

『허허, 내 목이 그닥지나 욕심이 날 것 같으면 내 목을 줄 것이니 문밖으로 나아갑시다. 어서 일어나시오.』

늙은 부인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네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이놈, 네 손으로 우리 아들을 속이고 돈만 빼앗을대로 실컷 빼앗고 그래도 부족하여 징역까지 하게 만들어놓았단 말이야? 부모에게 효성하는 이 세상에 다시 없는 우리 아들을…… 천하에 몹쓸놈도 다 있다. 그래도 모르는 체하니?』

펼쳐있는 유지를 김정연의 턱 아래에 대매 가슴이 뒤집히는 듯한 비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

김정연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뒤로 돌리매 늙은 부인은 김정연의 얼굴을 치어다보며 두 팔을 벌리고 손뼉을 치고 강동동 뛰놀면서,

『옳지 옳지, 저것 보아라. 네 모가지가 저절로 점점 가늘어지는구나. 인제 곧 땅에 똑 떨어지겠다.』

하며 떨어지는 목을 유지에 받으려고 두 손으로 받쳐들고 이리 대며 저리 댄다.

김정연은 두 손으로 밀쳐 대문 밖으로 내보내려 하나 늙은 부인은 문설주를 더 휘어잡고 다투면서,

『옳지, 네가 나까지 이 높은 언덕에서 떨어쳐 죽이려 하는구나, 이 도적놈아! 이 원수놈아!』

하며 벽력같이 소리를 지른다.

김정연은 힘을 다하여 문밖으로 내밀치고 안으로 대문을 닫아 걸었더라. 밖으로서는 문을 두드리며 오히려 욕설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이놈아, 이 도적놈아! 어서 네 모가지를 어서 다고.』

김정연은 문틈으로 바깥 모양을 엿보고 있는데 방안에서 몸을 벌벌 떨며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던 공씨는 광인(狂人)을 문밖에 내쫓겨남을 보고야 비로소 발자취를 가만가만히 하여 김정연의 뒤로 와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여보 영감, 그만 내버려두고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하며 공씨는 김정연을 억지로 이끌고 방안으로 들어왔는데, 늙은 부인은 오히려 돌아가지 아니하고 홀로 소리를 지르며 무죄한 아들이 김정연으로 하여서 무실한 죄명을 쓰고 징역을 하게 된 사실의 자초지종을 말하고, 홀로 울며 홀로 부르짖어 밤늦도록 돌아감을 잊어버리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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