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20장
아들의 원수되는 김정연의 머리를 얻고자 하여 황혼 때마다 실성한 늙은 부인의 찾아옴이 거의 팔구차에 이르렀더라.
쫓아내나 오히려 돌아가지 아니하고 문 앞에 있어 떠나지 아니함을 요란히 하여 무익한 일인 고로 다만 임의로 거취를 맡겨 두었더라.
김정연은 그와같은 광인이 날마다 문 앞을 떠나지 아니한다 할지더라도 능히 한 집안에 재앙은 주지 못할지니 한갓 이웃 개와 다름없는 물건이 문 앞에 누워 있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생각하였으나, 눈맞은 솔이파리 같은 머리털을 흐트러치고 요괴(妖怪)의 불빛 같은 눈을 사면으로 휘두르면서 웃어도 보며 울어도 보며 노하여도 보고 다시 꾸짖어도 본다.
침침한 칠야에 홀로 하늘을 우러러 슬픔과 원한을 호소하며 비린 냄새 나는 유지를 펼쳐들고 다만 사람의 머리를 구하고자 하는 광인이여, 비록 지금에는 큰 해를 더하지 아니할지라도 마침내는 그 집에 일개 대환을 자아내리로다.
사람의 골수에 사무치는 한 마음은 불로도 능히 물을 만들 것이요, 산으로도 능히 바다를 이룰 것이요, 강철을 쪼개며 바위를 부시는 힘도 없음이 아니어늘, 하물며 한 집을 멸하며 한 가족을 살해함에는 손바닥을 뒤집느니보다도 도리어 용이할 것이니, 두렵도다, 아무쪼록 무사태평하기를 공씨부인은 심중으로 축원하고 있다.
남편되는 김정연은 이아남이가 사서위조한 죄로 감옥에 형벌을 취함이 모두 자기의 흉계 중에서 나옴은 그 아내 공씨더러 이르지 아니하였는 고로 진실한 죄는 성광한 부인의 아들에게 있고 우리 집안에 대하여는 추호라도 남에게 원망을 받을 이유도 없고 그와같은 일이 일어남도 피차 영업상 승패에 있음이요, 또는 대차상(貸借上)에 손해가 돌아옴을 생각하면 차마치 못하는 일이라도 행함은 장사배의 관습이라 하며, 공씨는 스스로 믿고 그 부인의 성광함은 남편의 소위로 인하여 전혀 그러함이 아니라 생각하였더라.
그러나 사람의 어버이된 자의 자손을 사랑하는 간절한 정리를 생각할지라.
대개 이와같은 사정으로 사람의 원망을 사나니, 원망한 후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을진대 다만 마음에 솟아나오는 것은 두려운 것 뿐이라.
날을 두고 황혼 때이면 문 앞에 찾아옴은 은근히 우리의 목숨을 앗고자 함은 아니며, 문 밖에서 떠나지 아니함은 그 원굴한 마음이 서리어 한마음 한결심으로 우리 부부 두 사람을 저주(沮呪)함이 아닌가 하여 기위 믿음에 이르니, 공씨는 황혼 때에 이른 후부터는 괴이한 마음을 진정치 못하고 염불 나무아미타불이나 하여 두려운 마음을 잊어버리더라.
이날은 봄바람이 더욱 심하여 낮부터 흐린 일기에 티끌이 하늘을 가리우고 나뭇가지는 흔들리며 일식이 황혼에 이르매 더욱 풍세가 심하며 만호가 바람 속에 잠겨 있는 밤이 되었더라.
김정연의 집에도 처마 아래에 있는 등불도 바람에 사라지고 사면으로 끼어 있는 유리조각이 두어 조각이나 땅에 떨어졌으나 방안에 고요히 켜놓은 등불빛은 김정연의 저녁상 대하여 반주를 시작한 소반 위를 비치었다.
화로 위의 남비에서 부글부글 끓이는 것은 안주를 준비하였음이니 이날 저녁에는 아직도 그 실성한 사람이 오지 아니하였더라
공씨는 한편으로는 의아하며 또 한편으로는 적이 겁나는 가슴이 가라앉는 듯이 기꺼워하는 모양이 보이며,
『미친 계집도 오늘 같은 바람에는 할 수 없나 보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왔을 터인데 입때지 아니 올제는 오늘은 아마 아니오는 것이지. 아무리 미친 이라도 이 바람에야 어찌 나서겠소. 그래도 부처님께 소원하고 염불한 효험이 있나보오.』
김정연은 술잔을 연하여 삼사 배 기울이며,
『허허, 오늘은 가던 중 제일 술맛이 좋으이그려, 그 미친 마누라장이가 오지 아니하니까. 오기로 무서울 것은 없지마는 공연한 마음에는 실쭉하여서 그것이 와서 문 밖에 있는 때는 음식이 다 맛이 없는걸.』
『아이고, 그렇고말고요. 나는 요사이 꿈에 마다 그 마누라장이가 보여서 피하면 쫓아오고 숨어도 찾아와서 죽이려는 것같이 덤비는 것을 간신히 벗어나서 달아나다가 언덕 위에서 뚝 떨어지는 서음에 깜짝놀라 깨달으면 꿈이요구료. 땀이 쭉 흐르고 그제야 가슴이 시원 하게 숨이 나오니 날마다 그런 흉한 꿈을 꾸고 어찌 살겠소? 인제는 다시 오지 아니하였으면 좋으련만.』
불어오고 불어가는 바람은 대해에 물결치는 듯한 소리 들리며 심한 때에는 집이 울리고 기와가 벗어져 천병만마가 사면으로 몰아오는 듯한데, 다만 서로 향하여 방안에 있는 김정연의 부부 두 사람의 얼굴만 적적히 불이 비치었더라.
성광한 부인은 과연 그날은 이르지 아니하였더라. 기꺼워하며 또는 취하였던 김정연의 부부는 이날 밤은 두 발을 길게 뻗고 잠이 들었더라. 바람은 그치지 않고 더욱 맹렬하여 천지가 요란하며 야색이 처참한데 홀연 이와같이 흑암한 야반에 김정연의 집 뒤로부터 일도 화광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집에 가리어 무슨 불기운인지 알지 못하였다가 조금 있더니 지붕과 처마가 잠깐 보이고 다시 사라지매 이는 심한 바람에 불기운이 위로 감히 오르지 못하고 바람에 쫓기어 아래로 깔렸음이라 조금 있다가 다시 화광이 은은히 보이더니 바람이 지나간 후 다시 몰아오는 바람이 없는 틈을 타서 훌훌 뛰어오르는 화염은 그때야 비로소 사면을 비추었더라.
순식간에 불꽃은 종횡으로 만연하여 김정연의 집은 화염에 잠기었으나 불길은 하늘을 태우고 연기는 중천에 흩어져 그 사이부터 때때로 집이 무너져 주저앉는 소리인지 쾅쾅 하는 소리 또한 처참하며 집의 전후는 모두 불 속에 묻히었더라.
처음에는 화광 중에서 형용을 자세히 보지 못하였더니 황혼이면 오던 늙은 부인이 화염을 업수이 여기고 홀연 한가운데 서서 뛰놀며 소리하여 천연한데 얼굴은 거의 익을 듯이 되도록 붉은 모양은 재앙을 맡은 귀녀(鬼女)가 나타남인가 의심한다.
실로 그 여자는 한 발자취도 떼어놓지 아니하고 불이 잘 일고 못 이는 것을 감독하는 듯한 목자로 바람과 연기와 화광이 함께 섞여 힘을 다하여 다투는 것을 얼마나 상쾌히 생각하였는지 웃음을 띄우는 얼굴은 이 세상에 다시 또 짝이 없으리로다.
바람소리 심한 연고로 이웃에 잠든 사람이라도 이와같이 불이 심하였음은 알지 못하여 한 사람도 불을 끄러 동하는 사람도 없다.
집은 이미 주저앉았는데 그 틈으로서 한 소리로 부르짖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늙은 부인이라. 히히 하고 한 번 높이 웃었더라.
인리의 여러 사람들이 비로소 화재가 있음을 알고 불을 구하느라 요란히 들낼 때에는 김정연의 집은 이미 화염중에 싸여 문호마다 불꽃이 쏟아져 나오며, 화세를 돕는 바람은 그치지 아니하여 소방대의 힘으로도 능히 억제치 못하고 이웃집 삼사호까지 연소된 후 그 이튿날 아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화(鎭火)하였더라.
김정연의 집은 티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한 조각 흙과 재가 되었는데 날이 밝도록 주인 김정연의 부부는 자취가 없음을 괴이히 여기며 무슨 과실로 열화중에 장사함은 아닌가 의심하여 경찰관리는 사방으로 수색하였더라. 뜨거운 재 아래로 반은 타고 반은 부풀어오른 신체 한 개를 발견하였으니 사람의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할 참상을 이루었으나, 간신히 그 신체는 김정연의 공씨인 줄 알았는 고로 다시 사면으로 김정연의 주검을 찾으나 용이히 알기 어렵더니, 마당 아래 있는 근처에서 사라져 죽은 사람의 뼈를 찾아냈으니 이는 곧 김정연의 죽고 나머지 유골(遺骨)이라.
슬프다, 집과 몸과 상고가 모두 하룻밤 사이에 연기와 같이 사라지고 김정연의 자취는 붉은 흙과 검은 재 외에는 다시 보이는 것이 없고 다만 강풍열화 중에서 무사히 홀로 무사히 보존한 것은 김정연의 방안에 놓여 있던 금고(金庫) 뿐이러라.
개성군에 내려가 전도에 진력하던 김정연의 아들 김도식(金道植)은 이때 마침 외방으로 전도를 다니는 길인 고로 이 기별을 즉시 듣지 못하고, 이수일은 그날로 급히 병원에서 그곳까지 나왔더라.
수일은 사오 일 후에 퇴원(退院)할 예정이러니 뜻밖에 이와같은 큰일이 생겼으므로 병여의 몸을 간신히 움직여 제반 일을 처리하며, 한편 김도식의 가서 있는 곳으로 통기하여 속히 검도식의 돌아오기만 수일은 고대하고 있다.
수일은 오 년 동안을 한 가족과 다름이 없이 지내다가 하룻밤 사이에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집까지 가산까지 바람 앞에 뜬구름이 되었으니, 수일은 생각이 이에 이르매 나의 몸도 이날 밤으로 무슨 지경을 당할는지 헤아리기 어려움과 무상한 비회(悲懷)가 가슴에 사무친다.
연일 불던 바람이 이날 밤은 적이 그치고 몽롱한 월색 만호가 모두 고요히 잠들었다.
화재 후에 남아 있는 악한 냄새는 아직도 사면에 남아 있는데, 사람의 발에 밟힌 재와 흙은 물에 젖어 있고, 타고 나머지 기둥과 서까래는 이곳저곳에 쓰러져서 만목이 수참하여 오히려 나머지 더운 기운은 바람이 움직일 제마다 사람의 얼굴을 엄습한다.
수일은 병여의 몸을 막대에 의지하고 홀로 달을 향하여 창연히 이곳에 서서 있다.
전일의 주인의 집 마루와 방과 자기의 거처하던 처소가 역력히 생각나며, 김정연 부부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데, 이제는 적적한 빈 터가 되었으니 인생의 처량한 감동이 스스로 금키 어려우며, 때때로 비명에 목숨을 버린 김정연의 부부와 자기의 신세를 생각하고 눈물이 양협에 흐름을 깨닫지 못한다.
수일은 이와 같이 비회를 억제치 못하며 그곳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회할 즈음에 밤소리로 멀리 들리던 인력거가 살같이 몰아와 그곳에서 저지하며 그 위에 타고 있던 사람은 급히 내리며 수일의 서서 있는 곳을 향하여 나온다.
비창한 심사에 정신없이 서서 있던 일은 사람의 발자취에 비로소 자기의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들어 어떠한 사람이 오는고 바라보는데,
『아, 이게 이수일씨 아니오?』
『아, 이게 누구시오? 인제야 올라오시는구료.』
그 사람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김도식이라. 수일은 반가이 손목을 잡고 서로 향하여 달 아래에 얼굴을 바라보고 섰으나 졸연히 말할 바를 서로 알지 못한다.
수일은 비로소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이게 무슨 변이오니까? 무엇이라고 할 말씀이 없습니다.』
『나도 집에 있지 못하고 노형도 병환 중으로 계신 때에 이러한 변고가 나서 노형은 얼마나 애를 쓰셨소?』
『천만의 말씀을 하시는구료. 이 일이 날 제도 나는 병원에 있어서 아직도 나오지 못하였었는데 이러한 일이 생긴 줄은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새벽이나 되어서야 비로소 알고 와서 본즉 이와같은 참혹한 모양이 되었습니다그려. 지금 와서 말씀을 한들 소용이 있습니까마는 내라도 집에 있었으면 이 지경까지는 아니 갔을 것을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주붕으로 말씀을 하더라도 그 지경까지는 하지 아니하실 줄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수한(壽限)이 그뿐이시던지 너무도 원통하외다.』
김도식은 감고 있는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하고 이윽히 서서 있더니,
『그러하니까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모두 탔소구료.』
『네, 다른 것도 모두 타고 단지 금고 하나만 남아 있습디다.』
『금고가 남았어요? 그 속에는 무엇이 들었더란 말이요?』
『그 속에는 돈도 좀 들었지요마는 남의 문서와 증서·수표 등물이 들었었지요.』
『어찌하여서 그것이 남아 있었더란 말이요? 제일 그것이 타버렸더면 좋을 것을.』
하며 김도식은 오히려 금고가 남아 있음을 분히 여기는 모양이다.
수일은 김도식의 의견이 자기의 부친과 서로 같지 아니함을 아는 고로 묵묵히 서서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한다.
『집이 타고 세간이 탄 것은 내가 조금도 원통히 여기지 아니하오. 도리어 타야 옳은 일이지. 그렇지마는 우리 부모가 돌아가신 것을 눈물 한 점이라도 흘리고 슬퍼하는 사람은 우리 두 사람 뿐이요, 그 외에는 세상에서 누구 한 사람인들 불쌍하다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소? 오히려 다행히 여기고 기꺼워할 사람 뿐일 터이니,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더욱 우리 부모가 불쌍하고 유한이 골수에 사무치오.』
그러나 그칠 바를 알지 못하고 흐르는 것은 은애의 눈물이라. 세상에 수효를 헤아리지 못하도록 많은 사람 중에 누가 김정연의 죽음을 위하여 지촉(紙燭)의 부의(賻儀) 한 장인들 보내리요. 항상 그 부모는 그 아들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며 꺼리어 아들의 사랑함도 일찌기 알지 못하였으며, 그 아들은 부모를 한 집안에서 효양치 못함을 이제 이르러 뉘우치고 슬퍼한다.
(염염(炎炎)한 맹화(猛火) 중에서 부모는 아프고 답답한 고통으로 구원을 얼마나 불렀으리요.)
김도식은 생각이 이에 이르매 흐르는 것은 눈물이라.
『세상 사람들이 주인영감이 돌아가신 것을 즐거워하겠다 하시니, 아무리 세상 사람은 그러하더라도 당신 한 분의 마음으로 돌아가신 양친께서는 지하에 서서라도 편안히 눈을 감으시겠지요.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 실례지요마는, 당신이 오늘날까지 양친을 모시고 계신 것을 나의 몸을 가만히 볼 것 같으면 어떻게 부러운지 알지 못하겠소. 이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같이 서로 은휘치 아니하고 무간한 것은 없지요. 나는 팔구세 때부터 부모 없는 외로운 아이로 남에게 업심만 받았지요. 너무도 남에게 업심을 받으니까 그것이 분하고 원통 하여서 자포자기하다가 드디어 사람의 하는 도리를 하지 못하고 이렇게 못되게 하였습니다. 원래를 말하면 모두 제가 못생기고 저의 잘못으로 하여금 이 모양이 되었지마는 대체를 말하면 첫째는 부모가 없었던 연고로 이러한 불행한 몸이 되었습니다그려. 그러한 몸으 로도 오히려 오늘까지 목숨을 보전하여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부모를 떠나는 마음이 어렸을 때나 점잖었을 때나 일상 마찬가지겠지요마는 나와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을 생각하여 보시고 마음을 위로하시오.』
수일이가 김도식과 한가지로 누누히 이야기도 이날이 처음이니, 수일이가 말을 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김도식은 수일을 멀리하고 가까이 말을 사귀지도 아니하였으니, 그 연고는 자기 부친의 착하지 못한 일을 은근히 도와서 가위 조걸위학하는 사람으로 보았는 고로 수일을 평일에 보기를 금수같이 알고 친하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수일의 하는 말을 들으매 비로소 사람의 마음이 있는가 의심하였더라.
『그러면, 노형의 지금 처지는 사람의 할 노릇이 아니라고 하는 말이요?』
『과연 그렇소이다. 당신더러 이제 말씀이지, 이러한 남의 못할 노릇을 하면서 어찌 사람의 짓이라 하겠습니까?』
김도식은 한참이나 말을 아니하고 고개를 숙이고 침음(沈吟)하다가 홀로 고개를 들고 수일을 바라보며,
『그러면 노형도 인제부터는 사람 노릇을 하여보시오구료.』
하며 김도식은 슬픈 회포와 간곡한 정리가 가득한 모양으로 수일을 깨우치듯이 말을 한다.
『녜, 그저 말씀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아직 동안은 그저 내버려 두어주시오.』
『어찌하여서 그러하오.』
『지금 와서 다시 사람 노릇을 하는 체할 필요도 없습니다.』
『노형은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마는 나는 필요가 있는 줄로 알고 권고하는 말이요.』
『당신 말씀을 내가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올시다. 당신 댁에 오늘날까지 나는 신세를 지고 있어서 한집안같이 지내어도 당신과 서로 친밀히 이야기하기는 오늘이 처음이요. 나는 어떠한 위인인지 당신은 아마 자세히 알지 못하실 터이지요마는 나는 당신의 성질과 인격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결백하고 정직하신 도덕가(道德家)의 앞에서 감히 이런 비열(卑劣)한 사람의 심사를 말씀하는 것이 도리어 부끄럽고, 하는 말마다 모두 정당치 못한 일 뿐인데 바르고 높으신 귀에 들리게 하는 것도 실례막심한 일이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결단코 당신의 말씀을 거슬리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한 귀로 들으시고 한 귀로 흘려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김도식은 귀를 기울이고,
『응, 무슨 말씀인지 어서 하시오.』
『당신 말씀이 이제는 사람 노릇을 하라고 하시니 내 마음에도 얼마큼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업이 사람으로는 하지 못할 줄은 알면서도 부득이 하려하는 이 사람의 가슴인들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구태여 하는 것은 다시 설원도 하지 못할 원통한 사정이 있어서 그 분풀이로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술이라도 먹을 줄 알았으면 홧김에 술이라도 마시어 목숨을 끊어버렸을는지도 알지 못할 것을, 술은 본래 먹지 못하고 자살할 결심은 없는 연고로, 바로 말하면 변변치 못한 까닭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줄로 알아주시오.』
김도식은 이와같은 수일의 말에 은연히 감동되는 기색이 보인다.
『지금 말씀을 들은즉 노형이 오늘날 경우에 대하여서는 깊은 이유가 있는 것 같으니 자세한 말씀을 한 번 들려주시구료.』
『그렇듯 어리석은 사람의 일을 들으시면 무엇을 합니까? 이 일은 남더러 결단코 말을 아니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마는 대강령을 말씀할 것 같으면 남의 업심도 받고 재물없는 까닭으로 원통히 속은 일이 있었어요.』
『녜, 그러면 그 말씀은 다시 깊이 묻지 아니하겠소. 그러나 노형도 이 영업이 불가한 줄을 아시는구료. 우리 아버지께서는 부끄러운 줄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떳떳한 일인 듯이 알고 계시니 그때에 나는 어떠하게 민망하고 답답한지, 어떠한 때는 아버지 앞에서 차라리 죽더라도 아버지의 그릇 드신 마음을 돌이키리라 생각하였더니, 불의에 이와같은 변을 당하였으니, 나는 아버지 상사를 당하여 설운 마음보다 아버지께서 다시 마음을 고치시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유한이 되고, 부모를 임종도 못한 것은 자식된 사람의 평생 한이 될 듯 하오. 그러니 우리 아버지께서 개심(改心)하시지 못한 대신에 노형이나 마음을 고쳐 자시고 정당한 일을 하여주시면 하나님께서라도 노형을 도와주실 터이요, 나의 유한되는 마음도 얼만큼 적어질 터이니, 아무쪼록 회심하시오. 노형의 말씀을 들은즉 알 수 없는 사정을 알면서도 이 일을 한다 하시나, 오랫동안 사귀던 정분으로 우리 부모의 돌아가신 혼령을 좋은 곳으로 천도(遷道)하고 그 유족을 구원하여 주는 생각으로 빚놀이는 그만두시오. 우리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재산은 모두 노형을 줄 것이니 그것을 자본으로 하여가 지고 세상에 유익한 사업을 시작하여 주시면 내 마음이 얼마나 기껍겠소. 그뿐 아니라 우리 부모가 노형을 사랑하여 주시고, 노형이 우리 부모를 친부모와 같이 아시던 정분을 생각하실 것 같으면 우리 아버지 대신에 노형이 그릇 들었던 마음을 고쳐주시오.』
다만 듣고 있는 수일은 좌우로 눈물을 씻으며 대답이 없으나, 그 가슴 속에는 여러 가지로 감념이 왕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