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21장
봄비가 비로소 지나간 후 푸른 잎새와 붉은 꽃은 고운 빛이 더욱 선연하여 소쇄한 경치가 눈 아래에 가득하고, 처마 위로 보이는 검은 구름 흰 구름은 뭉얼뭉얼 바람을 좇아 동북으로 비를 몰아간 후 온화한 날빛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의 등에 비추어 따뜻한 기운이 전신에 퍼지는데, 날아가는 구름을 눈이 부신 것같이 유연히 치어다보고 있던 이수일은 다시 고개를 드리우고 뜰 앞에 떨어진 꽃잎을 한참 내려다보는데, 그 가슴에는 무슨 생각이 웅울한지 몸을 뿌리치고 다시 일어선다. 김정연의 부부 두 사람은 이미 화재로 인하여 사멸하고, 그 자리에 수일은 다시 조그마한 집을 건축하고 이수일이라 하는 문패를 붙였고, 이수일은 새 집의 주인이 되었더라.
김도식은 원래부터 자기의 집 재산을 불의의 물건이라 하여 자기는 그 재산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아니하고 모두 수일에게 맡겨 정당한 직업에 자본을 지으라 하여 수일로 하여금 온당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더라. 그러나 수일은 전일 김정연의 직업을 고치지 아니하고 더욱더욱 심한 수단으로 영업하여 새문 밖 냉동 근방에서는 이수일의 이름이 높았더라. 수일은 빈 집에 다만 노파 한 사람만 두고 조석을 지어서 먹으며 자기는 홀로 들어오나 나가나 일개 여관보다 조금 다름이 없다. 나가면 종일토록 다니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비로소 집을 찾아 돌아오는 수일은, 항상 나의 집이로되 적적히 빈 방안에 발을 들여 놓으면 가정의 쾌락한 재미는 없고 다만 책상을 향하여 벗을 삼고, 서로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노파 하나 뿐이라. 수일은 바야흐로 돌아와서 적적히 빈 방안에 번듯이 드러누워 종일 피곤한 몸을 쉬고 있을 때에 집에 있는 노파는 남포에 불을 켜서 들고 들어오며,
『낮이 훨씬 지나서 서너 너덧점쯤 되었을 때에 어떤 손님이 오셨어요. 내일도 그때쯤 하여서 다시 오겠으니 어디 가지 말고 꼭 집에서 기다리고 계시라고 하십디다. 함자가 무엇이냐고 물어도 대답은 하시지 않고 단지 전에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라고만 말씀을 하셔요.』
『학교의 친구?……』
수일은 돌연히 어떠한 사람인지 생각이 나지 아니하는 모양이라.
『그런데 모양은 어떠하더란 말인가?』
『글쎄올시다. 나이는 삼십이나 넘어 보이고 수염은 텁석부리로 나구요. 키는 크고 얼굴은 우락부락하여서 보기도 어찌 무서운지 모르겠어요.
수일은 대답지 아니하고 자주 고개만 끄덕이며 찾아 왔던 손이 어떠한 사람인지 깨달은 모양같이 이윽도록 말이 없다.
『그리고 그 양반은 보기에도 어찌 감이 사나지 모르겠어요.』
『내일 세나 네시쯤 하여서 또 오겠다고?……
『녜,일 또 올 터이니 꼭 기다리시라구요. 그런데 그 양반은 어떠하신 양반인지 의복도 누추하고 사람도 어찌 감이 사나지요.
『그러나 무슨 볼일이 있다고 하든?』
『그 말은 도무지 아니하셔요. 만나야 할 말이 있다고 하십디다.』
『그러면 내일 오거든 만나보지.
노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아가려 하다가 다시 주춤하고 서면서,
『그리고 조금 있다가 최만경씨도 왔다 가셨어요. 반찬 하여 잡수시라고 민어 자반 열 마리하고 전복 이십 개를 들려가지고 오셨어요. 이 할미도 과자를 가끔 사다 주시니까 어찌 잘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일은 그 말을 듣고 불쾌한 기색이 움직이며 대답이 없다.
『그리고 최만경씨도 내일 다섯시 때에 오겠다 하셔요. 꼭 뵈옵고 의논할 말이 있으니 그렇게 여쭈라고 하셔요.』
학교의 친구라 말하고 찾아오던 사람은 과연 그 이튿날 오후에 약속과 틀림이 없이 찾아왔더라. 수일은 백낙관의 찾아옴을 괴이히 여겼으며, 또는 반가이 .생각하였더라 백낙관은 거만히 자리 위에 앉아 수일을 바라보며 수염만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여러 가지로 회구하는 마음이 생기는 듯이 허허 웃고,
『벌써 우리가 지내던 일이 옛적이 되었네그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면 서로 할 말은 무궁무진하지마는, 첫째로 자네더러 물어볼 것은 오늘날까지라도 자네가 나를 그래도 친구로 알고 있나, 또는 아주 잊어버리고 친구 아니로 아는가?』
수일은 대답이 없이 고개만 숙이고 우둑히 앉아 있다.
『생각하여 볼 것도 없네. 친구로 아직까지도 알 것 같으면 아노라고 말을 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친구로 알지 아니하노라고 사나이답게 대답을 하게.』
『이전에는 친구로 지내었지.』
하며 수일의 말소리는 간신히 입밖에 나온다.
『응, 그래……』
『그렇지, 지금은 친구라고 말할 수 없지.』
『그것은 어찌하여서 그러한가?』
『그 후로 오륙 년 동안은 도무지 한 번도 만나보지를 못하고 지냈으니까 지금이야 어찌 친구라고 말할 수 있나?』
『무엇이야? 지금은 친구라고 말할 수 없어…… 이전에는 자네가 나를 무슨 친구로 알고 있었던가?』
수일은 백낙관의 이 말을 듣고 의아히 여기는 모양이라.
『아니 그러한가 자네도 생각하여 보게. 내 몸에 당한 장래의 사업을 정하는 때에 세상에 유지한 인물이 될는지 또는 돈만 목적하는 빚놀이를 할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결정할 때에 명색이 친구라 하면서 나더러는 무슨 의논 한 마디를 한 일이 있었나? 그 뿐 아니라 말 한 마디 없이 부지거처를 하니, 어디서 친한 친구간에 그렇게 일을 하는 법이 있든가?』
수일은 오히려 대답하지 아니한다.
『자네가 마음에 믿었던 정든 여자는 자네를 버렸을지언정 자네 친구되는 이 백낙관이는 결단코 자네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네. 그러한데 자네는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는가? 자네는 아무리 이와같이 나같은 친구라도 헌신같이 내버리지마는 나는 그렇지 못하여서 자네를 이렇게 찾아온 길일세. 그러나 자네는 내가 자네를 버리고 아니 버리는 것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무섭게 알 바는 아니겠지만 나는 나의 정리로 영인부아(寧人附我)언정 무아부인(無我附人)으로 좌우간 한 번은 내가 찾아왔네. 지금 자네 말이, 인제는 친구로 말할 수 없다 하니 자네는 나같은 사람하고 친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모양일세그려. 자네의 마음이 그러할 지경이면 나 역시 구태여 자네를 친코자 아니하고 오늘부터라도 사나이답게 이수일이와 백낙관 두 사람은 전일 정분을 끊어버리고 그만두세.』
수일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
『그러나 오늘까지 정다운 친구로 지내던 자네를 버릴 것 같으면 지금이 영별이니까, 마지막으로 자네더러 말 한마디 물어보지 아니할 수가 없네, 여보게 수일이, 자네는 무슨 까닭으로 돈을 모으려고 애를 쓰는가? 크게 믿고 크게 바라고 크게 즐거워하던 일개 여자를 남에게 빼앗기고 그 분풀이를 할 곳이 없어서 돈에 눈이 띄었더란 말인가? 돈을 모으려 하는 마음도 좋은 일이야. 그렇지마는 돈을 얻기 위하여서 부정하고 악독한 행위를 할 필요가 무엇인가? 자네도 이 세상에서 남에게 업심을 받으며 남에게 욕을 당하고 무한한 고통을 받으면서 그 생각을 하더라도 남에게 칭찬은 듣지 못할지언정 남에게 욕을 사고 남을 못 살게 굴 까닭이야 무엇인가? 그 뿐이 아니라 자네의 돈 늘이는 방법을 말하면, 사람이 돈을 하여 곤란하고 답답한 때에 좋은 낯으로 꾸어주고 나중에는 그 사람을 못 견디게 조르다가 피를 긁고 고기를 씹는 영업일세그려. 비유하여 말하면 강도의 수단을 써서 남의 돈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그런데 자네는 그것으로 오늘날까지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하는 말인가? 아무리 돈이라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제일가는 권력이 있다 하지마는 명색이 사람이라 하는 것이 악한 일을 하면서 한시각 동안이라도 마음을 편안히 하고 지낼 수가 없는 일일세. 그렇지만 자네는 의연히 즐겁게만 알고 있나? 빚을 조르러 가며 가산 집행을 하는 것이 자네는 따뜻한 봄날에 꽃구경이나 하는 듯한가?』
수일은 더욱 대답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다.
『자세히 알지 못하지마는 몇 해 동안을 두고 설마 그러한 마음은 없었겠지. 자네 얼굴을 자네가 좀 들여다보게. 얼굴이 죄인이나 다름이 없네. 감옥에 들어 있는 징역군이나 마찬가지야.』
알아보지 못하도록 파리한 수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백낙관은 눈물을 머금는다.
『수일이, 어찌하여서 내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지 아는가? 오늘날 이수일이로는 아마 알지 못하리. 아무리 돈을 많이 늘려서 큰 부자가 된다 하여도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마음을 위로하지 못하리. 병이 있을 때에 약은 먹지 아니하고 독약만 먹으면 그 병이 나을 줄로 아는가? 이와같이 자네는 약 먹을 줄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질세. 전일 백낙관의 지기지우로 있던 이수일은 그다지 어리석은 자가 아니더니 오늘날 가만히 보면 발광을 한 사람일세그려. 실성한 사람을 보고서 말을 하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마는, 일개 조그마한 여자로 하여서 발광 지경까지 이르는 것은 명색이 친구로 있는 내 얼굴이 도리어 부끄러워이. 여보게 이수일, 자네더러 사람들이 모두 강도놈이라고 말을 하데. 죄인이라고도 말을 하데. 또는 미친 놈이라고도 말을 하데. 이런 말을 듣고서도 분한 마음이 없는가? 분기가 일어나거든 나를 주먹으로 때리든지 발길로 때리든지 마음대로 하게.』
백낙관은 스스로 말하며 스스로 노하여 자기의 몸을 자기의 손으로 두드릴 듯이 기색을 지으며 일의 대답 나오기를 핍박한다.
『나는 분하지 아니하이.』
『분한 마음이 없어…… 그러면 남들이 강도라든지 미친 놈이라든지 간에 조금도 마음에 관계가 없다 하는 말인가?』
『내가 내 생각을 하여도 미친 놈인 줄을 아네. 일개 여자로 하여서 장부가 실성한 것은 자네게 대하여서 면목이 없고, 대답할 말이 없네. 그러나 이미 발광을 한 사람이니까, 지금 다시 어찌할 수가 있나? 모처럼 만에 권고하여 주는 자네의 말이지마는 내 몸은 나대로 아직은 그대로 내버려두게.』
수일은 간신히 입을 열어 이와같이 말하였더라.
『응, 그러면 자네는 저러한 돈으로만 마음을 위로하고 있단 말이지?』
『아직 그 돈 가지고는 마음을 위로할 수 없네.』
『그러면 어느 때나 마음이 위로되겠는가?』
『그것이야 알 수 있나?』
『그리고 자네는 그간에 장가를 들었는가?』
『아니 들었네.』
『어찌하여서 장가를 들지 아니하였더란 말인가? 이렇게 집을 지니고 살림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면 불편한 일이 대단히 많을걸.』
『아니, 불편할 것도 없네.』
『자네가 지금에는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그 여자가 누군가? 심순애의 말인가? 그년은 천하에 김생민도 못한 년이지.』
『그러나 지금으로 말을 하면 자네의 하는 일도 김생보다 나을 것이 없을 듯하이. 고리대금(高利貨金)하는 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 사람으로 사람의 마음이 없으면 금수에서 조금인들 다를 것이 무엇인가?』
『자네의 말은 그러이마는 세상 사람은 거의 모두가 김생과 같지 아니한가?』
『그러면 나도 김생이란 말인가? 여보게 수일이, 자네는 그 여자가 김생 같은 행위를 하였다고 거기에 마음이 격동되어서 자네조차 김생이 된 것일세그려. 그러나 만일 그 여자가 김생같이 먹었던 마음을 뉘우치고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올 것 같으면 그에 좇아서 자네 도 지금 잘못 들었던 마음을 고치겠지?』
『그 계집이 사람의 마음이 되어…… 그것이 될 뻔이나 한 말인가? 나는 이렇게 취리를 하고 있어도 남을 속이는 일은 결단코 아니하네. 처음부터 변리가 비싼 말은 하고 주는 돈이니까 싫은 사람은 취하여 가지 아니할 것이요, 그래도 쓰려고 하는 사람은 쓸 터이지. 쓰지 아니하는 사람을 억지로 강제를 하여가며 주는 것이 아닐세. 순애같이 김생민도 못한 것이 어떻게 다시 사람이 될 수가 있나? 그것은 도저히 아니될 말이지.』
『어찌하여서 아니된다 하는 말인가?』
『어찌하여서, 무슨 이유로 자네는 된다 하는가?』
『그러면 자네는 그 여자가 다시 회개하여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아니하는 말인가?』
『안 바라지, 안 바라! 그런 계집은 나는 소용없네.』
만일 순애가 그 자리에 있으면 수일은 그 얼굴에 침이라도 배앝을 듯한 기색이라.
『자네는 그렇게 말할지라도 모르겠지마는 자녀를 위하여서 내가 한 마디 말할 것은, 그 여자가 지금 와서는 크게 회과를 하고 자네에게 대하여서 잘못한 죄를 어떻게 뉘우치고 있는지 모르겠네.』
수일은 천정을 향하여 대소한다.
『그 여자도 그와같이 회개를 하였으니 이제는 자네도 회개하게. 그만하였으면 이런 영업은 그만둘 때가 되었을 듯하이.』
『순애의 회개는 순애의 일이요, 나에게야 조금인들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 김생 같은 집도 인제는 제 잘못한 죄를 깨달은 것이지.』
『요전에 내가 평양을 내려갔다가 우연히 만나서 대동강에서 빠져죽으려 하는 그 여자의 몸을 내가 구하여 내었는데, 그때에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원통한 소리도 말하거니와, 전에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개개복죄를 하면서 진정으로 회개를 한 모양이데. 그리하고 나더러 자네에게 말을 잘하여 달라고 하데. 그것을 못 하겠거든 자네를 한 번만 만나보게 하여달라고 울며 매달려서 청을 하데. 그러나 나는 또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 못하겠노라고 거절하였네. 또는 자네에게 대하여서 그 여자가 저와같이 회개를 하였으니 전죄를 용서하여 주라고 권하는 말은 아닐세. 다만 나는 그 여자가 이제는 회개를 하고 홀로 근심을 하고 세월을 보내는 모양이니, 즉 말을 할 것 같으면 스스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니까, 자네도 역시 자네가 그 여자에게 향한 원망을 풀어도 좋을 듯하니, 자네가 그 마음을 풀어버리면 아마 생각컨대 이전 이수일이가 다시 될듯하이. 자네의 말이 아직까지도 마음을 위로하지 못하고 어느 때나 마음의 위로를 받을는지 모르겠다 하나, 그 여자가 벌써 회개하고 목숨까지 끊으려고 결심을 하였으니 자네 마음에도 얼마큼 분하던 마음이 위로가 되지 아니한단 말인가? 자네가 요사이 몇 해 동안에 늘린 재물이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돈보다도 그 여자의 회개하였다는 말 한 마디가 훨씬 힘이 있어서 자네의 마음을 위로할 줄로 나는 아는데.』
『그것은 내 마음의 위로는 고사하고 순애로 말을 하면 그 고생을 받아야만 당연한 일이지. 순애가 아무리 전비(前非)를 뉘우쳤다 하기로 내가 한 번 잃어버리었던 물건을 이제 다시 얻을 수는 없는 일일세.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면 나의 오늘날 경우는 순애의 회개로 인연하여서 능히 내 마음을 위로한다고 말할 수 없네. 순애가 전일에 한 짓을 생각하면 밉고, 분하기는 한량이 없으나 그 분한 마음을 내가 마음을 위로하고 지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요, 또는 그 분풀이를 또 하자고 하는 마음은 결단코 없네 그 김생만도 못한 계집년을 데리고서 말할 가치도 없네. 오늘 와서는 후회를 하더라 하니 후회할 것은 처음부터 정한 이치가 아닌가? 처음에 잘못한 일이 없었더면 지금 와서 후회할 일이 없었을 것을.』
『그러하기에 나는 부득이 그 여자를 용서하여 주라는 말이 아닐세. 자네는 재물로 마음을 위로하려 하나 부득이 부정한 영업을 즐겨서 할 까닭이야 무엇인가? 그러나 돈을 모으더라도 정당한 수단으로 하는 것이 좋으니 목적은 변하지 말더라도 방법과 수단만 고쳐서 하게.』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마는 내가 지금 현혹한 정신이 아직 깨지를 못하였으니까 이수일이는 미친놈으로만 알고, 일절 관계를 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어 주게.』
『응, 그러하면 아무리 하여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겠다는 말인가?』
『그저 용서하여 주게.』
『무엇을 용서하여? 너는 나를 버렸지, 나도 너를 버릴 터이다. 피차에 인제는 서로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 용서 여부가 무엇이냐?』
수일은 일어서려 하는 백낙관의 소매를 붙들며,
『오늘날 마지막으로 이전 정분을 끊어버리고 작별하는 데 대하여서는 나도 자네더러 한 마디 물어볼 일이 있네. 대체 자네는 지금 어찌하고 지내는 모양인가?』
『내가 어찌 지내는지 네 눈으로 보면 알 일이지.』
『그저 보기만 하고서야 어찌 안단 말인가?』
『응, 나는 대단히 구차하게 지내고 있네.』
『구차히 지내는 줄은 나도 아는 일이지.』
『그뿐이지, 다시 무슨 할 말이 있나?』
『그 뿐이라니 말이 되나? 무슨 까닭으로 벼슬을 내버리고 사방으로 유리표박(流離漂泊)하면서 저렇게 곤란하게 지내니 무슨 연고가 있기에 그러하지.』
『내가 그 이유를 말하기로 너같은 광인이 어찌 알겠느냐?』
하며 백낙관은 크게 웃고 몸은 일어선다.
『알아듣지 못 알아듣지 한 마디 말 못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면 무엇하겠다는 말이야, 응? 네가 돈냥이나 있으니까 돈이나 조금 취하며 주려고 하는 말이냐? 나는 그것도 고맙지 아니하다. 적빈여세(赤貧如洗)한 몸이라도 마음은 항상 즐거이 있.』
『그러하니까 더욱 이상하지 아니한가? 가난은 하여도 항상 마음은 즐겁다 하니,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말 한 마디 하여주게나그려.』
백낙관은 대소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너같이 다 썩어서 죽은 것과 같은 사나이 자식이 그 말을 들으면 어찌 알겠니? 제법 사람의 소리 같은 말을 다 묻는구나.』
『자네가 그렇듯 수치를 보여주더라도 나는 대답할 말이 없네. 나는 벌써 다 썩어진 몸이니까.』
『물론 그러하지.』
『그렇게 벌써 썩어진 내 몸은 지금 다시 어찌할 수가 없지마는, 자네는 이미 동경에 유학까지 하여서 졸업 후에 즉시 고등관이 된 사람이니까 나는 자네를 이 세상에 유용지기로 알고 조금도 의심치 아니하였네. 나는 자네가 출세하기를 은근히 마음으로 축수하고 있었네. 자네는 나를 김생이니 미친 놈이니, 도적놈이니 말을 하지마는, 자네를 생각하고 있는 마음이 내 가슴 속에 떠난 날은 없었다네. 오늘날까지 자네 외에는 다시 친구가 없는 줄로 알고 있네. 재작년이든가 자네가 진주 군수를 하여가지고 도임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어찌 반갑고 좋은지 몰랐네. 또 한편으로는 내 신세를 생각하니까 설운 마음만 솟아나서 그날은 종일토록 밥 한술을 먹지 못하였네. 그 말을 듣고 곧 가서 자네에게 치하라도 하였으련마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자네를 만나볼 몸이 못되니까 은근히라도 자네가 잘된 모양을 나 혼자라도 가서 볼까 하고 남대문 정거장으로 나가서, 자네 떠나는 모양을 보고서 어떻게 내 마음에 좋은지 기꺼운 마음에 눈물만 나오데.』
백낙관은 은근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 책상에서 머리를 마주대고 함께 공부하던 자네가 출세하여 가는 것을 보니까, 그때는 얼마나 반가왔겠나? 그렇더니 오늘날 자네의 이렇듯 영락한 모양을 보니 내 마음이 또 어떠하겠는가 생각하여 보게. 내 몸의 어떠한 것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네를 향하여서 감히 이러한 말을 할 위인이 되지 못하지마는 나는 벌써 내 몸이라 하는 것은 돌아보지 아니하네. 일개 여자에게 속은 것을 분히 여겨서 제 몸의 일생을 그르치는 것으로 모르는 것이 아니지마는, 제 마음을 제 생각으로 능히 바로잡지 못하는 것은 전혀 나의 천성이 어리석고 비루한 까닭이라고 나 역시 제 몸의 못생긴 것을 한탄할 뿐이요 고치지 못하니, 나는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고 나는 이 모양으로 있다가 이 세상을 마칠 터일세. 자네의 친구로 있던 이수일은 이미 이 세상에서 죽어 없어진 사람으로 알아주게. 그러한 고로 이 말은 이수일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자네의 친구 중 어떠한 사람이 자네 몸을 아껴주는 마음으로 충고하는 말이어니 하고 들어주게.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 자네가 말을 하지 아니하니까 알 수는 없네마는, 자네의 몸은 아무쪼록 자중하여서 사회에서 유익한 일을 하여주기를 바라고 믿는 바일세. 자네가 저렇게 곤궁하게 지내는 모양 같으나 결단코 이 세상에서 배척을 당할 자네의 몸은 아닌 줄을 나는 믿고 있네. 그러하니 자네는 일 개인으로 자기를 위하여 몸을 자중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회를 위하여서 몸을 자중하라 하는 말일세. 만일 자네가 그 재주와 지혜를 쓰기 위하여서 사회에 출각하려 할 것 같으면 자네의 친구 어떠한 사람은 힘이 미치는 바까지는 조력하여 줄 생각일세.』
하며 수의 얼굴은 처음에 비창하던 기색이 변하여지며 화려한 광명(光明)이 점점 나타난다. 백낙관은 수염을 쓰다듬어 내리며 고개를 들어 수일의 얼굴을 흘끗 치어다본다.
『응, 그러며는 자네는 내가 이렇게 영락하여서 유리하는 것을 가엾이 여겨서 하는 말인가? 자네의 그 말은 대단히 좋은 말일세. 그러나 여보게 수일이…… 세상에는 너같은 고리대금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훌륭한 인재가 모든 명예를 상하고 몸을 그르쳐서 사회 밖으로 쫓겨나서 한갓 초목으로 한가지 썩을 뿐이니, 네가 지금 말이 사회를 위하여서 몸을 자중하라고 나같은 사람이라도 그렇게 말하여 주니 고마운 마음은 측량이 없네. 그러하면 자네도 자네의 하던 말과 같이 사회의 공익을 위하여서 그 부정한 영법은 그만두게. 나는 자네를 위하여서 충고하는 말일세. 이 세상에서 유용한 인재를 멸망케 하는 자는 계집과 또는 고리대금하는 자들이니라. 이와같이 영락한 백낙관이를 네가 만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네 손으로 곤란을 주는 여러 인재들을 더욱 가엾이 생각하여다고. 자네가 사랑하던 여자에게 실패하고 고통하는 것이나, 어떠한 사람이 돈이 없어서 고통하는 것이나 그 괴로운 일에 대하여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네. 나도 이렇게 곤궁하게 지낸 터인 고로 이 근심을 노나하여 줄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을 한탄하였네. 이전에 이수일이 같은 친구가 있었더면 좋을 것을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아니하였네. 그렇더니 그 생각하던 친구가 나의 몸을 생각하고 사회에 나서서 분투할 것 같으면 나도 일비지력을 도와주겠노라 하니 그 말을 들은 내 마음이 얼마나 기껍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은 붕우간(朋友間)이요, 가장 미운 것은 빚놀이하는 놈이니 이전에 형제같이 지내던 친구가 오늘날 빛놀이장이…… 아…… 나는 기가 막혀서 다시 말이 나오지 않네.』
하며 백낙관은 말을 그치고 수일의 얼굴을 노한 눈으로 흘겨본다.
『여러 가지로 자네의 권고하여 주는 말은 대단히 고마우이. 나도 급히 생각하여서 지금의 썩어진 몸이 전과 같이 결백한 사람이 다시 되면 그 외에 더 좋은 일이 없겠네. 자네도 또한 자애자중(自愛自重)하게. 내 몸은 이왕 이 모양이 되었지마는, 자네나 이 세상에서 크게 쓰이는 모양을 진정으로 보고 싶어이. 자네는 반드시 크게 쓰일 사람이 이렇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보면 내 마음에는 원통하고 슬퍼서 못견디겠네. 나도 인제 자네 있는 데를 한 번 찾아갈 터이니, 지금 자네 있는 데는 어느 곳인가?』
『빚놀이하는 자가 내 집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
『응, 그날은 자네 친구의 자격으로 찾아가지.』
『친구…… 나는 빚놀이하는 친구는 사귀지 아니하여.』
밖으로서 문이 조용히 열리며 기침소리도 없이 방안에 들어서는 사람은 최만경이라. 백낙관과 이수일은 일시에 고개를 들어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남자의 좌석에 무례히 돌입함을 수일은 미안히 여기었으며 또는 한편으로 놀랐더라. 최만경은 우선 주인에게 인사를 마친 후 다시 백낙관을 향하여 두어 마디로 인사한 후 한옆으로 비켜 단정히 앉으며 얼굴에는 웃음을 띄우고 방자히 방안에 들어온 허물을 무안하게 여기는 듯이 주저주저하고 말을 하지 못한다. 백낙관은 다시 점잖은 모양을 짓고 최만경을 바라보며,
『여기서 만나보기는 의외요구료. 옳지, 이수일이하고는 동사하는 사이니까 서로 친할 터이지.』
수일은 좌우로 나누어 보며,
『여보게, 자네는 어찌하여서 이 부인을 알던가?』
『응, 조금 알지. 그러나 내가 오래 여기 앉아 있으면 공연히 방해가 될 터이니까 나는 먼저 가겠네.』
『여보시오, 백낙관씨.』
하며 몸을 일어서려 하는 백낙관을 최만경은 중지케 하였더라.
『아, 이런 데서 뵈옵고 말씀하는 대단히 미안하외다마는…….』
하며 최만경은 백낙관의 기색을 살펴본다. 백낙관은 고개를 돌리고 손을 좌우로 내저으며,
『그 말은 이런 곳에서 들을 말이 아니야.』
『그렇지마는 언제든지 댁에를 찾아가면 갈 제마다 아니 계시니까 일이 결말날 때가 있어야지요.』
『아무리 나를 몇 천 번 만나기로 무슨 끝이 날 수가 있어야 말이지. 나는 보나 아니 보나 마찬가지요. 나는 달아나든지 숨든지 할 사람은 아니니까, 좋은 기회나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을까 보오.』
『그야, 얼마 동안이든지 참기야 하겠지요마는 당신 사세만 좋도록 하고 기다릴 수는 없어요. 그 생각을 좀 하여주셔야지요.』
『응, 생각하고 말고 나도 남의 것을 갚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범연히 있는 사람은 아니야.』
하며 백낙관은 비웃는 웃음같이 허허 하고 다시 일어선다. 수일은 백낙관의 두루마기 자락을 잡아당기며,
『여보게, 이왕 저물었으니 저녁밥이나 같이 먹고 가게나그려.』
『자네 말은 대단히 고마운 말일세는 장부불음동천수(丈夫不飮銅泉水)라니 나는 집으로 가서 내 밥 먹지.』
『여보시오 영감, 모처럼만에 오셨다는데 저녁이나 잡수시고 가시지요. 어서 이리 앉으셔요.』
하며 최만경은 백낙관의 서서 있는 다리 아래에 방석을 밀어놓으며 실로 손을 만류하는 주인보다 더욱 하는 모양이라. 백낙관은 수일과 최만경의 거동을 눈꼬리로 흘겨 내려다보며,
『천연히 부부간 같으이그려. 천하에 무부대라더니, 참 잘 모였다.』
『내왼 줄로 아셔도 관계없으니 어서 자리에 앉으셔요.』
본래부터 머무르지 아니하고 백낙관은 드디어 무거운 걸음을 문으로 향하여 옮기며,
『응, 이놈 수일아, 네가…….』
『……….』
『……….』
끝을 마치지 아니하는 백낙관의 말 한마디가 수일의 가슴을 무한히 요동케 하여 백낙관이가 대문 밖을 나아간 후에도 오히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슨 생각인지 깊이 하는 모양이라.
조금 있더니 남폿불을 켜가지고 경황이 없이 몸을 움치고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노파는 들여다 놓는다. 등불에 비추이는 최만경 얼굴은 완연히 빛과 향기를 방자히 하는 모란화 한 가지가 만개하여 드리운 것 같다. 최만경은 수일의 앞을 가까이 오며, 수그리고 있는 수일의 얼굴을 허리를 굽혀 정다이 들여다보며,
『여보 수일씨, 왜 그렇게 실심을 하고 계시오? 무슨 일이 있소?……』
수일은 비로소 눈을 들어보며,
『대체 당신은 어찌하여서 백낙관이를 압더니잇가?』
『나는 벌써 안 지가 오래되었지요마는 당신께서 그 양반하고 그렇게 친하신 줄은 참 몰랐어요. 나는 의외로 아는데요.』
『글쎄, 그 사람을 어찌하여서 알았어요? 무슨 관계로 알았더란 말이요?』
『돈냥 거래가 있어서 알았지요.』
『돈냥…… 그러면 백낙관이가 당신의 돈을 썼다 하는 말이요……? 그러면 돈을 얼마나 취하여 주었소?』
『삼천 원이나 되지요.』
『삼천 원…… 그러면 그 돈을 언제 주었더란 말이요?』
최만경은 자기의 무릎이 수일의 몸에 접하였으며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가까이 다가앉으며 열심으로 묻는 모양을 보고, 주순(朱脣)이 열리고 옥치가 드러나며 은근히 웃음을 띄우고,
『여보, 당신은 내 생각만 하는 양반이야. 자기의 긴한 일을 물을 제는 아주 정신없이 열심으로 하면서, 평일에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도무지 대답할 생각도 아니하지.』
『아따, 그런 소리는 말아요.』
『왜 하지 말아, 나는 좀 더할걸.』
『글쎄, 그 돈을 언제 주었단 말이요? 묻는 대답을 해야지.』
『나는 몰라요. 잊어버렸어요.』
『그러지 말고 어서 바른대로 대답을 하여주구료. 어쩌면 그 돈은 내가 대신하여 주리다.』
『나는 당신에게는 그 돈을 받지 아니할 터이야.』
『아무렇든지 돈만 받았으면 좋지 않소.』
『그 돈이 당신에게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데, 왜 이리 하시오. 또는 만일 당신이 대신 물어놓겠다고 정히 하시면 나는 그 돈을 받지 아니하고 떼어버릴 터이야요.』
『그것은 왜 그리하셔요?』
『무슨 까닭이든지 나는 그렇게 할 터이니까, 당신이 정히 대신 물어놓겠다고 하시면 그것은 나더러 받지 말고 탕감하여 주시라는 말과 마찬가지지요. 당신 말씀에 그 돈은 받지 말라 하시면 나는 두 말 아니하고 그만 탕감하여버리지요.』
『그것은 무슨 까닭으로……?』
『무슨 까닭이든지 나도 알 수 없지요. 왜 그렇게 귀가 어둡소. 알면서도 부러 모르는 체하고 그러시는 말씀이지.』
『응, 옳지 인제 대강은 알아듣겠소.』
『그러면 알면서도 왜 못 알아듣는 체하고 계시오? 그러니까 내 마음은 점점 더 야속하기만 하지.』
하며 최만경은 수일의 얼굴을 원망하는 듯이 흘겨본다.
『아따, 그런 소리는 하지 말고 내 묻는 말이나 대답하여 주어요.』
『대체 당신은 자기 갑갑한 것만 제일로 알고 있지.』
하며 최만경은 궐련을 내어 피우고 앉아 있다.
『그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당신에게 빚을 썼단 말이요? 알 수 없는 일일세.』
『……….』
『삼천 원이나 되는 돈을 무엇에 급하여서 그리하였노?』
『……….』
최만경은 오히려 대답이 없고 담배만 피우고 있다.
『글쎄, 여보, 자세한 대답을 좀 하구료.』
『나도 대답을 아니하고 모르는 체하니까 아마 당신도 갑갑하고 못견디겠지요. 당신도 갑갑한 일을 당하여 보시오. 그리고서 남의 생각을 좀 하여주시오. 그 맛이 어떠한가?』
『그것은 무슨 지각없는 말이요. 어서 말하시오.』
『그러면 내 말하지요. 할 수 있나, 여편네가 질 수밖에 없지. 그 돈이 벌써 여러 해 되었소. 처음에는 그 양반이 쓴 돈이 아니라, 남의 보를 섰다가 그 사람이 결단이 나서 갚지를 못하게 되고 사람까지 어디로 도망을 하여버리니까 할 수 없이 백낙관씨가 그 채무를 맡아나게 되었지요.』
수일은 고개를 숙이고 이윽히 최만경의 말을 듣고 있더니 홀연 양협으로 두 줄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