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24장
이십여간 되는 집 안에는 노파 한 사람이 살림을 주장하고, 뒷방에 고요하게 거처하는 이수일은 고요히 누워 천사 만념이 실마리 엉키듯 흉중에서 배회하는데, 홀연 귀에 들리는 것은 여편네의 호곡하는 소리와 여편네의 다투는 소리가 요란하다.
수일은 혹시 꿈이 아닌가 의심하여 베개에서 머리를 들고 귀를 기울여 소리나는 곳을 향하고 듣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리며 서로 다투는 모양도 더욱 심하여 들리는데 자주 걷고 달음질하는 발자취가 수일의 거처하는 방 앞으로 가까이 나아온다.
수일은 더욱 괴이함을 이기지 못하여 덮고 있던 침구를 발치로 밀쳐던지고 몸을 일려 할 때에 영창문 두 쪽이 일제히 왈칵 열어 제끼어지며 여자 두 사람이 서로 붙들고 엎드러지며 자빠지며 방안으로 들어온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한 여자는 머리는 흐트러지고 저고리와 치마는 물 속에 빠졌던 사람같이 비에 젖어 낙수가 둑둑 듣는다. 그 여자는 홀연 이수일의 얼굴을 보더니 기꺼운 빛과 반가운 마음으로,
『아이고, 수일씨!』
하며 수일의 앞으로 덤비려 하는 것을 양복 입은 여자가 뒤로 달려들며 옷고대를 잡아 끌어당긴다.
그 여자는 슬픈 목소리로,
『아이고, 수일씨! 이를 어찌하면 좋소.』
하며 구완하여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라. 수일은 부르짖는 그 목소리에 뼈가 녹는 듯이 감동된다.
최만경은 순애의 옷깃을 한 손으로 더위 잡고 수일을 돌아보며,
『여보 수일씨, 당신이 그렇게 대단히 알고 있던 정든 계집이라는 것이 이 계집이요?』
한 손으로는 다시 순애의 머리채를 잡아서 얼굴을 쳐들며,
『이 계집이지요? 수일씨가 일상 못 잊어하던 년이 이 계집이지요? 아이고, 내 가슴이야! 내 원통한 사정을 어따가 다 하나. 그래서 이 계집이 당신 마누라야요?』
『내 마누라면 어찌하라는 말이요?』
순애는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부르짖는 목소리로,
『아이고, 수일씨, 사람 좀 살려주오.』
최만경은 소리지르는 순애의 목 뒤를 두 손으로 에워잡아 방바닥에 엎쳐 놓고,
『아이고, 요란스럽다, 이것아…… 너보다 내가 수일씨에게 먼저 할 말이 태산같이 있으니 조용히 여기 엎드려서 하는 말이나 듣고 있거라.』
하고 다시 수일의 얼굴을 핏발이 가득한 목자로 바라보며,
『여보 수일씨, 이런 계집년이 똑 여우 모양으로 당신의 몸에 붙어 있으니까 내가 하는 말은 조금도 당신이 들어주지 아니하는 것이지. 당신은 아무리 이 계집을 못 잊어하셔도 이 계집은 본대 당신을 헌신같이 내버리고 다른 사람에게로 시집을 간, 인형을 쓰고서도 짐승만도 못한 계집년이 아니오니까? 그런 무정한 계집이 어디 있겠소.나도 자세히 안다오. 당신도 사나이답지 못하지, 아무리 어여뻐서 못 잊을 계집이기로 그 마음을 받지 아니하고 달아난 계집년을 밤낮 잊지 못하고 간절히 생각하니 어디 대장부라 말하겠소. 그래도 당신 마음에는 사나인 듯싶소? 나같으면 그러한 년은 한 칼에 두 도막을 내어버리지요.』
순애는 엎치어진 몸을 일려 하나 최만경에게 눌리어 소리 한 마디 지르지 못한다.
『여보 수일씨, 당신에게 내가 하던 말을 당신은 일상 대답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니 의가 아니니 하고 점잖게 거절하지 않았소. 그렇게 도리를 지키고 의리를 존중하게 아시는 양반이 어찌하여서 이와 같이 음란한 계집은 은근히 살려두고 보십니까? 그래서는 내게 대하여서 하시던 말씀도 거짓말이요. 당신도 사나이의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서 이 계집을 처단하지 않소. 나도 결단코 다시는 당신에게 무슨 말을 아니할 터이니 내 앞에서 이 계집을 좌우간 어떻게든지 처단을 하여 주시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첫째 내가 용서치 아니하겠소. 수일씨, 왜 가만히 앉았소? 당신도 사나이일 것 같으면 내 눈앞에서 이런 계집을 한 칼에 찔러죽이시지. 만일 당신이 한 칼에 목을 베어 죽이지 못하더라도 잘 드는 칼을 내가 드릴 터이니 어서 이것을 가지고 찌르시오.』
최만경은 품속으로부터 광채가 황황(晃晃)한 비수(匕首) 한 개를 내어놓는다.
수일은 놀라운 마음에 몸도 능히 움직이지 못하고 다만 살기가 가득한 최만경의 얼굴만 바라본다. 순에는 거의 맑은 정신을 잃었는지 엎더져서 숨소리도 들리지 아니한다.
『자, 내가 이렇게 누르고 있을 터이니 모가지든지 가슴이든지 아무데나 마음대로 한 칼에 찔러죽이시오. 왜 그렇게 어름어름하오? 칼 잡을 줄을 몰라서 그럽니까?』
최만경은 칼날을 위로 향하고 칼등은 아래로 하여 다섯 손가락으로 칼자루를 훔켜잡고 수일을 향하여 주며,
『자, 이렇게 잡고서 찌르면 됩니다.』
『……….』
『그래도 당신은 이런 집에 미련한 정이 남아 있어서 죽여버리기가 아까운 것인 게구려, 그러면 내가 당신 대신에 죽이오리까. 대번에 죽일 터이니 잠깐 보고 계시오.』
말이 다 맟지 못하여 거울빛 같은 광채가 번뜻 비추이며 칼날은 벌써 순애의 흩어져 내려온 머리털 사이로 들어간다. 수일은 그 모양에 깜짝놀라 일어나 말리려 할 때에 순애는 기운을 다하여 벌떡 일어나는 서음에 칼날은 빛나가 공연히 방바닥을 찔렀더라. 순애는 소리를 높이 지르며,
『아이고, 어찌하나! 수일씨.』
하며 최만경의 손에 매달리어 서로 밀치고 서로 잡아당기다가 두 여자가 한가지로 붙들고 방 위에 쓰러진다.
순애는 최만경의 두 손을 붙들고 방 위에 번듯이 누워 급히 소리를 지르며,
『여보 수일씨, 어서어서 그 칼을 집어서 나를 찔러 죽여주시오. 당신의 손으로 나를 죽여 주시오. 당신의 손에 죽기가 내 원이올시다. 제발 어서 죽여주. 당신에게 죽으면 원이 없겠소.』
이와 같이 위태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수일은 감히 손을 들어 말리기도 어렵고 가만히 앉아서 수수방관 하기도 어려운 일이라. 공연히 가슴이 요란하며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는데, 두 여자의 싸움은 점점 긴하여지며 두 사람 사이에서 서릿발 같이 번쩍거리는 빛은 혹은 높으며 혹은 낮아서, 좌편으로 또는 섬섬홀홀(閃閃忽忽)하여 흡사히 한 갈구리 새 달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 사이로 나타났다 다시 숨었다 함과 같다.
『여보 수일씨, 당신이 나를 남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두고 보고 계십니까? 내가 이 계집의 손에 죽는단 말씀이오니까?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이 계집의 손에 죽기는 원통하구료. 아, 원통해!』
하며 순애는 흐트러진 머리를 흔들며 사지를 온전히 두지 않고 입으로는 선혈(鮮血)을 뿜는다.
두 여자의 위태한 지경을 구하고자 하는 수일의 가슴은 수레바퀴같이 돌건마는 그 몸은 철색으로 결박한 것 같이 움직이려 하나 손가락 한 마디도 요동치 아니하고, 소리를 지르고자 하나 목이 막히어 숨결도 크게 나오지 아니한다.
근력도 이제는 다 진하고 목숨도 거의 위태하여 순애는 간신히 입밖에 나오는 목소리로 부르짖는다.
『여보, 당신이 나를 죽여주지 아니하면 내가 자살이라도 할 터이니, 여보 수일씨, 그 칼을 집어서 내 손에 쥐어주시오. 자, 어서 이 손에. 수일씨, 마지막 순애의 소청이올시다. 어서 칼 좀 잡아주어요.』
두 여자의 서로 붙들고 다투는 서음에 최만경의 수중에 들었던 칼이 뚝 떨어지며 수일의 앞 방바닥에 꽂힌다. 순애는 얼푸시 몸을 뛰어 그 칼을 손에 잡는다.
최만경은 칼을 빼앗기지 아니할 마음으로 다시 순애의 뒤로 달려드는 것을 한 손으로는 최만경의 몸을 물리치며 칼날을 거꾸로 하여 목에 대고 힘을 다하여 두 손으로 찌르는 기운에 칼날은 이미 반이나 들어갔고 선혈은 임리(淋漓)하여 칼자루로 넘쳐흐른다.
수일은 홀연 눈이 캄캄하여지고 마음이 사라지는 것 같은데, 아직 목숨이 남아 있는 순애는 수일의 무릎을 붙들고 다시 눈물을 흘린다.
『이제는 내 목숨은 없어졌고 나는 죽은 사람이올시다. 이 지경에야 내 소원 한번 못 들어주실 것이 무엇이요? 여보 수일씨, 당신의 손으로 남아 있는 내 목숨을 끊어 주시오. 그리하여 주시면 나는 당신에게 용서를 받은 줄 알고 죽을지라도 지하에 가서 눈을 감겠소. 지금까지 지었던 죄는 오늘날 다 용서하여 주시고 당신의 마음도 모두 풀어주시오. 내가 이렇게 알고 죽은 후라도 당신이 만일 용서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죽어도 원이 되고 후생에서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 원이 풀리지 아니하겠으니, 이 한 목숨 끊는 것을 불쌍히 보시고 한 마디 말씀으로 용서하여 주시오. 당신의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이나 불러주시고 한숨에 내 목숨을 죽여주시면 이 생에서 쌓였던 한이 다 풀어지고 웃는 얼굴로 지하에 돌아가겠습니다.』
선혈에 젖은 칼자루를 목을 디밀어 수일의 손에 쥐어 주며 순애는 얼음같이 식어가는 뺨에 수의 손을 이끌어다가 정다이 댄다.
『나는 인제 죽어버리면 다시 이 세상에서 당신을 뵈올 수가 없으니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살려주는 줄로 생각하여 주시고 이 자리에서 다만 한 마디만 「용서하노라」고 말씀하여 주오. 내 목숨이 살아 있을 때는 한없이 미웁게 보셨지요마는 죽어버리면 그만이올시다 그려. 이생에서 지은 죄와 한은 그만 사라져서 흙이 되어버리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전죄를 회개하고 당신 앞에서 목숨을 끊는 것이니, 여보 수일씨, 기왕에 지낸 일은 흘러 내려가는 물에 띄워버리시고 그만 용서하여 주시구료, 응, 수일씨.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그때에 생각지 못하고 지각없이 한 일이 어찌 뉘우쳐지고 원통한지 나는 무엇이라고 말씀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당신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시던 말씀도 입때까지 잊어버리지 아니하였소. 이후에는 날이 갈수록 생각날 일이 있을 터이니 「오늘 저녁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 안에 남아 있습니다. 내가 그때는 여우의 혼신이 씌웠든지, 어찌하여서 그때 말씀을 못 알아들었든지, 어리석은 제 몸만 책망할 수밖에 없지마는, 죽더라도 다시 회복하지 못할 일을 내가 왜 하였던지! 여보 수일씨, 당신의 벌역을 내가 입었습니다. 나는 살아서 섰을 땅이 없도록 당신에게 잘못한 벌역을 맞았습니다. 그러니 인제는 그만 용서하여 주시오, 네, 수일씨. 그리고 인제는 이와 같이 벌역을 당하여서 이 모양이 되었으니 지금 다시 좌우를 생각한들 소용없는 일이요. 살아 있을수록 고생만 될 터이요, 내 고생만 될 뿐이니까, 이 세상이 여러 가지로 섭섭한 일은 많이 있지마는 나는 하루바삐 죽어서 이런 근심 저런 고생을 다 잊어버리고 전생에서 정결하게 지내던 몸이 다시 되어서 이 다음 세상에 태어나서는 무슨 고생을 겪든지 당신과 한가지로 내외가 되어서 내 가슴에 가득히 들어 있는 말씀도 할 것이요, 이 세상에서 다 하지 못한 일도 마음대로 다 하여 당신 마음도 기껍게 하여드리고 내 마음도 즐거워서 한 세상을 재미있게 지내보고 싶소이다. 여보 수일씨, 요다음 다시 태어나는 세상에서는 결단코 내가 이 세상에서 같이 지각없이 아니할 터이니 당신도 아무쪼록 잊지 말고 계시오. 진정 말씀이니 잊지 말으시오. 죽을 때에 임하여 하는 말은 사람마다 착하다 하오니, 나는 이 후세에서나 다시 뵈옵기를 축원하고 죽습니다. 그러니 제발 용서하여 주시오.』
떨리는 목소리로 순애는 간신히 말을 마치고 한 손으로 다시 칼자루를 잡으며 방바닥에 엎드러진다.
『이게 웬일이야?』
하며 수일은 비로소 놀라운 마음에 외마디 소리같이 질렀더라.
『아, 수일씨!』
하며 슬피 바라보는 순애의 얼굴은 피는 넘치어 칼자루도 보이지 아니한다. 수일은 와락 달려들어 두 손으로 순애의 손을 붙들며,
『여보 순애, 이게 무슨 지각없는 일이요?』
하며, 목에 꽂히어 있는 칼을 빼려 하매 한마음을 독하게 먹은 여자의 힘은 자루를 잡은 것이 철석 같아여 움직이지 아니한다.
『이것을 놓아, 이 손을 놓치 못할 테야? 어찌해서 이 칼잡은 손을 놓치 못하느냐 말이야.』
『아이고, 수일씨……』
『응, 왜 그래?』
『아이고, 나는 좋은 마음으로 갑니다. 다시 유언할 말씀도 없소. 인제는 나를 용서하셨군요.』
『글쎄, 이 손을 놓아요.』
『이 손은 펼 수가 없소. 인제는 내가 눈을 감고 죽겠습니다. 여…… 여보 수일씨! 아, 점점 정신이 없어져가니 어서어서 내 귀에 말소리가 들릴 동안에 용서하여 준다는 말씀 한 마디만……』
철철 흘러내리는 피는 자리를 적시는데 점점 사라져가는 목숨은 순애의 얼굴을 가리어 온다.
수일은 그 경상을 차마 보지 못하여 어지러운 마음으로 순애의 몸을 흔들며,
『여보 순애, 정신을 차려.』
『으…… 응…….』
수일은 홀연 눈물이 솟아나오며 목소리가 떨리어 나온다.
『아, 순애! 용서하여 주리다. 벌써 내가 용…… 용서하…… 였어, 응, 순애…….』
『아이고 조…… 좋아라, 여보 수일씨.』
『어…… 순애…….』
한 마디 부르고 수일은 다시 가슴이 막히어 말을 이루지 못하는데, 수일의 무릎을 베고 수일에게 안기어 있는 순애의 얼굴에는 다시 두 줄 눈물이 흐르며 감겨가는 눈을 간신히 실날같이 뜨고 수일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러면 수일씨, 나는 인제 한숨에 죽어버리겠소. 수일씨, 부디 안녕히…….』
한 번 느끼며 다시 칼자루를 고쳐 잡고 목을 에어내려 하는 것을 수일은 그 손을 꼭 붙들며,
『글쎄, 이 손을 놓아요. 어떻든지 손을 떼어.』
『아니, 그대로 가만히 두셔요.』
『글쎄, 이러지 말아요.』
『왜 이리하시오? 어서 죽어야지요.』
간신히 칼자루 잡은 손을 풀어놓고 꽂힌 칼을 빼어놓으매 순애는 홀연 몸을 벌떡 뒤우치어 일어나 문 밖으로 엎드러지며 달아난다.
『여보 순애, 어데를 가오?』
하며 붙들려 하는 손은 이미 미치지 못한지라.
수일은 급히 일어나 쫓아가려 할 즈음에 급히 떼어놓는 발길이 최만경의 죽어 넘어진 신체에 걸리어 한간 동안이나 멀리 넘어지는데, 문지방에 허리를 걸쳐 아픔을 이기지 못하면서 다시 소리를 높이 하여,
『여보 순애, 잠깐만 기다리오. 내가 할 말이 있으니 거기서 기다리오. 여보게 할멈, 그 순애씨 가지 못하게 붙들게.』
아무리 소리를 높이 하여 부르짖으나 순애는 돌아오지 아니하고 노파도 대답이 없다.
수일은 아픈 곳을 두 손으로 부비면서 간신히 몸을 일어 문을 나서 사면을 바라보니 순애의 모양은 보이지도 아니하고 다만 발자취마다 줄줄이 흘리고 간 피 흔적만 마당으로부터 대문을 좇아 났는지라, 수일은 반석보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대문을 나서 보니 순애는 멀리 가지 못하고 앞에 가는 모양이 보인다.
푸른 하늘에 맑게 떠서 있는 월색은 먼 산봉우리에 구름같이 피어오르는 안개까지 몽롱히 보이는데, 수일은 순애의 가는 곳만 향하여 달음질한다.
『여보 순애, 가지 말고 거기서 기다리오.』
부르는 소리는 산에 울리어 다시 수일의 귀에 들릴 뿐이요, 교교한 월하에 다시 대답하는 사람의 소리는 없다. 수일은 이를 악물고 순애의 뒤를 따라간다.
눈앞에 보이는 순애의 걸음을 삽시간이면 쫓아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수일은 점점 숨이 차고 다리가 헛놓이며 몇 간 동안 앞에 보이건만 잡기는 어렵다. 수일은 전신에 평생 기운을 다하여 전도하여 가며 달음질한다. 순애는 거의 잡힐 듯하여 수일의 손에 바람에 날리는 치맛자락이 붙들리매 치마는 스스로 풀어지고 몸은 다시 달 아난다.
순애는 다시 언덕을 넘어가며 풀 속으로 주저앉더니 한 덩어리 선혈을 토하고 솔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맑은 바람에 다시 정신을 차리어 순애는 언덕 아래 버드나무 사이로 들어가는데, 그 아래에는 일만 물결의 깊은 물이 충충하여 사람의 목숨을 기다리고 있으니 순애는 이곳에서 몸을 던지려 함이러라.
수일은 두 손으로 풀 뿌리를 더위잡고 언덕 위로 올라오며 자주 순애를 부른다. 그러나 순애는 대답이 없고 푸른 버드나무 사이로 하얗도록 보이는 얼굴을 나타내며 쫓아오는 수일을 내려다보고 있더니, 수일을 향하여 용서하여 달라는 모양같이 두 손을 함께 합하여 들고 무수 사배하며 다시 나무 그늘로 몸이 숨겨진다.
순애는 언덕에 무성한 이슬에 젖은 풀을 발로 디디며 위태히 물가에 몸을 일어서서 위아래를 내려다본다. 양양히 흐르는 여울물 소리는 들어오려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짓하여 부르는 것 같다.
흘러 내려오는 물결은 바위에 다닷쳐 다시 흐르다가 무늬를 지어 고리같이 몇 바퀴를 돌다가 흘러내려가는 것도 이 자리가 사람이 들어올 데라고 가르쳐주는 것같이 생각되는데, 살쩍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점점 더하여 온다.
수일은 수풀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길을 따라 나무 뿌리를 더위잡고 언덕 위까지 다다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천만 길이나 넘는 언덕 아래에는 물이 가득히 흘러내려 가는데 순애는 그 물을 향하여 언덕 아래로 살닫듯이 내려간다.
그 죽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외에 다른 생각이 없는 수일은 그 모양을 보고 정신이 아득하여지며 발길을 멈출 사이도 없이 다만 한 발자국이라도 뒤지지 아니코자 쫓아 내려가며,
『순애.』
하며 부르는 소리 그치며 순애의 몸은 벌써 바람 지나간 후의 연기같이 사라지고 보이지 아니한다.
수일은 하늘과 땅을 부르짖으며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이 수풀 밑과 저 나무 사이를 찾아보니 조금도 형적이 보이지 않고 멀리 굽이쳐 흘러내려가는 물결에 싸여 잠겼다 떴다 하며 내려가는 물결이 혹시 사람의 몸이 아닌가 하며 수일은 황망히 나뭇가지를 붙들고 언덕 길에 몸을 붙이고 바위를 돌아 구렁을 넘으며 천신만고하 여 발이 빠지고 몸이 잠기건마는 몸의 위태함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가까이 이르러 보니 슬프도다! 녹음은 근심을 머금고 물결 소리는 체읍하는데, 여울 사이에 얹히어 있는 것은 순애의 신체로다.
수일은 홀연 대성통곡하며 순애의 신체를 붙들고 엎드러진다.
슬프도다, 순애여!
순애가 생전에 그 사람을 위하여 얼마큼 애정을 두었던고! 이제는 수일의 일천 줄기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다만 무심히 길게 잠들어 있는 순애의 얼굴을 적시건마는 순애의 영혼은 이를 알지 못하는도다. 수일은 슬픈 마음을 억제치 못하여,
『어, 순애! 여보 순애, 기어이 죽었구료. 자살한 것도 불쌍한데 이게 또 무슨 가엾은 일이요. 칼로는 목을 찌르고 다시 물에까지 빠지니, 어찌하여 이토록 참혹한 일을 하였단 말이요? 아, 불쌍하여라. 이렇게 아주 결심을 하였소? 여보 순애, 그대가 자살하고도 몸을 물에 던지니 한 번 죽음이 부족하여서 두 번씩이나 목숨을 끊는단 말이요. 아, 그 생각을 하니까 진정 불쌍하여 못견디겠구료. 그대가 아무 말을 하더라도 그대에게 대한 내 한은 결단코 잊지 아니하리라고 맹세를 하였소. 아무리 맹세는 하였지마는 이와 같이 무참한 주검을 내 눈으로 보고 나니, 미웁던 마음도 없어지고 탓되던 생각도 사라졌소. 여보 순애, 인제는 용서하였소. 내가 진심으로 용서하였소. 그대가 전과를 회개하고 이 모양까지 하는 것을 보니까 내가 도리어 부끄럽소. 여보, 순애, 내가 정말 면목이 없소. 이토록 마음을 결단한 줄을 알지 못하고 그대를 죽인 것이 내가 잘못한 일이요. 여보, 순애, 이렇게 죽도록 한 것은 내 죄니, 순애가 용서하여 주오. 알아들었소, 응, 순애, 아, 그만 죽었단 말이요!』
수일은 순애의 주검이 극히 참혹하며 또는 결백하여 전일에 부정하던 피는 모두 흩어져 더럽힌 몸을 결백하게 씻어버렸고, 다만 남아 있는 것은 회개하는 뜻으로, 또는 정성으로 내 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시체를 보매 불쌍하고 궁측하여 어느 곳에 비유할 수 없이 간절히 슬퍼한다.
수일은 구곡간장이 끊어지는 듯이 슬픈 마음으로 눈물을 뿌리며,
『여보 순애, 그대가 이렇게 죽었건마는 향불 한 개도 피워놓지 못하나 그 대신에 내 가슴 속을 그 향불로 알아 주오. 이 세상은 인제 마지막이니 아무쪼록 좋은 데로 연화대를 찾아가오. 후세에는 그대가 말하던 바와 같이 우리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부부가 되어서 백제를 누리어 보사이다. 순애…… 아무쪼록 잊어버시지 마오. 나도 잊지 아니할 터이니.』
얼음같이 식은 순애의 손을 두 손으로 끼어잡고 얼굴을 들여다보려 한즉, 눈물이 가리어 형체를 분간키 어려운데, 수일은 신체를 붙들고 다시 호읍한다.
『그러나 순애, 그대는 비록 한 번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후회를 하고 자살까지 하였으니 그 마음은 대단히 가상하오. 그래야 가위 사람이지. 그러나 이 이수일이는 어떠하오? 명색이 사나이자식으로 생겨나서 일개 아녀자에게 박대를 받았다고 한평생을 그릇하여 도척 같은 마음으로 염치도 모르고 도리도 생각지 않고 다만 이욕을 탐하느니 밖에는 알지 못하니, 그 돈은 두어 무엇에 쓰며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일을 하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람의 반드시 행할 도리가 있고, 내 몸 외에 또 사람의 길이 있거늘, 나는 그 도리를 다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행할 마음도 먹고 있지 아니하고 일개 여자로 인연하여서 낙망을 하였고, 낙망한 것으로 인연하여서 남자의 일생을 그릇하니 사람으로 생겨난 본의가 어디 있으며 사람의 도리가 어디 있소. 아, 잘못하였소. 내가 잘못이야. 순애, 그대는 내게 대하여서 회개하였으니 나는 사람된 도리에 대하여서 회개를 해야 할 것이요. 그대가 이렇게 회개한 모양을 보니 나는 실로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오. 당초에 그대가 나를 버리므로 인연하여서 이렇듯 타락한 이수일이면 그대가 뉘우치는 동시에 나도 속히 마음을 고쳐서 사람된 길에 어그러진 이 죄를 속(贖)해야 할 것이요. 아, 그러나 생각할수록 이 세상은 괴로운 일 뿐이로구나. 사람의 도리 도리요, 의무는 의무요. 낙은 또 낙으로, 그것도 없으면 못 쓰는 것이지. 나도 심택씨의 집에서 순애 한 사람만 바라고 공부를 열심으로 하고 있을 때는 이 인세(人世)라 하는 것은 다만 자미스러운 꿈으로만 생각하였구료. 그것이 꿈결 같은 이 세상일는지, 이것이 꿈결 같은 이 세상일는지 그 후로 오늘날까지 여섯 해 동안에 나는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져본 날이 하루도 없었소. 그러하거늘 무엇을 희망하고 내가 살아 있겠소. 죽기를 결단할 용맹이 없어서 그러한지. 김정연은 타서 죽고 순애는 자살하였으니 나는 어찌하면 좋단 말이요? 내가 만일 살아 있으면 평생을 두고서 그대의 죽은 얼굴이 눈에 밟히어서 눈물로 세상을 보내야 할 터이니, 그 모양으로 구차히 살아 있으면 무엇에 유익하겠소. 세상에 대하여서도 조금도 유익이 없을 것이요, 제 몸에 대하여서도 고생만 점점 더할 터이니, 차라리 죽어 몸 하나 주체하는 것이 제 몸에도 편안하고 더욱이 내가 죽으면 이 세상에 여러 사람들이 살게 되고, 또는 기꺼워할는지 알지 못할 일이지. 나도 세상에 사나이자식으로 생겨났다가 아녀자로 하여서 몸을 그르치고 나중에 하는 일은 강도에서 다름없는 고리대금을 하여 사람의 눈총과 욕설을 받다가 무성무취하게 죽어버리기도 원통하지마는 처음부터 이 길로 나서기가 불찰이지. 이렇듯 운수가 비색(否塞)한데 수일의 몸이 후세에나 다시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원통하던 일을 모두 풀어보지. 여보 순애, 이 자리에서 나도 죽소. 그대의 목숨은 나에게 바쳤으니 내 목숨은 그대를 주오리다. 후세에서 다시 부부가 되는 이것이 폐백이요, 잘 받아주오, 응, 순애. 그대도 아마 좋아할 터이지. 나도 싫어하지 않소. 나와 한가지로 잠깁시다.』
하며 순애의 신체를 일으켜 등에 업으려 한즉 가볍기가 한조각 종이와 다름없다. 괴이히 여겨 뒤를 돌아다보니 향기로운 냄새가 코에 엄습하며 한 송이 백합꽃이 사람의 얼굴같이 가득히 피어 어깨 너머로 드리웠다.
깜짝놀라 눈을 뜨고 깨달아 보니 아침날에 춘몽이 깊었는데 창 밖에서는 참새 소리만 짹짹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