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25장
흉몽을 깨고 난 후로부터는 이의 가슴은 더욱더욱 산란하며 이리 생각하고 저리 궁리하니 세상에 살아 있을 마음은 호말만치도 있지 아니하고 차라리 그때에 꾸던 꿈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
수일은 그 후로 만사를 젖혀놓고 번민(煩悶)하여 홀로 지내기를 삼사 일 동안이나 하였더라.
이와같은 사정을 말하자 하나 사람이 없으며 의논하자 하나 벗이 없고, 다만 스스로 가슴만 태우고 있을 뿐이로다. 이렇듯 어지러운 근심을 두 손으로 떼어다가 맹렬히 일어나는 화중에 사르고자 하나 그 근심을 사라지게 하는 날은 이수일의 몸도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라. 살아 있음이 옳을는지 죽는 일이 가할는지, 이수일의 흉중은 점점 어지럽고 드디어 이 문제를 처단하기에 항상 눈을 감고 심량(深量)할 때가 많이 있다.
수일은 날로 쇄락한 정신은 없어지고 암흑한 천지에서 배회하는 것 같아여 점점 신체의 건강을 해롭게 하는 고로, 잠시간 인연(人烟)이 복잡한 곳을 피하여 청량한 산중에서 신선한 공기나 마시고 현세의 괴로운 일을 잊을까 하여 하루는 아침부터 일찌기 경첩(輕捷)하게 행장을 차려가지고 며칠이고 몇 달이고 싫은 마음이 생기지 아니할 동안은 두류할 예정으로 동대문 밖 청량암(淸凉庵)이라 하는 조그마한 암자에 전일부터 친절히 아는 승에게로 찾아나아갔더라.
수일은 인력거를 몰아 동대문 밖으로 향할 때도 가슴에는 전일의 꿈이 연면하여 졸연히 떠나지 아니하고 인력거 위에서 담요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홍능(洪陵) 어귀에 다다를 때까지도 고개를 드리우고 좌우를 돌아보지 아니하더니, 홀연 울을창창한 송림이 길 좌우에 나열하였고 코에 맡추이는 초화의 향기에 비로소 눈을 들어 사면을 돌아보니 심수한 경치와 청량한 공기와 잔잔한 내야와 우뚝한 바위와 심지어 하늘에 떠 있는 구름까지라도 별건곤에 들어온 것 같아여 천만 가지의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일시에 사라질 듯한데, 다만 때때로 놀라운 것은 산이든지 물이든지 바위든지 풀이든지 나무든지 모두 몽중에 보던 곳과 흡사하다.
수일은 그 암자에 들어가 행리를 내려놓고 다시 대문을 나서 산 위로 가려 할 즈음에 어떠한 남자 한 사람이 수일을 보고 홀연 얼굴을 돌이켜 외면하고 그 대문으로 좇아 들어간다.
그 남자의 연기는 이십칠팔 세 되어보이고 신장은 조그마한데 자주 전후를 돌아보며 은근히 사람의 눈을 피하려 하므로 수일은 어떠한 사람이 무슨 연고로 그렇듯 수상히 하는고 하여 유의하여 보기를 마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 남자는 모양과 의복과 동작이 절간에 있는 사람도 아니요, 시골 사람도 아니요, 분명한 대 도회에서 성장한 사람이라. 그 남자의 모든 심상치 아니한 동작으로 미루어 보면 혹시 정신병(精神病)이 있는 사람으로 한양할 곳을 찾아서 이 절간을 찾아옴인가 홀로 결정하고 다시는 의심도 아니하였더라.
수일은 산 위로 산 아래로 한 바퀴를 돌아다니다가 저물기에 이르러서 암자로 서서히 돌아오니 처음에 대문에서 만나보던 남자는 그 절 아랫방 자기의 처소로 정한 건넌방에 앉아서 뜰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수일과 얼굴이 마주치매 또한 얼굴을 움치고 몸을 피한다.
수일은 그 남자의 행색을 다시 수상히 생각지도 아니하고 자기 방안으로 들어가 두루마기와 조끼를 벗어 걸고 다리를 펼치고 누웠으니 고요한 산중에 때때로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다. 조금 있더니 마당으로 좇아 신발 끄는 소리 들리며 늙은 승은 등잔을 들고 앞서 들어오고 젊은 승은 저녁상을 갖다 놓는다.
수일은 누웠던 몸을 벌떡 일어나며,
『아, 벌써 저녁이 되었나?』
젊은 승은 밖으로 나가고 노승은 저녁상을 다시 수일 앞으로 가까이 다가놓으며,
『아니 참, 나리…… 벌써 얼마만에 인제야 뵈옵소. 아까는 어찌 바빴든지 이야기도 한 마디 못하고…… 그동안은 그렇게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아니한단 말씀이요? 그러나 그 동안 어디가 불편하셨소? 신색이 대단히 못하셨구료.』
『삼백 육십일을 두고 일상 병치레만 하는 사람이 얼굴인들 어찌 피어볼 수가 있소? 그래서 이번에는 한가한 절간에서 약이나 좀 먹고 편안히 몸조리나 하여 볼까 하고 나온 길이요.』
『아이고 그렇지요. 이것저것 해도 내 일신이 제일이지요. 어서어서 약을 잡수시고 병환을 고치셔야지요. 그러나 찬이 아무것도 없어서 무엇을 잡수시나. 오늘은 두부 전골도 못하고…… 모두 널리 용서하여 줍시오. 요사이는 공일에는 손님이 별로들 나오시지 아니하시니까 마침 예비하였던 물건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일쯤이나 문안 장에 사람을 보내서 흥정을 좀 해오겠습니다. 내일은 잘 차려서 드릴 터이니 오늘은 배를 잔뜩 추켜주시오, 하하하하, 튀각 더 가져오리까?』
『아니, 그만두오. 그만하면 배가 불러 못 먹지 열 그릇이라도 먹겠소. 그런데 요사이는 손님이 그렇게 없단 말이요? 건넌방에도 손이 와서 있는 모양인데그래.』
『그 양반 한 분 뿐이야요.』
『단지 혼자 왔단 말이요? 그런데 아까 잠깐 그 사람의 모양을 보니까 무슨 병 있는 사람 같습디다.』
『아니오, 병객 같지는 아니하던 걸요.』
수일은 입에 물었던 물을 다 삼키고,
『그런데 대사도 그 사람하고 더러 이야기도 하여 보았소?』
『네, 이삼일째 묵는 양반이니까 집안 식구같이 모두 친하지요.』
『그 사람도 나같은 축인게루구먼. 혼자 무슨 맛으로 와서 며칠씩 묵어? 나는 병이나 있으니까 그렇지마는.』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요. 찾아올 사람이 있는데 입때지 오지 않는다고 어제부터는 하루 몇 번씩 전차 정거장으로 가서 기다려보기도 하고 편지도 부치는데 목이 타서 나올 사람을 기다리는 모양입디다. 올 사람 기다리느라고 조석도 아니 먹고 애를 써요.』
『허허, 그것참, 대단히 걱정될 일인데.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 오는 것같이 화나고 갑갑한 것은 없겠다. 그렇지만 조석을 먹지 않고 애쓸 것이야 무엇인가? 어떠한 사람인고, 남자인가 여편네인가.』
『글쎄요, 소승인들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남의 일이라도 궁금해서 못 견디겠어, 자세히 알고 나야지.』
노승은 부채를 들고 상의 파리를 날리며,
『나리도 대단히 다심한 양반이구료.』
『우리는 그런 말을 들으면 알고 싶어서 못 견디는 성품이야.』
『그렇게 기다리시다가 늙은이가 오든지 당신이 아시는 친구가 오면 좋지마는, 만일 꽃 같은 아가씨가 왔다가는 큰일나겠소그려.』
『왜 무슨 큰일이 난다 하는 말이요?』
『만일 어여쁜 색시가 저 손님 방에 와서 있으면 나리가 오즉 욕심이 나시겠소? 침을 흘리실 터이지.』
『남의 물건을 침을 흘리면 소용이 있나?』
수일은 저녁밥을 마치지 아니하여 건넌방에 앉아 있던 손은 옷을 입고 문 밖으로 나아간다.
노승은 수일을 보고 입을 빙긋하며 눈짓을 하고 나직이 말한다.
『저 손님이 또 정거장으로 기다리던 사람을 마중 나가나 보오.』
『정말 대단히 기다리는 모양이로구먼. 혼자 이런 곳에 와서 있기는 실상 말이지 조금 심심할 터야, 나부터 그러하니까.』
하며 혼잣말과 같이 한다.
『그렇고 말고요. 이렇게 적적한 산중에 도대체 혼자만 오시기가 당신의 잘못이지요. 남과 같이 좀 정신을 차리시오.』
하며 노승은 입을 가리고 웃는데,
『인제야 대사에게 배웠으니까 요다음부터는 정신을 차려서 잊어버리지 말고 한 사람 데리고 나오지.』
『요다음에 할 것 없이 내일 아침에라도 문안 기별하셔서 불러내 오시구료.』
『문안 기별 하여서…… 그러면 우리 집에 있는 밥 지어주는 할미장이나 불러올까.』
『공연히 나리도 그러지 말고…… 할멈은 불러다 무엇에 쓴단 말이요? 삼사십 년 후에 할멈 될 사람을 부르시라는 말씀이지.』
『남부끄러운 일이지마는 우리 집에는 단지 할멈 하나 밖에는 다시 없으니까.』
『왜 댁에 있는 사람만 말씀하오. 다른 데 꽃 같은 아가씨가 많이 있지요. 그 중에서 한 사람을 부르시구료.』
『다른 데야 들여쌓였지.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남의 소유물이라든데.』
『아따, 대체 나리도 거짓말씀은 퍽도 하오. 사람이 입은 삐뚤어도 주라는 바로 불라고, 참말을 해야지요.』
『참말이고 거짓말이고 나같은 사람은 그런 좋은 사람들은 하나도 아는 것이 없어요. 그런 좋은데가 있으면 무슨 재미로 이런 절간에 혼자 나와 있겠소?』
『아무렴, 그렇지요. 산속에 있는 중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그리하오?』
『아니, 진정 말이지 공연히 산속에 혼자 와서 산과 들로 돌아다니는 것은 나같이 미친 사람이나 그렇지.』
『그러면 소승은 밤낮으로 평생 산속에만 있으니까 벌써 미친 지가 오래 되었게요, 하하하하.』
수일은 밥상을 물리고 다시 대문을 나서 잠깐 동안 배회하다가 방으로 돌아와 보니 시계는 마침 아홉시가 되었는데, 건넌방에 있던 손은 정거장에 나아가 아직도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수일은 궐련 한 개를 피워물고 등잔불을 향하여 한참 동안이나 앉았다가 길게 한숨짓고 궐련 끝을 골난 사람같이 마당으로 내던지며 일어나 자리를 펴고 고요히 누웠으니, 집을 에워싸고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때때로 베개 머리에 떨어질 뿐이다.
그러나 조용히 혼자 누워 있는 수일의 가슴에는 처음부터 의심스러이 보았던 그 손의 행색을 의심 아니치 못 한다.
수일은 의심을 할수록 점점 의심은 더하여진다. 그 사람은 무슨 연고로 몸도 수척하였고 무슨 일로 사람을 꺼리어 피하는고? 가히 의심스러운 일이요, 연구할 사건이라. 이렇듯 의심하다가 수일은 남의 사실을 알고자 하여 공연히 심신을 수고로이 함을 도리어 시시로 책망하고 스스로 금지한다.
그러나 사람이라 하는 것은 왕왕이 자기에게 달린 마음을 능히 스스로 억제치 못하며 능히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
수일은 의심하는 마음을 억제코자 하나 이치에 대하여 의심 아니치 못할지라, 여러 가지로 의심이 수일의 가슴에서 전면(纏綿)하여 떠나지 아니하는데 웃간에 걸리어 있는 괘종은 늦게 들었던 잠이 비로소 깨어 기지개 켜듯이 띄엄띄엄 치는 종소리가 세어본즉 열한시가 되었더라.
그러나 밖으로 나갔던 손은 지금껏 돌아오지 아니한다. 그 손은 돌아오지 아니함인가, 또는 돌아오지 못함인가 하며 또한 의심을 마지 아니하며 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전전하다가 열두시가 되도록 그 손의 돌아오는 모양을 보지 못하고 드디어 잠이 들었더라.
이튿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매, 주인 노승은 마루에 와서 걸레질을 하고 있다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수일을 보고 손을 멈추며,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네, 나는 잘 잤소마는 대사는 지금도 눈에 졸음이 가득하구료.』
『졸리고 말고요. 어젯밤에 저 방 손님이 오실 줄 알고 새로 두점이나 되도록 문을 걸지 아니하고 기다리다가 이내 잠이 덧들려서 못 잤어요.』
『아, 그러면 그 손님은 이내 어젯밤에 와서 자지 아니하였소?…….』
『네, 아니 오셨어요.』
수일은 건넌방에 문을 열어놓았음을 보고 마루로 나와서 지나가는 체하고 방안을 들여다보니, 아랫목 머리 밑으로는 검은 가방 한 개와 누른 담요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는 자주 보자에 옷같은 물건을 싸서 놓아 있다. 수일은 그 가방의 모양을 살펴보아도 별로 의심스러운 형적은 보이지 아니하므로 다만 데리고 오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그를 보아서 가슴의 의심을 풀리라 하고 그 손보다도 수일의 기다리는 마음이 한시가 바쁘게 기다리고 있다.
이날도 이미 저물어 황혼이 되고 방안에 불빛이 고요한데, 수일은 저녁을 물리고 목침을 높이 하고 한가히 누웠더니 홀연 급히 사람의 신발소리 들리며 주인 노승은 문지방 너머로 방안을 들여다보며,
『여보 나리…… 인제 왔소. 저기 문간에 들어오니 좀 내다보시오.』
『무엇이 왔단 말이요?』
『글쎄, 얼른 일어나서 좀 내다보시구료. 꽃같은 색시를 하나 데리고 왔으니.』
『옳지, 그러면 저 방 손님이 기다리던 사람이 온게로구먼.』
노승은 다시 대답도 아니하고 급히 부엌으로 들어가서 기둥을 잡고 내다본다.
수일은 목침을 밀치고 벌떡 일어나 마당을 향하고 내다보니 벌써 남녀 두 사람의 그림자가 마당으로 좇아 들어오며 건너방 툇마루에 신을 벗고 들어간다. 회색 중절모를 눈썹까지 숙여 쓰고 얼굴을 사람 보이지 아니하는 곳으로 돌이키고 앞서 지나가는 사나이는 분명히 건넌방에 와서 있던 손이요, 데리고 오는 여자는 이십이삼 세나 되어 보이는데 곱게 빗기어 쪽찐 머리는 컴컴한 마당을 비추이는 등잔불 빛에 거울같이 광채가 나며, 자세히 보이지는 아니하나 윤이 흐르는 비단 저고리 비단 치마는 서슬이 푸르도록 새 감으로 하여 입고, 손에는 여자의 가방을 들고 한 손으로는 수건을 들어 입을 가리며 사람의 눈에 뜨이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는지 걸음을 급히 하여 남자보다 앞을 서서 방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급급히 지나가는 모양에 자세히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의복과 태도는 잠깐 보건대 여염가의 여자는 아니요, 화류계에서 출입하는 계집 사람이 아닌가 하고 수일은 홀로 짐작하였더라.
그 남녀 두 사람은 기꺼워하기를 마지 아니하는 모양으로 서로 무릎을 연하고 손을 서로 잡고 앉아서 무엇이라 가만가만 두런거린다.
『그렇지요, 그러하기에 나는 어떻게 심려를 하였는지 모르지요. 당신이 여기 앉아서 혼자 생각하시는 것같이 쉽게 일이 되어야 하지요. 그야 당신의 걱정되시는 마음도 그러하시겠지요마는 내 근심은 어떠하였는지 아시오? 내 마음을 좀 생각하여 달라고 하시지요마는 그는 피차에 마찬가지가 아니오. 아이고, 나는 지금까지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뒤에서 잡으러 쫓아오는 것같이 마음이 놓이지 아니해서 못견디겠소.』
『어떻든지 우리가 약속한대로 이렇게 만났으니 제일이지.』
『참말 그래요. 그저께 밤 같아서는 어떻게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는지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밤새도록 궁리만 하다가 오늘 이렇게 몸을 빠져나와서 생각을 하니까 내가 생각을 하여도 용하게는 철망을 벗어나왔어요. 이것도 우리의 인연이 다 진하지 아니한 까닭인게지요.』
하며 잠깐 남자의 얼굴을 흘긋 치어다보고 수건으로 눈물을 씻는다.
『그 인연이 다 진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 마지막으로 없어질 징조지. 나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악한 인연이라 하는 것은 할 수가 없는 것이야.』
여자는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당신은 말끝마다 악한 인연이 무엇이니 하시니 악한 인연이면 어찌하실 터이요?』
『악한 인연이니까 우리가 이 모양이 되었지.』
『이 모양이 되었으니 어찌하겠다는 말씀이요?』
『지금 와서야 어찌할 수가 있나? 헐일없지.』
『그런 말씀이야 하나마나한 말씀이지요. 대체 당신은 말씀하시는 것이 섭섭합디다.』
『여보게, 뉘 말이 섭섭하단 말인가?』
하는 남자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히 괴어 있다.
『당신 말씀이지요.』
하며 그 여자의 눈에서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은 눈물이라.
『나더러 섭섭하게 한다는 말이야……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내 마음은 좋겠나?』
『좋든지 언짢든지 간에 대체가 당신 말씀은 섭섭해요.』
『또 그런 소리를 하네그려. 내가 무엇을 섭섭하게 하던가, 그 말을 좀 하게.』
『네, 내 말씀하오리다. 당신 말끝마다 악한 인연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주 버릇이 되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사이가 본대 좋을 인연이면 이 모양이 되었겠소? 물론 인연이 좋지 못한 까닭으로 이런 근심을 하고 돌아다니지요. 그런 것을 당신은 말끝마다 인연이 좋으니 언짢으니 하시니, 듣는 나는 좋단 말씀이요? 바꾸어서 생각을 하여 보시구료. 나로 하여서 좋은 인연이 좋지 아니하게 되었단 말이요? 우리가 이 모양이 되어 가지고서도 그런 서어한 말씀을 일상 하시니 내 마음은 좋을 듯하단 말씀이요? 그런 말씀도 다른 때 같으면 모르겠소마는 오늘날 이 모양이 되어가지고도 그렇게 말씀을 하신단 말이요. 가만히 당신도 생각을 하여보시구료. 내 마음에 야속하겠다 아니하겠나?』
『글쎄, 우리의 인연이 악하니까 악하다 말이지. 내가 마음에 부족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 말인가?』
『글쎄, 인연이 악하면 어떠하고 좋으면 어떠하단 말이요?』
두 사람은 이토록 말이 없는데 여자는 은근히 입을 가리고 울음에 느끼고 있다.
『왜 이렇게 울고 있어? 남의 마음 상해 주지 말게.』
『아무리 생각하여도 당신은 내 마음을 모르시는 것이 원통합디다. 당신이 그리하면 나는…… 참…… 나는 어떻다고 말할 수가 없소. 단지 한 사람으로 믿고 있는 당신이…… 그러시니…….』
그 여자는 더욱 느끼어 울며 말을 이루지 못한다.
『여보게, 글쎄 자네도 생각을 좀 하여보게 우리가 이 모양 된 일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어찌 알 것 같으면 본래부터 자네하고 이런 사이가 되었을 리도 만무하고, 한 마음을 먹고 여기까지 함께 나와서 이 모양을 하려고 하였을 리는 있는가. 웃음의 말이라도 내 귀에 그런 말은 들려주지 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내 역시 마음에 좋지 않고 야속만 하이. 너무 야속하여서 나도 눈물이 나네. 내가 조금이라도 자네를 범연히 알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오, 자네를 서어하게 대접하는 것이 아니니 그런 말은 조금도 내지 말게.』
『그렇지는 하필 이러한 때를 당해서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니까 나도 잠깐 야속한 마음에 한 말씀이지요. 그러면 내가 잘못하였으니 용서하시오.』
하며 그 여자는 고개를 드리우고, 남자는 묵묵히 앉아 있다.
『여보, 무슨 생각을 그렇게 정신없이 하고 있소?』
『다른 생각이야 할 것이 있나. 우리 두 사람의 신세를 가만히 생각하니까 기가 막혀 그리하네.』
『무엇하러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던 말씀이요?』
『……….』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을 하면 무엇을 하오.』
남자는 눈을 돌리어 천정을 향하고 길게 한숨짓는다.
『글쎄, 그렇게 한숨쉬고 설워하시지 마오. 왜 그리하오?』
남자는 대답이 없고 다만 한참 동안은 묵묵히 앉아 있더니 다시 그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여보게 옥향이…… 자네가 지금 나이 스물두 살이 아닌가?』
『별안간 나이는 왜 묻소. 당신은 지금 스물일곱이시지요?』
『그러면 자네가 열아홉 살이던가?』
『그렇지요. 그때도 아마 요사이쯤 되었던 것이야요. 달은 밝고 할 때에 춥도 덥도 아니한데 당신하고 대동강으로 가서 배타고 놀던 생각이 지금도 엊그제 같은데요. 그날이 우리가 처음 만나는 때지요. 내 나이는 열아홉 살 때구료.』
『엊그제 같더니 벌써 삼 년이 되었네그려. 세월이야 쉽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모두 꿈결 같소구려.』
『참 그렇지, 꿈이야.』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무엇을 연하여 말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아, 참 꿈결이지. 살아 있던 세상이라고 할 수가 없어.』
『꿈이고 말고요. 우리가 몽중에서 몇 해를 보내고 있었지요.』
입 밖으로 나오려 하는 울음소리를 억지로 감추고자 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남자의 무릎 위에 엎드러진다.
『우리가 이 모양이 된 것도 모두 팔자이지요마는 그 못된 놈만 없었더면 우리가 이런 고생은 아니할 터이요. 나는 나대로 이리저리 생각한 일이 있으니까 얼마 동안만 기다려서 시절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더라도 우리에게 좋은 일이 여의하게 될 일이 눈에 확연히 보이는 것을, 그 못된 망한 놈이 훼방을 놓아서 억지의 짓을 한 까닭으로 평생을 바라고 있는 당신의 몸에 누명까지 씌우게 한 일을 생각하면 당신에게 다시 무엇이라고 말씀할 수가 없소.』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것이야 우리가 다 마찬가지로 당한 일인데.』
『아니오, 그렇지 아니해요. 내가 조금만 결단성이 있었더면 이 모양은 우리가 되지 아니하였을 것을. 마음 속으로는 여러 가지로 생각은 많아도 그것을 꼭 결단치를 못하는 성품이 되어서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으니, 정말 나는 당신에게 뵈올 낯이 없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 몸보다 당신의 몸을 먼저 근심하였소. 아마 나로 하여서 모든 난처하고 곤란한 일을 당하면서도 우리가 만날 때마다 당신의 걱정은 젖혀두고 내 몸만 염려를 하여주시고 정답게 위로를 하여주실 제마다 나는 마음이 기꺼운지 고마운지 어따가 비하여서 말 수 없어요.
그래서 요사이는 당신을 뵈오면 눈물부터 앞을 서고, 왜 그러한지 섧기만 하기에 이상스럽다 하고 있었더니 과연 이러한 일이 생기려고 그랬던지요. 당신에게 나는 항상 낯이 없어서 말을 못하고 있건마는 당신은 건듯하면 인연이 좋지 못하여 그렇다고 하시니 그때의 내 마음은 어떠하겠소. 나같은 일개 조그마한 계집으로 하여서 공연히 남의 신용만 잃어버리고 몸만 잊어서 어디 못된 계집하고 관계를 맺었다고 혹시 후회나 하시지 않는가 하고 혼자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이 어떠하겠소.』
『그래도 우리가 생이별보다는 낫지.』
『이별이요…… 아이고, 나는 그런 말은 듣기도 싫소.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가 나는데, 우리가 헤어지니 함께 사느니 그런 말은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더니, 그 못된 놈이 다닌 후부터 그런 소리가 시작되고 나중에는 심지어 이 모양까지 되었으니 그놈의 원수는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아니할 것 같소. 내가 이 원수를 어느때나 갚아볼까? 아이고 분해.』
하며 옥향(玉香)이라 하는 여자는 몸을 벌벌 떨며 골수에 사무치는 한을 방자하듯이 요란을 부린다.
알지 못게라. 이와 같이 원망하며 꾸짖으며 방자를 받는 사람은 어디 있는 어떠한 사람이뇨?
『그놈도 우습고 못생긴 놈이야.』
하며 그 남자도 비웃기를 마지 아니한다.
『못생길 뿐이요, 못생겨도 분수가 있지. 동서를 분간치 못하는 숙맥이지요. 노는 계집이면 모두 돈에 죽는 줄만 알고 놀지요. 그런 못생긴 위인이 어디 있소. 오며는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건마는 그 눈치도 알지 못하고 잠시도 떠나지 아니하며 붙어 다니면서 나중에는 남의 좋던 사이까지 방해하니 그런 못된 위인은 처음 보았어요. 나는 어찌 미운지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제 마지막 분풀이로 그놈의 몸뚱어리를 한 반이라도 짜개 놓아서 아주 다시 세상에 출두를 하지 못하게 병신을 만들어 놓아야 하겠소.』
『그것은 무슨 어리석은 말이요.』
『내가 어리석은 말이 아니라 내가 지금 죽기로 자처는 하였어도 그놈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이 큰 원이 되겠소.』
『지금 그런 소리는 소용 있나!』
하며 남자는 옥향이라 하는 여자의 손을 끌어다가 두 손으로 잔뜩 끼어 붙들고 말을 이루지 못하며 다만 낙수같이 떨어지는 눈물은 옥향의 치마 위에 떨어진다.
『그때 당신하고 작별한 후는 그 이튿날부터 궐자가 아주 자기의 집같이 와서 있고 조금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는구료. 나는 아무 마음이 없이 빠져나올 궁리만 하는데 그 사람은 점점 더 진대를 붙이고 귀치않게 구니까, 나중에는 견디다 못하여서 꾀병을 하고서 어디로 몸을 피하여 갔더니 거기까지 쫓아와서 사람을 못 살게 하는 구료.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궐자가 돈냥이나 있는 사람이라고 거기만 마음이 팔려서 집에 와서 있으면 별상 대접하듯 하고, 나더러는 그 사람을 반갑게 대접 아니한다고 일상 야단이지요. 그러니까 궐자는 제가 제일이고 잘나서 그러한 것같이 바로 점잔을 빼고 밥을 가져오너라, 술을 사오너라, 제 집같이 야단 요란을 부리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어요. 그리고 저의 집으로는 당초에 갈 생각도 아니해요. 그리하고 보니까 나는 아주 사로잡힌 몸이 되어서 나오려 하여도 빠져나올 수도 없고 당신하고 약조한 일이 있으니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어떻게 마음이 조리어지는지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어떠한 때는 집에서는 말도 아니하고 입고 있던대로 뛰어나올까 하다가도 동기(童妓)로 있는 우리 아우 화향이가 불쌍하고 어머니까지라도 나 하나를 치어다보고 계신데, 내가 없어진 후면 집안 식구가 어찌 살아가며 지금 나이 불과 십오세 된 화양이도 어린것이 철모르고 오죽이나 고생이 되랴 하는 마음으로 얼른 결단을 하지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다가 그만 늦어서 나오지 못하고, 궐자도 그날은 새로 두점까지 가지 않고 있다가 내가 별말을 다 하여서 간신히 까불려 보냈지요. 그리고 그 이튿날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우리 어머니의 생 꾸지람이 시작되어서 밤낮 하던 소리를 되하고 되하고 하시니까 나중에는 듣기도 싫고 대답마디나 하였더니 말대답한다고 싫도록 두드려 맞았지요. 나는 아무리 두드려맞지 아니하여 반이나 송장이 되기로 그것을 원망하는 말은 아니지마는 나도 평생을 바라고 있는 당신이 계시니까 내 마음까지는 실컷 벌어서 내가 기생 나와서 할 만큼은 다 하였구료. 아무리 욕심에는 한이 없다고 하지요마는 내 영만 세우려고 남의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부려먹으려고만 하니 내가 돈으로 사서 온 기계도 아니요. 동두철신(銅頭鐵身)이 아닌 바에야 그렇게 부려먹고 있어서야 내 몸이 살아 있을 수가 있소. 별로이 나를 위하여 달라는 말이 아니라 내 마음만 좀 알아주면 아무리 고생이 되더라도 참고 있을 수가 있지요마는, 돈만 있는 놈이면 개든지 돼지든지 불계하고 맞아들이라고 하니, 그렇게 천루한 짓을 하지 않더라도 넉넉히 살아갈 만큼은 내가 이왕에 벌어놓았구료. 그런 생각은 조금도 생각하여 주지 않고 억지의 소리를 하다가 말마디나 대답을 하면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않는다, 못생긴 년이다」 하고 일쑤 두드려만 주니 그게 무…… 무슨…… 일잇…… 가요. 그러니까 나도 와락 골이 나서 다시 참고 있을 수도 없고 기가 막히어서 말도 아니하고 뛰어나오려 할 때에 원수의 김가가 또 오는구료. 자, 인제 또 붙잡혀서 달아나려니 달아날 수도 없고, 어머니는 깨가 쏟아지게 나를 옹골지게 아시면서 함께 가거라 가거라 하니까 가는 더욱 좋아서 끌고 가자고 하기에 나도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까 집 밖에를 나서야 어떻게든지 몸을 빼치기가 쉽겠기에 못 이기는 체하고 저의 집으로 끌려갔지요. 궐자는 무슨 딴 생각이 있었던 게야요. 그날은 웬일인지 술을 곱뿌로 들이먹고, 억지로 나를 술을 권하기에 말하기 싫고 사양하기도 싫어서 먹을 줄도 모르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서 먹는 체하고 있었지요. 그러느라니까 궐자는 점점 술이 취하여서 호기가 또 나옵니다그려.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한 귀로는 듣고 한 귀로는 흘리고 있노라니까 가장 제가 무서워서 말대답을 못하는 줄 알고 점점 기고만장하여 네가 나를 그렇게 대접을 하느냐 마냐 하며 「너하고 내가 벌써 상종된 지가 사오 년이나 거의 되었는데 인정으로 말하기로 그렇게 박대를 할 수가 있느냐」 하며 나중에는, 「네가 만일 내 말을 순종치 아니하면 내게 좀 견디어 보라」고 호랑이 추상 같으길래, 하도 아니꼽고 골이 나서 이것저것 보지 않고 동이로 방구리로 욕을 들이 퍼부어 주었더니, 나중에는 그 못난 물건이 무엇이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네가 아무리 기고 날으는 재주가 있더라도 돈으로 결박하여 놓은 네 몸이니까 헐 수 없을라」 하면서 바로 뽐냅디다 그려. 나는 그 말을 들으니까 어찌 한편으로는 우스운지, 「아마 당신이 눈이 어두워서 거미줄로 닭의 알을 동였나 보오」 그랬지요.』
그 남자는 은근히 상쾌히 여기는 모양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하고 보니까 그 사람은 제딴은 대단히 골이 났던 모양이야. 야단을 하면서, 「기생년의 버릇으로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내 옷깃을 훔켜잡고 끌어내어 꽂는구료. 나도 그때는 어언간에 술이 취하였던 것이야요. 그때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단지 그놈의 미운 마음만 가슴에 가득하여서 그 옆에 놓였던 사기 그릇을 집어서, 「이놈아, 원수의 망한 놈아」하고 면판을 향하고 한 번 내던지니까 마침 양미간에 가 맞아서 그릇은 깨어지고 얼굴에서는 피가 주르르 흐르는 야단에 집안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수선을 부리는 동안에 슬그머니 나는 빠져서 나와 가지고는 갈 곳이 없어서 어떠한 알던 사람의 집으로 갔었지요. 거기 가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는 아직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머리가 모두 흐트러지고 옷이 모두 찢어졌으니 꼴이 사나와서 아무리 밤이기로 문 밖에를 나설 수가 없어서 헐 수 없이 그날 밤은 그 집에서 자고 밤새도록 그 집주인 마누라님하고 신세타령을 하다가 밤을 새웠지요.』
하며 말을 마치고 옥향은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는다.
남녀 두 사람은 혹은 체읍하며 혹은 말하는 것을 이수일은 마루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방안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듣고 있다. 그 손의 기다리던 사람이 과연 어떠한 사람인지 그 모양을 보고 의심을 풀리라 하던 일은 한 가지로 들어오는 여자를 보고 더욱 여러 가지로 의심이 일어난다.
(어찌한 연고로 그 여자까지도 얼굴빛이 좋지 못하고 그 남자와 같은 것을 보건대 피차간에 한 모양으로 근심이 싸여 그러함이로다. 예전부터 전하여 오는 말에 이르기를, 「범죄(犯罪)하는 데는 반드시 계집이 참예한다」 하더니 과연 저 남자도 저 여자로 인하여 죄를 범한 일이 아닌지 모르리로다. 그 죄로 인하여 저 남자는 근심하고, 그 남자의 근심으로 인하여 저 여자는 저렇듯 마음 태우는 것이라 하면, 저와 같은 남녀 두 사람은 진실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일컬을지라. 알지 못게라, 저 남녀는 무슨 연고로 손목을 이끌고 이와 같이 적적한 산중을 찾아왔는고? 그 죄를 도망하기 위함인가, 그 근심을 잊기 위함인가, 혹은 피차에 사랑하는 마음을 온전히 하기 위함인가? 저 사람들은 분명히 부부간은 아니요, 저 여자가 비록 기생이라 하나 놀음으로 온 길도 아니요, 다만 사사로이 정을 통함이 아닌가 의심한다.)
수일은 문득 생각하되 저 여자가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이곳까지 도망하여 옴이로다, 하며 가슴에는 여러 가지 감동이 일어난다.
슬프다, 창밖에 있어 남의 남녀가 봄 해 같이 따뜻한 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수일은 육년 전에 평양 대동강변의 예전 꿈을 다시 꾸고 있다.
(세상에 다만 이수일 하나 뿐이요, 다시 없는 줄로 믿고 사랑하던 순애는 저 남녀와 같이 도망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잠깐 동안에 재물을 바라고 눈이 어두워 백 년의 아름다운 인연을 아끼지도 아니하고 버리었으니 그때의 내 가슴의 한과 오늘날 순애의 후회하는 마음이여. 지금의 순애는 주야로 영화를 받고 이욕 사이에서 기거하며 온당치 못한 남녀간의 애정을 따르고자 하리로다.)
이와 같이 생각한 후 일은 은근히 그 남녀 두 사람의 행동을 의심치 아니하고 결백한 연애(戀愛)의 완전한 목적을 달하자 함이니, 만일 그리하면 그 두 사람의 자세한 사정을 알고자 한다.
여러 해 전부터 남녀간 연애에 실패한 수일은 지금 다시 자기의 신세를 남녀 두 사람에게 비유하여 본다. 나의 신세의 불행은 얼마나 크며, 남의 다행한 신세는 얼마나 많으며, 나의 인연은 얼마나 엷으며, 남의 인연은 얼마나 깊으뇨.
나를 사랑하던 사람의 정은 얼마나 얕았으며, 사랑하는 정의는 얼마나 깊으뇨. 나의 연애에는 장애하는 물건이 얼마나 많으며, 남의 연애에는 시기하는 물건이 하나도 없도다. 슬프다. 나의 연애는 이미 흩어진 물건이 되었도다.
수일은 슬픈 회포를 억제치 못하고 긴 한숨과 짧은 탄식으로 다시 자기 방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펴고 누웠으나 잠은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고 현세의 꿈을 꾸니 지난 일과 장래의 일이 모두 번갈아가며 눈 앞으로 왕래한다.
조용한 야반에 귀에 들리는 것은 다만 건넌방에서 도란거리는 남녀 두 사람의 이야기소리 뿐이요, 끊이었다 다시 이었다 하는 말소리는 밤이 아니면 들리지도 아니하겠거늘, 수일의 귀에는 오히려 번거히 들리더라.
그렇지 아니하여도 능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남녀 두 사람의 내력을 알고자 하여 이리 생각하며 저리 궁리하는데, 더욱이 여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말이 번갈아서 낭랑히 들리는 소리에 잠은 점점 멀리 가고 눈은 점점 반반하여진다. 홀연 그 방으로 좇아 크게 목소리가 나는 고로 수일은 놀라 베개에서 머리를 번쩍 들고 들으니 여 자가 체읍함이라.
그때에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자 한 사람이 소리쳐 울고 있을 뿐이니, 수일은 깨어 있던 눈이 더욱 청랑하여지며 그 여자의 홀연 큰 울음은 무슨 연고인지 알지 못하여 가슴을 두근거린다.
잠깐 동안은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다가 이하여 진정하더니, 전과 같이 또 무슨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일은 기울인 귀를 오히려 띄우지 아니하고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아니하여 듣고 있다. 그러나 자세한 의미는 들리지 아니한다.
수일은 다시 베개를 베고 돌아누워 잠 오기를 청하고 있다.
조금 있더니 그 방에 이야기도 끊이고 수일도 잠을 간신히 이루었다가 이튿날 아침이 늦어서 잠을 깨어 문을 열고 보니 그 남녀 두 사람은 뜰 앞에서 거닐고 있다.
수일은 그제야 비로소 그 남녀 두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더라.
이 날은 토요일이라 아침이 지내어 낮 후부터 놀러다니는 사람들은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씩 사람이 놀이차로 나오는 고로 그 남녀 두 사람은 사람의 눈을 피하여 아침부터 영창문을 닫고 들어앉아 있다가 오후 너덧시부터 가늘게 내려오는 초하의 비는 옷을 적시기 적당하다.
유산하러 나왔던 사람들은 모로 총총히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청량리 절간은 도로 적막하여졌는데, 저물어 가는 해가 흐린 날에 더욱 저물어 영창문을 굳이 닫고 방안에는 불을 켜고 수일은 고요히 누워 있다.
등잔불을 낮추고 밤이 깊도록 아무 소리가 없던 건넌방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두 잠이 들어 고요한 열두시 때에 이르러 홀연 등불을 돋우고 사람의 소리가 난다.
건넌방에 들어 있는 남녀 두 사람은 일어나 앉으며,
『여보게, 술상 이리 가져오게.』
『녜.』
하며 여자는 고요히 대답하나 그 목소리가 극이 처량하다.
『여보,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당신에게 말씀을 다 못한 것 같애.』
『아, 그런 말 하지 말게. 우리가 이 지경이 되어서 그런 생각을 다시 하면 역시 우리가 잊혀지지를 못해요.』
하며 남자는 눈을 감는데 눈귀로는 눈물이 흐른다.
『여보, 당신 반지하고 내 반지하고 우리 바꾸어 낍시다.』
『응, 그러지.』
하며 각각 손에 끼었던 반지를 빼어서 금으로 성명 새긴 반지는 옥향의 손에 끼고 금강석 박은 반지는 사나이의 손에 끼었더라. 동남풍에 내려오는 빛발은 영창문의 종이를 적시는데 방안에서 문을 굳이 닫고 이야기하는 말소리까지 음습하게 들린다.
『아, 비가 대단히 쏟아지는 모양일세.』
『당신은 평일에도 비오는 것을 보면 좋아하시더니 하나님도 우리의 사정을 알으시고 마지막 작별로 이 비를 주시나 보오.』
『아무쪼록 이 비를 술 안주로 알고…… 옥향이 마음을 단단히 먹게.』
『나는 벌써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니…… 염려 마시오.』
『어서 술이나 이리 가져오게.』
『녜.』
옥향이는 산란한 마음을 진정하며 저녁때부터 예비하여 놓았던 술과 안주를 두 사람 사이에 옮겨놓으며,
『자, 약주 잡수시오. 이 세상에서 내 손으로 당신 술 따라드리기는 마지막이요.』
『피차에 다 마찬가지지. 자네 손에 얻어먹는 것도 지금 마지막일 그려. 아무쪼록 마음을 편안히 먹고 있게. 여보게 옥향이, 그럴 리는 만무하지마는 혹시 잘못되어서 실수하는 수가 있더라도 나중이기로 아니 좇아갈 리가 만무하니 먼저 가서라도 나는 원망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게, 응…….』
옥향이는 목이 메어 말을 이루지 못하고 남자의 무릎에 얼굴을 숙이고 체읍한다.
『그리고 만일 자네가 뒤를 지더라도 나는 죽어서…… 그 혼은 자네의 몸을 떠나지 아니하고 있을 터이니 아무쪼록 마음이 변하지 말고 있게, 응 옥향이.』
『아이고…… 그…… 그런 소리 하시지 말고 함께…… 함께 데리고 가시구료.』
『아무렴, 한가지로 가지.』
『어서어서 함께 손목을 붙들고 가십시다.』
『자, 그러면 이 세상을 하직차로 이것을 한 잔씩 먹세. 그만 울지 말게.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
『울지 아니할 테야.』
『그러면 저 구석으로 가서 먹세.』
남자는 먼저 일어서서 여자의 손을 잡으니 옥향은 남자의 손을 붙들고 끌리어 울며 간다.
한구석으로 남녀 두 사람이 모여 앉았는데 두 얼굴은 모두 눈물에 어리었다.
『잔으로 술을 먹지 말고 아주 보기로 먹세.』
『그러면 반씩 노나 먹읍시다. 당신 먼저 잡숫고 주시오.』
옥향의 벌벌 떨리는 손으로 주전자는 잡았으나 눈에는 술잔도 자세히 보이지 아니한다.
남자는 술잔을 손에 들고 마실 생각도 아니하며 눈물만 흘리고 있다.
『여보게 옥향이, 자네 손에 얻어먹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
『여보, 나는 오늘날까지 고생만 하고 세상을 보내다가 당신하고 하루도 살아보지 못하고 기생의 이름을 면치 못하고…… 이대로 죽는 것이 제일 원통하오 그려.』
남자는 대답도 이루지 못하고 손에 들었던 술 그릇을 입에 대더니 한 모금에 반이나 마시고,
『자 옥향이 이 술마저 먹게.』
옥향은 그릇을 받아들었으니 이 술이 오늘 이별하는 술잔인가 생각하며 스스로 손은 떨리고 가슴은 무너진다.
『여보시오. 내가 지금 이런 말씀 하는 것이 도리어 서어한 말인 듯하지마는 당신은 참 나같은 못생긴 계집이라도 잊지 아니하고 여러 해 동안을 하루 한날 같이 사랑하여 주시는 마음은 진정 어떻게 고마운지 몰랐소. 내가 지금까지라도 입으로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어도 속마음으로는 어찌 고마왔는지요. 그 은혜를 갚고 싶으나 당신 아시듯이 우리 어머니라 하는 이가 오죽하오. 그런 까닭으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전후에 사람은 당치 못할 고생을 하여가면서 어느 때든지 좋은 기회가 있으면 당신하고 내외가 되어서 나를 사랑하여 주시는 은혜를 갚으려 하고 그 못할 고생도 나중에 바라는 마음으로 위로하여가며 지내어 왔더니, 인제는 그도 저도 다 틀려버리고…… 공든 탑이 무너지랴 하더니 그 말도 다 헛말이요. 인제는 당신이나 나나 다 같이 죽어서 흙이 될 터이니까 다시 우리가 이렇게 만나볼 수는 없을 터이니 내 마음이 그러하였던 줄이나 알아주시오.』
남자는 눈물을 씻으며 벌벌 떨리어 나오는 말이라.
『글쎄,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 마음만 좋지 못하니…… 그런 말을 들으면 황천으로 가는 길이 점점 방해가 되네. 우리가 이렇게 함께 죽으면 이승에서 함께 사는 것이나 저승에서 함께 사는 것이나 다 일반이지. 그런 슬픈 생각은 다시 하지 말고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같이 죽세.』
『내야 기뻐하고 말고요. 이렇게 죽는 죽음은 웃어가며라도 죽겠소. 나도 남기신 술을 먹겠소.』
하며 한입에 마시어버리고 남자의 앞으로 잔을 내밀며,
『당신이 나 한 잔 따라주시오.』
따르는 사람의 손도 떨리며 받는 사람의 손도 떨리고 엎지르면 다시 치며 다시 치면 또 엎지러진다.
남자는 옥향의 귀에 입을 대고 한 손으로는 옥향의 허리를 끌어안았는데, 나직이 나오는 목소리로,
『옥향이 마음을 단단히 차리게.』
『글쎄, 염려 마시오, 나는.』
『그러면 인제 먹어보세.』
『오래도록 이리 하고 있으면 무엇하오? 얼핏 죽어버립시다.』
그 남자는 가방을 열더니 조그마한 종이주머니 한 개를 꺼내어 놓는다.
그 속에 쌓여 있는 가루약은 이 남녀 두 사람의 목숨을 끊는 물건이러라.
옥향은 종자 두 개를 나란히 벌여놓았는데 눈과 같이 흰 가루를 두 종자에 나누었더라.
『자, 옥향이 이 잔을 잡게, 자네 잔에는 내가 따라주고, 내 잔에는 자네가 따라주게…….』
『네, 그럽시다.』
이때에 쏟아져 내리던 비는 개이고 처마에서 뚝뚝 듣는 낙수 소리만 들린다.
그 남자는 주전자를 들어 한 그릇에 술을 가득히 부어 놓으매 옥향이는 두 손을 합장하고 간신히 입밖에 나오는 목소리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옥향이도 남자의 앞에 있는 술잔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술을 치며 입속으로는 염불 소리를 그치지 아니한다.
이때에 남녀 두 사람의 맑은 정신은 거의 반이나 사라지고 각각 손에는 술잔을 들어 바야흐로 입에 대려 할 즈음에 홀연 백뢰(百雷)가 일시에 내려지는 듯한 소리에 남녀는 혼비백산하여 손에 들었던 술잔은 떨어져 방 안에 엎치어지는데 비로소 정신을 차리어 보니 등잔불 아래에 어떠한 남자의 모양이 나타나 있다.
『당신네는 어떠한 생각으로 이와 같이 마지막으로 가는 짓을 하오?』
그 남자는 비로소 맑은 정신이 돌아오며 놀라운 마음을 진정하고,
『아, 노형은 누구시오?』
『아마 노형도 내 얼굴을 아시겠구료. 저 방에 와서 묵고 있는 사람이요. 그러나 남의 방을 통기도 없이 이렇게 뛰어 들어와서 대단히 실례가 되었소마는 조금만 늦었더면 큰일이 날 뻔하였구료. 대체 노형네는 무슨 일로 이러한 짓을 하려고 그러시오?』
창연한 기색으로 남자는 고개를 드리우고 들지 아니하는데 옥향은 반이나 몸을 사나이의 그림자에 가리우고 앉아 있다. 수일은 두 사람의 동정을 자주 살피며 대답 나오기를 기다린다.
『물론 여기에 대하여서는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러한 일이니까 사소한 일은 다 말씀 아니하더라도 내가 대장은 짐작하겠으나 다만 무슨 까닭으로 두 분이 함께 자처하려는지 그 말씀만 하여 주시오.』
『……….』
『두 분이 부부가 되어서 살려고 하여도 마음대로 되지 못하니까 차라리 함께 죽는 것이 낫다 하는 말씀이요?』
그 남자는 대답은 없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렇다하는 말씀이요그려. 그러면 어찌하여서 부부가 되려 하여도 되지 못한단 말씀이요?』
그 남자는 역시 대치 아니한다.
『그 이유를 말씀하여 주시면 내 힘으로 능히 될 만한 일은 서로 의논껏 하여 도와드릴 수도 있을까 하고 묻는 말씀이니 좌우간에 대답하여 주시오. 자세한 말씀을 들은 후에 내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고, 과연 노형네의 사정이 어찌할 수 없이 죽어야만 할 것 같으면 내 역 억지로 말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돌아가시도록 권할는지도 알 수 없소. 나도 기위 이 자리에 들어왔다가 그저 나갈 리는 만무하니까, 노형네를 내가 능히 구하여 드릴는지 또는 구하지 못할는지 좌우간 무슨 결말이 있어야지요. 다행히 노형의 위급한 일을 구하면 나는 사람의 목숨 둘을 건지는 것이요, 만일 내 힘으로 구치 못하면 노형네는 이 자리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이니까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이면 무엇이 부끄러우며 무엇을 꺼리어서 말을 못하겠소? 조금도 관계가 없을 줄로 나는 아오. 그리고 만일 내가 노형 네의 목숨을 구하는 수가 있으면 나는 노형에게 큰 은인이니, 은인에게 대하여서야 무슨 비밀한 말씀이기로 못할 것이 없을 듯하오. 나는 공연히 남의 은근한 사정이나 알고자 하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상은 나도 노형의 사정을 들을 만한 마음이 있어서 하는 말이요. 조금도 염려 말고 말씀하여 주시오.』
수일은 가장 엄숙한 태도로 대답을 재촉한다.
그 남자는 하릴없이 입 밖에도 나오지 아니하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하는 모양이라.
『당신의 말씀은 모두 고마운 말씀이시다.』
『그러면 어서 말씀하시오.』
『녜, 말씀하오리다.』
『지금 이 지경에 이르러서 조금이라도 은휘할 필요는 없으니 하나도 숨기지 말고 다 말씀하여 주시오. 아, 참 내가 급한 마음에 잊었었구료. 나는 새문밖 사는 이수일이라 하는 변호사요. 그러한데 오늘 우연히 광경을 당하여 보니 그것도 무슨 연분이 있어서 그러 하였던가 보오. 결단코 내가 노형네에게 해로운 일은 없도록 하여줄 터이요. 나는 사람 두 목숨을 한 번 구하여서 양인에게 적선을 하고 싶소.』
『그토록 말씀을 하여주시니 더욱이 고마운 말씀은 이루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서 말씀하시오.』
하며 수일은 비로소 자리를 편안히 고쳐 앉으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 남자는 말내기를 심히 주저하며,
『사람도 하도 복잡하니까 무엇을 먼저 말씀하여야 좋을는지…….』
『다른 말씀은 어찌하였든지 간에 첫째로 말씀할 것은 노형네가 부부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어서 죽으려 하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그것을 먼저 말씀하시오.』
『네, 말씀하지요. 대단 부끄러운 말씀이올시다마는 나는 주인의 돈을 너무 많이 축을 내어서…….』
『아, 그러하면 노형은 주인이 따로 있소?』
『녜, 그렇습니다. 나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연전부터 주인에게 잘 보였든지 주인이 경영하는 무역회사(貿易會社)에 있다가 지점이 평양에 설시된 후로 그 지점의 지배인으로 삼사년 전부터 평양 가서 보던 최원보(崔元甫)라 하는 사람이올시다. 그리고 이 여자는 평양에서 기생 노릇하던 옥향이라 하는 기생이올시다.』
옥향은 그때야 일어나 수일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 간신히 허리를 굽히어 인사한다.
『그래서 어찌하였단 말이요?』
『그런데 요사이로 이 옥향이를 구실을 떼려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옳지, 그래서?』
『그리고 보니까 옥향은 기생의 몸으로 아무리 싫더라도 그 사람을 따라가야 할 모양이 되고, 또 나는 주인의 돈 쓴 연고로 하여서 주인에게 고소를 당하였읍니다그려. 그러하니까 나는 살아 있으면 감옥서의 귀신은 면치 못할 터이니까, 철없는 생각으로 이 모양을 하였습니다.』
하며 남녀 두 사람이 서로 부끄리는 얼굴을 들지 못하며 다시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다.
『그러하면 지금 여기 돈만 있으면 일이 펴일 모양이요 구려. 노형이 주인의 돈을 범포하였다 하나 그 돈을 충수하여서 내놓으면 고소당할 이유도 없을 것이요, 저 여자의 몸값은 다른 사람이 내놓느니만큼 노형도 내 놓으면 아무 소리가 없이 되겠구료. 그러나 노형 의 지금 내놓을 돈은 모두 얼마나 되오?』
『삼천 원 가량…….』
『삼천 원이야. 그러고 저러고 저 여자의 몸값은 얼마나 가지면 될 듯하오?』
최원보는 옥향을 돌아다보며 무엇이라 두서너 마디 말을 하더니,
『이것저것 모두 하면 육칠백 원쯤 들겠소이다.』
『넉넉잡아 삼천 칠백 원만 있으면 노형네 두 분은 돌아갈 필요가 없겠구료.』
계산을 하여보건대 진실 그 남녀 두 사람의 목숨은 한 사람에 대하여 일천칠백오십 원에 지나지 못하는도다.
『돈이라야 불과 삼사천 원 내외간을 가지고 죽느니 사느니 하는 것이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요. 그만한 적은 돈은 내 힘으로라도 넉넉히 변통을 하여드릴 터이니 염려 마시고 노형의 자세한 사정을 빼지 말고 말씀하여 주시오.』
이와 같은 때에 이와같은 사람의 말이 얼마나 그 사람의 귀에는 기껍게 들렸으리요.
최원보는 그 말이 거짓인지 진심인지 분간할 여가도 없이 다만 남의 근심을 내 몸과 같이 위로하여 주는 수일의 친절한 말에 깊이 감동되었더라.
『전일에는 한 번 인사도 없던 양반이 우리같이 어리석고 죽어야 할 사람을 이다지 친절하게 마음을 쓰는 것을 뵈오니까 도리어 부끄럽고 면목이 없습니다. 이렇듯 자세히 물으시는 말씀에 어찌 대답을 아니하겠습니까? 그 말씀을 하자면 모든 일이 모두 부끄러워서 남의 앞에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말씀하던 삼천 원 돈으로 말씀하면, 바로 말씀하면 방탕히 노느라고 회삿돈에다가 손을 대어서 처음에는 이리저리 변통을 하여서 상하탱석이 되더니, 나중에는 회삿돈이 자리가 비니까 그때는 억지의 짓도 하여가노라니까 자연히 그 돈이 늘어서 나중에는 짐이 무겁게 되었습니다그려. 그러하니까 자연 거래도 막히고 서울 있던 주인도 기미를 차차 알아놓았으니 도적질을 하더라도 그 돈은 충수하여 놓아야 큰 야단을 면하겠기에 어리석은 생각으로 놀음 뒤를 당하였다가 거기도 마저 실패를 하고 보니 모든 부채가 삼천여 원이 되었어요 삼천 원 중에서 일천오백 원 가량은 놀음판에 내버렸소. 그러나 주인의 돈을 범용한 일 한 가지만 같으면 주인이라도 십여 년 같이 지내는 정분으로 용서할 도리도 있겠지요마는, 그 외에 이 계집으로 하여서 이 일을 주인까지 알고 하루는 주인이 앞으로 불러 앉히더니, 처음 같은 일이니까 이번에는 용서하니 다시는 그런 계집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엄절히 나무랍디다그려.』
수일은 점점 무릎을 앞으로 내밀고 가까이 다가앉으며,
『응, 그래서?』
『주인이 나더러 계집을 가까이하지 말라 하는 것은 또 다른 까닭이 있지. 그것은 주인의 조카딸 되는 계집아이 하나가 장성하였어도 입때까지 시집을 보내지 못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서 그 삼촌의 집에서 데려다 두었는데, 전전부터 나더러 조카사위가 되라고 권하는 것을 나는 암만하여도 마음이 적어서 이 핑계 저 핑계 하고 오늘날까지 내려오다가, 요사이로는 바싹 긴하게시리 말하면서 범용한 돈은 내가 다 탕감하여 줄 터이니 그저 조카딸에게 장가를 들라고 합니다그려. 그리고 내 몸으로 말씀하면 의리로 하든지 정으로 하든지, 또는 주인의 고마운 마음으로 하든지 어찌 그 말을 거역하겠습니까마는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기어히 그 말을 거역하였습니다그려. 제 마음에 싫은 것이야 천자를 주기로 어찌합니까?』
『응, 그래서 어찌하였소?』
『그리고 보니까 그 후에는 주인이 시퍼렇게 분이 나서 만일 네가 내 말을 복종치 아니하면 네가 쓴 돈을 들여 놓든지, 그렇지 못하면 내가 고소하여 너를 징역을 시킬 터이니, 너도 가만히 다시 한 번 생각하여서 주인의 말을 복종하라고 사이에 사람까지 놓아서 몇 번을 말하는 것을 끝끝내 불청하였지요.』
『그것은 노형이 잘못이요구료.』
『그러기에 내가 한 일은 어천만사에 한 가지도 잘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는 아주 하직하는 편지까지 써서 놓고 나왔는데, 그때까지는 걱정되는 일이 그뿐이더니 며칠 아니 되어서 또 옥향이 구실 뗀다는 말이 일어났습니다그려.』
『그래서……?』
『이 옥향의 어미라 하는 사람은 본래 수양어미인데 나도 가끔 소문은 들었지요마는 어떻게 심하게 굴고 욕심 많은지 하루도 야단 아니하는 날이 없는 사람이올시다. 자세히 말씀하자며는 이루 한이 없습니다마는 이 옥향으로 말하면 이름이 딸이라 하였지, 실상인즉 어려서부터 돈을 주고 사다가 기생질을 시키는데, 사람의 마음은 조금도 없고 개돼지같이 부려먹어서 돈 밖에는 알지 못하는 아귀올시다. 나도 자주 저의 집에 다닐 때는 돈도 잘 쓰고 하니까 그리 말이 없더니, 요사이 와서 내가 돈을 잘 쓰지 못하는 양을 보고서는 날마다 옥향이를 때려가면서, 그 사람 왜 오지 못하게 굴지 않느냐고 바가지를 긁는 차에 마침 옥향의 몸을 속량하여 가겠다는 사람이 생기었는데, 그 사람은 삼사 년 전부터 옥향에게 다니던 사람으로 지금 김산은행(金山銀行) 평양 지점장으로 있는 사람이올시다.』
수일은 깜짝 놀라는 듯이 고개를 들며,
『응…… 무…… 무엇이야?』
『당신께서도 그 사람을 아십니까? 김…… 김중배라 하는…….』
『김중배! 응, 그러면 나도 알지요. 그래, 김중배라 하는 사람이 옥향이 구실을 떼려고 하던 사람이라 하는 말이…….』
하며 수일은 눈에는 살기가 돌고 얼굴에는 분기가 가득하여지는데, 최원보와 옥향은 은근히 놀랐다.
수일은 옥향을 돌아보며,
『김중배라 하는 놈이 그래서 옥향의 몸을 사가려고 하였단 말인가?』
옥향은 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부끄러움을 머금고,
『네, 그랬습니다.』
『그런데 옥향이가 그 사람에게는 아니 가려고 반대하였단 말이지.』
『삼사 년 전부터 김중배가 옥향에게를 다녔다 하니, 그간에 아마 그 사람의 신세는 많이 졌겠지?』
『신세는 하나도 진 일이 없습니다. 본래 그 사람은 마음에 맞지 아니하니까, 신세를 지어주려고 하여도 제가 받지 아니하였지요. 단지 그 집에서 부르러 보내면 기생의 직책으로 가서 놀기만 하였지요.』
『그러면 그 사람을 영감으로 섬긴 일은 없었구요?』
옥향은 그러한 말을 귀로 듣기까지라도 더러이 여기는 모양이라
『아이고, 천만에…… 흉한 말씀도 하시네. 그런 일을 하였을 리가 있습니까?』
『허허, 그러면 옥향씨는 이른바 매창 불매음으로 재주와 소리는 팔았을지언정 이곳저곳에 몸은 허락한 일이 없고, 다만 장래에 백년을 의탁할 최원보씨에게만 정을 두었다 하는 말이요구료.』
『녜, 그 말씀이올시다.』
수일은 이윽히 옥향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를 마지 아니 하더니 문득 눈 속으로 구슬 같은 물방울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아, 참 옥향씨는 가위 사람이요……. 내가 비록 목숨은 내버릴지라도 처음에 한 번 뜻하였던 사람과 동기 평생하리라 하는 그 마음이 실로 가상이요.』
무슨 연고인지 분간치 못하겠으니 수일의 우는 모양을 보고 두 사람은 망연히 앉아 있다.
수일의 눈물 흘리는 것은 무엇을 위하여 감동됨이뇨?
그 여자는 매창 매음하는 일개 천기로도 능히 죽기로써 결심하고 의리와 정절을 온전히 지킴을 얻고 이욕에 그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함을 탄복하여 울고 있음이다.
『옳소, 옳아!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래야 하는 법이지. 그것이 가위 여자의 지킬 만한 도리외다. 오늘날 이와 같은 경박한 세상에서 이렇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주 없는 줄로 알았더니, 오늘밤에 옥향씨의 다음과 같이 좋은 말을 들으니 내 마음도 어찌 좋은지 감동이 되어서 이렇게 나는 눈물이 흐르는구료. 나는 노형네의 사정을 남의 일로 알지 않고 내 일이나 다름없이 깊이 감동이 되오.』
하며 수일은 급히 눈물을 씻는다.
『그래서 김중배는 어찌하였소?』
『그 사람은 내가 그렇게 내대건마는 그것도 모르고 칩칩스러이 굴지요. 그리고 세상에 사나이로도 제가 제일인 체, 영리하기도 제가 제일, 점잖기도 제가 제일인 체하면서 말을 두 마디만 하면 벌써 돈이지요. 돈이라면 사람들이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죽는 줄만 알고 천 원이나 만 원을 여기서 내놓으면 너희가 어찌할 터이냐고 일상 그렇게 어리석고 못생긴 소리만 하지요. 그러기에 기생들에게도 조롱을 받고 놀려주지, 한 사람도 그 사람 반거워하는 것은 없어요. 모두 싫어하지.』
『그러할 것이지.』
『그러한 사람이니까 여간 정당한 말로 거절하는 것은 조금도 어찌 알지 아니하지요.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되지도 못할 말을 가지고 꾀이듯이 하여도 저는 일향 말을 듣지 아니하니까 나중에는 할 수 없어서 저의 어머니하고 은근히 무슨 언론이 되었든지 내용으로는 아 마 결정이 다 되었든가 보아요. 그러기에 어머니라 하는 이는 날마다 최원보는 상관을 말고 아주 김중배의 첩으로 가라고 야단이올시다그려. 말을 듣지 아니하면 두드려는 주고, 말을 듣자니 마음이 향하지 아니하고 단지 나오는 것은 신세 한탄이요, 눈물 밖에 없습니다.』
팔자가 사나와서 어려서부터 기생질을 하였어도 나중에는 마음에 있는 남편이나 얻어서 늙게나 재미를 볼까 하였더니 그도 되지 않는 팔자를 어찌합니까?』
『그래서, 나중이 어찌 되었소?』
『그러기로 제가 들을 리가 있겠습니까? 내게로 오면 평생을 금의옥식에 싸여서 팔자 좋게 지낼 터이니 무엇이 걱정이 되어서 싫다고 하느냐고, 집이라야 마누라가 있는가 시부모가 있는가 무슨 염려가 있어서 그리 하느냐고 어린아이 달래듯 하옵디다. 그렇지만 제가 거기 속아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듣는 수일은 은근히 속으로는 가슴이 떨리어 아은아온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찌하여서 마누라가 없다고 하는 말이요?』
『어찌한 일인지 알지 못하여도 그 사람의 말은, 자기의 부인은 일상 누워서만 지내고 병인이나 조금도 다른 것이 없으며, 아이도 없고 일은 하지 못하니까 쓸데가 없어서 저의 친정으로 쫓아 보냈으니까, 집에 가서 있더래도 시앗에 눈치 보일 것도 없고 아무 걱정 없다고 하는 말눈치입디다.』
『그러면 그것이 정말인지 알 수 있소? 아내를 어찌 함부로 쫓아버린단 말이요.』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어찌 믿기야 할 수가 있습니까마는 가만히 시골서 소문을 듣는지 모양을 보든지 어찌하든지 간에 그 부인이라 하는 사람과는 사이가 좋지 못한가 보옵디다.』
하며 수일은 홀연 고개를 드리우고 꿈을 꾸듯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더니 문득 눈을 뜨며,
『그러면 그 아내하고는 서로 뜻이 맞지 아니하는 게구료. 그래서 심지어 친정에까지 쫓아보낸 게지. 세상 일이 모두 그러하여.』
(슬프다, 순애의 뉘우침이여! 순애의 한이며, 순애의 슬픔이며, 순애의 고생이며, 순애의 근심이며, 순애의 팔자여!)
수일은 이같은 생각을 하매 다시 순애의 박명함을 생각하며 또는 눈앞에 천연히 나타난다.
수일은 지금 살아 있는 순애보다도 이제 죽고자 하는 옥향의 어리석지 아니함을 반가와하며, 전일에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은 능히 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연히 만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스스로 탄식하며 자기의 몸의 불행을 설워한다.
이때에 옥향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고 수일은 귀를 기울인다.
『한참 이렇게 야단으로 지낼 때에 최원보씨의 사정이 급하게 되어서 만일 돈 삼천 원이 당장에 없을 것 같으면 징역을 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저는 어떻게 놀랐는지 정신이 아득하여서 두 사람의 사정이 모두 이 지경이 된 바에야 죽을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을 줄로 그때부터 생각하였던 일이올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여 본즉 죽는 것은 마지막으로 가는 일이니, 차라리 김중배에게라도 돈 삼천 원만 꾸어다가 일을 펴볼까 하고 최원보씨에게 의논한즉, 「내 몸이 아무렇게 되든지 네 생각대로 하여라. 돈 삼천 원에 끌리어서 네가 김중배에게로 가는 것이 좋겠느냐? 혹은 나하고 함께 죽는 것이 낫겠느냐?」 이렇게 말을 합니다그려.』
『옳지, 그러할 것이지.』
『저는 돈 몇 천원으로 하여서 김중배 같은 사람에게 전당물이 되고 싶지 아니한 마음은 고사하고 지금까지 물을 부어도 새어나갈 틈이 없게 지내어오던 정리로 그 인연을 끊고 다른 데로 가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엇하러 그까짓 못난 사나이를 바라고 가겠습니까마는, 돈으로 하여서 두 사람이 목숨을 끊는 것은 너무도 원통하기에 삼천 원을 낼는지 아니 낼는지 그것은 알 수 없어도 만일 내놓거든 나는 그리로 잠깐만 가서 있다가 다시 곧 도망하여 오지요, 그러면 그만 아니오니잇가? 잠시 동안 피차에 마음만 좋지 못할 뿐이지요, 그래도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아니하겠습니까? 그 말을 하였더니 최원보씨의 말씀은 그런 짓을 하면 사기취재(詐欺收財)라고 합니다그려.』
『옳은 말이요. 사기 취재가 즉 그러한 것이외다.』
고개를 드리우고 묵묵히 앉아 있던 최원보는 옥향의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대답한다.
『그것은 진정한 사기취재올시다. 계집을 사이에 놓아서 남의 돈을 속여 먹으려 하느니보다, 남의 돈을 사나이답게 그대로 범용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경할 듯하외다. 그런 악한 일을 행하여 가면서라도 구차히 목숨을 보존하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이 옥향이로 말씀을 하더라도 오늘날까지 김중배를 그렇게 박대를 하고 본 체도 아니하다가 지금 와서는 돈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몸을 허락한다 하여서야 사람의 가치가 너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야 사람의 허물을 쓰고 나온 본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돈이 없어서 계집하고 한가지로 정사(情死)하였다는 사람의 조소는 들을지언정, 계집을 팔아가지고 저 사람은 간신히 군색을 면하였다는 조조는 듣기 싫어요. 그러한 마음을 먹으려면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할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지마는 목숨을 살려 하면 이 위에 더욱 좋지 못한 일을 행해야 할 터이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죽어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죽기로 작정을 하였으니 네 마음은 어떠하냐고 물었지요.』
『옳지, 그런데 옥향씨는?』
하며 수일은 옥향을 돌아본다.
『저는 지금 다시 김중배니 무엇이니 말씀한 것은, 모두가 제 한 몸으로 인연하여서 최원보씨가 이 모양이 되었으니까 아무쪼록 어떻게든지 하여서 그 사람을 구하여낼 생각으로 한 말씀인데, 만일 그 사람이 죽을 것 같으면 나 혼자 살아 있으면 무엇을 합니까? 당신이 돌아가시면 나도 함께 죽겠노라고 약속이 되어서 죽을 곳을 찾느라고 멀리 여기까지 왔습니다.』
『두 분의 말씀은 다 자세히 알아들었소.』
하며 수일은 홀로 흉중이 상연(爽然)하고 통쾌하여 감동되는 마음으로 다시 전일 순애의 무정하던 바를 생각한다.
『옥향씨로 말을 하면 기생의 몸으로 능히 한 사나이를 지키고 있다가 그 사나이가 몸이 타락하여 할 수 없는 경우에 있는 그 사람을 박대하지 않고 꽃으로 이르면 봉오리로 있는 몸을 가지고 조금도 원통한 마음이 없이 사나이를 위하여 죽고자 하니 그 아름다운 마음은 어따 비하여 말할는지. 옥향씨의 그 감사한 마음에 내 역시 어떻게 감동이 되었는지 눈물이…… 이렇게 흐르는군요. 옥향씨는 아무쪼록 일평생을 두고서 지금 마음을 버리지 마오. 그 마음 하나가 그대의 보배요, 또는 최원보씨에게도 큰 보배가 될 것이요. 통칭하면 그대 부부간에 무한한 보배가 될 것이외다. 이후라도 옥향씨는 남편되는 최원보씨를 위하여 죽을 일이 있거든 아무때라도 죽으시오. 아무때라도 남편을 위하여서 죽으리라 하는 마음은 잊지 말고 가지고 계시오. 억천만인 중으로서 다만 한 사람을 바라고 있는 이상에는 물론 그 사람을 위하여서는 목숨이라도 아끼지 아니할 마음이 있어야지. 만일 처음부터 그 마음이 없을 것 같으면 차라리 그 사나이를 단념하는 편이 좋을 것이요. 한 번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뼈가 부서지고 목숨이 없어지더라도 결단코 마음을 변개하지 말아야 하지, 공연히 외양으로만 정이 들었느니, 너 아니면 내가 살 수 없겠느니 하는 것은 대개 속마음은 따로 있고 하는 것인데, 그러한 줄은 알지 못하고 진심으로 정을 두고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가 홀연 일조일석에 내박차고 돌아보지 아니하면 그 소박맞은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생각하여 보오.』
하며 수일의 목소리는 더욱더욱 떨린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는 그러한 일이 많다 하오. 그와 같이 잠시간으로 사랑이니 정이니 하는 것은 도리어 없는 것이 낫소. 소박을 하는 사람이든지 소박을 맞는 사람이든지 다 같이 나중은 좋지 못하외다. 나는 그런 일을 당장에 지금 당하고 있소. 당하고 있는 사람으로 지금 그대네가 이와 같이 서로 일시에 죽을지언정 헤어지지는 아니하겠다 하는 것을 보니까 내 마음까지라도 얼마나 기껍고 반가우며 또 그대네의 장래의 행복이 어떠하겠소. 그대네 두 분은 그 마음을 영원토록 내버리지 말고 또는 잊지 말고 오늘밤의 그 마음으로 일평생을 화목하게 지내시오. 나는 그 모양을 보고 싶소. 그대네가 오늘날 죽는다 하는 것은 망령된 마음이니, 삼천 원이나 사천 원은 내가 어떻게든지 변통하여 드리오리다.』
수일의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남녀 두 사람의 마음은 지옥에서 활불(活佛)을 만남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 마시려 하던 독약(毒藥)은 변하여 양약(良藥)이 되었도다.
두 사람은 기꺼운 듯 놀라운 듯, 귀신인가 사람인가 다시 수일의 얼굴을 꿈속같이 바라보고 있다.
방안의 등불은 점점 빛이 쇠잔하여 가고 영창의 종이는 점점 희어가는데 그 밤은 벌써 다 가고 새벽달이 밝아질 때이라.
남녀 두 사람의 운성(運星)에 가리웠던 구름은 벗어지고 새벽에 돋아 오르는 날빛과 한가지로 다시 이 세상의 광명을 얻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