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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몽/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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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부호(富豪)의 난행(亂行)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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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하다, 순애의 수심이여! 슬픈 소회를 지필로 대신하여 애원하기를 십오차에 이르렀더라.

그러나 수일은 처음에는 그릇하여 한 장을 뜯어보았으나 그 후로는 편지가 이를 때마다 손에 접하기도 불결히 여기며 더욱 그 여자의 행실이 단정치 못함을 더러이 여기었더라. 그러나 이날 아침에 체전부가 전하고 가는 순애의 편지는 우연히 향하는 마음으로 피봉을 뜯고 한 발이 넘는 편지를 반이나 지나 보다가 홀연 견디기 어렵도록 마음이 요동하므로 스스로 수일은 자기의 심약함을 부끄리고 또는 자책한다.

마음에 있는 회포는 한 가지도 누락지 아니하고 모두 그리어 있는 순애의 편지라. 처음에 십여 줄은 글자도 분명하고 문투도 알기 용이하더니 십여 줄을 지난 후부터는 점점 글씨가 어지러워지고 글도 계속하여 의미를 해석하기 어려우니, 그 글자와 귀절에도 가히 그 마음의 어지러움을 분명히 나타냈으며, 만일 이 문사와 같을진대 순애는 드디어 죽음에 이르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성광(成狂)에 이르리로다.

수일은 보기를 다하고 다시 고개를 드리워 침음하다가 게을리 손을 놀리어 무릎 위에 쌓인 편지 한 반을 찢어 들고 우연히 어느 곳을 바라본다. 홀연 몸을 일어 뜰로 내려서려 하다가 다시 몸을 굽히어 방 위에 있는 편지를 집어 손에 들고 정전의 수음 사이로 서서히 왕래하여 한 걸음에 한 번 찢고 두 걸음에 두 번 찢으며, 나무 그늘에 들어서서도 찢고, 먼 산을 바라보고도 찢는다. 걸음을 멈추고 찢고, 걸어가며도 찢으며, 찢고 찢어 다시 두 손으로 부비며, 가다가는 다시 돌아오고 섰다가는 다시 걸음하여 부스러기 종이는 손 사이로 떨어지고 굵은 종이조각은 손바닥 안에서 환약같이 된다.

이렇듯 하다가 수일은 걸음하기도 괴로운 듯이 그늘 아래에 나무를 의지하여 먼 산만 정신없이 바라보고 서서 있다.

홀연 방문 열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며 신발을 끌고 수일의 앞으로 향하여 한 손에는 신문지를 들고 웃는 얼굴로 오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전일에 동문 밖 청량암에서 옥향과 한가지로 위태한 목숨을 구하여 그 후로는 부부가 한가지로 수일의 집에 의탁하여 있는 최원보라. 수일은 비로소 내 정신을 차리어 급히 손에 남아 있는 편지를 한구석으로 멀리 던지고 그늘로 좇아 나오며,

『나는 벌써 가게로 나간 줄 알았더니…… 그러면 내 방으로 들어가서 심심한데 이야기나 합시다.』

하며 수일은 앞을 서서 방으로 향하고 들어간다.

『녜, 가게 역사도 거운 거운 낙성이 되어가고 마침 공일이 되었기에 일군들더러 오늘 하루는 편히 쉬라고 하였습니다. 회사의 일은 당신 덕택으로 아주 어저께야 무사 타첨이 되구요.』

회사라 함은 전일에 최원보가 지배인으로 있던 무역회사를 말함이요, 가게 역사라 하는 것은 금번에 수일이가 자본을 내어 최원보를 시키어 새로이 지전을 실시하는데 점포를 수축함을 가리킴이라.

『아무렴, 그래야지 간혹 휴가하는 때도 있어야지. 사람의 몸으로 잠시도 쉴 때가 없이 노력만 해서야 어찌 견디겠소? 그러기에 나도 항상 옥향씨더러 하는 말이 있지요. 최원보씨는 너무 사무에 열심하여서 몸이 패하기 쉽겠다고…….』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당신의 그와 같이 친절하신 마음을 생각하기로 어찌 잠시인들 편히 놀고 있겠습니까? 역사가 수일 내로 끝이 나거든 전부터 부탁하시던 유필균(柳弼均)의 일도 속히 찾아서 되도록 운동하여 보겠습니다.』

최원보가 무역회사의 지배인으로 있을 때에 그 회사 서기로 있던 유필균은 여러 사원 중에서도 그중 재주가 뛰어나고 사무에 근간하므로 최원보의 눈에 들어 연구한 다른 사원보다도 유필균을 더욱 사랑하던 터이라.

그러므로 유필균은 최원보를 공경하기를 스승같이 하고, 바라기를 부형같이 하며, 또는 유필균의 부모도 최원보에게 그 아들을 성인케 하여달라고 때때로 부탁하므로 서로 자주 왕래가 있어 정의가 친척이나 다름이 없었더라. 그 외에 유필균은 정옥(貞玉)이라 하는 아름다운 매제가 한 사람 있으니 혼약을 맺었던 신랑 서아남(徐雅男)이가 불행히 김정연의 독수에 걸리어 사서위조죄(私書僞造罪)로 일 년 육 개월의 징역에 처한 후로 그 부모는 정옥을 위하여서 아남에게 혼약을 파의하였으나 신부되는 정옥은 이미 사주까지 받은 남편을 죄인으로 가서 있다고 어찌 박절히 언약을 어기느냐 하고 죽기로 처하고 다른 곳으로 출가 아니하려 하고 절개를 지킨다 하며, 서아남의 모친은 아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미친 병이 들었다가 인하여 김정연의 집에 불을 놓아 김정연의 부부를 태워 죽이고 자기도 스스로 죽은 일을 수일도 자세히 아는 바인 고로, 수일은 최원보로 하여금 사이에 들어 서아남의 인연을 원만히 맺어주고자 주소로 근심하던 바이라.

생각컨대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던 최원보의 부부간 신성한 사랑을 진심으로 감동하던 청량암 하루 저녁에 수일은 암흑한 칠야에 일도광명(一道光明)을 얻음 같아여 수일의 가슴 속에 얼음같이 차고 굳게 맺히었던 물건이 점점 따뜻하여가고 맺힌 덩어리는 풀리어, 이제 다시 서아남의 긍측한 정상을 구원하려 함이라. 그러나 슬프다, 순애에게 향한 원한은 어느때든지 풀릴 기한이 없고, 이제 다시 순애의 뉘우침이 늦었음을 한하여 처음부터 옥향과 정옥의 두 여자는 한 조각 지키던 마음을 변치 아니함을 경모(敬慕)한다.

수일의 침음하는 모양을 보고 이윽토록 말이 없던 최원보는 수일의 고개 들기를 기다려 비로소 말을 한다.

『오늘은 아무 보실 일이 없습니까?』

수일은 묻는 말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여,

『일이 있다 하면 있고 없다 하면 없겠지마는, 요사이는 공연히 심사가 산란하여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아니하는구료.』

『만일 여가가 계시면 잠깐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봅시다그려.』

『불가불 보셔야 할 것은 아니요, 심심한데 소일로나 보실 것이올시다.』

최원보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손에 들고 있는 신문이라.

최원보가 손으로 가리키는 제목을 수일은 들여다보더니 홀연 눈살을 찌푸린다.

그 신문을 자세히 보건대 제삼면 비두에 부호의 난행(富豪의 亂行)이라 제목하고, 백여 줄에 이르는 기사는 그 내용을 대략 말할진대, 김산은행 평양지점장 김중배는 연천한 위인으로 은행의 중임을 맡았으나 품행을 단정히 가지지 못하고 화류계에 출몰하여 향자부터 그곳 기생의 옥향을 첩으로 삼고자 하다가 여일치 못하고, 다시 다른 곳으로 방연을 고치어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모란이라 하는 기생을 일만 원의 돈을 허비하여 간신히 구실을 떼었다가 중간에 이론이 생기어 다시 오천 원을 더 쓰고 비로소 작첩하였는데, 김중배는 본성이 부랑하여 은행을 빙자하고 여러 사람의 금전을 소융하였으므로 채권자 등이 김중배의 사실을 탐문한즉 은행은 이미 파산할 지경에 이르고 부채는 기생을 작한 이후로도 십만 원에 달하였는 고로 여러 채권자 등은 김중배의 행위를 미웁게 여겨 사기취재범으로 당지 지방 법원에 기소하였는데, 목하에 엄중히 취조중이라 하였는데, 수일은 이와같이 기사를 보기를 다한 후 비로소 얼굴에는 비웃는 웃음을 띄우며 말이 없다.

『세상에는 별 미친 놈도 다 있지요?』

하며 최원보는 고개를 들고 웃기를 마지 아니한다.

『미친놈인 줄이야 이제야 안 것이 아니지마는, 그놈이 본래에 심지도 곱지 못하던게요그려. 이 신문을 옥향씨도 보았소?』

『아직 못 보았습니다. 인제 불러서 보이겠습니다.』

하고 최원보의 부르는 소리에 옥향은 급히 대답하며 수일의 방을 향하여 오는데, 아침에 늦게 단장한 얼굴은 조반 후에 더욱 화기를 띄워 웃는 얼굴로 두 팔을 문지방에 짚고 방 안으로 들여다보며,

『어찌 부르셨어요?』

최원보는 대치 아니하고 한편으로 앉을 자리를 내놓고 옮겨 앉는다.

수일은 앞에 있던 신문을 옥향의 앞으로 내어밀고 빙긋이 웃으며,

『다른 말이 아니라 하도 재미있는 일이 신문에 났기에 그것을 좀 보라고 불렀소.』

『무엇이 그렇게 재미 있어요?』

『어떻든지 한 번 내려보게나 그려. 김중배가 인제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하며 최원보는 손가락으로 그 제목을 가리킨다.

옥향은 신문을 들고 십여 줄쯤이나 내려보더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꾸짖는 소리로,

『아따, 시원도 하지. 제가 어디를 가면 기생들에게라도 환영받을 줄로 알았던가? 돈은 쓰면서도 설움은 혼자 받고 다니지요. 못도 났지…….』

『아따, 남의 욕은 그만하고 그 아래를 마저 보아요.』

『여보, 나는 언문이 서툴러서 얼른 볼 수가 없으니 보아서 들려주구료.』

최원보는 신문을 받아들고 크게 소리하여 읽는데, 옥향은 그 옆에 앉아 귀를 기울이고 듣더니 옥향의 얼굴은 희던 빛이 변하여 붉어지며 분기가 새로이 일어가는 듯하다.

『여보 옥향씨, 그래도 돈이라 하는 것이 좋은 것이로구. 김중배에게로 첩이 되어가는 기생이 있으니.』

『그러기에 저는 일상 미운 것이 김중배의 돈 자랑이야요. 걸핏하면 돈부터 앞을 내세우니까요. 세상 사람 치고서야 누가 돈 싫다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우리 평양 기생들은 돈보다 사람을 더 본답니다. 이번에 김중배에게로 첩되어간 기생의 모란이로 말씀하면 필경 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저의 부모나 그렇지 아니하면 식주인과 무슨 의논이 되어서 노욕 많은 늙은이들이 돈에 눈이 어두워서 그리한 것이지요.』

『하필 늙은 사람의 흉만 볼 것이 아니라 기생들이기로 전혀 중배에게 마음이 없으면 갔을 리가 있나? 돈에라도 홀리었기에 그러한 것이지.』

『그 말씀은 옳은 말씀이올시다. 무엇에든지 홀린 데가 있기에 간 것이지요마는 마음에 홀려서 간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올시다. 단지 돈에 눈이 어두워서 솔깃한 마음으로 갔다가 나중에 그 정신이 깨어나고 보면 후회막급이지요. 제가 전에 기생 노릇할 때에 이 신문에 난 일과 같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어린 계집의 마음으로 돈 많은 사나이의 날마다 호강으로 지내는 것이 부러워서 실정으로 말을 하면 그 사람에게 정이라 하는 것은 꿈에도 없건마는 단지 돈 욕심에 한 번만 그 사람하고 살아보았으면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막이 그 사람하고 같이 살게 된 후에는 며칠이 가지 못하여서 헤어집디다. 몇 십만 원 가진 부자의 아내가 된들 그 돈이 다 제것이겠습니까? 가령 된다 하더라도 그 돈을 무엇합니까? 하루 밥 두 그릇이면 그만이요, 아무리 팔진육미라도 세 번만 연하여 먹으면 코에서 누린 냄새가 나는 법이올시다. 그렇게 해보지 못할 때는 부럽기도 하고 욕심도 나다가, 제가 이제 그 지위를 당하여 보면 그때는 사나이의 경중을 달아보기 시작합니다그려. 본래 정이라는 것은 조금도 없는 내외간에 점점 보이는 것은 사나이의 흠절뿐이올시다. 인제 그리고 보면 그 사나이가 점점 마음에 맞지 않고 싫어가는 것은 사람마다 인정은 일반이지요. 그때는 돈도 싫고 호사도 싫고, 마차가 무엇이냐 인력거도 그만 두어라 하고, 양금이나 거문고 하나로 제 마음대로 기생 노릇이 다시 하고 싶어지지요. 그 지경 되면 나중에는 도로 제 본색을 버리지 못하고 도로 기생으로 나오는 법이올시다.』

『아무렴, 그러하지. 옥향씨의 말이 꼭 옳은 말이요. 여편네라 하는 것은 공연히 허욕이 많아서 남의 부귀하는 것을 부럽게도 여기고 시기도 하는 물건이라. 여펀네의 허영심은 어찌할 수가 없어, 그런 마음이 한 번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 여편네는 벌써 볼일 다 본 사람이외다. 그러기에 자기의 마음을 흡족히 하려고 무슨 짓이든지 조금도 부끄리지 않고 하는구료. 그런 고로 여자로 죄를 짓는 사람은 열 사람 중에 팔구 명은 으례 허영심에서 시초가 난 일이니, 그것을 두고 보면 실로 계집이라 하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야. 옥향씨가 지금 앞에 앉아 있지마는 기생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한 영업이라 하여도 가한 터이니까, 몸을 사가는 사람이 있으면 팔려갔다가 서로 뜻이 맞지 아니하면 다시 기생으로 나오기도 하고 다른 사나이를 얻어 살기도 해서, 들어가든지 나오든지 용이하지마는 만일 여염집 여자 같으면 어떠하겠소? 가령 여기 어떠한 처녀 하나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처녀가 깊이 정든 사나이와 부부가 되어서 화목하게 지내려 하다가 돈에 눈이 어두워서 그 사나이를 버리고 다른 남편을 얻어가면 며칠이든지 몇 해든지는 영화롭게 지내겠지마는 처음부터 부부간의 깊은 정이라 하는 것은 없었으니까, 옥향씨의 말과 같이 점점 그 사나이의 단점만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은 기생이나 여염가 여자나 그 마음은 한가지겠구료. 자, 그리고 본즉 여 염가 여자라 하는 것은 한 번 남편을 얻으면 좋든지 언짢든지 일평생을 그 사람만 지키고 있는 법이요, 기생과 같이 그 사나이하고는 살기가 싫으니 돌아가겠다 할 수도 없는 일이지…….』

『옳은 말씀이올시다. 부끄러운 말씀이지요마는 저의 네 기생이라 하는 것은 말하자면 천한 영업이지요 이 위 천한 장사를 하는 바에야 이것저것 돌아볼 것이 무엇이오니잇가? 재산 많은 사나이를 얻어가서 저 하고 싶은 노릇은 마음대로 다 하다가 비위에 틀리면 헤어지기는 으레 하는 법이올시다 그려. 이 신문에 난 모란이도 김중배 같은 사나이에게로 가서 평생을 누리려고 마음을 먹었겠습니까. 기생이라 하는 것은 물건과 같아서 팔고 사고 하는 것이지요마는, 여염가 여편네야 한 번 시집가면 좋든지 흉하든지 그대로 지내는 것이지, 돈 있을 때는 같이 살다가 돈이 없어지면 배반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처음부터 정든 님을 버리고 재물을 쫓아간 것은 본래의 제 잘못이니까 나중에 그 사나이가 싫더라도 소용없는 일이지요. 정세는 불쌍하지마는 어찌할 수 있습니까?』

『옳지, 옳은 말이요. 자작지얼이니까 정말 어찌할 수 없지.』

진실로 이른바 자작지얼이로다.

수일은 최후에 이와 같이 마음을 결단하매 아침에 순애의 편지를 본 후부터 마음을 수고로이 하여 이리 생각 저리 생각 하며 유예 미결하던 가슴을 한 마디의 말로 해결하여 버리는 한숨을 짓는다.

수일의 묻는 말과 탄식하는 모양이 남의 일 같이 심상히 묻는 말이 아님을 최원보는 한편에 가만히 앉아 처음부터 수일의 기색을 살피다가 무슨 생각하는 일이 있는 듯이 무릎을 내밀고 앞으로 나앉으며,

『옳지 않은 말씀을 묻는 것 같습니다마는 당신이 아신 양반 중에라도 그런 부인이 있습니까?』

『왜 그리하시오?』

하며 수일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최원보의 얼굴을 바라본다.

『무슨 깊은 이유가 있어서 묻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말씀하시는 모양을 가만히 뵈오니까 전수히 남의 일을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외다그려. 요전에 청량감에서도 저의 신세 이야기를 들으시고 말씀이, 나는 남의 일로 생각지 않노라 하신 말씀도 있었거니와, 간간이 옥향에게도 그러한 눈치로 말씀하시더란 말도 들었는 고로, 저의 내외는 모여 앉으면 쓸데없이 무익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몸들도 주체하지 못하는 위인이 주제넘게 남의 걱정을 다 한다고 생각하실는지는 모르와도 저의 몸이 되어서 말씀하고 보면 당신은 큰 은인이올시다그려. 그러한 은인이 무슨 사정이 있는지 항상 쾌락치 못하게 날을 보내시는 것을 보고 저희들은 어찌 마음이 좋겠습니까? 저의 힘으로 될 일 같으면 견마의 수고라도 사양치 아니하고 은혜의 만분지 일이라도 갚을까 하오니 말씀하시더라도 크게 상치되는 일만 없거든 말씀하여 주시면 근심이라도 함께 노나 하면 좋을 듯하오이다. 저희는 대강 생각하기를, 당신께서도 김중배에게 무슨 불쾌한 감정이 계신 것 같습니다.』

수일은 항상 홀로 번뇌하고 입밖에 내지 않는 병근(病根)을 최원보의 부부는 이미 칠팔 분이나 짐작한 바 되었더라.

정이 두터운 최원보의 부부는 진실한 마음으로 은인을 생각하여 수일의 일언일동에 주의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므로 깊이 마음속에 감추어 있는 비밀한 사정을 은연히 추측하였더라.

수일은 얼굴에 수심이 가리며 다시 고개를 드리운다.

『지금 저의 남편도 말씀합니다마는 저희에게 말씀하시기로 밖에 소문낼 염려는 없구요. 듣기로 저희가 무슨 힘으로 근심을 덜어드릴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혼자 가슴만 태우시느니보다 저희 같은 사람에게라도 말씀하여 주시면 잠시라도 가슴이 시원하시지요.』

두 사람을 좌우로 건너다보는 수일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괴어 있다.

『그대들은 항상 말할 때는 은인 은인하나 나는 그대네를 내 은인으로 알고 있소. 내가 그대네를 구하여 준 것은 돈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일이요. 그대네는 돈보다 더 귀중한 사람의 성심이라 하는 것으로 이미 죽었던 내 마음을 소생케 하여 주어서 아무것도 돌아보지 아니하던 고리대금자가 비로소 보통사람과 같이 인정도 솟아나고 눈물도 흐르오. 요전에도 옥향씨더러 말한 일이 있소. 사람의 곤란한 일 보기를 제가 잘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고리대금자 이수일의 마음으로 무슨 일로 그대의 목숨을 구하였는지 이후에 자세히 알 날이 있을 것이요, 내가 본래 어떠한 사람인지 차차 말할 날이 있겠다고 하였더니, 마침 오늘 이 기회가 좋으니 내 사정도 은휘치 않고 자세히 하리다.』

수일은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지내온 이력을 이슥토록 순서를 따라 이야기하는데, 최원보의 부부는 정신을 잃고 듣고 있는데 남녀 두 사람은 때때로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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