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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몽/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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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병상(病床)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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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에 놓여 있는 연산홍 두어 분은 넘어가는 햇빛을 받아 반사(反射)하는 붉은 기운이 뜰 아랫방 영창에 선연히 비추이는데, 그 안에는 머리를 흐트리고 파리한 얼굴로 몸에는 이불을 둘렀으니, 그 모양은 이울어가는 꽃송이가 다시 바람에 쓸리어 고개를 들지 못함과 방불하다.

그 여자는 연애에 병들어 있는 심순애요. 그 방은 학창시대에 거처하던 이수일의 방이라. 전일에 수일이는 장래의 희망을 가지고 학문에 열심하던 곳이 지금에는 보기 어려운 정랑(情郞)을 생각하는 순애 병실이 되었도다.

중한 병이 들어 목숨이 조석에 있는 것은 아니로되, 몸을 일어 자리에 떠날 힘이 없고 날로 파리하여 가는 얼굴은 남의 눈으로 보기에는 크게 병든 사람과 다름없다.

그 부모는 날로 근심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약을 지성으로 권하매 순애는 마음으로는 효험이 없을 줄 아나 부모의 마음을 거역하기 어려워 날로 의약을 게을리 아니 한다.

그러나 병증은 어떠한 명의국수(名醫國手)가 올지라도 대증 투제하는 약용이 과녁을 등지고 활을 쏘는 일보다도 무효할지로다

주야를 물론하고 홀로 방안에 누워 사람을 대하기 싫어하며 잠든 것도 아니언마는 눈을 뜨지 아니하고 다만 마음으로 번뇌할 뿐이라.

낮이 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홀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때때로 한숨을 지으며 연고 없는 눈물 흔적이 보이매, 모르는 사람들은 병으로 하여 그러하다고 할지라.

그러나 밤이 깊고 인적이 고요할 때는 없던 정신이 새로 온 듯이 몸을 일어 책상을 향하고 무엇을 길고 길게 쓰다가 간간이 그 앞에 누가 있는 듯이 이야기도 하여 보며 또는 눈물을 흘리며 종이를 적실 때도 있다.

이렇듯 하다가 밤이 새어갈 때에 이르면 몸이 솜과 같이 피곤하여 자리 위에 쓰러지면 흔흔침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이와같이 잠을 이루지 못하여 쇠약한 몸이 신경과민(神經過敏)이 되어 정신병(精神病)이 되었다 하여도 가할지라.

순애도 자기의 병증세가 그러함을 스스로 짐작하고, 혹시 이 몸이 미치지나 아니할까 의심하여 홀로 겁낸다.

원래부터 효험이 없으리라 짐작은 하였으나, 그래도 마음에는 기다리는 것이 있는 연고로 아깝지 아니한 목숨을 지금까지 보존하였으니 아모쪼록 그 기다리는 것이 돌아오기까지는 이 몸과 이 마음이 있기를 심축한다. 그러나 그 바라고 기다리는 물건은 무엇이뇨?

한 번은 죽기로 마음을 결단하고 그 사람의 눈앞에서 회개하고 용서하기를 바랐으며, 정성을 다하여 천만 가지로 원정한 편지도 이미 십여 차에 이르렀건마는, 무정한 수일의 마음은 천만근 되는 바위와 같아여 움직이기 어려우며, 이 몸의 기다리는 바는 돌이 말을 하며 얼음이 덥기를 기다림과 같다 생각할 때에는, 순애는 차라리 일찌 기 죽고자 하는 일도 있었더라.

다시 또 한 가지 생각하는 일이 있으니, 수일의 무정함은 다만 이 몸의 지은 죄를 미웁게 여기어 그러할 뿐 아니라, 전일에 괴상한 여자 한 사람이 나의 집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것을 수일의 집에서 보았는 고로, 혹은 그 여자로 인하여 이 몸에 향하는 정은 사라지고 다만 미워하는 마음만 남아 있음이 아닌가? 이 몸이 아는 바와 같이 수일의 마음은 온후하고 더욱이 순애에는 동정이 많은 사람이러니, 지금에는 이다지 무정하도록 마음이 변하였는가. 이와 같이 생각할 때에 순애는 자기의 죄가 얼마나 중하였으며, 자기의 죄로 하여 남의 마음까지 상하여 놓은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시 돌아볼 여가도 없이 다만 수일의 무정함을 원망하며 그 여자의 방자함을 미워하여 슬픈 마음과 투기스러운 생각에 어지러운 정신을 수습치 못한다.

그러나 수일의 오늘날 저렇듯 변하여 있는 신세를 다시 생각하면 가엾고 불쌍한 생각은 스스로 일어나 원망하던 마음은 없어지고, 수일로 하여금 오늘날 신체에 이르게 한 책임은 모두 내 몸의 허물로 자처하여 자기의 요사이 근심과 고통은 자기의 죄로 벌을 당함이라 하며, 다시 수일로 하여금 전일의 수일을 만들어놓는 것이 내 몸 책임이라고 순애는 생각하였더라.

이와같이 쓸데없는 근심을 할 때마다 근심 위에 근심이 더하여 거의 성광에 이를 지경이다.

순애는 다시 자리에 누워 흐트러진 머리는 얼굴을 반이나 가리었는데 피골이 상령한 얼굴에는 혹은 붉은 기운이 올랐다 또는 내리었다 하며, 간간이 들리는 것은 한숨이요, 베갯머리에 흐르는 것은 눈물이라. 이때에 그 모친은 그 약그릇을 들고 고요히 문을 열고 들어오나 순애는 조금도 알지 못하고 누웠는데, 모친은 약그릇을 옆에 놓고 순애의 모양을 이윽히 보다가 홀로 눈물을 지으며 순애의 어깨에 손을 대고 가만히 흔들며 울음에 섞여 나오는 목소리로,

『이…… 이애, 김…… 김집아, 약 가져왔다. 어서 일어나 약 먹어라. 응, 잠 들었니……?』

순애는 홀연 눈을 뜨며 그 눈에는 노한 기운이 가득하여,

『어머니는 일상 김집 김집 하시니 나는 그런 소리 듣기 싫소. 그렇게 그 말은 하지 말래도 이혼까지 한 후에도 그런 말씀만 하신단 말이요? 그 말씀만 내 귀에 들려주지 아니하면 약보다 더 낫겠소…….』

하며 순애는 다시 눈을 감고 벽을 향하여 돌아눕는다.

모친은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여 흐르던 눈물은 어느덧 없어지며,

『아이구, 내가 잊었구나. 그저 늙은 어미가 정신이 사나와서 그리하였구나, 어서 약 먹어라. 네가 저리하면 나 먼저 죽어야지, 저 꼴을 이 늙은 부모더러 어찌 보라느냐?』

순애는 마지못하여 두 팔을 짚고 일어나서 벌벌 떨리는 손으로 약그릇을 붙잡으며 스러져가는 목소리로,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 가셨소?』

『네 병으로 하여서 의원 보러 가시나 보더라.』

『아이고, 어머니,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목숨이 오래지 아니할까 보오. 왜 딸자식은 낳으셨소. 부모께도 불효요, 제 신세도 가련하지요.』

말을 마치고 모녀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붙들고 눈물만 흘리는데, 넘어가는 해는 산봉우리에 가리웠고 방안은 점점 어두워 두 사람의 심사를 더욱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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