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30장
연기는 육십여 세나 되었으며 이마는 벗어지고 머리털과 수염은 거의 백발이 되었는데, 장승과 같이 파리한 몸은 등걸만 남아 있는 듯하나 그 온후한 미목에는 일맥 유정이 나타나며, 중장에 몸을 의지하고 동문 외의 일개 촌간에서 한적히 세월을 보내는 백낙관의 집을 찾아온 사람은 심택.
심택은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동안에는 백낙관은 능히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겠더라.
전일에도 우연히 수차의 면분이 있음은, 백낙관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동창생으로 있던 이수일의 인연으로 수차에 면접한 일이 있을 뿐이요, 지금이라도 그 이름을 들으면 먼저는 수일과 순애를 생각하고 그 다음 비로소 심택의 이름을 생각하는 터이니, 그 음성과 형용은 처음 대하는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지라.
재물의 욕심으로 눈을 흐리어 그 딸을 앗기었으며, 친아들과 다름없는 좋은 청년을 버리어 한 사람은 자포자기하여 몸을 스스로 타락하였고, 한 사람은 실성함에 이르게 한 간접 범인으로 생각하매 이마 위에 흰 머리가 부끄러움에 취하여 붉어지도록 면책을 하여도 오히려 부족하리라 생각하였으나, 다만 연치가 마음 꺼리고 또는 처음 인사하는 사람이나 다름없음을 협의하여 백낙관은 심택의 하는 말이나 먼저 듣고자 한다.
심택의 백낙관을 아는 바는 고등학교 시대부터 수일이가 형과 같이 공경하던 학우(學友)가 될 뿐 아니라 그때부터 위인이 노성하여 일반 소년과는 다른 곳이 많음을 보고 장래에는 필연 고귀한 사람이 되리라 예정하였던 터이니, 이제는 상당한 지위를 얻어 쾌락한 생활을 함으로 생각하였더니, 비로소 눈앞에 당하여 형상 보건대 수간 모옥(茅屋)에 일정한 직업도 없고 가세의 빈한함이 외양에 나타나며 일개 부랑한 인물에서 지나지 못함을 보고, 처음에는 자기가 찾아오기를 그릇하여 동성 동명자가 있음이 아닌가 의심하여 자기의 말하고자 하던 바를 심히 주저하였더라. 그러나 차차로 말의 단서를 열어 문답하는 때에 은근히 살피건대 언어가 자약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업수이 여기지 못할 태도가 보이고 의기가 헌앙하여 사람을 능히 항복받을 만한 기운이 있는 듯하다.
『여러 번 이렇듯 묻는 것이 대단히 미안한 일이나 오늘 노형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의 비밀한 사정이 있어서 그 일을 의논차로 온 길인데 과연 노형이 예전에 이수일이와 한가지로 고등학교에 다니던 백낙관씨요?』
『녜, 그렇습니다. 제가 그때 백낙관이가 분명하오이다. 노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렇게 형세는 곤란하게 지내도 마음은 조금도 곤란치 않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백낙관이는 변하지 않았으니 노인께서라도 조금도 어찌 아시지 말고 하실 말씀이 있거든 합시오.』
여러 번 의심하여 묻는 말을 백낙관은 심히 무례하다 생각하여 책망을 하고자 하다가, 다시 연치를 생각하고 다만 속으로 은근히 웃으며 두 손바닥으로 수염만 부비는데, 심택은 자기의 실언함이 마음을 부끄린다.
『우리가 피차에 길이 달라서 오래 뵈옵지 못하다가 오늘이야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뵈옵습니다마는, 작년 봄인가 여름이든가 김중배씨의 부인된 순애씨를 오래간만에 우연히 만나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노인께서도 아마 자세히 들어 계시겠지요.』
『나는 딸의 일이지마는 당초의 자세한 말은 듣지 못하였소. 작년에 그 애를 만나보았다 하니 어디서 만나보았소? 혹시 댁에를 찾아왔습더니잇가?』
『아니오,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그려. 지금 당시에 유명한 실업가 김중배씨의 정부인으로 어찌 누추한 제 집에를 왕림하실 수가 있습니까? 어찌하다가 우연히 길가에서 잠깐 만나뵈왔지요. 그래도 이 백낙관이 같은 광인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셨든지 알아보고 반색을 하십디다. 그래서 대강 말씀도 들었거니와 순애씨도 그간에 내가 이리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라십디다. 그러나 순애씨도 여러 가지로 난처한 사정이 많은 모양으로 말씀을 듣고 저도 사람의 팔자라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감동되는 마음이 있어서 한가지로 눈물 흘린 일도 있지요.』
『말씀 들어도 어찌 고마운지 모르겠소. 그작지 동정을 표하여 주시니 아비된 내 마음에도 어떻게 고마운지 하고 말씀이 없구요. 그러나 지금 말씀을 들으니 내 딸자식의 사정이라든지 심중에 있는 소회를 모두 본인의 입을 주접을 들었다 하니, 내가 다시 번거히 여 러 말씀할 것도 없소마는, 다만 말씀하자는 것은…… 그 애가 요사이로 그만 실성하였구료.』
『응…… 미쳤어요? 그래, 정말 실성을 하였단 말씀이오니잇가?』
백낙관은 은근히 순애의 소식을 뒤로 탐지하고 있는 터인 고로 순애의 병이 중하단 말도 들었으며 실성하여 병원에 입원한 일도 알았는지라. 그런 고로 그 후에 증세가 어떠함을 심두에 잊지 못하고 염려하더니, 이제 다시 그 부친에게 확실히 실성하였다 하는 말을 들으매 새로 이 마음에 창연함을 이기지 못한다.
『전부터 거동이 전과 같지 아니하고 때때로 정신없는 말을 하며, 밤낮으로 방안에 혼자 들어앉아서 울울불락하여 하기에 의원을 보인즉 기부족이라 하여 약첩이나 먹이었지요마는, 이렇게 미쳐버릴 줄은 몰랐군요. 처음 그 애가 미쳐서 날뛰는 모양을 보았을 때 내가 어떻게 놀랐는지 정신이 아득하옵디다. 지금은 총독부의원에 입원시키어 있는데, 의사의 말이 정신병이라고 하여서 사오 삭만 치료하면 쾌복이 되겠다 하기에 사오 삭 아니라 사오 년이 되더라도 낫기만 하였으면 좋겠다고 고대하였더니 뜻밖에 점점 더하여 지금은 어제 오늘로는 병이 만성(慢性)으로 변하였다고 의원의 말이 그리하면서…….』
『네, 만성이 되었어요? 그러면 낫는다 하여도 오래될 걸요. 그러나 정신병도 종류가 여러 가지니까 순애씨의 병은 어떠하게 되었습니까, 대강 증세가?』
『증세라야 별로 따로 있는 것은 없고 실성한 사람의 항용 있는 증세지요. 처음에 시초하기 전 며칠 동안은 하루를 가도 말 한 마디 아니하고 심란한 사람같이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리에 누웠습디다그려.』
백낙관은 자주 고개만 끄덕이고 대답이 없다.
『그렇게 며칠 동안 지내더니 앉았다가 별안간에 방안으로 마당으로 돌아다니면서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무엇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울었다가 웃었다가 하는 모양은 차마 부모된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디다. 그 중에도 제일 더 측은한 것은 울다가 웃었다 할 제마다 혼자 하는 말은 모두 수일을 보고 하는 말이지요. 「수일씨에게 내가 잘못했으니 수일씨는 나를 용서하여 주시오」 하며 병이 이 모양 되기 전에는 그다지 수일이를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더니, 병이 심한 후부터는 하는 이야기는 모두 수일의 타령이요그려. 병은 원래 수일이로 하여서 난 병이니까 그렇기도 하겠지마는 나중에는 두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하는 것을…….』
『아, 또 자살을 하려고 했어요?』
『네, 두 번이나 그리하였지요. 본래 실성한 사람이니까 미리 주의하고 위태한 물건은 당초에 앞에 놓지 아니하였지요. 그랬더니 한 번은 치마끈으로 목을 매어서 벽에 박힌 못에 걸고 늘어진 것을 치마끈이 약해서 탁 끊어지니까 다행히 살아났지요. 만일 그렇지 아니하였으면 벌써 죽었을 사람이요. 그리고 또 한 번은 제 손가락을 제가 깨물어서 피를 흘리는데, 가만히 그 동정을 본즉 모든 것이 이수일이를 생각하고 그리 하는 모양 같으니, 여보! 백낙관씨, 나는 그 모양을 뼈가 녹는 것 같아서 못견디겠으니 어찌하면 좋소?』
심택은 이리 말하고 솟아나오는 눈물에 얼굴을 돌이키며 자주 수건에 코만 풀고, 백낙관은 눈을 감고 대답이 없으며 깊이 생각하는 모양이라.
수목이 울밀한 이곳에는 매미 우는 소리가 집을 에워 들리는데, 바람없는 여름날이라도 스스로 청량한 기운이 일어난다.
『여보 백낙관씨, 그런데 내가 오늘 별안간에 일부러 노형을 찾아온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그저 노형의 힘으로 수일이를 우리 딸에게 한 번만 보여주시구료. 그랬으면 그것이 다시 살아날 도리가 있을 듯하오구료.』
백낙관은 그제야 비로소 눈을 뜨고 고개를 들며 정시(正視)한다.
『그때가 아마 작년 봄이든가 보오. 수일이가 한번 우리 집을 떠나간 이후에는 다시 소식을 듣지 못하고 거처를 알지 못하다가 우연히 전하는 소문을 들으니까, 수일이가 누구에게 몹시 맞아서 기지사경이 되었는데 지금 총독부의원에 입원하여 있다 하는 말을 듣고 오래 간만에 만나보는 것도 반갑고 문병도 할 차로 찾아갔었지요. 수일이는 그때까지라도 나의 한 일을 오해도 하였고, 또는 내가 제게 잘못한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기에 좌우간 만나보고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요, 잘한 것은 잘한 것으로 아주 서로 파혹을 하자고 이 늙은것이 저를 먼저 찾아갔구료. 그랬더니 파혹은 고사하고 명함을 주니까 당초에 심택이라 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도로 쫓아내보냅디다.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그렇지 못하여서 저를 들어가 보고 이리 저리 그렇지 아니한 이유를 말하여도 도무지 들을 생각도 아니하고 벽을 향하여 눈을 감고 돌아누우니, 그때 내 모양이 어찌 되었겠소? 내가 나이 칠십에 그런 수치당하여 보기는 처음이요. 그런데 그때 보니까 수일이 그간에 어떠한 여편네를 얻었나봅디다그려.』
『여편네를 얻어요?……』
하며 백낙관은 의아하여 도리어 묻는다.
『그때에 나하고 인사까지 하였는데 성명이 최만…… 어떻든지 최가는 최가야요. 이름은 내가 잊었소마는 옷은 양복을 입고, 요사이 문자로 참 하이카라를 하고 수일의 옆에 아주 친절하게 병구완을 하고 있던데요.』
『옳지, 그렇지. 그 여자는 최만경이든 게지요? 그 사람도 취리상에서 노는 사람인데, 제가 이수일이를 탐내어서 영락하려 하지요마는 수일이는 결단코 말을 듣지 아니하는 터이외다. 수일이도 여편네에게는 큰 경험을 당하여 본 사람이니까…….』
심택은 탄식하는 듯이 흰 눈썹을 찡그리고 손에 들었던 부채를 펴서 성난 사람같이 얼굴 두어 번 부치고 다시 탁 접어 한편 옆으로 치워놓으며,
『지금 말한 바와 같이 늙은것이 먼저 찾아가서 사과하듯 하여도 저 사람이 들어주지 아니하는 것이야 어찌 하겠소. 그러나 십유여 년을 한집안 식구로 알고 지내다가 어찌한 과실로 조그마한 감정이 났기로 그렇게 발을 끊는 것은, 나는 정말 야속하여 오늘날까지라도 풀리지 않소. 서로 정든 본의로 하기로 어찌 그리하는 수가 있소? 그러나 이번에는 내 딸자식도 저 모양이 되어서 지성으로 수일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니, 이 기회에 저희가 서로 한 번 만나서 전일 감정을 풀어버리고 좋은 사이로 다시 지냈으면 오죽 좋겠소. 그러나 우리의 마음만 그러하지 수일의 생각은 어떠한지? 요전에 병원에 찾아갔던 때와 같아서는 좀처럼 듣지 아니할 듯하나 좌우간 만나서 수일의 대답이나 들어보아야 할 터인데, 대체 만나야 하지 않소. 수일의 집을 간신히 수소문하여서 사오차나 찾아가도 도무지 만나볼 수가 없고, 그 집에 최원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늙은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하도 여러 번 찾아오니까 아마 가엾은 마음이 났던가 보옵디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기에 노인이 이렇게 여러 번을 오느냐고 묻기에 자세한 말을 하였더니, 그 사람이 노형의 집을 가르쳐주면서 노형에게 의논을 하여보라 하기에, 노형도 모르는 터가 아니요 더욱 반가와서 이리로 찾아왔소. 노형이 이 늙은 놈의 사정을 좀 생각하여 주시오. 수일이는 저 모양이 되고 딸 자식은 미쳐버리니 이런 놈의 신수가 어디 있소? 우리 내외는 꼭 죽고 싶은 생각 밖에는 없소.』
백낙관은 묵중한 태도로 서서히 입을 열어 말한다.
『노인장의 지금 사정을 나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기탄없이 바로 말을 하면 노인께서 오늘날 이 고생하시는 것은 모두 자취올시다. 순애씨가 마음을 태우다가 드디어 실성한 것도 당신의 잘못이요, 수일이가 집을 떠나서 저렇듯 몸이 타락한 것도 당신의 허물이외다. 어찌하여서 그러하냐 하면 혈기가 미정한 청년 남녀로 견확(堅確)한 지각이 없이 마음이 사면으로 흩어지기 쉬운 때에 노인장 내외분이 아니 계시면 혹시 모를 일이올시다마는 항상 옆에 있어서 그 사람의 감독을 잘하셨던들 그 청년 남녀가 오늘날 저 모양이 되었을 리가 만무하지요. 그런 고로 그 허물은 전부 당신의 몸에 있다 하여도 가하외다.』
심택은 부채로 무릎을 짚고 가만히 앉아 백낙관의 하는 말을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듣더니 이마에 솟아나오는 땀을 수건으로 씻으며,
『진실로 나는 면목이 없소. 노형이 그렇게 말을 하니 나도 말이요마는, 실상은 오늘날 와서야 비로소 육 년 전에 내가 잘못한 일을 깨달았소. 집에서 우리 마누라더러도 아직 말한 법도 없소마는, 어찌하여서 그때는 생각이 그렇게 들어갔던지 지금 와서는 후회막급이요. 그러나 수일이로 말하면 제가 한 짓이 너무도 분하구요. 내가 비록 언약을 어기었다 할지언정 내 마음은 결단코 저를 아주 내버릴 것이 아니요, 아주 수양자로 정하여서 변변치는 못하여도 심택의 재산을 상속하여줄 터이요, 학교를 마친 후에 다시 공부를 하고 싶거든 일본까지라도 보내어 주마 하였고 또는 십여년 간 양육하여 준 은혜를 생각하든지, 어차어피에 제가 나를 그렇게 대접할 수가 없는 터인데, 지금의 제 소위를 가만히 보면 그런 박정한 사람이 어디 있소. 그런 고로 지금까지 나는 수일이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였소. 세상 사람이라 하는 것은 모두 그렇게 무정한 물건인가 하고 단정하였더니, 인제는 내 속으로 나온 자식까지 저 모양이 되고 본즉 측은하여 못 보겠고, 그것을 측은히 생각할 때마다 수일이가 다시 불쌍한 마음이 나는구료. 사람이라 하는 것은 모두 그러한 것입디다. 제가 그 경우를 당해보아야 사정을 아는 것이야. 수일이도 오죽 원통해야 그 모양이 되었겠소? 나는 인제야 수일의 사정을 불쌍히 여기오. 내가 딸의 혼인을 파의할 때에 처음 얼마 동안은 젊은 아이들의 마음이라 좋지 못할 것은 정한 일이지요마는, 차차 오래되면 그 마음 저 마음이 없어지리라고 나는 용이하게 생각하고 한 일이 수일이는 그 길로 몸을 버려서 저 모양이 되고, 순애는 처음에는 부모의 시키는대로 순종하여 가기에 결심을 단단히 한 줄로만 알았더니, 실인즉 순애의 마음도 역시 굳게 결심을 못하였던지 기어이 저 모양이 되었으니, 나는 인제 와서야 비로소 그때의 생각이 그릇 들었던 줄을 깨달았소. 순애와 수일의 마음은 내 생각과 같이 잠시 그 자리뿐이 아니라 대단히 깊고 깊었던 줄을 인제야 깨달았소. 지금 노형 말씀과 같이 경력 많은 늙은 사람들이 좌우에 있으면서 청년 남녀로 저 지경을 만들어놓은 일이 절통하고 분한 일이라 하시나, 절통하고 분한 것은 고사하고 제일 남을 대하기가 부끄럽소. 이런 늙은 물건이라도 없었으면 남들이라도 괴이쩍게 알 것이 없겠지마는, 실상인즉 이 늙은것의 말이 젊은 아이들보다 먼저 어두워서 그렇구료. 바른대로 말씀하면 대단히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전에 김중배가 큰 부자라 하는 말에 눈이 현란하였구료. 여보 백낙관씨, 이렇게 늙은 놈도 재물에 눈이 어두웠거든 황차 심지 미정한 계집아이가 잠깐 마음을 변하기 쉬운 일이 아니오? 그러나 우리 딸은 그 일로 하여서 오륙 년을 근심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기어이 이제는 실성까지 되어서 수일에게 사죄를 하고 뉘우쳤으니, 수일이도 이제는 얼마큼 마음이 풀어져서 용서를 하여줄 듯하구료. 만일 그래도 수일이가 마음을 풀지 아니하고 용서치 아니하면 그야 억지로 어찌 하겠소. 할 수 없는 일이니 다만 수일의 얼굴만 한 번 순애에게 보여주었으면 좋겠소. 억지의 말을 내가 하는 것같지마는 이런 말을 노형에게나 청을 하였지 뉘게다가 말을 하겠소. 노형은 그저 실성하여 죽어가는 순애의 정경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늙은 심택의 내외를 가련히 보아서 이 청을 한 번만 들어주면 우리 부녀가 결초보은이라도 하겠소.』
하며 심택은 머리를 조아 애원한다.
백낙관은 한편으로는 우습고, 한편으로 가긍하여 심택의 얼굴을 바라보며,
『노인장께서 지금 난처하신 사정을 저도 자세히 압니다. 내가 이수일을 대신하여 노인께 할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마는 노인께서는 벌써 전에 잘못한 일을 깨달아 남이 부끄럽다고까지 말씀을 하실 제는 좀처럼 생각하신 일이 아니니까, 다시 저는 노인 경의(敬意)를 표합니다. 인수무과리요 개지위기(人誰無過改之爲貴)라 하는 예전 말씀이 있으니 노인장께서 인제는 마음을 잘 가지셨습니다. 이수일이도 아마 노인장의 그 마음을 인제는 알겠지요. 그러나 수일이를 순애에게 한 번만 보여 달라 하시나 그 일이 제 힘으로는 하기가 어려울 듯하외다. 작년에 순애씨를 평양서 만났을 때에도 순애씨의 말이, 수일씨를 한 번 만나게 주선을 하여 달라고 합디다. 「만일 수일씨가 내 죄를 용서하여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앞에서 마음에 있는 말이나 다 한 번 하여보고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저는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 거절하였습니다. 순애씨의 뉘우친 일도 자세히 알았고, 순애씨의 슬픈 사정도 모르는 것이 아니올시다마는, 한편으로는 또 이수일의 정상도 생각해야 하지 않습니까? 가련한 정상이 누가 더하겠느냐 할 것 같으면 수일의 원통하고 슬픈 마음이 아마 순애씨의 근심보다 백 배나 더 하오리다. 아직도 순애씨의 고통이 부족하니까 용서할 만한 길이 부족하다고 저는 그때에 차마 못할 말로 거절하고 눈물을 흘리고 작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친구의 의를 생각하고 순애씨를 용서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애씨가 근심에 근심을 더하고, 고통에 고통을 더하여 드디어 오늘날 실성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 모양이 된 후까지도 순애씨를 책망하는 것은 사람의 정이라 할 수가 없으니까 제가 아무 짓을 하든지 이수일의 원망과 분함과 한은 내가 맹세하고 풀어 드릴 터이니 염려 마시고, 가시거든 순애씨더러 이수일이 용서하여 준다더라 말씀 한 마디만 하여주시오.』
『그러면 백낙관씨를 나는 믿고 가오.』
심택은 홀연 희색이 만연하여 기꺼운 보고를 그 아내와 딸에게 전하고자 총총히 작별하고 병원으로 다시 향하여 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