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31장
사오 일 동안 청음(晴陰)이 고르지 못하던 천기가 이 날은 아침부터 큰 비가 내리고 석양에 이르러는 고운 비로 쓸어낸 듯이 구름은 흩어지고 청량한 월광은 동편 하늘에서 얼굴을 나타내는 때에, 더위를 쫓는 서풍은 서서히 불어 사람의 가슴까지 서늘하다.
길가에 손도 없는 빙수집의 주렴은 한가히 바람에 움직일 뿐이요, 종현 천주교당의 뎅뎅 치는 종소리는 지금 오후 여덟시를 보하는 때라.
새문밖 냉동 이수일의 집 뒤뜰 오동나무 아래에 교의를 나란히 벌여 놓고 남자 두 사람이 걸터앉았으니, 한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으며, 한 사람은 수염난 얼굴로 달을 향하여 창연히 바라보고 있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어 옆의 사람을 내려다보며,
『여보게 수일이, 어서 결심하게. 내가 자네 결심하였다는 말을 들어야 하겠네.』
수일은 마음을 결단한 바가 있는 듯이 고개를 들며,
『여보게 백낙관, 자네 말대로 내가 그것은 결심하겠네』
『응…… 결심하였어? 그러면 자네는 오늘은 세례를 받은 셈이니 내일부터는 단정코 고리대금 영업은 폐지할 터이지?』
『내일까지 어디 기다리겠나. 오늘 이 자리에서 아주 폐지하였네.』
『허허, 대단히 고마운 말일세. 그러면 자네는 부활(復活)한 사람일세.』
백낙관은 손을 들어 수일의 손을 꽉 쥔다.
손을 잡은 사람이든지 손을 잡힌 사람이든지 한참 동안 말은 없으니 구회를 이기지 못하여 창연히 눈물을 금치 못한다.
『아…… 수일이…….』
『백낙관, 나는 길고 길고 다시 긴 꿈을 꾸었네그려.』
『허허, 자네가 인제 긴 꿈을 깨었나…… 꿈은 깨었지마는 자네의 세상은 역시 적막하이그려.』
『자네와 같이 적막한 생각을 울고 있는 사람이 역시 꿈을 깨어서 한 사람 또 있네…….』
수일은 대답치 아니하고 다만 미소를 띄우며 고개만 좌우로 흔든다.
『여보게 수일이, 제일 문제는 비로소 낙착이 되었으니 인제 제이 문제를 자네에게 말할 터인데, 어찌하든지 오늘은 대단히 기꺼운 날이라. 자네는 비록 술을 먹을 줄 몰라도 하나님의 성찬(聖餐)에 마시는 포도주로 알고 한 잔 먹세. 그리고 우리가 오늘 저녁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버리세나그려.』
하며 백낙관은 쾌활이 노파를 불러 술을 청한다.
수일은 본래부터 술을 조금도 접구치 못하는 터라. 그러나 이날은 극히 기꺼운 날이라 하여 강잉히 수삼 배를 마시매 수척하였던 얼굴에 일맥 생기가 오르며 새로이 온화한 전일 수일의 형용이 나타난다.
백낙관은 잔에 술을 가득히 따라 술잔을 다시 전하며,
『그런데 내가 제이 문제라고 말하던 바는 다른 말이 아니라, 여보게 수일이, 자네는 오늘날 이렇게 회개를 하였네그려. 회개한 이상에는 여섯 해 동안에 자네가 타락하였던 죄는 모두 없어진 줄로 자네도 알지. 한 번 죄를 회개하고 자복한 이후에는 이수일이는 정말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할 터인데,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 된 이수일을 만일 이후에도 어젯날까지 고리대금하던 수일이로 세상 사람이 대접을 하면 그때는 자네가 어찌할 터인가?』
이와같이 어려운 말로 물으매 수일은 잠시 대답을 주저하다가,
『그렇게 대접하더라도 할 수 없지. 자기가 그 대접을 받을 만한 죄책이 있으니까 아무 소리 못하고 참을 수밖에 없지.』
『그러나 회개한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하지마는, 전능하신 하나님도 회개한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한다 하셨는데, 전능치 못한 인간으로 자네같이 이렇게 회개한 사람을 회개하기 전 사람으로 알고 대접을 하면 할 수 없이 참고 받을 수밖에 없겠지마는, 자네가 생각을 하더라도 너무 심하다고 말하겠지?』
『그야 그러하지…….』
『그러면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네그려. 그러면 나는 아무리 회개를 하여서 좋은 사람이 다시 되었건마는 사람들이 내 몸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원통하지마는 할 수 없이 참고 지낸다 하지. 그러나 만일 마음이 약한 사람이면 그러한 일에 반동력이 생기어서 일껀 회개한 본의가 없이 도로 다시 타락하여버리는 일이 있네그려.』
『응, 자네 말 알아듣겠네. 백낙관이, 자네는 나를 염려하여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마는 내가 그다지 마음이 약한 사람은 아닐세, 염려 말게.』
『글쎄, 내 말을 듣고 말을 하게. 내가 아무러기로 자네의 마음이 굳은 줄이야 알지 못하겠나. 자네가 마음이 약하지 아니한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일세. 그러나 너무 굳세어서 강유가 겸전하지 못하면 거기서 무슨 일이 또 생길는지 모르는 것이지.』
『그러면 자네의 말이 내가 오늘날 회개하였지마는 이후에 또다시 마음이 어떻게 변할는지 몰라서 걱정되어 하는 말인가? 자네 말도 그러할 듯하나 나도 오늘날까지 이 세상의 풍파를 여러 가지로 겪어서 인정 세태가 어떠한지 대강 알고 있네. 이후부터는 세상 사람들더러 나를 알아달라고 하지 않네. 여섯 해 전에 이수일이는 너무 정직만 하여서 그 결과로 자포자기도 하여 보고 타락도 하였으나 오늘날부터 이수일은 조금 엄절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네. 하하하.』
하며 수일은 백낙관의 염려하는 마음을 풀고자 하여 쾌락한 웃음을 보인다.
『그렇지, 사람이라 하는 것은 엄절한 것이 있어야지. 너무 정직만 하여서는 조그마한 일에도 남의 원망도 하고 한탄하여 지내니 정직한 것이 물론 아름다운 일이지마는 그러면 그릇이 너무 적어 못쓰는 법이야. 그런 고로 예전 사람의 말은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아니한다는 말이 없는가? 그러한 말이 모두 엄절한 말일세. 그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만일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너희들의 천부도 또한 너희들의 죄를 용서할 것이요, 만일 사람의 죄를 용서치 아니하면 너희들의 천부는 또한 너희들의 죄를 용서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여보게 수일이, 자네도 자네를 스스로 용서하는 동시에 그 여자 한 사람도 그만 용서하여 주면 어떠하겠는가?』
비로소 수일은 백낙관의 제이 문제의 깊은 뜻을 해득하였더라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설명하며, 전일의 죄과를 항상 허물로 아는 것은 너무 참혹한 일이라 하여 혹은 고석(古昔) 성현의 관용(寬容)하는 일과, 혹은 천부(天父)의 자애(慈愛)를 순순(諄諄)히 말함이 수일의 금후 처신함을 염려함이 아니라 모두 순애의 지금 정경을 비유하여 말함이라.
수일은 무엇이라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고 점점 고개를 드리우고 눈을 뜨지 않으며 대답이 없다.
『지금 한 말을 또다시 하는 것 같으나, 자네도 스스로 잘못한 줄을 알고 스스로 뉘우쳤으니 그 여자도 그만 용서해 주어야지. 이렇지 아니하면 너무 과하지 않은가? 여자라 하는 것은 마음이 약한 물건이라 한번 회개한 일이 있더라도 다시 동정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도로 타락하여지는 일이 없지 아니한 법이니 내가 지금 염려하는 바는 그것일세. 연약한 아녀자를 가지고 그다지 심하게 할 것은 없네. 지금 그 여자는 목숨이 조석에 걸리어서 죽고 사는 것이 자네 손에 달리었는데, 자네는 그 여자의 죽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 가만히 두려는가?』
수일은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간신히 들며,
『글쎄, 자네는 용서만 하여주라니 용서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어찌하다니, 당장에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내야지, 생죽음하는 것을 어찌 보고 있나?』
『구해내어……,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인제는 자네가 용서하여 주고, 다시 인연을 이으라 하는 말일세,』
『응…… 인연을 이어……?』
하며 수일은 의외의 하는 말에 심히 놀라는 모양이라.
『여보게 수일이, 그렇지 아니하면 그 여자는 죽는 사람일세. 육년 전의 심순애를 자네가 아주 잊지는 아니하였지? 아무쪼록 죽지 말게.』
『가만히 있게, 내가 생각을 해보아야 하겠네.』
오동잎 사이로 흘러오는 달빛은 묵묵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적막히 비추는데 반딧불은 하나 둘씩 담 밖으로 지나 날아간다.
백낙관은 수일의 마음을 재촉하는 모양으로,
『여보게 용서를 하든지 못하든지 대답하게. 그 여자는 회개만 하였을 뿐이 아니라 그 결과로 실성까지 하였고, 두세 번이나 자네에게 대한 의리로 자살까지 하려 하였으니 그 정상이 가긍치 않은가? 그만 용서하게. 지금 순애는 김중배의 아내가 아니라 전일의 심택의 딸 심순애가 다시 되었네. 이 지경까지 되도록 자기의 몸을 책망하여 회개하였는데 그래도 그 사람을 허물하는 것은 너무 심하니.』
수일은 양협에 눈물을 드리우며,
『응…… 용서하여 주겠네…… 용서하여 주지.』
『용서하여 주는 것을 입으로만 해서야 무슨 효험이 있나? 그 여자를 한 번 만나보고 그 여자의 귀에 들리게 말하여 주게. 그리고 그 여자를 자네가 직접으로 위로하여 주게. 자네로 하여서 저 병이 들었으니, 자네 말 한 마디로 위로하면 그 병이 곧 나을는지도 알 수 없네. 아무리 의약을 한다 하기로 실성한 사람의 병이 의약으로 어찌 낫는단 말인가? 자네가 만일 그 여자를 불쌍히 여기어 전과 같이 성한 사람을 만들어놓을 생각이 있거든 다만 한 가지 도리가 있으니, 그것은 자네가 만나보고 다시 자네 집으로 데려오게.』
『여보게, 가만히 있게. 만나고 아니 만나는 것은 아직 결단하여 대답할 수 없네.』
『그러면 어서 결심하게. 용서한 바에야 만나보는 것이 무슨 어려울 것이 있단 말인가? 아까도 내가 말하였지마는 일전에 심택씨가 나를 찾아와서, 한 번만 수일을 만나게 해달라고, 만일 수일이가 순애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마는 얼굴 잠깐 보여주어도 좋겠다고 하면서 백발이 된 머리를 내 앞에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걸을 하데그려. 가엾기도 하고 또는 동정이 없지도 아니하여 거절치 못하였네. 그러나 지금도 그 여자가 만일 김중배의 아내라 하는 명목이 있으면 나도 그렇게 마음이 쓰이지 아니하였겠으나, 이미 김중배하고 인연을 끊은지는 오래 되고, 지금은 순전한 남이 되었는 고로 나도 장담을 하고 금명일 내로 수일을 데리고 병원까지 가겠노라 약조를 하였네. 그러하니 자네도 다시 생각하여 보게. 기위 용서한 사람이면 한번 만나보기를 그렇게 주저할 것이 무엇인가? 자네의 주저하는 뜻을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네. 혹은 입으로만 용서하였다 말하고 그 실상 속마음으로는 용서할 생각이 없으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한 바에야 무슨 일로 만나보기를 어려워하나? 오래간만에 만나기가 점직하여서 그리하나?』
『점직하지 않은 것도 아닐세…… 그러나.』
『서로 만나보기가 점직하다고 자네가 몸을 피하면 그 여자의 병은 점점 중하여질 터이요, 또는 중할 뿐이 아니라 목숨까지 보존하기 어려우니.』
『그러나 그토록 자네가 말하는 것을 나는 내 고집만 세우면 자네 대접이 아니니까…….』
『그러면 만나보겠다 하는 말인가?』
『응…… 만나보지.』
수일은 드디어 서로 만나기를 결심하였도다.
슬프다, 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하여 그 여자는 오늘까지 기만괵(幾萬斛)의 눈물을 흘렸느뇨! 오늘밤 이때에 총독부의원 병실에 누워 있는 순애의 꿈은 두리건대 육 년 전 봄날을 다시 만남과 같도다.
『어, 인제는 자네의 그 말 한마디에 심순애의 목숨은 살았네.』
하며 백낙관은 수일의 손목을 잡으며,
『아! 육 년 전의 순애, 심택의 딸로 있던 심순애, 나도 순애씨의 신세를 많이 졌더니 꽃이 떨어지고 다시 봄을 만났구나. 다시 한 번 예전 순애가 되도록 하여 보세 응, 수일이.』
하여 두 사람은 암연히 눈물을 흘리는데 섬돌 아래 이슬비 젖은 풀 속에서는 귀뚜라미 소리만 간간이 들리더라.
『여보게, 그러면 한시가 바쁜 터이니 속히 가서 보고 그 사람을 구해 주어야 하지 않나? 일어서게, 어서 가세.』
용서하겠노라 언약하였고, 만나리라 맹세한 수일의 마음은 스스로 즐겨함이 아니라 백낙관의 열성과 백낙관의 권고로 인하여 박절히 거절치 못하고 총독부 의원으로 발을 향함에 이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