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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몽/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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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날 심택의 집에는 다동(茶洞) 사는 김소사(金召史)가 이르렀더라. 김소사와 심택의 부인은 시누이와 오라버니댁이 되는 터이니 속담에 이른바 올케끼리라. 친척으로는 비록 가까우나 고래로 풍속이 사돈간에는 부인 등은 서로 자주 심방함을 좋아 여기지 아니하는 터이요, 차라리 안으로는 왕래가 끊어졌다 하여도 가할러라. 그러나 이날은 의외에 김소사가 그 시누이 되는 심택의 부인을 찾아왔으니 서로 반가이 만나 담화는 하였으나 심택의 부인 최씨(崔氏)는 그 오라버니댁이 졸지에 찾아온 일을 괴이히 여기며 또한 무슨 일이 있는가 하였더라.

김소사는 아침 일찍이 와서 석양 때까지 있는데 이 집은 사랑이 없고 다만 이수일의 거처하는 뜰 아랫방 하나가 있을 뿐이니, 이날 심택은 손님에게 안방은 빼앗기고 종일토록 홀로 뜰 아랫방 안에 갇히었는데 그 김소사는 모르는 것도 아니언마는 도무지 불안한 마음이 없이 오래도록 있으며 무슨 말을 의논할 듯 할 듯하나 순애가 옆에 있음을 꺼리어 조용한 틈을 기다리는 모양이러니, 점점 날이 늦어 가매 할일 없이 김소사는 옆에 앉아 있는 순애를 돌아보며,

『이애, 너는 건넌방으로 좀 건너가서 있거라. 너의 어머니하고만 조용히 할 말 있으니.』

순애는 대답하고 일어나서 나아가며 생각한다. 무슨 은근한 말이 있어서 어머니에게 하는 말을 자식 되는 나를 피하는고? 필연 수상한 곡절이 있음이니 기어이 그 말을 내가 엿들으리라 하여 건넌방으로 들어가는 체하고 다시 건너와 안방 지게 문 뒤에 숨어 서서 방 안에서 조용조용히 하는 말을 이윽히 듣고 있다. 방 안에서 하는 말을 참적이 듣고 섰던 순애는 홀연 얼굴이 홀로 벌개진다.

이날 이수일은 학교에 가고 집에 있지 아니하였는 고로 이와 같이 괴상한 안손님이 와서 다녀간 줄을 전혀 알지 못하였으며, 집안사람들도 김소사의 왔던 일을 속이고 말하지 아니하였더라.

이날 이후로 하루가 지나고 이틀 지내어 날이 점점 지나가매 순애는 점점 먹기를 적게 하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한다. 그러나 이수일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순애는 날이 점점 지나갈수록 그 가슴 속에 있는 말을 수일에게 고하고자 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사이에 심택의 부부는 항상 조용히 앉으면 그 일을 의논하느라고 수군수군한다. 그러나 심히 난처하여 결단키 어려워한다.

저와 같이 은근한 가운데에서 이르는 일을 이수일은 신령(神靈)이 아니라, 어찌 알리요. 그러나 편시(片時)라도 잊지 못할 순애의 얼굴이 평일과 다름은 분명히 알았는지라, 항상 마음으로 그 여자의 건강을 축원하며 진심을 다하여 사랑하는 그 여자의 얼굴이 요사이로 홀연 까닭 없이 혈색이 걷히고 동작까지도 심히 무력하여 보이며 웃는 형용도 가장 강잉하는 모양이다.

그 집 건넌방은 순애가 홀로 거처하는 방이라고 이르기는 어려우나, 순애의 날마다 쓰는 손그릇과 경대와 책상과 벼루와 학교에 다닐 때에 보던 책권과 의복 넣는 장 등속까지 이 방에 있고 저녁에 잠도 그 방에서 항용 많이 잔다. 그러므로 낮에 바느질을 하더라도 건넌방에서 할 때가 많이 있으며 일하기에 곤뢰(困懶)하면 전일 학교에 다닐 때에 공부하던 풍금(風琴)도 때때로 희롱한다.

뜰 앞에 서서 있는 홍도화(紅桃花) 한 가지를 꺾어다가 유리병에 물을 붓고 그 속에 꽂았는데, 그 꽃방울은 방 안의 따뜻한 기운에 벌써 꽃방울이 불어서 불그스름한 꽃봉오리가 보이며 노르스름한 잎사귀도 싹이 나오는데, 순애는 화로의 불을 두 손으로 쪼이며 정신없이 그 병에 꽂힌 복숭아 가지를 바라보니, 온전한 정신으로 그 가지를 바라봄이 아니라 실상은 다른 생각을 하는지 주목하여 보는 것이 없고 다만 얼굴만 들어 정신없이 바라보는데, 그 둘째 손가락에는 골무가 끼어 있다. 또 한편에는 바느질하느라고 바늘을 끼워놓은 옷감이 놓여 있다.

순애는 먹기를 적게 하고 밤에 잠을 이루기 어려워한 이후로는 스스로 즐겨 이와 같이 고요한 방 안에 홀로 앉아 깊이 무슨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부모들은 그 딸의 깊이 생각하는 일을 아는지 별로 동작의 괴이함을 힐문치도 아니하고 다만 심상히 보고만 있다.

이날 이수일은 학교에 갔다가 늦어서 돌아오니 집안은 빈 것같이 적적하여 인적(人跡)이 없는데, 다만 건넌방에서 순애의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그 후로는 다시 적적한지라, 순애는 나의 돌아옴을 알지 못하는가 하여 발자취를 내지 아니하고 건넌방 문 앞에 이르러 조그만치 터진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순애는 책상 앞에 앉아서 두 손은 화롯가에 올려놓고, 머리는 구부려 책상가에 대고 엎디었다가 다시 얼굴을 들어 영창문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천장을 향하고, 길게 한숨지으며 혹시 무슨 소리를 듣는지 귀를 기울이고 아름답고 영롱한 눈을 바로 뜨고 묵묵히 있는 것은 진정으로 보는 것이 있고, 들으려 하는 것이 있어서 그리 함이 아니라, 깊고 깊이 가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라. 그 모양은 진실로 입으로 말하지 아니하나 마음으로 번민하고 난처하여 하는 형상이 외모(外貌)에 나타난다.

수일이는 순애의 이와 같은 모양을 괴이히 여기며 더욱 그 하는 양을 보고자 한다. 순애는 조금 있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몸을 책상에 실리고 쓰러진다.

몸을 숨기고 문틈으로 엿보던 이수일은 그 곡절을 알지 못하여 눈썹을 찡기고 생각한다.

무슨 일로 저와 같이 근심을 하는고? 저렇듯 근심할 일이 생겼으면 무슨 까닭으로 나에게 말을 하지 아니하는고? 그 연고를 깨닫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와 같이 근심할 일이 어떤 곳으로 좇아 생기는지 또한 의심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이렇듯 이유를 해석하고자 하나 도저히 묻지 아니하고는 알지 못하리라 하여 다시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순애는 오히려 책상에 엎디었는데 머리에 꽂았던 대모빗(玳瑁梳)이 어느 틈에 내려져서 책상 위 한 머리에 떨어졌으나, 오히려 알지 못하고 엎디었다가 인기척에 깜짝 놀라 쳐다보니 수일이가 옆에 와서 앉았는지라, 순애는 깜짝 놀라 흩어진 머리도 수습하며, 떨어진 빗도 집어 다시 꽂고 조금이라도 자기의 사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가리고자 한다.

『아, 깜짝 놀랐구려. 지금 학교에서 오시는 길이요?』

『응, 지금 오는 길이요, 오늘은 안방에서도 어디를 가셨소?』

『네, 어디 나들이 가셨지요.』

순애는 자기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봄을 부끄리어,

『무얼 그렇게 남의 얼굴을 들여다 보아.』

그러나 수일은 순애의 얼굴 보기를 마지 아니한다. 순애는 얼굴을 피하여 모로 돌아앉으며 공연한 손장난을 하고 있다.

『여보, 순애, 어디가 불편하오? 기색이 매우 좋지 못한 모양이니.』

『아니오, 아무렇지도 아니한데. 왜요?』

하며 순애는 천연히 대답하고 반짇고리를 잡아당겨 일감을 손에 든다.

수일은 모자 쓴 대로 책상머리에 한 팔을 올려놓고 순애의 얼굴을 모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러하기 때문에 내가 항상 정답지가 못하다고 말을 하지, 이렇게 말하면 순애는 나더러 의심이 많으니, 신경이 과민하니 말을 하지마는 실상인즉 순애가 사람이 내게는 너무 범연하여.』

『글쎄, 아프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왜 정신없이 무엇을 생각하고 가끔 한숨을 쉬며 답답해서 못 견뎌? 내가 아까부터 이 문밖에서 죄다 엿보았어요. 그러나 참 무슨 병이 있어 그리하나? 혹은 무슨 근심이 생겨서 그리 하나? 나더러 말 못할 것이 무엇이요?』

순애는 그 말에 더욱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고 바느질거리만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고 있다.

『몸이 어디가 불편하여서 그리하오?』

순애는 다만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그러면 근심하는 일이 있어서 그리하오?』

순애는 또한 고개만 흔든다.

『그러면 어찌하여서 그러느냐는 말이야요.』

순애는 가슴 속에서 두 방망이질을 할 뿐이요, 진실로든지 거짓으로든지 대답을 능히 할 계책이 없고, 다만 이미 범한 죄를 은휘치 못할 줄 깨달음 같아서 공구(恐懼)한 마음에 몸이 떨리는 것 같다.어찌 대답을 하면 좋을는지 알지 못하여 주저하는데 옆에는 수일이가 앉아서 더욱더욱 대답을 재촉하매 몸은 점점 구석으로 끼어 박 히는 것 같고 등에서는 찬땀이 줄줄이 흐르는도다.

『글쎄, 어찌해서 그러는지 말을 좀 못 한단 말이요?』

수일의 목소리는 조금 높아졌으니, 그는 다름 아니라 순애의 말 아니함을 괴이히 생각함이라. 순애는 마지못하여 임시변통으로 말을 한다.

『웬일인지 나도 알 수 없어요…… 요사이 삼일 째는 웬 까닭인지 공연히 여러 가지로 안 날 생각이 없이 나서…… 이 세상이 다 우스운 것 같고 공연히 심란만 해요.』

이는 순애의 하는 말을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

『사람이란 것이 오늘 이렇게 살아 있어도 어느 날 어느 시에 죽어버릴는지 알 수 있소?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즐거운 것 같아도 그 대신에 괴로운 일도 많고 설운 일도 많고 난처한 일도 있을 것이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이 세상이 우습고 가소로워요. 우연히 요사이는 매일 이런 생각만 하여지고 마음이 괴상스러워져요. 내가 내 생각을 하여도 웬일인고 하지요. 그런데 지금 내 얼굴이 보기에 병 있는 것 같소?』

눈을 감고 자세히 듣고 있던 이수일은 서서히 눈을 뜨며 다시 미간을 찌푸린다.

『응, 그런 것이 즉 병이지.』

순애는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심려하지는 말아요. 심려를 하면 도리어 병에 해로울 터이니.』

『아니오, 심려하지는 않아요.』

하며, 말하는 목소리가 처량하게 나오니 그 말이 수일의 귀에는 어떠하게 들리었으리요.

『그것이 모두 병으로 하여서 일어나는 증세야, 아마 뇌(腦)가 좋지 못한가 보오. 지금 순애가 하든 말과 같이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으면 하루 한시라도 웃고 지낼 날은 없으리다. 원래 세상이라는 것은 그리 재미있는 것이 못되는 물건이요. 또 사람의 몸같이 알 수 없는 것은 없을 터이야. 그는 과연 그러하지마는 그렇다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런 생각만 할 것 같으면 세계가 말끔 절각이 되고 말게. 믿을 수 없는 것은 세상이라 하나 그와 같이 믿을 수 없고 허탄한 세상 가운데에서 간절히 낙을 구하려고 우리네 사람이 모두 이렇듯 각각 힘써 일하는 것이 아니오. 그러한데 그렇듯 생각하고 심려를 한들 믿을 수 없고 허탄한 세상에 사람으로 생겨서 나온 이상에는 아무리 하여도 다시는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아무리 허탄·맹랑한 세상에서라도 얼마큼 재미있게 세상을 지내고자 생각할 수밖에 없소. 그런 고로 재미있게 지내려면 무엇이든지 낙이 있어야 할 터인데 한 가지의 낙을 한 번 정하면 결단코 세상이 우습고 허탄하지 않는 법이외다. 그러니까 순애는 이때까지 낙이라 하는 것이 없구로. 이렇게 낙이 없으니까 이 세상에 살기가 재미가 없다고 할 만 한 낙이 없는 것이로구료.』

순애는 아름다운 눈을 들어 구하는 바이 있는 것같이 수일이가 얼굴을 돌릴 때마다 수일의 얼굴을 모르게 바라본다.

『꼭 없지, 그렇소?』

순애는 웃음을 머금는다. 그러나 그 웃음이 심히 괴로이 보인다.

『그래, 정녕 없소?』

수일은 순애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돌이키려 한즉 순애는 남자의 하는 대로 맡기어 몸을 수일의 앞으로 돌이키나 오히려 얼굴은 부끄러워 옆으로 돌린다.

『글쎄 있소, 없소? 좌우간에 말을 해야지.』

어깨에 얹은 손은 오히려 내리지 아니하고 순애의 몸을 흔드니 순애는 어깨 위에 얹혀 있는 손이 천근 철퇴로 내리누르는 것 같아여 마음이 편안치 못하고, 다만 찬땀이 등에서 흐름을 깨닫겠더라.

순애는 은근히 수일의 안색을 살펴보니 평일과 다름이 없고 장난의 말로 하는 모양이라. 그 얼굴에는 일점(一點) 노기(怒氣)도 없고 도리어 입에는 웃음을 띄었더라.

『나는 아주 크고 큰 한 가지 낙이 있어서 이 세상이 어찌 유쾌하고 재미있는지 한 시각이라도 지내가는 것이 어찌 아까운지 모르겠어. 나는 세상이 재미가 없어서 이 낙을 구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낙이 있는 고로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것이요. 만일 이 세상에서 이 낙이 없어지면 세상도 없고 이수일이라 하는 명칭도 없을 터이요. 나는 그 낙과 생사를 한 가지로 할 터인데, 여보 순애, 아마 부럽지.』

순애는 전신의 피가 일시에 얼음같이 추움을 견디지 못하여 떨기를 마지아니하며 심중으로는 사색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하여 나오지 아니하는 말을 억지로 강작하여,

『부럽고 말고.』

『정말 부러울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은 참 막무가내 하지마는 순애야 노나 주지 않을 수가 있나?』

『그럼, 어서 주어야지.』

『에, 다 주어버려라.』

하며 수일은 양복 주머니 속으로부터 종이 주머니에 넣은 것을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으니 손을 똑 떼매 종이 주머니의 입이 열리며 동글동글한 사탕이 도르륵 굴러 헤어져서 나오니 이는 순애가 항상 즐겨하는 과자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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