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장한몽/6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그 이튿날 순애는 수일의 전하는 말에 거역하기 어려워 병도 없건마는 병이 있는 체하고 의원의 진찰을 받았더니 의원은 위병(胃病)이라 하여 다병의 물약을 주는지라, 수일은 과연 위병인 줄 알고 의심치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병자는 약 먹을 것이 아닌 줄 아나 수일이 보는 옆에서는 할 수 없이 약을 먹는 체한다.

순애는 은근히 근심하기를 날로 마지 아니하여 그 표면에는 현저(顯著)히 보이지 아니하나 그 가슴 깊은 속에는 수화상극(水火相克)됨과 같은 고통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할 뿐이요, 조금도 감함이 없다.

이수일은 순애의 가장 연연(戀戀)히 사랑하던 사람이라. 그러나 괴이하도다, 저 여자는 요사이로부터 점점 이와 같이 사랑하던 남자와 서로 대하기를 두려워한다. 보지 못하면 진정으로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나 서로 얼굴을 대하면 스스로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등에는 찬땀이 흐르는 듯하다.

순애는 수일의 정다운 말과 간절한 마음에 보고 생각할 때마다 살 에이는 듯한 마음과 몸서리가 나는 듯한 두려움이 일어난다.

순애는 이와 같이 수심에 싸인 후부터 수일이는 병이 있어서 그러함인가 하여 평일보다 더욱 순애에게 향한 마음이 간곡하고 친절하여지는 고로 순애는 이에 이르러 죽기를 구하나 얻지 못하고 살기를 구하나 또한 얻지 못하고, 다만 정신이 산란하여 머리는 무겁고 몸은 항상 깨끗지 못하여 중병을 겪고 간신히 소생하여 일어난 사람과 같다.

순애는 이와 같이 근심으로 날을 보내고 있더니 드디어 괴로운 근심을 그 부모에게 말하였는지, 혹은 그 부모가 순애의 심중을 헤아리고 한 일인지, 또는 그 외에 무슨 사실이 있었는지 하루는 그 모친과 함께 홀연 급급히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길을 떠나갔더라.

적적히 빈 집에 홀로 안방에 앉아 있는 심택은 홀로 앉아 담뱃대를 물고 무슨 생각인지 하고 있는 모양이러니, 벽에 걸려 있는 골패(骨牌) 주머니를 내어 오관을 떼고 있다.

심택은 지금 나이 오십이 조금 넘고 육십은 아직 멀었으되 머리에는 백발이 반이 넘고 길게 기른 수염도 육칠 분은 희었더라. 얼굴은 수척하였으나 쇠모(衰耄)한 모양은 보이지 아니하고 미목(眉目)이 온후하여 극히 공손한 사람이러라.

조금 있더니 이수일은 학교로부터 돌아오는지라 수일은 순애의 모녀가 홀연 집에 있지 아니하고 심택 노인만 집에 있음을 괴이히 여겼으나 유심히 묻지도 아니하고 동정만 살펴본다.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는 고로 더욱 수상히 여겨 심택에게 연고를 물으니, 심택은 긴 수염을 서서히 쓰다듬으면서 허허 웃고,

『순애 모녀는 오늘 안에 평양으로 떠나 내려갔단다. 가만히 눈치를 보니까 순애의 병으로 하여서 어디 가서 물어보았나 보더라. 그래서 물어본즉 그 대답이 평양 어떠한 산에 가서 기도를 며칠만 드리면 낫겠다고 말한 모양이야. 산에 기도한다고 병이 낫겠느냐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편네들의 고집이 말리는 사람의 말을 어디 듣느냐? 그러면 평양 내려가서 구경이나 하고 오라고 보내었다.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못하면 이후에 내 탓할까 무서워서.』

수일은 그 말을 들음에 의심이 여러 가지로 나는 모양이라.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가시기로 그다지 급작스레 내려가신다 말씀이오니까?』

『나 역시 어찌한 영문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러면 평양서는 며칠이나 묵다가 올라오신대요.』

『나 역시 그 말도 물어보지 아니하였지. 그렇지마는 사오일밖에 더 묵어 오겠니.』

이수일은 의아한 마음을 진정치 못하며 다시는 말이 없고 다만 고개를 기울여 한편 벽만 바라본다. 수일이는 옷을 바꾸어 입고자 하여 자기의 거처하는 방으로 내려간다. 떠나갈 때에 순애가 혹시 나에게 편지나 써서 두고 간 것이 없는가 하여 책상 아래위로 온 방을 모두 찾아보아도 순애의 글은 하나도 없는지라. 급급히 떠나간 사이에 아마 쓸 틈이 없어 그리함이니. 내일은 필연 우체로라도 편지가 오리라 하여 다시 마음을 돌리었으나 자연히 마음은 쾌락치 못하다. 수일은 오륙 시간 동안 학교에 있다가 돌아옴은 하루 동안 주렸던 마음을 가장 아름다운 한 여자의 얼굴 위로코자 함이어늘, 이날은 공연히 주린 마음만 품고 빈 방 안에 위로할 데 없는 책상을 향하였더라.

(사람도 참 정답지 못하다. 아무리 급히 떠난다 하기로 말 한마디도 잠깐 써놓고 가지 못한단 말인가? 잠깐 어디로 동리 출입한 것도 아니요, 며칠이 될지 모르는 길을 떠나면서 말 한마디가 없을 수가 있나? 떠나갈 때에 편지는 하든지 못하든지 그것은 오히려 둘째 어니와, 기도든지 무엇이든지 하러 먼곳에 떠나갈 줄 알면 미리 나더러 의논 한마디를 할 것이지. 옳지, 별안간에 가게 되어서, 아무리 별안간에 가게 되었기로 오늘 아니 떠나서 낭패될 일은 없을 것인데 아무리 어른이 떠나자고 하시더라도 나에게 향한 마음이 있을 지경이면 핑계라도 하고 날짜를 물려서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거든 조용히 나를 보고서, 나는 내일 어떠어떠한 일로 어디를 떠나가오 하고 말 한마디만 하였으면 오죽이나 정다울까? 정답기도 하거니와 도리상으로 말하더라도 명색이 그래도 내가 저의…… 그러나 그 사람은 내 얼굴을 보지 아니하고 떠나가고 섭섭한 마음이 없는 것이지.
대체로 말하면 여편네라 하는 것은 사나이보다 상냥하여서 정이 더한 법인데, 이렇듯 범연한 것을 보면 나를 사랑치 아니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설마 그 사람이 나를 사랑치 아니할 리가 있나? 결단코 그럴 리는 만무하지. 그러나 내가 저를 사랑하는 것같이 저는 나를 사랑하지 못한 모양이야.
대체 그 사람의 성질이 원래 냉담(冷淡)하여, 그런 고로 여편네다운 데가 적어 그 까닭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 같이 정답지 못하고 범연한 데가 많은 것이야. 아잇적부터 그런 성품은 있는 것 같아도 지금같이 심하지는 아니한 줄 아는데,
가령 말하면 어렸을 때에는 범연하다가도 장성하여지면 점점 정다워져야 할 터인데 그렇지가 못하니 웬일인고? 점점 점잖아지니까 겸연쩍고 부끄러워 그리하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의심스러워, 의심 아니할 수가 없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비유하여 보면 거의…… 거의가 아니라 전혀 빠져 있는 모양이야. 내가 내 생각을 하여도 어찌하여서 이다지 빠졌는지 모르겠어. 이렇듯 나는 자기를 사랑하니 그 마음을 받더라도 조금은 정다이 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를 못하고 어떠한 때는 아주 타인 대접하듯 하지. 오늘 일로만 말을 하더라도 이럴 수가 있나?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의 정분이라 할까? 나는 그 사람을 너무도 깊이 사랑하는 까닭으로 이런 일을 당한 때는 더 미워 못 견디겠지? 지금 이 자리에 있으면 좀 때려라도 주겠네.
어찌하면 이럴 수가 있나? 편지에다가 이런 말을 모두 써서 가서 있는 곳으로 부칠까 보다.
아서라, 소위는 생각하면 좀 나무라도 가하지마는 성한 몸으로 가서 있는 것도 아니오, 병중으로 있는 사람을 걱정시키는 것도 불가하다.
내가 생각하여도 어떠한 때는 너무 생각을 하여서 신경과민증이 없는 것은 아니야. 그러기에 그 사람이 항상 말하기를, 나더러 자격지심이 많다고 하지마는, 내가 정말 자격지심이 있는지 혹은 그 사람이 정이 두텁지 못하여서 그러한지 이것은 한 의문이다. 그리하고 내가 또 한 가지 생각하는 일이 있지, 그 사람이 나에게 하는 것이 서어할 때마다 나를 업수이 여겨서 그리하나 하는 생각이 나지. 나는 이 집에 붙어 있는 사람이라, 이를 터이면 속담에 데릴사위라 하니까, 나를 업수이 여기는가 하는 생각이 일상 있어…… 아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만일 나를 데릴사위라고 업수이 여길 것 같으면 처음부터 사위로 정할 리가 만무하지. 그러하기로 항상 그 사람에게 핀잔을 먹지. 조금이라도 그 눈치로 말을 하면 그 사람은 대단히 노여워하는 것을 보아도 나를 저의 집 데릴사위라고 하여서 멸시하지 않는 일은 분명하다. 스스로 내가 내 생각을 하여도 자격지심으로 그러한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어리석다. 그러나 만일 저 사람의 마음속에 추호(秋毫)만치라도 나를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보이면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딸이 아내가 되었을지라도 나는 그 인연 끊어버리고 말 터이야. 사나이 자식으로 행동을 결백하게 하지. 나는 애정에 사로잡힌 자는 되었을지언정 결단코 애정의 노예가 될 마음은 아직 없다. 만일 그 인연을 끊고 보면 혹시 나는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보고 싶은 마음에 말라 죽을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죽는 데까지는 이르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아마 실성(失性)은 될 듯하다.
응, 미치더라도 관계치 아니하다. 내 몸은 어느 지경에 이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고 인연은 끊어버릴 터이야. 사나이 자식이 그렇듯 비루한 꼴을 보고야 그 집에 어찌 붙어 있을 수가 있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런 생각은 모두 나의 자격지심인지, 그렇게 영리한 사람으로 그러한 마음을 조금인들 먹을 이치가 있나? 그 마음이 없는 줄은 나도 모르지 아니하지마는 다만 나에게 향하여서 내 마음같이 정답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하는 것이 다 냉담하여서 설면하단 말이야. 설면한 고로 정답지 못하지. 나에게 대한 애정이 그와 같이 설면한 마음을 이기도록 정이 들지 못하였는지, 혹은 원래도 설면한 성미를 가진 사람의 애정은 이러한 것인지, 이러한 일은 크게 연구할 문제로다.)

수일은 항상 마음에 만족치 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이 연구하나, 그러나 일찍이 해석하여 얻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금일은 이 문제를 어찌 해석하였으리요. 그 이튿날 오후에 이르러 평양으로부터 우체로 편지 한 장이 이수일의 수중에 떨어지나, 다만 한 장 엽서(葉書)로 길에서 무사히 평양까지 도달함과 머무르고 있는 여관의 통호수를 통기함에 지나지 못하였으며, 편지에는 순애의 필적(筆蹟)이 씌었더라.

수일은 편지를 받아 읽기를 다함에 홀연 두 손으로 쪼각쪼각이 찢어서 방안 한구석으로 내던진다. 이때에 만일 순애가 그 앞에 있었던들 이유를 변명하기 능하였으리니, 그 여자가 친히 또는 정다이 발명하는 말에는 아무리 크게 노기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수일의 마음은 태양빛에 얼음 녹듯 하였을 터이다.

수일이는 순애의 앞에서는 노여움과 한과 근심을 모두 잊어버리고 다만 화락한 마음만 있는 터이라. 그러나 지금은 그와 같이 어여쁜 얼굴을 보지 못함을 심히 낙망(落望)되어 있거늘, 그 위에 더욱 정답지 못한 편지를 보았으며 또는 변명할 사람도 있지 아니한 고로 수일의 노기는 마른 섶에 불 일어나듯 하여, 화염(火炎)이 그칠 바를 알지 못함과 같도다.

이날 저녁에 수일은 심택과 한가지로 석반(夕飯)을 파하고 등잔불 아래 옹서(翁婚) 두 사람이 서로 대하여 적적히 앉아 있으니, 심택은 홀로 심심타 하여서 수일을 머무르게 하여 적막함을 잊고자 함이라. 그러나 수일은 묵묵히 앉아서 유쾌치 못하여 하는 기색이 외양에 나타난다. 심택은 한참이나 수일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어디가 아프냐? 어찌하여서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느냐?』

『네, 가슴이 조금 아픈 것 같애요?』

『웅, 가슴이 아프다니, 그래서야 쓸 수가 있나? 대단히 아프냐?』

『아니올시다. 대단치는 않습니다. 인제 곧 낫겠지요.』

『그러면 차나 한 잔 달여 먹지.』

『네, 있다가 달여 먹습지요.』

비록 나의 마음속으로는 분한(憤恨)이 있을지라도 그 분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것은 심히 온당치 못한 일이라 하여, 스스로 억제하여 기색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나의 거처하는 방으로 내려가서 마음을 상케 하느니보다 사람과 서로 향하여 근심을 수작 사이에 잊음만 같지 못하다 생각하였는 고로, 마음을 억제하여 천연한 태도를 보이고자 하나, 조금 하면 마음은 빈 공중으로 날아가고 심택의 하는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아니한다.

오늘 오는 편지에 만일 정이 가득한 마음으로 자세한 사정을 써서 보내었던들 나의 마음이 얼마큼 기꺼웠으리요? 오히려 한 집안에서 항상 얼굴을 대하고 있느니보다 떠나 있어서 서로 그리워하는 것도 즐거움이 깊을 것이요, 말없이 떠나감을 원망하는 마음도 가히 잊어버리고, 주야로 그 편지만 가지고 얼굴을 보지 못하는 대신으로 자주 내어 보아서 기념함도 즐거울지라.

그 여자는 급자기 떠나가되 말 한마디 고함이 없고 경솔히 한 일을 내가 필연 분노할 줄은 자기도 모르지 아니하리니, 그것을 알면 다만 한 마디라도 편지 속에 정다운 말을 써서 내 마음으로 하여금 위로케 하여 주지 아니하며,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에 얼마나 기꺼워 들릴 줄도 필연 자세히 알겠거늘,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이 어찌하여 그 일을 하지 아니하는고? 이렇듯 정이 두텁지 못한 세상에서 저 여자는 방황하는가? 이상한 일이로다, 이상한 일이로다 하며 수일의 가슴은 다시 산란하여 공중에서 방황하는데, 홀연 옆에 앉아 있던 심택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내 정신으로 다시 돌아왔더라.

『너에게 할 말이 조금 있는데 말하기가 어려운 일이라.』

웃는 것도 아니오, 성난 것도 아니오, 비웃는 모양 같은 얼굴로 말을 얼른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심택의 거동은 평일에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얼굴과 같이 수일은 깨달았더라.

『녜, 무슨 말씀이오니까?』

심택은 반백이 넘은 긴 수염을 두 손으로 썩썩 부비어 아래로 쓰다듬으며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는 모양이라.

『네 일신상에 대한 일로 하여서…….』

하며 간신히 그 말을 할뿐이요, 다시 주저하며 다만 수염만 가지고 괴로이 쓰다듬는다.

『너도 여러 해 열심히 하여서 올에는 졸업이 될 터이지.』

수일이는 별안간 공손한 마음으로 단정히 꿇어앉는다.

『그러니까 인제는 나도 한숨을 돌렸다. 너의 돌아가신 아버지께 대해서도 은혜의 만분 일이나 아마 갚았을 듯하다. 그런 고로 너도 더욱더욱 정신을 차려서 더욱 공부를 하여야 아니하겠느냐? 이 학교를 졸업한 후라도 더 공부를 시켜서 이 세상에서 상당한 지위를 얻도록 하지 아니하면 나의 본의가 아니다. 그런 고로 이후로는 일본으로든지 서양으로든지 유학(留學)을 보내어서 유명한 인물을 만들어야 할 터이니, 그러면 지금도 내가 몇 해 발분망식하여서 네 일을 보아주어야 할 터이로구나, 응? 아니 그러하냐.』

이 말을 들은 수일은 철승(鐵繩)으로 어깨를 결박한 것 같이 몸이 묶여 옴을 깨닫겠으며 심중으로는 괴로운 기운이 솟아 나온다. 그 은혜의 과대(過大)함을 인하여 다시 평일에 지낸 일을 살펴 생각한다.

『녜, 진정 말씀이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금에 입으로는 감사한 말씀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일에 저의 선친은 얼마나 되는 은혜를 끼쳐 주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아무리 하여도 이렇듯 후하게 은혜를 갚을 수는 아마 없는 듯하오이다. 지금 와서는 전일 선친의 일은 어찌하였든지 저는 저대로 이 은혜를 어느 때든지 갚으려고 생각합니다. 선친이 돌아가신 후에 만일 여기서 저를 데려다가 길러주시지 아니하였드면, 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 있을는지 모를 것을…… 지금 그 생각을 하면 이 세상에서 저와 같이 다행한 신세도 없는 줄 압니다.』

『네가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나 역시 신이 난다. 그러나 한 가지 너에게 청을 할 일이 있는데 들어주겠느냐?』

『무슨 일이온지 제 힘에 자랄 만한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수일은 이와 같이 대답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위태히 아는 바이 없지 못함은 아니로되, 사람이라 하는 것이 이러한 말을 할 때에는 열에 아홉은 능히 허락지 못할 일을 강잉하여 허락을 받고자 하여 먼저 시험하여 보는 말이라.

『다른 일 아니라 순애의 일인데…… 순애를 시집을 보내려고 해서 그 의논을…….』

그 말을 듣더니 수일의 놀라는 모양은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할러라. 그러나 수일은 황망히 천연히 태도를 어지르지 아니하고 묵묵하여 말이 없다.

『이 일에 대하여서는 나도 여러 가지로 생각하여 보았지마는 나도 크게 생각하는 바이 있어서 그러한 일을 하였다. 너도 지금부터 며칠 아니 되면 학교를 졸업할 터이니까, 졸업하거든 사오 년 동안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줄 터이니 유학해서 졸업한 후 귀국하거든 너는 다시 극가한 규수(閨秀)를 택하여서 장가를 보내 줄 터이니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너의 목숨을 달라고 핍박하면 그때에 사람의 마음은 어찌 하리요? 대경실색한 수일의 얼굴은 다만 심택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심택은 심히 괴로운 모양으로 다만 수염만 부비고 있다.

『전일에는 내가 너에게 금석같이 약속을 하여 놓고 지금 와서 다시 딴소리를 하는 것은 나 역시 무안하여 할 말이 없지마는, 이 일에 대하여서는 내가 몇 달 며칠을 두고 깊이 생각한 일이 있는 고로 조금이라도 네게 당하여서는 해롭게 하지 아니할 터이니 털끝만치라도 염려 말고 순애는 다른 곳으로 시집 보내게 하여라, 응?』

수일의 대답하기를 한참 동안이나 기다리나 숨 한 번 크게 쉬지 아니하고 묵묵히 앉아 있는 고로 심택은 무료한 마음을 억제치 못하여 어름어름하다가,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잘못 알아들어서는 내가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다. 그 애를 다른 데로 시집 보낸다고 너와 나와 사이가 전만 못하여질 바도 없고, 너는 또 일본으로 유학을 시켜줄 터이니 조금치라도 나쁘게 듣지는 말아라.

이왕 약속한 순애를 이제 별안간에 다른 데로 보낸다 하니까 아마 너는 부족히 생각할 듯하다는, 결단코 그런 것이 아니니 네가 시원스럽게 쾌히 허락하여야지…… 또 너로 말을 하더라도 공부를 잘하여서 큰 사람 되기가 네 원이 아니냐? 그러니까 네 본뜻만 여의하게 성취하면 제일이지, 순애하고 내외가 되고 안되는 것이야 무슨 크게 관계된 일이 있겠느냐? 너도 가만히 생각하여 보아라. 그렇지 않으냐? 그러나 이것은 내 말이니까 너는 혹시 듣고자 하지 않을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네가 아마 얼른 허락을 하지 아니할 듯하기에 너더러 청할 것이 있다고 한 말이다. 너를 어렸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돌아보아 주었거니와, 오늘 이후로도 네가 성인(成人) 할 때까지는 도와줄 터이니 그 은혜를 네가 갚으려거든 지금 내 말을 허락하여 다고.』

수일은 다문 입술이 떨리며 눈에는 은근히 눈물을 머금으며 평일과 같이 내고자 하는 목소리는 자연히 떨려 전일 수일의 낭랑한 음성이 아니라,

『그리하면 아무리 하여도 전일 언약은 파의하겠다 하시는 말씀이오니까?』

『아니다, 꼭 이전 혼약을 파의하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대체 네 마음은 어떠냐? 아무리 은인의 청이라도 듣지 아니하고 또는 자기의 행실에 흠점이 되더라도 너는 관계하지 아니하고 하늘이 두 쪽에 나더라도 순애는 남을 주지 못하겠다 하는 말이냐?』

『……….』

『설마 그렇지 않지? 너인들 요량이 없겠니?……』

입을 다물고 말을 이르지 못하는 수일의 가슴에는 경우 없고, 내 욕심만 채우는 소리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책망할 일과 힐문할 일과 설명할 일이 여러 가지로 흉중에서 비등(沸騰)하건마는 심택은 수일의 하늘 같은 은인이라, 사실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물론하고 어떠한 일에 대하든지 그 말은 능히 거역치 못하리라 생각였으므로 피가 흐르도록 혀를 깨물고 말은 하지 아니하리라 결심하였더라.

수일은 또 한 가지를 생각한다. 은인은 은혜를 착가(着枷)와 같이 사용하여 이와 같이 핍박하나 나는 이러한 착가로 하여서는 몸을 굴릴지언정 저 노옹(老翁)은 어떠한 날카로운 장기로써 나와 순애의 애정을 베고자 하는고?

순애가 나에게 향한 애정이, 내가 순애에게 향한 사랑과 같이 두텁지는 못하다 하나 나를 헌신(弊履)같이 버릴 지경에 이르도록은 순애가 나에게 향한 정이 엷지 아니한지라, 저 순애만 나를 멀리 버리지 아니하면 착가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 은인의 무거운 말도 두려울 것이 없을지니, 다만 이제 믿고 바랄 것은 순애의 마음 하나뿐이로다. 수일은 이와 같이 순애의 마음을 생각하고 심택에게 대한 분기는 힘써 풀고자 한다.

나는 항상 순애의 내게 향한 애정이 두텁지 못함을 의심하였더니, 이와 같은 기회는 가히 순애가 나를 사랑하는 힘이 얼마나 됨을 족히 시험하리로다.

『다른 데로 시집을 보내겠다고 하시니 그러면 어딘지 대강 유의하여 두신 데가 있습니까?』

『응, 있기는 한 군데가 있으나 아직 완정한 일은 아니로되 동대문 안 배호개(東大門內梨峴) 근처에 금산은행(金山銀行)이라 하는 은행이 있는데 그 은행은 그 근처에 사는 김형순(金瑩淳)이라고 유명한 재산가로, 자기 홀로 세운 은행인데, 그 김형순이가 순애를 자부로 삼겠다고 통혼을 하기에…….』

김형순의 아들이라 하니 이는 곧 지나간 정월 십오일에 다동 김소사 집에서 놀이할 때에 만나 보던 오백원짜리 금강석 반지 끼었던 김중배로다, 하고 수일은 그윽히 조소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그러나 또는 의외 이 사람이 나타남을 놀래었으나 다시 도리어 수일은 웃는다. 이는 결단코 의외라 말하지 못할지라.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눈있고 지각 있는 사람이면 뉘라서 우리 순애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치 아니하는 자 있으리요? 그러나 다만 의심나는 것은 심택의 마음이로다.

내가 십여 세 때부터 십여 년 동안에 이르기까지 언약하였던 혼인을 무슨 얼굴을 들고 파의하겠다 말하는고? 나이 점점 많아 노망이 났는가, 혹은 실성을 하였는가? 순애를 앗고자 하는 사람은 금강석이다. 금강석이 아무리 세계에 유명한 보배라 할지라도 순애를 다투어 승부를 결단하는 마당에는 보배되지 못하는 수일의 힘을 능히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피하여 돌아가리라 생각하매 적이 마음이 위로된다.

『녜, 김형순이요? 네 저도 들었습니다. 성안·성밖에 유명한 재산가인 줄도 압니다. 돈 많은 사람인 줄 알아요.』

수일의 이 말 한마디에 심택의 얼굴은 술 취한 사람같이 붉어진다.

『이번 일은 나도 한두 번 생각하여 본 일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이리도 생각하여 보았고, 저리도 생각하여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까 내 말대로 하는 편이 제일일 듯하더라. 전일에 너와 굳게 맺은 언약을 지금 와서 왜 변하겠느냐? 나는 너를 아들겸 사위로 알고 일후에는 우리 내외가 양자하지 않고 외손 봉사 시키려고까지 마음을 먹고 있었던 터인데 어찌하여서 다른 데로 출가를 시키겠나마는, 본래 우리 집안은 강근지척이 없고 너의 집안으로 말하여도 역시 고단하니 사람의 집안이 항상 이렇게 무사하란 법이 어디 있느냐? 만일 일조에 무슨 일이 생겨나면 친척의 도와주는 힘이 적지 아니한데, 저 김형순의 집안으로 말하면 재산도 있거니와 친척도 번다하고, 또는 이 세상에서 어디를 나서든지 그 사람은 조금이라도 괄세치 못하는구나. 그리고 그 사람은 꼭 우리 집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이 기회를 잃지 말고 쾌히 허락하는 것이 좋을 듯하며 그 사람과 친척의 의(義)를 맺어놓으면 후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손 빌기도 쉽지 아니하냐? 나는 이러한 생각으로 하는 말이니 너는 조금치라도 내 말을 그르게 알아들어서는 못쓴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욕을 취하여서 돈 많은 부자 사위를 얻고자 하여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너든지 순애든지 또는 늙은 우리 내외는지 모든 몸을 다 위하여서 이 생각이니까 너도 잘 생각하여 보아라. 나도 너와 부자간 같은 정리가 있는 고로 이와 같이 의논하는 것이니, 너도 이 늙은것의 말을 거역치 말고 들어야 옳지 않느냐? 내 소원은 네가 들어주고 네 소원은 내가 또 들어주마! 올에 너도 학교를 마치거든 밥 먹을 것을 죽으로 쑤어 먹더라도 너 하나만은 학비를 대어서 일본으로 유학을 시킬 터이니 이삼 년 후에 대학교 졸업장을 타가지고 돌아와서 내 마음을 기껍게 하여주려므나, 응?』

수일은 심택의 하는 말을 좇아서 능히 그 심사의 어떠함을 가히 촌탁(寸度)하리로다.

(심택의 천만언어(千萬言語)로 삼촌지설(三寸之舌)을 농락하여 마지 아니함은 이욕(利慾)이라 하는 글자를 가리우고자 함이라. 빈한한 사람은 간난을 능히 이기지 못하여 도둑질함은 이 세상에 혹시 있는 일이라. 그러나 간난치 아니하고도 오히려 도둑질을 차마 하고자 하느뇨? 나도 더러운 세상에 나왔는 고로 더러운 일은 스스로 알지 못하고, 혹은 더러운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더러운 행실을 짓는 일이 없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나 스스로 더러운 줄을 알고야 어찌 능히 더러운 일을 행하리요?
아내를 팔아서 외국으로 유학을 간다, 이것이 어찌 더러운 데도 가장 심한 자가 아니요, 이 세상도 더럽고 이 세상 사람도 비루한 줄 알았으나 나는 항상 우리 은인된 심택은 홀로 이 세상 더러운 풍속에 물들지 아니한 사람으로 믿고 의심치 아니하였더니, 꿈결같이 지낸 조그마한 은혜를 잊지 아니하고 무의탁한 외로운 아이를 데려다 기르던 그 마음은 가히 감사하리로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은가? 또는 나의 생각이 어리석은지. 연래로 믿고 있던 우리 은인도 이와 같이 나를 속이는가? 이제는 거세가 모두 더럽혔으니 슬퍼한들 이미 더럽힌 세상을 다시 어찌 하리요. 그러나 온 세상을 다 더럽힌 사람만 있을지언정 그중에 올연 독립한 우리 두 사람은 결단코 이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였으리로다.)

수일은 못 잊어하는 순애를 다시 생각한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록 죽는 것으로써 위협하더라도 굴하지 않을 것이요, 순애의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서양 어떠한 여황(女皇)의 머리 위에 장식한, 세계에 다시 쌍이 없다 하는 금강석으로 사고자 하여도 그 굳은 마음은 능히 움직이지 못할지니.
나와 저 여자 사이의 사랑은 진실로 진토(塵土) 중에 싸인 백옥과 같도다. 나는 이 세상에 더럽히지 아니한 한 사람을 취하여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잊어버리리로다.)

수일은 이와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위로하며 비록 심택의 의리 없고 간사한 말에 분한 마음은 한이 없으나 억지로 사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공손히 듣고 있을 따름이라.

『그러면 이런 일을 순애도 이미 알았습니까?』

『응, 자세히는 몰라도 대강은 아마 어렴풋이 아나 보더라.』

『그런데 아직 이 일을 순애하고는 의논을 못하셨……』

『잠깐 순애더러 물어보기는 하였지마는…….』

『그래서, 물어보시니까 대답이 무엇이래요?』

『응, 순애야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느냐? 아버지 어머니 하시는 대로 따라가지요, 하면서 별로 싫어하는 모양은 없더라.』

결단코 진정의 말이 아니라 거짓 꾸며대는 말인 줄로 알되, 자연히 그 말 한마디에 수일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그러니까 순애도 그 일에 대하여서 허락을 하였다는 말씀이옵니까?』

『아무렴, 허락하고 여부가 있느냐? 그러하니 너도 쾌락을 하려므나. 잠깐 생각하면 내 말이 억지 말인 듯하나, 실상인즉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지금 이야기한 말도 네가 자세히 알아들었겠지, 응?』

『녜…….』

『내 말을 알아들었거든 너도 쾌히 허락해야지. 녜, 녜, 녜, 대답만 해서야 쓸 데가 있느냐, 응? 수일아.』

『녜.』

『그러면 너도 허락하겠다 하는 말이냐? 그러면 나도 참 인제는 안심을 하겠다. 자세한 이야기는 종차 또다시 말할 터이니 이번에 네가 이렇게 내 청을 들어주니 나도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 허허허.』

『…………….』


저작권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