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9장
남대문 정거장 한가운데 기둥에 걸려 있는 괘종은 오후 네 시를 가리켰더라. 부산으로 향하는 야행열차(夜行列車)는 이미 차실마다 승객을 가득히 실었는데, 기관차는 검은 연기를 하며 객차·화차를 합하여 수십여 채를 연결하였는데, 만리재(萬里峴) 뒷산으로 넘어가는 석양의 붉은 햇발은 유리창에 영롱히 비치어 화염이 일어나는 듯하며, 이삼 인의 역부(驛夫)와 차장(車掌)은 아래위로 왕래하며 뒤떨어져 있는 승객을 어서 타라 재촉하는 소리도 귀 밖으로 듣고, 대답보(大踏步)로 천천히 나가는 서양사람은 맥주 광고의 그림 같은 큰 배를 앞으로 내밀고, 한 손에는 손가방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치마 뒷자락을 추켜잡고 가는 서양부인과 한가지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우리 탈 자리야 설마 없으랴 하는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말로 무엇이라 지껄이며 지나간 후, 뒤미쳐 시골 여자 한 사람은 기차를 놓칠까 겁이 나서 급한 걸음으로 궁둥이만 휘두르면서 머리 위에는 봇짐을 이고, 등에는 삼사 세 먹은 어린아이를 업고 어디로 오르면 좋을는지 몰라 창황망조하다가 차장의 인도를 입어 자리를 정한 후에야 비로소 겁나던 가슴을 진정하였는데, 그 뒤로 오십여 세나 되어 보이는 시골 노인 한 사람도 콧물을 흘리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역시 오를 곳을 알지 못하여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하는 것을 역부에게 끌려 차 안으로 들여보내고 밖으로 문을 탁 닫치매 두루마기 자락이 문에 끼어 앞으로 가려면 뒤에서 잡아당기고 또 가려면 잡아당기는 고로 노인은 겁이 나서 고개를 좌우로 돌려 보는 모양은 아직도 경성을 멀리 떠나지 아니하였으되 이미 여행의 곤란함을 깨달았더라.
다섯 사람이 함께 모여 자리를 정한 소년 선사들은 중등실(中等室) 한편에 있는데 모두 걸터앉았고, 그중에 멀리 가려고 행리(行李)를 차린 신사는 한 사람뿐이요, 그 외의 네 사람은 모두 한 사람을 전송코자 영등포까지라도 가는 모양이라. 두루마기 입은 사람도 있고 양복한 사람도 있으며, 그중의 한 사람만 프록코트를 입었는데 옆에 놓였던 가방과 단장·우산 등물을 머리 위 탁자에 얹고 다시 걸터앉더니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좌우를 이윽히 내다보더니 다시 쪽빛같이 맑게 개인 가을 하늘을 치어다보며,
『어, 참 일기도 좋다. 이런 때는 밤에 타는 기차가 더 운치가 있어.』
『비 한 줄기 쏟아지는 것도 한 운치가 될지 모르지. 그렇지 아니한가, 응? 조병권.』
옥색 명주 두루마기 입은 사람은 이렇듯 말을 하고 빙그레 웃는다.
조병권(曺秉權)이라 하는 사람은 검은 모자 두루마기를 입고 코 아래에는 팔자형(八字型)으로 수염을 뻗친 사람이라. 조병권이가 미처 대답치 아니하여 양복 입은 신장우(申章雨)라 하는 사람은 젊은 나이로 목소리는 심히 노성하였는데, 노성한 목소리가 아니라 원래 목소리가 잠기었더라. 입밖에 간신히 나오는 쉰 목소리로,
『여보게, 조병권, 비 한 줄기가 오는 것도 운치라지. 그 핑계를 하여가지고 무슨 지저귀를 또 하려고 그러나.』
『아닐쎄, 여보게, 조병권이 속은 내가 유리 붙이고 들여다보는 듯이 알고 있네.』
『여보게, 자네들은 공연히 남을 가지고 별명을 짓지 말게.』
하며 조병권은 변명하듯이 말을 한다. 지금까지 교의에 걸터앉아 묵묵히 있던 흰 옥양목 두루마기 입은 신사는 다시 자리를 고쳐앉으며,
『여보게 신(申), 자네하고 나하고는 오늘 백군(白君)을 전송 오는 것이 못되고 조병권이하고 유정상(劉正相)이 두 사람을 바래다주는 셈쯤 되었네. 저 사람들은 은행지점으로 영등포 가서 있으니까, 거기 아마 소일거리로 색다른 친구가 있나 보데. 그래서 요전부터 나더러도 한 번 놀러 가자고 하더니 오늘은 겸두겸두해서 우리가 끌려오는 모양 아닌가?』
『그것은 다 무슨 소리들인가? 자네들은 저 사람들에게 속아오느니 끌려오느니 하면, 나는 자네들 네 사람에게 팔려가는 셈일세 그려. 그러기에 내가 아까부터 영등포까지 멀리 전별할 것이 없다고 해도 지성껏 같이 간다 하기에 대단히 불안스럽고 고맙게 알았더니, 인제 보니까 나를 전송한다는 것은 한 빙잣거리가 된 것 아닌가. 예끼, 이 사람들…… 전에 우리가 학교에 함께 있을 때부터도 자네들은 그런 짓을 더러 하더니, 이후에도 나는 자네들을 위하여서 큰 걱정일세. 사나이가 혹시 있는 일이지마는 아무쪼록 삼가하게.』
이와 같이 점잖이 충고하는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사년 전에 이수일이가 친형같이 알고 한 학교 한 학년에 다니던 백낙관(白樂觀)이라.
백낙관은 경성서 학교를 마친 후에 관비 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일본 동경에 건너가서 명치대학 법과(明治大學 法科)를 졸업하고 돌아온 후 즉시 경상남도 진주 군수(郡守)를 피임하여 이날 부임(赴任)하는 길이라.
백낙관은 그 연령(年齡)과 원지(遠志)와 성실함은 가히 당시의 군자라 일컬을지라. 그런고로 전일 학교에 있을 때에도 여러 학생 중에 노실(老實)한 청년으로 공경을 받던 터이라.
『이번에 내가 떠나가면 자네들을 종종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니 아무쪼록 자기의 몸을 자기가 돌아보아 낭패스러운 소문이 내 귀에 들리지 않도록 하여 주게.』
네 사람은 한참 동안을 재미있게 지껄이다 이 말 한 마디에 입을 봉한 듯이 먹먹한데, 다만 자주 피우는 궐련 연기만 살닫듯 하는 기차의 창문으로 좇아 바람에 불려 날아가는 구름같이 한강 철교 위에서 흐트러질 뿐이라.
유정상이라 하는 사람은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며,
『그런 것이 아니라 아까 남대문 정거장에서 항상 내가 유의하던 여편네 빚장이로 유명한 미인을 만나보았는데, 그 계집은 언제 보든지 이뻐. 오늘은 더구나 단장을 잘하고 바로 외교관의 부인이나 되는 듯이 양복을 떨뜨리고 나왔데그려. 어디 무슨 좋은 먹을자비가 또 생겼는지 그년에게 물렸다가는 참 견디지 못하지. 그년의 돈을 쓰고야 동두철신이면 견디어낼 수 있나?』
옥양목 두루마기 입은 사람은,
『허허, 그것 좀 보았더면 좋은 것을 못 보았네그려. 나도 그 계집의 이름은 이미 들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
하며 말을 연속하려 하는 것을 조병권은 가로채어 말을 한다.
『옳지 옳지,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안숙(安淑)이가 퇴학당한 것도 그 계집 때문이 아닌가? 그 계집이 아주 부자라지? 몸에도 모두 금투성이를 하고 다닌다지? 얼굴도 어여쁘거니와 빚놓이에는 아주 이골이 나서 채권 독촉하는 데는 물이 못 난다는걸. 여보게, 유정상이, 자네도 그 내력을 알면서 위태하게 그 계집에게 달려들려고 그러나?』
『아니야, 그 계집은 그렇지 아니한데 뒤에서 서방이 있던지 누가 있어서 은근히 자꾸 꼬드겨 주던 모양이데.』
하며 신상우라 하는 사람은 이러한 말을 한다.
백낙관은 묵묵히 앉아서 여러 사람이 하는 말을 온당치 못하여 여기는 모양인데, 옥양목 두루마기 입은 사람은 교의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여보게, 그 계집의 내력은 자네들은 자세히 아직 모르네. 그 계집의 내력을 말할 것 같으면 훌륭한 소설 하나 보는 셈이지. 그 계집은 서방이 있나니, 서방도 젊지 않고 늙은 것인데, 이전에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무전대금업(無典貸金業)으로 유명한 서양사람에 찌레만이라는 놈이 없었나? 그 서양사람이 그 계집의 서방이라네. 그놈이 본래 빈손으로 조선 나왔다가 그 못된 짓을 하여서 지금은 누거만(累巨萬)원의 재산을 모았는데, 남의 못할 일도 많이 하고 그 중에도 큰 음물(淫物)이라, 빚 받으러 다니다가는 남의 유부녀·처녀 할 것 없이 함부로 통간을 하여 그놈으로 하여서 몸을 버린 여편네가 적지 아니한데, 그 계집도 그 찌레만의 손에 걸렸드라네. 저의 부모는 본대 가문이 과히 상없지 않은 사람이나, 구차하여서 헐 수 없이 그 서양놈의 돈을 썼는가보데. 그래서 자연이 왕래가 되니까 그 음특한 놈이 어느 곁에 그 집 딸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서 욕심이 불같이 나서 못된 마음을 먹고는 그 구차한 사람에게 돈 재촉을 심히 하지 않고 기한이 되어서 갚지 못하더라도 조르는 법도 없고 오히려 돈을 더 취하여 주어가며 특별히 정답게 하니까, 그 부모는 그놈의 흉한 마음은 조금도 알지 못하고 세상에 없이 고마운 사람으로만 알았네그려. 이렇듯 얼마 동안을 지내다가, 하루 그 서양사람의 말이, 그대의 따님이 대단히 재주도 있고 사람이 영리하니 내게 빌리면 여자에 상당한 공부를 시켜주마고 친절한 말로 권하니까, 그 부모는 본래부터 그 서양사람에게 신세를 졌을 뿐 아니라 항상 고맙게 하는 뜻을 감사히 알던 터에, 가령 그 마음이 음흉한 줄을 알더라도 거절하기가 대단히 힘들 터인데, 그때에 그 서양사람의 나이는 벌써 육십에 가까운 늙은 사람이요, 그 딸은 그때 열육칠 세 밖에 안 된 어린 것인 고로 설마 못된 생각이야 있으랴 하고 허락을 하였든가 보데. 그 후부터 저의 집에다가 데려다 두고 영어도 가르치고 방안 심부름도 시키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어느 결에 둘이 이상한 관계를 맺어서 첩과 같이 되어 버렸네 그려.』
묵묵히 앉아서 듣고 있던 백낙관은 고개를 끄덱끄덱 하며,
『흥흥, 계집이라 하는 것은 모두 그런 물건이야.』
조병권은 홀연 백낙관의 얼굴을 치어다보며,
『이것 참 별일일세 그려. 자네도 계집 이야기에 참례할 때가 다 있나, 허허허,』
이때에 기차는 속력을 다하여 급히 달리는데 바퀴 구르는 소리는 뇌성벽력 같아여 말소리가 자세히 들리지 아니한다. 한 사람은 이야기를 듣느라고 귀를 기울이나 요란한 기차 소리에 자세히 들리지 아니한다.
『압다, 여보게, 크게 좀 이야기하게. 도무지 아니 들리니.』
유정성은 백낙관의 무릎을 탁 치며,
『여보게, 백낙관, 아까 정거장에서 받은 맥주나 한 병 빼서 먹세. 목이 컬컬하니.』
곱뿌에 가득히 따른 맥주를 위의 거품을 훅 불어버리고 한입에 마신 후 유정상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계집아이 이름은 최만경(崔萬慶)이라 하는데, 그때 서양사람에게 속아서 몸을 더럽힌 후에는 저도 마음에 부끄럽고 분하여서 저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나, 서양사람이 허락을 아니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있다가 그럭저럭 서로 정이 들었는지 그 후에는 저의 부모가 오라고 하여도 아니오네 그려. 그 후로 차차 그 부모가 서양사람과 자기 딸 사이에 관계가 있는 모양을 알았든지 펄펄 뛰면서 딸자식 하나 버렸다고 야단을 치고 서양사람에게 가서 담판을 크게 일으키던가 보데그려. 그러나 그 서양놈이 그까짓 담판을 무서워할 리가 있나? 이왕 그 지경이 되었으니 아주 본마누라를 삼을 터이니 달라고 하나 듣지 아니하고, 그 딸더러 가자고 한즉 듣지 아니하고, 그 딸 역시 울며불며 이위 몸을 버렸으니 제발 허락하여 달라 하니까 제 부모는 더욱 분이 나서 딸자식 하나로 하여서 가문을 더럽혔느니, 자식이 아니니, 의절을 하느니 하고 야단을 한들 이미 변한 마음이 다시 회복할 수 있나? 그 후로는 그 부모가 다만 딸 하나를 내버린 자식으로 알고 내버려 두었든가 보데. 그리노라니까, 만경이는 점점 그 서양사람의 총(寵)을 얻어서 내정외무(內政外務)를 모두 총찰하게 되었는데 만경이의 성질이 역시 인색하여서 자기 수중으로 기천금 기만금을 쓰지마는 저의 부모 집에는 엽전 한 푼, 오리 동록을 보태어주는 법이 없네그려. 그러니까 점점 그 서양사람이 마음에 맞아서 서로 잘근 정이 든 모양인데, 그 계집도 차차 그 취리하는 장사가 재미가 났던지 돈이 점점 늘어가니까 그 돈이 다 내 것이라고 욕심이 불같이 나서 부모보다 돈이 제일이라는 몰지각한 마음이 들었더라네.』
『어, 참 계집이란 것은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야.』
하며 백낙관은 미우간에 불쾌한 빛이 나타나며 말을 한다.
『그런데 워낙 성질이 민첩한 계집이라, 자연히 얼마 되지 아니하여도 빚놓이하는 속이 아주 환하여지니까 그 후에는 그 서양사람이 가지 아니하더라도 제가 모두 대신 재촉도 다니고 빚을 줄 만한 데는 제가 임의로 주기도 하는데, 재작년부터는 그 서양사람이 별안간에 중풍이 되어서 오늘날까지라도 몸을 쓰지 못하고 대소변까지 남의 손을 벌게 되어서 인제는 만경이가 저 혼자 돈을 가지고 좌지우지한다데. 그리고 저의 아버지는 작년에 죽었다는데, 무어 굶어서 죽었나 보데. 그러나 이내 그 딸은 다시 보지 아니하고 그 딸도 저의 아버지를 굶어 죽게 내버려 두었으니 어찌 사람의 정이라고 할 수가 있나? 그러나 그 계집은 돈맛이 여전하여서 늙은 서양 서방은 한편에 뉘어 두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취리를 하는데 그 계집의 별명이 양 빚장이라네. 나이는 지금 스물 하나나 그렇지 아니하면 갓 스물쯤 되었는데, 그저 상종하기는 썩 재미있지. 얼굴도 어여쁘고 목소리도 가늘고 정답고 싹싹하고 태도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숫보기 비슷도 하여 보여서 은전을 가지고 이것은 어떤 나라 훈장일까요 하고 묻기 쉬듯 하게 규중에 들어앉아 있는 여자같아 보여도, 돈 주고 표 받는 것과, 수형(手形)의 경위 아는 것과, 돈 재촉과 조를 때는 찌레만이가 어디를 당하겠나? 그때는 보기에 아주 매섭지. 나도 궐녀에게 두서너 번 빚에 졸려 보았지마는.』
또 한 사람은 옆에 앉았다가,
『그러면 지금까지 찌레만이라는 서양사람은 중풍이 되어서 누워 있단 말이야. 그런데 그 계집은 몸을 조수하고 있을 리가 있나? 뒷문은 열어놓아 둔 곳이 있을 터이지. 그렇지마는 남모르게 하는 것이 그 계집의 용한 수단이야.』
『수단 좋은 것도 탈이야.』
하며 유정상은 교의를 뒤로 기대어 비스듬히 드러 누으면서 껄껄 웃는다. 한 좌중이 모두 대소한다.
유정상은 고등학교 이년생 때부터 이미 중한 변리의 채무를 지고 독촉의 곤란을 매일 면치 못하는 몸이라.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채무에 경험이 없지 아니하되 다만 백낙관과 신장우 두 사람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한 번도 지내본 일이 없다. 기차는 노량진에 도착이 되었는데 이 일행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건너 교의에 앉아서 방청하고 어떤 상인 같은 사람이 웃어가며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다가, 기차가 정지하매 옆에 놓였던 가방을 집어 들고 차에 내린다. 잠시 기차 안에서는 이야기가 끊이었는데 백낙관은 고개를 드리우고 무삼 생각을 깊이 하는 모양이러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며 혼잣말과 같이 말을 한다.
『그 후에는 누구든지 이수일의 소식을 들은 사람이 혹시 있나?』
『응, 이수일이?』
하며 신장우는 다시 묻는다.
『내가 뉘게 들었든지 고리대금으로 빚놓이하는 사람의 집 서사(書士) 노릇을 한다든지, 무엇인지 한다고 하데.』
옆에 있던 또 한 사람은 깜짝 생각이 나는 듯이,
『옳지 옳지, 나도 그런 말을 들은 법해. 그러나 이수일이가 빚놓이를 능히 할까? 워낙 그 사람의 성질이 착하기만 하여서 남의 사정을 보기에 남의 피 긁는 영업을 한달 수 있다구?』
백낙관은 그 말이 내 마음에 있는 생각과 같다 하는 듯이 고개만 끄떡끄떡하며 오히려 아무 말이 없다.
유정상과 조병권은 한 학교에 다녔으되 학년이 같지 아니 하였는 고로 이수일과는 서로 친치 못한 터이다.
백낙관은 고개를 유리창 밖을 내다보며, 길게 한숨짓고,
『허허, 이수일이가 그 영업이야 할 리가 있나? 아마 헛소문인 게지. 그 사람은 천성이 인자하여서 남에게 동정을 많이 표하는 사람인데, 결단코 그러할 리가 없지. 아까운 사람을 갖다가, 불쌍한 일이지. 그만큼 재주 있고 마음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마 드물걸. 그 사람이 지금 있었드면…….』
하며 창연히 말을 마치지 못하고 다시 한숨을 지으며,
『그러나 자네들은 그 사람을 지금 만나보아도 아마 얼굴을 자세 알아보지 못하리.』
신장우는 와락 나앉으며,
『아, 여보게, 아무리 눈이 무디기로 그 사람이야 못 알아본단 말인가? 명랑하기가 샛별 같은 눈에 곱다란 이마전이며, 노 나는 그 사람의 옆 책상에 앉아서 모로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 꼭 비사맥이 얼굴 같으니, 학교에 와야 쓸데없는 장난도 아니 하고 고요히 앉아서 선생님의 강의하는 말만 귀담아 듣던 그 얼굴을 그 동안에 잊어버리겠나?』
백낙관은 천정을 향하여 껄껄 웃는다.
『허허, 자네가 나의 친형제 같은 친구를 이전 영웅에게 비하여 주니 대단히 고마우이. 그 회례로 이 술이나 한잔 먹게
하며 손에 들었던 곱뿌를 신장우를 주며 맥주를 가득히 따라준다. 신장우는 술잔을 받아 한입에 다 마시고,
『참말, 자네는 이수일이하고는 친형제보다 더하게 지냈으니까 오래 못 만나서 가끔 보고 싶겠네.』
『나는 실상으로 죽은 아우보다 살아 있는 이수일을 못 보아서 항상 마음이 서늘하여이.』
하며, 백낙관은 처연(棲然)한 기색으로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수그리고 무삼 생각인지 한참을 말이 없더니,
『여보게, 나는 아까 남대문 정거장에서 이상한 일을 보았네. 다른 것이 아니라 정거장에서 이수일이를 만났네그려, 정녕 그 사람이 이수일이야. 처음에는 정거장 이등객 대합실에서 사람 틈으로 잠깐 이수일이 얼굴을 보았는데 하도 반가와서 교의에서 벌떡 일어나서 찾으려고 하니까 벌써 사람 틈에 섞여서 도무지 볼 수 없더니, 나중에 차를 타고 앉아서 창밖으로 이리저리 내다 보느라니까 차는 방금 떠나려고 호각 부는 소리가 나는데 멀리서 기둥 옆에 붙어서서 나를 보고 모자를 두르며 작별하는 것 같데그려. 그래서 자세히 바라보니까 과연 그 사람이 이수일이데. 나를 보고 잘 가라고 모자를 흔들 때는 이수일이가 분명하지 않은가?』
영등포, 영등포, 에이도호, 에이도호 하고 역명(驛名)을 부르며 창밖으로 역부들이 외우고 지나가는데, 기차는 이미 영등포 정거장 플랫포옴에 닿았더라. 내리는 사람, 오르는 사람, 정거장 문 앞에서는 요령 흔드는 소리가 일시에 요란 복잡하여지며 그 사이로는 음식 파는 아이들이 목판을 언메고 창 옆으로 내왕하며,
『벤또 · 비루 · 마사무네 삼편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