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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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형님,

일부러 먼먼 길에 찾아오셨던 것도 황송하온데 또 이처럼 정다운 글까지 주시니 어떻게 감격하온지 무어라 여쭐 수 없습니다.

형님은 그저 내가 형님의 말씀을 귀 밖으로 듣는 듯이 섭섭하게 여기시지만 나는 참말이지 귀 밖으로 듣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내 눈앞에는 초연히 앉으셔서 수연한 빛을 띠시던 형님의 모양이 아른아른 보이고, 순순히 타이르고 민민히 책망하시던 것이 그저 귓속에 쟁쟁거립니다.

"형님, 왜 올라오셨어요?"

지난 여름, 형님께서 서울 오셨을 제 나는 형님을 모시고 성균관 앞 잔솔밭에 나가서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그건 왜 새삼스럽게 묻니? 너 데리러……."

형님의 말씀은 떨리었습니다.

"저를 데려다가는 뭘 하셔요?"

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흐리어 가는 형님의 낯을 뵈옵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뭘 하다니? 얘, 네가 실신을 했나 보다? 그래 내가 온 것이 글렀단 말이냐?"

형님은 너무도 안타까운 듯이 가슴을 치셨습니다.

"형님, 왜 그렇게 상심하셔요? 버려 두셔요. 제 하는 일을 버려 두셔요."

무어라 여쭈면 좋을는지 서두를 못 차린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글쎄 그게 무슨 일이냐? 응…… 내가 네 하는 일을 간섭할 권리가 무어냐마는 네가 이런 일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눈을 뜨고 보겠니? 집 떠난 일을 생각해야지? 집 떠난 일을…… 왜 내 말은 안 듣니? 네 친형이 아니라구 그러니?"

"아이구 형님두."

나는 형님의 말씀이 그치기 전에 형님 앞에 쓰러져 울었습니다.

"네 친형이 아니라구……."

이 말을 들을 때에 나는 어떻게 형님이 야속스러운지 알 수 없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여 엉엉 울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가자! 가서 죽식간에 먹으면서 좋은 때를 기다려서 다시 오려무나!"

"내가 말랐거든 네가 풍성풍성하거나 네가 없거든 내가 있거나…… 나는 무식한 놈이니 아무런들 상관 있니마는……."

"나두 그놈의 여편네와 애들만 아니면 너를 쫓아댕기면서 어깨가 부서지더라도(목도꾼이라는 뜻) 네 학비는 댈 터인데."

형님은 서울에 닷새 동안이나 계시는 때에 이러한 탄식을 하시면서 나를 달래고 꾸짖고 권하시다가 끝내 나를 못 데리고 내려가셨습니다.

"어서 내려가거라, 더 할 말 없구나."

형님은 떠나실 제 차에 올라간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한숨을 쉬셨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있다가,

"형님, 안녕히……."

하고 눈물이 핑그르르 돌아서 내려왔습니다. 그 뒤로 이날 이때까지 형님을 잊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글월을 주시고 노비까지 부치었으니 무어라 여쭐 바를 알 수 없습니다.

아우야, 날씨가 추워지니 네 생각이 더욱 간절쿠나! 삼각산 찬바람에 네 낯이 얼마나 텄니? 네 형수는 늘 네 이야기요 어린 용손(형님의 아들)이는 아재씨가 언제 오느냐고 매일 묻는다.

이 글을 내가 부르고 용손이가 쓴다. 그놈이 금년에 사학년인데 국문은 곧잘 쓴다.

어서 오너라. 노비 이십 원을 부치니 곧 오너라. 밥값 진 것이 있으면 내려와서 부치도록 하여라. 한꺼번에 부쳤으면 얼마나 좋겠니마는 그날 그날 빌어먹는 형세라 어디 그렇게 돼야지! 이것도 용손의 저금을 찾았다. 그놈이 저금을 찾는다면 엉엉 울던 것이 네게 보낸다고 하니 제가 달아가서 찾아 가지고 오는구나!

용손이 정을 생각하여 너는 오너라. 아재씨…… 서울 아재씨를 기다리는 용손이는 잠을 못 잔다. 매일 부두로 마중 간다고 야단이다.

형님,

나는 울었습니다.

"구두 곤칩시오."

"구두 약칠하시오." 하고 이골목 저골목으로 온종일 돌아다니다가 들어온 나는 형님의 글월과 우환 이십 원을 받고 울었습니다. 더구나 순진한 가슴으로 우러나오는 용손의 따뜻한 인간성에 어찌 눈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고집불통한 나는 그 따뜻한 정을 못 받습니다. 형님께서 노여워하실 것보다도 아주머님께서 섭섭해하실 것보다도 용손의 낙망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린 것이 아니라 뿍뿍 찢깁니다. 하지만 내 길을 걸어야 할 나는 또 형님의 뜻을 거역합니다.

나는 이때까지 이러한 길을 밟게 된 동기를 형님께 말씀치 않았사오나 이번에는 말씀하겠습니다. 서울 오셨을 때에 여쭈려고 하다가 여쭙는대도 별수가 없겠기에 그만 아무 말도 없이 있었고, 이번에도 여러 번 주저거리다가 드디어 이런 생활을 하게 된 동기를 여쭙기로 작정하였습니다.

2[편집]

형님,

내가 서울 온 지도 벌써 오 년이나 됩니다. 형님도 늘 말씀하시지만 집 떠나던 때의 기억은 지금도 머릿속에 있습니다. 진절머리가 나던 면소 서기를 집어치우고 나설 때에 내 맘은 여간 괴롭지 않았습니다. 그때에도 형님께서는 지금 모양으로 벌이를 좇아서 일로절로 다니시느라고 직접 보시지 못하였으니 모르시지만 늙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내게는 여간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나를 어떻게 기르셨습니까?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나 때문에 개가를 못 하시고 젊으나젊으신 청춘을 속절없이 늙히면서 당신의 모든 정력과 성의를 내 한몸에 부으셨습니다. 내가 훈채를 못 갚아서 글방에서 쫓기어났을 때 어머니께서는 당신 머리의 다리를 팔아 주시었고 명절은 되고 옷감이 없어서 쩔쩔 헤매시다가는 당신 젊어서 지어 두셨던 비단옷을 뜯어서 내 몸을 가리어 주던 기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그때에는 형님께서도 고향서 농사를 지으실 때라 그런 것 저런 것 다 보실 뿐만 아니라 겨울이 되면 목도리와 장갑을 사다 주시고 여름이 되면 아주머니 낳으신 베를 갖다가 내 옷을 지어 주던 것까지 생각납니다.

"우리 어머니의 아들이 저것뿐인데."

하고 형님은 어머니를 꼭 어머니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형님의 아버지의 누님이니 형님께는 고모가 되시는데 형님은 '고모'라 하지 않고 꼭 '어머니'라고 부르셨습니다.

"저 인갑(형님 함자)이는 내 오라비의 아들이나 내 아들같이 길렀다. 너는 꼭 친형같이 모셔라. 오라비(형님 아버지)와 올케(형님 어머니)가 죽은 뒤에 우리 오라비의 댓수를 이를 것은 저 인갑이 하나뿐이요, 네 아버지의 향화를 끊지 않을 것은 네 하나뿐이니 너희 둘이 친형제같이 지내어서 내가 죽은 뒤라도 의를 상치 말아라."

어머니께서도 늘 형님과 저를 불러 놓으시고 이런 훈계를 하셨습니다.

그렇듯 한 어머니의 감화 속에서 자라난 나는 형님을 잊지 못할 뿐만 아니라 친형이니 친형이 아니니 하는 생각도 못 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형님의 감화도 컸습니다. 아마 우리 어머니 다음으로 나를 사랑하신 이는 형님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열일곱 살에, 즉 면소 서기로 들어가던 해에 형님은 얼마 되지 않는 밭을 수재에 잃어버리고 아주머니와 용손이와 세 식구가 고향을 떠나셨습니다. 한번 생활의 안정을 잃은 형님은 정거장과 항구 바닥과 치도판을 쫓아다니시게 되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에서 십여 원 남짓한 월급과 어머니의 바느질 삯으로 근근이 지내었습니다. 이렇게 지내는 사이에 내 고통과 번민은 커졌습니다. 그리고 차츰 셈이 들면서부터 앞길이 자꾸 내다보였습니다. 늙어 가시는 어머니의 흐리어 가시는 눈과 떨리는 손은 드디어 바느질 삯전을 못 얻게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무 수입도 못 하게 된 뒤로 우리 생활은 십팔 원이 되는 내 월급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배고픈 설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를 장가두 못 보내구 내가 죽겠구나!"

이것이 이때 어머니의 큰 걱정이었으나 나는 그와 반대로 늙은 어머니에게 조밥이나마 배불리 대접지 못하는 것과 남들과 같이 서울로 공부 못 가는 것이 큰 고통이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문예를 즐기어서 그 변에 뜻을 두고 공부하였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옛적 이야기를 많이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감화라고 믿습니다.

함께 소학교와 글방에 다니던 친구들은 어느새 서울 어느 학교를 졸업하였다는 둥 동경 어느 대학에 입학하였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혈관의 피는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도 괴로운 것은 한때는 같은 글방에서 네냐 내냐 하던 친구들이 고향의 학교와 군청에 혹은 교사로 혹은 군 주사나리로 부임하여 면소에 출장을 나오면 옛정은 잊어버리고 배 내미는 꼴을 차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으로 그놈의 것을 꿀꺽꿀꺽 참고 나면 십년 감수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밖으로는 이러한 자극을 받고 안으로는 생활에 쪼들릴 제 어찌 젊으나젊은 내 가슴에 감정이 없겠습니까? 내게 신경쇠약이라는 소위 문명병이 있다 하면 그 원인은 이때로부터 생기었을 것입니다.

내가 기미 운동 때에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고 지금도 친구들께 미움을 받는 바요, 형님께서도,

"왜 그런 때에 가만히 있었느냐?"

고 어느 때 말씀하셨지마는 나는 그때에도 어머니를 생각하여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때 어린 내 가슴에는 나라보다도 어머니가 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에 나도 서울에나 뛰어올라왔더면 지금보다는 나았을는지? 그저 어머니를 생각하는 애틋한 정과 또 어머니가 말리는 정만 생각하고 그날이 그날로 별수없는 생활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맘은 고정적이 아닙디다. 유동적으로 환경을 따라서 늘 변합디다. 어머니의 망령 아래서 어머니만 생각하던 나의 맘은 점점 드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번쩍 드틴 것은 기미 운동이 일어난 뒤 삼 년 만이니 내 나이가 스물한 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해는 육갑으로 신유년인데, 신유년 유월 스무이튿날은 어머니의 환갑이라 이것은 형님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그 스무이튿날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마 그날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과 내가 집 떠나던 날과 같이 내 눈 구석에 흙이 들기 전에는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죽어 가서 내 혼령이 있다 하면 그 혼령에까지 그 기억은 따를 것입니다.

환갑날이 가까워 올수록 내 맘은 뿌듯하여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는 것 같았습니다. 벌써 눈치를 알아차리신 어머니께서는,

"얘, 내 환갑 걱정은 말아라. 금년에 못 쇠면 명년에 지내지…… 그까짓 게 걱정될 것 있니? 앞이 급한데."

나를 타이르시나 내게는 그 말씀이 젊은 옛날의 영화를 돌아보시고 늘그막 신세를 탄식하시는 통곡같이 들리었습니다.

"어머니 회갑이 눈앞에 이르니 네 걱정이 클 것이다. 허나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고 정 못 하게 되더라도 상심치 말아라."

고량진미를 못 드릴까망정 어머니 슬하에 모여 앉아서 따뜻한 진지나 지어 드리려고 하였더니 노비도 없거니와 일전에 다리를 상하여 가지 못했습니다.

형님께서도 그때에 이러한 편지와 같이 돈 삼 원을 부치셨지만 나도 없으면 좋은 말씀으로 위로를 하리라 하면서도 음식을 많이 장만하고 어머니의 친구를 많이 청하여 어머니와 함께 유쾌하게 하루 동안을 지내시도록 하고 싶은 생각이 불같이 붙었습니다.

"아무개네 늙은이는 회갑도 못 쇤데! 그 아들은 뭘 하는 게야?"

이렇게 남들은 비웃는다는 말까지 들은 뒤로 나의 어깨는 더 처지었습니다. 나는 이친구 저친구 찾아가서 다만 얼마라도 취할까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내키지 않는 발길을 김초시 댁으로 옮기었습니다. 김초시는 혈혈단신으로 의지 없는 것을 우리 아버지가 보아 주셔서 부자가 된, 얼마쯤은 돌리어 줄 터이지 하는 생각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허, 그것 안됐네마는 나도 요새 어떻게 군졸한지 한푼 드릴 수 없네! 그것 참 안됐는데! 우리집에 닭이 있는데 그게나 한 마리 갖다가 고아 대접하게."

이것이 김초시의 대답이었습니다. 큰 모욕을 받는 듯이 흥분되었습니다. 나는 뻣뻣이 앉아서 게트림을 하면서 부른 배를 슬슬 만지는 김초시를 발길로 차놓고 싶었으나 억지로 그 충동을 참고 밖에 나서니 천지가 누런 것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시면 걱정을 하실까 봐서 나는 태연한 빛으로 집에 돌아가서 그 밤을 새우고 이튿날, 즉 스무이튿날 아침에 형님께서 보내신 삼 원으로 고기와 쌀을 사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이웃집 늙은 부인 오륙 명을 청하였습니다. 며느리 없는 어머니는 당신 손으로 짓고 끓인 밥과 국을 늙은 친구들과 같이 대하실 때에 눈물을 씻었습니다. 어머니 상머리에 앉은 나는 어머니의 눈물을 볼 때 그만 낯을 가리었습니다. 숙종대왕 시절에 어떤 효자는 아내의 머리를 깎아 팔아서 어머니의 회갑상을 차리어 놓고 어머니가 슬피 우는 것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아내를 시키어 춤을 추이고 자기는 노래를 부르는데 숙종대왕이 미행을 하시다가 그 연유를 물으시고 인하여, '喪歌僧舞老人哭(상주는 노래하고 중은 춤추고 늙은이는 통곡한다)'이라는 과제를 내어서 그 효자를 등용하셨다는 말이 지금도 전하지만 나는 그 효자만한 정성이 없어서 그런지 나오는 설움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쪼록 어머니의 맘을 편케 하리라, 슬픈 빛을 띠지 말리라 하였으나 쏟아져 나오는 눈물과 우러나오는 울음 소리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억지로 설움을 참으려고 하시면서,

"우지 마라. 울긴 왜?"

하고는 눈물을 씻었습니다.

이 뒤로부터 나는 나의 존재와 사회적 관계를 더욱 생각하였습니다. 적자생존과 자연도태설을 그제야 절실히 느끼었습니다. 그것을 어떤 잡지에서 읽고 어떤 친구에게서 처음 들을 때는 이론상으로 그렇거니 하였다가, 공부한 친구들은 점점 올라가고 나는 점점 들어가는 그때에 절실히 느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불공평한 사회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남과 같이 적자(適者)가 되자. 자연도태를 받지 말자. 시대적 인물이 되자.'

하다가는 그렇게 될 조짐이 없다는 것―---적자가 될 만한 공부할 여유가 없어서 하면 될 만한 소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내 처지를 돌아볼 때 나는 이 불공평한 제도를 그저 볼 수 없었습니다.

형님, 나에게 ××주의적 사상이 만일 있다고 하면 이것은 벌써 그때부터 희미하게 움이 돋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이 ××주의 사상인지 무언지 모르고 다만 내 환경이 내게 가르친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은 어떠한 계통을 찾아서 과학적으로 되지는 못하고 다만 이러한 결론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소용 없다. 이깐놈의 면서기로는 점점 타락이다. 점점 공부하여 나은 놈들이 생길 터이니 나중은 면 하인 자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생활은 지금보다 더할 것이다. 뛰어가? 엑 서울 뛰어가서 고학이라도 하지? 그러나 어머니는 어쩌나? 형님이나 고향에 계셨으면…… 그렇다고 어머니를 붙들고 있으면 더할 일이요…… 엑 떠나지? 삼사 년이면 나도 무슨 수가 있을 것이요, 그새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지는 않을 터이니 늘그막에 고이 모시도록 지금 자리를 닦아야 할 것이다. 그새에 굶어 돌아가시면? 그래도 하는 수 없다. 그것은 내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에게 그처럼 강박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는 모순이 되면 풀고 풀었다가는 다시 생각하여서 될 수 있는 대로는 집을 떠나는 데 유리하도록 생각하던 끝에 드디어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렇게 결심하고도 어머니가 거리끼어서 얼른 거사를 못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큰 은인인 동시에 큰 적이다.'

어떤 때는 이러한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이러다가 신유년 가을 어떤 달밤이었습니다. 나는 집을 떠났습니다. 밤 열두시 연락선으로 떠날 결심을 한 나는 맘이 뒤숭숭해서 저녁도 바로 먹지 못하였습니다.

"왜 밥을 그렇게 먹니?"

아무 영문도 모르는 어머니는 내가 밥 적게 먹는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나는 밥 먹은 뒤에 황혼빛이 컴컴하게 흐르던 방에 들어가서 쓸 만한 책을 모아 쌌습니다. 이렇게 책을 거둬 싸니 맘은 더욱 뒤숭숭하였습니다. 마치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전쟁길에 오르는 군인의 맘같이 모든 것이 볼수록 아쉽고 그리워졌습니다. 나는 공연히 책상 서랍도 열어 보고 쓸데없는 휴지도 부스럭거리어 보니 나중은 뒤 울안까지 가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때에 조금도 쉬일 사이 없이 눈앞에 언뜻언뜻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평시에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머니의 친안이 보이지 않고 처참한 환상으로 보이던 터인데, 이날에는 더욱 그러해서 차마 무어라 말씀할 수 없이 가련하고도 기구한 환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나중은 어느 때 형님과 이야기를 하던 그 거지 노파의 꼴로도 되어 보입디다.

"여보, 밥 한술만 주셔요. 나는 달아난 아들을 찾아가는 길이오."

다 해어진 누더기 치마저고리를 걸친 늙으나늙은 노파가 이집 저집으로 다니면서 걸식하는 것을 볼 때 나는 그 늙은 어머니를 버리고 간 자식을 괘씸히 여겼습니다.

"아아, 나도 그 자식의 본을 따누나?"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부르짖었습니다.

뒤따라 어머니의 그림자가 그 노파의 그림자와 같이 떠오를 때 나는 그만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아아, 어머니!"

하면서 어머니 계신 부엌방으로 갔습니다. 나는 인륜의 큰길을 어긴 듯이 두렵고도 가슴이 찌르르하여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엌문 밖에 이르렀을 때에 나는 그만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어쩐지 끓어오르던 정은 식으면서 누가 다시 뒤를 끄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 방에 들어가서 책보를 들고 나오면서,

"오늘 밤에는 좀 늦어서 들어올 것 같습니다."

하고 어머니를 보면서 마당에 내려섰습니다. 아까보다도 가슴이 더욱 울렁거리고 앞에는 별별 환상이 다 떠올라서 나는 어둑한 마당을 돌아볼 때 은근히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내 집과 마지막 하직이던 줄이야 언제 꿈인들 꾸었겠습니까? 나는 바로 부두로 향하지 않고 공동묘지를 지나서 바닷가 세모래판으로 나갔습니다. 어느새 초열흘 달은 높이 솟았으나 퍼런 안개가 자욱이 하늘을 덮어서 봄의 우수 달밤같이 설움에 겨운 가슴을 더욱 간질였습니다. 나는 세모래판에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우숙그러한 달빛 아래서 고요히 소리치는 물결을 바라보았습니다. 찬바람을 맞고 달빛에 싸여서 그 물결을 볼 때 모든 감각은 스러져 버리고 나의 온몸이 바닷속에 몰리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구러 밤이 깊어서 바닷가로 부두를 향하고 내려갔습니다. 때는 열한시, 나는 십 원짜리를 내어주고 표를 살 때 등뒤에서,

"이놈."

하는 듯하였습니다. 마치 도둑질한 돈을 남몰래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돈은 그날 면소에서 월급 받은 돈인데 모두 십팔 원이었습니다. 있는 놈의 하룻밤 술값도 못 될 것이지만 그때 우리집에는 큰 돈이라 어머니는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는 어머니를 속이고 내가 노자로 쓰는 것을 생각하는 때에 어찌 맘이 편하였겠습니까?

"아이구 얘야! 네가 왜 그러니? 응, 흑…… 나를 버리구 가면 나는 어쩌라니? 차라리 나를 이 바다에 차넣고 가거라!"

나는 배에 오르는 때에 어머니가 이렇게 통곡을 하시면서 쫓아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괴로운 중에도 서울을 인제 구경하나 보다 하니 뛸듯이 기뻤습니다. 이까짓 서울이 왜 그리도 그립던지? 어째서 서울로 오고 싶던지? 오늘날 생각하면 그것도 소위 도회 중심의 문명 사상에 유인된 것이나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내남 할 것 없이 이리하여 도회에 모여드나 봅니다. 왜 나는 농촌에서 나서 아무것도 배우지 말고 농사만 배우지 못하였던고 하는 생각도 없지 않으나 형님을 생각하면 그것도 얼없는 생각으로 믿어집니다.

형님,

형님은 농사를 질 줄 모르셔서 도회로 돌아다니게 되었습니까? 또는 도회가 그리워서 도회처를 찾아다니십니까? 형님같이 농촌을 사랑하고 형님같이 농사를 잘하시는 이는 드물 것입니다마는 땅이 없으니 노동을 따르는 것이요 노동은 도회에 있는 것이니 하는 수 없이 도회에 모이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대로 도회가 잘 받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직업난과 생활난은 그네들을 도로 쫓아내게 됩니다. 그러나 더 갈데없는 그네들은 어찌하오리까. 여기서 차마 인간성으로는 하지 못할 가지각색의 현상이 폭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폭발은 인간으로 인간의 참다운 생활을 찾으려는 현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3[편집]

형님,

떠나던 날 밤에 배 속에서 어머니에게 글월을 드리고 그 이튿날 원산 내려서 기차로 서울에 왔습니다. 배 속과 기차 속에서 새로운 산천을 볼 때 기쁜 듯도 하고 슬픈 듯도 하여 뒤숭숭한 맘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언뜻언뜻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귓가에 도는 것 같아서 남모르게 가슴을 쓸었습니다. 그러다가 남대문역에 내려서 전차에 오르니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같이 오는 친구는,

"저것이 남대문, 저것이 남산, 저리로 가면 본정―---진고개, 예가 조선은행."

하고 가르쳐 주는 때에 나는 호기심이 나서 슬금슬금 보면서도 곁의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여보, 여태껏 서울을 못 보았소?"

하고 핀잔을 주는 듯해서 일종의 모욕을 느끼었습니다. 그러나 애써 가르쳐 주는 친구를 나무란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 그저 꿀꺽 참고 있었습니다.

서울 들어서던 날 나는 하숙을 계동 막바지 어떤 학생 하숙에 정하였습니다. 구린내 나던 그 하숙 장맛은 지금도 혀끝에 남아 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서 차츰 서울의 내막을 보는 때에 나는 비로소 내 상상과는 아주 딴판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제일 눈에 서투른 것은 '할멈'과 '거지'였습니다.

형님,

우리 함경도에야 어디 거지가 있습니까? 또 할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에는 골목골목이 거지여서 나같이 헐벗은 사람은 괜찮지만 양복조각이나 입은 신사는 그 거지 성화에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할멈이라는 것은 계집 하인인데 늙은것은 '할멈'이요 젊은것은 '어멈'이라 하여 꼭 하대를 합니다. 소위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다는 이들도 이렇게 하인을 두고 얘, 쟤 하대를 합니다. 나는 그것을 볼 때면 어머니 생각이 불현듯 났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헐수할수없으면 그 모양이 될 것입니다. 그런 것 저런 것 생각하는 때에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나고, 또 그 할멈이 어떻게 가긍한지 나는 할멈이 내 방에 불때러 오는 때마다 내가 대신 때어 주고 또 할멈에게 절대 반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며칠을 하였더니 하숙 주인이 나를 가리키면서,

"저게 함경도 상놈의 자식이야! 하는 수 없어, 제 버릇 개를 주겠나?"

하고 은근히 욕을 하더라고 같이 있는 학생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할멈도,

"서방님, 저 부엌 불도 좀 때주구려."

하고 반말하는 것이 어떻게 골나던지 그날로 주인과 할멈을 불러 놓고 한바탕 굴어 놓았습니다. 나는 지금 와서는 그것을 후회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그네를 불쌍히 여기는 생각이 내 가슴에 있었다면 나는 가만히 그 모든 모욕을 받아야 옳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놓았더니 주인은 내게 빌리어 주었던 담요를 뺏어 갈 뿐 아니라 밥값 독촉이 어떻게 심하여지는지 나중엔 내 편에서 화를 내고 야단을 친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때에 형님께도 편지로 여쭈었지만 올라오던 해 겨울은 한 절반 죽어서 지내었습니다. 가을에 입고 온 겹옷으로 이불 없이 지내는데 밤이면 자지 못하고 마당에 나가서 뛰어다닌 일까지 있었습니다. 몹시 추워서 몸이 졸아들다가도 한바탕 뛰고 나면 후끈후끈하여졌습니다. 그것을 그때 하숙에 같이 있는 속모르는 친구들은 위생을 한다고 비웃었습니다.

형님,

이렇게 괴로운 가운데서도,

'이미 집을 떠났으니 몸 성히 잘 있거라.'

하는 어머니의 편지와,

'어머니는 내가 모시고 있으니 너는 걱정 말고 맘대로 하여라.'

하는 형님의 글을 받으면 모든 괴로움이 스러지고 용기가 한층 났습니다. 그러나 밥값 얻을 구멍은 없고 배는 고프고 등은 시리고―---이렇게 되니 어느 겨를에 공부를 하겠습니까? 이때 내 가슴에는 집에 있을 때보다 더 큰 고민이 일어났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쌓다가도 밖에 나서면 하늘과 땅은 진흙물을 풀어 놓은 듯이 누렇게 보이었습니다.

옛적에 어떤 분이 반딧불에 공부를 하고 어떤 분은 공부에 취하여 배고픈 것을 잊었다 하지만, 나는 춥고 배고픈 때면 책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 때마다,

'이것은 내 정성의 부족이다.'

하는 생각으로 다시 책을 들고 붓을 잡았으나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뼛속에 사무치고 오장은 빼인 듯이 가슴과 뱃속이 휑하여 기운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이르러서 어떤 잡지사에 들어가서 원고도 모으고 교정도 보게 된 뒤로는 생활이 좀 편하였으나, 그때는 또 일에 몰리어서 공부할 여가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떠날 때에는 아무쪼록 학교에 입학하여 체계 있게 공부를 하려고 하였으나, 그것은 유한계급에 처한 이로서 할 일이요, 우리 같은 사람으로는 할 일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뒤로부터 나는 여가 있는 대로 책이 손에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고 읽었습니다마는 그것조차도 자유롭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리하는 새에 문인들과 사귀게 되고 소설을 써서 잡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처음 문인을 사귀게 되고 다음 소설을 쓰게 되고, 다음 그 쓴 것이 잡지에 실리게 된 때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우습고 그러한 생활에 애착을 잃었지만, 그 당시에는 어떻게 기쁜지 바로 대가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차츰 글을 많이 쓰게 되고 문단에 출입이 잦게 되면서 여러 문인들과 같이 어떤 신문사 어떤 잡지사의 초대를 받아서 영도사나 명월관이나 식도원 같은 데 가서 평생 못 먹던 음식상도 대하여 보고 차마 쳐다도 못 보던 기생의 웃음도 받게 되니 그만 어깨가 와짝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음식을 대하는 때마다 어머니 생각에 목이 메었습니다.

형님, 사람은 이리하여 허영에 뜨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서부터 나는 은근히 몸치장을 시작하였습니다. 머리도 자주 깎고 싶고 손길도 주물러 보고 옷도 깨끗하게 입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요구를 채울 만한 요소인 돈이 어디서 나겠습니까. 이것도 한 번민거리가 되었으나 간간이 눈앞에 떠오르는 어머니의 낯은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습니다.

'응, 내가 허영에 빠지나. 나는 안일을 구할 때가 아니다. 오직 목적을 향하고 모든 것을 돌보지 말아야.'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공상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 같으면서도 길에 나서면 먼저 옷에 맘이 가고 누구를 대하면 나는 글쓰는 사람이다 하는 맘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유혹은 좀처럼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유혹을 배척하는 맘과 그 맘을 먹으려는 유혹은 서로 가슴속에서 괴롭게 싸웠습니다. 여쭙기 황송한 말씀이오나 이때에 나는 비로소 연애의 맛도 보았습니다. 그것은 나와 친한 김군의 고향에서 온 여자인데, 그때 열아홉이었습니다. 그리 미인은 아니나 동그스름한 얼굴 윤곽과 어글어글한 눈길은 맘에 들었습니다.

"이이는 소설 쓰시는 변기운 씨(내 이름)."

"이이는 ××유치원에 계신 정인숙 씨."

하는 김군의 소개로 인숙이를 본 뒤로 나는 은근히 맘이 끌리었습니다. 그 뒤에 나는 김군을 만나서,

"여보게, 그 인숙 씨가 그저 서울 있나?"

하였더니,

"왜 자네 생각 있나? 둘이 단란한 가정을 이루도록 내가 중매함세."

하고 김군은 웃었습니다. 행이든지 불행이든지 이것이 참말이 되어 인숙이와 나 사이에는 소위 연애가 성립되었습니다. 연애란 참말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야 어떻게 해서 만났든지 그 만나던 장면은 아주 꿈 같아서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마는 지금 청춘남녀로서는 아마 거지반 연애의 맛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어 보면 다 신비한 꿈 같아서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쓰디쓴 그 연애가 그때에는 어찌도 달던지, 나는 그 단맛에 취하여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연애에 익숙지 못한 나는 그때 거기 빠져서 헤엄칠 줄 모르는 까닭에 욕을 단단히 보았습니다.

'늙은 어머니를 버리고 나선 내게 연애가 무슨 상관이냐? 내게는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하루도 몇십 번씩 생각하고 끊으려 하면서도 인숙의 웃음에 끌리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부터 나는 모양을 더 내고 싶었습니다.

땟국이 흐르는 두루마기를 입고 어떤 '세비로' 신사와 가지런히 섰다가 인숙의 눈에 뜨이게 되면 내 눈은 신사의 세비로와 내 의복에 가서 두 어깨가 축 처지고, 온몸이 땅에 잦아드는 것 같은 동시에,

"아 당신 같은 이쁜 이가 이런 거지와 사랑을……."

하고 신사가 모욕이나 주는 것 같아서 더욱 불쾌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때마다 인숙이 보기가 어떻게 열없고 부끄러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인숙에게 그런 하정을 하였습니다.

"그까짓 돈이 다 뭐요. 정으로 살지."

내가 하정을 아뢰는 때마다 인숙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대답을 듣는 때마다 나는 행복을 느끼었고 동시에 더욱 죄송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숙이가 피아노를 사들이고 비단으로 몸을 휘휘 감아서 극도의 사치를 하는 것이 내 맘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나와는 영영 타협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잡지사가 쓰러져서 나의 행색은 더욱 초초한 때이라 그런 생각이 더욱 났습니다. 참말로 내 상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잡지사에서 나와서 두 달 되던 때―---즉 계해년 봄이었습니다. 하루는 인숙이를 찾아가니,

"그저께 주인을 옮기었는데 알 수 없어요."

하고 주인이 말하기에 의심을 품고 돌아와서 뒤숭숭한 맘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때는 한창 밥값에 쪼들리어서 원고를 팔려고 애쓴 때이라 그 때문에 어물어물 사흘이나 보내고 나흘 되던 날 어떤 친구에게서 들으니 인숙이는 나를 소개하던 김군과 어쩌구저쩌구 해서 벌써 임신한 지 삼사 개월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그 연놈을 찾아 칼로 찔러 놓고 싶었으나,

'일없는 생각이다. 그와 나와 영원히 타협도 되지 않으려니와 버리는 자를 쫓아가면 뭘 하며 죽일 권리가 어디 있나?'

하며 나의 가난한 처지를 나무라고 단념하는 동시에 비로소 여자의 심리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위 친하던 사람의 뱃속도 알게 되었습니다. '내게는 큰 목적이 있다. 연애에 상심할 때가 아니다.'

그래도 애틋한 생각이 있는 나는 이렇게 스스로 억지의 위로를 하였습니다. 조금도 속임 없이 말씀한다면 그때에 내가 그만하고 만 것은 배가 너무도 고픈 때문이었겠습니다. 밥값 변통에 눈코를 못 뜨게 된 나는 연애 지상주의자에게는 미안한 말씀이오나 거기만 모든 힘을 바치게 못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원고 쓰기에 눈코를 못 떴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원고료나마 그때 내 생활에는 없지 못할 것이요 또 잘잘못간에 배운 재주가 그것뿐이니 그것밖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나는 원고를 썼습니다. 써서는 잡지사와 신문사에 보내었습니다. 보낸 뒤에 창피한 꼴이야 어찌 일일이 말씀하오리까? 처음 써달라는 때에는 별별 아첨을 다 하여 가져가고는 배를 툭툭 튀기면서 똥값만도 못한 원고료나마 질질 끌다가 그것도 바로 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싸울 수도 없어서 혼자 애를 태우고 혼자 분개합니다. 다소간 잘 주는 데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런 데는 번번이 보내기도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나 혼자면 모르지만 거개가 그 원고료를 바라는 친구들이라 잡지사에선 어찌 일일이 수응하겠습니까? 그때도 이때와 같이 잡지 경영 곤란은 막심한 때였습니다. 이렇게 순전히 어떠한 예술적 충동은 돌볼 사이가 없이 영리 본위로 쓰게 되니 돈을 생각하는 때마다 원고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오지도 않는 정을 억지로 빡빡 긁어서 질질 썼습니다. 이 고통은 여간 크지 않았습니다. 내 눈에는 번연히 못 쓰겠다고 보이는 것을 질질 쓰다가도 차마 양심에 그럴 수가 없어서,

"엑 그만둬라."

하면서 붓을 던지고 원고를 찢어 버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다가도 '내달 밥값'을 생각하는 때면 울면서 겨자먹기로 붓을 잡게 되었습니다. 쓰기는 써야 하겠고 나오지는 않고 화는 나고 하여 어떤 때는 공연히 내 머리를 잡아뜯는 때도 많았습니다.

또 그때는 글의 잘되고 못된 것으로 고료를 정치 않고 페이지 수로 따지는 때이라 산만하여 줄이고 싶은 것도 그놈의 고료가 줄까 보아서 그대로 보내었습니다. 이리하여 점점 타락하였고 또 아무 공부도 없이 쓰니 무슨 신통한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지내니 공부할 맘은 태산 같으면서도 못 하였습니다. 나중에 소위 절개까지 변하게 되었습니다.

나와 주의주장이 틀린 어떤 단체나 개인의 기관지에 절대 쓰지 않는다던 맹세도 변하여,

"쓴다. 어디든지 쓴다. 돈만 주면 쓴다."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친구들께서 욕먹게 되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그래도 남아 있는 양심의 고통은 나날이 컸습니다. 어떤 잡지나 어떤 신문의 태도가 미워도 원고 팔기 위하여 꿀꺽 참았습니다. 그 참는 고통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때에 맘에 없는 글을 쓴 것은 물론이요, 맘에 없는 웃음도 웃어 보았습니다. 나의 작품이 상품으로 변하는 것은 벌써부터 느낀 바이지만, 차츰 나의 태도를 반성할 때 신마치(新町)의 매춘부를 생각 아니치 못하였습니다. 누가 매춘부 되기를 소원하겠습니까마는 생활의 위협은 그녀로 하여금 그러한 구멍으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그와 같이 나도―---나의 예술도 매춘부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이에까지만 이르고 말았으면 문제가 없겠는데, 그렇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나 그녀―---매춘부들은 이런 것 저런 것 의식지 못하고 그렇게 되니 용서할 점이 있다만 너(나)는 그런 것 저런 것 다 의식하면서 차마 그 일을 하느냐?'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쳐서 더욱 괴로웠습니다.

이렇게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나는 ××주의의 행동에 크게 공명이 되었습니다. 내게 ××주의적 사상이 완연히 머리를 든 것은 이때요 내 발길이 ××주의 단체에 드나들게 된 것도 이때입니다. 나는 처음에 이삼 일 안으로 이상적 사회나 건설할 듯이 만장 기염을 토하고 다니었으나, 그것도 하루나 이틀에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는 때에 내 기염은 차차 머리를 숙였습니다. 머리 숙였다는 것은 절망이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모든 방법을 세워야 할 것이요, 방법을 세우는 동안의 밥은 먹어야 하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친 까닭이었습니다.

형님, 이리하여 나는 다시 그전부터 구하던 직업을 또 하나 구하였습니다. 여기 가 비위를 쓰고 저기 가서 비위를 부리면서 소개도 얻고 직접 말도 하여 어느 신문 기자나 한자리 하여 볼까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 졸업이라는 간판과 튼튼한 배경이 없는 나는 실패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도 지금과 같이 신문 기자 후보자가 여간 많지 않아서 어떤 이는 어떤 신문사와 잡지사 사장과 편집국장에게 뇌물을 산더미같이 드리는 것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판인데 뇌물 없는 내가 어떻게 발을 붙이겠습니까? 더구나 그때나 이때나 뇌물 드릴 만한 여력이 있으면 내가 먹고 있겠습니다. 나는 이러한 꼴―---소위 민중의 공기요 대변자라는 한 신문사의 내막에 잠긴 추태를 볼 때 이 세상이 싫어지고 미워지고 부숴 버리고 싶었습니다. 나중은 혼자 화에 신문사 잡지사의 추태를 욕하다가도,

"모두 내 잘못이다. 내게 과연 뛰어난 학식이 있다 하면 내가 애쓰기 전에 그네가 찾을 것이다. 나부터 닦자."

하고 모든 것을 나의 학식 없는 탓으로 돌리었고, 따라서 학식을 닦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문제는 학식 닦는 것입니다. 무슨 여유로 학식을 닦습니까? 이렇게 민민히 지내던 끝에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농촌에 간대야 땅 한 평도 없고 농사 지을 줄도 모르는 내 힘을 생각하면 그것도 공상이었습니다.

'엑 아무 데서나 똥통이라도 메지!'

이렇게까지 생각하면서도 그저 맘 한 귀퉁이에 남은 허영과 체면은 얼른 그것을 허락지 않고 행여나 하는 희망으로 다시 어느 신문사 기자로 운동하리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물어물하고 일년이나 지내던 판에 어머니의 흉음을 받았습니다.

4[편집]

형님, 지금도 그때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작년 이월 초사흗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때에도 직업 운동을 나가던 판인데,

'모주 작고.'

라는 형님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날이 가고 가서 이렇게 되면서는 설움이 점점 커지는데, 그때에는 슬픈지 원통한지 그저 어리벙벙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멀거니 꿈꾸듯 섰다가 무심한 태도로 하숙을 나섰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너무도 놀라서 온 신경이 마비가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렇게 하숙을 나서서 종로로 나가다가 차츰 정신이 들고 설움이 북받치어 하숙에 돌아가 울었습니다. 전보 받은 이튿날 형님의 친필을 받고서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전보를 받고 얼마나 우니?

어머니는 가셨다. 어머니는 영영 가셨다. 어머니는 가시는 때에 너를 수십 번 부르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쉽게 가실 줄 몰랐다. 사흘 동안이나 머리가 아프시고 가슴이 울렁거리신다고 하시면서 음식도 잡숫지 않고 누워 계시다가 나흘 되던 날 아침에 갑자기 피를 토하시고 가슴을 치시면서 너를 자꾸 부르시다가 돌아가셨다.

이렇게 급히 가시게 되어서 네게 편지도 못 하였다. 그럴 줄 알았더면 네게 미리 통지나 하여 임종에 뵙게 할 것을 미련한 형은 천고의 스러지지 못할 한을 어머니와 네 가슴에 박았구나.

나는 이러한 형님의 편지를 읽고 나서 천지가 아찔하였습니다. 온몸의 피가 모두 심장에 엉키어들어서 심장이 터지고 목구멍이 메는 듯하고 어떻게 죄송한지 어머니의 무덤에라도 따라가서,

"어머니, 어머니, 이 불효 자식을 죽여 줍시오." 하고 싶었으나 그것도 못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불효 자식이 여북 보고 싶었으면 임종까지 부르셨겠습니까?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이런 말씀 저런 설움을 여쭐 수 없습니다. 형님이 깊이 통촉하실 줄 믿습니다. 그 뒤로부터 세상에 대한 나의 원망은 더 커지었습니다. 내게 어찌 원망이 없겠습니까? 죽고 사는 것은 자연이라 누가 막으리요마는 그래도 이러한 변태적 사회에 나지 않았다면 왜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으며 내가 이렇게 못 할 짓을 하였겠습니까?

나는 차마 하늘이 보기 무서워서 몇 번이나 죽으려고 한강까지 갔다 오고 칼을 빼어 들었다가도 이 세상이 어찌 되는 것을 보려고 단념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소용 있습니까? 내가 죽어도 이 세상은 세상대로 있을 것이요 나의 지내 온 사실은 사실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또 내 한몸이 없어졌다고 누가 코나 찡그리겠습니까.

'세상에는 나밖에 믿을 놈이 없다.'

이때부터 나는 이러한 느낌을 절실히 받았습니다. 모두 그러한 꼴인데 언제 나의 일을 생각하겠습니까. 세상은 비웃을 줄은 알아도 건져 주고 도와 줄 줄은 모릅니다. 어제는 영화를 누리다가 오늘날 똥통을 멘다고 비웃기는 하지만 도울 줄은 모릅니다. 또한 똥통을 멘다고 그 인격에 손상이 생길 리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 탈을 못 벗은 까닭에 이리저리 끌리는 것입니다.

나는 이에 비로소 꽉 결심하고 이 구둣짐을 졌습니다. 갖바치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결심하였건마는 처음 구둣짐을 지고 거리에 나서니 길가의 흙까지 비웃는 듯하였습니다. 친구들의 낯이 먼 데 보이면 슬그머니 피하여졌습니다. 참 습관이란 그처럼 벗기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흥, 그네가 나를 비웃으면 나를 먹이어 줄 테냐? 또 내가 이것(구둣짐)을 졌다고 내 인격에 흠이 생기나?'

이렇게 스스로 가다듬으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왔습니다. 예전날 생활과 오늘날 생활을 비교하는 때마다 나는 벌써 왜 이런 일을 못 하였던고 하는 후회가 납니다. 참 편합니다. 신사니, 양복이니, 구두니, 안경이니, 명예니 하는 것이 참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형님,

그러나 나의 노래를,

"구두 곤칩시오! 구두 약칠합시오."

하는 이 갖바치의 노래를 참으로 편한 신세를 읊조리는 소리로는 듣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내가 이러한 생활을 한다고 타락이라고도 생각지 마소서.

"언제나 너도 남과 같이 군수나 교사나……."

하시던 형님의 맘에는 퍽 못마땅하게 생각되시겠지만, 나는 그런 허위의 생활과 취한 생활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편하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편한 것이 아니요, 그네들도 그것을 최대 이상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아직도 배고픈 설움을 몰라서 하는 수작이라고 믿습니다. 또 나는 안일을 구할 만한 권리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내가 어찌 안일을 구하겠습니까. 하루라도 살아서 하늘 보는 것까지 황송합니다마는 나는 하루라도 살기는 더 살려고 합니다. 내가 갖바치 된 것도 그 때문이니 하루라도 이 목숨을 더 늘이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이 목숨이 하루라도 더 붙어 있으면 그만큼 이 두 눈은 이 세상이 되어 가는 꼴을 똑똑히 볼 것이요, 이 팔과 다리는 하루라도 더 싸워 줄 것입니다.

형님,

이제 어머니의 원혼을 위로하고 내 원한을 풀 길은 이밖에 없습니다. 이러므로 형님의 따뜻한 맘과 아주머니의 두터운 정과 용손의 순진한 뜻을 못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받는 내 가슴은 더욱 찢깁니다. 형님은 진정으로 나를 위하시는 형님이요, 내게는 오직 형님 한 분이시라 어찌 형님의 말씀을 귀 밖으로 듣겠습니까. 형님께서는―---이제 이 옛날의 생활을 전멸하고 새 생활을 맞는 나의 전아사(餞梺辭)를 보시고 모든 의심을 푸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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