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예송논쟁 시 복제에 관한 윤선도의 상소문
성인이 상례(喪禮)에 있어 오복(五服)으로 정한 것이 어찌 우연히 하신 일이겠습니까. 집에서 쓰면 부자의 천륜이 밝아지고, 나라에서 쓰면 군신의 신분이 엄절해지며, 천지의 존비와 종묘 사직의 존망도 모두 거기에 매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는 그야말로 막중하고 막대하여 털끝만큼이라도 틀려서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적통을 이어받은 아들은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는데, 아버지가 적자의 상에 복제를 꼭 참최 3년으로 한 것은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조종(祖宗) 적통을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사가(私家)에서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국가이겠으며, 삼대(三代) 태평 시절에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말세 위의(危疑)스러운 때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신하와 백성들 마음을 안정시키고 함부로 날뛰는 무리들이 넘보는 것을 막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국가를 둔 이라면 그 예에 있어 삼가지 않으면 되겠으며 엄격하게 않으면 되겠습니까? 잠시라도 소홀히 여겨 내버려둘 수 있는 일입니까?
신이 선왕이신 효종 대왕 상사를 듣고 대왕 대비 복제에 대하여 《예경(禮經)》을 상고하였더니, 성인이 위하신 뜻이 사실은 할어버지와 체(體)가 되고 있음에 있고, 또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도 사실은 천리에 근원을 두고 종통(宗統)을 정하자는 뜻이어서, 당연히 재최(齊衰) 3년으로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일이요, 의심할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초에 예관이 《의례(儀禮)》 주에 의하여 기년의 복으로 정했을 때, 조야를 막론하고 지식 있는 사람이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무슨 뜻으로 그렇게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국가 종통도 그로 인하여 약간 흐릿한 느낌이 있으며 어쩌면 다소 흔들리고 있는 것도 같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대통(大統)을 밝히고, 백성들 마음을 안정시키고, 종묘 사직을 굳건히 할 예가 되겠습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뼈가 놀라고 가슴이 써늘합니다. 그야말로 즉시 의논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인데, 연기(練期)가 다가오도록 뉘 하나 국가를 위하여 그 말을 올린 자가 없이 고요하기만 하여, 신이 한가로이 있으면서 깊이 생각할 때 너무나 종묘 사직을 위하여 걱정이 되었는데, 지난번 전 장령 허목이 예경을 상고하여 한 장의 소문을 올렸다고 듣고는 신이 참으로 국가에 사람이 있음을 기뻐하였습니다.
아, 허목이 말한 것은 예의 정대한 원리를 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나라 다스리는 빈틈없는 계책이기도 한데, 만약 천리의 절문(節文)에 밝지 아니하고 신하로서 진실한 충성심이 아니라면 그 말을 어떻게 하겠으며 또 어떻게 감히 그 말을 올리겠습니까? 그를 듣지 않았다가는 후회 막급일 것입니다. 전하께서 우선 마음으로 단안을 내리시고 즉시 예관으로 하여금 성경(聖經)에 의하여 바로잡게 하셔야 했는데, 그것을 다시 송시열에게 물으신 것은 유신(儒臣)을 우대하는 뜻으로 하신 것이니, 시열로서는 마땅히 문순공 이황이 기대승의 공박한 설을 듣고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종전의 견해를 바꾸고는 ‘만약 기 아무개가 아니었더라면 천고의 죄인이 되는 길을 면치 못할 뻔하였다.’ 했듯이 하여야 했는데, 시열은 도리어 자기 잘못을 꾸미기 위하여 예경의 문자들을 주워모으고 게다가 자기 소견까지 붙여서 너무 번거로울 정도로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열은, ‘정작 아비가 자식을 위하여 참최를 입는 이유가 오로지 할아버지와 체가 되고 있음에 있다.’ 한 것과, ‘성인이 그 예를 엄절하게 한 이유가 오로지 대통과 종묘 사직을 이어받음에 있다는 예경의 주된 뜻에 관하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도 못했고 말하지도 못하여, 신으로서는 그의 말에 승복할 수도 없고 또 그의 뜻도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비록 학문에 어둡고 지식이 얕아 예경에는 원래 깜깜하지만 그러나 천리가 있는 곳, 성인이 예를 만든 주지만은 일찍이 알아도 보았으며 대의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시열이 잘못 인용한 설에 대하여 신이 그 중요한 부분을 추려 하나하나 논변하겠습니다.
시열이, 소설(疏說)의 ‘차장자를 세우고도 역시 3년을 입는다.’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아래에 또 이르기를, ‘지금 반드시 차장자는 서자가 아니라는 분명한 기록을 찾아내야지만 허목의 설을 비로소 따를 수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효종 대왕은 바로 인조 대왕의 차장자입니다. 소설에 이미 ‘차장자를 세워도 역시 3년을 입는다.’ 하는 분명한 기록이 있으면, 대왕 대비의 복이 재최 3년일 것은 털끝만큼도 의심스러울 것이 없고, 그대로 딱 잘라 행하면 그뿐이지 왜 꼭 다시 차장자는 서자가 아니라는 분명한 기록을 찾아야 한다는 책임을 허목에게 지우는 것입니까? 시열이 말하기를, ‘문왕이 나라를 전하면서는 백읍고를 두고 무왕에게 전했으나, 주공이 예를 만들면서는 장서(長庶)를 구별하는 데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했는데, 신이 생각기는, 문왕이 한 일은 성인이 당시 사정에 맞도록 규정한 큰 권도이고, 주공이 만든 예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제도를 만든 정상적인 법으로서 그것은 그 두 성인이 각기 시기 적절하게 한 일이지, 주공이 어찌 백읍고를 위하여 그 예를 만들었을 것입니까? 그렇다면 꼭 그 예를 고집하여 효종 대왕이 적장자가 아니라 하고 대왕 대비가 3년을 입지 않아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열의 논의에, 장자가 성인이 되어 죽은 것을 두 번 세 번 말했는데, 그가 가장 요점을 두고 단정한 말은 ‘장자가 비록 성인이 되어 죽었더라도 그 다음들을 모두 장자로 명명하고 참최를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존엄하지 못하다.’ 한 것입니다. 그의 말이 꼭 성인이 되어 죽은 것에 비중을 두는 뜻은, 성인이 되어 죽으면 적통이 거기에 있어 차장자가 비록 동모제(同母弟)이고, 비록 이미 할아버지와 체가 되었고, 비록 이미 왕위에 올라 종묘를 이어받았더라도 끝까지 적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니, 그 말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적(嫡)’이라는 것은 형제 중에서 적우(嫡耦)할 사람이 없다는 칭호이고, ‘통(統)’이라는 것은 물려받은 사업을 잘 꾸려가고, 서물(庶物)의 으뜸이 되며, 위에서 이어받아 후대로 전한다는 말인데, 차장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으면 적통이 다른 데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차장자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하늘의 명령을 받아 할아버지의 체로서 살림을 맡은 뒤에도 적통이 되지 못하고 적통은 오히려 타인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게 가세자(假世子)란 말입니까? 섭황제(攝皇帝)란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차장자로서 왕위에 선 이는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에 대하여 감히 임금으로 군림할 수 없고,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역시 차장자로 왕위에 오른 이에게는 신하 노릇을 않는다는 것입니까? 시열이 만약 자기 실언을 깨닫는다면 반드시 둔사(遁辭)로 해명하기를, ‘적통불엄(嫡統不嚴) 이 네 글자는 다만 만세를 두고 장유(長幼)의 차례를 엄히 하기 위하여 한 말이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네 글자는 위아래 문세(文勢)로 볼 때 그렇지가 않으니, 누가 그의 뜻이 그렇다고 믿겠습니까? 또 더구나 장유의 차례만 엄히 하고 군신(君臣)의 신분은 엄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고금 천하에 그러한 의리가 어디 있으며, 하늘의 이치와 선인의 법도가 과연 그렇겠습니까? 아, 고공(古公) 이 비록 계력(季歷)을 후계자로 세웠지만, 태백(泰伯) 이 자손이 있으면 고공의 적통은 그래도 태백의 자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라 안 백성들 마음이 일정치 못할 것인데 계력의 자손들이 어떻게 배겨나겠습니까? 문왕이 비록 무왕을 세웠으나 백읍고가 후사가 있었으면 문왕의 적통이 그래도 백읍고 자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까? 그리되면 천하의 마음들이 헷갈려서 무왕의 자손들이 어떻게 배겨날 것입니까?
시열은, 종통(宗統)은 종묘 사직을 맡은 임금에게로 돌리고, 적통은 이미 죽은 장자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적통·종통이 둘로 갈리게 되는데 그러한 이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또 시열 자신도 이통(二統)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시열의 식견이 비록 부족한 점은 있지마는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깜깜하기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세 번씩이나 ‘성인’을 들먹이면서 또 적통이 존엄하지 못하다는 말을 했는데, 그 뜻을 신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고 보면 시열은 망령스러운 자가 아니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국가 대례를 어찌하여 꼭 그 사람 논의에 따라 정할 것입니까?
시열이 또 이르기를, ‘아비 된 자 한 몸에다 너무나 많은 참최복을 지고 있지 않은가.’ 하고서, 심지어 세종조의 여덟 대군을 들어 변증을 하였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세종의 수명이 비록 짧고 여덟 대군 모두가 비록 단명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여덟 대군 모두가 각기 3년복이 되게 불행해질 이치가 있으며, 게다가 문종·세조 두 대왕까지 합쳐 3년짜리가 아홉이 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비록 소진(蘇秦)의 궤변으로도 틀림없이 그러한 말로 감히 남을 꺾으려고는 않을 것입니다. 송준길이 차자에서 말한 ‘가령 사대부 집의 적처 소생이 10여 명 되는데, 맏이가 죽어 그 아버지가 그를 위해 3년을 입고 둘째가 죽어 그 아비가 또 3년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가 죽고 다섯째가 죽으면 모두 3년씩 입을 것인가?’ 한 그 말과 함께 모두 있을 수 없는 이치인 것입니다. 그들 말이 그렇게 딱 들어맞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 두 사람 견해야말로 진짜 형제지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열이 논의에서 이르기를, ‘대왕 대비가 소현의 상에 인조 대왕과 함께 이미 장자를 위한 복을 입었는데, 그 의리가 어떻게 오늘에 와서 바꿔질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가 말한 장자의 복이란 어느 복입니까? 그때 과연 참최 3년을 입었던가요? 그리하였으면 지금도 당연히 소설의 ‘차장자를 세우고 역시 3년을 입는다.’ 한 그 정의에 따라 3년으로 정해야 할 것이고, 그때 만약 혹시라도 기년으로 정했다면 그것은 예관이 실례를 하여 그리되었던지 아니면 혹시 인조 대왕께서 무슨 은미한 딴 뜻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신으로서는 모두 모르는 일입니다. 그때는 비록 기년으로 정하였더라도 오늘 효종의 복은 대왕 대비가 재최 3년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열의 말에, ‘부왕(父王)이 서자(庶子)를 위하여 3년을 입지 않았으면 비록 이미 대통을 이었더라도 모후(母后) 혼자서 어떻게 감히 3년을 입을 것인가?’ 한 그 말은 더욱 무리한 말이고 더욱 알쏭달쏭한 말입니다. 대체로 태자(太子)의 ‘태(太)’는 바로 ‘적(嫡)’ 또는 ‘장(長)’과 글자 뜻이 같은 자인데, 그 칭호를 더욱 구별있게 하여 특별히 표가 나도록 한 것이고, 세자(世子)의 ‘세’도 적·장과 뜻이 같은 글자이나 그 칭호를 더욱 구별있게 하여 특별히 표가 나도록 한 것입니다. 이름하여 ‘태자’ ‘세자’라고 했으면 그가 바로 살림을 맡고 승중(承重)을 하고, 할아버지와 체가 되었다는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서 ‘적’ ‘장’ 두 글자보다 오히려 더 돋보이는데, 이미 세자가 되고서도 장자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러한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소설에 그래서 차장자를 세운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세울 당시에 가리켜 차장자이지 이미 세워진 후에는 당연히 곧바로 장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자가 되었으면 장자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고, 그가 죽었을 때는 참최를 입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대통을 이어받아 군림을 한 그 후에 그를 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를 위해 참최를 입지 않을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시열이 말하기를, ‘소설에 차장자를 세우고도 3년으로 한다 하고, 그 아래 또 서자는 승중하여도 3년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 두 설이 서로 모순이 되고 있다.’ 하였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거기에서 말한 그 서자라는 것이 과연 정실(正室)이 낳은 중자(衆子)를 지칭한 것이라면 과연 윗 글월과 모순이 되지만, 만약 첩잉(妾媵)의 소생을 가리켜 말한 것이면 윗 글월과 모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열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것이 분명 첩잉의 자식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바로 중자를 지칭한 것임을 알아 모순이 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또 시열 예문(禮文)에서 말하고 있는 서자라는 것이 모두 중자를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하여도 그것쯤은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인조 대왕이 하늘의 섭리를 따르시고 문무의 도를 지키면서 효종 대왕을 세자로 삼으셨는데, 효종 대왕이 이미 세자가 되신 후에도 그를 장자라고 하지 않고 적자라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서자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하물며 나라의 어른이 되어 군림한 그 후까지도 장자·적자라 하지 않고 끝까지 서자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시열이 효종 대왕을 끝까지 서자에다 비기려고 한 그 뜻을 신은 또 알 수가 없습니다.
시열은 또 불이참(不貳斬)을 증거로 내세우는데, 예경의 불이참이라는 말은 그것을 이름이 아니라, 그것은 같은 때에 존자(尊者)가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뜻에 불과한 것입니다. 전상(前喪)·후상(後喪)이면 같은 때도 아니고 높음 역시 차이가 없는데, 어찌하여 전상만을 참최로 하고 후상을 참최로 않는다는 것입니까? 소설에 차장자를 세우고 역시 3년을 입는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며, 또 그 말은 천리(天理)·성경(聖經)과도 모든 면이 꼭 맞는 말입니다. 하물며 우리 효종 대왕은 세자가 되었을 당시로 논하자면 그 장(長)이나 존(尊)이 소현과 대등하지만, 군림한 이후로 논하자면 그 장과 존이 소현에 비할 바 아닌데, 소현에게는 참최를 입었으면서 효종에게는 참최를 입지 않아 될 일입니까? 시열의 그 말은 소설과 어긋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 성경과도 배치되는 말이고, 성경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사실은 천리에 어그러진 말입니다.
시열이 또 말하기를, ‘효종 대왕이 대왕 대비에 대하여는 군신(君臣)의 뜻이 있는데, 대왕 대비가 도리어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으로 대왕의 복을 입을 것인가?’ 하였는데, 그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참으로 그 말대로라면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게 했는데, 그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 복이 아니며, 임금이 세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게 했는데, 그것은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 아니랍니까? 어쩌면 그의 말이 이렇게도 사리에 당찮습니까.
아, 선왕조 시절부터 믿고 소중히 여겨 모든 것을 맡겼던 자로 두 송(宋)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제(齊)의 환공(桓公)이 이오(夷吾) 에 대하여, 하나도 중부(仲父)요 둘도 중부였으며, 한(漢)의 소열(昭烈)은 공명(孔明)과의 사이가 마치 물고기와 물이었지만 어찌 이보다야 더했겠습니까. 하물며 늠인(廩人)이 계속 식량을 대고 포인(庖人)이 계속 고기를 댔으니, 바로 옛날 대현을 대우했던 예였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그들을 유현(儒賢)으로 쳐주었고, 그 두 사람 역시 그 이름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야의 공론은 그들을 현자로 여기지 않으며, 신과 같이 어리석은 자도 그들을 현자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가 그 나라에 있을 경우 임금이 써주면 그만큼 안부 존영(安富尊榮)을 누린다.’ 하였는데, 이들 두 사람이야말로 임금의 신임을 그렇게 독차지했었고 그리고 또 상당히 오랜 기간을 그리하였으나, 자기 자신들 안부 존영은 최고를 누렸다 할 수 있지만 임금을 안부 존영하게 만들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미 유현 대우를 받았으면 사부로서의 책임을 사피할 수는 없을 것인데, 선왕을 잘못 보도하여 함궐(銜橛)의 걱정 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간하여 들어주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것은 되지만 그 직에 있으면서 그 책임을 맡았을 때는 부(傅)는 덕의(德義)를 펴야 하고, 보(保)는 신체(身體)를 보호해야 하는데, 그 의리가 어디 있습니까? 재궁(梓宮)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일 같은 것은 국가를 가진 이로서는 만고에 없었던 이변으로서 그러한 일들을 볼 때 편안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의관(衣冠)을 영원히 간직하는 일은 바로 마지막을 보내는 대사(大事)인데, 주자(朱子)도 종묘 혈식(血食)을 오래 가게 하는 길이라 하여 소를 올려 강력히 말했던 것을 보면, 그 자리의 길흉(吉凶)에 따라 관계된바 막중함을 알 만합니다. 그런데도 최고 길지를 버리고 흠결이 있는 곳으로 옮겨 잡은 것은 자못 그 택조(宅兆)를 골라 정하여 영원한 편안함을 도모하는 도리가 아닌 것으로, 일만세 유택(幽宅)이 그럴 바에야 그것이 어찌 일시적 불안에 그치고 말 일입니까? 재해가 함께 닥치고 기근이 거듭거듭 이어져 공사(公私) 모두가 곤경에 빠져있고, 나라는 가난하고 백성은 유리되어, ‘임금이 뉘와 함께 흡족을 누릴 것입니까?’ 하고, 또는 ‘내가 누가 있어 임금 노릇을 할 것인가?’ 했던 그러한 걱정들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있는데, 이렇고서 부유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복(福)과 위(威)를 아래서는 만들어내는데 위에서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높다고 할 수 없겠으나, 심지어 왕위에 계시기 10년이 된 뒤에도 아직껏 적(嫡)과 장(長)이 되지 못하고, 국가에서 대우하는 예가 중자의 그것과 대등하다는 것은 천리 성경에 크게 어긋난 일일 뿐만 아니라 높지 않기로도 너무 심한 게 아니겠습니까? 편안하지 못하고, 부유하지 못하고, 높지 못하고, 영화롭지 못함이 모두 그 속에 있어 논하잘 것이 없습니다. 현자를 등용하여 효과가 그렇다면 고금 천하의 국가에 어느 누가 현자 등용하는 것을 귀히 여기겠습니까?
아, 그 두 사람들 학식과 심술에 있어서는 신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한 행위를 살펴보면 인후하지 못한 자 아니면 슬기롭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설에만은 밝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이 일생 갈고닦은 것이 예학(禮學)이라고 하기 때문에 남들도 예학이라면 그들을 추대하고, 자기 자신들도 담당해 왔는데, 그런데 국가 대례에 있어 견해가 틀리기 거의 그 모양이니, 하물며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나 나라를 굳건히 하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는 대계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아, 애석한 일입니다.
송시열이 논의를 끝맺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로 하여 더 강론하고 더 밝혀 십분 정당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어찌 다만 일시적 다행일 뿐이겠습니까.’ 했는데, 시열이 참으로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남이 박정(駁正)한 말을 틀림없이 거역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시열의 그 말은 취택할 만한 말이 됩니다. 그리고 송준길도 논의의 말단에서, ‘천하의 의리는 끝이 없고 문의(文義)에 대한 견해도 각기 다른데, 어떻게 일률적으로 그렇다 그렇지 않다를 단정할 것입니까?’ 했는데, 그 말도, 자기 입에서 나온 것 이상으로 남의 옳은 의견을 존중하여 한 말이면 역시 취택할 만한 말입니다.
혹자는 주장하기를, ‘우리 나라가 선대에는 자기 아랫사람 복에 대하여는 많이 간편을 취하여 강복을 하고 3년을 입지 않았는데, 지금 어떻게 다시 옛날 예대로 할 것인가?’ 한다는데, 그렇다면 등(滕)나라 대부(大夫)가 자기 조상들 단상(短喪) 제도를 따르자던 주장이 예이고, 맹자(孟子)가 문공(文公)에게 3년을 입도록 권한 것은 예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옛날처럼 나라가 공고할 때라면 강복을 하더라도 그것이 실례가 되어 부끄러울 뿐이지 종묘의 제사에 있어서는 해가 없겠지만, 이렇게 백성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위아래가 위태위태한 대통(大統)을 밝혀야 하는 이러한 대례를 어떻게 조금이나마 소홀히 다룰 것입니까?
또 혹자는, 당초에 이미 잘못 정한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추복(追服)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는가 보나, 옛날 송(宋)나라 임금 상에 옅은 색만으로 상복을 만들었는데, 유신(儒臣) 주희(朱熹)가 추개(追改)를 건의한바 있었습니다. 지금 기년으로 강복한 것이 송의 옅은 색 상복과 다를바 없으므로, 주자가 건의했던 대로 추복을 하는 것이 바로 불원복(不遠復) 입니다. 그게 오히려 끓는 물을 만지고도 찬물에 씻지 않고, 서리를 밟고서도 얼음을 대비하지 않았다가 결국 뭇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 종통(宗統)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가 의아하게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또, 아낙들 복 입는 것은 남자와 달라 복제를 3년으로 정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나, 그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효자가 거상(居喪)하는 예에 있어서도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행하라는 기록이 있으니, 지금 이 대왕 대비 복제도 3년으로 의주(儀注)를 고치고 팔방(八方)에 알리어 대소 신민들로 하여금 조정 공론이 다른 뜻이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하고, 그리하여 명분을 바로잡고, 국시(國是)를 정하고, 그리하여 나라를 안정된 태산 위에다 올려놓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 밖의 내전에서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예경에서 말한,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행하라고 한 교훈대로 따르면 불가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소설을 쓴 이가 성인이 아닌 바에야 한 마디쯤은 성경에 맞지 않는 경우도 어찌 없겠습니까. 만약 천리로 미루어 보아도 맞지 않고 성경에다 맞추어 보아도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아야 하지만, 만약 천리로 미루어 보아도 맞고 성경에다 맞추어 보아도 맞으면 왜 따르지 않을 것입니까? 소설에 이른바, ‘차장자를 세워도 역시 3년을 입는다.’ 한 그 말은, 천리와 성경에 딱 들어맞는 말로서 명명 백백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 예에 대하여 의논하려면 마땅히 그 설을 취용할 것이지 달리 찾을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기년 제복(除服)은 결코 해서 안 될 일이고 3년상으로 정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신의 이 말은 모두가 신이 근거없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사실 옛 성인의 예경의 뜻이며 천리에 근원한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서둘러 바로잡도록 하소서.
신이 견묘의 충정을 이기지 못하여 오직 군부와 종묘 사직이 있음을 알고 자신이 있음을 생각지 않았기에 시대의 저촉을 범해가면서 바른말을 올리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사람으로 하여 말까지 폐기하지는 마소서. 신은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느냐 않느냐와, 이 말대로 실현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주세(主勢)가 굳건하고 못하는 여부와, 국조(國祚)가 연장되고 안 되는 여부를 점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