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도와 김정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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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山子라는 별호(別號)를 아는 이가 몃 사람이 못되지만 그래도 우리 조선 사람에게 알녀지기는 불과 몇 해 전 일이요 더구나 金正皥(김정호)[1]라는 성명이나마 알게 되기는 아조 새로운 근래의 일입니다. 그러니 그의 내력이야 더구나 아는 이가 잇겟습닛가. 어느 해 어느 어느 날 무슨 시에 난 줄도 모르고 뉘 집 자손인지도 모르고 어느 고을 어느 동리인지도 모르지만 다만 황해도(黃海道) 출생이라는 것 하나만이 세상에 전하야 젓습니다. 先生이 만일 귀족(貴族)의집에 태여나서 벼슬을 하고 노론소론(老論少論)하며 남인북인(南人北人)하고 서로 다토아 보았으면 이러ᄭᅦᄭᅡ지 모르는 사람은 되지야 아니 하엿슬 것이요 양반의 집 자제 가텟스면 이러케ᄭᅡ지 모르는 사람은 아니 되엿슬 것이로대 先生은 원래가 아조 한미한 상놈의 자식이요 先生의 한 일이 워낙 그 시대에 잇서서는 한 밋친 놈의 짓으로밧게 더 알지 못하엿기 ᄯᅢ문에 그만 죄업는 죽엄을 당하고 이름조차 파뭇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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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四千年 력사를 가젓다고 자랑하고 조선은 三千里 금수江山을 가졋다고 ᄯᅥ들고 조선은 동방례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 내세지만 특별히 리조시대(李朝時代)에 와서 밤낫 당파 싸움이나 하고 헛글 헛례식(禮式)이나 숭상하엿지 하나토 실질 잇는 짓이라고는 한 것이 별로 업섯습니다. 그래 임진란리(壬辰亂)도 무참히 당하고 병자란리(丙子亂)도 참혹히 당한 것입니다. 조정(朝廷)에는 재상(宰相)이라는 이들이 세력 다툼이나 하고 민간에서는 공자왈 맹자왈이나 읽으며 양반 다툼이나 하고 잇는 판이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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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으로 태여나지 못한 古山子의 집안이라 그 부모는 一평생 한이 아들을 글을 읽켜 과거(科擧)를 보여 양반 노릇 한 번 해 보앗으면 하는 욕심이 잇지만 古山子 先生은 어려서부터 ᄯᅳᆺ이 ᄯᅡᆫ곳에 잇섯습니다. 부모가 식히는 글공부 선생이 식히는 글공부보다도 항상 반대되는 방면에 ᄯᅡᆫ쳥을 부렷습니다. 공자왈을 차저야 할 터인데 동리앞 山을 바라보고는 저 山맥이 어대서 왓슬가 하고 先生에게 무러 보고 강남풍월한다년(江南風月閑多年)을 소리 놉혀 을퍼야 할 것인데 山水 그린 병풍을 처다 보고는 조선 ᄯᅡᆼ뎅이도 저러케 그림으로 그려 보앗으면 하는 ᄯᅡᆫ 생각을 두엇습니다.

先先은 한 살 더 먹으면 더 먹는 만큼 키가 한 치 자라면 더 자라는 만큼 그 생각이 작고 커가고 더 ᄯᅳ거워 갓습니다. 그래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하다가 엇더케 해서 그 골 읍도(邑圖)라는 것이 선생의 손에 드러 왓습니다. 날ᄯᅱᆯ드시 깃버서 그것을 가지고 자긔 고을로 도라 단이며 실지와 대여 보앗지만 하나도 맛는 것이 업는 헛지도엿습니다. 서울에는 반드시 정확한 지도가 잇스려니 하고 ᄶᅩᆺ차 올나와 西大門 밧 약현(藥峴)이라는 곳에 머므르면서 이곳으로 쳥을 늣코 저곳으로 쳥을 늣코 해서 얼마 후에야 어느 대관의 주선으로 대궐 안에 잇는 규장각(奎章閣) ·· 그ᄯᅢ 모든 서적(書籍)을 맛흔 관청입니다 ·· 안에 잇는 조선 八도 지도를 한 벌 어더 가지고 위선 자긔 시골로 내려가서 ᄯᅩ 다지 맛추어 보앗스나 역시 하나도 맛는 곳이 업는지라 선생은 여긔서 단연히 모든 것을 집어 치우고 자긔 一生을 조선 지도 만들기에 밧치기로 결심하엿습니다.

『이러고서야 나라를 엇더케 직혀 가며 정치를 무엇으로 한단 말이냐 지금ᄭᅡ지 선비들은 헛짓을 하여 왔다 제 나라 지도 하나를 ᄯᅮᆨᄯᅩᆨ히 못 만드러 노코 공맹지도니 동방례의지국이니 하고 밤낫 ᄯᅥ드르면 무슨 소용이냐?』

선생은 지금ᄭᅡ지 배우던 글 공부를 모다 집어 치우고 가난한 살님이나마 다 ᄯᅥ러 업고 마누라 한 분 따님 한 분을 다리고 그야말로 남부녀대(男負女戴)하고 千리 길을 머다 아니하고 것고 걸어서 서울 西大門 밧게 외로히 와서 오막살이 한 간 집에 세 식구가 몸을 붓처 잇게 되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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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古山子 先生은 서울을 中心 삼어 가지고 조선 지도를 만들기에 착수하엿습니다. 나라의 힘도 빌지 안코 관청의 힘도 빌지 안코 부자의 힘도 빌지 안코 학자의 힘도 빌지 안코 양반의 힘도 빌지 안코 오직 자긔의 눈 자긔의 발 자긔의 손으로 혼자서 단이며 보고 보아서는 그리고 그려서는 색이고 색여서는 박히고 하야 전후 十年 二十年 三十年 자세히 햇수도 모르지만 엇잿던 장구한 시일을 허비하야 만드러 내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그의 一生 사업이엿습니다. 七十年 전 그 시절에 긔게 하나 엄시 눈으로 보아 손으로 그린 것이언만 江 하나 山 하나 동리 하나 ᄲᅢ여논 것 업고 방향 위치 넓은 것 좁은 것 길고 ᄶᅡ른 것이 틀니지 안게 심지어 멀고 갓가운 리ㅅ수ᄭᅡ지 一一히 적어서 스물두첩 열 평(坪) 이상 되는 대지도를 만드러 내여 전고에는 그만 두고 오늘가티 문명한 긔게가 발달되엿다는 세상에 안저서도 이것을 보고 놀내지 안는 이가 업고 층찬치 안는 이가 업스며 일로전쟁(日露戰爭)이라는 큰 싸움에도 일본이 익이게 된 것은 이 지도의 힘을 입은 것이 만헛고 년전 조선총독부에서 四千명의 기수와 三十萬원의 돈과 그리고도 六年ㅅ 동안이라는 세월을 허비하야 만든 토지조사국(土地調查局)의 측량도 이 지도를 근거 삼아 가지고 쉽게 성공하엿다 하니 古山子 先生 한 사람의 혼자 힘으로 만든 이 지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先生이 조선에 ᄭᅵᆺ친 공뇌가 얼마나 영구할 것입닛가 그 일을 생각한다면 눈물이 제절로 흐르게 감격한 생각이 납니다마는 슬흐게도 先生의 보수는 오직 죽임 그것ᄲᅮᆫ이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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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이 十年 二十年 三十年이나 혼자서 피와 ᄯᅡᆷ을 흘니어 박인 지도가 무엇보다도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 울어 나온 것이라 국경방비(國境防備) 가튼데 더욱 힘을 써서 자상히 만드럿기 ᄯᅢ문에 병인년양요(丙寅年洋擾) 란리에도 이 지도가 우리 조선 장수에게 아조 요긴하게 씨엿습니다. 그래 그ᄯᅢ 정권을 잡은 대원군(大院君)에게 그것이 드러가서 『요망스럽게 이런 것을 만드러서 외국 놈과 비밀을 통할냐고』 하고는 六十 평생에 그것 하나, 만드느라고 ᄲᅧ만 남은 古山子 金正皥 先生과 과하도록 시집도 못 가고 아버지 일을 도아 드린 그의 ᄯᅡ님은 이 지도 만든 것이 죄가 되야 대원군의 손택이에 잡히며 옥중에서 원통히 죽은 외로운 혼이 되고 마럿습니다. 아버지와 ᄯᅡ님이 번가라 가며 손칼질을 하야 색인 나무ᄯᅢᆨ이 지도판은 무참히도 부억 아궁이 모긔ㅅ불 감으로 거의 다 타버리고 마럿습니다. 지금은 오직 한 조각 두 조각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이 보배로 감추어 둔 것 밧게 남은 것이 업습니다. 다행히 先生이 평생에 친한 친구에게 난우 주엇던 지도 몃 벌이 엇더케 전하야 내려 와서 그나마 先生의 공뇌가 아조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안케 된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의 사업이라는 것이 대개는 이럿타 하거니와 그의 말로(末路)의 비참함이 ᄯᅩ한 古山子와 가티 참혹함이 ᄯᅩ한 적을 것이외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벌서 이야기로 들어서 아시는 분도 잇고 글로 읽어서 아시는 분도 잇겟지만 나는 이 거룩한 눈물이 흐르도록 감격할 이 古山子 先生 이야기를 몃 번이라도 거듭거듭 여러분ᄭᅦ 드리고 십습니다.

참고[편집]

  1.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金正浩이다. 나중에 《조선어 독본》에도 이 오류가 그대로 답습되므로, '조선어 독본'이 이 글을 기반으로 집필되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