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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첫날밤 (1925)
저자: 투르게네프, 역자: 현진건

1925년 5월 12일부터 6월 30일까지 시대일보에 '늘메'라는 필명으로 연재하였고,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현재 없는 시대일보 연재본은 박문서관본으로 보충한다.

투루게네프 원작

서서(瑞西)의 ‘그레샤’호(湖)라면 경치 좋기로 세계에 유명하다. 겨울 가을 할 것 없이 탑승객의 자취가 끊이지 않지마는, 더구나 늦은 봄으로부터 여름까지 더위를 피하는 손들이 너도 나도 모여 들어 겨울 같은 물 얼굴엔 사람의 그림자가 어지럽고 한가하던 산새도 발자최에 놀래매 쓸쓸한 산골이 문득 번화한 공원으로 변하는 법이다.

어느새 봄도 저물었을 때, 오후 세 시쯤 되어 그 호수ㅅ가의 훌륭한 여관에 도착한 남녀 한쌍은, 이시안(李詩安)과 그의 안해 배유리(裵琉璃)였다. 부부라고는 하였지만 아직 빈 이름 뿐이다. 오늘 아침 아홉 점에야 산 밑 ‘안델마트’란 곳 어떤 교당에서 결혼식을 마치자 말자 그만 마차를 집어 타고 신혼여행의 길을 떠난 터이니, 말하자면 이 앞으로 부부가 되는 것이지 정말 부부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평생에 이때처럼 좋은 때는 없으리라. 그 애틋한 정과 기쁜 맛이란 무엇에 견줄까. 하늘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것이요 땅을 주어도 싫다 하리라. 지나가는 일분 일초가 천금도 헐하고 만금도 싼 것이다. 오래 부부 생활을 하고 보면 서로 제 고집을 세워도 보고 바가지도 긇어 보고 뜯기도 하겠지만, 신혼여행을 하는 첫날이야말로 새맑은 하늘에 한 점 구름인들 왜 있으랴. 안해인 유리로 말하면, 여여덟 살이 되었을까 말았을까, 다만 여학교를 졸업하였을 뿐인데 ‘안델마트’에 두류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다니러 왔다가 고만 이시안에게 작고 깨끗한 가슴을 태우게 된 것이다. 얼굴도 어여쁘거니와 재산도 넉넉하기 때문에 많은 사내들이 침을 흘리며 뒤꽁무니를 따라 다녔지만 한번 이시안을 만난 후로는 다른 남자에겐 눈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이 혼례식까지 지내게 되었으니 아직 티끌 세상의 거친 물결이란 겪어 보지 못한 아가씨다. 조선에서는 여학교 하나만 졸업하면 갖은 것을 다 아는 척하고 멋대로 건방짐을 부리지만, 서양에서는 여학교쯤 마쳤다 해도 숫보기 규중 처녀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남편되는 이시안도 스물 남짓한 청년으로 신분은 상당하지마는 수년 전에 몹쓸 계집에게 속아서 한번 혼인한 일이 있다. 그 때문에 부모에게 몇 달 동안 의절까지 당한 것ㅇ르 보면, 자세히는 알 수 없어도 그 계집에게 여간 곡경을 당하지 않은 모양이나 마침내 서로 갈라서게 된 것만 만행이랄까. 본래 착실하고 얌전한 그는 그후부터 자기의 허물을 깊이 뉘우치고 인제 세상 사람이 저를 돌아보지도 않으리라 하여 문을 굳이 닫고 바깥 출입도 자조하려던 차 그 여자는 미국에 가서 죽고 말았다.

이만한 일은 젊은 사람에게 행용 있는 일이어늘 그렇게 실심낙담을 하야 구만리 같은 전정을 그르칠 게 무에냐, 고 형과 친구들이 권고도 하고 격려도 하는 바람에 표연히 외국 유학의 길을 떠나 대학교를 마치고는 세계를 만유하던 길에 배유리를 만나게 되었다. 눈과 눈이 서로 마주 치는 그 순간으로부터, 젊은 가슴엔 새 사랑의 눈이 트기 시작하였다. 유리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차라리 죽느니만 같지 못할 듯 싶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에는 이전 안해의 검은 그림자가 떠오르지 않음은 아니로되 지난 일은 물로 흘려 보내자, 어수선한 꿈자리로 사러 버리자.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아니냐. 만일 유리가 나의 지난 허물을 용서하고 백년가약을 맺어줄진댄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그뿐이 아니냐. 이렇게 마음에 단단이 맹서하고 자기 형에게 그 사연을 말헀더니 형도 매우 찬성을 하며 곧 배유리의 모친에게 편지로 혼인을 구한 결과, 모든 일이 순리로 성취되었다. 세상에 이에 더한 기쁨이 또 있으랴.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안해가 손에 손을 서로 잡고 신혼여행을 나왔으나 시안이나 유리나 마치 천당에 오른 듯하였다.

둘은 집을 여관 방에 푼 뒤에 어깨를 겨누고 석양이 기울도록 산보를 하고 돌아 왔다. 저녁 때, 오는 우편마차로 혹은 시안의 형으로부터 축하 편지가 올 듯하기에 여관 문 앞에 교의를 나란히 끌어다 놓고, 돌 아닌 딴 사람은 들어도 모를 이야기를 속살속살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중 유리는 무심코 이런 말을 물었다.

“여보, 처음 결혼을 하신 때에도 이렇게 기뻤어요?” 물론 질투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다만 넘치는 기쁨을 걷잡다 못해 말이 잠깐 딴 길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듣는 시안은 눈썹을 찡기며,

“인제 그 일은 입에 올리지도 맙시다. 그렇잖아?” 유리는 곧 제가 안할 말을 했구나, 하고 조금 무색하였다.

어느덧 황혼 빛은 짙어지고, 산골을 스처오는 찬 바람이 즐거움에 흐물어질 그들의 옷깃을 엄습하였다. 유리는 조금 몸을 떨며

“나, 목도리를 하고 올 테요. 그러고 짐짝도 좀 풀지요. 당신 것도 내 손으로 끌러 드리지” 시안도 같이 일어서려다가, 마침 멀리서 마차 소리가 나기 때문에 주춤 걸음을 멈추며 “그러면 곧 갈 터이니 혼자 풀어 보구려”

자기 형의 축하편지가 올 줄 안 그 마차로부터 자기네의 행복을 여지없이 부숴버릴 괴물이 나타날 줄이야! 귀신 아닌 시안으로 어찌 뜻하였으랴.

유리가 들어간 후 마차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시안은 자기 형의 축하편지를 기다릴 뿐이지 그 마차로부터 무슨 불길한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마차는 닿을 데 닿았다. 우편물은 없었던지 마부는 체신성의 표가 붙은 부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 대신 마차로부터 부인 하나이 나려선다. 훌륭한 여행복을 차렸고 나이는 사십쯤 되었을 듯. 시안은 무심코 그 얼굴을 보았다. 그 부인도 시안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저편은 무심히 하는 일이 아니요, 그 눈에는 분명히 빈정대고 득의양양한 웃음이 떠돌았다. 시안은 그 싸늘하고 비웃는 눈이 한번 제 얼굴을 쏘자 악 하고 외마디 소리를 칠 뻔하였다. 밟고 선 땅이 문득 소용돌이를 치며 어찔어찔 그 자리에 넘어질 듯하였다. 시안이가 이대도록 놀래고 당황함도 무리가 아니니, 그 부인이야말로 미국에서 죽은 줄 알았던 자기 안해인 까닭이다.

이 어쩐 심술궂은 운명이냐, 기절할 인연이냐. 죽은 줄 알았던 요악한 계집이 다시 살아온 것이다. 보통 여자 같으면 그래도 모르련마는, 남을 속여먹고 욕보이고 호려내는 것을 큰 재조로 아는 징글징글한 계집년! 그 계집이 아직 죽지 않았구나! 죽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구나! 더군다나 시방도 안해는 분명한 나의 안해다. 돈을 주어서 갈라는 섰지마는 정식 이혼은 아니었다. 다만 당자가 죽어 버린 까닭에 이혼 수속을 하지 않아도 절로 타첩이 된 줄 알았을 뿐이다.

그것이 잘못이다. 생각하면 생각수록 여간 잘못이 아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시방 와서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마는, 하필 오늘이란 오늘에야 하늘에서 떨어지듯 땅에서 솟아올르듯 나타났단 말이냐. 어여쁜 유리와 혼인한 첫날밤에 그 지긋지긋한 얼굴을 드러낼 게 무엇이냐. 아아 왜 어제 나타나지 않았던고! 만일 어제 나타났더면 유리와 혼례나 지내지 않았을 것을. 왜 내일 나타나지 않는고! 내일 나타났던들 ─ 내일 나타났든 ─ 아아 왜 길이길이 나타나지 않고 말지 않았는고!

시안이가 이렇게 고민할 사이 그년은 마치 ‘이 얼굴을 잊기야 안 했겠지’ 하는 듯이 시안을 노리면서, 아니 시안에게 제 얼굴을 맘껏 실컷 노리게 하고는 천천히 여관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시안은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넘어지는 듯이 앉았던 교의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다시 일어서려고도 안 했다. 그대로 고개를 빠뜨리고 물 끓듯 하는 생각에 잦아졌다.

아모리 생각해 보아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제 전처가 살아있는 다음에야 오늘 아츰 유리하고 지낸 혼례는 손톱만한 효력도 없다. 아니, 혼례라고 일컬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안해가 눈이 등잔같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른 여자와 혼인을 못하는 법이다. 자기는 유리를 안해라고 부를 권리가 없다. 권리가 없을 뿐인가, 이 여관에 데리고 온 것부터 예에 벗어난 노릇이다. 그의 곁에도 가까이 갈 수가 없지 않으냐.

사면이 적적해짐을 따라, 저편 호수에 떨어지는 폭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하다. 차라리 저 폭포에 몸을 던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하였다.

그렇다, 이런 경우에 고통을 벗을 길은 오즉 자살뿐이라 하였다. 그는 정말 물고기의 밥이 되어 원 많은 넋을 지으리라 하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려다가 문득 생각하니, 만일 내가 죽는다면 유리는 어찌 될까, 아모 죄 없는 그는 혼인하던 첫날밤에 남편을 여의고 청춘과부로 꽃다운 일평생을 한숨과 눈물로 보낼 것이 아니냐. 그나 그뿐인가, 세상에 대한 치욕은 또 무엇으로 씻으랴. 불쌍도 한지고, 가엾기도 한지고! 혹은 기구한 제 팔자에 울고 울다가 눈물 속에서 연약한 목숨이 잦아질는지도 모르리라. 그러면 차라리 그와 같이 죽을 일이다. 그렇다. 그리하는 것이 피차에 좋은 일이다. 그대도록 살갑고 귀여운 이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 어찌 나 혼자 목숨을 끊을 수 있으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 정사! 정사! 그 얼마나 섧고도 아름다운 일이랴. 슬프고도 기쁜 일이랴. 한데 어우러진 두 몸과 두 맘이 맑은 물에 씻기고 또 씻기어 한없이 끝없이 깨끗한 사랑을 누릴 수 있으리라……. 시안은 고만 정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정사! 이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못할 짓이다. 오늘밤 이 여관에 같이 온 것부터 미안한 일이어든, 그 어린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을까. 못할 일이다. 못할 일이다, 차마 못할 일이다. 내 안해도 아모 것도 아닌 여자를 죽여서 될 말인가. 만일 내 안해요, 내 사람이라 할 것 같으면 ─ 그렇다, 만일 내 안해 같으면 죽인다 하기로니 ─ 생각이 이에 미치매 문득 그의 마음에도 무서운 판단이 나리고 말았다. 옳지, 옳지, 안해를 죽여버리는 것이 가장 적당한 조처라 하였다. 유리를 죽일 수는 없지마는, 시방 나타난 정말 안해를 죽이자면 못 죽일 바도 아니다. 아니, 꼭 죽여야만 될 일이다. 그 악독한 안해만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면 유리를 슬픔과 치욕에서 건져낼 수가 있지 않으냐. 번민과 고통에서 내 자신도 구해낼 수가 있지 않으냐. 그 후에 유리와 다시 혼례를 지내고 보면 이 행복이 부서지지 않으리라, 이 기쁨이 사라지지 않으리라. 이대로 정다운 부부, 이대로 즐거운 신혼여행 ─ 아아 이보담 더 좋은 방법이 어데 있으랴. 그는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심연희(沈蓮姬)를 죽이자, 그러면 유리와 내 몸을 구해 낼 수가 있다. 죽이자, 죽이자.”

심연희란 시방 나타난 요악한 계집의 성명이다. 그는 인제 사람이 아니다. 사나운 짐승이 되었다, 모진 악마가 되었다. 심연희를 죽인다고 외우친 그 말이 소리가 되어 입으로 나왔는지, 또는 목에까지 올라오지 않고 뱃속에서만 중얼거리고 말았는지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하였다. 하여튼 그년을 죽이겠다고 최후로 결심한 것이다. ‘죽이자. 죽이자.’ 다시 되풀이할 즈음에 등뒤에서 사람의 소리가 났다.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이 군!”

꿈이 갑자기 깨이듯, 깜짝 놀래어 돌아다 본즉, 지금 산보를 하고 돌아온 한 여관의 손님으로 일찍이 유리의 모친과 친하게 지내던 영국 태생인 마백륜(馬伯倫)이란 신사이었다. 유리도 물론 이 사람을 안다. 자기 또한 두어번 인사를 교환한 일도 있었다. 그럴 뿐더러 아까 유리와 같이 산보를 할 때에도 이 사람을 만난 일까지 있다. 시안은 그의 얼굴을 보고,

“나는 누구시라고?”

하면서 숨을 내쉬었다.

만일 그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던들 시안의 행동을 괴이하게 생각하였으리라. 아니, 의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두운 저녁이 아니요 밝은 낮일 것 같으면 시안의 앞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보고, 심상한 일이 아닌 줄은 대번에 짐작하였으리라. 그러나 그가 의심이 많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시안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껄껄 웃으며,

“왜 당신 혼자 이런 데서 계십니까? 그러면 유리 씨가, 아차 이시안 씨의 영부인께옵서 여간 근심을 하실까요.?”

놀라는 듯 비웃는 듯, 한 마디를 남겨 두고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여관으로 들어갔다.

마백륜으로 말미암아 시안은 본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심연희를 죽이자는 결심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면 차릴수록 죽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을 뿐이다. 그는 죽이고 난 뒤의 조처까지 생각해 보았다. 오즉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연희가 제 본성과 본 이름을 숙박기에 적지나 않았나 하는 것이다. 더구나 성으로 말하면 내 성을 따랐으니, 만일 그대로 적어 두었다면, 죽인 혐의는 갈데없이 내 몸에 돌아올 것이 아니냐. 빌어먹을 것, 혐의가 돌아온다기로 상관할 것이 무엇이냐. 내일 아츰 일찍이 유리를 데리고 달아나면 그뿐이다. 연희의 시체를 나리잘르는 폭포 밑에만 집어 던지면, 쏜살같은 물길에 밀리어 백리나 이백리나 떠나려 갈터이니, 발각될 염려는 없을 것이다.

옳다, 그렇다. 인제는 연희를 물가에 꾀어내기만 하면 그뿐이다. 절벽으로부터 천야만야한 물속에 밀어 넣기만 하면 만사가 귀정 나고 말 것이다. 아아, 어찌하면 이만한 생각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던고. 한동안, 쓸데없이 마음을 괴롭게 하였구나, 하면서 안심의 숨을 내어쉴 때에, 여관 뽀이가 나와서 쪽지 하나를 전한다. 문틈으로 새어 흐르는 불빛에 비춰본즉 연희의 필적이 분명하다. 그 사연에 하였으되,

“보시는 바와 같이 나는 아즉 죽지 않았답니다. 죽었다고 신문에 낸 것은 무슨 사정이 있어서 한 일이에요. 당신이 기를 쓰고 모아둔 연희의 죽은 증거는 한푼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 꼭 여쭐 말씀이 있으니, 물가로 열 점에 와 주셔요. 오시지 않으면 내 본성명을 드러낼 터에요.”

화약을 지고 불로 뛰어든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름인가. 꾀어내려는 장소에 제 발로 걸어오려 할 줄이야.

이편에서 꾀어내려는 장소로 저편에서 만나자는 것은 그 얼마나 잘된 일이랴. 물론 시안은 기뻐하였다. 더구나 아직 제 본 이름을 나타내지 않은 것도 죽인 뒤에 걱정을 여간 덜어 주는 것이 아니다. 셋씩 넷씩 가짜 이름을 쌔를 따라 경우를 따라 쓰는 계집이라 본명을 숨김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로되 이 계집의 한 일 중에 조금이라도 고맙게 생각한 것은 전후에 오즉 이번뿐이다.

짤막한 사연 가운데에도 통략과 위협이 군데군데 보이었다. 무슨 편지에라도 남을 빈정대고 어르는 구절을 넣는 것이 이 계집의 버릇이거니, 시방 와서 새삼스럽게 놀랠 것도 아니오 겁낼 것도 아니다.

“죽이자, 죽이자” 또 한 번 뇌이고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 여관에 들어가 본즉, 사랑스러운 유리는 벌써 복도까지 나와서 식당에 들어가려고 시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번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자, 시안의 마음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쓰리고 말았다. 속살을 알고 보면 이 몸의 안해도 아니어늘, 이 몸을 남편으로 튼튼히 믿고 알뜰히 섬기는가. 이대도록 거짓이 많고 죄악이 깊은 마음으로, 천사와 같이 맑고 깨끗한 그의 곁에라도 갔다가 천벌이나 내리지나 않을까. 단 몇 시간을 지내지 못하여 세상에도 무서운 살인죄를 범할 이 몸이어든, 차마 그와 어깨를 겨누고 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을까. 거울 같은 저 마음, 수채 같은 이 마음! 유리의 곁으로 다가가는 시안의 손과 다리가 저절로 떨리었다. 나중에 이 몸의 죄악을 알고 보면 얼마나 한란하고 슬퍼할 것인가. 시안의 머리는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졌다.

아무리 하여도 연희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 이것만은 벌써 결정해 놓은 일이오 조금치라도 꺼리거나 두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부 유리에게 누를 끼칠 일이 뼈를 깎아내는 것보다도 더한 고통이었다.

유리가 나의 정말 안해가 아닌 줄 안 이때에, 아모 말 없이 안해로 대접해서 옳은 일일까. 내일부터 살인죄가 있는 몸으로 뻔뻔스럽게 유리의 남편 노릇을 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일일까.

이런 생각을 하매, 스스로 무서운 마음에 몸서리를 쳤지마는 이런 경우에 마음이 약해서야 무슨 일을 하랴 하고, 억지로 양심을 눌러 버리려고 애를 썼다. 죽일 년은 죽이고 말아야 한다, 그년을 살려 놓으면 유리를 번듯한 내 안해로 삼을 수 없다. 무슨 죄를 저지를지라도 유리만은 놓치기 싫다, 죽어도 싫다. “죽이자, 죽이자” 또 한 번 재우치고 시안은 유리와 함께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에는 연희도 벌써 자리를 잡았고 그 맞은 편에는 마백륜도 앉아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손들이 많았지만, 시안은 그들에게 눈도 거들떠 보지 않고 식탁에 앉자마자, “뽀이, 술을 가져와, 술을” 하고, 부르짖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한다 하더니만, 하면서 유리는 이상하다 하는 듯이 시안의 기색을 살피었다.

술잔을 손에 들자, 시안은 다시 생각하였다. 술로 제 양심을 마비해 두고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오늘 밤에 연희를 죽이는 것은 충분히 생각해보고 하는 노릇인즉, 비열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 자기의 양심의 한 점의 흐린 데 없이 엄밀한 감시를 하는 곳에서 죽일 것이다. 그러면 언제든지 후회를 하지 않게 될 것이라 하였다.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면 상상도 못할 별별 일이 다 마음에 떠오르는 모양이다.

결국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유리도 그리 많이 먹지를 않으므로 얼마 아니되어 식사를 마치고 그와 유리는 누구보다도 먼저 식당을 빠져나왔다. 인기척도 없는 복도 구석에 다다르자 그는 다짜고짜로 유리의 손목을 쥐었다. 그 쥐는 손아귀에는 이상하게 힘이 넘치므로 유리는 괴이쩍게 시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보, 유리씨, 당신은 일평생을 나와 같이 지내겠다 하였지요”

물론, 교당에서 혼례식할 때에 맹서한 말이 백년이 다 진토록 이별 마자 하였는지라, 유리는 고개를 다소곳하며

“녜!” 라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그는 물끄러미 유리를 바라보다가

“정말 나와 백년의 고락을 같이 합시다” 하고는, 일부러 소리쳐 웃었다. 전 같으면 그의 웃음소리는, 기쁘게 탐탁하게 유리의 창자 밑까지 스며들 것이어만, 오늘밤의 이 웃음은 어쩐지 속 힘이 없고 쓸쓸하게 울리었다. 이윽고 그는 가장 다정한 목청으로

“퍽도 곤하지요. 먼저 가서 누웠구려. 난 조금 산보를 하다가 들어갈 터이니”

말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결혼한 첫날 밤에 신랑의 말로는 적이 냉담한 느낌이 없지 않다.

사랑에 겨운 첫날밤의 신랑 신부이어니 일초일분인들 서로 떨어지려 할 것이 아니다. 산보를 가도 같이 갈 일이요, 피곤한 몸을 쉬어도 같이 쉴 일이 아니냐. 그러나 어린 유리도 첫날밤에 사랑이 어떻게 다정히 굴고 어떻게 행동해야 마땅할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시안의 먼저 들어가라는 말에, 역시 ‘녜!’ 하고 선선히 제 방으로 돌아왔다. 만일 혼례하기 전 같으면, 유리는 이런 냉담한 말은 듣지도 않고, 시안의 말에 매어달리며,

“나도 같이 산보를 가요.”

하고, 따라섰을는지 모를 것이로되, 부부란 이름이 붙고 보니, 그런 응석을 피기가 도리어 겸연쩍었다.

시안은 천천히 마당에 나왔다. 어느 결엔지, 달이 떠서 땅 위에 길게 누운 나무 그림자가 이곳에 독특한 밤경치를 그리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여관 문을 나와 강을 끼고 비탈길을 걸어서 연희와 만나자고 맞춘 곳에 다다랐다. 그 곳이야말로 오늘밤의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이었다. 밤이 이슥해질수록 사람의 그림자도 어른대지 아니하고, 소리를 질른다 한들 우렁찬 물소리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얼마를 서성서성하고 있노라니 저편 모롱이에 여자 하나가 나타난다.

‘숄’로 다 가라우지도 못한 어깨가 달빛에 부시며, 헌출한 흰 모양이 쏘는 듯이 보임은 연희가 분명하다. 대담한 여자도 있고는 볼 일이다. 이다지 음침한 곳을, 비밀히 만나야 할 일이라고는 하지마는, 제출물에 골라놓고, 홑몸으로 다가설 줄이야! 목숨 귀한 줄 모른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얼마동안 그 모양은 우거진 나무 그늘에 숨으락 돋아나락 하다가 마츰내 시안의 코앞에 나타났다. 시안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가슴은 불같이 가라앉고 얼음같이 찼다. 제 발부리의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를 굽어보면서, 여기서 밀어 박질르기만 하면 타살인 줄은 아모도 모르리라 하였다. 제 잘못으로 발을 헛디딘 줄 인정하리라 하였다.

“서로 갈린 지 오년 동안에 그리 변하지 않으셨구려.”

하고, 연희는 친숙하게 먼저 말을 건네었다. 시안은 몰풍스럽게,

“변하지 않을 리 있나! 아모한테라도 속던 도련님이 인제는 훌륭한 악마가 되었다. 이것도 네년의 덕택이다.”

정말 기막힌 소리다. 그러나 연희는 들은 체 만 체,

“내 얼굴도 조금 변했지?”

하고, 밝은 달빛에 제 얼굴을 비춰 보임은, 저의 아름다운 꼴로 얼마쯤 지낸 날의 사랑을 자아내려 함이리라. 그야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시안은 더욱더욱 얄미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런 요물이 또 어데 있으랴. 벌써 삼십을 지냈거늘 그 입술이란 마치 갓 핀 꽃잎과 같다. 시안은 다짜고짜 없이,

“변하고 아니 변한 것은 네가 아랑곳할 일이 아니다. 어서 할 말을 일러다고.”

하면서도 낭떠러지를 옆눈질하였다. 고만 밀어 던질까. 연희는 다시 비웃는 어조로,

“대단히 서두는구먼.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겠네. 한시바삐 신부 곁에 가고 싶지?”

“할 말이나 해!”

“아까 식당에서 보니까, 아주 어린애더구먼. 요새는 또 그런 것을 좋아하게 되었소?”

밀어 던지려면 이 때라 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팔이 벌어지지 않았다.

“할 말을 해!”

“하하하, 딱딱하기가 바루 관리의 말투 같구먼. 내 할 말이야 입밖에 내지 않아도 뻐언히 다 알면서도 그래. 예전대로 부부가 되어 달라 해도 시방 형편으로는 들어주지 않을 테니 돈을 주어요. 그것도 싫으면 나는 내 본명을 드러내고 말 테야.”

시안은 이런 경우에 어울리지 않은 큰 소리로,

“싫다.”

라고 딱 끊어 말했다. 그 말과 한 께 그의 팔은 제법 벌어졌다. 아니, 벌어지려고 옴츠러들었다.

연희는 그 소리에 조금 놀랜 모양이러니 곧 다시 냉정해지며,

“소리만 질르면 누가 겁을 낼 줄 아나베. 싫기는 무엇이 싫단 말야. 돈만 주면 나는 이대로 몸을 숨기어, 네놈허고 그 어린 년을 어데까지 부부가 되도록 해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연희야말로 시안의 안해다 하면서, 나설테니, 그때 후회는 말아요.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싫으냐?”

“다 싫다!”

“다 싫고 견디어 갈 줄 알아?”

시안은 다시 두말 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부르짖었다.

“네년을 죽일 테다. 죽이고 말겠다.”

“네년을 죽일 테다 죽이고 말겠다.”

하는 시안의 형상은 진실로 무서웠다. 제아무리 악독한 계집년이라도 이런 경우에는 ― 벼락같이 죽인다고 야단을 치고, 정말 죽일 듯이 서슬이 푸른 것을 보고야 아니 두려워할 수 없으리라. 더군다나 제가 흉악하니만치, 또 저편이 고지식하니만치 한층 더 무서운 법이다. 연희는 몸을 벌벌 떨며, 가위 눌린 목소리로

“시안!” 하고 외마디 소리를 쳤다.

“아까부터 몇 번을 생각해보았지만 너같은 년은 도저히 이 세상에 살려 둘 수 없다. 자아, 이년아 내 손에 죽어봐라, 네년의 목숨을 빼앗고야 말 것이다.”

연희는 겁결에 저절로 뒷걸음을 쳤다. 그런데 바루 그의 등 뒤에는 낭떠러지가 하품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밟는 발엔 받치는 것이 없고 허공임을 어찌하랴. 악 소리를 칠 겨를도 없이 연희의 몸은 절벽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여간한 악인이 아니고는 못할 노릇이다. 세상에는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빼앗는 악인도 있지마는, 도저히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시안과 같은 위인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죽인다, 죽인다 하지마는, 정말 실행할 만한 담력이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몇 번이나 손을 내어밀었으나 그 손이 도리어 움츠러든 것이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 보면 시방 연희가 발을 헛디디어 절벽 위에서 떨어진 것은 시안에겐 매우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만일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던들 시안의 손으론 결코 연희의 목숨을 끊을 수 없었으리라. 어느 때까지 연희에게 졸리고 쪼들렸으리라. 그래도 시안의 생각에는,

“아하, 떨어졌다. 제출물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 손으로 밀어뜨리랴 했더니만, 제가 미리 떨어지니. 어쩐지 마음에 조금 미협한걸. 얼핏 떠다밀더면 좋을 걸 갖다가.”

그는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입밖에 내어 중얼거리기까지 하였다. 이것이 건전한 정신일까. 그의 정신이 보통 때보담 얼마쯤 달라진 것이 아닐까.

그는 또 속살거렸다.

“어쨌든 일은 잘 되었다. 연희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았으니, 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안심을 하자마자 그는 문득 스스로 놀래었다. 이렇게 안심을 하고 배길 수 있을까. 이대로 시침을 딱 떼고 유리와 부부가 되어서 옳은 일일까. 그는 다시금 여러 가지 염려에 덜미가 잡히어, 슬금슬금 절벽가로 나와, 시방 연희가 빠진 곳을 나려다보았다.

아아, 이런 몸서리칠 광경이 어데 있으랴. 연희는 아주 낭떠리지에 떨어지고 만 것은 아니다. 떨어지다가 바루 시안의 발밑에 있는 바위 모서리를 부여잡고, 두 손의 힘으로 허공에 디룽디룽하며 달려 있지 않은가.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서 기어오르려고 버르적거리지 않는가.

“시안 씨! 시안 씨!”

그녀는 부르짖었다. 지옥 속에서 떠오르는 듯하는 무서운 그 소리와 참혹한 그 모양에 시안은 저도 모를 사이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억지로 모진 말을 골라서,

“너같이 요악한 년에게는 그렇게 뒤어지는 게 마땅한 일이다. 이삼 분만 지내 보아, 손에 힘이 빠지면 천야만야한 바위 등성이에 가루가 될 테니.”

“시안 씨! 시안 씨!” 연희는 다시금 외우쳤다.

“살려 주어요. 사람을 살려 주어요. 손에 힘이 없어지는구먼. 에그머니, 바위 모서리가 축축해서 손이 미끄러지려 하네.”

비두발괄하다 못한 연희는 악을 바락 썼다.

“그래, 정말 나를 죽일 작정이야. 나를 죽이고 네 몸은 성할 줄 아느냐. 살인죄를 범한 놈이 시침을 딱 떼고 아모 것도 모르는 그 어린 년의 남편 노릇을 할 듯싶으냐? 그러고도 하늘이 무섭지 않을 듯싶으냐?”

그러나 그 발악조차 길지 않았다.

“에그머니 인제 함이 다 빠졌구먼. 이 망할 바위가 왜 이렇게 미끄러워, 왜 이렇게 미끄러워, 사람을 살려요. 살려만 주면 그 은혜는 잊지 않을 테니. 살려 쥬, 살려 쥬.”

시안의 마음은 흔들리었다. 시방까지도 산란치 않았던 것은 아니로되 연희의 악쓰는 바람에 본 정신이 돌아오고 말았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 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살인죄를 범한 놈이 아모 것도 모르는 어린 년의 남편 노릇을 할 듯싶으냐?”

하는 한 마디가 못을 친 듯이 그의 가슴에 깊이깊이 박히었다. 그렇다. 참으로 그렇다. 살인죄를 숨겨두고 멀쩡하게 유리의 남편 노릇을 한다는 건 너무도 뻔뻔한 짓이다, 무서운 짓이다. 그럴 사이에 연희의 소리는 벌써 말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피를 뿜어내는 듯한 단말마(斷末魔)의 외마디 소리였다. 시안은 차마 그냥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겐 그것을 대항할 만한 모진 심장이 없었다.

“에잇, 할 수 없다.”

하고, 절벽을 나려다보며,

“요 요악한 계집년. 시방 와서도 내 마음을 수란케 하는구나. 자, 살려주지.”

하고, 손을 늘여 연희의 손을 쥐었다. 죽이려는 데는 늘이지지 않던 손도 살리려는 데는 늘어났다. 갖은 애를 쓰며 간신간신히 끌어올려서 마츰내 겨드랑이를 부여안아 절벽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이것을 비극이라 할까, 희극이라 할까. 세상도 넓고 사람도 많지마는 이런 광경은 좀처럼 구경할 수 없으리라, 이런 일을 겪어본 이도 없으리라. 가슴에 새기고 마음에 뇌여가며 죽이겠다고, 쪼겨야만 되겠다고, 맹서맹서하던 사람이 도리어 구해내고 건져주는 부처가 될 줄이야.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 보며 절벽 위에 섰을 제, 어느 편이 죽이려 하였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시안의 얼굴은 비지땀이 흐르고 죽은 사람같이 해쓱할 뿐더러 왼몸이 바람 만난 갈대잎처럼 떨고 있다. 연희로 말하면 전신의 피가 모조리 깡그리 상판으로 모였던지 껍질이 터질 듯이 새빨갛게 번쩍인다. 어느 때까지 둘은 서로 노리면서 서 있었다. 선 채로 밤을 새우려는 듯하였다. 이윽고 연희 편에서 먼저 긴장한 얼굴을 풀어 버리며 쓸쓸한 코웃음을 치고는,

“암만해도 무섭잖아. 너 같은 것을 겁낼 이 연희가 아니란다. 곤죽 같은 네가 사람을 죽이면 난 손가락에 불을 붙이고 하늘에 올라갈 테야.”

그야말로 ‘곤죽’이로구나 하고 시안은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게 이러한지도 모르리라. 죽이자는 마음을 먹자마자, 대번에 죽이기는 어렵지마는 한번 죽이려다가 실패를 하고, 또다시 죽일 마음을 먹을 때에는 그 때야말로 거침없이 죽이고 말 것 같다, 악독한 마음이란 점점 굳어지고 단단해질 것 같다. 사안은 진국으로,

“두고 보아, 이 다음에는 그예 죽이고 말 테니.”

이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지독하고 날카로운 것은, 그렇듯 악독한 계집으로도,

“인제 네 곁에 오지만 않으면 그뿐이 아니냐.”

고 대답한 걸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시안은 못내 반기며,

“제발 그리해 다고, 다시일랑 내 앞에 어른대지 말아 다고. 자 이것은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여비로 주는 것이다. 내일 아츰에 빨리 이 곳을 떠나다고.”

하면서, 마츰 지니고 있던 백원 가량을 내어준 것은 진실로 시안의 사람 된 품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연희는 그 돈을 받으며,

“애걔 요것뿐이야.”

라고, 매우 불만하게 여기는 눈치다. 그러면 약속대로 이 곳을 떠나갈는지 말는지 적지 않은 의문이다.

“하여튼 오늘밤에 천천히 생각해 봐야 돼……”

또 한 마디를 재우치고는 연희는 저 갈 데로 가 버렸다.

잘 되었든 못 되었든 오늘밤 이 일은 이대로 끝이 났다고, 시안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뒷걱정이 여간 큰 게 아니다. 이렇게 된 다음에야 모든 것을 유리에게 고백 않을 수 없다. 연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유리를 안해로 삼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아츰 혼례도 혼례가 아닌 것이다.

사실대로 샅샅이 알려준 뒤에 유리를 돌려보내는 것밖에 딴 도리가 없다 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쉽사리 뜻대로 실행할 수가 있을까?

아아, 연희를 죽이려다가 실패를 하고 말았다. 목숨을 빼앗으려다가 도리어 붙여 주고 말았다. 못난 짓도 분수가 있지 않으냐, 얼빠진 노릇도 한도가 있지 않으냐. “에잇, 과연 나는 곤죽이다.” 원통한 듯이 시안은 외쳤다. 곤죽이라면 곤죽 아닌 것도 아니다. 악한 일을 당연히 해내트릴 기력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희생에 바칠지라도, 바른길을 밟아나갈 결심도 못하는 모양이다.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번민과 수심으로 해를 지우고 밤을 밝히며 제 살을 내리는 이는 대개 이따위 인물이다. 만일 참된 악인 같으면 마음 먹은 대로 눈 한 번 깜짝이는 법 업시 아무리 악착한 짓이라도 해낼 터이니 그렇게 제 마음을 괴롭게 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또 참된 선인 같으면 착한 일을 한 것을 가슴 속 깊이 기뻐하기에도 겨를이 없으려든, 그른 일에 연연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시안은 돌아가는 연희의 뒷모양을 바라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건만 다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길로 쫓아 가서 새삼스럽게 연희를 죽여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정을 유리에게 이실직고하든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취할밖에 업나. 그 좋은 기회를 놓쳐 버리고 다시금 연희를 죽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 암만해도 유리에게 고백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뚜렷한 안해가 있다. 오늘 아침 너와 나와 혼례를 지낸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니 여기서 갈라 서자, 맺었던 인연을 끊고 다시 남이 되자.” 이렇게 말할밖에 없다.

생각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보았건만, 만족할 수가 도무지 나서지 않는다. 이 길로 돌아가서 유리에게 사정을 말해 버리리라고, 칼로 에여 내는 듯한 아프고 쓰린 작정을 하고 말았다. 그러니 갑자기 다리가 천 근이나 되는 듯이 무거워져서 좀처럼 발길이 내켜지지를 않았다. 이십 분도 걸리지 않을 길을 한 시간이 훨씬 넘도록 걸어서 여관에 돌아와 보니 밤은 벌써 자정이 넘었다. 연희도 자고, 유리도 자는 모양. 다만 밤새움하는 손 두셋이, 뽀이의 귀찮아 하는 것도 헤아리지 않고, 담화실에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며 담배를 피우며 술을 청하며 노닥거리고 있을 뿐. 마백륜이란 궐자도 그중에 끼어있었다.

쉰길로 시안은 유리의 방문 앞까지 다다랐건만, 다시금 머뭇머뭇 하였다. 곤한 잠에 떨어진 이를 깨워 앉히고 반갑지 않은 그런 사정을 알림이 무엇보담도 애달픈 일이었다. 그러나 이 밤이란 이 밤은 유리의 신상에 여간 중대한 일이 아니다. 남편도 아닌 남자를 남편인 줄로 알고, 한 여관에서 같이 잤다고 하면 유리는 색상에 고개도 들 수 없게 되고 만다. 거룩하고 깨끗한 처녀의 자랑에 닦을 수 없는 흠절이 묻게 되어, 평생을 어둠 속에서 보내고 말게 된다. 그야 어찌 차마 할 일이랴. 모든 것을 샅샅이 알려 준 후, 이 밤이 새기 전에 자기 어머니의 숙소까지 데려다 주어야 한다.

야차와 같은 아까 마음과는 아주 딴판으로 이번에는 보살 같이 선심이 났다. 이 마음이 또다시 변해지지는 않을런지? 그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유리 씨, 유리 씨” 하고, 불렀다.

유리는 그때껏 잠이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르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바시시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이러틋이 산드러지고 어여쁜 모양은 또다시 없으리라. 잠은 들지 않았지만, 벌써 잘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새벽녁의 골안개처럼 여리고 흰 속옷을 허늘 허늘하게 감는 듯이 입었는데, 느슨하게 매인 허 리가 길게 길게 늘어졌다. 아낌 입시 드러난 팔과 목 언저리는 우유에 살작 분홍을 물들인 듯, 흰 구름에 싸인 천사의 모양도 이보다 더 아름답다고 누가 보증하랴. 어느 날 유리를 아니 본 날이 없는 시안으로도 이런 모양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를 부르셨어요?” 웃는 듯이 방싯 웃다가, 속옷만 입은 제 모양을 부끄러워함이런지, 하늘 하늘한 두 뺨이 갑자기 붉어진다.

“응, 불렀소.”

시안은 대답하였건만, 그 소리는 보통 때와 아주 달랐다. 제 귀에도 남의 소리 같이 들리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유리의 손을 부여 잡자, 방안에 비틀거리며 들어와서, 유리를 교의에 앉히고 자기도 그 앞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는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은 움직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눈치다. 그러나 좀처럼 말은 나오지 않았다.

시안의 하는 양이 암만 하여도 수상하였다. 밝은 눈동자에 정신을 모아 시안을 살피고 있던 유리는 마침내 물어 보았다.

“여보, 왜 어디가 편낳으세요?” 시안의 모양은 과연 무슨 기막힌 근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병든 사람 같았다. 먼 산을 파고 있는 그에게 유리의 뭇는 말까지 들리지 않는 모양.

“여보!” 유리는 재우쳐 물었다.

아아, 시안은 어서 바삐 모든 것을 고백하려고 애를 썼건만, 목이 메어 도무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다시금 입을 움직였으되, 유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길이 없었다. 아니, 시안의 제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목구멍이 막히고 만 것이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암만 해도 오늘 밤에는 고백할 수 없다. 내일로 미루자. 오늘 밤은 딴 방에서 따로 자면 그뿐이 아니냐.” 악한 일을 저지르기에도 용기가 없던 그는 착한 일을 실행하는 데까지 마음이 약하였다.

“심기가 불평하십니까.” 유리는 세 번째 물었다.

“응, 그래, 어떤지 마음이 좋지 않아. 가슴이 답답해요.” 문득 시안의 말구멍은 터졌다.

“에구 큰일났구먼, 그럼 내가 잘 간호를 해드리지. 시방 곧 의사를 불러올까요.”

유리는 큼직한 눈을 호동그랗게 뜨며 매우 걱정되는 듯이 물었다.

시간은 어색한 듯이 머리는 긁적긁적 하고는


“무얼, 내일 아츰이면 낫겠지, 그리 심하지는 않으니까. 의사까지 부를 건 없어. 저…… 나는…… 유리 씨에게 편히 쉬란 말을 하러 온 거야. 문을 잠그고 잘 자오, 잘 자요.”

하고, 시안은 총총히 일어선다.

만일 혼인하던 첫날밤이 아니었던들 유리는 더 자세하게 물어보았을 것이언만, 어쩐지 겸연쩍은 생각이 앞을 가리어 미주알고주알 캐물을 수가 없었다.

“네, 안녕히 주무셔요.”

하고, 간단한 인사만 해 두었다.

시안이 나간 뒤에 유리는 어쩐지 쓸쓸하고 외롭고 서운한 증이 들며 싸늘한 슬픔이 가을 바람 모양으로 설렁설렁 뜨거운 가슴을 스쳐가는 듯하였다.

자려고 눈을 감아 보았건만 졸음은 오지 않고 무에라고 지정할 수 없는 생각이 머리에 굽이칠 뿐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축축하고 싼득싼득한 산골의 공기가 문틈으로 새어들기에, ‘숄’을 꺼내어 속옷 위에 두르고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교의에 걸어앉아 있었다. 첫날밤을 어떻게 치러야 옳은지 어린 그는 대중도 못하였건만, 휘황한 화촉을 호올로 보기엔 너무나 눈이 부신 듯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눈물이 어리인 눈은 불빛에 섬벅섬벅하며 아프기까지 하였다. 몇 번이나 바루제 옆방에 있는 시안에게로 뛰어가려 하였는지 몰랐다. 그의 불편한 듯싶은 몸을 간호해 주고 싶었다. 무슨 걱정이 있는 듯싶은 그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까 시안의 행동을 생각하면 이편이 가까이 오는 것은 꺼리는 듯하여 그런 살뜰한 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만일 그 방에 가 보았더면 시안도 저와 같이 자지도 않고 교의에 몸을 실린 채, 혼자 우는 꼴을 발견하였으리라.

밤은 벌써 새로 두 점을 지냈다. 유리는 교의에 기대어 꾸벅꾸벅 조을기 시작하다가, 문득 이상한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누구인지 복도를 걸어 지나는 듯하였다. 혹, 시안이가 고통을 참다 못하여 구원을 청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발딱 일어나서, 가만히 문을 열고 내다본 그는 아니 놀랠 수 없었다.

소리의 임자는 분명히 시안이다. 유리의 머물고 있는 방에서 저편으로 셋째 되는 방으로부터 시안은 슬금슬금 걸어나온다. 아아 시안은 무슨 까닭으로 아닌 밤중에 남의 방에 들어갔던고! 오른편 손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왼편 손에는 수건 하나를 들고 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해쓱하였으며 남과 눈이 마주침을 겁이나 내는 듯이 고개를 숙여 발부리만 나려다 보면서, 제 방으로 돌아간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남의 방에 몰래 들어간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행동인지라, 유리는 조금 무서운 증이 들어서 제 몸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다만 방긋이 열린 문틈으로부터 그가 무사히 제 방에 들어가는 것만 보아두었다.

얼른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다. 남 다 자는 이 밤중에 호올로 걸어다님도 수상하겠거든 더구나 남의 방에서 나옴은 무슨 곡절이 없지 못한 듯싶었다.

그러나 이것보담도 만일 유리로 하여금 사안의 오른편 손을 보았던들, 그 자리에 기절을 하였을는지도 모르리라. 시안의 오른손에는 피 묻은 단도가 번쩍이고 있었으므로.

10

[편집]

유리와 시안은 각방에서 따로따로 밤을 밝혔다. 지리하던 밤도 필경 새고 말아 그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아침이 되면은 모든 것을 고백하리라고 결심한 시안은, 과연 유리에게 속사정을 헐어 내일 수가 있을까. 그는 일어나는 길로 뽀이를 불러, 조용한 딴 방 하나를 치우고 거기 둘의 아침을 준비해 놓으라 분부하였다. 아침을 먹으면서 슬금슬금 사정 이야기를 할 요량인 것 같다.

유리는 뽀이로부터, 그 사연을 듣고, 우선 아침 화장을 할 차로 거울을 향하였다. 거울에 비춘 제 얼굴을 보고, 그는 아니 놀랠 수 없었다. 가을 물같이 맑은 눈엔 붉은 핏발이 섰다. 야들 야들하던 뺨이 얼마쯤 파리해졌을 뿐인가, 이슬을 머금은 꽃잎같이 발그스름하던 좋은 혈색조차 가뭇없시 사라져 버리고 그 대신 푸른 창경에 비추인 배꽃처럼 해쓱한 가운데 푸른 기가 돈다. 그도 그럴 일이다. 어젯밤을 뜬눈으로 새운 데다가, 시안의 하는 양에 수상쩍은 점이 많아서, 비둘기 kx은 가슴이 걱정과 근심에 쪼들린 까닭이다.

얼마 아니 되어 둘은 따로 치운 방에서 만났는데, 시안의 얼굴도 푸르다. 그뿐인가, 두 편의 입조차 장마지는 날의 구름장 같이 무겁디 무거웠다. 파릇파릇 새 움이 트는 봄풀에 아침 해가 해죽이 웃음 웃는 듯이, 번쩍여야 할 혼인하던 이튿날이어늘, 우중충한 비 실은 공기가 두 사이에 떠돌 줄이야. 꽃밭에서 날으는 종달새의 노래와 같이 화창하고 즐거워야 할 그들의 수작이건만, 웃음 소리 한 마디 들을 수 없다. 웃음이란 그림자도 그들의 얼굴을 스쳐가지 않았다. 이윽고 유리 편에서 억지로 부드러운 얼굴을 지어서 시안을 쳐다 보며

“여보, 무슨 나에게 숨기는 일이 있지 않아요?”

깊은 뜻 없이 슬쩍 묻는 말이로되 시안의 가슴은 털썩 내려 앉았다. 그는 한동안 어쩔 줄 모르는 듯이 당황해 하다가

“유리씨 얼굴 보기가 미안하게 되었소. 기실 어젯밤에 사정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암만 해도 용기가 나지 않는구려. 오늘 아침에도 잠 깨는 길로 말을 해버리려 했더니만 고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요. 용서해 주어.” 이런 말을 듣고 보니 유리의 마음은 봄 입김에 얼음 녹듯, 풀어지기 시작하였다.

“내게 사정 이야기를 하시는데 용기고 뭐고 할 필요가 없지 않아요. 어제까지는 어린애였지만 오늘부터 당신의 안해가 된 다음에야 나도 어른 노릇을……” 하고, 오래간만에 방싯 웃고는 “남의 안해가 되었으니 무슨 걱정이라도 남편과 같이 해야 되지 않아요.”

옳은 말이다. 떳떳한 말이다. 무슨 걱정이라도 남편과 같이― 그렇지만 기실 남편도 아니고 안해도 아니다. 모든 의식을 갖춘 혼례도 효력 없는 혼례다― 라고 시안은 명백하게 고백할 수 있을까. 파랗게 질렸던 그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여하간 아침이나 먹고 보지. 시방 유리 씨의 말에 용기가 났으니 인제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 테야.”

시안은 변명 비슷 이런 어색한 말을 한 뒤에 아츰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식사가 겨우 마쳤을 때, 복도로 많은 사람의 달음박질하는 발자최 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시끌시끌 떠드는 말소리가 들리었다. 둘은 일변으로 놀래고 일변으로 수상해 하며, 곧 복도로 나온즉, 뽀이 하나가 입에 거품을 흘리다시피 황황히 굴며 여러 손님에게 무슨 설명을 하고 있다.

“아녜요. 어젯밤에 처음으로 이 여관에 든 부인이야요. 늘 오시던 손님도 아닙니다. 숙박계에는 심연희라고 적혔을 뿐이야요.”

손 하나가,

“그래 상처는?”

“상처는 날카로운 단도로 찔른 것이라고 의사가 감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단도는 간 곳 없어요. 어젯밤 새로 두 시쯤 되어 죽인 듯하다고 해요. 벌써 몸에 온기 하나 없이 뻐드러져서 아주 송장이 되었어요.”

그러면 연희가 누구에게 맞아 죽은 것이다. 뽀이의 설명이 끝도 나기 전에 시안은 갑자기 기절이 되어 유리의 발 밑에 쓰러지고 말았다. 무슨 까닭으로 기절이 되었는지 아모도 몰랐다. 가엾고 불쌍한 것은 유리이다.

곧 넘어진 것을 한 방에 엇메어다 놓고 유리는 골똘히 간호를 하였다.

그 보람이 있어 얼마 만에 시안은 정신을 차리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물을 달라 하였다. 유리의 손에서 물 한 곱부를 얻어 마시고, 놀래인 가슴을 진정하려는 사람 모양으로 여러 번 가슴을 쓰다듬은 후,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그리 놀랠 일도 아냐. 어젯밤에 죽은 연희란 계집은 나의 안해야.”

11

[편집]

놀래지 말자 한들 어찌 아니 놀래고 견딜건가. 마른 하늘에 벼락이 나린다는 것은 이 때의 유리를 위하여 준비해 놓은 말이리라.

“네? 네? 무에라 하십니까?”

유리는 부르짖었다.

“당신의 안해? 당신의 안해는 이 유리가 아니고……”

“죽은 줄로 알았던 안해가, 의외로 살아 있어 어젯밤에 이 여관에 오지 않았겠나. 이 전에도 이야기한 일이 있지마는 여간 악독하고 흉칙한 계집년이라야지. 기실 유리 씨와 내가 결혼한 줄 알고 공갈을 하러 온 것이야. 그렇게 놀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허나 벌써 어떤 자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니 적이 마음이 놓인다. 하늘이 나와 유리 씨의 인연을 길게 맺어 주시는 것이다.”

유리는 가위눌린 듯이 눈을 홉뜨고 숨을 헐떡거리며,

“그래서 당신이, 어젯밤에…… 어젯밤에……?”

“그래, 유리 씨에게 모든 것을 고백을 않을 수 없고, 또 전처가 살아 있고 보면 어제 아츰의 혼례도 효력이 없는 것이므로 유리 씨를 안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얼마나 내가 고심초사를 하였는지 몰랐어.”

유리는 너무도 의외의 일에 입까지 벌릴 수 없었다. 시안은 말을 이어,

“그야 어찌되었든지, 연희가 죽었다면 모든 문제는 귀정이 나고 만 것이다. 모든 근심도 인제 사라진 것이다. 싫었든 좋았든, 제가 데불고 살던 안해가 죽었다고 기뻐하는 것은 인정상 박정한 일이겠지만, 진절머리가 나는 요물이라 진정으로 기쁘다. 죽은 것이 춤이라도 출 듯이 기쁘다. 무거운 짐을 벗은 듯이 몸이 거뜬하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유리 씨와 나는 다시 혼례를 지낼 밖에 없소. 다시 지내는 혼례야말로 떳떳한 혼례가 되겠지요. 그런 뒤에 우리는 정말 부부가 됩시다. 그렇지 않소. 허니까 좌우간 유리 씨는 어머님께로 돌아가 주시오. 이런 데 오래 머문다는 건 피차에 모양 흉한 일이 아니오? 어서 바삐 마차를 불러 타시고 먼저 가 주시오. 나는 셈을 치르고 곧 뒤좇아 가서 어머님을 뵈옵고 모든 사정을 여쭐 테니.”

달음박질이나 해 온 사람 모양으로 숨이 턱에 닿아서 말소리가 매우 황급하다.

별안간에 회오리 바람을 만난 듯이 어쩔 줄을 모르던 유리도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한 일이다.자기가 시안의 안해도 아니요. 시안이 자기의 남편도 아닌 다음에야 어머니를 빼놓고 누구와 의론을 하며 누구와 걱정을 논하랴.

“그러면 당신이 마차를 불러 주셔요. 그 동안에 나는 당신의 짐을 싸 드릴 터이니.”

하고, 총망한 발길로 시안의 방에 들어가서 되는 데로 흩어져 있는 물건을 주섬주섬 거둬서 가방 속에 넣으려 하였다.

어수선한 가방 속을 정리하고 있던 유리는 그 자리에 기절을 할 듯싶었다.

거시서 새빨간 피가 징글징글하게 묻은 손수건이 나오지 않는가! 그 수건은 자기가 시안의 성자를 수 놓아준 것임은 첫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이 피 흔적은 누가 보더라도 칼 닦은 자최임이 분명하다.

어젯밤 두 시쯤 되어 시안이가 저편으로 셋째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에 왼손에 들고 있던 수건이 이것이나 아니었던가. 그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 셋째 방은 누가 들었던가. 이러니 저러니 할 것 없이 대관절 무서워 견달 수 없으므로 무심코 집어 들었던 그 수건을 본대대로 가방 밑에 넣으려 한즉, 싸늘하게 손에 닿는 물건 하나가 또 있었다.

그것은 피 묻은 단도이었다. 어젯밤에 시안의 오른편 손에도 무엇을 들고 있는 듯하더니. 그러면 그 때 이 단도를 가지고 있지나 않았던가, 하는 의심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유리에게는 이리 저리 생각을 굴려 볼 겨를도 없었다. 귀신에게나 홀린 듯이 눈을 홉뜨고 있는 그는 사나운 잠승에게 쫒기는 사람 모양으로 그 방을 뛰어나왔다. 나와 본즉 셋째 방에 사람들이 떼를 지우고 모여서 여자의 송장 하나를 꺼내고 있다. 저것이 시안의 본처의 시체다. 어젯밤에 시안이가 저 방에서 나온 것이다! 유리는 모든 일이 하도 무서워서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이 곳으로부터 한시바삐 달아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에겐 시안도 없었다. 귀부인의 체면도 없었다. 여러 사람의 수상해 하는 눈동자도 없었다. 허둥지둥하는 발길로 문간까지 뛰어나와 보니, 방장 어데인지 떠나려는 마차 한 채가 그의 뒤집힌 눈에도 띄었다.

유리는 누구의 마차인지 묻지도 않고, 허둥지둥 뛰어 오르며, 터고 있는 사람에게,

“저를 어머니한테 데려다 주셔요. 네, 어머니한테만 데려다 주셔요.”

라고, 입에 침이 없이 간청을 하였다.

12

[편집]

누구의 마차인지 물어 보지도 않고 덮어넣고 뛰어오른 유리의 행동이 예에 벗어난 짓이라고 꾸짖지 말지어다. 유리가 이 때에 당한 놀램과 무서움은 사람의 일평생치고라도 한번 격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런 경우에 태연스럽게, 볼 것 다 보고 차릴 것 다 차린다고 하면, 유리는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세상을 겪어보지 못한 숫보기 처녀가 아니다.

마차를 타고 있던 이는 매우 놀래며,

“유리 씨가 아닙니까? 아니, 이시안 씨의 부인이 아니십니까?”

라고, 부르짖었다. 사람 살리는 보살은 간 곳마다 있다는 격으로 그 사람은 다름 사람 아닌 마백륜이었다.

“제발 어머니한테 데려다 주셔요.”

유리는 또 한번 재우쳤다.

“무슨 일인지 나는 도모지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나도 시방 ‘안델마트’로 가는 길이니 모셔다 드리긴 어렵진 않습니다마는, 그래도 무슨 연유인지 알기나 해야지요.”

“아모 말도 묻지 말아 주셔요. 어서 바삐 데려다만 주셔요.”

마백륜은 열이 날만치 침착하다.

“으응, 심상한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그려, 무슨 당신의 부탁을 아니 들어 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그랬다가 나종에 자당께 꾸중을 모실 게니까요. 허나 시안 씨로부터 나에게 단 한 마디라도 부탁이 있어야 되지 않아요?”

백륜의 말은 사리에 당연할 뿐더러 매우 은근하다.

“상관없어요. 어서 데려다만 주셔요.”

유리는 더욱 급히 서두른다. 백륜은 매우 난처하다는 듯이

“그러면 나는 당신이 이 마차를 타신지 아니 타신지 통히 모른 체해 버리지요. 내 모르는 틈에 당신이 오르시고, 내 모르는 틈에 당신이 나리시는 건, 당신의 자유이니까요.”

세상에 불친절한 사람도 있구나, 유리는 원망스럽게 혼자 속부치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신사의 예의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수작을 하고 있을 사이에,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백륜은 정말 유리가 저와 같이 탄 줄을 까맣게 모르는 듯이 한번 입을 닫친 이후로는, 다시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유리도 또한 저편에서 이러니 저러니 묻고 참견하고 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무슨 말을 한다 한들 귀담아 들을 정황도 아니다. 그러나 마차가 진행함을 따라 얼른 생각하면 매몰스럽고 냉정한 듯한 백륜의 태도가, 도리어 고마운 것인 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있는 친절, 없는 친절을 다 내어 가지고 위로도 해 주고 또 무슨 사정인지를 미주알 고주알 캐고 팠던들, 유리는 일일이 대꾸하기에도 여간 힘이 들지 않았을 것이요, 몇 번 얼굴을 붉히며 쥐구멍에나 들어갈 듯이 몸을 움츠렸을는지도 몰랐으리라. 불친절한 것이 이 때의 유리에게는 도리어 친절한 것이었다.

그는 시안보담 나이 많아서 벌써 삼십이나 되었으리라. 가장 위엄있게, 엄격하게 버티고 있었지만, 교제에 익숙한 탓이런지, 유리에게 조금도 불편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이런 데 그는 무에라 말할 수 없는 묘리를 터득한 모양이다.

덤덤히 한 시간 동안이나 지내고 나니, 유리가 제출물에 미안쩍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많이 폐를 끼쳤습니다. 억지만 부려서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사과를 하였다. 그는 말로 대꾸는 하지 않고, 다만 뻥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었다. 그 웃음이야말로 제 승리를 스스로 기뻐하는 악마의 웃음인 줄이야 어린 유리의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리라.

마차가 어머니 계신 곳에 가까워 갈수록 유리의 사슴은 메여질 듯하였다.

어젯밤으로부터 오늘 아츰까지 일어난 가지가지 괴변이 더욱 더욱 선면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을 그대로 숨겨 두면 그 작은 가슴은 터지고 말 것 같았다. 일초가 바쁘게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싶었다, 하소연 하고 싶었다.

어쩐지 속이 찌르르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억제하기에 무진 애를 썼다. 만일 곁에 사람이 없었던들 그는 목을 놓고 실컷 울었으리라.

마츰내 ‘안델마트’에 도착하였다. 마차는 여관 앞에 와서 머물렀다. 유리는 간단하게,

“대단히 고맙습니다.”

하고, 마차를 나렸다. 쏜살같이 그는 어머니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이 눈에 어머니의 모양이 얼찐하자, 고만 참고 참았던 눈물이 솟아올랐다.

“어머니!”

할 겨를도 없이 그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울었다.

13

[편집]

유리의 어머니로 말하면 재산은 넉넉하였지만,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일단 정성을 오직 무남독녀인 유리에게 바치었다. 아비 없이 자라나서 행여나 남에게 멸시를 당할까, 비소를 받을까 하고, 조바심을 하며 오늘날까지 길러 내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정성 들인 보람이 있어 세상 사람으로부터 유리의 칭찬을 듣는 것에 모든 재미를 붙이었다. 자기 자신도 남의 입길에 오르나리지 않고, 세상의 존경과 칭찬을 받도록만 애를 썼고 힘을 들이었다.

세상의 칭찬을 받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의리도 보아야 한다, 교제도 잘해야 한다, 때를 따라서는 남의 비위도 맞춰 주어야 하고, 속으론 미워도 겉으론 흔연 대접을 해야 되며 배가 아픈 경우라도 웃고 지내야 한다. 여기 대한 묘리를 모두 터득을 하였기 때문에, 시방도 교제 사회에 적지 않은 세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남이 눈썹 찡길 노릇은 단 한 번이 없도록 몸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연만한 경우에도 경망스럽게 놀래는 법이 없지마는, 어제같이 신혼여행을 떠난 딸이, 오늘같이 달겨들 뿐인가, 자기 가슴에 매어달려 다짜고짜 없이 우는 꼴을 보고야 아니 놀랠 수 없었다.

“이 애가, 이 애가 이게 웬일이냐?”

하고, 얼굴빛을 변하며,

“울기만 해서야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있니, 무에 그렇게 슬프단 말이냐? 말을 해다고, 말을 해 다고.”

하였건만 유리는 더욱더욱 느껴 울 뿐이다.

“큰 변이 났나 보구나. 왜 이 서방이 어데를 다쳤니? 그렇지도 않아? 그러면 둘이 싸움을 한 게로구나, 인제 곧 이 서방이 뒤좆아 오겠군. 머리를 흔드는걸 보면 그렇지도 않단 말이냐? 울지 말고 말을 해야 알지. 그래 네 남편이 너를…….”

유리를 눈물 소리를 떨었다.

“시안 씨는 제 제 남편이 아녜요.”

“뭐, 어째? 어제 혼례까지 지낸 사람이 남편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그분의 본처가 아직 살아 있어요.”

눈물에 흐렸고, 모가 같은 소리건만 어머니의 귀에는 우레같이 들리었다.

“응! 이 서방의 전처가 아즉 죽지 않았다니…… 자, 얼굴을 들고 속시원하게 말을 좀 하려무나.”

유리는 그대로 얼굴을 들지 않았다. 울음을 그치지 않으며,

“네, 살았어요. 어젯밤에 저의 든 여관에 들었어요.”

“너희와 한 여관에, 한 여관에.”

라고, 뇌일 뿐이러니 점점 사건이 여간 중대치 않은 데 짐작이나 선 모양이다.

“그러면 너는 이 서방의 안해가 아니로구나. 아아, 아아, 어제 혼례를 마치고 기뻐했더니만. 그렇다면 우는 것도 괴이찮다. …… 이 애, 이애, 인제 울지 말고…….”

“어머니는 아즉도 다 모르셔요, 어젯밤에 그 안해란 여자가 별안간에 또 죽었답니다.”

어머니는 한참 생각을 돌리는 모양이더니,

“죽었어? 이상한 일도 있다. 죽었다면 세상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곧 혼례를 다시 지내고……. 그 일은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하고.”

유리는 몸서리를 치며,

“그냥 죽은 게 아녜요. 맞아 죽었어요. 칼에 맞아…….”

어머니도 몸서리를 쳤다.

“맞아 죽었어?”

그때에야 유리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떠나 교의에 몸을 던지었다.

“어머니, 어머니!”

하고는 다시 쓰러져서 진저리를 치며 운다.

“어머니는 아즉도 다 모르셔요.”

어머니는 번개같이 딸의 말뜻이 어데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애, 너 그게 무슨 말이냐? 슬픔에 겨워서 네가 미쳤나 부다.”

“그래요, 제가 미쳤습니다. 미쳤습니다. 어머니, 저는 고만 죽고 싶어요.”

“그렇잖다, 그럴 리는 만무하다. 의심하는 네가 그르다. 누가 무에라고 해도 이 서방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아니고 말고……. 그런 무서운 의심을 종작없이…….”

유리는 또 한번 재우쳤다.

“어머니는 아즉 다 모르셔요.”

“모른다 모른다 하니, 말을 해야 알지 않느냐. 자초지종을 하나도 빼지 말고 말을 해 다고. 왜 이리 울고만 있니? 자 구만 울음을 끈치고 말을 해다고.”

어머니는 입에 침이 없이 초조히 굴며, 쓰러져 있는 유리를 안아 일으켜서 교의에 몸을 기대게 하였다.

14

[편집]

유리를 교의 위에 일으켜 앉히고 어머니는 물었다.

“이 서방에 한해서는 그런 악한 일을 저질 리가 없다.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혹시…… 혹시 그런 짓을 했다면 그야말로 큰일 났다, 눈앞이 캄캄해질 노릇이다. 네가 그다지 의심을 하니 증거를 본 것이 있니? 어서 샅샅이 말을 해요. 궁금해 죽겠네.”

불상한 유리는 애끊는 소리로,

“어머니, 어머니! 저를 어데든지 데려다 주어요. 멀리 멀리 이 곳을 떠나게 해 주어요.”

이런 곳에 한시라도 지체를 했다가 남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이 죽기보담도 더 싫은 모양이다.

“그래, 어데든지 데려다 달라면 데리고 가겠다만, 대관절 무슨 곡절인지 시원하게 말을 해야 되잖니? 뭘로 너는 그렇게 이 서방을 의심하단 말이냐?”

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눈으로 보았어요. 어젯밤 저편으로 셋째 방에서 나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어요.”

“저편으로 셋째 방이라니.”

“오늘 아츰까지도 그 방이 뉘 방인지 몰랐어요. 아츰에야 알고 보니 그방인즉 곧 그 여자가 들었던 방이겠지요. 그러고 맞아 죽었다는 시간도 꼭 들어맞겠지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도 비틀비틀 쓰러지려 하였다. 그의 눈도 놀램과 절망으로 하여 치떠지고 말았다.

“그래, 정말 그래, 큰일 났구나. 저런 변괴가 어데 있겠나? 이 애, 그런 말은 아모한테도 다시일랑 입 밖에 내지도 말아.”

“왜 남에게야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암만해도 나는 이 서방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런 무서운 의심을 그 사람에게 두기 싫다. 좌우간 당자를 만나 보고 자세히 물어 보면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는지도 모르지. 남의 방에서 나왔다고 해서 사람을 죽였달 수야 있니? 무슨 곡절이 있었겠지.”

유리는 다시금 진저리를 치며 울었다.

“그 것뿐만이 아녜요. 그보담 더 무서운 증거를…….”

“뭐, 더 무서운 증거? 그것은 뭐란 말이냐?”

유리는 훌쩍 훌쩍 느끼며 울 뿐이요, 더 말할 용기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듯이 한동안 멍멍히 섰다가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하여튼 당자를 만나 보고, 그 변명이나 들었으면 좋겠군.”

이 말이 끝나자 마자 방문은 요란스럽게 열리었다. 핏기 하나 없이 해쓱한 얼굴로 시안이가 황황히 들어온다.

유리가 질팡갈팡 뛰어나간 뒤에, 그는 여관의 셈을 치르고, 짐짝을 정돈해서 다른 마차를 집어 타고, 뒤좇아 온 것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여전히 진땀이 흐른다.

유리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급을 하면서 어머니의 등 뒤에 숨어 버렸다.

어머니는 시안을 보고, 인사 한 마디 없이,

“대강은 들었네마는, 자네가 어젯밤 두 시쯤 해서, 전처의 방에 들어간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시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뭐요? 전처의 방엘 제가 들어갔어요? 그런 일은 없는걸요. 저는 유리의 옆방에서 교의에 걸어앉은 채, 깨락 조으락 하면서 밤을 밝혔는데요.”

“이 애가 제 눈으로 정녕히 봤다는데 그래?”

시안은 멍멍히 무슨 생각을 하다가,

“그럴 리가 있나요? 아마 유리 씨가 꿈을 꾼 게지요.”

꿈을 꾸었다는 것이 될 말이냐. 그 때 유리는 눈이 보송보송하게 깨어 있었고, 또 저편으로 셋째 방이 맞아 죽은 여자의 방인지도 몰랐을 뿐인가, 그 때에는 맞아 죽은 여자의 내력조차 까맣게 몰랐던 터이 아니냐. 아모 연맥이 닿지 않는 일을 꿈엔들 꿀 까닭이 왜 있으랴. 그러나 우리에겐 선은 이렇고 후는 저렇다고, 다툴 기력이 없었다.

“어머니, 어서 바삐 나를 어데든지 데려다 주어요.”

라고 재우칠 뿐이었다.

어머니는 시안의 변명을 반신반의하며,

“그러면 유리가 꿈을 꾸었든지 혹은 자네가 잠에 잠꼬대로 그런 짓을 하고도 깬 뒤에는 씻은 듯이 잊어 버렸든지 한 게로군. 그런데 자네가 평일에도 잠꼬대가 심하지나 안 했는가?”

시안은 웬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는 듯이, 얼굴빛을 변하며,

“글쎄요. 평일에는 도모지 그런 버릇이 없었는데요.”

“허나 자네가 저편으로 셋째 방에서 나오는 것을 유리가 보았다는 것이, 내 생각 같아서는 꿈은 아닐 것 같네.”

“네? 저편으로 셋째 방! 그것은 분명히 연희의 방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연희를 죽인 것은 아닙니다. 자초지종을 여쭐 터이니 들으시고 판단을 해주십시오.”

15

[편집]

시안의 변명은 이러하였다. 죽일 까닭이 없었던 것도 아니요 또 죽이자고 생각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 흉칙한 요물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만, 자기의 체면을 유지할 수도 있고, 꿀 같은 행복을 보전할 수도 있었다. 머리를 썩이고 이를 갈면서 그 목숨을 빼앗을 궁리를 한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뜻 먹은 대로 실행하기엔 그의 마음은 너무도 보드러웠다, 너무도 약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한 담력이 없었다. 용기가 없었다. 그는, 우편 마차를 기다리다가 어떻게 연희와 마주치게 되었으며, 음침한 절벽 위에서 약속대로 만났던 것이며,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로 밀어박지르려 하던 제 팔이 도리어 허공에 달린 연희를 어떻게 끌어올린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설명을해 들린 다음에,

“만일 연희를 죽일 테면, 죽이자고 결심한 때에 죽이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 발로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구해낼 까닭이 없지 않아요?”

과연, 그럴듯한 말이다. 사리에 당연한 변명이다. 그러나 그는,

“이 다음에는 기어이 죽일 테다.”

고, 단연코 부르짖은 일절만은, 잊어 버렸던지 또는 일부러 숨기는지, 입 밖에 내지를 않았다.

예까지 듣고 나서 어머니의 마음은 더욱 산란해졌건만, 억지로 의심을 풀어 버리려는 듯이 유리를 향하여,

“자, 들어 보아. 이 서방은 결코 악한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냐.”

유리는 또 한번 재우쳤다.

“어머니는 아즉 다 모르셔요. 제발 나를 어데든지 데려다 주셔요.”

시안은 유리에게로 한 걸음 다가들며,

“유리 씨! 당신은 그래도 무슨 의심이 남았습니까?”

유리는 시안의 얼굴을 보기도 무서운 모양이다. 파고 들어갈 듯이 어머니의 등더리에 얼굴을 비벼대며,

“어서 나를 데려다 주어요. 네, 어머니, 제발 어데든지 데려다 주어요.”

다시금 눈물겨운 소리를 떨었다.

어머니는 화증을 버럭 내며,

“아즉도 어린애 노릇을 하는구나. 이런 경우에 그 따위로 응석만 부리면 어쩌잔 말이냐! 무에든지 아는 일이 있거든 어서 이야기를 해요!”

유리는 간단하게,

“시안씨의 가죽 가방 밑을 보아요.”

너무도 이상한 그 말에, 어머니와 시안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어머니 편에서 먼저 얼굴빛을 바루며,

“이 서방, 그러면 그 가방을 가져다가 우리 앞에서 검사를 해 뵈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시안은 무슨 패 속인지 알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삐죽하더니만, 밖으로 나가, 시방 마차에서 끌어 나린 짐짝 가운데로부터, 가죽 가방 한 개를 들고 왔다. 어머니의 보는 앞에서 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뚜껑을 열어 제치고 그 곳을 일일이 검사하니까, 맨 밑으로부터 피 묻은 수건과 단도가 튀어 나왔다.

“아! 유리의 꿈이 아니었구나, 꿈이 아니었구나!”

꿈이 아니었구나, 하는 말 한 마디가 곧 시안에게 대하여 사형의 선고를 나리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시안은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니는 유리를 부둥켜안으며,

“가자, 어데든지 가자.”

하다가, 만사를 섣불리 하지 않는 성질이라, 유리를 놓고, 혹 엿듣는 사람이 없지나 않은가고, 염려하는 듯이, 방문을 열고 바깥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그러자마자 무슨 무서운 것이나 본 것같이 황망히 문을 닫치며,

“이런 무서운 증거가 남의 눈에 뜨이면 큰일이다.”

하면서 그 칼을 그 수건에 싸서, 자기 품에 숨기고는, 유리의 손목을 끌고 뒷문으로 빠져나가며,

“이 애, 어서 나와.”

하고, 이층에 있는 자기 침대로 총총히 올라갔다.

이 때까지 주저앉은 채로 복날의 개와 같이 헐떡이고 있던 시안은 저 혼자 남게 되자,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기막힌 일도 있다. 연희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끌어올리지만 않았더면, 아모 일도 없었을 것을. 마음 한 가지가 약하기 때문에 객스럽게 구해 내어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원통한 일이다. 애닯은 노릇이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 난관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 세상없어도 유리와 다시 떳떳한 혼례를 하지 못하면 시안은 사람이 아니다, 사내가 아니다. 살아 있을 보람도 없다.”

하고, 목을 놓고 엉엉 울었다.

울면서 그 가방에, 꺼냈던 물건을 다시 집어넣고, 본래대로 뚜께를 나리우자마자, 등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아 당기는 여섯 팔이 있었다.

“포박을 받아라!”

하고, 외우치는 것은 저승 차사와 같은 형사 셋이었다. 아까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가, 황망히 닫은 것은 이 무서운 형사의 꼴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16

[편집]

불쌍하다, 시안은 형사에게 수갑을 질리고 말았다. 아아, 어제와 오늘! 밤 낮 하루가 바뀌지도 않아서, 그의 신상이 변한다 한들 어찌 그대도록 변하랴, 어제의 이맘때는 세상에 저처럼 행복스러운 사람이 없을 듯하였다. 젊은 가슴의 피를 끓이며 참된 마음을 바치어, 세상에 둘도 없이 사랑하던 처녀와 백년 가약을 맺을 때에, 그의 기쁨은 어떠하였으랴. 포동포동하고 보들보들한 신부의 팔을 맞걸고, 결혼식장에서 나려올 때, 그의 발길은 춤을 추는 듯하였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어슴푸레하게 달지근하게 무에라 말할 수 없는 황홀한 느낌에 그의 몸도 녹아지고 마음도 사라지는 듯하였다. 단 둘이 꽃마차에 몸을 실리고 신혼여행의 길을 떠날 제, 얼굴에 불어닥치는 바람도 축복의 ‘키스’를 던져 주는 듯하였다. 우둘투둘한 길로 말미암아 마차가 이리저리 흔들리우며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것도, 그들의 새로운 생활을 참미하는 노래로 들리었다. 그러하거늘 오늘은 어떠한가. 이대도록 불행하고 이대도록 가엾은 사람은 세상에 저 하나뿐인 듯하였다. 향기로운 꽃과 어여쁜 새들이 필대로 피고 노래할 대로 노래하는 낙원으로부터, 불가마가 끓고 쇠몽둥이가 비 오듯 하는 지옥에 떨어진 것 같았다. 한심한 일도 있고는 볼 일이다, 기막힌 운명도 있고는 볼 일이다. 그는 형사를 향해서,

“나를 포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아모 죄도 지은 일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이런 변명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모리 무죄한 발명을 한다 한들 누가 저를 믿어 주랴. 만사가 벌써 틀린 줄 아는 그는 여러 말로 다투려 하지도 않고, 그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알뜰한 유리에게 작별 인사 한 마디 못하고 그 곳을 떠나가는 그는, 한 발자욱 한 발자욱에 피눈물이 떨어지는 듯하였으리라.

그의 운명은 이 뒤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사람을 죽인 자는 죽는 법률이니, 그는 물론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 그만한 증거가 충분할까. 과연 그는 연희를 찔러 죽였을까. 그가 죽이지 않고 누가 죽였으랴. 여러 가지 증거가 역력히 들 수 있지 않은가. 그는 무슨 수로든지 연희를 죽여야만 될 경우에 빠졌었다. 한번은 죽이자고 만나 본 일가지 있다. 그 때에는 마음이 약한 탓으로 죽이지 못했지만, 다음 번에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서까지 하였다. 그러고 남 다 자는 그날 밤에 연희의 방에 들어갔었다.

피 묻은 단도를 쥐고 그 방에서 나왔다. 그 시간인즉 연희가 맞아 죽은 시간과 영절스럽게 들어맞는다. 어데 터럭만치라도 증거의 빈틈이라고는 없다. 무슨 재조로 형벌을 벗어날 도리가 있으랴. 넓고 넓은 이 세상이로되, 어느 뉘 하나 시안을 구해낼 힘이 없으리라.

그러나 그보담도 더 가련한 이는 유리였다. 유리는 형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어머니를 따라서 이층에 올라갔건만. 무서움에 떨던 신경도 마비가 되었고, 울려 하여도 벌써 눈물이 말라 버렸다. 사람의 일평생에, 더구나 여자의 일평생에, 가장 소중하고 복스러운 첫날밤에, 옥같이 티 없는 그 몸, 수정 같이 맑은 그 마음이 무서움에 떨고 슬픔에 시들 줄이야! 징글징글한 죄악의 원인이 되고, 동기가 될 줄이야! 처녀의 깨끗한 자랑에까지 씻을 수 없는 혐의의 상채기를 입게 되어, 봉오리가 피기도 전에 이을고 스러질 악착한 운명을 짊어질 줄이야! 어느 뉘가 뜻하였으랴. 그의 생각이 이에 미쳤던들, 그의 고통은 한층 더 심하였으련마는, 놀래인 가슴과 혼뜬 머리는 찬찬히 생각해 볼 겨를도 주지 않았다. 비 맞은 새 모양으로, 초연히 창경 앞에 앉았을 때에 문밖이 들석들썩한다.

“또 무슨 일이 나는가 부다.”

하면서, 창문을 열고 밑을 내어다보았다.

그 수건과 단도를 장 속 깊이 감추노라고, 골몰하는 어머니는 벌써 눈치를 알아채고 황급하게 유리에게 종종걸음을 치며,

“이 애, 이 애! 왜 바깥을 내어다보니? 네 얼굴이 보이면 어쩌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듣기 전에 유리는 벌써 모든 광경을 다 보았다. 시방 시안은 세 형사에게 붙들리어 마차를 타는 판이었다. 그리고 동리 사람들은 구름같이 그 마차를 에워싸고 무에라고 욕지거리를 하며 떠들고 있었다.

이런 참혹한 꼴을 당하는 것이, 무서운 살인죄를 범한 자에게 마땅한 벌이라 하겠지만, 유리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연한 가슴을 날카로운 칼로 에어내는 듯하였다. 오늘 아츰결까지도 다만 시안을 지겹다 할 뿐이요 무섭다 할 뿐이러니, 그 광경을 보고 나니 어쩐지 가엾은 생각이 앞을 가리었다.

“에구, 어머니, 이 일을 어찌해요?”

하면서 어머니 품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는 불야불야 창문을 닫쳐 버렸다.

17

[편집]

“만일 시안 씨를 구해낼 수만 있다고 하면, 무슨 노릇을 해서라도 구해 드리고 싶어요.”

어머니의 손에 매어 달리며 유리는 새삼스럽게 눈물 고인 눈을 애원하는 듯이 치뜨고, 충정으로 이런 소리를 하였다.

“그야, 두말 할 것 있겠니? 이 서방이 만일 벌을 받게 된다면, 네 이름도 남의 입길에 오르나리지 않니?”

“제까지 이름이야 어찌 되든지 저는 상관이 없어요. 시방 그 수건과 단도는 잘 감춰 두셨어요?"

그 얼마나 숫되고 어여쁜 감정이냐. 시안을 동정하고 위하는 마음이 말끝에 넘치지 않느냐. 이것이 여자의 고운 마음씨일 것이다. 비록 잘못된 결혼이라 하자, 또는 부부란 빈 이름뿐이라 하자. 한번 남편으로 정했던 사람이 이런 불행한 경우를 당하는 것을 보고야 어찌 건져 주고 구해낼 생각이 나지 않으랴. 무서움과 놀램이 가라앉자마자, 풀솜같이 보드라운 창자에서는 곧 동정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법이다.

“응, 수건과 단도는 잘 숨겨 두었다. 이 어미의 눈에 흙이 덮이지 않은 다음에야, 설마 네 이름에 똥칠을 하기야 하겠니? 공연히 그런 걱정으로 마음을 썩히지 마라. 세상은 넓으니까 멀지 않은 장래에 이 서방보담 더 훌륭한 사위도 볼 수 있겠지.”

유리는 못 들을 말을 들은 듯이 눈을 호동그랗게 뜨며,

“에그, 어머니는 별말씀도…….”

하고,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린다. 어머니도 시방은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닌 것을 진작 깨닫고, 다시 사위란 말은 입밖에 내지 않으며, 한껏 유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가라앉히기에만 힘을 쓰기로 하였다.

그는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경우에 어버이의 몸이 되어, 제일 염려되는 것은 귀여운 딸의 이름이다. 이제 지낸 혼례는 아모 효력이 없는 것인즉, 유리의 몸으로 말하면 한번도 결혼을 하지 않은 훌륭한 처녀다.

그러하건만, 세상 사람은 언제든지 시안의 이름과 같이 유리의 이름을 이러니 저러니 할 것이 맹랑한 노릇이다. 그것을 미리 방패막이를 하자면 얼핏 사위를 정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렇다 하는 사위만 정해 놓고 보면, 유리의 몸은 아즉 이렇듯이 존경을 받고 있습네 하고, 세상에 대해서 자랑을 할 수 있거니와, 또 유리 자신도 슬픔과 고통에서 헤어 오를 수 있다. 자기 또한 무남독녀로 에지중지하는 귀한 딸의 뉘도 볼 수 있다. 한즉 어찌하더라도 틈을 보아 유리에게 잘 일러듣겨야 되겠다고, 벌써부터 어머니는 이런 궁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만 일은 세상에 남의 어머니 된 이치고 누구든지 생각할 만한 일이다. 이 생각이 없다고 하면 알뜰히 살뜰히 자녀를 위하는 어머니가 아닐는지도 모르리라. 어머니는 속셈으로 중얼거리기까지 하였다.

“이만한 재산이 있으니, 사위 고르는 데 그렇게 힘도 들지 않으렷다.”

이 날 해가 지지 않아서 세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첫째는 마백륜이가 위문을 온 것이었다. 진정으로 유감이란 뜻을 표하며 부드러운 말씨로 많이 어머니를 위로해 주었다. 어머니는 그가 돌아갈 때에,

“조금 나이가 틀리지만, 이 사람이면 과히 흉치야 않겠지.”

하고, 속으로 따져 보았다. 아니 나이도 무얼 그렇게 걸맞지 않은 것은 아니다. 회뚝회뚝하는 애송이보담 나이 지긋한 편이 도리어 나으리라 하였다.

삼십이 될락 말락 하였으니 꼭 알맞을는지도 모르리라 하였다. 아모리 속으로만 꿍꿍이를 다 했지만, 자연히 겉으로 아니 나타날 수 없었다. 말 한 마디를 하고 웃음 한 번을 웃어도 유난히 친절하고 끌어 덮어지는 듯한 울림을 속일 길이 없었다.

백륜은 그 눈치를 알아보았음이런지, 또는 오직 친절한 마음에서 나옴이런지, 그 후로부터 종종 유리의 모녀를 방문하였다.

둘째로 경찰에서 주의가 있었다. 이시안 사건의 증인으로 불일간 유리를 호출할 터이니 될 수 있는 대로 먼 곳에 가지를 말고, 언제든지 오랄 때 와 달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어데든지 가자는 유리의 안타까운 희망조차 끊어지고 모녀는 ‘안델마트’에 아니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셋째로 영국에 있는 사안의 형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변호사를 고빙하여 같이 출장한다.”

는 것이었다. 이러구러 유리의 신상에는 여러 가지 사단이 거미줄같이 얽히었다.

18

[편집]

유리의 작은 가슴에는 모순된 두 갈래 감정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였다.

시안에 대한 의심의 검은 구름장은 암만해도 개어지지 않은 것이 그 하나이다. 그는 분명히 연희를 죽였다, 본처의 목숨을 무참하게 빼앗은 것은 갈데없는 그라 하였다. 천 마디 만 마디를 교묘하게 늘어놓아 뚜렷한 변명을 세운다 할지라도, 죽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였다. 이 점에 들어서는 푸른 바다가 뽕나무밭이 되는 한이 있을지언정, 유리의 의심을 덮칠 길이 없으리라. 콩으로 메주를 쑤었다 하더래도 유리는 믿어 주지 않으리라. 그러니 시안의 일을 생각할 적마다 무섭고 지겨운 소름이 찬바람 모양으로 유리의 전신에 끼침을 어찌할 수 없었다.

또 하나는 그 생각과 정반대로 그에 대한 한없는 동정이었다. 아모리 살인죄를 범한 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지옥이라 할 철창 속에서 아까운 청춘을 썩히기는 싫었다. 더구나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매, 유리의 마음은 조 비비는 듯하였다. 구해낼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구해 주고 싶었다.

이 검은 의심도 닦아 버릴 수 없거니와, 샘 솟는 듯하는, 가엾은 정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럼으로, 만일 유리에게 시안을 구해낼 수만 있다고 하면, 그는 즐거이 물에도 뛰어들리라, 불에라도 뛰어들리라, 제 목숨까지 버리라 해도 그리 아까워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시안과 다시 혼례를 하고, 부부가 되라고 하면, 유리는 고개를 흔들 것이다. 세상없어도 거절을 하고 말 것이다, 죽을지언정 살인범의 안해 노릇하기는 싫었다. 설령 재판소에서 증거가 충분치 못한 탓으로 무죄의 판결을 나린다 할지라도, 유리의 눈에는 역력한 증거가 빈틈없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의심과 가엾은 정이 서로 얽히고 설키어 유리의 가슴을 물어뜯었다. 아모리 어머니가 친절히 굴고 다정히 굴고 위로를 해 주어도 마음의 상채기를 아물리게 할 까닭이 없었다. 그 이튿날 낮부터 유리의 몸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 날밤에는 열이 사십도나 높아져서 헛소리를 하며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방황하였다. 다행히 평일에 건강하던 몸이라 한 일주일 가량해서 낫기는 하였으되, 그 병을 치르고 난 유리는 아주 딴 사람이 되고 말았다. 탐스럽도록 포동포동하던 팔뚝이 새꽤기같이 말라 버렸다. 보얀 기름이 흐르는 듯하던 목덜미가 여지없이 파리해져서 시들시들하고 가랑가랑해졌다. 지난날의 앳되고 곱던 얼굴빛이란 그림자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변해진 것은 몸뿐이 아니었다. 활발하고 유쾌하던 성질초차 가뭇없이 사라지고, 침착하고 음울하게 되었다. 대수롭지 않을 일에도 고만 마음을 상하며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었다. 다른 사람에겐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머니한테라도 제가 먼저 입을 떼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위로해 주는 틈틈이 다음 사위 말을 비추었다. 유리는 들을 뿐이요 쓰다 달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란 자연의 힘이 조금씩 조금씩 승리를 얻어가는 듯하였다. 아니, 시방 유리에게는 어머니에게 저항할 힘이 없음이다. 무슨 말을 하더래도 대개는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않고, 이따금 대답을 한다면 ‘네’란 한 마디뿐이지, ‘싫어요’할 적이 별로 없었다. 아마도 모든 것을 단념하였음이리라. 벌써 제 몸은 어듬 속에서 어둠 속에 사라질 따름이요, 광명한 세상에 활개치고 나설 가망이 없으므로, 어머니의 말씀에 애써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이리라. 가끔 어머니는 마백륜을 불러서 유리와 한 자리에 앉히는 일이 있었다.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도록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유리는 싫어하는 모양도 없고 그렇다고 좋아하는 눈치도 없었다. 그에게는 살도 없도 피도 없는 듯하였다. 유순하기가 마치 인형과 같았었다.

“될 대로 되어라.”

하고, 선택을 하지 않는 듯하였다.

한 열흘쯤 지낸 후에 시안의 형 시충(時充)이란 사람이 변호사를 데리고 왔다. 물론 유리는 그 사람을 만나 보았다. 마백륜과 한 자리에 섞일 때보담 얼마쯤 마음이 내키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묻는 대로 첫날밤에 지낸 일장을 숨김없이 이야기하였다. 형은 절망을 하였다.

“그렇다면 시안은 유죄로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구해낼 길이 없습니다.”

하고, 탄식하였다. 유리는 시숙의 손에 매어달리며,

“어찌하시든지 구해 드려요.”

라고, 부르짖었다. 이만한 열정이 아즉도 유리에게 남았으리라고는, 누구든지 생각도 못하였을 것이다.

19

[편집]

며칠 후에 시안의 공판은 열리었다. 참으로 번화한 공판이었다. 번화하다는 것은 조금 우스운 말이로되, 백리 이백리 되는 먼 곳에서까지 산을 넘어서 방청인이 모여들었다. 결혼하던 첫날밤에 난데없는 전처가 불쑥 나타났다가 또 그날 밤으로 무참한 죽음을 지었다는, 이상하고 야릇하고 무섭고 불쌍한 사건인 데다가, 신부 유리도 증인으로 호출된다는 바람에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할 수 없이 높았다.

그 신부의 얼굴이라도 한번 구경하겠다고 새벽부터 법정의 문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재판정 문이 열리자 너도 나도 하고 앞을 다투다가 엎어지고 자빠지며 야단법석을 하기 때문에 좌석을 정리하노라고 정각보담 한 시간이나 늦게 재판을 시작한 지경이었다.

재판은 이틀 동안 계속하였다. 첫날은 심문이요. 둘째 날이 선고이었다.

그 여관의 뽀이, 사무원 등 몇 사람의 심문이 끝난 뒤에 마지막으로 유리가 호출되었다. 모든 눈은 유리에게로 몰리었다. 유리는 해쓱한 얼굴을 숙이고 입술을 물어뜯으며 별로 말이 없었다. 재판장도 유리의 나이 어리고 어여쁜 것을 보자, 차디찬 법률을 가지고는 그에게도 불상한 정이 들었든지,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물어 두려는 눈치이었다. 더구나 유리의 슬픔을 띤 여윈 얼굴은 모든 사람의 동정을 끌었다.

‘에그 불쌍해라, 저런 어린 아기를 호출할 것이 무엇이람? 고만 용서를 해 줄 것이지.’

하고 소근거리는 이도 있었다.

피고 시안에게 대하여는, 여러 가지로 의심도 하고 미워도 하였지만, 유리에게 대하여는 어느 뉘 하나 가엾게 아니 여기는 이는 없으리라. 백년의 고락을 맹서한 그 혼례가 정말 혼례가 아니요, 떳떳한 남편인 줄 알고 몸과 마음을 바치었던 사내에게 전처가 살아 있을 뿐인가, 그날 밤에 남편이란 자가 무서운 살인죄를 범하게 되고, 자기는 세상에 얼굴을 내어놓기도 어렵게 되었으니, 기막힌 경우란 것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유리가 증인석에서 일어섰을 때, 부인석에는 흑흑 느끼는 울음소리가 새어 흘렀다. 수건을 얼굴에 대지 않은 부인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암만하여도, 유리의 일거일동을 하나도 빼지 않고 주목을 할 뿐인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을 울렁거리는 이는 피고석에 앉은 시안이었다. 처음으로 유리의 모양이 나타났을 제, 그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혼인한 지 며칠이 못 되어 자기는 무서운 살인범으로 피고의 몸이 되었고 사랑하는 안해 ― 떳떳한 안해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안해가 될 뻔하던 여자가 그 증인으로 공판장에 서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괴상하고 참혹하고 부끄러운 노릇이 어데있으랴. 차라리 귀치 않은 목숨을 끊어 버릴지언정 이런 꼴을 당하기는 정말 진저리를 치겠다. 벼를 깎이고 살을 저미는 것은 오히려 참을 수 있다마는, 이런 치욕은 정말 견딜 수 없다 하였다. 기실 철창으로 새어드는 새벽 바람에 편안치 못한 꿈이 깨었을 제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한지 몰랐다. 굵은 쇠창살대에 머리라도 부딪고 싶었다. 이대도록 기구하고 사나운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죽기보담도 더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약한 탓도 탓이려니와 간수의 엄밀한 감시는 그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지리하던 몇 날이 지나자 그는 공판정으로 끌려 오는 몸이 되고 말았다. 있는 죄고 없는 죄고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떨어졌으니 구경거리가 되든지 우세를 당하든지 돌아볼 형편이 아니건만, 저로 말미암아 유리까지 창피한 꼴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었다. 유리의 얼굴이 햇발과 같이 부신 듯하였다.

이렇듯이 부끄러운 생각이 물밀 듯 하는 가운데에도 유리의 말 한 마디로 말미암아 자기의 운명이 결정될 것을 생각하면 귀를 아니 기울일 수 없었다. 쏠려 가는 눈을 붙잡을 길이 없었다. 제 목숨이 오직 유리에게 달린 판이어니, 그렇게 마음이 움직임도 또한 사람의 상정이리라. 아모리 시침을 떼려 하여도 그의 얼굴빛은 몇 번이나 변했는지 몰랐다.

법대로 선서식(宣誓式)이 마친 뒤에 재판장은 물었다.

“증인이 피고와 같이 ‘그리샤’의 여관에 들었지. 그 날 밤 일을 숨기지 말고 진술을 하오. 그날 밤에 피고는 무슨 일을 하였어?”

20

[편집]

판사의 묻는 말은, 혼인하던 첫날밤에 무슨 일을 하였나, 하는 것인즉,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유리의 대답하는 말 한 마디가 피고 시안의 죽고 삶을 결정할는지 모른다.

만일 유리가, 그 날 밤에 자기가 듣고 본 것을 일일이 말해 버리면 어찌될까. 시안은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으리라.

시안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유리의 말 한 마디가 곧 이 몸의 목숨이라 하였다. 시방 입을 벌리려는 유리의 얼굴을 치어다볼 제, 시안의 눈에는 일평생의 공포와 염려가 한꺼번에 모인 듯하였다.

유리는 말대답을 하려고 입을 벌리었다. 입술까지 곰실곰실 움직였으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목구녕을 자물쇠로 채우기나 한 것같이 판사도 딱하게 생각하였음이리라. 더 한층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그 날 밤에 시안과 연희란 여자가 서로 만나는 것을 당신이 보셨소?”

유리는 모기 같은 소리를 떨었다.

“아녜요.”

“흥, 그러면 보시지 못했단 말이구려. 그 날 연희라는 여자가 저녁 때에 마차를 타고 그 여관에 왔다는데, 그 마차가 올 때에 당신은 어데 있었소?”

“제 방에 있었어요.”

“시안과 같이 아니 있었구려?”

“네, 그래요.”

“그러면 시안은 어데 있었던가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마 문간에 있었던가 봐요.”

숨기지 않고 사실 그대로 대답하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사실 고대로는 시안에게 결코 이익 되지 못할 것이 아니냐. 이대로 턱턱 대답을 해 버리면, 필경은 모든 것을 샅샅이 까바치고 말 것 같다. 시안은 무서운 형벌을 선고되고 말 것 같다. 시안의 형은 손에 땀을 쥐었다. 시안 자신도 구슬 같은 땀이 이마에 흐르며 얼굴이 희락 푸르락 하였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시안은 당신의 방에 없었습니까?”

“제 방에 있지 않았어요.”

“몇 점에나 돌아왔단 말이오?”

“아마 밤 열두 점이나 해서 왔어요.”

“와서 어찌 하였소?”

“저한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왔다고 해요. 그래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곧 자기 방으로 돌아갔어요.”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진술이 피고에게 불리한 것은 물론이다. 저녁 먹은 후에 시안은 신부를 혼자 남겨 두고 어데를 갔던고? 일시 반시를 서로 떨어지기를 싫어 할 첫날밤이어늘, 따로따로 제 방에 있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요, 또 친구들에게 끌려서 산보를 나갔다 할지라도 열두 점까지 돌아오지 않을 리가 만무할듯하다. 어머니까지 버리고 단둘이 신혼여행을 떠났을 지경이니 친구와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낼 것 같지도 않다. 더구나 열두 점이나 해서 돌아온 신랑이 신부를 보고 잘 자라는 인사를 한 것부터 수상하다.

“그 후에 피고는 당신의 방에 오지 않았소?”

“오지 않았습니다.”

유리의 처녀의 자랑은 이 말 한 마디로 변명이 되었을는지도 모르리라. 방청인들조차 전신을 귀로 삼아 유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순결한 처녀의 몸 그대로 남았다는 것이 그들에게도 매우 흥미를 일으키는 듯하였다. 그리고 유리의 그 말을 의심하는 이는 아모도 없었다. 그와 반대로 시안에게 대한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그 행동이 수상한 것은 누구든지 인정 않을 수 없었다. 무슨 까닭으로 그는 신부의 방을 피하였는가, 백년의 인연을 굳게 맺을 첫날밤에 그는 무슨 까닭으로 화촉을 외롭게 대하였을까. 두말 할 것도 없이 그 사이에 연희 죽일 궁리를 했구나, 하는 것은 누구의 가슴에도 떠오른 상상이었다. 밤이 열두 점이 되도록 신부를 호올로 내버려 둔 것도 그 때문이요, 겨우 인사 한 마디를 하자마자 제 방으로 돌아간 것도 그 때문일 것 같다. 기실 시안이 유리를 존경하는 뜻으로 그 방을 피하였으리라고는, 아모도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판사의 심문은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면 그 후에 시안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당신은 모르겠소?”

유리는 ‘왜 몰라요? 죄다 알지요.’ 하고 대답을 할 수 없다.

밤새로 두 점에 연희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다. 그뿐인가, 생각만 해도 징글징글한 그 수건과 칼까지도 보았다. 그러나 그대로 이실직고 한다면 모든 일이 결정나고 말 것이다.

21

[편집]

그 후의 사안의 행동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느냐? 이 때까지는 술술 대답을 해 왔으되 이 물음에 대하여서는 무에라 할지 유리는 당황하였다. 파랗게 얼굴이 다시금 해쓱해지고 말았다. 왼몸이 가을바람에 휘둘리는 갈대잎과 같이 벌벌 떨리었다.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은 것은 여간 제 몸을 단속한 탓이 아니리라. 얼마 만에 간신히 대답한 말은 방청인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판사의 귀에만 겨우 들리었다.

“네.”

“네라니, 안단 말이요 모른단 말이오?”

“알지 못해요.”

알지 못해요, 란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설령 거짓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실과는 아주 틀리는 대답이 아니냐. 시방까지 말을 굽히지 않은 유리로 이 말 한 마다가 얼마나 나오기 어려웠으랴. 시안도 이 대답을 듣고 안심되는 숨을 내어쉬는 듯하였다. 그는 유리에게 대하여 감사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즉 유리에게는 이 몸을 두호할 만치, 덮어줄 만치 사랑이 남았구나, 하였다. 이런 경우가 아니었던들 그는 미친 듯이 유리에게 달겨들어 뜨거운 ‘키스’를 하였으리라.

그러나 형님과 변호사는 시안이만큼 그 말을 고맙게 여기지 않는 눈치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근심 빛이 한층 더 짙어진 듯하였다. 무릇 법정에서 이런 증인을 취조하는 것은 그 말만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증인의 행동과 기색을 가장 주목하는 법이다. 증인의 기색이 피고를 의심하는가, 또는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확실히 믿는가, 이것을 제일 중하게 보는 것이다. 의심하는 눈치가 보이면, 비록 말로는 신지무의하더래도, 재판장의 마음에는 더욱 의심이 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정에 익숙한 재판장인지라, 말은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게 하였으되, 유리의 기색에는 면밀한 주의를 말지 않았다. 재판장뿐만 아니라, 배심원들도 유리의 일거일동에 주목을 하고 있었다.

형님과 변호사도 유리의 말에는 만족을 하였지만, 그 거동에는 미협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그렇다 할지라도 유리로서 이 위에 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모른다고 잡아뗀 것이 전심전력을 다 들여 한 노릇이어늘, 어느 결에 몸 가지는 것조차 돌아보랴.

모른다는 이에게 미주알고주알 파고 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던지, 심문은 이걸로 끝이 나고 말았다. 내일 하루도 시안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 것이다. 유리는 어머니의 손에 매어 달리고, 마백륜의 부축을 받으며 여관으로 돌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시안의 형님도 그 여관에 찾아왔다.

“시안 씨가 무죄하게 될까요?”

유리는 형님을 보자 안타깝게 물었다.

형님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변호사도 희망이 적다고 합니다.”

유리는 그 자리에 울며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럴 수도 없었는지 얼굴을 가리고 물러 나왔다. 얼마 후에 형님은 그 여관의 동산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수란한 가슴을 진정하려 함이리라. 저편 나무 그늘 아래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소리나는 곳을 따라가 본즉, 걸상 위에 유리가 엎더져서 울고 있다. 지금도 유리가 얼마나 시안을 사랑하는지 이걸로 알 수 있구나, 하면서 형님은 무한 위로를 간신히 일으켜 앉힌 뒤에

“만일 시안이가 무죄백방이 되면 당신은 다시 만나보시렵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 말 가운데는 다시 부부가 되어 주겠느냐, 하는 뜻까지 품겼으리라.

유리가 다시 시안과 부부가 된다 하면, 세상에 대하여 안해만은 시안을 의심치 않은 표적을 보이는 것인즉, 될 수만 있으면 그리해 주고 싶은 것이 형님의 마음이리라.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유리는 무서움에 파랗게 질리었다. 유리야말로 깊이깊이 시안을 의심하고 깊이깊이 그 죄를 두리는 터이다. 유리의 가슴에는 무서움과 사랑이 서로 싸우고 있는 터이다.

형님은 실망한 어조로,

“당신은 시안을 구해 주지 않으시겠지요?”

유리는 열심으로,

“구해낼 도리가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야…….”

“구해낼 힘은 이 넓은 세상에 오직 당신에게만 있습니다.”

“어찌하면 구해낼까요? 일러 주셔요. 가르쳐 주셔요.”

“그렇지만 당신은 못할 일입니다.”

“가르쳐만 주셔요. 시안 씨를 구할 수가 있다고 하면 제 몸은 무엇이 되든지 괜찮아요.”

형님의 가슴 가운데는 과연 무슨 궁리가 있는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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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도 넓고 사람도 많지만은 사안을 구해낼 힘이 없을 줄 알았더니, 그 힘이 있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더구나 그 힘이 오즉 유리의 손에 있다는 것은 한층 더 이상한 일이다.

“세상은 넓지만, 오즉 유리 씨의 손에 그 힘이 있을 뿐입니다.”

하는 것이 형님의 말이었다. 유리를 빼어놓고는 아모한테도 없는 힘이 무엇일까. 유리는 농담이나 아닌가 하고, 의심할 지경이었다.

“참으로 저한테 그런 힘이 있다고만 보면, 무슨 짝에 여러분이 애를 쓰시고 걱정을 하게 해요? 될 수만 있으면 하루바삐 구해 드리지요.”

하고, 유리는 무슨 비장한 결심이나 한 것같이 해쓱하던 얼굴에 살짝 피가 올랐다. 형님은 매우 진국으로,

“사실 그 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내가 유리 씨에게 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이여요?”

“너무도 비상한 수단이니까요.”

“아모리 비상한 수단이기로, 제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면야…….”

“될 수야 있지요…… 허나…….”

하고, 형님은 말끝을 흐리마리해 버린다.

“제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고, 시안 씨를 구해낼 수가 있기만 하면 저는 제 몸을 버려도 좋다고 여쭙지 않았습니까?”

형님은 무엇을 곰곰이 생각을 하며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빛은 매우 침중해졌다. 입술을 꽉 다물고 이맛살을 찌푸린다. 여간 중대한 수단이 아닌 것은 그 기색을 보고도 짐작할 수 있다.

“일러 주셔요, 네, 일러 주셔요. 무슨 수단이여요?”

“아모리 생각해 보아도, 너무 심한 일이니 구만두지요.”

“구만둘 때 구만두더라도 일러 들려 주시기야 그다지 어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제발 말씀을 해 주셔요. 듣기라고 하게.”

형님의 얼굴빛은 더욱더욱 엄숙해졌다. 너무 엄숙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또 무슨 궁리를 하는 듯하더니, 말이라도 해 보려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유리 씨, 나로서는 결코 이 일을 당신에게 권하지는 않습니다. 당신 일평생의 명예에 관계되는 일이라, 입 밖에도 내기가 무서운 노릇입니다. 오즉 이런 수단이 있구나, 하고, 내 마음에 떠오른 것을 경솔히 말을 했다가, 당신에게 졸리게 되었습니다. 차마 그런 말을 당신의 귀에 들리기가 싫으니, 지금이라도 구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말을 취소라도…….”

유리는 말을 가로채며,

“취소라니요, 그것은 당치 않은 말씀이야요. 제발 들려 주셔요. 일평생의 명예이고 뭐고, 저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말을 하겠습니다마는, 들으시고 그 자리에서 잊어 주십시오.”

유리는 더욱 초조하였다.

“그렇게 어려워 하실 거야 무엇이야요? 어서 말씀을 해요, 어서…….”

형님은 혹시 엿듣는 사람이 없나 하는 듯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후에도 얼마를 주저하다가 마츰내 유리의 귀에 입술을 대고, 무에라고 몇 마디 속살거렸다. 그 말 가운데에 무슨 신출귀몰한 수단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로되, 그 말을 듣는 유리의 얼굴은 대번에 변하였다. 날카로운 칼날에 찔리기나 한 듯이 ‘에그머니’ 하고, 외마디 소리를 치자마자, 비슬비슬 쓰러지려다가, 제 몸을 지탱하려는 듯이 그 옆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그 얼굴빛이란 죽은 사람과 같이 새파랗게 질리었다. 당장에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형님은 매우 당황하였다. 허둥허둥 유리에게로 달아들며,

“놀래시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선선히 말을 못한 것입니다. 번연히 그런 줄을 알면서 입 밖에 낸 내가 잘못입니다. 용서해 주시오. 이 자리에서 잊어 주시오. 나는 유리 씨에게 이야기라고 한 것을 잊어 버리겠습니다. 제발 잊어 주시오.”

귀로 들어와 뼈에 새기었거니 잊으랴 한들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유리는 막혔던 숨길을 간신히 회복하자,

“아니에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예요. 말씀을 않으시겠다는 걸 억지를 부린 제가 잘못이지요…….”

하고 입술을 한번 물다가 눈물 소리를 떨었다.

“저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슨 노릇을 다 할지라도 그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용서해 주셔요.”

형님은 말 낸 것을 매우 후회하는 듯이,

“모든 것이 나의 경솔한 탓입니다. 물론 유리 씨는 못할 일입니다. 제발 이 자리에서 잊어 주시오”

하고 재우쳤다.

23

[편집]

말하기도 어려운 비상 수단! 졸르고 졸라서 급기야 듣고 보니, 유리는 그 자리에 서 있을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엔 다시 본색이 돌아오지 않고, 자기 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걸어가는 모양은 중병 치른 사람과 같았다. 비척비척하는 걸음걸이는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 엷고 가벼운 옷이건만 주체를 못하는 것처럼 휘휘 몸에 감기고, 실바람이 불어도 날아갈 듯한 그 모양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형님은 후회를 걷잡지 못하는 것같이,

“잘못이로구나, 내 잘못이로구나,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않을 것 갖다가…….”

하고 소근거리고, 또

“인제 시안을 구해낼 길은 없구나.”

하고 길이 한탄하였다.

방에 돌아온 유리는 문을 굳이 닫고 혼자 번민하였다.

“그러고 보면 내 몸은 살아날 길이 없고, 몸뚱아리는 살았다 할지라도 그야 말로 산송장이 되고 만다.”

중얼거리는 둥,

“그러나 시안 씨를 죽일 수 있을까? 사형선고 받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죽이자면 내 몸을 죽이자.”

하는 둥, 마치 잠꼬대 같은 여러 가지 헛소리를 뇌이고 또 뇌이었다.

“아아, 시안 씨가 죽든지 이 몸이 죽든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는 면할 도리가 없구나.”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탄식하였다.

그러구러 그 날도 저물고 그 이튿날이 되었다. 시안의 생사가 귀정 나는 날이다. 그 날 아츰이 되어도 유리의 얼굴빛은 여전히 푸르렀건만, 무슨 중대하고 비창한 결심을 한 사람 모양으로 어머니를 보고도 말 한 마디 하는 법 없이 때때로 혼자 쓸쓸한 웃음을 입술 가에 띨 뿐이다. 단두대에 올라서는 죄수가 모든 것을 단념하였을 때나 이런 웃음을 띠우리라. 그러면 유리는 제 몸을 버리기로 작정을 하였는가, 또는 시안을 죽여 버리자고 야차 같은 심사를 먹고 이렇게 쓸쓸한 웃음을 웃는 것인가. 그 모양을 매우 수상쩍게 여겼지만,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무에라고 위로할 길이 없었다.

오정 때쯤 해서 어머니한테는 마백륜이가 와서 놀고 있었는데 그가 돌아간 뒤에, 어머니가 유리의 방에 가 본즉, 유리는 혼자 울고 있다가, 어머니의 발자최 소리를 듣고 발딱 몸을 일으키며

“시안 씨는 어찌 될까요? 오늘 무슨 판결을 받을까요? 여기 이러고 있으면 저는 걱정이 되어서 죽을 듯해요.”

“왜 이 서방 생각만 하고 있니?”

“저를 또 한번 재판소에 데려다 주어요. 집에서 조바심을 하느니보담, 판결되는 것을 곁에서 듣는 것이 도리어 마음에 편할 듯해요.”

어머니는 그리 찬성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유리가 병이 들는지 몰라서 싫어 싫어하면서도 또 재판소에 데리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재판소에서는 최후의 증인이 심문을 받고 물러나섰다. 피고 이시안 외에 연희 죽일 사람은 아모도 없었으므로, 판사와 배심원의 의향은 일치하게 시안의 유죄한 것을 인정한 모양이었다. 인제 문제는 사형 선고를 나리울까, 정상을 참작하여 종신 징역을 시킬까, 둘 중에 하나이었다. 아슬아슬한 이 대목에, 시안의 변호사의 손에 한 조각 종이를 전하는 자가 있었다. 그것을 펴본 변호사는 놀랜 듯이 유리 있는 편을 돌아다보고, 다시 재판장에게 향하며,

“어제 심문을 받은 증인 배유리가 그 진술에 조금 부첨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재판장은 유리를 다시금 증인석에 불러 세우고 선서식을 하였다. 무슨 추가할 말이 있는가, 피고는 물론이요, 법정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재판장은 물었다.

“어느 점에 추가할 것이 있단 말이오?”

유리는 어제보담 몸 가지는 것이 매우 의젓하다. 얼마쯤 몸이 떨리지 않는 것은 아니로되 그 소리는 분명하고 힘이 있었다.

“그 날 밤 열두 점 후에 피고의 한 일을 조금도 모른다고 여쭈었습니다마는, 실상인즉…… 실상인즉…….”

“실상인즉 다소간 아는 점이 있단 말이오?”

“네, 그래요.”

재판장의 얼굴은 매우 엄숙해지며,

“왜 어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새파랗던 유리의 얼굴에는 금시로 불을 담아 부은 듯이 빨개지고 말았다.

“어제는 입에서 잘 나오지 않아서요.”

하고 고개를 숙이었다. 입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면, 그러면! 저편에서 셋째 방 일장을 설명하려는 것인가? 시안은 물에 빠진 사람이 다시 헤어 오를 수 없을 때처럼 눈을 홉뜨고 있었다. 재판장이고 배심원이고 모두 숨길조차 죽이고, 유리의 입만 바라보았다.

24

[편집]

설마 유리가 시안에게 이롭지 않은 말을 하려고 일부러 법정에 나타난 것은 아닐 것 같다. 제가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더래도 시안은 유죄의 판결을 받을 것이 아니냐. 그러나 열두 점 이후의 유리가 아는 시안의 행동 중에는, 다만 저편에서 셋째 방 사건뿐이 아니냐. 그 일장을 고해 바친다면 그야말로 시안에겐 눈 위에 서리다. 정확한 증거가 더욱 정확해짐을 따라 시안의 목숨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기연가미연가하는 재판장의 티끌만한 주저도 풀어져 버릴 것이요, 다소간이라도 시안에게 동정을 보내었던 이조차 침 배앝고 돌아설 것이 아니냐.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마는 시안의 형 시충의 얼굴은 근심과 걱정으로 말미암아 몇 번이나 변한지 몰랐다. 그는 어제 유리에게 대하여 시안을 구해낼 도리를 일러듣겼다가, 구만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거절한 유리가 스스로 나와서 재판장의 앞에 서는 것은 결코 시안에게 이로운 말을 할 것 같지도 않다.

근심하는 정도를 서로 비교한다 하면, 그의 얼굴과 거의 상대되는 것은 오직 시안의 얼굴뿐이리라. 아니, 암만해도 시안의 얼굴이 더 심한 편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선 그는 걱정을 아니 하려 한들 어찌 걱정이 되지 않으랴. 더구나 그다지도 자기가 사랑했던 이에게 불리한 말을 듣게 된다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느니보담도 더 원통하게 애닯게 생각하였으리라.

이윽고 유리의 입은 열리었다.

“어제 여쭌 말씀 가운데 조금 틀리는 것이 있어서…… 어제 여쭌 말씀을 조금 곤치려고 합니다…….”

말소리는 분명하였지만 어데인지 허전허전 하는 가락이 있음은, 아모리 모진 결심을 한 일이라도 얼마쯤 가슴이 수란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추가가 아니고 수정이로군. 어째서 어제 것이 틀리는가?”

아까까지도 매우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며 말도 위해 주던 재판장이언만, 어젯말이 틀린다는 바람에 제 행투가 나오며, 반말을 하기 비롯하였다.

“어제는 일부러 틀리게 말씀을 여쭈었어요.”

“뭐이 어쩨……!”

판사는 추상같이 엄숙해졌다.

“선서까지 하고 일부러 틀린 진술을 하다니.”

“바른 대로 여쭈면…… 제 이름이…… 더렵혀질 줄 알았습니다. 용서해 주시기를.”

하고는 말끝은 눈물이 흐려지고 말았다.

판사는 또 가긍한 생각이 들었던지 다시금 부드러운 테도로.

“그렇듯도 하오. 그래 오늘 그 틀린 점을 고치는 것도 관계찮소. 그러면 당신은 밤 열두 점 후에 피고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구려.”

“네!”

판사의 얼굴빛도 변하였다. 여간치 않은 증언이 나오는 줄 알았음이리라.

“그래, 열두 점 후에 시안은 제 방에 가서…….”

“자기 방에 가지 않았어요. 제 방에 그대로 있었어요.”

“응, 당신 방에 같이 있었어? 그래 몇 점까지나?”

“밤이 다 밝을 때까지 있었어요.”

이것이 유리의 할 말인가. 만장이 마치 쇠사슬로 몸을 동여맨 것같이 손끝 하나 꼼짝이는 이도 없었다.

“열두 점으로부터 밝기까지, 그 사이에 피고는 나가지 않았소?”

“네, 나가지 않았습니다.”

판사는 미주알고주알 파고 캐야 되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당신은 그 사이에 자지 않았소?”

“네……. 아니……. 저어…….”

“안 잤단 말이오?”

“조금 잤는지도 모르지만…….”

“잘 때에 나가지는 않았을까?”

“결코 그런 일은 없어요. 만일 나갔으면 제가 모를 리 없지요.”

“어찌해서?”

“그의 몸은…… 그의 몸은…… 노오 제 손에 만치었으니까요.”

“그것은 당신 방 어데란 말이오?”

“어데라니요?”

“교의에 걸어앉아서 밤을 밝히지는 않았겠지?”

“교의 위에는 아녜요.”

“그러면 어데란 말이오?”

“구석이어요.”

“구석이라니?”

“제 방구석에 있는 구석에 있는 치 침대 위에서…….”

하자마자 유리는 그 자리에서 기절되고 말았다.

25

[편집]

동서고금을 털어놓고 여자의 거짓말 가운데, 이다지도 거룩하고 이다지도 가련한 것이 또 어데 있으랴! 유리는 시안을 구하려고, 아니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굳게굳게 결심을 하였다. 그 지극한 결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거짓말을 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제 이름을 더럽히고 제 몸을 더럽히고 제 얼굴을 더럽히고 말았다. 줄여 말하면 모든 것을 버렸다. 시안을 위해서 대신 죽음을 한 것이다. 세상에는 소위 열녀란 이름을 듣는 이가 많다. 그리 많다고는 하지 못할망정, 새벽 하늘에 별처럼 그물게라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유리의 흉내라도 낼 이는 하나도 없으리라.

법정의 소동은 여기 일일이 적지 않더래도 현명하신 독자는 추측하실 줄 안다. 기절한 유리는 변호사에게 안기어 어머니 있는 자리로 왔다. 어머니는 일변 놀래고 일변 노엽고 일변 슬퍼서, 몸이 돌이 되어 버린 것처럼 말 한마디 못하였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였다. 새파란 얼굴로 뜨거운 숨길을 내어쉬고 들여쉴 뿐이다가, 시충에게 부축을 받아 모녀가 함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유리의 말은 물론 시안의 덜미를 짚었던 혐의를 흔적도 없이 씻어 주었다.

열두 점으로부터 밤이 밝기까지 유리의 팔뚝에서 단꿈을 꾼 그이거든, 새로 두 점에 다른 방 여자를 죽일 까닭이 있었을 것이냐. 그럴 겨를이 털끝만친들 있을까 보냐. 그는 곧 무죄의 판결을 받아 청천 백일아래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판사는 꾸짓는 듯이,

“유리 씨에게 대한 피고의 행동은 신사의 할 짓이 아니다.”

보통 때 같으면 그 말을 듣고 시안은 얼마나 부끄러워하였을는지 모르련마는, 시방은 왼몸과 마음에 넘치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재판장의 말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형 선고를 받을 몸이 아모 일 없이 구해진 것도 기쁘려니와, 그보담 더욱 기쁜 것은 자기를 구해낸 부처가 다른 사람 아닌 유리인 것이었다. 지극히 사랑하던 유리가 제 몸을 건져 주었다. 그 건져준 방법이란 또한 항용 것이 아니고, 여자의 생명인 처녀의 자랑을 버리지 않았는가, 더럽히지 않았는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몸을 구해 주었다. 그만큼 유리는 이몸을 사랑하는구나, 하였다. 진실하게 뜨겁게 이 몸을 사랑하는구나, 하였다. 그다지 끔찍끔찍한 희생을 바치고라도 오히려 이 몸에 대한 사랑을 끊지 않았구나, 하였다. 내가 유리를 사랑함이나 조금도 진배없이 유리도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였다.

방면의 수속이 끝이 나자마자 그는 변호사까지도 방해물같이 뿌리치고, 단숨에 유리 있는 여관으로 뛰어갔다. 눈여겨 보는 사람이면 그가 미치지나 않았나고 의심하였으리라.

여관에 다다르니 어머니는 교의에 울며 쓰러졌다. 그 동안에 얼마나 유리를 꾸짖고 한탄을 하였을까. 제출물에 제 기운이 지쳐서 울고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시안의 눈에는 어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물끄러미 천정을 치어다보고만 있었다. 시안은 미친 듯이 그에게로 달겨들며,

“유리 씨, 유리 씨!”

하면서 그 손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유리는 무서운 것이나 본 것같이 뒤로 물러선다.

“오오, 유리 씨! 당신의 은혜는 이 몸을 갈아 바쳐도 갚을 길이 없소. 무에라고 감사한 말을 드릴 수는 없소. 고맙소, 고맙소, 힐 따름이오. 내 눈에 흙이 덮힐 때까지 유리 씨를 지극히 사랑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유리 씨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인제 다시 혼례만 지내면 모든 것이 전과 같이…….”

유리는 얼굴빛을 바루며,

“인제 저와 시안 씨 사이에는 아모 관계도 없습니다. 시안 씨가 저를 찾을 것도 없고 저도 시안 씨의 얼굴을 뵈올 일이 없습니다.”

유리의 마음 가운데에는 살인범이란 의심과 무서움이 겹겹이 서리었다. 몸을 버려서 구해내기는 하였지만, 사람을 죽인 자와 어찌 다시 부부가 될 수 있으랴. 그런 징글징글한 인물과 다시 교제인들 할 수 있으랴. 이런 마음이 얼마 안 되는 이 동안에도 유리의 태도에 분명히 나타나므로 시안은 일변 놀래고 일변 어이가 없어,

“유리 씨, 유리 씨, 당신은 아직도 나를 의심하십니까? 아즉도 의심이 풀리지 않았습니까?”

“풀리지 않았어요.”

“언제든지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네, 언제든지.”

하는 소리는 가늘었지만, 힘이 있었다. 늠연한 그 얼굴빛에는 가까이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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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와 시안의 이번 면회야말로 창자를 끊는 듯한 느낌이었다. 울어도 시원찮고 웃어도 시원찮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가리킨 말이리라. 원수의 정근(情根)은 피차에 서리서리 박히었지만, 먹장 같은 검은 의심은 두 사이를 가리웠으니 사를 이가 그 누구이며 헤칠 이가 그 누구이랴. 정이 지극하면 지극할수록 저편의 죄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더욱 굳고 더욱 심한 법이요. 두려워하고 미워하자니 사랑하는 이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고 쓰릴 건가. 깨끗한 줄 알았던 이가 기실 더러운 줄을 알 제 그 환멸(幻滅)의 서운한 느낌이란 옥으로도 채우기 어려웁고, 금으로도 메우지 못하리라. 그리고 믿으려 하여도 믿을 수 없는 슬픔인들 또 어떠하랴. 모진 독사에게 물리는 것을 참을지언정, 흉악한 아귀에게 가위눌리는 것을 견딜지언정, 그 지긋지긋한 고통은 배겨낼 수가 없으리라. 그와 반대로 자기를 구해낸 은인에게 의심을 받는 것도 차마 못할 노릇이어든, 하물며 그 은인이 자기의 열렬히 사랑하는 애인이었으며 백년을 맹서하던 안해임에랴. 더구나 열여덟 살 먹은 어리고 숫된 처녀로, 조인광좌 중에 거짓말을 꾸며서 처녀의 자랑을 집어던지고, 자기의 목숨을 건져주니만큼 예나 인제나 짝이 없는 사랑이건만, 그 속에 깊이 맺힌 의심의 고를 풀어낼 수 없는 답답한 것이야 무엇으로 형용하랴. 하늘을 가리켜 맹서를 하려 하나 유유한 흰 구름이 증거가 되지 않음에 어찌 하며, 땅을 치고 호소하려 하나 무심한 바위가 말이 없음을 어찌하랴.

증언부언, 천 마디 만 마디로 타이르기도 하고 변명도 하고 달래기도 해보았건만 유리의 마음은 구름처럼 덤덤하고 바위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의 눈으로 보면 시안은 암만해도 죄인이다. 안해 연희를 죽인 사람이다. 그에게 손목을 쥐임도 몸서리칠 지경이다. 사랑은 사랑, 지겨운 것은 지겨운 것이니, 시안을 위하여 이름과 몸을 바침은 싫어하지 않지마는. 살인범의 안해가 되기는 죽어도 못할 노릇이었다. 시안은 입이 닳도록 말을 하다 못해,

“그렇게 나를 의심하면 무슨 짝에 구해 주었단 말요?”

시안의 그 말에는 사내답지 않게 눈물이 어리었다. 그는 사랑하는 이에게 이렇게 의심을 받을 지경이었으면, 차라리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나았으리라 하였다. 유리도 슬픈 어조로,

“무슨 짝에, 무슨 짝에? 당신이 살인범으로 판결받을 걸 생각하니, 무슨 짓을 해도 아니 구해 드릴 수가 없었어요. 구해 드리지 않으면 당신은 누명을 쓴 채 돌아가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어요.”

그렇다. 과연 그렇다. 유리가 구해 내지 않으면 시안은 분명히 살인죄를 짊어지고 저승길을 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면, 더욱 유리의 한 일이 고마운 줄을 아니 깨단할 수가 없었다. 이 몸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그 일을 한 것이다. 이렇듯한 친절이 또 어데 있으랴.

그 친절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유리와 갈라서는 것이 어떻게 원통한지 몰랐다. 무슨 짓을 하더래도 다시 혼례를 지내야겠다 싶었다. 마음의 밑으로부터 자기의 혼이 빠져 나와 유리의 몸에 엉키는 듯하였다. 그러나 하릴없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르짖었다.

“아, 이시안의 평생은 유리 씨에게 받은 의심을 풀기 위하여 바치겠습니다. 무슨 짓을 하더래도 풀고야 말겠습니다. 만일 그것이 안 되는 날은 시안의 죽는 날입니다.”

이것이 무쇠 같은 그의 결심이다. 이 뒤에 왼 세계를 돌아다닐지라도, 산천 초목을 알알이 뒤질지라도, 유리의 눈에 제 몸이 결백한 것을 보일 만한 증거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고 유리를 다시 내 안해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반쯤 미친 사람이 되어 유리와 작별하고 돌아섰다. 시충의 여관에 돌아온 시안은 제 형에게 모든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였다. 형님도 매우 딱하게 생각하고,

“또 한번 내가 권해 보지.”

하였다. 아우의 대리로 시충은 다시금 유리를 방문하고 여러 가지로 타일러 보았다. 유리는 매우 감동된 모양이었으나 그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 후 며칠 만에 시안은 표연히 그 곳을 떠났다. 향하는 곳이 어데인지는 모를 일이로되, 혐의를 풀 만한 증거를 얻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 그 결심이었다. 과연 훌륭한 증거를 얻어 가지고 돌아올 때가 있을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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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도 가고, 시충이도 떠나 버렸다. 차마 볼 수 없게 풀이 죽고 기운이 빠진 이는 유리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법정의 일체로 유리가 아주 버린 사람이 된 것을 알아채었다. 그와 같이 여지없는 사실을 자백하였으니 신문이란 신문은 대지특서로 그 일체를 보도하였을지라, 한입 건너 두입 건너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벌써 왼 세계에 퍼졌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유리를 거들떠나 볼 일이랴. 산더미 같은 재산이 있다 할지라도 상당한 신사 치고 유리에게 손도 내어미는 이가 없으리라. 그와 백년의 인연을 맺으려는 이는 방방곡곡에 뒤져 보아도 구해 내기 어려우리라. 오늘이란 오늘까지 애지중지 하며 길러내어 딸의 뉘를 보자 하였더니, 그 또한 새벽녘의 꿈으로 사라져 버렸다. 십 여년을 두고 공들여 쌓은 탑이 일조에 무너지고 말았다.

딸의 출세로 말미암아 가문을 빛내고 따라서 자기 또한 구김 없는 행세를 하려 한 것이, 무참할손 악착할손, 도리어 문벌을 더럽히고 제 몸 또한 세상에 고개조차 들기 어려운 지경에 빠질 줄이야. 떠올리려 해도 다시 떠올릴 수 없는 굴헝에 빠지고 말 줄이야! 가슴을 두드려도 시원치 않고 창자를 베어내도 원통한 생각을 풀 길이 없으리라.

“유리야, 어쩌자고? 유리야, 어쩌자고?”

하면서 몇 번이나 유리의 몸을 흔들었는지 몰랐다. 유리는 무에라고 변명할 길이 없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라고 재우칠 뿐이었다.

“지금 와서 잘못했다면 쓸데가 무에냐?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왜 한 마디라도 내게 귀뜸을 안 했단 말이냐? 네 이름을 네가 더럽히는 거야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였겠지만, 네 이름뿐이 아냐, 이 어미까지 세상에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되었구나. 우리 집 선조의 이름까지 더럽히게 되었구나.”

엎친 물을 담을 수가 있으랴, 지낸 일을 돌이킬 수 있으랴마는,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딸을 원망하였다.

그런 말을 듣는 족족 유리는 제 한 일이 너무도 대담스럽고 너무도 죄가 많은 듯싶어서 새삼스럽게 무서운 증이 들었다.

“이후엘랑 무슨 일이라도 어머니의 지도대로 하겠습니다. 다시는 제 자의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셔요.”

하고 빌 따름이다.

참말이지 유리는 제 몸과 마음을 버리었다. 비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딸려 갈지언정, 제 뜻대로 좌지우지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제 이름과 몸을 죽일 때에 제 뜻까지도 죽여 버린 것이다. 큰일 작은 일을 물을 것 없이 오직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다. 아모 말썽 없는 인형이 되고 말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을 할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방문하는 손님의 발자최가 끊이지 않던 어머니에게도 찾아오는 이가 드물었다. 쓸쓸하게 닫힌 문은, 얼음이나 얼은 것같이 싸늘해 보이었다. 세상 사람은 그 모녀를 잊은 것이다, 버린 것이다.

이러함을 따라 어머니의 실심낙담은 날로 깊었는데, 하룻날 훌륭히 예복을 입고 찾아온 이는 역시 마백륜이었다. 어머니는 캄캄한 밤중에 실낱 같으나마 불빛을 본 것같이 기뻐하며 맞아들이어 방문해 준 친절을 사례한즉, 그는 끌어올리는 말씨로 유리에게 청혼을 하였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어머니는 자기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런 미친 애를 당신께서 안해로 삼으시겠습니까?”

백륜은 성이 난 것같이 엄연한 태도로,

“미친 애라고는 말아 주십시오. 시방 세상에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부인네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가 어렵습니다. 저는 따님의 정직과 용기에 탄복하였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이나 했으면 좋게요. 사실도 아니니까 미친 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리가 그 날 밤을 시안과 한 방에서 새운 일은 결코 없습니다.”

“사실이 아니면 더욱 거룩한 일이지요. 따님의 몸은 보석과 같이 번쩍일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듯 저는 따님 외에 백년의 고락을 같이할 여자가 없다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어렵지 않게 약혼이 되었다. 실로 백륜은 꼭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이 사연을 들을 제, 유리는 조금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이었으나 ‘싫어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벌써 모든 것을 버린 몸이 아니냐.

이러나 저러나 죽은 인생이니, 어머니가 하자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음이리라.

28

[편집]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맡긴 몸인지라 유리는 ‘싫어요.’ 소리를 못하였다. 창자로부터 목구녕까지 치밀려 올라갔건만 입술을 뚫고 나오지는 못하였다. 분명히 자기의 뜻 있는 데를 말하고, 고집을 부린다 하더래도 벌써 기울어진 형편인데, 그렇지도 않은 다음에야 필경 마백륜의 안해가 될 운명이다.

그런데 시안은 어데로 갔는가, 이런 사연을 아는가 모르는가. 한번 길을 떠난 후로 엽서 한 장이 없으니 구름 같은 그 종적이 어데를 헤매는지 아는 이가 그 누구이랴. 제 몸에 똥칠한 누명을 씻어 버리고 다시 유리의 떳떳한 남편이 되어 보자, 지극히 사랑하는 그이 가슴에 맺힌 의심을 풀어 주고 전갈이 행복스러운 생활로 돌아가 보자, 오즉 그 증거를 찾기 위하여 침식을 잊으며 외로운 제 그림자를 동무 삼아 세계에 표박하는 중이어니 있는 데를 알 길도 없거니와, 어느 시절에나 돌아올는지 기약인들 어찌 하랴.

그러나 유리로 말하면 어머니 말씀에 순종 않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쓰렸으랴, 아팠으랴.

어머니가,

“너도 생각이 있으면 이 어미의 말을 들어 주겠지.”

하고, 또 한번 다질 적에, 유리의 눈엔 난처해 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을 뿐이다.

“어머니, 난 구만 죽고 말고 싶어요.”

하고 울며 쓰러졌다.

“죽기는 왜 죽어? 새파랗게 젊은 년이 죽을 까닭이 무엇이람? 이러나 저러나 그릇된 일인데, 지낸 일을 생각할 거야 무엇 있니? 살아보면 의외로 재미난 생활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 이 어미 생각을 좀 해 보아.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고 딸자식이나마 오즉 너 하나의 성취에 모든 것을 재미를 붙이고 있는데, 나를 버리고 죽는단 말이 할 말이냐.”

라고, 다시금 어머니가 신세 한탄을 늘어놓으면 유리의 가슴은 미어질 따름이다.

그 후부터 날마다 마백륜이가 찾아왔다. 벌써 사위로 정했으니 날마다 오는 것이 떳떳한 일이리라. 그는 어머니한테도 친절히 굴었다. 유리한테도 친절히 굴었다. 이따금 슬픔과 절망에 떨어진 모녀의 입이 벌어지도록 우스개를 붙일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 행동에 의젓하고 점잖음이란 시안보담은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훌륭한 신사로 어느 것 하나 빠질 것이 없지마는, 억지로 부족한 점을 찾아내인다면 그 말소리에 어쩐지 참스러운 맛이 적었다. 슬퍼할 때나 기뻐할 때나, 마음속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요, 겉으로만 엄벙하는 듯싶었다. 쾌활하게 웃을 때에도 걸핏하면 웃음 외에 무슨 다른 뜻이 있는 듯싶었다. 어머니는 그것저것 몰랐지만, 유리는 가끔 그것을 느끼었다.

또 한가지 미협한 것은 신분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부친이 영국의 ‘요크셔’란 곳에서, 죽은 유리의 아버지와 친절히 지냈다는 것은, 그가 어머니와 첫 인사를 하는 마당에 제 편에서 한 이야기다. 그 말을 듣고 본즉 어머니도 그럴 상싶었다. 남편이 생존하였을 때, 많은 친구 가운데 마가 성가진 이가 있은 듯도 하였다. 그러나 그이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는 아모리 생각해 보려 하여도 도모지 기억에 나서지 않았다. 더구나 ‘요크셔’란 곳으로 말하면 마씨 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마씨네들이 많이 살았다. 그 중에는 하루 한끼 먹기가 곤란한 가난뱅이도 없지 않았으되, 대개는 지위도 훌륭하고 재산도 넉넉한 대가들이었다. 마백륜도 그런 훌륭한 집안의 한 사람이어니 하였다. 재산이 넉넉치 않고야 무슨 수로 이런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세계를 돌아다니랴. 수작하는 틈틈에 그의 지식과 박람한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치고 그의 발길이 아니 거친 곳은 별로 없는 듯싶었다. 조선의 금강산까지 구경을 한 모양이었다.

“해금강의 절경이란 결코 남쪽 유럽(구라파)의 바다에 지지 않아요.”

하여, 모녀의 눈을 호기심에 번쩍이도록까지 하였다.

만일 보통 때 같으면, 더 자세하게 신분을 알아도 보고 물어도 보련마는,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이 사람이야말로 지옥에서 만난 지장 보살님이다. 박명한 우리 모녀를 위하여 하느님이 보내 주신 천사라 하였다. 이 사람을 빼어놓고 유리를 데려갈 신사는 다시 없을 듯싶었다. 하루바삐 유리를 치워 버리지 않으면, 귀여운 내 딸은 세상의 비소와 멸시의 굴헝에 영영 떨어지고 말 것 같다. 허우적거리는 모녀에게 건져 주는 밧줄은 오즉 이 사람뿐일 것 같다. 이 사람이면 영국의 교제사회에서도 많은 친구를 가졌을 터니, 이 사람의 이름 밑에 유리의 지난 허물을 숨길 수 있을 것 같다.

29

[편집]

몇 달 후에 유리 모녀와 마백륜은 동행으로 영국에 돌아갔다. 이왕이면 여러 가지로 창피한 꼴, 몸서리칠 변을 당한 ‘안델마트’에서 혼례를 지낼 필요가 없었다. 소문을 들어서 대강 짐작은 할지라도 가까이 보고 들으니만치, 영절스럽고 소상치는 않을지라도 얼마쯤 숨길 수 있고 속일 수도 있을 듯싶었다. 물론 어머니와 마백륜은 하루바삐 혼례를 지내야 된다고 서두르고 볶아쳤다. 그러나 이것만은 유리가 선선히 승낙을 하지 않았다.

“혼인 날짜는 제발 정하지 말아 주셔요.”

하고 그는 울 듯이 어머니에게 간청을 하였다. 아즉도 그는 실낱 같은 희망을 끊으랴 끊을 수가 없음이리라. 잠은 분명히 깨었건마는 의희한 꿈길이 오히려 남는 것 모양으로 그는 그 누구의 그림자를 잊으랴 잊을 수 없었음이리라. 비록 작고 어린 가슴일망정, 그 맨 밑에는 은근히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음이라. 쉽사리 떨쳐 버리고 끊어 버리기에는 너무도 지긋지긋한 꿈이 아니냐, 너무도 안타까운 희망이 아니냐.

그야 처음 결혼에 그와 같이 가슴 뜨거운 변을 보았으니, 아즉도 놀래인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탓도 탓이리라. 어머니는, 유리가 혼인 날짜만 말해도 질색을 하는 것이 온전히 이 때문이어니 한다. 그래서 마백륜이가 조급히 굴면 그런 이유로 변명도 하고 발명도 하였다.

그러나 시를 따라 때를 따라 달래고 조르는 어머니한테 어느 때까지 배겨낼 수는 없었다. 마츰내 반년 후에 혼례를 지내자 하여 유리가 스스로 기한을 정한 것이 그 해 구월일이었다. 그러면 명년 삼월 초순에는 혼례를 지내게 된다. 여간 멀지 않은 기한이었으되, 그보담 늦게 하자면 어머니와 마백륜이가 들어주지 않고, 그보담 일찍 하자면 유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여섯달 동안에 유리는 스스로 자기 마음을 길들여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마백륜의 안해 노릇을 하겠다고, 승낙은 하였건만, 암만해도 그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모리 제 몸을 버리었다 하더라도, 아직 스무 살도 못 된 몸이어든 어찌 쉽사리 모든 것을 단념할 수 있으랴.

세월은 쉬워서 석달 넉달이 훌훌 지나가고 보니, 어느덧 그 이듬해 봄이 되었다. 봄! 만물이 새로 살아나는 생명의 기쁨에 뛰고 굴리는 봄, 알 수 없는 향긋한 느낌에 달뜬 가슴이 발버둥하는 봄이언마는 유리의 몸은 더욱 더욱 파리해 가고, 마음은 더욱더욱 침울해졌다. 시안과 혼례를 지낼 때와 단 일년밖에 되지 않았으되 유리의 형용은 그때의 그림자조차 찾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 야들야들하던 얼굴빛은 어데로 가 버렸느냐. 납으로 푸르고 새꽤기로 마른 그 모양은 보는 사람마다 놀랠 지경이다. 어머니의 앞에든지 마백륜의 앞에든지 결코 입을 벌리지 않았다. 호올로 있을 때에는 얼이나 빠진 것같이 무슨 생각에 잦아질 뿐이다. 이런 음울한 새악시는 별로 구경하기 어려우리라.

이월이 되었다. 어머니는 혼례의 준비에 눈코를 못 뜨도록 바빴다. 마백륜으로부터 유리에게 여러 가지 예물도 있었다. 이렇게 어수선한 판에, 파리(巴里) 우편국인이 찍힌 편지 한 장이 어머니한테 왔다. 펴 보니 시안의 한 것이다.

어머니는 화증을 버럭 내며,

“이 사람은 인제 유리에게 편지할 권리가 무에람?”

하고, 부르짖었다.

권리가 없기 때문에 유리에겐 편지를 하지 않고 어머니한테만 한 것이 아니냐. 어머니는 유리에게 들킬까 보아, 조바심을 하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읽어 보았다. 처음에는 시안이가 연희 내력을 조사하려고 미국 각지를 돌아다닌 것과, 다시 유럽으로 건너와서 각국을 대개 거친 연유를 적었고, 그 다음에는 때때로 자기 형 시충과는 서신 왕래가 있었는데, 거기서 유리 모녀의 지내는 형편도 간접으로나마 알았다는 것을 설명한 후, 끝으로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저는 시방 와서 유리 씨의 신상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할 권리도 없거니와 면목도 없습니다마는, 저로서는 그대로 둘 수 없기 때문에 몇 마디를 적는 것이외다. 이것은 온전히 유리 씨의 장래를 위하는 충정에서 나온 것이요, 결코 무슨 시기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 줄만 믿어 주소서.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따님과 마백륜의 혼례를 지내기 전에 먼저 마백륜의 신분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방 저는 이곳에서 일찍이 ‘그례샤’호 여관에서 뽀이 노릇 하던 사람을 만나 매우 의심 나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예까지 읽자, 어머니의 가슴은 이상하게 흔들렸다.

30

[편집]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하여 어머니는 잠깐 숨을 들여쉬고 내어쉬다가, 다시금 시안의 편지를 나려보기 시작하였다.

“의심 나는 사실이란 다른 것이 아니외다. 내일 모래로 유리 씨의 남편이 될 마백륜이 이미 죽은 제 처와 매우 깊은 교제가 있었던 것이외다.”

어머니는 예까지 이러고 나서 스스로 제 눈을 아니 의심할 수 없었다. 침침한 눈을 또 한번 닦아 보았건만 ‘깊은 교제’란 네 글자는 또렷또렷하다. 전처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칠 지경이어든, 모든 희망을 걸어둔 마백륜과 그 여자 사이에 교제가 깊었다는 것은 놀랠 만한 사실이 아니냐. 그래도 어머니는 자기 마음을 스스로 가라앉히노라고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깊은 교제, 깊은 교제! 무얼 그렇게 대수롭지는 않은 일이겠지. 마 서방으로 말하면 세계 각국을 두루 돌아다닌 터이니까 친한 사람도 많겠지. 사람을 알면 겉으로 알았지 속까지 모른다는 격으로 그 몹쓸 연희란 계집하고도 일면지식이 있었는지 누가 아나?”

그러나 편지 사연은 그뿐이 아니었다.

“…… 그렇게 깊은 교제를 한 터이어늘, 마백륜 씨는 무슨 까닭으로 그런 사색도 내지 않을까요? 시침을 딱 떼고 지낼까요? 자기의 친한 부인이 참혹한 변을 당했다면, 경찰서에나 재판소에 자기의 아는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닐까요? 그 사건에 증인으로 서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닐까요……?”

어머니의 입술은 비뚤어졌다. 입에 쓰디쓴 물이 도는 모양이었다. 과연 시안의 말과 같이 마백륜과 연희의 사이가 그렇게 친하다고 하면 적이 괴이쩍지 않은 바도 아니다. 친한 여자가 죽었으면 자진해서 증인도 될 것이요, 말끝마다 그런 이야기라도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거기 말 못할 비밀이나 있지 않았던가. 어머니는 의심이 와락 아니 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방 와서 그런 의심이 아모 필요가 없는지라, 나는 의심을 누르려고 애를 썼다.

아아 시안의 말을 어찌 믿으랴. 그는 시방 질투의 불길에 몸과 마음을 태우며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라 하였다. 유리의 남편이 된다는 바람에 마백륜의 명예를 깎아서 혼례를 못 지내도록 방해를 놓는 것이라 하였다.

물론 그럴 듯한 추측이다. 그러나 시안이가 질투를 못 이기어, 거짓말을 꾸며 내기까지 해서 혼례를 방해할 만큼, 여지없이 못된 사람일까. 여기는 어머니도 얼마쯤 그의 인격을 믿어 주었다. 설마 그럴 수야 있으랴, 하는 의심이 없지 않았다. 사연은 아즉도 계속되었다.

“깊은 교제라고도 하였습니다마는, 깊은 관계가 있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거기 대한 증거는 역력히 세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연희가 ‘그례샤’ 그 여관에 도착하던 날 밤, 저한테 보낸 종이쪽과 똑같은 종이쪽을 마백륜 씨에게도 준 사실이외다. 그 종이쪽을 전한 뽀이가 직접으로 저한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뽀이는 오십 전짜리 은화 세 개를 얻어 먹고, 그런 일은 오늘날까지 아모한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일원 오십전이란 곧 입막음을 시키는 뇌물이외다. 그 사람은 시방 이곳에 와서 저 든 여관에 뽀이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필요가 있다고 하면 증인라도 되겠다고 합니다.”

예까지 보자, 어머니의 편지 든 손을 떨리었다. 그리고 그 얼굴빛까지 새파래지고 말았다. 편지는 그래도 끝이 나지 않았다.

“돈까지 주어 가면서 부탁을 한 것을 보면 그 종이쪽이 결코 보통 것은 아닐 것이외다. 남의 이목을 두리는 곳에 죄악이 숨는 법 아닙니까? 그러면 두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치 않습니까? 남이 알면 아니 될 무슨 비밀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은 누구라도 품을 것이외다. 저는 이 뒤에도 더욱더욱 미주알고주알 캐고 파 보겠습니다. 이것이 단서가 되어 의외의 중대한 일이 발견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마백륜 씨와 유리 씨의 혼례가 박두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위선 아는 대로 아뢰는 것이외다. 첫 번 혼례에 실패하신 유리 씨이고 보니 이번 혼례는, 더욱 신중히 해야될 것은 제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만사를 심량조처하시와, 두 번째 후회가 없도록 바라며 위선 이만 줄입니다.”

읽기를 마치자, 어머니의 가슴은 무에라 말할 수 없는 무서움에 가위눌리고 말았다.

31

[편집]

그 편지를 물론 어머니의 창자를 뒤틀고, 염통을 오려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간신히 물 위에 헤어 나와 바위 하나를 부여잡았더니 뜻밖에 그 바위가 흔들릴 줄이야. 자기의 운명을 지배할 그 바위야말로 절망의 깊은 못에서 떠오르는 자기의 머리를 눌릴 줄이야, 시방까지 환하게 비추었던 햇빛까지 침침해지는 듯하였다. 터럭끝만한 광명조차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캄캄한 그믐밤 빛이 자기를 휩싸고 도는 듯하였다. 이 어둠을 내어쫓고 물리칠 방법은 아모리 생각해 보아도 없을 듯싶었다. 한동안 어머니는 그 편지를 든 채로 멍멍히 앉아 있었다.

“아아, 유리의 팔자가 불행하면 어찌 이대도록 불행할까. 이 서방과 첫번 혼례가 그 모양이러니 이번 마 서방과 지내려는 혼례도 또한 신신치 못할 터이니, 세상에 이런 가막힐 노릇이 또 있을까. 눈 위에 서리요, 자빠져도 코가 깨어진다는 것은 우리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마츰내 어머니는 길이 한탄을 하며 그 편지를 움켜쥐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간 큰 일이 아니다. 한칼에 목을 찔러 그 자리에 죽게 하는 것은 오히려 시원하다고나 하겠지만, 이다지도 요모조모로 사람을 깎고 저미며 근심과 걱정으로 말미암아 말라 죽게 할 하느님이야말로 야속하다 하였다,

악착하다 하였다. 전생에 지은 죄를 그래도 갚을 수 없을 지경이면 차라리 마른 날에 벼락을 나리어, 재를 맨들고 가루를 짓는 것이 오히려 나으리라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마백륜이가 연희의 일체를 입 밖에도 내지 안 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장모가 될 나이어들, 어찌 일언반사도 거기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을까. 비밀한 편지를 주고받을 터수이었으니, 혹은 아모한테도 말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르리라. 그야말로 ‘깊은 교제가 아니라 깊은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르리라. 그런 몹쓸 여자와 그리고 그런 관계가 있었다면 그 신분은 미루어 알 것이 아니냐. 똥칠한 유리의 얼굴을 그로 하여 씻어 버리려 했더니 도리어 그로 말미암아 유리의 모양이 말 못 되게 아니 되리라고, 누가 보증하랴.

엎치락뒤치락하는 생각의 물결에 어머니는 얼마나 번민하였는지 몰랐다.

그러나 마츰내 마음을 곤쳐먹어 보았다. 시방 와서 새삼스럽게 마백륜을 의심함은 모든 것을 부수고 무너뜨리는 일이니 될 수 있는 대로 마백륜이야말로 믿을 만한 사람이요, 그에 대한 의심의 검은 구름을 쓸어 버리려 하였다. 이런 경우에 시안의 말을 취신할 수 있으랴. 그는 시방 질투로 말미암아 미치게 된 형편이 아니냐. 비록 전부가 거짓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또는 이 혼례를 방해 놀 비열한 심장을 갖지 않았다 할지라도, 질투하는 눈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크게 보이는 법이다. 마백륜이가 연희의 종이쪽을 받았는지도 모르리라. 연희와 같은 말괄량이의 일이라, 제 인격을 높이고 제 신용을 두텁게 하려고, 일면지식이나 있는 사람이면, 무슨 깊은 관계가 있는 듯이 남볼상에 사나운 짓도 하였는지 모르리라. 마백륜이가 아모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이야기할 만한 거리가 되지 않는지 모르리라. 한 걸음 나아가 마백륜이도 그 계집을 어데에서나 만났을 터이고, 젊은 신사의 하기 쉬운 일로 이러니 저러니 우스개를 붙여보았는지도 모르리라. 그럼으로 사내란 사내를 제 손아귀에 주물러 보려는 그 계집이, 한층 더 교제를 깊이 해 보려고, 혹은 무슨 일을 부탁하려고, 그런 종이쪽을 주었으리라. 그렇다면 마백륜이가 그 일체를 말하지 않는다 한들 괴이할 것이 무엇이랴.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

세상 풍파를 많이 겪어본 이만큼, 어머니는 번민 끝에 이런 그럴 듯한 추측을 해 보고, 스스로 수란한 제 가슴을 쓰다듬었다.

‘아. 쓸데없는 일에 공연히 마음을 괴롭게 하였구나. 하마터면 또 무슨일을 저질른지도 몰랐지 만일 이런 편지가 유리의 눈에 띄이면 또 무슨 방정을 떨는지 모르니, 구만 태워 버려야지.’

이렇게 스스로 소곤거리고 그 편지를 난로에 집어넣었다. 이 편지만 없에 버리면 아모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편지에는 무에라고 하였던가.

이 뒤에도 더욱더욱 캐고 파 보겠다 하지 않았는가. 이 앞으로 또 무슨 비밀이 발견될는지 어찌 알랴. 어머니가 예까지 생각을 돌리지 못한 것은 유감이라 하겠다. 어머니는 혼잣말로,

“이러나 저러나 좋은 일은 끄을 게 아냐. 얼른 혼례 날짜만 닥쳤으면 모든 것이 귀정되겠건만.”

과연 이번 혼례가 ‘좋은 일’인가. 그러나 어머니가 서둘고 말고, 날은 자꾸 지나갔다. 마백륜과 유리의 혼인 날짜는 벌써 당도하고 말았다.

32

[편집]

오늘이란 오늘은 결혼식의 바루 전날이다. 내일이면 유리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 것이다. 여자로 태어난 몸이어니 일평생의 고락을 남에게 아니 부탁할 수 없고, 지금까지 불행했던 신세, 기구했던 팔자이기 때문에 내일로 일평생의 운명이 결정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난한 일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다. 유리는 울었다. 제 방문을 굳이 잠그고 호올로 들어앉아, 후끈거리는 뺨을 싸늘한 눈물이 흐르는 대로 맡기었다.

일찍이 시안과 혼례를 지낼 때와 틀리면 어찌 이대도록 틀리랴. 그 때야말로 내일이 혼례란 말을 들을 제, 유리는 뛰어야 옳을지 굴러야 옳을지 알 길이 없었다. 연하고 어린 가슴은 기쁨으로 하여 당장에 터질 듯하다. 꿈같은 행복의 기대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아모리 잠을 이루려 하여도 열에 띠인 눈은 좀처럼 졸음이 오지 않았다. 화평스럽고 행복스러운 자기네의 가정을 생각할 제, 자릿자릿하게 달뜬 마음이란 걷잡을 길도 없었다.

그러하였거늘, 이번 혼례는 어떠한가. 어쩐지 무서웁고 어쩐지 위태위태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모리 마음을 즐겁게 먹어 보려 하였건만, 가라앉은 마음을 일으켜 세울 도리가 없었다. 자기의 몸이 오늘밤을 최후로 컴컴한 굴헝에 끌려 들어가는 듯하였다. 아아, 내일이 닥치지 않았으면! 내일이란 날은 길이길이 자기 앞에 다다르지 않았으면, 좋을 듯싶었다. 두 무릎을 꿇고 내일이 오지 않도록 정성껏 기도라도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즐겁던 지난날의 혼례는 정말 혼례가 아니었음을 어찌하랴. 무서운 이번 혼례야말로 백년의 고락을 결정하는 정말 혼례임을 어찌하랴.

이와 반대로 신랑 될 마백륜은 기뻐서 못 견디는 눈치이었다. 그는 벌써 한다는 여관을 주인으로 잡고, 또는 훌륭한 구락부에 출입을 하기 때문에 누구의 눈에든지 훌륭한 신사로 보이었다. 다만 그 재산의 출처를 아는 이는 아모도 없었다. 또는 알아 보려고도 안 했다. 어머니의 생각에는 제 시골 있는 재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구락부의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골패·투전이 있는 곳이면 그는 어데를 가든지 먹고 입는 것에 걱정을 않으리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전 날 밤에 재수 없던 사람이 지어낸 험담일 테니 물론 믿음직한 말은 아니다. 젊은 신사로 그만큼 행세하는 사람이 어데 있느냐. 상류 가정에 교제가 그만큼 넓은 사람이 별로 없는 터이 아니냐. 유리가 그의 안해가 된다고 하면 귀부인의 사회에 출입할 길도 열린 듯하였다. 유리의 어머니는 다만 이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 날, 마백륜은 오정 때쯤 되어 제 여관을 나가더니, 새로 두 점쯤 해서 반지와 머리꽂이 등속을 사 가지고 돌아와, 제 방문을 걸고 헌 편지들을 검사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로 제 독신 생활이 끝나는 터이니까, 모든 것을 마감할 작정인 것 같다. 새로운 생활에 들어갈 준비로, 지난 생활의 때를 씻음이리라. 찬란한 앞날의 광명을 바라보고, 시방까지 걸어온 침침한 밤길을 돌아다보며 그는 닥치는 행복에 가슴을 뛰었으되 또한 징글징글한 기억에 몸서리도 아니칠 수 없었다. 그 헌 편지 가운데서 네다섯 통은 그에게 무슨 무서운 일을 생각나게 하였던지 몸을 떨며,

“이것이, 이것이 아즉도 남았구나.”

라고, 중얼거린 후 사면을 돌아다보더니, 불 가운데 던지었다. 그 흉물스러운 종이쪽이 새빨간 불길에 검게 변하였을 제 그는 스스로 중얼거리기를,

“이번 일이야말로 천우신조다.”

라 하였다. 유리로 제 안해를 삼는 것이 천우신조라고 하는 뜻인가, 독신 생활을 하던 사람이 장가를 든다 하기로니 천우신조라고 할 것이 무엇인가.

세 시가 조금 지내서 그는 유리를 찾아왔다. 아까 샀던 물건을 유리에게 주었다. 내일같이 혼례를 지내겠고 오늘같이 신랑의 예물! 신부 되어서 어찌 기뻐하지 않을 것이랴. 수줍은 생각으로 붉어진 얼굴에 감추랴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번쩍일 것 아니냐. 그러나 유리는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조금도 수줍어하는 눈치도 없었다.

‘이 원수의 것.’ 하고, 무슨 보지 못할 것이나 본 듯이 시선을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인사 한 마디야 없을 수 없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는데, 그 소리도 모기 소리만하였다.

내일로 남편 될 사람에게 하는 말로는 너무도 애교가 없다. 그러자 유리는 몸을 소스라치더니 창 앞에 와서 창경에 이마를 대이고 밖을 내어다 보았다.

그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33

[편집]

유리가 창경에 이마를 대이고 무슨 비감스러운 회포가 일어났던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제, 마백륜이도 슬며시 일어나서 그 등 뒤에 섰다.

입술이 실룩실룩하는 것을 보면 유리에게 무슨 할말이 있었음이리라. 아니, 할 말이라는 것보담 유리의 허리로 갈 듯 갈 듯한 손이 내어밀었다 움츠러들었다 하는 것은, 그를 위로도 해 주고 싶고 부둥켜안고도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백륜이의 입이 떨어지기 전에, 팔이 벌어지기 전에 유리는 급작스럽게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마백륜이도 따라서 제자리에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츰내, 떼기 어려운 입을 떼었다.

“유리 씨! 내 마음의 만분지일이라도 당신이…….”

말이 마치기 전에 유리는 얼핏 대답하였다.

“저는 약속을 지킬 터에요.”

그렇다, 오직 약속뿐이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마백륜의 흉중은 모를 일이로되, 유리의 가슴에는 티끌만한 사랑도 없었다. 다만 약속에 끌려 그의 안해가 될 따름이다. 관에 몰려가는 소 모양으로 결혼식장에 몰려갈 뿐이다. 경우와 형편이 몰아 넣는 대로 유리는 눈을 딱 감고 수채에라도 빠지며 굴헝에라도 떨어질 뿐이다.

간단한 대답이건만, 그 한 마디가 몹시 마백륜의 가슴을 찌른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무엇을 한참 생각난 듯하더니, 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

“유리 씨! 무슨 약속이라도 하기 싫으면 취소도 못할 것이 아닙네다. 약속을 하였다고 일평생을 보기 싫은 사람과 지낸다는 것은 지옥살이에 더한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유리 씨가 그렇게 싫을 것 같으면 오늘로 취소를 해 버리구려.”

진정 비슷 위협 비슷한 마디를 뇌이었다.

시방이란 시방까지 유리가 마백륜의 말을 듣고 가슴이 찌르르하도록 느껴 본 것은 이 말 한 마디뿐이리라. 이 자리에서 오히려 약속의 취소를 허락함은 정말 사내다운 일이요, 신사다운 태도인 듯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해 버렸다.

“아녜요. 약속을 취소할 때는 벌써 지나갔어요.”

과연 취소할 때는 지나간 것이다. 시방 와서 새삼스럽게 취소를 할 지경이면 애당초에 약속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유리로 하여금 부득이 약속을 하게 된 사정이어든, 그 약속을 구만둘 가망인들 어찌 있을 수 있으랴. 아모리 마백륜이가 허락을 한다손 치더래도 어머니가 들어 줄 리도 만무할 것이다.

마백륜은 그 말을 듣자 기쁨 반 걱정 반으로,

“그러면 내일 또 뵈옵지요.”

하고, 물러갔다. 쓸쓸하고 맛없는 혼례도 있고는 볼 일이다.

마백륜이가 돌아가자 유리는 갑자기 방안이 넓어진 듯하였다. 언제든지 그가 곁에 있고 보면, 웬일인지 공기가 납덩어리같이 무겁게 되어 자기를 눌리는 듯하였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길이 콱콱 막히었다. 그런데 그와 일평생을 같이 지낼 수 있을까. 거울같이 마주앉고 그림자처럼 서로 따르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꿈에도 그럴 가망이 없건마는 지금 와서 노심을 한다한들 그 보람이 무엇이랴. 심술 사나운 운명의 손이 잡아끄으는 대로 가시덤불의 길을 아니 걸어갈 수 없다.

“벌써 취소할 때가 늦었다. 벌써 취소할 때가 늦었다.”

이렇게 스스로 소근거리며 방안을 왔다 갔다 할 때에 어느덧 날은 저물고 말았다. 그 날 해가 서으로 기울어짐을 따라 유리의 생활에도 어두운 밤이 오는 듯하였다. 이 밤만 지내면 그는 속절없이 마백륜의 안해 노릇을 아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녁 때가 되어 문득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에 열어 보니 하인이 명함 한 장을 들고 서 있다.

“이 어른이 아가씨와 좀 면회를 하겠다고 합니다.”

유리가 그 명함을 받고 하인이 물러가자마자, 찾아온 이는 뛰어드는 듯이 그 방에 들어왔다. 이것이 누구인가. 유리는 그 얼굴을 보고 깜빡 놀래었다. 그는 다른 사람 아닌 이시안이었다. 무슨 일로 오늘날에 시안이가 여기 왔는지 유리는 외마디 소리도 치지 못하고 눈만 호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혹은 시안이가 미치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같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정말 미쳤는지도 모르리라. 법정에서 볼 때나, 또는 방면되어 만났을 때나, 비록 얼굴이 파리했다 할지라도 시방처럼 이 꼴은 아니었다. 시방 시안은 신사로 볼 수도 없을 지경이다. 수염은 자랄 대로 자라고, 칼라는 새까맣게 더러워졌으며, 단추까지 끼우지 않았다. 그는 다만 끓는 듯한 음성으로,

“오오, 유리 씨!”

하고, 덥석 유리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유리와 마백륜이가 내일로 결혼식을 한다는 말을 듣고 질투로 말미암아 미치지나 않았는가.

34

[편집]

시안이가 돌아오리라고는, 유리의 꿈에도 생각지 못한 바이었다. 너무 의욋일이라 유리는 스스로 제 눈을 의심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정말 이시안인가. 저승의 저곳에는 모르거니와 이승에서는 대면도 하기 어려우리라던 이시안인가. 엄청나게 징글징글한 가운데 그래도 잊으랴 잊을 수 없고 때때로 자기의 가슴에 연기같이 안개같이 떠오르던 이시안이란 말인가. 아니다, 아니다, 암만해도 그이가 아니다. 그이는 벌써 멀리멀리 가지 않았던가. 제 몸의 순결을 증명할 만한 거리를 장만하려고, 시방 세계 각국을 두루 편답하는 중이 아닌가. ‘암만해도 의심을 풀 수 없다.’는 자기 말 한 마디에 더할 수 없이 분개하며 자리를 차고 돌아가지 않았는가. 자기를 매몰하다 하여 냉정하다 하여 근처에도 오기를 싫어할 그이가 아니야. 시방 와서 아모리 뉘우친다 하더래도 벌써 담을 수 없는 물인 줄만 알았더니, 그 이가 꿈 아닌 생시에 자기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헛것으로 그리던 안타까운 그 모양을 뜬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반갑고 놀랠 일이 아니냐. 반가움이 너무도 넘치니 암만하여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무슨 까닭인지 깨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리 씨! 유리 씨!’ 하는 그 소리는 옛날 부르던 그 음성과 속이려 속일 수 없음에 어찌하랴. 덥석 쥐인 손목엔 뜨거운 열이 옮아옴을 어찌하랴.

유리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쥐인 손목을 뿌리치며,

“어째 당신은 이곳을 오셨어요? 여기는 당신 오실 데가 아녜요.”

꾸짖는 듯이 한 마디 해 보았으나, 어쩐지 목이 메이었다. 가슴은 미친 바람을 만난 바다와 같이 울렁거리었다. 시안은 들은 체 만 체 다시금 한걸음을 다가 들어서며 다짜고짜로 유리를 부둥켜안으려 하였다.

“안 돼요, 전 내일로 혼례를 한답니다. 마백륜 씨의 안해가 된답니다. 당신은 이때껏 그것을 모르십니까?”

말은 물론 정당하나, 그러나 이 말을 하는 것이 유리의 본뜻일까, 생각하면 이 말을 안 할 수 없게 된 유리의 흉중이야 어떠하랴.

“알아요, 나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온 것이다. 그런 필요 없는 혼례를 고만두라 하려고 숨이 턱에 닿도록 내가 뛰어온 것이다.”

시방 와서 혼례를 구만둔단 말이 될 말인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지언정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 말마따나, 그는 타오르는 질투의 불길로 말미암아 발광을 하고 만 것 같다. 유리는 조금 어성을 높이며,

“당신은 정신에 이상이 생겼습니까? 시방 와서 그것이 될 말씀이야요? 시방 구만두게 한다면 구만두게 될 줄 아십니까?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어서 이 곳을 떠나 주셔요. 어서 댁으로 돌아가 주셔요. 여기서는 오래 이야기할 것도 못 됩니다.”

“아니오, 갈 수 없습니다.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오즉 온전한 정신으로 당신을 찾아온 것입니다. 누가 무에라고 하든지 그 혼례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암만해도 이 이시안의 안해이니까요. 남편이 눈이 등잔같이 살아있는 다음에야 어찌 다시 시집을 갈 수 있나요?”

사안의 말투는 더욱더욱 수상해지고 유리의 당황은 점점 심해 갔다.

“구만 가 주셔요, 아모 말도 마시고 구만 가 주셔요. 공연히 남의 가슴만 얼떨떨하게 맨들지 마시고 제발 돌아가 주셔요.”

하고, 유리는 세 번째 몰풍스럽게 거절을 하였으나, 시안은 조금 침착해지며,

“하여튼 남의 말이나 들어 주어요. 아까도 말했거니와, 나는 결코 미치광이가 아니요 멀쩡한 본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 한번 일러듣기지만, 우리들의 저번 결혼이 결코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소. 번듯한 혼례식이었소. 당신과 나는 그때나 이때나 변함없이 떳떳한 부부란 말이오. 쓰든 달든 백년을 같이할 부부란 말이오. 그 혼례를 정말 혼례가 아닌 줄 안 것은 피차에 잘못이었소. 말하자면 경솔한 탓이겠지요.”

시안은 떠먹는 듯 중언부언하였건만, 유리에게는 도모지 웬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당신의 안해는 그때 번연히 살아 있지 않았어요? 전처가 살아 있고 지낸 혼례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예요?”

“흥, 그것이 그렇지 않아요. 꼭 그런 줄만 알았더니 천만뜻밖에 그렇지 않은 까닭을 내가 발견했어요. 그 연희란 여자는 내 안해가 아니예요. 나와 연희의 혼례야말로 거짓 혼례랍니다.”

“네, 네, 뭣이 어째요!”

연희가 시안의 안해가 아니란 말은,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35

[편집]

연희가 시안의 안해가 아니란 말에, 유리의 눈은 호동그래지고 말았다. 시안은 입에 침이 없이 설명을 계속하였다.

“유리 씨야 놀래기도 할 것이오. 연희란 년이 얼마나 악독하고 흉측한 계집인지 생각만 해도 혀가 내어둘려요. 기실 나와 혼례를 지낼 때에, 벌써 정당한 남편이 있지 않았겠소? 남편 있는 것을 속이고 나와 결혼을 하였으니 그 혼례가 무슨 쓸 데가 있겠소? 그것은 새빨간 거짓 혼례가 아니겠소?

따라서 나는 연희와 부부 된 일이 없지 않소? 아니, 애당초에 부부가 되지를 않은 것이 아니오? 연희와 내가 부부가 되지 않았다면 이 이시안이란 사람은 자유로운 몸이니까, 누구하고라도 결혼할 권리가 있을 것이 아니오?

그러니 전번에 우리 둘이 지낸 혼례야말로 정식 결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한즉 유리씨는 법률상으로 보아도 떳떳한 내 안해란 말이오. 이시안은 당신 남편이란 말이오. 남편 있는 몸이거늘 어찌 다른 사내와 결혼을 한단 말이오?”

꿈인지 생시인지 유리는 도모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는 꿈결에 시안의 얼굴을 보고, 꿈결에 시안의 말을 듣는 듯하였다.

혹은 시안이가 꾸며내어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은 조금도 유리의 가슴에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를 여지가 없었다. 시안의 그 말은 그런 의심을 일으킬 만한 틈을 주지 않았다. 창자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그 목소리는 누구든지 감동시키지 않으면 말지 않았다. 구구절절에 참됨이 넘쳐흘렀다.

“이야말로 놀랠 만한 사실이 아니겠소. 내 손에 확실한 증거품이 들어왔소. 인제는 아모리 속이려 하여도 속일 수 없는 증거를 내가 잡았단 말이오. 그러므로 나는 밤잠도 자지 않고 유럽에서 뛰어온 것이오. 무슨 짓을 하더래도 유리 씨와 마백륜이가 혼례를 거행하기 전에, 일장 설화를 하려고 얼마나 고심을 하였는지 조급히 굴었는지, 유리 씨로는 생각도 못할 것이오. 인제 알았소? 인제 내 말을 알아들었소? 당신은 내 안해다. 이 이시안의 안해다.”

유리의 얼떨떨하던 머리도 조금씩 가라앉으며 사건의 연맥을 짐작한 듯싶었다.

“그러면 그 연희란 여자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 정당한 남편이 있었더란 말씀이에요?”

“그래, 그래, 그래요. 분명히 정당한 남편이 있었소. 그것을 증명할 만한 서류는 내가 여기 가지고 있소. 아마 그 남편 되는 자도 이 세상에 살아 있겠지요. 시방 나의 대리인은 그 사람을 찾으러 독일(獨逸)에 출장을 하였지요.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사기도박을 하는 자라니까 머지 않아서 어데서든지 붙들리겠지요. 본성명은 최달수(崔達洙)라고 하지마는, 여러 번 변명을 하는 자이니 시방은 무슨 이름으로 행세를 하는지 모르지요. 그것은 어찌되었든, 대관절 이것만 보아요.”

하고, 유리의 코앞에 시안이가 펴 보이는 것은, 자금부터 팔 년 전에 최달수와 심연희의 결혼을 등록한 문서 초본이었다. 관청인까지 분명히 찍혔으니 터럭 끝만치라도 의심쩍은 점은 없다.

유리는 그것을 자세하게 검사해 볼 필요도 없었다. 검사해 보지 않더라도 모든 연유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갑자기 맥이 풀린 것같이 등 뒤의 교의에 넘어지는 듯이 주저앉고 말았다.

“유리 씨, 유리 씨!”

하고, 시안은 살뜻한 제 안해의 손목을 잡으며,

“누가 무에라 해도 당신은 내 안해요, 내 것이오. 인제 아모의 안해도 아니오. 내 안해, 내 안해, 내 사랑이다.”

‘내 안해’란 말이 유리의 가슴 밑까지 스며들어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시안은 더욱 잽싸게,

“저번 혼례를 지낸 뒤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이제 모든 것을 물로 흘려 버리자. 유리 씨는 내 안해이니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자아 이 길로 다시 신혼여행의 길을 떠나자. 이 집은 벌써 유리 씨의 집이 아니다. 유리 씨의 집은 곧 나 있는 곳이다. 이런 기쁜 일이 또 어데 있을까. 자아, 가요.”

유리는 시안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해 된 몸이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조금만 기다려 주셔요. 무엇이든지 당신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만일 유리로 하여금 좀더 생각을 하였던들 이다지도 쉽사리 시안의 말을 듣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유리의 마음은 시방 여러 가지로 산란한 판이다.

그러므로 시안의 안해란 생각밖에 다른 일을 돌아볼 형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제 몸이 불행했던 반동으로, 외곬으로 시안의 명령에 움직이게 되었다. 안해인 다음에 그의 명령을 어찌 거역하랴. 말대로 복종하는 것이 의무다. 옳은 일이든 그른 일이든 오즉 남편과 한길을 걸을 뿐이다.

이리하여 유리는 시안을 아니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36

[편집]

꽃밭으로 걸어가든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든지, 벌써 부부가 된 다음에야 남편과 운명을 같이 안 할 수 없다. 복되고 불행한 것을 따질 것이 아니다.

가릴 것 아니다. 모든 것에 눈을 감아야 한다.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지팡이 힘을 빌리는 것처럼 그도 시안의 팔에 매어달리어 끌려갈 따름이다, 따라갈 따름이다. 유리는 이런 마음을 먹고, 시안이가 ‘다시 신혼여행의 길을 떠나자’ 하는 말에, 선선히 그리 하겠다고 승낙한 것이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다. 남편의 몸이요 남편의 마음이다.

의외에 쾌한 승낙을 듣자 시안은 기쁨은 못 견디는 듯이 벌떡 몸을 일으켰으나 기쁜 생각이 돎을 따라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문득 깨달으니 이대로 여행할 수는 없다. 여러 가지 준비도 준비려니와 신사답게 차림차림도 차리지 않으면 도리어 유리에게 수치를 끼칠 것이 아니냐.

“유리 씨!”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난 몸단속을 조금 하고 세 시간 뒤에 올 터이니 유리 씨도 그 때까지 마치 준비를 하고 있구려.”

“네 그러지요.”

하고 유리는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무슨 생각이 난 것같이,

“저어……. 어머님한테도 고별을 해야 되잖아요?”

시안은 한동안 무슨 궁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님께 고별하시는 건 구만 두지요. 그야 아모 말 없이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는 것이 여간 섭섭하고 죄송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머니한테 그런 말을 했다가 우리 일에 방해가 되면 큰일이 아니오? 그 말만 들으시면 어머님은 대경 질색을 하실 테요. 그러면 마백륜이를 불러대든지 또는 내 형님한테 교섭을 하든지 야단법석이 일어나겠지요. 그러면 오늘밤에 떠나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것보담 차라리 몰래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겠소. 어머님께는 연유나 몇 마디 적어 놓고 우리끼리 가 버립시다. 내일 내가 자세한 일을 상서로 아뢸 터이니.”

유리는 또 ‘네’ 하고,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남쪽 프랑스(불란서)로 가십시다. 거기 가서 좋은 경치를 보면서 피로한 머리를 쉬어 보지요.”

“네. 그러지요.”

하고 유리는 또 하자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안이가 돌아간 뒤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과연 어머님께 미리 사연을 알릴 수 없고, 그렇다고 일언반사 없이 떠나갈 수도 없었다. 그래, 유리는 간단하게 마백륜에게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일 혼례는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필 당신뿐이 아니라 이 몸은 누구하고도 결혼할 자격이 없는 것을 오늘에야 깨달았습니다.

작년에 이시안 씨와 지내인 혼례를 무효인 줄만 알았더니 그렇지 않고 그것이 정당한 혼례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이 몸은 언제든지 이시안 씨의 안해이외다.

그러면 당신과 약혼한 것은 저절로 효력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오늘날까지 기다려 주신 것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나, 아까 말씀과 같이 취소를 할 터이면 시방이라도 취소할 수 있다는, 하해같이 넓으신 마음을 든든히 믿삽고, 저번 약속을 취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피차에 인연이 없는 걸로 단념하시고 깊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이렇게 썼다.

천만뜻밖에 이시안 씨가 돌아오셨습니다. 저는 꿈이나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였사오나 그이는 분명히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이의 얼굴을 보고 음성을 들을 제 저는 웬일인지 눈물이 앞을 가리웠어요. 그는 연희와 부부가 아니었습니다. 연희가 그의 안해로 속은 것은 그이나 제가 경솔한 탓이었습니다.

그이와 연희가 부부가 아닌 동시에 저와 그이는 떳떳한 남편이고 안해인줄 지금이야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남편의 말에 좆으려 합니다. 그와 저는 운명을 같이 안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데든지 그이를 아니 따라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밤 내로 저는 그이와 다시 신혼여행의 길을 떠나갑니다. 향하는 곳은 남쪽 유럽(구라파)이 될 듯하여요. 뵙고 자세한 사연을 여쭙고도 싶습니다마는, 그럴 수도 없는 불초 여식의 흉중을 굽어살피소서. 자세한 말씀은 내일 시안 씨가 상서로 아뢰겠다고 힙니다.

쓰기를 마치자,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37

[편집]

유리는 물론 총망하게 편지 쪽을 감춰 버렸으므로 어머니는 눈치도 채지 못하였다.

유리는 얼굴은 여전히 해쓱했으되, 아츰결에 볼 때보담 얼마쯤 침착된 점이 있으므로 어머니는 도리어 안심을 하였다.

“오늘 밤은 저녁을 일찍 먹고 일찍이 자자. 벌써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 재산과 가져갈 돈 같은 것도 의론이 끝나고 시방 마 서방이 매우 기뻐하며 돌아갔다.”

“그러면 마백륜 씨가 지금까지 어머니한테 있었습니까.?”

“그래, 재산에 대한 의론이 조금 길어져서……. 무슨 그 사람의 잘못은 아냐. 시골 있는 그의 공증인이 도모지 재산 목록을 보내지 않은 탓이야.”

정당한 제 재산일 것 같으면 주인이 팔아 올려 보내라도 보낼 것이어늘 그 목록까지 보내지 않는 것은 수상한 일이리라. 더구나 혼인을 정한 지가 하루이틀이 아니요, 벌써 반년이 넘는 터이 아니냐. 그 사이에 목록 하나 꾸미지 못할 리가 만무한 일이 아니냐. 그만 것이야 적이 주의를 하면 마백륜의 행동에 미심쩍은 점이 여러 가지인 줄 발견하련마는 어찌 되었든 하루바삐 딸을 치워 버리려는 어머니는 그런 주의를 할 겨를도 없었다. 유리로 말하면 어렴풋이나마 의심이 아니 나는 것이 아니로되 시방 와서 그런 일을 따져볼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도리어 마음에 찔릴 뿐이다. 어머니와 마백륜은 꼭 내일로 혼인이 될 줄 알고 이렇듯이 애를 쓰며 준비를 하는구나, 할 제 유리는 어떻게 미안쩍고 죄송스러운지 몰랐다.

“일찍이 밥을 먹고 일찍이 자자.”

하는 어머니의 말대로, 식당에 들어왔으나, 그래도 고별 한 마디 없이 달아날 일을 생각하매 꺼리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의 방에 올라가자,

“어머니, 저어…….”

하며, 유리는 말을 끄집어내어 보았다.

“왜, 무슨 할말이 있니?”

“저어 작년에 시안 씨와 지낸 혼례가 아모 탈이 생기지 않았으면 시안씨의 신변에 그런 끔찍한 일이 없고 일평생을 무사히 지내갔으면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어머니는 눈을 호동그랗게 뜨며,

“시방 와서 그런 소리를 왜 한단 말이냐? 그런 소리일랑 입 밖에도 내지 말아요.”

“아녜요. 그저 여쭈어 보는 말씀이야요. 아모 탈 없이 그 혼례가 정말 정당하고 효력 있는 것이고, 제가 시방 시안 씨와 금실 좋게 지냈으면…… 어머니 마음에는 어떠하시겠습니까? 기쁘게 여기겠습니까, 슬프게 여기시겠습니까?”

“그게 다 무슨 말이냐. 그야 물을 것도 없지. 어느 미친년이 제 딸의 혼례에 병통이 생기기를 좋아한단 말이냐. 아모 탈 없이 지내갔으면 의례히 기쁠 게지.”

그 말을 듣고 나니 유리는 적이 안심이 되는 듯하였다. 마음의 짐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하였다. 그렇다, 시안이와 아모 탈 없이 지냈으면 어머니는 물론 기뻐하실 것이다. 효력 없던 혼례에 다시 효력이 생기어 나와 시안이가 다시 신혼여행의 길을 떠났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그리 꾸중을 않을 듯싶었다, 그리 놀래지 않을 듯싶었다.

“어머니, 저는 그러면 먼저 가서 잘 터예요. 안녕히 주무셔요.”

하고, 물러 나오면서 어머니를 돌아다보는 그 얼굴에는 오래간만에 웃음의 그림자까지 떠돌았다.

혼자 남은 어머니는 멋모르고 기뻐하였다.

“뭐니 뭐니 해도 아즉 어린 계집애다. 내일 혼인을 지낸다니까 벌써부터 활기가 도는구나. 한번도 기쁜 빛이 떠오르지 않던 그 얼굴에 웃음이 흐르는 것을 보면 내심으로 여간 기쁘지 않은 모양이다. 지낸 일을 벌써 다 잊어 버리고 인제 새로운 행복을 느낀 모양이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하고, 어머니는 스스로 웃었다. 자기도 일찍이 자고 바쁜 내일 날을 맞으려고 침실로 돌아갔다.

그날 밤 열 점쯤 되어서, 유리는 자기 침실에서 빠져 나왔다. 아까 써 놓은 편지 두 장은, 내일 아츰에 곧 어머니의 눈에 띄도록, 벼개 위에다가 나란히 올려 놓았다. 아모 것도 가지지 않고 가위 빈몸으로 밖을 나왔다. 길 모서리에 몰라보리만큼 훌륭한 신사가 되어 시안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손에 손을 잡았다. 시안의 기쁨이야 그 어떠하였으랴. 유리의 손을 잡으니 시방까지 죽었던 자기가 다시 살아난 듯하였다. 그들은 곧 프랑스(불란서)가는 기차를 집어탔다.

이것으로 시방까지 그들을 덮었을 검은 구름장이 걷히고, 행복의 햇발이 다시 웃기 시작할 듯하였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것은 아니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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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올라탄 차실 안에는 다른 승객이 없었다. 휘너른 찻간이 오직 그들에게 홑지고 따뜻한 행복을 누려 주기 위하여 텅 비어 있는 듯하였다.

시안의 곁에 앉은 유리의 마음은 해면과 같이 풀어 가지고 말았다. 시안과 혼례식을 지낸 후 오늘이란 오늘까지 이렇게 가라앉고 풀어져 본 적은 없었다. 어쩐지 푸근하고 시원한 느낌에 마음이 턱 놓이는 듯하였다. 일시 반시도 끊일 새 없이 깎고 살을 저미는 근심과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다만 하늘과 땅이 갑자기 넓어지는 듯하며 가슴속까지 환해지는 듯하였다.

극락세계에 들어간 듯하다는 것은 이 때의 유리의 마음을 이름이리라.

“인제야 나는 안심이 돼요.”

하고, 그는 졸리는 듯이 소근거리었다.

무슨 까닭으로 유리의 마음은 이다지도 가라앉고 풀어졌을까? 그럴 듯도 한 일이다. 시안과의 결혼이 헛 효력인 줄 알 때에 어린 그의 가슴은 근심과 걱정으로 말미암아 터질 듯하였다. 지금까지 기쁨과 행복에 발버둥하는 몸이 옳지 못한 혼인으로 하여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었다. 한 그믐밤 빛 같은 어둠이 그를 에워싸고 말았다.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그나 그뿐인가, 사실 제 남편도 아닌 남자이언만, 오직 첫날밤을 같이 지내었다는 정리로 말미암아 법정에서 끔찍끔찍한 거짓말을 하고 보니, 자기는 세상과 인연까지 끊게 되었다. 살아도 사는 보람이 없고 이미 송장이 된 몸이어니 가릴 것이 무엇이고 헤아릴 것이 무엇이냐. 물결 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밀리어 가고 불리어 갈 따름이다. 스물도 못 된 꽃다운 처녀로 이 지경이 될 제 걱정도 걱정이요 근심도 근심이려니와, 그 원통하고 애닯은 생각이야 무엇에 견줄 것인가. 제가 지은 죄라 할지라도 이런 참혹한 신세가 되고 보면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을 원망할 것이어늘, 빙설 같은 마음에 한 점의 티가 없고, 갓 피어난 꽃과 같이 신선하고 아름다운 몸에 털끝 만한 험절도 없었음 에랴. 당당한 처녀의 몸이언만, 벌써 처녀의 자랑을 잃었고 희망 많은 청춘이언만 모든 것에 단념을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어데 있을까. 기구한 내 팔자요 불행한 내 신세이어든 그대로 버려 두기나 했으면 좋으련마는, 마음에 싸지 않은 약혼까지 하게 되고, 몇 시간이 못되어 곁에만 있어도 숨이 막히는 사내의 안해 노릇을 않을 수 없게 되매, 볶이고 쪼들리는 애를 진정할 길이 없던 차에, 천만 의외로 시안이가 달겨들어, 전번의 혼례가 정말 혼례인 줄 알게 되었다. 그럴 동시에 자기의 일평생은 다시 변통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쓰든 달든 내 남편인 다음에야 인제 다시 몸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세상에 이보담 더 안심되는 일이 어데 있으랴. 너무도 안심이 지나쳐서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말하자면 안심에 취해서 혼이 뜬 것이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놀랜 새새끼가 제 어미의 품에 안기는 것 모양으로 유리는 시안의 곁에 가깝게 가깝게 다가앉았다. 유리의 안심보담 더한 것은 시안의 기쁨이었다.

“오오, 유리 씨, 이런 기쁠 때가 어데 있겠소?”

하고, 그는 말을 꺼내었다.

“그래요”

라고, 대답을 하였건만, 시방은 좋아하고 기뻐할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도 지치고 너무도 피로해서 맥이 풀어진 듯하였다. 호올로 느긋한 안심만 맛보고 있는 듯하였다. 시안은 가슴속에서 밀려 올라오는 사랑스러운 정을 금하다 못하여 두 손 사이에 그 얼굴을 들어 보았다. 가슴츠레한 눈은 반이나 가무러졌고, 깰락 조을락 하며 우단 같은 꿈길을 걸어가는 듯하였다.

“세상에 가엾은 일도 있다. 오랫동안 근심과 걱정에 유리 씨는 이다지도 피로하셨구려. 졸리시면 조금 자요.”

“아뇨.”

하고, 유리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한번 방긋 웃어 보이었다.

“자아, 그러면 우리 이것이나 먹고 정신을 차려 보아.”

하면서, 시안은 제 가방 속으로부터 과실 몇 개를 꺼내어, 찬칼로 벗기기 시작하였다. 때때로 기차가 몹시 흔들리기 때문에 칼이 빗나가서, 구만 손가락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그런 일이란 항다반 있는 일이다. 상처라고도 못할 만큼 조금 다친 것이라, 곧 수건을 대이며 피를 닦았다. 이런 시시한 일이언만 그 결과는 결코 시시하지 안 했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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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과실을 버리고 다른 것을 꺼내었으나 그 상처로부터 의외로 피가 많이 나와 깎기에 매우 불편하다. 깎으려던 과실을 다시 집어치우고 시안은 다시금 다친 곳을 수건으로 눌렀다. 그럴 사이에 유리의 기운은 더욱더욱 가라앉는 모양이었다. 시름없이 차창을 기대고 다시금 눈을 감으며 그대로 감으러지지 않는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 모양을 보자 시안은,

“옳지, 과실보담 더 좋은 것이 있는 걸 그랬구나.”

하면서, 이번에는 ‘뿌란데’ 병을 나리어 조그마한 잔에 부어 가지고 유리를 주며,

“유리 씨, 자아, 이것을 마셔 보아요.”

유리는 눈을 뜨며,

“대단히 고맙습니다.”

하고, 시안을 향해 방긋 웃고는, 주는 것을 받아서 홀짝 마신 후, 그 잔을 도로 보낼 제, 시안의 무릎 위에 얹은 피 묻은 수건이 그의 눈에 띄고 말았다.

이상하게나 여기는 듯이 자세자세 그 수건을 보고 또 보는 서슬에, 유리의 얼굴빛은 변해 갔다. 시방이란 시방까지 유리는 다만 제 몸이 시안의 안해이란 생각밖에 없었다. 다른 모든 일은 씻은 듯이 잊어 버렸더니, 이 수건을 한번 보자마자, 문득 일년전의 피 묻은 수건 그 일과 단도를 생각하였다. 그것뿐일 것 같으면 구만이라 하겠으되, 그럴 동시에 전기와 같이 마음을 쓰는 것은 시안의 범죄이었다. 자기 뒷덜미를 짚는 운명의 사나운 꼴이나 본 듯싶었다. 나는 살인범의 안해가 되었다. 인제 일평생 이 몸이 그에게 달리고 말았다. 무참히 맞아 죽은 이의 원혼이 길이길이 내 몸에 붙어 다닐 것이다.

유리는 아모 말도 하려 안 했다. ‘악’ 소리도 치지 않았으되, 몸이 대번에 뻣뻣해지고 말았다. 자기 가슴속에 일어난 파란을 곁에 있는 이에게 아니 알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몸이 떨리었다. 피차의 열이 서로 옮아 오리만큼 붙어앉은 시안이가 유리의 몸에 일어난 변태를 모를 리 없었다.

“왜 몸이 이렇게 떨리오? 한기가 드는 모양이구려.”

“아녜요. 아모렇잖아요.”

하고, 유리는 고개를 흔들었건만 그 말소리까지 떨림을 어찌하랴.

“오오, 얼굴도 파랗게 질렸구려. 자아, 고개를 이리로 돌려 보아.”

고개를 돌리려 하여도 뻣뻣해진 목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인제 곧 나아요.”

하고, 대답하였건만, 시안은 더욱 수상해 하며,

“유리, 유리.”

하면서, 그 손을 잡으며,

“내 얼굴을 봐요. 왜 외면을 하오? 자아 고개를 돌려요.”

하고 손목을 잡아당기었으나 그 보람이 없었다. 유리는 간신히,

“그것을 치워 주세요. 당신 무릎에 있는 것을 치워 주셔요.”

“뭐 뭐를 치우란 말야? 무엇이 그렇게 무섭담?”

하고, 제 무릎을 나려다본즉, 피 묻은 수건이 그대로 얹혀 있었다.

“이것 말야?”

하고, 시안은 그 수건을 들다가, 그도 심경이 예민한 사람이라, 곧 유리의 흉중을 추측할 수 있었다.

“유리 씨, 유리 씨는 아직 나를 의심하는구려. 그만하면 의심이 풀릴 것 아니오?”

풀린 것이 아니라, 잠깐 잊었을 따름이다. 제 눈으로 역력히 본 일이어늘 그렇게 까닭 없이 풀릴 것이랴.

“유리 씨는 그러면 무슨 짝에 나와 두 번째 신혼여행의 길을 떠났단 말요?”

유리의 입으로부터 그제야 말 같은 말이 나왔다.

“지낸 일은 이렁성거리지 말아 주어요. 아까도 시방까지의 일은 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당신의 안해가 아니야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과 같이 당하고 같이 겪을 따름이지요. 아모 말도 말아 주셔요. 아모 것도 묻지 말아요.”

그렇다. 유리는 남편이요 안해란 인연으로 말미암아. 옳은 일이든 그른일이든 오즉 시안을 따라 가려고 결심한 것이다. 남편에게 살인죄가 있으면 안해도 그 죄를 나누는 수밖에 없다. 이리 된 다음에야 인제 싫어도 할 바 아니요 달아도 날 배 아니다. 이것이 유리의 먹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안이가 이걸로 만족할까. 그는 안해의 마음에 의심이 아주 풀어질 줄 믿었었다, 알았었다. 그렇기에 손에 손을 마주잡고 신혼여행의 길을 떠난 것이 아니냐. 만일 유리가 아직도 자기를 의심할 줄 알았던들 유리의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놀람은 실망이 되고 분노가 되었다.

“유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유리의 남편이 될 수 없다. 이 몸에 살인죄가 있거늘, 그것을 숨기고 죄 없는 이를 안해로 삼아, 그의 몸조차 더럽힌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시안이란 사내가 그렇게 비열한 놈은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 시안의 앞이마에는 푸른 힘줄이 섰다.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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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의 일평생에 이다지도 분노한 적은 없으리라. 분노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는 지금도 유리가 자기를 의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의심이 풀렸기에 이와 같이 기뻐하며 다시 부부가 된 줄로 알았다.

그러나 유리는 그렇지 않았다. 의심이 풀려서 다시 부부가 된 것이 아니요, 저번에 지내인 혼례가 유효하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부부가 되는 것이 정당한 줄만 여겼다. 의심을 눌르고 시안을 따라서게 된 것이다. 그러니 둘의 마음에는 넘을 수 없는 굴헝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의심이 풀리는 것과 의심을 눌르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일이다. 그러나 어느 편의 생각을 그르다고도 못할 일이다. 옳기는 다 옳지마는 서로 합할 수는 없다. 아니, 피차에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서로 자기를 굽힐 수 없음이다. 앞이마에 푸른 힘줄이 드러난 시안은 부르짖었다.

“그래, 오늘이란 오늘까지 임자는 내가 연희를 죽인 줄로 알았구려.”

“왜 그런 말은 자꾸 하셔요. 제발 구만 두어요. 내가 모든 것을 잊어버리면 그뿐이 아니야요.”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뿐이란 말이 될 말이냐. 분명히 대답을 해 다고. 내가 연희를 죽였다는 의심이 아즉 임자의 마음에, 남아 있소 없소. 있거든 있다고 시원스럽게 대답을 해요. 대답을.”

입으로 의심이 풀어졌다 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건만 유리는 제 남편에게 거짓말할 여자가 아니다. 곧이곧대로 제 먹은 마음을 숨기지 않는 여자다.

시방 의심하고 있는 것을 어찌 의심이 풀어졌다고 할 수 있으랴.

“꼭 대답을 해야 되겠어요? 구만두지요”

“아모렴, 꼭 대답을 해야 된다. 세상없어도 그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 자아 말을 해요, 아즉도 의심이 풀리지 않았소?”

유리는 푹 고개를 숙이었다. 입술이 실룩실룩하며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대답을 않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난처하고 슬픈 것인 줄 짐작할 수 있다.

“네, 그래요. 나는 아모리 의심을 씻어버리려 해도 씻어버릴 도리가 없는 것을 어찌해요?”

시안은 최후의 선고를 듣고 말았다.

“흥, 기막힌 노릇이다.”

하고, 시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유리의 손을 잡으며 소리를 가라앉히며,

“여보, 나는 무에라 할지 말이 나오지 않소. 작년 내가 재판소로부터 방면 되었을 제, 임자에게 다시 부부가 되자고 하였을 때, 임자는 나를 의심하고, 응하지 않았다. 이번에 내가 돌아온즉 임자는 곧 내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였다. 이번이란 이번은 의심이 풀린 것이라고. 그런데 알고보니 시방도 의심을 하는 터이어늘 왜 이번에도 작년과 같이 거절을 하지 않았소?”

유리는 울음소리를 떨었다.

“작년에는 부부가 아닌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이번은 부부가 된 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편을 좇으리라 결심했지요.”

시안은 겉으로는 점점 침착해 갔으나 속에는 불이 타올랐다.

“알았다, 알았다. 임자의 마음을 알았다. 남편의 살인죄를 자기도 짊어진다는 그 친절은 내가 죽어도 잊지 않겠다. 그러나 이 이시안은 그 친절을 받을 수 없다. 나는 인제 이 세상에 친구도 잃었고 신용도 잃었다. 명예도 없고 지위도 없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지마는, 자기가 믿는 것은 깨끗한 제 마음뿐이다. 제 정에 끌려 비열한 짓을 않으리란 결심뿐이다. 그야 연희를 죽이려고 아니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죽이지를 못하고 도리어 구해 주었을 뿐이다. 그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 임자가 나를 의심하는데 부득부득 내 안해로 삼는다는 것은 남이야 어찌되든 제 욕심만 채우는 일이다. 구축축한 짓이다, 더러운 짓이다. 그런 일을 하고서야 세상에 고개를 못 들기도 하려니와 첫째로 내가 내 자신을 침이라도 배앝아야 된다. 여보, 임자는 싸늘한 법률로 말미암아 내 안해 노릇할 것은 없소. 의심이 풀릴 때까지 집에 돌아가 있소. 아모리 생각해 보아도,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면 부부의 인연을 끊을 방법도 없지 않은 것 아니겠소? 만일 의심이 풀린다면 그때에 또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이대로 부부가 된다는 것은 둘이 다 제 몸을 망치는 것이다. 안해가 남편을 의심하며 백년고락을 같이 할 수도 없는 일이요, 남편이 안해의 의심을 받아 가며 살아갈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갈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로 헤어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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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갈라서자. 여기서 갈라설 밖에 도리가 없다.”하는, 시안의 소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부르짖음이었다. 따라서 그의 결심은 돌과 같이 단단하였다. 이렇게 강단 있는 사람인 줄 몰랐더니, 작년부터 뒷덜미를 짚은 불행과 신고에 몸과 마음이 단련된 모양이었다. 유리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지 말아요, 제발 그러지 마시고 이대로 지내갑시다그려. 나는 벌써 지난일은 모두 잊어 버렸어요. 일평생을 당신에게 맡기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잊어 버리는 것과, 의심이 풀리는 것과는 대상부동한 일이다, 곧 어머님께로 돌아가 주어요. 이다음 정거장에서 저편에서 오는 기차와 갈릴 터이니 그 차를 바꾸어 타면 열두 점 안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시방 와서 어찌 어머니한테 돌아간단 말씀이야요? 떠먹듯이 신혼여행의 길을 떠난다고 적어놓고 나왔다가 어찌 혼자 돌아간단 말예요? 무슨 낯으로 또 어머니를 뵈옵는단 말예요?”

“그렇게 어려우면 내가 데려다 주지. 내가 어머님을 뵈옵고 모든 사정을 이야기하면 그뿐이 아니오?. 그러면 어머님께서도 이해를 해 주시겠지요. 사리를 도모지 모르시는 어머님이 아니시니까.”

“제발 그런 말 마시고, 이대로…….”

하며, 유리는 얼마나 빌었는지 몰랐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빌었으나 시안은 들은 체 아니하였다. 한번 먹은 그의 마음은 다시 굽힐 도리가 없었다.

무쇠같이 움직일 길이 없었다.

얼마 아니 되어 다음 정거장에 닿자, 시안은 유리의 손목을 잡아끌어, 다른 차에 옮아탔다. 세상에 사나운 운명이라 한들 유리같이 사나운 운명에 시달리는 이가 어데 있으며, 기구한 팔자이라 한들 유리같이 기구한 이가 어데 있으랴. 처음의 혼례가 거짓이 되고 평생을 의탁했던 남편은 살인죄에 몰리게 되었으며,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린 값으로 남편 될 뻔하던 이를 구해낼 수는 있었으나, 그에게 대한 지긋지긋한 의심은 풀 길이 없으매, 속절없이 피눈물만 뿌리게 되었다. 다시 돌아다보는 이가 없을 줄 알았더니 다행히 마백륜을 만나 내일로 혼례를 지내려는 판에 의외로 앞날의 혼례가 효력 있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떳떳한 남편을 따라섰더니만 저와 그 사이에는 합하랴 합할 수 없고 풀어지랴 풀어질 수 없는 의심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한번 나왔던 집에 다시 돌아가게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기막힌 노릇이 또 있으며 액색한 일이 또 있을까.

유리도 유리려니와, 시안인들 여북하랴. 일시의 젊은 죄로 흉측한 계집과 인연을 맺게 되고, 갖은 애를 다 써서 그와 갈라서자 천만다행으로 그 원수의 계집이 죽었다는 바람에 어여쁘고 살뜰한 처녀를 만나 굳게굳게 백년을 맹서했더니 첫날밤에 전처가 나타날 줄이야. 그의 행복이 산산이 부서졌을 뿐인가, 애매한 살인범으로 법정에 서게 되고, 무사히 백방은 되었지만, 그다지도 자기를 사랑하던 안해를 잃게 되매, 천신만고를 무릅쓰고 유력한 증거를 잡기는 잡았으나, 끝끝내 자기에 대한 의심을 풀 길이 없어 다시금 안해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두번째 신혼여행의 길을 떠남도 인생의 불행이라 하겠거든, 비싼 값으로 산 그 기쁨조차 눈 깜짝일 사이에 사라져 버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이별을 않을 수 없음에랴. 그의 지긋지긋한 운명에 고개를 돌릴 일이 아니냐.

시안의 손에 끌려서 기차를 바꾸어 탄 유리는 앞을 가리는 눈물에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런던이 가까워 가자 유리는 목메인 소리로,

“아모리 당신이 데려다 주신데도, 오늘밤엔 어머니한테로 돌아갈 수 없어요. 내일 아츰이 되어 어머님과 마백륜 씨가 내 편지를 보고, 사정이나 알고 소동이 끝이 난 뒤면 집에 들어갈 수도 있지마는.”

“그러면 오늘밤엘랑 어데든지 동무의 집에서 밝히면 그뿐이지. 품행 단정한 귀부인 가운데, 누구든지 임자의 동무가 있겠지요.”

“그런 동무가 없어요.”

“그러면 여관에 드시구려. 내일 아츰에 내가 마중을 갈 테니.”

“나 혼자 여관에 들란 말씀입니까?”

“물론이지요.”

“난 싫어요, 싫어요.”

시안은 어찌할 줄 모르는 듯이 이윽고 무슨 궁리를 하다가,

“그러면 우리 형님 댁으로 가자. 형수하고 임자는 서로 친한 터수이니까, 형수가 하룻밤만은 임자를 보호해 주겠지요.”

유리는 이것조차 거절할 말은 없었다.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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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두 점이 조금 지나서, 기차는 런던에 닿았다. 시안은 유리의 손목을 끄을고 자기 형의 집을 찾아갔다.

시방까지 조 비비는 듯하는 근심과 걱정을 떨쳐 버리고 어머니의 집을 빠져나온 지 몇 시간이 못 되어 다시 이 땅을 밟게 되니 유리에게 이런 한심할 때가 또 있으랴. 밤이 깊어서 길거리에 사람의 자최가 끊어졌건만, 유리는 누구의 눈살이나 맞는 듯이 고개를 폭 나리숙이고 허둥허둥 걸어갔었다.

시안의 마음도 물론 좋을 리 없었다. 벌써 이슬이 나리고 뺨을 스쳐 가는 바람끝이 산뜩산뜩하였으되, 그의 얼굴은 모닥불을 담아 붇는 듯이 확확 달았다. 그것은 남 보기에 부끄러운 탓은 아니다. 더할 수 없이 흥분한 그의 까닭 모를 불길에 몸과 마음이 타 들어가는 듯하였다. 씨근씨근하는 그의 숨결은 마치 몇 십 리를 줄달음질이나 친 사람 같았다.

밤이 이렇게 길었으니, 형님도 필연 잘 터이라, 그렇다면 아모리 친동기간이라도, 아닌 밤중에 뚜드려 일으키는 것이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자기 홑몸 같으면 그래도 모르려니와 유리까지 데리고 가서 형수에게까지 폐를 끼치는 것이 무에라 말할 수 없이 미안한 노릇이었다.

무밋무밋하며 형님의 집 문앞까지 다다라 본즉 다행히 형님의 방에는 오히려 불이 켜 있었다. 문을 뚜드리니 시충이가 친히 나왔다.

“형님, 또 폐를 끼치려 왔습니다.”

하는 것이 시안의 첫인사이었다.

형님은 아까 시안과 만났었다. 그러므로 시안과 유리가 다시 신혼여행의 길을 떠난 줄 알았다. 그랬더니 시방 또 둘이 돌아왔으므로,

“그러면 기차를 놓쳤구나. 아 유리 씨도 오셨습니까? 바깥 일기가 매우 찬데 어서 들어오시지요.”

유리는 시안에게 끌리다시피 하여 형님의 방으로 들어왔다. 휘황한 전등불 밑에서 둘의 기색을 살펴본 형님은 놀래었다. ‘또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고, 가슴이 덜컥 나려앉았다. 시안은 시안이대로 상기된 얼굴에 눈에는 핏발이 섰으며, 유리는 유리대로 비 맞은 비둘기같이 풀기 하나 없을 뿐인가. 뺨가에 눈물 흔적이 아른아른히 남았고 눈시울까지 퉁퉁히 붓지 않았는가. 심상한 일이 아닌 줄은 벌써 알아채었으나 생각이 많은 그는 조금도 그런 사색을 내지 않았다.

“마츰 잘 왔다. 보통 때 같으면 벌써 잠이 들어서 깨워도 아니 일어났겠지만 오늘은 책을 좀 보느라고, 집안 사람을 다 재우고 나 혼자 깨어 있는 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엿들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형편이다.”

하고 형님은 시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어서 알려 다고 하는 눈치이었다. 그러나 시안의 입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유리와 같이 교의에 걸어앉아, 그의 얼굴도 해쓱하게 변하며 애꿎은 머리만 긁적긁적할 뿐이었다. 아모리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좌우간 사정 이야기를 않을 수 없는 형편이라 마츰내 기차 안에서 일어난 일장을 하나도 빼지 않고 일일이 고해 바치었다.

형님은 옳다 긇다는 판단을 나리지 않았다.

“세상에 딱한 일도 있다. 딴은 내 집에 유리 씨를 묵게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지. 그러면 유리 씨는 대단히 피로하셨겠습니다그려. 공연히 갔다 왔다 하시노라고. 허나 그렇게 걱정하실 것은 없어요. 오늘밤일랑 내 마누라하고 주무시구려. 내일 아츰이 되어 새 정신이 나거든 피차에 좋을 도리를 생각해 보지요. 아모리 어려운 일이라도 피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유리는 다시금 울음소리를 떨었다.

“아녜요. 밤만 새면 저는 혼자 어머님한테로 가겠어요. 하룻밤만 폐를 끼치게 해 주셔요.”

그 얼마나 가련한 말이냐. 범연한 형님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면 피로도 하실 테니 나를 따라 가십시다. 안방에서 편히 쉬시지

요.”

하고, 형님은 유리를 재촉하여 자기 안해의 방으로 인도하였다. 유리는 제가 들고 온 손가방, 장갑, 모자 등속을 그 방 시렁 위에다가 얹어 놓고 시충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 때는 벌써 밤이 새로 두 점이나 되었다. 시안은 유리의 남겨 놓고 간 물건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얼마 아니 되어 유리를 데려다 주고 형님이 나려왔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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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은 덤덤히 무슨 궁리를 하는 듯하더니,

“일이 여간 어려웁게 되지 않았다. 유리의 마음에 아즉도 의심이 남았다면 이대로 부부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노중에서 돌아선 너의 태도는 감복할 만하다. 이런 형편이니 내일이 되어도, 무슨 좋은 도리가 나설 것 같지 않다. 얼마 동안 또 갈라져 있을 수밖에 없는걸…….”

시안은 길이 한숨만 쉴 따름이었다. 형님은 다시 말을 이어,

“하여튼 내일 또 의론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될 테니 너도 여관에 돌아갈 것 없이 여기서 자는 것이 좋겠지. 나는 이 방에서 이 책들을 보면서 밤을 밝힐 터이니 내 침대에서 자려무나. 조금도 설밋하게 생각할 것은 없어.”

시안은 조금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그러겠습니다. 시방 돌아가서 여관 문을 뚜드리는 것도 무얼하고, 어차피에 내일 아츰에는 일찍이 와야 될 터이니, 차라리 여기서 자는 것이 좋겠어요.”

하고, 그는 아래층 형님의 침실로 물러갔다. 침대에 누운 시안은 편히 잘 수가 있었을까. 여라 가지 일에 마음도 피로하였고 몸도 피로하였거니 곤한 잠에 아니 떨어질 리도 만무한 듯싶다. 그러나 마음이 피로하면 피로할수록 잠은 잘 오지 않는 법이다. 가로도 누워 보고 모로도 누워 보았건만, 잠은 천리나 만리나 달아나 버리고, 지낸 일, 닥칠 일이 물거품의 그림자 모양으로 일어났다 스러졌다 하며 눈은 찬물이나 끼얹은 듯이 말뚱말뚱해 왔다.

까닭없이 살이 스멀스멀하고 찌뿌드드해서 견딜 수 없었다. 급기야 일어 앉아도 보고 방안을 왔다갔다 거닐어도 보았건만 그 또한 수란한 마음을 가라 앉혀주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로 석 점이 넘었다. 그러다가는 내일 일도 할 수 없으리라 하고, 억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보았다. 그랬다고 안오는 잠이 별안간 달겨들 까닭이 없었다. 이불 속이 굴속이나 같아서 갑갑해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담배 한 개를 붙여 물었다. 한발을 침대 위에 떨어뜨리고 비스듬히 팔로 머리를 고이고는 한동안 무슨 생각에 잦아질 사이에, 손가락에 끼운 담배가 저절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 고달픈 졸음이 잠깐 그를 엄습한 모양이었다.

형님은 형님대로 깊은 밤에 호올로 앉아서 조용하게 책들을 뒤지고 또 뒤졌는데 새로 석 점이 지나고 보니 자꾸 오는 졸음을 물리칠 길이 없었다.

아모리 책을 보아도, 한편으로 보고 한편으로 잊어 버리게 되었다.

“아, 졸음도 몹시도 온다. 이래서야 암만 책을 보아도 결국 머리에 남는 것은 없겠군. 차라리 교의 위에서 조금 자고 깨어 볼까. 무얼 한 삼십 분만 자고 나면 다시 새 기운이 나겠지.”

혼자 이런 말을 중얼거리고 그 방구석에 있는 긴 교의 위에 두 다리를 뻗고 누웠다. 한번 늘어지게 하품을 하자마자 잠이 소르르 들려 할 즈음이었다. 그 때에 방 한편 문을 누가 가만히 열지 않는가.

아즉 깊은 잠도 들지 않았거니와 더구나 잠귀가 밝은 그는 곧 눈을 떴다.

이 새벽녘에 누가 들어온단 말인가. 소리 나는 문인즉 아까 시안이가 제 침실로 나려갔던 곳이었다. 이상히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소리의 임자는 시안이었다. 시안은 왼편 손에 촛불을 들고 가만가만히 걸어 들어온다.

무슨 까닭일까? 시방 자러 간 그이어든 이때껏 자지도 않고 또 올라옴은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냐?”

고 묻고 싶었으나 이상한 의심이 일어나기 때문에 아모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하는 양만 살펴보고 있었다. 시안은 아까 유리가 앉았던 자리에 와서 유리의 등더리가 닿았던 곳을 못내 그리는 듯이 반기고 또 만지더니 마지막엔 자기가 그 자리에 와 앉았다. 이것이 무슨 일일까? 시안이가 본정신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자기 형이 무슨 연구를 하느라고 오늘밤을 새이는 것을 번연히 아는 그가 아니냐. 그러면 아모리 유리의 생각이 간절할지라도 시방 올라와서 그 앉았던 자리를 만져볼 리가 없지 않으냐. 아아, 그는 잠꼬대를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늘 한자리에 같이 잤건마는 도모지 이런 버릇은 없었는데……, 아마도 낮에 몹시 신경을 쓸 것 같으면 이런 일도 하는구나 하였다, 몹시 마음이 피로한 밤에는 잠꼬대를 하는구나 하였다. 형님은 그 하는 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에 문득 무서운 의심이 끓어올랐다.

“이렇게 몹쓸 잠꼬대를 하는 사람이면 잠결에 무슨 일을 저즐는지도 모를 것이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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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 숨도 쉬지 않고 보고 있는 줄을 시안은 아는가 모르는가. 그는 유리의 걸어앉았던 교의에 걸어앉아 한동안 한숨만 쉬고 있더니만, 이윽고 교의의 양편에 있는 팔걸이를 만지고 또 만지며 나종에는 고개를 숙여 거기 입을 닿이었다. 얼른 보면 미친 짓이라 하겠으되, 그는 아까 유리의 팔이 이 팔걸이에 닿았던 것을 아는 까닭에 유리의 손을 키스하는 모양으로 그 팔걸이에 입을 맞춘 것이다. 그 하는 양이 결코 아모 것도 모르는 돌과 나무에 대해서 정을 붙이는 것이 아니요 가장 존경하고 그리운 정이 넘치는 것을 보면 곁에서 보는 사람이라도 마음을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닿았던 입술을 떼자 그는 얼굴로 그곳을 문지르기 시작하였다. 쓸개 빠진 사내의 치태라 하겠으되 그 정곡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눈물겨울 일이냐, 안타까운 일이냐.

정말 그는 꿈 가운데 사람이다. 잠결에 잠꼬대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이윽고 그 교의에서 일어난 그는 방구석에 있는 시렁으로 갔다. 그 시렁에는 아까 유리가 모자와 손가방과 장갑 등속을 두고 갔었다. 그는 먼저 촛불을 시렁 위에 꽂고는 모자를 집어들더니만 제 가슴에 부둥켜안는 시늉을 한다.

마치 유리와 달콤한 포옹을 하는 듯하였다. 형님은 몇 번이나 시안의 이름을 부르려고 하였으나 억지로 참아 보았다.

시안은 모자를 본래대로 얹어 놓은 후, 이번에는 또 손가방을 들어 본다.

그러고 또 장갑을 제 손에 끼어 본다. 이 모양으로 그 물건들을 가지고 제 몸에 닿게 하였다 떼었다, 마치 어린애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장갑 하나만 제 손에 낀 채, 다른 손으로 촛불을 들고, 가만가만히 저 자던 방으로 돌아갔다.

형님은 여간 놀래지 않았다. 몽유병(夢遊病)에 걸린 그이어니 나종에 무슨 짓을 저질는지 알 수 없는지라, 곧 뒤를 밟아 따라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밤 새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졸음도 달아나 버렸다. 그렇다고 정신을 수습하여 다시 책을 보려 해도 생각이 딴 데 있기 때문에 뜻대로 될 리가 없었다. 밤이 어떻게 긴지 몰랐다. 얼마 만에야 창경에 부유스름한 그림자가 깃들이기 시작하였을 제, 또 아까 그편 문이 열리며 시안이가 들어온다. 형님은 그의 행동을 자세히 주목해 보았으나 이번에는 잠꼬대가 아닌 듯하였다. 온전히 잠이 깨인 사람이었다.

그는 형님을 보고 분명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암만해도 잠이 오지 않아요. 몇 번을 앉았다 거닐다 하다가 동이 트는 것을 보고 고만 뛰어나왔습니다.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너무 이르긴 하지마는, 동산에 산보나 할까 하고 형님한테로 왔습니다.”

그는 제가 잠꼬대한 줄을 모를 뿐 아니라, 잠든 것까지 모르는 모양이다.

“응, 잠이 오지를 않았어? 그래서 아까 이 방에 올라왔어……?”

“네, 아까 제가 여기를 올라왔어요? 저는 도모지 그런 일이 없는데요.”

“그러면 여기도 오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무엇을 하였담?”

“그저 침대 위에 누워 있었지요. 때때 방안을 왔다갔다 거닐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면서 밤 새기를 기다렸는데요.”

“그러면 조금도 자지 않았더냐?”

“혹 눈을 조금 붙였는지도 모르지요. 가끔 생각이 끊어지기는 하였지만 쾌히 잠이 들지도 않았어요.”

형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그러면 작년 저 ‘그레샤’ 여관에서, 걱정으로 밤을 새던 때와 같더냐?”

시안은 일변 놀래고 일변 수상해 하며,

“왜 그런 말씀을 물으셔요? 딴은 어젯밤에도 꼭 그 날밤 같은 듯싶었어요.”

그 말을 듣자 형님은 벌떡 일어나서 시안의 손목을 꽉 잡았다.

“시안아, 너 시방은 본정신이 돌아왔니? 큰일이다 큰일.”

시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형님의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그는 웬 영문인지 알 까닭이 없었다. 어리둥절하게 그대로 서 있을 제 형님은 그의 손목을 잡아당기어 바루 자기 앞에 앉히고 아까 시안의 하던 일을 일일이 설명해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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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은 자기 형으로부터 일장 이야기를 듣고 나자, 매우 놀래인 모양이었다.

“제가 여기 올라와서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 그리고 유리의 장갑까지 끼고 나려갔단 말입니까?”

하다가 자기가 한 짓이 너무도 어이없고 얼빠진 것에 얼굴을 아니 붉힐 수 없었다.

“그래, 그 장갑은 어쨌느냐?”

“저는 당초에 생각도 나지 않는걸요.”

“그러면 시방 같이 나려가서 찾아보자. 끼고 간 것은 분명하니까. 침실 어데에 벗어 놓았겠지.”

그들은 침실로 나려와서 구석구석을 찾아보았다. 아모리 찾아도 좀처럼 보이지 않더니만, 마츰내 경대 설합에서 나오고 말았다. 시안은 더욱이 놀래었다.

“그러면 제가 잠꼬대를 한 것입니다그려. 잠결에 이런 짓을 하였는가 봅니다.”

“그레샤의 여관에서 피 묻은 단도와 수건이 내 가방 속으로부터 튀어나온 것이나 같은 일이 아니냐?”

오늘이란 오늘까지 시충에겐 연희의 죽은 일체가 암만해고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인제는 얼마쯤 그 수수께끼가 풀린 듯싶었다. 시안이가 잠결에 그 수건과 단도를 가져왔는지도 모를 일이리라. 그는 그렇다 할지라도 그가 손수 연희를 죽였는지 아니 죽였는지는 그래도 의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다 구만두더라도 자기의 사랑하는 아우를 살인범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생각하기가 싫었다. 또 무슨 별다른 까닭이 이 수수께끼 속에 없지 않을 듯싶었다.

그러나 형님보담도 시안이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몰랐다. 그의 얼굴에는 일시에 피가 벌컥 올라왔다. 그 눈까지 튀어나온 듯하였다.

“한심한 일이다, 한심한 일이다.”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면 형님, 형님! 연희는 제가 죽인 것입니다. 제 손으로 죽인 것입니다.”

형님은 무에라 대답할지 몰랐다. 방안은 쓸쓸한 침묵이 점령하고 말았다.

시안은 다시금 말을 이어,

“제가 죽이지 않았으면 누가 죽였겠습니까? 어젯밤에 저는 유리만 생각했기 때문에, 잠결에 유리가 앉았던 자리를 찾아가고, 급기야 그 장갑까지 가져와서 이렇게 숨기지 않았습니까? 저는 조금도 모르는 노릇이지만 사실은 명백한 사실이 아닙니까? 그레샤 여관에서도 늦도록 잠을 못 이루고 연희 죽일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까, 잠결에 연희의 방에 들어간 것이겠지요. 아모 것도 모르고 자는 연희를 한칼에 죽였는지도 모르지요.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그 단도의 출처입니다. 죽일 생각만 하였지 단도까지는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 어데서 그 칼을 얻었을까요? 허나, 그야 식탁에 가서 집어올 수도 있는 것이요, 또 연희의 방에서 주웠는지도 모르지요. 하여튼 연희를 죽여 버린 후 그 징글징글한 물건을 가지고 제 방에 돌아온 것이겠지요. 장갑을 감춘 모양으로 그 칼도 제 가방 속에 넣어둔 것이겠지요. 유리가 저 편으로 셋째 방에서 제가 나온 것을 보았다는 것이 암만해도 이상한 줄 알았더니 인제야 대중이 나섭니다. 그 방에서 나온 것과 또 피 묻은 칼과 수건을 제 눈으로 보았으니, 어찌 유리의 의심이 풀리겠습니까?”

“잠꼬대로 사람을 죽인 예는 시방까지 퍽 많은 일이다. 본정신 없이 한 노릇이니 죄 될 것은 없지만.”

할 때에 시안은 자기의 무서운 운명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기막힌 노릇입니다. 이디지도 무서운 버릇이 저한테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시방까지 제 몸을 결백한 줄만 알았습니다. 남이야 살인범으로 의심을 하든지 말든지 내 몸만 깨끗한 다음에야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 도리어 유리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하면서도 오히려 의심을 풀어 주지 않는 그가 얼마나 야속한지 몰랐어요. 두 번째 신혼여행이 또 다시 실패에 돌아갈까 저는 노여웠습니다. 분했습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뻔뻔한 수작입니까? 알았든 몰랐든 저는 무서운 살인죄를 범한 놈이니까, 이 세상을 이대로 지낼 수가 없습니다. 저의 몸은 벌써 더러웠어요, 썩었어요. 오늘로, 오늘로 저는 이 세상을 하직하겠습니다. 이 손은, 이 손은 사람 죽인 피가 묻었습니다.”

그는 아주 절망의 굴헝에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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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기괴한 사정이다. 기괴하다느니보담 이런 공교한 처지가 어데 있을까. 너무도 공교했기 때문에 시방까지 연희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연유를 아는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그 의문이 쉽사리 풀리고 말았다. 다시 변동할 수 없이 명백한 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 아닌 시안의 죽임이 불보담도 더 밝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고 머리를 기웃거려 보아도 다시는 변명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천만에, 그런 변괴가 있다니 말이 되나 하고, 아모리 부인을 하여도 아니 믿으랴 아니 믿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세 살먹은 어린애가 보아도 시안의 한 짓은 속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안이 자신도 인제란 인제에야 그 까닭을 알았다. 모르는 체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을 인정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은 또 다시 없으리라. 원통한 일은 또 다시 없으리라. 죽인 생각은 꿈에도 없건마는 죽인 것을 어찌 하랴. 마음도 없고 정신도 없이 저지른 일이라 할지라도 자기 손이 범한 것임을 어찌하랴.

시안의 일평생은 여기 끝나고 말았다. 그야 법률상으로 이론을 캔다고 하면 잠결에 죽인 것이니 죄가 아니 될는지 모르리라. 그러나 무의식이든 유의식이든 자기 몸은 더러워지고 만 것이다. 인제 자기 몸을 스스로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려 하여도 날카로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속절없이 자포자기 하는 절망에 몸과 마음을 내어 맡기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가 ‘이 몸은 벌써 썩었습니다.’ 하면서 울며 부르짖는 것이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니다. 아모리 인정이 많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누가 그를 아랑곳이나 할 것이냐.

형님의 절망도 동생에게 지지 않았다.

남이야 무엇이라고 떠들든지, 사랑하는 내 아우에게 한해서는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일조에 그것이 거짓이 아니요 또렷또렷한 증거 있는 까닭을 짐작할 때 그의 속인들 얼마나 아팠으랴. 그러나 마음이 든든하니 만큼 대번에 방정을 떨고 서둘지는 않았다. 도리어 시안을 좋은 말로 위로한 뒤에,

“좌우간 이런 사연이나마 유리 씨에게 일러 듣겨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유리 씨의 마음도 얼마쯤 가라앉을 것이 아니냐? 시방까지는 멀쩡한 정신에 죽인 줄만 아는 터이니까, 모르고 죽였다는 것이 무엇보담도 훌륭한 증명이 될 것이 아니냐?”

“형님, 그것은 그렇지도 않아요, 모르고 죽였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죽일 궁리는 늘 마음에 떠나지 않았으니까, 비록 잠결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저의 허물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인들 유리에게 변명할 용기가 있겠습니까? 유리와 서로 얼굴을 대하는 것조차 차마 못할 일이 아닙니까?”

“그는 그러기도 하겠다마는, 말을 않을 수야 있느냐? 전후 사정을 알리기나 해야 저편에서도 궁금증이 풀어질 것이 아니냐? 네가 그다지도 말하기 어렵거든 내가 일르지. 유리 씨뿐만 아니라 그 자당에게도 내가 변명도 하고 설명도 해 주마. 그 뒤의 일은 너와 의론도 해야 되겠으니, 너는 얼마 동안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

시안은 그 말엔 아모 대답도 아니 하였다. 속에서 치밀리는 분하고 애닯은 생각에 제 손으로 제 머리를 바드득바드득 뜯으면서 미친 듯이 방안을 왔다 갔다 하였다.

이윽고 형님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때에 벌써 유리는 일어나서 하회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충을 보자마자,

“시안 씨는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다짜고짜 없이 물었다. 형님은 무에라 대답할지 몰라서 머뭇머뭇하고 있을 사이, 유리는 자기 속에 괴어오르는 감정을 걷잡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어젯밤에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습니다. 암만해도 제가 잘못한 듯싶어요. 시안 씨에게 사과를 해야 될 듯싶어요.”

시충은 간단하게,

“네, 그렇습니까?”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벌써 부부가 아니에요? 안해가 남편을 의심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겠지요, 당돌한 짓이야요. 남편이 그렇다 하는 것이면 안해도 그렇다고 믿어야 될 듯싶어요. 어젯밤에 시안 씨가 차중에는 그렇게 역정을 내시는 걸 보면, 그이는 결코 사람을 죽인 이가 아녜요. 저도 까닭 모를 일이 여럿 있지마는 그것은 제가 잘못 안 것이겠지요. 사람을 죽이고서야 시안 씨가 그같이 분노하실 턱이 없을 듯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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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안해가 되었거니 어찌 남편을 의심하랴. 어데까지 남편을 믿어 주자.

비록 내 눈으로 본 사실이라 할지라도 내가 틀렸을지언정 남편의 잘못은 아니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유리의 마음은 얼마나 순결한가, 아름다운가. 모든 것을 희생에 바쳐 버리고 남을 믿겠다는 거룩한 마음씨는 세상에 그 짝을 찾기 어려우리라. 그러나 시방은 벌써 늦었다. 시안에게 사과하잔 마음이 어젯밤 기차 속에서 일어났던들, 혹은 무사하게 타첩이 되었을는지도 모르되, 시방 와서는 그러자는 도리가 나서지 않았다. 시충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윽고 시충은 무거운 입을 떼어,

“좌우간에, 또 무슨 사정이 생겼으니, 유리 씨는 자친께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지요. 내가 모셔다 드릴까요?

유리의 입은 실룩실룩하며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하더니만, 시충의 기색이 어쩐지 침울하고 무한한 근심을 숨긴 듯하므로, 다만

“네, 그러지요.”

라고 승낙을 하였다.

“그러면 곧 가십시다.”

하면서 시충은 재촉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랑방으로 나왔는데. 시안의 모양이 보이지 않았다. 만일 시안이가 거기 있었던들, 유리로 하여금 벌써 마음이 풀어진 것을 알리어, 그의 수란한 가슴을 얼마쯤이라도 진정을 시킬 것이언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으니 하릴없는 일이다. 그러면 또 다시 침실로 돌아와서 혼자 누웠든지, 무슨 궁리에 잦아졌든지, 했나 보다 하면서 형님은 집을 나왔다. 마츰 밖에 마차가 준비되었으므로, 유리와 같이 올라탔는데, 유리는 암만해도 무슨 끔찍한 일이 발생된 것을 느끼었다.

“그런데 시안 씨는 어데로 가셨어요?”

조심성 많게 이런 말을 묻는 유리의 가슴에는 어젯 일로 말미암아 분노와 절망 끝에 자살을 하지 않았나, 하는 무서운 의심조차 떠올랐다.

“아니오. 아모 데도 가지는 않았습니다. 자당을 뵈옵고 모든 사정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한테는 말씀 못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들려 주셔요. 저는 궁금해 견딜 수가 없어요. 여기서 들려 주셔요.”

하고, 졸라 보았으나 시충은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유리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면 시안 씨가 자살을 하셨습니까?”

하고, 부르짖자마자, 유리는 그 자리에 울고 쓰러졌다.

“아니오, 천만에 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언명을 하지요.”

입으로는 이런 소리를 하였지만, 시방 나올 때 그의 모양이 보이지 않던 것이 마음에 키이기 시작하였다. 만일에, 만일에, 불행한 일이 있었으면 어찌 할까, 하매 형님의 마음도 조 비비는 듯하였다. 한시바삐 유리를 어머니한테 데려다 주고 선걸음에 돌아와야 되겠다 싶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니 집에 당도하여, 사랑을 거쳐 이층으로 올라갈 때인즉, 어머니가 유리의 두고 간 편지를 보고 놀래며 울며 뛰어 나려오는 임물이었다.

“에구, 이 원수의 것, 에구 이 원수의 것.”

하면서, 어머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시충과 유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여러 가지 사정을 자세히 여쭙겠습니다.”

하고, 시충은 달래는 듯이 한 마디 하고 어머니와 같이 조용한 방에 들어왔다. 어젯밤의 경과를 일일이 설파하기 시작하였다.

그 말 가운데 구석이 빈 곳은 유리가 곁에서 보충을 하였는데, 어머니는 듣는 마디마디에 깜짝깜짝 놀라며, ‘에구 저런’ 이라든가 ‘ 에구머니’이라고 몇 번을 부르짖었는지 몰랐다.

일의 대체를 짐작하게 한 뒤에 시충은 시안의 잠꼬대 일체를 일러 듣겼다.

여기 이르러서는 어머니보담도 유리가 더욱이 놀래었다. 안절부절, 그 자리에서 가만히 배겨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마지막으로,

“이런 까닭에 시안이 자신도 두 분에게 무에라고 여쭐 말이 없다고 합니다.”

할 때에, 모녀는 그대로 쓰러지며 북받치는 눈물에 오열할 따름이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시충은 시안의 일이 궁금한지라,

“이 선후책에 대해서는 다시 의론을 해야 되겠지만, 두 분의 마음이 진정 된 뒤에 제가 또 오기로 하지요.”

하고 그곳을 나왔다.

밖에 나와서 길 모서리를 돌려고 할 때에 훌륭한 마차와 마주쳤다. 그 마차 안에는 마백륜이가 들어 있었다. 그는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꿈에도 모르고 혼례의 기구를 갖추어 교당을 향해 가는 터이다. 그 길에 유리의 집에 들릴 것은 물론이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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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의 형이 돌아간 뒤에 유리의 모녀는 어찌할 줄 몰랐다.

눈물 묻은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건만, 위로할 말도 없었다. 가슴은 놀램과 무서움과 슬픔으로 소용돌이를 치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쯤 지난 뒤에 어머니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피 묻은 수건과 단도를 보고, 이 서방의 한 짓이 아닌가고, 의심을 했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의 한 짓이로구먼.”

유리는 변호하는 듯이,

“그렇기는 해도 정신 없이 한 짓이 아니예요? 모르고 저지른 노릇이 아니예요?”

과연 정신 없이 한 짓이다. 아모 것도 모르면서 한 노릇이니 죄는 없다.

털끝만한 죄도 없다. 그러나 알고 범한 줄만 여겨서 몸서리가 치이도록 흉측한 인물로 의심하는 때보담, 죄 없는 사람으로 판명된 시방이 더욱 안타깝다, 기막히다. 유리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젯밤이 새도록 저는 잠 한 숨 아니 자고 생각해 보았어요. 여러 가지로 생각을 돌려본 뒤에야 시안 씨의 한 짓이 아닌 줄 깨달았더니만, 시방까지도 그는 그런 무서운 짓을 아니 했으려니 하고 믿었더니만, 역시 그이가 정신 없이 한 노릇입니다그려. 세상에 아슬아슬한 대목도 있지. 어쩌면 잠결에라도 그런 짓을 했을까요? 생각하면 저는 원통해서 견딜 수 없어요. 그런데 어머니, 인제 어찌했으면 좋아요? 이 일을 어찌해야 되겠어요?”

그야말로 어찌하면 좋을까. 가지가지로 괴상하고 기이한 형편과 경우가 설키고 얽히어 다시 변통할 수도 없고 요개할 수도 없다. 천 가닥 만 가닥 쇠사슬로 맨다 한들 이에서 더 든든하고 악착할 수는 없으리라.

“그게 무슨 짓이냐! 방정맞게 어젯밤 일이 도모지 웬일이냐! 만일 그때 이 서방의 말을 선선히 듣지 않았던들 혹 무슨 딴 도리가 나설는지도 모르지만.”

무슨 딴 도리가 나설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럴 듯도 한 탄식이라고 하겠다. 어젯밤에 유리가 시안을 따라 달아나지만 않았으면 혹은 일이 이렇게도 뒤틀리지 않았으리라. 그나 그뿐인가, 어머니의 그 말 가운데는, 오늘 아츰에 무사하게 마백륜과 유리는 꽃다운 혼례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련마는, 하는 원통한 생각까지 숨은 것이다.

“방정을 떤 게 무엇이야요? 저는 시안 씨의 안해인데요. 그러니까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더 있어요?”

어머니는 매우 괘씸하다는 듯이,

“아니, 너만 방정을 떤 게 아냐. 이 서방이 방정을 떨었단 말이다. 무슨 일이든지 앞뒤를 잘 생각지도 못하고 빠르르 뛰어와서 모든 일을 뒤틀리게 맨들었지.”

만일 시안으로 하여금 ‘방정’을 떨지 않았던들, 유리는 오늘 아츰에 이중 결혼의 죄를 범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보담도 일이 더 어려웁게 되지 않았을까? 시안과의 혼례를 무효로 돌리 수도 없고 백륜과의 혼례를 버리기도 맹랑할 것이 아니냐. 그러나 어머니의 수란한 머리로는 그것까지 미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모녀가 주거니 받거니 이런 쓸데없는 탄식을 하고 있을 때에 들어온 사람은 마백륜이었다. 그는 손꼽아 기다리는 혼례의 날이 닥쳤기 때문에 입은 저절로 벌어졌다.

어머니는 그의 얼굴을 보자,

“에그머니!”

라고, 외마디 소리를 치고 달아나려 하였다. 유리는 새파랗게 질리어 손끝도 꼼짝을 하지 못하였다.

백륜은 너무나 기뻐서 이런 눈치를 알아 채일 여유도 없었다.

“오래간만에야 기쁜 날이 닥쳤습니다그려.”

하고, 말을 꺼내다가 모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아니, 무슨 일이 생겼어요?”

하며, 물었다.

어머니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유리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준절하게,

“여쭙기는 안됐지만, 오늘은 혼례를 지낼 수 없어요.”

라고, 딱 끊어 말했다. 백륜은 빙그레 웃으며,

“그런, 농담은 마시지요.”

“저는 이시안의 안해이니까, 누구하고도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마백륜은 또 한번 소리쳐 웃었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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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하던 어머니도 딸의 말에 기운을 얻어서,

“물론 그러시겠지요. 웬 까닭인지 모르시기도 할 것입니다. 하여튼 여기 앉으셔서 사정을 잘 들으시지요.”

하여 자리에 앉힌 후 유리가 시방도 시안의 안해란 사연을 간단하나마 명백하게 일러듣기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희란 계집이 남편 있는 몸으로 이 서방과 이중 결혼한 것을 생각하면 혀가 내어 두를 일이 아닙니까? 에구머니, 내가 제 앞에 당한 일을 남의 말같이 하는구먼, 하마터면 유리도 오늘 아츰에 이중결혼을 했겠지요. 어젯밤에 이런 사정을 몰랐던들 당신께 여간 누를 끼치지 않았겠지요.”

백륜은 무시무시할 만치 엄숙해졌다. 얼굴빛까지 새파래지는 듯하였다. 얼마 만에야 그는 조용하나마 힘 있는 소리로,

“가만히 계십시오. 설령 시안이가 그런 말을 한다 하기로니 그것을 믿을 수야 있을까요? 그야 그 증거품으로 서류를 초해 가지고 왔겠지만, 그러나 그 초본이 위조가 아니라고 보증할 수가 있을는지요?”

딴은 그렇기도 하다.

“글쎄요, 증거를 보증할 만한 증거는 없는걸요.”

“그것이 없다고 하면 덮어놓고 그를 신용한다는 것은 너무 사람이 좋은 탓이겠지요. 과한 말 같지만 경솔한 짓이 아닐까요? 먼저 그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가 이 세상에서 사람의 행세를 하자면 곧 제 몸에 얽힌 의심을 벗어 버리자면, 제일 빠른 길이 유리 씨와 부부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유리 씨는 내 안해로 작정이 되어 혼인 지낼 날짜도 임박하고 보니, 다시는 유리 씨를 어쩔 수 없게 되잖습니까? 그러니 연희와 제가 지낸 혼례가 무효란 것을 내어세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 아닙니까? 그것을 증명하자면 당신께 드린 그 서류를 위조하는 것밖에 별수가 더 있나요?

지당한 언론이다.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리조차 그 말이 유리한 것을 인정 않을 수 없었다.

백륜은 다시 말을 이어,

“시안에게 그런 방해를 받고 보니 더더군다나 유리 씨와 혼례를 한시바삐 지내 버려야 안심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매기단을 짓지 못하고 있으면 또 무슨 흉계를 꾸며내일지 누가 알아요? 한번 그르친 것도 후회막급이겠는데, 또 무슨 변이 생기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닙니까? 유리 씨의 신세는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솔깃해지고 말았다.

딴은 이렁저렁하다가는 백륜과의 혼사도 틀어져 버리고 만사가 다 물거품에 돌아갈 듯싶었다.

“자아, 어서 교당으로 가십시다.”

하면서 유리에게로 다가들었다. 유리는 몸을 피하며,

“잠깐 기다리셔요. 시안 씨의 증거품이 위조인지 아닌지, 조사할 때까지…….”

“조사할 때까지 혼인을 미루잔 말씀입니까? 유리 씨까지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백륜은 거의 절망한 모양이더니 다시 마음을 진정한 후,

“안 됩니다. 미루면 저편의 흉계를 성취시킬 여유를 주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위조인 것이야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환한 일이 아닙니까? 정식 부부가 되고 보면, 나는 남편이란 권리로써 법률상 소송도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유리 씨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허나 혼례를 하지 않으면 나에겐 그런 권리가 없지 않습니까? 유리 씨가 무슨 그물에 걸려 들어도 나는 곁에서 방관만 할 따름입니다.”

어머니는 구만 백륜에게 기울어지고 말았다. 만일 이대로 진행되었던들 유리의 모녀는 속절없이 백륜의 말솜씨에 떨어지고 말았으리라.

이런 단대목에 숨을 헐떡거리면서 들어온 이는 아까 돌아갔던 시충이었다.

그는.

“무슨 의론인지는 모르지만 대관절 이것이나 보십시오.”

하고, 전보 한 장을 세 사람 앞에 펴 보이었다.

시충은 설명하였다.

“이 전보는 시안이가 연희의 사건을 위임한 파리에 있는 유명한 탐정이 보낸 것입니다.”

그 전보의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연희의 남편 최달수는 분명히 이 세상에 살아 있다. 얼마 전까지도 독일에 있다가 요사이는 영국에 있는 모양. 유명한 사기 도박자로 요새 성명은 마백륜이라 한다.”

마백륜! 마백륜! 마백륜이면 여기 있는 이 마백륜이가 아니고 누구이랴.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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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의 남편인 줄 알았던 시안은 기실 남편이 아니요. 마백륜이가 그 연희의 참남편인 줄이야 어느 꿈에나 생각하였으랴. 백륜은 얼굴에 피가 벌컥 오르며 부르짖었다.

“사람을 모함을 해도 분수가 있지. 흥, 이 나를 연희의 남편이라 하는 말이오? 딴은 그런 흉책을 쓰지 않으면 나를 해칠 리도 없겠지. 전보까지 위조를 하는 것은 여간 교묘한 수단이 아닌걸.”

하고, 그는 정말 남에게 모함을 입은 듯이 분해 하였다.

시충이도 그 말에 매우 분개하였다.

“내 아우는 남을 해치려고 거짓 전보를 칠 만큼 비열한 인물은 아니오.만일 전보가 틀리다면 친 사람의 잘못이겠지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점잖게 한 마디 한 다음에, 다시 마백륜을 향하여,

“그렇지만 노형은 연희란 여자를 모르신다고 잡아떼지는 않으겠지요?”

백륜은 그 말엔 대답도 아니하고,

“그 전보는 누구한테 온 것이오?”

“시안이한테 온 것이오. 사안이가 어젯밤에 우리 집에서 묵고, 오늘 아츰에 어데인지 나가고 없기에, 나는 아까 여기서 나와 가지고 곧 그 여관을 찾아갔소. 가 본즉 그는 이 세상을 하직하려고 유언을 쓰지 않겠소? 그렇게 마음을 좁게 먹어서는 아니 된다고 만류를 하는 판에 이 전보가 왔으므로 그도 적이 안심을 하였소. 나는 또 노형이 마차로 이 댁을 향해 오는 것을 도중에서 보았기에, 혹 이 전보는 쓸데가 있을까 보아 가지고 온 것이오.”

“그것만으로는 이 전보가 거짓 아닌 증거는 될 수 없는걸. 나를 연희의 남편이라 하다니, 참 세상에는 별일도!”

“허나 노형은 그레샤 여관에서 연희의 종이 쪽지를 받았지요?”

“못할 말이 없구려.”

“못할 말이 아니라, 그 종이 쪽지를 전한 뽀이가 언제든지 증인이 되겠다고 해요.”

“종이 쪽지를 받았으니 남편이란 말이오?”

“노형은 시방까지 왜 그 일을 숨겼었소?”

마백륜은 비웃는 듯이,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다해 보시오. 설령 내가 연희의 남편이라 할지라도, 그 여자가 죽은 다음에야, 유리 씨의 남편 된들 어떠하단 말이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자아, 부인 유리 씨, 곧 교당으로 가십시다.”

하고 유리의 손목을 잡아 끌려 하였다. 이런 무례한 일이 어데 있을까.

방안엔 소동이 일어났다. 그보담도 더욱 소란한 것은 그 때에 형사 사오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다.

“마백륜이란 이가 누구요? 그레사 여관에서 안해 죽인 혐의로 포박하겠소.”

하고, 마백륜에게로 달겨들었다. 형사에게 덜미를 잡힌 채 마백륜은,

“이런 무례한 일이 어데 있단 말이오? 불문곡직하고 남을 체포한다는 것은 인권 무시가 아니오? 세상에 이렇게도 나를 모해를 한담. 이렇게도 교묘한 수단을 써서 나를 얽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

하면서 말을 하랴, 형사의 손을 뿌리치랴, 한참동안 버르적거렸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할 말이 있거든, 갈 곳에 가서 하오.”

하여, 입을 닥치게 한 뒤에 끄을고 가 버렸다.

뜻밖의 일이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시안의 연희 죽인 혐의가 점점 풀려 가기 시작하였을 제 마백륜이가 또 연희 죽인 혐의로 붙들려가고 말았다.

까마귀의 암놈 수놈을 구별할 수 없다더니만 이런 일이야말로 흑백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하겠다. 세 사람은 마백륜의 끌려가는 뒤꼴을 바라볼 뿐이요, 아모 말이 없었다. 그의 모양이 아주 보이지 않았을 때까지 세 사람은 서로서로 얼굴을 치어다볼 뿐이요 말이 없었다. 집혀 가는 마백륜이도 마백륜이려니와 남아 있는 사람도 너무나 의외의 일이라 놀래인 가슴과 얼떨떨한 머리를 진정할 길이 없었음이다. 그 때에 문이 열리며 시안이가 새파란 얼굴로 들어오는데 세 사람은 더욱 놀래었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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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은 정신 잃은 사람 모양으로 한동안 멀거니 서 있다가 형님을 향하여,

“세상에 이상한 일도 있고는 볼 일입니다. 아까 그 전보가 온 뒤에 시방도 이런 전보가 파리에서 왔습니다.”

하고, 여러 장의 긴 전보를 내어 보이었다. 어머니와 유리도 그 전보로 모이어 읽어보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일전 그레샤 여관의 숙박기를 조사해 보았더니, 그 일 생긴 이튿날 아츰에 그 여관을 떠난 손이 있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의 간 곳을 찾으매, ‘함불크’ 자택에 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한 바, 그 사람의 증언으로 놀랠 만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사람은 불면증이 있기 때문에 밤이 늦도록 마당을 거닐고 있었던 바, 제 삼호실에서 남녀의 싸우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여자가 백륜, 백륜이라고도 외마디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니. 그러면 연희를 죽인 자는 갈데없는 그 남편 마백륜인 듯, 이런 연유를 혼자 짐작한 그 사람은 법정에 증인으로 불려 다니기를 귀찮게 생각하고 그 이튿날 일찍이 그 여관을 떠난 것인 듯.

이 사람의 증언은 경관이 입회한 후에 들은 것이라, 영국 경찰에 곧 전보를 놓았으니 마백륜은 그곳에서 곧 포박될 듯.

읽기를 마치자 모든 곡절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놀래야 좋을지 기뻐해야 좋을지, 얼마 동안은 스스로 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백륜은 감방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그러나 모진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는 간수에게 모든 것을 자백하였다. 새가 죽을 때엔 그 우는 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엔 그 하는 말이 착하다는 격으로, 세상에도 드문 악한이건만 죽을 때에는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의 한 짓은 듣기만 해도 혀가 내어둘리고 몸서리가 치이는 끔찍끔찍한 짓이었다.

그는 연전에 시안의 돈을 빼앗아 먹으려고 제 안해 연희를 시안과 결혼케 하였다. 그 후 시안의 열이 식어지자 다른 사기 사건이 또 발각되어, 경찰의 수색이 엄하므로, 그는 마백륜이라고 성명을 고치고 안해 없는 홀아비 행세를 하였다. 그 후 그가 유럽(구라파)으로 돌아다닐 때에 유리의 어머니와 친해지고, 재산 많은 줄 알자, 유리와 결혼을 하려고 갖은 흉계를 다 부려 보았건만, 시안이가 유리의 마음에 들어 끝끝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기회에 돈이나 빼앗아 먹자고, 곧 제 안해인 연희를 그레샤 여관으로 불러 왔었다. 마당에 왔다 갔다 하면서 사안이가 ‘연희를 죽이자, 죽이자.’ 고민하는 것을 엿듣고 다시금 흉측한 마음이 움직였다. 시안을 긁어 먹을 대로 긁어먹은 다음에 안해를 죽여 버리면 그 혐의는 시안이가 뒤집어 쓰리라 하였다. 얼마 안되어 연희가 시안이와 밀회를 하고 돌아온 것을 알고 밤이 으슥해 연희의 방에 들어가서 공갈해 얻은 돈을 내어놓으라고 한즉, 겨우 백 원밖에 못 뺏었다고, 그것도 여비를 하겠다고 내어놓지 않는지라, 백륜은 안해가 자기를 속이는 줄 알고, 한동안 싸우는 판에 연희가 ‘이러면 누가 겁을 낼줄 아나베.’ 하면서 호신용 단도를 내어 보이므로, 곧 그 칼을 빼앗아서 찔러 죽이고 말았다.

죽여도 혐의는 자기에게 아니 돌아올 줄 알았다. 또 연희의 주머니에서 적어도 몇 천 원의 돈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갑을 검사해 보니까 의외로 돈이 적어서 실망을 하고 제 방에 돌아왔다. 그 이튿날 과연 시안이가 혐의를 받게 되었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유리를 안해로 삼으려고, 갖은 흉계를 부렸더니, 모든 일이 뜻대로 되어 가다가 최후에 시안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일이 물거품에 돌아간 것은 유감이라 하겠다. 이것이 한 달이든지, 일주일이든지, 혹은 하루라도 늦었던들 무사했을걸, 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로 보면 시안은 그 날밤 백륜이가 연희를 죽인 뒤에 들어가서 잠꼬대로 그 단도를 빼어 가지고 제 방으로 돌아간 것이다.

인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유리의 기쁨, 시안의 기쁨, 형님의 기쁨, 왼 집안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한 달 후에 유리와 시안은 손에 손을 다시 잡고 세 번째 신혼여행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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