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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창만초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기어코 가을이 왔다. 맑아가는 하늘의 별님을 그리워, 그 처녀 같은 코스모스가 어여쁘게 피어났다.

가을은 좋은 철이다. 내 방 세 평되는 뜰에서도 밤마다 벌레들의 음악회는 열린다. 문각씨, 귀뚜라미 베짱이고 조그만 친구들이 누구보다도 더 고운 소리로 밤이 이슥하도록 가을을 노래한다.

아아, 가을은 분명히 왔다. 시인은 풀잎을 쥐고 울리라. 철학자는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하리라. 그러나 이 철에 느끼는 이가 어떻게 시인뿐이랴, 철인뿐이랴. 월색은 치마를 적시고, 벌레는 창 밑에 속삭이는데, 사람 그립고 세상 그리워 잠 아니 오는 밤을 나는 붓장난이나 긁적여 보리라.

가을 하면 벌써 나는 언제든지 코스모스를 생각한다. 그 가늘은 허리, 상글상글한 잎, 무엇을 그리워하는 처녀의 눈동자같이 빠안짝 피어나는 꽃, 그 꽃은 봄철에 본대도 가을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말이다. 코스모스는 가을 기상을 잘 나타낸 어여쁜 꽃이다. 가을 코스모스, 코스모스 가을, 만일 코스모스가 피어 주지 아니한다면 가을을 얼마나 탄식하고, 얼마나 울랴.

청초(淸楚)한 꽃 코스모스, 나는 언제든지 이 어여쁜 꽃을 곱고, 착한 여학생과 함께 생각한다.

아직 더럽혀지지 아니한 순결한 처녀 학생, 그들이 무슨 욕심이 있느냐, 무슨 사악(邪惡)이 있느냐. 세상에 아무러한 마풍(魔風)이 불거나, 아무러한 죄악이 있거나, 그네는 오직 순결하다. 세상을 곱게 보고, 아름다운 노래를 가진 외에 무슨 딴 것이 있으랴. 아아 수정같이 맑고 꽃같이 아름다운 처녀 학생, 그들은 하얀 적삼에 까아만 치마를 가뜬히 입고, 산뜻산뜻 걸어다닌다. 그 가늘고, 맑고, 어여쁘고, 가을 맛 가진 코스모스다. 조선 여학 생은 코스모스다.


꽃은 봄에도 핀다. 그러나 어떻게 가을꽃같이 맑으며, 가을에 국화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코스모스같이 청초하랴.

여자는 곱다, 그러나 어떻게 처녀같이 고우며, 처녀는 곱다, 그러나 어떻게 여학생같이 맑고 고우랴. 갇혀 앉은 색시도 곱다. 그러나 그냥 고울 뿐이다. 그는 목단이다. 여학생도 처녀일 것에는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그는 고울 뿐이 아닌 것을……. 지로나 정으로나 세련된 미를 가지고 있다. 맑다, 청초하다, 조선 여학생 그는 코스모스다, 코스모스다.

불에 타는 것 같은 홍장미 ! 그것은 뜨거운 정열의 꽃이다. 그러나 거기는 찌르는 가시가 있다. 마치 기생 같다 할까, 매음녀 같다 할까.

코스모스는 원래 다르다. 판판결 다르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이랴.

장미가 코스모스 탈을 쓰고, 가을 꽃밭에 스며들어 오기 시작하였다. 가짜 코스모스의 가시에 찔려 본 사람이 하나씩 둘씩 늘어서, 코스모스에도 가시가 있다는 말을 퍼뜨려 놓았다.

코스모스를 위하여 이보다 더한 치욕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한 봉변이 어디 있으랴.

울고 탄식한다. 코스모스가 울고 탄식한다. 사랑하는 코스모스가 어깨를 흔들며 느껴 운다.


그까짓 것이 무슨 걱정이랴, 장미는 영구히 코스모스가 되지 못할 것을……. 가시는 가시대로 있는 것을, 그러나 정말로 큰 일이 있다. 코스모스를 위하여 정말로 걱정할 일이 생겼다.

장미— 가짜 코스모스와 섞이는 중에 원래의 코스모스에 가시 달린 것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싫은 꼴이 내 눈에 보인다.

장미는 코스모스처럼 꾸미기에 노력하여 근사근사하게 코스모스처럼 꾸며가면, 코스모스 중의 어수룩한 꽃은 그것이 신종(新種)의 코스모스인 줄 알고 따라가기에 노력한다.

이는 저를 따라가기에 애를 쓰고, 저는 이가 자기를 따라오는 것인 줄은 모르고 이를 따르기에 애를 쓰고 하여, 서로서로 자기의 본색을 잃어버리게 되어 가게 된다.

아아, 이렇게 하여 가시 돋힌 코스모스가 얼마나 종자를 퍼뜨렸느냐.

코스모스야 코스모스야, 왜 남을 따르느냐, 왜 남을 따르느냐…….


밤이 퍽 깊었다.

이웃집에서 시계 치는 소리가 떼엥 떼엥하고 은은하게 들려 온다. 벌써 새로 두 시건마는 마당의 음악회는 아직도 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