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강헌대왕실록/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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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二年 春正月[편집]

1月 1日[편집]

백관의 조하를 받고,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새해를 축하하는 의식을 가지다. 처음으로 명나라에서 제정한 관복을 입다[편집]

○丁未朔/上率群臣賀帝正, 始服朝制冠服。 禮畢, 上坐殿受中外朝賀。 都評議使司上箋, 各道都節制、按廉、牧、都護府使, 皆上箋獻方物。 楊廣道按廉使趙璞獻《歷代帝王爲學爲治綱目之圖》, 交州、江陵道按廉使鄭擢獻《師尙父奉丹書戒武王之圖》及《大學衍義》二部, 斡都里獻生虎。 仍賜宴群臣, 左侍中趙浚奉觴稱壽曰: “元正首祚, 臣等不勝大慶, 謹上千歲壽。” 群臣皆三呼千歲。 上盡觴, 許群臣坐, 群臣再拜就坐, 極歡而罷。 暮, 使軍器監設火戲, 觀之。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정조(正朝)를 하례하고 비로소 조정(朝廷)[1] 제도의 관복(冠服)을 입었다. 예(禮)를 마치고 난 뒤에 임금이 전(殿)에 앉아서 중외(中外) 관원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문(箋文)을 올리고, 각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안렴사(按廉使)·목사(牧使)·도호부사(都護府使)들이 모두 전문(箋文)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조박(趙璞)은 역대의 제왕이 학문을 하고 정치를 하는 강목(綱目)의 그림[歷代帝王爲學爲治綱目之圖]을 바치고, 교주 강릉도 안렴사(交州江陵道按廉使) 정탁(鄭擢)은 사상보(師尙父)[2]가 단서(丹書)[3]를 받들어 무왕(武王)을 경계한 그림[師尙父奉丹書戒武王之圖]과 《대학연의(大學衍義)》 2부를 바쳤으며, 알도리(斡都里)는 산 범[生虎]을 바쳤으므로, 이내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내렸다.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이 술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였다.

"정월 초하루 새해의 아침에 신 등은 큰 경사를 감내하지 못하여 삼가 천세수(千歲壽)를 올립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천세(千歲)를 세 번 불렀다. 임금이 술잔을 다 비우고 여러 신하들에게 앉기를 허락하니, 여러 신하들이 두 번 절하고 자리에 나아가 앉아서 한껏 즐기고 파(罷)하였다. 해가 지매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놀이[火戲]를 설치하게 하고 이를 구경하였다.


우현보·이색·설장수 등 30인을 경외 종편시키다[편집]

○宥禹玄寶、李穡、偰長壽等三十人, 許京外從便。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 30인을 서울 밖의 어느 곳에서든 살게 하였다.


1月 2日[편집]

태실 증고사 권중화가 태실의 길지와 신도 후보지의 지도를 바치다[편집]

○戊申/胎室證考使權仲和還, 上言: “全羅道珍同縣, 相得吉地。” 乃獻山水形勢圖, 兼獻楊廣道雞龍山都邑地圖。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權仲和)가 돌아와서 상언(上言)하기를,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吉地)를 살펴 찾았습니다."

하면서, 이에 산수 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의 도읍 지도(都邑地圖)를 바쳤다.


1月 5日[편집]

연복사에서 새로 만든 탑을 구경하다[편집]

○辛亥/如演福寺, 觀新塔。

연복사로 가서 새로 지은 탑을 구경하였다.


1月 6日[편집]

도당에 명하여 평양에 성을 쌓도록 하다[편집]

○壬子/命都評議使司, 城平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하여 평양(平壤)에 성을 쌓도록 했다.


1月 7日[편집]

인일이므로 여러 신하들이 조하하니, 녹패 등을 주다[편집]

○癸丑/人日。 群臣朝賀, 賜人勝祿牌。

인일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조하하니 인승, 녹패를 주었다.


광흥창에 명하여 백관의 녹봉을 주도록 하다[편집]

○命廣興倉, 賜百官祿。

광흥창에 명하여 백관에게 녹(祿)을 내렸다.


진위사 이거인이 경사로부터 돌아오다[편집]

○陳慰使李居仁回自京師。

진위사 이거인이 서울로부터 돌아왔다.


태실을 완산부 진동현에 안치하고 승격시켜 진주로 삼다. 신도 후보지 계룡산 행차에 대간과 의흥 친군위가 수종하도록 준비케 하다[편집]

○遣三司左僕射權仲和, 安胎室于完山府珍同縣, 陞其縣爲珍州。 敎: “將以今月十八日, 幸雞龍山, 其令臺省各一員, 義興親軍侍從。”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권중화(權仲和)를 보내어 태실(胎室)을 완산부(完山府) 진동현(珍同縣)에 안치(安置)하고, 그 현(縣)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고, 명령하였다.

"이달 18일에 계룡산(鷄龍山)으로 거둥할 것이니 대성(臺省)에서 각기 한 사람씩과 의흥친군(義興親軍)이 시종(侍從)하도록 하라."


1月 9日[편집]

사헌부에서 횡령죄를 범한 우봉 철소 별감 김계선을 탄핵하니 파직시키다[편집]

○乙卯/司憲府上言: “牛峯鐵所別監金係先監臨自盜。 請收職牒, 鞫問科罪。” 上敎: “所盜錢財沒官, 罷職不敍。”

사헌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우봉 철소 별감(牛峰鐵所別監) 김계선(金係先)이 현장에 나가 감독하면서 제가 도둑질[監臨自盜]을 하였사오니, 청하옵건대,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국문(鞫問)하여 과죄(科罪)하소서."

임금이 명령하였다.

"도둑질한 전재(錢財)는 관청에 몰수하고, 관직을 파면하고 서직(敍職)하지 말게 하라."


1月 12日[편집]

고려조에 사관을 겸하면서 우왕·창왕을 태조가 죽였다고 사초에 허위로 기재한 이행을 국문하다[편집]

○戊午/司憲府上言: “前藝文春秋館學士李行, 嘗爲恭讓知申事, 職兼史官修撰, 乃阿李穡、鄭夢周, 誣書我主上殿下殺辛禑、辛昌及邊安烈。 請收職牒, 鞫問論罪。” 上允之。 先是, 侍中趙浚坐春秋館, 見前朝史草, 至行所記, 有曰: “尹紹宗忌李崇仁才, 告於趙浚, 欲害崇仁。” 浚指日誓之曰: “所聽紹宗之言, 欲害崇仁者, 有如白日。” 進告上。 上命進戊辰已後史草, 遂親見行所記, 以誅安烈及禑、昌父子等事, 皆指斥上, 以爲無罪被殺。 上曰: “邊安烈, 臺省請罪, 恭讓便許誅之, 予不及請止之; 禑、昌父子, 百官國人合辭請誅, 恭讓允之。 予初無欲害之心, 小儒何至乃爾?” 乃許憲司鞫問。 初前朝恭愍王無子, 惑於辛旽邪計, 以旽子禑, 稱爲宮女韓氏所出, 年九歲, 封爲江寧大君, 置王大妃殿。 及恭愍王暴薨, 李仁任等乃探恭愍邪志, 立以爲主。 戊辰回軍之日, 上欲復立王氏, 曺敏修用李穡之言, 乃議立禑子昌。 邊安烈黨於禑舅李琳, 乃謀迎禑, 情狀顯著。 及恭讓卽位, 臺省請安烈罪, 恭讓允之。 憲司卽遣其吏, 就誅流所。 上聞而欲止之, 不及。 禑、昌父子, 大小臣僚, 請置於法, 以絶禍根, 恭讓允之。 行爲恭讓之近臣, 不直書事之本末, 故及。

사헌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學士) 이행(李行)이 일찍이 공양왕(恭讓王)의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직책이 사관 수찬(史官修撰)을 겸했는데도,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에 아첨하여, 우리 주상 전하께서 신우(辛禑)·신창(辛昌)과 변안열(邊安烈)을 죽였다고 거짓으로 꾸며서 썼사오니, 청하옵건대,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국문(鞫問)하여 논죄(論罪)하소서."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이보다 먼저 시중(侍中) 조준(趙浚)이 춘추관(春秋館)에 앉아서 고려 왕조의 사초(史草)를 보다가. 이행이 기록한 글에,

"윤소종(尹紹宗)이 이숭인(李崇仁)의 재주를 꺼려서, 조준에게 알려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

는 말이 있음을 보고, 조준이 해[日]를 가리켜 맹세하기를,

"윤소종의 말을 듣고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는 것은 하늘의 해가 증명하고 있다."

고 하면서, 나아가 임금에게 고(告)하니, 임금이 명하여 무진년 이후의 사초(史草)를 바치게 하고서 친히 이행의 기록한 것을 보니, 안열(安烈)과 신우·신창 부자(父子)를 목 베인 일들을 모두 임금을 지척(指斥)하여, 죄도 없이 살해당했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변안열은 대성(臺省)에서 죄주기를 청하매, 공양왕이 문득 목 베기를 허가했으므로, 내가 미처 이를 중지할 것을 청하지 못하였으며, 우(禑)와 창(昌) 부자(父子)는 백관(百官)과 나라 사람들이 합사(合辭)하여 목 베기를 청하므로, 공양왕이 이를 윤허했으니, 나는 처음부터 살해할 마음이 없었는데, 작은 선비[小儒]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면서, 이에 헌사(憲司)에게 국문(鞫問)하기를 허가하였다.

처음에 고려 왕조의 공민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신돈(辛旽)의 간사한 계책에 의혹되어, 신돈의 아들 우(禑)를 궁녀(宮女) 한씨(韓氏)가 낳았다고 일컫고, 나이 9세에 강녕 대군(江寧大君)으로 책봉하여 왕대비(王大妃)의 궁전에 두었었다. 뒤에 공민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인임(李仁任) 등이 이에 공민왕의 부정(不正)한 뜻을 탐색(探索)하여 그를 세워 군주로 삼았었다. 무진년에 〈위화도 에서〉 군사를 돌이키던 날에 임금께서 다시 왕씨(王氏)를 세우려고 하니, 조민수(曺敏修)가 이색(李穡)의 말[言]을 써서 우(禑)의 아들 창(昌)을 세우기를 의논하매, 변안열은 우(禑)의 장인(丈人)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우(禑)를 맞이하기를 꾀하여, 정상(情狀)이 현저하였었다. 뒤에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대성(臺省)에서 안열(安烈)에게 죄주기를 청하매, 공양왕이 이를 윤허했으므로, 헌사(憲司)에서 즉시 그 관리를 보내어 배소(配所)에 가서 목 베었으니, 임금이 듣고 이를 중지시키고자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우(禑)와 창(昌) 부자(父子)는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형(刑)에 처하여 화근(禍根)을 근절시키기를 청하므로, 공양왕이 이를 윤허했던 것인데, 이행이 공양왕의 근신(近臣)이 되어 사건의 본말(本末)을 바른 대로 쓰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국문(鞫問)을 받게 된 것이었다.


1月 15日[편집]

임금의 행차에 뛰어 들어 양민이라고 호소한 사람들을 국문하다[편집]

○辛酉/上還時座宮。 訴良人五十餘輩, 訴于駕前, 命巡軍獄, 鞫越所之罪, 杖魁三人。

임금이 시좌궁(時座宮)으로 돌아오니, 양민(良民)임을 호소하는 사람 50여 명이 어가(御駕) 앞에서 호소하므로, 순군옥(巡軍獄)에 명하여 장소를 어긴 죄[越所之罪]를 국문(鞫問)하고, 괴수 3인에게 곤장을 치게 하였다.


1月 16日[편집]

영안군을 시켜 큰 군기의 귀신에게 제사 지내게 하다[편집]

○壬戌/命永安君, 祭纛神。 先是, 造紅黑二纛, 至是告成, 故祭之。 與祭執事官, 皆武服。

영안군(永安君)에게 명하여 둑신(纛神)[4]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홍둑(紅纛)·흑둑(黑纛) 둘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므로 제사지내게 한 것이었다. 제사에 참여한 집사관(執事官)은 모두 무복(武服)의 차림이었다.


대사헌 남재가 불교의 폐해를 진술하다[편집]

○上坐殿, 大司憲南在, 極陳佛氏之弊。

임금이 궁전에 앉았는데 대사헌 남재(南在)가 불교(佛敎)의 폐해를 남김없이 진술하였다.


1月 18日[편집]

임금의 행차시 각사가 수종하기를 청하였으나, 형조의 1인만을 수종케 하다[편집]

○甲子/諫官安景儉等上言: “恭惟殿下, 應天順人, 創業垂統, 一動一靜, 子孫所法, 不可不愼。 今當大駕南巡, 止率三軍, 而百官不與焉, 臣等竊有慊焉。 乞許各司一員隨駕, 以爲後世之法。” 上只許刑曹一員, 同臺省隨駕。

간관(諫官) 안경검(安景儉) 등이 상언하였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제왕(帝王)의 기업(基業)을 세워 자손에게 전하여 주니, 한번 움직이고 한번 정지하는 것도 자손이 본받게 되므로,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가(大駕)가 남방으로 순행하면서 다만 삼군(三軍)만 거느리고 백관(百官)은 참여하지 않으니, 신 등은 그윽이 불만스러움이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각사(各司)에서 한 사람씩 대가에 따라가기를 허가하고, 이를 후세(後世)의 법으로 삼게 하소서."

임금이 다만 형조(刑曹)의 한 사람만을 대성(臺省)과 같이 대가(大駕)에 따라가게 하였다.


1月 19日[편집]

안종원 등과 계룡산에 가서 신도 후보지를 살펴보려고 하다[편집]

○乙丑/上發松京, 欲親見雞龍山形勢, 將定都。 領三司事安宗源、右侍中金士衡、參贊門下府事李之蘭、判中樞院事南誾等從之。

임금이 송경(松京)을 출발하여 계룡산(鷄龍山)의 지세(地勢)를 친히 보고 장차 도읍을 정하려고 하니, 영삼사사(領三司事) 안종원(安宗源)·우시중(右侍中) 김사형(金士衡)·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 등이 따라갔다.


1月 21日[편집]

회암사를 지나다가 왕사 자초를 데리고 가다[편집]

○丁卯/過檜巖寺, 請王師自超以行。

회암사(檜巖寺)를 지나면서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청하여 같이 갔다.


전국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리다[편집]

○吏曹請封境內名山大川城隍海島之神: “松岳城隍曰鎭國公, 和寧、安邊、完山城隍曰啓國伯, 智異、無等、錦城、雞龍、紺嶽、三角、白嶽諸山、晋州城隍曰護國伯, 其餘皆曰護國之神。” 蓋因大司成劉敬陳言, 命禮曹詳定也。

이조에서 경내(境內)의 명산(名山)·대천(大川)·성황(城隍)·해도(海島)의 신(神)을 봉(封)하기를 청하니, 송악(松岳)의 성황(城隍)은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화령(和寧)·안변(安邊)·완산(完山)의 성황(城隍)은 계국백(啓國伯)이라 하고, 지리산(智異山)·무등산(無等山)·금성산(錦城山)·계룡산(鷄龍山)·감악산(紺嶽山)·삼각산(三角山)·백악(白嶽)의 여러 산과 진주(晉州)의 성황(城隍)은 호국백(護國伯)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護國)의 신(神)이라 하였으니, 대개 대사성(大司成) 유경(劉敬)이 진술한 말에 따라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상정(詳定)한 것이었다.


이색이 와서 죄를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하다[편집]

○李穡來謁, 謝宥恩。

이색(李穡)이 와서 임금을 알현(謁見)하고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謝禮)하였다.


1月 22日[편집]

임금이 병이 나서 한강에서 4일간 머물다. 순군에게 명하여 남의 집에 소란을 피운 자를 군사들 앞에서 곤장치게 하다[편집]

○戊辰/次漢江邊不豫, 留四日。 令巡軍執騷擾人家者杖之, 以示軍中。

한강(漢江) 가에 머물렀는데, 임금이 병환이 나서 4일 동안을 머물었다. 순군(巡軍)으로 하여금 인가(人家)를 소요(騷擾)하게 한 자를 잡아서 곤장을 때려 군중(軍中)에 보이게 하였다.


1月 24日[편집]

설장수가 와서 죄를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하다[편집]

○庚午/偰長壽來謁, 謝宥恩。

설장수(偰長壽)가 와서 임금을 알현(謁見)하고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謝禮)하였다.


1月 25日[편집]

사방에 붉은 기운이 끼다[편집]

○辛未/四方赤祲。

사방에 붉은 요기(妖氣)가 끼었다.


첨서중추원사 정총에게 정릉의 비문을 짓게 하다[편집]

○命僉書中樞院事鄭摠, 製定陵碑文。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정총(鄭摠)에게 명하여 정릉(定陵)[5]의 비문(碑文)을 짓게 하였다.


1月 29日[편집]

서쪽에 붉은 기운이 끼다[편집]

○乙亥/西方赤祲。

서방에 붉은 요기(妖氣)가 끼었다.


지진이 일어나다[편집]

○地震。

지진이 일어났다.


햇무리가 지다[편집]

○日珥。

햇무리가 졌다.


동냥중들이 임금이 서명한 발원문을 가지고 다니면서 관민을 속이는 것을 금지케 하다[편집]

○下旨都評議使司曰: “各道緣化僧徒稱齎親押願文, 誑誘兩班百姓者, 一皆禁止。”

도평의사사에 교지를 내리었다.

"각도의 연화승(緣化僧)[6]들이 내가 친히 수결(手決)한 원문(願文)을 가졌다고 핑계하고서, 양반(兩班)과 백성(百姓)을 속인 사람들은 일체 모두 금지하게 하라."


각도에 의학 교수와 의원을 두고 양반 자제들을 교육하여 백성의 질병을 치료토록 청하다[편집]

○全羅道按廉使金希善報都評議使司曰: “外方無通曉醫藥者, 乞於各道遣醫學敎授一員。 每於界首官, 置一醫院, 選聚兩班子弟, 以爲生徒, 擇其識字謹厚者, 定爲敎導, 令習鄕藥惠民經驗方, 敎授官周行講勸, 定屬採藥丁夫, 以時採取藥材, 依方劑造, 有得病者, 隨卽救療。”

전라도 안렴사(按廉使) 김희선(金希善)이 도평의사사에 보고하였다.

"외방(外方)에는 의약(醫藥)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원컨대, 각도에 의학 교수(醫學敎授) 한 사람을 보내어 계수관(界首官)[7]마다 하나의 의원(醫院)을 설치하고, 양반의 자제(子弟)들을 뽑아 모아 생도(生徒)로 삼고, 그 글을 알며 조심성 있고 온후한 사람을 뽑아 교도(敎導)로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을 익히게 하고, 교수관(敎授官)은 두루 다니면서 설명 권장하고, 약을 채취(採取)하는 정부(丁夫)를 정속(定屬)시켜 때때로 약재(藥材)를 채취하여 처방(處方)에 따라 제조하여, 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즉시 구료(救療)하게 하소서."


고려조의 행정동성을 수리하여 태평관이라 하다[편집]

○是月, 修前朝行征東省, 改號太平館。

이달에 고려 왕조의 행정동성(行征東省)의 관아를 수리하여 태평관(太平館)이라고 이름을 고치게 하였다.


二年 二月[편집]

2月 1日[편집]

신도 후보지인 계룡산으로 행차 도중 천도에 대한 의견을 말하다[편집]

○丙子朔/昧爽, 上命駕, 知中樞院事鄭曜齎都評議使司啓本, 來自京城, 以顯妃未寧, 平州、鳳州等處, 又有草賊聞。 上不悅曰: “草賊有邊將報歟? 何者來告歟?” 曜無以對。 上曰: “遷都, 世家大族所共惡, 欲(籍)〔藉〕以止之也。 宰相久居松京, 安土重遷, 遷都豈其意耶?” 左右皆無以對。 南誾曰: “臣等濫與功臣, 蒙恩上位, 雖遷新邑, 有何不足, 松京田宅, 豈足惜耶? 今此行已近雞龍, 願上往觀營都之地, 臣等留擊草賊。” 上曰: “遷都, 卿等亦不欲也。 自古易姓受命之主, 必遷都邑。 今我急觀雞龍者, 欲於吾身親定新都也。 孺子雖欲繼志遷都, 大臣沮以不可, 則孺子何能哉?” 乃命還駕。 誾等令李敏道卜之, 曰: “病必瘳, 草賊亦不足慮。” 相會議請往, 上曰: “然則必罪曜, 而後行。” 誾曰: “何必罪之!” 上遂行, 至靑布院之郊留宿。

이른 새벽에 임금이 거둥하려고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니,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요(鄭曜)가 도평의사사의 계본(啓本)[8]을 가지고 서울에 와서, 현비(顯妃)가 병환이 나서 편치 못하고, 평주(平州)와 봉주(鳳州) 등지에 또 초적(草賊)이 있다고 아뢰므로, 임금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초적(草賊)은 변장(邊將)의 보고가 있던가? 어떤 사람이 와서 알리던가?"

하니, 정요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 대족(世家大族)들이 함께 싫어하는 바이므로, 구실(口實)로 삼아 이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宰相)은 송경(松京)에 오랫동안 살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본뜻이겠는가?"

하니, 좌우(左右)에서 모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남은(南誾)이 아뢰기를,

"신 등이 외람히 공신(功臣)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은혜를 입었사오니, 비록 새 도읍에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경(松京)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행차는 이미 계룡산(鷄龍山)에 가까이 왔사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가서 도읍을 건설할 땅을 보시옵소서. 신 등은 남아서 초적(草賊)을 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王朝)가 바뀌고 천명(天命)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지금 내가 계룡산(鷄龍山)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 때에 친히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후사(後嗣) 될 적자(嫡子)가 비록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려고 하더라도, 대신(大臣)이 옳지 않다고 저지(沮止)시킨다면, 후사(後嗣) 될 적자(嫡子)가 어찌 이 일을 하겠는가?"

하고, 이에 명하여 어가(御駕)를 돌리게 하였다. 남은 등이 이민도(李敏道)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니,

"현비의 병환도 반드시 나을 것이요, 초적(草賊)도 또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서로 모여서 의논하고 가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반드시 정요를 처벌한 뒤에 가자."

하니, 남은이 아뢰기를,

"어찌 정요를 처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마침내 길을 떠나 청포원(靑布院)의 들에 이르러 유숙(留宿)하였다.


2月 2日[편집]

양광도 안렴사 조박에게 죄인의 정상을 살피게 하다[편집]

○丁丑/令楊廣道按廉使趙璞慮囚。

양광도 안렴사 조박(趙璞)으로 하여금 죄수의 정상을 살피게 하였다.


2月 3日[편집]

통사 곽해룡이 예부의 자문 부본을 가지고 오니, 기뻐하여 말을 하사하다[편집]

○戊寅/奏聞使韓尙質一行通事郭海龍齎禮部咨文副本來, 上大悅, 賜海龍馬。

주문사(奏聞使) 한상질(韓尙質)의 일행(一行)인 통사(通事) 곽해룡(郭海龍)이 예부(禮部)의 자문 부본(咨文副本)을 가지고 오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해룡(海龍)에게 말을 내려 주었다.


2月 5日[편집]

어가가 청주에 이르니 관민이 맞이하다[편집]

○庚辰/至淸州, 牧使陳汝宜、判官閔道生等備儺禮迎于北郊, 父老進歌謠, 拜于駕前。

청주에 이르니 목사(牧使) 진여의(陳汝宜)와 판관(判官) 민도생(閔道生) 등이 나례(儺禮)를 갖추어 북교(北郊)에서 맞이하고, 부로(父老)들은 노래를 불러 올리면서 어가(御駕) 앞에 절하였다.


2月 6日[편집]

남방에 붉은 기운이 끼다[편집]

○辛巳/南方赤祲。

남방에 붉은 기운이 끼었다.


2月 8日[편집]

계룡산 밑에 이르다[편집]

○癸未/至雞龍山下。

계룡산 아래에 이르렀다.


2月 9日[편집]

신도 예정지의 산수와 형세를 돌아보고, 조운, 도로, 성곽터 등을 조사케 하다[편집]

○甲申/日有暈冠, 至晩乃息。 上率群臣, 相新都山水形勢, 命三司右僕射成石璘、商議門下府事金湊、政堂文學李恬, 審漕運便否、程途險易。 又命義安伯和及南誾, 審城郭形勢。

햇무리가 지더니 저물어서야 없어졌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새 도읍의 산수(山水)의 형세(形勢)를 관찰하고서,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성석린(成石璘)·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김주(金湊)·정당 문학(政堂文學) 이염(李恬)에게 명하여 조운(漕運)[9]의 편리하고 편리하지 않은 것과 노정(路程)의 험난(險難)하고 평탄한 것을 살피게 하고, 또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와 남은(南誾)에게 명하여 성곽(城郭)을 축조할 지세(地勢)를 살피게 하였다.


2月 10日[편집]

권중화가 신도에 들어설 종묘 등의 도면을 바치고, 서운관 관원 등에게 지형을 조사, 측량케 하다[편집]

○乙酉/三司左僕射領書雲觀事權仲和進新都宗廟社稷宮殿朝市形勢之圖。 命書雲觀及風水學人李陽達、裵尙忠等, 審視面勢, 判內侍府事金師幸以繩量地。

삼사 좌복야 영서운관사(三司左僕射領書雲觀事) 권중화(權仲和)가 새 도읍의 종묘(宗廟)·사직(社稷)·궁전(宮殿)·조시(朝市)를 만들 지세(地勢)의 그림을 바치니, 서운관(書雲觀)과 풍수 학인(風水學人) 이양달(李陽達)·배상충(裵尙忠) 등에게 명하여 지면(地面)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에게 명하여 먹줄[繩]로써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


2月 11日[편집]

김주·한상질·도흥·이무·남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丙戌/以金湊爲藝文春秋館大學士, 韓尙質僉書中樞院事, 都興、李茂開城尹, 柳亮中樞院副使, 南在中樞院學士, 安景恭司憲府大司憲兼都評議使司使, 朴信司憲侍史。

김주(金湊)를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대학사(大學士)로, 한상질(韓尙質)을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도흥(都興)과 이무(李茂)를 개성 윤(開城尹)으로, 유양(柳亮)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남재(南在)를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로, 안경공(安景恭)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使)로, 박신(朴信)을 사헌 시사(司憲侍史)로 삼았다.


신도의 높은 언덕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왕사 자초에게 신도의 터에 대해 묻다[편집]

○駕登新都中心高阜, 周覽形勢, 問王師自超, 以不能知對。

어가(御駕)가 새 도읍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

"능히 알 수 없습니다."


2月 13日[편집]

계룡산을 떠나면서 김주 등에게 신도의 건설을 감독케 하다[편집]

○戊子/上發雞龍山, 留金湊及同知中樞朴永忠、前密直崔七夕, 監營新都。

임금이 계룡산에서 길을 떠나면서 김주(金湊)와 동지중추(同知中樞) 박영충(朴永忠)·전 밀직(密直) 최칠석(崔七夕)을 그곳에 남겨 두고 새 도읍의 건설을 감독하게 하였다.


2月 14日[편집]

청주에 도착하다[편집]

○己丑/還至淸州。

임금이 돌아와서 청주(淸州)에 이르렀다.


2月 15日[편집]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예부의 자문[편집]

○庚寅/奏聞使韓尙質來傳禮部咨, 上向帝闕, 行謝恩禮。 其咨曰:

本部右侍郞張智等, 於洪武二十五年閏十二月初九日, 欽奉聖旨: “東夷之號,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 欽此, 本部今將聖旨事意, 備云前去。

上感悅, 賜韓尙質田五十結, 下敎境內:

王若曰, 予以涼德, 荷天休命, 肇有邦國。 向遣中樞院使趙琳, 奏聞于帝, 報曰: “國更何號, 星馳來報。” 卽令僉書中樞院事韓尙質請更國號, 洪武二十六年二月十五日, 韓尙質齎禮部咨文以來。 本部右侍郞張智等於洪武二十五年閏十二月初九日, 欽奉聖旨: “東夷之號,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 玆予不穀, 豈敢自慶! 實是宗社生靈無疆之福也。 誠宜播告中外, 與之更始。 可自今除高麗國名, 遵用朝鮮之號。 屬玆初服, 宜示寬恩, 其在洪武二十六年二月十五日昧爽以前, 二罪以下, 已發覺未發覺、已結正未結正, 咸宥除之, 敢以宥旨前事相告言者, 以其罪罪之。 於戲! 創業垂統, 旣得更國之稱; 發政施仁, 當布勤民之治。

주문사(奏聞使) 한상질(韓尙質)이 와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전하니, 임금이 황제의 궁궐을 향하여 은혜를 사례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그 자문(咨文)은 이러하였다.

"본부(本部)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이 홍무(洪武) 25년 윤12월 초9일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조칙에, ‘동이(東夷)의 국호(國號)에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소. 삼가 본부(本部)에서 지금 성지(聖旨)의 사의(事意)를 갖추어 앞서 가게 하오."

임금이 감격해 기뻐하여 한상질에게 전지(田地) 50결(結)을 내려 주고, 경내(境內)에 교지를 내렸다.

"왕은 이르노라. 내가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나라를 처음 차지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중추원 사(中樞院使) 조임(趙琳)을 보내어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회보(回報)하기를, ‘나라는 무슨 칭호로 고쳤는지 빨리 와서 보고하라.’ 하기에, 즉시 첨서중추원사 한상질(韓尙質)로 하여금 국호(國號)를 고칠 것을 청하였다. 홍무(洪武) 26년 2월 15일에 한상질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본부(本部)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이 홍무(洪武) 25년 윤12월 초9일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조칙에, 「동이(東夷)의 국호(國號)에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고 하였소.’ 하였다. 지금 내가 불선(不善)하니 어찌 감히 스스로 경하(慶賀)하겠는가? 실로 이것은 종사(宗社)와 백성의 한이 없는 복(福)이다. 진실로 중앙과 지방에 널리 알려서 그들과 함께 혁신(革新)하게 할 것이니, 지금부터는 고려(高麗)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조선(朝鮮)의 국호를 좇아 쓰게 할 것이다. 이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시행하는 시기에 있어 마땅히 관대한 은전(恩典)을 보여야 될 것이니, 홍무(洪武) 26년(1393) 2월 15일 이른 새벽 이전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는 이미 발각된 것이거나, 발각되지 않은 것이거나, 또는 이미 결정(結正)된 것이거나, 결정되지 않은 것이거나 모두 이를 사유(赦宥)해 없애버리게 하되, 감히 유지(宥旨) 전(前)의 일로써 서로 고발하여 말하는 사람은 그 죄로써 죄주게 할 것이다. 아아!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하고, 이미 국호(國號)를 고쳤으니, 정치를 시행해 인정(仁政)을 펼치고 마땅히 백성의 일에 힘쓰는 정치를 펴야 될 것이다."


좌시중 조준 등이 국호 받은 것을 진하한 전문[편집]

○門下左侍中趙浚等遣左諫議大夫李滉, 奉箋陳賀。 箋曰:

聖人啓統, 奄臨箕子之舊封; 帝命用休, 申錫朝鮮之美號。 光榮宗社, 喜溢臣民。 恭惟殿下邁舜文明, 齊湯勇智。 順謳歌之所屬, 膺曆數之攸歸。 推廣臨下之仁, 益勤事大之禮。 一札十行之詔, 先正其名; 億載萬年之基, 自今伊始。 臣等阻陪天仗, 雖未詣駿奔之班; 嘉與都人, 實倍輸燕賀之懇。

문하 좌시중 조준 등이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 이황(李滉)을 보내서 전문(箋文)을 받들어 진하(陳賀)하게 하였다.

"성인(聖人)이 왕통(王統)을 창시(創始)하였으니 문득 기자(箕子)의 옛 봉토(封土)를 다스리었으며, 황제의 명령이 아름다웠으니 조선(朝鮮)의 미호(美號)를 주었습니다. 종사(宗社)에 영광이 오고 신민(臣民)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순제(舜帝)의 문명(文明)보다 지나쳤으며, 탕왕(湯王)의 용지(勇智)에 필적(匹敵)하셨습니다. 구가(謳歌)의 따른 바에 순응하고 역수(曆數)의 돌아온 바를 받아서 하민(下民)을 다스리는 인덕(仁德)을 미루어 넓히고, 대국(大國)을 섬기는 예절에 더욱 근실히 하셨으니, 한 장의 종이에 열 줄 되는 조칙이 먼저 그 이름을 바루게 하였으매, 억년 만년의 기업(基業)이 지금부터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신 등은 성상의 병위(兵衛)를 모시지 못하여, 비록 빨리 달려가는 반열[駿奔之班]에 나아가지 못했사오나, 즐거이 도성(都城) 사람들과 더불어 연하(燕賀)의 정성을 갑절이나 다하겠습니다."


2月 16日[편집]

달이 자미성을 범하다[편집]

○辛卯/月犯紫微左角。

달이 자미성의 왼쪽 모서리를 범하였다.


묘통사에 들어온 범을 마을 사람들이 잡다[편집]

○虎入妙通寺, 里人共獲之。

범이 묘통사(妙通寺)에 들어오니,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이를 잡았다.


2月 20日[편집]

거센 바람으로 화재가 많이 발생하다[편집]

○乙未/大風, 城中多失火。 江陵道襄州一家失火, 延燒官舍民家殆盡。

큰 바람이 부는데 성중(城中)에서 잘못하여 불을 낸 사람이 많았다. 강릉도(江陵道) 양주(襄州)에서 한 집이 잘못하여 불을 내어, 불길이 이웃으로 번져서 관사(官舍)와 민가(民家)가 거의 다 타버렸다.


2月 21日[편집]

좌시중 조준이 행재소에서 임금을 알현하다[편집]

○丙申/左侍中趙浚上謁行在所。

좌시중 조준이 임금을 행재소(行在所)에서 알현(謁見)하였다.


2月 24日[편집]

의비의 기일이므로 회암사에 가서 중들을 공양하다[편집]

○己亥/懿妃(忌晨)〔忌辰〕, 次檜巖寺飯僧。

의비(懿妃)의 기신(忌晨)이므로 임금이 회암사(檜巖寺)에 거둥하여 중들을 공양(供養)하였다.


2月 25日[편집]

명승의 아들 명의가 부친의 별세를 고하니 예부에 아뢰게 하다[편집]

○庚子/明昇男義, 告其父歿, 呈禮部。

명승(明昇)의 아들 의(義)가 그 아버지의 별세하였음을 알리니, 예부(禮部)에 아뢰게 하였다.


2月 26日[편집]

달이 목성을 범하다[편집]

○辛丑/月犯歲星。

달이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세자가 어가를 장단에서 맞이하다[편집]

○世子接駕于長湍。

세자(世子)가 어가(御駕)를 장단(長湍)에서 맞이하였다.


2月 27日[편집]

계룡산에서 돌아오니 백관이 맞이하고, 채붕과 나례를 설치하다[편집]

○壬寅/至自雞龍山, 百官迎于龍屯之野。 上入自崇仁門, 結綵儺禮于時座宮門外, 成均學官率諸生進歌謠。

임금이 계룡산으로부터 이르니, 백관(百官)들이 용둔(龍屯) 들에서 맞이하였다. 임금이 숭인문(崇仁門)으로 들어오니 채붕(綵棚)과 나례(儺禮)를 시좌궁(時座宮) 문밖에 설치하였다. 성균관의 학관(學官)이 여러 유생(儒生)을 거느리고 가요(歌謠)를 불러 올렸다.


호위하는 군사를 시켜 《신중경》의 액막이 주문을 외우게 하다[편집]

○命宿衛士卒, 誦《神衆經》《消災呪》于殿庭。

숙위(宿衛)하는 사졸(士卒)에게 명하여 《신중경(神衆經)》의 재앙 없애는 주문(呪文)을 대궐 뜰에서 외우게 하였다.


二年 三月[편집]

3月 1日[편집]

도당에서 임금을 위하여 시좌궁에서 잔치를 베풀다[편집]

○丙午朔/都評議使司享上于時座宮。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임금을 위하여 시좌궁(時座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야광사를 허물고 관사를 수즙한 죄로 죽주 감무 박부에게 베 5백 필을 징수하다[편집]

○竹州監務朴敷取決按廉使, 壞其縣野光寺, 修緝官舍。 僧錄司啓聞, 上欲加罪乃止, 徵布五百匹, 命還其任。

죽주 감무(竹州監務) 박부(朴敷)가 안렴사(按廉使)에게 결정을 얻어 그 고을에 있는 야광사(野光寺)를 무너뜨리고 관사(官舍)를 수즙(修緝)하였으므로, 승록사(僧錄司)[10]에서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죄를 가하려고 하였으나 그만두고, 베[布] 5백 필을 징수하고 본래의 직책으로 다시 임명하였다.


3月 2日[편집]

지형조사 장연이 노비 쟁송에 대한 교지가 내려진 이후 오히려 번다해졌다고 상언하니, 사헌부를 시켜 조사케 하다[편집]

○丁未/知刑曹事張演等上言:

向者下旨曰: “凡奴婢訴良者, 役使已久, 則仍令從賤, 其相爭未決奴婢, 許於當時得決者給之。” 雖然有役使已久而未得決者, 亦有得決而未得使者, 爭訟尤煩。

上曰: “予欲禁爭訟, 反曰爭訟尤煩, 何也? 令憲司問其故以聞。”

지형조사(知刑曹事) 장연(張演)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지난번에 교지를 내리시기를, ‘무릇 노비(奴婢)로서 소량(訴良)한 자는 사역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면 그대로 천인(賤人)에 종사하게 하고, 그 서로 다투어 판결이 나지 않은 노비는 당시에 판결을 얻은 사람에게 이를 주기로 허가한다.’ 하였사온데, 비록 그러하오나, 사역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판결을 얻지 못한 사람도 있고, 또한 판결을 얻었는데도 사역하지 못한 사람도 있어, 쟁송(爭訟)이 더욱 번잡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쟁송(爭訟)을 금하고자 했는데 도리어 쟁송이 더욱 번잡하다고 하니, 무슨 이유인가? 헌사(憲司)로 하여금 그 까닭을 물어서 아뢰게 하라."


3月 4日[편집]

금성 현령 김승리를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己酉/命囚金城縣令金承理于巡軍獄。

금성 현령(金城縣令) 김승리(金承理)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게 하였다.


3月 5日[편집]

시위군을 함부로 국문한 안렴사 정탁 등을 논죄하다[편집]

○庚戌/命囚交州、江陵道按廉使鄭擢于巡軍獄。 初金承理以縣人張劒等三人不法, 囚縣獄還放。 劒等曾屬侍衛軍, 當番上詣縣, 執承理下庭歐辱之, 承理報按廉使鄭擢, 下春州官執劒等鞫問。 上聞之曰: “侍衛軍雖有罪, 不宜擅囚。” 召擢問之, 擢以不鞫問對。 上怒, 囚擢, 杖承理一百, 流固城; 徵春州事田理布一百匹。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 안렴사(按廉使) 정탁(鄭擢)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게 하였다. 처음에 김승리(金承理)가 고을 사람 장검(張劍) 등 3인이 법에 어긋난 짓을 한 이유로써 현옥(縣獄)에 가두었다가 도로 석방했는데, 장검 등이 일찍이 시위군(侍衛軍)에 소속되어 상번(上番)하게 되므로, 고을에 나아가 이들이 김승리를 잡고 뜰 아래에서 때리고 욕을 하여, 승리가 이를 안렴사 정탁에게 보고하니, 춘주관(春州官)에 명을 내려 장검 등을 잡아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시위군(侍衛軍)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함부로 가둘 수가 없다."

하면서, 정탁을 불러 이 사실을 물으니, 정탁이 국문을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정탁은 가두고, 김승리는 장(杖) 1백 대를 쳐서 고성(固城)으로 귀양보내고, 춘주사(春州事) 전이(田理)에게는 베[布] 1백 필을 징수하게 하였다.


3月 6日[편집]

정탁을 사면하여 본직에 나가게 하다[편집]

○辛亥/宥鄭擢還任。

정탁을 용서하여 본래의 직책으로 다시 임명하였다.


3月 8日[편집]

신도를 건설하던 백성들을 놓아 보내다[편집]

○癸丑/放營新都之民。

새 도읍을 건설하는 백성들을 놓아 보냈다.


3月 9日[편집]

수창궁으로 옮기다[편집]

○甲寅/移壽昌宮。

수창궁(壽昌宮)으로 옮겼다.


국호를 승인한 은혜를 사례하는 표문을 올리고, 공민왕대에 내린 금인 1개를 돌려보내다[편집]

○遣門下侍郞贊成事崔永沚赴京, 奉表謝恩。 其表曰:

睿恩洋濊, 聖訓丁寧, 擧國與榮, 撫躬知感。 伏念幸遭昭代, 權長荒陬, 曾無補於絲毫, 但佇瞻於天日。 頃當賤介之返, 特承宸命之加, 示國名之當更, 勑星馳而來報, 臣與國人, 不勝感激。 切惟昔在箕子之世, 已有朝鮮之稱, 玆用奏陳, 敢干聰聽, 兪音卽降, 異渥尤偏。 旣戒之以牧民, 又勸之以昌後, 佩服無已, 糜粉難酬。 玆蓋伏遇端拱九重, 明見萬里, 諒臣乾乾若厲, 憐臣斷斷無他, 乃令小邦獲蒙新號。 臣謹當之屛之翰, 益虔職貢之供; 載寢載興, 恒切康寧之祝。

又遣政堂文學李恬, 送納高麗恭愍王時所降金印一顆。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최영지(崔永沚)를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가서 표문(表文)을 받들어 은혜를 사례하게 하였다.

"황제의 은혜가 한없이 넓고, 황제의 훈계가 정녕(丁寧)하시오니,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영광으로 여기오며, 자신을 돌아보고 감격함을 알겠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다행히 밝은 세상을 만나 먼 곳의 임시 군장(君長)으로 있으면서,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도 없었으므로 다만 천일(天日)만을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천한 사신[賤介]이 돌아오매 특별히 천자의 명령이 내리심을 받았사온데, 나라 이름을 마땅히 고쳐야 될 것임을 지시하여 빨리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명하였으니, 신(臣)은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감격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옛날 기자(箕子)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조선(朝鮮)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어 진술(陳述)하여 감히 천자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했는데, 유음(兪音)이 곧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습니다. 이윽고 백성을 다스리라는 말로써 경계하시고, 또 후사(後嗣)를 번성하게 하라는 말로써 권장하시니, 깊이 마음속에 느껴서 분골쇄신(粉骨碎身)이 되더라도 보답하기 어렵겠습니다. 이것이 대개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천하를 다스리면서 만리(萬里) 밖의 일을 환하게 보시어, 신(臣)이 부지런히 힘써 조심함을 살피시고, 신이 성실하여 딴마음이 없음을 어여삐 여기시어, 이에 소방(小邦)으로 하여금 새 국호(國號)를 얻게 했던 것입니다. 신은 삼가 마땅히 번병(藩屛)이 되어 더욱 직공(職貢)의 바침을 조심하고, 자나 깨나 항상 천자에게 강녕(康寧)하시라는 축원에 간절하겠습니다."

또 정당 문학(政堂文學) 이염(李恬)을 보내어 고려 공민왕 때에 내린 금인(金印) 1개를 송납(送納)하였다.


3月 10日[편집]

목왕의 기일이므로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다[편집]

○乙卯/皇高祖穆王(忌晨)〔忌辰〕, 停朝市。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ref목조(穆祖)></ref>의 기신(忌晨)이므로 조회와 저자[市]를 정지하게 하였다.


3月 11日[편집]

노비 쟁송의 단서를 일으킨 죄로 형조 도관의 관원을 파직시키다[편집]

○丙辰/憲司上言:

殿下曾下敎奴婢爭訟, 一皆永斷, 刑曹都官不體上意, 巧飾啓聞, 欲起爭訟之端。 請將知曹事張演、議郞張羽、正郞趙謙、佐郞尹莘老等, 皆罷職不敍。

敎罷行首張演、掌務尹莘老職。

헌사(憲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전하께서 일찍이 교지를 내리시어 노비(奴婢)의 쟁송(爭訟)은 일체 모두 영구히 금단(禁斷)하게 했는데도, 형조(刑曹)의 도관(都官)이 성상의 뜻을 본받지 않고 교묘히 꾸며서 계문(啓聞)하여 쟁송(爭訟)의 단서(端緖)를 일으키고자 하오니, 청하옵건대, 지조사(知曹事) 장연(張演)·의랑(議郞) 장우(張羽)·정랑(正郞) 조겸(趙謙)·좌랑(佐郞) 윤신로(尹莘老) 등을 모두 관직을 파면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말게 하소서."

명하여 행수(行首) 장연(張演)과 장무(掌務) 윤신로(尹莘老)의 관직을 파면하게 하였다.


3月 12日[편집]

승록사에서 경행(經行)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편집]

○丁巳/僧錄司上言:

前朝之法, 每歲春三月, 集禪敎福田, 諷經城中街路, 謂之經行。 願許擧行。

從之。

승록사(僧錄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고려 왕조의 법에는 해마다 춘(春) 3월에 선교(禪敎)의 복전(福田)[11]을 모아서 성중(城中)의 가로(街路)에서 경(經)을 외게 하고, 이를 경행(經行)이라 하였사오니, 원하옵건대, 거행하기를 허가하소서."

그대로 따랐다.


3月 13日[편집]

도당에서 의비와 현비의 3대 조상을 봉증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편집]

○戊午/都評議使司請上皇妃懿妃三代及中宮顯妃三代封贈, 允之。

도평의사사에서 황비(皇妃) 의비(懿妃)의 3대(代)와 중궁(中宮) 현비(顯妃)의 3대(代)를 봉증(封贈)하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3月 15日[편집]

왜구에게 병선 3척을 빼앗긴 고만양 만호 신용무를 참형으로 논죄하다[편집]

○庚申/都評議使司據刑曹呈啓曰: “高灣梁萬戶申用茂不能備禦倭寇, 見奪兵船三艘, 照律應斬。” 從之。

도평의사사에서 형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었다.

"고만량 만호(高灣梁萬戶) 신용무(申用茂)가 왜구(倭寇)를 능히 방어하지 못하고 병선(兵船) 3척을 빼앗겼사오니, 율(律)에 의거하면 참형(斬刑)에 해당됩니다."

그대로 따랐다.


3月 16日[편집]

예조에서 감시의 혁파, 식년의 과거시험을 청하니 올해에는 감시를 치르도록 명하다[편집]

○辛酉/禮曹上言:

敎書一款節該: “科擧之法, 本以爲國取人。 通三場相考入格者, 送于吏曹, 量才擢用, 監試革去。” 願自今當子午卯酉試之。

上曰: “今年且依前朝己酉年格試之, 幷行監試。”

예조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교서(敎書)의 한 항목(項目)에, ‘과거(科擧)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으므로, 삼장(三場)[12]을 통하여 상고(相考)해서 입격(入格)한 사람은 이조(吏曹)에 보내어 재주를 헤아려 탁용(擢用)하고, 감시(監試)[13]는 혁파(革罷)해 없애라.’ 하였사오니,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마땅히 자(子)·오(午)·묘(卯)·유(酉)의 해에만 이를 시험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금년에는 또한 고려 왕조의 기유년(己酉年)의 격식에 의거하여 시험하게 하고, 아울러 감시(監試)도 행하게 하라."


안렴사 심효생이 절제사를 각도에 파견하여 왜구의 침입을 방비토록 청하다[편집]

○慶尙道按廉使沈孝生報: “倭寇將侵邊境, 請遣節制使于諸道, 禦之。”

경상도 안렴사 심효생(沈孝生)이 보고하였다.

"왜구(倭寇)가 장차 변경에 침범하려 하오니, 청하옵건대, 절제사(節制使)를 여러 도(道)에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소서."


3月 18日[편집]

삼도 절제사 이화 등을 각도에 보내 왜구를 방비케 하다[편집]

○癸亥/遣三道節制使義安伯和、前門下評理朴葳ㆍ崔雲海於楊廣道, 興安君李濟、判中樞院事南誾、參贊門下府事李之蘭於慶尙道, 今殿下及前全州節制使陳乙瑞於全羅道, 以備倭寇。 命曰: “卿等苟不能獻捷, 無以見我。”

삼도 절제사(三道節制使)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전 문하 평리(門下評理) 박위(朴葳)와 최운해(崔雲海)를 양광도(楊廣道)에 보내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을 경상도에 보내고, 지금의 전하(殿下)[14]와 전 전주 절제사(全州節制使) 진을서(陳乙瑞)를 전라도에 보내어 왜구(倭寇)를 방비하게 하고, 명령하였다.

"경들이 진실로 능히 승전(勝戰)하여 포로를 바치지 못한다면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3月 19日[편집]

형혹성이 여귀성과 적시성을 범하다[편집]

○甲子/熒惑犯輿鬼、積尸。

형혹(熒惑)이 여귀(輿鬼)와 적시(積尸)를 범하였다.


수군 도절제사에게 병선을 거느리고 왜적을 잡도록 명하다. 고만량 만호 신용무를 용서하여 왜적을 치게 하다[편집]

○命左道水軍都節制使朴子安、右道水軍都節制使金乙貴, 領兵船浮海捕倭。 參贊門下府事鄭熙啓請曰: “向者, 使司請罪高灣梁萬戶申用茂, 驍勇絶倫, 其死可惜。 今子安願令免死, 與之同力捕倭。” 上宥用茂, 使之自効, 子安拜謝率行。

좌도 수군 도절제사(左道水軍都節制使) 박자안(朴子安)과 우도 수군 도절제사(右道水軍都節制使) 김을귀(金乙貴)에게 명하여 병선을 거느리고 바다에 내려가서 왜적을 잡게 하였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정희계(鄭熙啓)가 아뢰어 청하였다.

"지난번에 도평의사사에서 고만량 만호(高灣梁萬戶) 신용무(申用茂)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사오나,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남보다 뛰어났으니, 그 죽음은 아깝습니다. 지금 자안(子安)이 그의 죽음을 면하게 하고, 그와 더불어 힘을 합쳐서 왜적(倭賊)을 잡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신용무를 용서하여 스스로 충성을 다하게 하였다. 자안(子安)이 배사(拜辭)하면서 신용무를 거느리고 갔다.


3月 20日[편집]

사은사 정도전 등이 경사에서 돌아오다[편집]

○乙丑/謝恩使鄭道傳、賀正使盧嵩ㆍ趙仁沃回自京師。

사은사(謝恩使) 정도전(鄭道傳)과 하정사(賀正使) 노숭(盧嵩)·조인옥(趙仁沃)이 중국 서울에서 돌아왔다.


중국에 명성이 알려진 최영지 대신 이염을 경사로 보내다[편집]

○崔永沚行至安州。 鄭道傳遇永沚曰: “吾見上, 必召公還, 宜且留。” 及至, 言於上曰: “永沚久將兵西北, 爲中國所聞, 不宜輕遣。” 乃召永沚還, 仍令李恬兼齎謝恩表以去。

최영지(崔永沚)가 중국에 가다가 안주(安州)에 이르니, 정도전이 영지(永沚)를 만나서 말하기를,

"내가 임금님을 뵙게 되면 반드시 공(公)을 불러 돌아오게 할 것이니, 마땅히 잠깐 머물고 있으시오."

하였다. 도전이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영지는 오랫동안 서북면(西北面)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서 중국에 명성이 알려졌사오니, 마땅히 경솔히 보낼 수는 없습니다."

하니, 이에 영지를 불러 돌아오게 하고, 이염(李恬)으로 하여금 사은표(謝恩表)까지 가지고 가게 하였다.


동부 학당의 아이가 절을 훼손시키자, 오부 학당에 명하여 절에 가지 못하게 하다[편집]

○上責東部儒學敎授官李格曰: “爾何縱狂童, 汚毁佛寺?” 欲杖乃止, 仍命五部學堂, 毋寓於寺。

임금이 동부 유학 교수관(東部儒學敎授官) 이격(李格)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못된 동자(童子)를 놓아주어 절[佛寺]을 더럽히고 훼손하게 하였는가?"

하면서, 곤장을 치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내 오부 학당(五部學堂)에 명하여 절에 가지 못하게 하였다.


3月 21日[편집]

이행의 가산을 적몰시키고 울진으로 귀양보내다[편집]

○丙寅/杖李行一百, 籍沒家産, 流于蔚珍。

이행(李行)에게 장(杖) 1백 대를 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고 울진(蔚珍)으로 귀양보냈다.


3月 22日[편집]

내시 별감을 회암사에 보내 왕사 자초를 맞이하게 하다[편집]

○丁卯/遣內侍別監鄭尙, 邀王師自超于檜巖。

내시 별감(內侍別監) 정상(鄭尙)을 보내어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부르다.


3月 23日[편집]

박신 등을 각도의 안렴사로 임명하다[편집]

○戊辰/分命各道按廉使。 交州、江陵道司憲侍史朴信, 西海道禮賓少卿權文毅, 京畿左道工曹典書張子忠, 右道三司左丞林球。

각도의 안렴사를 나누어 명(命)하였는데,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에는 사헌 시사(司憲侍史) 박신(朴信)이고, 서해도(西海道)에는 예빈 소경(禮賓少卿) 권문의(權文毅)이고, 경기좌도(京畿左道)에는 공조 전서(工曹典書) 장자충(張子忠)이고, 우도(右道)에는 삼사 좌승(三司左丞) 임구(林球)였다.


3月 24日[편집]

계룡산의 신도를 중심으로 81개의 주·현·부곡 등을 획정하다[편집]

○己巳/定雞龍山新都畿州縣、部曲、鄕所, 凡八十一。

계룡산에 새 도읍을 정하였는데, 기내(畿內)의 주현(州縣)·부곡(部曲)·향소(鄕所)[15]가 모두 81이었다


벌레가 송악의 소나무를 갉아먹다[편집]

○蟲食松嶽松。

벌레가 송악(松嶽)의 소나무를 갉아먹었다.


3月 28日[편집]

연복사의 5층탑이 완성되자 문수 법회를 베풀고, 친히 자초의 선법 강설을 듣다[편집]

○癸酉/演福寺五層塔成。 命設文殊會, 親幸聞自超說禪。

연복사(演福寺)의 5층 탑이 이루어졌으므로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베풀게 하고,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자초(自超)의 선법(禪法) 강설(講說)을 들었다.


3月 29日[편집]

심원사에 화재가 일어나고, 회암사에 역질이 돌다[편집]

○甲戌/深源寺災, 王師自超兼住所也。 檜巖寺疫。

심원사(深源寺)에 화재(火災)가 일어났으니 왕사(王師) 자초(自超)가 겸주(兼住)하는 곳이었다. 회암사(檜巖寺)에 역질(疫疾)이 발생하였다.


도순문사 조온이 왜구를 공격하다가 명나라 사람을 포로로 바치니 요동으로 호송하다[편집]

○西北面都巡問使趙溫擊倭寇于隨州, 獲寧海州人李唐信以獻。 命給衣糧, 遣前判典儀寺事金乙祥, 管送遼東。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 조온(趙溫)이 왜구(倭寇)를 수주(隨州)에서 공격하여 영해주(寧海州) 사람 이당신(李唐信)을 사로잡아 바치니, 명하여 의복과 양식을 주게 하고, 전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김을상(金乙祥)을 시켜 요동(遼東)으로 보내게 하였다.


二年 夏四月[편집]

4月 1日[편집]

신도를 건설하던 공장을 놓아 보내다[편집]

○乙亥朔/放營新都工匠。

새 도읍을 건설하는 공장(工匠)을 놓아 보내었다.


4月 2日[편집]

왕비와 함께 연복사에서 문수 법회를 구경하다[편집]

○丙子/上與中宮幸演福寺, 觀文殊會。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연복사(演福寺)에 거둥하여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구경하였다.


도승지 이직을 기복시키다[편집]

○起復都承旨李稷。 初, 稷丁父憂, 居喪于京山府, 上强起之。

도승지(都承旨) 이직(李稷)을 기복(起復)시켰다. 처음에 이직이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경산부(京山府)에서 거상(居喪)하고 있었으므로, 임금이 강제로 그를 기복(起復)시킨 것이었다.


명으로부터 인장이 도착하기 전이므로 예전대로 교지에 국왕 신보를 쓰다[편집]

○都評議使司啓: “朝廷印章未降間, 凡頒行敎旨、差除等事, 用國王信寶。” 允之。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조정(朝廷)의 인장(印章)이 내려오기 전에는 무릇 반행(頒行)하는 교지(敎旨)와 차제(差除)[16] 등의 일은 국왕(國王)의 신보(信寶)[17]를 쓰게 하소서."

그대로 윤허하였다.


4月 3日[편집]

서북면 도순문사 조온이 탈환불화가 예전의 관하 인민을 찾으러 왔다고 보고하다[편집]

○丁丑/西北面都巡問使趙溫報: “上國使臣脫歡不花, 以推刷舊管下人民事來。” 蓋脫歡不花, 本東北面人, 在前朝己巳歲, 以帝命就去者也。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 조온(趙溫)이 보고하였다.

"상국(上國)의 사신(使臣) 탈환불화(脫歡不花)가 예전의 관하(管下) 인민(人民)을 찾기 위한 일로써 왔습니다."

대개 탈환불화는 본디 동북면(東北面) 사람인데, 고려 왕조의 기사년에 황제의 명령으로 중국에 간 사람이었다.


4月 4日[편집]

왕우와 함께 격구하면서 공양왕에 대하여 말하다[편집]

○戊寅/上與王瑀擊毬。 謂瑀曰: “人皆謂我以姻婭之故, 貰卿也, 不然。 寡人與卿同事恭愍, 相交不淺, 余何害卿? 封卿於麻田, 猶周之封微子於宋也。 卿兄恭讓, 但多欲而無厭, 故以致今日。” 瑀泣謝。

임금이 왕우(王瑀)와 더불어 격구(擊毬)하면서 왕우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인아(姻婭)의 관계인 까닭으로 경(卿)을 용서한다.’고 말하나, 그렇지 않다. 내가 경(卿)과 더불어 공민왕을 함께 섬겼으므로 서로의 교분이 얕지 않으니, 내가 어찌 경을 해치겠는가? 경을 마전군(麻田郡)에 봉한 것은 주(周)나라에서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한 것과 같다. 경의 형인 공양왕이 다만 욕심이 많기가 한량이 없었던 까닭으로 오늘날의 일이 있게 되었다."

하니, 왕우가 울면서 사례하였다.


4月 6日[편집]

밀직사 박원을 요왕부에, 밀직 부사 유운을 영왕부에 각각 보내 빙문케 하다[편집]

○庚辰/遣前密直使朴原聘遼王府, 前密直副使柳雲騁寧王府。

전 밀직사(密直使) 박원(朴原)을 보내어 요왕부(遼王府)를 빙문(聘問)하게 하고, 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운(柳雲)을 보내어 영왕부(寧王府)를 빙문하게 하다.


죄수의 정상을 살피게 하다[편집]

○慮囚。

죄수의 정상을 살피게 하였다.


형조 정랑 노상 등을 여러 도에 파견하여 병마의 단련 상황을 점고케 하다[편집]

○遣刑曹正郞盧湘于慶尙道, 工曹正郞盧石柱于楊廣道, 司水監丞尹儀于全羅道, 點考兵馬團練形止。

형조 정랑(刑曹正郞) 노상(盧湘)을 경상도에 보내고, 공조 정랑(工曹正郞) 노석주(盧石柱)를 양광도에 보내고, 사수감 승(司水監丞) 윤의(尹儀)를 전라도에 보내어 병마(兵馬)의 단련(團練) 상황을 점고(點考)하게 하였다.


왕사 자초를 접대하고 비단을 하사하다[편집]

○享王師自超于闕內, 賜綵帛。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대궐 안에서 접대하고 채색 비단[綵帛]을 내려 주었다.


4月 8日[편집]

까마귀떼가 연복사에 모여들어 짖어대다[편집]

○壬午/群烏聚噪于演福寺。

까마귀떼가 연복사(演福寺)에 모여 시끄럽게 지저귀었다.


4月 11日[편집]

평주 온천에 거동하니 친군위·대간·사관 등이 호종하다[편집]

○乙酉/幸平州溫泉, 親軍衛、臺諫、史官從之。

임금이 평주(平州) 온천(溫泉)에 거둥하니, 친군위(親軍衛)·대간(臺諫)·사관(史官)이 임금을 따랐다.


4月 12日[편집]

강음현 들판에서 유숙하고, 공상을 빙자하여 물품을 갈취한 감무 조을상을 곤장치다[편집]

○丙戌/次于江陰縣郊。 監務曺乙祥憑上供, 有斂於民, 命杖之。

강음현(江陰縣)의 들에서 유숙하였다. 감무(監務) 조을상(曺乙祥)이 임금에게 공상(供上)한다고 빙자하고서 백성에게 징수한 것이 있으므로, 명하여 곤장을 치게 하였다.


4月 13日[편집]

탈환불화가 오다[편집]

○丁亥/脫歡不花來。

탈환불화(脫歡不花)가 왔다.


4月 14日[편집]

왜구가 물러가니 의안백 이화 등 여러 절제사가 돌아오다[편집]

○戊子/義安伯和等諸節制使皆還, 以倭寇自退也。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 등 여러 절제사(節制使)들이 모두 돌아왔으니, 왜구(倭寇)가 스스로 물러갔기 때문이었다.


4月 16日[편집]

하정사 우인열이 경사에서 돌아와 알현하고 각궁을 바치다[편집]

○庚寅/賀正使禹仁烈回自京師, 見于行在所, 仍獻角弓二。

하정사(賀正使) 우인열(禹仁烈)이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임금을〉 행재소(行在所)에서 알현(謁見)하고, 이내 각궁(角弓) 2개를 바치었다.


진왕부의 사람이 소 무역을 위해 의주에 도착하니 회답할 자문을 짓게 하다[편집]

○西北面都巡問使趙溫報: “秦王府差人, 爲易換牛隻, 到義州。” 命都承旨李稷, 議於都評議使司, 修撰秦府回答咨文以來。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 조온(趙溫)이 보고하였다.

"진왕부(秦王府)에서 사람을 보내어 소[牛]를 무역하기 위하여 의주(義州)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도평의사사에 의논해서 진왕부에 회답할 자문(咨文)을 지어 오게 하였다.


4月 17日[편집]

까마귀 떼가 백록산에 모여들다[편집]

○辛卯/群烏翔集于白鹿山。

까마귀떼가 날아와서 백록산(白鹿山)에 모이었다.


진왕부 사람에게 소 무역의 어려움을 말하고 내온 등을 하사하다[편집]

○命前密直權鈞, 齎咨往見秦府人, 辭以易換之難, 仍送遺內醞、苧麻布。

전 밀직(密直) 권균(權鈞)에게 명하여 자문(咨文)을 가지고 가서 진왕부(秦王府)의 사람을 보고 소를 무역하기가 어려움을 말하게 하고, 이내 내온(內醞)[18]과 저포(苧布)·마포(麻布)를 보내주었다.


4月 19日[편집]

가뭄을 근심하여 환과 고독을 구휼토록 도당에 전지하니 비가 내리다[편집]

○癸巳/上憂旱, 命右承旨韓尙敬, 以四事傳旨都評議使司:

一, 鰥寡孤獨、老弱廢疾等, 貧乏不能自存者, 蠲免雜泛徭役存恤。 一, 中外官司罪囚, 或因飾詐罔告, 或因奸吏弄法, 或因證佐不明, 久在牢獄, 積生冤枉, 致傷和氣。 自四月十九日已前, 二罪以下, 一皆原免。 雖係常赦不原, 再經鞫問, 情狀不明, 徒年已滿者, 悉令放免。 一, 中外官司, 賢愚褒貶, 已有成法, 備悉分揀, 具名申聞, 以憑黜陟。 一, 凡有便民事宜, 隨卽申聞, 以副予意。

仍慮囚。 暮, 雨。

임금이 가뭄을 근심하여 우승지(右承旨) 한상경(韓尙敬)에게 명해서 네 가지 일로써 도평의사사에 전지(傳旨)하였다.

"1.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늙고 쇠약하며 폐질(廢疾) 등으로 가난하여, 스스로 생존하지 못할 사람은 잡다(雜多)한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하게 할 것이며,

1. 중앙과 지방의 관사(官司)의 죄수들이 혹은 거짓 꾸며 무고(誣告)한 것으로, 혹은 간리(奸吏)가 법을 마음대로 적용한 것으로, 혹은 증거가 명백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감옥에 있게 되어, 원통하고 억울함이 쌓여 화기(和氣)를 상(傷)하게 하였으니, 4월 19일 이전의 이죄(二罪) 이하는 일체 모두 용서하게 하고, 비록 상사(常赦)에서 용서하지 않는 데에 관계되더라도 두 번이나 국문(鞫問)을 거쳐 정상(情狀)이 불명(不明)하고, 도년(徒年)이 이미 찬 자는 다 방면(放免)하게 할 것이며,

1. 중앙과 지방의 관사(官司)에서는, 현명한 사람을 표창하고 우매한 사람을 폄직(貶職)하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법이 있으니, 상세히 모두 분간(分揀)하여 이름을 써서 신문(申聞)하여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시키는 데 빙고(憑考)하게 할 것이며,

1. 무릇 백성에게 편리한 사의(事宜)가 있으면 곧 신문(申聞)하여 내 뜻에 부응(副應)하게 하라."

이내 죄수의 정상을 살피게 하니, 해질 무렵에 비가 내렸다.


4月 20日[편집]

왜선 30여 척이 연해 지방을 침입하려 한다는 보고가 올라오다[편집]

○甲午/楊廣道按廉使趙璞報: “倭寇三十餘艘, 將至沿海地面。”

양광도 안렴사 조박(趙璞)이 보고하였다.

"왜구(倭寇) 30여 척의 배가 연해(沿海)의 지면(地面)에 이르고 있습니다."


4月 21日[편집]

나세를 연해 등처 병선 조전 절제사로 삼아 친군위 병사를 거느리고 가도록 하다[편집]

○乙未/以羅世爲沿海等處兵船助戰節制使, 募親軍衛勇士以行。

나세(羅世)를 연해 등처(沿海等處)의 병선 조전 절제사(兵船助戰節制使)로 삼아 친군위(親軍衛)의 용사(勇士)를 모집하여 가게 하였다.


4月 25日[편집]

온천에서 돌아오다[편집]

○己亥/上至自溫泉。

임금이 온천(溫泉)으로부터 돌아왔다.


탄환불화가 각궁을 바치니 후에 접견키로 하고 음식물을 보내다[편집]

○脫歡不花獻角弓二張, 傳旨曰: “余昔爲將帥時可受, 今安用爲! 卽欲相見, 方以微疾, 湯浴而還, 體甚羸憊, 請且就館, 間二三日可得相見。” 命中官一人饋送。

탈환불화(脫歡不花)가 각궁(角弓) 2개를 바치니, 전지(傳旨)하였다.

"내가 옛날에 장수(將帥)였을 때는 받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디에 쓰겠는가? 곧 상견(相見)하고 싶지마는, 하찮은 병으로 온천에 목욕하고 돌아와서 몸이 몹시 피곤하니, 객관(客館)에 나아가 있으면 2, 3일 뒤에는 상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중관(中官) 한 사람에게 명하여 음식물을 보내게 하였다.


4月 26日[편집]

중추원 사 이무에게 서강의 군선을 점검하여 왜구를 방비케 하다[편집]

○庚子/命中樞院使李茂, 點檢西江軍船, 以備倭寇。

중추원 사(中樞院使) 이무(李茂)에게 명하여 서강(西江)의 군선(軍船)을 점검(點檢)하여 왜구(倭寇)를 방비하게 하였다.


4月 27日[편집]

의창의 곡식을 내어 기민을 진휼하다[편집]

○辛丑/發義倉粟, 賑窮民。

의창(義倉)의 곡식을 내어 가난한 백성을 진휼(賑恤)하였다.


4月 30日[편집]

환왕의 기일이므로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중들에게 궐내에서 불경을 읽게 하다[편집]

○甲辰/皇考桓王(忌晨)〔忌辰〕, 上減膳, 令僧徒諷經闕中。

황고(皇考) 환왕(桓王)[19]의 기신(忌晨)이므로 임금이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중들로 하여금 대궐 안에서 경(經)을 외게 하였다.


벌레가 소나무를 갉아먹다[편집]

○蟲食松。

벌레가 소나무를 갉아먹었다.


二年 五月[편집]

5月 1日[편집]

화원을 수리하다[편집]

○乙巳朔/命修花園。

명하여 화원(花園)을 수리하게 하였다.


5月 2日[편집]

청심정에서 척석희를 구경하다[편집]

○丙午/上登淸心亭, 觀擲石戲。

임금이 청심정(淸心亭)에 올라서 돌싸움의 놀이[擲石戲]를 구경하였다.


5月 3日[편집]

박안신 등 99명의 감시 합격자를 발표하다[편집]

○丁未/放監試榜于簾。 前成均大司成劉敬掌試, 取朴安信等九十九人, 上增取三人, 謂之三殿施福。

감시(監試)의 방(榜)을 〈궁전〉 발[簾] 앞에 내어 걸었다. 전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유경(劉敬)이 시험을 관장하여 박안신(朴安信) 등 99인을 뽑았는데, 임금이 3인을 더 뽑았으니, 이를 세 전시복(殿施福)이라 하였다.


유정현의 두 아들이 감시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유정현의 직첩을 돌려주다[편집]

○命給還柳廷顯職牒。 以其子顗、暲俱中監試。

명하여 유정현(柳廷顯)의 직첩(職牒)을 돌려주게 하니, 그 아들 유의(柳顗)와 유장(柳暲)을 모두 감시(監試)에 합격한 때문이었다.


5月 4日[편집]

박영충을 강화 절제사로, 이승원을 교동 절제사로 임명하다[편집]

○戊申/以朴永忠爲江華節制使, 李承源爲喬桐節制使。

박영충(朴永忠)을 강화 절제사(江華節制使)로 삼고, 이승원(李承源)을 교동 절제사(喬桐節制使)로 삼았다.


5月 7日[편집]

탄환불화 등에게 저포와 마포를 하사하다[편집]

○辛亥/賜脫歡不花苧麻布, 以及從者。

탈환불화(脫歡不花)에게 저포(苧布)와 마포(麻布)를 내려 주고, 종자(從者)에게도 주게 하였다.


박영충의 농장에 은닉한 양민을 충군시킨 죽주 감무 박부가 원한을 사 귀양가다[편집]

○杖竹州監務朴敷, 流丑山。 初, 同知中樞院事朴永忠農莊在竹州, 敷刷其匿占良民四人充軍, 永忠銜之。 及營新都罷役, 而還至竹州, 責敷不公服而迎, 來訴于上。

죽주 감무(竹州監務) 박부(朴敷)를 곤장을 쳐서 축산(丑山)으로 귀양보냈다. 처음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박영충(朴永忠)의 농장(農莊)이 죽주(竹州)에 있었는데, 박부가 숨겨 둔 양민(良民) 4인을 찾아내어 군대에 충당[充軍]했더니, 박영충이 이를 원망하였다. 뒤에 새 도읍을 건설하고 역사(役事)를 파(罷)하고 돌아오다가, 죽주(竹州)에 이르러 박부가 공복(公服)을 입지 않고 맞이한다고 책망하고는, 와서 임금에게 호소하였던 것이다.


왜구에 의해 만호 최용유의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해의 방비를 엄하게 명하다[편집]

○倭十三艘寇高灣梁, 萬戶崔用濡力戰, 與其二子死之。 倭掠船五艘而去。 上聞用濡死, 嘆曰: “國家所患, 莫甚於倭。” 命益備沿海鎭戍。

왜적(倭賊)의 배 13척이 고만량(高灣梁)에 침구하니, 만호(萬戶) 최용유(崔用濡)가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그 두 아들과 전사하였으므로, 왜적이 배 5척을 빼앗아 갔다. 임금이 용유(用濡)가 죽었단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국가에서 근심하는 바가 왜적보다 심한 것이 없다."

하면서, 명하여 더욱 연해(沿海)의 진수(鎭戍)를 방비하게 하였다.


세자전의 양청 짓는 공사를 중지케 하다[편집]

○命罷世子殿涼廳役。 先是, 世子謂僚佐曰: “吾所居卑隘, 何以堪暑?” 都評議使司聞之, 令繕工監構小涼廳。 上知之, 謂都承旨李稷曰: “比年工役稍繁, 然皆不得已, 予豈樂爲哉? 世子雖無涼廳, 亦可。”

명하여 세자전(世子殿)의 양청(涼廳)[20]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세자가 요좌(僚佐)에게 이르기를,

"나의 거처가 낮고 좁으니 어찌 더위를 견딜 수 있겠느냐?"

하니, 도평의사사에서 이 말을 듣고 선공감(繕工監)에 명령하여 조그마한 양청(涼廳)을 짓게 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이를 알고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일렀다.

"근년에 공역(工役)이 조금 잦지만, 그러나 모두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하기를 즐기겠는가? 세자는 비록 양청이 없더라도 좋다."


공신자제가 세자에게 시학하면서 폐단을 일으키자 직숙만 하도록 명하다[편집]

○上曰: “曩者功臣子弟, 令侍學世子, 其年少輩, 不事講讀, 反生逢迎之害。 自今毋與侍學, 只許更日直宿。”

임금이 말하였다.

"지난번에 공신(功臣)의 자제(子弟)들을 세자(世子)에게 시학(侍學)하게 하였더니, 그 연소(年少)한 무리들이 강독(講讀)은 일삼지 않고, 도리어 세자의 마음에 들도록 힘쓰는 폐해가 발생하니, 지금부터는 함께 시학(侍學)하지 말게 하고, 다만 날마다 교대로 직숙(直宿)하게 하라."


5月 8日[편집]

왜적이 아용포에 침구하여 군선 1척을 빼앗아 가다[편집]

○壬子/倭寇全羅道阿容浦, 掠軍船一艘。

왜적(倭賊)이 전라도 아용포(阿容浦)에 침구하여 군선(軍船) 1척을 빼앗아 갔다.


중추원 사 이무에게 강화의 병선을 점고하고 연해에 정박한 왜적을 잡게 하다[편집]

○命中樞院使李茂, 點考江華兵船, 至泊沿海要路捕倭。

중추원 사(中樞院使) 이무(李茂)에게 명하여 강화(江華)의 병선(兵船)을 점고(點考)하고, 연해(沿海)의 요로(要路)에 정박하여 왜적(倭賊)을 잡게 하였다.


5月 10日[편집]

의비의 3대 조상을 추증하다[편집]

○甲寅/贈懿妃三代: 考贈永興府院君崔公諱閑奇爲積德守義宣威補祚協贊佐理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判門下府事判都評議使司事兼判尙瑞司事永興伯, 妣贈洪原郡夫人李氏爲朝鮮國大夫人。 祖考左右衛保勝中郞將諱終大爲純勤恭儉勁節秉義宣力翊衛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左侍中判都評議使司吏曹事永興伯, 祖妣花山郡夫人金氏爲朝鮮國大夫人。 曾祖考戶長正朝諱天甫爲宣威補祚翊戴贊化爕理佐命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判門下府事判都評議使司事兼判尙瑞司事永興伯, 曾祖妣金氏爲朝鮮國大夫人。

의비(懿妃)의 삼대(三代)를 추증(追贈)하니, 고(考) 증 영흥 부원군(贈永興府院君) 최공(崔公) 휘(諱) 한기(閑奇)는 적덕 수의 선위 보조 협찬 좌리 공신(積德守義宣威補祚協贊佐理功臣) 특진 보국 숭록 대부 판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 겸 판상서사사(特進輔國崇祿大夫判門下府事判都評議使司兼判尙瑞司事) 영흥백(永興伯)으로 삼고, 비(妣) 증 홍원 군부인(贈洪原郡夫人) 이씨(李氏)는 조선 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으로 삼고, 조고(祖考) 좌우위 보승 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휘(諱) 종대(終大)는 순근 공검 경절 병의 선력 익위 공신(純勤恭儉勁節秉義宣力翊衛功臣) 특진 보국 숭록 대부 문하 좌시중 판도평의사사 이조사(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左侍中判都評議使司吏曹事) 영흥백(永興伯)으로 삼고, 조비(祖妣) 화산 군부인(花山郡夫人) 김씨(金氏)는 조선 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으로 삼고, 증조고(曾祖考) 호장 정조(戶長正朝) 휘(諱) 천보(天甫)는 선위 보조 익대 찬화 섭리 좌명 공신(宣威補祚翊戴贊化燮理佐命功臣) 특진 보국 숭록 대부 판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 겸 판상서사사(特進輔國崇祿大夫判門下府事判都評議使司兼判尙瑞司事) 영흥백(永興伯)으로 삼고, 증조비(曾祖妣) 김씨(金氏)는 조선 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으로 삼았다.


5月 11日[편집]

종묘와 산천의 신에게 기우하다[편집]

○乙卯/禱雨于宗廟及群望。

종묘(宗廟)와 여러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비를 빌었다.


탄환불화가 경사로 돌아가다[편집]

○脫歡不花還京師。

탈환불화(脫歡不花)가 중국 서울로 돌아갔다.


5月 13日[편집]

3일동안 비가 내리다[편집]

○丁巳/始雨三日。

비로소 3일 동안 비가 내렸다.


5月 14日[편집]

왜적이 교동에 침구하다[편집]

○戊午/倭寇喬桐。

왜적(倭賊)이 교동(喬桐)에 침구하였다.


5月 16日[편집]

오랑합 사람에게 의복을 하사하다[편집]

○庚申/賜吾郞哈五人衣各一襲。

오랑합(吾郞哈) 5인에게 의복을 각기 한 벌씩 내려 주었다.


5月 17日[편집]

오랑합 궁부대에게 동량 등처 상만호를 제수하다[편집]

○辛酉/中樞院奉敎, 以吾良哈宮富大爲同良等處上萬戶, 給牒曰: “凡事公勤, 毋得緩弛。”

중추원(中樞院)에서 교지를 받들어 오량합(吾良哈) 궁부대(宮富大)를 동량(同良) 등처(等處) 상만호(上萬戶)로 삼고, 직첩(職牒)을 주면서 말하였다.

"모든 일을 공정하고 근실히 하여 해이(解弛)하지 말게 하라."


5月 18日[편집]

양광도 안렴사 조박과 가뭄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임하고자 했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壬戌/楊廣道按廉使趙璞來朝。 上賜對, 問曰: “吾聞楊廣、全羅、慶尙三道旱, 將失農, 信乎?” 璞對曰: “全羅、慶尙, 臣所不知, 楊廣道則雨澤不絶, 禾稼稍盛。” 上大悅。 璞乞免其任曰: “臣未嘗有尺寸之効, 濫與一等功臣, 實布衣之極, 不敢自安, 又委一道之任, 如蚊負山, 豈敢當哉? 且自古人臣受命, 勤勞于外, 反罹讒毁者多矣。 願殿下釋臣此任, 俾全臣命。” 上曰: “卿何出此言? 我之於臣, 雖有譽之者, 必察焉; 雖有毁之者, 必察焉, 必得其實, 然後以行賞罰。 卿其往敬哉!”

양광도 안렴사 조박(趙璞)이 와서 조회하니, 임금이 묻기를,

"내가 듣건대, 양광도·전라도·경상도 3도(道)가 가물어 장차 실농(失農)할 것이라 하니, 참말인가?"

하매, 조박이 대답하기를,

"전라도와 경상도는 신(臣)이 알지 못하오나, 양광도 는 비가 계속해 내려서, 벼이삭이 점점 무성해집니다."

하므로, 임금이 크게 기뻐하였다. 조박이 그 임무를 면하기를 청하면서 아뢰었다.

"신은 일찍이 조그마한 공로도 없으면서 외람히 일등 공신에 참여했사오니, 실로 평민(平民)으로서 출세할 수 있는 최고(最高)의 자리임으로 감히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온데, 또 한 도(道)의 임무를 맡기셨으므로,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사오니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더구나, 예로부터 신하가 명령을 받고 밖에서 근로(勤勞)하다가 도리어 참소와 훼방을 만난 사람이 많았사오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임무를 해임(解任)시켜 신의 생명을 보전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경(卿)이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가? 나는 신하에게 비록 칭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살피며, 비록 헐뜯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살펴서, 꼭 그 실상을 알아낸 뒤에 상벌(賞罰)을 시행하니, 경은 임지에 가서 조심하라."


5月 20日[편집]

왜적이 교동에 침구하다[편집]

○甲子/倭寇喬桐。

왜적(倭賊)이 교동(喬桐)에 침구하였다.


5月 21日[편집]

이화 등 여러 절제사를 보내 왜적을 격퇴시키다[편집]

○乙丑/遣義安伯和及諸節制使擊之, 倭遁。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와 여러 절제사(節制使)를 보내어 왜적을 치게 하니, 왜적이 도망하였다.


5月 23日[편집]

흠차 내사 황영기 등이 조선의 국왕을 위협하는 조서를 가지고 오다[편집]

○丁卯/欽差內史黃永奇、崔淵等, 奉帝手詔來, 上率百官, 迎于宣義門外, 前導至壽昌宮, 聽詔行禮。 詔曰:

一, 曩者說兩浙民中不良者, 爲爾報消息, 已戮數十家矣。 其高麗山川鬼神, 豈不知爾造禍, 殃及於民! 此生釁一也。 一, 遣人至遼, 將布帛金銀之類, 假以行禮爲由, 意在誘我邊將, 此生釁二也。 一, 近者, 暗遣人說誘女眞, 帶家小五百餘名, 潛渡鴨江, 罪莫大焉。 此生釁三也。 一, 口稱稱臣入貢, 每以馬至, 令豢馬調之, 馬皆駑下, 亦皆乘乏勞倦者, 侮之一也。 一, 更國號一節, 遣人請旨, 許爾自爲, 或祖朝鮮, 爾爲苗裔。 使者旣還, 杳無音信, 反作釁端, 侮之二也。 嗚呼! 自元季中原擾攘, 民被兵殃, 英雄遍處, 轉戰殺傷, 幾將二紀, 朕已平之矣。 然中國旣定, 四夷生邊釁及不庭者, 命將討之, 又二紀于玆, 蠻夷率服, 海外諸島來庭。 邇來, 國中或生亂臣賊子, 今年春, 擒捕族誅, 姦黨已絶。 朕將化鋒刃爲農器, 撫戰士以忘昔勞, 厚養金傷者, 欲終于家, 致諸將衣輕裘乘肥馬, 翫四時之景, 以享太平。 乃何爾高麗, 速構兵殃? 朕又將昭告上帝, 命將東討, 以雪侮釁之兩端。 若不必師至三韓, 將誘女眞之人, 全家發來, 幷已往女眞大小送回, 朕師方不入境。

上禮畢, 宴內史于殿上。 內史二人, 皆國人也。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최연(崔淵) 등이 황제의 수조(手詔)를 받들고 오니,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맞이하여 앞을 인도해서 수창궁(壽昌宮)에 이르러 조서(詔書)를 듣고 예(禮)를 거행하였다.

"1. 지난번에 절동(浙東)·절서(浙西)의 백성 중에서 불량한 무리들이 그대를 위하여 소식을 보고하기에, 이미 수십 집을 죽였소. 그 고려의 산천 귀신이 어찌 그대가 화단(禍端)을 만들어 재앙이 백성에까지 미치게 될 줄을 알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흔단(釁端)을 일으킨 것의 한 가지요,

1. 사람을 보내어 요동(遼東)에 이르러 포백(布帛)과 금은(金銀)의 종류를 가지고 거짓으로 행례(行禮)함으로써 사유(事由)로 삼았으나, 마음은 우리 변장(邊將)을 꾀는 데 있었으니, 이것이 흔단(釁端)을 일으킨 것의 두 가지요,

1. 요사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여진(女眞)을 꾀여 가권(家眷) 5백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몰래 건넜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었소. 이것이 흔단(釁端)을 일으킨 것의 세 가지요,

1. 입으로는 신하라 일컫고 들어와 조공(朝貢)한다 하면서도, 매양 말을 가져올 때마다 말 기르는 사람[豢馬]으로 하여금 길들여 보게 하니, 말은 모두 느리고, 또한 모두 타서 피로한 것들이니, 업신여김의 한 가지요,

1. 국호(國號)를 고치는 일절(一節)은 사람을 보내어 조지(詔旨)를 청하므로, 그대의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했는데, 조선(朝鮮)을 계승하여 그대가 후손이 되게 하였소. 사자(使者)가 이미 돌아간 후에는 오래도록 소식이 없으며, 도리어 흔단(釁端)을 만드니 업신여김의 두 가지이다.

아아! 원(元)나라 말기로부터 중원(中原)[21]이 난리가 나서, 백성들이 병화(兵禍)를 입게 되었소. 영웅이 여러 곳에 웅거하여 전전(轉戰)하면서 살상(殺傷)한 지가 거의 24년이 되었는데, 짐(朕)이 이미 이를 평정하였소. 그러나 중국이 이미 평정되매, 사방의 오랑캐가 변흔(邊釁)을 일으키고 조공(朝貢)하지 않는 것은 장수에게 명하여 정토(征討)하게 한 지가 또한 2년이나 되었소. 만이(蠻夷)가 복종[率服]하고 해외(海外)의 여러 섬나라도 와서 조공(朝貢)하는데, 근래에 나라 안에서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발생했으므로, 금년 봄에 사로잡아 멸족(滅族)하여 간악한 무리들이 이미 근절되었소. 짐(朕)은 장차 칼날을 변화시켜 농구(農具)를 만들고, 전사(戰士)들을 어루만져 옛날의 노고를 잊게 하며, 칼날에 부상한 사람을 후하게 부양하여 제 집에서 평생을 마치게끔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진 말을 타도록 하여 사시(四時)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태평을 누리게 하려고 하는데, 어찌 그대의 고려에서 속히 병화(兵禍)를 일으키는가? 짐은 또 장차 상제(上帝)에게 밝게 고(告)하고, 장수에게 명해서 동방을 정벌하여 업신여기고 흔단을 일으킨 두 가지 일을 설욕(雪辱)할 것이오. 만약 군사가 삼한(三韓)에 이르지 않더라도 장차 여진의 사람들을 꾀어 전가(全家)를 떠나오게 할 것이니, 이미 간 여진의 모든 사람을 돌려보낸다면 짐의 군사는 국경(國境)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

임금이 예(禮)를 마치고 난 후에 내사(內史)에게 전상(殿上)에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두 사람은 모두 우리 나라 사람이다.


판내시부사 김사행이 상의원 소속으로 탈루된 서북면 사람을 점고하자고 청했으나 윤허치 않다[편집]

○判內侍府事金師幸啓曰: “尙衣院屬人物在西北面者, 率多脫漏。 乞令本院差人, 馳驛前去, 精加點考。” 上曰: “此內藏私事, 非國家急務。 前是差人之弊, 余所嘗聞, 敢煩驛馬乎!” 師幸力請再三, 不允。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이 아뢰었다.

"상의원(尙衣院)에 소속한 인물로서 서북면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많이 탈루(脫漏)되었사오나, 원하옵건대, 본원(本院)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역마(驛馬)로 달려 앞으로 가서 자세히 점고(點考)를 가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이것은 내장(內藏)[22]의 사삿일이고 국가의 급한 사무는 아니다. 이보다 먼저 사람을 보내는 폐단은 내가 일찍이 들은 바인데, 감히 역마(驛馬)까지 폐를 끼치겠는가?"

사행(師幸)이 두세 번 힘써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月 24日[편집]

청심정에서 내사에게 잔치를 베풀다[편집]

○戊辰/上宴內史于淸心亭。

임금이 내사(內史)에게 청심정(淸心亭)에서 잔치를 베풀다.


5月 25日[편집]

도당에 명하여 내사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다[편집]

○己巳/命都評議使司, 宴內史。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내사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성 등지로부터 의탁한 여진인을 돌려 보내도록 하고, 황제에게 주문할 일을 의논하다[편집]

○上以帝命, 命推刷泥城、江界等處來投女眞人物。 上謂左右曰: “帝以兵甲衆多, 政刑嚴峻, 遂有天下。 然以殺戮過當, 元勳碩輔, 多不保全, 而乃屢責我小邦, 誅求無厭。 今又責我以非罪, 而脅我以動兵, 是何異恐喝小兒哉!” 都承旨李稷曰: “然則何以對之?” 上曰: “吾且卑辭謹事之耳。” 命與侍中趙浚、金士衡等, 議所以奏聞。

임금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성(泥城)·강계(江界) 등지에서 와서 의탁한 여진(女眞)의 인물을 찾아 돌려보내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황제는 군사가 많고 정형(政刑)이 엄준(嚴峻)하였으므로 마침내 천하를 차지했지만, 사람을 죽임이 정도에 지나쳤으므로 원훈(元勳)과 석보(碩輔)[23]들이 생명을 보전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이에 우리 작은 나라를 자주 책망하면서, 강제로 청구함이 한량이 없었다. 지금 또 나에게 죄가 아닌 것을 책망하면서, 나에게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니,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공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도승지 이직(李稷)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답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우선 말을 낮추어 조심스럽게 섬길 뿐이다."

하였다. 명하여 시중(侍中)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 등과 더불어 황제에게 주문(奏聞)할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5月 26日[편집]

해도로 유배된 공양왕의 친족들을 육지로 옮겨 생업을 안정시키도록 하다[편집]

○庚午/命都承旨李稷, 傳旨于都評議使司曰:

自古王者, 初定大業, 猶恐前朝苗裔, 爲己後患, 多生疑忌, 必欲剪除, 予則不然。 天命寡躬, 以爲一國之主, 凡在境內者, 皆吾赤子, 一視同仁, 以答天意。 已將恭讓君從便安住, 妻子童僕, 完聚如古, 獨其族屬, 入處海島, 生理艱苦, 予甚憫焉。 其令王氏之族在巨濟者, 劃日出陸, 各於陸地州郡安置, 以遂生理, 毋致失所, 如有才幹者, 揀擇敍用, 以示公道。 仰都評議使司, 其亟施行。

使司於是移文慶尙道按廉使及巨濟兵馬使, 皆令出陸, 分處于完山、尙州、寧海。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도평의사사에 전지하였다.

"예로부터 왕자가 처음에 대업(大業)을 정할 적에 오히려 전조(前朝)의 후손이 자기의 후환(後患)이 될까 두려워하여, 의심과 꺼리는 마음을 많이 내어 반드시 목 베어 없애버리고자 하였는데, 나는 그렇지 아니하다. 하늘이 과궁(寡躬)을 명하여 한 나라의 군주로 삼았으니, 무릇 경내(境內)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나의 적자(赤子)029) 인지라, 피아(彼我)의 차별이 없이 똑같이 사랑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해야 될 것이다. 이미 공양왕은 편리한 데 따라[從便]서 편안히 거주하게 하고, 처자(妻子)와 동복(童僕)들도 예전과 같이 모여 있게 하였으나, 다만 그 족속(族屬)들은 해도(海島)에 들어가 거처하여 생계(生計)가 고생스러우니, 내가 심히 민망하게 여긴다. 그 왕씨(王氏)의 족속으로서 거제(巨濟)에 있는 사람은 시일을 정하여 육지로 나오게 하고 각기 육지의 주군(州郡)에 안치(安置)하여 생계(生計)를 이루어 안정된 처소를 잃지 말게 하되, 만약 재간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간택(揀擇)하여 서용(敍用)해서 공도(公道)를 보이게 할 것이니, 도평의사사에 영을 내려 빨리 시행하라."

도평의사사에서 이에 경상도 안렴사와 거제 병마사에게 이문(移文)하여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해서, 완산(完山)·상주(尙州)·영해(寧海)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


왕강과 왕승보를 불러오다[편집]

○召王康、承寶。

왕강(王康)과 왕승보(王承寶)를 불러 왔다.


각도에서 군사를 점고하여 군적을 올리다[편집]

○各道上軍籍。 先是, 遣南誾、朴葳、陳乙瑞等八節制使, 以備倭寇。 寇退, 乃命南誾于慶尙道, 朴葳于楊廣道, 陳乙瑞于全羅道, 點軍成籍, 其餘諸道, 令按廉使點之。 至是, 成籍以上。 京畿左右、楊廣、慶尙、全羅、西海、交州、江陵凡八道馬步兵及騎船軍摠二十萬八百餘人, 子弟及鄕驛吏諸有役者十萬五百餘人。

각도에서 군적(軍籍)을 올렸다. 이보다 먼저 남은(南誾)·박위(朴葳)·진을서(陳乙瑞) 등 8명의 절제사(節制使)를 보내어 왜구(倭寇)를 방비하게 하였는데, 왜구가 물러가매, 남은은 경상도에서, 박위는 양광도 에서, 진을서는 전라도에서 군사를 점고(點考)하여 명부(名簿)를 만들게 하고, 그 나머지 여러 도(道)에는 안렴사로 하여금 군사를 점고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군적(軍籍)을 만들어 올리게 되니, 경기 좌우도와 양광도 ·경상도·전라도·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강릉도(江陵道) 등 8도에 마병(馬兵)·보병(步兵)과 기선군(騎船軍)이 합계 20만 8백여 명이고, 자제들과 향리(鄕吏)·역리(驛吏)와 여러 유역자(有役者)가 10만 5백여 명이었다.


경상도에 가뭄이 들다[편집]

○慶尙道旱。

경상도에 가뭄이 들었다.


5月 30日[편집]

도당·대간·육조 등에 수령 적임자를 천거토록 교지를 내리다[편집]

○甲戌/敎曰: “守令, 兼任軍民, 必文武專才, 可當其任。 卽位以來, 每因薦擧用人, 其間多不稱職。 都評議使司、臺諫、六曹, 各擧所知, 不拘名數, 以次敍用, 各其班簿, 幷錄擧主姓名, 如有不稱職者, 罪及擧主。”

교지를 내리었다.

"수령(守令)은 군민(軍民)을 겸임(兼任)하였으니 반드시 문무(文武)를 구비한 재간이라야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하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매양 천거(薦擧)를 통하여 사람을 썼는데, 그 중에는 직책에 맞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 도평의사사와 대간(臺諫)과 육조(六曹)에서 아는 사람을 각각 천거하되, 명수(名數)에 구애하지 말고 차례대로 서용(敍用)하게 하고 각기 그 반부(班簿)에는 천거한 사람[擧主]의 성명(姓名)까지 아울러 기록하여, 만약 직책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죄가 천거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할 것이다."


二年 六月[편집]

6月 1日[편집]

황제가 힐문한 조목에 대해 답사하는 표문[편집]

○乙亥朔/遣中樞院學士南在, 奉表帝京曰:

誡命昭示於丁寧, 天威不違於咫尺。 玆深悚懼, 用切籲呼。 竊念以庸陋之資, 處僻遠之地, 然粗聞聖賢之垂訓, 故得知華夏之當尊。 洪武二十一年, 辛禑、崔瑩等, 妄興師旅, 欲向遼東, 二十五年, 王瑤、鄭夢周等繼禑邪志, 將犯上國。 臣曉諭一國臣民, 以謂夷不可以亂華, 下不可以犯上。 衆皆知其逆順, 彼咸服其罪辜。 非但上天之明知, 實惟聖鑑之灼見。 屢奉曰兪之命, 常懷圖報之誠。 謹修歲時, 無怠職貢。 今者, 欽奉手詔節該, 一款, “曩者說兩浙民中不良者, 爲爾報消息。” 一款, “遣人至遼, 以布帛金銀之類, 假以行禮爲由, 意在誘我邊將。” 一款, “近者暗遣人說誘女眞, 帶家小五百餘名, 潛渡鴨綠。” 一款, “口稱稱臣入貢, 每以馬至, 令豢馬者調之, 馬皆駑下, 亦皆乘乏勞倦。” 一款, “更國號一節, 遣人請旨, 許爾自爲, 或祖朝鮮, 爾爲苗裔。 使者旣還, 杳無音信。” 欽此。 有王瑤自構其逆釁, 致國人不義其所爲, 退處于家, 獲保其命, 妻子之團圝自若, 朝夕之奉養如常。 瑤雖至昏, 豈不自反? 玆乃聖恩之所及, 可明臣心之無他。 且夫兩浙之民, 消息本無相報。 況在王氏之日, 情狀何與於臣? 至若行禮於遼東, 是亦景仰於上國。 當使介往來之際, 有賓主交接之儀, 在禮則然, 於誘何敢? 其有女眞隷于東寧, 旣皆作軍而當差。 安肯遣人而說誘? 但遼東都司起取脫歡不花之時, 其管下人民, 或有不卽隨行者。 由彼安土, 非臣勒留, 無所供於我邦, 各自守其舊業。 欽依手詔事意, 將脫歡不花原管人民安土不卽隨行者, 差人取勘見數, 發送遼東。 曩有本國人民往投遼東, 懷思鄕土及親戚, 或復逃來, 潛隱山谷之間。 臣初不知節次, 據遼東來文, 差人根緝獲到。 臣以謂雖其本系出於小邦之民, 然其姓名載於官軍之籍, 不宜容置, 曾已發還。 其逃來未獲者, 不知女眞、高麗, 旣係逃軍, 不行出首, 未審潛隱去處。 今爲差人, 遍行搜捕, 隨卽起解。 情迫驚恐, 先此奏陳。 抑貢馬之非良, 迺土性之所致。 措辦之數斯夥矣, 駑下之材或有焉。 詔旨又曰: “奈何爾高麗, 速構兵殃?” 欽此, 誠惶誠懼。 臣雖鄙愚, 不至狂妄。 蒙上之德而忌其德, 責人之尤而效其尤, 固非人情, 安有是理? 臣如欺罔, 天實照臨。 念臣以一身之微, 出萬死之計, 首倡大義, 以絶禍萌, 良由事大之忠, 多取群小之怨。 前者尹彛、李初等, 潛赴朝廷, 妄搆是非, 幸蒙睿照, 得達卑情。 旣遭聖明而以爲依歸, 雖有讒構而不自憂恤, 豈圖貝錦又干冕旒! 每盡力於虔供, 獨何心而侮釁! 逢天之譴, 無地自容。 伏望皇帝陛下, 垂日月之明, 擴乾坤之度, 察讒人交亂四國, 憐小臣永肩一心, 特霈洪恩, 俾安遠俗。 臣謹當臣節益堅於終始, 皇齡倍祝於康寧。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남재(南在)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중국의 서울에 올리게 하였다.

"계명(誡命)[24]은 정성스럽게 밝게 보여주셨고, 천위(天威)는 지척(咫尺)에서 멀지 않으니, 깊이 두려워하여 사정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용렬하고 못난 자질로써 궁벽하고 먼 땅에 처(處)하였사오나, 성현(聖賢)의 교훈[垂訓]을 대강 들었으므로 중화(中華)를 마땅히 높일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무(洪武) 21년(1388)년에 신우(辛禑)와 최영(崔瑩) 등이 군대를 함부로 일으켜 요동(遼東)으로 향하고자 했으며, 25년(1392)에 왕요(王瑤)[25]와 정몽주 등이 신우의 부정한 뜻을 계승하여 장차 상국(上國)을 범하려 하므로, 신(臣)이 온 나라 신민(臣民)들에게 효유(曉諭)하여, 오랑캐가 중화(中華)를 소란하게 할 수가 없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할 수 없다고 말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역리(逆理)와 순리(順理)를 알게 되고, 저들이 모두 그 죄에 자복(自服)하였으니, 다만 상천(上天)이 밝게 알 뿐이 아니오라, 실로 황제께서 환하게 보신 바입니다. 여러 번 윤허(允許)하신다는 명령을 받들었으므로, 항상 보답하려는 정성을 품고, 삼가 세시(歲時)에 예절을 차려서 직공(職貢)을 게을리 함이 없었습니다. 지금 삼가 수조(手詔)를 받들었사온데, 그 한 항목에, ‘지난번에 절동(浙東)·절서(浙西)의 백성 중에서 불량한 무리들이 그대를 위하여 소식을 보고한다.’ 하고, 한 항목에, ‘사람을 보내어 요동(遼東)에 이르러 포백(布帛)·금은(金銀)의 종류를 가지고 거짓으로 행례(行禮)함으로써 사유(事由)로 삼았으나, 마음은 우리 변장(邊將)을 꾀는 데 있다.’ 하고, 한 항목에, ‘최근에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 여진(女眞)을 말로 꾀어서 가솔 5백여 명을 데리고 몰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갔다..’ 하고, 한 항목에, ‘입으로는 신하라 일컫고 들어와 조공(朝貢)을 한다 하면서도, 매양 말을 가져올 때마다 말 기른 사람[豢馬]으로 하여금 이를 뽑아 보내게 하니, 말은 모두 느리고 또한 타서 피로한 것들이라.’ 하고, 한 항목에, ‘국호(國號)를 고치는 일절(一節)은 사람을 보내어 조지(詔旨)를 청하므로, 그대의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했는데, 조선(朝鮮)을 계승하여 그대가 후손이 되게 하였소. 사자(使者)가 이미 돌아간 후에는 오래도록 소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이것은 왕요(王瑤)가 스스로 흔단(釁端)을 만들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의 한 짓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여, 그를 집에 물러가 있게 하여 그 생명을 보전하게 하되, 처자(妻子)와 한 곳에서 그전처럼 단란하게 살고, 조석의 봉양(奉養)도 평상시와 같게 하였는데, 왕요가 비록 지극히 혼암(昏暗)하지마는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곧 성은(聖恩)이 미치는 바이므로 신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음을 밝힐 수 있습니다.

또 절동(浙東)·절서(浙西)의 백성은 소식을 본디부터 서로 보고한 일이 없었는데, 하물며 왕씨(王氏)가 있었던 시기의 정상(情狀)이 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요동(遼東)에 행례(行禮)하는 일 같은 것은, 이것도 또한 상국(上國)을 경앙(景仰)[26]하여 사신(使臣)이 왕래하는 때에 빈주(賓主)의 교접(交接)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이니, 예의(禮儀)에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온데, 꾀는 일이 어찌 감히 있었겠습니까? 여진(女眞)은 동녕부(東寧府)에 예속되어 이미 모두 군사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보내게 되었는데, 어찌 사람을 보내서 말하여 꾀겠습니까? 다만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탈환불화(脫歡不花)를 데려갈 때에, 그 관하(管下)의 인민들이 혹은 즉시 따라가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은 저들이 그 곳에서 편안히 살고 있기 때문이고, 신이 강제로 머물러 있게 한 것이 아니오며, 우리 나라에는 이바지할 것이 없으나 각자가 스스로 그 구업(舊業)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삼가 수조(手詔)의 내용에 따라 탈환불화(脫歡不花)의 본래 관하(管下)의 인민으로 그곳에 편안히 살면서 즉시 따라가지 않은 사람을,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서 현재의 수효대로 발송(發送)하겠습니다.

요동(遼東)에는 이전에 본국(本國)[27]의 인민이 가서 요동에 의탁하고 있었으므로, 고향과 친척들을 생각하여 혹은 다시 도망해 와서 산골짜기 사이에 몰래 숨어 살고 있었는데, 신이 처음에는 절차(節次)를 알지 못하여 요동(遼東)에서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여 사람을 보내어 모두 체포하여 오게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비록 본 계통은 소방(小邦)의 백성에게 나왔지마는, 그 성명(姓名)이 관군(官軍)[28]의 명부에 기재된 사람은 마땅히 용납해 두지 못하겠으므로 일찍이 벌써 돌려보냈으며, 그 도망해 와서 잡지 못한 사람은, 여진인(女眞人)인지 고려인(高麗人)인지 알지 못하나, 이미 도망한 군사에 관계되므로 아직 잡지 못하고, 몰래 숨어 간 곳을 살피지 못했사오나, 지금 사람을 파견하여 널리 찾아 체포하도록 하였으니 곧 날짜를 정해 보내겠습니다. 사정이 급박하여 놀라고 두려워서 먼저 이 사유를 아뢰옵니다.

공마(貢馬)가 좋지 않다는 것은 곧 토성(土性)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오며, 조처하여 출판(出辦)한 수효는 많았으나 느리고 약한 말도 혹 있었을 것입니다.

조지(詔旨)에 또 말씀하기를, ‘어찌 그대 고려는 전쟁의 재앙을 일으키는 데 급급한가.’ 하였사오니, 삼가 이 말은 진실로 황공하옵니다. 신이 비록 못나고 어리석지마는 광망(狂妄)한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덕을 입으면서도 그 덕을 꺼리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책망하면서도 그 허물을 본받는 것은 진실로 인정(人情)이 아니온데,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만약 〈황제를〉 속인다면 하늘이 실로 굽어 살피실 것입니다.

생각하옵건대, 신은 일신(一身)의 미력(微力)으로써 죽음을 무릅쓰는 계책을 내어 맨 먼저 대의(大義)를 일으켜 화란(禍亂)의 발단을 근절했사오니, 진실로 대국(大國)을 섬기는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지만, 여러 소인(小人)들의 원망을 많이 받았습니다. 전일에 윤이(尹彝)·이초(李初) 등이 몰래 조정(朝廷)에 가서 시비(是非)를 거짓 꾸몄사오나, 다행히 황제의 살피심을 입어 신의 심정을 통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황제의 고명(高明)한 세상을 만나서 의뢰(依賴)를 삼고자 하므로, 비록 거짓의 참소가 있더라도 스스로 근심하지 아니하온대, 어찌 비단처럼 꾸민 참소의 말이 또 황제의 귀에 들어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매양 삼가 공봉(供奉)하는 일에 힘을 다했사온대, 홀로 무슨 마음으로 모시(侮視)하고 흔단(釁端)을 일으키겠습니까? 하늘의 꾸지람을 만났으니 땅에서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황제 폐하께서 해와 달 같은 총명을 드리우시고 하늘과 땅 같은 도량을 넓히시어, 참소하는 사람이 사방의 나라를 뒤섞어 어지럽힘을 살피시고, 소신(小臣)이 한 마음[一心]을 가짐을 어여삐 여겨, 특별히 큰 은혜를 내리어 먼 지방의 풍속을 편안하게 하시면, 신은 삼가 마땅히 신하의 절개를 시종여일하게 더욱 굳게 지키고, 황제의 연세(年歲)는 강녕(康寧)하시라고 배(倍)나 축원하겠습니다."


6月 2日[편집]

갑자기 찬 바람이 일다[편집]

○丙子/寒風暴作。

갑자기 찬 바람이 일었다.


6月 3日[편집]

화원에 거둥하여 팔각정을 수리케 하다[편집]

○丁丑/如花園, 命宦者金師幸, 修八角亭。

임금이 화원(花園)에 거둥하여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에게 명하여 팔각정(八角亭)을 수리하게 하였다.


주문사 남재에게 의복과 술을 내리다[편집]

○遣將軍南贄, 賜衣酒于奏聞使南在。

장군(將軍) 남지(南贄)를 보내어 주문사(奏聞使) 남재(南在)에게 의복과 술을 내리게 하였다.


6月 6日[편집]

요동 도지휘사사를 통해 공마 1만 마리 비용을 지불하는 내용의 예부 자문이 오다[편집]

○庚辰/遼東都指揮使司差千戶高闊闊出, 齎禮部咨來。 其咨曰:

洪武二十六年二月二十八日, 禮部署部事儀部主事蓋霖等官將遼東都司實收過高麗節次, 解到馬數於奉天門, 奏奉聖旨: “爾禮部照依馬數, 將紵絲緜布, 差官運去, 給還他價。” 欽此。 除欽遵外, 今將該給馬價段匹緜布, 差指揮同知王鼐等, 管運前去。 計實收過馬九千八百八十匹, 給紵絲緜布各一匹, 共運去。 各色紵絲緜布一萬九千七百六十匹, 紵絲九千八百八十匹, 緜布九千八百八十匹。

요동 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에서 천호(千戶) 고활활출(高闊闊出)을 보내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다.

"홍무(洪武) 26년(1393) 2월 28일에 예부 서부사(禮部署部事) 의부 주사(儀部主事) 개임(蓋霖) 등 관원이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실지로 수납(收納) 통과시킨 고려(高麗)의 절차에 따라 말 수효[馬數]를 봉천문(奉天門)에 도착시켰는데,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들어 예부(禮部)에서 말 수효에 의거해 대조하고 저사(紵絲)와 면포(綿布)를 관원을 시켜 운반해 가서 그 값을 지급하게 하였다. 삼가 이를 준행(遵行)한 외에 지금 말 값으로 단필(段匹)과 면포(綿布)를 지급하여 지휘동지(指揮同知) 왕내(王鼐) 등을 보내어 운반해 가지고 앞에 가게 하였다. 합계, 실지로 수납 통과시킨 말이 9천 8백 80필이므로 저사(紵絲)·면포(綿布) 각 1필씩을 함께 운반해 가니, 각종 저사·면포가 1만 9천 7백 60필이다. 저사가 9천 8백 80필이고, 면포가 9천 8백 80필이다."


장사길과 곽충보에게 문화현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공격토록 하다[편집]

○倭寇文化、永寧二縣, 遣永安君及同知中樞院事張思吉, 商議中樞院事郭忠輔擊之。

왜적(倭賊)이 문화현(文化縣)·영녕현(永寧縣)의 두 현(縣)에 침구하니, 영안군(永安君)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장사길(張思吉)과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곽충보(郭忠輔)를 보내어 이를 치게 하였다.


6月 7日[편집]

좌산기 상시 안경검이 화원의 공사를 중지토록 청하니, 종사의 안위 외의 일을 아뢰지 말도록 명하다[편집]

○辛巳/左散騎常侍安景儉等請罷花園役, 上曰: “諫官欲令國君, 足不到宮門之外乎? 此園前朝所營, 因而灑掃, 以備遊觀, 獨不可乎?” 召左拾遺王裨, 命曰: “自今非關宗社安危者, 不宜啓聞。”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안경검(安景儉) 등이 화원(花園)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간관(諫官)이 나라 임금에게 발을 궁문(宮門) 밖에 내어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이 화원은 고려 왕조에서 만든 것인데, 그대로 깨끗이 소제하여 유람(遊覽)에 대비하는 것이 유독 옳지 못한 일인가?"

하면서, 좌습유(左拾遺) 왕비(王裨)를 불러 명하였다.

"이제부터는 종사(宗社)의 안위(安危)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마땅히 계문(啓聞)하지 마라."


6月 10日[편집]

고활활출이 돌아가다[편집]

○甲申/高闊闊出還。

고활활출(高闊闊出)이 돌아갔다.


지중추원사 조임을 정요위에 보내 말 값을 받아오게 하다[편집]

○遣知中樞院事趙琳, 受馬價于定遼衛。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임(趙琳)을 보내어 정요위(定遼衛)에서 말 값을 받아 오게 하였다.


6月 13日[편집]

지공거 조준 등이 선발한 윤정 등 33인에게 전시를 치뤄 송개신을 1등으로 뽑다[편집]

○丁亥/坐報平殿, 試知貢擧左侍中趙浚、同知貢擧藝文春秋館大學士金湊所擧尹定等三十三人, 以宋介臣爲第一。

임금이 보평전(報平殿)에 앉아서 지공거(知貢擧)인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과 동지공거(同知貢擧)인 예문춘추관 대학사 김주(金湊)가 천거한 윤정(尹定) 등 33인을 시험하였는데, 송개신(宋介臣)을 제1로 삼았다.


6月 14日[편집]

현비의 생신이므로 참형과 교형 이하의 죄수를 용서하다[편집]

○戊子/顯妃生辰, 宥二罪以下囚。

현비(顯妃)의 생신(生辰)이므로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용서하였다.


6月 16日[편집]

섬라곡국에서 소목·속향·토인을 바치다[편집]

○庚寅/暹羅斛國遣其臣乃【乃, 其國官名也。】 張思道等二十人, 來獻蘇木一千斤、束香一千斤及土人二名, 上令二人守闕門。

섬라곡국(暹羅斛國)[29]에서 그 신하 내(乃) 【내(乃)는 그 나라 관직 이름이다.】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게 하였다.


일본 일기도의 중 건철이 포로 200여 인을 돌려보내고 방물을 바치다[편집]

○日本一岐島僧建哲, 使人來歸我被擄男女二百餘人, 仍獻方物曰: “以表遠忱。”

일본 일기도(一岐島)의 중[僧] 건철(建哲)이 사람을 시켜 우리 나라에서 사로잡혀 갔던 남녀 2백여 인을 돌려보내고, 이내 방물(方物)을 바치면서 말하였다.

"먼 곳에서 정성을 표합니다."


6月 17日[편집]

성절을 하례하고, 말 값을 보내준 것을 사례하는 표문을 보내다[편집]

○辛卯/遣判三司事尹虎賀聖節, 遣參知門下府事金立堅謝賜馬價。 其表曰:

正使建陽衛指揮同知王鼐等官, 齎捧到禮部咨, 臣欽蒙聖慈給還節次解到馬價, 臣與一國臣民不勝感激者。 聖恩旣渥, 天貺實優, 登受以還, 感銘無已。 竊念臣猥以庸稟, 幸際明時, 誓修職分之常, 小答生成之造。 近者, 欽依措辦, 節次解送馬匹。 産從僻壤, 本乏良才, 恐不充於天閑, 何敢望於價幣? 恩非意及, 感與愧幷。 玆蓋伏遇皇帝陛下推同仁一視之心, 擧厚往薄來之典, 遂令遠俗, 得荷殊私。 臣謹當倡率一方, 益勵虔供之志, 用祈萬壽, 永殫頌禱之誠。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를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어 말 값을 내려 준 것에 대하여 사례하게 하였다. 그 표문에 이러하였다.

"정사(正使)인 건양위 지휘동지(建陽衛指揮同知) 왕내(王鼐) 등 관원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사온데, 신(臣)은 삼가 황제께서 절차에 의하여 보낸 말 값을 돌려주심을 입었으니, 신은 온 나라 신민(臣民)들과 더불어 감격함을 견딜 수 없사옵니다. 성은(聖恩)이 이미 후하온데 주시는 값도 실로 많으시니, 이를 받아서 가지고 돌아오매 감명(感銘)됨이 한이 없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신은 외람히 용렬한 자질로써 다행히 태평한 세상을 만나서, 직분(職分)의 떳떳함을 실천하기를 맹세하여 생성(生成)시키는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려고 하였습니다. 요사이 삼가 조판(措辦)하라는 절차에 의거하여 말을 보냈사오나, 궁벽한 땅에서 생산되었으므로 본디부터 좋은 품질은 없었습니다. 황제의 마굿간[天閑]에 채우지 못할까 두려워했는데 어찌 감히 값을 주실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은혜가 생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격이 부끄러움과 함께 일어납니다. 이것은 대개 황제 폐하께옵서 피아(彼我)의 차별이 없이 똑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보내 주는 것은 후하게 하고, 가져오는 것은 경하게 하는 규정을 사용하여, 마침내 먼 지방으로 하여금 특별한 은혜를 입게 한 것입니다. 신은 삼가 마땅히 한 지방을 거느려서 더욱 직공(職供)을 삼가히 할 뜻을 권려하고 만수(萬壽)를 기원(祈願)하여 영구히 송도(頌禱)하는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6月 19日[편집]

내시 이만을 죽이고, 세자의 현빈 유씨를 내치다[편집]

○癸巳/誅內竪李萬, 黜世子賢嬪柳氏。

내수(內竪)[30] 이만(李萬)을 목 베고, 세자(世子)의 현빈(賢嬪) 유씨(柳氏)를 내쫓았다.


6月 21日[편집]

대간 등에서 현빈 유씨 일의 정상을 밝히도록 상언하니, 노하여 순군옥에 내리다[편집]

○乙未/臺諫、刑曹上言:

竊見內竪李萬伏誅, 賢嬪柳氏黜還私第, 國人未知所以, 疑懼不已。 願殿下將左右親近之人, 下法司鞫問, 以絶國人之疑。

上怒, 下右散騎常侍洪保、左拾遺李慥、司憲中丞李䇕、侍史李原、刑曹正郞盧湘于巡軍。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가만히 보건대 내수(內竪) 이만(李萬)이 참형(斬刑)을 당하고, 현빈(賢嬪) 유씨(柳氏)가 내쫓겨 사제(私第)로 돌아갔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의심하고 두려워함이 그치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좌우(左右)의 친근한 사람을 법사(法司)에 내려 국문(鞫問)해서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없애게 하소서."

임금이 노하여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 홍보(洪保)·좌습유(左拾遺) 이조(李慥)·사헌 중승(司憲中丞) 이수(李䇕)·시사(侍史)[31] 이원(李原)·형조 정랑(刑曹正郞) 노상(盧湘)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었다.


6月 22日[편집]

현빈 유씨의 일을 함부로 논한 대간·형조의 관원들을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丙申/又下左諫議李滉、右諫議閔汝翼、直門下鄭擢、起居注李之剛、右補闕尹將、右拾遺王裨、刑曹典書李舒、議郞趙思義ㆍ崔士議、佐郞閔思正、兼司憲中丞朴苞、雜端秦瓊ㆍ李致、參臺監察柳善等于巡軍, 命鄭熙啓、南誾、趙琦、黃希碩鞫問。 先時, 上謂左侍中趙浚、右侍中金士衡曰: “宮中小竪嬪媵黜罰, 我家私事, 非外人所得知也。 今臺諫、刑曹妄論是事, 必外人妄自生疑, 傳相聚議, 非獨此輩之意也。 今欲逮此輩於獄鞫問。” 浚等不對, 出謂都承旨李稷曰: “臺諫刑曹, 一國綱紀所在, 自古重之, 合司被囚, 有傷國體。 宜善辭啓聞。” 稷入告, 上然之, 欲只囚掌務問之, 以其辭連及, 命皆囚之。

또 좌간의(左諫議) 이황(李滉)·우간의(右諫議) 민여익(閔汝翼)·직문하(直門下) 정탁(鄭擢)·기거주(起居注)[32] 이지강(李之剛)·우보궐(右補闕) 윤장(尹將)·우습유(右拾遺) 왕비(王裨)·형조 전서(刑曹典書) 이서(李舒), 의랑(議郞) 조사의(趙思義)·최사의(崔士儀), 좌랑(佐郞) 민사정(閔思正)·겸 사헌 중승(司憲中丞) 박포(朴苞), 잡단(雜端)[33] 진경(秦瓊)·이치(李致), 참대 감찰(參臺監察) 유선(柳善)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게 하고, 정희계(鄭熙啓)·남은(南誾)·조기(趙琦)·황희석(黃希碩)에게 명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이전에 임금이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과 우시중(右侍中) 김사형(金士衡)에게 이르기를,

"궁중(宮中)의 소수(小竪)[34]와 빈잉(嬪媵)[35]을 내쫓아 처벌하는 것은 내 집안의 사삿일이므로 외인(外人)이 알 바가 아닌데, 지금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이 일을 함부로 논(論)하게 되매, 반드시 외인(外人)이 망령되게 스스로 의심을 내어 전해서 서로 모여서 의논하게 될 것이니, 다만 이 무리들의 뜻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무리들을 옥에 가두어 국문(鞫問)하고자 한다."

하니, 조준 등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나가서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이르기를,

"대간(臺諫)과 형조는 한 나라의 기강(紀綱)이 매여 있으므로 예로부터 이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합사(合司)가 갇히게 되면 국체(國體)에 손상됨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말을 잘 해서 계문(啓聞)하오."

하였다. 이직이 들어가서 아뢰니, 임금이 옳게 여겨 다만 장무(掌務)만 가두어 국문하고자 하였으나, 그 공사(供辭)가 관련되어 미치게 된 까닭으로, 명하여 모두 가두게 한 것이었다.


6月 23日[편집]

현빈 유씨의 일에 관련된 대간의 관원들을 귀양보내다[편집]

○丁酉/流洪保、李䇕、尹將、秦瓊、李致、崔士儀、趙思義、王裨于其鄕; 流李原于竹林, 盧湘于全羅道軍營, 李慥于角山; 李舒、朴苞、閔汝翼、鄭擢、李滉、李之剛等, 以功臣故, 許歸私第。

홍보(洪保)·이수(李䇕)·윤장(尹將)·진경(秦瓊)·이치(李致)·최사의(崔士儀)·조사의(趙思義)·왕비(王裨)는 그 본향(本鄕)으로 귀양보내고, 이원(李原)은 죽림(竹林)으로 귀양보내고, 노상(盧湘)은 전라도 군영(全羅道軍營)으로 귀양보내고, 이조(李慥)는 각산(角山)으로 귀양보내고, 이서(李舒)·박포(朴苞)·민여익(閔汝翼)·정탁(鄭擢)·이황(李滉)·이지강(李之剛) 등은 공신(功臣)인 까닭으로 사제(私第)로 돌아가게 하였다.


6月 24日[편집]

성균관에서 생원시를 보아 윤상신 등 132명을 선발하다[편집]

○戊戌/成均館試生員, 取尹尙信等一百三十二人。

성균관에서 생원(生員)을 시험하여 윤상신(尹尙信) 등 1백 32인을 뽑았다.


판삼사사 윤호의 졸기. 참지문하부사 김입견을 윤호 대신 성절사로 보내다[편집]

○賀聖節使判三司事尹虎卒于金巖驛。 訃聞, 上停朝三日。 虎字仲文, 坡平君侅之子也。 性正直, 稍善書。 嘗仕恭愍朝, 恭愍與之圍碁, 虎不勝, 命書古詩以進, 乃書唐李紳《讀李斯傳詩》以進。 其詩曰: “欺暗常不然, 欺明當自戮。 難將一人手, 掩得天下目。” 恭愍以爲譎諫, 遂疎之。 爲楊廣道都巡問使, 用兵謀數捕倭寇, 尹雞林, 善於備禦。 當革命之初, 有協贊推戴之功。 受命朝京, 不以病辭, 力疾以行, 卒於道。 無子。 以參知門下府事金立堅代尹虎行。

하성절사(賀聖節使)인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가 금암역(金巖驛)에서 졸(卒)하였다. 부고(訃告)가 들리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게 하였다. 윤호의 자는 중문(仲文)이니 파평군(坡平君) 윤해(尹侅)의 아들이다. 천성이 정직하고 글씨를 조금 잘 썼다. 일찍이 공민왕대에 벼슬하였는데, 공민왕이 그와 더불어 바둑을 두니, 윤호는 이기지 아니하였다. 명하여 옛날의 시(詩)를 써서 바치게 하니, 곧 당(唐)나라 이신(李紳)의 독이사전시(讀李斯傳詩)를 써서 바쳤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어두운 곳을 속이는 일도 그렇지 못할 것인데,

밝은 곳을 속이는 일은 마땅히 제손으로 죽어야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손으로서는

천하의 눈을 가리기가 어렵겠구나."

공민왕이 넌지시 간(諫)한다고 여겨 마침내 그를 소원(疏遠)하여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로 삼았다. 군사를 꾀로써 잘 부려 여러 번 왜구(倭寇)를 잡았으며,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어 적을 잘 방어하였다. 혁명(革命)할 초기에 협찬(協贊) 추대(推戴)한 공로가 있었는데, 명령을 받아 중국 서울에 조회하게 되매, 병(病)으로 사양하지 아니하고 병을 참고서 가다가 길에서 죽었다. 아들이 없다.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김입견(金立堅)으로 윤호를 대신하여 가게 하였다.


6月 26日[편집]

서방에 붉은 기운이 끼다[편집]

○庚子/西方赤祲。

서방(西方)에 붉은 요기가 끼었다.


6月 28日[편집]

예조 전서 이민도가 종묘, 적전의 제사에 7일간 재계하는 것 등을 규례로 삼도록 청하다[편집]

○壬寅/禮曹典書李敏道等上書曰:

有國之典, 惟祀爲大。 古之人, 當祭之時, 七日戒三日齊, 而天神格人鬼享, 皆由己以致之也。 孔子曰: “祭如在, 祭神如神在。” 又曰: “吾不與祭, 如不祭。” 伏望殿下, 其於宗廟籍田之祭, 必須七日戒三日齊, 躬親酌獻, 垂法後世, 如有故, 令世子攝之。

예조 전서(禮曹典書) 이민도(李敏道)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나라를 보유(保有)하는 전례(典禮)는 제사(祭祀)가 큰 것이 되므로, 옛날 사람이 제사지낼 때를 당하면 7일 동안을 재계[戒]하고 3일 동안을 재계[齋]하므로서 천신(天神)이 감동하고 인귀(人鬼)가 흠향하게 되니, 모두 자기로 인하여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제사지낼 때는 조상이 있는 듯이 여기며, 신(神)에게 제사지낼 때는 신이 있는 듯이 여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종묘(宗廟)와 적전(籍田)의 제사에는 반드시 7일 동안을 재계하고, 3일 동안을 재계하여 몸소 친히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시어 뒷세상에 법을 전하고, 만약 유고(有故)하면 세자(世子)로 하여금 이를 섭행(攝行)하게 하소서."


6月 29日[편집]

판중추원사 남은을 시켜 윤호의 빈소에 치전케 하다[편집]

○癸卯/命判中樞院事南誾, 致奠于尹虎之殯。

판중추원사 남은에게 명하여 윤호(尹虎)의 빈소(殯所)에 치전(致奠)하게 하였다.


二年 秋七月[편집]

7月 1日[편집]

일식이 있자 임금이 해질 무렵까지 소복을 입다[편집]

○甲辰朔/日食不見。 初日官啓曰: “當日沒時有食。” 上素服以俟, 日沒乃釋。

일식(日食)이 있어 해가 보이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해가 질 때에 일식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소복(素服)차림으로 해가 지기를 기다리다가, 해가 지고 난 뒤에야 소복을 벗었다.


정사를 볼 때에는 계문한 후 평전에 들어오도록 명하다[편집]

○上謂都承旨李稷曰: “每日聽政時, 大小臣僚輒入報平殿, 甚爲褻慢。 自今令僉節制使, 把門考察, 啓聞乃入。”

임금이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일렀다.

"날마다 정사를 청단(聽斷)할 때에 대소 신료들이 문득 보평전(報平殿)에 들어와서 보고하니, 매우 행동이 거만하고 무례하다. 이제부터는 첨절제사(僉節制使)로 하여금 문을 파수하여 고찰하게 하고, 계문한 후에야 들어오게 하라."


7月 2日[편집]

내시 별감 한계보를 왕사 자초에게 보내 서울로 돌아오도록 청하다[편집]

○乙巳/遣內侍別監韓季輔, 請王師自超曰: “旣爲王師, 不宜在林壑, 可速赴京。”

내시 별감(內侍別監) 한계보(韓季輔)를 보내어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청하였다.

"이미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깊은 산림 속에 있어서는 안 되니 속히 서울에 가시오."


서북면 도순문사 조온에게 의주도의 군적을 고쳐서 정리하도록 명하다[편집]

○命西北面都巡問使趙溫, 改鍊義州道軍籍。

서북면(西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 조온(趙溫)에게 명하여 의주도(義州道)의 군적(軍籍)을 고쳐 마련(磨鍊)하게 하였다.


7月 3日[편집]

윤호를 문하 우시중에 증직하고 정후라는 시호를 내려 예장토록 하다[편집]

○丙午/禮曹上書曰:

卒判三司事尹虎, 性本勤儉, 出將入相, 服勞旣久, 又當殿下受命之初, 協力推戴, 今又受命朝覲, 不以老辭, 殞身旅次。 其贈諡送終之禮, 一依古制。

允之, 命贈門下右侍中, 諡靖厚, 葬以禮。

예조에서 상서(上書)하였다.

"죽은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는 성품이 본디부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 되어 힘드는 일에 종사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또 전하(殿下)께서 천명(天命)을 받던 초기에 협력하여 추대(推戴)하였으며, 지금 또 명령을 받고 중국에 조근(朝覲)하게 되매, 늙은 이유로써 사양하지 않다가 여행 중의 숙소에서 운명(殞命)하였사오니, 그 시호(諡號)를 내려 주고 장사(葬事)를 치르는 예절은 한결같이 옛날의 제도에 의거하게 하소서."

그대로 윤허하여 명해서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을 증직(贈職)하고, 정후(靖厚)란 시호를 내렸으며, 예(禮)로써 후하게 장사하게 하였다.


7月 4日[편집]

급제자에게 은영연을 베풀다[편집]

○丁未/賜新及第恩榮宴。

새로 급제(及第)한 사람에게 은영연(恩榮宴)[36]을 내리었다.


7月 5日[편집]

전 문하 평리 박위를 양광도에 보내 전함을 만들게 하다[편집]

○戊申/遣前門下評理朴葳于楊廣道, 造戰艦。

전 문하 평리(門下評理) 박위(朴葳)를 양광도(楊廣道)에 보내어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였다.


새로 급제한 송개신 등이 전문을 올려 은영연을 사례하다[편집]

○新及第宋介臣等上箋謝賜恩榮宴。

새로 급제한 송개신(宋介臣) 등이 전문(箋文)을 올려 은영연(恩榮宴)을 내린 것에 대하여 사례하였다.


문하 시랑찬성사 정도전을 동북면 도안무사로 삼다[편집]

○以門下侍郞贊成事鄭道傳爲東北面都安撫使。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정도전(鄭道傳)을 동북면(東北面) 도안무사(都安撫使)로 삼았다.


7月 7日[편집]

삼사 우복야 윤사덕을 경사로 보내 말 값을 준 것을 사례하다[편집]

○庚戌/遣三司右僕射尹思德, 代金立堅謝賜馬價。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윤사덕(尹思德)을 보내어 김입견(金立堅)을 대신해서 말 값을 내려 준 것을 사례하게 하였다.


7月 13日[편집]

내사의 출신지인 직산현을 군으로 승격시키다[편집]

○丙辰/陞稷山縣爲郡。 以縣人火者崔淵選入中國, 奉使而來請之也。

직산현(稷山縣)을 승격시켜 군(郡)으로 삼았으니, 현인(縣人) 화자(火者)044) 최연(崔淵)이 선발되어 중국에 들어갔다가, 사신으로 와서 이를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훈련관에서 양반 자제와 성중관에게 병법을 강습하여 능한 사람을 시취토록 하다[편집]

○都評議使司啓曰: “兵法, 當預備鍊習, 臨時應變。 前朝之季, 法令廢弛, 視爲餘事, 中軍軍候所陣圖之法、敎學之名, 皆爲文具。 願自今主掌訓鍊觀, 集兩班子弟及各成衆官, 各領可敎者, 講習兵書陣圖, 其有成才者, 依前降敎旨, 試取擢用, 監察一人, 日至訓鍊觀, 考察勤慢。” 上允之。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병법(兵法)은 마땅히 예비로 연습하였다가 임시 응변(臨時應變)하는 것인데, 고려 왕조의 말기에는 법령이 폐이(廢弛)되어 이를 필요하지 아니한 일로 여겨, 중군 군후소(中軍軍候所)의 진도(陣圖)의 법과 교학(敎學)의 명칭이 모두 문구(文具)[37]가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주장(主掌)하는 훈련관(訓鍊觀)에서 양반 자제(兩班子弟)와 각 성중관(成衆官)[38]들을 모아서 가르칠 만한 사람을 거느려 병서와 진도를 강습하게 하여, 그 중에 재주를 성취한 사람이 있으면 전에 내린 교지에 의거하여 시취(試取)해 탁용(擢用)하도록 하고, 감찰(監察) 한 사람은 날마다 훈련관(訓鍊觀)에 이르러 근만(勤慢)을 고찰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왜구와 싸우다 패전한 지군사 등에게 곤장을 치고, 영선 천호를 처형토록 하다[편집]

○西海道按廉使報: “知軍事金鈞、金勸, 與倭寇戰敗績。” 上曰: “今聞敗績之由, 專是知軍事, 不盡心力戰所致。 當坐軍律, 然予不欲殺人, 姑宥之。 知軍事二人, 各杖一百, 牌頭各杖八十, 以期後日立功, 止誅領船千戶不赴戰者。”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보고하였다.

"지군사(知軍事) 김균(金鈞)·김권(金勸)이 왜구와 싸우다가 패전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지금 패전한 이유를 듣건대, 오로지 이것은 지군사(知軍事)가 마음을 다하여 힘껏 싸우지 않은 데서 그렇게 된 것이니, 마땅히 군율(軍律)에 의거하여 죄를 받아야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아니하니, 잠정적으로 이를 용서할 것이다. 지군사(知軍事) 두 사람은 각기 장(杖) 1백 대를 치고, 패두(牌頭)[39]는 각기 장 80대를 쳐서 뒷날에 공을 세울 것을 약속하고, 다만 영선 천호(領船千戶)로서 싸움에 나가지 않은 사람만 목 베게 하라."


경기도에서 인부를 차출하여 서강에 성을 쌓도록 하다[편집]

○命城西江, 發役徒於京畿左、右道。

명하여 서강(西江)에 성(城)을 쌓게 하였는데, 역도(役徒)를 경기 좌·우도(京畿左右道)에서 내게 하였다.


7月 14日[편집]

예조에서 의학, 율학에 능한 사람을 등용토록 청하니 윤허하다[편집]

○丁巳/禮曹上言: “醫學, 活人之方; 律學, 輔治之具, 誠國家要務。 乞試所業能通者, 以充其職。” 上允之。

예조에서 사뢰었다. "의학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요, 율학은 다스림을 돕는 도구이니 참으로 나라의 중요한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이 일에 능통한 사람을 시험하여 그 직책을 담당하게 하십시오." 임금께서 윤허하셨다.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경우 모친에게 늠록을 주게 하다[편집]

○命都評議使司, 三子登科者, 可依舊制廩其母。

도평의사사에 명하였다.

"세 아들이 과거(科擧)에 오른 사람은 옛날의 제도에 의거하여 그 어머니에게 늠록(廩祿)을 주게 하라."


7月 15日[편집]

일관이 월식을 아뢰다[편집]

○戊午/日官告月食, 陰雲不見。

일관이 월식을 아뢰었는데, 먹구름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7月 19日[편집]

팔각전을 수리하는 화원에 가서, 삼사의 원리에게 과다한 비용을 검사하게 하다[편집]

○壬戌/上微行如花園。 其修八角殿也, 畫工計丹雘之費甚巨, 乃令三司員吏, 親檢其費。 其經營繪飾、裁種花卉、雕琢木石之事, 宦者金師幸悉掌之。

임금이 미행(微行)으로 화원(花園)에 갔으니 팔각전(八角殿)을 수리하기 때문이었다. 화공(畫工)이 빨간 도료(塗料)의 비용을 계산하니 매우 많으므로, 삼사(三司)의 원리(員吏)로 하여금 친히 그 비용을 검사하게 하였다. 그 경영(經營)하고 회식(繪飾)하는 것과 화초(花草)를 심고 나무와 돌을 다듬는 일은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이 모두 관장해 했던 것이었다.


회암사에 역질이 돌자 왕사 자초를 광명사에 거처하게 하다[편집]

○王師自超至, 使居廣明寺。 初自超在檜巖寺, 至今年春, 檜巖始疫。 自超來赴演福文殊會, 會罷不歸檜巖, 而往居谷州佛國莊。 夏, 檜巖大疫, 僧徒多死。 至是, 邀置廣明寺, 城中男女歸請論法者, 日以百數。

왕사(王師) 자초(自超)가 이르니 광명사(廣明寺)에 거처하게 하였다. 처음에 자초가 회암사(檜巖寺)에 있었는데, 금년 봄에 이르러 회암사에서 역질(疫疾)이 발생했으므로, 자초가 연복사(演福寺)의 문수 법회(文殊法會)에 왔다가 법회가 파하고 난 뒤에 회암사로 돌아가지 않고 곡주(谷州)의 불국장(佛國莊)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여름에 회암사에서 역질(疫疾)이 크게 성하니 중들이 많이 죽었다. 이때에 와서 자초를 맞이하여 광명사에 있게 한 것인데, 성중(城中)의 남녀들이 법을 강설하기를 청하는 사람이 날마다 백 명이나 되었다.


화원에서 흠차 내사에게 잔치를 베풀다[편집]

○如花園, 宴欽差內史。

임금이 화원(花園)에 가서 흠차 내사(欽差內史)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7月 22日[편집]

우박이 내리다[편집]

○乙丑/雨雹。

우박이 내렸다.


개국에 공이 있었던 판문하부사 홍영통 등 127인에게 포상토록 교지를 내리다[편집]

○敎曰: “判門下府事洪永通、領三司事安宗源等一百二十七人, 自辛禑竊位亂極思治之際而安危皆注意於予, 諭德宣譽, 馴致今日, 功亦不細矣。 其褒賞之典, 有司擧行。”

교지를 내리었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홍영통(洪永通)과 영삼사사(領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 1백 27인은, 신우(辛禑)가 왕위를 도적질하여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백성들이 다스려진 정치를 생각하는 시기로부터 세상의 안위(安危)를 모두 나에게 뜻을 두어, 도덕을 가르쳐 깨우치고 좋은 평판을 선포하여 오늘날이 있게 하였으니, 그 공이 또한 작지 않다. 그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


회군 공신을 책록토록 교지를 내리다[편집]

○敎曰: “前朝之季, 僞主辛禑, 頑凶狂悖, 乃與其臣崔瑩, 謀犯遼陽, 督責諸將, 將渡鴨綠江。 時予爲右軍都統使, 諭諸將以爲: “以小國犯天子之境, 於義不順, 況得罪天朝, 則東方之民, 殆無類矣。” 諸將實能明曉逆順。 當時師若渡江, 東民安得按堵至今? 惟爾諸將, 聽寡人之言, 仗義還師, 以安東方, 肆予寡躬, 得有今日。 若論其功, 宜在旌賞。 靑城伯沈德符、義安伯和、判開城府事柳蔓殊、門下侍郞贊成事崔永沚、參贊門下府事李之蘭等十三人, 可爲一等功臣; 前判慈惠府事慶補、參贊門下府事慶儀、三司右僕射尹思德、商議門下府事鄭曜、同知中樞院事朴永忠等十五人, 亦知大義, 參謀與議, 可爲二等功臣; 前判慈惠府事崔鄲、前雞林府尹王賓、前密直副使金天莊、前開城尹南成理、前漢陽尹李至、工曹典書張子忠、僉節制使崔允壽、前晋州牧使黃順常等十人, 亦識利害, 從順無違, 可爲三等功臣。 中樞院學士南在、兵曹典書尹紹宗等, 雖不與行師, 其於還京, 社稷大計擬議之際, 援古贊計, 可爲三等功臣崔鄲之例; 卒侍中曹敏修ㆍ裵克廉、判三司事尹虎等, 一等功臣沈德符之例; 卒檢校侍中邊安烈、判三司事王安德ㆍ池湧奇、三司左使趙仁壁、完山君元桂、門下評理鄭地、忠州節制使崔公哲等九人, 二等功臣慶補之例; 卒判慈惠府事安慶、晋州牧使金賞、開城尹李伯等, 三等功臣崔鄲之例, 褒賞之典, 有司擧行。”

교지를 내리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위주(僞主) 신우(辛禑)가 완흉(頑凶)하고 광패(狂悖)하여, 그 신하 최영(崔瑩)과 더불어 요양(遼陽)을 범하기를 꾀하고 여러 장수들을 독촉하여 장차 압록강을 건너려고 했는데, 그때 내가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여러 장수들을 타일러 말하기를, ‘소국(小國)이 천자(天子)의 국경을 범하게 되니 의(義)에도 불순(不順)한데, 하물며 천조(天朝)에 득죄(得罪)하게 되면 동방의 백성들은 거의 종류도 없을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실로 역리(逆理)와 순리(順理)의 구별을 밝게 이해하였다. 그 당시에 군사가 만약 압록강을 건넜더라면 동방의 백성들이 어찌 편안하게 살아서 지금까지 이르겠는가? 다만 여러 장수들이 과인(寡人)의 말을 듣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동방을 편안하게 했으니, 그 까닭으로 과인(寡人)이 오늘날이 있게 되었다. 만약 그 공을 논한다면 마땅히 공적을 표창해야 될 것이다.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만수(柳蔓殊)·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최영지(崔永沚)·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 등 13인은 1등 공신이 될 만하고, 전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경보(慶補)·참찬 문하부사 경의(慶儀)·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윤사덕(尹思德)·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정요(鄭曜)·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박영충(朴永忠) 등 15인도 또한 대의(大義)를 알고 참모(參謀)하여 의논에 참여하였으니, 이등 공신이 될 만하며, 전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최단(崔鄲)·전 계림 부윤(鷄林府尹) 왕빈(王賓)·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김천장(金天莊)·전 개성 윤(開城尹) 남성리(南成理)·전 한양 윤(漢陽尹) 이지(李至)·공조 전서(工曹典書) 장자충(張子忠)·첨절제사(僉節制使) 최윤수(崔允壽)·전 진주 목사(晉州牧使) 황순상(黃順常) 등 10인도 또한 이해(利害)를 알아서 순리(順理)에 따르고 도리에 어김이 없었으니, 삼등 공신이 될 만하며,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남재(南在)·병조 전서(兵曹典書) 윤소종(尹紹宗) 등은 비록 행군(行軍)하는 데는 참여하지 않았지마는, 서울에 돌아와서 사직(社禝)의 대계(大計)를 헤아려 의논할 즈음에는 예전 일을 인용하여 계책을 도왔으니, 삼등 공신 최단(崔鄲)의 예(例)가 될 만하며, 죽은 시중(侍中) 조민수(曹敏修)·배극렴(裵克廉),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 등은 일등 공신 심덕부(沈德符)의 예(例)가 될 만하며, 죽은 검교 시중(檢校侍中) 변안열(邊安烈)과 판삼사사(判三司事) 왕안덕(王安德)·지용기(池湧奇),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인벽(趙仁璧)·완산군(完山君) 이원계(李元桂)·문하 평리(門下評理) 정지(鄭地)·충주 절제사(忠州節制使) 최공철(崔公哲) 등 9인은 이등 공신 경보(慶補)의 예(例)가 될 만하며, 죽은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안경(安慶)·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상(金賞)·개성 윤(開城尹) 이백(李伯) 등은 삼등 공신 최단(崔鄲)의 예(例)가 될 만하니,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


7月 23日[편집]

경비의 기일이므로 조회를 정지하고, 광명사에서 중 5백명을 공양하다[편집]

○丙寅/以皇祖妣敬妃(忌晨)〔忌辰〕, 停朝, 飯僧五百于廣明寺。

황조비(皇祖妣) 경비(敬妃)의 기신(忌辰)이므로 조회를 정지하고, 중 5백 명을 광명사(廣明寺)에서 공양(供養)하였다.


7月 24日[편집]

도왕의 기일이므로 조회를 정지하다[편집]

○丁卯/皇祖度王(忌晨)〔忌辰〕, 亦如之。

황조(皇祖) 도왕(度王)[40]의 기신이므로 또한 전날과 같이 하였다.


7月 26日[편집]

정도전이 몽금척·수보록·납씨곡·궁수분곡·정동방곡 등의 악장을 지어 바치다[편집]

○己巳/門下侍郞贊成事鄭道傳上箋曰:

臣觀歷代以來, 受命之君, 凡有功德, 必形之樂歌, 以焜燿當時, 而垂示後來, 故曰一代之興, 必有一代之制作。 恭惟主上殿下, 神武資其略, 勇智錫於天, 深仁厚德, 結於民心者, 已久矣, 則受命必出於生人之望, 所以不崇朝而正大義。 然祥鳳之於衆禽, 靈芝之於凡草, 其生必異。 當聖人之作, 靈異之瑞, 所應先感, 亦理之必然者也。 如武王伐紂曰: “朕夢協朕卜, 襲于休祥。” 光武赤伏符之類, 載諸典冊, 不可誣也。 我主上殿下, 在潛邸, 夢神人以金尺授之, 若曰: “以此均齊家國。” 又有人得異書以獻之曰: “秘之勿妄示人。” 後十數年, 其言果驗, 是皆天以今日之事, 預告之也。 殿下以寬弘之量, 容受衆言, 凡閭巷之間, 微細之民, 一有不得其所者, 必知之, 知之, 必加優恤, 猶恐人之不言, 開言路也廣矣; 待功臣以誠, 賜以信書, 刊諸金石, 保功臣也至矣。 前朝之季, 政廢法壞, 經界不正, 民受其害, 禮樂不興, 官失其守, 殿下一皆正而定之。 以天道則如彼, 以人道則如此, 較功度德, 無與爲比。 是宜播之聲詩, 被之絃歌, 傳之罔極, 俾聞者知聖德之萬一焉。 臣雖不敏, 遭遇盛代, 得與開國功臣之末, 幸以文筆兼太史之職, 不勝感激踊躍之至, 謹記受命之瑞、爲政之美, 撰樂詞三篇繕寫, 隨箋以獻。 一, 《夢金尺》。 主上殿下在潛邸, 夢見神人, 奉金尺自天而來, 若曰: “慶侍中有淸德, 且髦矣, 崔三司有直名, 然戇也。” 謂殿下資兼文武, 有德有識, 民望屬焉, 乃以金尺授之。 “惟皇鑑之孔明兮, 吉夢協于金尺。 淸者耄矣兮直其戇, 繄有德焉是適。 帝用度吾心兮, 俾均齊于家國。 貞哉厥符兮受命之祥, 傳子及孫兮彌于千億。” 一, 《受寶籙》。 主上殿下在潛邸, 有人得異書於智異山石壁中以獻, 後至壬申歲, 其言乃驗, 作《受寶籙》。 “彼高矣山, 石與山齊。 于以得之, 實維異書。 桓桓木子, 乘時而作。 誰其輔之? 走肖其德。 非衣君子, 來自金城。 三奠三邑, 贊而成之。 奠于神都, 傳祚八百。 我龍受之, 曰維寶籙。” 一, 殿下初卽位, 立經陳紀, 與民更始, 可頌者多矣。 擧其大者, (作)開言路, 保功臣, 正經界, 定禮樂。 “法宮有嚴深九重, 一日萬機紛其叢。 君王要得民情通, 大開言路達四聰。 開言路臣所見, 我后之德與舜同。 聖人受命乘飛龍, 多士競起如雲從。 騁謀効力咸厥功, 誓以山河保始終。 保功臣臣所見, 我后之德垂無窮。 經界毁矣久不修, 强幷弱削相炰烋。 我后正之期甫周, 倉廩充富民息休。 正經界臣所見, 烝哉樂愷享千秋。 爲政之要在禮樂, 近自閨門達邦國。 我后定之垂典則, 秩然以序和以懌。 定禮樂臣所見, 功成治定配無極。”

上賜道傳綵帛, 令樂工肄習。 道傳又敍其武功, 作樂詞以獻。

一, 《納氏曲》。 納氏恃雄强, 入寇東北方。 縱傲誇以力, 鋒銳不敢當。 我鼓倍勇氣, 挺身衝心胸。 一射斃偏裨, 再射及魁戎。 裹槍不暇救, 追奔星火馳。 風聲固可畏, 鶴唳亦堪疑。 喙矣莫敢動, 東北永無虞。 功成在此擧, 垂之千萬秋。【右言其逐納氏之功。】一, 《窮獸奔曲》。 有窮者獸, 奔于險巇。 我師覆之, 左右離披。 或殲或獲, 或走或匿。 死者粉糜, 生者褫魄。 不崇一朝, 廓爾淸明。 奏凱以旋, 東民以寧。【右言其敗倭寇之功。】一, 《靖東方曲》。 繄東方阻海陲, 彼狡童竊天機。 肆狂謀興戎師, 禍之極靖者誰? 天相德回義旗, 罪其黜逆其夷。 皇乃懌覃天施, 軍以國俾我知。 於民社有攸歸, 千萬世傳無期。【右言其回軍之功。】

문하 시랑찬성사 정도전이 전문(箋文)을 올리었다.

"신(臣)이 보건대, 역대(歷代) 이래로 천명(天命)을 받은 인군은 무릇 공덕(功德)이 있으면 반드시 악장(樂章)에 나타내어 당시(當時)를 빛나게 하고, 장래(將來)에 전하여 보이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한 시대가 일어나면 반드시 한 시대의 제작(制作)이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뛰어난 무용(武勇)은 그 계략을 도우셨고, 용기(勇氣)와 지혜는 하늘에서 주신 것이므로, 깊고 후한 인덕(仁德)이 민심(民心)에 결합(結合)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면, 천명(天命)을 받은 것은 반드시 인민들의 기대에서 나왔을 것이니 아침이 되기 전에 대의(大義)를 바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상서로운 봉(鳳)이 뭇 새들보다, 신령스런 지초(芝草)가 보통 풀보다 그 남[生]이 반드시 다르게 되니, 성인(聖人)이 일어날 적에 영이(靈異)한 상서(祥瑞)가 먼저 감응(感應)하게 되는 것은 또한 이치의 필연적인 것입니다.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때에 ‘짐(朕)의 꿈이 짐(朕)의 점[卜]과 합하여 좋은 상서(祥瑞)에 합치되었다.’고 한 말과, 광무제(光武帝)의 적복부(赤伏符)[41]와 같은 종류가 전책(典冊)에 기재된 것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국가를 정제(整齊)하십시오.’라 한 것과, 또 어떤 사람이 이상한 글을 얻어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숨기고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마십시오.’라고 한 것이 그 후 10여 년 만에 그 말이 과연 맞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하늘이 오늘날의 일을 미리 알려 준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넓으신 도량으로 여러 사람의 말을 용납해 받아들여서, 무릇 여항(閭巷) 사이의 미세(微細)한 백성들로서 그 안정된 처소를 얻지 못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이를 알게 되고, 이를 알게 되면 반드시 후하게 구휼(救恤)하여, 오히려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까 염려했으니, 언로(言路)를 열어 놓음이 넓었으며, 공신(功臣)을 대우하되 지성으로써 하여, 신서(信書)를 내려 주시고 금석(金石)에 새겼으니, 공신을 보전하심도 지극하였습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정치가 퇴폐(頹廢)하고 법도가 무너져서, 토지 제도[經界]가 바르지 못하여 백성이 그 해를 받게 되고,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않아서 관원이 그 직책을 잃게 되었는데, 전하께서 일체 모두 바로잡아 정하였으므로, 천도(天道)로써는 저와 같았고 인도(人道)로써는 이와 같았으니, 공을 비교하고 덕을 헤아려 보매 더불어 비할 데가 없습니다. 이것을 마땅히 성시(聲詩)로써 전파하고 현가(絃歌)에 올려서 한없는 세상에 전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게 해야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민(不敏)하나 성대(盛代)를 만나서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말석(末席)에 참여하고, 다행히 문필(文筆)로써 태사(太史)의 직책을 겸무하게 되었으니, 감격하여 뛰고 싶은 마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삼가 천명(天命)을 받은 상서(祥瑞)와 정치를 보살핀 아름다운 점을 기록하여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이를 써서 전문(箋文)에 따라 바치옵니다.

1. 몽금척(夢金尺). 주상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받들고 하늘에서 왔는데, ‘경 시중(慶侍中)[42]은 깨끗한 덕행은 있으나 또한 늙었으며, 최 삼사(崔三司)[43]는 강직한 명성은 있으나 고지식하다.’ 하고는, ‘전하(殿下)는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비했으며 덕망도 있고 식견도 있으니, 백성의 희망이 붙게 되었다.’ 하면서, 이에 금자를 주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살피심이 심히 밝으셔서, 길몽(吉夢)이 금자에 맞으셨습니다. 깨끗한 사람은 늙었고 강직한 사람은 고지식하니,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이것이 적합하였습니다. 상제(上帝)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서 국가를 정제(整齊)하게 했으니, 꼭 맞은 그 증험은 천명(天命)을 받은 상서(祥瑞)입니다. 아들에게 전하여 손자에게 미치니, 천억년(千億年)까지 길이 미치겠습니다.

1. 수보록(受寶籙). 주상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智異山) 석벽(石壁)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뒤에 임신년[44]에 이르러, 그말이 그제야 맞게 되었으므로, 수보록(受寶籙)을 지었습니다. 저 높은 산에는 돌이 산과 가지런했는데, 여기서 이를 얻었으니 실로 이상한 글이었습니다. 용감한 목자(木子)[45]가 기회를 타서 일어났는데, 누가 그를 보좌하겠는가? 주초(走肖)[46]가 그 덕망 있는 사람이며, 비의(非衣)[47] 군자(君子)는 금성(金城)에서 왔으며, 삼전삼읍(三奠三邑)[48] 이 도와서 이루었으며, 신도(神都)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王位)를 8백 년이나 전한다.’는 것을 우리 임금께서 받았으니, 보록(寶籙)이라 하였습니다.

1. 전하께서 처음 왕위에 오르시매, 상법(常法)을 만들고 기강(紀綱)을 베풀어 백성들과 더불어 혁신(革新)하게 되니 칭송할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 큰 것을 들어 말한다면, 언로(言路)를 열고 공신(功臣)을 보전하고,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예악(禮樂)을 정하였습니다. 궁궐은 엄하여 아홉 겹이나 깊었으며, 만기(萬機)[49]는 하루 동안에도 매우 번잡하온데, 군왕께서는 민정(民情)을 통하게끔 하여, 크게 언로(言路)를 열어 사방의 시청(視聽)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언로(言路)를 열어 놓은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우리 임금의 덕은 순제(舜帝)와 같습니다. 성인(聖人)이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많은 선비가 다투어 일어나서 구름처럼 따랐습니다. 계책을 부리고 힘을 써서 그 공을 함께 이루었으니, 산하(山河)로써 맹세하여 시종(始終)을 보전했습니다. 공신(功臣)을 보전한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우리 임금의 덕은 무궁한 세대(世代)에까지 전하겠습니다. 토지제도가 무너졌는데 오래도록 정리하지 않으니, 강한 사람은 합치고 약한 사람은 줄어들어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를 바로잡은 지 겨우 1주년에 국가의 창고는 꽉차고 백성은 휴식하게 되었습니다. 토지 제도를 바룬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임금께서 즐거워하여 천 년까지 누리겠습니다. 정치하는 요령은 예악(禮樂)에 있으니 가까이는 규문(閨門)에서부터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를 정하여 법칙을 전하였으니, 질서 정연하게 차례대로 되고 화락(和樂)으로써 기쁘게 되었습니다. 예악(禮樂)을 정한 것은 신의 본 바이오니,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어 천지(天地)에 필적(匹敵)하겠습니다."

임금이 정도전(鄭道傳)에게 채색 비단을 내려 주고는,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이를 익히게 하였다. 도전이 또 그 무공(武功)을 서술하여 악사(樂詞)를 지어 바치었다.

"1. 납씨곡(納氏曲). 납씨(納氏)[50]가 세력이 강함을 믿고 동북방(東北方)에 쳐들어왔습니다. 방종하고 오만하여 힘으로써 자랑하니, 그 기세의 강함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북을 치매 용기가 배나 나는데, 앞장서서 적의 심장부에 부딪쳤습니다. 한 번 쏘아서 편비(褊裨)를 죽였으며, 두 번 쏘아서 괴수에게 미쳤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미처 구원하지 못하는데 적군을 추격하여 성화(星火)처럼 달려갔습니다. 바람소리는 진실로 두렵지만, 학(鶴)의 울음도 또한 의심할 만했습니다. 피로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니 동북방이 영구히 걱정이 없었습니다. 공을 이룸이 이번 거사(擧事)에 있었으니 이를 천만년(千萬年)에 전하겠습니다. 【위는 납씨(納氏)를 쫓은 공을 말한 것임.】

1. 궁수분곡(窮獸奔曲). 곤궁한 짐승이 위험한 곳으로 달아나는데, 우리 군사가 이를 덮치니, 좌우에서 활짝 갈라졌습니다. 혹은 죽이고 혹은 잡았으며, 혹은 달아나고 혹은 숨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부스러져 가루가 되고, 산 사람은 넋을 빼앗겼습니다. 하루 아침도 지나지 않았는데, 난을 평정하여 청명(淸明)하여졌습니다. 개가(凱歌)를 부르면서 돌아왔으니, 동방의 백성이 편안하여졌습니다. 【위는 왜구(倭寇)를 물리친 공을 말한 것임.】

1. 정동방곡(靖東方曲). 아아! 동방은 바다 모퉁이에 막혔는데, 저 교동(狡童)[51]이 임금의 자리를 도적질했습니다. 미친 계획을 자행(恣行)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니 화(禍)가 극도에 달했는데, 평정할 사람은 누구인가? 하늘이 덕망 있는 사람을 도와 의기(義旗)를 돌이켜서, 죄 있는 자는 내쫓고 반역한 자는 죽였습니다. 황제가 이에 기뻐하여 은혜를 미치게 하여, 군사가 나라로써 우리에게 알게 하였습니다. 백성과 사직(社稷)이 돌아가는 데가 있으니 천만세(千萬世)까지 기한없이 전하겠습니다. 【위는 그 군사를 돌이킨 공을 말한 것임.】"


7月 27日[편집]

창업에 공이 있는 우인열·김사행·윤상·권중화 등에게 포상토록 교지를 내리다[편집]

○庚午/敎曰: “紀功行賞, 固有令典。 矧當創始之初, 是宜先擧其功。 判開城府事禹仁烈器宇雍容而有先見。 自予出將入相之日, 乃以舊識, 注意寡躬, 捍衛之功, 誠有焉。 判內侍府事金師幸於踐祚之初, 壼則粗立而未備, 歷擧前朝盛時之宮儀, 損過益不及而飾內助之治, 功可錄也。 同判內侍府事尹祥ㆍ李匡、知內侍府事安居等雖未及此, 補助之益, 蓋多有之, 亦可錄也。 三司左僕射權仲和、前門下贊成事成石璘等八人, 自辛氏竊位, 亂極思治之際, 安危皆注意於予。 其褒賞之典, 有司擧行。”

교지를 내리었다.

"공(功)을 기록하고 상(賞)을 주는 것은 진실로 영전(令典)이 있으니, 하물며 창업(創業)의 초기에 있어서는 마땅히 그 공을 거론(擧論)해야 될 것이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우인열(禹仁烈)은 타고난 기품(氣品)이 온화(溫和)하고, 앞을 내다보는 밝은 지혜가 있었는데, 내가 출장입상(出將入相)하던 때부터 구지(舊知)로서 과궁(寡躬)에게 뜻을 두고 방위(防衛)한 공이 진실로 있었으며,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은 내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궐내(闕內)의 제도가 대강 마련되고 갖추어지지 못했는데, 전조(前朝) 성시(成時)의 궁중 의식을 일일이 들어 지나친 것은 줄이고 모자란 것은 보태어서 내조(內助)의 다스림을 장식했으니, 공을 기록할 만하며, 동판내시부사(同判內侍府事) 윤상(尹祥)·이광(李匡)과 지내시부사(知內侍府事) 안거(安居) 등은 비록 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보조(補助)의 이익은 많이 있었으니 또한 공을 기록할 만하며,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권중화(權仲和)·전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성석린(成石璘) 등 8인은 신씨(辛氏)[52]가 왕위를 도적질하여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던 때부터 세상의 안위(安危)를 모두 나에게 뜻을 두었으니, 그들을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


7月 28日[편집]

화원에 가다[편집]

○辛未/如花園。

임금이 화원(花園)에 갔다.


요동 도사가 황제의 명령으로 조선 사신을 출입하지 못하게 하다[편집]

○賀聖節使金立堅、從行通事郭海龍來告: “立堅至白塔, 遼東都司不納曰: ‘帝詔自今高麗人不許過來。’”

하성절사(賀聖節使) 김입견(金立堅)을 따라갔던 통사(通事) 곽해룡(郭海龍)이 와서 아뢰었다.

"입견(立堅)이 백탑(白塔)에 이르니,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황제의 명령이 지금부터 고려 사람은 통과해 오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였습니다."


서강에 성을 쌓는 것을 중지하다[편집]

○罷西江築城之役。

서강(西江)에 성을 쌓는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였다.


7月 29日[편집]

양부의 기로들이 명나라의 조선 사신 출입 통제 조처에 대해 논의하다[편집]

○壬申/兩府耆老會議。 以海龍來告事。

양부(兩府)의 기로(耆老)들이 곽해룡(郭海龍)이 와서 아뢴 일을 가지고 모여서 의논하였다.


강인유 등 71인과 일관 유방택 등 11인을 원종 공신으로 포상토록 교지를 내리다[편집]

○敎曰: “前判三司事姜仁裕、前判開城府事韓蕆等七十一人, 自辛氏竊位, 亂極思治之際, 而安危皆注意於予, 諭德宣譽, 馴致今日, 功亦不細矣。 檢校密直副使柳方澤、盧乙俊等十一人, 方卽位之時, 俱在日官, 心不疑貳, 謹卜天時, 勸登大位, 其功亦可尙也。 其褒賞之典, 有司擧行。”

교지를 내리었다.

"전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인유(姜仁裕)·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한천(韓蕆) 등 71인은 신씨(辛氏)가 왕위를 도적질하여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던 때부터 세상의 안위(安危)를 모두 나에게 뜻을 두고서, 도덕을 가르쳐서 깨우치고 좋은 평판을 선포하여 오늘날이 있게 하였으니, 공이 또한 작지 않았으며, 검교 밀직 부사(檢校密直副使) 유방택(柳方澤)·노을준(盧乙俊) 등 11인은 내가 막 즉위(卽位)하던 때에 모두 일관(日官)으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아니하고 천시(天時)를 삼가 점쳐서 대위(大位)에 오르기를 권고했으니, 그 공이 또한 높일 만하다. 그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


강천수 등 595인을 원종 공신으로 포상토록 교지를 내리다[편집]

○敎曰: “前典書姜天守、李天祐等五百九十五人, 於予出將入相三十餘年, 許身以死, 備嘗艱險, 捍衛寡躬, 式至今日休。 當擧義之日, 雖不得與焉, 前功安敢略乎? 有司擧行賞典。”

교지를 내리었다.

"전 전서(典書) 강천수(姜天守)·이천우(李天祐) 등 5백 95인은 내가 출장입상(出將入相)한 지 30여 년 동안에, 죽음으로써 몸을 바치기로 하여 어려운 고비를 갖추 겪으면서 내 몸을 방위(防衛)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하였으니, 대의(大義)를 거행하는 날에는 비록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그전의 공을 어찌 감히 뺄 수가 있겠는가? 유사(有司)는 상전(賞典)을 거행하라."


二年 八月[편집]

8月 1日[편집]

개성 윤 이무를 경상도에, 중추원 부사 이의를 전라도에 보내 군사를 점고케 하다[편집]

○甲戌朔/遣開城尹李茂于慶尙道, 中樞院副使李薿於全羅道, 點兵。

개성 윤(開城尹) 이무(李茂)를 경상도에 보내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이의(李薿)를 전라도에 보내어 군사를 점검(點檢)하게 하였다.


6도의 백성을 동원하고 옛 터의 반을 줄여 경성을 쌓게 하다[편집]

○發京畿、楊廣、西海、交州、江陵六道之民, 築京城。 以舊基廣難修, 約其半。

경기도·양광도·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강릉도(江陵道) 6도(道)의 백성을 동원하여 경성(京城)을 쌓게 했는데, 옛터[舊基]가 넓어 수리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그 반을 줄이게 하였다.


8月 2日[편집]

병조 전서 윤소종이 병으로 사직코자 하다[편집]

○乙亥/兵曹典書尹紹宗以病乞免。

병조 전서(兵曹典書) 윤소종(尹紹宗)이 병으로 인하여 면직(免職)을 원하였다.


정도전 대신 이지란을 동북면 도안무사로 삼다[편집]

○以李之蘭, 代鄭道傳, 爲東北面都安撫使。

이지란(李之蘭)으로 정도전을 대신하여 동북면 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로 삼았다.


사은사 등이 요동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오다[편집]

○賀聖節使金立堅、謝恩使尹思德等至遼東, 不得入而還。

하성절사(賀聖節使) 김입견(金立堅)과 사은사(謝恩使) 윤사덕(尹思德) 등이 요동(遼東)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간관 안경검 등이 경성을 옛 터대로 쌓기를 청했으나, 윤허치 않다[편집]

○諫官安景儉等上書請依京城舊基築之, 不允。

간관(諫官) 안경검(安景儉)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청하옵건대, 경성(京城)은 옛터에 의거하여 쌓게 하소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신의 중국 입국을 청하는 표문과 여진인 4백여 명을 경사로 보내다[편집]

○欽差黃永奇、崔淵等還京師, 上送于西郊。 遣中樞院副使李至, 齎請通朝路表, 幷押領女眞男女四百餘口赴京。 其表曰:

陪臣知門下府事金立堅等到遼東, 蒙都司稱有聖旨, “朝鮮進表進獻一應使臣, 不許將過來”, 欽此回還。 臣與國人, 不勝隕越, 仰陳鄙抱者。 以小事大, 當修聘獻之儀; 居高聽卑, 庸切籲呼之懇。 惟高麗邈處要荒之地, 不知禮義之方。 辛禑構釁於攻遼, 王瑤踵謀於猾夏, 而臣擧逆順之義, 除禍亂之萌。 聖鑑孔昭, 卑忱是察, 俾權軍國之務, 許襲朝鮮之名。 爰自受命以還, 益謹爲藩之禮, 忽承有嚴之譴責, 實惟罔措以兢惶。 伏望皇帝陛下以乾坤生物之心爲心, 以父母愛子之念爲念, 擴包容之量, 通往來之途, 則臣謹當職貢無怠於歲時, 皇靈永祝於悠久。

황제가 보낸 황영기(黃永奇)·최연(崔淵) 등이 중국 서울로 돌아가니, 임금이 서교(西郊)에서 전송하였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이지(李至)를 보내어 조회할 길을 통해 줄 것을 청하는 표문(表文)과 여진(女眞) 남녀 4백여 명을 아울러 압령(押領)하여 가지고 중국 서울로 가게 하였다.

"배신(陪臣)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김입견(金立堅) 등이 요동(遼東)에 이르렀는데,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성지(聖旨)가 있다고 하면서, ‘조선(朝鮮)에서 바친 표문(表文)과 진헌(進獻)한 일체(一體)와, 사신(使臣)을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 하여, 이들이 돌아왔으므로, 신(臣)은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원하는 마음이 절실한 것을 이기지 못하여, 저의 마음속에 품은 바를 우러러 진술하게 됩니다.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섬기는 데는 마땅히 조빙(朝聘)과 공헌(貢獻)의 예의(禮儀)를 차려야 될 것인데, 높은 곳에 있으면서 낮은 말을 들으시니 항상 호소(呼訴)하는 정성이 간절합니다. 다만 고려는 멀리 황복(荒服)061) 의 땅에 있어 예의(禮儀)의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신우(辛禑)는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에 흔단(釁端)을 일으키고, 왕요(王瑤)062) 는 중국을 침공(侵攻)하는 일에 계획을 계속하였사온데, 신(臣)이 역리(逆理)와 순리(順理)의 구별을 들어 말하여 화란(禍亂)의 발단(發端)을 제거하였습니다. 황제의 살피심이 매우 밝으시어, 낮은 정성을 살피셔서 신으로 하여금 군국(軍國)의 사무를 임시로 맡게 하시고, 조선(朝鮮)이란 국명(國名)을 물려받게 하시니, 명령을 받아 돌아온 이후로는 더욱 제후(諸侯)가 된 예의(禮儀)를 삼가했사온데, 문득 엄격하신 견책(譴責)을 받게 되오니 실로 몸둘 바를 몰라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천지(天地)가 만물을 살리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가지시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생각으로써 생각을 가지시와, 포용(包容)하는 도량을 넓히시어 왕래하는 길을 통하게 하신다면, 신은 삼가 마땅히 직공(職貢)을 세시(歲時)마다 게을리 함이 없게 하고, 천자의 신령(神靈)은 유구(悠久)한 세월까지 길이 축원하겠습니다."


조임 등이 말 값을 받아 가지고 요동에서 돌아오다[편집]

○趙琳等齎馬價, 來自遼東。

조임(趙琳) 등이 말 값을 받아 가지고 요동(遼東)으로부터 돌아왔다.


8月 5日[편집]

도성의 공사를 시작하다[편집]

○戊寅/始都城役。

도성(都城)의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8月 6日[편집]

목성이 우림성의 자리로 들어가다[편집]

○己卯/木星入羽林。

목성(木星)이 우림성(羽林星)의 분야(分野)로 들어갔다.


남산에 올라 성터를 보고, 예조 전서 이민도와 성의 축조 상황에 대해 말하다[편집]

○上微行, 登男山, 觀城基, 入花園。 禮曹典書李敏道言於上曰: “臣恐築城未易畢也。” 上曰: “何故?” 對曰: “員吏怠於董役, 役夫惰於趨事, 徒費民力, 而役事無效。 臣以爲堅氷將至, 功未訖也。” 上以爲直, 賜敏道衣一領、米豆三十石。

임금이 미행(微行)하여 남산(男山)에 올라 성터[城基]를 시찰하고 화원(花園)에 들어가니, 예조 전서(禮曹典書) 이민도(李敏道)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은 성 쌓는 일이 쉽게 마칠 수 없음을 염려합니다."

"무슨 이유인가?"

"원리(員吏)들은 역사를 감독하는 데 게을리 하고, 역부(役夫)들은 일을 하는 데 게으르니, 한갓 민력(民力)만 허비할 뿐이고 역사(役事)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신은 생각하옵기를, 얼음이 얼 절후가 장차 이르게 될 것이니 일은 마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임금이 정직하다고 여겨 민도(敏道)에게 의복 한 벌과 쌀·콩 30석을 내려 주었다.


8月 7日[편집]

감찰에게 성을 쌓는 원리들의 근태를 검열케 하다[편집]

○庚辰/上令左副承旨崔迤, 往閱築城員吏勤怠。 自是以後, 日令司憲監察巡檢。

임금이 좌부승지(左副承旨) 최이(崔迤)로 하여금 가서 성을 쌓는 원리(員吏)들의 부지런하고 태만한 것을 검열(檢閱)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날마다 사헌 감찰(司憲監察)로 하여금 순검(巡檢)하게 하였다.


8月 8日[편집]

성 쌓는 감독을 소홀히 한 14인을 순군옥에 내리고, 장군 전오를 강화 수군에 충군시키다[편집]

○辛巳/下築城員吏怠於董役者十四人于巡軍獄, 尋釋之, 唯將軍全吾, 充江華水軍。

성을 쌓는 원리(員吏)로서 역사(役事)의 감독에 태만한 사람 14인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이들을 석방하고, 오직 장군(將軍) 전오(全吾)만을 강화 수군(江華水軍)에 충군(充軍)시키었다.


8月 10日[편집]

왕강을 회군 공신의 예로, 송문중 등을 원종 공신의 예로 포상토록 교지를 내리다[편집]

○癸未/敎曰: “敷奏以言, 明試以功, 而報其庸者, 古之道也。 前同知密直司事王康, 學識穎悟, 規模有餘; 發言如流, 事無不逮, 咸稱能焉。 予以是試於漕運, 事之修擧, 如其所言。 前朝四十載不通漕運之路, 乃能開之, 以贍國用; 三道四十年疲勞陸轉之苦, 乃能除之, 以蘇民生。 其功旣著, 人誰謗之? 予嘉不忘也。 又當創始之初, 聲樂未諧, 且試之習樂提調, 乃能叶比聲律, 洗盡前朝哀思之音, 形容一代惟新之治。 其功亦豈少哉? 載諸賞典宜矣, 可依戊辰年回軍功臣南在之例。 判校書監事宋文中、大將軍趙卿, 自予在潛邸時, 久勞於予, 安危注意, 艱難不避, 以至今日。 可依原從功臣李沃之例, 褒賞之典, 有司擧行。”

교지를 내리었다.

"말로써 사정을 진술하게 하고 공(功)으로써 밝게 시험하여 그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옛날의 방법이다. 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왕강(王康)은 학식이 매우 뛰어나고 규모(規模)는 여유가 있어, 말하는 것은 물이 흐르듯이 하고 일은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잘한다고 일컬었다. 내가 이 사람을 조운(漕運)에 시험해 보니, 일의 정리 거행된 것이 그 말한 바와 같게 되어, 고려 왕조 40년 동안 통하지 않던 조운(漕運)의 길이 이제야 능히 개통되어 국가의 용도(用途)가 유족(裕足)하게 되고, 3도(道)의 40년 동안 육로 운반[陸轉]에 피로한 고통이 이제야 능히 제거되어 백성을 소생(蘇生)하게 하여, 그 공이 이미 나타났으니, 사람들이 누가 그를 훼방하겠는가? 내가 가상(嘉尙)히 여겨 잊지 않는다. 또한 창업(創業)한 초기에 성악(聲樂)이 잘 조화(調和)되지 못했으므로, 또 이 사람을 습악 제조(習樂提調)에 시험했더니, 이에 능히 성율(聲律)을 조화(調和)시켜 전조(前朝)의 슬픈 음곡(音曲)을 씻어 없애고 한 시대의 혁신(革新)한 정치를 형용(形容)하게 했으니, 그 공이 또한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상전(賞典)에 기재하는 것이 마땅하니 무진년의 회군 공신(回軍功臣) 남재(南在)의 예(例)에 의거할 만하고,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송문중(宋文中)과 대장군(大將軍) 조경(趙卿)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오래도록 나에게 봉사하여 안위(安危)에 뜻을 두고 어려운 고비를 피하지 아니하고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원종 공신(原從功臣) 이옥(李沃)의 예(例)에 의거할 만하다.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


8月 11日[편집]

광명사에서 왕사 자초를 만나보고, 소격전으로 거동하다[편집]

○甲申/幸廣明寺, 見王師自超, 遂幸昭格殿。

임금이 광명사(廣明寺)에 거둥하여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보고, 드디어 소격전(昭格殿)으로 거둥하였다.


8月 12日[편집]

동북면 도안무사 이지란를 시켜 갑주와 공주에 성을 쌓게 하다[편집]

○乙酉/遣東北面都安撫使李之蘭, 城甲州、孔州。

동북면 도안무사(都安撫使) 이지란(李之蘭)을 보내어 갑주(甲州)와 공주(孔州)에 성을 쌓게 하였다.


명에 진헌한 말 값의 채단을 사적으로 교환한 중추원 부사 구성로를 파면시키다[편집]

○司憲府論劾中樞院副使具成老至遼東, 與同列趙胖相詰取譏又私換進獻馬價綵段之罪, 上罷成老職。

사헌부에서,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구성로(具成老)가 요동(遼東)에 이르러 동열(同列) 조반(趙胖)과 서로 힐난하여 비난을 받았으며, 또 중국에 진헌(進獻)한 말 값의 채단(綵段)을 사적으로 교환한 죄를 탄핵하니, 임금이 성로(成老)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8月 14日[편집]

부역인을 기한내에 보내지 않은 수령 9인을 태형에 처하고, 안렴사 조박을 한양부에 가두다[편집]

○丁亥/遣僉節制使陳忠貴于楊廣道, 考諸州郡送役徒不及期者。 笞守令九人, 囚按廉使趙璞于漢陽府。

첨절제사(僉節制使) 진충귀(陳忠貴)를 양광도에 보내서, 주군(州郡)에서 역도(役徒)를 보내어 기일 내에 미치지 못한 사람을 조사하게 하여, 수령(守令) 9인을 매질[笞]하고, 안렴사 조박(趙璞)을 한양부(漢陽府)에 가두었다.


8月 15日[편집]

사은사 이염이 황제에게 매질을 당하여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다. 황제가 요동도사에게 조선 사신을 입국시키지 못하도록 명하다[편집]

○戊子/謝恩使李恬回自京師。 恬入見帝, 責其跪不正, 且俛其首, 棒恬幾死, 令飮藥得活。 及其還至遼東, 不給驛, 徒步而來。 詔遼東不納朝鮮之使。

사은사(謝恩使) 이염(李恬)이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왔다. 이염이 들어가서 황제를 뵈오니, 황제가 그의 꿇어앉음이 바르지 못하다고 책망하고, 또 머리를 숙이게 하고 이염을 몽둥이로 쳐서 거의 죽게 되었었는데, 약을 마시고 살게 되었다. 그가 돌아와 요동(遼東)에 이르니, 역마(驛馬)를 주지 않으므로 걸어서 왔다. 황제가 요동(遼東)에 명령하였다.

"조선의 사신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안익 등 11인에게 포상토록 교지를 내리다[편집]

○敎曰: “前門下贊成事安翊等十一人, 自辛氏竊位亂極思治之際, 安危皆注意於予, 諭德宣譽, 馴致今日, 功亦不細矣。 其褒賞之典, 有司擧行。”

교지를 내리었다.

"전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안익(安翊) 등 11인은 신씨(辛氏)가 왕위를 도적질하여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던 때부터 세상의 안위(安危)를 모두 나에게 뜻을 두고서, 도덕을 가르쳐서 깨우치고 좋은 평판을 선포하여 오늘날이 있게 하였으니, 그 공이 또한 작지 않다. 그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


8月 16日[편집]

신도와 부근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여 10결, 5결로써 차등있게 지급토록 명하다[편집]

○己丑/敎曰: “新都京畿田地改量, 以十結五結, 差等作丁折給。”

교지를 내리었다.

"새 도읍인 경기(京畿)의 전지(田地)를 고쳐 측량하여 10결(結), 5결(結)로써 등급을 차별하여 정(丁)을 만들어 나누어 주게 하라."


상락군 김진의 사제로 이거하다[편집]

○上移上洛君金縝之第。

임금이 상락군(上洛君) 김진(金縝)의 사제(私第)로 옮겨 거처하였다.


8月 17日[편집]

전 서운정 김보 등 39인을 원종 공신의 예로 포상토록 교지를 내리다[편집]

○庚寅/敎曰: “前書雲正金寶等三十九人, 其功與天守、天祐等同, 攸司擧行褒賞之典。”

교지를 내리었다.

"전 서운 정(書雲正) 김보(金寶) 등 39인은 그 공(功)이 강천수(姜天守)·이천우(李天祐) 등과 같으니, 유사(攸司)는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라."


8月 18日[편집]

달이 묘성을 범하다[편집]

○辛卯/月犯昴。

달이 좀생이별을 범했다.


경성 수축 도감 판사 홍영통 등에게 왕륜사에서 잔치를 베풀다[편집]

○都評議使司宴京城修築都監判事洪永通、安宗源等于王輪寺。

도평의사사에서 경성 수축 도감(京城修築都監)의 판사(判事) 홍영통(洪永通)·안종원(安宗源) 등을 왕륜사(王輪寺)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8月 19日[편집]

성을 시찰하고 화원으로 거둥하다[편집]

○壬辰/上觀城, 遂幸花園。

임금이 성(城)을 시찰하고 마침내 화원(花園)으로 거둥하였다.


8月 20日[편집]

정도전이 사시수수도를 바치다[편집]

○癸巳/贊成事鄭道傳作《四時蒐狩圖》以獻。

찬성사(贊成事) 정도전(鄭道傳)이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53]를 만들어 바치었다.


8月 23日[편집]

부역인을 기한내에 도착시키지 못한 마전·토산 감무를 귀양보내다[편집]

○丙申/杖麻田監務文緝、兎山監務吳思敏, 流邊郡。 以送役徒不及期也。

마전 감무(麻田監務) 문집(文緝)과 토산 감무(兎山監務) 오사민(吳思敏)을 장(杖)을 쳐서 변방 고을로 귀양보냈으니, 역도(役徒)를 보내어 시기에 미치지 못한 까닭이었다.


8月 29日[편집]

수창궁에서 머물다[편집]

○壬寅/幸壽昌宮宿焉。

임금이 수창궁(壽昌宮)에 거둥하여 유숙하였다.


요동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예부에 자문을 보내다[편집]

○遣前密直副使曺彦, 管送遼東逃來人口。 咨禮部曰:

洪武二十六年五月二十三日, 欽差內史黃永奇等至, 欽奉手詔內一款節該: “近者, 暗遣人說誘女眞, 帶家小五百餘名, 潛渡鴨綠江, 罪莫大焉。” 欽此, 臣與一國臣民, 驚惶震懼, 措身無地。 謹遣陪臣密直提學南在, 奉表陳情去訖。 竊照, 本國軍民節續逃往遼東, 投充軍丁, 其有懷思鄕土, 或復逃來, 山谷之間潛隱者。 臣初不知, 節次據遼東都司來文, 往往尙且擒獲解送。 況女眞人等, 言語異別, 本非同類, 安敢遣人說誘, 潛渡鴨江前來? 今欽奉詔旨, 劃卽差人於西北面各府州郡縣, 緝捉到年月不等逃來原係本國人朴龍等一百二十二戶, 幷家小三百八十八名, 枷杻赴遼東都司交割。 昨前起取脫歡不花之時, 其所在人民, 皆非脫歡不花父祖管屬。 雖有管屬人民, 於洪武十六年間, 被千戶徐便、胡拔都招引前去。 或有不卽隨行, 安居本土者, 亦非小國勒留。 今來欽奉聖旨, 隨卽差人, 取勘到女眞人仇乙吐等二十五戶幷家小一百一十六名, 就付右軍都督府差來千戶王, 脫歡不花管領及僻屯口子原把截千戶金完貴, 一同起解。

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조언(曹彦)을 보내어 요동(遼東)에서 도망해 온 인구(人口)를 관압(管押)하여 보냈다.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냈다.

"홍무(洪武) 26년(1393) 5월 23일에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 등이 이르러서 삼가 수조(手詔)를 받았는데, 그 수조(手詔) 내의 한 항목에, ‘근일에 몰래 사람을 보내어 여진(女眞)을 꾀[說誘]여 가족 5백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게 했으니, 죄가 이보다 큰것이 없다.’고 했으므로, 신(臣)은 온 나라 신민(臣民)들과 더불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몸둘 땅이 없었습니다. 삼가 배신(陪臣) 밀직 제학(密直提學) 남재(南在)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사정을 진술하러 가게 했습니다. 가만히 조회해 보니 본국(本國)[54]의 군민(軍民)이 계속하여 요동(遼東)으로 도망해 가서 군정(軍丁)에 충당되었으나, 그들이 고향을 생각하여 혹은 다시 도망해 와서 산골짜기 사이에 몰래 숨어 있던 사람은, 신이 처음에는 절차(節次)를 알지 못하여 요동 도사(遼東都司)에서 온 공문에 의거하여 왕왕(往往)히 또한 사로잡아 보냈사온데, 하물며, 여진인(女眞人)들은 언어가 다르고 본디부터 동류(同類)가 아닌데, 어찌 감히 사람을 보내어 말로써 꾀여 압록강을 몰래 건너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삼가 조지(詔旨)를 받고, 즉시 서북면(西北面)의 각 부(府)·주(州)·군(郡)·현(縣)에 사람을 파견하여, 연월(年月)이 같지 않게 도망해 온, 본디 본국(本國)사람인 박용(朴龍) 등 1백 22호(戶)와 가족 3백 88명을 잡아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워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가서 서로 교환했으며, 그전에 탈환불화(脫歡不花)를 데려갈 때, 그곳에 있던 인민들은 모두 탈환불화의 부조(父祖)의 관속(管屬)이 아니었으며, 비록 관속(管屬)된 인민이 있더라도 홍무(洪武) 16년(1383)에 천호(千戶) 서편(徐便)·호발도(胡拔都)에게 초인(招引)되어 갔으며, 혹은 즉시 따라가지 아니하고 본토(本土)에 편안히 사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소국(小國)에서 강제로 머물러 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황제의 조칙을 삼가 받들어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여진인(女眞人) 구을토(仇乙吐) 등 25호(戶)와 가족 1백 16명까지 취(取)하여 조사해서 우군 도독부(右軍都督府)에서 파견해 온 천호(千戶) 왕(王)에게 내어 주고, 탈환불화의 관령(管領)과 벽둔구자원(僻屯口子原)의 파절 천호(把截千戶) 김완귀(金完貴)도 모두 보냅니다."


二年 九月[편집]

9月 1日[편집]

동지중추원사 박영충을 보내 천추절을 하례하다[편집]

○癸卯朔/遣同知中樞院事朴永忠, 賀千秋。 上拜箋于壽昌宮, 還時坐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박영충(朴永忠)을 보내어 천추절(千秋節)[55]을 축하하게 하였다. 임금이 수창궁(壽昌宮)에서 전문(箋文)을 배송(拜送)하고 시좌소(時坐所)로 돌아왔다.


공마의 말 값을 나누어 주다[편집]

○頒朝廷所賜馬價。

중국에서 내려 준 말 값을 나누어 주었다.


9月 2日[편집]

주문사 남재가 경사에서 돌아와 3년에 한번 조회하라는 황제의 지시를 아뢰다[편집]

○甲辰/奏聞使南在回自京師曰: “帝厚待之, 且命曰: ‘爾國使臣行李往來, 道遠費煩, 自今三年一朝。’”

주문사(奏聞使) 남재(南在)가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고 또 명령하기를, ‘너희 나라 사신의 행차가 왕래하는데 길이 멀어서 비용이 많이 드니, 지금부터는 3년 만에 한 번 조회하라.’ 하였습니다."


9月 4日[편집]

성을 쌓는 인부들에게 식량을 주게 하다[편집]

○丙午/命都評議使司, 給築城役徒糧。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성을 쌓는 역도(役徒)들에게 식량을 주게 하였다.


경상·전라도 안렴사에게 인부를 차출하여 신도로 보내도록 명하다[편집]

○命都評議使司, 移牒慶尙、全羅道按廉使, 發役徒赴新都。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경상도·전라도 안렴사에게 공문을 보내서 역도(役徒)를 내어 신도(新都)에 보내게 하였다.


9月 6日[편집]

서운관에서 지력이 다한 송도의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청하다[편집]

○戊申/書雲觀上言: “道詵云: ‘松都五百年。’ 又曰: ‘四百八十年基。’ 且王氏絶祀之地, 而今方興土工。 請新都造成之前, 移幸吉方。” 下都評議使司議之。

서운관(書雲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도선(道詵)이 말하되, ‘송도(松都)는 5백 년 터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4백 80년 터이며, 더구나 왕씨(王氏)의 제사가 끊어진 땅이라.’ 하는데, 지금 바야흐로 토목공사(土木工事)를 일으키고 있사오니, 새 도읍을 조성(造成)하기 전에 좋은 방위로 이행(移幸)하소서."

도평의사사에 내리어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9月 10日[편집]

익왕의 기일이므로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다. 성을 시찰하고 수창으로 거둥하다[편집]

○壬子/以皇曾祖翼王(忌晨)〔忌辰〕, 停朝市。 上觀城, 幸壽昌宮。

황증조(皇曾祖) 익왕(翼王)의 기신(忌晨)이기 때문에 조회와 시장(市場)을 정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성을 시찰하고 수창궁으로 거둥하였다.


9月 11日[편집]

일본에서 칼 20자루를 바치니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좌궁으로 돌아오다[편집]

○癸丑/日本國遣使來獻劍二十柄, 上賜諸大臣, 還時坐宮。

일본국에서 사신을 보내어 칼 20자루를 바치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내려 주고 시좌궁(時坐宮)으로 돌아왔다.


9月 13日[편집]

안렴사를 폐지하고 관찰출척사를 회복시키다. 한상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乙卯/罷按廉, 復觀察黜陟使。 楊廣道韓尙質, 慶尙道閔開, 全羅道安景恭, 西海道柳爰廷, 交州、江陵道柳亮, 京畿左道河崙, 右道李彬。 又以洪永通爲南陽伯, 安宗源判門下府事, 權仲和領三司事, 鄭道傳判三司事, 柳蔓殊、成石璘門下侍郞贊成事, 南誾知門下府事, 南在判中樞院事, 李稷中樞院學士, 李懃大司憲, 韓尙敬都承旨。

안렴사(按廉使)를 폐지하고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를 회복시켜, 양광도는 한상질(韓尙質)을, 경상도는 민개(閔開)를, 전라도는 안경공(安景恭)을, 서해도(西海道)는 유원정(柳爰廷)을,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는 유양(柳亮)을, 경기좌도(京畿左道)는 하윤(河崙)을, 우도(右道)는 이빈(李彬)을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로 삼고, 또 홍영통(洪永通)을 남양백(南陽伯)으로, 안종원(安宗源)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권중화(權仲和)를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정도전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유만수(柳蔓殊)와 성석린(成石璘)을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남은(南誾)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남재(南在)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이직(李稷)을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로, 이근(李懃)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한상경(韓尙敬)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9月 14日[편집]

삼군 총제부를 의흥 삼군부로 개정하고, 중방을 폐지하다[편집]

○丙辰/改三軍摠制府爲義興三軍府, 罷重房。

삼군 총제부(三軍摠制府)를 고쳐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로 삼고, 중방(重房)을 폐지하였다.


화령부를 영흥부로, 영흥현을 영평현으로 고치다[편집]

○改和寧府爲永興府, 改永興縣爲永平縣。

화령부(和寧府)를 고쳐 영흥부(永興府)로 삼고, 영흥현(永興縣)을 고쳐 영평현(永平縣)으로 삼았다.


왜적이 서북면 정주에 침구하다[편집]

○倭寇西北面定州。

왜적(倭賊)이 서북면 정주(定州)에 침구하였다.


9月 16日[편집]

성을 시찰하고 수창궁으로 거둥하다[편집]

○戊午/上觀城, 幸壽昌宮。

임금이 성을 시찰하고 수창궁으로 거둥하였다.


9月 17日[편집]

진표사 이지가 요동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오다[편집]

○己未/進表使李至至遼東不得入而還。

진표사(進表使) 이지(李至)가 요동(遼東)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병조 전서 윤소종의 졸기[편집]

○兵曹典書、知製敎、同知春秋館事尹紹宗卒。 紹宗字憲叔, 茂松縣人, 文貞公澤之孫。 聰敏好學, 年未冠, 詩文已老成, 文忠公李齊賢見而稱奇。 恭愍庚子, 中成均試, 乙巳年二十一, 中乙科第一人。 對策高出前輩, 遂拜春秋修撰, 累官至左正言。 時幸臣金興慶恣行威福, 驕傲無禮; 宦者金師幸巧詐逢迎, 專掌工役, 俱病國害民。 紹宗草疏極言, 欲皆斥去。 同僚知之, 托以稱疾不仕, 劾罷之, 疏不果上。 僞朝己未, 起爲典校寺丞, 遷典儀副令、藝文應敎。 辛酉, 丁母憂, 居廬錦州。 服闋, 南方學者多從而受業。 丙寅, 以成均司藝召還。 戊辰夏, 上回自威化島, 駐軍東門外, 紹宗懷《霍光傳》進見。 上旣執退崔瑩等, 乃行陞黜, 擢爲典理摠郞, 尋陞右司議大夫。 己巳春, 上書論李仁任, 請斬棺潴宅, 不允。 移成均大司成。 上與趙浚等欲革私田, 令百官議可否, 俱以爲不可, 紹宗與鄭道傳等, 力請革之。 恭讓君立, 授左常侍、經筵講讀官。 恭讓欲迎僧粲英爲師, 抗疏止之, 恭讓積不平, 改禮曹判書, 尋竄錦州。 上卽位, 召拜兵曹典書, 許列原從功臣。 紹宗慷慨有大志, 常以格君心正風俗爲己任, 每當言路, 極陳得失, 無所忌諱。 其居家不治生産, 雖至屢空, 不以爲意。 博覽經史, 手不釋卷, 尤精於性理之學, 闢異端甚力。 年四十九, 病卒, 士林惜之。 所著詩文八卷, 自目曰《桐軒集》。 子淮登辛巳科, 今爲僉知承文院事。

병조 전서 지제교 동지춘추관사(兵曹典書知製敎同知春秋館事) 윤소종(尹紹宗)이 졸(卒)하였다. 소종(紹宗)의 자는 헌숙(憲叔)이며, 본관은 무송(茂松)이니, 문정공(文貞公) 윤택(尹澤)의 손자이다. 총명하고 민첩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나이 20세가 되기 전에 시문(詩文)은 이미 노성(老成)했으므로,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이 보고 기이한 재주라고 칭찬하였다. 공민왕 경자년(1360)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을사년에 나이 21세로서 을과(乙科) 제1인에 합격하여 대책(對策)[56]이 전배(前輩)보다 훨씬 뛰어났다. 드디어 춘추관 수찬(春秋館修撰)에 임명되고, 관직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렀다.

이때 행신(幸臣) 김흥경(金興慶)은 위력(威力)과 은혜를 제 마음대로 행하고, 교만하여 예절이 없었으며,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은 교사(巧詐)하여 임금의 뜻을 잘 맞추어 공역(工役)을 전장(專掌)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였다. 소종이 소(疏)를 초(草)잡아 남김없이 말하여 이들을 모두 물리쳐 제거하고자 하니, 동료(同僚)들이 이것을 알고는 병(病)을 일컫고 출근하지 않았다고 핑계하고서 그를 논핵(論劾)하여 파면시켰으므로, 소(疏)는 과연 올라가지 못하였다. 위조(僞朝)[57] 기미년에 다시 전교시 승(典校寺丞)으로 임명되고, 전의 부령(典儀副令)·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로 천직(遷職)되었다. 신유년에 어머니 상사(喪事)를 만나 금주(錦州)에서 여막(廬幕)살이를 했으며, 상복을 입는 기간이 끝나자 남방(南方)의 학자(學者)들이 많이 따라와서 수업(受業)하였다. 병인년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써 나라에서 소환(召還)하였다. 무진년 여름에 임금이 위화도(威化島)에서 돌아와 군사를 동문(東門) 밖에 주둔하고 있으니, 소종이 〈《한서》〉 곽광전(霍光傳)을 품안에 품고 나아와서 뵈었다. 임금이 이미 최영(崔瑩) 등을 물리치고, 이에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고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는 일을 단행하면서 소종을 뽑아 올려 전리 총랑(典理摠郞)으로 삼고, 조금 뒤에 우사의 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시켰다. 기사년 봄에 글을 올려 이인임(李仁任)을 논죄(論罪)하여 관(棺)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집터에 못을 파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겼다. 임금이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私田)을 개혁(改革)하고자 하여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소종이 정도전 등과 더불어 힘써 청하여 이것을 개혁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좌상시 경연 강독관(左常侍經筵講讀官)으로 임명되었다. 공양왕이 중[僧] 찬영(粲英)을 맞아 와서 왕사(王師)로 삼고자 하므로, 소(疏)를 올려 이를 말렸더니, 공양왕이 불평(不平)을 품고서 예조 판서로 옮겼다가, 조금 뒤에 금주(錦州)로 귀양보내었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불러 와서 병조 전서에 임명하고,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열(參列)하게 하였다. 소종은 강개(慷慨)하고 큰 뜻이 있어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매양 임금에게 말할 때는 정치의 잘되고 잘못된 점을 남김없이 진술하여 꺼리고 숨김이 없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때는 산업(産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비록 자주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러도 개의(介意)하지 아니하고, 경사(經史)를 널리 보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더욱이 성리(性理)의 학문에 정통(精通)하였으며 이단(異端)[58]을 배척하는 데 매우 힘을 기울였다. 나이 49세에 병들어 죽으니, 사림(士林)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저술한 시문(詩文)이 8권인데 스스로 제목(題目)하여 《동헌집(桐軒集)》이라 하였다. 아들 윤회(尹淮)는 신사년 과거에 올라 지금 첨지승문원사(僉知承文院事)가 되었다.


9月 18日[편집]

수창궁에서 성절을 하례하고 시좌소로 돌아오다[편집]

○庚申/上率群臣, 賀聖節于壽昌宮, 還時坐所。

임금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성절(聖節)을 수창궁에서 하례하고는 시좌소(時坐所)로 돌아왔다.


동북면 함주에 환왕의 정릉비를 세우다[편집]

○遣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于東北面咸州, 書桓王定陵碑立之。 其文曰:


{{이중 언어|上卽位之二年春正月辛未, 命臣摠若曰: “予以否德, 荷天休命, 肇造邦家, 惟祖宗積德是賴。 謹已追諡四代, 皆上王爵。 汝其銘我先烈考定陵碑, 昭示永世。” 臣摠承命祗慄, 不敢以鄙拙辭。 嘗觀孟氏之言, 曰: “五百年, 必有王者興。” 前朝自始祖王氏以來, 垂五百年, 運祚旣衰, 恭愍絶嗣。 妖僧辛旽子禑冒姓竊位, 荒淫戾虐。 歲戊辰, 與其相崔瑩謀, 興師妄動, 將犯天子之境, 生民之禍, 靡所紀極。 維時我主上殿下, 爲右軍都統使, 仗義還師, 禑乃知罪, 遜位子昌。 越明年, 天子責以異姓爲王氏後, 殿下以侍中任國政, 與諸將相議, 立王氏之裔瑤爲君。 初自禑時政在權臣, 鬻賣官獄, 濁亂朝廷, 攘奪土田, 籠絡山野, 紀綱大壞, 毒痡日甚, 民胥怨咨, 日夕思治。 及殿下作相, 革除舊弊, 更新治道。 罷私田以正經界, 汰冗官以重名器。 登崇俊良, 放竄頑兇。 奮武威以却邊寇, 施仁政以厚民業。 整頓紀度, 修明禮樂, 三韓之民, 父母愛之。 瑤乃以昏迷, 闇於大體, 崇信姦回, 廢黜忠直。 聽婦寺而亂田制之正, 任私昵而紊名器之公。 政令無常, 以壞國法, 用度無節, 以傷民財。 信群小浸潤之譖, 忘殿下匡復之功, 乃與其相鄭夢周, 常謀陷之。 夢周陰嗾其黨之在臺諫者, 欲加罪功臣及直言者, 羅織上書, 將及殿下, 禍在不測, 國人莫不憤怨。 洪武二十五年七月十六日, 左侍中裵克廉、右侍中趙浚等五十二人, 知天命之所在, 察人心之所歸, 倡以大義, 百官父老, 不謀而同, 合辭勸進。 殿下讓至再三, 衆志彌固, 勉卽寶位。 市不易肆, 兵不血刃, 會朝淸明, 民乃大悅。 卽遣知中樞臣趙胖奏聞, 帝乃詔曰: “三韓之民, 旣尊李氏, 民無兵禍, 人各樂天之樂, 迺帝命也。” 未幾, 中樞使臣趙琳繼還, 又勅: “國更何號, 星馳來報。” 卽令藝文學士臣韓尙質, 奏請國名, 賜以朝鮮之號, 且曰: “體天牧民, 永昌後嗣。” 其獲天人上下之助如此, 誠所謂應五百年而興者也。 臣謹按璿源所自, 全之望族。 有司空諱翰, 仕新羅, 娶太宗王十世孫軍尹金殷義之女, 生侍中自延。 侍中生僕射天祥, 僕射生阿干光禧, 阿干生司徒立全, 司徒生兢休, 兢休生廉順, 廉順生承朔, 承朔生充慶, 充慶生景英, 景英生忠敏, 忠敏生華, 華生珍有, 珍有生宮進, 宮進生大將軍勇夫, 大將軍生內侍執奏璘。 執奏娶侍中文克謙之女, 生將軍陽茂, 將軍娶上將軍李公諱康濟之女, 生知宜州諱安社。 後仕元朝, 爲南京五千戶所達魯花赤, 卽我殿下皇高祖。 今封穆王, 陵號曰德。 配李氏, 千牛長史諱公肅之女。 今封孝妃, 陵號曰安。 皇曾祖諱行里, 襲封千戶, 今封翼王, 陵號曰智。 配登州崔氏, 今封貞妃, 陵號曰淑。 皇祖贈贊成事諱椿, 今封度王, 陵曰義陵。 配文州朴氏, 封敬妃, 陵曰純陵。 皇考榮祿大夫判將作監事朔方道萬戶、贈門下侍中諱子春, 屢立邊功, 以長萬夫。 至正庚子四月甲戌, 病薨于朔方道, 年四十六。 其年八月丙申, 葬于咸州之東歸州之原。 今封桓王, 陵曰定陵。 妃崔氏, 贈判門下永興伯靖孝公諱閑奇之女, 封懿妃, 陵曰和陵。 世積勳德, 肇基王迹, 積善鍾慶。 源遠流光, 篤生聖哲, 以建大業, 天之眷佑有德至矣。 女適三司左使趙仁璧。 殿下配韓氏, 贈領門下府事諱卿之女, 先薨, 贈節妃, 陵曰齊陵。 生男曰芳雨, 封鎭安君,【上王諱。】,永安君, 曰芳毅, 益安君, 曰芳幹, 懷安君, 曰【今殿下諱。】 靖安君, 曰芳衍, 早歿, 贈元尹。 女二, 皆幼。 繼室康氏, 判三司事諱允成之女, 封顯妃。 生男曰芳蕃, 撫安君, 曰芳碩, 幼。 女適京山李氏濟, 封興安君。 鎭安娶贊成事池奫之女, 生男曰福根, 元尹。 永安娶贈門下左侍中金天瑞之女。 益安娶贈門下贊成事崔仁㺶之女, 生男曰石根, 元尹。 懷安娶贈門下贊成事閔璿之女, 生男曰孟宗, 元尹。 靖安娶藝文館大學士閔霽之女, 撫安娶歸義君王瑀之女。 臣竊觀帝王之興, 祖宗積累之遠, 本支蕃衍之多, 未有若周家者也。 爰自后稷, 歷數十世, 以至文、武而興王業。 振振麟趾, 詵詵螽斯, 實基蒼姬八百年之曆, 亦有先世仁厚之德以致之也。 今我國家, 自司空至于桓王, 積善悠久, 而我殿下以英明之資、神武之略, 遠紹遺烈, 光膺大慶, 以開億萬世無疆之休, 金枝之衍, 旣蕃且茂, 誠與周家竝隆。 是其積之者久, 故發之者大; 樹之者固, 故傳之者遠。 於戲盛哉! 臣摠拜手稽首獻銘曰: 於皇仙李, 本固根深。 粤自司空, 世茂德音。 長發其祥, 至于桓王。 誕我明主, 奄有東方。 曆數攸歸, 不試戎衣。 與民更始, 昭布德輝。 王曰不穀, 獲膺天祿。 是繇祖宗, 毓慶之力。 迺稽舊章, 追諡以王。 潛德昭著, 不顯其光。 振振公姓, 卽篤其慶。 維本維支, 萬世有永。 瞻彼歸州, 有峙其丘。 王氣鬱葱, 無疆惟休。 臣拜稽首, 我銘不諛。 刻此貞珉, 以示後人。

문하 시랑찬성사 성석린을 동북면(東北面) 함주(咸州)에 보내어 환왕(桓王)의 정릉비(定陵碑)에 글을 써서 이를 세우게 하였다. 그 비문은 이러하였다.

"임금이 즉위(卽位)한 2년 봄 정월 신미일에 신(臣) 정총(鄭摠)에게 명하기를,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처음으로 국가를 세웠으니, 조종(祖宗)의 쌓은 덕을 힘입었다. 삼가 이미 사대(四代)를 추시(追諡)하여 모두 왕작(王爵)을 올렸으니, 그대는 내 선열고(先烈考)[59]의 정릉비(定陵碑)에 비명(碑銘)을 지어 영원한 세대(世代)에 밝게 보이게 하라.’ 하매, 신 총(摠)이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문사(文辭)의 변변치 못한 이유로써 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맹씨(孟氏)[60]의 말을 살펴보건대, ‘5백 년 만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일어나게 된다.’ 하였으니, 고려 왕조는 시조(始祖) 왕씨(王氏) 이후로 거의 5백 년이 되었습니다. 국운(國運)이 이미 쇠퇴(衰頹)해지자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끊어졌는데, 요망스런 중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성(姓)을 속여 왕위를 도적질하고는 주색(酒色)에 빠지고 포학하였습니다. 무진년에 그 재상(宰相) 최영(崔瑩)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움직여서 장차 천자의 국경을 범하려고 하였으니, 백성의 화(禍)가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대의(大義)에 따라 군사를 돌이켰으니, 우(禑)가 그제야 죄를 알고서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사양했습니다. 이듬해에 천자(天子)께서 이성(異姓)이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되었음을 책망하니, 전하(殿下)께서 시중(侍中)으로서 국정(國政)을 맡고 있었으므로, 여러 장상(將相)들과 서로 의논하여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당초 우(禑) 때로부터 정권이 권신(權臣)에게 있었으므로, 돈을 받고 벼슬을 팔며, 송사(訟事)로 인하여 뇌물을 받아 조정을 탁란(濁亂)시켰으며, 토지를 빼앗아 산야(山野)를 온통 싸고 있었으며, 기강(紀綱)이 크게 무너져서 해독이 날로 심하니,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탄식하며 밤낮으로 다스려진 세상을 생각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구폐(舊弊)를 고쳐 없애고 치도(治道)를 다시 새롭게 하여, 사전(私田)을 폐지하여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용관(冗官)[61]을 도태(淘汰)시켜 명기(名器)를 소중히 하고, 준량(俊良)을 등용시키고 완흉(頑兇)을 내쫓았으며, 무위(武威)를 떨쳐서 변방의 외구(外寇)를 물리치고, 인정(仁政)을 베풀어 백성의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기강(紀綱)을 정돈하고 예악(禮樂)을 수명(修明)하였으니,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습니다. 요(瑤)는 혼미(昏迷)한 자질로써 대체(大體)에 어두워서, 간사한 무리를 믿어 쓰고 충직(忠直)한 신하를 내쫓으며, 부녀와 환관(宦官)의 말을 듣고서 전제(田制)의 바른 것을 어지럽히고, 사친(私親)과 근신(近臣)을 임용하여 명기(名器)의 공정함을 문란시키며, 정령(政令)이 일정하지 않아서 국법(國法)을 무너뜨리고, 용도(用度)가 절차가 없어서 백성의 재물을 해롭게 하며, 여러 소인들의 차츰차츰 헐뜯는 참소를 믿고, 전하의 나라를 광복(匡復)시킨 공로는 잊고서 이에 그 재상(宰相)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늘 전하를 모함(謀陷)하였습니다. 몽주(夢周)는 그의 무리로서의 대간(臺諫)에 있는 사람을 몰래 사주(使嗾)하여, 공신(功臣)과 직언(直言)하는 사람에게 죄를 가하려고 죄를 꾸며 법망(法網)에 끌어넣으려는 글을 올려서, 장차 전하(殿下)에게 미치게 하려고 하여 화(禍)가 헤아리지 못할 단계에 있게 되니, 나라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홍무(洪武) 25년(1392) 7월 16일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인이 천명(天命)이 있는 바를 알고 인심의 돌아가는 바를 살펴서, 대의(大義)로써 먼저 주창하니, 백관(百官)과 부로(父老)들이 의논하지 않고서도 의견이 서로 같게 되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니, 전하께서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사오나, 여러 사람의 뜻이 더욱 견고하므로 마지 못하여 보위(寶位)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저자[市]는 가게[肆]를 변동하지 않고,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하루아침에 청명(淸明)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즉시 지중추(知中樞) 신(臣) 조반(趙胖)을 보내어 이 사실을 황제에게 주문(奏聞)하니, 황제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였는데, 백성은 병화(兵禍)가 없고 사람마다 각기 하늘의 즐거움을 즐기게 되니, 곧 상제(上帝)의 명령이다.’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추사(中樞使) 신(臣) 조임(趙琳)이 잇따라 돌아왔는데, 또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나라는 무슨 이름으로 고치는가? 빨리 달려와서 보고하라.’ 하기에,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신(臣) 한상질(韓尙質)로 하여금 국명(國名)을 주청(奏請)하니, 조선(朝鮮)의 국호(國號)로 내려 주고, 또 말하기를,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의 위아래의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이른바 5백 년의 시기에 응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신(臣)이 삼가 선원(璿源)[62]의 기원을 살펴보건대, 전주(全州)의 명망(名望)이 있는 집안으로서,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은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63]의 십대손(十代孫)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가서 시중(侍中) 이자연(李自延)을 낳고, 시중은 야(僕射)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는 아간(阿干) 이광희(李光禧)를 낳고, 아간은 사도(司徒) 이입전(李立全)을 낳고, 사도는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긍휴는 이염순(李廉順)을 낳고, 염순은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승삭은 이충경(李充慶)을 낳고, 충경은 이경영(李景英)을 낳고, 경영은 이충민(李忠敏)을 낳고, 충민은 이화(李華)를 낳고, 화는 이진유(李珍有)를 낳고, 진유는 이궁진(李宮進)을 낳고, 궁진은 대장군(大將軍) 이용부(李勇夫)를 낳고, 대장군은 내시 집주(內侍執奏) 이인(李璘)을 낳고, 집주는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가서 장군(將軍) 이양무(李陽茂)를 낳고, 장군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가서 지의주(知宜州)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았는데, 뒤에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남경 오천호소(南京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으니, 곧 우리 전하의 황고조(皇高祖)입니다. 지금 목왕(穆王)으로 봉해졌으며, 능(陵) 이름은 덕릉(德陵)이라 하고, 배위(配位) 이씨(李氏)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로서, 지금 효비(孝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안릉(安陵)이라 하였습니다. 황증조(皇曾祖) 휘(諱) 이행리(李行里)는 천호(千戶)를 물려 봉[襲封]했는데, 지금 익왕(翼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지릉(智陵)이라 하고, 배위(配位)는 등주(登州) 최씨(崔氏)이니, 지금 정비(貞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숙릉(淑陵)이라 하였습니다. 황조(皇祖) 증 찬성사(贈贊成事) 휘(諱) 춘(春)은 지금 도왕(度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의릉(義陵)이라 하고, 배위(配位)는 문주(文州) 박씨(朴氏)이니, 경비(敬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순릉(純陵)이라 하였습니다. 황고(皇考) 영록대부판장작감사삭방도만호증문하시랑(榮祿大夫判將作監事朔方道萬戶贈門下侍郞) 휘(諱) 이자춘(李子春)은 여러 번 변방에서 공을 세워 만부(萬夫)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지정(至正) 경자년(1360) 4월 갑술일에 병으로 삭방도(朔方道)에서 훙(薨)하니, 연세가 46세였습니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咸州)의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장사했는데, 지금 환왕(桓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정릉(定陵)이라 하고, 비(妃) 최씨(崔氏)는 증 판문하 영흥백(贈判門下永興伯) 정효공(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니, 의비(懿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화릉(和陵)이라 하였습니다.

대대로 훈공(勳功)과 은덕(恩德)을 쌓아서 비로소 왕업(王業)의 기초(基礎)를 닦았으며, 선행(善行)이 쌓여지고 경사(慶事)가 모여져서, 근원이 깊으매 덕이 후세에 전하여 성철(聖哲)을 거듭 낳아서 큰 왕업(王業)을 세우게 했으니, 하늘이 덕이 있는 이를 돌보아 도와주심이 지극하였습니다. 딸은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인벽(趙仁壁)에게 시집갔습니다. 전하(殿下)의 배위(配位) 한씨(韓氏)는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인데, 먼저 훙(薨)하고, 절비(節妃)라 증시(贈諡)하고 능 이름은 제릉(齊陵)이라 하였습니다. 아들 이방우(李芳雨)는 진안군(鎭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과(李芳果)는 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의(李芳毅)는 익안군(益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간(李芳幹)은 회안군(懷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원(李芳遠)은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연(李芳衍)은 일찍 별세했는데 원윤(元尹)을 증직(贈職)하고, 딸 두 사람은 모두 어립니다. 계실(繼室)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며, 아들 이방번(李芳蕃)은 무안군(撫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석(李芳碩)은 어리며, 딸은 경산 이씨(京山李氏) 제(濟)에게 시집갔는데, 흥안군(興安君)으로 봉해졌습니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복근(李福根)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영안군(永安君)은 증 문하 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에게 장가갔으며, 익안군(益安君)은 증 문하 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석근(李石根)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회안군(懷安君)은 증 문하 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맹종(李孟宗)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정안군(靖安君)은 예문관 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에게 장가 갔으며, 무안군(撫安君)은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에게 장가갔습니다.

신이 가만히 보옵건대, 제왕(帝王)이 일어날 적에 조종(祖宗)의 적루(積累)[64]가 오래고 본지(本支)[65]의 번연(蕃衍)의 많은 것이 주(周)나라와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후직(后稷)[66]으로부터 수십세(數十世)를 지내어 문왕(文王)·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왕업(王業)을 일으켰는데, 인후(仁厚)한 후비(后妃)의 덕화에 자손이 또한 인후(仁厚)하고, 후비(后妃)가 질투하지 않으므로써 자손이 많아져서, 실로 창희(蒼姬) 8백 년의 역수(曆數)의 터전을 잡았던 것이지만, 또한 선대(先代)의 인후(仁厚)한 덕이 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가는 사공(司空)으로부터 환왕(桓王)에 이르기까지 적선(積善)을 오래 했는데,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영명(英明)한 자질과 신무(神武)의 지략(智略)으로써 멀리 전해 온 공렬(功烈)을 계승하고 큰 경사(慶事)를 빛나게 받아 억만대(億萬代)의 한이 없는 경사(慶事)를 개시하여, 금지(金枝)[67]의 퍼짐이 이미 무성하여졌으니, 진실로 주(周)나라와 같이 융성(隆盛)하겠습니다. 이것은 그 쌓인 것이 오래 된 까닭으로 나타나는 것이 크게 되고, 심은 것이 튼튼한 까닭으로 전하는 것이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아아! 성대한 일이로다. 신 총(摠)은 절하고 손을 모아 머리를 조아려 명사(銘辭)를 올리기를 ‘실령한 오얏나무[李氏]는 근본이 튼튼하고 뿌리가 깊었습니다. 사공(司空)으로부터 대대로 덕음(德音)이 무성하더니, 길이 그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환왕(桓王)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명주(明主)[68]를 낳으시어 문득 동방을 차지하였습니다. 역수(曆數)의 돌아가는 바이니 전쟁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혁신(革新)하여 덕을 밝게 선포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말하시기를, ‘불선(不善)한 내가 천록(天祿)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이 경사(慶事)를 기른 힘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에 예전에 시행하던 전장(典章)을 상고하여, 왕(王)을 추시(追諡)하니,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덕행이 나타나게 되매, 그 광채가 빛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인후(仁厚)한 공성(公姓)[69]은 즉시 그 경사를 두터이 하여,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만세(萬世)까지 영구히 존속하겠습니다. 저 귀주(歸州)를 보건대, 높다란 그 언덕에 왕기(王氣)가 매우 성하니, 한이 없는 그 경사입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매, 나의 명(銘)이 과분한 칭찬이 아니옵니다. 이 비석(碑石)에 새겨서 후세의 사람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환왕의 서자인 이원계와 이화의 가계[편집]

○桓王有孼子二人, 元桂, 婢內隱藏出; 和, 婢古音加出。 元桂子四, 良祐、天祐、朝、伯溫。 和子七, 之崇、淑、澄、湛、皎、淮、漸。 良祐子, 興發、興濟、興露、興美。 天祐子宏軒。 之崇子壽長。 淑子吾望、之發。 澄子義敬、微童。 湛子孝孫。 淮子福同。 漸子實堅。

환왕(桓王)에게 서자(庶子) 두 사람이 있었으니, 이원계(李元桂)는 비(婢) 내은장(內隱藏)이 낳았고, 이화(李和)는 비(婢) 곰가[古音加]가 낳았다. 원계(元桂)의 아들이 네 사람이니, 이양우(李良祐)·이천우(李天祐)·이조(李朝)·이백온(李伯溫)이고, 화(和)의 아들이 일곱 사람이니, 이지숭(李之崇)·이숙(李淑)·이징(李澄)·이담(李湛)·이교(李皎)·이회(李淮)·이점(李漸)이다. 양우(良祐)의 아들은 이흥발(李興發)·이흥제(李興濟)·이흥로(李興露)·이흥미(李興美)요, 이천우(李天祐)의 아들은 이굉헌(李宏軒)이다. 지숭(之崇)의 아들은 이수장(李壽長)이요, 숙(淑)의 아들은 이오망(李吾望)·이지발(李之發)이요, 징(澄)의 아들은 이의경(李義敬)·이미동(李微童)이요, 담(湛)의 아들은 이효손(李孝孫)이요, 회(淮)의 아들은 이복동(李福同)이요, 점(漸)의 아들은 이실견(李實堅)이다.


9月 19日[편집]

사역원을 설치하여 중국어를 익히게 하다[편집]

○辛酉/置司譯院, 肄習華言。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하고 중국말을 익히게 하였다.


9月 20日[편집]

정비의 기일이므로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다[편집]

○壬戌/以皇曾祖妣貞妃(忌晨)〔忌辰〕, 停朝市。

황증조비(皇曾祖妣) 정비(貞妃)의 기신(忌晨)인 이유로 조회와 시장(市場)을 정지하게 하였다.


9月 21日[편집]

중추원 학사 이직을 시켜 예전대로 조공하기를 청하는 표문을 보내다[편집]

○癸亥/遣中樞院學士李稷, 赴京謝恩, 仍請依舊朝聘。 表曰:

陪臣南在, 回自京師, 欽蒙宣諭切至, 臣與國人, 不勝感激者。 聖訓諄諄, 廓示包容之量, 臣心斷斷, 玆懷感愧之私。 臣於當年六月間, 遣陪臣金立堅, 謝賜馬價, 七月, 又遣陪臣尹師德, 進賀聖節, 俱蒙遼東都司稱有聖旨, 阻當回還。 欽此, 遣陪臣李至, 備具情由, 卽行聞奏。 撫微躬而罔措, 冀睿鑑之灼知。 今者, 陪臣南在傳奉宣諭聖旨節該: “爾回去對他說三年一貢。 看爾至誠, 我使人叫爾來。” 欽此, 許通行李往來之途, 深荷聖人懷綏之惠。 玆蓋伏遇皇帝陛下, 仁以字小, 明以燭微, 察臣卑忱, 俾臣再造。 但歲時之疎也, 在臣心而缺焉, 願修貢之如常, 供祈天之有永。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이직(李稷)을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가서 사은(謝恩)하고 이내 그전대로 조빙(朝聘)하기를 청하게 하였다. 그 표문(表文)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남재(南在)가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삼가 선유(宣諭)가 간절하고 지극하심을 받고는, 신(臣)은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감격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성훈(聖訓)이 곡진하게 타일러 포용(包容)하는 도량을 보이셨는데, 신의 마음은 성실하고 전일하오나 감괴(感愧)의 사정(私情)을 품게 되었습니다. 신은 그해 6월에 배신(陪臣)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어 말 값[馬價]을 내려 주심을 사례하였고, 7월에 또 배신(陪臣) 윤사덕(尹師德)을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는데, 모두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성지(聖旨)가 있다고 일컬으면서 막았으므로 돌아왔습니다. 삼가 배신(陪臣) 이지(李至)를 보내어 사정의 이유[情由]를 상세히 갖추어서 즉시 주문(奏文)하오니, 제 몸을 돌아보매 어찌 할 바를 모르므로, 예감(睿鑑)이 밝히 아시기를 바랐습니다. 지금 배신(陪臣) 남재(南在)가 선유(宣諭)하는 성지(聖旨)를 전해 받들고 왔사온데, ‘그대가 돌아가거든 그대 나라에 대하여 3년 만에 한 번 조공(朝貢)하도록 하고, 그대의 지성을 보아서 내가 사람을 시켜 그대를 불러 오게 한다.’ 하여, 사신 행차의 왕래하는 길을 통하게 하셨으니, 성인(聖人)의 회수(懷綏)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개 황제 폐하께서 인애(仁愛)로써 소민(小民)을 사랑하고, 총명으로써 미세(微細)한 것을 밝게 살피시와, 신의 낮은 정성을 살펴서 신으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다만 세시(歲時)에 드물게 가는 것은 신의 마음에 예의(禮儀)를 다하지 못함이 있사오니, 원하옵건대, 수공(修貢)은 평상시와 같이 하여 천자(天子)의 수명이 영원하기를 빌게 하소서."


현비의 본향인 곡주를 곡산부로 승격시키다[편집]

○陞顯妃鄕谷州爲谷山府。

현비(顯妃)의 본향(本鄕)인 곡주(谷州)를 승격시켜 곡산부(谷山府)로 삼았다.


유경·이거이·정탁·박신·김승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劉敬左散騎常侍, 李居易右散騎常侍, 鄭擢直門下, 朴信兼司憲中丞, 金陞司憲中丞。

유경(劉敬)을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로, 이거이(李居易)를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로, 정탁(鄭擢)을 직문하(直門下)로, 박신(朴信)을 겸 사헌 중승(兼司憲中丞)으로, 김승(金陞)을 사헌 중승(司憲中丞)으로 삼았다.


9月 23日[편집]

절비의 기일이므로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다[편집]

○乙丑/以節妃(忌晨)〔忌辰〕, 停朝市。

절비(節妃)의 기신(忌晨)인 이유로써 조회와 시장(市場)을 정지하게 하였다.


9月 27日[편집]

참형과 교형이하의 죄인을 방면하다[편집]

○己巳/宥二罪以下囚。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사면(赦免)하였다.


9月 28日[편집]

병이 나자 도당에 명하여 피접할 곳을 살펴보게 하다[편집]

○庚午/上不豫, 令都評議使司, 相避居之地。

임금께서 병환이 나서 편치 못하므로 도평의사사에 명령하여 피접(避接)해 있을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9月 29日[편집]

도당에서 임금이 옮겨 거둥할 장소를 살펴보다[편집]

○辛未/都堂合坐于松林佛日寺, 觀移幸所。

도당(都堂)에서 송림(松林) 불일사(佛日寺)에 합좌(合坐)하여 임금이 옮겨 거둥할 장소를 살펴보았다.


천추사 박영충이 감수참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오다[편집]

○千秋進賀使朴永忠, 至甛水站, 不得入而還。

천추절 진하사(千秋節進賀使) 박영충(朴永忠)이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9月 30日[편집]

서운관 관원을 불러 이거할 만한 곳을 점치게 하다[편집]

○壬申/召書雲觀員于闕內, 卜移幸吉地。

서운관(書雲觀)의 관원을 궐내(闕內)에 불러서 임금이 옮겨 거둥할 길지(吉地)를 점치게 하였다.


천둥이 치다[편집]

○雷。

천둥이 쳤다.


二年 冬十月[편집]

10月 3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乙亥/木稼。

목가(木稼)[70]하였다.


10月 4日[편집]

전 판사 안의의 첩을 빼앗은 영과 조를 곤장치다[편집]

○丙子/杖(二)〔正〕尹英、前將軍朝。 朝與英, 奪前判事安義之妾, 上怒杖之。

두 윤(尹)[71] 이영(李英)과 전 장군(將軍) 이조(李朝)를 곤장을 치게 하였다. 조(朝)와 영(英)이 전 판사(判事) 안의(安義)의 첩을 빼앗았으므로 임금이 노하여 곤장을 치게 한 것이었다.


10月 6日[편집]

성을 쌓다가 도망한 인부 6명을 참수하다[편집]

○戊寅/斬築城逃夫六名。

성을 쌓다가 도망한 역부(役夫) 6명을 목 베었다.


10月 9日[편집]

무공방을 설치하고 무악을 익히게 하다[편집]

○辛巳/置武工房, 肄習武樂。

무공방(武工房)을 설치하고 무악(武樂)을 익히게 하였다.


10月 10日[편집]

청성부원군 심덕부의 아들 심종을 부마로 삼다[편집]

○壬午/以靑城府院君沈德符子淙爲駙馬。

부원군(靑城府院君) 심덕부(沈德符)의 아들 심종(沈淙)을 부마(駙馬)로 삼았다.


10月 11日[편집]

임금의 탄신일이므로 이죄 이하의 죄인을 사면시키고, 중 1,500명을 공양하다[편집]

○癸未/上誕日, 門下府及各道觀察、節制使, 上箋賀。 宥二罪以下囚, 飯僧一千五百於廣明寺。

임금의 탄생일이므로 문하부(門下府)와 각도의 관찰사·절제사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하였다.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사면(赦免)하고, 중[僧] 1천 5백 명을 광명사(廣明寺)에서 공양(供養)하였다.


10月 13日[편집]

성 쌓는 인부를 방면하다[편집]

○乙酉/放楊廣、交州、西海道築城夫。

양광도(楊廣道)·교주도(交州道)·서해도(西海道)의 성 쌓는 역부(役夫)를 놓아보냈다.


수창궁에 거동하다. 참찬문하부사 경의 등을 경사에 보내 정조를 하례케 하다[편집]

○幸壽昌宮。 遣參贊門下府事慶儀、商議中樞院事鄭南晋赴京, 賀明年正。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였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경의(慶儀)와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정남진(鄭南晉)을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가서 명년의 정조(正朝)를 하례하게 하였다.


10月 17日[편집]

연복사에 5층탑을 건축하여 《대장경》을 간수하고, 왕사 자초에게 강설을 주관케 하다[편집]

○己丑/飯僧于演福寺, 披讀《大藏經》, 以王師自超主講。 先是, 營五層塔, 藏《大藏經》, 至是落之。

연복사(演福寺)에서 중[僧]을 공양(供養)하고 《대장경(大藏經)》을 펼쳐서 읽게 하는데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강설(講說)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오층탑(五層塔)을 건축하여 《대장경》을 간수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이를 낙성(落成)하였다.


동쪽에 무지개가 서다[편집]

○虹見東方。

무지개가 동방에 나타났다.


절제사가 거느리는 군관의 직함을 고치고, 영안군을 중군 절제사 등으로 삼다[편집]

○改下諸節制使所領軍官職銜。 以永安君爲三軍府中軍節制使, 撫安君芳蕃爲左軍節制使, 興安君李濟爲右軍節制使。 沈淙靑原君, 李舒安平君, 金稛雞林君。

여러 절제사(節制使)의 거느린 군관(軍官) 직함(職銜)을 고쳐서 내리니, 영안군(永安君)을 삼군부 중군 절제사(三軍府中軍節制使)로 삼고,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을 좌군 절제사(左軍節制使)로 삼았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를 우군 절제사(右軍節制使)로 삼았다. 심종(沈淙)을 청원군(靑原君)으로 삼고, 이서(李舒)를 안평군(安平君)으로 삼고, 김균(金稛)을 계림군(雞林君)으로 삼았다.


10月 19日[편집]

경천사로 이거하여 삼성의 각 1명과 의흥 친군위만으로 숙위케 하다[편집]

○辛卯/駕移敬天寺。 令都評議使司以下各司還都。 留臺省、刑曹各一員, 義興三軍府更番宿衛。

어가(御駕)가 경천사(敬天寺)로 옮겨 갔다. 도평의사사 이하의 각 관사(官司)로 하여금 도성(都城)으로 돌아가게 하고, 대성(臺省)과 형조(刑曹)의 각 1원(員)과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를 남겨 두어 번갈아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왜구 40여 명을 죽인 이성 만호 이귀철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하다[편집]

○西北面體覆使張元卿報: “泥城萬戶李龜鐵擊倭寇, 斬獲四十餘級。” 上悅, 卽以僉節制使白彦麟, 往賜龜鐵衣酒廐馬, 仍賜元卿衣酒。

서북면 체복사(西北面體覆使) 장원경(張元卿)이 보고하였다.

"이성 만호(泥城萬戶) 이귀철(李龜鐵)이 왜구(倭寇)를 쳐서 적의 머리 40여 급(級)을 베었습니다."

임금이 기뻐하여 즉시 첨절제사(僉節制使) 백언린(白彦麟)을 시켜 가서 귀철(龜鐵)에게 의복·술·내구마(內廐馬)를 내려 주고, 이내 원경(元卿)에게도 의복과 술을 내려 주게 하였다.


10月 21日[편집]

조회일이므로 백관이 임금의 임시 처소로 가다[편집]

○癸巳/都堂、百司以衙朝, 詣時坐所。

도당(都堂)의 모든 관사(官司)가 아조(衙朝)[72]로써 시좌소(時坐所)에 나아갔다.


금성과 토성이 동상 자리에서 마주치다[편집]

○金、土抗東相。

금성(金星)과 토성(土星)이 동방의 상성(相星)에게 대항하였다.


각 관사마다 1원씩 수창궁에 숙직케 하고, 사헌부를 시켜 근태를 살피게 하다[편집]

○命各司一員, 更直壽昌宮, 令司憲府, 考其勤慢。

명하여 각 관사(官司)마다 1원(員)씩 수창궁에 번갈아 숙직(宿直)하게 하고, 사헌부로 하여금 그들의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고찰하게 하였다.


10月 23日[편집]

태백성이 각성을 범하다[편집]

○甲午/太白犯左角。

태백성(太白星)이 왼쪽의 각성(角星)을 범하였다.


격구하다[편집]

○上擊毬。

임금이 격구(擊毬)하였다.


10月 24日[편집]

유성이 서쪽으로 쏜살같이 지나가다[편집]

○丙申/流星西射。

유성(流星)이 서쪽으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10月 26日[편집]

수창궁으로 거둥하다[편집]

○戊戌/幸壽昌宮。

임금이 수창궁으로 거둥하였다.


10月 27日[편집]

왕사 자초를 불러 재를 올리고 명주와 비단을 시주하다[편집]

○己亥/上請王師自超設齋, 施以紬絹。

임금이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청하여 재(齋)를 베풀게 하고 주견(紬絹)을 시조(施助)하였다.


경성 수축 도감 판사들에게 비단과 명주를 하사하다[편집]

○上坐殿, 賜京城修築都監判事綺絹各一匹。

임금이 궁전에 앉아서 경성 수축 도감(京城修築都監) 판사(判事)에게 무늬 있는 비단[綺]과 명주[絹] 각 1필씩 내려 주었다.


관습 도감 판사 정도전이 전악서의 무공방을 거느리고 몽금척 등의 새 악곡을 연주하다[편집]

○都評議使司享上。 慣習都監判事鄭道傳ㆍ王康、副判事鄭士倜率典樂署武工房, 進《文德》、《武功》、《夢金尺》、《受寶籙》等新樂。

도평의사사에서 임금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관습 도감(慣習都監) 판사(判事) 정도전(鄭道傳)·왕강(王康)과 부판사(副判事) 정사척(鄭士倜)이 전악서(典樂署)의 무공방(武工房)을 거느리고 문덕(文德)·무공(武功)·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 등 새 음악을 올렸다.


병학, 율학 등 6학을 설치하여 양가 자제들에게 익히게 하다[편집]

○設六學, 令良家子弟肄習。 一兵學, 二律學, 三字學, 四譯學, 五醫學, 六算學。

육학(六學)을 설치하고 양가(良家)의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익히게 했으니, 1은 병학(兵學), 2는 율학(律學), 3은 자학(字學), 4는 역학(譯學), 5는 의학(醫學), 6은 산학(算學)이었다.


사은사 이직이 백탑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오다[편집]

○謝恩使李稷至白塔, 不得入而還。

사은사(謝恩使) 이직(李稷)이 백탑(白塔)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10月 28日[편집]

경천사로 돌아가다[편집]

○庚子/上還敬天寺。

임금이 경천사(敬天寺)로 돌아왔다.


10月 29日[편집]

별의 괴변을 액막이 하기 위해 재를 올리고, 왕비와 함께 부처에게 분향하다[편집]

○辛丑/以星變屢見, 集僧徒於時坐所, 設消災道場, 上與中宮, 禮佛行香。

별의 변괴(變怪)가 자주 나타난 이유로 중들을 시좌소(時坐所)에 모아서 재앙을 소멸시키는 도량(道場)을 베풀게 하고는,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예불행향(禮佛行香)[73]하였다.


二年 十一月[편집]

11月 1日[편집]

여러 관서에서 정사를 아뢰고자 시좌소로 가니, 조회를 정지시키다[편집]

○壬寅朔/都堂各司以衙朝, 詣時坐所, 上不視朝。 以往來之煩, 停衙朝。

도당(都堂)의 각 관사(官司)가 아조(衙朝)로써 시좌소(詩坐所)에 나아가니, 임금이 조회를 보지 않고, 왕래가 번잡한 이유로써 아조를 정지하게 하였다.


11月 2日[편집]

도승지 한상경 등에게 명하여 《대학연의》를 강론케 하다[편집]

○癸卯/命都承旨韓尙敬、左副承旨宋文中, 講《大學衍義》。

도승지 한상경(韓尙敬)과 좌부승지(左副承旨) 송문중(宋文中)에게 명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게 하였다.


11月 4日[편집]

안개가 많이 끼다[편집]

○乙巳/大霧。

몹시 안개가 끼었다.


11月 5日[편집]

경천사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천추절을 하례하다[편집]

○丙午/上在敬天寺, 率群臣賀千秋節。

임금이 경천사(敬天寺)에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좌산기 상시 유경이 사직하여 신선술을 배우고자 청했으나 윤허치 않다[편집]

○左散騎常侍劉敬進曰: “臣蒙至恩, 職居顯秩, 無補國家, 但縻廩祿, 心實卑陋。 乞辭本職, 退學仙術。” 上曰: “爾之遇知於我, 固非一日, 臣庶亦謂我相待甚厚。 今爾忽然遁去, 人將謂何? 且學仙者, 必遺君父。 爾棄我則不忠, 棄親則不孝。 爾欲學仙, 何也?”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유경(劉敬)이 나아가서 아뢰었다.

"신(臣)이 지극하신 은혜를 입사와 관직이 높은 지위에 있사오나, 국가에 도움은 없고 다만 늠록(廩祿)만 소비하고 있으니, 마음속으로 실상 비루(卑陋)하게 여기옵니다. 원하옵건대, 본직(本職)을 사면하고 물러가서 선술(仙術)을 배우려고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대가 나에게 지우(知遇)를 받음이 진실로 하루 이틀이 아니며, 신하들도 또한 내가 대우함이 심히 후하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그대가 갑자기 도망해 간다면 사람들이 장차 무어라 말하겠는가? 또한 신선(神仙)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임금과 아버지를 버리게 되는데, 나를 버린다면 불충(不忠)이요, 어버이를 버린다면 불효(不孝)이니, 그대가 신선을 배우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11月 6日[편집]

정신의를 중추원 부사, 전백영을 간의로 삼다[편집]

○丁未/以鄭臣義爲中樞院副使, 全伯英爲諫議。

정신의(鄭臣義)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삼고, 전백영(全伯英)을 간의대부(諫議)로 삼았다.


봉성현을 서원군으로 승격시키다[편집]

○陞峰城縣爲瑞原郡。

봉성현(峰城縣)을 승격시켜 서원군(瑞原郡)으로 삼았다.


11月 7日[편집]

가는 글씨로 전문을 쓰는 것을 금하다[편집]

○戊申/禁箋文細書。

전문(箋文)을 잘게 쓰는 것을 금지시켰다.


성 쌓는 인부들의 질병을 일일이 묻도록 명하다[편집]

○遣人築城所, 歷問役徒疾病。

사람을 성 쌓는 곳에 보내어 역도(役徒)의 질병을 일일이 묻게 하였다.


11月 9日[편집]

무략이 있는 사람을 뽑아 《진도》를 가르치다[편집]

○庚戌/判三司事鄭道傳言於上, 擇諸節制使所領軍士有武略者, 敎陣圖。

판삼사사 정도전이 임금에게 말씀을 올려, 여러 절제사들의 거느린 군사 중에서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뽑아 《진도(陣圖)》를 가르치게 하였다.


11月 10日[편집]

동지이므로 황제를 향해 하례하고, 여러 신하들의 하례는 정지시키다[편집]

○辛亥/冬至。 上率群臣, 向帝闕行賀禮, 停群臣賀。

동지(冬至)이므로 임금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황제의 궁궐을 향하여 하례(賀禮)를 행하고, 여러 신하들의 하례는 정지하게 하였다.


11月 11日[편집]

오랑합이 오다[편집]

○壬子/吾郞哈來。

오랑합(吾郞哈)이 왔다.


11月 12日[편집]

달이 묘성을 가리다[편집]

○癸丑/月掩昴。

달이 묘성(昴星)을 가리웠다.


정도전이 군사를 집합시켜 《진도》 대로 훈련시키다[편집]

○鄭道傳集軍士於毬庭, 設陣圖, 使習鼓角、旗麾、坐作、進退之節。

정도전이 군사를 구정(毬庭)에 모아 진도(陣圖)를 설치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고각(鼓角)·기휘(旗麾)·좌작 진퇴(坐作進退)의 절차를 익히게 하였다.


의주 등에 번상한 군관 가운데 장무만 남겨두고 귀향시키다[편집]

○放義州、泥城、江界道軍官番上者, 只留掌務。

의주(義州)·이성(泥城)·강계도(江界道)의 군관(軍官) 중에서 상번(上番)한 사람을 놓아 보내고, 다만 장무(掌務)만 남겨 두었다.


각도의 계수관을 정하다[편집]

○定各道界首官: 慶尙道, 鷄林、安東、尙州、晋州、金海、京山; 全羅道, 完山、羅州、光州; 楊廣道, 廣州、忠州、淸州、公州、水原; 交州ㆍ江陵道, 原州、淮陽、春州、江陵、三陟; 西海道, 黃州、海州; 京畿左道, 漢陽、鐵原; 右道, 延安、富平。

각도의 계수관(界首官)을 정했는데, 경상도는 계림(鷄林)[74]·안동(安東)·상주(尙州)·진주(晉州)·김해(金海)·경산(京山)[75]이고, 전라도는 완산(完山)[76]·나주(羅州)·광주(光州)이며, 양광도 는 광주(廣州)·충주(忠州) 청주(淸州)·공주(公州)·수원(水原)이며, 교주 강릉도(交州江陵道)는 원주(原州)·회양(淮陽)·춘주(春州)·강릉(江陵)·삼척(三陟)이며, 서해도(西海道)는 황주(黃州)·해주(海州)이며, 경기좌도(京畿左道)는 한양(漢陽)·철원(鐵原)이며, 우도(右道)는 연안(延安)·부평(富平)이다.


11月 15日[편집]

절비의 삼년상을 마치고 여러 왕자와 군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다[편집]

○丙辰/命世子宴王子諸君, 以節妃三年喪畢也。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왕자(王子)와 여러 군(君)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였으니, 절비(節妃)의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때문이었다.


11月 16日[편집]

명나라의 읍배례를 시행토록 하다[편집]

○丁巳/命行朝廷揖拜禮。 都評議使司及各司會于壽昌宮, 三品以下, 入使司廳行揖禮, 出闕門外相揖, 乃罷。

명하여 조정(朝廷)의 읍배례(揖拜禮)를 행하게 하였다. 도평의사사와 각 관사(官司)에서 수창궁에 모여서 3품 이하의 관원을 도평의사사의 청사(廳事)에 들어와서 읍례(揖禮)를 행하고, 대궐 문밖에 나와서 서로 읍(揖)하고 헤어졌다.


11月 19日[편집]

신도의 건설에 내원당 감주 조생 등의 중들이 자원하다[편집]

○庚申/內願堂監主祖生進見。 先是, 上欲營新都, 慮用民力曰: “僧徒游手者衆, 宜集而役之。” 各宗僧聞之, 有欲勸募僧徒赴役者數十輩, 祖生引進, 上悅, 飯祖生, 賜各宗僧絹及緜布。

내원당 감주(內願堂監主) 조생(祖生)이 임금을 진현(進見)하였다. 이보다 먼저 임금이 새 도읍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민력(民力)을 쓰게 됨을 염려하여 말하기를,

"중들 중에 노는 사람이 많으니 마땅히 모아서 역사(役事)시켜야 되겠다."

하니, 각 종파(宗派)의 중이 이 말을 듣고는 중들을 권유 모집하여 역사(役事)에 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 되었다. 조생(祖生)이 인솔하여 나아오니 임금이 기뻐하여 조생에게 음식물을 주고, 각 종파(宗派)의 중에게는 명주와 면포(綿布)를 내려 주었다.


11月 20日[편집]

얼음이 얼지 않는 등의 기후 변화로 소격전에서 초제를 지내다[편집]

○辛酉/以無氷且霧, 遣左承旨崔迤, 醮太一于昭格殿, 以祈時令調和。

얼음이 얼지 아니하고 또 안개가 끼인 이유로써, 좌승지 최이(崔迤)를 보내어 소격전(昭格殿)에서 태일성(太一星)을 초제(醮祭)하여 절후(節候)가 조화(調和)되기를 빌게 하였다.


11月 21日[편집]

사헌부에서 공납한 말 값의 단자를 몰래 도용한 조반 등을 논죄하다[편집]

○壬戌/司憲府請罪趙胖、趙琳、具成老: “胖等會赴遼東, 受馬價段子, 私竊易換, 請治其罪。” 上令明察得情。 是日又請, 上曰: “二百餘匹, 豈能盡換? 若盡徵納, 必有冤枉。 獨其在逃押物, 可疑, 宜出榜諭示, 三日內自來者, 從末減, 以不畏官令論, 其不出者, 乃行徵納。”

사헌부에서 조반(趙胖)·조임(趙琳)·구성로(具成老)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조반 등이 그전에 요동(遼東)에 가서 말 값을 받아서 단자(段子)를 사사로이 몰래 교환했기 때문에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밝게 살펴서 실정을 알아내게 하였다. 이날에 와서 또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2백여 필을 어찌 능히 다 교환했겠는가. 만약 다 징납(徵納)한다면 반드시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 도망해 자취를 감춘 압물(押物)은 의심스러우니 마땅히 방문(榜文)을 내걸어 유시(諭示)하되, 3일 안에 스스로 온 사람은 말감(末減)에 좇아 관청의 영(令)을 두려워하지 않는 죄로써 논단(論斷)하고, 그 나오지 않는 사람은 징납을 행하게 하라."


11月 24日[편집]

짙은 안개가 끼다[편집]

○乙丑/昏霧。

짙은 안개가 끼었다.


권희를 검교 문하 시중으로 삼다[편집]

○以權僖爲檢校門下侍中。

권희(權僖)를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동북면의 여러 능에 권무인 능직 2인씩을 두다[편집]

○始置東北面諸陵直權務各二人。

비로소 동북면의 여러 능직(陵直) 권무(權務)를 각각 2인씩 두었다.


11月 25日[편집]

달이 방성을 범하다[편집]

○丙寅/月犯房。

달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11月 26日[편집]

수창궁으로 거둥하다[편집]

○丁卯/幸壽昌宮。

임금이 수창궁으로 거둥하였다.


11月 28日[편집]

좌복야 김주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하다[편집]

○己巳/賜左僕射金湊衣酒。

좌복야(左僕射) 김주(金湊)에게 의복과 술을 내려 주었다.


조준이 질병이 있는 조관에게 의원을 보내 진찰하는 제도를 실시하자고 청하다[편집]

○左侍中趙浚請行朝士疾病遣醫(胗)〔診〕試之法。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이 조관(朝官)의 질병에 의원을 보내어 진찰하는 법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선군, 전조의 징수, 호구 등에 대한 도당의 구폐 사의(救弊事宜)[편집]

○都評議使司以救弊事宜, 條陳上言:

其一曰近來倭寇稍息, 實賴兵船之力。 船軍或有在逃身故者, 萬戶、千戶移文守令, 卽充其額。 都觀察使、都節制使無時點考, 守令如有闕立船軍者, 一名笞一十, 每一名加一等, 罪止杖九十, 還任, 十名以上, 杖一百, 罷職。 二曰各道侍衛軍官於番上往來之際, 擅入州郡, 騷擾人民, 踏損禾穀, 民甚苦之。 今後悉令屯宿草野, 毋入州郡, 違者, 身及牌頭, 依律論罪。 三曰宮司倉庫之奴, 因收田租, 分往諸州, 多率人馬, 橫斂多端。 今後奴一名馬一匹, 以爲定數, 田租之外橫斂, 痛行禁斷。 四曰民無恒産者, 彼此相移, 戶口日減。 自戶口成籍之後, 如有流移者, 家長杖一百; 許接者, 罪同; 里正於里內有移去移來, 不卽告官者, 杖七十; 守令許接而不還本者, 移去而不推核者, 各杖六十, 還任。 五曰今歲諸道, 因旱年荒。 如不早圖, 飢饉荐臻。 且無知之民, 不顧後患, 以祀神、香徒契內等事, 糜費不小, 州郡守令亦因賓客送迎, 糜費亦多。 願自今冬, 供上及祭醮、上國使臣宴享外, 禁酒。

上從之。

도평의사사에서 폐해를 구제하는 사의(事宜)로써 조목별로 진술하여 말씀을 올렸다.

"1. 근래에 왜적(倭賊)의 침구가 조금 쉬게 된 것은 실로 병선(兵船)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선군(船軍)이 혹은 도망 중에 있거나 자신이 사고(事故)가 난 사람은 만호(萬戶)·천호(千戶)가 수령(守令)에게 공문을 보내어 즉시 그 수효를 충당하게 하고, 도관찰사(都觀察使)와 도절제사(都節制使)는 정한 때가 없이 수시(隨時)로 점고(點考)하여, 수령(守令)이 만약 선군(船軍) 세우는 것을 빠뜨리는 사람이 있으면 1명에 태(笞) 10대를 집행하고, 매 1명마다 1등을 가하여 죄를 장(杖) 90대까지 이르게 하되 환임(還任)시키고, 10명 이상이 되면 장(杖) 1백 대를 집행하고 관직을 파면하게 할 것이며,

2. 각도의 시위 군관(侍衛軍官)이 상번(上番)차 왕래할 즈음에 주군(州郡)에 함부로 들어가서 인민을 소란하게 하고 볏곡을 밟아 손상시키니,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럽게 여깁니다. 지금부터는 모두 그들로 하여금 들판[草野]에 모여서 자[屯宿]게 하고는 주군(州郡)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자신과 패두(牌頭)를 율(律)에 의거하여 논죄(論罪)하게 할 것이며,

3. 궁사(宮司)·창고(倉庫)의 노속(奴屬)이 전조(田租)를 징수하는 일로 인하여 여러 주(州)에 나누어가서, 사람과 말을 많이 거느리고 온갖 방법으로 불법 징수하게 되니, 지금부터는 노(奴) 1명과 말 1필로써 정수(定數)로 삼고, 전조(田租) 외에 불법 징수하는 것은 엄하게 금단(禁斷)할 것이며,

4. 백성으로서 항산(恒産)이 없는 사람은 저곳과 이곳에서 서로 옮기게 되어 호구(戶口)가 날로 감손하게 되니, 호구(戶口)가 호적(戶籍)에 등록된 후로부터는 만약 유이(流移)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장(家長)은 장(杖) 1백 대를 집행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죄를 가장(家長)과 같게 주고, 이정(里正)이 마을 안에서 옮겨 가고 옮겨 오는 사람이 있는데도 즉시 관청에 알리지 않는 사람은 장(杖) 70대를 집행하고, 수령(守令)이 받아들여 본향(本鄕)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사람과 옮겨 갔는데도 추문(推問)하지 않는 사람은 각기 장(杖) 60대를 집행하되 환임(還任)시킬 것이며,

5. 금년에 여러 도(道)에서 가뭄으로 인하여 연사(年事)가 흉년이오니, 만약 일찍이 도모하지 않는다면 기근(飢饉)이 거듭 닥쳐오게 될 것입니다. 또 무지한 백성들이 훗날의 걱정을 돌보지 않고서 신(神)에게 제사하고, 향도계(香徒契)[77] 등의 일로써 소비하는 것이 적지 않으며, 주군(州郡)의 수령들도 또한 빈객(賓客)을 전송하고 영접하는 일로 인하여 소비하는 것이 또한 많게 되니,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공상(供上)과 제초(祭醮)와 상국 사신(上國使臣)을 연향(宴享)하는 이외에는 술을 금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서방색을 봉서국으로 개칭하다[편집]

○改書房色爲奉書局。

서방색(書房色)을 고쳐서 봉서국(奉書局)으로 하였다.


11月 29日[편집]

김주를 계룡산의 신도 예정지로 보내다[편집]

○庚午/遣金湊于雞龍新都。

김주(金湊)를 계룡산의 새 도읍에 보내었다.


二年 十二月[편집]

12月 1日[편집]

왕우·유만수 등과 내정에서 격구하다[편집]

○壬申朔/上與歸義君王瑀、贊成事柳蔓殊等擊毬內庭。

임금이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와 찬성사(贊成事) 유만수(柳蔓殊) 등과 더불어 내정(內庭)에서 격구(擊毬)하였다.


12月 2日[편집]

서강에 조수가 넘쳐 민가를 침수시키다[편집]

○癸酉/西江潮溢, 溺民戶。

서강(西江)에서 조수(潮水)가 넘쳐서 민호(民戶)를 침몰시켰다.


12月 4日[편집]

소격전 옛 터에 거둥하여 종묘의 터를 살펴보고 독역관을 정하다[편집]

○乙亥/上如昭格殿舊基, 相宗廟之基, 定督役官。

임금이 소격전(昭格殿) 옛터[舊基]에 거둥하여 종묘(宗廟)의 터를 살펴보고 독역관(督役官)을 정하였다.


12月 5日[편집]

금주령을 해제토록 명하다[편집]

○丙子/命憲司: “時方大寒, 且使臣入京, 其除禁酒之令。”

헌사(憲司)에 명하였다.

"지금 매우 춥고 또한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니, 금주(禁酒)의 영을 해제하게 하라."


12月 6日[편집]

동북면의 숙위자에게 면포를 하사하다[편집]

○丁丑/賜緜布于東北面宿衛軍士。

동북면(東北面)에서 숙위(宿衛)하는 군사에게 면포(緜布)를 내려 주었다.


12月 7日[편집]

하정사 경의 등이 요동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오다[편집]

○戊寅/賀正使慶儀等至遼東, 不得入而還。

하정사(賀正使) 경의(慶儀) 등이 요동(遼東)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12月 8日[편집]

내사가 좌군 도독부의 자문을 가지고 오니,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맞이하다[편집]

○己卯/朝廷使臣內史金仁甫等四人齎左軍都督府咨文來, 上率百官, 具儀衛郊迎。

중국의 사신 내사(內史) 김인보(金仁甫) 등 4인이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오니,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의위(儀衛)를 갖추어 교외(郊外)에 가서 맞이하였다.


12月 9日[편집]

달이 묘성을 범하다[편집]

○庚辰/月犯昴。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내사 김인보 등의 부모에게 쌀·콩을 하사하다[편집]

○賜金仁甫等父母米豆一百石。

김인보(金仁甫) 등의 부모에게 쌀·콩 1백 석을 내려 주었다.


12月 10日[편집]

수창궁에서 내사에게 잔치를 베풀다[편집]

○辛巳/上宴使臣于壽昌宮。

임금이 수창궁에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12月 11日[편집]

하윤의 상언대로 계룡산의 신도 건설을 중지하고 천도할 곳을 다시 물색케 하다[편집]

○壬午/遣大將軍沈孝生如雞龍山, 罷新都之役。 京畿左右道都觀察使河崙上言: “都邑宜在國中。 雞龍山地偏於南, 與東西北面相阻。 且臣嘗葬臣父, 粗聞風水諸書。 今聞雞龍之地, 山自乾來, 水流巽去, 是宋朝胡舜臣所謂水破長生衰敗立至之地, 不宜建都。” 上命進書, 令判門下府事權仲和、判三司事鄭道傳、判中樞院事南在等, 與崙參考, 且覆驗前朝諸山陵吉凶以聞。 於是, 以奉常寺諸山陵形止、案山水來去考之, 吉凶皆契, 乃命孝生罷新都之役, 中外大悅。 胡氏之書, 自此始行。 上命以前朝書雲觀所藏秘錄文書, 盡授崙考閱, 更覽遷都之地以聞。

대장군(大將軍) 심효생(沈孝生)을 보내어 계룡산에 가서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였다. 경기 좌·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 하윤(河崙)이 상언(上言)하였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서면·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風水)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 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 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임금이 명하여 글을 바치게 하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權仲和)·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재(南在) 등으로 하여금 하윤과 더불어 참고하게 하고, 또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山陵)의 길흉(吉凶)을 다시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에 봉상시(奉常寺)의 제산릉 형지안(諸山陵形止案)의 산수(山水)가 오고 간 것으로써 상고해 보니 길흉(吉凶)이 모두 맞았으므로, 이에 효생(孝生)에게 명하여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니,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호씨(胡氏)[78]의 글이 이로부터 비로소 반행(頒行)하게 되었다. 임금이 명하여 고려 왕조의 서운관(書雲觀)에 저장된 비록 문서(秘錄文書)를 모두 하윤에게 주어서 고열(考閱)하게 하고는 천도(遷都)할 땅을 다시 보아서 아뢰게 하였다.


12月 13日[편집]

진안군 이방우의 졸기[편집]

○甲申/鎭安君芳雨, 上之長子也, 性嗜酒, 日以痛飮爲事, 飮燒酒病作而卒。 輟朝三日, 諡敬孝。 子福根。

진안군(鎭安君) 이방우(李芳雨)는 임금의 맏아들인데,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많이 마시는 것으로써 일을 삼더니, 소주(燒酒)를 마시고 병이 나서 졸(卒)하였다.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경효(敬孝)란 시호를 내렸다. 아들은 이복근(李福根)이다.


12月 14日[편집]

백관이 진안군의 장례에 조문하다[편집]

○乙酉/百官弔慰。

백관(百官)들이 진안군을 조위(弔慰)하였다.


12月 15日[편집]

진안군의 장례 행렬을 백관들이 문 밖에서 전송하다[편집]

○丙戌/葬鎭安君, 百官送于門外。

진안군을 장사하는데 백관들이 문 밖에서 전송하였다.


내사들이 고향에 가서 근친하다[편집]

○使臣各覲其鄕。

사신들이 각기 그 본향(本鄕)에 가서 근친(覲親)하였다.


12月 16日[편집]

오랑합 10여 인에게 무명옷을 주다[편집]

○丁亥/賜吾郞哈十餘人緜布衣。

오랑합(吾郞哈) 10여 인에게 면포(緜布)로 지은 옷을 내려 주었다.


12月 18日[편집]

경천사로 돌아가다[편집]

○己丑/上還敬天寺。

임금이 경천사(敬天寺)에 돌아왔다.


급전사에서 향리의 자손 등에게 경기의 전지를 주지 말도록 청하다[편집]

○戶曹給田司狀啓曰: “願將京畿餘田, 給於受田科不足者及初仕未受田者。 其中鄕吏子孫無免鄕明文者、公私賤口、工商ㆍ巫覡ㆍ倡妓ㆍ僧尼子孫冒受官爵者, 幷不給之。” 上曰: “免鄕之吏, 有功於國者, 雖無免鄕明文, 給之; 初仕人曾有功勞者, 從仕以後, 國耳忘家者, 不問從來, 竝宜給之。”

호조(戶曹)의 급전사(給田司)에서 장계(狀啓)하였다.

"원컨대, 경기(京畿)의 남은 전지(田地)를 전과(田科)를 받는 데에 부족한 사람과 초사(初仕)하여 전지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 주고, 그 중에 향리(鄕吏) 자손이 향리(鄕吏)를 면한 명문(明文)이 없는 사람과 공사 천구(公私賤口)·공상(工商)·무격(巫覡)·창우(倡優)·기생(妓生)·승니(僧尼)의 자손으로서 관작을 부당하게 받은 사람들은 모두 전지(田地)를 주지 마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향리(鄕吏)를 면한 관리가 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은 비록 향리(鄕吏)를 면한 명문(明文)이 없더라도 전지를 줄 것이며, 초사(初仕)한 사람도 일찍이 공로가 있는 사람과 종사(從仕)한 이후에 나라를 위하고 자기 집을 잊은 사람은 소종래(所從來)를 불문(不問)하고 모두 전지를 주게 하라."


12月 19日[편집]

김승주를 이성 만호, 조치를 서북면 험찰 별감으로 삼다[편집]

○庚寅/以殿中卿金承霔爲泥城萬戶, 司憲監察曺致爲西北面驗察別監。

전중 경(殿中卿)[79] 김승주(金承霔)를 이성 만호(泥城萬戶)로 삼고, 사헌 감찰(司憲監察) 조치(曹致)를 서북면 험찰 별감(西北面驗察別監)으로 삼았다.


12月 21日[편집]

진안군의 관을 작게 만든 선공감의 관원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석방하다[편집]

○壬辰/囚繕工監官吏于巡軍獄。 繕工監治鎭安君槨, 隘小不能容棺也。 甲午, 釋之。

선공감(繕工監)의 관리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다. 선공감(繕工監)에서 진안군(鎭安君)의 곽(槨)을 만들었는데, 좁고 작아서 관(棺)을 능히 용납하지 못하게 한 때문이다. 23일에 이를 석방하였다.


12月 27日[편집]

대간이 사신으로 가서 진현을 잘못하여 구타당한 정당 문학 이염을 탄핵하다[편집]

○戊戌/諫官、憲司劾政堂文學李恬曰: “臣等竊謂, 孔子曰: ‘使於四方, 不辱君命。’ 惟我殿下卽位以來, 奉使天朝者, 皆蒙至恩。 今恬奉使入朝, 進見應對之際, 有所違失, 至被歐杖, 取笑中國。 自是中國, 不許朝聘。 所以致此者, 必有其故。 罪宜重論, 反居寵秩, 一國臣民, 莫不痛心。 乞收其職牒, 鞫問其故, 以礪士節。” 上只令罷職。

간관(諫官)과 헌사(憲司)에서 정당 문학(政堂文學) 이염(李恬)을 탄핵하였다.

"신들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공자가 말하기를,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황제의 조정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은 모두 지극한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이염은 명령을 받들고 입조(入朝)하여 진현(進見)하고 응대(應對)할 때에 어긋나고 실수한 일이 있어서 구타와 매질을 당하여 중국에 웃음거리가 되었으므로, 이로부터 중국에서는 조빙(朝聘)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므로, 죄는 마땅히 중하게 논단(論斷)해야 될 것인데도, 도리어 용질(寵秩)에 머물러 있으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매우 상심(傷心)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그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그 까닭을 국문(鞫問)하여 사절(士節)을 권려(勸勵)하소서."하니, 임금이 다만 파직하도록 하였다.


12月 28日[편집]

참형·교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다[편집]

○己亥/宥二罪以下囚。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사면(赦免)하게 하였다.


12月 29日[편집]

왕비와 함께 경천사에서 돌아와 권손의 집에 머물다[편집]

○庚子/上與中宮至自敬天寺, 下輦于柳井洞權遜第。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경천사(敬天寺)에서 와서 유정동(柳井洞) 권손(權遜)의 사제(私第)에서 연(輦)을 내렸다.


주석[편집]

  1. 중국
  2. 강태공(姜太公)
  3. 중국 고대의 황제(皇帝)와 전욱(顓頊)의 도(道)가 기재되어 있다는 적작(赤雀)이 물고 온 글
  4. 대가(大駕) 앞에나 군중(軍中)에서 대장(大將)의 앞에 세우는 기(旗)의 한 종류이니, 곧 기의 신(神)임
  5. 환조의 능
  6. 불사(佛事)를 경영하여 시연(施緣)을 구하는 중
  7. 서울에서 각도(各道)에 이르는 본가도(本街道)의 도계(道界)에 있는 고을
  8.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글월
  9. 배로 물건을 운반하는 것
  10. 중의 도첩(度牒) 사무를 맡아 보는 관아
  11. 부처를 공양하여 얻은 복(福)을 말함인데, 여기서는 중을 말한 것임.
  12.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
  13. 국자감의 진사(進士)를 뽑는 시험
  14. 태종(太宗)
  15. 특수한 지방의 하급 행정구획. 소(所)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금·은·동·철·실[絲]·종이·도기(陶器)·먹(墨) 등을 만들기 위하여 두었던 특수 기관으로서, 여기서 일하는 공장(工匠)은 죄인 또는 천민의 집단이었다. 향(鄕)은 부곡(部曲)과 비슷한 행정구역의 하나인 듯하다.
  16. 임명
  17. 옥새
  18.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 주는 술
  19. 환조(桓祖)
  20. 여름철에 거처하는 청사
  21. 중국
  22. 왕실의 재산과 물품을 관리하는 관부(官府)
  23. 보좌하는 현량(賢良)한 신하
  24. 황제의 경계하는 명령
  25. 공양왕
  26.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봄
  27. 조선
  28. 명군(明軍)
  29. 지금의 태국(泰國)
  30. 내시(內侍)
  31. 사헌부의 정4품 벼슬
  32. 중서문하성의 정5품 벼슬
  33. 사헌부의 정5품 벼슬
  34. 나이 젊고 지위가 낮은 환관(宦官)
  35. 빈(嬪)과 잉첩(媵妾). 빈은 정1품의 내명부(內命婦)의 품계(品階)이고, 잉첩은 시녀(侍女)이다.
  36.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의 영예를 축복하여 임금이 내리는 연회
  37. 법문(法文)만이 갖추어 있는 것
  38. 내금위(內禁衛)·충순위(忠順衛)·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별시위(別侍衛)·족친위(族親衛) 등에 속하여 근시(近侍)·숙위(宿衛)를 맡은 관리
  39. 패(牌)의 우두머리
  40. 도조(度祖)
  41.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제위(帝位)에 오를 때에 하늘로부터 내려 받았다는 적색(赤色)의 부절(符節)
  42. 경복흥(慶復興)
  43. 최영(崔瑩)
  44. 태조 즉위년
  45. 이성계(李成桂)
  46. 조준(趙浚)
  47. 배극렴(裵克廉)
  48. 정도전(鄭道傳)
  49. 임금이 보살피는 정무(政務)
  50. 나하추(納哈出)
  51. 교활한 아이. 곧 신우(辛禑)를 지칭한 말임.
  52. 신우(辛禑)
  53. 춘하 추동(春夏秋冬) 사시의 사냥하는 것을 그린 그림
  54. 조선
  55. 중국 황태자의 생일
  56. 시정(時政) 또는 경의(經義)에 관한 과거(科擧) 문제의 답안
  57. 우왕(禑王)
  58. 유교(儒敎)가 아닌 불교(佛敎)나 도교(道敎)와 같은 종교를 이르는 것인데, 여기서는 불교를 말함.
  59. 공훈이 큰 돌아가신 아버지.
  60. 맹자(孟子)
  61. 쓸데없는 관원
  62. 왕실의 세계(世系)
  63. 김춘추(金春秋)
  64. 공덕(功德)이 쌓이고 또 쌓임.
  65. 본손(本孫)과 지손(支孫)
  66. 주나라 선조(先祖) 기(棄)
  67. 왕족(王族)
  68. 태조(太祖)
  69. 공손(公孫)과 같은 말. 즉 왕후(王侯)의 손자.
  70. 된서리가 내려 나무나 풀에 하얗게 얼어붙은 것. 상고대.
  71. 관명(官名)
  72. 매월 여섯 번씩 곧 5일마다 육부(六部)와 대성(臺省)의 관원들이 조회(朝會)하여 임금에게 정사에 관한 일들을 보고하는 것. 고려 때에는 1일·5일·11일·15일·21일·25일에 하였던 것 같고, 이조 때에는 처음에 1일·6일·11일·16일·21일·26일로 날짜에는 다소의 변화가 있었으나, 역시 육아일(六衙日)을 지키다가, 뒤에 줄어서 1일·11일·21일·25일의 사아일(四衙日)로 되었음.
  73. 부처에게 경배(敬拜)하고 분향(焚香)하는 것
  74. 경주(慶州)
  75. 성주(星州)
  76. 전주(全州)
  77. 불교 신앙 단체의 계(契)의 하나
  78. 호순신(胡舜臣)
  79. 전중 시어사(殿中侍御史)를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