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강헌대왕실록/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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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 春正月[편집]

1月 1日[편집]

백관을 거느리고 황제에게 새해 축하례를 드리고 신하들의 축하를 받다[편집]

○丙申朔/上率百官, 賀帝正, 受朝賀。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명나라 황제에 대한 새해의 축하례를 행하고 〈군신들로부터〉 새해의 축하를 받았다.


1月 2日[편집]

사은사 이무와 하천추사 정남진이 남경에서 돌아오다[편집]

○丁酉/謝恩使李茂、賀千秋使鄭南晋回自京師。

사은사(謝恩使) 이무(李茂)와 하천추사(賀千秋使) 정남진(鄭南晉)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1月 3日[편집]

왜인 표시라 등 4인이 와서 항복하니, 경상도에 두다[편집]

○戊戌/倭人表時羅等四人來降, 命置諸慶尙州郡。

왜인 표시라(表時羅) 등 4인이 와서 항복하니, 경상도 고을에 두라고 명하였다.


1月 4日[편집]

판개성부사 성석린을 동북면에 보내어 여러 능에 제사지내게 하다[편집]

○己亥/遣判開城府事成石璘, 祭東北面諸陵。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성석린(成石璘)을 동북면(東北面)에 보내어 여러 능(陵)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형조에서 사헌부를 탄핵하지 못하게 하다[편집]

○大司憲朴經等上疏請罪刑曹主事鄭持。 初持以爭禮事, 欲劾雜端曺致, 憲司知之, 先劾持。 至是, 論其凌辱憲司之罪, 請自今刑曹毋得彈劾憲司, 上允之, 罷持職。

대사헌 박경(朴經) 등이 상소하여 형조 주사(刑曹主事) 정지(鄭持)의 죄를 청하였다. 당초에 지(持)가 예절(禮節)의 시비로 잡단(雜端) 조치(曹致)를 탄핵하려고 하였는데, 헌사(憲司)에서 이를 알고 먼저 지(持)를 탄핵하고, 이때에 이르러 그 헌사를 능욕(凌辱)한 죄를 청하고, 또 지금부터는 형조에서 헌사를 탄핵하지 못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지(持)의 벼슬을 파(罷)하였다.


1月 6日[편집]

오랑캐 만호 몽상과 천호 보리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辛丑/孔州以北吾郞改萬戶蒙尙、千戶甫里等遣人來獻土物, 賜木緜紬紵有差。

공주(孔州) 이북의 오랑캐(吾郞改) 만호(萬戶) 몽상(蒙尙)과 천호(千戶) 보리(甫里) 등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니, 목면(木綿)·명주·모시를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민간에서 흰 가축을 기르지 못하게 한다는 말을 퍼뜨린 능귀 등을 참형하다[편집]

○水原記官能貴、龍駒戶長希進造妖言: “禁民間犬馬雞羔之色白者。” 命皆處斬, 傳示諸道。

수원(水原) 기관(記官) 능귀(能貴)와 용구(龍駒)[1] 호장(戶長) 희진(希進)이 요망한 말을 만들어,

"민간에서 흰 빛깔의 개·말·닭·염소 등을 기르지 못하게 한다."

하였으므로, 모두 참형에 처하여 여러 도에 전해 보이었다.


1月 8日[편집]

간관이 조성 도감에서 물의를 일으킨 판개성부사 이거인을 탄핵하다[편집]

○癸卯/諫官張至和等劾判開城府事李居仁曰: “居仁以詭詐之資, 仕前朝, 致位崇班。 當殿下卽位之初, 奉使上國, 暗行貿易, 還至萊州, 爲人所竊, 勒令從事人金夫介、李仁吉等償其段子, 及到我境, 忿猶未銷, 囚李仁吉于隨州, 遂令病死, 其貪暴至矣。 又當殿下建都之初, 以掌土之官, 爭吏曹議郞崔士威所占家基, 未遂其欲, 乃奪檢校中樞院副使崔融之家, 使其妻子冒寒慟哭。 頃者, 臣等劾其所犯, 幸蒙聖慈, 復其舊任, 尙不改心易慮, 妄與造成都監, 造辭飾非, 以駭衆聽, 非毁所司。 乞收其職牒, 明鞫所犯, 以懲奉使興利之罪, 以杜新邑攘奪之漸。” 上以居仁原從之功, 只許罷職。

간관(諫官) 장지화(張至和) 등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이거인(李居仁)을 탄핵하여 말하였다.

"거인(居仁)은 속이는 성질을 가지고 고려조에 벼슬하여 계급이 숭반(崇班)에 올랐으며,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두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남몰래 무역(貿易)을 하여 가지고 내주(萊州)에 돌아와서 도둑에게 잃어버리자, 강제로 종사인(從事人) 김부개(金夫介)와 이인길(李仁吉)에게 그 비단을 보상하게 하고,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그 분(忿)이 풀리지 아니하여 이인길을 수주(隨州)[2]에 가두어서 드디어 병사(病死)하게 하였으니, 그 탐포(貪暴)함이 지극합니다. 또 전하께서 도읍(都邑)을 건설하는 때를 당하여, 토지를 맡은 관원[掌土之官]으로 이조 의랑(吏曹議郞) 최사위(崔士威)가 점유한 집터[家基]를 빼앗으려고 하다가 그 욕심을 이루지 못하자, 검교중추원 부사(檢校中樞院副使) 최융(崔融)의 집을 빼앗아, 그의 처자(妻子)로 하여금 추위를 무릅쓰고 통곡하게 하였으므로, 일전에 신 등이 그 죄를 탄핵하였던 것입니다. 다행히 전하의 사랑을 받아 옛날의 직품에 복직하였는데, 아직도 마음을 고치지 않고 망령되게 조성 도감(造成都監)에 참예하여 거짓말을 만들어서, 여러사람의 이목을 놀랍게 하고 유사(攸司)를 헐뜯으오니, 청하옵건대 그 직첩(職牒)을 거두고 그 범한 죄를 밝게 국문(鞫問)하여, 사신(使臣)으로서 장사하는 죄를 징계하고, 새 도읍에서 약탈하는 폐습을 막게 하소서."

임금이 거인(居仁)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고 하여 다만 파직하는 것만 허락하였다.


1月 9日[편집]

여러 도에 특사를 보내어 군용을 검열하게 하다[편집]

○甲辰/遣使諸道, 點考軍容。 上將軍申孝昌于慶尙道, 大將軍金季壽于全羅道, 大將軍具成亮于豐海道, 大將軍盧尙義于江陵道。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군용(軍容)을 점고(點考)하게 하였다. 상장군(上將軍) 신효창(申孝昌)을 경상도에, 대장군(大將軍) 김계수(金季壽)를 전라도에, 대장군 구성량(具成亮)을 풍해도(豐海道)에, 대장군 노상의(盧尙義)를 강릉도(江陵道)에 보냈다.


예조 전서 조영규의 졸기[편집]

○禮曹典書趙英珪卒。 英珪初名評。 從上潛邸, 屢立戰功, 國初, 與於功臣之列, 至是病卒。 贈參贊門下府事, 致賻以厚。 子珠、仁、祐。

예조 전서(禮曹典書) 조영규(趙英珪)가 졸(卒)하였다. 영규의 처음 이름은 조평(趙評)이었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따라다니며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웠고, 개국(開國)하자 〈개국〉 공신에 참예하였다.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니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증직(增職)하고 후하게 부의(賻儀)하였다. 아들 조주(趙珠)·조인(趙仁)·조우(趙祐)가 있다.


1月 10日[편집]

도평의사사에서 숙위군의 구조 개편에 대해 아뢰다[편집]

○乙巳/都評議使司啓曰: “前朝之季, 官爵汎濫, 宿衛之士, 皆受無祿添職, 生理甚艱; 老幼無才者, 充職各領, 徒費廩祿, 實爲兩失。 乞令三軍府、兵曹, 將各道各衛時散武官等, 考其年貌才藝, 以備衛領, 誠爲便益。” 上兪允施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아뢰었다.

"고려 말기에 관작(官爵)이 남발되어,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은 모두 녹(祿)이 없는 첨직(添職)만 맡아서 생리(生理)가 매우 어렵고, 늙고 어리고 재주 없는 사람들이 각 영(領)에 충당되어 국고(國庫)만 축을 내니, 실로 두 가지 다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삼군부(三軍府)와 병조(兵曹)로 하여금 각도(各道)·각위(各衛)의 현직 및 퇴직 무관(武官)들의 나이와 얼굴과 재주와 기술을 조사하여 위(衛)·영(領)의 군인을 삼는 것이 실로 편하고 도움이 되겠습니다."

임금이 윤허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月 11日[편집]

수로 전운소 완호 별감을 두다[편집]

○丙午/置水路轉運所完護別監。 自龍山江至忠州淵遷凡七所, 每所隷戶三十。

수로 전운소 완호 별감(水路轉運所完護別監)을 두었다. 용산강(龍山江)으로부터 충주(忠州)의 연천(淵遷)까지 무릇 일곱 소(所)에 각각 30호씩 예속시키었다.


간관이 사신 가서 무역하다 물의를 일으킨 상의중추원사 정남진을 탄핵하다[편집]

○諫官張至和等劾商議中樞院事鄭南晋曰: “嘗奉使中國, 肆行貿易, 與護送鎭撫相詰而鬪, 貽笑中國。 請令憲司鞫問論罪。” 上曰: “南晋, 原從也, 又其奉使, 往還及期, 可嘉, 勿問。”

간관(諫官) 장지화(張至和) 등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정남진(鄭南晉)을 탄핵하였다.

"일찍이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마음대로 물화를 무역하다가 호송 진무(鎭撫)와 서로 싸우게 되어 중국 사람에게 웃음을 사게 되었으니, 청하옵건대 헌사(憲司)로 하여금 국문하여 죄를 논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남진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며, 또 사명(使命)을 받들고 기일 안에 갔다가 돌아왔으므로 가상하니, 죄를 묻지 말라."


1月 14日[편집]

장지화가 개성부에서 나눈 집터의 부수를 다시 정할 것을 상소하다[편집]

○己酉/張至和等上疏以爲:

殿下肇造新邑, 命開城府, 自時散各品, 至于庶人, 量給家基, 以臣等所見, 誠有未便。 今新都之地, 不過五百餘結。 若以開城府所定正一品六十負, 以次而降, 則文武見任, 尙難周給, 況散官庶人乎? 願下攸司, 更定負數, 上不過三四十負, 則人皆無憾, 而各得其所矣。

上兪允。

장지화(張至和) 등이 상소하였다.

"전하께서 새로 도읍을 정함에 있어서 개성부(開城府)에 명하여 현직·퇴직 관리의 각품(各品)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집터를 나누어 주게 하였는데, 신 등의 소견으로는 진실로 옳지 못하옵니다. 지금 신도(新都)의 면적은 5백여 결(結)에 불과한데, 만약에 개성부에서 정한 대로 정1품에게 60부(負)를 주고 차차로 내려오면, 문·무관의 현직자도 골고루 줄 수 없거늘, 하물며 산관(散官)과 서민에게 주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유사(攸司)에 명령을 내리어 다시 부수(負數)를 정하여 최고 3, 40부를 지나지 않게 하면 모두 유감이 없고, 각각 살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윤허하였다.


개성부에서 다시 각 품의 집터를 정하다[편집]

○開城府更定各品家基。 正一品三十五負, 降殺以五, 至于六品十負, 庶人則二負。

개성부에서 다시 각품(各品)의 집터를 정하였다. 정1품이 35부(負), 이하 한 품에 5부씩 내려 6품에 이르러 10부, 서민은 2부씩 주었다.


1月 19日[편집]

오랑합 만호와 천호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甲寅/吾郞哈萬戶波所、千戶照乙怪ㆍ李都介等來獻土物, 各賜衣服。

오랑합(吾郞哈) 만호(萬戶) 파소(波所)와 천호(千戶) 조을괴(照乙怪)·이도개(李都介)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각각 의복을 내려 주었다.


요동에서 넘어온 사람을 압송해 돌려보내다[편집]

○人有自遼東來者, 命中郞將鄭安止, 管押發還。

요동(遼東)에서 사람이 왔으므로, 중랑장(中郞將) 정안지(鄭安止)에게 명하여 압송해서 돌려보내었다.


1月 22日[편집]

금성이 낮에 보이다[편집]

○丁巳/金星晝見。 始自乙亥。

금성(金星)이 낮에 보이었는데, 을해방(乙亥方)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1月 23日[편집]

은천군 조기가 등창이 나니, 내정에 중들을 모아 기도하게 하다[편집]

○戊午/銀川君趙琦背疽幾死, 上命集僧內庭禱佛。

은천군(銀川君) 조기(趙琦)가 등창이 나서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임금이 중들을 내정(內庭)에 모아서 부처에게 기도하였다.


검교 판중추원사 변옥란의 졸기[편집]

○檢校判中樞院事卞玉蘭卒。 玉蘭, 密陽人, 贈贊成事元之子, 監察御史玄仁之後。 年未冠, 丁(內)〔外〕憂。 服闋, 卽告于母曰: “赴京從仕, 以繼祖先。” 母以年幼止之, 固請以行。 仕前朝, 至正丙戌, 拜掖庭內侍伯, 積官至禮賓寺丞。 庚子, 判官晋州, 丁未秋, 以典法正郞, 出按全羅道, 戊申, 少尹和寧, 壬子, 爲水原府使, 乙卯, 拜繕工判事, 丙辰, 移判內府, 楊廣道按廉使。 辛元佐以水原人, 褒狀轉聞, 授典農判事, 階通憲。 尋加奉翊, 出牧淸州, 庚申, 又牧忠州, 丁母憂。 服闋, 居閑十年。 庚午, 拜戶曹判書, 尋遷兵曹、吏曹兩判書。 壬申, 上卽位, 賜原從功臣之號, 癸酉, 授檢校判中樞院事, 蓋老之也。 至是, 病卒于家, 年七十四。 訃聞, 上悼甚曰: “此老, 予欲用爲實中樞, 已無及矣!” 玉蘭天資剛明, 秉心仁恕, 鄕黨稱其孝友, 歷官京外, 俱有成効。 常訓子弟: “事君當以至誠, 奉公當以克勤。 愼勿以趨勢殖貨爲意。” 其忠君憂國之志, 至老不衰。 子二, 仲良、季良, 俱登科。 仲良官至右副承旨, 季良今爲藝文館提學。

검교 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변옥란(卞玉蘭)이 졸(卒)하였다. 옥란의 관향(貫鄕)은 밀양(密陽)이요, 증 찬성사(贈贊成事) 변원(卞元)의 아들이며, 감찰 어사(監察御史) 변현인(卞玄仁)의 후손이다. 관례(冠禮)하기 전에 부상(父喪)을 당하고, 복(服)을 벗은 뒤 그 어머니에게,

"서울 가서 벼슬하여 조선(祖先)의 업(業)을 계승하겠습니다."

고 하니, 모친이 아직 나이 어리다 하고 말리었으나, 굳이 청하여 갔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지정(至正) 병술년에 액정 내시백(掖庭內侍伯)이 되었고, 벼슬이 올라 예빈시 승(禮賓寺丞)이 되었으며, 경자년에 진주 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정미년 가을에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로 갔고, 무신년에 화령 소윤(和寧少尹)이 되었으며, 임자년에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을묘년에 선공 판사(繕工判事)로 임명되었고, 병진년에 내부 판사(內府判事)로 옮겼는데,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신원좌(辛元佐)가 수원 사람으로서 〈옥란의〉 포장(褒狀)을 올리게 되어 전농 판사(典農判事)로 통헌(通憲)의 계급을 받아, 얼마 안 되어 봉익(奉翊)으로 승급하여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가, 경신년에 또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복을 벗은 뒤, 10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다가, 경오년에 호조 판서가 되었고, 곧 병조와 이조의 판서로 옮겼다. 임신년에 태조가 즉위하자,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호를 주고, 이듬해 검교 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를 제수하였으니, 대개 늙은 까닭이었다. 이에 이르러 집에서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나이 74세였다. 부음(訃音)이 이르자, 임금이 심히 슬퍼하여 말하였다.

"이 노인을 실직(實職) 중추원 사로 쓰려고 했더니 하는 수 없구나!"

옥란은 천품이 강명(剛明)하고 마음가짐이 어질고 인자하였으며, 고향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과 우애를 칭찬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벼슬을 역임하여 모두 업적이 훌륭하였다. 항상 자제들에게 훈계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데는 지성으로 해야 하고, 관직을 맡아서는 부지런해야 하며, 세도에 아부하고 재물을 모으려는 마음을 갖지 말라."

하였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랏일을 걱정하는 것은 늙도록 쇠하지 않았다. 아들은 둘이 있는데 변중량(卞仲良)과 변계량(卞季良)이다. 모두 급제하여 중량은 벼슬이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고, 계량은 지금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있다.


1月 25日[편집]

정도전과 정총이 《고려사》를 편찬하여 바치다. 그들에게 내린 교서[편집]

○庚申/判三司事鄭道傳、政堂文學鄭摠等撰前朝《高麗史》自太祖至恭讓君三十七卷以進。 上親覽, 敎鄭道傳曰:

蓋聞王者代德而有國, 必命文臣, 修史以成書。 非惟備一代之典章, 抑亦重萬世之勸戒。 若稽王氏之世, 襲稱高麗之名, 能合三韓, 以爲一統。 歷歲之久, 將五百年; 傳世之多, 踰三十代。 興衰治亂之迹, 善惡得失之端, 記錄(悉)〔甚〕繁, 殘缺亦甚。 苟非付於良史, 焉得成其全書! 惟卿學窮經史之微, 識貫古今之變。 議論之正, 皆本乎聖賢之言; 臧否之明, 必辨其忠邪之趣。 佐我開國, 有成厥功。 嘉猷可以補政敎之施, 雄筆可以托制作之任。 溫溫儒者之氣象, 嶷嶷大臣之風儀。 肆予當卽位之初, 知卿有適用之學, 俾居輔相之列, 又兼國史之官。 果能於燮理之餘, 得遂其編摩之効。 表年以首其事, 因略以致其詳。 有變有常, 去就實關於大體; 或褒或貶, 是非不繆於曩賢。 事該其本末而不至於繁, 文貴乎簡質而不至於俚。 不待游、夏之贊, 蔚有班、馬之風。 披閱已還, 嘉嘆無已。 宜致匪頒之寵, 以旌撰錄之勤。 於戲! 虞史作《堯典》之文, 旣已施其直筆; 殷鑑在夏后之世, 所當戒於前車。 今賜卿白金一錠、廐馬一匹、綵段一匹、絹一匹, 至可領也。

敎鄭摠曰:

前世興衰之迹, 必待後人而成書; 後王勸戒之端, 具載經史而可鑑。 粤惟王氏, 奄有高麗。 合三韓而爲一家, 自五季而事中國。 世代旣久, 記錄甚繁。 且因喪亂之屢更, 頗有殘缺而未備。 況記者非一手, 疏密詳略之不同; 或言之亦多端, 曲直邪正之難辨! 如或成一代之實錄, 必須待三長之全才。 惟卿氣醇以淸, 學邃而富。 言辭簡質而必信, 文章典雅而可傳。 皮裏《春秋》, 能謹嚴而有守; 胸中權度, 自精切而不差。 當予開國之時, 賴卿協謀之力。 爰升出政之府, 俾兼秉筆之官。 旣致力於贊襄, 亦專心於撰述。 以公羊三世之事, 法司馬編年之規。 勒成全書, 垂示來世。 議論無愧於《唐鑑》, 鄙吝不生於《漢書》。 有變有常, 筆削之精著矣; 可法可戒, 善惡之効昭然。 予心曰嘉, 賞典是厚。 於戲! 雖華不繁, 雖質不俚, 可謂有良史之才; 與治必興, 與亂必亡, 盍亦觀前代之事! 今賜卿廐馬一匹、白銀五十兩、段子一匹、綵絹一匹, 至可領也。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과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 등이 전조(前朝)의 태조(太朝)로부터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37권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여 바치니, 임금이 친히 보고 정도전에게 교서(敎書)를 내리었다.

"듣건대, 임금이란 것은 하늘의 덕(德)을 대신하여 나라를 가지고, 반드시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역사를 써서 책을 만드는 것이니, 그것은 일대(一代)의 전장(典章)만 갖추자는 것이 아니라, 후세를 권장하고 경계하는 것이 중하기 때문이다. 왕씨(王氏)의 세상을 상고해 보면, 고려라는 국호를 습용하여 능히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해[歲]를 지낸 것이 5백 년에 가깝고, 대[世]를 전한 것이 30대를 넘으매, 치란성쇠(治亂盛衰)의 자취와 선악득실(善惡得失)의 원인에 대하여 기록이 번거롭게 있으나, 또한 없어진 것도 많으니, 진실로 훌륭한 역사가에 맡기지 않았던들 어찌 완전한 책을 만들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경은 학문이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의 미세한 부분까지 연구하였고, 식견은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였으며, 의논은 옛 성현의 말씀에 의거하여 바르게 하고, 시비는 반드시 사특하고 정직한 취지에 의하여 밝게 판단하여, 나를 도와서 나라를 열고 큰 공을 이루었으며, 아름다운 계책은 정치와 교화를 시행하는 데 도움이 되고, 웅장한 문장은 문물 제도를 제정할 임무를 맡길 만하며, 온순한 선비의 기상이요 늠름한 대신(大臣)의 풍도인지라, 내가 즉위할 당초부터 경에게 적당히 쓰일 학문이 있는 것을 알고 보필하는 정승의 자리에 앉히고, 또 국사(國史)를 편찬하는 관직까지 겸하게 하였더니, 과연 정치를 잘하는 여가에 훌륭한 역사책을 만들어, 첫째로 연대를 표기하고 대략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변고와 상사(常事)는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것을 취사 선택하고, 〈인물의〉 포폄(褒貶)은 선현(先賢)의 〈의견에〉 얽매이지 아니하였으며, 사건은 원인과 결과를 자세히 썼으되 너무 복잡하지 않고, 문장은 간결하되 속되지 않으니 옛날의 자유(子游)·자하(子夏)[3]의 칭찬을 기다리지 않아도 반고(班固)[4]와 사마천(司馬遷)[5]의 훌륭한 사필(史筆)의 풍도가 있다. 책을 펴보고 돌려보내며 가상하고 탄복함을 그치지 못하여, 은총을 내려서 편찬한 공로를 정표하는 바이다. 아아! 옛날 우사(虞史)는 요전(堯典)의 글을 지어서 직필(直筆)하였고, 은(殷)나라는 하후(夏后) 때의 일을 거울삼았으니, 당연히 앞에 가던 수레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제 경에게 백금(白金) 1정(錠), 구마(廐馬) 1필, 채단(綵段) 1필, 비단[絹] 1필을 하사하니 받을지어다."

정총(鄭摠)에게 교서를 내리었다.

"전대(前代)의 흥망성쇠의 자취는 반드시 뒷사람을 기다려서 역사책이 이루어지고, 후왕(後王)들의 권계(勸戒)가 되는 것은 경서와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 거울삼을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왕씨(王氏)는 고려를 세워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한 집을 만들고, 오대(五代)[6] 때부터 중국을 섬겨, 세대(世代)가 오래고 기록이 대단히 많으나, 여러 번의 난리로 인하여 없어진 것이 있어 사료가 구비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록한 사람이 하나가 아니어서, 엉성하고 주밀하며 자세하고 간략함이 같지 아니하고, 혹은 너무 길게 기록하여 시비곡직(是非曲直) 사정(邪正)을 가리기 어렵게 되었으니, 만일 일대(一代)의 실록(實錄)을 만들려면 반드시 재질·학문·식견의 삼장(三長)을 다 가진 재사(才士)라야 한다. 생각하건대, 경은 기품이 순수하고 맑으며, 학문이 깊고 풍부하며, 언사(言辭)가 간결하여 믿음직하고, 문장(文章)이 우아(優雅)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고, 비판은 근엄하고 지조가 있으며, 가슴 속에 들어 있는 권도(權度)는 깨끗하고 틀림이 없는지라, 내가 개국할 때에 경의 협력에 힘을 입어, 국정(國政)을 결정하는 의정부(議政府)에 올리고 사필(史筆)을 잡는 관원을 겸하게 하였더니, 정치를 협조하는 데 힘을 쓰고 역사를 편찬하는 데 또한 전심하여, 공양 삼세(公羊三世)[7]의 일과 사마천의 편년체(編年體)의 규범에 의하여 〈고려의〉 전사(全史)를 완성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였으니, 의논이 〈송 나라 범조우(范祖禹)가 지은〉 《당감(唐鑑)》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와 같이 야비하지 아니하며, 변사(變事)나 상사(常事)에 대하여 필삭(筆削)이 정(精)하고,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일에 대하여 선악을 명시하였다. 내 마음으로 가상히 여겨 후하게 상을 주는 바이다. 아아! 비록 화려하나마 번거롭지 않고 소박하나마 속되지 않으니, 가위 현량한 사관(史官)의 재질이 있다하겠다. 다스리게 되면 반드시 흥하고 어지럽게 되면 반드시 망하는 것이니, 어찌 전대(前代)의 역사를 보지 않으랴! 이제 구마(廐馬) 1필, 백은 50냥(兩), 비단[段子] 1필, 채견(綵絹) 1필을 하사하니 받을지어다."


간관 이문화 등이 검교 시중을 혁파하도록 상소했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諫官李文和等上疏。 略曰:

名器, 人主所以待賢, 賞功不可不重也。 況侍中之稱, 乃冢宰之職! 雖檢校不可輕以與人, 混雜名位也。 臣等竊見卽位以來, 不論功罪德行之有無, 但以老耄輒授, 數至八九, 名器之濫, 莫玆若也。 乞將檢校侍中, 一皆革去。

上曰: “今授檢校侍中之職者, 皆國老, 不可棄也。 勿更聞。”

간관(諫官) 이문화(李文和)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명기(名器)[8]는 임금이 어진 이를 대우하고 공(功)을 상주는 것이니, 중하게 여기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중(侍中)이란 칭호는 곧 우두머리 재상[冢宰]의 벼슬이니, 비록 검교(檢校)라 할지라도 경솔하게 주어서 명위(名位)를 혼잡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 등이 그윽이 보옵건대, 즉위하신 이래로 공죄(功罪)와 덕행의 유무(有無)를 가리지도 않고, 다만 늙었다고 해서 제수한 것이 8, 9명에 이르오니, 명기(名器)의 외람함이 이와 같은 때가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검교 시중(檢校侍中)을 모두 혁파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이번에 검교 시중의 벼슬을 제수한 자는 모두 원로(元老)들로서 버릴 수 없으니, 다시는 아뢰지 말라."


1月 27日[편집]

국사 조구의 고향인 담양현을 군으로 승격시키다[편집]

○壬戌/陞潭陽縣爲郡, 國師祖丘鄕也。

담양현(潭陽縣)을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니,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고향인 까닭이었다.


1月 29日[편집]

사직단을 영조하다[편집]

○甲子/營社稷壇。

사직단(社稷壇)을 영조(營造)하였다.


四年 二月[편집]

2月 1日[편집]

조기의 병을 기도하게 하기 위해 궁궐에 부역하는 중 50명을 돌려보내다[편집]

○乙丑朔/放宮闕役僧五十, 以趙琦病禱佛也。 琦聞之感泣。

궁궐에 부역하는 중 50명을 돌려보냈으니, 조기(趙琦)의 병을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기(琦)가 이를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었다.


국경을 넘어간 서북면의 김법화 등 7인을 저자에서 목베다[편집]

○西北面人金法華、鄭大等七人棄巿。 皆犯令越境者也。

서북면(西北面) 사람 김법화(金法華)와 정대(鄭大) 등 7인을 기시(棄市)하였으니, 모두 국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간 사람들이었다.


2月 2日[편집]

각영의 장군 오원 십장 등을 신중히 선택하도록 삼군부와 병조에 명하다[편집]

○丙寅/上命三軍府、兵曹曰: “各領將軍五員十將等, 內充宿衛, 外備不虞, 當重其選。 其令各道都統使節制使擧其道判事以下有武略者各五人啓聞, 以備擢用。”

임금이 삼군부(三軍府)와 병조(兵曹)에 명하였다.

"각영(各領)의 장군(將軍) 오원 십장(五員十將) 등은 안으로는 숙위(宿衛)에 충당하고 밖으로는 불의의 사변에 대비하는 것이니, 신중히 선택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각도의 도통사(都統使)와 절제사(節制使)에게 분부하여, 그 도(道)의 판사(判事) 이하로 무략(武略)이 있는 자를 각각 5인씩 뽑아 올리게 하여 뽑아 쓰도록 하라."


2月 7日[편집]

오도리 10명이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辛未/吾都里十人來獻土物, 賜米布厚慰之。

오도리(吾都里) 1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으므로, 쌀과 베[布]를 주어서 후하게 위무(慰撫)하였다.


2月 13日[편집]

진안군의 아들을 진안군으로 습봉하다[편집]

○丁丑/以鎭安君芳雨子福根, 襲封鎭安君。

진안군(鎭安君) 이방우(李芳雨)의 아들 이복근(李福根)을 진안군(鎭安君)으로 습봉(襲封)하였다.


예문춘추관과 혜민국의 일부 직제를 신설하다[편집]

○始置藝文春秋館兼供奉二人、兼修撰二人、兼直館四人, 惠民局令二人七品、丞二人八品。

처음으로 예문춘추관(藝文春秋官)의 겸공봉(兼供奉) 2인, 겸수찬(兼修撰) 2인, 겸직관(兼直館) 4인을 설치하고, 혜민국(惠民局)에 영(令) 2인을 7품, 승(丞) 2인을 8품으로 설치하였다.


서반의 관제를 개정하다[편집]

○改西班官制: 義興親軍左衛爲義興侍衛司, 右衛爲忠佐侍衛司, 鷹揚衛爲雄武侍衛司, 金吾衛爲神武侍衛司, 左右衛爲龍驤巡衛司, 神虎衛爲龍騎巡衛司, 興威衛爲龍武巡衛司, 備巡衛爲虎賁巡衛司, 千牛衛爲虎翼巡衛司, 監門衛爲虎勇巡衛司。

서반 관제(西班官制)를 개정하였다. 의흥 친군 좌위(義興親軍左衛)를 의흥 시위사(義興侍衛司), 우위(右衛)를 충좌 시위사(忠佐侍衛司), 응양위(鷹揚衛)를 웅무 시위사(雄武侍衛司), 금오위(金吾衛)를 신무 시위사(神武侍衛司), 좌우위(左右衛)를 용양 순위사(龍驤巡衛司), 신호위(神虎衛)를 용기 순위사(龍騎巡衛司), 흥위위(興威衛)를 용무 순위사(龍武巡衛司), 비순위(備巡衛)를 호분 순위사(虎賁巡衛司), 천우위(千牛衛)를 호익 순위사(虎翼巡衛司), 감문위(監門衛)를 호용 순위사(虎勇巡衛司)로 고치었다.


윤방경·심효생을 새 관직에 임명하고 육조의 주사를 폐지하다[편집]

○以尹方慶爲商議中樞院事, 沈孝生爲中樞院學士。 罷六曹主事。

윤방경(尹方慶)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심효생(沈孝生)을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로 삼고, 육조(六曹)의 주사(主事)를 폐지하였다.


심효생의 부인 유씨를 정경 옹주로 하다[편집]

○以沈孝生妻柳氏爲貞慶翁主。

심효생의 부인 유씨(柳氏)를 정경 옹주(貞慶翁主)라 하였다.


검교 시중 남을번의 졸기[편집]

○檢校侍中南乙蕃卒。 乙蕃, 晋州宜寧人, 靈光郡事天老之子, 性醇謹。 仕前朝, 歷官至密直副使。 有四子, 在、誾、實、贄。 至國初, 以在、誾爲開國功臣, 拜檢校侍中。 卒年七十六, 諡敬烈, 官庇葬事。

검교 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이 졸(卒)하였다. 을번의 본관(本貫)은 진주(晉州) 의령(宜寧)이요, 영광 군사(靈光郡事) 남천로(南天老)의 아들이다. 천성이 순후하고 근신하며, 고려조에 벼슬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아들 넷이 있으니 남재(南在)·남은(南誾)·남실(南實)·남지(南贄)이다. 개국 당초에 재와 은이 개국 공신이 되었으므로 검교 시중을 받았다. 향년이 76세이며, 시호(諡號)를 경렬(敬烈)이라 하고 관(官)에서 장사를 치렀다.


2月 17日[편집]

지중추원사 은천군 조기의 졸기[편집]

○辛巳/知中樞院事銀川君趙琦卒。 琦, 白州人。 起身行伍, 仕前朝隷崔瑩麾下, 官至版圖判書。 性强悍, 所在必欲盡職。 瑩敗, 上召置麾下, 俾掌軍務, 及上卽位, 爲開國功臣。 以親軍衛上鎭撫, 出入宮禁, 奉行威令, 部伍懾伏。 然不識字, 暗於大體, 輒肆喜怒, 凌辱朝士, 人多短之。 及卒, 上悼甚輟朝, 贈門下侍郞贊成事, 諡忠魏。 遣商議中樞院事李天祐, 往祭柩前, 命有司禮葬。 子順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은천군(銀川君) 조기(趙琦)가 졸(卒)하였다. 기(琦)의 본관(本貫)은 백주(白州)이다. 군졸(軍卒)에서 출발하여 고려조의 최영(崔瑩)의 휘하에 예속되어 벼슬이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성질이 강하고 사나우며, 가는 곳마다 자기의 직책을 다하였다. 최영이 패하자, 태조가 휘하에 불러 두고 군무(軍務)를 맡아 보게 하였는데, 태조가 즉위하자 개국 공신이 되고, 친군위 상진무(親軍衛上鎭撫)로 궁궐에 출입하면서 군령을 봉행하니, 군중(軍中)의 대오(隊伍)가 두려워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글자를 모르고 대체(大體)에 어두우며, 기쁨과 노여움을 절제하지 못하여서 조사(朝士)들을 업신여기어 욕을 보이므로, 사람들이 좋지 않게 여기었다. 죽게 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를 증직(贈職)하였으며, 시호를 충위(忠魏)라 하고,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이천우(李天祐)를 보내어 관(棺)앞에 제사를 지내었으며, 유사(有司)를 시켜서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조순화(趙順和)이다.


2月 19日[편집]

농사철이라 군용 점고를 할 수 없다고 한 전라도 관찰사 조박을 안치하다[편집]

○癸未/遣巡軍提控李慤, 置全羅道都觀察使趙璞于公州。 初, 軍容點考使金季壽至, 璞同議上啓云: “玆當農月, 不可無故點兵。” 又以邊報之緩, 忤旨。

순군 제공(巡軍提控) 이각(李慤)을 보내어 전라도 관찰사 조박(趙璞)을 공주(公州)에 안치(安置)하였다. 처음에 군용 점고사(軍容點考使) 김계수(金季壽)가 이르니, 박(璞)이 함께 의논하고 상계(上啓)하기를,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아무 사유없이 군사를 점고할 수 없다."

하고, 또 변방에 대한 보고를 늦게 하여, 임금의 뜻에 거슬렸던 때문이었다.


궁궐 조성에 각도의 인부를 돌려 보내고 대신 중을 쓰기로 하다[편집]

○放宮闕造成諸道丁夫, 以僧徒代之。 初大司憲朴經等上書曰:

宮室之制, 燕寢有殿, 而百官供奉, 各有所止, 間閣之數, 不下於千, 其工匠卒徒, 當用數萬人矣。 必用農民, 以充其數, 農必失時, 不可不慮也。 士大夫營一家, 必請僧以役者, 手段熟習, 且無家計而用工專也, 僧亦樂於趨事者, 以其有資於衣食也。 況創立宮闕, 豈可容拙手於其間哉? 徒廢農業, 而緩於工役。 國家度僧, 初無定額, 僧之於民, 居十之三, 而其可赴役者, 亦不下三之二焉。 蓋僧之品有三。 食不求飽, 居無常處, 修心僧堂者, 上也; 講說法文, 乘馬奔馳者, 中也; 迎齋赴喪, 規得衣食者, 下也。 臣等竊謂下等之僧, 其於國役也, 赴之何害! 願令攸司, 集僧赴役, 更不徵民, 以遂其生, 則工役不廢而邦本固矣。

上兪允, 故有是命。

궁궐을 조성(造成)하는 각도의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내고 승도(僧徒)들로 대신하게 하였다. 처음에 대사헌(大司憲) 박경(朴經) 등이 상서하기를,

"궁실(宮室)의 제도는 임금이 거처하는 전(殿)이 있어야 하고, 백관들이 집무하는 방이 있어야 하므로, 크고 작은 건물의 수가 1천보다 적지 않을 것이요, 수만 명의 공장(工匠)과 졸도(卒徒)를 써야 될 것이온데, 농민으로 그 수를 채우면 반드시 농사 때를 놓칠 것이니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대부(士大夫)가 집 한 채를 경영하는 데에도 반드시 중[僧]을 청해서 일을 시키는 것은 솜씨가 능숙하고 또 살림살이가 없어서 일에 전력할 수 있기 때문이며, 중들도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의식(衣食)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궁궐을 처음으로 짓는 데에 어찌 익숙지 못한 사람을 쓰겠습니까? 다만 농사만 폐하고 공사가 늦어질 뿐입니다. 나라의 도승(度僧)은 원래 정한 수효가 없고, 백성 가운데에 중이 10분의 3은 되는데, 그중에 부역할 수 있는 자가 3분의 2는 될 것입니다. 대개 중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는데, 배부르게 먹지 아니하고 일정한 곳에 거처하지 아니하며, 승당(僧堂)에서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상등이요, 불경을 강론하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자가 중등이요, 재(齋) 올리는 데에 찾아가고 초상집에 달려가서 의식(衣食)을 엿보는 자가 하등입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 하옵건대 하등의 중들을 국가 공사에 일하게 하여 무엇이 해가 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중들을 모아서 공사를 하게 하고, 다시는 백성을 징용(徵用)하지 말아서 그 생계를 보살피게 하면, 공사는 폐하지 아니하고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임금이 윤허하여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었다.


교주도 작목 별감이 재목을 비온 뒤 뗏목으로 만들어 운반할 것을 아뢰다[편집]

○交州道斫木別監盧湘啓曰: “所斫材木萬餘條, 若於此時, 刻日盡輸, 其弊甚鉅。 願待雨作結桴流下便。” 上從之。

교주도(交州道) 작목 별감(斫木別監) 노상(盧湘)이 아뢰었다.

"벌채해 놓은 재목 1만여 개를 지금 곧 운반하려면 그 폐단이 매우 클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비온 뒤에 뗏목을 만들어서 강으로 내려오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삼군부에서 군사의 통솔과 상호 감찰 방법에 대해 건의하다[편집]

○三軍府上言: “軍事, 大小相統, 彼此交察, 乃可長治久安。 闕內宿衛諸衛, 令義興三軍府知委, 令鎭撫所, 照名點考, 省記啓聞。 入直中樞一員, 令堂後官收擧案, 上大將軍以上, 各其名下, 皆寫進不進; 將軍以下, 親署名, 翌日朝啓聞; 中郞將以下, 摠數施行; 諸衛巡綽, 亦令本府知委, 當番節制使照名點考, 每更巡綽。 其中無緣故宿衛不進員人及入番無緣故擅出員人, 令入直中樞及鎭撫所報府; 無緣故巡綽不到員人, 令監巡節制使報府, 推考論罪, 輕者還職, 重者啓聞, 罷職充軍。 軍事以嚴爲重, 階級之間, 不相凌犯, 可以上能出命, 下能服役, 事功以成。 當以各衛上將軍一位、大將軍一位、三軍將軍一位, 各領將軍一位、中郞將一位、郞將一位、別將一位、散員一位、隊長一位、隊副一位爲定。 彼我衛勿論, 自上而下, 一位嚴於一位, 不相凌犯, 不敢竝立。 路間相逢, 卑者先下馬, 隔一位, 高者下馬、不下馬, 任意; 違者, 推考論罪。”

삼군부(三軍府)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군사(軍事)란 대소(大小)가 서로 통솔하고 피차(彼此) 서로 검찰해야 길이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궐내(闕內)에 숙위(宿衛)하는 여러 위(衛)는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로 하여금 이것을 지휘하게 하고, 진무소(鎭撫所)로 하여금 명부를 대조 점고(點考)하여 생기(省記)를 계문(啓聞)하게 하고, 입직(入直)한 중추(中樞) 1원이 승지(承旨)로 하여금 거안(擧案)[9]을 거두게 하되, 상(上)·대장군(大將軍) 이상은 각각 그 이름 밑에 진(進) 또는 부진(不進)이라고 쓰고, 장군(將軍) 이하는 친(親)히 서명(署名)하게 하여 이튿날 아침에 계문(啓聞)하게 하고, 중랑장(中郞將)이하는 총수만 보고할 것입니다. 여러 위(衛)의 순작(巡綽)도 역시 본부(本府)에서 지휘하여, 당번(當番) 절제사(節制使)로 하여금 명부를 점고하고 경(更)마다 순작하게 하되, 그 중에 이유 없이 숙위에 나오지 않은 자와 입번(入番)했다가 이유 없이 마음대로 나간 자는 입직한 중추와 진무소로 하여금 본부에 보고하게 하고, 이유 없이 순작에 나오지 아니한 자는 감순 절제사(監巡節制使)로 하여금 본부에 보고하게 하여 추고(推考)해서 죄를 주되, 가벼운 자는 환직(還職)하고, 중한 자는 계문하여 파직(罷職)하고 충군(充軍)하소서. 군사는 엄한 것을 중하게 여기고, 하관이 상관에게 범하는 일이 없어야 상관이 명령을 내릴 수 있고 하관이 복종하여 사업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오니, 당연히 각위(各衛)의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삼군 장군(三軍將軍)과 각영(各領)의 장군(將軍)·중랑장(中郞將)·낭장(郞將)·별장(別將)·산원(散員)·대장(隊長)·대부(隊副)를 각각 한 계급으로 정하고, 피아(彼我)의 위(衛)를 물론하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한 계급이 다음 계급보다 엄하여, 서로 능멸하거나 범하는 일이 없게 하고, 감히 나란히 서지도 못하게 하며, 길에서 서로 만나면 낮은 자가 먼저 말에서 내리고, 한 계급을 격해서 높은 자는 말을 내리고 내리지 않는 것은 자유로이 하게 하되, 어긴 자는 추고(推考)하여 죄를 주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月 20日[편집]

형혹성이 여귀성을 범하다[편집]

○甲申/熒惑犯輿鬼。

형혹성(熒惑星)이 여귀성(輿鬼星)을 범하였다.


2月 21日[편집]

달이 심성을 범하다[편집]

○乙酉/月犯心星。

달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2月 22日[편집]

요동에서 도망해 온 군사 25명을 압송하다[편집]

○丙戌/遣通事金乙祥, 管送遼東逃軍金不改等二十五名。

통사(通事) 김을상(金乙祥)을 보내어 요동(遼東)에서 도망해 온 군사 김불개(金不改) 등 25명을 압송하게 하였다.


2月 24日[편집]

천변 때문에 죄수를 석방하고, 감옥의 청결 상태를 점검하도록 명하다[편집]

○戊子/宥中外二罪以下囚。 以天變也。 乃命都評議使司曰: “京外犴獄, 汚穢不修, 盛暑祈寒, 人多疾疫, 以致札夭, 予甚憫焉。 其令所在官吏, 以時審視, 務令完潔。”

중외(中外)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다 석방하였으니, 천변(天變) 때문이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령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감옥이 더럽고 수리하지 아니하여, 무더위와 모진 추위에 병이 들어 비명에 죽게 되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긴다. 그 곳 관리로 하여금 때때로 돌아보고 깨끗하게 하도록 하라."


사직단의 공사가 있었다[편집]

○有事于社稷。

사직단(社稷壇)의 공사가 있었다.


고려 왕씨를 위해 관음굴 등에 수륙재를 베풀고 봄 가을로 거행하게 하다[편집]

○上命設水陸齋於觀音堀、見巖寺、三和寺, 每春秋以爲常。 爲前朝王氏也。

임금이 수륙재(水陸齋)를 관음굴(觀音堀)·현암사(見巖寺)·삼화사(三和寺)에 베풀고 매년 봄과 가을에 항상 거행하게 하였다. 고려의 왕씨를 위한 것이었다.


2月 25日[편집]

군사 점고를 분부대로 하지 않은 김계수를 가두다[편집]

○己丑/下金季壽于巡軍獄。 點軍不稱旨也。

김계수(金季壽)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으니, 군사(軍士)를 점고(點考)하기를 분부대로 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서해도에 흉년이 들어 구휼하다[편집]

○西海道饑, 命發倉賑之。

서해도(西海道)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구휼하게 하였다.


2月 26日[편집]

서해도 도관찰사가 흉년이므로 금주하기를 청하다[편집]

○庚寅/西海道都觀察使洪吉旼以年饑請行禁酒, 上從之。 且令都評議使司移文各道, 禁之。

서해도 도관찰사(都觀察使) 홍길민(洪吉旼)이 흉년이라고 하고 금주(禁酒)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각도에 공문을 보내서 술을 금하게 하였다.


2月 27日[편집]

서봉 밑에 거둥하여 사직단 쌓는 것을 보다[편집]

○辛卯/上幸西峰下, 觀築社稷壇。

임금이 서봉(西峯) 밑에 거둥하여 사직단 쌓는 것을 보았다.


이달에 태백성이 낮에 보이다[편집]

○是月, 太白晝見。

이달에 태백성이 낮에 보이었다.


四年 三月[편집]

3月 1日[편집]

동북면의 기민을 구휼하다[편집]

○甲午朔/上命發倉, 賑東北面饑。

임금이 창고의 곡식을 내어 동북면(東北面)의 기민(饑民)을 진휼하게 하였다.


남에게 뇌물을 받고 관교를 고쳐 준 노을생을 참형하다[편집]

○斬盧乙生。 初乙生得典醫少監鄭世龍官敎, 刮其名, 改書方用濟, 受用濟厚賂而給之, 事覺被斬, 杖用濟。

노을생(盧乙生)을 참형에 처하였다. 처음에 을생이 전의 소감(典醫少監) 정세용(鄭世龍)의 관교(官敎)를 얻어 가지고 그 이름을 긁어내고 방용제(方用濟)로 고쳐 써서 용제에게 후한 뇌물을 받고 주었다. 일이 발각되어 참형을 당하였고, 용제도 곤장을 맞았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게 뇌물을 받고 고발하지 않은 아들을 참형하다[편집]

○慶尙道加守人陳松與鄭萬爭田, 歐殺萬。 萬子原哲, 受松厚賂, 不以告官, 事覺誅之。

경상도 가수(加守) 사람 진송(陳松)이 정만(鄭萬)과 토지를 다투다가 만(萬)을 때려 죽였으나, 만의 아들 정원철(鄭原哲)이 송(松)으로부터 후한 뇌물을 받고 관청에 고발하지 않았다. 일이 발각되어 참형에 처하였다.


응방을 한강 가에 만들다[편집]

○營鷹坊于漢江上。

응방(鷹坊)[10]을 한강(漢江) 가에 만들었다.


3月 2日[편집]

강릉도 수군 만호로 사칭한 자를 참형하다[편집]

○乙未/斬詐稱江陵道水軍萬戶者申淸。

강릉도(江陵道) 수군 만호라고 사칭한 신청(申淸)을 참형에 처하였다.


하정사 민제·유원지와 압마사 손흥종이 남경에서 돌아오다[편집]

○賀正使政堂文學閔霽、中樞院副使柳原枝、押馬使中樞院副使孫興宗回自京師。

하정사(賀正使) 정당 문학(政堂文學) 민제(閔霽)와 중추원 부사 유원지(柳原枝)와 압마사(押馬使) 중추원 부사 손흥종(孫興宗)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3月 3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보이다[편집]

○丙申/太白晝見。

태백성이 낮에 보이었다.


3月 4日[편집]

과주에 거둥하여 수릉 자리를 물색하니, 정도전이 눈물로 간언하다[편집]

○丁酉/上如果州, 相壽陵地。 將還, 都評議使司享于豆毛浦船上, 群臣以次獻觴。 鄭道傳進曰: “天佑聖德, 肇建丕基, 臣等蒙恩至厚, 常願千萬歲壽。 今日相地, 臣不勝感愴。” 因泣下, 上曰: “欲於平安之日, 預定之耳, 何泣爲!” 至徃尋村路上, 上欲馳馬射獐, 僕隷朴夫金執鞚不放, 上乃止。

임금이 과주(果州)에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살폈다. 돌아올 때 도평의사사의 주최로 두모포(豆毛浦) 선상(船上)에서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술잔을 올리었다. 정도전이 〈임금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聖德)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자리를 물색하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을 흘리니, 임금이 말하였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는가?"

왕심촌(往尋村) 노상(路上)에 이르러 임금이 말을 달려서 노루를 쏘려고 하였으나, 마부 박부금(朴夫金)이 재갈을 잡고 놓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그만두었다.


3月 7日[편집]

각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군적을 점고하게 하다[편집]

○庚子/遣使各道, 點考軍籍。

사신을 각도에 보내어 군적(軍籍)을 점고(點考)하게 하였다.


3月 8日[편집]

화성이 여귀성 동쪽에 있었다[편집]

○辛丑/火星在輿鬼東。

화성(火星)이 여귀성(輿鬼星) 동쪽에 있었다.


3月 9日[편집]

간관 이고 등이 농사철이라 하여 군사 점고를 정지할 것을 아뢰다[편집]

○壬寅/諫官李皋等上書曰:

《傳》曰: “足食足兵。” 兵食不可偏廢也。 然食不足, 則雖有堅甲利兵, 將安用哉! 足食之道, 惟在於不奪農時而已。 殿下受命之初, 人民相慶, 冀蒙德化, 比年以來, 土木之役, 點軍之事, 殆無虛歲, 民不堪苦, 播散流亡者, 不知其幾也。 今又分遣朝官, 考定軍籍。 此雖安不忘危, 有備無患之長慮, 然今東作方興, 時不可奪。 點軍之際, 聚集農民, 往來淹延, 不得耕種, 則仰事俯育, 尙且不贍, 軍國之須, 何自而出? 願殿下姑停此擧, 使民皆得盡力於農, 俟其農隙, 遣使點考, 亦未晩也。

上召判三司事鄭道傳曰: “今諫官上書以爲: ‘時當農月, 不可點軍。’ 諫官之言雖逆耳, 猶且優容。 況民事乎? 予頗然之, 第今左右政丞皆有疾不視事, 卿往其第, 擬議以聞。” 道傳奉旨擬議, 啓以止令州郡官吏, 考定軍籍, 上從之。

간관(諫官) 이고(李皐) 등이 상서하였다.

"전(傳)에 말하기를, ‘먹을 것이 족(足)하고 군사가 넉넉해야 된다.’ 하였으니, 군사와 식량은 어느 하나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식량이 부족하면 비록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가 있다 한들 무엇에 쓰겠습니까?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농시(農時)를 빼앗지 않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천명(天命)을 받아 즉위할 당초에는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고 덕화(德化)를 입을 것을 바랐사온데, 근년 이래로 토목 공사와 군사를 점고하는 일이 한 때도 빠짐이 없어, 백성들이 고생을 견디지 못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유망(流亡)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또 조관(朝官)을 나누어 보내서 군적(軍籍)을 점고하오니, 이것이 비록 편안할 때 위험한 것을 잊지 않고, 걱정이 없을 때 준비하려는 장구한 계책이오나, 방금 봄농사가 한창이오니 때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군사를 점고할 때에 농민을 한 데 모으게 되니, 오고가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여 경종(耕種)을 제대로 못하면,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녀를 양육하기도 오히려 부족할 터인데, 군국(軍國)의 필요한 물자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아직 군사의 점고를 정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에 힘쓰게 하옵고, 농한기를 기다려서 사신을 보내어 점고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을 불러서 말하였다.

"이제 간관(諫官)이 상서하여, 농사철을 당하여 군사의 점고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간관의 말은 비록 귀에 거슬려도 받아들이는 것인데, 하물며 백성들에 관한 일이겠느냐? 나도 자못 옳게 여기나, 다만 지금 좌우 정승이 모두 병으로 인하여 정사를 보지 못하니, 경이 그 집에 가서 의논해서 아뢰라."

도전이 분부를 받고 의논하여 아뢰었다.

"사신 파견을 중지하고, 그 고을 관리들로 하여금 군적을 점고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상산군 이민도의 졸기[편집]

○商山君李敏道卒。 敏道, 中國河間人, 元慶元路摠官公埜之子。 以父死事, 授同知涿州事。 元朝多難, 寓居外家明州, 前朝使臣成準得回自張士誠所, 敏道請與俱來。 以醫卜見稱, 往往有驗, 授書雲副正, 遷典醫正, 以至慈惠府司尹, 兼判典醫寺事。 當上潛邸之日, 陰有推戴之意, 陳說歷代沿革, 及上卽位, 得與功臣之列, 官至商議中樞院事, 賜號推忠協贊開國功臣。 以妻鄕尙州, 封商山君。 年六十卒, 贈門下侍郞贊成事, 諡直憲。 子蓁。

상산군(商山君) 이민도(李敏道)가 졸(卒)하였다. 민도는 중국 하간(河間) 사람으로 원(元)나라 경원로 총관(慶元路摠官) 이공야(李公埜)의 아들이다. 부친이 〈국사(國事)에〉 죽었으므로 동지탁주사(同知涿州事)에 임명되었으나, 원나라가 어지럽게 되어 외가(外家)인 명주(明州)에 우거(寓居)해 있었다. 고려의 사신 성준득(成準得)이 〈원말군웅의 하나인 오왕(吳王)〉 장사성(張士誠)의 곳에서 돌아올 때, 민도가 자청하여 함께 〈고려에〉 와서 의술(醫術)과 점술(占術)로 이름이 나타나 왕왕 징험이 있으므로, 서운 부정(書雲副正)과 전의 정(典醫正)을 역임하고, 자혜부 사윤(慈惠府司尹)이 되어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를 겸임하였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은근히 추대(推戴)할 뜻을 가지고 역대의 연혁(沿革)을 설명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자 공신(功臣)의 열(列)에 참예하여 벼슬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이르고, 추충 협찬 개국 공신(推忠協贊開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의 처향(妻鄕)이 상주(尙州)이므로 상산군(商山君)을 봉하고, 나이 60세에 돌아가니,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를 증직하고, 시호를 직헌(直憲)이라 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이진(李蓁)이다.


경상도 수군 만호 차준이 왜선 2척을 잡다[편집]

○慶尙道見乃梁水軍萬戶車俊, 捕倭二船。

경상도 견내량(見乃梁) 수군 만호 차준(車俊)이 왜적의 배 2척을 잡았다.


3月 12日[편집]

차준과 도만호 안처선 등에게 술과 채단 등을 내려 주다[편집]

○乙巳/上遣使賜俊酒及綵段紅綃, 仍賜都萬戶安處善如賜俊之數, 兼賜酒都節制使趙狷、都觀察使崔有慶。 聞俊有外舅喪, 賜米豆百石。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차준(車俊)에게 술과 채단(綵段)·홍초(紅綃)를 하사하고, 또 도만호(都萬戶) 안처선(安處善)에게도 차준에게 준 수대로 주었으며, 겸해서 도절제사 조견(趙狷)과 도관찰사 최유경(崔有慶)에게도 술을 하사하였다. 차준의 처부(妻父)의 상고(喪故)가 있다는 말을 듣고 쌀과 콩 1백 석을 주었다.


창종을 앓는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에게 중관을 보내 문병하다[편집]

○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皆發瘡, 上遣中官曺恂問疾, 且曰: “治瘡不可動心, 勿慮事接客。”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모두 창종(瘡腫)을 앓으니, 임금이 중관(中官) 조순(曹恂)을 보내서 문병하게 하고, 또 말하였다.

"창종(瘡腫)을 고치는 데는 동심(動心)하여서는 안 되니 정사(政事)를 염려하거나 손님을 접대하지 말라."


3月 13日[편집]

우박이 내리다[편집]

○丙午/雨雹。

우박이 내리었다.


세자 이사 정도전이 《맹자》를 강의하다[편집]

○世子二師鄭道傳講《孟子》, 至權然後知輕重曰: “心猶衡也。 衡量小, 則爲兩, 量大, 則爲斤, 若大小幷量, 則斤兩混矣, 故大小各量, 然後稱物之輕重, 而知其斤兩矣。 是以衡之爲物, 虛以待物。 人之一心, 亦猶是也。 見善則喜, 見惡則怒, 喜怒中節。 若當喜而怒, 當怒而喜, 則可乎? 是以心之爲物, 尤必虛以待事, 願世子精察之。”

세자 이사(世子貳師) 정도전(鄭道傳)이 《맹자(孟子)》를 강(講)하였는데, "달아 본 뒤에야 가볍고 무거운 것을 안다."는 대목에 이르러 말하였다.

"마음이 저울 같습니다. 저울눈[衡量]이 작으면 냥(兩)이 되고, 저울눈이 크면 근(斤)이 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것을 한꺼번에 달면 근량이 섞입니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것을 각각 달아 본 뒤에야 물건의 경중과 근량을 알 수 있습니다. 저울이라는 물건은 비워 두었다가 물건을 기다리는 것인데, 사람의 한 마음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좋은 일을 보면 기뻐하고 못된 일을 보면 성을 내는 것인데, 기뻐하고 성을 내는 것이 사리에 맞아야 합니다. 만약에 좋아할 때에 성을 내고 성을 낼 때에 기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이라는 물건은 더욱 비워 두고 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세자께서는 정밀하게 살피소서."


3月 18日[편집]

평주 온천에 거둥하려 하니 간관이 불가함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辛亥/上將幸平州溫水, 諫官韓尙桓等上言: “臣等竊聞, 殿下將幸溫水, 欲以治疾, 不敢望其必止也。 然臣等竊惟, 溫泉距新都三百餘里, 蒙犯風露, 跋涉山川, 駐輦荒郊, 其於治疾之方, 恐或未便。 況今農事方殷, 行幸所至, 雖務簡省, 豈不有妨? 伏惟上裁。” 上召掌務補闕尹須曰: “予之此行, 欲治疾也。 但以民弊爲言, 不虞予疾, 何哉?” 遂不允。

임금이 장차 평주(平州) 온천(溫川)에 거둥하려 하므로, 간관(諫官) 한상환(韓尙桓)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신 등은 전하께서 장차 온천에 거둥하려 하신다는 말을 들었사온데, 병을 고치려고 하시는 것이오니 중지하시기를 바랄 수는 없사오나,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온천이 신도(新都)에서 3백여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산을 넘고 내를 건너며 황무한 들판에서 연(輦)을 멈추어야 하오니, 병을 고치는 방법에도 좋지 못할까 하오며, 더구나 농사철이 한창이온데, 거둥하시는 곳마다 아무리 간략하게 한다 하더라도 어찌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소서."

임금이 장무(掌務)인 보궐(補闕) 윤수(尹須)를 불러 말하였다.

"이번의 거둥은 병을 고치려고 하는 것인데, 다만 민폐만 말하고 내 병은 걱정하지 않으니, 무슨 말이냐?"

드디어 윤허하지 않았다.


3月 20日[편집]

천둥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며 우박이 내리다[편집]

○癸丑/雷電大風雨雹。

천둥과 번개하며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리었다.


새 궁궐의 양청에서 주연을 베풀다[편집]

○上置酒新宮涼廳, 南陽伯洪永通、昌寧府院君成汝完與焉, 潛邸故人也。 判三司事鄭道傳賦詩以獻:

禁院春深花正繁, 爲招耆舊置金樽。 天工忽放知時雨, 便覺渾身雨露恩。

임금이 새 궁궐의 양청(涼廳)에 주연(酒宴)을 베풀었는데, 남양백(南陽伯) 홍영통(洪永通)과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 잠저(潛邸) 때의 친구들로서 참예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시(詩)를 지어 올리었다.

"금원(禁院)에 봄빛은 깊고 꽃은 한창인데

옛친구 불러서 술잔을 드니

하늘마저 때에 맞는 비를 내리어

이 몸 또한 우로(雨露)의 은택을 깨달았도다."


3月 21日[편집]

평주 온천에 거둥하다[편집]

○甲寅/幸平州溫水。

평주 온천에 거둥하였다.


조박을 석방하고 사람을 보내어 부르다[편집]

○宥趙璞, 遣人召之。

조박(趙璞)을 석방하고 사람을 보내어 불러왔다.


3月 23日[편집]

임금이 개성에 이르다[편집]

○丙辰/上次舊京。

임금이 옛 서울[개성(開城)]에 이르렀다.


3月 24日[편집]

경기좌도와 충청도 병선의 허실과 군사들의 능력을 점고하게 하다[편집]

○丁巳/遣校書少監鄭渾于京畿左道及忠淸道, 點考兵船虛實、軍將能否。

교서 소감(校書少監) 정혼(鄭渾)을 경기좌도(京畿左道)와 충청도에 보내어 병선(兵船)의 허실(虛實)과 장수와 군사들의 능력을 점고(點考)하게 하였다.


3月 25日[편집]

적전의 들에 나가 해동청 사냥을 구경하다[편집]

○戊午/上出籍田郊, 觀放海靑。

임금이 적전(籍田)의 들에 나가서 해청(海靑)의 사냥을 구경하였다.


四年 夏四月[편집]

4月 1日[편집]

비가 오고 붉은 기운이 중천에 끼다[편집]

○甲子/雨。 赤氣中天。

비가 오고, 붉은 기운이 중천(中天)에 끼었다.


왕이 평주 온천에 도착하다[편집]

○上至溫泉。

임금이 평주 온천에 도착하였다.


삼군부에 명령을 내려 《수수도》와 《진도》를 간행하게 하다[편집]

○令三軍府刊行《蒐狩圖》、《陣圖》。

삼군부(三軍府)에 명령을 내려서 《수수도(蒐狩圖)》와 《진도(陣圖)》를 간행하게 하였다.


4月 2日[편집]

평양 윤 경의의 졸기[편집]

○乙丑/平壤尹慶儀卒。 儀, 淸州人, 左侍中貞烈公復興之子。 性儉直無所修飾。 歷仕至參贊門下, 出爲西北面兵馬都節制使, 兼尹平壤。 卒諡順節。 子習。

평양 윤(平壤尹) 경의(慶儀)가 졸하였다. 의(儀)의 본관(本貫)은 청주(淸州)로, 좌시중(左侍中) 정렬공(貞烈公) 경복홍(慶復興)의 아들이다. 천성이 검소하고 곧아서 꾸밈이 없었고, 벼슬이 참찬문하(參贊門下)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나가서 서북면 병마 도절제사 겸 평양 윤이 되었다. 시호를 순절(順節)이라 하고, 아들이 있으니 경습(慶習)이다.


4月 4日[편집]

대사헌 박경 등이 경기 토지 만으로 공신에게 줄 것을 상언하니 윤허하다[편집]

○丁卯/大司憲朴經等上言: “前朝之季, 田制紊亂, 豪强兼幷, 倉庾空竭, 爭訟日繁, 骨肉相殘。 殿下卽位之初, 損益制度, 遂正經界, 將京畿左右道及六道之田, 以定陵寢、倉庫、軍資、公廨、寺院田、學校、神祠、鄕津、驛吏、紙匠等田, 而以士大夫居京城, 衛王室, 置科田以養廉恥; 軍士在邊圉, 藩國家, 置軍田以加恤養。 凡科田、功臣田止於畿內給之; 軍田止於畿外給之。 此法甚美, 實可爲萬世常行之大典, 宜令後世遵守勿失。 近日功臣都監移牒戶曹給田司, 原從功臣田, 皆於本鄕給之。 夫廣占田宅者, 以私田在外故也。 今若置私田畿外, 則人爭有僥倖之心, 又其田四方皆公田, 不若畿內之皆有主也。 或有貪黠之輩, 乘其勢而蠶食之, 則四方公田, 皆必且潛耗。 臣等以謂畿外占田之弊遽作, 兼幷爭頌之端復起, 而終莫之救也。 伏惟聖鑑令攸司更議其宜, 皆於畿內給之。 若京畿之內, 更無餘田, 則今當更定京畿之時, 加一二州縣, 以充其數, 亦無害也。 加定京畿, 外方州縣, 均是公田, 彼此減損, 雖無有異, 稱京畿以給之, 則無失於法制, 給之於外方, 則不惟有乖於已定之制, 且復已革之弊矣。” 下使司擬議。 使司以如憲府所申聞, 上從之。

대사헌(大司憲) 박경(朴經)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고려 말기에 토지 제도가 문란하고, 지방 호족(豪族)들이 토지를 겸병(兼倂)하여, 창고가 텅 비고, 송사(訟事)가 날로 많아지며 골육(骨肉)끼리 서로 해쳤는데, 전하께서 즉위할 당초에 제도를 가감(加減)하여 토지의 경계(經界)를 바루어서, 경기좌·우도와 6도(道)의 토지로 능침(陵寢)·창고(倉庫)·군자전(軍資田)·공해전(公廨田)·사원전(寺院田)·학교(學校)·신사(神祠)·향(鄕)·진(津)·역리(驛吏)·지장(紙匠) 등의 전지를 정하고, 사대부(士大夫)들은 경성(京城)에 거주하여 왕실(王室)을 호위하므로 과전(科田)을 주어서 염치(廉恥)를 기르게 하고, 군사들은 변경에서 국가를 지키고 있으므로 군전(軍田)을 주어서 〈가족을〉 구휼하게 하였으되, 과전과 공신전(功臣田)은 경기의 토지만 주고, 군전(軍田)은 경기도 이외의 토지만 주게 하였으니, 이 법은 매우 좋은 것으로 실로 만세(萬世)에 항상 시행해야 할 대전(大典)이오니, 후세로 하여금 〈이 법을〉 지켜서 고치지 말게 해야 할 터인데, 근일에 와서 공신 도감(功臣都監)이 호조(戶曹)의 급전사(給田司)에 공문을 보내어,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토지는 모두 본향(本鄕)의 토지를 주게 하였으니, 대개 토지와 집터를 넓게 점령하는 것은 사전(私田)이 지방에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 만약 사전(私田)을 경기 이외의 지방에 두면 사람마다 서로 다투어 요행을 바랄 것이며, 또 그 토지의 사방이 모두 공전(公田)이므로 기내(畿內)의 주인(主人) 있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혹시나 탐욕이 있고 교활한 무리들이 그 세력을 믿고 차차 먹어 들어가게 되면, 사방의 공전이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경기 이외에 토지를 점령하는 폐단이 어느덧 겸병하게 되어, 쟁송(爭訟)이 다시 일어나 마침내 구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여 모두 경기 이내에 주게 하고, 만약 경기 이내에 남은 토지가 없으면, 이제 다시 경기도의 구획을 정할 때에 〈외방의〉 한두 고을을 더 붙여서 그 수를 채우는 것이 역시 해롭지 아니할 것입니다. 경기에 붙인 외방의 고을도 마찬가지의 공전(公田)이니, 피차의 감손(減損)은 없고 〈실상은〉 다릅니다. 경기의 토지라 하고 주면 법제에 어긋나지 않고, 외방의 토지라 하고 주면 이미 정해 놓은 제도에 어긋날 뿐 아니라, 또 이미 개혁해 놓은 폐단을 복구하는 것이 됩니다."

도평의사사에 내려보내어 의논하게 하자, 사사에서도 헌부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고하였으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흥안군 이제가 사사로이 관리를 때렸으나 헌사에서 아무 말도 않다[편집]

○興安君李濟, 以私忿, 鞭西部令權詳, 憲司無敢言者。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서부 영(西部令) 권상(權詳)을 때렸으나, 헌사(憲司)에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4月 8日[편집]

야행하다 순관을 능욕한 의안백의 아들을 가두다[편집]

○辛未/義安伯子皎在本京, 因觀點燈, 率群小夜行, 凌辱巡官。 上命囚之, 杖其群小首者一百餘, 各有差。

의안백(義安伯)의 아들 교(皎)가 본 서울에서 관등(觀燈)할 때에 여러 소인들을 데리고 야행(夜行)하다가 순관(巡官)을 능욕하였으므로, 임금이 명하여 가두게 하고, 그 소인들의 두목은 장(杖) 1백을 때리고, 나머지도 각각 차등이 있게 곤장을 때리게 하였다.


4月 9日[편집]

최유경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壬申/上謂右政丞金士衡曰: “慶尙道都觀察使崔有慶, 在戊辰年間, 雖負我輩, 然爲其主耳, 且有布置之才。” 乃除知中樞院事、中軍同知節制使, 仍兼觀察使。 以陳乙瑞爲西北面兵馬都節制使、平壤尹。

임금이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에게 일러 말하였다.

"경상도 도관찰사 최유경(崔有慶)이 무진년[11]에 비록 우리들을 배반하였으나 그 임금을 위한 것이요, 또 포치(布置)하는 재주가 있다."

이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중군 동지절제사(中軍同知節制使)를 제수하고, 그대로 관찰사를 겸임시켰으며, 진을서(陳乙瑞)로 서북면 병마 도절제사·평양 윤을 삼았다.


4月 17日[편집]

능엄회 베푸는 회암사에 쌀·콩 등을 내려 주다[편집]

○庚辰/賜檜巖寺米豆百七十石、五升布二百匹。 王師自超設《楞嚴》會也。

회암사(檜巖寺)에 쌀·콩 1백 70석과 오승포(五升布) 2백 필을 내려 주었으니, 왕사(王師) 자초(自超)가 능엄회(楞嚴會)를 베풀기 때문이었다.


4月 19日[편집]

검교 참찬문하부사 최무선의 졸기[편집]

○壬午/檢校參贊門下府事崔茂宣卒。 茂宣, 永州人, 廣興倉使東洵之子。 性巧慧多方略, 喜談兵法。 仕前朝, 官至知門下府事。 嘗曰: “制倭寇莫若火藥, 國人未有知者。” 茂宣每見商客自江南來者, 便問火藥之法。 有一商以粗知對, 請置其家, 給養衣食, 累旬諮問, 頗得要領。 言於都堂欲試之, 皆不信, 至有欺詆。 茂宣積以歲月, 獻計不已, 卒以誠意感之, 乃許立局, 以茂宣爲提調官, 乃得修鍊火藥。 其具有大將軍、二將軍、三將軍、六花石砲、火砲、信砲、火㷁、火箭、鐵翎箭、皮翎箭、蒺藜砲、鐵彈子、穿山五龍箭、流火、走火、觸天火等名。 旣成, 觀者莫不驚嘆。 又訪求戰艦之制, 言於都堂, 監督備造。 及庚申秋, 倭寇三百餘艘至全羅道鎭浦, 朝議崔公火藥, 今可試矣。 乃命爲副元帥, 與都元帥沈德符、上元帥羅世, 乘船齎火具, 直至鎭浦。 寇不意有火藥, 聚船相維, 欲盡力拒戰, 茂宣發火具盡燒其船。 寇旣失船, 遂登岸刼掠全羅以至慶尙, 還聚于雲峰。 上時爲兵馬都元帥, 與諸將殲盡無遺。 自爾倭寇漸息, 乞降者相繼, 濱海之民, 復業如舊。 雖由上德應天之所致, 茂宣之功, 亦不小矣。 至國初, 以年老未見用, 上念其功, 授檢校參贊, 及卒, 上嗟悼, 賻以厚。 歲辛巳, 追贈議政府右政丞、永城府院君。 子海山。 茂宣臨卒, 以一卷書屬其夫人曰: “待兒長, 以此與之。” 夫人藏之甚密, 及海山年十五稍識字, 出而與之, 乃火藥修鍊之法。 海山學其法見用, 今爲軍器少監。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이 졸(卒)하였다. 무선의 본관은 영주(永州)요, 광흥창 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 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 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라고 하였다. 무선은 항상 중국 강남(江南)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 만나 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얻은 뒤,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무선을 속이는 자라 하고 험담까지 하였다. 여러 해를 두고 헌의(獻議)하여 마침내 성의가 감동되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고 무선을 제조(提調)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㷁)·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이름이 있었다. 기계가 이루어지매,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전함(戰艦)의 제도를 연구하여 도당(都堂)에 말해서 모두 만들어 내었다.

경신년[12]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무선을〉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고 도원수(都元帥) 심덕부(沈德符)·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배를 타고 화구(火具)를 싣고 바로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가 화약이 있는 줄을 뜻하지 못하고 배를 한곳에 집결시켜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때 태조가 병마 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太祖)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이 역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에 늙어서 쓰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여 검교 참찬(檢校參贊)을 제수하였다. 죽음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후하게 부의(賻儀)하였으며, 신사년에 의정부 우정승·영성 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최해산(崔海山)이다. 무선이 임종할 때에 책 한 권을 그 부인에게 주고 부탁하기를,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을 주라."

하였다. 부인이 잘 감추어 두었다가 해산의 나이 15세에 약간 글자를 알게 되어 내어주니, 곧 화약을 만드는 법이었다. 해산이 그 법을 배워서 조정에 쓰이게 되어, 지금 군기 소감(軍器少監)으로 있다.


4月 20日[편집]

왕이 온천에서 돌아오다[편집]

○癸未/上至自溫泉。

임금이 온천에서 돌아왔다.


4月 21日[편집]

양부에 가선 이하 6품 이상으로 군사와 정사를 겸임할 사람을 천거케 하다[편집]

○甲申/令兩府各擧嘉善以下六品以上可兼任軍民者十人。

양부(兩府)로 하여금 각각 가선(嘉善) 이하 6품 이상으로 군민(軍民)을 겸임할 수 있는 사람 10인을 천거하게 하였다.


왕지를 위조한 사노들을 참형에 처하여 기시하다[편집]

○私奴崔文、吳天壽等僞造王旨, 皆棄巿。

사노(私奴) 최문(崔文)·오천수(吳天壽) 등이 왕지(王旨)를 위조하였으므로 모두 기시(棄市)하였다.


말을 타고 궁성에 들어와 탄핵 당한 이염을 파직시키다[편집]

○藝文春秋館太學士李恬罷。 恬騎馬入宮城, 憲司劾之。

예문춘추관 태학사 이염(李恬)을 파직(罷職)하였다. 염(恬)이 말을 타고 궁성(宮城)에 들어왔으므로 헌사(憲司)에서 탄핵하였기 때문이었다.


4月 22日[편집]

반송정에서 활 쏘기를 사열하고 용산에 거둥하여 말을 보다[편집]

○乙酉/上閱射于盤松亭, 遂如龍山, 觀放牧場。 是夕, 大雷雨雹。

임금이 반송정(盤松亭)에서 활 쏘는 것을 사열하고, 다시 용산(龍山)에 거둥하여 목장의 말을 보았다. 이날 저녁에 크게 천둥하고 우박이 내리었다.


공조 전서 양첨식이 말 5백 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편집]

○遣工曹典書楊添植, 獻馬五百匹, 至遼東交割而還。

공조 전서(工曹典書) 양첨식(楊添植)을 〈명나라에〉 보내어 말 5백 필을 바쳤는데, 요동에 가서 교부하고 돌아왔다.


4月 23日[편집]

크게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다[편집]

○丙戌/大雷電雨雹。

크게 천둥하고 번개하며 우박이 내리었다.


한강에 거둥하여 응방을 보다[편집]

○上如漢江, 觀鷹坊。

임금이 한강(漢江)에 나가서 응방(鷹坊)을 보았다.


4月 24日[편집]

천변으로 인하여 재상들에게 구언하는 교서[편집]

○丁亥/命判三司事鄭道傳, 製敎書曰:

時當正陽之月, 有此陰沴之災, 變故非常, 予甚懼焉。 且人事有得失之異, 天之災祥, 各以類應, 故古先哲王, 每遇天災, 必求人事, 或側身修道, 或博採群言, 蓋反其本也。 寡躬代天職治天物, 然不能獨治, 乃與宰相共之。 其時政得失、生民休戚, 陳之無隱, 庶幾遷善改過, 以消天變焉。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교서를 짓게 하였으니, 그 교서는 이러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양기(陽氣)가 한창인 이달에 이러한 비바람의 재변이 있어 변고가 보통이 아니니, 내가 심히 두려워하노라. 사람의 하는 일이 옳고 그름에 따라 하늘이 재앙을 내리기도 하고 상서를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옛날 슬기로운 임금들은 천재를 만날 때마다 반드시 사람의 일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고, 혹은 몸을 기울여서 도(道)를 닦기도 하고, 혹은 널리 여러 사람의 말을 구하기도 하였으니, 대개 그 근본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과인이 천직(天職)을 대신해서 천물(天物)[13]을 다스리고 있으나, 나 홀로 다스릴 수가 없어서 재상들과 더불어 함께 다스리는 것이니, 시정(時政)의 득실(得失)과 생민(生民)의 휴척(休戚)을 숨김없이 말하여, 천선개과(遷善改過)해서 천변이 없어지게 하라."


4月 25日[편집]

경솔하게 거둥하는 것과 밤에 풍악 울리는 것 등에 대해 대사헌이 올린 상소[편집]

○戊子/大司憲朴經等上疏曰:

至不可玩者, 上天之怒; 尤不可忽者, 斯人之疑。 知所以解人心之疑, 則可以息天心之怒矣。 今月二十二日, 當殿下游幸之時, 天大雷電雨雹, 以至連日, 乃知天心仁愛殿下, 欲恐懼修省改行之速也。 臣等竊惟, 二帝三王之盛, 一行一止, 必於其時, 必於其義, 故動無過擧, 而皆曰: “一哉王心! 大哉王言!” 是以言行政事, 皆可法於後世。 其或有水旱之災、雷電之變, 惕然修省, 延訪得失, 恐懼改行, 以消變異, 故能變禍爲福, 化弱爲强, 而垂基業於無窮。 漢、魏以降, 爲人君者不能正心修身, 以行道布德之公位, 爲快情遂欲之私居, 外不分於晝, 內不分於夜。 故聽政有數, 而妃嬪御幸者無常; 宴游無度, 而公卿進接者至少。 然天下萬事, 來者不可不應, 公卿旣不可使之於內, 妃姬又不可使之於外。 於是用刑餘之人, 將命於其間者矣。 復有性識儇利, 言語辨給, 善伺候顔色, 承迎志趣, 故人君以爲眞可任使令之職, 委以朝夕出納之命。 於是黜陟賞罰之柄, 潛移於近習, 而不自知, 此豈細故哉! 卑佞之辭, 日聞於耳, 誠以爲天下之事, 擧無可虞, 極意聲色, 日醉後庭, 奢侈彌甚, 土木繁興, 以至喪身傾國者, 代不乏矣。 古之聖人放鄭聲遠佞人, 良以此也。 恭惟殿下以英明之資, 得天人之助, 開創丕基, 以登大位, 凡致治之道, 皆法於三代, 誠漢、唐以下之所無也。 然以臣等所見揆之, 言語擧動, 或乖於三代之盛者有之, 是以臣等猶敢有言。 臣等竊觀, 近日宮中管絃之聲, 或至徹夜, 恐非頤養性情之術; 車駕或時輕出游幸, 恐非貽厥孫謀之道; 土木之役, 過於常制, 恐非愛養黎民之意; 諂諛之人, 或在左右, 恐非正身率下之理。 諂瀆佛神, 無益於恐懼之念; 駕前女樂, 有虧於儀衛之嚴。 凡此數事, 皆人心之所疑, 而天之所以怒也。 伏惟殿下, 取法二帝三王之盛, 深鑑漢、魏以下之失, 聽樂有節, 遊幸有常, 省土木之役, 斥諂諛之輩, 事佛神而不瀆, 禁女樂而不邇, 則人心悅而天意解矣, 惟殿下深加察納。

上曰: “夜作管絃, 車駕輕出, 駕前驅女樂, 予將改之。 佛神, 前代君王, 以地鉗設置, 禮曹書雲觀, 請行禳禬。 宮闕, 聽政之所, 亦不可太狹, 若有過制者, 當更以聞。 諂諛之人, 在左右者, 擧其姓名以聞。”

대사헌 박경(朴經) 등이 상소하였다.

"도저히 보고만 있지 못할 것은 하늘의 노함이요, 더욱이 무시하지 못할 것은 백성들의 의심이옵니다.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줄 줄 알게 되면 하늘의 노여움도 없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달 22일에 전하께서 거둥하실 때, 하늘이 크게 천둥하고 번개하며 우박을 내리게 하여 연일 계속되오니, 이것은 곧 하늘의 마음이 인자하여 전하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속히 수성개행(修省改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요(堯)·순(舜) 이제(二帝)와 우(禹)·탕(湯)·문왕(文王) 삼왕(三王)의 시대가 융성한 것은 일거일동이 반드시 때를 맞추고 의리에 합하게 하므로, 행동에 지나친 것이 없어서, 모두 말하기를, ‘한결같도다 임금의 마음이여! 대단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하였습니다. 이 까닭에 언행과 정사가 모두 후세의 모범이 되었으며, 혹시 수재·한재와 뇌변(雷變)이 있다 해도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반성을 하고, 여러 사람에게 잘하고 못한 것을 물어서 행동을 고쳐 천재와 괴변이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재화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고, 약한 것을 강하게 만들어 그 기업(基業)을 무궁히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후로 임금된 자들이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지 아니하여, 도(道)를 행하고 덕(德)을 펴는 공위(公位)를 자기의 마음을 쾌하게 하고 욕심을 행하는 사삿집으로 삼아, 밖에서 낮을 분간하지 못하고 안에서 밤을 분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사를 듣는 것은 셀 수 있으되, 비빈(妃嬪)과 만나는 것은 한이 없고, 연회를 베풀고 노는 것은 절도가 없으되, 공경(公卿)들을 접견하는 것은 지극히 적었으나, 그러나 천하 만사는 오는 자를 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공경들을 안에서 쓸 수 없고, 비빈들 역시 밖에서 쓸 수 없으므로, 형벌하다가 남은 사람[14]들로 그 사이에서 명령을 받들게 하고, 또 성질이 영리하고 말이나 나불거리며 남의 얼굴빛을 잘 살피고 비위나 살살 맞추는 자가 있으므로, 임금이 명령을 전달하는 데에 참으로 쓸만하다 하여, 아침저녁으로 내고 들이[出納]는 명령을 맡기니, 이에 인물의 출척(黜陟)과 상벌(賞罰)의 권한이 이들 근시에게 옮겨 가나 스스로 알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아첨하는 말이 날로 귀에 들어오니 천하의 일이 모두 걱정 없는 줄 알고, 풍악과 여색에만 마음을 써서 뒷뜰에서 날마다 취하고 사치만 점점 심해져서, 토목 공사만 자주 일어나 마침내 몸을 망치고 나라까지 기울게 하는 자가 어느 대(代)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성인들이 정(鄭)나라의 음란한 노래를 물리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 한 것이 이 까닭이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신 자질로 하늘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왕업의 터전을 열으시고 대위(大位)에 오르시어, 정치의 법도를 삼대(三代)[15]에 본받으시니, 실로 한·당나라 이후에 없는 바입니다. 그러하오나 신 등의 소견으로 볼 때에 언어(言語)와 거동(擧動)에 혹 삼대의 성대(盛代)와 틀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감히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신 등은 그윽이 근일의 일을 보옵건대, 궁중에서 풍악소리가 밤을 지새울 때가 있으니, 성정(性情)을 기르는 방법이 아니오며, 어가(御駕)가 어떤 때는 가볍게 대궐 밖으로 거둥하시니, 후세에 본을 보이는 도리가 아니며, 아첨하는 사람이 혹은 좌우에 있으니 몸을 바루고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도리가 아니며, 부처와 귀신에게 빠져서 기도하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몸을 닦는 데에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며, 어가(御駕) 앞에 여악(女樂)이 따르는 것은 의장(儀仗)을 갖춘 엄숙한 호위에 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은 다 사람들이 의심하는 바이며, 하늘이 노여워 하는 바입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제(二帝)·삼왕(三王)의 성시(盛時)를 본받고 깊이 한(漢)나라·위(魏)나라 이후의 잘못된 일을 거울삼으시어, 풍악을 들으시되 절제하시고, 전렵(畋獵)과 거둥은 일정한 때에 하시고, 토목 공사를 생략하시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물리치시고, 부처와 귀신을 섬기되 번잡하게 하지 마시고, 여악(女樂)을 금하고 가까이 하지 마시오면, 인심이 즐거워하고 하늘의 노여움이 풀릴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시와 받아들여 주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밤에 풍악을 잡히고, 거가(車駕)가 경솔히 나가고, 가전(駕前)에 여악을 데리고 가는 것을 내가 장차 고칠 것이다. 부처와 귀신은 전대의 군왕들이 땅을 진압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며, 예조와 서운관에서 지신을 진압할 것을 청하였다. 궁궐은 정사를 듣는 곳이므로 너무 좁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제도가 지나친 것이 있으면 다시 보고하고, 아첨하는 사람으로 좌우에 있는 자는 그 성명을 적어서 올리라."


헌사에서 금주령을 내리자는 상소를 올려 윤허 받다[편집]

○是日, 憲司上疏曰:

竊惟昔者, 聖帝明王, 創制立法, 尊爵俎豆以爲器, 金石絲竹以爲樂, 以適郊廟, 以臨朝廷。 其享燕之禮, 獻酬之儀, 自王公而下, 各有等級, 不相僭踰, 蓋所以辨上下定民志也。 又慮人耽酒生禍, 故諄諄以流連荒亡爲戒。 《書》曰: “飮惟祀, 德將無醉。” 《禮》曰: “一獻之禮, 賓主百拜, 終日飮酒, 而不得醉焉。” 其所以養人性塞禍源之意, 深切矣, 此禁酒之上也; 漢、魏以降, 世衰一世, 不克遵先王之制, 以塞禍亂之源, 一遇水旱霜蟲, 則禁人飮酒, 以儲穀粟, 此禁酒之中也; 或慮財用之不足, 禁人私釀, 置官榷酤, 以專其利, 此禁酒之下也。 恭惟主上殿下, 制禮作樂, 動法三代之盛, 而禁酒一令, 豈可泥常而不革乎? 臣等竊以爲, 出令禁酒, 專以戕人性生禍亂爲戒, 其可矣。 前朝叔世, 紀綱陵夷, 禮制浸壞, 士大夫皆慕晋人蓬頭嗜飮, 自謂宏達, 廢棄禮法, 遺落世事, 衆庶効之, 遂成風俗, 迄今猶未全改。 其會客之家, 勿論尊卑, 奢侈相高, 數日營辦。 酒非內法, 菓非珍異, 器皿非滿案, 不敢請焉, 此豈特爲費財? 其失至爲無等, 甚者一飮數斗, 累日昏醉, 以致廢時失事。 願自今宗廟事神, 君臣同宴, 使臣迎餞外, 臣下勿論官職高卑, 毋得聚會縱酒, 以至廢事, 至於工商賤隷, 亦毋得群飮, 以禁伐性之端, 以絶産禍之源, 若有犯者, 科罪痛懲, 勿限年月, 永爲著令。

上允之。

이날 헌사(憲司)에서 상소하였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옛날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이 제도를 만들고 법을 세울 때, 준작(尊爵)[16]과 조두(俎豆)[17]를 만들어서 그릇으로 삼고, 금석(金石)과 실과 대나무로 악기를 만들어서 종묘 및 교외의 제사와 조정의 연향에 쓰고, 향연(享燕)하는 예(禮)와 잔을 드리는 의식이 왕공(王公) 이하로 각각 등급이 있어 서로 참람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한 것은, 대개 상하를 분별하고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술을 몹시 좋아하다가 재화를 낼까 염려하여, 순순(諄諄)히 유련황망(流連荒亡)함을 경계한 것입니다. 《서전(書傳)》에 이르기를, ‘술을 마시는 것은 오직 제사(祭祀) 때만 할 것이며, 덕으로써 취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한 잔 드리는 예는 손이나 주인이 백 번 절하고 마시는 것이니, 종일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사람의 성품을 기르고 재화의 근원을 막는 뜻이 깊고 절실하오니, 이것은 술을 금하는 최상의 방책입니다. 한(漢)나라·위(魏)나라 이후로는 세상이 한 대를 내려갈 적마다 쇠해져서, 선왕의 제도를 지켜 화란(禍亂)의 근원을 막아내지 못하고, 한 번 수재(水災)·한재(旱災)나 상재(霜災)·충재(蟲災)를 만나면 술 마시는 것을 금하여 곡식을 저축하려 하니, 이것은 술을 금하는 중등의 방법이며, 혹은 재용(財用)이 부족할까 하여 개인의 양조(釀造)를 금하고 관원을 두어서 전매(專賣)하여 그 이익을 취하니, 이것은 술을 금하는 최하의 방법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서 예악(禮樂)을 제정함에 있어서 삼대(三代)의 성시(盛時)를 본뜨고 있으나, 금주령 하나만은 어찌 풍속에 구애하여 고치지 아니하옵니까?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금주령을 내리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본성을 해치고 화란(禍亂)을 낼까 염려하여서이니,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 옳을까 하옵니다. 고려조 말기에 기강이 무너지고 예제(禮制)가 허물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옛날 진(晉)나라 사람의 풍류를 따라, 쑥대머리로 술을 마시는 것을 스스로 마음이 넓고 달통한 사람이라 하고, 예법을 폐기(廢棄)하고 세상 만사를 잊어버리니, 서민들이 또한 이를 본받아, 드디어 풍속이 되어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집을 보면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치만 서로 숭상하여 여러 날 동안 준비하고, 술이 궐내에서 쓰는 법주(法酒)가 아니고 과자(菓子)가 진기(珍奇)한 것이 아니며 기명(器皿)이 상에 가득 차지 않으면 감히 손님을 청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어찌 재물만 허비할 뿐이겠습니까? 그 손실은 더할 나위가 없을 정도에 이르니, 심한 자는 한 번에 두어 말의 술을 마시고 여러날 동안 정신 없이 취하여 시간을 모르고 일을 폐하는 데에 이릅니다. 원하옵건대, 지금부터의 종묘의 제사와 임금과 신하의 연회와 사신(使臣)의 영송(迎送) 이외에는, 신하들은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부로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여 사무를 폐하는 일이 없게 하고, 공상(工商)·천례(賤隷)들도 떼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여 본성을 잃고 재화를 부르는 원인을 제거하고,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죄를 다스려서 크게 징계하되, 기한을 정하지 말고 영구한 법령으로 삼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일본 살마수 총주와 중이집원 태수가 잡혀 있던 사람들을 보내오다[편집]

○日本(薩摩守)〔薩摩州〕總(州)〔守〕藤伊久發還被擄人口。 又中伊集院太守藤原賴久稱臣奉書獻禮物, 歸我傳傳到來人口。

일본 살마수 총주(薩摩守總州) 등이구(藤伊久)가 피로(被擄)되었던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또 중이집원 태수(中伊集院太守) 등원뇌구(藤原賴久)가 신(臣)이라 일컫고 글을 올려서 예물을 바치고, 이곳 저곳 전해서 온 〈피로〉 인구를 돌려보내 왔다.


총지사와 현성사에 사신을 보내 천변을 기양하는 재를 올리다[편집]

○遣使于摠持、賢聖等寺, 作佛事以禳天變。

사신을 총지사(摠持寺)와 현성사(賢聖寺) 등에 보내서 부처님께 재를 올려 천변(天變)을 제거하게 하였다.


천변의 원인이 왕우 삼부자에게 있다며 강화도에 안치하기를 간관이 청하다[편집]

○諫官李皋等上言: “冒職言官, 事有關於宗社安危者, 不敢含默。 矧今有求言之敎, 謹以愚衷, 仰瀆天聰。 竊惟自古國家之變, 不生於所愼, 常起於所忽。 古昔聖王, 深謀遠慮, 使不軌之徒, 不得接迹於當世者, 所以備不測之患, 而爲宗社生靈之大計也。 前朝王氏, 不克庸德, 君道旣失, 天人離叛, 自底滅亡。 殿下以好生之德, (實)〔悉〕令完聚, 恩至渥也。 惟且不念殿下之德, 反謀不軌, 悉皆誅伏, 而王瑀實主其謀, 獨蒙寬典, 得保首領。 是雖殿下天地生物之仁, 然豈以殿下一時之恩, 遂忘五百年社稷之業乎? 其報復之計, 必未嘗一日忘于懷也, 第因羽翼未成, 不敢發耳。 況以寵弟多才, 素得群小之心, 在今北鄙有言, 人心洶洶。 若聚群不逞之徒, 乘間竊發, 則臣等恐噬臍無及矣。 如或自懷疑懼, 逃入他境, 則後日之患, 可勝言哉! 願殿下將王瑀三父子, 移置江華, 禁其出入, 使不得私通雜人, 以杜禍亂之源。 臣等以謂, 今當正陽之月, 有雨雹陰沴之災, 未必不由群小陰謀之所召也。 伏惟殿下深慮之。” 上不允。

간관 이고(李臯)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언관(言官)의 직책을 가졌으니 종묘·사직의 안전과 위험에 관한 〈중대한〉 일에 대하여 감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사옵고, 더구나 이제 바른말을 구하는 교서가 내렸으니, 삼가 어리석은 충심(衷心)으로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할까 하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예로부터 국가의 변란은 삼가는 데서 나오지 않고 항상 소홀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옛날 성왕(聖王)들이 깊이 계획하고 멀리 생각하여, 반역을 꾀하는 무리가 당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한 것은 불의의 사변을 예방하고 종묘·사직과 생령(生靈)을 위한 큰 계책인 것입니다. 고려의 왕씨가 덕이 없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 다 떠나고 배반하여 스스로 멸망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으로 모두 한데 모여서 살게 하셨으니, 실로 은총이 지극히 두터운데, 전하의 덕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반역을 음모하였으므로, 거의 다 참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왕우(王瑀)는 실상 그 음모의 우두머리인데 홀로 관대한 용서를 받고 우두머리 자리를 보전할 수 있게 되니, 이는 비록 전하께서 하늘과 땅이 만물을 살리는 인자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나, 어찌 전하의 한때의 인자한 마음으로 5백 년 사직의 왕업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보복하려는 계획을 하루도 가슴속에 잊어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좌우에서 도와줄 당파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행동을 못한 것뿐입니다. 더구나 그 사랑하는 동생이 재주가 많고, 본디 소인배의 마음을 얻었는데, 요새 와서 북쪽 변방에서 들려오는 말이 있어 인심이 흉흉하니, 만약 못된 놈들과 떼를 지어 기회를 엿보고 비밀히 행동하면, 신 등은 〈그때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스스로 의심을 품고 겁을 내어 다른 나라로 달아나면 후일의 걱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왕우 삼부자(三父子)를 강화도로 옮겨 출입을 금하고 잡인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여, 화란의 근원을 막도록 하소서.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이제 양기가 한창인 4월을 당하여 우박과 비가 내리는 재변은 못된 놈들이 음모하는 데에 원인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엎드려 아뢰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月 26日[편집]

간관이 다시 왕우 삼부자의 강화도 안치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己丑/諫官又上言: “臣等昨以王瑀三父子移置事, 具陳以聞, 殿下不賜兪允。 然事關宗社, 不能自已, 謹昧死敢言。 竊惟王瑀將圖不軌, 臣子所不共戴天之讎也。 昔武王革命, 封紂子武庚, 未幾而武庚叛, 成王誅之, 然後天下無虞, 王室再安。 果使其計得行, 成周八百年之業, 未可期也。 大抵天下之變, 常起於所忽之地, 而終至於莫制。 臣等雖愚鄙, 未嘗不爲之痛心也。 願殿下斷以大義, 將王瑀三父子, 移置江華, 以備不測之患, 宗社幸甚。” 上不允。

간관(諫官)이 또 상언(上言)하였다.

"신 등이 어제 왕우(王瑀) 삼부자(三父子)를 〈강화도로〉 귀양보낼 것을 자세히 말씀드렸는데 전하께서 윤허하지 아니하셨사오나, 일이 종묘와 사직에 관계된 것이므로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다시 말씀 드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왕우가 장차 반역을 음모할 것이니, 신하들이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혁명할 때에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하였다가, 얼마 아니되어 무경이 배반하여 성왕(成王)이 죽였습니다. 그런 뒤에 천하에 걱정이 없어지고 왕실이 다시 평안하여졌습니다. 과연 〈무경의〉 계교가 그대로 시행되었던들 주나라 8백 년의 왕업은 기(期)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개 세상의 변란은 언제나 소홀히 하는 곳에서 일어나 마침내 막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 등이 비록 어리석고 못났사오나 마음이 아프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대의(大義)로 판단하시와 왕우 삼부자를 강화도에 안치(安置)하여 불측(不測)의 화(禍)를 예방하는 것이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다행일까 하옵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月 27日[편집]

이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각도 수령으로 병마 단련을 겸하게 하다[편집]

○庚寅/以李茂判中樞院事, 以都承旨韓尙敬爲僉書中樞院事, 以張至和代之, 以劉敬爲中樞院副使。 以各道守令, 皆帶兵馬團練, 三品曰使, 四品曰副使, 五六品曰判官。 郡縣小者, 二員互兼其職, 蓋欲有事則一員率兵以行, 一員留治二縣。

이무(李茂)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도승지 한상경(韓尙敬)으로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를 삼고, 장지화(張至和)로 대신 도승지를 삼았으며, 유경(劉敬)으로 중추원 부사를 삼고, 각도 수령(守令)들로 하여금 병마단련(兵馬團練)을 겸하게 하여 3품을 사(使), 4품을 부사(副使), 5품·6품을 판관(判官)이라 하고, 고을이 작은 곳은 두 〈고을의〉 수령이 서로 그 직을 겸하게 하였다. 대개 일이 있을 때에 한 사람은 군마를 거느리고 나가게 하고, 한 사람은 남아서 두 고을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왜구를 막지 못하고 군인의 딸을 강탈한 창포 천호를 참형에 처하다[편집]

○倉浦千戶朴仁守不能禦倭, 使賊入境, 殺掠人民者再, 且强奪軍人女爲妾。 事聞, 命斬之。

창포 천호(倉浦千戶) 박인수(朴仁守)가 왜구를 막지 못하여, 적으로 하여금 경내에 들어와서 인민을 살해하고 약탈하게 한 것이 두 번이었으며, 또 군인의 딸을 강탈하여 첩을 삼았다. 그 사실이 보고되자 명하여 참형에 처하게 하였다.


왜구에 항거한 완산 절부 임씨의 정문을 세우다[편집]

○旌表完山節婦林氏閭。 林氏, 完山人崔克孚妻, 待聘齋生柜之女也。 陷於倭寇, 欲汚之, 不從。 寇斷一臂, 又刖一足, 猶不從, 寇刺殺之。

완산(完山)의 절부(節婦) 임씨(林氏)의 정문(旌門)을 세웠다. 임씨는 완산 사람 최극부(崔克孚)의 아내며, 대빙재(待聘齋)의 학생 임거(林柜)의 딸이다. 왜구에게 붙들리어 욕을 보이려 하매, 듣지 아니하여 왜구가 한쪽 팔을 베어내고 또 한쪽 다리를 떼어내어도 듣지 않으므로, 왜구가 찔러 죽였다.


4月 28日[편집]

무예 도시(都試)를 쳐서 33인을 뽑다[편집]

○辛卯/都試武藝, 取三十三人。

무예(武藝)의 도시(都試)를 보여서 33인을 뽑았다.


四年 五月[편집]

5月 1日[편집]

사헌부에서 장수를 가려 뽑고 무기를 수리하는 등의 6조목을 올리다[편집]

○癸巳朔/憲司上言, 選將帥、修器械、完城堡、畜資糧、明賞罰、寬征賦凡六條, 命都評議使司, 擬議施行。

헌사(憲司)에서 상언(上言)하여, 장수를 가려서 임명하고, 기계를 수리하고, 성보(城堡)를 완비하고, 자재와 식량을 비축하고, 상벌(賞罰)을 밝게 하고, 세금과 부역을 헐하게 하자 하는 여섯 가지 조목을 청하였으므로, 도평의사사에 분부하여 의논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5月 3日[편집]

도평의사사에서 왕의 명령을 주고 받을 때의 자세에 대하여 상언하다[편집]

○乙未/都評議使司上言: “親稟王命以傳, 則傳者立, 承者跪; 若傳奉以傳, 則傳承皆跪。”

도평의사사에서 상언하여, 친히 임금의 명령을 받아서 전할 때에는 전하는 자는 서고 받는 자는 꿇어앉게 하며, 만약 전해 받아서 전할 때에는 전하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꿇어앉게 하자고 하였다.


5月 7日[편집]

관리를 각도에 파견하여 군용을 점고하게 하다[편집]

○己亥/遣使各道, 點軍容。

사신을 각도에 보내어 군용(軍容)을 점고(點考)하게 하였다.


5月 8日[편집]

사은사 이직이 남경에서 돌아오다[편집]

○庚子/謝恩使李稷回自京師。

사은사(謝恩使) 이직(李稷)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백백 태자와 양왕의 손자에게 쌀과 콩 등을 내려 주다[편집]

○賜伯伯太子米豆四百斛、紵麻布三十匹, 梁王孫子米豆百斛、紵麻布十(匠)〔匹〕。

백백 태자(伯伯太子)에게 쌀과 콩 4백 곡(斛)과 저포(紵布)·마포(麻布) 30필을 내려 주고, 양왕(梁王)의 손자에게 쌀과 콩 1백 곡과 저포·마포 10필을 내려 주었다.


5月 11日[편집]

최자운이 말 천 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편집]

○癸卯/遣前典農正崔子雲, 獻馬一千匹, 至遼東交割而還。

전 전농 정(典農正) 최자운(崔子雲)을 보내서 말 1천 필을 〈명나라에〉 바쳤는데, 요동에 가서 교부하고 돌아왔다.


처음으로 세자 부빈객을 두고 한상경과 유경을 좌우 부빈객으로 삼다[편집]

○始置世子副賓客。 以韓尙敬爲左副賓客, 劉敬爲右副賓客。

처음으로 세자 부빈객(世子副賓客)을 두고 한상경(韓尙敬)으로 좌부빈객(左副賓客)을, 유경(劉敬)으로 우부빈객(右副賓客)을 삼았다.


환관 황영기 등이 경사에서 축출당하여 돌아오다. 명나라에 그들의 죄를 청하다[편집]

○閹人黃永奇、李仁敬、申用明、辛興奇、金禾、鄭澄、金希裕、李原義、崔淵等二十餘人, 至自京師, 本國人也。 上命校書少監鄭渾訊其故。 興奇、禾、澄、原義、希裕等, 嘗覲親而還, 於赴京入闕時, 或持蘇合香元, 或持閹人在闕中者本家書信, 或持僧自超所贈隨求梵書漆環。 門者搜索奏聞, 帝見之驚怪, 命皆黜之。 上遣奉常寺事金乙祥, 具奏以聞, 請罪永奇等。

환관(宦官) 황영기(黃永奇)·이인경(李仁敬)·신용명(申用明)·신흥기(辛興奇)·김화(金禾)·정징(鄭澄)·김희유(金希裕)·이원의(李原義)·최연(崔淵) 등 20여 인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모두 본국 사람이다. 임금이 교서 소감(校書少監) 정혼(鄭渾)을 시켜서 그 연유를 물으니, 흥기·화·징·원의·희유 등이 일찍이 부모를 뵙고 돌아가 남경에 돌아가서 입궐할 때에, 혹은 소합향원(蘇合香元)을 가지고 가고, 혹은 궐내에 있는 〈다른〉 환관의 본가 편지를 가지고 가고, 혹은 중[僧] 자초(自超)가 범서(梵書)를 구하기 위하여 준 칠환(漆環)을 가지고 갔으므로, 문지기가 수색하여 황제에게 아뢰어, 황제가 이를 보고 매우 놀래어 다 축출한 것이라 하였다. 임금이 봉상시사(奉常寺事) 김을상(金乙祥)을 보내서 사연을 갖추어 아뢰고, 황영기(黃永奇) 등의 죄를 청하였다.


5月 13日[편집]

간관 한상환 등이 재정 및 토지 정책에 대한 시무를 아뢰다[편집]

○乙巳/諫官韓尙桓等上言治兵足食之要曰: “願罷檢校之職、婦女之爵, 庶幾祿俸不至於妄費。 且凡寺社之田充給外, 毋得加給, 其原從功臣之田, 亦且停給。 又自今賜米助哀, 一切停罷, 以備不虞。”

간관(諫官) 한상환(韓尙桓) 등이 군대를 강하게 하고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요점을 올려서 말하였다.

"원하옵건대, 검교(檢校)의 벼슬과 부녀들의 작위를 파하면 녹봉이 낭비되지 않을 것이요, 사사(寺社)의 토지는 이미 준 것 이외에 다시 더 주지 말고,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토지도 역시 주지 말며, 또 지금부터는 쌀로 부의(賻儀)하는 것을 일체 중지하여 뜻밖의 일어나는 사변에 대비하게 하소서."


5月 15日[편집]

왜구에게 사로잡혀 수절하고 죽은 전 별장 이제 아내의 정문을 세우다[편집]

○丁未/右道觀察使金希善報都評議使司曰: “喬東人前別將李堤妻, 百丁曺長壽之女, 嘗爲倭所虜, 守節而死。 宜旌表其閭。” 使司以聞, 上從之。

우도 관찰사(右道觀察使) 김희선(金希善)이 도평의사사에 보고하였다.

"교동(喬桐) 사람 전 별장(別將) 이제(李堤)의 아내는 백정(百丁) 조장수(曹長壽)의 딸로서 일찍이 왜구에게 사로잡혀 수절(守節)하고 죽었사오니, 그 여리(閭里)를 정표(旌表)하소서."

사사(使司)에서 임금에게 주달하여 그대로 따랐다.


5月 17日[편집]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바람에 침몰하다[편집]

○己酉/慶尙道漕船十六艘, 至安興梁, 遇風沒水。

경상도 조선(漕船) 16척이 안흥량(安興梁)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침몰하였다.


5月 18日[편집]

우리 나라에 와 정탐하며 헛소문을 퍼뜨린 요동 중 각오를 참형하다[편집]

○庚戌/斬遼東僧覺悟。 初悟來言: “上國欲加兵於我。” 乃囚巡軍獄鞫之, 悟曰: “遼東閔千戶以各衛軍赴征, 疑朝鮮人擣虛, 使來觀變。”

요동(遼東)의 중[僧] 각오(覺悟)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처음에 각오가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군사를 보내서 치려고 한다."

하였으므로,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각오가

"요동의 민 천호(閔千戶)가 각위(各衛)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에 나갔는데, 조선 사람이 헛점을 노릴까 하여, 나를 보내서 정탐하게 한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었다.


5月 19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보이다[편집]

○辛亥/太白晝見。

태백성이 낮에 보이었다.


5月 24日[편집]

좌복야 남은과 참찬문하부사 남재를 기복(起復)하다[편집]

○丙辰/命左僕射南誾、參贊門下府事南在起復, 皆賜衣冠。

좌복야(左僕射) 남은(南誾)과 참찬문하부사 남재(南在)를 기복(起復)하여 〈다시 벼슬을 시키고〉 모두 의관(衣冠)을 하사하였다.


5月 27日[편집]

태묘 건축 공사를 둘러보고 응방에 거둥하다[편집]

○己未/上觀太廟經營, 遂如漢江鷹坊。

임금이 태묘(太廟)의 건축 공사를 보고, 한강(漢江)의 응방(鷹坊)에 거둥하였다.


5月 28日[편집]

간관 이고 등이 풍악을 울리고 경솔히 거둥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상언하다[편집]

○庚申/諫官李皋等上言:

求言納諫, 人主之要道, 君不納諫, 則無以知其過。 是故以帝堯之聖, 捨己從人; 以大舜之智, 好察邇言; 伊尹贊成湯之德曰: “‘改過不吝。’” 傅說告于高宗曰: “‘從諫則聖。’” 三代以下從諫之君, 莫如漢文帝、唐太宗, 故其治幾於三代。 頃者, 憲司請止輕出遊幸、夜奏管絃等事, 殿下卽賜兪允, 群臣咸稱殿下從諫之美。 殿下更令奏樂, 且置鷹坊, 遊幸漢江, 雖有從諫之名, 而無從諫之實。 夫創始之君, 子孫之所儀刑也, 且信者, 人君之大寶。 殿下旣從憲司之言, 尋自反之, 信安在哉? 願殿下俯察狂斐之言, 以實前日從諫之美, 以爲子孫萬世之法。 臣等伏見, 殿下使甲士諷經闕庭, 鐘鼓之聲, 聞于國都, 非所以嚴宮衛也。 佛雖有靈, 豈此輩之誦經, 所能感哉? 伏惟殿下, 卽令停罷, 俾甲士專委宿衛, 以嚴宮禁。

간관(諫官) 이고(李皐)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바른말을 구하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임금의 요도(要道)이며, 임금으로서 간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잘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요(堯)와 같은 성제(聖帝)도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말을 따랐으며, 순(舜)과 같은 지혜로도 비근한 말을 잘 살폈으며, 〈은(殷)나라〉 이윤(伊尹) 같은 어진 신하가 탕(湯) 임금의 덕을 칭찬하여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하였고, 〈은나라〉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고하기를, ‘간하는 말을 따르면 성군(聖君)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삼대(三代) 이후로 간하는 말을 잘 들은 임금은 한나라 문제(文帝)와 당나라 태종(太宗)만한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치세(治世)가 거의 삼대(三代)와 비슷하였습니다.

지난번엔 헌사(憲司)에서 경솔하게 거둥하는 것과 밤에 풍악을 중지할 것을 청하여, 즉시 윤허하셨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전하께서 간하는 것을 따르는 아름다움을 칭찬하였사온데, 〈이제〉 전하께서 다시 풍악을 울리게 하고, 또 응방(鷹坊)을 설치하고 한강(漢江)에 거둥하시오니, 비록 간하는 말을 좇는다는 이름은 있으되 간하는 말을 좇은 실지는 없습니다. 대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임금은 자손들에게 의표(儀表)가 되는 것이오며, 또 믿음은 임금의 대보(大寶)이온데, 전하께서 이미 헌사(憲司)의 말을 좇겠다 하시고 곧 돌이키시오니,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저희들의〉 광망(狂妄)한 말을 굽어 살피시와, 전날 간하는 말을 좇겠다고 하신 아름다움을 실행하시어 자손 만대에 법이 되게 하소서. 신 등은 또 보옵건대, 전하께서 갑사(甲士)로 하여금 궐정(闕庭)에서 불경을 외게 하고, 종소리와 북소리가 시내에까지 들리오니, 궁중의 호위를 엄하게 하는 바가 아닙니다. 부처가 비록 영험이 있다 해도 어찌 이들의 경을 외는 데에 감동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즉시 이것을 정지하시고 갑사들로 하여금 오로지 숙위(宿衛)를 맡아 보게 하여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소서."


四年 六月[편집]

6月 1日[편집]

사신을 사천왕사 등에 보내어 사천왕 도량을 베풀다[편집]

○癸亥/遣使四王等寺, 設四天王道場。

사신을 사천왕사(四天王寺) 등처에 보내어 사천왕 도량(道場)을 베풀었다.


6月 6日[편집]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치다[편집]

○戊辰/改漢陽府爲漢城府, 移其吏民于見州, 改爲楊州郡。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쳤다.


지중추원사 최유경에게 태안군 북쪽에 운하 팔 곳이 있는지를 보게 하다[편집]

○上遣知中樞院事崔有慶, 相泰安郡北漕渠。 有慶回, 以地高石堅, 不可卒開聞。

임금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유경(崔有慶)을 보내어 태안군(泰安郡) 북쪽에 〈조선(漕船)이 다닐 수 있는〉 조거(漕渠)[18]를 팔 곳을 보게 하였는데, 유경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땅이 높고 굳은 돌이 있어서 갑자기 팔 수 없습니다."


중추원 사 권근에게 관혼 상제의 예를 상정하게 하다[편집]

○命中樞院事權近, 詳定冠婚喪祭之禮。

중추원 사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관혼 상제(冠婚喪祭)의 예(禮)를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판삼사사 정도전이 《경제문감》을 저술해 올리다[편집]

○判三司事鄭道傳撰《經濟文鑑》以進。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저술하여 올리었다.


6月 9日[편집]

임금이 당태종의 고사를 예로 들어 사초를 보고자 하다[편집]

○辛未/上以唐太宗古事, 欲鑑卽位以來史草, 大臣上言不可, 臺諫亦上書言之, 上兪允。

임금이 당나라 태종의 고사(古事)를 본받아 즉위(卽位) 이래의 사초(史草)를 보려고 하니, 대신이 상언(上言)하여 옳지 못하다 하고, 대간(臺諫)에서도 또한 상서(上書)하여 옳지 아니하다고 하였으므로, 임금이 이에 따랐다.


6月 12日[편집]

달이 방성을 범하다[편집]

○甲戌/月犯房星。

달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6月 13日[편집]

개성부·양광도·서해도·강릉도·교주도의 이름을 고치고 관리를 임명하다[편집]

○乙亥/改開城府爲開城留後司, 改楊廣道爲忠淸, 西海道爲豐海, 合江陵、交州道爲江原。 成石璘爲判漢城府事, 鄭臣義爲尹, 禹仁烈爲開城留後司留後, 盧崇、鄭南晋爲副留後。

개성부(開城府)를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로 고치고, 양광도(楊廣道)를 충청도(忠淸道)로, 서해도(西海道)를 풍해도(豐海道)로 고치고, 강릉도(江陵道)와 교주도(交州道)를 합하여 강원도(江原道)라 하고, 성석린(成石璘)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신의(鄭臣義)를 한성부 윤, 우인열(禹仁烈)을 개성 유후사 유후(留後), 노숭(盧崇)과 정남진(鄭南晉)은 부유후를 삼았다.


참지문하 김입견을 성절사로 보내다[편집]

○遣參知門下金立堅, 如京師賀聖節。

참지문하(參知門下) 김입견(金立堅)을 남경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보이다[편집]

○太白晝見。

태백성이 낮에 보이었다.


6月 14日[편집]

현비의 생일이므로 이죄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다[편집]

○丙子/放中外二罪以下囚。 顯妃生日也。

서울과 지방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는 석방하게 하였으니, 현비(顯妃)의 생일인 까닭이었다.


6月 15日[편집]

과전을 많이 받아 탄핵 당한 참찬문하 조임을 파직시키다[편집]

○丁丑/參贊門下趙琳罷。 諫官劾其剩受科田之罪, 上以原從功臣, 止罷其職。

참찬문하 조임(趙琳)을 파직하였다. 간관(諫官)이 과전(科田)을 더 받은 죄를 탄핵하였으므로, 임금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 하여 그 벼슬만 파면한 것이었다.


6月 23日[편집]

중추원 당후 박헌이 서북면 익군을 다시 훈련 시킬 것 등을 건의하다[편집]

○乙酉/中樞院堂後朴軒, 獻書都評議使司, 論西北面各翼改鍊、千戶擇定地祿制、鷹子禁止等事, 使司以聞。

중추원 당후(中樞院堂後) 박헌(朴軒)이 도평의사사에 글을 올려서 서북면 〈좌우〉 각 익군(翼軍)을 다시 훈련시키고 천호(千戶)를 가려서 임명하고, 지록제(地祿制)를 개정하고, 매사냥을 금지할 것 등의 일을 건의하였으므로, 사사에서 아뢰었다.


6月 26日[편집]

서북면 도순무사 최윤지를 모해한 전 낭장 김영수를 참형에 처하다[편집]

○戊子/前郞將金永守伏誅。 永守謀害西北面都巡撫使崔允祉, 以匿名狀投于都巡問使安景良曰: “允祉父子, 有非分望, 將爲逆。” 景良捕得永守械送, 上命下巡軍鞫問之。 召允祉具言其獄辭, 允祉惶懼請對辨, 上曰: “卿於寡人, 義爲君臣, 恩猶父子。 雖有構者, 何疑之有!” 卽令有司, 支解永守, 徇于各道。

전 낭장(郞將) 김영수(金永守)를 참형에 처하였다. 영수가 서북면 도순무사(西北面都巡撫使) 최윤지(崔允祉)를 모해(謀害)하기 위하여 익명서(匿名書)를 도순문사(都巡問使) 안경량(安景良)에게 보내서 말하기를,

"윤지의 부자가 분외(分外)의 야망을 가지고 장차 역적을 모의한다."

하였으므로, 경량이 영수를 잡아 수갑을 채워서 올려보냈다. 임금이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하게 하고, 윤지를 불러서 옥사(獄辭)를 말하니, 윤지가 황공해서 대질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경은 나에게 의리로는 군신이나 은혜로는 부자와 같은데, 비록 모함하는 자가 있다 한들 어떻게 의심하겠는가?"

하고, 즉시 유사(有司)를 시켜 영수의 사지(四肢)를 찢어서 각도에 돌려 보이게 하였다.


6月 28日[편집]

사헌부에서 첩으로 아내를 삼은 김우와 함부로 과전을 받은 변옹을 탄핵하다[편집]

○庚寅/憲司劾將軍金宇棄妻對妾及前禮安監務卞雍冒受科田之罪, 命罷宇職, 流雍于外方。

헌사에서 장군(將軍) 김우(金宇)가 아내를 버리고 첩을 대신 아내로 삼은 것과 전 예안 감무(禮安監務) 변옹(卞雍)이 함부로 과전(科田)을 받은 죄를 탄핵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우(宇)는 파직시키고, 옹(雍)은 외방으로 귀양보내었다.


궁궐 조성 감역관과 인부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다[편집]

○賜酒食于宮闕造成監役官, 仍給役徒。

술과 음식을 궁궐 조성 감역관(宮闕造成監役官)에게 하사하고 인부들에게도 주었다.


사헌부에서 부모의 삼년상을 행할 것 등을 아뢰니 사사에서 논의하게 하다[편집]

○憲司上言: “自今勿論時散, 許終三年之喪, 申明家廟之制。 禁三日葬及火葬, 一依三月踰月之制。” 下使司擬議以聞。

太祖康獻大王實祿卷第七

헌사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지금부터 현직 관리와 산관(散官)을 막론하고 〈부모의〉 삼년상을 마치게 하고, 가묘(家廟)의 제도를 밝히며, 삼일장(三日葬)과 화장(火葬)을 금하되, 모두 석 달 또는 달을 넘겨서 장사지내는 제도를 행하게 하소서."

사사(使司)에 내려보내어 논의해서 아뢰게 하였다.


四年 秋七月[편집]

7月 1日[편집]

풍문으로 탄핵하였다 하여 간관 이고에게 일을 보지 말게 하다[편집]

○壬辰朔/諫官劾前開城尹金云貴剩受科田, 仍論不孝其親之罪, 上以剩受田之罪, 流于外方。 召散騎李皐等曰: “前朝之季, 諫官以傳聞之事, 請劾無辜, 或至死亡, 予甚憫焉。 肆自卽位以來, 令諫官毋得劾傳聞之事, 今乃數以傳聞請罪何?” 皐對曰: “云貴不孝之罪, 國人所共知。 臣等職在言責, 何可不劾?” 上命皐勿視事。

간관이 전 개성 윤(開城尹) 김운귀(金云貴)가 과전을 〈한도 외에〉 더 받은 것을 탄핵하고, 인하여 그 어버이에게 불효한 죄를 논의하니, 임금이 과전을 더 받은 죄로써 외방에 유배시켰다. 그리고 산기(散騎) 이고(李皐) 등을 불러서 말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간관이 전해 들은 말로 무고(無辜)한 사람을 탄핵하여 혹은 죽게까지 하였으니, 내 심히 불쌍히 여겼다. 그러므로 내가 즉위한 이래로는 간관(諫官)으로 하여금 전해 들은 말을 가지고 탄핵하지 말라고 했더니, 이제도 자주 풍문을 가지고 죄를 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고(皐)가 대답하였다.

"운귀의 불효한 죄는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터이온데, 신 등은 직책이 간관에 있으니 어찌 탄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임금이 고(皐)에게 일을 보지 말라고 분부하였다.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이 중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日本九州節度使源了俊遣僧原正泉等, 來獻土物。

일본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이 중 원정천(原正泉) 등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제주에서 해마다 바치는 마른 말고기를 그만두게 하다[편집]

○禁濟州歲貢乾馬肉。 濟州俗每於臘月, 殺牝馬作脯。 都安撫使黃君瑞回自濟州, 白罷之。

제주에서 공(貢)바치는 마른 말고기를 금하였다. 제주의 풍속은 매년 섣달에 암말을 잡아서 포를 만들어 토산물로 바쳤는데, 도안무사 황군서(黃君瑞)가 제주에서 돌아와서 아뢰므로 이를 파하게 하였다.


7月 3日[편집]

폭풍에 새 궁궐 동쪽 월랑 48간이 무너지다[편집]

○甲午/暴風雷雨, 新闕東廊四十八間頹。

폭풍과 번개가 치고 비가 와서 새 대궐 동쪽 월랑(月廊) 48간이 무너졌다.


7月 5日[편집]

풍문 공사한 좌산기 상시 이고를 파직시키다[편집]

○丙申/左散騎常侍李皐罷。

좌산기 상시 이고(李皐)를 파직시켰다.


진안군 복근을 봉녕군으로 봉하다[편집]

○以鎭安君福根爲奉寧君。

진안군(鎭安君) 복근(福根)을 봉녕군(奉寧君)으로 봉하였다.


금령을 어기고 술을 빚어 연회한 광주 목사 최식을 파직시키다[편집]

○罷廣州牧使崔湜。 湜犯禁令, 置酒具樂饗客。 監司崔迤聞之, 劾罷之。

광주 목사(廣州牧使) 최식(崔湜)을 파직하였다. 식(湜)은 금령을 범하여 술자리를 벌여 풍악을 갖추고 손님을 접대하니, 감사 최이(崔迤)가 이를 듣고 탄핵하게 되어 파직하였다.


7月 8日[편집]

환관 장부개 신흥기 등의 공초를 명나라에 바치며 올린 주문[편집]

○己亥/遣金乙祥赴京, 奏聞曰:

洪武二十七年十一月十九日, 親男【今殿下諱。】回自京師, 欽奉宣諭聖旨節該: “爾國火者有一箇柳條, 捲過來放在髢髻上, 打開看裏頭, 有箇紙撚緊緊的捲著, 不知甚麿字, 又有幾封書縫在衣領上, 又那厮我根底奏道: ‘本國王賞給四箇銀子。’ 旣係王賞, 呵就與他父母親眷的是。 他將來的意思, 是爾那里敎他將來, 這箇都是小道兒。 我罵也不曾罵他一箇, 自家跳井死了。” 欽此, 卑職實甚惶愧間, 洪武二十八年四月二十五日, 遼東都司抄蒙禮部批文: “爲差百戶姚忠, 伴送本國奄人張夫介等二十六名, 到來義州, 交付還國。” 準此竊詳, 上項奄人張夫介等, 節次欽奉聖旨, 起取赴京, 職當小心謹愼, 給事宮中, 不期張夫介等奸頑不肖, 干犯法令。 欽蒙聖慈, 不卽與罪, 發遣本國, 卑職委實驚懼, 措身無地。 爲此隨卽委官, 究問各人所犯情由。 據委官鄭渾等狀啓, 取問到張夫介等各各供說詞因, 理合論罪, 爲緣夫介等曾侍天朝, 未敢擅便處斷。 除夫介、辛興奇、金希裕、李原義、金和、崔淵、金貴千等監收聽候外, 今將各人所供詞因, 逐一開坐, 差判典儀寺事金乙祥, 收領前去。

김을상(金乙祥)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나아가 주문하게 하였다. 그 주문은 이러하였다.

"홍무 27년 11월 19일에 신의 아들이 【지금의 전하 휘(諱).】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는데, 선유(宣諭)한 성지를 받들으니, 이르기를 ‘너희 나라의 화자(火者)가 한 개의 버들가지 껍질을 말아 가지고 온 것이 있는데 상투 속에 넣어 가지고 왔다. 열어서 그 속을 보니, 종이를 비비꼬아서 말은 것이 있었는데, 무슨 글자인지 알지 못했고, 또 몇개의 봉한 편지를 옷깃 속에다 꿰매 가지고 왔는데, 그놈이 제 근본을 말하되, 「본국 왕이 4개의 은자를 상으로 준 것이다.」하니, 이미 왕이 상준 것이라면 그의 부모 친권(親眷)과 교제하는 것일 터인즉, 그가 가지고 온 의사가 너희 그쪽에서 그에게 시킨 것이냐? 가지고 온 것들도 모두 자그마한 것이었으며, 나는 꾸짖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우물에 빠져 죽었으니, 그리 알라.’ 하시오니, 이것을 보고 비직(卑職)이 실로 심히 황공하옵니다. 또 홍무 28년 4월 25일에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초한 예부(禮部)의 비문(批文)을 받으니, ‘백호(百戶) 요충(姚忠)을 보내어 본국의 환자[奄人] 장부개(張夫介) 등 26명을 함께 의주(義州)에 도착시켜 교부(交付)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하니, 이것을 보고서 그윽이 위에 말한 장부개(張夫介) 등의 절차를 자세하게 알았습니다. 폐하의 분부를 받자와 경사(京師)에 나아가 직무를 맡게 하였으니, 마땅히 소심하고 근신해서 궁중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인데, 뜻밖에 장부개 등이 간사하고 완악하고 좋지 못해서 법령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폐하의 인자하심을 입사와 즉시 죄주지 아니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시니, 비직이 실로 놀라고 황공하여 몸둘 곳이 없사와, 즉시 관원에게 위임해서 각 사람의 범죄한 정상을 심문하게 하였더니, 위관(委官) 정혼(鄭渾) 등의 장계에 의거하면, 장부개 등에 이르러서는 각각 공초한 말이 이치가 마땅히 논죄하여야 할 것이나, 부개 등이 일찍이 천조(天朝)에서 내시로 있었으므로 감히 처단을 못했사오나, 장부개·신흥기(辛興寄)·김희유(金希裕)·이원의(李原義)·김화(金和)·최연(崔淵)·김귀천(金貴千)을 가두고서 처분을 기다리는 외에, 이제 각 사람의 공초한 말을 일일이 기록해서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김을상을 시켜서 가지고 가게 합니다."


왜선 1척을 잡은 경상도 수군 첨절제사와 만호에게 궁온과 비단을 내리다[편집]

○慶尙道水軍僉節制使金天伸、萬戶車俊捕倭船一隻, 遣趙方玄, 各賜宮醞綺絹。

경상도 수군 첨절제사 김천신(金天伸)과 만호 차준(車俊)이 왜선 1척을 잡았으므로, 조방현(趙方玄)을 보내어 각각 궁온(宮醞)과 비단을 하사하게 하였다.


7月 9日[편집]

남재와 남은을 편전에서 인견하고 고기를 권하다[편집]

○庚子/引見南在、南誾于便殿, 命食肉。

남재(南在)와 남은(南誾)을 편전(便殿)에서 인견하고 고기를 먹으라고 명하였다.


명나라 제도에 따라 제복의 등급을 정하다[편집]

○依上國明降, 定祭服等級: 一等服, 視中朝三等七旒五章, 宗室宰臣服之; 二等服, 視中朝四等五旒三章, 中樞服之; 三等服, 視中朝五等五旒一章, 典書服之; 四等五等服, 視中朝六等七等服三旒無章, 三四品服之; 六等七等服, 視中朝八等九等無旒無章, 自五品至九品服之; 七品以下, 無佩綬。

명나라의 칙지에 따라 제복(祭服)의 등급을 정하였다. 1등 복은 명나라의 3등 복을 본받아서 7류 5장으로 종실이나 재신들이 입고, 2등 복은 명나라의 4등 복을 본받아서 5류 3장으로 중추들이 입으며, 3등 복은 명나라의 5등 복을 본받아서 5류 1장으로 전서들이 입고, 4등·5등 복은 명나라 6등과 7등 복을 본받아서 3류 무장으로 3, 4품이 입으며, 6등·7등 복은 명나라 8등·9등 복으로 무류 무장이고 5품에서 9품까지가 입는데, 7품 이하는 차는 끈이 없다.


7月 10日[편집]

일본에 잡혀 있던 포로 570여명이 돌아오다. 구주절도사가 보낸 글[편집]

○辛丑/日本回禮使崔龍蘇與九州節度使源了俊所遣僧宗俱來, 歸我被虜男女五百七十餘口, 遣禮賓卿宋得師迎勞之。 其書曰:

日本國鎭西節度使源了俊奉書朝鮮國兩侍中相公閤下。 貴使工曹典書崔龍蘇之來, 所賜尊敎, 焚香拜讀, 伏承動止勝常, 欣忭不已矣。 就而名土佳貺, 如數拜受, 遠意之厚, 感謝多矣。 蒙諭禁賊之事, 罄力於一岐、對馬, 已久矣。 海中寇賊, 以舟爲家, 從風便無著落之處, 今比于舊日, 賊輩十之八九減少焉。 若又以官軍將帥, 別開異途, 恐絶通好之路。 諺云: “賊是小人, 智過君子。” 彼所計謀之智略, 雖云聖賢, 或有未及之處。 仰願放寬, 等我做拙計, 必無噍類, 方宜陪兩國之款懷哉! 被虜男女, 嚴加推刷, 隨得可伴送, 不敢拘留也。 重承國使戶曹典書金積善護送兩《藏經》, 今歲三月初八日, 繫纜于此岸。 示諭珍翰, 開拆拜閱, 仰感國恩, 如海之無垠。 宗敎有光, 山川增重, 加額無已。 便付與兩寺僧, 永奉祈貴朝國泰民安者也。 又承彩色等物, 討之京中, 與來使金戶曹同可令載送者也。 今差白垣侍從宗俱前往, 特伸感謝之誠, 幸乞照察焉。 卽日孟夏, 伏希爲國自重。 不宣。

일본 회례사(日本回禮使) 최용소(崔龍蘇)가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이 보낸 중 종구(宗俱)와 함께 돌아오고, 피로되었던 남녀 5백 70여인이 돌아왔다. 예빈 경(禮賓卿) 송득사(宋得師)를 보내어 영접 위로하게 하였는데, 그 절도사의 글월은 이러하다.

"일본국 진서 절도사(鎭西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은 조선국 두 시중상공합하(侍中相公閤下)에게 글월을 올립니다. 귀국 사신 공조 전서(工曹典書) 최용소가 와서 내리신 존교(尊敎)를 분향(焚香)하고서 배독(拜讀)하였는데, 기거(起居)가 전보다 낫다고 하시니 기뻐하여 마지않으며, 나아가서 좋은 토산물을 〈단자에 적힌〉 수대로 받으오니, 멀리서 후한 뜻에 감사할 뿐입니다. 도적을 금하라는 유서(諭書)를 받자와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對馬島)에 대하여 힘을 다한 지 이미 오래 되오나, 바다 가운데의 도둑이라 배로 집을 삼기 때문에, 바람이 부는 대로 따라 정착하여 일정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옛날과 비교하여 도둑들이 10분의 8, 9는 감소되었으니, 만약에 또 관군(官軍)의 장수들에게 다른 방도를 내게 한다면 통호(通好)하는 길이 끊어질까 염려됩니다. 속담에 ‘도둑은 소인이나 지혜는 군자보다 낫다.’ 하였으니, 저들의 계략과 모책은 비록 성현이라 하더라도 혹 따르지 못함이 있으니, 바라옵건대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졸한 계책이나마 그대로 맡겨 두면, 반드시 지저귀는 무리들이 없어져 두 나라의 정이 마땅히 좋아질 것이니 헤아리소서. 피로된 남녀들은 엄중하게 추쇄(推刷)해서 있는 대로 함께 보내옵고, 감히 구류(拘留)해 두지 않겠습니다. 거듭 귀국 사신 호조 전서 김적선(金積善)을 뵈오니 두 《장경(藏經)》을 호송해 주시어 금년 3월 초8일에 배를 이 포구에 매어두고 귀한 글월을 받았습니다. 봉함을 뜯고 절하고 읽어 보니 귀국의 은혜에 감동됨이 마치 바다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종교에 빛이 있고 산천이 더욱 중해지니 이마에 손을 올리기 한이 없습니다. 이번에 함께 온 두 절 중과 더불어 길이 받들어서 귀국의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안정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또 채색 등 물건을 받자오니 서울에서 구하여 온 사신 김 호조(金戶曹)와 함께 실려 보낸 것이오라, 이번에 백원 시종(白垣侍從) 종구를 임명해 먼저 보내어 특히 감사의 성의를 표하오니 다행히 살피소서. 근일 첫여름에 나라를 위해 자중하기를 엎디어 바라오며, 다 할말을 못합니다."


7月 11日[편집]

달이 심성을 범하다[편집]

○壬寅/月犯心星。

달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일본 일향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日本國日向州人來獻土物。

일본국 일향주(日向州) 사람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판삼사사 정도전 등에게 광주에 가서 수릉을 살피게 하다[편집]

○上命判三司事鄭道傳、左使南在、參知門下南誾、中樞院使李稷, 相壽陵地于廣州。

임금이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과 좌사 남재(南在)와 참지문하 남은(南誾)과 중추원 사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광주(廣州)에 가서 수릉(壽陵)을 살피게 하였다.


7月 12日[편집]

현비가 병이 나니 중에게 기도하게 하고 죄수를 석방하다[편집]

○癸卯/上以顯妃未寧, 飯僧禱佛, 放中外二罪以下囚。

왕이 현비(顯妃)가 평안하지 못하여 중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부처에게 기도하게 하고, 중외(中外)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는 석방하게 하였다.


원종 공신전을 받은 자는 회군 공신전을 받지 못하게 하다[편집]

○原從功臣受田者, 又受戊辰回軍功臣田, 憲司請止之, 上允。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 과전(科田)을 받은 자도 무진년(1388)의 회군 공신전(回軍功臣田)을 받으므로 헌사에서 중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7月 13日[편집]

제주왕의 아들 문충보가 양마 7필을 바치다[편집]

○甲辰/濟州王子文忠甫來獻良馬七匹。

제주(濟州)의 왕자(王子) 문충보(文忠甫)가 와서 양마(良馬) 7필을 바쳤다.


공신들의 화상을 봉안할 장생전을 궁궐 서쪽에 세우게 하다[편집]

○命營長生殿于闕西, 欲垂功臣圖象。 諸功臣出錢穀有差, 以助其費。

장생전(長生殿)을 궁궐 서쪽에 세우라고 명하였다. 공신들의 화상을 드리우려 함이라, 여러 공신들이 돈과 곡식을 차등 있게 내어 그 비용을 도왔다.


진마사를 호송하러 의주에 왔다가 돌아가던 요동 백호 하질이 압록강에 빠져 죽다[편집]

○遼東百戶夏質渰死鴨綠江。 質護送進馬使楊添植到義州, 買牛還渡江, 時水方漲, 至中江, 牛驚跌墮, 舟遂覆, 同舟者皆死。

요동 백호(遼東百戶) 하질(夏質)이 압록강에 빠져 죽었다. 질(質)은 진마사(進馬使) 양첨식(楊添植)을 호송하고 의주까지 이르렀다가 소를 사 가지고 돌아갔는데, 강을 건널 때 물이 한창 붇는 판이라, 강 가운데서 소가 놀라 넘어져 빠지면서 배가 엎어졌다. 함께 탔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


7月 16日[편집]

일본 살마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丁未/日本國薩摩州人來獻土物。

일본국 살마주 사람이 토산물을 와서 바쳤다.


내신을 회암사에 보내어 왕사에게 문안하다[편집]

○遣內臣檜巖寺, 問安王師, 仍賜苧麻布。

내신(內臣)을 회암사(檜巖寺)에 보내어 왕사(王師)에게 문안드리게 하고, 인하여 저포(苧布)·마포(麻布)를 하사하였다.


7月 17日[편집]

비가 와 산사태로 15명이 깔려 죽다[편집]

○戊申/雨。 山崩水湧, 自原寂山至牛頭山凡一千六百餘所。 壓死者十有五人。

비가 와서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쳐 흘렀다. 원적산(原寂山)에서 우두산(牛頭山)에 이르기까지 1천 6백여 곳에서 깔려 죽은 자가 15인이나 되었다.


좌우 정승 조준과 김사형,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말 1필씩을 하사하다[편집]

○賜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判三司鄭道傳, 文忠甫所獻馬各一匹。

좌정승 조준(趙浚)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문충보(文忠甫)가 바친 말 1필씩을 각각 하사하였다.


7月 20日[편집]

천둥과 번개가 치니 왕이 구언(求言)하다[편집]

○辛亥/雷電。 上以災異求言。

천둥하고 번개치니, 임금이 재변이라고 하여 바른 말을 아뢰라고 명령하였다.


왕사 자초의 병을 낫게 한 전의감 양홍원에게 내구마 1필을 하사하다[편집]

○王師自超病, 遣典醫監楊弘遠治之。 病愈, 賜弘遠廐馬一匹。

왕사(王師)인 자초(自超)가 병드니, 전의감 양홍원(楊弘遠)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는데, 병이 나으므로 홍원에게 내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


문충보에게 음식을 하사하다[편집]

○賜食濟州文忠甫。

제주의 문충보(文忠甫)에게 먹을 것을 하사하였다.


7月 21日[편집]

관직을 제수 받은 후 사은하는 것을 정례화시키도록 도평의사사에서 상언하다[편집]

○壬子/都評議使司上言: “東西各品受職者, 不卽一時詣闕謝恩。 西班四品以下, 東班七品以下, 不行謝禮, 尤爲不可。 乞自今下命翌日, 各具公服, 一時排班謝恩, 如朝會儀, 尙瑞司函盛官敎, 分授新官如頒祿牌。 肅拜訖, 皆詣都評議使司行參禮, 西班則復詣三軍府行參禮, 其有故者, 次日行禮如前儀, 違者, 憲司糾理。”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동서 각품의 수직자(受職者)들이 즉시 일시에 예궐(詣闕)하여 사은(謝恩)하지 않는데다, 서반 4품 이하와 동반 7품 이하는 사례를 행하지 않음은 더욱 옳지 못하오니, 청하옵건대 지금부터는 명령을 내리시와 이튿날에 각각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일시에 반열을 짓고 사은하게 하되 조회하는 의식같이 하게 하소서. 상서사(尙瑞司)에서는 관교(官敎)[19]를 함(函)에 담아서 새로 임명된 관원에게 나누어 주기를 마치 녹패(祿牌) 나누어 주듯이 하고, 숙배를 마치면 모두 도평의사사에 가서 새로 참례(參禮)를 행하고, 서반은 다시 삼군부(三軍府)에 나아가 참례를 행하며, 유고해서 나오지 못한 사람은 다음날에 행례하기를 전날에 한 것처럼 하되, 어긴 자는 헌사(憲司)에서 규리(糾理)하게 하소서."


7月 22日[편집]

서원군 사람 거두가 벼락을 맞다[편집]

○癸丑/震瑞原郡人居豆。

서원군(瑞原郡) 사람 거두(居豆)가 벼락을 맞았다.


7月 25日[편집]

관교를 위조한 칠원현 사람 육희운을 참형하다[편집]

○丙辰/漆原縣人陸希雲伏誅。 僞造官敎, 事覺。

칠원현(柒原縣) 사람 육희운(陸希雲)이 관교(官敎)를 위조한 사실이 발각되어 참형당하였다.


7月 26日[편집]

각도의 70세 이상인 사람에게 쌀 2곡씩을 하사하다[편집]

○丁巳/令各道訪年過七十者, 勿論尊卑, 賜米各二斛。

각도로 하여금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을 방문하여 존비(尊卑) 여하를 물론하고, 쌀 2곡(斛)씩 하사하게 하였다.


각도의 효자·순손·의부를 추천하게 하다[편집]

○上命都評議使司, 令各道擧孝子、順孫、義夫有實行者, 具名啓聞, 以憑擢用。

임금이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각도로 하여금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로 실행(實行)이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되, 성명을 갖추 계문하여 발탁 임용하는 데에 빙거를 삼으라고 하였다.


7月 27日[편집]

도평의사사에서 백관들의 직무 태만을 규찰하도록 아뢰다[편집]

○戊午/都評議使司啓: “百官曠職, 陵夷日甚。 其掌刑獄, 以累日月不決者, 憲司糾之; 其掌錢穀, 以致朽損不察者, 三司考劾; 三司憲司不擧行者, 使司申聞科罪。”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백관들이 직무에 태만하고 능이(陵夷)해짐이 날로 심하옵니다. 형옥(刑獄)을 맡고 여러 날 여러 달을 지체시켜 판결하지 아니한 자는, 헌사(憲司)에서 이를 규찰하게 하고, 전곡(錢穀)을 맡고 썩거나 없어졌는데도 살피지 아니한 자는 삼사(三司)에서 상고해서 탄핵하게 하되, 삼사나 헌사에서 거행하지 않는 자는 사사(使司)에서 계청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흥국사 구리부처가 땀을 흘리다[편집]

○留後司興國寺銅佛出汗。

유후사에 있는 흥국사(興國寺)의 구리 부처가 땀을 흘렸다.


종묘에 거둥하여 건축 상황을 둘러보다[편집]

○幸太廟, 視其經營。

종묘에 거둥하여 그 건축하는 것을 보았다.


7月 30日[편집]

사헌부에서 급전을 잘못한 호조 급전사의 판사·전서 등을 탄핵하다[편집]

○辛酉/憲司劾戶曹給田司判事崔允沚、典書張子忠、散騎李文和、侍史宋因、議郞尹會宗、正郞金偉、佐郞安懃等給田失誤, 皆削職流外。 允沚、子忠, 以原從功臣免。

헌사에서 호조 급전사(戶曹給田司) 판사 최윤지(崔允沚)·전서(典書) 장자충(張子忠)·산기(散騎) 이문화(李文和)·시사(侍史) 송인(宋因)·의랑(議郞) 윤회종(尹會宗)·정랑(正郞) 김위(金偉)·좌랑(佐郞) 안근(安懃) 등이 급전(給田)함에 있어 잘못된 것을 탄핵하니, 모두 삭직하여 외방으로 유배보냈으나, 윤지와 자충은 원종 공신이므로 죄를 용서하였다.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각도의 기민을 구휼하게 하다[편집]

○上命都評議使司, 賑各道飢民曰: “移文各道都觀察使, 令守令發倉庫米豆, 以行賑濟。 守令用心賑濟者, 褒賞; 不爲用心者, 論罪。” 使司移文曰:

令守令各於四面村程途里數分辨, 分置賑濟所, 擇其閑良、品官慈祥廉潔者, 定爲監考, 守令以時考察。 其有老病飢困不能就食者、兩班男女心懷慙愧不屑就食者, 分揀推考, 別行賑濟。 守令有用心做辦, 境內無飢死者, 職名及所活人數呈報, 以憑擢用, 如有不爲用心, 境內有飢死者, 守令、監考, 俱決杖, 守令罷職, 監考充水軍, 職名呈報。

임금이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각도의 기민을 구휼하라고 말하였다.

"각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에게 공문을 보내어 수령으로 하여금 창고의 쌀과 콩을 내어 구휼하게 하되, 구휼에 힘쓰는 수령은 포상하고, 힘쓰지 않는 자는 논죄하도록 하라."

사사(使司)에서 이문(移文)하였다.

"수령으로 하여금 사방에 있는 동리의 거리(距里)와 마을 수를 참작해서 진제소(賑濟所)를 나누어 두게 하되, 한량(閑良)이나 품관(品官) 중에서 자상하고 청렴한 사람을 골라 감고(監考)로 정하고, 수령이 때때로 살피도록 하라. 노병(老病)이나 기곤(飢困)으로 밥 먹는 데에 나오지 못하는 자나, 양반(兩班)이라 마음으로 부끄러워하여 먹는 데에 나오지 않는 자는 분간하여 별도로 알아서 구휼하게 하라. 수령으로서 여기에 마음을 쓰고 좋은 방법을 써서 그 경내에 굶어 죽은 자가 없게 한 자는 직명과 살려낸 사람의 수를 보고하여 발탁해서 쓰도록 하고, 만일에 마음을 쓰지 않아서 경내에 기사자(飢死者)를 있게 한 수령과 감고가 있다면 함께 결장(決杖)하되, 수령은 파직하고 감고는 수군(水軍)에 보충하며, 직명을 보고하게 하라."


제언을 쌓고 산불을 방지하자는 전 낭장 정분의 진언을 사사에서 아뢰다[편집]

○使司據前郞將鄭芬陳言以聞。 其略曰: “勸農之要, 在築堤堰。 守令皆帶勸農之職, 而不急乎此。 堤堰者, 所以備旱潦也。 乞下都觀察使, 令州府郡縣, 擇其鄕閑良、品官廉幹者, 定爲勸農官, 當秋冬交, 修築堤堰, 以瀦雪水, 務要堅緻, 無或漏洩。 又於水口, 置石溝, 築其上, 與堤等, 溝內面立木桶。 桶之內面, 作三五穴, 隨水之高下而通塞之; 溝之外面, 橫置木槽, 虛其兩端, 其下左右開渠引水。 別於堤堰一邊, 低築若干尺, 比桶之上穴差高, 排之以石, 以備霖潦之溢。 置守者若干戶, 勸農官監封其穴。 及春將耕, 則佃者告于勸農官, 以次開穴分水, 使灌漑有節, 無致費用。 勸農官之能否、守令之勤怠, 都觀察使親自點檢, 褒貶申聞, 以憑黜陟。 且山林茂密, 然後地氣滋潤, 旱不爲災, 收拾橡實, 可備凶年。 無賴之徒, 耽于田獵, 輒縱火焚, 尤可痛心。 宜令守令, 親檢山林, 分使附近居民主之, 如有縱火者, 便來告官, 從重論罪, 其不告者, 以其罪坐之。 唯牧馬場, 許於蟄蟲未啓之時焚之。” 上允之。

사사(使司)에서 전 낭장이던 정분(鄭芬)의 진언(陳言)으로써 아뢰었다. 그 대략의 내용은 이러하다.

"농사를 장려하는 중요한 일은 제언(堤堰)을 쌓는 데에 있습니다. 수령들이 모두 권농하는 직책을 갖고 있으면서 여기에 힘쓰지 않으오나, 제언이란 가뭄과 장마를 방비하는 것이오니, 도관찰사에게 명을 내리시어 주(州)·부(府)·군(郡)·현(縣)으로 하여금 그 고을의 한량(閑良) 품관 중 청렴하고 일 잘 보는 사람을 골라서 권농관(勸農官)으로 정하게 하고, 〈농한기인〉 가을과 겨울 사이에 제언을 수축해서 눈 녹은 물을 모아 두게 하되, 단단하고 치밀하게 하는 데 힘써서 새는 일이 없게 하소서. 또 수구(水口)에는 돌로 도랑을 만들어 그 위를 쌓게 하고, 뚝과 같도록 도랑 안쪽에는 나무통을 세우고 나무통 안쪽에는 셋이나 다섯 구멍을 만들어서 물의 높고 낮은 데를 따라서 통하거나 막히게 하며, 도랑 바깥으로는 나무통을 두되 두 끝을 비워 두고, 그 밑으로는 좌우로 물을 내려서 끌어가도록 하고, 따로 제언의 한 쪽에 몇 자나 낮게 쌓되 수통의 웃구멍보다 약간 높게 돌을 깔아서 장마에 물이 〈뚝을〉 넘치는 것을 방비하소서. 지키는 자 몇 호(戶)를 두고 권농관이 그 구멍을 막을 때에 감독했다가 봄이 되어 논을 갈려고 할 때, 토지 임자들이 권농관에게 말해서 차례대로 구멍을 열어서 물을 나누되, 관개(灌漑)하는 데 절용해서 허비가 없게 하며, 권농관의 잘하고 못하는 것과 수령들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도관찰사가 친히 점검해서 포폄(褒貶)을 알리게 하여 파직하고 승직하는 데에 참고가 되게 하며, 또 산림이 무성한 뒤에 땅 기운이 윤택해서 가물어도 한재가 덜하며, 상수리를 주워서 흉년을 방비할 것입니다. 무뢰한 무리들이 전렵하는 것만 탐을 내어 산에다가 불을 놓으니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마땅히 수령으로 하여금 친히 산림을 점검하고 부근에 살고 있는 백성들로 나누어 맡아 보게 하여, 만일에 불을 놓는 자가 있으면 즉시 와서 알리어 중한 죄로 벌하게 하고, 그것을 알리지 않는 자는 그 불놓은 사람과 연좌(緣坐)하게 하며, 다만 목마장은 칩충(蟄蟲)이 깨어나기 전에 불에 태우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산사태와 홍수가 난 광주와 천녕 사이 고을의 세곡을 면제하고 양식을 주다[편집]

○上以廣州、川寧之境, 山崩水湧, 免其田租, 且戶給米粟。

왕이 광주(廣州)와 천녕(川寧) 사이에서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었으므로, 그 토지의 세곡을 면제하고 또 집집마다 쌀과 서속(黍粟)을 주게 하였다.


四年 八月[편집]

8月 7日[편집]

충청도 조운선 10척과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바람에 파선되다[편집]

○戊辰/忠淸道漕運船十艘, 慶尙道漕運船十六艘, 遇風摧敗。

충청도 조운선(漕運船) 10척과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바람을 만나 파선되었다.


원주 목사 조박이 앓으니 어의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다[편집]

○上聞原州牧使趙璞疾病, 遣太醫魚承震、金之粹, 往治之。

임금이 원주 목사(原州牧使) 조박(趙璞)이 질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의 어승진(魚承震)과 김지수(金之粹)를 보내어 그를 치료하게 하였다.


8月 8日[편집]

훈련관에서 여러 위의 장군과 각영의 군관을 모아 병서를 강습하게 하다[편집]

○己巳/令訓鍊觀, 集諸衛上ㆍ大將軍、各領將軍ㆍ諸軍官等, 講習諸家兵書。

훈련관(訓鍊觀)으로 하여금 제위(諸衛)의 상장군·대장군을 모아서 각영(各領)의 장군과 모든 군관 등을 인솔하고 여러가지 병서를 강습하게 하였다.


판교서감사 함부림을 강원도에 보내어 장생전의 재목을 감독하게 하다[편집]

○遣判校書監事咸傅霖於江原道, 監督長生殿材木。 仍命問疾原州牧使趙璞, 且賜內藥。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함부림(咸傅霖)을 강원도에 보내어 장생전(長生殿)의 재목을 감독하게 하고, 인하여 원주 목사 조박에게 문병하도록 명하고는 또한 궁내에서 쓰는 약을 하사하였다.


8月 9日[편집]

경상도 관찰사가 왜구가 배 1척을 불지르고 군사 3인을 죽였음을 아뢰다[편집]

○庚午/慶尙道觀察使報: “倭入夫成浦, 燒船一隻, 殺軍三人。”

경상도 관찰사가 보고하였다.

"왜구가 부성포(夫成浦)에 들어와 배 1척을 불사르고 군사 3인을 죽였습니다."


8月 11日[편집]

햇무리가 지다[편집]

○壬申/日珥日冠

일이(日珥)·일관(日冠)의 현상이 나타났다.


8月 12日[편집]

좌도와 우도와 충청도의 정부를 징발해 궁궐 역사에 부역하게 하다[편집]

○癸酉/徵左道丁夫四千五百、右道五千、忠淸道五千五百, 付宮闕役。

좌도(左道)의 정부(丁夫) 4천 5백 명과 우도의 정부 5천 명과 충청도의 정부 5천 5백 명을 징발하여 궁궐의 역사에 부역하게 하였다.


8月 14日[편집]

이무·이빈·오사충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乙亥/以李茂爲全羅道都觀察黜陟使, 李彬判中樞院事, 吳思忠商議中樞院事。

이무(李茂)로 전라도 도관찰출척사(全羅道都觀察黜陟使)를, 이빈(李彬)으로 판중추원사를, 오사충(吳思忠)으로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를 삼았다.


도관찰사 이지에게 예를 차리지 않은 상의문하부사 조반에 대한 기사[편집]

○商議門下府事趙胖以禱雨, 奉內香詣留後司, 道遇都觀察使李至, 至下馬鞠躬, 胖騎馬過行。 至曰: “吾亦親受王旨、鈇鉞而來, 今胖騎馬直過, 是豈禮乎?” 移文憲司。 憲司劾胖請罪, 上宥之。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조반(趙胖)이 기우제를 지내기 위하여 내향(內香)을 받들고 유후사로 가는 도중에 도관찰사 이지(李至)를 만났다. 이지는 말에서 내려 몸을 굽혔으나, 조반은 말 탄 채로 지나니, 이지가,

"나도 친히 왕지(王旨)를 받아 부월(鈇鉞)을 갖추고 왔는데, 지금 조반이 말을 탄 채 곧장 지나가니 이것이 어찌 예의겠는가?"

하고, 헌사에 이문(移文)하게 되었다. 헌사에서 조반을 탄핵하고 청죄했으나, 임금이 그를 용서하였다.


8月 15日[편집]

경기도 빈 땅을 토호들이 강점하는 것을 금하다[편집]

○丙子/上召憲司掌務敎曰: “京畿閑曠之地, 爲豪强所占, 或爲牧馬之所, 民之芻蕘者, 不得往焉, 又其禾穀爲牛馬踏損, 宜分遣監察禁之。” 於是以監察金晊、金鑰爲左右道行臺。

임금이 헌사(憲司)의 장무(掌務)를 불러 전교하였다.

"경기(京畿)의 빈 땅은 토호(土豪)들의 강점(强占)한 바가 되고 혹은 목마지(牧馬地)가 되어, 백성들은 마소의 꼴도 베이러 갈 수 없는데다 또한 그들의 볏곡은 마소들의 밟히는 바가 되어 손실이 많다고 하니, 마땅히 감찰을 나누어 보내어 금하게 하라."

이에 감찰 김질(金晊)과 김약(金鑰)을 좌·우도의 행대(行臺)로 삼았다.


8月 16日[편집]

서운관 관원에게 산이 무너지면 운세가 어떠한지를 묻다[편집]

○丁丑/上召書雲觀官問曰: “山崩如何?” 對曰: “非名山, 則無害。”

임금이 서운관(書雲觀) 관원을 불러서 묻기를,

"산이 무너지는 것은 어떠냐?"

하니, 대답하기를,

"명산(名山)이 아니라면 해가 없습니다."

하였다.


8月 18日[편집]

전중 경 곽경의가 말 천 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편집]

○己卯/遣殿中卿郭敬義, 押馬一千, 至遼東交割而還。

전중 경(殿中卿) 곽경의(郭敬義)를 보내서, 말 1천 필을 압령(押領)하여 요동에 가서 교할(交割)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8月 20日[편집]

연사흘 우박이 내리다[편집]

○辛巳/雨雹。 壬午癸未亦如之。

우박이 내렸는데, 21일과 22일에도 내렸다.


8月 27日[편집]

금성이 헌원성을 범하다[편집]

○戊子/金犯軒轅。

금성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왜선 1척과 포로 21명을 잡은 김영렬에게 내구마 1필 등을 내리다[편집]

○右道水軍僉節制使金英烈, 捕倭船一隻, 生擒二十一人以獻。 上嘉之, 遣大將軍高鳳智, 賜廐馬一匹、綺絹宮醞。

우도 수군 첨절제사 김영렬(金英烈)이 왜선(倭船) 1척을 나포하여 21인이나 사로잡아 바치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기어 대장군 고봉지(高鳳智)를 보내어 내구마 1필과 비단과 궁온(宮醞)을 하사하게 하였다.


8月 28日[편집]

중추원 부사 장자충을 천추사로 보내다[편집]

○己丑/遣中樞院副使張子忠, 奉箋如京師, 賀千秋。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장자충(張子忠)을 보내어 전문(箋文)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서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장사 지낸 지 4일 되는 영흥부 사람 박언의 무덤에서 소리가 나다[편집]

○永興府人前軍器監朴彦病, 以六月十一日亥時死, 其妻前夫之子金原卿, 以翌日辰時葬。 越四日, 前郞將金用鈞, 道過墓前, 有呼奴聲, 歸告其家, 其奴來發視之, 已還死矣。

영흥부(永興府) 사람 전 군기감(軍器監) 박언(朴彦)이 병이 들어 6월 11일 해시(亥時)에 죽으니, 그 아내의 전부(前夫)의 아들인 김원경(金原卿)이 이튿날 진시(辰時)에 장사를 지냈더니, 4일을 지낸 뒤에 전 낭장 김용균(金用鈞)이 무덤 앞으로 지나다가 〈무덤 속에서〉 종을 부르는 소리가 나매, 그 집에 가서 말하였다. 그 종이 와서 파 보니 다시 죽어 있었다.


회암사에서 소재 법석을 베풀다[편집]

○遣太學士柳玽於檜巖等, 設消災法席。

태학사(太學士) 유구(柳玽)를 회암사에 보내어 소재 법석(消災法席)을 베풀게 하였다.


백악산 단에 제사를 지내다[편집]

○有事于白岳山壇。

백악산(白岳山)의 단(壇)에 제사를 올렸다.


금성이 헌원성을 침범하다[편집]

○金犯軒轅。

금성이 헌원성을 침범하였다.


四年 九月[편집]

9月 4日[편집]

정혼과 장지도에 명하여 《정관정요》를 교정해 올리게 하다[편집]

○乙未/命禮曹議郞鄭渾及校書少監張志道, 校正《貞觀政要》以進。

예조 의랑(禮曹議郞) 정혼(鄭渾)과 교서 소감(校書少監) 장지도(張志道)에게 명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정해서 올리게 하였다.


9月 5日[편집]

동산을 봉하여 호국신으로 삼다[편집]

○丙申/令吏曹封東山爲護國之神。

이조로 하여금 동산(東山)을 봉(封)하여 호국신(護國神)으로 삼게 하였다.


9月 9日[편집]

현비가 새 궁궐 후청에서 역승과 목공 등에게 은혜를 베풀다[편집]

○庚子/顯妃出新闕後廳, 施役僧及木石諸工。

현비(顯妃)가 새 대궐 후청(後廳)에 나가 역승(役僧)과 여러 목공(木工)·석공(石工)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9月 15日[편집]

추수를 위해 궁궐에 부역하는 인부를 귀가시키다[편집]

○丙午/放新闕赴役丁夫, 止留僧徒。 重秋斂也。

새 대궐에 부역하는 정부(丁夫)를 놓아 보내고 승도들만 머물러 두니, 가을걷이를 중하게 여김이었다.


9月 16日[편집]

각도에서 보고한 효자·절부 등을 정려하고 복호하게 하다.[편집]

○丁未/上命左右政丞曰: “今各道所報孝子順孫義夫節婦, 各有實跡, 宜加褒賞, 旌表門閭。 其有役者則復之, 貧乏者則周之, 以勵風俗。” 及第卓愼, 全羅道光州人也。 父歿, 三年衰絰終制, 奉養其母盡誠敬, 鄕黨稱孝焉。 前署令金四知, 忠淸道全義人也。 奉養老母, 朝夕進饌, 必自親嘗, 承順致孝, 久而不怠。 牙州學生孔都知, 年二十七歲喪父, 貧乏失業, 不能自存。 其妻勸移他邑, 都知泣曰: “先墳所在, 何忍去之!” 織屨爲食, 祭享不怠。 林州人林安貴, 喪父母, 守墳八年。 淸州戶長孫禧, 歲戊午, 倭賊突入州中, 母及妻妹, 皆爲所執, 憤不顧生, 直入賊中, 負母登山, 得免於死, 終始孝養, 以盡子職。 寧州官奴勿金, 孝父以誠, 比其歿也, 斬衰三年, 作置神主, 朝夕致祭。 金化前散員李英奇, 祖父母及父母, 老且貧乏, 躬耕孝養, 終始不怠。 喬桐百姓方君正, 養母盡孝, 閭里稱之。 前副正梁希賢, 華人也。 居於江陰, 家甚貧乏, 奉養老母, 雖蔬食菜羹, 必以其鄕之樂侑之, 孝心純至。 其妻承順, 不替婦道。 廣州戶長李勣, 失於軍期, 廣州道兵馬使趙希古欲置勣極刑。 勣子前萬戶好生, 手抱其父, 欲以身代, 希古感其孝誠釋之, 勣得免。 及勣病歿, 好生服喪終制。 水原生員李造, 喪母廬墓三年, 朝夕食粥, 不進鹽醬菜菓, 以致哀敬。 前別將金桂同, 亦水原人也。 性本孝敬, 定省惟勤。 母歿置祠堂, 四時朔望, 奉祀不怠。 右皆孝子順孫也。 咸悅人前散員崔得林妻洪氏, 歲戊午, 爲倭所獲, 賊欲汚之, 罵賊固拒, 中槍而死。 陽城故判事全五福妻盧氏, 歲丁卯, 夫亡。 廬於墳墓之下, 至今九年, 祭享不怠。 春州狼川監務趙安平母李氏, 早喪其夫, 寡居守節, 敎子從仕。 喬桐前別將李提妻曺氏, 年十九, 爲倭所獲, 死不汚賊。 皆節婦也。 命皆復其家, 存恤其子。 其中願從仕者, 令給馬上京; 年老家貧者及婦人, 賜米有差。 且令旌表其閭, 仍錄實迹, 通諭中外。

임금이 좌·우정승에게 분부하였다.

"지금 각도에서 보고한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 등은 모두 실적이 있으니 마땅히 포상을 더하고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되, 구실[役]이 있는 자는 복호(復戶)하게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구휼하여 주어 풍속을 가다듬게 하라."

급제 탁신(卓愼)은 전라도 광주(光州) 사람이다. 부친이 돌아가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상제(喪制)를 마쳤으며, 그의 모친을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니 한 고을에서 효성을 칭찬하였다.

전 서령(署令) 김사지(金四知)는 충청도 전의(全義) 사람이다. 노모(老母)를 봉양하기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반찬을 올리되 반드시 자기가 먼저 맛을 보며, 부모의 뜻을 순종하여 오래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주(牙州)의 학생 공도지(孔都知)는 나이 27세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가난하고 직업도 잃어 스스로 살아갈 길이 막연하므로 그 아내가 다른 고을에 옮겨 살자고 권하니, 도지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선영이 여기에 있는데 어찌 차마 떠날 수 있는가?"

하고, 신을 삼아 팔면서 제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주(林州) 사람 임안귀(林安貴)는 부모의 상고를 당하여 8년이나 분묘를 지켰고, 청주 호장(淸州戶長) 손희(孫禧)는 무오년에 왜구가 갑자기 고을에 침입하여 모친과 아내며 누이동생까지 다 왜구에게 붙들린 바 되자, 분통해서 살기를 돌아보지 않고 바로 적중(賊中)에 들어가서 모친을 업고 산에 올라가서 죽음을 면하게 하고, 끝내 효성으로 봉양하여 자식의 직분을 다하였다.

영주(寧州)의 관노(官奴) 물쇠[勿金]는 아비를 성심으로 섬기다가 아비가 돌아가자 참최(斬衰) 3년에 신주를 모셔 두고 아침저녁으로 상식했으며,

김화(金化)의 전 산원(散員) 이영기(李英奇)는 조부모와 부모가 늙고 또한 가난하였으므로 몸소 농사를 지어 효성으로 봉양하였는데 끝끝내 게을리 하지 않았고, 교동(喬桐)의 백성 방군정(方君正)은 어미를 효성으로 봉양하므로 온 동리에서 칭찬하였다.

전 부정(副正) 양희현(梁希賢)은 중국 사람이다. 강음현(江陰縣)에서 살았는데 집안이 심히 가난했으나, 늙은 모친을 봉양하는데 비록 나물 반찬에 나물국이지만 반드시 그 고을의 좋은 것으로 대접해서 효성하는 마음이 극진하였고, 그의 아내도 잘 받들어서 부도(婦道)를 잃지 않았다.

광주 호장(廣州戶長) 이적(李勣)은 군사의 날짜를 잃어버려서, 광주도 병마사(廣州道兵馬使) 조희고(趙希古)가 적(勣)을 극형에 처하고자 하니, 적의 아들 전 만호(萬戶) 이호생(李好生)이 손으로 그의 부친을 끌어안고 제몸으로 대신하려 하매, 희고가 그 효성에 감동되어 석방하여 적이 죽기를 면했으며, 그 뒤 적이 병들어 죽자 호생이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마쳤다.

수원(水原)의 생원 이조(李造)는 모친상을 당하여 무덤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아침저녁으로 죽만 먹고 소금과 장이며 나물과 과실을 먹지 않고 슬퍼하며 공경했으며, 전 별장(別將) 김계동(金桂同)도 역시 수원 사람인데, 천성이 원래 효성스럽고 공순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기를 공근히 하다가 모친이 죽으매 사당을 두고 사철의 초하루 보름에 제사를 올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상은 모두 효자와 순손이며, 함열(咸悅) 사람 전 산원(散員) 최득림(崔得林)의 아내 홍씨(洪氏)는 무오년에 왜적에게 잡힌 바 되어 적이 욕을 보이려 하니, 적을 꾸짖고 한사코 거절하다가 창에 찔려서 죽었고,

양성(陽城)의 고(故) 판사(判事) 전오복(全五福)의 아내 노씨(盧氏)는 정묘년에 가장이 죽자 무덤의 아래에다 여막을 짓고 지금까지 9년 동안을 제사지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춘주(春州)[20]의 낭천 감무(狼川監務) 조안평(趙安平)의 모친 이씨(李氏)는 일찍이 그의 가장을 잃고 과부로 살면서 수절하고 아들을 교양시켜 벼슬을 하게 하였다.

교동(喬桐)의 전 별장(別將) 이제(李提)의 아내 조씨(曹氏)는 나이 19세에 왜적에게 붙들려 가서 죽었으나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모두 절부이었다.

명하여 모두 그들을 복호(復戶)하고 그 자손들을 구휼해 주게 하되, 그 중에서 벼슬하기를 원하는 자는 말[馬]을 주어 서울로 올라오게 하고, 나이 많고 집이 가난한 자와 부인들에게는 차등 있게 쌀을 내려 주고, 또 그 동구문[閭]에 정표하게 하고는 사실을 기록해서 경중과 외방에 널리 알리게 하였다.


9月 17日[편집]

충청도와 풍해좌·우도에서 정부를 징발하여 강화도에서 석회를 굽게 하다[편집]

○戊申/徵忠淸、豐海左右道丁夫千二百, 赴江華燔造石灰。

충청도와 풍해좌·우도(豊海左右道)의 정부(丁夫) 1천 2백 명을 징발하여 강화도에 보내서 석회(石灰)를 굽게 하였다.


9月 18日[편집]

백관을 거느리고 성절을 하례하다[편집]

○己酉/上率百官, 賀聖節如儀。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성절(聖節)의 하례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판사농시사 옥산기가 말 5백 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편집]

○遣判司農寺事玉山奇, 押馬五百(匠)〔匹〕, 至遼東交割而還。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 옥산기(玉山奇)를 보내서 말 5백 필을 압령하여 요동(遼東)에 가서 교할(交割)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간관이 세자가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상언하다[편집]

○諫官上言世子不好學, 上命世子日就書筵, 講習毋怠。

간관이 세자가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상언하니, 임금이 세자에게 분부하여 매일 서연(書筵)에 나아가 강습을 게을리 말라고 하였다.


9月 22日[편집]

정도전에게 새 궁궐의 침실 벽에 쓸 경계가 될 말을 모아 올리게 하다[편집]

○癸丑/命判三司事鄭道傳曰: “新闕寢室四面壁上, 欲書可法可戒之訓, 其緝經史嘉言以進。”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새 대궐의 침실(寢室) 사면의 벽 위에 본받을 만하고 경계될 만한 훈계를 쓰고자 하니, 경서와 사서에 있는 좋은 말들을 모아서 올리라고 하였다.


9月 26日[편집]

명년 정월에 도성을 쌓고자 하니 빨리 마치게 하라고 명하다[편집]

○丁巳/命左僕射南在及敬興府司尹曺恂, 告于左右政丞曰: “明年正月, 欲徵諸道民築都城。 其體予意, 以亟厥成。”

좌복야 남재(南在)와 경흥부 사윤(敬興府司尹) 조순(曹恂)에게 명하여, 좌우 정승에게 명년 정월에 여러 도의 백성을 징발해서 도성(都城)을 쌓고자 하니, 나의 뜻을 몸받아 빨리 마치도록 알리라고 하였다.


9月 28日[편집]

안암동에 가서 능터를 물색하고 이어 주종소에 거둥하다[편집]

○己未/幸安菴洞, 相壽陵地, 又幸鑄鍾所。

안암동(安菴洞)에 거둥하여 능터를 물색하고, 또 주종소(鑄鍾所)에 거둥하였다.


9月 29日[편집]

개국 공신에게 내구마 1필 씩을 하사하다[편집]

○庚申/賜開國功臣廐馬各一匹。

개국 공신에게 각각 내구마 한 필씩 하사하였다.


꿩이 새 대궐 대전의 남쪽 뜰에 들어오다[편집]

○雄雉入新闕大殿南庭。

수꿩이 새 대궐 대전(大殿)의 남쪽 뜰에 들어왔다.


경상도 관찰사 심효생이 한 줄기에 9절이 되는 벼를 바치다[편집]

○慶尙道觀察使沈孝生獻一莖九節之禾。

경상 관찰사 심효생(沈孝生)이 한 줄기에 9절(節)이나 되는 벼를 바쳤다.


새 대궐 후원에 연못을 파다[편집]

○鑿池于新闕後園。

새 대궐 후원에 연못을 팠다.


김영렬이 잡은 왜구를 성동에서 참형하다[편집]

○斬金英烈所擒倭寇於城東。

김영렬(金英烈)이 잡은 왜구를 성동(城東)에서 참형하였다.


대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다. 그 규모와 구성 및 배치 상황[편집]

○是月, 太廟及新宮告成。 太廟太室七間, 同堂異室。 內作石室五間, 左右翼室各二間, 功臣堂五間, 神門三間, 東門三間, 西門一間, 繚以周垣。 外有神廚七間, 享官廳五間, 左右行廊各五間, 南行(廓)〔廊〕九間, 齋宮五間。 新宮燕寢七間。 東西耳房各二間, 北穿廊七間, 北行廊二十五間。 東隅有連排三間, 西隅有連排樓五間, 南穿廊五間。 東小寢三間, 穿廊七間接于燕寢之南穿廊, 又穿廊五間接于燕寢之東行廊。 西小寢三間, 穿廊七間接于燕寢之南穿廊, 又穿廊五間接于燕寢之西行廊。 報平廳五間, 視事之所, 在燕寢之南。 東西耳房各一間, 南穿廊七間, 東穿廊十五間, 始自南穿廊第五間, 接于東行廊。 西穿廊十五間, 亦起南穿廊第五間, 接于西行廊。 自燕寢北行廊東隅, 止于正殿北行廊之東隅二十三間, 爲東行廊。 自西樓止正殿北行廊之西隅二十間, 爲西行廊。 以上爲內殿。 正殿五間, 受朝之所, 在報平廳之南。 有上下層越臺, 入深五十尺, 廣一百十二尺五寸。 東西北階廣各十五尺。 上層階高四尺, 石橋五級。 中階四面廣各十五尺, 下層階高四尺, 石橋五級。 北行廊二十九間, 穿廊五間, 起自北行廊, 接于正殿之北。 水刺間四間。 東樓三間, 有上下層, 其北行廊十九間接于正殿之北行廊東隅, 與內東廊連。 其南九間接于殿門之東角樓。 西樓三間, 有上下層。 其北行廊十九間接于正殿之北行廊西隅, 與內西廊連。 其南九間接于殿門之西角樓。 殿庭廣東西各八十尺, 南一百七十八尺, 北四十三尺。 殿門三間, 在殿之南。 左右行廊各十一間, 東西角樓各二間。 午門三間, 在殿門之南, 東西行廊各十七間。 水閣三間, 庭中有石橋御溝, 水所流處也。 門之左右行廊, 各十七間, 東西角樓, 各二間。 東門曰日華, 西曰月華。 其餘廚房、燈燭ㆍ引者房、尙衣院、兩殿司饔房、尙書司、承旨房、內侍茶房、敬興府、中樞院、三軍府、東西樓庫之類, 總三百九十餘間也。 後築宮城, 東門曰建春, 西曰迎秋, 南曰光化門。 樓三間有上下層, 樓上懸鍾鼓, 以限晨夕警中嚴。 門南左右, 分列議政府、三軍府、六曹、司憲府等各司公廨。

이달에 대묘(大廟)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대묘(大廟)의 대실(大室)은 7간(間)이며 당(堂)은 같게 하고 실(室)은 따로 하였다. 안에 석실(石室) 5간을 만들고 좌우의 익랑(翼廊)은 각각 2간씩이며, 공신당(功臣堂)이 5간, 신문(神門)이 3간, 동문이 3간, 서문이 1간이었다. 빙둘러 담장을 쌓고 신주(神廚)가 7간, 향관청(享官廳)이 5간이고, 좌우 행랑이 각각 5간, 남쪽 행랑이 9간, 재궁(齋宮)이 5간이었다. 새 궁궐은 연침(燕寢)이 7간이다. 동·서 이방(東西耳房)이 각각 2간씩이며, 북쪽으로 뚫린 행랑이 7간, 북쪽 행랑이 25간이다. 동쪽 구석에 연달아 있는 것이 3간,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간이고, 남쪽으로 뚫린 행랑이 5간, 동쪽의 소침(小寢)이 3간이다.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 행랑에 닿았고,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동쪽 행랑에 닿았으며, 서쪽 소침(小寢) 3간과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의 남쪽 통하는 행랑에 닿았다.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서쪽 행랑에 닿았고, 보평청(報平廳)이 5간, 정사를 보는 곳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 이방(耳房)이 각각 1간씩이며, 남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7간, 동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15간이다. 처음 남쪽에서 통행하는 행랑 5간이 동쪽 행랑에 닿고, 서쪽으로 통하는 행랑 15간도 역시 남쪽 행랑 5간에서 서쪽 행랑에 닿고, 연침 북쪽 행랑 동쪽 구석에서 정전(正殿)에 그치고 북쪽 행랑의 동쪽 23간이 동쪽 행랑, 서루(西樓)에서 정전(正殿)까지 가는 북쪽 행랑 서쪽 20간이 서쪽 행랑이 되어, 이상이 내전(內殿)이다.

정전(正殿)은 5간으로 조회를 받는 곳으로 보평청의 남쪽에 있다. 상하층의 월대(越臺)가 있는데, 들어가는 깊이가 50척, 넓이가 1백 12척 5촌(寸), 동계(東階)·서계(西階)·북계(北階)의 넓이가 각각 15척이다. 윗층계[上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石橋)가 5층[五級]인데 중계(中階)의 사면 넓이가 각각 15척, 아랫층계[下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가 5층이다. 북쪽 행랑 29간을 통하는 행랑은 북행랑에서 정전(正殿)의 북쪽에 닿았고, 수라간(水刺間) 4간과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동쪽에 닿아서 내전의 동쪽 행랑과 연했으며, 그 남쪽 9간은 전문의 동각루(東角樓)에 닿았다. 서루(西樓) 3간도 상·하층이 있는데,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서쪽 구석에 닿아서 내전의 서쪽 행랑과 연하고, 그 남쪽 9간은 전문(殿門)의 서각루(西角樓) 전정(殿庭)에 닿았다. 넓이는 동서(東西)가 각각 80척, 남쪽이 1백 78척, 북쪽이 43척이며, 전문 3간은 전(殿)의 남쪽에 있고, 좌우 행랑 각각 11간과 동(東)·서각루(西角樓) 각각 2간과 오문(午門) 3간은 전문(殿門)의 남쪽에 있다. 동서의 행랑은 각각 17간씩이며, 수각(水閣)이 3간, 뜰 가운데에 석교(石橋)가 있으니 도랑물 흐르는 곳이다. 문(門)의 좌우의 행랑이 각각 17간씩이며, 동·서각루가 각각 2간씩이다. 동문을 일화문(日華門)이라 하고, 서문을 월화문(月華門)이라 한다.

그 밖에 주방(廚房)·등촉방(燈燭房)·인자방(引者房)·상의 원(尙衣院)이며, 양전(兩殿)의 사옹방(司饔房)·상서사(尙書司)·승지 방(承旨房)·내시 다방(內侍茶房)·경흥부(敬興府)·중추원(中樞院)·삼군부(三軍府)와 동·서루고(東西樓庫)가 무릇 3백 90여 간이다.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建春門)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樓] 3간이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삼군부(三軍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의 각사(各司) 공청이 벌여 있었다.


四年 後九月[편집]

閏9月 1日[편집]

종묘에 이안 도감을 설치하다[편집]

○壬戌朔/置宗廟移安都監。

종묘에 이안 도감(移安都監)을 설치하였다.


대묘 동역 제조관에게 잔치를 내려 주고 내구마 1필 씩을 하사하다[편집]

○賜宴太廟董役提調官, 仍賜廐馬各一匹。

대묘(大廟)의 동역 제조관(董役提調官)에게 잔치를 내려 주고는 각각 내구마 1필씩 하사하였다.


閏9月 2日[편집]

노루가 성 안에 들어오다[편집]

○癸亥/鹿入都中。

사슴이 성내에 들어왔다.


閏9月 3日[편집]

삼척 부사 박만이 침입한 왜구 2인을 죽이니 내온을 하사하다[편집]

○甲子/倭寇侵三陟府, 府使朴蔓擊斬二人。 上遣將軍李自芬, 賜內醞。

왜구가 삼척부(三陟府)에 침입한 것을 부사(府使) 박만(朴蔓)이 2인을 쳐서 죽였다. 임금이 장군 이자분(李自芬)을 보내어 내온(內醞)을 하사하게 하였다.


閏9月 8日[편집]

오도리 상만호 동맹가첩목아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己巳/吾都里上萬戶童猛哥帖木兒等五人來獻土物。

오도리(吾都里) 상만호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등 5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閏9月 10日[편집]

동교에 거둥하여 매사냥을 구경하다[편집]

○辛未/幸東郊, 觀放鷹。

임금이 동교에 거둥하여 매사냥을 구경하였다.


임금이 도성쌓을 자리를 돌아보다[편집]

○上巡觀都城基。

임금이 도성(都城)의 터를 순회하였다.


閏9月 13日[편집]

도성 조축 도감을 설치하고 그 직제를 정하다. 정도전에게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다[편집]

○甲戌/始立都城造築都監: 置判事、副判事、使、副使、判官、錄事。 命判三司事鄭道傳, 定城基。

처음으로 도성 조축 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두어 판사·부판사·사(使)·부사(副使)·판관·녹사 들을 임명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정하게 하였다.


閏9月 16日[편집]

용산강에 거둥하여 단기로 외출하려다가 간관이 상언하여 중지하다[편집]

○丁丑/上遊幸龍山江, 諫官上言請勿單騎輕出, 上允之。

임금이 용산강(龍山江)에 행행(行幸)하고자 하니, 간관이 상언하여,

"단기(單騎)로 경솔히 납시지 마소서."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閏9月 19日[편집]

인부 천 명을 징발하여 태평관을 짓게 하다[편집]

○庚辰/徵諸道丁夫一千, 營太平館。

여러 도의 인부[丁夫] 1천 명을 징발하여 태평관(太平館)을 짓게 하였다.


閏9月 24日[편집]

밤에 무안군의 집에 거둥하여 문병하다[편집]

○乙酉/夜, 上如撫安君芳蕃第, 視疾。

밤에 임금이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의 집에 거둥하여 문병하였다.


閏9月 25日[편집]

서산에 거둥하여 성 쌓을 터를 살피다[편집]

○丙戌/幸西山, 相城基。

서산(西山)에 거둥하여 성 쌓을 터를 살폈다.


개성 대정에서 물이 붉게 끓어 오르다[편집]

○開城大井赤沸。

개성의 대정(大井)에서 물이 붉게 끓어 올랐다.


閏9月 26日[편집]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을 유후사에 보내어 종묘 이안을 고유케 하다[편집]

○丁亥/遣藝文春秋館學士權近于留後司, 告宗廟移安。

예문춘추관 학사(學士) 권근(權近)을 유후사에 보내어 종묘의 이안(移安)을 고유하게 하였다.


각사에서 한 명씩 유후사에 보내어 4대 신주를 봉안하고 오게 하다[편집]

○遣各司一員, 奉迎四代神主于留後司。

각사(各司)에서 1원(員)씩 보내어 유후사에 가서 4대 신주(神主)를 봉안하고 오게 하였다.


閏9月 27日[편집]

종묘제에 왕이 새 궁궐에서 재계하다. 헌관 김사형 등도 서계하다[편집]

○戊子/上齋于新宮。 宗廟祭獻官右政丞金士衡及諸執事會盟三司, 致齋于各衙門。 諫官李升商、吳陞、安束、鄭守弘、尹須不及與盟, 憲府劾之, 罷職。

임금이 새 대궐에서 재계(齋戒)하였다. 종묘제 헌관(宗廟祭獻官)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여러 집사들이 삼사(三司)에 모여서 서계(誓戒)하고, 각 아문에서도 재계를 하였는데, 간관 이승상(李升商)·오승(吳陞)·안속(安束)·정수홍(鄭守弘)·윤수(尹須)가 서계하는 데에 참예하지 못해서 헌부에서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閏9月 28日[편집]

백관이 공복을 입고 반송정에 나아가 신주를 봉영하다[편집]

○己丑/百官具公服, 迎神主于盤松亭, 以象輅儀仗鼓吹, 安于新廟。 命判門下府事權仲和, 行移安祭。

백관이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반송정(盤松亭)에 나아가 신주를 봉영(奉迎)하였다. 상로(象輅)에 모시어 의장(儀仗)과 풍악을 잡히고 새 종묘에 안치하고,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에게 명하여 이안제(移安祭)를 행하게 하였다.


閏9月 29日[편집]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다[편집]

○庚寅/雷電雨雹。

천둥하고 번개치며 우박이 내렸다.


四年 冬十月[편집]

10月 2日[편집]

천둥 치고 비가 내리다[편집]

○壬辰/雷雨。

천둥하고 비가 내렸다.


10月 4日[편집]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묘에 이르러 사배례를 하고 재소로 들어가다[편집]

○甲午/上服絳紗袍遠遊冠, 乘象輅, 百官具公服前導, 至太廟外門, 先至諸執事出迎于道左。 上率百官至廟東門外, 行四拜禮, 乃入齋所。

임금이 강사포(絳紗袍)에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상로(象輅)를 타고, 백관들이 공복을 갖추어 입고 앞에서 인도하여 대묘의 바깥문에 이르니, 먼저 온 여러 집사들이 길 왼쪽에 나와 맞이하였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묘의 동문(東門) 밖에 이르러 사배례를 행하고는, 곧 재소(齋所)로 들어갔다.


10月 5日[편집]

제례를 마친 후 중외의 조하를 받고 국정 쇄신의 내용을 담은 교서를 내리다[편집]

○乙未/上服冕服, 親祼酌獻, 世子亞獻, 右政丞金士衡終獻。 禮畢, 還大次, 受中外朝賀。 乘平兜輦至市街, 成均博士率諸生, 進歌謠三篇。 其一曰《天監》, 美受命也; 其二曰《華山》, 美定都也; 其三曰《新廟》, 美立廟親祀也。 至雲從街, 典樂署女樂, 進歌謠呈才, 上三次駐輦觀之。 至午門帳次, 頒降敎書:

王若曰, 予以杳躬, 荷祖宗積累之德, 賴臣民推戴之力, 肇造丕基, 奄有東國, 奠厥新邑于漢之陽。 歲乙亥九月, 太廟成, 奉安皇高祖考穆王、皇高祖妣孝妃、皇曾祖考翼王、皇曾祖妣貞妃、皇祖考度王、皇祖妣敬妃、皇考桓王、皇妃懿妃四代神主。 越十月乙未, 飭躬齋戒, 親執犧牲珪幣, 聿嚴蒸祭, 式禮莫愆。 載惟宗祏, 國之大本也, 而寢廟有赫; 蒸嘗, 國之大事也, 而祀事孔明。 皆由先世, 肇基王迹, 以至寡人, 化家爲國。 覩此盛典, 予甚自慶。 宜施寬大之恩, 以布惟新之令, 可宥境內。 自洪武二十八年十月初五日昧爽已前, 常赦所不原外二罪以下, 已發覺未發覺、已結正未結正, 咸宥除之。 於戲! 衎我烈祖, 遹觀福祿之臻; 嘉與群生, 同躋仁壽之域。 所有合行事宜, 條列于後。 一, 培養國脈, 在於養禮俗。 前朝之季, 政敎陵夷, 禮制大壞, 士習民風, 俱爲不美, 以至於亡。 自今爲士大夫者, 飭乃身勤乃職; 爲民庶者, 守乃分供乃役, 毋僥倖以苟得, 毋放僻以自逸, 以成禮義之俗。 一, 民惟邦本, 在所優恤, 近因遷都, 力役悉煩。 然宗廟所以安祖宗盡孝敬, 宮闕所以聽國政示尊嚴, 城郭所以捍內外而備非常, 皆非得已, 予豈樂用民力哉? 其餘土木興作, 一皆停罷, 毋復困吾民力。 其有赴役死亡者, 所在官司, 恤復其家。 一, 卽位之初, 每降敎條, 驗民田荒熟, 量減租賦, 已有定制。 然至今年, 旣有水潦風霜之災, 又因軍役, 民多失業。 其被災尤甚者, 驗免租賦, 前朝之時, 州縣逋租, 竝許免徵, 其民間稱貸公私之物, 貸者旣歿, 徵及其族者, 一皆禁斷。 一, 州郡之兵, 番上宿衛, 所以重根本而均勞逸也。 然老弱困行役之勞, 單丁無資糧之助, 予甚憫焉。 今後各道侍衛軍士, 選遣强壯及奴婢雙丁者, 其老弱單丁, 毋得竝遣。 一, 每降敎條, 諭以便民事宜, 監司守令, 視爲文具, 不卽擧行, 澤不下究, 予甚慮焉。 在內司憲府, 在外觀察使, 將每年頒降條畫, 隨卽擧行, 毋至廢墜。 一, 農桑, 王政之本; 學校, 風化之源也。 卽位以來, 屢下敎書, 示以勸農桑興學校之意, 而守令不務擧行, 監司不加考劾, 皆無實效, 予甚慮焉。 自今內而司憲府, 外而觀察使, 以時考課, 無致陵夷, 以副寡人愛民重道之意。

讀訖, 上乘輿還宮。 女樂至殿庭, 顯妃垂簾觀樂。 越三日丁酉, 加與祭執事官各一級, 賜兩府以上廐馬各一匹, 宴群臣於新宮。 上謂執事曰: “卿等恪勤乃事, 衎我祖宗, 予甚喜焉。” 賜馬左政丞趙浚、判三司事鄭道傳, 曰: “卿等雖不與事, 然宗廟之禮, 皆卿等所定。” 加賜道傳金飾角帶一腰曰: “今聞雅樂, 知卿功不細矣。”

임금이 면복(冕服)을 입고 친히 관향(祼享)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니, 세자가 아헌(亞獻)하고 우정승 김사형이 종헌(終獻)하였다. 제례를 마치고 대차(大次)에 돌아오자, 중외(中外)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평두연(平兜輦)을 타고 시가(市街)에 이르니, 성균 박사가 태학생을 인솔하고 가요(歌謠) 3편을 올렸는데, 첫째는 천감(天監)이니 천명 받은 것을 찬양한 것이요, 둘째는 화산(華山)이니 도읍 정한 것을 찬양한 것이요, 셋째는 신묘(新廟)이니 종묘를 세워서 친히 제향 올린 것을 찬양한 것이었다.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니, 전악서(典樂署)의 여악들이 노래를 부르고 정재(呈才)를 드렸다. 임금이 세 차례나 연을 멈추고서 이를 보았고, 오문(午門)의 장막친 임시 행차소에 이르러 교서를 반포해 내렸다.

"왕은 이르노라. 내가 외로운 몸으로 선대의 쌓은 덕을 입고 신민들이 추대하는 힘을 입어서, 크나큰 터전을 마련하여 문득 동쪽의 나라를 차지하고, 새 도읍을 한양에 들이게 되어 태세 을해 9월에 종묘가 낙성되고 황고조고 목왕(穆王)과 황고조비 효비(孝妃)며, 황증조고 익왕(翼王)과 황증조비 정비(貞妃)며, 황조고 도왕(度王)과 황조비 경비(敬妃)며, 황고 환왕(桓王)과 황비 의비(懿妃)의 4대 신주를 봉안하고, 10월 을미일에 삼가 몸소 재계하고 친히 희생(犧牲)과 규폐(珪幣)를 올리나니 증제(蒸祭)를 엄하게 할 것이며 의식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생각하건대 종묘의 위패는 나라의 대본이니, 종묘는 빛남이 있어야 하고, 증제와 상제는 나라의 대사이니 공명해야 한다. 이는 모두 선대부터 왕이 될 징조를 갖게 되어 나에게 이르러서 한 집이 나라로 변하니, 이번 성전을 보고서 내가 심히 스스로 경사로 여겼노라.

마땅히 관대한 은전을 베풀어 새로운 법령을 펴고자 하니, 홍무 28년 10월 초5일 새벽 이전에 지은 죄로 상사(常赦)로써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제외한 이죄(二罪) 이하는 이미 발각된 것이나 안 된 것이나, 이미 판결된 것이거나 안 된 것이거나,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라. 아아! 참으로 나의 조상의 복록(福祿)이 이름을 보시고, 가상하게도 여러 생령으로 함께 인수(仁壽)의 지경에 올라가게 되니, 마땅히 행하여야 될 좋은 일을 다음에 기록하노라.

1. 국맥(國脈)을 배양하는 것은 예의와 풍속을 이루는 데 있다. 고려 말기에는 정치와 교화가 어지럽고 예의와 제도가 무너져서 선비들의 습관과 백성들의 풍속이 모두 좋지 못하게 되어서 망국에 이르렀으니, 이제부터는 사대부가 된 자는 그 몸을 계칙하고 그 직책에 부지런히 하며, 서민이 된 백성이라도 그 본분을 지키고 할 일에 잘하여 요행으로 구차하게 얻으려 하지 말고 , 제멋대로 행동하여 혼자서만 편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예의의 풍속을 이루게 하라.

1. 백성이란 오직 나라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각각 있는 곳에서 넉넉하게 구휼해 주라. 근래에 도읍을 옮김으로 인하여 애써서 한 부역이 너무 많았으나, 종묘는 조종(祖宗)을 편안하게 하고 효도와 공경을 다하자는 바이며, 궁궐은 나라의 정사를 듣고 존엄성을 보이려 하는 바이며, 성곽은 안과 밖을 가리고 비상사태를 방비하려는 바이니, 모두 부득이한 일이다. 내 어찌 기꺼이 백성의 노력을 썼겠는가? 그 외의 건축하는 일은 모두 정지하고 파해서 다시 나의 백성의 힘을 곤하게 하지 말라. 만일에 부역하다가 죽는 자가 있으면, 그 맡은 관청에서는 그 집을 복호(復戶)하게 하라.

1. 즉위한 처음부터 교조(敎條)를 내려 백성들의 토지가 묵었나 곡식이 잘되었나를 답사해서 세곡을 적당하게 감하게 한 일정한 제도를 두었으나, 금년에 와서는 이미 장맛비와 풍재·상재가 있었는데다, 또 군역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많이 직업을 잃었으니, 그 재해를 우심하게 입은 자는 답사해서 세곡을 면하게 하라. 고려 때에 주현(州縣)의 세곡이 체납된 것은 모두 면제해 주고, 그 민간에서 공사의 물건을 빌려서 쓰고, 빌려서 쓴 자가 이미 죽어서 그 일족에게까지 받는 것은 모두 금단하게 하라.

1. 주군(州郡)의 군사가 번상(番上)하여 숙위(宿衛)하는 것은 근본을 중하게 하고 수고로움과 편안한 것을 고루게 함이었다. 그러나 늙고 약한 자가 멀리서 올라와 고생을 하고, 단정(單丁)으로 있는 사람은 식량을 밑천으로 할 도움이 없으니, 내가 심히 불쌍히 여기는 바이다. 금후로는 각도의 시위 군사는 장건한자 및 노비와 두 장정이 있는 사람을 뽑아 보내고, 늙고 약하며 홑몸으로 있는 자는 아울러 보내지 말게 하라.

1. 번번이 조목으로 분부해서 백성들에게 편리할 일을 하도록 했으나, 감사와 수령들은 문구(文具)로만 여기고 즉시 거행하지 않아서 은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못할 것은 내 심히 염려한다. 경중(京中)은 사헌부에서, 외방(外方)은 관찰사가 매년 조목을 반포하여 즉시 시행하고, 흐지부지되지 않도록 하라.

1. 농상(農桑)은 왕정(王政)의 근본이며, 학교는 교화하는 근원이다. 즉위한 이래로 여러 번 교서를 내려 농상을 권하고 학교를 일으키라는 뜻을 보였으나, 수령은 거행하는 데 힘쓰지 않고 감사는 더 고핵(考劾)하지 않아서 모두 실효가 없으니, 내가 심히 염려된다. 이제부터는 경중은 사헌부에서, 외방은 관찰사가 때때로 성적을 매겨서 흐릿해지는 점이 없게 하여, 나의 백성을 사랑하고 도(道)를 소중하게 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여(輿)를 타고 환궁하였다. 여악(女樂)이 궁전 뜰에 이르니, 현비가 주렴을 드리우고 풍악을 보았다. 3일 뒤 정유일에 〈종묘 제사의〉 집사관으로 참예했던 사람들에게 각각 한 계급씩 올려 주고, 양부(兩府) 이상에게는 내구마 1필씩 하사하고, 신궁(新宮)에서 군신(群臣)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집사들에게,

"경 등은 맡은 일을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하여 우리 조종께서도 즐기실 것이니, 내 심히 기뻐하는 바이다."

하고, 좌정승 조준과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말을 하사하면서,

"경 등은 비록 제향에는 참예하지 않았으나, 종묘의 예식은 모두 경 등이 정한 것이었다."

하고, 정도전에게 금으로 장식한 각대(角帶) 하나를 더 주면서,

"이제 아악(雅樂)을 들어보니 경의 공이 적지 않았다."

하였다.


10月 7日[편집]

특명으로 상장군 노석주를 겸 상서 소윤에 임명하다[편집]

○丁酉/以上將軍盧石柱兼尙瑞少尹。 石柱非由科目進者, 出於特旨。

상장군 노석주(盧石柱)로 겸 상서 소윤(兼尙瑞少尹)을 삼았다. 석주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한 자는 아니고, 왕의 특지(特旨)로 나왔었다.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다[편집]

○命判三司事鄭道傳, 名新宮諸殿。 道傳撰名, 幷書所撰之義以進。 新宮曰景福, 燕寢曰康寧殿, 東小寢曰延生殿, 西小寢曰慶成殿, 燕寢之南曰思政殿, 又其南曰勤政殿, 東樓曰隆文, 西樓曰隆武, 殿門曰勤政, 午門曰正門。

其景福宮曰:

臣按, 宮闕, 人君所以聽政之地, 四方之所瞻視, 臣民之所咸造, 故壯其制度, 示之尊嚴; 美其名稱, 使之觀感。 漢、唐以來, 宮殿之號, 或沿或革, 然其所以示尊嚴, 而興觀感則其義一也。 殿下卽位之三年, 定都于漢陽, 先建宗廟, 次營宮室, 越明年乙未, 親服袞冕, 享先王先后于新廟, 宴群臣于新宮, 蓋廣神惠而綏後祿也。 酒三行, 命臣道傳曰: “今定都享廟, 而新宮告成, 嘉與群臣宴享于此。 汝宜早建宮殿之名, 與國匹休於無疆。” 臣受命謹拜手稽首, 誦《周雅》“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請名新宮曰景福。 庶見殿下及與子孫, 享萬年太平之業, 而四方臣民, 亦永有所觀感焉。 然《春秋》重民力謹土功, 豈可使爲人君者, 徒勤民以自奉哉? 燕居廣廈, 則思所以庇寒士, 生涼殿閣, 則思所以分淸陰, 然後庶無負於萬民之奉矣。 故倂及之。

其康寧殿曰:

《洪範》九五福, 三曰康寧, 蓋人君正心修德, 以建皇極, 則能享五福。 康寧乃五福之一, 擧其中以該其餘也。 然所謂正心修德, 在衆人共見之處, 亦有勉强而爲之者。 在燕安獨處之時, 則易失於安佚, 而儆戒之志, 每至於怠矣, 而心有所未正, 德有所未修, 皇極不建, 而五福虧矣。 昔者衛武公自戒之詩曰: “視爾友君子, 輯柔爾顔, 不遐有愆。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武公之戒謹如此, 故享年過九十, 其建皇極而享五福, 明驗已然。 蓋其用功, 嘗自燕安幽獨之處始也。 願殿下法武公之詩, 戒安佚而存敬畏, 以享皇極之福, 聖子神孫, 繼繼承承, 傳于千萬世矣。 於是稱燕寢曰康寧。

其延生殿、慶成殿曰:

天地之於萬物, 生之以春, 成之以秋; 聖人之於萬民, 生之以仁, 制之以義。 故聖人代天理物, 其政令施爲, 一本乎天地之運也。 東小寢曰延生, 西小寢曰慶成, 以見殿下法天地之生成, 以明其政令也。

其思政殿曰:

天下之理, 思則得之, 不思則失之。 蓋人君以一身, 據崇高之位, 萬人之衆, 有智愚賢不肖之混; 萬事之繁, 有是非利害之雜。 爲人君者, 苟不深思而細察之, 則何以別事之當否而區處之, 人之賢否而進退之? 自古人君, 孰不欲尊榮而惡危殆哉, 親近匪人, 爲謀不臧, 以至禍敗者, 良由不思耳。 《詩》曰: “豈不爾思! 室是遠而。” 孔子曰: “未之思也, 夫何遠之有!” 《書》曰: “思曰睿, 睿作聖。” 思之於人, 其用至矣, 而是殿也, 每朝視事於此, 萬機荐臻, 皆稟殿下, 降勑指揮, 尤不可不之思也。 臣請名之曰思政殿。

其勤政殿、勤政門曰:

天下之事, 勤則治, 不勤則廢, 必然之理也。 小事尙然。 況政事之大者乎? 《書》曰: “儆戒無虞, 罔失法度。” 又曰: “無敎逸欲有邦, 兢兢業業, 一日二日, 萬機。 無曠庶官, 天工人其代之”, 舜、禹之所以勤也; 又曰: “自朝至于日中昃, 不遑暇食, 用咸和萬民”, 文王之所以勤也。 人君之不可不勤也如此。 然安養旣久, 則驕逸易生, 又有諂諛之人, 從而道之曰: “不可以天下國家之故, 疲吾精而損吾壽也”, 又曰: “旣居崇高之位, 何獨猥自卑屈而勞苦爲哉?” 於是, 或以女樂, 或以遊畋, 或以玩好, 或以土木, 凡所荒淫之事, 無不道之, 人君以爲, 是乃愛厚, 不自知其入於怠荒。 漢、唐之君, 所以不三代若者, 此也。 然則人君, 其可一日而不勤乎? 然徒知人君之勤, 而不知所以爲勤, 則其勤也流於煩碎苛察, 不足觀矣。 先儒曰: “朝以聽政, 晝以訪問, 夕以修令, 夜以安身。” 此人君之勤也。 又曰: “勤於求賢, 逸於任賢。” 臣請以是爲獻。

其隆文樓、隆武樓曰:

文以致治, 武以戡亂, 二者如人之有臂, 不可偏廢也。 蓋禮樂文物, 粲然可觀, 戎兵武備, 整然畢具, 至於用人, 文章道德之士, 果敢勇力之夫, 布列中外, 是皆隆文隆武之至。 庶見殿下, 文武竝用, 以臻長久之治焉。

其正門曰:

天子諸侯, 其勢雖殊, 然其南面出治則皆本乎正, 蓋其理一也。 若稽古典, 天子之門曰端門, 端者, 正也。 今稱午門曰正門。 命令政敎, 必由是門而出, 審之旣允而後出, 則讒說不得行, 而矯僞無所托矣; 敷奏復逆, 必由是門而入, 旣允而後入, 則邪僻無自進, 而功緖有所稽矣。 闔之, 以絶異言奇邪之民; 開之, 以來四方之賢, 此皆正之大者也。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그 경복궁에 대하여 말하였다.

"신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것은 임금이 정사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민(臣民)들이 다 조성(造成)한 바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성을 보이게 하고, 그 명칭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감동되게 하여야 합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래로 궁전의 이름을 혹 그대로 하기도 하고, 혹은 개혁하였으나, 그 존엄성을 보이고 감상을 일으키게 한 뜻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여 먼저 종묘를 세우고, 다음에 궁궐을 경영하시더니, 다음 해 을미일에는 친히 곤복(袞服)과 면류관(冕旒冠)을 쓰시고 선대의 왕과 왕후를 신묘(新廟)에서 제향을 올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새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셨으니, 대개 신(神)의 혜택을 넓히시고 뒷사람에게 복록을 주심이옵니다. 술이 세 순배 되어서, 신 정도전에게 분부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하셨으므로, 신이 분부를 받자와 삼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그러나 《춘추(春秋)》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백성만 괴롭혀 자봉(自奉)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에 거의 만백성의 봉양하는데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말씀드립니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네가 군자와 벗하는 것을 보니 너의 얼굴을 상냥하고 부드럽게 하고, 잘못이 있을까 삼가하는구나. 너의 방에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구나.’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합니다. 성인이 만백성에게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드시니,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므로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하므로, 동쪽의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여,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자로서 누가 높고 영화로운 것을 바라고 위태로운 것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좋지 못한 일을 꾀하여서 화패(禍敗)에 이르게 되는 것은, 진실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 일이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노리갯감으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편안히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하기를 청하옵니다.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에 대해서 말하오면,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난(亂)을 안정시킴이오니, 마치 사람의 두 팔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예악과 문물이 빛나서 볼 만하고, 군병과 무비가 정연하게 갖추어지며, 사람을 쓴 데에 이르러서는 문장 도덕의 선비와 과감 용맹한 무부(武夫)들이 경외(京外)에 퍼져 있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높이게 한 것이며, 거의 전하께서 문무를 함께 써서 오래도록 다스림을 이룰 것입니다.

그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하오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신실하게 한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하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10月 10日[편집]

태학사 유구와 한성 윤 정신의를 하정사로 보내다[편집]

○庚子/遣太學士柳玽、漢城尹鄭臣義, 如京師賀明年正。

태학사 유구(柳玽)와 한성 윤 정신의(鄭臣義)를 경사(京師)로 보내어 명년 정조(正朝)를 하례하게 하였다.


10月 11日[편집]

왕의 탄일이라 군신들이 헌수하니 잔치를 베풀다[편집]

○辛丑/上誕日, 群臣上壽, 賜群臣宴。

임금의 탄일(誕日)이라 군신들이 헌수를 하니,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남양백 홍영통이 임금의 탄일에 만취하여 집에 돌아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다[편집]

○南陽伯洪永通墜馬而卒。 永通, 南陽人, 贈門下侍中承演之子, 都僉議中贊子蕃曾孫。 以門蔭出身, 仕恭愍朝, 歷仕官至判少府寺事, 出爲安東府使。 辛旽以僧時舊恩, 爲監察大夫, 尋遷密直副使。 與李春富、金蘭, 爲旽腹心。 旽以私憾, 多殺戮人, 永通以緣業之說, 每誘而止之, 多所全活。 旽敗, 春富等皆伏誅, 永通得免死流外。 及辛禑立, 以姻屬, 積官至左侍中。 性醇謹, 務於循常, 無所建白。 至國初, 以耆舊封南陽伯, 屢蒙優接。 及上誕日, 赴宴沈醉, 將還, 馬驚墜而卒。 上嗟悼, 遣人致祭, 命攸司葬以禮, 賜諡安愍。 無子。

남양백(南陽伯) 홍영통(洪永通)이 말 위에서 떨어져 돌아갔다. 영통은 남양(南陽) 사람으로 증 문하 시중(門下侍中) 홍승연(洪承演)의 아들이며,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홍자번(洪子蕃)의 증손이다. 문음(門蔭)으로 출신하여 공민왕 때에 판소부시사(判少府寺事)를 지냈고, 나가서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다. 뒤에 신돈(辛旽)이 중으로 있을 때의 구은(舊恩)으로 감찰 대부(監察大夫)가 되었다가, 곧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옮겼고, 이춘부(李春富)·김난(金蘭)으로 더불어 돈의 심복이 되었다. 돈이 사감(私憾)을 가지고 사람을 많이 죽이므로, 영통이 연업지설(緣業之說)로 언제나 설득하여 못하게 하여서 많은 사람을 살렸었다. 돈이 패하게 되자 춘부 등은 다 주살(誅殺) 당했으나 영통은 죽기를 면하고 외방으로 유배갔다가, 우왕이 즉위하자 왕과 인척 관계이므로 여러 관직을 거쳐 좌시중(左侍中)에 이르렀다. 천성이 순박하고 조심스러워 상례(常例)를 좇아 계책을 세워 건의하는 바가 없었다. 국초에 이르러 기구(耆舊)라 하여 남양백(南陽伯)에 봉해지고 여러 번 우악한 접대를 받았다. 임금의 탄일 잔치에 나갔다가 만취되어 돌아오다가 말이 놀라는 바람에 떨어져 죽었다. 임금이 애도하여 사람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시호를 안민(安愍)이라 하였는데, 아들이 없다.


회암사에 쌀과 콩을 내리다[편집]

○賜檜巖寺米豆三百斛。

회암사(檜巖寺)에 쌀과 콩 3백 곡을 내려 주었다.


10月 12日[편집]

안개가 끼고 달이 묘성을 가리다[편집]

○壬寅/霧。 月掩昴。

안개가 끼고 달이 묘성(昴星)을 가렸다.


10月 13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癸卯/木稼。

목가(木稼)하였다.


정안군이 사냥 갔다가 표범에 물릴 뻔하다[편집]

○義安伯和請靖安君獵于西郊, 靖安君爲怒豹所犯, 幾不免。 郞將宋居信躍馬馳躡之, 豹乃釋之, 反逐居信, 從前登馬嚙鞍。 居信臥於馬上以避之, 豹纔離馬。 郞將金德生從後馳射之, 一箭而斃。 靖安君給二人馬各一匹, 太祖又賜居信馬一匹, 和及閔霽, 亦各贈馬一匹。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가 정안군(靖安君)을 청하여 서교(西郊)에 가서 사냥하다가, 정안군이 성낸 표범에게 부닥친 바 되어 거의 면하기 어려울 즈음에, 낭장 송거신(宋居信)이 말을 달려 따라가니, 표범이 정안군은 놓아두고 반대로 거신(居信)을 따라 와서 앞으로 달려들어 말 위에 올라 안장을 깨물었다. 거신은 말 위에 누워서 이를 피하니, 표범이 겨우 말과 떨어졌다. 낭장 김덕생(金德生)이 뒤를 달려가서 활을 쏘아 한 발에 표범을 죽였다. 정안군이 2인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주니, 태조도 거신에게 말 1필을 하사하고, 화(和)와 민제(閔霽)에게도 또한 각각 말 1필씩을 하사하였다.


10月 14日[편집]

홍영통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 때문에 대신들에게 요여를 내려 주다[편집]

○甲辰/賜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判門下府事權仲和、判三司事鄭道傳竹腰輿各一, 以及耆老諸臣。 蓋以洪永通墜馬爲戒也。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판문하부사 권중화·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대[竹]로 만든 요여(腰輿) 하나씩을 내려 주고, 기로 제신(耆老諸臣)에게도 내려 주었는데, 대체로 홍영통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연사흘 안개가 끼다[편집]

○霧。 乙巳、丙午, 亦如之。

안개가 끼었다. 15일, 16일에도 안개가 끼었다.


10月 17日[편집]

천둥 치고 샘물이 끓어 오른 것 때문에 내전에서 금경 법석을 행하다[편집]

○丁未/上以冬雷井沸, 設《金經》法席於內殿, 分遣人於各寺, 亦設法席。

임금이 겨울을 당하여 천둥과 샘물이 끓어올랐으므로, 금경 법석(金經法席)을 내전(內殿)에서 베풀고, 사람을 여러 절에 나누어 보내어 법석을 베풀게 하였다.


아버지를 죽인 도둑을 두 아들이 잡다[편집]

○盜殺廣州百姓李之天, 其子豆介、內隱三捕其盜復讎。 盜李夫介等十三名, 夜入之天家, 殺之天, 掠財而去。 豆介等跡至川寧路上, 潛遣人告縣官, 縣發吏要諸津, 及盜登船, 盡捕而斬之。

도둑이 광주(廣州) 백성 이지천(李之天)을 죽였는데, 그 아들 이두개(李豆介)·이내은삼(李內隱三)이 그 도둑을 잡아서 복수하였다. 도둑 이부개(李夫介) 등 13명이 밤에 지천(之天)의 집에 들어와 지천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 가므로, 두개 등이 뒤를 밟아 천녕(川寧) 노상(路上)에 이르러 몰래 사람을 보내어 현관(縣官)에게 알리게 하니, 고을에서 아전들을 여러 나루터[津]에 내보내어 기다리게 하였다가, 도둑이 배에 오르자 다 잡아서 참형하였다.


10月 25日[편집]

문묘를 경영하게 하다[편집]

○乙卯/命營文廟。

명하여 문묘(文廟)를 경영하도록 하였다.


처를 통간한 주인을 반역을 도모한다고 무고한 종이 참형당하다[편집]

○李中實奸其奴松山妻, 松山誣告中實圖不軌, 覈實而斬之。

이중실(李中實)이 그의 종[奴] 송산(松山)의 처(妻)를 통간했더니, 송산이 중실이 역적을 도모한다고 무고했는데, 실상을 조사하고서 송산을 참형하였다.


요동 도사가 전과 같이 호송하게 해 달라고 명 예부에 보낸 자문[편집]

○遣官咨禮部曰:

陪臣金乙祥, 回自京師言: “蒙差赴京, 欽奉聖旨: ‘火者崔加勿, 帶引回去。’ 欽此, 將引崔加勿到遼東, 蒙都司稱有聖旨, 不許護送。 乙祥等徒步還來了。” 據此參照, 小邦臣事聖朝, 凡有差人赴京, 回還至遼東, 每蒙都司護送, 沿途庶無踈失。 今據金乙祥來言, 竊見小邦鴨綠江, 西至遼東甛水站, 其間人烟斷絶, 草木叢茂。 若無護送, 慮恐盜賊刦掠, 虎狼侵害, 煩爲聞奏。 乞賜明降遼東都司, 仍前護送施行。

관원을 보내어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김을상(金乙祥)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경사에 나아가 삼가 성지(聖旨)를 받자오니, 「화자(火者) 최가물(崔加勿)을 데리고 돌아가라.」 하오매, 그대로 최가물을 인솔하고 요동(遼東)까지 온즉, 요동 도사로부터 「성지(聖旨)가 계셨다.」 하고, 호송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을상 등이 도보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방(小邦)은 신하로서 성조(聖朝)를 섬겼기 때문에, 무릇 사람을 차정하여 경사(京師)에 나아갔다 돌아오게 할 때에는, 요동에 이르러서 언제나 도사가 호송해 주게 하여 오가는 길에 거의 소홀하고 실수하는 일이 없었는데, 이제 김을상이 와서 하는 말이, ‘우리 나라의 압록강 서쪽에서 요동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는 그 중간은, 인가의 연기가 끊어지고 초목(草木)이 울밀해서, 만약에 호송을 해 주지 않으면 도적에게 약탈당하고 호랑(虎狼)에게 침해당할까 두렵다.’고 하오니, 아뢰기가 지번하오나, 청하옵건대, 요동 도사에게 명문을 보내서 전과 같이 호송하도록 하옵소서."


왕자와 제군이 매 기르는 것을 금하다[편집]

○上諭王子諸君曰: “以養鷹故, 殺民間雞犬, 甚不可也。 自今勿畜鷹子。”

임금이 왕자(王子)와 제군(諸君)에게 유시하여, 매를 기르기 위하여 민간의 닭과 개를 잡아 죽이는 것은 심히 옳지 못하니 지금부터는 매를 기르지 말라고 하였다.


진상하는 매와 사사로이 바치는 매를 금하다[편집]

○又禁進上鷹子外私贈鷹子。

또 진상하는 매[鷹子] 이외에 사사로이 바치는 매도 금하였다.


판사역원사 장백의 아들이 중국 등주에서 아버지의 유골을 거두어 오다[편집]

○判司譯院事張伯子洪壽收其父骨而回。 伯嘗奉使, 病死登州, 蒿葬其地。 洪壽具狀, 乞咨禮部, 赴京哀訴, 回至登州, 收骨還葬。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 장백(張伯)의 아들 장홍수(張洪壽)가 그의 아비 유골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왔다. 백(伯)은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등주(登州)에서 병사(病死)하여 그곳에다 임시로 묻어 두었더니, 홍수가 장계를 올리고 예부에 자문을 보내게 하여, 경사(京師)에 나아가 슬피 하소연하여 등주에 돌아가서 유골을 파 가지고 돌아와서 안장하였다.


10月 30日[편집]

밤에 정도전 등 훈신을 불러 주연을 베풀다[편집]

○庚申/夜上召判三司事鄭道傳等諸勳臣, 置酒張樂。 酒酣, 上謂道傳曰: “寡人之得至於此, 卿等之力也。 相與敬愼, 期至子孫萬世可也。” 道傳對曰: “齊桓公問於鮑叔曰: ‘何以治國?’ 鮑叔曰: ‘願公無忘在莒時, 願仲父無忘在檻車時。’ 臣願殿下無忘墜馬時, 臣亦無忘鎖項時, 則子孫萬世可期矣。” 上曰: “然。” 使人歌《文德曲》, 目道傳曰: “此卿所撰進, 卿宜起舞。” 道傳卽起舞, 上令脫上衣以舞, 遂賜龜甲裘。 歡甚徹夜乃罷。

밤에 임금이 판삼사사 정도전 등 여러 훈신(勳臣)을 불러 술을 마시고 풍악을 잡혔다. 주연(酒宴)이 한창 벌어질 무렵에 임금이 정도전에게 하는 말이,

"내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경 등의 힘이니,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 만대에까지 이르기를 기약함이 옳을 것이다."

하니, 도전이 대답하였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포숙(鮑叔)에게 묻기를, ‘어떻게 해야 나라가 다스려지오?’ 하니, 포숙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는 거(莒) 땅에 계셨을 때를 잊지 마옵시고, 원컨대, 중부(仲父)[21]께서는 함거(檻車)에 있을 때를 잊지 마소서.’ 하였으니, 신이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말 위에서 떨어지셨을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역시 항쇄(項鎖)했을 때를 잊지 않으면, 자손 만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옳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서 문덕곡(文德曲)을 노래하게 하고, 도전에게 눈을 껌벅이면서 하는 말이,

"이 곡은 경이 찬진(撰進)한 바이니 경이 일어나서 춤을 추라."

하니, 도전이 즉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임금이 상의(上衣)를 벗고 춤을 추라 하고, 드디어 귀갑구(龜甲裘)를 하사하고는 밤새도록 심히 즐기다가 파하였다.


四年 十一月[편집]

11月 1日[편집]

백관을 거느리고 제궐을 향해 동짓날 하례를 행하다[편집]

○辛酉朔/冬至。 上率百官, 向帝闕行賀禮。

동짓날이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제궐(帝闕)을 향해 하례를 행하였다.


11月 2日[편집]

서북면 임원관·임반관에 승을 두다[편집]

○壬戌/始置西北面林原、林畔館丞。

처음으로 서북면(西北面)의 임원관(林原館)·임반관(林畔館)에 승(丞)을 두었다.


11月 3日[편집]

연이틀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癸亥/木稼, 甲子亦如之。

상고대[木稼]가 끼었는데, 초4일에도 이와 같았다.


11月 5日[편집]

백관을 거느리고 천추절을 하례하다[편집]

○乙丑/上率百官, 賀千秋節。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였다.


11月 6日[편집]

연왕과 사사로이 교제한다고 명나라가 통사 송희정과 압마 권을송을 유배시키다[편집]

○丙寅/節日使金立堅回自京師曰: “通事宋希靖、押馬權乙松等被流遐方。” 初計稟使金乙祥, 道經燕邸, 復于上曰: “燕王謂臣曰: ‘爾國王何不送馬於我?’” 上信之, 立堅去時, 仍附鞍馬以送, 燕王受之以聞。 帝曰: “朝鮮王何得私交?” 乃流希靖、乙松于金齒衛, 再流騰衝府。

절일사(節日使) 김입견(金立堅)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아뢰었다.

"통사 송희정(宋希靖)과 압마(押馬) 권을송(權乙松)이 먼 곳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처음에 계품사(計稟使) 김을상(金乙祥)이 연왕(燕王)의 저택을 거쳐 왔는데 임금에게 복명하기를,

"연왕이 신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 임금은 어째서 나에게 말을 보내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하매, 임금이 그 말을 믿고 입견이 갈 때에 그 편에 안마(鞍馬)를 부송(附送)하였더니, 연왕이 받고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가

"조선왕이 어찌 사사로이 연왕과 교제할 수 있느냐?"

하고, 희정과 을송을 금치위(金齒衛)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등충부(騰衝府)로 유배시켰다.


11月 7日[편집]

비가 내리다가 이튿날 그치다[편집]

○丁卯/雨。 至翌日乃止。

비가 내리더니, 이튿날에야 그쳤다.


고관들이 백성들의 채초 금하는 것을 규찰하게 하다[편집]

○上曰: “達官之家, 各占畿內草木茂盛之地, 禁民樵採, 甚爲未便。 其令憲司, 嚴加禁理。”

임금이 말하였다.

"고관들의 집에서 각각 기내(畿內)의 초목이 무성한 땅을 차지하여 백성들의 채초(採樵)[22]를 금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니, 헌사로 하여금 엄하게 규찰하여 다스리게 하라."


도평의사사에서 한산군 이색에게 쌀과 콩을 보냈으나 받지 않다[편집]

○都評議使司遺韓山君李穡米豆百石, 不受。

도평의사사에서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에게 미두(米豆) 1백 석을 보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사사로이 매를 주는 것을 엄금하다[편집]

○申嚴各道鷹子私贈之禁。

각도에서 매를 사사로이 주고받는 것을 금하도록 거듭 엄중하게 지시하였다.


11月 9日[편집]

사헌부 감찰 한사람이 별순절제사와 같이 순작을 점고하게 하다[편집]

○己巳/始命都評議使司, 自今令司憲監察一員, 同別巡節制使點考巡綽。

처음으로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지금부터는 사헌 감찰 1원(員)으로 하여금 별순 절제사(別巡節制使)와 같이 순작(巡綽)함을 점고하게 하였다.


11月 10日[편집]

사헌부에서 감사와 수령을 인사 고과하는 조목에 대해 아뢰다[편집]

○庚午/憲司上疏言考察監司守令得失之目: 興學、撫民、恤刑、治兵, 備鹽鐵, 繕城堡, 畜資糧, 省征斂, 禁田獵, 懲鄕愿, 納租自量, 種桑麻、藝莞楮之令。

헌사에서 상소하여 말하였다.

"감사와 수령들의 잘잘못을 매기는 데에 대한 조목은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을 사랑하며, 형벌을 조심하고 군사를 다스리며, 염철(鹽鐵)을 준비하고 성보(城堡)를 수축하며, 자량(資糧)을 저축하고 세부를 박하게 하며, 사냥을 금하고 향원(鄕愿)을 징계하며, 조세(租稅)를 받아들이고 상마(桑麻)를 심으며, 왕골과 닥[莞櫧] 같은 것을 가꾸게 하는 등의 영(令)으로써 고찰하게 하소서."


종묘 삭제의 전물이 박했다 하여 상정관 제조 등을 핵문하고 파직시키다[편집]

○上聞宗廟朔祭奠物之薄, 命憲司參劾其實。 憲司劾問詳定官提調三司右僕射閔霽、掌務禮曹正郞尹思永、祭享司議郞姜天霔, 罷職。

임금이 종묘의 삭제(朔祭)의 전물(奠物)이 박하였다는 말을 듣고, 헌사(憲司)에 명하여 그 사실을 조사하게 하니, 헌사에서 상정관 제조(詳定官提調) 삼사 우복야 민제(閔霽), 장무(掌務) 예조 정랑 윤사영(尹思永), 제향사 의랑(祭享司議郞) 강천주(姜天霔)를 핵문하고 파직시켰다.


11月 11日[편집]

각도의 6품 이상 70세 이하의 한량관을 기록하여 아뢰게 하다[편집]

○辛未/都評議使司奉王旨移牒各道: “六品以上年七十以下閑良官, 除鄕校訓導及騎船軍官外, 一皆訪問, 具錄以聞。”

도평의사사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각도에 이첩(移牒)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6품 이상으로 나이 70세 이하의 한량관(閑良官)은, 향교(鄕校)의 훈도(訓導)와 기선 군관(騎船軍官)을 제외하고는 일체로 방문하여 갖추 기록하여 아뢰라."


명나라에 국왕의 고명과 조선국의 인장을 내려달라고 청하는 글[편집]

○遣藝文春秋館太學士鄭摠, 齎閑良、耆老、大小臣僚上禮部申, 赴京請誥命印章。 其申曰:

朝鮮國都評議使司左侍中趙浚等, 竊謂小邦, 王氏失德, 浚等與一國臣民, 推戴李諱爲主。 洪武二十五年七月十五日, 差知密直司事趙胖, 奏達天庭, 繼差門下評理趙琳, 奉表陳奏, 欽奉聖旨, 許允權知國事。 準奉禮部來咨內云: “國更何號, 星馳來報。” 準此, 卽差知密直司事韓尙質, 齎擎奏本赴京, 欽奉聖旨節該: “東夷之號,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矣, 可以本其名而祖之。” 欽此, 除欽遵外, 洪武二十六年三月初九日, 差門下評理李恬, 送納前朝高麗國王金印, 又於當年十二月初八日, 準奉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內一款節該: “卽合正名。 今旣改號朝鮮, 表文仍稱權知國事, 未審何謀?” 欽此, 一國臣民, 戰栗惶懼, 咸請國王欽遵施行。 見今雖稱國王名號, 切緣未蒙頒降誥命及朝鮮國印信, 一國臣民, 日夜顒望, 仰天籲呼。 伏請照驗, 煩爲聞奏, 乞賜頒降國王誥命及朝鮮印信施行。

예문춘추관 태학사(太學士) 정총(鄭摠)을 보내어, 한량 기로(閑良耆老)와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신문(申文)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나아가,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청하게 하였다. 그 신문은 이러하였다.

"조선국 도평의사사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가 덕을 잃어서 준(浚) 등은 일국의 신민과 함께 이(李) 【휘(諱).】 를 임금으로 추대하였습니다. 홍무 25년 7월 15일에 지밀직사사 조반(趙胖)을 보내어 황제께 주달하였고, 계속해서 문하 평리(門下評理) 조림(趙琳)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아뢰게 하였더니, 삼가 성지(聖旨)를 받자오니, 권지 국사(權知國事)로 윤허하시고, 예부에서 온 자문을 받자오니, 그 사연에, ‘나라의 이름을 무엇으로 고쳐야 하느냐? 빨리 와서 알리라.’ 하옵기로, 이에 의하여 즉시 지밀직사사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주본(奏本)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가서 삼가 성지를 받자오니, 이르기를, ‘동이(東夷)의 칭호는 오직 조선이라 하는 것이 아름답고, 또 그 내력이 오래 되니, 그 이름을 근본으로 삼아 본받을 만하니.’ 하셨으니, 삼가 이에 따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밖에 홍무 26년 3월 초9일 문하 평리 이염(李恬)을 보내어 전조 고려 국왕의 금인(金印)을 부송(附送)했고, 또 그 해 12월 초8일에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을 받자와 삼가 성지(聖旨)의 1절(節)을 뵈오니, 그 사연에, ‘정명(正名)에 합치되게 지금 조선이라고 이름을 고쳤은즉, 표문에 전대로 권지 국사라 함은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셨으니, 이 분부를 받자와 일국 신민들이 벌벌 떨면서 황송히 여기오며, 모두 국왕이라고 시행하라 하오나, 오늘날 비록 국왕이라 일컬을지라도 명칭이 끊어져 내려 주신 고명과 조선국의 인장을 받지 못하여, 일국의 신민들이 밤낮으로 옹망하고 감히 사연을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살피시기를 청하와 번거롭게 아뢰오니, 국왕의 고명과 조선의 인신(印信)을 주시어서 시행하게 하옵소서."


수군 절제사 김영렬과 형조 전서 김승주에게 왜구 공격할 계책을 논의케 하다[편집]

○命都評議使司, 召水軍節制使金英烈、刑曹典書金承霔, 問攻倭之策。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수군 절제사 김영렬(金英烈)과 형조 전서 김승주(金承霔)를 불러서 왜구를 공격할 계책을 논의하게 하였다.


각도에 도관찰사를 내려 보내다[편집]

○分遣都觀察使于各道。

도관찰사를 각도에 나누어서 보냈다.


11月 14日[편집]

비가 내리다[편집]

○甲戌/雨。

비가 내렸다.


국사 조구가 병으로 죽으니 조회를 정지하다[편집]

○國師祖丘病死, 爲之停朝。

국사(國師) 조구(祖丘)가 병사(病死)하니, 조회를 정지하게 하였다.


11月 15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乙亥/木稼。

목가(木稼)하였다.


11月 16日[편집]

봉상시에서 사직·원구단·문묘 제향 때의 악장을 고칠 것을 아뢰다[편집]

○丙子/奉常寺啓: “今當國初, 一新舊制, 已改宗廟樂章。 其社稷、圓丘、文宣王等祭樂章, 尙循舊制, 亦宜改作。” 上從之。

봉상시(奉常寺)에서 아뢰었다.

"이제 국초(國初)를 당하여 구제(舊制)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미 종묘의 악장(樂章)을 고쳤으나, 사직과 원구단(圜丘壇)과 문묘 제향의 악장은 아직도 옛날대로 하니, 역시 개작(改作)하여야 옳겠습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月 21日[편집]

각도의 수령을 비롯한 여러 관원들의 잘잘못을 상세히 보고케 하다[편집]

○辛巳/都評議使司奉王旨, 移牒各道, 大小守令、水陸軍官、萬戶ㆍ千戶、儒醫敎授、鹽鐵場官、驛丞得失, 備錄以聞。

도평의사사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각도에 이첩(移牒)하였다.

"대소의 수령과 수륙 군관(水陸軍官)과 만호·천호와 유의 교수(儒醫敎授), 염철장(鹽鐵場) 관원, 역승(驛丞)의 잘잘못을 일일이 상세히 보고하라."


11月 24日[편집]

한산군 이색이 오대산에서 돌아오자, 임금이 융숭히 대접하다[편집]

○甲申/韓山君李穡來自臺山。 初穡見擯于外, 及蒙恩從便, 請游關東, 至臺山因留居。 上遣人召之, 至是穡至, 上待以故舊之禮, 從容與語, 置酒歡洽。 及出, 送至中門。

한산군 이색이 오대산(五臺山)에서 돌아왔다. 당초에 색(穡)이 외방으로 버림을 받았다가 종편(從便)하라는 은총을 입어 관동 지방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에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부르니, 색이 왔다. 임금이 친구의 예로 접대하고 조용하게 담화를 하고 술을 마시고 즐겼다. 나갈 때에는 중문까지 나가서 보냈다.


11月 25日[편집]

안개가 27일까지 계속 끼다[편집]

○乙酉/霧。 至丁亥。

안개가 끼더니, 27일까지 계속하였다.


종묘·사직 등의 향관과 집사의 차정을 판중추·첨서·학사가 논의해 서명케 하다[편집]

○上敎都評議使司曰: “宗廟ㆍ社稷ㆍ佛宇ㆍ道殿ㆍ神祠享官、諸執事, 本中樞院奉敎差定, 今委諸堂後官, 甚爲失禮。 自今判中樞僉書學士, 同議署牒。”

임금이 도평의사사에게 전교하였다.

"종묘(宗廟)·사직(社稷)·불우(佛宇)·도전(道殿)·신사(神祠)의 향관(享官)과 여러 집사(執事)들은 원래 중추원에서 교지를 받아 차정(差定)하던 것인데, 지금은 당후관(堂後官)[23]에 위임하니 매우 실례(失禮)가 된다. 이제부터는 판중추(判中樞)·첨서(僉書)·학사(學士)가 함께 논의해서 직첩에 서명하도록 하라."


11月 27日[편집]

한산군 이색에게 과전과 쌀 등을 내려 주다[편집]

○丁亥/賜韓山君李穡科田一百二十結、米豆百斛、鹽五斛。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에게 과전(科田) 1백 20결, 쌀과 콩 1백 곡(斛), 소금 5곡을 내려 주었다.


11月 28日[편집]

비가 내리다[편집]

○戊子/雨。

비가 내리었다.


간관 이정견 등이, 매 아일 조회 뒤에는 대신 및 여러 관리들로부터 국정을 상세히 보고받을 것을 아뢰다[편집]

○諫官李廷堅等上書曰:

《書》曰: “謀及庶人。” 《詩》曰: “詢于芻蕘。” 蓋人主高拱深宮, 不能周知庶事之微, 必延訪咨問, 知其得失, 然後民情不壅, 而政事無失。 我朝一月六衙之法, 非徒受群臣朝謁, 蓋所以聽斷朝政也。 殿下每衙日, 禮接大臣, 講論治道, 可謂得爲政之要矣。 雖然百寮庶事之得失, 閭巷庶民之疾苦, 豈能盡達於天聰哉? 願殿下, 每衙受朝之後, 入坐正殿, 悉令大臣及庶寮凡願言者, 皆得盡言, 優容弗咈, 採取施行, 以通上下之情。 且守令近民, 其於利害休戚, 備知之矣, 第因地阻, 未得上達。 願自今, 各道守令, 將民生休戚、政治得失及可興利除害者, 實封直達, 毋得壅蔽。

上曰: “每衙, 旣與大臣, 講論國事, 庶僚不須面陳, 其各道守令, 則宜許實封以聞。”

간관(諫官) 이정견(李廷堅)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모책(謀策)은 서인(庶人)에게까지 미치게 하라.’ 하였고,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나무꾼, 꼴꾼에게도 물어 보라.’ 하였습니다. 대개 임금은 깊은 궁궐 속에서 팔짱만 높이 끼고 있어서 여러가지 작은 일을 두루 알지 못하므로, 반드시 누구를 인견(引見)하고 물어 보아서 그 득실(得失)을 알게 된 뒤에야 민정(民情)이 막히지 않고 정사가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서 한 달에 6번씩 조회(朝會)하는 법은 한갓 여러 신하들의 조알(朝謁)만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오라, 대개 조정의 정사[朝政]를 들어서 결정하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매 아일(衙日)마다 예(禮)로써 대신(大臣)을 접(接)하시고 치도(治道)를 강론(講論)하심은 가위(可謂) 정사하는 요긴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백관들의 여러가지 일의 잘되고 못되는 것과 여항(閭巷)의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어찌 다 전하께 주달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아일(衙日)마다 조회를 받은 뒤에 정전(正殿)에 들어가 앉으시어, 대신과 일반 관리들로 하여금 말하기를 원하는 자는 다 말하도록 하시고, 좋은 용안(容顔)으로 언짢아하시지 마시고 좋은 것은 취해서 시행하여 상하의 정이 통하게 하시옵고, 또 수령들은 백성들과 가까와서 그 이해(利害)와 휴척(休戚)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사오나, 다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하께 상달하지 못하오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각도의 수령들이 민생(民生)의 휴척과 정치의 득실(得失) 및 백성들에게 이익을 더할 수 있고 해를 덜어줄 수 있는, 사실대로 글월로 봉해서 바로 주달(奏達)하게 하여 〈민정(民情)이〉 가리고 막히지 않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아일마다 이미 대신들과 국사를 강론하고 있으니 일반 관리들은 구태여 면진(面陳) 할 것 없다. 그러나 각도의 수령인즉 마땅히 사실대로 봉서(封書)해서 아뢰게 하라."


공·사 노비에 따로 도감을 두고 노비 문제를 변정하게 하다[편집]

○刑曹都官朴信等上言: “臣等聞繼治世者, 其道同。 繼亂世者, 其道變, 此三代聖王, 不能無救弊之政也。 恭惟殿下, 憫前朝田制之亂, 遂革私田, 以正經界, 公私田籍, 盡行燒毁, 更定法制, 各給公文, 田有定限, 國有成法。 故豪强絶兼幷之志, 親戚無爭訟之冤, 公私贍足, 上下相安, 誠萬世良法美意也。 獨有奴婢一事, 尙循舊轍, 爭訟益繁, 奸僞日滋, 骨肉至親, 反唇相詰, 分門割戶, 患若仇敵。 而況其他奪攘, 詎可勝言! 各務求勝, 造飾百端, 眞僞混淆, 以故淹滯。 或有奸黠, 攻發陰伏, 或有貪婪, 追改日月, 文契汗漫, 言辭反復, 至使聽者, 眩於處決, 弭訟之方, 可謂難矣。 當該官吏, 苦心焦思, 決雖公正, 謗者競起, 決者見遞, 旋又呈訟, 無有涯涘, 弊之巨者, 莫玆若也。 殿下前日, 惡其如此, 許於得決者給之, 以革其弊。 然曾訟得決之外, 又有爭端非一, 故訟者如前, 以累盛朝。 法匪更新, 曷革玆弊? 今殿下應天順人, 創業垂統, 凡爲子孫萬世慮者, 至詳且備矣。 何憚而獨留此弊, 以貽傷風俗毁人心之端乎? 伏惟殿下, 深垂睿鑑, 廓揮剛斷, 俯採臣等之迂謀, 以立盛代之新典, 庸革巨弊, 以正國家, 惟其時矣。 願自今, 依戶曹給田司例, 命臺省各一員, 掌都官改籍之務, 推源爭訟之害, 明立詐僞之禁, 收納原文, 考其脈胳, 勿論官職高下、奴婢多小, 將時役之數, 具錄一通, 各給公文, 火其舊籍, 以今日之公文, 爲後世之原籍, 則文契簡而爭訟息, 人心定而風俗厚矣。 向者革私田之時, 稍有怨讟之興。 蓋田法, 以職之高下, 定田之多少, 故得失多寡, 至相十百, 論議紛紜, 久而後定, 今奴婢之事, 實異於是。 將曾役奴婢, 只考來歷, 作新賤籍, 各還其主, 則其勢非有難者, 而人反以爲便矣。 若曰攘奪仍執者, 得以肆志, 被奪微劣者, 冤抑莫訴, 願命立別司, 定其期限, 將上項爭訟, 一皆剖決, 然後隨給公文, 燒毁舊籍, 掃去詐僞之萌, 永杜爭奪之門。 至於官寺奴婢, 改作其案, 亦從此例, 毋致繁亂。 其禁令條目, 當續議以聞。” 上命都評議使司擬議申聞。 使司議得: “如刑曹都官所申, 公私奴婢, 別立都監, 賤籍改成給, 舊籍一皆燒毁。 其相訟奴婢, 令主掌都官, 將辛丑年以後事, 自丙子年爲始, 限二年決給, 傳報都監, 賤籍成給, 舊籍亦皆燒毁, 永絶爭端。” 上從之。

형조 도관(刑曹都官) 박신(朴信)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신 등은 듣자오니, 치세(治世)를 이어받은 자는 그 방법을 전과 같이 해야 하고, 난세(亂世)를 이어받은 자는 그 방법을 고쳐야 한다 하옵니다. 이것은 삼대(三代)의 성왕(聖王)도 능히 폐단을 없이 하려는 정치가 없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고려 시대의 토지 제도가 문란한 것을 민망하게 여기시고 사전(私田)을 혁파해서 경계(經界)를 바루시고, 공사(公私)의 전적(田籍)을 다 불살라 버리고 다시 법제(法制)를 정하여 각각 공문(公文)을 주어, 전지가 일정한 한도가 있고, 나라에는 성법(成法)이 있으므로, 호강(豪强)들이 토지를 겸병(兼倂)할 뜻이 없어지고, 친척들은 쟁송(爭訟)의 원통함이 없어져서, 공사(公私)가 모두 넉넉해지고 상하(上下)가 서로 편안하게 되었으니, 실로 만세(萬世)의 양법(良法)이며 아름다운 뜻이로되, 오직 노비(奴婢)의 한 가지 일만이 아직도 옛 제도대로 따르고 있어, 쟁송(爭訟)이 더욱 번잡하고 간위(奸僞)가 날로 더하여져서, 골육지친(骨肉至親)이 입을 비죽거리고 서로 힐난하며, 문중(門中)이 갈라지고 집안이 나뉘어져서, 원망이 원수와 같을 뿐 아니라, 더구나 그 외에 빼앗고 몰래 취하는 것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각기 이기기를 힘써서 백 가지로 위조하고 가식하여 참과 거짓이 뒤섞이기 때문에, 세월만 지체되고, 혹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있어 남의 비밀을 찾아내고, 혹 탐욕을 내는 자가 있어 뒤에 날짜를 고쳐서, 문계(文契)가 한만(汗漫)하고 언사(言辭)가 반복(反復)되어, 듣는 자로 하여금 체결하는 데에 현란(眩亂)하게 하여, 송사를 판결하기가 가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당해 관리가 고심초사(苦心焦思)하여 비록 공정하게 판결하였어도, 비방하는 자가 다투어 일어나고, 판결한 사람이 갈리게 되면 또 다시 송사를 올려서 끝장이 없으니, 폐해의 큰 것이 이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전일(前日)에 이러한 것을 싫어하시어 판결을 얻은 자에게 주도록 허락하시고 그 폐해를 고쳤으나, 일찍이 송사해서 결정지은 외에 또 쟁단(爭端)이 있는 것이 하나뿐이 아니므로, 송사하는 자가 전과 같아서, 성조(盛朝)의 누(累)가 되오니, 법을 경신(更新)하지 않고 어찌 이 폐해를 다 고치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천의(天意)에 응하고 민의(民意)에 순종하여 왕업을 세우시고, 통서(統緖)를 자손에게 전하려 하시오니, 무릇 자손 만대를 위해서 염려하시는 바가 지극히 상세하고, 또 구비하셨사온데, 무엇을 꺼리어서 이 폐단만을 남겨 두시어, 풍속을 해치고 인심을 상하게 하는 단서가 되게 하십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예감(睿鑑)을 드리우시와 과단성 있는 결정을 내리시고, 굽어 신 등의 어리석은 계책을 채택하시와 성대(盛代)의 신전(新典)을 세우시어, 커다란 폐해를 고치고 나라를 바루는 것이 오직 이 때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호조(戶曹)의 급전사(給田司) 예(例)에 따라, 대성(臺省)에 명하여 각 한 사람씩이 도관(都官)에서 개적(改籍)하는 임무를 맡게 하여, 다투고 송사하는 해를 따져서, 거짓을 금하는 법을 밝게 세우고, 원문(原文)을 수납(收納)하여 그 내력을 상고해 보아서, 관직의 고하와 노비의 다소를 물론하고 현재 부리고 있는 수효를 기록하여 1통을 만들고, 각기 공문(公文)을 주고 구적(舊籍)은 불태워 버려서, 금일의 공문으로써 후세(後世)의 원적(原籍)이 되게 하면, 문서가 간단하고 쟁송이 그칠 것이며, 인심이 안정되고 풍속이 후해질 것입니다. 전날 사전(私田)을 개혁할 때에 약간의 원망하고 비방하는 일이 있었으나, 대개 전법(田法)은 직품(職品)의 고하(高下)로써 토지의 많고 적은 것을 정하므로, 득실(得失)의 다과(多寡)가 서로 10이나 백에 이르게 되어 논의가 분분했으되, 오랜 뒤에 안정되었습니다. 지금 노비의 일은 실로 이것과 달라서, 일찍이 부리던 노비는 다만 내력만을 상고하고, 새로 만든 천적(賤籍)은 각각 그 상전에게 돌려주면, 그 사세(事勢)가 어렵지 아니하고, 사람들도 도리어 편리하게 여길 것입니다. 만약에 ‘빼앗아서 그대로 가진 자가 제 마음대로 빼앗게 되어, 미미한 존재가 없는 자는 원통해도 소송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원컨대 별사(別司)를 두도록 명하여, 그 기한을 정해서 위와 같은 송사를 한결같이 모두 판결한 뒤에 공문을 주고, 옛문서는 불살라 버리게 하여, 거짓의 시초를 없애고 다투어 빼앗는 길을 영구히 막으소서. 관청과 절의 노비에 이르러서는 다시 문서를 만들되, 역시 이 예(例)에 따라 번잡하고 문란하지 않게 하고, 그 금령 조목(禁令條目)은 마땅히 곧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임금이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의논해서 아뢰게 하였다. 사사(使司)에서 형조 도관의 아뢴 대로 의논하였으되, 공사 노비에 대하여 따로 도감(都監)을 두고, 노비 문서를 새로 만들어 주고 옛문서는 모두 불태워 버리며, 그 서로 송사하는 노비는 주장 도관(主掌都官)으로 하여금 신축년 이후의 일은 병자년으로 위시(爲始)해서 2년을 위한(爲限)하여 결정해 준 뒤에, 도감에 전보(傳報)하고, 노비 문서를 만들어 주고, 옛문서는 역시 모두 불살라 버려 영구히 쟁단(爭端)을 없애고자 하였으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四年 十二月[편집]

12月 1日[편집]

북쪽에 붉은 기운이 끼다[편집]

○庚寅朔/北方赤氣。

북쪽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12月 3日[편집]

남편 고종제와 간통하고 남편을 교살한 여자를 교형에 처하다[편집]

○壬辰/散員崔安宗妻重寶奸其夫表弟金仲明, 縊殺安宗, 事覺。 刑曹推鞫, 仲明逃, 絞重寶。

산원(散員) 최안종(崔安宗)의 아내 중보(重寶)가 그 남편의 고종제(姑從弟) 김중명(金仲明)과 간통하고 안종을 목 졸라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형조에서 추국(推鞫)하니, 중명은 도망쳤고, 중보는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12月 7日[편집]

성균관과 교서관으로 하여금 문묘 역사를 감독하게 하다[편집]

○丙申/上命成均、校書兩館, 監督文廟之役。

임금이 성균관과 교서감에 명하여 문묘(文廟)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과거식을 상정하다[편집]

○禮曹詳定科擧式。 始以講經書爲初場, 罷進士爲生員試。 上從之。

예조에서 과거식(科擧式)을 상정(詳定)하였으되, 처음에 경서(經書)를 강(講)하는 것으로써 초장(初場)을 삼고, 진사시(進士試)를 파하여 생원시(生員試)를 하자고 하였으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신궁에 거둥하여 3일간 격구하는 것을 보다[편집]

○上幸新宮, 觀擊毬三日。

임금이 신궁(新宮)에 거둥하여 격구(擊毬)하는 것을 3일 동안 보았다.


12月 8日[편집]

한산군 이색에게 쌀과 콩, 술과 고기를 내려 주다[편집]

○丁酉/賜韓山君李穡米豆百斛, 且賜酒肉曰: “卿已老矣。 宜復酒肉, 以養體氣。” 時穡托佛斷酒肉, 故有是命。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에게 쌀과 콩 1백 곡(斛)을 내려 주고, 또 술과 고기를 주면서 말하였다.

"경은 이미 늙었으니 다시 술과 고기를 먹고 건강을 유지하게 하라."

이때에 색이 불교를 신봉하여 술과 고기를 끊었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다.


12月 11日[편집]

변혼이 아버지 재취 부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하여 간관이 변혼의 이혼을 청하다[편집]

○庚子/前開城尹卞南龍娶故判書李竦妻廉氏, 南龍子渾, 又娶竦女。 諫官請離異渾妻, 上允。

전 개성 윤(開城尹) 변남룡(卞南龍)이 죽은 판서(判書) 이송(李竦)의 아내 염씨(廉氏)에게 장가들고, 남룡의 아들 변혼(卞渾)이 또 이송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간관(諫官)이 혼의 처와 이혼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2月 12日[편집]

동북면 도순문사가 효자·순손·절부를 천거하니 복호하게 하다[편집]

○辛丑/東北面都巡問使報: “咸州民女今珍, 年二十三, 喪夫守節, 年至七十二; 定州人申必, 年九十九; 永興府民金夫介祖母, 年三十二, 喪夫寡居, 夫介孝養不怠, 年至七十九歲。” 上賜米各十石, 復其家。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보고하였다.

"함주(咸州) 백성의 딸 금진(今珍)이 나이 23세에 상부(喪夫)하고 수절(守節)해서 72세나 되었으며, 정주(定州) 사람 신필(申必)은 나이 99세입니다. 영흥부(永興府) 백성 김부개(金夫介)의 조모(祖母)는 32세에 상부(喪夫)하고 과거(寡居)하고 있는데, 부개가 효양(孝養)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나이 70세에 이르렀습니다."

임금이 각각 쌀 10석씩을 주고 복호(復戶)하게 하였다.


12月 14日[편집]

회례사 김적선이 일본에서 돌아오다[편집]

○癸卯/回禮使金積善至自日本。

회례사(回禮使) 김적선(金積善)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오랑합족의 수오·적개 등 4인의 투항사실과 당시 북방 야인들의 귀화 실태[편집]

○吾郞哈水吾、狄介等四人來。 三國之末, 平壤以北, 悉爲野人游獵之所。 高麗時, 徙南民以實之, 自義州至陽德, 徑築長城, 以固封疆。 然不安其居, 數爲畔亂, 至於用兵以討之。 義州土豪張氏, 不遵朝命, 南方之地, 倭寇肆暴, 東西數千里, 去海數百里, 屠燒城郭, 暴骨原野, 絶無人烟, 安邊以北, 多爲女眞所占, 國家政令不能及。 睿宗遣將深入, 克捷有功, 建置城邑, 然尋復失之, 覉縻而已。 上受命以後, 聲敎遠被, 西北之民, 安生樂業, 田野日闢, 生齒日繁。 義州張思吉願隷上麾下, 得與開國功臣之列, 自後張氏無復反側, 自義州至閭延沿江千里, 建邑置守, 以鴨綠江爲界。 島倭革面來朝, 復通商賈, 南道之民, 安心奠居, 戶口益增, 雞鳴狗吠相聞, 濱海之地, 斗絶之島, 墾田無遺, 不知兵革, 日用飮食而已。 東北一道, 本肇基之地也, 畏威懷德久矣。 野人酋長遠至, 移闌豆漫皆來服事, 常佩弓劍, 入衛潛邸, 昵侍左右, 東征西伐, 靡不從焉。 如女眞則斡朶里豆漫夾溫猛哥帖木兒、火兒阿豆漫古論阿哈出、托溫豆漫高卜兒閼、哈闌都達魯花赤奚灘訶郞哈、參散猛安古論豆闌帖木兒、移闌豆漫猛安甫亦莫兀兒住、海洋猛安括兒牙火失帖木兒、阿都哥猛安奧屯完者、實眼春猛安奚灘塔斯、甲州猛安雲剛括、洪肯猛安括兒牙兀難、海通猛安朱胡貴洞、禿魯兀猛安夾溫不花、幹合猛安奚灘薛列、兀兒忽里猛安夾溫赤兀里、阿沙猛安朱胡引答忽、紉出闊失猛安朱胡完者、吾籠所猛安暖禿古魯ㆍ奚灘孛牙、土門猛安古論孛里、阿木剌唐括奚灘古玉奴。 (兀郞哈)〔兀良哈〕則土門括兒牙八兒速, 嫌眞兀狄哈則古州括兒牙乞木那、答比那、可兒答哥, 南突兀狄哈則速平江南突阿剌哈伯顔, 闊兒看兀狄哈則眼春括兒牙禿成改等是也。 上卽位, 量授萬戶千戶之職, 使李豆蘭招安女眞, 被髮之俗, 盡襲冠帶, 改禽獸之行, 習禮義之敎, 與國人相婚, 服役納賦, 無異於編戶。 且恥役於酋長, 皆願爲國民。 自孔州迤北, 至于甲山, 設邑置鎭, 以治民事, 以練士卒。 且建學校, 以訓經書, 文武之政, 於是畢擧, 延袤千里, 皆入版籍, 以豆滿江爲界。 江外殊俗, 至於具州, 聞風慕義, 或親來朝, 或遣子弟, 或委質隨侍, 或請受爵命, 或徙內地, 或進土物者, 接踵於道。 所畜之馬, 若産良駒, 皆不自有, 爭來獻之。 近江而居者, 有與國人爭訟, 則官辨其曲直, 或囚之或笞之, 莫敢有怨於邊將。 蒐狩之時, 皆願屬三軍, 射獸則納官, 犯律則受罰, 與國人無異。 後上幸東北面謁山陵, 江外野人爭先來見, 路遠不及者, 皆垂涕而返。 野人至今慕德, 每從邊將飮酒酣, 言及太祖時事, 必感泣不已。

오랑합(吾郞哈) 수오적개(水吾狄介)등 4인이 왔다.

삼국 말기에 평양 이북은 모두 야인들의 사냥하는 곳이 되었었는데, 고려 때에 남방 백성들을 옮겨서 채우고 의주(義州)에서 양덕(陽德)에 이르기까지 장성(長城)을 쌓아 국경을 굳게 했으나, 그 사는 데 불안(不安)하여 자주 반란을 일으켜서 군사를 내어 토벌까지 하였었다. 의주의 토호(土豪) 장씨(張氏)가 조정 명령을 듣지 않고, 남쪽 지방에는 왜구들이 멋대로 약탈해서, 동서(東西)의 수천 리와 바다에서 떨어진 수백 리에 성곽(城郭)이 불타고 해골이 들판에 깔려 있으므로, 인가[人煙]가 전혀 없고, 안변(安邊) 이북은 여진(女眞)의 점령한 바가 되어 국가의 정령(政令)이 미치지 못하였었다. 고려 예종(睿宗)이 장수를 보내어 깊이 들어가서 토벌하고 성읍(城邑)을 세웠으나, 바로 잃어버리고 기미(羇縻)만 하여 두었을 뿐이었다.

임금이 즉위한 이후에 성교(聲敎)[24]가 멀리 서북면 백성들에게까지 입혀져서, 편안하게 살고 업(業)을 즐기게 되어, 전야(田野)가 날로 개간되고 인구가 날로 번성하여져서, 의주의 장사길(張思吉)이 임금의 휘하에 예속되기를 원하여 개국 공신의 반열에 참예하게 되었다. 이 뒤로부터 장씨가 다시 반란하는 일이 없어서, 의주에서 여연(閭延)에 이르기까지의 연강(沿江) 천 리에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어서 압록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도왜(島倭)들도 얼굴을 고치고 내조(來朝)하여 다시 무역을 하게 되어, 남도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곳을 정하여, 호구가 더욱 불어나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게 되었으며, 바닷가의 땅과 매우 험준한 섬까지 남김없이 개간하여, 전쟁을 모르고 날마다 마시고 먹을 뿐이다.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은 알타리 두만(斡朶里豆漫) 협온 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화아아 두만(火兒阿豆漫) 고론 아합출(古論阿哈出)·탁온 두만(托溫豆漫) 고복아알(高卜兒閼)·합란 도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 해탄가랑합(奚灘訶郞哈)·삼산 맹안(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闌帖木兒)·이란 두만 맹안(移闌豆漫猛安) 보역막올아주(甫亦莫兀兒住)·해양 맹안(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括兒牙火失帖木兒)·아도가 맹안(阿都哥猛安) 오둔완자(奧屯完者)·실안춘 맹안(實眼春猛安) 해탄탑사(奚灘塔斯)·갑주 맹안(甲州猛安) 운강괄(雲剛括)·홍긍 맹안(洪肯猛安) 괄아아올난(括兒牙兀難)·해통 맹안(海通猛安) 주호귀동(朱胡貴洞)·독로올 맹안(禿魯兀猛安) 협온불화(夾溫不花)·간합 맹안(幹合猛安) 해탄설렬(奚灘薛列)·올아홀리 맹안(兀兒忽里猛安) 협온적올리(夾溫赤兀里)·아사 맹안(阿沙猛安) 주호인답홀(朱胡引答忽)·인출활실 맹안(紉出闊失猛安) 주호완자(朱胡完者), 오롱소 맹안(吾籠所猛安) 난독고로(暖禿古魯)·해탄발아(奚灘孛牙), 토문 맹안(土門猛安) 고론발리(古論孛里)·아목라(阿木刺) 당괄해탄고옥노(唐括奚灘古玉奴)이며, 올랑합(兀郞哈)은 토문(土門)의 괄아아팔아속(括兒牙八兒速)이며, 혐진 올적합(嫌眞兀狄哈)은 고주(古州)의 괄아아걸목나(括兒牙乞木那)·답비나(答比那)·가아답가(可兒答哥)이며, 남돌 올적합(南突兀狄哈)은 속평강(速平江)·남돌아라합백안(南突阿刺哈伯顔)이며, 활아간 올적합(闊兒看兀狄哈)은 안춘(眼春)·괄아아독성개(括兒牙禿成改) 등이 이것이다.

임금이 즉위한 뒤에 적당히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벼슬을 주고, 이두란(李豆闌)을 시켜서 여진을 초안(招安)하여 피발(被髮)[25]하는 풍속을 모두 관대(冠帶)를 띠게 하고, 금수(禽獸)와 같은 행동을 고쳐 예의의 교화를 익히게 하여 우리 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도록 하고, 복역(服役)과 납부(納賦)를 편호(編戶)와 다름이 없게 하였다. 또 추장에게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모두 국민이 되기를 원하였으므로, 공주(孔州)에서 북쪽으로 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읍(邑)을 설치하고 진(鎭)을 두어 백성의 일을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하며, 또 학교를 세워서 경서를 가르치게 하니, 문무(文武)의 정치가 이에서 모두 잘되게 되었고, 천 리의 땅이 다 조선의 판도(版圖)로 들어오게 되어 두만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강(江) 밖은 풍속이 다르나, 구주(具州)에 이르기까지 풍문(風聞)으로 듣고 의(義)를 사모해서, 혹은 친히 내조(來朝)하기도 하고, 혹은 자제들을 보내서 볼모로 시위(侍衛)하기도 하고, 혹은 벼슬 받기를 원하고, 혹은 내지(內地)로 옮겨 오고, 혹은 토산물을 바치는 자들이 길에 잇닿았으며, 기르는 말이 좋은 새끼를 낳으면 자기네가 갖지 않고 서로 다투어서 바치며, 강 근처에 사는 자들이 우리 나라 사람과 쟁송(爭訟)하는 일이 있으면, 관청에서 그 곡직(曲直)을 변명(辨明)하여 혹 가두기도 하고, 혹은 매를 치기까지 해도 변장(邊將)을 원망하는 자가 없고, 사냥할 때에는 모두 우리 삼군(三軍)에게 예속되기를 자원해서, 짐승을 잡으면 관청에 바치고, 법률을 어기면 벌을 받는 것이 우리 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뒤에 임금이 동북면에 거둥하여 산릉(山陵)을 참배하니, 강(江) 밖에 사는 야인들이 앞을 다투어 와서 뵙고, 길이 멀어서 뵙지 못한 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다. 야인들이 지금까지도 그 은덕을 생각하고, 변장들과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하면 태조 때 일을 말하고 감읍(感泣)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동북면 여러 능에 영안군 양우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다[편집]

○遣寧安君良祐于東北面, 祭于諸陵。

영안군(寧安君) 양우(良祐)를 동북면에 보내서 여러 능(陵)에 제사를 올리었다.


12月 15日[편집]

노비 변정 도감을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다[편집]

○甲辰/立奴婢辨定都監, 以左僕射南在、僉書韓尙敬、中樞金希善爲判事。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설치하고 좌복야(左僕射) 남재(南在)와 첨서(僉書) 한상경(韓尙敬)·중추(中樞) 김희선(金希善)으로 판사(判事)를 삼았다.


12月 16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乙巳/木稼。

목가(木稼)하였다.


이조와 병조에서 정안법의 시행을 청하다[편집]

○吏兵曹, 請行前朝政案之法。

이조와 병조에서 고려 때의 정안법(政案法)[26]을 행하기를 청하였다.


일본 대내전의 다다량이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日本大內多多良, 遣人來獻土物。

일본 대내전(大內殿)의 다다량(多多良)이 사람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다.


12月 19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戊申/霧。

안개가 끼었다.


12月 20日[편집]

좌우 정승 조준·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칼 한자루씩을 주다[편집]

○己酉/賜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判三司事鄭道傳劍各一。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판삼사사 정도전에게 각각 칼 한 자루씩을 주었다.


12月 22日[편집]

이색을 한산백에 봉하고 오고 도제조로 삼다[편집]

○辛亥/以李穡爲韓山伯, 仍命爲義成、德泉等五庫都提調。

이색(李穡)으로 한산백(韓山伯)을 봉하고 인하여 의성고(義成庫)·덕천고(德泉庫) 등의 오고 도제조(五庫都提調)를 삼았다.


12月 23日[편집]

한산백 이색에게 대로 만든 요여를 내려 주다[편집]

○壬子/賜韓山伯李穡竹腰輿。

한산백 이색에게 대[竹]로 만든 요여(腰輿)를 내려 주었다.


12月 24日[편집]

무안군 이방번의 집에 거둥하여 문병하다[편집]

○癸丑/幸撫安君芳蕃第, 視疾。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의 집에 거둥하여 문병(問病)하였다.


12月 25日[편집]

한산백 이색에게 잔치를 베풀며 문덕곡과 무공곡을 듣다[편집]

○甲寅/上宴韓山伯李穡, 判三司事鄭道傳亦與焉。 上聞《文德》、《武功》二曲曰: “歌頌功德, 實惟過情。 每聞此曲, 予甚愧焉。” 道傳對曰: “殿下有此心, 歌所以作也。”

임금이 한산백 이색에게 잔치를 베푸니 판삼사사 정도전도 참예하였다. 임금이 문덕(文德)·무공(武功)의 두 곡조를 듣고서 말하기를,

"노래로 공덕을 칭송한 것이 실로 본정에 지나친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내 심히 부끄럽다."

하니, 도전이 대답하였다.

"전하께서 이런 마음이 계시기에 노래를 지은 것입니다."


주인을 죽이고 여종과 도망갔던 간부를 사지를 찢고 여종은 교형에 처하다[편집]

○前司僕少卿鄭宣執逃婢閉門禁出, 奸夫龍石者殺宣, 率其婢以逃。 捕於安山, 支解龍石傳示, 絞其婢。

전 사복 소경(司僕少卿) 정선(鄭宣)이 도망갔던 여종을 두고 폐문(閉門)하여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니, 간부(奸夫) 용석(龍石)이란 자가 정선을 죽이고 그 여종을 데리고 도망하다가 안산(安山)에서 잡혔다. 용석은 사지(四肢)를 찢어서 각도에 돌리고, 그 여종은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음사 훼철, 가묘 건립, 축산, 토지분배 등 시무에 관한 법령을 각도에 이첩하다[편집]

○知益州事閔由義上請革淫祠、立家廟、畜雞豚、養老病、供祭祀, 禁僧寺役婢執饌, 禁才人禾尺流移, 籍口給田, 上曰: “此皆已有著令, 第不能擧行耳。” 令使司移牒各道。

지익주사(知益州事) 민유의(閔由義)가 음사(淫祠)를 헐어 버리고 가묘(家廟)를 세우며, 닭과 돼지를 쳐서 늙고 병든 사람을 봉양하고 제사에 이바지하게 하며, 절간[僧寺]에서 여종을 시켜서 반찬 장만하는 것을 금하고,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의 유이(流移)를 금하고 호적을 만들어 토지를 주자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것은 모두 이미 만들어 놓은 법령이 있으나, 다만 거행하지 못하였을 뿐이니, 사사(使司)로 하여금 각도에 이첩(移牒)하게 하라."


12月 28日[편집]

새 궁궐에 들어가다[편집]

○丁巳/入新闕。

새 궁궐로 들어갔다.


12月 29日[편집]

백악을 진국백,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아 일반인의 제사를 금하다[편집]

○戊午/命吏曹, 封白岳爲鎭國伯, 南山爲木覓大王, 禁卿大夫士庶不得祭。

이조에 명하여 백악(白岳)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南山)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


주석[편집]

  1. 지금의 경기도 용인
  2. 지금의 평안도 정주
  3. 공자의 제자들로 문학(文學)에 뛰어났음
  4. 후한(後漢) 때의 역사가
  5. 공자의 제자로 문학(文學)에 뛰어났음
  6. 당말(唐末)의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
  7. 제(齊)나라 공양고(公羊高)가 지은 《공양전(公羊傳)》의 태평세(太平世)·승평세(升平世)·난세(亂世)를 말함
  8. 작위(爵位)와 거복(車服)
  9. 공회(公會)에 참여하는 자의 명함
  10. 매를 사육하는 곳
  11. 1388년 위화도(威化島) 회군시
  12. 우왕 6년(1379)
  13. 백성
  14. 환관
  15. 하(夏)·은(殷)·주(周)
  16. 술잔 이름
  17. 제기(祭器) 이름
  18. 운하(運河)
  19. 사령장
  20. 지금의 춘천
  21. 중국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높여 부른 이름
  22. 땔나무를 베어 거두는 것
  23. 중추원의 정7품 벼슬
  24. 백성을 감화하는 임금의 덕
  25. 머리를 풀어 헤치는 것
  26. 고려 때의 이부(吏部) 또는 병부(兵部)와 이조 때의 이조(吏曹)·병조(兵曹)에서 각각 문무관(文武官)의 출신한 연월(年月)의 차례와 벼슬자리의 일이 힘들고 편한 것을 가르고, 재직 중에 잘하고 못한 것을 표시하며, 또 그 직책에 적부(適否)를 자세히 기록·작성하여 전주(銓注)의 참고로 하던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