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강헌대왕실록/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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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五年 春正月[편집]

1月 1日[편집]

군신을 거느리고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신년 하례후 군신의 조회를 받고 잔치하다[편집]

○庚申朔/上率群臣賀帝正, 受群臣朝, 仍賜宴。 群臣歡甚, 光陽府院君李茂方起舞, 判三司事鄭道傳稱觴而進言曰: “正朝, 一歲之元; 始祖, 一國之元。 元者, 善之長也, 國之始祖, 不可不愼。” 上曰: “兪。”

임금이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황제의 정월[帝正]을 하례하고 군신(群臣)의 조회를 받고는,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즐거워함이 한창일 때에, 광양 부원군(光陽府院君) 이무방(李茂方)이 일어나 춤을 추고,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은 잔을 받들고,

"정월 원조는 한 해의 으뜸이며, 시조(始祖)는 일국의 으뜸이니, 으뜸이란 것은 온갖 좋은 것 중에서도 제일이 되는 것이오라, 나라의 시조는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 진언(進言)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1月 3日[편집]

송사 판결문에 세자의 이름을 쓴 형조 장무 정랑 김온을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壬戌/囚刑曹掌務正郞金穩于巡軍獄。 以決訟啓本, 犯書世子諱也。

형조(刑曹)의 장무(掌務)인 정랑(正郞) 김온(金穩)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으니, 송사를 판결하는 계본에 세자의 이름[諱]을 써 놓았기 때문이었다.


1月 4日[편집]

도성 쌓을 터를 둘러보다[편집]

○癸亥/上觀都城基。

임금이 도성의 터[基]를 보았다.


1月 9日[편집]

민정 11만 8천 70여 명을 징발하여 도성을 쌓게 하다. 도성의 공사 구역 측량과 작업 구역 할당[편집]

○戊辰/徵慶尙ㆍ全羅ㆍ江原道及西北面安州以南、東北面咸州以南民丁十一萬八千七十有奇, 始築都城。 旣度城基, 分定字號, 始自白岳之東, 起天字, 終于白岳之西, 止弔字, 幷西山石嶺, 得地凡五萬九千五百尺。 每六百尺爲一字號, 凡九十七字。 每一字分六號, 每二字置監役、判事ㆍ副判事各一員、使副使判官十二員。 計各道州郡民戶多少, 自天字止日字東北面, 月字止寒字江原道, 來字止珍字慶尙道, 李字止龍字全羅道, 師字止弔字西北面。 督役者不分日夜, 上以寒甚, 禁夜役。

경상·전라·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安州) 이남과 동북면의 함주(咸州) 이남의 민정(民丁) 11만 8천 70여 명을 징발하여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 이미 성터를 측량하여 자호(字號)를 나누어 정하였는데, 백악(白岳)의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백악의 서쪽으로 조자(弔字)에서 그치게 하였다. 서쪽 산 돌재[石嶺]까지 합해서 땅의 척수가 무릇 5만 9천 5백 척(尺)이요, 6백 척마다 한 자호(字號)를 붙였으니, 모두 97자(字)이며, 한 글자마다 6호(號)로 나누고, 두자(字)마다 감역(監役)을 두고, 판사(判事)·부판사(副判事)는 각 1원(員)을 두고, 사(使)·부사(副使)·판관(判官)은 12원(員)을 두었다. 각도 주군(州郡)의 민호(民戶)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천자(天字)로부터 일자(日字)까지는 동북면이, 월자(月字)에서 한자(寒字)까지는 강원도가, 내자(來字)에서 진자(珍字)까지는 경상도가, 이자(李字)에서 용자(龍字)까지는 전라도가, 사자(師字)에서 조자(弔字)까지는 서북면이 맡게 하였다. 역사를 감독하는 사람이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시키니, 임금이 날씨가 심히 춥다고 하여 밤의 역사는 못하게 하였다.


도성의 기초를 닦았으므로 백악과 오방 신에게 제사하다[편집]

○以都城開基, 致祭白岳及五方之神。

도성(都城)의 기초를 열었으므로, 백악(白岳)과 5방(方)의 신(神)에게 치제(致祭)하였다.


1月 10日[편집]

좌·우도 인부 2백 명을 징발해 소격전을 건축하다[편집]

○己巳/發左右道丁(未)〔夫〕二百, 營昭格殿。

좌·우도의 인부[丁夫] 2백 명을 징발해서 소격전(昭格殿)을 경영하게 하였다.


1月 11日[편집]

공신들이 새 궁궐에서 임금에게 헌수하다[편집]

○庚午/功臣獻壽於新宮內殿。

공신들이 새 궁궐 내전(內殿)에서 임금에게 헌수(獻壽)하였다.


1月 14日[편집]

성 쌓는 역사를 둘러보다[편집]

○癸酉/上觀築城之役。

임금이 성 쌓는 역사를 보았다.


1月 16日[편집]

천추사 장자충이 경사에서 돌아오다[편집]

○乙亥/千秋使張子忠回自京師。

천추사 장자충(張子忠)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다.


1月 17日[편집]

유후사 거둥의 중지를 간관 이정견 등이 간했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丙子/上將幸留後司, 諫官李廷堅等, 伏閤諫之, 不允。 翌日, 廷堅等又上疏止之, 未蒙兪允。

임금이 장차 유후사에 거둥하려 하므로, 간관(諫官) 이정견(李廷堅) 등이 합문(閤門) 밖에서 엎드려 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정견 등이 또 정지하기를 상소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내전에서 소재 대반야 도량을 열다[편집]

○集僧徒二七於內殿, 設消災《大般若》道場。

중[僧徒] 27명을 내전에 모으고 소재 대반야 도량(消災大般若道場)을 베풀었다.


1月 19日[편집]

판사복시사에게 왕이 거둥한 뒤에 세자를 잘 감시하게 하다[편집]

○戊寅/召判司僕寺事呂稱曰: “予出行幸之後, 世子雖欲出遊, 爾毋進馬。”

판사복시사 여칭(呂稱)을 불러 분부하였다.

"내가 나가서 거둥한 뒤에, 세자가 비록 나가서 놀려고 하더라도 너는 말[馬]을 올리지 말라."


1月 20日[편집]

현비와 함께 유후사에 거둥하다[편집]

○己卯/上與顯妃幸留後司。

임금이 현비(顯妃)와 함께 유후사에 거둥하였다.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의 졸기[편집]

○參贊門下府事金立堅卒。 輟朝三日。 立堅, 福山人, 元朝巡訪萬戶於珍之子。 仕前朝, 拜將軍, 歷官至判密直, 入本朝拜參知門下, 遷參贊門下。 卒年五十七, 贈諡良平。 無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김입견(金立堅)이 졸(卒)하니, 3일간 철조(輟朝)하였다. 입견은 복산(福山) 사람이다. 원(元)나라 조정의 순방 만호(巡訪萬戶) 김어진(金於珍)의 아들로 고려조에 벼슬하여 장군이 되고, 벼슬이 판밀직(判密直)까지 올랐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참지문하(參知門下)에서 참찬문하로 올랐다. 향년은 57세이며, 양평(良平)이라 시호를 내려 주었다. 아들이 없었다.


형조 전서 김승주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以刑曹典書金承霔, 爲東北面靑海道安撫兼察理使。

형조 전서 김승주(金承霔)로 동북면 청해도 안무 겸 찰리사(東北面靑海道安撫兼察理使)를 삼았다.


원종 공신들에게 녹권을 하사하다[편집]

○賜原從功臣錄券。

원종 공신(原從功臣)들의 녹권(錄券)을 하사하였다.


내신을 성 쌓는 곳에 보내어 추위가 혹독한 날은 역사를 쉬라고 하다[편집]

○遣內臣於築城所, 諭以“近日冱寒, 恐有凍死者。 自今風雪日, 毋令赴役。”

내신(內臣)을 성 쌓는 곳에 보내어 유시하였다.

"근일의 혹독한 추위로 얼어서 죽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니, 이제부터는 바람 불고 눈내리는 날은 역사를 시키지 말게 하라."


1月 21日[편집]

달이 심성 앞 별을 침범하다[편집]

○庚辰/月犯心前星。

달이 심성(心星) 앞 별을 침범하였다.


1月 22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辛巳/木稼。

목가(木稼)하였다.


1月 23日[편집]

거가가 유후사에 이르다[편집]

○壬午/駕至留後司。

거가(車駕)가 유후사에 이르렀다.


1月 24日[편집]

경상도에 있는 전 지신사 이첨을 부르다[편집]

○癸未/召前知申事李詹于慶尙道。

전 지신사(知申事)였던 이첨(李詹)을 경상도에서 오라고 불렀다.


화공에게 부처를 그리게 하여 새 궁궐에 안치하고 불사를 일으키다[편집]

○上命工畫佛, 安于新宮, 作佛事。

임금이 화공에게 분부하여 부처를 그려서 새 궁궐에 안치하고 불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유밀과 쓰는 것을 금하다[편집]

○禁用油蜜果。

유밀과(油蜜果) 쓰는 것을 금하였다.


세자가 창기를 궁중에 출입시킨 데 대하여 함부림이 직간하다[편집]

○世子在書筵講畢, 諸講官皆出。 右輔德咸傅霖進曰: “有所聞不告, 不直也。” 世子曰: “宜盡言。” 傅霖曰: “娼妓出入宮中, 信乎?” 世子有慙色曰: “更不令近之。”

세자가 서연(書筵)에서 강(講)을 마치자, 여러 강관(講官)이 모두 나갔는데, 우보덕(右輔德) 함부림(咸傅霖)이 나와서 말하였다.

"들은 바가 있사온데 고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세자가 대답하였다.

"할 말은 다 하시오."

함부림이 말하였다.

"창기(娼妓)가 궁중에 출입한다는데 참말이옵니까?"

세자가 무안한 얼굴로,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겠소."

하였다.


五年 二月[편집]

2月 5日[편집]

큰 바람이 불고 진눈깨비가 내리다. 금천교 80여 호가 불에 타다[편집]

○癸巳/大風雨雪。 錦川橋八十餘戶火。

크게 바람이 불고 진눈깨비가 왔다. 금천교(錦川橋)의 80여 호가 불에 탔다.


2月 9日[편집]

신년 하례하는 표·전문에 희롱하는 문귀가 있다 하여 힐책하는 명나라 예부의 자문[편집]

○丁酉/賀正使打角夫金乙珍、押物高仁伯等齎禮部咨來。 其咨曰:

本部官欽奉聖旨: “前者爲朝鮮國王數生釁端, 以告岳鎭海瀆山川神祇, 轉達上帝。 今本國差使臣進洪武二十九年正朝表箋文內, 輕薄戲侮, 又生一釁, 是欲搆兵不靖。 若以言詞侮慢, 興師問罪, 尙未可也。 爲何? 昔者周將伐犬戎, 有諫者曰: ‘不可。’ 先王之制, 不動兵於遠者, 其理有五, 今所以不卽興師者, 爲此。 令李諱知釁端之所以, 將撰文者至, 使者方歸。” 欽此, 本部今將聖旨事意, 備云移咨。

하정사(賀正使) 타각부(打角夫) 김을진(金乙珍)과 압물(押物) 고인백(高仁伯) 등이 예부(禮部)의 자문을 가지고 왔다. 그 자문은 이러하였다.

"본부관(本部官)이 삼가 황제의 분부를 받드니, ‘전자에 조선 국왕이 여러 번 흔단(釁端)을 내었다고 해서, 악진(岳鎭)과 해독(海瀆) 등 산천 귀신에게 고하고 상제께 전달하게 했더니, 이번에도 본국에서 보낸 사신이 올린 홍무 29년 정조(正朝)의 표·전문(表箋文) 속에 경박하게 희롱하고 모멸하는 문귀가 있어 또 한번 죄를 범했으니, 이것으로 군병을 거느리고 부정(不靖)한 것을 다스릴 것이나, 만약에 언사가 모만(侮慢)하다고 해서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다면 옳지 못하니 무엇 때문일까? 예전에 주(周)나라에서 견융(犬戎)을 치려 하니 간하는 자가 있어서 말하기를, 「옳지 못합니다. 선왕이 정하신 법제에 원방에 동병을 하지 않는 이유가 다섯 가지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번에 즉시 군사를 일으키지 않음도 이 때문이니, 이(李)[1]로 하여금 흔단의 소이(所以)를 알게 하고, 글 지은 자가 도착하면 사신은 돌려보낼 것이다. 삼가 이것으로써 본부에서 지금 황제의 분부를 받들어 자문(咨文)으로 옮깁니다."


현비와 함께 관음굴에 거둥하여 재를 올리다[편집]

○上與顯妃幸觀音崛, 觀佛事, 翼日乃還。

임금이 현비와 함께 관음굴(觀音崛)에 거둥하여 부처에게 재를 올리고, 이튿날 돌아왔다.


2月 13日[편집]

왜선 1척을 잡은 풍해도 도관찰사 송문중에게 궁온과 비단을 하사하다[편집]

○辛丑/豐海道都觀察使宋文中捕倭船一隻獻馘, 遣大將軍金漸, 賜宮醞綺絹。

풍해도 도관찰사 송문중(宋文中)이 왜선 1척을 잡아서 수급(首級)을 바치니, 대장군 김점(金漸)을 보내어 궁온(宮醞)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김약항을 중추원 학사로, 곽해륭을 대장군으로 삼다[편집]

○以金若恒爲中樞院學士, 郭海隆爲大將軍。

김약항(金若恒)으로 중추원 학사를 삼고, 곽해륭(郭海隆)으로 대장군을 삼았다.


2月 15日[편집]

신년 하례의 표·전문 지은 김약항을 경사로 압송하며 명나라에 보낸 자문[편집]

○癸卯/遣郭海隆, 押送撰文者金若恒如京師。 移咨禮部曰:

洪武二十九年二月初九日, 小邦賀正使打角軍人高仁伯等回自京師, 準禮部咨, 卑職驚恐隕越, 措身無地。 竊詳小邦, 僻居海外, 聲音言語, 不類中華, 必憑通譯, 僅習文意, 所學粗淺, 措辭鄙陋, 且不能盡悉表箋體制, 以致言詞輕薄。 何敢故爲戲侮, 以生釁端! 天日照臨, 實非誣妄。 幸蒙聖慈, 不卽問罪, 寬宥之恩, 昊天罔極, 知感且愧, 糜粉難報。 今照進賀洪武二十九年正朝表文, 係成均大司成鄭擢修撰; 賀東宮箋文, 係判典校寺事金若恒修撰。 爲緣鄭擢見患風疾病證, 不能動履, 難以起遣。 除已欽依, 差通事郭海隆, 管送撰文人金若恒赴京, 伏取聖裁。

곽해륭을 보내어 표·전문을 지은 김약항을 북경으로 압송하게 하고, 예부에 자문을 보내었다.

"홍무 29년 2월 초9일에 소방(小邦)의 하정사 타각 군인(打角軍人) 고인백(高仁伯) 등이 북경에서 돌아왔는데, 예부의 자문을 받자오매, 비직(卑職)이 놀랍고 황공해서 몸둘 바가 없습니다. 그윽이 살피건대, 소방(小邦)은 해외의 한구석에 있어 성음(聲音)과 언어(言語)가 중화와 같지 않아, 반드시 통역에 의해서만 겨우 문자의 뜻을 익히옵는데, 배운 바가 거칠고 얕아서 문자의 사용이 비루하고 표·전문의 체제를 다 알지 못하여 언사(言詞)가 경박하게 되었사오니, 어찌 감히 고의로 우롱하거나 모멸해서 흔단(釁端)을 일으키겠습니까? 천일이 내려 비추옵고 참으로 무망(誣妄)이 아니옵니다. 다행히 인자하신 폐하께서 즉시 문죄를 하시지 않고 용서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하늘처럼 망극하며 감사하오나, 또한 부끄러워 몸이 가루가 되어도 갚기 어렵습니다. 이제 알아보오니, 홍무 29년의 정조 표문(表文)은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정탁(鄭擢)이 수찬하고, 동궁에게 올린 전문(箋文)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약항이 수찬했으나, 정탁은 현재 풍질병으로 기동을 할 수 없어서 일으켜 보내기가 어려우므로 분부에 의해서 통사 곽해륭(郭海隆)을 보내며, 전문을 수찬한 김약항을 북경에 보내오니, 폐하의 결재를 기다리겠나이다."


경상도 기민을 진휼하다[편집]

○命賑慶尙道飢。

경상도의 기민을 진휼하게 하였다.


농사를 위해 도읍에 역사하러 온 사람들을 돌려 보내다[편집]

○命都堂曰: “新都赴役之民, 待今月晦日, 盡放歸農。”

도당(都堂)에 분부하였다.

"새 도읍에 역사하러 온 사람은 이달 그믐날을 기다려 모두 돌려보내어 농사짓게 하라."


2月 18日[편집]

대가가 송경을 떠나다[편집]

○丙午/駕發松京。

대가(大駕)가 송경(松京)을 떠났다.


2月 19日[편집]

수미 들판에 불을 놓고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다[편집]

○丁未/縱火于壽美原, 觀獵。

수미(壽美) 들판에다 불을 놓고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2月 20日[편집]

동남방 하늘에 붉은 기운이 끼다[편집]

○戊申/東南赤氣。

동남방의 하늘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2月 22日[편집]

현비와 함께 유후사에서 돌아오다[편집]

○庚戌/上與顯妃至自留後司。

임금이 현비와 함께 유후사에서 돌아왔다.


통도사에서 송림사에 옮겨 두었던 부처의 두골 사리 등을 가져 오게 하다[편집]

○佛頭骨捨利、《菩提樹葉經》, 舊在通度寺, 因倭寇移置留後司松林寺, 遣人取來。

부처의 두골사리(頭骨舍利)와 《보리수엽경(菩提樹葉經)》이 그전에 통도사에 있던 것을 왜구로 인하여 유후사 송림사(松林寺)에 갖다가 놓았는데, 사람을 보내어 가져오게 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함부림을 의주에 보내어 임금의 뜻을 전하니 김약항이 충성을 약속하다[편집]

○遣成均大司成咸傅霖, 往諭金若恒于義州。 若曰: “非不惜汝, 重違朝命解送, 汝其善辭以對, 毋敢有失。” 若恒聞命曰: “敢不盡心!” 丙寅, 若恒將涉鴨江, 謂傅霖曰: “願王親君子遠小人, 修明政刑, 勵精圖治, 勿以臣之死生爲慮。 臣欲爲國亡身久矣, 幸以臣言達於王前。” 言訖而去。

성균관 대사성 함부림(咸傅霖)을 의주에 보내어 김약항을 교유하되,

"그대를 아끼지 않음은 아니나, 여러 번 명나라 명령을 어겼기에 해송(解送)하는 것이니, 그대는 좋은 말로 대답하고 실수가 없도록 하라."

하니, 약항이 명령을 듣고 하는 말이,

"어찌 마음껏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3월 초6일에 약항이 압록강을 건너려 할 때에 부림에게 부탁하기를,

"원컨대, 전하께서는 군자를 친하고 소인을 멀리 하여, 정치와 법제를 밝게 닦는 데에 힘쓰시고 다스림을 도모하사, 신이 죽고 사는 것에는 염려하시지 마옵소서. 신이 나라를 위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지 오래이오니, 신의 말씀을 전하께 주달해 주시오면 다행하겠습니다."

하고, 말을 마치자 떠나갔다.


임금이 연사흘 동안 도성 축조 공사를 돌아 보다[편집]

○上觀都城之役連三日。

임금이 도성의 역사하는 것을 연 3일 동안 계속 보았다.


2月 25日[편집]

문무를 겸비한 자를 수령의 후보자로 천거케 하다[편집]

○癸丑/命都評議使司曰: “近聞守令多不稱職。 其令各司, 薦嘉善以下六品以上文武兼才堪爲守令者。 所擧非人, 罪及擧主。”

도평의사사에 분부하였다.

"근래에 들으니 수령들의 대다수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니, 각사(各司)에 분부하여 가선(嘉善)이하 6품 이상 중에서, 문무를 겸재(兼才)한 수령이 될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라. 잘못 천거하면 죄가 천거한 자까지 미치리라."


2月 27日[편집]

성문 밖 세 곳에 수륙재를 베풀어 역부 중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하고 복호시키다[편집]

○乙卯/命設水陸齋於城門外三所。 薦役夫死亡者, 仍命復其家三年。

성문 밖 세 곳에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어 역부(役夫)로서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하고는, 명하여 그 집도 3년 동안 복호하도록 하였다.


2月 28日[편집]

성 쌓는 역부를 돌려보내다. 도성의 규모[편집]

○丙辰/放築城役夫。 城基高嶮處築石城, 高十五尺, 長一萬九千二百尺。 平山築土城, 下廣二十四尺, 上廣十八尺, 高二十五尺, 長四萬三百尺。 水口築雲梯, 兩傍築石城, 高十六尺, 長一千五十尺。 東大門以其地洿下, 排橛疊石, 而後城之, 故其功倍他。 安東、星山府人, 寔赴其役未畢, 慶尙道都觀察使沈孝生請曰: “東大門役人, 請留十餘日以畢, 無令再來。” 判漢城府事鄭熙啓啓曰: “民不可誣也。 近有命曰: ‘時當耕種, 築城人, 悉放歸農。’ 聞者莫不欣喜。 今獨留安東、星山人, 則其民心何? 況其未畢, 地勢然也, 非民之怠也。” 上然之, 命幷放之。

성 쌓는 역부를 돌려보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15척이나 되었으며, 길이가 1만 9천 2백 척이었다. 평탄한 산에는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아래의 넓이는 24척, 위의 넓이는 18척, 높이가 25척이며, 길이가 4만 3백 척이었다. 수구(水口)에는 높은 사다리[雲梯]를 쌓고 양쪽에다 석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6척, 길이가 1천 50척이요, 동대문(東大門)에는 지세가 낮으므로 밑에다가 돌을 포개어 올리고 그 뒤에 성을 쌓았으므로, 그 힘이 다른 곳보다 배나 되었다. 안동(安東)과 성산부(星山府) 사람들이 그 역사를 맡았으나 마치지 못했으므로, 경상도 도관찰사 심효생(沈孝生)이,

"동대문의 역사는 10여 일은 더 두고 마치게 하여 다시 올라오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청했으나, 판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가 아뢰기를,

"백성들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근간에 분부가 계시기를, ‘씨뿌릴 때가 되었으니, 모두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게 하라.’ 하시어, 듣는 자들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안동과 성산 사람만 남겨 두면 그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마치지 못한 것은 지세가 그런 까닭이며,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함께 돌려보내게 하였다.


五年 三月[편집]

3月 4日[편집]

축성을 감독한 경외관에게 잔치를 베풀다[편집]

○辛酉/命都評議使司, 宴築城監督京外官。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축성을 감독한 경외관(京外官)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술 취하여 행패를 부린 시위 갑사의 아들 안말건을 죄주다[편집]

○侍衛甲士安白之子末巾, 使酒於巿街, 刼奪人財物。 商議中樞院事黃居正見之, 令皀隷禁之, 末巾突進, 扶下歐辱之。 上命囚巡軍欲誅之, 巡軍照律以聞, 乃杖一百, 充水軍。

시위 갑사 안백(安白)의 아들 안말건(安末巾)이 거리에서 술이 취하여 사람들의 재물을 겁탈하매,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황거정(黃居正)이 이를 보고 조례(皂隷)로 하여금 금지하게 하였더니, 말건이 갑자기 달려들어 조례를 때리고 욕보였다. 임금이 순군(巡軍)에 가두고 베이고자 하였더니, 순군에서 조율(照律)하여 아뢰므로, 장(杖) 1백을 때리고 수군(水軍)에 충수하게 하였다.


중들을 모아 온천에 원집을 짓게 하고 쌀과 콩을 내리다[편집]

○命集僧徒, 營院于溫泉, 仍賜米豆三十碩。

중들을 모아 온천에 원집[院]을 짓게 하고는 쌀과 콩 30석을 하사하였다.


자은종의 도승통 종림과 전 판사 윤안정이 판교원이란 원집을 지어 도성 쌓는 인부들의 병을 치료하다[편집]

○慈恩都僧統宗林與前判事尹安鼎, 嘗作板橋院, 及築城人往還有疾病者, 請醫(胗)〔診〕脈, 劑藥救療, 且供飮食, 疾愈者, 給糧遣之。 右政丞金士衡聞之以聞, 上命賜米豆鹽醬。

자은 도승통(慈恩都僧統) 종림(宗林)이 전 판사(判事) 윤안정(尹安鼎)과 함께 판교원(板橋院)을 짓고, 성 쌓는 사람으로 왕래하다가 병이 있는 자에게 의원을 청하여 병을 진찰시키고 약을 지어 구료한데다, 또한 음식도 공급하여 병이 나으면 식량을 주어서 보냈다. 우정승 김사형이 이를 듣고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미두(米豆)와 염장(鹽醬)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효녀 도리장에게 면포를 내려 주다[편집]

○珍原郡民女都里莊聞其父赴城役得病, 卽痛哭曰: “我無兄弟, 當往省之, 庶得生還。” 乃假男服, 卽日發行。 每於道傍, 見人病臥者, 輒入視之, 及至板橋院, 乃見其父, 病幾殆。 盡心救療, 扶携以還, 鄕里稱其孝。 事聞, 賜都里莊緜布。

진원군(珍原郡) 백성의 딸 도리장(都里莊)이 그 부친이 성 쌓는 역사에 갔다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는 말이,

"나에게는 아무 형제도 없으니 내가 가서 보아야 혹시나 살아 돌아오실 것이다."

하고, 남복(男服)으로 바꿔 입고, 즉일로 길을 떠나 길가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꼭 들어가서 보았다. 판교원에 이르러 그 부친을 보게 되었는데, 병이 위태하므로 마음껏 구료해서 부축하고 돌아오니, 고향에서 효녀라고 칭찬했다.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리게 되어 도리장에게 면포(綿布)를 내려 주었다.


3月 7日[편집]

중추원의 8인에게 서북면의 수령을 겸하게 하다[편집]

○甲子/以中樞院八人, 兼西北面守令: 金輅於泥城, 林敬於江界, 趙崇於義州, 朴苞於黃州, 張湛於定州, 黃居正於肅州, 南實於成州, 吳蒙乙於延山府。

중추원(中樞院)의 8인으로 하여금 서북면의 수령을 겸하게 하였는데, 김로(金輅)는 이성(泥城)에, 임경(林敬)은 강계(江界)에, 조숭(趙崇)은 의주(義州)에, 박포(朴苞)는 황주(黃州)에, 장담(張湛)은 정주(定州)에, 황거정(黃居正)은 숙주(肅州)에, 남실(南實)은 성주(成州)[2]에, 오몽을(吳蒙乙)은 연산부(延山府)[3]에 보냈다.


3月 9日[편집]

술에 취해 임금을 비방하는 말을 한 전 안동 부사 이전을 하옥시키다[편집]

○丙寅/下前安東府使李專于獄。 專與判漢城府事鄭熙啓詣益安君第, 飮酒醉, 與熙啓相戲, 語涉謗訕, 熙啓以聞。 命憲司鞫之, 專以醉不省事爲對。

전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전(李專)을 하옥시켰다. 전(專)은 판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익안군(益安君)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희계와 더불어 서로 농을 하였는데, 말이 비방하고 비웃는 데에 이르렀다. 희계가 임금에게 아뢰니, 헌사에 분부하여 국문하게 하였으나, 전은 술이 취해서 무어라 한지 전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3月 10日[편집]

간관과 대간의 중지 상소에도 불구하고 병 치료 위해 충청도 온천으로 행차하다[편집]

○丁卯/上幸忠淸道溫泉。 初諫官李廷堅等請止之, 不允。 臺諫又合辭請止之, 上曰: “欲往溫泉, 爲療疾也。 臺諫力止之, 何義耶?” 遂行。

임금이 충청도 온천으로 행차하였다. 처음에 간관 이정견(李廷堅) 등이 중지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대간에서 또 연명(連名)으로 상소하여 정지(停止)하기를 청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온천에 가고자 함은 병을 치료하기 위함인데, 대간에서 애써서 말리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고, 드디어 거둥하였다.


3月 13日[편집]

홍경천에서 사냥하다. 윤침의 가노 2인이 의성고의 소속으로 해줄 것을 하소하다[편집]

○庚午/上畋于弘慶北郊, 尹忱家奴二人欲屬義成庫, 妄訴駕前, 命杖之。

임금이 홍경천(弘慶川)[4] 북교(北郊)에서 사냥을 하는데, 윤침(尹忱)의 집종[家奴] 2인이 의성고(義成庫) 종으로 소속되려고 임금의 행차 앞에 나아와 하소연하매, 명하여 곤장을 쳐서 보내게 하였다.


3月 16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癸酉/霧。

안개가 끼었다.


조준과 정도전을 과거 고시관으로 삼다. 정도전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以左政丞趙浚、判三司事鄭道傳, 爲科擧考試官, 都承旨閔汝翼、大司成咸傅霖爲成均試員。 鄭道傳請辭考試官, 不允, 固辭又不允。 閔汝翼亦辭試員, 不允。

좌정승 조준(趙浚)과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으로 과거 고시관(科擧考試官)을 삼고, 도승지 민여익(閔汝翼)과 대사성 함부림(咸傅霖)으로 성균 시원(成均試員)을 삼았다. 정도전이 고시관을 사면시키기를 청하였다. 윤허하지 않으니, 굳이 사양하므로 또 윤허하지 아니하니, 민여익도 또한 시원(試員)을 사양하려 하매 윤허하지 않았다.


온천에 도착하다[편집]

○上至溫泉。

임금이 온천에 도착하였다.


전라도인이 성 쌓는 역사에서 많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미두를 하사하다[편집]

○上聞全羅道人赴役病死者尤多, 命賜米豆其家。

임금이 전라도 사람들이 성 쌓는 역사에 왔다가 병들어 죽은 자가 더욱 많다는 것을 듣고, 그 집에 미두(米豆)를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3月 19日[편집]

맏딸을 군자감 승 이백경에게 출가시키다[편집]

○丙子/上以長女降于軍資監丞李伯卿。

임금이 맏딸을 군자감 승(軍資監丞) 이백경(李伯卿)에게 출가시켰다.


3月 29日[편집]

새로 나온 나물과 귤, 사냥해서 잡은 것들을 종묘에 천신하다[편집]

○丙戌/薦新菜于宗廟, 又薦柑子。 凡畋獵所獲, 亦必先薦于廟。

새로 나온 채소를 종묘에 천신하고, 또 감자(柑子)와 그리고 사냥해서 잡은 것들도 모두 종묘에 먼저 천신하게 하였다.


남은에게 면포 2필을 내려 주다[편집]

○南誾以其子, 見賜緜布二匹。

남은(南誾)이 그 아들을 데리고 와 뵈므로 면포 2필을 내려 주었다.


인신과 고명을 줄 수 없다며 표전의 작성자를 보내라고 한 명나라 자문[편집]

○計稟使鄭摠一行人, 來自京師, 傳禮部咨, 曰:

本部尙書門克新等官奏: “朝鮮國王遣知門下府事鄭摠, 詣闕請印信誥命。” 奉聖旨: “朕中國上古帝王, 列聖相繼, 撫馭於民, 條章昭著, 具載方冊。 其分茅胙土之邦, 若令一出, 欽遵守之, 約束之法, 至不敢有違, 此華夏化內封疆之制也。 其四隣夷狄, 風殊俗異, 各各酋長, 皆非分茅胙土者也。 古稱化外, 未嘗令以導之, 法以懲之。 先諸聖人務以靜爲, 尙以不貪而樂民, 所以爲聖人也。 德布天下, 爵有九等之分, 安內而撫外, 垂衣裳之治。 爵九等云何? 侯、甸、男、采、衛、蠻、夷、鎭、(蕃)〔藩〕, 賓、夷、荒、侯、綏、要、荒。 是等度遠近分輕重, 此化內之所爲也。 其王終王, 此睦四夷之德, 先聖人之心, 更何以加哉! 今朝鮮在當王之國, 性相好而來王, 頑嚚狡詐, 聽其自然, 其來文關請印信誥命, 未可輕與。 朝鮮限山隔海, 天造地設, 東夷之邦也, 風殊俗異。 朕若賜與印信誥命, 令彼臣妾, 鬼神監見, 無乃貪之甚歟? 較之上古聖人, 約束一節, 決不可爲。 朕數年前曾勑彼, 儀從本俗, 法守舊章, 令聽其自爲聲敎; 喜則來王, 怒則絶行, 亦聽其自然。 爾禮部移文李某, 使知朕意。”

又咨曰:

本部尙書門克新等官欽奉聖旨: “自古及今, 以小事大, 至敬之禮, 莫貴乎修辭。 是以古先聖王之制, 列國諸侯九夷八蠻, 有不貢不王者, 則修辭修文修意。 以此觀之, 上之取下, 下之事上, 皆在乎修辭。 昔者, 列國紛爭不已, 爲何? 皆爲修意修辭修文, 俱不中理, 所以紛爭不已。 惟鄭有賢相子産, 善於辭命, 不受攻伐。 凡往來交際文辭之間, 裨諶草創, 世叔討論, 子羽修飾, 子産潤色, 詳審精密。 以此應對諸侯, 鮮有敗事。 今朝鮮每遇時節, 遣人進賀表箋, 似乎有禮, 然文辭之間, 輕薄肆侮, 近日奏請印信誥命狀內, 引用紂事, 尤爲無禮。 或國王本意, 或臣下戲侮, 況無印信所拘, 或齎奉使臣中途改換, 皆不可知。 以此來使未可放回。 若將撰寫校正人員, 盡數發來, 使者方回。”

계품사(計稟使) 정총(鄭摠) 일행들이 북경에서 왔다.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전하기를,

"본부 상서 문극신(門克新) 등 관원이 상주(上奏)하기를, ‘조선 국왕이 지문하부사 정총(鄭摠)을 보내어 궐내에 나아가 인신(印信)과 고명(誥命)을 청합니다.’ 하였더니, 성지(聖旨)를 받드오니, ‘짐(朕)의 중국의 예전 제왕이 여러 대를 이어오면서 백성들을 애무한 사실은 문적에 밝게 드러나 있고 책에 갖추 실려 있다. 그 군왕으로 봉한 나라는 만약에 영이 한 번 나오면 삼가 따라서 지키며, 약속한 법은 감히 어김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중화(中華)의 안으로 귀화하게 하며 나라를 봉한 제도이다. 그 사린(四隣)의 이적(夷狄)들의 풍속이 각각 달라 추장마다 모두 군왕으로 봉함을 받는 것이 아니며, 옛부터 화외지맹(化外之氓)이라 해서 일찍이 명령으로 지도하고 법제로써 징계하지 않았다. 선대의 제왕들은 안정(安靜)을 힘써 언제나 탐욕하지 않고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기 때문에 성인이 된 바이다. 천하에 덕을 펴고 벼슬을 9등으로 나누었으니, 안으로 편안하게 하고 외방을 안무해서, 의상을 드리우기만 해도 다스려지는 정치를 행하였다. 9등의 벼슬이란 무엇인가 하면, 〈동북방향으로는〉 후(侯)·전(甸)·남(男)·채(采)·위(衛)·만(蠻)·이(夷)·진(鎭)·번(蕃)이요, 〈서남방향으로는〉 빈(賓)·이(夷)·황(荒) 〈서북방향으로는〉 후(侯)·유(綏)·요(要)·황(荒) 등의 복(服)을 이름이니, 이들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고 가볍고 소중한 것을 나누어 안으로 귀화하게 하는 바이며, 그 왕을 끝내 왕으로 하는 것은 사이(四夷)를 화목하게 하는 덕이고 옛 성인의 마음이니, 다시 무엇을 더하겠는가? 이제 조선이 왕국(王國)이 되었고, 천성이 서로 좋아서 오게 했는데, 왕이 간악하고 간사하며 교활하고 사특하며, 그 마음대로 들어서 그 오는 관문(關文)에 인신과 고명을 청한 것은, 경솔하게 줄 수 없다. 조선은 산에 가리우고 바다로 막혀서 하늘이 만들고 땅이 베푼 동이(東夷)의 나라이다. 풍속이 달라서 짐이 만약에 인신과 고명을 주게 되면 저들로 하여금 신첩(臣妾)과 귀신(鬼神)으로 보게 할 것인즉, 너무나 탐욕이 심하지 않겠는가? 상고의 성인에게 비추어 보더라도 약속 일절은 결코 할 수 없다. 짐이 수년 전에 일찍이 그들에게 계칙해서 제도는 본속을 따르고, 법은 옛 제도를 지키며, 명령을 마음대로 하게 하되, 소문과 교화가 좋거든 오게 하고 왕이 노하거든 가는 것을 끊게 하였으니, 역시 하는 대로 듣도록 하라. 너의 예부는 이모(李某)에게 이문(移文)하여 짐의 뜻을 알게 하라.’ 하였습니다."

하고, 또 자문(咨文)에,

"본부 상서 문극신(門克新)은 삼가 성지(聖旨)를 받드오니, 이르기를, ‘예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소국(小國)이 대국을 섬기는 데 있어 지극히 공경하는 예(禮)의 가장 귀한 것은 사령(辭令)을 닦는 것이었다. 이러므로 예전의 성왕(聖王)들의 제도가 열국의 제후와 구이(九夷)와 팔만(八蠻)에게 조공하게 하고, 왕도 사령을 닦고 문자를 닦고 의사를 닦게 한 것이니, 이로써 보게 되면 위에서 아래를 취하는 것과 아래에서 위를 섬기는 것이 다 사령을 닦는 데에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여러 나라가 분쟁하기를 마지 않는 것은 어찌된 일이었던가? 모두 의사를 닦고 사령을 닦고 문자를 닦는 것이 함께 이치에 당하지 않아서 분쟁이 그치지 않은 것이었다. 오직 정나라의 어진 재상 자산(子産)이 있어 사명(辭命)을 잘해서 공격과 정벌을 받지 않았으며, 무릇 왕래하고 교제할 때의 문사(文辭)는 비침(裨諶)이 초창(草創)을 하고, 세숙(世叔)이 토론하고, 자우(子羽)가 수식(修飾)하고, 자산(子産)이 윤문(潤文)을 해서 자세히 살피고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제후들과 교제하는 일에 실패한 일이 적었다. 이제 조선이 명절을 당할 때마다 사람을 보내어 표전(表箋)을 올려 하례하니, 예의가 있는 듯하나, 문사(文辭)에 있어 경박하고 멋대로 능멸히 하여 근일에 인신(印信)과 고명(誥命)을 주청한 장계 안에 주(紂)의 일을 인용했으니 더욱 무례하였다. 혹 국왕의 본의인지, 신하들의 희롱함인지, 아니면 인신(印信)이 없는데도 거리낌 없었으니, 혹 사신이 받들어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 바꿔치기 한 것인지도 모두 알 수 없으므로 온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겠다. 만약에 글을 만들고 교정한 인원을 전원 다 내보낸다면 사신들을 돌려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일본 좌경 권대부 다다량 의홍이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구하다[편집]

○是月, 日本國左京權大夫多多良義弘遣通竺、永琳兩禪和, 來達禁賊及擄掠人還送事, 仍獻禮物, 兼求《大藏經》。

이달에 일본국 좌경 권대부(左京權大夫) 다다량의홍(多多良義弘)이 보낸 통축(通笁)·영림(永琳) 두 선승(禪僧)이 와서 해적을 금지하고 노획한 사람들을 돌려보낼 것을 주달하고, 예물을 바치고 겸해서 《대장경》을 요구하였다.


五年 夏四月[편집]

4月 1日[편집]

거가가 온천을 떠나 영주에 머무르다[편집]

○戊子朔/駕發溫泉, 次寧州, 分遣巡軍官, 禁放馬害麥。

거가(車駕)가 온천을 출발하여 영주(寧州)[5]에 머물렀다. 순군관(巡軍官)을 나누어 보내서 말을 놓아 보리를 해치는 것을 엄금하게 하였다.


4月 6日[편집]

광주를 지나다가 수릉을 정할 만한 곳을 둘러 보다[편집]

○癸巳/上過廣州, 相壽陵之地。

임금이 광주(廣州)를 지나다가 수릉(壽陵)의 땅을 보았다.


4月 7日[편집]

온천에서 돌아오다[편집]

○甲午/上至自溫泉。

임금이 온천에서 돌아왔다.


4月 8日[편집]

표문 가져온 관원의 가족들을 중국에 보내라는 명나라의 자문[편집]

○乙未/賀正使柳玽一行朴光春回自京師, 齎禮部咨以來。 其咨曰:

本部尙書門克新等官欽奉聖旨: “朝鮮國王好生疑心, 重生釁端又多。 前者進正朝表箋內, 不停當的字樣多有。 因此, 將進表官員留在京城。 恁禮部與文書, 敎李某將各妻小分房幾口, 來就京城住。 我這里將各官諸衙門裏用著。 李某兩頭來往討消息, 那的不便當。 若不將老小來, 這各官都送金齒去。”

하정사 유구(柳玽)의 일행 박광춘(朴光春)이 경사(京師)에서 예부(禮部)의 자문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자문에 이러하였다.

"본부 상서(本部尙書) 문극신(門克新) 등 관리가 삼가 성지(聖旨)를 받드오니, ‘조선 국왕은 의심을 잘 내고 거듭 흔단(釁端)을 내는데다, 또한 전자에 정조(正朝)를 축하하는 표·전문 안에 옳지 못한 문자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표문을 가져온 관원을 서울에 억류하였으니, 너희 예부(禮部)는 문서를 이모(李某)에게 주어 각 〈관원의〉 아내와 시녀 몇을 데리고 서울에 와서 우리의 마을 여러 아문 속에 거처하게 하라. 이모(李某)는 성의가 없이 반복으로 내왕하여 우리의 소식을 탐지하려 하니 부당하다. 만약에 가족들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 여기에 온 각 관원은 모두 금치(金齒)에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4月 10日[편집]

오랜 가뭄때문에 금주령을 내리다[편집]

○丁酉/以久旱禁酒。

오래 날씨가 가물어 금주(禁酒)하게 하였다.


4月 13日[편집]

가뭄이 길어지니 간관이 토목 역사를 중지할 것 등에 대해 상언하다[편집]

○庚子/諫官以久旱, 上言遇災憂懼之事。 其一, 停土木之役, 其二, 恤城役病死人復其家, 其三, 察中外滯獄, 以懲當該官吏。

간관(諫官)이 오래 가물었다고 하여 재해를 만나 걱정할 일을 상언(上言)하였다.

"1. 토목(土木)의 역사를 정지할 것이옵고,

2. 성 쌓는 역사에서 병들어 죽은 사람은 그 집을 복호할 것이며,

3. 중외(中外)의 지체된 옥사를 살펴 해당 관리들을 징계하소서."


경사에 구류된 사신과 일행의 집에 쌀과 콩을 내리다[편집]

○賜赴京拘留使臣家米豆有差: 柳玽母八十斛, 鄭臣義家五十斛, 鄭摠母六十斛, 金若恒母五十斛, 又賜一行人各家有差。

경사(京師)에 나아가 구류된 사신의 집에 쌀과 콩을 차등 있게 하사했는데, 유구(柳玽)의 모친에게는 80곡(斛)을, 정신의(鄭臣義) 집에는 50곡을, 정총(鄭摠)의 모친에게는 60곡을, 김약항(金若恒)의 모친에게는 50곡을, 그리고 일행들의 집에도 각각 차등 있게 하였다.


4月 14日[편집]

중외의 이죄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다[편집]

○辛丑/宥中外二罪以下囚。

중외(中外)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4月 17日[편집]

유후사의 박연, 임진현의 덕진, 개성현의 대정 등지에 내시를 보내어 비를 빌게 하다[편집]

○甲辰/分遣內侍於留後司。 朴淵、臨津縣德津、開城縣大井、海豐郡南津、延安府大池設祭, 於抱州海龍王寺、江陰天神寺, 設齋以祈雨。

내시(內侍)를 유후사의 박연(朴淵)과, 임진현(臨津縣)의 덕진(德津)과, 개성현(開城縣)의 대정(大井)과 해풍군(海豐郡)의 남진(南津)과, 연안부(延安府)의 대지(大池)에 나누어 보내어 제사지내고, 포주(抱州)[6] 해룡왕사(海龍王寺)와 강음(江陰)[7] 천신사(天神寺)에도 재를 올려 비를 빌게 하였다.


환자 최 첩목아가 부모 뵈러 경사로 돌아왔다.[편집]

○宦者崔帖木兒, 還赴京師。 初帖木兒入侍帝所, 帝命歸覲。 後, 帝問帖木兒於我朝使臣, 故遣之。

환자(宦者) 최 첩목아(崔帖木兒)가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처음 첩목아가 황제 있는 곳에 입시했더니, 황제가 고향에 가서 부모를 보고 오라 했다. 뒤에 황제가 우리 나라 사신에게 첩목아에 관해 물었으므로, 그를 보냈다.


가뭄 때문에 저자를 옮기다[편집]

○以旱徙市。

가뭄으로 인하여 사시(徙市)하였다.


4月 19日[편집]

한성부에 명하여 5부의 총 52방에 방명표를 세우게 하다[편집]

○丙午/令漢城府建五部坊名標: 東部十二坊曰燕喜、崇敎、泉達、彰善、建德、德成、瑞雲、蓮花、崇信、仁昌、觀德、興盛, 南部十一坊曰廣通、好賢、明禮、太平、熏陶、誠明、樂善、貞心、明哲、誠身、禮成, 西部十一坊曰永堅、仁達、積善、餘慶、仁智、皇華、聚賢、養生、神化、盤石、盤松, 北部十坊曰廣化、陽德、嘉會、安國、觀光、鎭定、順化、明通、俊秀、義通, 中部八坊曰貞善、慶幸、寬仁、壽進、澄淸、長通、瑞麟、堅平。

한성부에 명하여 5부(五部)의 방명표(坊名標)를 세우도록 하였다. 동부가 12방(坊)이니, 연희(燕喜) · 숭교(崇敎) · 천달(泉達) · 창선(彰善) · 건덕(建德) · 덕성(德成) · 서운(瑞雲) · 연화(蓮花) · 숭신(崇信) · 인창(仁昌) · 관덕(觀德) · 흥성(興盛) 이요, 남부가 11방이니, 광통(廣通) · 호현(好賢) · 명례(明禮) · 태평(太平) · 훈도(熏陶) · 성명(誠明) · 낙선(樂善) · 정심(貞心) · 명철(明哲) · 성신(誠身) · 예성(禮成) 이며, 서부가 11방이니, 영견(永堅) · 인달(仁達) · 적선(積善) · 여경(餘慶) · 인지(仁智) · 황화(皇華) · 취현(聚賢) · 양생(養生) · 신화(神化) · 반석(盤石) · 반송(盤松) 이고, 북부가 10방이니, 광화(廣化) · 양덕(陽德) · 가회(嘉會) · 안국(安國) · 관광(觀光) · 진정(鎭定) · 순화(順化) · 명통(明通) · 준수(俊秀) · 의통(義通) 이며, 중부가 8방이니, 정선(貞善) · 경행(慶幸) · 관인(寬仁) · 수진(壽進) · 징청(澄淸) · 장통(長通) · 서린(瑞麟) · 견평(堅平) 이다.


세자가 밤에 중추 유용생의 집에 갔다 돌아오다[편집]

○世子夜至前中樞柳龍生第而還。

세자가 밤에 중추(中樞) 유용생(柳龍生)의 집에 갔다가 돌아왔다.


4月 23日[편집]

감찰을 경기좌·우도에 보내어 말이 곡식 해치는 것을 금하다[편집]

○庚戌/分遣監察於京畿左右道, 禁私放馬害穀者。

감찰을 경기좌·우도에 분견(分遣)하여 사사로이 말을 놓아서 곡식을 해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4月 26日[편집]

전 판전농시사 유양이 말 5백 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편집]

○癸丑/以前判典農寺事柳楊, 押馬五百匹, 至遼東交割。

전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유양(柳楊)으로 말 5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이르러 교할(交割)[8]하게 하였다.


4月 27日[편집]

이달충이 살았을 적 부탁이 있다 하여 그 아들 이전이 참형을 면하게 하다[편집]

○甲寅/憲司上疏請罪李專如律。 殿下啓曰: “臣聞上潛邸時, 專父達衷囑其子孫。 今專縱有罪, 恐未可誅也。” 上乃悟, 傳旨刑曹曰: “專本狂妄, 不足數也。 且其父達衷, 乃嘗以信義友我者也。 專若受誅, 達衷之靈, 其謂我何? 其原之。” 遂命徒海南縣, 籍其家。 專死於徒。

헌사가 상소하여 이전(李專)을 율(律)대로 죄주기를 청하니, 전하(殿下)009) 께서 아뢰기를,

"신은 듣자오니 전하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전(專)의 아비 이달충(李達衷)이 그 자손을 부탁했다고 하니, 이전이 비록 죄가 있더라도 베이는 것은 옳지 못한가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그제야 깨닫고, 형조에 전지(傳旨)하기를,

"전은 본래 광망(狂妄)하여 말 할 필요도 없고, 또 그 아비 달충은 일찍이 신의로 나와 벗하던 사람이니, 전이 만일에 참형을 당하게 되면 달충의 영혼이 나를 무엇이라 하겠는가? 그의 죄를 용서하라."

하고, 명하여 도죄(徒罪)로 해남현(海南縣)에 보내고, 그 집은 적몰(籍沒)하였는데, 전(專)은 도형(徒刑)으로 복역 중 죽었다.


4月 29日[편집]

중 8백 명을 근정전에 모으고 《금강경》을 외게 하다[편집]

○丙辰/集僧八百于勤政殿, 講《金經》。

중 8백 명을 근정전에 모으고 《금강경(金剛經)》을 외우게 하였다.


五年 五月[편집]

5月 1日[편집]

고시관이 조유인 등 33인을 뽑아 올렸는데 김익정을 장원으로 삼다[편집]

○丁巳朔/上坐勤政殿, 試考試官趙浚、鄭道傳所取曺由仁等三十三人, 以金益精爲第一。

임금이 근정전에 앉아서 고시관 조준과 정도전이 뽑은 조유인(曹由仁) 등 33인을 시험보이고, 김익정(金益精)을 제1등으로 삼았다.


이백경을 상당군으로 봉하다[편집]

○封李伯卿爲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을 상당군(上黨君)으로 봉하였다.


5月 4日[편집]

비가 내리다[편집]

○庚申/雨。

비가 내렸다.


간관이 숙위를 엄하게 하고 순찰을 강화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諫官上請: "嚴宿衛謹巡綽, 如有廢闕, 毋從寬典, 按律科罪。" 上從之。

간관이,

"숙위(宿衛)를 엄하게 하고, 순찰을 삼가도록 하여 만일에 폐하거나 궐하는 일이 있으면 관전(寬典)을 좇지 말고 율(律)을 살펴서 죄를 매기소서."

하고,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月 6日[편집]

예조에서 생원시 과목과 절차에 대해 건의하다[편집]

○壬戌/禮曹申請: “生員試, 自今試疑義各一道, 取一百人, 依前朝進士例, 簾前放榜, 三日成行, 以勸後生向學之心。 其貢生, 令成均正錄所講四書業經, 方許記名赴試。” 上許之。

예조에서,

"생원시(生員試)를 이제부터는 의(疑)·의(義) 각각 한 가지씩 질문하여 1백 인을 뽑되, 고려조의 진사시(進士試)의 예에 의하여 염전(簾前)[9]에서 방방(放榜)하고, 3일 만에 행례를 이루어서 후생들의 향학심(向學心)을 권장하소서. 그 공생(貢生)[10]은 성균 정록소(成均正錄所)로 하여금 《사서(四書)》와 업경(業經)을 강독하게 하고 이름을 기록해서 부시(赴試)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유원정 집 여종을 갑사 이부개가 희롱하다 압사시킨 데 대한 판결이 공정치 못했다 하여 형조 전서를 가두다[편집]

○下刑曹典書文繼宗、議郞金九德等于巡軍獄。 瑞城君柳爰廷家婢, 道逢甲士等輸木, 有李夫介者與婢戲, 婢爲車壓而死。 刑曹囚李夫介, 徵燒埋錢及婢價, 欲杖之。 上聞之曰: “法官議罪不公。” 乃有是命, 尋出之。

형조 전서 문계종(文繼宗)과 의랑(議郞) 김구덕(金九德)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하옥시켰다. 서성군(瑞城君) 유원정(柳爰廷)의 집종[家婢]이 길에서 나무를 운반하는 갑사(甲士)들을 만났는데, 이부개(李夫介)란 자가 종[婢]과 희롱하다가 종이 수레에 눌려 죽었다. 형조에서 이부개를 가두고 소매전(燒埋錢)과 종의 몸값[婢價]까지 징수하고는 매를 치려 하니, 임금이 이를 듣고,

"법관이 죄를 논의하는데 공정하지 못했다."

하여, 이런 명령이 있었으므로, 얼마 아니 되어 내보냈다.


5月 7日[편집]

사헌부에서 농사철에 관리들을 내려 보내 민정을 시찰케 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건의하다[편집]

○癸亥/遣三司左僕射南在于豐海、江原東西北面, 中樞院副使金希善于忠淸、全羅、慶尙道, 問民疾苦。 憲司上言: “時方農月, 不可分遣使臣。 問民疾苦, 雖出於愛民之誠, 待秋發遣, 深爲便益。” 不允。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남재(南在)를 풍해(豐海)·강원(江原)·동북(東北)·서북면(西北面)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김희선(金希善)을 충청·전라·경상도에 보내어 백성의 병들고 고생하는 것을 위문하게 하니, 헌사에서 상언(上言)하였다.

"때가 바야흐로 농사철이온데, 사신을 나누어 보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백성들의 병들고 고생하는 것을 위문함은 비록 백성을 사랑하는 성심에서 나온 일이오나, 가을을 기다려서 내보내는 것이 심히 편익(便益)할 것입니다."

그러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한산백 이색의 졸기. 여주 신륵사에서 죽다[편집]

○韓山伯李穡卒于驪興神勒寺。 訃聞, 上輟朝, 致祭賜賻, 諡文靖。 穡字穎叔, 號牧隱, 韓州人, 征東行中書省郞中都僉議贊成事諡文孝公穀之子。 自幼聰慧異常, 年十四, 中成均試。 至正戊子, 穀在元朝, 爲中瑞司典簿, 穡以朝官子, 補國子監生員。 辛卯正月, 穀還本國卒, 奔喪終制。 癸巳, 恭愍王設初科, 知貢擧李齊賢等, 擢穡爲魁, 秋, 中征東省解元。 甲午, 中會試, 對策殿庭, 中第二甲第二名。 讀券官參知政事杜秉彛、翰林承旨歐陽玄諸公, 大加稱賞, 勑受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 東歸須次, 王就加典理正郞、藝文應敎、兼春秋編修。 乙未, 陞內史舍人, 夏, 如京仕翰林院。 丙申, 以母老棄官東歸, 秋, 拜吏部侍郞, 再遷至右副承宣。 由是昵居喉舌凡七年。 辛丑, 紅賊陷京城, 王南行。 穡從王行, 弼成克復, 策勛一等, 賜以鐵券。 癸卯, 宣授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 拜本國密直提學, 賜端誠保理功臣之號。 丁未, 宣授征東省郞中。 以本國判開城兼成均大司成, 擧一時通經術者鄭夢周、李崇仁等六七人, 皆兼學官, 分經授業, 常與論難, 各盡其極。 穡辨析折衷, 竟夕忘倦。 於是, 記誦之習, 功利之說稍息, 而性理之學復興。 己酉, 同知貢擧, 與知貢擧李仁復請王, 始用中朝科擧之法。 穡凡主貢擧四次, 人服其公。 王構魯國影殿, 窮極侈麗, 侍中柳濯, 上書請止, 王怒, 欲誅濯, 命穡製諭衆文。 穡請罪名, 王數濯四罪。 穡對曰: “此非可殺之罪, 願更思之。” 王益怒, 促愈亟, 穡曰: “臣寧得罪, 安敢爲文, 以成其罪!” 王遂感悟, 濯得全。 辛亥, 丁母憂。 壬子, 王命起復政堂文學, 以疾辭。 甲寅, 王薨, 穡方疾篤, 杜門七八年。 壬戌, 拜判三司事。 戊辰, 崔瑩請攻定遼衛, 禑命耆老兩府會議可否, 皆希旨, 否者少而可者多。 穡亦附衆議, 退謂子弟曰: “今日我爲汝輩從逆義之論。” 及上回軍, 執退瑩等, 起穡爲門下侍中。 自恭愍之薨, 天子每徵執政大臣入朝, 皆畏懼不敢行, 及穡爲相, 欲廢王昌親朝, 又欲王官監國, 自請入朝, 遂以穡爲賀正使。 太祖稱之曰: “慷慨哉是翁!” 穡以太祖威德日盛, 中外歸心, 恐其未還乃有變, 請一子從行, 太祖以殿下爲書狀官。 天子素聞穡名, 引見從容語曰: “汝仕元朝爲翰林, 應解漢語。” 穡遽以漢語對曰: “親朝。” 天子未曉其志, 問曰: “說甚麿?” 禮部官傳奏之。 穡久不入朝, 語頗艱澁, 天子笑曰: “汝之漢語, 正似納哈出。” 穡還語人曰: “今皇帝, 心無所主也。 我意帝必問此事, 帝不之問, 而所問皆非我意也。” 時論譏之曰: “大聖人度量, 俗儒可得而議乎?” 冬, 恭讓王立。 穡以時論不與, 見貶至于五次, 及太祖卽位, 以故舊原之。 每進見, 退語子弟曰: “眞受命聖明之主也。” 又嘗請止營繕, 及退, 人有問之者, “創業之主, 廟社宮室官府城郭, 不可緩也。” 乙亥秋, 請遊關東, 入五臺山, 因欲留居, 上遣使召。 至, 封韓山伯。 穡進見曰: “開國之日, 何不使我知之? 我若知之, 當行揖讓之禮, 更有光矣。 豈(若)〔可〕使馬賈爲首乎?” 指裵克廉也。 南誾曰: “何得使汝老腐儒知之!” 上叱誾使不復言, 待以故舊之禮, 送至中門。 後有議之者, 南在召穡子種善謂曰: “尊公發狂言, 有議之者, 不去必受禍。” 丙子夏五月, 請避暑神勒寺, 將行疾作, 旣至疾革。 有僧進欲有言, 穡擧手揮之曰: “死生之理, 吾無疑矣。” 言訖而卒。 穡天資明睿, 學問精博, 秉心寬恕, 處事詳明。 爲宰相, 務遵成憲, 不喜紛更, 勉進後學, 孜孜不倦。 爲文章, 操筆卽書, 辭意精到。 有集五十五卷行于世。 爲家不問有無費, 平生無疾言遽色, 樽俎之間, 油油然處之不及亂。 襟懷灑落, 言動從容, 久居寵利, 而不以爲喜, 再遭屯亂, 而不以爲慼。 晩年奉旨, 銘指空、懶翁二浮圖, 其徒因來往于門, 頗有佞佛之譏。 穡聞之曰: “彼謂追福君親, 予不敢拒也。” 穡三男, 長種德, 次種學, 皆官至密直, 先歿。 次種善, 今爲兵曹參議。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이 여흥(驪興)[11]에 있는 신륵사(神勒寺)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조회를 정지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부의를 내려 주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색(穡)의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한주(韓州)[12] 사람 정동행중서성 낭중 도첨의찬성사(征東行中書省郞中都僉議贊成事)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과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나이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지정(至正) 무자년(1348)에 이곡(李穀)이 원조(元朝)[13]의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는데, 색은 조관의 아들이라 하여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이 되었다. 신묘년(1351) 정월에 곡(穀)이 본국에 돌아와 죽으니,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하여 상제(喪制)를 마치고, 계사년 공민왕이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할 때는 지공거(知貢擧) 이제현(李齊賢) 등이 색을 장원으로 뽑았다. 가을에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 장원(壯元)하였고, 갑오년(1354)에 회시(會試)에 합격하였으며, 전정(殿庭)에서의 대책(對策)에서 제2갑(甲) 제2명으로 합격하였다. 독권관(讀券官) 참지정사(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彝)와 한림 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 등 제공(諸公)이 크게 칭찬하여 칙지로 응봉 한림문자·동지 제고 겸 국사원 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고 귀국하자, 공민왕이 전리 정랑(典理正郞)·예문 응교 겸 춘추 편수(藝文應敎兼春秋編修)를 더하였다. 이듬해 내사 사인(內史舍人)에 오르고,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병신년(1356)에 모친이 늙었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와 가을에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임명되고, 다시 옮겨서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후설(喉舌)[14]로 임금을 가까이 한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紅巾賊)이 경성(京城)[15]을 함락시켜 공민왕이 남행(南行)할 때, 색은 왕의 행행(行幸)에 호종, 도움을 이루어 적을 물리친 뒤에는 훈 1등에 책정되고 철권(鐵券)을 하사받았다. 계묘년에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원나라에서 임명받고, 본국에서는 밀직 제학(密直提學)을 임명받고 단성 보리 공신(端誠保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정미년에 원나라 정동성 낭중(征東省郞中)으로 제수되고, 본국에서는 판개성 겸 성균 대사성(判開城兼成均大司成)으로 임명되었는데, 한때의 경술(經術)을 통하는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 6, 7인을 천거하여 모두 학관(學官)을 겸했다. 경전을 나누어 수업을 하매 서로 어려운 것을 논란해서 각각 있는 지식을 다했다.

색은 변론하고 분석하며 절충하는 데 저물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기억하고 외우기만 하는 습관과 공리(功利)의 학설이 점점 없어지고, 성리(性理)의 학문이 다시 일어났다. 기유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이인복(李仁復)으로 더불어 임금에게 청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과거법을 쓰자고 했는데, 색이 무릇 공거(貢擧)를 주장한 지 네 번이나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공정함을 탄복했다. 공민왕이 노국 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짓는데 말할 수 없으리만큼 사치하고 호화롭기가 지극하여,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상서(上書)하여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유탁을 죽이려 하고, 색을 시켜서 여러 신하들에게 알리는 교유문을 지으라 했다. 색이 죄명을 임금에게 물으니, 임금이 탁의 네 가지 죄목을 들었다. 색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죽일 만한 죄가 아닙니다. 원컨대, 깊이 생각하옵소서."

임금이 더욱 노하며 독촉하기를 급히 하였다. 색이 아뢰었다.

"신이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어찌 글로써 죄를 만들겠습니까?"

임금이 감동되어 깨우쳐 탁이 죽기를 면했다. 신해년에 모친의 상(喪)을 만났으나, 이듬해 임금이 기복(起復)시켜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삼았는데, 병이 있다고 사면하였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돌아갔다. 색이 병이 중해서 문을 닫고 7, 8년을 지내다가 우왕 8년 임술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고,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요동위(遼東衛)를 공격하자고 청하여, 우왕이 기로(耆老)와 양부(兩府)로 하여금 모여서 가부를 논의하라고 하니, 모두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서 반대하는 자가 적고 좋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색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나, 물러 나와서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오늘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의리에 거스리는 논의를 했다."

고 하였다.

이 태조가 회군하자 최영을 물리치고 색으로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삼았다. 공민왕이 돌아간 뒤로 부터 원나라 천자가 번번이 집정 대신(執政大臣)을 들어오라고 해서, 모두 겁을 내고 감히 가지 못했는데, 색이 시중이 되어 폐왕(廢王) 창(昌)을 친히 조회하도록 하고, 또 창왕으로 감국(監國)을 시키도록 하려고 원나라에 들어가기를 자청하여, 드디어 색으로 하여금 하정사(賀正使)를 삼았다. 그리고 태조가 칭찬하여 말하였다.

"이 노인은 의기가 있다."

색이 생각하기를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해지고, 중외가 마음이 돌려져서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혹 변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한 아들을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는 전하(殿下)[16]로 서장관(書狀官)을 시켰다. 천자가 원래에 색의 명망을 들었으므로, 인견하고 종용(從容)하게 하는 말이,

"그대가 원나라 조정에서 벼슬해 한림 학사를 했으니 응당 한어(漢語)를 알리라."

하니, 색이 당황하여 한어(漢語)로 대답하기를,

"왕이 친히 조회하려 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뜻을 깨닫지 못학고 묻기를,

"무슨 말이냐?"

하매, 예부의 관원에게 전하여 주달하게 하였다. 색이 오래도록 조회하지 않았으므로 말씨가 대단히 간삽(艱澁)하니, 천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대의 한어는 정히 나하추(納哈出)와 같다."

하였다. 색이 돌아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황제는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없는 사람이다. 내 마음으로 이것을 물으려니 하면 황제는 묻지 않고, 묻는 바는 모두 내 뜻과는 같지 않더라."

하니, 당시의 논의로 기롱(譏弄)하기를,

"큰 성인의 도량을 속유(俗儒)가 어떻게 요량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공양왕이 즉위하였는데, 이색은 시론(時論)에 참예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섯 차례나 폄척(貶斥)당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자 옛날의 벗이라 하여 용서하니, 태조에게 나아가서 보고 올 때마다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참으로 천명을 받은 거룩한 임금님이시다."

하였다. 또 일찍이 영선(營繕)을 정지하기를 청하고는 물러 나와서 사람들이 묻는 일이 있으면,

"창업하는 임금은 종묘·사직과 궁궐이며 성곽 같은 것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고 했다.

을해년 가을에 관동(關東)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 곳에서 거주하려 하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불러 와서 한산백(韓山伯)을 봉했다. 색이 진현(進見)하고 하는 말이,

"개국하던 날 어찌 저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저에게 만일 알렸다면 읍양(揖讓)하는 예를 베풀어서 더욱 빛났을 것인데, 어찌 마고(馬賈)[17]로 하여금 추대하는 수석이 되게 하셨습니까?"

하였다. 이것은 배극렴(裵克廉)을 가리킨 것이었다. 남은(南誾)이 옆에 있다가 하는 말이,

"어찌 그대 같은 썩은 선비에게 알리겠는가?"

하니, 임금이 은(誾)을 꾸짖어 다시 말을 못하게 하고, 옛날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중문까지 나가서 전별하였다. 뒤에 이것을 논의하는 자가 있으므로, 남재(南在)가 색의 아들 이종선(李種善)을 불러서 하는 말이,

"존공(尊公)이 광언(狂言)을 하여 이를 논의하는 자가 있으니,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오."

하였다. 병자년 5월에 신륵사(神勒寺)로 피서하기를 청하였는데, 갈 때에 병이 생겼다. 절에 가자 병이 더하니 중이 옆에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색이 손을 내 흔들면서 하는 말이,

"죽고 사는 이치는 내가 의심하지 않으오."

하고, 말을 마치자 돌아갔다.

색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왔으며, 학문이 정박(精博)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하였다. 사리를 처리하는 데 자상하고 밝아서, 재상이 되어 기성의 법을 따르는 데 힘을 쓰고 복잡하게 고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애를 쓰고 부지런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붓만 잡으면 즉시 쓰되 사연이 정밀하고 간절했었다. 문집 55권이 세상에 나왔다. 집을 위해서는 재산의 유무(有無)를 묻지 않았으며, 평시에 경솔한 말과 갑자기 노여워하는 얼굴빛을 보지 못했다. 연회나 접대를 받는 자리에서도 여유있고 침착하여서 처사하는 데 난번되지 않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언동은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임금의 은총과 좋은 자리에 있었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두 번이나 변란과 불행을 만났으되 슬퍼하지도 않았다. 늙어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지공대사(指空大師)[18]와 나옹대사(懶翁大師)[19]의 부도(浮圖)에 명(銘)을 지었기로, 그 중들이 문하에 내왕해서 불교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았다.

색이 듣고 하는 말이,

"저들이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 복을 기원해 주는데,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하였다. 색의 아들은 세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 이종덕(李種德)과 둘째 아들 이종학(李種學)은 모두 벼슬이 밀직사에 이르렀으나 먼저 죽었고, 셋째 아들 이종선(李種善)은 지금 병조 참의가 되었다.


사헌부에서 유원정을 심핵하다[편집]

○命巡軍, 鞭刑曹掌務正郞李震一百, 又鞭佐郞沈啓蒙一百, 還任。 命囚柳爰廷家奴十名于獄。 憲司尋劾爰廷。

순군(巡軍)을 명하여 형조(刑曹)의 장무(掌務)인 정랑(正郞) 이진(李震)에게 편(鞭) 1백 대를 치게 하고, 좌랑 심계몽(沈啓蒙)에게도 편(鞭) 1백 대를 치게 하여 본직으로 돌려보내고, 유원정(柳爰廷)의 집종 10명을 옥에 가두도록 명하니, 헌사에서 유원정을 심핵(審覈)하였다.


5月 8日[편집]

도성 축조 역사의 감독을 소홀히 한 판중추원사 이빈이 탄핵당하다[편집]

○甲子/諫官劾判中樞院事李彬。 以築城提調, 屢歸私第, 緩於督役也。 上命收其職牒, 沒入田民, 流于寧海府。

간관(諫官)이 판중추원사 이빈(李彬)을 탄핵하였다. 이빈은 축성 제조(築城提調)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사제(私第)에 돌아갔다 왔으므로 역사를 감독하는 데 소홀히 하였었다. 임금이 그의 직첩을 거두도록 명하고 전민(田民)을 몰수해 들이고는 영해부(寧海府)로 귀양보냈다.


5月 11日[편집]

황영기의 부친인 중추원 부사 황성에게 쌀 등을 하사하다[편집]

○丁卯/賜中樞院副使黃成米豆五十斛。 成, 永奇之父也。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황성(黃成)에게 쌀과 콩 50곡을 하사하였는데, 성(成)은 황영기(黃永奇)의 부친이다.


5月 12日[편집]

새 종(鐘)이 완성되다[편집]

○戊辰/新鑄鍾成。 賜監役提調官權仲和ㆍ李恬綺絹各二匹。

새로 주조(鑄造)하게 한 종(鐘)이 이룩되었으므로, 감역 제조관(監役提調官) 권중화(權仲和)와 이염(李恬)에게 각각 비단 2필씩 내려 주었다.


5月 18日[편집]

유원정의 직첩을 거두고 귀양 보내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용서하다[편집]

○甲戌/司憲中丞李原、雜端曺致, 劾大司憲朴經、侍史鄭節ㆍ權鼎、雜端李致。 以經等推鞫柳爰廷家婢致死之故, 移關刑曹也。 乃請收柳爰廷職牒, 流于外方, 上以功臣原之。

사헌 중승(司憲中丞) 이원(李原)과 잡단(雜端) 조치(曹致)가 대사헌 박경(朴經), 시사(侍史) 정절(鄭節)·권정(權鼎)과 잡단 이치(李致)를 탄핵했는데, 경(經) 등이 유원정(柳爰廷)의 가비(家婢)가 치사한 연유를 추국하여 형조에 관문(關文)을 보냈기 때문이다. 유원정의 직첩을 거두고 외방에 귀양보내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공신이라 하여 용서하였다.


5月 20日[편집]

이조에서 6품이상의 관리에게 조상을 현양하고 배필을 품계로 예우하는 법을 건의하다[편집]

○丙子/吏曹請顯祖宗重配匹: “一, 六品以上應祭三代者, 追贈三代考妣。 父對品, 祖曾祖, 各遞降一等, 妣竝同。 功臣則加二等。 一, 各品正妻, 一品郡夫人, 二品縣夫人, 正三品成均大司成以上淑人, 三品令人, 四品恭人, 五品宜人, 六品安人, 參外孺人。 令主掌吏曹, 奉敎給牒。 如因夫及子之功, 特恩封爵者, 不在此限。 一, 凡婦人受封者, 須是室女爲人正妻者, 得封。 雖係正妻, 原非室女者, 不許封爵, 止許稱某官某妻某氏。 其世係有咎明白者, 雖正妻不許封爵。 無封爵明文, 而擅稱者, 痛行理罪。 夫亡改嫁者, 追奪封爵。”

이조(吏曹)에서 조종(祖宗)을 현양하고 배필(配匹)을 중히 하기를 청하였다.

"1. 6품 이상으로서 3대(三代)의 제사를 받들어야 할 사람은 3대의 고비를 추증(追贈)하되, 부친은 본인의 품계와 대등하게 하고 조부와 증조부는 각각 한 등씩 낮추고 비(妣)도 같게 하며, 공신이면 2등을 더할 것.

1. 각품의 정처(正妻)는 1품이 군부인(郡夫人), 2품이 현부인(縣夫人), 정3품으로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이상은 숙인(淑人), 3품은 영인(令人), 4품은 공인(恭人), 5품은 의인(宜人), 6품은 안인(安人), 7품 이하 참외(參外)는 유인(孺人)으로 정하여 주장(主掌)하는 이조로 하여금 전교를 받아서 직첩을 주게 하되, 만약에 가장이나 아들에게 공이 있어 특히 봉작(封爵)을 받은 자는 이 제한에 구애됨이 없게 할 것.

1. 무릇 부인으로 봉(封)함을 받는 자는 모름지기 처녀[室女]로서 남의 정처(正妻)가 된 자라야 봉함을 얻고, 비록 정처라 하더라도 원래 처녀가 아닌 자는 봉작(封爵)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단지 모관(某官)·모처(某妻)·모씨(某氏)로만 하되, 그 세계(世系)에 명백한 허물이 있는 자는 비록 정처라도 봉작을 허락하지 말고, 봉작한 명문이 없는데도 자기들끼리 함부로 일컫는 자는 통렬히 죄로 다스리게 하소서. 그리고 가장이 죽고 개가한 자는 봉작을 추탈(追奪)하게 하소서."


五年 六月[편집]

6月 1日[편집]

이수 등 99인의 생원 합격자를 발표하다. 환자 조순이 부정을 시도하다[편집]

○丁亥朔/上坐勤政殿, 放生員榜李隨等九十九人。 宦者曺恂素厚公州鄕貢朴彛。 彛不中, 恂請於汝翼, 汝翼令成均掌務李希老, 搜得彛卷子, 間置衆卷之中。 傅霖知之, 抽而擲去。

임금이 근정전에 앉아서 이수(李隨) 등 99인의 생원(生員)을 방방(放榜)하였다. 환자(宦者) 조순(曹恂)은 평소에 공주(公州)의 공생(貢生) 박이(朴彛)와 두터운 사이였는데, 이(彛)가 합격하지 못하자 순이 민여익(閔汝翼)에게 청탁하게 되매, 여익이 성균 장무 이희로(李希老)를 시켜서 이(彛)의 시험지를 여러 사람의 시험지 속에 끼워 두었으나, 함부림(咸傅霖)이 알고 뽑아서 던져버렸다.


중국에 구류당해 있는 사신들을 봉군(封君)하다[편집]

○以被留柳玽爲晋川君, 鄭摠爲西原君, 鄭臣義爲烏川君, 金若恒爲光山君。 右道都觀察使洪吉旼喪父, 以朴經代之。

중국에서 구류당하고 있는 유구(柳玽)로 진천군(晉川君)을 봉하고, 정총(鄭摠)으로 서원군(西原君)을 봉하고, 정신의(鄭臣義)로 오천군(烏川君)을 봉하고, 김약항(金若恒)으로 광산군(光山君)을 봉하였다. 우도 도관찰사 홍길민(洪吉旼)이 부친상을 당하여, 박경(朴經)을 대신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판예빈시사 김정경을 전라·충청도에 보내어 수군 현황을 조사하다[편집]

○遣判禮賓寺事金定卿于全羅、忠淸道, 監督攻戰, 考察兵船虛實, 仍案被奪戰艦死亡數。

판예빈시사 김정경(金定卿)을 전라·충청도에 보내어 공전(攻戰) 연습을 감독하고, 병선(兵船)의 허실을 조사하게 하며, 또 빼앗긴 전함과 죽은 사람의 수를 기록하게 하였다.


6月 2日[편집]

성의 부실 공사 때문에 축성 제조 이성중을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戊子/囚築城提調李誠中于巡軍。 以築城不堅故也。

축성 제조 이성중(李誠中)을 순군옥에 가두니, 성을 쌓은 것이 부실한 까닭이었다.


복업인 송모지 등 20인을 충주 청주 두 고을에 거주시키고 옷과 식량을 주다[편집]

○復業人宋毛知、宋波豆、申元、金元、小古未、李海兒、僧禪運ㆍ禪悟ㆍ達禪等二十人來, 安置于忠、淸二州, 給田宅衣糧。

우리 나라로 되돌아온 사람 송모지(宋毛知)·송파두(宋波豆)·신원(申元)·금원(金元)·소고미(小古未)·이해아(李海兒)와 중 선운(禪運)·선오(禪悟)·달선(達禪) 등 20인이 오니, 충추와 청주 두 고을에 안치(安置)시키고, 전택(田宅)과 의량(衣糧)을 주었다.


새로 만든 종을 시험삼아 치다가 깨어지니 다시 만들게 하다[편집]

○幸大巿, 觀新鑄鍾, 試擊四五度, 鍾裂, 命更鑄。

대시(大市)에 거둥하여 새로 만든 종(鐘)을 보고 4, 5차례를 시험삼아 치니, 종이 깨어져서 다시 만들라고 분부하였다.


6月 5日[편집]

중국 사신 맞이할 때의 내관의 관복 착용 건의를 조순이 저지시키다[편집]

○辛卯/都評議使司上請: “迎朝廷使臣時, 大小內官, 皆從本品官服。” 曺恂從中沮之。

도평의사사에서,

"조정에서 사신을 맞이할 때에는 대소 내관(內官)들도 모두 본품(本品)의 관복을 입게 하소서."

하고 청하니, 조순(曹恂)이 말려서 이를 중지하였다.


6月 9日[편집]

남녀의 황색복과 말 고들개 드리우는 것을 금하다[편집]

○乙未/嚴男女黃色服及緩鞦之禁。

남녀의 황색복(黃色服)과 밀치를 드리우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유원종의 종 2인을 무고죄로 치죄하다[편집]

○刑曹以誣告, 論柳爰廷奴二人, 各杖一百, 徒三年。

형조에서 유원정(柳爰廷)의 종[奴] 2인을 무고(誣告)로 논죄하여 각각 장(杖) 1백 대와 도(徒) 3년에 처하였다.


6月 11日[편집]

중국 사신 우우 등이 오다. 표문 지은 정도전 등을 보내라는 예부의 자문[편집]

○丁酉/朝廷使臣尙寶司丞牛牛、宦者王禮ㆍ宋孛羅ㆍ楊帖木兒至, 上率百官, 出迎于蟠松亭。 使臣至景福宮勤政殿, 先傳宣諭聖旨, 曰: “恁那裏來的火者, 俺這內園裏, 到處裏行走都看來。 俺這裏去的到那王的內園裏, 到處行走看一看, 明日好做親家。” 又傳禮部咨, 曰:

本部尙書門克新等官欽奉聖旨: “前者朝鮮國進正朝表箋文內, 輕薄戲侮, 着李某將撰文者發來, 止送撰箋者至, 其撰表人鄭道傳、鄭擢, 至今不見送到。 今再差尙寶司丞牛牛、內使楊帖木兒ㆍ宋孛羅ㆍ王禮, 一同原差來通事楊添植、從人金長前去本國, 催取撰表人鄭道傳等, 及催原搬取本國使臣柳玽等家小, 前來完聚。” 欽此, 今將聖旨事意, 備云移咨。

중국 사신 상보사 승(尙寶司丞) 우우(牛牛)와 환자 왕예(王禮)·송패라(宋孛羅)·양 첩목아(楊帖木兒) 등이 왔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반송정(蟠松亭)까지 나가서 맞았다. 사신들이 경복궁 근정전에 이르러 선유(宣諭)한 성지(聖旨)를 전했는데, 말하기를,

"너희가 보내 온 화자[火者]가 여기 내원(內園)[20]에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친가(親家)처럼 여기고 있으니, 우리한테서 가는 내시도 왕의 대궐 안을 돌아다니면서 무엇이나 보게 하여라. 그래야 다음에 혼사를 맺기가 좋을 것이다."

하고, 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전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본부 상서 문극신(門克新) 등 관이 삼가 성지(聖旨)를 받자오니, ‘전자에 조선국에서 바친 정조(正朝)의 표문과 전문 속에 경박하고 모멸하는 귀절이 있어 이(李) 【모(某).】 에게 글을 지은 사람을 보내게 하였더니, 단지 전문(箋文)을 지은 자만 보내 오고, 그 표문(表文)을 지은 정도전·정탁은 여태껏 보내 오지 않아서, 지금 다시 상보사승(尙寶司丞) 우우(牛牛)와 내사(內使) 양 첩목아(楊帖木兒)·송패라(宋孛羅)·왕예(王禮) 등 일동과 원래 보냈던 통사(通事) 양첨식(楊添植)의 종인(從人) 김장(金長)으로 본국에 가서 표문을 지은 정도전 등과 원래에 데리고 오라던 본국 사신 유구(柳玽) 등의 가솔을 데리고 와서 완취(完聚)하게 하라.’ 하시기에, 이제 이 뜻을 받들어 성지(聖旨)를 갖추어서 자문으로 전한다."


백관에게 항상 사모를 쓸 것과 매일 궐문에 모여 시위할 것을 명하다[편집]

○令百官恒著紗帽, 每日會闕門侍衛。

백관으로 하여금 상시로 사모(紗帽)를 쓰고서 매일 궐문에 모여서 시위하게 하였다.


6月 13日[편집]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다[편집]

○己亥/以帝許做親, 告宗廟。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이성중을 석방하다[편집]

○釋李誠中。

이성중(李誠中)을 석방하였다.


6月 14日[편집]

성절 표문을 올리지 못하는 사유를 알리는 자문을 보내다[편집]

○庚子/遣參贊門下府事趙胖, 如京師賀聖節, 咨禮部曰:

照得, 洪武二十七年十一月間, 陪臣司譯院副使李玄來自京師, 欽傳宣諭聖旨: “爾那裏進來的表內下的字樣, 好生兜搭, 今後休敎進表來。” 欽此參詳, 以小事大之禮, 必因進表, 得達微誠。 況正旦聖節, 華夷會同, 莫不奉表, 不敢不進。 爲此, 於洪武二十八年聖節千秋節、二十九年正旦等項表箋, 依前修撰進賀去。 後承準來咨, 欽奉聖旨節該: “今進洪武二十九年正旦表箋文內, 輕薄戲侮。” 欽此竊詳, 小邦事大之誠, 不敢小怠, 而海外之人, 學問粗淺, 未識中朝表箋體制, 以致字樣差謬, 兢惶罔措。 今來欽遇洪武二十九年九月十八日聖節, 不敢上表。

참찬문하부사 조반(趙胖)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예부에 자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홍무(洪武) 27년 11월 간에 배신 사역원 부사(司譯院副使) 이현(李玄)이 경사에서 왔었는데, 삼가 선유(宣諭)한 성지(聖旨)를 받자오니, ‘너희가 보내 온 표문(表文)의 글에 알 수 없는 글자를 잘 쓰니, 이제부터는 표문 보내는 것을 그만두라.’ 하셨는데, 삼가 이를 자세히 상고할 때에,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기는 데는 반드시 표문을 올려야 조그마한 성의라도 진달할 수 있거늘, 하물며 원단(元旦)과 성절에는 화이(華夷)에서 표문을 올리지 않음이 없으니, 감히 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홍무 28년의 성절(聖節)·천추절(千秋節)과 29년의 원단(元旦) 등의 표문과 전문을 전대로 지어서 진하(進賀)한 것이온데, 그 뒤에 온 자문을 받아서 삼가 성지(聖旨)를 받자오니, 그 사연에, ‘이번에 올린 홍무 29년 정월 원단의 표문과 전문 속에 경박하고 모멸한 자귀가 있다.’ 하오니, 이것을 받자와 그윽이 자세히 생각하오니, 소방(小邦)의 사대(事大)하는 성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나, 해외(海外)의 사람들이라 학문이 황잡하고 얕아서 중국 조정의 표문과 전문의 체제를 알지 못하여 문구가 틀리게 된 것이오니, 떨리고 황공하기 비할 데 없어 이번에 맞을 홍무 29년 9월 18일의 성절에는 감히 표문을 올리지 못합니다."


6月 15日[편집]

전라도 진도 만호가 왜구 10여 급을 베다[편집]

○辛丑/全羅道珍島萬戶金寶桂, 斬倭十餘級。

전라도 진도 만호(珍島萬戶) 김보계(金寶桂)가 왜구 10여 급(級)을 베었다.


6月 17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癸卯/霧。

안개가 끼었다.


판문하부사 권중화 등을 보내어 사돈 맺자고 한 일을 사례하다[편집]

○遣判門下府事權仲和、商議中樞院事具成老, 如京師謝做親事, 仍獻良馬十二匹。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와 상의중추원사 구성로(具成老)를 경사(京師)에 보내어 혼사를 맺자고 한 일을 사례하고, 인하여 양마(良馬) 12필을 진헌하게 하였다.


금주령을 폐지하다[편집]

○罷禁酒令。

금주령(禁酒令)을 폐지하였다.


광주에 황충이 일다[편집]

○廣州蝗。

광주(廣州)에 황충(蝗蟲)이 성하였다.


6月 18日[편집]

경상도 동래 만호와 석포 천호가 왜선 1척을 잡아 바치다[편집]

○甲辰/慶尙道東萊萬戶尹衡、石浦千戶李義敬, 捕倭船一隻, 獻軍器衣甲, 遣人賜醞, 仍賜綺絹。

경상도 동래 만호(東萊萬戶) 윤형(尹衡)과 석포 천호(石浦千戶) 이의경(李義敬)이 왜구의 배 1척을 잡아서 군기와 갑옷을 바치니, 사람을 보내어 내온(內醞)을 하사하고 인하여 비단을 내려 주었다.


6月 19日[편집]

천둥하고 번개 치다[편집]

○乙巳/雷電。

천둥하고 번개하였다.


6月 25日[편집]

28일까지 어둡도록 안개가 짙다[편집]

○辛亥/至甲寅昏霧。

28일까지 어둡도록 안개가 짙었다.


6月 26日[편집]

현비가 병이 나니 구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다[편집]

○壬子/上以顯妃未寧, 避居舊宮。

임금이 현비(顯妃)의 병환으로 구궁(舊宮)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였다.


종실 제군에게 중국 사신을 사택에서 연회케 하다[편집]

○命宗室諸君, 以次享朝廷使臣于私第。 使臣牛牛請密納娼妓。 爲人倨傲, 所至無禮貌, 至殿下邸, 見殿下, 不覺下床, 叩頭禮敬。 世子之黨皆不悅, 相謂曰: “天子之使, 叩頭於陪臣, 豈有此禮! 必有以也。” 因欲構於太祖, 竟不果。

종실의 제군(諸君)에게 명하여 차례로 조정 사신을 사택에서 연회하게 하였다. 사신 우우(牛牛)가 비밀히 창기(娼妓)를 들이라고 청했는데, 우우는 사람됨이 거만하고 가는 곳마다 예의와 체모가 없었다. 전하(殿下)의 사저(私邸)에 와서는 전하를 뵙고 모르는 결에 상(床)에서 내려와 고두례(叩頭禮)를 행하므로, 세자(世子)[21]의 당류[黨]가 모두 좋아하지 않고 서로 하는 말이,

"천자(天子)의 사신이 배신에게 고두(叩頭)하다니, 어찌 이런 예(禮)가 있는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고, 태조에게 그 죄를 얽으려 하다가 마침내 그대로 하지 못했다.


6月 29日[편집]

경상도 연해 14군현이 폭풍과 폭우로 피해를 입다[편집]

○乙卯/慶尙道沿海十四州縣, 大風以雨, 以及全羅之境, 禾穀盡偃, 樹木折拔, 諸浦兵船四十三隻傷破。

경상도 연해(沿海)의 14군현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전라도 경계에까지 볏곡이 모두 쓰러지고 나무가 부러지고 뽑혔으며, 여러 포구(浦口)의 병선 43척이 깨지고 상하였다.


살마주 이집원 태수가 예물을 바치다[편집]

○是月, 薩摩州伊集院太守藤原賴久使人獻禮物。

이달에 살마주(薩摩州) 이집원 태수(伊集院太守) 등원뇌구(藤原賴久)가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쳤다.


五年 秋七月[편집]

7月 1日[편집]

현비의 병 때문에 중 50명을 내전에 모아 부처에게 빌다[편집]

○丙辰朔/以顯妃未寧, 集僧徒五十於內殿禱佛。

현비(顯妃)가 병환이 났으므로 중 50명을 내전(內殿)에 모아서 부처에게 빌었다.


7月 3日[편집]

폭풍우로 도성 수구의 옹성 1간이 무너지다[편집]

○戊午/夜, 風雨暴作, 都城水口甕城一間圯。

밤에 폭풍우가 일어 도성(都城) 수구(水口)의 옹성(甕城) 1간이 무너졌다.


7月 4日[편집]

명나라 사신을 내전에서 접견하려고 내관을 보내어 청했으나 확정적인 답변을 요구하다[편집]

○己未/上欲見明使於內殿, 遣內官請之, 使臣曰: “承命委來之事未集, 徒醉酒, 何以復命? 苟以定計言之, 連日醉倒, 亦何厭哉?” 不肯來, 兩政丞詣館請之, 乃來。

임금이 명나라 사신을 내전(內殿)에서 접견하려고 하여 내관(內官)을 보내어 청하니, 사신이 말하였다.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온 일을 아직 끝내지 못했는데, 한갓 술에만 취하면 무어라고 복명(復命)하겠는가? 정한 계책만 말해 준다면야 연일 취한들 어찌 싫어하겠는가?"

사신이 오지 않으므로 두 정승(政丞)이 관(館)으로 가서 청하니, 그제서야 왔다.


7月 5日[편집]

큰 바람과 비에 도성 수구의 옹성 1간이 또 무너지다[편집]

○庚申/大風以雨, 都城水口甕城一間又圯。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도성(都城) 수구(水口)의 옹성(甕城) 1간이 또 무너졌다.


7月 6日[편집]

문하부 낭사들이 가을에는 농사일과 군사 훈련을 위하여 축성 역사의 중지를 건의하다[편집]

○辛酉/門下府郞舍上書論足食足兵之道: “願於今年秋, 姑停築城之役, 以休民力, 使之不廢秋耕, 專務練養, 以備不虞。”

문하부 낭사(郞舍)가 상서(上書)하여 양식을 족하게 하고 군사를 족하게 할 방책을 의논하였다.

"원컨대 금년 가을에 성 쌓는 역사를 잠시 정지하여 백성의 힘을 쉬게 해서 가을갈이[秋耕]를 폐하지 않도록 하고, 군사 훈련에 전력을 써서 뜻밖의 환난에 대비하소서."


7月 7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壬戌/霧。

안개가 끼었다.


현비의 병 때문에 부처에게 빌고 초제를 지내며 죄수를 석방하다[편집]

○以顯妃有疾, 集僧徒於內殿禱佛, 遣使於檜巖寺, 亦如之, 又設醮於昭格殿, 宥中外二罪以下囚。

현비의 병환을 위하여 중들을 내전(內殿)에 모아서 부처에게 빌고, 사신을 회암사(檜巖寺)에 보내어 역시 그와 같이 하였으며, 또 소격전(昭格殿)에 초제(醮祭)를 거행하고 중외(中外)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7月 8日[편집]

폭풍우로 인한 강원도 9개 고을의 피해 상황[편집]

○癸亥/迅風暴雨, 江原道春州、金城、洪川等九州縣, 山崩水湧, 漂沒人家百五十餘, 溺死人口百八、牛十頭、馬九匹。

폭풍우로 인하여 강원도의 춘주(春州)·금성(金城)[22]·홍천(洪川) 등 아홉 주현(州縣)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어, 인가(人家)가 표몰(漂沒)된 것이 1백 50여 가(家)나 되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것이 인구(人口)가 1백 8명, 소가 10두(頭), 말이 9필이었다.


참찬문하부사 남은이 표찬자와 유구 등의 가속을 명나라에 보내지 말기를 청하다[편집]

○參贊門下府事南誾上書請止發遣撰文者及柳玽等家小。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은(南誾)이 상서(上書)하여 찬문자(撰文者)와 유구(柳玽) 등의 가속(家屬)을 보내는 것을 정지하기를 청하였다.


7月 11日[편집]

섬라곡국에 사신갔다 오던 일행 중 왜구에게 잡혀 모두 죽고 이자영 만이 돌아오다[편집]

○丙寅/李子瑛來自日本。 初子瑛以通事, 偕禮賓少卿裵厚, 回禮暹羅斛國, 與其使者林得章等, 還到羅州海中, 爲倭寇所虜盡殲之。 子瑛獨被生擒以歸, 至是乃還。

이자영(李子瑛)이 일본에서 왔다. 당초에 자영(子瑛)이 통사(通事)로서 예빈 소경(禮賓少卿) 배후(裵厚)와 함께 섬라곡국(暹羅斛國)에 회례사(回禮使)로 갔다가, 그 사신 임득장(林得章) 등과 더불어 돌아오다가 전라도 나주(羅州)의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왜구에게 붙잡혀 다 죽고, 자영만이 사로잡혀 일본으로 갔다가 이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간관이 성 쌓는 역사를 중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꾸짖다[편집]

○諫官上書請止築城役, 上責之曰: “都邑不可無城, 固諫之, 何也? 其待命爾家。”

간관(諫官)이 상서하여 성 쌓는 역사를 중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꾸짖었다.

"도읍(都邑)에 성이 없을 수 없는데 굳이 간(諫)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너의 집에서 명령을 기다리라."


7月 12日[편집]

판한성부사 계림군 정희계의 졸기[편집]

○丁卯/判漢城府事雞林君鄭熙啓卒。 熙啓, 雞林人, 門下評理暉之子。 始仕前朝, 恭愍王見其容儀, 選爲近侍, 累遷至大護軍。 恭愍薨, 隷崔瑩幕, 官至密直使。 瑩敗, 上以姻親待, 遷至門下評理兼鷹揚軍上護軍。 至國初, 與議推戴, 賜號佐命開國功臣。 然不學, 行己無檢, 爲人所輕。 至是疽背卒, 上輟朝, 命有司葬以禮, 賜諡。 奉常擬諡, 以安荒聞, 上命改之, 乃諡良景。 子吉祥。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계림군(雞林君) 정희계(鄭熙啓)가 졸(卒)하였다. 희계는 계림(雞林)[23] 사람으로 문하 평리(門下評理) 정휘(鄭暉)의 아들이다. 처음 고려 조정에 벼슬하여, 공민왕이 그의 용모를 보고 근시(近侍)로 뽑아서, 여러 번 벼슬이 올라서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고, 공민왕이 훙(薨)한 뒤에 최영(崔瑩)의 막하(幕下)에 소속되어 벼슬이 밀직 사(密直使)에 이르렀다. 최영이 패하자 임금이 인친(姻親)이라 하여 우대해서 문하 평리(門下評理) 겸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에 올랐다가, 개국 초기에 이르러 추대하는 데에 참예하여 좌명 개국 공신(佐命開國功臣)의 호를 주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여 행신하는 것이 조심이 없어서 남에게 경멸을 받았다. 이에 이르러 등창이 나서 졸(卒)하니, 임금이 조회를 정지하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시호(諡號)를 주게 하매, 봉상시(奉常寺)에서 안황(安荒)으로 시호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고치라고 명령하여 양경(良景)이라 시호하였다. 아들은 정길상(鄭吉祥)이다.


7月 13日[편집]

큰비가 내리고 유성이 흐르다[편집]

○戊辰/大雨。 夜, 流星出紫薇南門, 入五帝座。

큰비가 내리고, 밤에 유성(流星)이 자미성 남문(紫薇星南門)에서 나와서 오제좌(五帝座)로 들어갔다.


7月 14日[편집]

태평관에 거둥하여 사신을 만나보다[편집]

○己巳/上如太平館, 見使臣。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사신을 만나 보았다.


7月 16日[편집]

근정전에서 사신을 연회하다[편집]

○辛未/宴使臣於勤政殿。

근정전(勤政殿)에서 사신을 연회하였다.


7月 19日[편집]

표문과 전문 지은 권근·정탁 등을 남경으로 보내며 시말을 주달한 글[편집]

○甲戌/使臣宋孛羅先還京師, 上率百官, 送于盤松亭。 使臣牛牛送至留後司而還。 判司譯院事李乙修爲管押使, 管送撰表箋人藝文春秋館學士權近、右承旨鄭擢、當該啓稟校正人敬興府舍人盧仁度於京師。 以漢城尹河崙爲啓稟使, 具奏于帝曰:

洪武二十九年六月十一日, 欽差尙寶司丞牛牛等官至, 準禮部咨, 欽奉聖旨節該: “前者進正旦表箋文內, 輕薄戲侮, 著將撰文者發來, 止送撰箋者至, 其撰表人鄭道傳、鄭擢, 至今不見送到。 今再差牛牛等前去本國, 催取撰表人及催原搬取本國使臣柳玽等家小, 前來完聚。” 欽此比奉以前準禮部咨, 欽奉聖旨節該: “今進正旦表箋文字內, 輕薄戲侮。 若以言辭侮慢, 興師問罪, 尙未可也, 撰文者至, 使者方歸。” 欽此照得, 進賀洪武二十九年正旦表文, 係成均大司成鄭擢修撰, 箋文係判典校寺事金若恒修撰。 其時爲因鄭擢患病, 止將撰箋人金若恒, 已於洪武二十九年二月十五日, 發送赴京。 今奉來因, 合將撰表人員, 欽依起送間, 行據都評議使司狀啓: “據鄭道傳狀告: ‘年五十五歲, 受判三司事職事, 見患鼓脹脚氣病證。 道傳於大司成鄭擢所撰洪武二十九年賀正表草, 竝不曾改抹校正, 今負干連事因, 告乞詳狀, 將其時藝文館當該直館, 究問虛實, 以憑施行。’ 得此, 就責得盧仁度狀供: ‘年三十歲, 無病, 受藝文館直館職事。 仁度委於洪武二十八年閏九月十四日, 將大司成鄭擢所撰進賀洪武二十九年正旦表草, 到於提調官判三司事鄭道傳處, 稟請校正間, 爲緣本官掌宗廟遷移祭享等事, 不曾改抹校正。 却將表草, 於次提調官知門下府事鄭摠、藝文館提學權近處校正。 所供是實。’ 得此, 謹錄狀啓。” 據此竊念, 臣不諳經史, 而撰文者皆是海外之人, 語音別異, 學不精博, 未識表箋體制, 以致字樣差謬。 豈敢故爲戲侮! 除已欽依將撰表人鄭擢及校正表人權近、當該啓稟校正人盧仁度, 責差判司譯院事李乙修, 管送赴京, 伏取聖裁外, 其鄭道傳, 旣於鄭擢所撰表文, 不曾改抹校正, 事無干連。 又緣本人患鼓脹脚氣病證, 不能起送。 所據柳玽等各項使臣家小一節, 竊謂小邦, 臣事聖朝以來, 不敢少怠, 今見賀正使柳玽等未蒙放還, 又奉搬取家小, 擧國臣民, 無不驚恐。 其各官家小等, 亦因違離鄕土, 哀號切至, 誠可憐憫。 見今撰文人鄭擢、金若恒等, 旣已欽依赴京, 更候明降, 伏望聖慈寬宥, 以慰國人之望。

사신 송패라(宋孛羅)가 먼저 남경으로 돌아갔다. 임금이 백관을 인솔하고, 반송정(盤松亭)에 나가 전별하였으며, 사신 우우(牛牛)는 유후사(留後司)까지 가서 전별하고 돌아왔다.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 이을수(李乙修)로 관압사(管押使)를 삼아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지은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權近)과 우승지 정탁(鄭擢)과 그것을 계품(啓稟) 교정(校正)한 사람 경흥부 사인(敬興府舍人) 노인도(盧仁度)를 남경으로 보내고, 한성 윤(漢城尹) 하윤(河崙)으로 계품사(啓稟使)를 삼아서 황제에게 시말을 주달하였다.

"홍무(洪武) 29년 6월 11일에 황제께서 보내신 상보사 승(尙寶司丞) 우우(牛牛) 등이 이르매,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에, ‘황제 폐하의 분부를 받자왔는데, 그에 이르기를, 지난 번 정단(正旦)에 올린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속에 경박하게 희롱하고 모멸한 것이 있으므로, 글을 지은 사람을 보내 오라 했더니, 전문을 지은 자만 보내 왔고 표문을 지은 정도전·정탁은 지금까지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다시 우우 등을 본국으로 보내어 표문을 지은 사람을 보내기를 재촉하고, 와 있는 사신 유구 등의 가솔(家率)을 보내어 와서 완취(完聚)하도록 하기를 재촉한다.’ 하였습니다. 근일에 받자온 이전의 예부 자문에, ‘폐하의 분부를 받자온 내용에, 이번에 올린 정단(正旦)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안에 경박하게 희롱하고 모멸한 것이 있었으나, 만일 언사가 모멸하고 거만스럽다고 군사를 일으켜 문죄(問罪)하는 것은 아직 불가하고, 글을 지은 사람이 와야 사신이 바야흐로 돌아가리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알아본즉 홍무 29년 정단을 하례한 표문은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정탁(鄭擢)이 지었고, 전문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약항(金若恒)이 지은 것이오나, 그때에 정탁은 병이 있었으므로 전문을 지은 김약항만을 홍무 29년 2월 15일에 보내어 경사(京師)에 갔사오며, 이제 온 사유를 받들어 표문을 지은 인원을 분부대로 보내옵는데,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장계(狀啓)에 의거하여 정도전의 장고(狀告)에 의하면, 나이는 55세이고 판삼사사(判三司事)의 직(職)에 있사온데, 현재 복창(腹脹)[24]과 각기병증(脚氣病證)이 있다 합니다. 도전은 대사성 정탁이 지은 바 홍무 29년의 하정표(賀正表)를 기초한 것을 고치거나 교정한 일이 없사온데, 이제 거기에 관련되었다 하여 자세하게 살펴 주기를 빌므로, 그 당시의 예문관의 해당된 직관(直館)에게 허실(虛實)을 물어서 시행하기로 하여, 노인도(盧仁度)의 장계(狀啓)로 한 공초(供招)에 의하면 나이 30세에 무병(無病)하고, 예문관 직관(藝文館直館)의 직(職)을 맡았는데, 홍무 28년 윤9월 14일에 대사성 정탁이 지은 바 홍무 29년 정단에 하례하는 표문의 초고를 제조관(提調官)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에게 보내 교정을 청하였더니, 본관(本官)[25]이 종묘(宗廟)의 이안(移安)하는 제향(祭享) 등의 일로 인하여 고치거나 교정하지 못하였고, 표문의 초고를 차제조관(次提調官)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정총(鄭摠)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권근(權近)에게 교정했다 하였는데, 공초가 사실이므로 이것을 삼가 기록하여 아뢴다고 하였나이다.

이에 의거하여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신이 경사(經史)에 밝지 못하옵고, 글을 지은 자가 모두 해외(海外)의 사람이므로 어음(語音)이 다르고, 학문이 정미하고 해박하지 못해서 표문과 전문의 체제를 알지 못하여, 문자가 어긋나고 틀리게 된 것이요, 어찌 감히 고의로 희롱하고 모멸했겠습니까? 삼가 분부하신 대로 표문을 지은 정탁과 교정한 권근이며, 교정을 계품한 노인도는 판사역원사 이을수를 시켜서 경사(京師)로 압송해 가 폐하의 결재를 청하는 외에, 정도전은 정탁이 지은 표문에 일찍이 지우거나 고치지 않았으므로 일에 관계없으며, 또 본인은 복창(腹脹)과 각기병(脚氣病)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유구 등 각항 사신의 가솔들을 보내라는 일절(一節)은 그윽이 생각하기를, 소방(小邦)이 성조(聖朝)를 섬긴 이래로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사온데, 이제 하정사 유구 등이 방환(放還)되지 못하였고, 또 가솔들을 들여보내라 하는 것을 보고는 온 나라 신민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사오며, 그 각 고을의 가솔들도 역시 고국을 떠나게 되어 슬프게 부르짖음이 간절하고 지극하오니, 진실로 불쌍하옵니다. 지금 글을 지은 사람 정탁·김약항 등은 이미 분부하신 대로 경사(京師)에 보내어 다시 밝으신 처분을 기다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시와 나라 사람들의 소망을 위안해 주소서."


7月 20日[편집]

천변 때문에 자책하면서 신하들에게 바른 말 하기를 구하다[편집]

○乙亥/上以天變, 自責求言。 中樞院副使張子忠上書以爲: “人事失於下, 則天變應於上”, 極言天人相應之理。

임금이 천변(天變)이 있으므로 자책(自責)하고, 바른말을 구(求)하니,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장자충(張子忠)이 상서(上書)하였으되,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잘못되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응한다."

고 하여, 하늘과 사람과의 서로 감응하는 이치를 극언(極言)하였다.


7月 21日[편집]

각도 군인을 징발해 도성 역사를 마치려 했으나 신하들이 반대하다[편집]

○丙子/上命都評議使司, 徵發各道軍人, 畢築都城, 問其可否, 贊成事以下皆曰: “否。” 上召問之曰: “予移都城郭幾成矣。 其於畢築之役, 皆曰否, 何哉? 如此則予豈移都於此乎?” 三司左僕射禹仁烈對曰: “臣等之曰否, 非謂其永不築城, 姑待豐年耳。” 政堂文學韓尙質對曰: “臣等曰否, 以今年早旱晩水, 又有蝗蟲之災, 禾穀不登。 以此請待來年, 然後畢築爲便。” 上曰: “予已命各道觀察使, 給築城赴役之糧。” 參贊門下府事安翊對曰: “臣等未知已有給糧之令, 以爲否, 臣等皆有罪焉。” 上聞翊言, 怒稍弛, 命賜酒遣之。

임금이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각도의 군인을 징발해서 도성(都城)을 필역(畢役)하는 데 대해 그 가부(可否)를 물으니, 찬성사(贊成事) 이하가 모두 옳지 못하다고 하므로, 임금이 불러서 물었다.

"내가 도읍을 옮기고 성곽이 거의 다 되었는데, 필역하는 것을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 일인가? 이렇게 되면 내가 어찌 도읍을 여기에 옮기겠는가?"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우인열(禹仁烈)이 대답하였다.

"신 등이 불가하다고 하는 것은 영원히 성을 쌓지 말자는 것이 아니옵고 풍년을 기다리자는 것이옵니다."

정당 문학(政堂文學) 한상질(韓尙質)은 대답하였다.

"신 등이 불가하다 하는 것은 금년에 초두에는 가물고 늦게는 물이 졌으며, 또 황충(蝗蟲)의 재(災)가 있어서 벼가 잘되지 못하였으므로, 내년을 기다려서 필역하는 것이 편리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벌써 각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성 쌓는 역사에 올 사람들의 식량을 주게 하였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안익(安翊)이 대답하였다.

"신 등이 이미 식량까지 준 명령이 계신 줄 모르고 불가하다 했사오니, 신 등이 모두 죄가 있습니다."

임금이 익(翊)의 말을 듣고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술을 주고서 보내었다.


7月 24日[편집]

달이 목성을 가리다[편집]

○己卯/月掩木星。

달이 목성(木星)을 가리었다.


우도 수군 절제사 김영렬이 왜선 2척을 잡고 3명을 생포하다[편집]

○右道水軍節制使金英烈捕倭船二隻于楸子島, 生擒三名。

우도(右道) 수군 절제사(水軍節制使) 김영렬(金英烈)이 왜선(倭船) 2척을 추자도(楸子島)에서 잡고 3명을 생금(生擒)하였다.


사신 우우 등이 한강에 나가 놀다[편집]

○使臣牛牛等出遊漢江。

사신 우우(牛牛) 등이 한강(漢江)에 나가서 놀았다.


7月 25日[편집]

큰 바람이 불고 금성이 달을 질러 지나가다[편집]

○庚辰/大風。 金星貫月。

큰 바람이 불고, 금성(金星)이 달[月]을 꿰었다.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내전 침실에서 연회하다[편집]

○宴使臣於內殿寢室。

사신을 내전 침실에서 연회하였다.


7月 26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辛巳/霧。

안개가 끼었다.


7月 27日[편집]

정도전을 봉화백에 봉하고, 설장수를 판삼사사로 삼다[편집]

○壬午/以鄭道傳爲奉化伯, 偰長壽爲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으로 봉화백(奉化伯)을 봉하고, 설장수(偰長壽)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임명하였다.


서북면 순안현 등으로 군현을 통폐합하다[편집]

○都評議使司據西北面都巡問使報: “以順寧、安定合爲順安縣, 以价州兼官熙州別爲知郡, 大ㆍ小朔州、龜州合爲知朔州郡, 龍州兼官定戎、寧德、寧朔合爲定寧縣, 陽巖、樹德合爲陽德監務。”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의 보고에 의거하여 순녕(順寧)과 안정(安定)을 합하여 순안현(順安縣)으로 하고, 개주(价州)의 겸관(兼官)인 희주(熙州)를 따로 지군(知郡)을 삼고, 대·소 삭주(大小朔州)와 구주(龜州)를 합하여 지삭주군(知朔州郡)으로 하고, 용주(龍州)의 겸관인 정융(定戎)·영덕(寧德)·영삭(寧朔)을 합하여 정녕현(定寧縣)이라 하고, 양암(陽巖)과 수덕(樹德)을 합해서 양덕 감무(陽德監務)로 하였다.


五年 八月[편집]

8月 3日[편집]

김영렬을 중추원 부사 겸 경기도 도절제사로 삼고, 궁온과 비단을 내리다[편집]

○戊子/以金英烈爲中樞院副使兼京畿都節制使, 仍遣大將軍鄭龜, 賜宮醞綺絹。

김영렬(金英烈)로 중추원 부사 겸 경기도 도절제사를 삼고, 대장군(大將軍) 정귀(鄭龜)를 보내어 궁온(宮醞)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8月 4日[편집]

사신 우우 등이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다[편집]

○己丑/使臣牛牛等觀放鷹于迎曙驛。

사신 우우(牛牛) 등이 영서역(迎曙驛)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8月 6日[편집]

서리가 내리다[편집]

○辛卯/隕霜。

서리가 내리었다.


환자 조순을 의주에 보내어 사신 송패라를 위로하다[편집]

○遣宦者曺恂於義州, 勞使臣宋孛羅。

환자(宦者) 조순(曹恂)을 의주(義州)에 보내어 사신(使臣) 송패라(宋孛羅)를 위로하였다.


경상·전라·강원도에서 축성 인부 7만 9천 4백 명을 징발하다[편집]

○徵慶尙、全羅、江原道築城夫七萬九千四百。

경상·전라·강원도에서 축성 인부(築城人夫) 7만 9천 4백 명을 징발하였다.


8月 8日[편집]

사복시를 시켜 사복시 서편에 세마지를 파게 하다[편집]

○癸巳/令司僕寺鑿洗馬池於寺西, 上出觀之。

사복시(司僕寺)를 시켜서 세마지(洗馬池)를 사복시 서편에 파게 하고, 임금이 나가 보았다.


8月 9日[편집]

현비의 병환이 위독해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다[편집]

○甲午/顯妃以疾篤, 避居判內侍府事李得芬第。

현비(顯妃)의 병환이 위독하여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였다.


판삼사사 설장수에게 쌀과 콩 50석등을 내리다[편집]

○賜判三司事偰長壽米豆五十石。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에게 쌀과 콩 50석을 내려 주었다.


왜선 120척이 경상도에 들어와 수군 만호를 죽였으며 동래·기장·동평성을 함락하다[편집]

○倭百二十艘入寇慶尙道, 奪兵船十六隻, 殺水軍萬戶李春壽, 陷東萊、機張、東平城。

왜적의 배 1백 20척이 경상도에 입구(入寇)하여 병선(兵船) 16척을 탈취해 가고, 수군 만호(水軍萬戶) 이춘수(李春壽)를 죽였으며, 동래(東萊)·기장(機張)·동평성(東平城)을 함락하였다.


8月 12日[편집]

왜구 방어를 위해 예빈 경 신유정을 삼남 경차관으로 삼다[편집]

○丁酉/以禮賓卿辛有定, 爲忠淸、全羅、慶尙道敬差官。 備防倭也。

예빈 경(禮賓卿) 신유정(辛有定)으로 충청·전라·경상도 경차관(敬差官)을 삼았으니, 왜구를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현비의 병환이 위독해 이득분의 집에 거둥하다[편집]

○上以顯妃疾篤, 幸李得芬家。

현비의 병환이 위독하여 임금이 이득분의 집에 거둥하였다.


8月 13日[편집]

밤에 현비가 이득분의 집에서 훙하다[편집]

○戊戌/夜, 顯妃薨于李得芬家。 上痛悼不已, 停朝市十日。

밤에 현비가 이득분의 집에서 훙(薨)하였다. 임금이 통곡하고 슬퍼하기를 마지 아니하였고, 조회(朝會)와 저자[市]를 10일간 정지하였다.


8月 14日[편집]

소렴하다. 상례와 장례를 치루기 위해 4도감 13개소를 설치하다[편집]

○己亥/世子及百官帶麻絰發哀, 小斂。 以喪葬設四都監十三所。

세자(世子)와 백관(百官)들이 마질(麻絰)을 띠고 발상(發喪)하고, 소렴(小斂)하였다. 상장(喪葬)을 치루기 위하여 4도감(都監) 13소(所)를 설치하였다.


예조에 명하여 상례를 상정케 하고 구궁으로 빈소를 옮기다[편집]

○令禮曹詳定發哀行喪之禮, 移殯于舊宮。

예조에 분부하여 발상(發喪)하는 예를 상정(詳定)하게 하고, 구궁(舊宮)으로 빈소(殯所)를 옮기었다.


각도 대소 군민관의 위문을 정지시키다[편집]

○命停各道大小軍民官陳慰。

각도의 대소 군민관(軍民官)의 위문을 정지하게 하였다.


8月 15日[편집]

대렴하다. 세자와 백관들이 재최복을 입고 빈전에 치전하다[편집]

○庚子/大斂。 世子及百官服齊衰, 奠于殯殿。

대렴(大斂)하였다. 세자와 백관들이 자최복(齊衰服)을 입고 빈전(殯殿)에 치전(致奠)하였다.


백의·백관을 착용하고 안암동에 나가 능터를 물색하다[편집]

○上以白衣冠如安巖洞, 相陵地。

임금이 백의(白衣)·백관(白冠)으로 안암동(安巖洞)에 나가서 능터[陵地]를 물색하였다.


8月 16日[편집]

태백성이 심성을 범하다[편집]

○辛丑/太白犯心星。

태백성(太白星)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조준 등의 건의로 공신 이서로 하여금 3년 동안 왕비의 능을 지키게 하다[편집]

○功臣門下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等上言曰: "恭惟主上殿下, 應天順人, 化家爲國, 是乃殿下之至德深仁, 有以得天命人心之所歸, 亦由顯妃殿下稟性貞淑, 操行謹愼, 常存儆戒於平日, 參決大策於危時。 內助之功, 光於竹帛, 難可殫言。 不弔上天, 奄至昇遐, 臣等痛悼, 倍萬恒情。 切念臣等, 俱以庸材, 遭遇盛際, 獲忝開國功臣之列, 義則係於君臣, 恩實同於父母, 雖欲粉身, 圖報末由。 請以功臣一人, 守陵三年。 自此以後, 永爲恒式, 代代子孫, 遵守勿失, 縱未報昊天罔極之德, 庶得効臣等區區之誠。 伏望採擇施行, 不勝幸甚。" 上從之, 乃令功臣安平君 李舒守陵。

공신(功臣)인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 조준(趙浚)과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을 순응하여 집을 나라로 만드셨으니, 이것은 전하의 지극하신 덕(德)과 깊으신 인(仁)이 천명과 인심이 돌아옴을 얻게 된 것이오며, 역시 현비 전하(顯妃殿下)께서는 품성(稟性)이 정숙(貞淑)하시고 조행(操行)이 근신(謹愼)하시어 평시에도 항상 경계(儆戒)하는 마음을 두시고, 위태할 때에는 대책(大策)을 결정하는 데에 참예하여 내조(內助)의 공이 역사[竹帛]에 빛나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상천(上天)이 돌보지 아니하여 문득 승하(昇遐)하시니, 신 등이 슬퍼함이 보통보다 만배나 더합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재질(材質)로 성대(盛代)를 만나서 개국 공신의 반열에 외람되이 참예하오니, 의(義)로는 임금과 신하의 사이오나, 은혜는 실로 부모와 같습니다. 비록 몸을 가루로 만들어 보답하려 해도 할 수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공신 1인으로 3년 동안 능을 지키게 하고, 이로부터 영구히 전례가 되게 하여, 대대의 자손들이 준수하여 어기지 않으면, 비록 호천망극(昊天罔極)한 덕은 갚지 못하나마 신 등의 구구(區區)한 정성은 바칠 수 있겠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채택하여 시행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라 공신(功臣) 안평군(安平君) 이서(李舒)로 능을 지키게 하였다.


8月 17日[편집]

도성 감역관 박이가 돌을 운반하다 이사위 집의 울타리를 헐은 데 대한 시비[편집]

○壬寅/都城監役官前司宰監朴理令軍人輸大石, 以道狹, 撤前密直李士渭家藩籬, 士渭歐辱朴理。 城門提調崔有慶等以聞, 上令出士渭家奴二十名, 赴南門役。

도성 감역관(都城監役官)인 전 사재감(司宰監) 박이(朴理)가 군인(軍人)을 시켜서 큰 돌을 운반하다가, 길이 좁아서 전 밀직(密直) 이사위(李士渭) 집의 울타리를 걷어치우니, 사위가 박이를 때리고 욕설을 하였다. 성문 제조(城門提調) 최유경(崔有慶) 등이 이를 아뢰니, 임금이 사위의 가노(家奴) 20명을 내어 남문(南門)의 역사에 나오도록 하였다.


금주령을 내리고 중외에 매사냥을 금하다[편집]

○下令禁酒, 又禁中外放鷹。

명령을 내리어 금주(禁酒)하게 하고, 또 중외(中外)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8月 18日[편집]

왜구를 방비키 위해 대장군 오용권을 삼남 경차관으로 삼다[편집]

○癸卯/以大將軍吳用權, 爲忠淸、全羅、慶尙道敬差官, 以備防倭。

대장군(大將軍) 오용권(吳用權)으로 충청·전라·경상도 경차관을 삼았으니, 왜구를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왜적이 경상도에 들어와 통양포 병선 9척을 탈취해 가다[편집]

○倭寇慶尙道, 奪通洋浦兵船九隻。

왜적이 경상도에 들어와서 통양포(通洋浦)의 병선 9척을 탈취해 갔다.


8月 20日[편집]

행주에 거둥하여 능지를 보았으나 모두 뜻에 맞지 않다[편집]

○乙巳/上幸幸州, 相陵地意不叶。 書雲觀劉旱雨、裵尙忠、李陽達等, 私相論詰, 吉凶未決, 上怒, 皆杖之。

임금이 행주(幸州)에 거둥하여 능지(陵地)를 보았으나 뜻에 맞지 않았다. 서운관(書雲觀) 유한우(劉旱雨)·배상충(裵尙忠)·이양달(李陽達) 등이 저희들끼리 서로 좋으니 나쁘니 하여 서로 다투다가 결정을 짓지 못하므로, 임금이 크게 성을 내어 모두 매를 때리었다.


8月 21日[편집]

안암동에 거둥하여 능지를 잡았으나 그 이튿날 파보니 물이 솟아 중지하다[편집]

○丙午/上如安巖洞, 相陵地, 丁未, 命開基堀之, 水湧乃止。

임금이 안암동(安巖洞)에 거둥하여 능지(陵地)를 보아 이튿날 개기(開基)하고 땅을 파 보도록 명하였는데, 물이 솟으므로 중지하였다.


8月 23日[편집]

왜구가 영해성을 함락시키다[편집]

○戊申/倭陷寧海城。

왜구가 영해성(寧海城)을 함락하였다.


취현방에 거둥하여 지형을 돌아 보고 능지를 결정하다[편집]

○上如聚賢坊, 相定陵地。

임금이 취현방(聚賢坊)에 거둥하여 능지(陵地)를 보아 결정하였다.


8月 24日[편집]

문무백관에게 재계하는 모임과 제향 올릴 때에만 상복을 입게 하다[편집]

○己酉/命文武百官曰: “喪服視事不便, 止於齋會澆奠服之。”

문무백관에게 명령하였다.

"상복(喪服)으로 사무를 보는 데 불편하니 단지 재계(齋戒)하는 모임과 요전(澆奠)[26]하는 데에만 입도록 하라."


8月 25日[편집]

상의중추원사 김적선을 천추사로 보내다[편집]

○庚戌/遣商議中樞院事金積善, 如京師賀千秋節。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김적선(金積善)을 남경에 보내어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홍유용을 강원도, 구성량을 충청도 경차관으로 각각 임명하다[편집]

○是日, 以判內府寺事洪有龍爲江原道敬差官, 判司農寺事具成亮爲忠淸道敬差官。

이날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홍유용(洪有龍)으로 강원도 경차관을 삼고,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 구성량(具成亮)으로 충청도 경차관을 삼았다.


8月 26日[편집]

왜구 방비를 위해 삼남 도찰리사와 각도 조전 절제사 등을 임명하다[편집]

○辛亥/又以商議中樞院事李至爲忠淸、全羅、慶尙道都察理使, 前商議中樞院事李天祐爲江原道助戰節制使, 前泥城道兵馬節制使李龜鐵爲忠淸、慶尙道助戰節制使。 備防倭也。

또 상의중추원사 이지(李至)로 충청·전라·경상도 도찰리사(都察理使)를 삼고, 전 상의중추원사 이천우(李天祐)로 강원도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를 삼고, 전 이성도 병마 절제사(泥城道兵馬節制使) 이귀철(李龜鐵)로 충청·경상도 조전 절제사를 삼았으니, 왜구를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8月 28日[편집]

봉상시에서 현비의 존호와 정희계의 시호를 올리다.[편집]

○癸丑/奉常寺議獻顯妃尊號曰孝昭、昭順、昭獻, 又諡鄭熙啓曰安煬、安荒、安惑。 報于禮曹, 禮曹傳報門下府, 府具本取旨。

봉상시(奉常寺)에서 현비(顯妃)의 존호(尊號)를 효소(孝昭)·소순(昭順)·소헌(昭獻) 등으로 의논하여 올리고, 또 정희계(鄭熙啓)의 시호(諡號)를 안양(安煬)·안황(安荒)·안혹(安惑) 등으로 의논하여 예조에 보고하니, 예조에서 다시 문하부(門下府)에 보고하고, 문하부에서 문안(文案)을 만들어서 임금의 결재를 청하였다.


8月 29日[편집]

정희계의 시호문제로 봉상시의 관원들을 가두다[편집]

○甲寅/上召定諡奉常博士崔蠲問曰: “熙啓, 元勳也。 贈諡何若是其甚耶? 且但論其過, 不擧其功, 何耶?” 卽下巡軍獄鞫之, 又囚奉常少卿安省、寺丞金汾、大祝韓皐、協律郞閔審言、錄事李士澄。 於是, 刑曹劾散騎常侍全伯英、李滉等, 又劾禮曹議郞孟思誠、佐郞趙士秀。 不駁奉常寺贈諡之誤也。

이튿날[편찬자 주: 갑인을 이튿날로 번역함] 임금이 시호를 정한 봉상 박사(奉常博士) 최견(崔蠲)을 불러서 물었다.

"희계는 원훈(元勳)인데 시호를 왜 이다지도 심하게 하였느냐? 또 단지 그 허물만을 논하고 그 공은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즉시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국문하게 하고, 또 봉상 소경(奉常少卿) 안성(安省)과 봉상시 승(奉常寺丞) 김분(金汾)·대축(大祝) 한고(韓皐)·협률랑(協律郞) 민심언(閔審言)·녹사(錄事) 이사징(李士澄)을 가두었다. 이에 형조에서 산기 상시(散騎常侍) 전백영(全伯英)·이황(李滉) 등을 탄핵하고, 또 예조 의랑(禮曹議郞) 맹사성(孟思誠)·좌랑(佐郞) 조사수(趙士秀) 등의 봉상시에서 시호를 잘못 마련한 것을 반박하지 않은 죄를 탄핵하였다.


서북면 도순문사가 영삭진에 성 쌓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다[편집]

○是月, 西北面都巡問使請城寧朔鎭, 從之。

이달에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영삭진(寧朔鎭)에 성을 쌓기를 청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五年 九月[편집]

9月 1日[편집]

천변지괴 때문에 백악산에 제사지내고 여러 절에 소재 법석을 베풀다[편집]

○丙辰/以天變地怪屢見, 命參贊門下府事安翊、政堂文學韓尙質, 祭于白岳山, 又遣人於諸寺, 設消災法席。

천변지괴(天變地怪)가 여러 번 나타났으므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안익(安翊)과 정당 문학(政堂文學) 한상질(韓尙質)에게 명하여 백악산(白岳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 사람을 여러 절에 보내서 소재 법석(消災法席)을 베풀게 하였다.


9月 5日[편집]

정희계의 시호 문제로 최견·안성·김분 등이 유배가다[편집]

○庚申/刑曹照律崔蠲絞, 安省、金汾等杖一百, 徒三年。 左政丞趙浚聞之, 惻然曰: “蠲罪乃至是歟?” 與判三司事偰長壽、典書唐誠, 同議照律, 手執律文, 直入面啓, 上從之。 杖蠲一百, 徒于金海。 杖省等有差, 流省于丑山, 汾于角山, 審言于順天, 士澄于康州。 全伯英、李滉、孟思誠、趙士秀等, 俱罷職, 更諡熙啓良景。

형조에서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최견(崔蠲)은 교형(絞刑), 안성(安省)과 김분(金汾) 등은 장(杖) 1백에 도(徒) 3년으로 정하였다.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이 이를 듣고 불쌍히 여기면서,

"견(蠲)의 죄가 이에까지 이르겠는가?"

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전서(典書) 당성(唐誠)과 함께 동의(同議)하여 조율(照律)해서, 손에 율문(律文)을 가지고 바로 들어가서 임금에게 면대해서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견(蠲)은 장(杖) 1백 대를 쳐서 김해(金海)로 도배(徒配)하고, 성(省) 등은 차등있게 매[杖]를 쳐서, 안성은 축산(丑山)으로, 분(汾)은 각산(角山)으로, 심언(審言)은 순천(順天)으로, 사징(士澄)은 강주(康州)로 유배(流配)하고, 전백영(全伯英)·이황(李滉)·맹사성(孟思誠)·조사수(趙士秀) 등은 모두 파직(罷職)하고, 희계(熙啓)를 다시 양경(良景)이라고 시호(諡號)를 주었다.


9月 6日[편집]

7일까지 안개가 끼다[편집]

○辛酉/霧。 壬戌亦如之。

안개가 끼었다. 초 7일에도 역시 안개가 끼었다.


9月 9日[편집]

시호를 헌의할 때 봉상 판사 이하가 의논해 사사에 전보하여 아뢸 것을 건의하다[편집]

○甲子/使司上言: “諡法, 國家重事, 不可獨令奉常博士議定。 乞令奉常判事已下擬議, 傳報使司, 使司啓聞, 以爲成法。”

사사(使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시법(諡法)은 국가의 중사(重事)이오니, 봉상 박사(奉常博士)만으로 의정(議定)하게 할 수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봉상 판사(奉常判事) 이하가 의논해서 사사(使司)에 전보(傳報)하게 하고, 사사에서 위에 아뢰도록 법을 정하소서."


명나라에 사명을 받들고서 오래 지체한 신유정·오용권을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以辛有定、吳用權奉使稽留, 下巡軍獄。

신유정(辛有定)·오용권(吳用權)이 사명을 받들고서 오래 지체하였기 때문에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도성 역사를 시찰하고 감독관에게 술을 내려 주다[편집]

○上觀都城役, 賜酒監督官。

임금이 도성(都城)의 역사를 시찰하고 감독관에게 술을 내려 주었다.


능 만드는 역사를 둘러 보다[편집]

○上觀作陵役。

임금이 능(陵)을 만드는 역사를 보았다.


제주 목사 여의손과 그의 모친에게 비단과 쌀을 내려 주다[편집]

○賜濟州牧使呂義孫綺絹, 又賜其母米三十石。

제주 목사(濟州牧使) 여의손(呂義孫)에게 비단을 주고, 또 그의 모친에게 쌀 30석을 내려 주었다.


9月 12日[편집]

형조에서 이사위가 박이를 구타하고 욕설한 죄를 논하니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丁卯/刑曹上疏論李士渭歐辱朴理之罪, 命下士渭于巡軍獄。

형조에서 상소하여, 이사위(李士渭)가 박이(朴理)를 구타하고 욕설한 죄를 논하니, 명하여 사위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9月 13日[편집]

현비의 상사 기간 중 술 마시고 고기를 먹은 상장군 오용권 등이 탄핵당하다[편집]

○戊辰/刑曹劾啓: “上將軍吳用權、大將軍沈澄ㆍ盧尙義、中軍將軍尹普老、左軍將軍李思謹等, 於發哀陳慰之時, 飮酒食肉。” 上只許罷職。 刑曹又上疏極論, 乃許收其職牒。

형조에서 상장군(上將軍) 오용권(吳用權)·대장군(大將軍) 심징(沈澄)·노상의(盧尙義), 중군 장군(中軍將軍) 윤보로(尹普老), 좌군 장군(左軍將軍) 이사근(李思謹) 등이 현비의 상사에 곡하고 위문할 때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고 탄핵하여 아뢰니, 다만 파직(罷職)만 시켰다. 형조에서 또 상소하여 극론(極論)하니, 그 직첩(職牒)을 거둘 것을 허락하였다.


9月 14日[편집]

한산군 조인옥의 졸기[편집]

○己巳/漢山君趙仁沃卒。 仁沃, 漢陽人, 版圖判書暾之子。 仕恭愍朝, 授散員, 累遷至上護軍。 戊辰, 從上至威化島, 與議回軍, 拜典法判書。 己巳, 遷右副代言, 至壬申, 協謀推戴, 上卽位, 拜中樞院副使, 賜號輸忠佐命開國功臣, 乙亥, 封漢山君。 以病卒, 命攸司禮葬, 贈諡忠靖。 仁沃少有志節, 稍識字, 喜言古人事業。 回軍之時, 與南誾等, 密有推戴之議, 畏上嚴明不發言。 及還, 以其議達于我殿下, 旣聞之, 戒以勿洩。 至壬申, 與誾等言於殿下, 遂成大計。 至庚寅, 配享太祖廟庭。 子: 賚、齎、貫、賡。

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이 졸(卒)하였다. 인옥은 본관이 한양(漢陽)이며, 판도 판서(版圖判書) 조돈(趙暾)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벼슬하여 산원(散員)을 제수 받아, 여러 번 벼슬을 옮겨서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 무진년[27]에 태조를 따라서 위화도(威化島)에 갔다가 회군(回軍)하는 모의에 참예해서 전법 판서(典法判書)가 되었고, 기사년에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옮겼다가, 임신년에 태조를 추대하는 모의에 협찬(協贊)하여, 태조가 즉위하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삼고 수충 좌명 개국 공신(輸忠佐命開國功臣)의 호를 주었다. 을해년에 한산군(漢山君)으로 봉해졌다가 병으로 졸(卒)하였다.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시호(諡號)를 충정(忠靖)이라 주었다. 인옥은 젊었을 때부터 지조(志操)와 기절(氣節)이 있었고, 약간의 식자(識字)가 있어서 고인(古人)의 사업(事業)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회군(回軍)할 때에 남은(南誾) 등과 더불어 비밀히 추대할 모의가 있었으나 태조의 위엄이 두려워서 말을 내지 못했다가, 돌아와서 그 모의를 우리 전하(殿下)[28]에게 주달하였다. 〈전하가〉 이미 듣고는 누설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임신년에 이르러 남은 등과 더불어 우리 전하에게 말하여 드디어 큰 계책을 이루었다. 경인년에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하였다. 아들은 조뇌(趙賚)·조재(趙䝴)·조관(趙貫)·조갱(趙賡)이다.


9月 15日[편집]

의장과 호위를 갖추고 경복궁으로 옮기다[편집]

○庚午/上備儀衛, 移景福宮。

임금이 의장(儀仗)을 갖추고 경복궁으로 옮기었다.


9月 18日[편집]

군신을 인솔하고 성절을 하례하다.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다[편집]

○癸酉/上率群臣, 行賀聖節禮。 朝廷使臣牛牛等, 先於月臺上, 行五拜三扣頭禮。 是日, 幸太平館, 享使臣。

임금이 군신을 인솔하고 성절(聖節)을 하례(賀禮)하였다. 명나라의 사신 우우(牛牛) 등이 먼저 월대(月臺) 위에서 오배 삼고두례(五拜三扣頭禮)를 행하였다. 이날 태평관(太平館)에 거둥하여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9月 22日[편집]

이사위를 석방시키다[편집]

○丁丑/釋李士渭。

이사위(李士渭)를 석방하였다.


9月 24日[편집]

신유정·오용권 등의 죄를 용서하다[편집]

○己卯/宥辛有定、吳用權等罪。

신유정(辛有定)·오용권(吳用權) 등의 죄를 용서하였다.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 [편집]

○築城役訖, 放丁夫。 其春節所築, 有因水湧頹圯者, 以石城築之, 間以土城; 雲梯爲雨水所衝, 以致圮毁處, 復築之; 又置雲梯一所, 以分水勢, 石城有低下者, 加築之。 又作各門月團樓閤。 正北曰肅淸門, 東北曰弘化門, 俗稱東小門。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東南曰光熙門, 俗稱水口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 小北曰昭德門, 俗稱西小門。 正西曰敦義門, 西北曰彰義門。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내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石城)으로 쌓고 간간(間間)이 토성(土城)을 쌓았다. 운제(雲梯)도 빗물로 인하여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고, 또 운제(雲梯) 1소(所)를 두어서 수세(水勢)를 나누게 하고, 석성(石城)으로 낮은 데가 있는 데는 더 쌓았다. 또 각문(各門)의 월단 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9月 28日[편집]

봉상시에서 현비의 존호를 신덕 왕후로, 능호를 정릉으로 헌의하다[편집]

○癸未/奉常寺議獻顯妃尊號曰神德王后, 陵號曰貞。

봉상시에서 현비의 존호를 신덕 왕후(神德王后)라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貞陵)이라 의논해서 올렸다.


풍해도와 전라도의 일부 군현을 통폐합하다[편집]

○使司以各道觀察使報, 受判。 “豐海道: 合連豐、長命鎭爲連豐監務, 文化、白翎爲文化縣, 載寧、三枝江爲載寧縣, 俠溪、新恩爲新恩縣, 嘉禾、永寧爲嘉禾監務, 永康、鐵和、殷栗各爲監務。 全羅道: 同福、和順合爲同福監務, 茂豐、朱溪合爲茂豐監務。”

사사(使司)에서 각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의 보고에 의하여 임금의 비준을 받은 다음, 풍해도(豊海道)의 연풍(連豊)·장명진(長命鎭)을 합하여 연풍 감무(連豊監務)로 하고, 문화(文化)·백령(白翎)을 합하여 문화현(文化縣)으로 하고, 재령(載寧) 삼지강(三枝江)을 합하여 재령현(載寧縣)으로 하고, 협계(俠溪)·신은(新恩)을 합하여 신은현(新恩縣)으로 하고, 가화(嘉禾)·영녕(永寧)을 합하여 가화 감무(嘉禾監務)로 하고, 영강(永康)·철화(鐵和)·은률(殷栗)을 각각 감무(監務)로 하였으며, 전라도의 동복(同福)·화순(和順)을 합하여 동복 감무(同福監務)로 하고, 무풍(茂豊)·주계(朱溪)를 합하여 무풍 감무(茂豊監務)로 하였다.


수릉 개석을 운반하다가 전라도 인부 89인이 다치다[편집]

○全羅道役夫輸壽陵蓋石, 顚仆傷折手足者, 八十九人。

전라도 역부(役夫)들이 수릉(壽陵)의 개석(蓋石)을 운반하다가 넘어져서 손발을 부러뜨린 자가 89인이나 되었다.


五年 冬十月[편집]

10月 1日[편집]

도성 제조 권화·박자안·신유현에게 내구마 1필씩을 내려 주다[편집]

○乙酉朔/賜都城提調權和、朴子安、辛有賢內廐馬各一匹。

도성 제조(都城提調) 권화(權和)·박자안(朴子安)·신유현(辛有賢)에게 내구마(內廐馬) 각각 1필씩을 내려 주었다.


10月 2日[편집]

거둥하여 성 쌓는 역사를 둘러보다[편집]

○丙戌/上出觀城役。

임금이 거둥하여 성 쌓는 역사를 보았다.


10月 3日[편집]

참찬문하부사 안익과 동지중추원사 김희선을 하정사로 보내다[편집]

○丁亥/遣參贊門下府事安翊、同知中樞院事金希善, 如京師賀明年正。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안익(安翊)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김희선(金希善)을 남경에 보내어 명년 정조(正朝)를 하례하게 하였다.


10月 4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戊子/霧。

안개가 끼었다.


10月 5日[편집]

아일조회는 5경 4점, 대조회는 5경 1점에 궐문에 모이게 하다[편집]

○己丑/命百官, 衙日朝會則五更四點, 大朝會則五更一點, 畢集闕門。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아일 조회(衙日朝會)는 5경(更) 4점(點)에, 대조회(大朝會)는 5경 1점에 다 궐문(闕門)에 모이게 하였다.


10月 10日[편집]

좌정승 조준과 판중추원사 이근에게 신덕 왕후의 시책을 올리게 하다[편집]

○甲午/命左政丞趙浚、判中樞院事李懃, 上神德王后諡冊。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근(李懃)에게 명하여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시책(諡冊)을 올리게 하였다.


복업인 이상좌와 강충을 전라도에 두다[편집]

○置復業人李上左、姜忠于全羅道。

복업인(復業人) 이상좌(李上左)와 강충(姜忠)을 전라도에 두었다.


10月 11日[편집]

임금의 탄일이라 중에게 《금강경》을 읽게 하다. 죄수를 석방하고 우현보·이전을 복권시키다[편집]

○乙未/上誕日。 飯僧百八於宮庭, 讀《金經》, 宥中外二罪以下囚, 賜還禹玄寶、李專等家産。

임금의 탄일(誕日)이기 때문에 중 1백 8명을 궁정에서 밥먹이고 《금강경(金剛經)》을 읽게 하였다. 중외(中外)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모두 석방하고, 우현보(禹玄寶)와 이전(李專) 등의 〈적몰(籍沒)했던〉 가산(家産)을 돌려주었다.


10月 13日[편집]

유성이 위성에서 나와 천장군자리로 들어가다[편집]

○丁酉/流星出胃, 入天將軍。

유성(流星)이 위성(胃星)에서 나와 천장군성(天將軍星)으로 들어갔다.


10月 14日[편집]

각도 주군의 들쑥날쑥한 경계를 다시 정하다[편집]

○戊戌/使司以各道州郡之地, 犬牙相入者, 折長補短, 更定疆界, 具本以聞, 上從之。

사사(使司)에서 각도의 주군(州郡)의 땅으로서 개어금니[犬牙]같이 서로 들어간 것은, 긴 것은 끊고 짧은 것은 보태어서 다시 경계를 정할 것을 조목을 갖추어 올리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月 17日[편집]

검교 참찬문하부사 오중화의 졸기[편집]

○辛丑/檢校參贊門下府事吳仲華卒。 仲華, 羅州同福人, 龜城君僐之子。 仕前朝, 官至判密直司事。 初恭愍朝, 上至王京, 僐一見奇之, 致禮意, 屬其子仲華曰: “吾老且死矣, 他日善護吾兒。” 上在潛邸, 待仲華以厚, 及卽位, 拜三司左僕射。 然仲華性不端, 構爲虛辭, 以惑人聽, 以故卒不大用。 作新屋未經塗墍, 繫牛于柱, 牛驚拔柱, 仲華適在其下, 被壓而死。 子: 陞、隮。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오중화(吳仲華)가 졸(卒)하였다. 중화는 본관이 나주(羅州)의 동복(同福)이요, 구성군(龜城君) 오선(吳僐)의 아들이다. 고려조에 벼슬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처음 공민왕 때에 태조께서 개성(開城)에 올라왔을 때에 선(僐)이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그 아들 중화(仲華)를 부탁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늙어서 멀지 않아 죽게 되었으니 뒷날 내 자식을 잘 보호해 주시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중화를 후하게 대접했다가, 즉위하자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를 삼았다. 그러나 중화의 천성이 단정하지 못하여 거짓말을 만들어서 남을 의혹(疑惑)하게 하므로 마침내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새집을 짓고 벽을 바르기 전에 소를 기둥에 매어 두었더니, 소가 놀래어 기둥을 뽑았으므로, 중화가 마침 그 밑에 있다가 눌려서 죽었다. 아들은 오승(吳陞)·오제(吳隮)가 있다.


10月 18日[편집]

도망병 누근도 등 25명을 요동으로 압송하다[편집]

○壬寅/遣殿中卿郭敬儀, 管送遼東逃軍樓近道等二十五名。

전중 경(殿中卿) 곽경의(郭敬儀)를 보내어 도망해 온 군사 누근도(樓近道) 등 25명을 압송해 요동(遼東)으로 보내었다.


고려 시중 최영의 시호를 주게 하다[편집]

○命奉常寺, 諡前朝侍中崔瑩。

봉상시에 명하여 고려조의 시중(侍中)인 최영(崔瑩)의 시호(諡號)를 주게 하였다.


알도리 족의 소을마 월자 등이 와서 방물을 바치다[편집]

○斡都里所乙麻月者等來獻方物, 賜苧麻緜布二十匹。

알도리(斡都里) 소을마(所乙麻)·월자(月者) 등이 와서 방물(方物)을 바치므로, 저포(苧布)·마포(麻布)·면포(緜布) 20필을 내려 주었다.


10月 22日[편집]

천둥이 치다[편집]

○丙午/雷。

천둥이 쳤다.


10月 23日[편집]

최운해와 이귀철을 경상도와 충청도의 도절제사로 임명하다[편집]

○丁未/以知中樞院事崔雲海, 爲慶尙道兵馬都節制使; 前泥城兵馬使李龜鐵, 爲忠淸道兵馬都節制使。

지중추원사 최운해(崔雲海)로 경상도 병마 도절제사를 삼고, 전 이성 병마사(泥城兵馬使) 이귀철(李龜鐵)로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를 삼았다.


복업인 고겸 등 6인을 충청도에 살게 하고 땅과 집을 주다[편집]

○置復業人高謙等六人于忠淸道, 給田宅。

복업인(復業人) 고겸(高謙) 등 6인을 충청도에 두고 토지와 집을 주었다.


10月 27日[편집]

왜구가 동래성을 포위했다가 퇴각. 병선 21척을 불사르고 수군 만호 윤형 등이 전사[편집]

○辛亥/倭圍東萊城不克, 退焚兵船二十一隻。 水軍萬戶尹衡、任軾死之。

왜구가 동래성(東萊城)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면서 병선 21척을 불살랐고, 수군 만호(水軍萬戶) 윤형(尹衡)과 임식(任軾)이 전사하였다.


五年 十一月[편집]

11月 1日[편집]

중군의 둑기가 저절로 움직이다[편집]

○乙卯朔/中軍纛自動。

중군(中軍)의 둑기(纛旗)가 스스로 움직이었다.


11月 2日[편집]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 등이 왜구와 싸워 세 놈의 목을 베다[편집]

○丙辰/慶尙道都節制使崔雲海、雞林尹柳亮等, 與倭戰于長鬐, 斬倭三級。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崔雲海)와 계림 윤(鷄林尹) 유양(柳亮) 등이 왜구와 더불어 장기(長鬐)에서 싸워 왜병 3급(級)을 베었다.


충청도 시진·덕은·채운·직산 등 일부 군현을 통폐합하다[편집]

○幷忠淸道市津、德恩、彩雲, 置德恩監務; 罷慶陽縣爲慶陽庄, 屬稷山郡。

충청도 시진(市津)·덕은(德恩)·채운(彩雲)을 합하여 덕은 감무(德恩監務)를 두고, 경양현(慶陽縣)을 파(罷)하고 경양장(慶陽庄)으로 하여 직산군(稷山郡)에 예속시키었다.


11月 4日[편집]

계품사 하윤과 표문을 지은 정탁이 가지고 온 예부의 자문[편집]

○戊午/計稟使河崙、撰表人鄭擢齎禮部咨文, 回自京師。 其咨曰:

本部左侍郞張炳等官欽奉聖旨: “前者朝鮮國表內, 撰表者故下戲侮字樣, 特將使臣柳玽等六名, 留在京師, 索取同撰表人鄭道傳赴京。 今使者歸, 朝鮮國王已將鄭道傳作患病沈重, 破調不來, 只將同撰表人鄭擢等參名赴京。 訊其所以, 各官委實秀才, 曾經撰表, 定擬前文。 前者差來柳玽等, 皆不係秀才, 比今使者未至, 已自發還本國。 今來秀才與舊來秀才, 欲便發還, 蓋因此等深通古今, 博知典故, 所以表箋內斟酌定議, 安頓戲侮字樣。 若以朝鮮國王言之, 無乃皆數生爲之? 朕以古人比較數生者, 皆不如我中國一賤人爾。 昔楚伐鄭, 軍小北陷。 及伶人鄖公鍾儀, 鄭旣得之, 獻之於晋。 晋公於軍府見, 問: ‘南冠者誰?’ 有司答: ‘鄭人所獻楚囚也。’ 晋公召問之。 鍾儀, 本伶人賤人也, 其所應答言辭語意, 皆中平之理, 無偏循苟且之言。 雖在伶人, 其志君子哉! 公語范文子, 文子乃知鍾儀君子者, ‘盍歸之? 晋、楚構兵, 連歲不已, 傷生害命, 有乖天地之氣。 事雖大, 此人旣歸, 晋、楚罷兵必成。’ 公允其說, 厚待而歸之。 旣歸未久, 楚遣人報鍾儀之歸, 晋之德也。 由是兵解禍消, 數十年無征戰之勞。 此一賤人懷君子之道, 能排難解紛, 以安黎庶。 朝鮮數儒, 不如古楚之一伶人也。 今留京師, 無使隨侍於王。 故人有云: ‘以道助人主, 不以兵强天下。’ 此數儒, 不爲王量力, 敢作小敵之堅, 敢作戲侮生隙, 以構民殃。 爾禮部移文朝鮮國王, 無用是生留於中國, 別授微職。”

계품사(計稟使) 하윤(河崙)과 표문(表文)을 지은 정탁(鄭擢)이 예부 자문(禮部咨文)을 가지고 남경에서 돌아왔다. 그 자문은 이러하였다.

"본부(本部) 좌시랑(左侍郞) 장병(張炳) 등 관원이 삼가 황제의 명을 받자온즉, ‘지난번의 조선국 표문 속에 표문을 지은 자가 고의로 희롱하고 모멸하는 문자를 썼으므로, 특히 사신(使臣) 유구(柳玽) 등 6명을 경사(京師)에 머물러 두고 그 표문을 지은 정도전(鄭道傳)을 찾아내어 경사로 보내라 했더니, 지금 사신이 돌아왔는데, 조선 국왕이 「정도전은 병이 침중(沈重)해서 조리를 하지 못하고 올 수 없다.」 하고, 단지 표문을 함께 지은 정탁 등 3명만이 경사에 왔기에, 그 연유를 신문하였는데, 각 관원이 수재(秀才)가 표문을 지은 것이 확실하다 하고, 앞서 보낸 글도 그들이 의논해 만든 것이라 하는데, 지난 번에 보내 온 유구 등은 모두 수재가 아니므로, 이번 사신이 오지도 않아서 벌써 본국으로 돌려보냈고, 이번에 온 수재는 지난번에 온 수재와 함께 곧 돌려보내려 한다.

대개 이들은 깊이 고금(古今)을 통(通)하고 널리 전고(典故)를 알아서, 표문과 전문 속에다 참작(參酌)해 의논하여 희롱하고 모멸한 문자를 넣었으니, 만약에 조선 국왕으로 말하면, 모두 두어 사람의 유생(儒生)이 한 바라 하지 않겠는가? 짐(朕)은 옛사람으로 두어 사람의 유생을 비교할 때에 모두 우리 중국의 한 천(賤)한 사람만도 못한 것이다. 옛날 초(楚)나라가 정(鄭)나라를 칠 때에 군사가 적어서 패하여, 영인(伶人)[29] 운공종의(鄖公鍾儀)를 정나라가 포로하여 진(晉)나라에 바치니, 진공(晉公)이 군부(軍府)에서 보고 「남관(南冠)을 쓴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유사(有司)가, 「정나라 사람이 바친 초나라 포로라.」 하니, 진공이 불러서 물으매, 종의는 본래 악공(樂工)으로 천인(賤人)이되, 그 응답(應答)하는 말이 모두 중평(中平)한 이치로서 편벽되고 구차한 말이 없어서, 비록 악공으로 있으나 그 뜻은 군자이었다. 공(公)이 범문자(范文子)에게 말하니, 문자가 종의가 군자인 줄 알고 「어찌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진나라와 초나라가 전쟁을 하여 여러 해 동안 그치지 않아서, 생명(生命)을 상해(傷害)한 것이 천지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한 일이 비록 컸으나, 이 사람이 이미 돌아 간 뒤엔 진나라와 초나라와의 군사를 파(罷)하는 것이 반드시 될 수 있을 것입니다.」하여, 진공이 그 말대로 후대(厚待)해서 돌려보낸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초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서 종의의 돌아온 것을 진나라의 덕이라고 하여, 이 까닭에 군사가 풀리고 전쟁이 그쳐져서 수십 년 동안 전쟁하는 괴로움이 없었으니, 이것은 한 사람의 천인(賤人)이 군자(君子)의 덕을 품고 있어 능히 난리를 풀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한 것이다. 조선의 두어 사람의 선비는 초나라의 한 악공만도 못하므로, 이제 경사에 억류시켜서 왕을 모시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도(道)로써 임금을 도와주고, 군사로써 천하에 강한 체하지 말라.」 했으니, 이 두어 사람의 선비는 왕을 위해서 힘을 생각하지 않고 감히 작은 적(敵)으로써 반항하는 행동을 하여, 희롱하고 경멸하는 문자로 틈이 생기게 하여 백성들에게 앙화(殃禍)가 미치게 하였다. 너 예부(禮部)는 조선 국왕에게 글월을 보내[移文]되, 이들 선비를 중국에 머물러 둘 필요도 없으니 낮은 벼슬이나 주게 하라.’ 하였습니다."


11月 5日[편집]

왜구가 평해성을 포위하다[편집]

○己未/倭圍平海城。

왜구가 평해성(平海城)을 포위하였다.


11月 6日[편집]

요동 백호 하질이 죽게 된 경과를 추궁하는 명 좌군 도독부의 자문[편집]

○庚申/謝恩進表使權仲和、進箋使具成老、被留使臣柳玽ㆍ鄭臣義回自京師。 臣義來傳左軍都督府咨。 其咨曰:

本府左都督楊文等官, 欽奉聖旨: “去年五月, 朝鮮國進馬使臣楊添植等, 回還本國, 遼東都司差百戶夏質、軍人劉頑子等一十名, 護送楊添植等, 抵鴨綠江。 至彼, 進馬使臣, 以好意諭說百戶幷旗軍等, 到鴨綠江左至義州萬戶府處館驛內安下。 以微禮相待間, 其中諭說辭多, 百戶夏質不然其說, 然後發到鴨綠。 舟至中流, 內船夫一名, 將百戶夏質項下衣領鎖紐住, 一同投江, 以致百戶沈江渰死。 此果朝鮮國王之謀歟? 抑義州萬戶之不仁歟? 以此輕薄奸詐, 擅生釁端。 恁左軍都督府移文朝鮮國王, 令義州萬戶前來回話。”

사은 진표사(謝恩進表使) 권중화(權仲和)와 진전사(進箋使) 구성로(具成老)와 남경에 억류되어 있던 사신(使臣) 유구(柳玽)와 정신의(鄭臣義)가 남경에서 돌아왔는데, 신의가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을 전하였다. 그 자문은 이러하였다.

"본부(本府) 좌도독(左都督) 양문(楊文) 등 관원이 삼가 황제의 명을 받자왔는데, ‘지난해 5월에 조선국 진마 사신(進馬使臣) 양첨식(楊添植) 등이 본국에 돌아갈 때에, 요동 도사(遼東都司)에서 백호(百戶) 하질(夏質)과 군인(軍人) 유완자(劉頑子) 등 10명을 시켜 양첨식 등을 호송하여 압록강까지 이르게 하니, 그곳에 이른 진마 사신(進馬使臣)이 좋은 말로써 백호(百戶)와 기군(旗軍)들에게 설유(說諭)해서 압록강 건너에 있는 의주 만호부(義州萬戶府)의 관역(館驛) 안에 머물러 놓고 변변치 못한 예(禮)로 서로 접대하면서 말이 많았으나, 백호 하질은 그 말을 옳게 여기지 않고 압록강을 떠나서 배가 중류(中流)에 이르자, 그 중의 선부(船夫) 1명이 백호 하질의 목 밑에 있는 옷깃 단추를 거머쥐어 한꺼번에 강물로 던져서 백호가 강물에 빠져서 죽었으니, 이것이 과연 조선 국왕의 계책이었는가? 혹은 의주 만호(義州萬戶)가 나쁜 것인가? 이런 경박하고 간사한 것들이 함부로 흔단(釁端)을 일으켰으므로, 좌군 도독부를 시켜서 조선 국왕에게 자문을 보내어 의주 만호로 하여금 와서 회답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권중화 등이 김적선 일행이 등주에서 배가 부서져 익사했음을 아뢰다[편집]

○仲和等言: “金積善過登州海, 遭風船敗, 一行皆渰死。”

권중화(權仲和) 등이 말하였다.

"김적선(金積善) 등이 등주(登州) 바다를 지나다가 풍랑을 만나서, 배가 부서져 일행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11月 8日[편집]

태평관에 거둥하여 사신 우우 등을 접대하다[편집]

○壬戌/幸太平館, 享使臣牛牛等, 始進肉膳。

태평관(太平館)에 거둥하여 사신 우우(牛牛) 등을 접대하였는데, 처음으로 육선(肉膳)을 주었다.


11月 9日[편집]

환관 왕예가 말에서 떨어져 영접관과 접반사에게 행패를 부리다[편집]

○癸亥/使臣牛牛等詣闕謝。 宦官王禮墜馬發怒, 鞭迎接官鄭贇, 接伴使敬興尹張子忠止之, 亦被辱。 上聞之, 下供驛署丞崔得冏于巡軍獄。 以不閑之馬, 進于使臣也。

사신 우우(牛牛) 등이 대궐에 나와서 사례하였다. 환관(宦官) 왕예(王禮)가 말에서 떨어져서 성을 내어 영접관(迎接官) 정빈(鄭贇)에게 채찍질을 하는 것을, 접반사(接伴使) 경흥 윤(敬興尹) 장자충(張子忠)이 이를 말리다가 역시 곤욕을 당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공역서 승(供驛署丞) 최득경(崔得冏)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으니, 순하지 못한 말을 사신에게 태운 까닭이었다.


곽충보와 이천우를 강릉도에 보내어 왜구를 방비케 하다[편집]

○遣商議中樞郭忠輔、前商議中樞李天祐, 禦倭于江陵道。

상의중추(商議中樞) 곽충보(郭忠輔)와 전 상의중추 이천우(李天祐)를 강릉도(江陵道)에 보내어 왜구를 방비하게 하였다.


11月 10日[편집]

상의문하부사 도흥을 광암사에 보내어 성변의 소재 법석을 베풀다[편집]

○甲子/遣商議門下府事都興于光巖寺, 設星變消災法席。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도흥(都興)을 광암사(光巖寺)에 보내어 성변 소재 법석(星變消災法席)을 베풀었다.


하성절사 조반이 남경에서 돌아오다[편집]

○賀聖節使趙胖回自京師。

하성절사(賀聖節使) 조반(趙胖)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11月 13日[편집]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가 왜구를 쳐죽이니, 왜구가 강원도로 향하다[편집]

○丁卯/慶尙道都節制使崔雲海, 擊斬倭寇于寧海, 倭還騎船, 向江原道。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崔雲海)가 왜구를 영해(寧海)에서 쳐 죽이니, 왜구가 도로 배를 타고 강원도로 향하였다.


11月 15日[편집]

월식이 있었다[편집]

○己巳/月蝕。

월식(月蝕)하였다.


11月 16日[편집]

화성이 태미성 우집법 서북 병성 남쪽으로 들어가다[편집]

○庚午/火入太微右執法西北屛星南。

화성(火星)이 태미성 우집법(太微星右執法) 서북 병성(屛星) 남쪽으로 들어갔다.


11月 17日[편집]

왜구가 울진현에 침입하다[편집]

○辛未/倭寇蔚珍縣。

왜구가 울진현(蔚珍縣)을 침략하였다.


울주 지주사 이은이 왜구 6급을 베니 비단을 내려 주다[편집]

○倭侵蔚州境, 知州事李殷督州兵斬倭六級, 賜綺絹。

왜구가 울주(蔚州) 지방을 침략하니 지주사(知州事) 이은(李殷)이 주병(州兵)을 독려해서 왜구 6급(級)을 베었으므로, 비단을 내려 주었다.


11月 19日[편집]

태평관에 거둥하여 사신을 연회하고 수릉에 가다[편집]

○癸酉/幸太平館宴使臣, 遂如壽陵。

태평관에 거둥하여 사신을 연회하고, 수릉(壽陵)에 갔다.


11月 20日[편집]

정총·권근·김약항·노인도의 가솔을 호송하여 남경에 보내다[편집]

○甲戌/遣判禮賓寺事姜仲琳, 管送鄭摠、權近、金若恒、盧仁度等家小如京師。 賜送摠、近、若恒苧麻布各二十匹, 仁度苧麻布各六匹。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강중림(姜仲琳)을 보내서 정총(鄭摠)·권근(權近)·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 등의 가솔(家率)을 호송하여 남경에 보내었다. 총·근·약항에게는 모시와 마포(麻布) 각각 20필을 주고, 인도에게는 모시와 마포 각 6필을 주었다.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에게 궁온과 비단을 내려 주다[편집]

○遣(閣)〔閤〕門舍人權曉于慶尙道, 賜崔雲海宮醞綺絹。

합문 사인(閤門舍人) 권효(權曉)를 경상도에 보내서 최운해(崔雲海)에게 궁온(宮醞)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11月 21日[편집]

사신 우우와 환관 왕예가 경사로 돌아가다[편집]

○乙亥/使臣牛牛、宦官王禮等還京師, 戶曹典書楊添植偕行。

사신 우우(牛牛)와 환관 왕예(王禮) 등이 남경으로 돌아갔는데, 호조 전서(戶曹典書) 양첨식(楊添植)이 함께 갔다.


도당에서 각도 역마의 짐 무게를 60근으로 제한하다[편집]

○都堂定各道驛路䭾限六十斤, 知重過行。

도당(都堂)에서 각도 역마(驛馬)의 짐 싣는 것을 60근을 한도로 하고, 무게를 안 후 지나다니게 하였다.


11月 23日[편집]

삼사 우복야 권화 등을 강원도에 보내어 왜구를 방비케 하다[편집]

○丁丑/遣三司右僕射權和、商議中樞院副使張思靖、漢城尹曺益修, 禦倭于江原道。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권화(權和)와 상의중추원부사(商議中樞院副使) 장사정(張思靖)과 한성 윤(漢城尹) 조익수(曺益修)를 강원도로 보내어 왜구를 방비하게 하였다.


위그르 인으로 귀화한 판삼사사 설장수의 관향을 계림으로 삼게 하다[편집]

○賜鄕判三司事偰長壽雞林。 長壽, 回鶻人也。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에게 계림(鷄林)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해 주었다. 설장수는 회골(回鶻) 사람이다.


백관이 모두 상복을 벗다[편집]

○百官皆釋服。

백관이 모두 상복(喪服)을 벗었다.


사돈 맺자고 한 것과 사신 유구 및 권중화 등이 돌아온 것에 사은하는 주문[편집]

○遣判三司事偰長壽、中樞院副使辛有賢, 如京師謝恩。 奏曰:

陪臣河崙等回自京師, 欽傳宣諭聖旨節該: “我實要做親, 我的子孫厮兒多女兒小。 恁那里纔八歲, 到十六歲, 便是成丁, 恁那里實事小虛事多, 是實呵。 我和爾做親, 恁只要至誠, 不要生事。” 欽此, 又準禮部咨, 欽奉聖旨節該: “差來使臣柳玽等, 皆不係秀才, 發還本國。” 欽此, 臣欽感聖恩, 擧國忻慶。 謹遣陪臣偰長壽等, 欽齎鞍馬禮物, 赴京謝恩。

又咨禮部曰:

陪臣權仲和等回自京師, 欽傳旨意: “仲和等四起使臣正從共二十六名, 欽蒙聖恩, 各賜馬一匹, 騎坐還國。” 聽此, 當職欽感實深。

판삼사사 설장수와 중추원 부사 신유현(辛有賢)을 남경에 보내어 사은(謝恩)하였다. 그 주문(奏文)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하윤(河崙) 등이 남경에서 돌아와 삼가 성지(聖旨)를 전해 받자왔사온데, ‘나는 실심(實心)으로 친(親)하려고 한다. 내 자손이 사내아이는 많고 여아는 적다. 그 곳에서는 겨우 8세에서 16세에 이르면 성정(成丁)이 된다고 한다. 그곳은 실사(實事)는 적고 허사(虛事)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내가 너와 친하는 데 너는 반드시 지성을 요하고 일이 생기는 것을 요하지 않는다.’ 하였고, 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에 의거하여 삼가 성지(聖旨)를 받자왔는데, ‘보내 온 사신(使臣) 유구(柳玽) 등이 모두 수재(秀才)가 아니므로 본국으로 돌려보낸다.’ 하였사오니, 신이 성은(聖恩)에 감사하옵고, 온 국민이 기꺼워하는 경사입니다. 삼가 배신(陪臣) 설장수(偰長壽) 등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鞍馬]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가서 사은(謝恩)하게 하옵니다."

또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었다.

"배신 권중화 등이 경사에서 돌아왔는데 삼가 황제의 분부를 전해 받자온즉, 중화 등 네 패의 사신(使臣) 정사(正使)와 종사관(從事官) 26명에게 각각 말 1필씩 주어서, 말을 타고 돌아오게 하였다 하오니, 이것을 듣고 당직(當職)은 감사하옵기가 실로 깊습니다."


전 의주 도병마사 진충귀를 경사로 압송하며 좌군 도독부에 보낸 자문[편집]

○又遣司譯院舍人崔雲, 管送前義州都兵馬使陳忠貴于京師, 咨左軍都督府曰:

承準來咨: “本府左都督楊文等官, 欽奉聖旨節該: ‘去年五月, 朝鮮國進馬使臣楊添植等還國, 遼東都司差百戶夏質護送至彼, 以致百戶沈江渰死。 恁左軍都督府移文, 令義州萬戶前來回話。’” 準此, 行據都評議使司狀啓: “責得陳忠貴狀供: ‘洪武二十八年六月十五日, 有遼東都司差來百戶夏質, 帶領軍人十四名, 護送楊添植, 到來本州館驛安歇, 爲因梅雨, 江水泛漲, 留住十日, 不能前渡。 至當月二十五日天晴, 夏質催倂帶來軍人, 將本州小槽兒船六隻內四隻, 遣令軍人十一名乘坐, 先到鴨綠江, 到婆娑府去訖。 內二隻連拴做一船, 百戶夏質嗔怪過江遲滯。 帶領軍人劉丑兒等三名, 幷本州船梢吳乙冲、吳伯等五名, 乘坐渡江去了。 當日申時, 劉丑兒等三名, 隔江呼喚, 卽時令人將小船還渡。’ 劉丑兒等前來告說: ‘丑兒等根同夏質, 帶領船梢吳乙冲等五名, 渡涉鴨綠江, 渡第三渡西江, 船至江心水急, 爲所載牛隻跌倒, 以致踏船翻覆, 眼見百戶夏質, 幷船梢吳伯渰死。 其餘船梢吳乙冲等四名, 不知去向。 丑兒等浮水, 得出忠貴。’ 聽此, 卽使差人, 同劉丑兒等, 撑駕小船十隻, 沿江撈覓夏質屍體, 經及數日不見。 將此事因, 已經申報遼東都司去訖。 所供上項詞因, 皆是聽據劉丑兒等及吳乙冲等回來所說, 竝不曾親見夏質溺死事由, 所供是實。 得此謹錄狀啓。” 據此, 令準欽奉事理, 將萬戶陳忠貴及其時同渡船梢人等, 責差通事崔雲管送, 赴京前去。

또 사역원 사인(司譯院舍人) 최운(崔雲)을 보내어 전 의주 도병마사(義州都兵馬使) 진충귀(陳忠貴)를 경사(京師)로 압송하고,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에 자문(咨文)을 보내었다.

"온 자문(咨文)을 받자오니, ‘본부(本府)의 좌도독(左都督) 양문(楊文) 등 관원이 성지(聖旨)를 받들기를, 「지난해 5월에 조선국 진마 사신(進馬使臣) 양첨식(楊添植) 등이 환국(還國)할 때에,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백호(百戶) 하질(夏質)을 시켜 호송하여 그곳에 이르게 하였는데, 백호가 강에 빠져서 죽었다. 좌군 도독부는 공문을 보내[移文]어 의주 만호(義州萬戶)가 이리 와서 회답하게 하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장계(狀啓)에 의거하면, 진충귀(陳忠貴)의 공초(供招)에, ‘홍무 28년 6월 15일에 요동 도사가 보내 온 백호 하질이 군인 14명을 거느리고 양첨식(楊添植)을 호송하여 와서 본주(本州)의 관역(館驛)에서 평안히 쉬고 있었는데, 여름철 장마로 인하여 강물이 불어서 10일간을 유숙하도록 건너갈 수 없었고, 그달 25일에야 날씨가 개어서 하질이 인솔하고 온 군인을 독촉하여 의주(義州)의 작은 배 6척을 가지고, 그중의 4척은 군인 11명을 태워 보내서 먼저 압록강에 이르러서 파사부(婆娑府)에 도착하고, 그 중의 2척은 한데 잡아매어, 백호 하질이 강을 건너가는 것이 지체된다고 호통을 치고 꾸짖으면서, 군인 유축아(劉丑兒) 등 3명과 의주의 뱃사공 오을충(吳乙冲)·오백(吳伯) 등 5명을 거느리고 함께 타고 강을 건너갔는데, 당일 신시(申時)에 유축아 등 3명이 강건너 편에서 소리를 높여 부르므로, 즉시 사람을 시켜서 작은 배를 가지고 도로 건너가니, 「축아 등이 말하기를, 축아 등이 하질을 따라서 사공 오을충 등 5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는데, 제삼도(第三渡) 서강(西江)을 건너다가 배가 강심(江心)에 이르자 급류(急流)에 휩쓸려, 실었던 소[牛]들이 넘어지는 바람에 배가 밟혀 뒤집혔는데, 눈으로 본즉 백호 하질과 사공 오백이 물에 빠져 죽고, 그 나머지 사공 오을충 등 4명은 간 곳을 모릅니다.」 하였습니다. 축아 등이 헤엄쳐서 나왔는데, 충귀가 이 말을 듣고 즉시 사람을 시켜서 유축아 등과 함께 작은 배 10척을 한데 얽어 가지고 강을 오르내리면서 하질의 시체를 찾기를 수일 동안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이러한 사유를 벌써 이미 요동 도사에 보고하였습니다. 보고하여 올린 이상 사유는 모두 유축아 등과 오을충이 돌아와서 한 말을 들은 것이며, 하질이 빠져 죽는 것은 직접 보지 못했으나, 공초(供招)는 실상이기로 여기에 의거하여 삼가 장계를 올린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이제 자문에 의거하여 만호 진충귀와 그때 함께 건넜던 뱃사공 등을 통사(通事) 최운(崔雲)에게 책임지워 경사(京師)로 우선 압송하나이다."


11月 30日[편집]

의흥 삼군부에서 역대 강무 제도를 참고하여 강무를 시행할 것을 상소하다[편집]

○甲申/義興三軍府上疏曰:

謹按歷代講武之制, 成周春夏振旅茇舍, 秋冬治兵大閱。 四時皆敎, 其肄之也精; 內外皆敎, 其用之也利。 此成周所以得持守之道也。 西漢御戎輅執弩, 齎束帛賜武官, 肄孫、吳之法, 習戰陣之儀, 會五營之士, 爲八陣之法, 此京師講武, 以乘之爲名者也; 諸郡有郡守都尉, 課都試之功, 凡車騎(才)〔材〕官樓船, 皆肄習焉, 此郡國講武, 以都試爲名者也。 漢高帝出入兵間, 熟究利病, 其爲子孫規模至矣。 秦失講武之制, 肄兵之法, 僅行於中國, 而內外之敎皆廢。 夫以富强之力, 雄視天下, 匹夫作難, 函谷不守, 蓋失講武之制故也。 東漢罷尉侯之職, 無都試之役, 廢車騎材官樓船之士。 其後官無警捕, 實啓戎心。 一有兵革, 取辦黔首, 不及講其射御, 驅之以卽强敵, 是以每戰常負。 不敎而戰, 是謂棄之, 跡其禍敗, 光武豈能逃其責哉? 恭惟殿下, 以神武之資, 肇造丕基, 凡禮文之事, 以次修擧, 而講武之事, 獨不行焉, 豈非盛代之闕典歟? 伏望下敎中外, 以講武事, 示安不忘危之計。 其講武之制與踈數之節, 時與勢殊, 取古制而損益之, 見作《蒐狩講武圖》, 京中當四時之季, 講武獲禽, 以祭宗社, 外方當春秋兩節, 講武獲禽, 以祭其州方社之神。 如此則武事熟, 神人和矣。 當講武時, 乘輿親幸及攝行儀注, 外方官員監考之法, 令禮官詳定啓聞。

上從之。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에서 상소하였다.

"삼가 역대의 강무 제도(講武制度)를 상고하옵건대, 주[成周]나라 시대에는 봄과 여름에는 군막(軍幕)에서 군병을 훈련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군사를 크게 사열(査閱)했다 하오니, 사철 언제나 교련하므로 그 익히는 것이 정(精)하였고, 안팎으로 다 가르치므로 그 쓰기가 이(利)로왔으니, 이것이 주나라가 나라 지키는 도리를 얻은 것입니다. 서한(西漢) 때에는 임금이 융로(戎輅)[30]에 올라서 쇠뇌[弩]를 잡고 비단을 가지고 무관(武官)에게 주어서 손(孫)·오(吳)[31]의 법을 익히고, 싸우고 진(陣)치는 제도를 익혔는데, 오영(五營)의 군사들을 모아서 팔진법(八陣法)을 시켰으니, 이것이 경사(京師)에서 강무(講武)하는 것인데 승법(乘法)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여러 고을[郡]에서 군수(郡守)와 도위(都尉)가 있어서 도시(都試)의 성적을 매기므로, 모든 수레 타고 말 타는 재관(才官)과 누선(樓船)이 모두 익히게 하니, 이것은 고을이나 나라에서 강무(講武)하는 것으로서 도시(都試)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한(漢)나라 고제(高帝)는 군중(軍中)에 출입(出入)하면서 이병(利病)을 깊이 연구하여 그 자손을 위한 규모(規模)가 지극하였습니다. 진(秦)나라가 강무하는 제도를 잃어버려서 군사를 훈련하는 법이 겨우 중국에서 행해졌으나, 안팎으로 가르치는 것이 모두 없어졌으니, 대개 부강(富强)한 힘으로 천하를 웅시(雄視)하였으되, 필부(匹夫)가 난을 일으키매 함곡관(函谷關)을 지키지 못한 것은 대개 강무의 제도를 잃었던 까닭입니다. 동한(東漢)도 위(尉)·후(侯)의 벼슬을 파(罷)하고 도시(都試)의 일을 없애어, 수레와 말 타는 재관(才官)과 누선(樓船)의 군사들을 폐해 버려서, 그 뒤에는 관(官)에서도 경계하고 잡는 것이 없어서, 이것이 오랑캐가 융심(戎心)을 내도록 열어 주었으니, 한번이라도 전란이 있으면 백성들에게 방위를 시켜, 그 활 쏘고 말 타는 법을 미처 가르치지 못하고 강한 적병에게 몰아넣으므로, 이 까닭에 매양 싸울 때마다 항상 지게 되었습니다. 가르치지도 않고 싸움을 시키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니, 그 화패(禍敗)의 원인을 추구하면 광무제(光武帝)가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무(神武)의 자질로 왕업(王業)의 터전을 처음 마련하시와 예문(禮文)의 일은 차례로 마련하시면서 강무(講武)의 일만은 오직 행하지 않으시니, 어찌 성대(盛代)의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중외(中外)에 강무(講武)의 일을 명령하시어 편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잊지 않으시는 계책을 보이시어, 그 강무의 제도와 드물게 하고 자주 하는 절목은 시대와 사세(事勢)가 다르오니, 옛날 제도에다가 더하기도 하고 덜기도 하여 사냥하여 강무하는 그림[蒐狩講武圖]을 만들어서, 서울에서는 사철의 끝달에 강무하여 짐승을 잡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제물로 올리며, 외방에서는 봄·가을 양철에 강무하여 짐승을 잡아서 그 지방의 귀신에게 제사지내게 하면, 무사(武事)가 익숙해지고 신(神)과 사람이 화(和)할 것입니다. 강무할 때를 당해서는 어가(御駕)가 친히 거둥하시는 것과 대리로 행하는 의식(儀式)이며, 외방 관원들이 감독하고 성적을 매기는 법을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상정(詳定)하여 아뢰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五年 十二月[편집]

12月 1日[편집]

흥천사에 거둥하여 공장들에게 음식을 주다[편집]

○丙戌/上幸興天寺, 命餉工役。

임금이 흥천사(興天寺)에 거둥하여 공장(工匠)들에게 음식을 주었다.


12月 3日[편집]

일기도·대마도를 정벌하러 떠나는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내린 교서[편집]

○丁亥/以門下右政丞金士衡爲五道兵馬都統處置使, 以藝文春秋館太學士南在爲都兵馬使, 中樞院副使辛克恭爲兵馬使, 前都觀察使李茂爲都體察使, 聚五道兵船, 擊一歧、對馬島。 將行, 上出南門外餞之, 授士衡鈇鉞敎書, 賜鞍馬、毛冠、甲弓矢、藥箱; 賜在、茂、克恭各毛冠、甲弓矢。 敎書曰:

自古王者, 常以撫綏中外爲務。 不幸而有鼠竊狗偸之虞, 則專責方伯, 以驅逐擒制之, 至於其勢昌熾, 方伯不能制禦, 然後命大臣出征, 若召虎之征淮夷, 吉甫之伐玁狁是已。 予自卽位以來, 凡用兵之道, 一遵古昔, 未嘗輕擧, 恐致斯民之擾動也。 今蕞爾島夷, 敢肆猖狂, 侵我邊鄙, 至於再四, 已遣將師, 出而禦之。 然非大興師旅, 水陸相迫, 一擧而殄滅之, 則邊境無時得息矣。 卿衣冠冑族, 廊廟宏才, 稟氣森嚴, 立志弘毅, 揆度庶政, 咸當於理, 薦進人材, 允適其宜, 明足以識虛實, 智足以制寇亂。 是用命爲諸道兵馬都統處置使, 授以節鉞, 佐以同列, 廣置僚寀, 以重其威, 庶幾諸將, 俯伏以聽命, 盜賊聞風而破膽。 卿其坐運籌策, 指示將師, 謀無再擧, 以圖萬全, 以副予懷。 其有將師之失律, 守令之稽緩, 法所當懲, 無問大小, 便卽處決。

都堂餞於漢江。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으로 오도 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남재(南在)로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삼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극공(辛克恭)으로 병마사(兵馬使)를 삼고, 전 도관찰사(都觀察使) 이무(李茂)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5도(道)의 병선(兵船)을 모아서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對馬島)를 치게 하였다. 길을 떠날 때에,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이를 전송하고, 사형에게 부월(鈇鉞)과 교서(敎書)를 주고 안장 갖춘 말[鞍馬]·모관(毛冠)·갑옷·궁시(弓矢)·약상자(藥箱子)를 내려 주었으며, 재·무·극공에게는 각각 모관·갑옷·궁시를 내려 주었다. 교서는 이러하였다.

"예로부터 임금 된 자는 항상 중외(中外)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데에 힘써왔다. 불행히도 쥐나 개 같은 좀도둑이 생겼을 때에는 오로지 방백(方伯)에게 책임을 지워서 몰아 쫓고 잡게 하였으며, 그 세력이 성해져서 방백(方伯)이 능히 제어하지 못할 때에야 대신(大臣)에게 명령하여 출정(出征)하게 하는 것이니, 소호(召虎)[32]가 회이(淮夷)를 정벌한 것과 윤길보(尹吉甫)[33]가 험윤(玁狁)[34]을 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무릇 용병(用兵)의 도리를 한결같이 옛일을 따라서 일찍이 경솔한 거조가 없었던 것은 이들 백성들이 동요될까 염려하였던 것인데, 이제 하찮은 섬 오랑캐가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노한 지가 3, 4차에 이르러서, 이미 장수들을 보내어 나가서 방비하게 하고 있으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수륙(水陸)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一擧)에 섬멸하지 않고는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 경은 의관(衣冠)의 명문(名門)이며 조정에서는 재상의 큰 재목이라, 기품(氣稟)이 삼엄(森嚴)하고 입지(立志)가 홍의(弘毅)해서 서정(庶政)을 처리할 때는 다 이치에 맞고, 인재(人材)를 천거하면 모두 그 소임에 합당하여, 밝기는 허(虛)와 실(實)을 잘 알고, 슬기로움은 외적의 난을 제어할 것이다. 이에 제도 병마 도통처치사(諸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절월(節鉞)[35]을 주어 동렬(同列)을 시켜 돕게 하고, 널리 막료(幕僚)를 두어서 그 위엄을 중(重)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부복(俯伏)해서 명령을 들을 것이요, 적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肝膽)이 떨어질 터이니, 경은 앉아서 계책을 세워서 장수와 군사들을 지휘하여 두 번 출병할 일이 없게 하여, 만전(萬全)을 도모하여 나의 생각에 맞게 하라. 혹시나 장수나 군사가 군율(軍律)을 어기거나, 수령(守令)들의 태만한 일이 있거든 법대로 징계할 것이며, 크거나 작은 일을 물론하고 즉시 처결(處決)하라."

도당(都堂)에서 한강(漢江)까지 전송하였다.


한성 윤 민개의 졸기[편집]

○漢城尹閔開卒。 開, 驪興人, 典理判書抃之季子。 稟資聰明, 立志慷慨, 揚歷臺諫, 至爲知申事, 出納惟允。 當恭讓遜位之日, 開爲大司憲, 欲執不可, 見於辭色。 南誾等謂趙浚等曰: “開可斬。” 浚不可乃止。 後爲觀察慶尙、忠淸, 皆有成績。 卒年三十七, 士林惜之。 開觀察之日, 自奉甚薄約, 以致成疾。 上聞之, 許令各道觀察使, 一日四時進饌, 永爲恒式。

한성 윤(漢城尹) 민개(閔開)가 졸(卒)하였다. 개(開)는 본관이 여흥(驪興)이요, 전리 판서(典里判書) 민변(閔抃)의 막내아들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뜻이 강개(慷慨)하여 대간(臺諫)을 지냈고, 지신사(知申事)가 되기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말의〉 출납을 잘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위에서 물러나던 날에 민개가 대사헌(大司憲)으로서 반대하고자 하여 말과 기색[辭色]에 나타내었었다. 남은(南誾) 등이 조준(趙浚)에게,

"개는 베어야 한다."

하였으나, 준이 반대해서 죽지 않았다. 뒤에 경상·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모두 성적이 좋았었다. 죽을 때의 나이가 37세였다. 사림(士林)들이 아깝게 여기었다. 개가 관찰사로 있을 때에 자봉(自奉)이 너무 박해서 병이 나게 되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각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하루 네 때씩 먹도록 길이 항식(恒式)으로 정하였다.


12月 7日[편집]

종루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한 종을 보다[편집]

○辛卯/上幸鍾樓, 觀新鑄鍾。

임금이 종루(鐘樓)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鑄造)한 종(鐘)을 보았다.


12月 8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보이다[편집]

○壬辰/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이었다.


12月 9日[편집]

왜선 60척이 영해 축산도에서 투항해 오다[편집]

○癸巳/倭船六十, 到寧海丑山島。 其萬戶林溫等, 奉書於觀察使韓尙質曰: “吾等欲降, 若許貴國邊地一處, 又給食糧, 則我等無敢有二心, 且禁他盜。” 尙質以聞, 上許之。 時都節制使崔雲海及雞林府尹柳亮、安東府使尹柢等, 俱領兵屯于寧海之西, 與賊戰敗之。 聞寇魁欲遣人納降, 皆莫之信, 亮獨曰: “威信納降, 自古有之。 安可疑貳, 以失事機!” 亮卽騎馬直前, 使一人前呼曰: “雞林府尹來。” 寇魁五人, 率數百人, 皆解甲下船, 羅拜而請命。 亮陳說利害, 勸之使降, 寇魁等喜, 遂決意以降, 放還所虜人口。

왜구의 배 60척이 영해(寧海)의 축산도(丑山島)에 이르렀는데, 그 만호(萬戶) 임온(林溫) 등이 관찰사 한상질(韓尙質)에게 글월을 올려서 말하였다.

"우리들이 항복하고자 하오니, 만일 귀국(貴國)에서 변방 한 곳을 허급(許給)하고 또 식량을 주면, 우리들이 감히 딴 생각[二心]을 갖지 않을 것이며 또 다른 도적들도 금하겠습니다."

상질이 장계(狀啓)로 알리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때에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운해(崔雲海)와 계림 부윤(雞林府尹) 유양(柳亮)·안동 부사(安東府使) 윤저(尹柢) 등이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영해의 서쪽에 진을 치고 적과 더불어 싸워서 패했었는데, 적의 괴수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겠다는 말을 듣고 모두 믿지 않았다. 양(亮)이 홀로 말하기를,

"위엄과 신의로 항복을 받는 것은 자고(自古)로 있는 일이니, 어찌 의심하여 좋은 기회를 놓치겠는가?"

하고, 양이 즉시 말을 달려 바로 앞으로 가서, 한 사람을 시켜서 먼저 소리질러 말하기를,

"계림 부윤이 왔다."

하니, 왜구의 괴수 5명이 수백 인을 거느리고 모두 갑옷을 벗고 배에서 내려와서 줄지어 절을 하고 명령을 기다렸다. 양이 이해(利害)를 설명하고 항복하도록 권하니, 왜구의 괴수들이 기뻐하면서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사로잡았던 인구(人口)들을 돌려보내었다.


12月 13日[편집]

비가 내리다[편집]

○丁酉/雨。

비가 내리었다.


사의 사직 송득거 등이 왜구 토벌의 선봉이 되기를 자청하다[편집]

○司衣司直宋得居、前別將盧文理等, 進闕以聞曰: “臣等竊見殿下, 軫慮倭寇, 命將致討。 願爲前鋒, 敢盡死力。” 上壯之, 令赴五道都統處置使麾下。

사의 사직(司衣司直) 송득거(宋得居)와 전 별장(別將) 노문리(盧文理) 등이 궐내에 들어와서 아뢰었다.

"신 등이 그윽이 보오니 전하께서 왜구를 염려하시와 장차 토벌을 하시려 하오니, 전봉(前鋒)이 되어 감히 죽기로 힘을 다하겠습니다."

임금이 장하게 여기고 오도 도통처치사(五道都統處置使)의 휘하에 달려가게 하였다.


12月 14日[편집]

비가 내리다[편집]

○戊戌/雨。

비가 내리었다.


12月 21日[편집]

간관 이황·전백영, 대관 이발·우홍도에게 사무를 보게 하다[편집]

○乙巳/命諫官李晃ㆍ全伯英、臺官李潑ㆍ禹洪道視事。

간관(諫官) 이황(李晃)·전백영(全伯英), 대관(臺官) 이발(李潑)·우홍도(禹洪道)에게 명하여 사무를 보게 하였다.


인안전에 전지기 2인을 두다[편집]

○置仁安殿直二人。

인안전 직(仁安殿直) 2인을 두었다.


항복한 왜구의 괴수 구육이 장검과 환도를 바치고 숙배하다[편집]

○降倭魁㡱六, 率三人來, 獻長劍一、環刀一, 詣朝班肅拜。 上引見與之語, 賜㡱六衣一襲、高頂笠一曰: “汝來何意?” 六對曰: “聞殿下撫綏降者, 不念舊惡, 願請土而爲氓。” 上曰: “降者非獨汝也, 受降者, 非獨我也。 天下皆是汝。 去則不必追, 來則不必拒, 汝之去就, 惟汝心耳。 汝可還去, 與爾輩令知此意。 汝輩之中, 豈無有福智者乎? 其思長久之計, 更來告之。” 六泣涕而退。 命三司左僕射禹仁烈、藝文春秋館學士河崙, 賜宴于所館。

항복한 왜의 괴수 구육(㡱六)이 3인을 인솔하고 와서 장검(長劎) 하나와 환도(環刀)하나를 바치고 조반(朝班)에 나아와서 숙배(肅拜)하였다. 임금이 인견하고 서로 이야기하고 구육에게 의복 1습(襲)과 고정립(高頂笠) 하나를 주면서 말하였다.

"네가 무슨 뜻으로 왔느냐?"

육(六)이 대답하였다.

"전하께서 항복하는 자를 어루만져 안정시켜 주시고 지난날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신다기에, 토지를 청해서 백성이 되려고 하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항복하는 자가 너만이 아니며 항복을 받는 자도 나만이 아니다. 천하(天下)가 모두 너와 같은 자들이라, 가는 자는 붙들 필요가 없고 오는 자는 거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너의 거취(去就)는 오직 너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네가 돌아가서 너의 무리들에게 이런 뜻을 알려라. 너희들 중에도 어찌 복(福)과 지혜가 있는 자가 없겠는가? 장구한 계획을 생각하고 다시 와서 말하라."

육(六)이 눈물을 흘리고 물러갔다.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우인열(禹仁烈)과 예문춘추관 학사(藝文春秋館學士)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묵고 있는 곳에 가서 연회를 베풀어 주게 하였다.


12月 22日[편집]

오도 병마 도통처치사 김사형에게 궁온을 내려 주다[편집]

○丙午/遣敬興尹張子忠, 賜宮醞于處置使金士衡。

경흥 윤(敬興尹) 장자충(張子忠)을 보내어 처치사(處置使) 김사형(金士衡)에게 궁온(宮醞)을 내려 주었다.


남은·심효생 등과 항복한 왜인 구육·비구시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南誾兼判尙瑞司事, 沈孝生知中樞院事, 閔汝翼大司憲, 鄭澹都承旨, 鄭擢左承旨, 降倭㡱六宣略將軍龍驤巡衛司行司直兼海道管軍民萬戶, 非㡱時知敦勇校尉龍驤巡衛司左領行司正兼管軍百戶。 賜㡱六銀帶一、腰紗帽一、靴一。

남은(南誾)은 겸 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를, 심효생(沈孝生)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민여익(閔汝翼)은 대사헌(大司憲)을, 정담(鄭澹)은 도승지(都承旨)를, 정탁(鄭擢)은 좌승지(左承旨)를, 항복한 왜인 구육은 선략 장군 용양 순위사 행 사직 겸 해도 관군민 만호(宣略將軍龍驤巡衛司行司直兼海道管軍民萬戶)를, 비구시지(非㡱時知)는 돈용 교위 용양 순위사 좌령 행 사정 겸 관군 백호(敦勇校尉龍驤巡衛司左領行司正兼管軍百戶)를 삼고, 구육에게 은대(銀帶) 1개, 사모(紗帽) 1개, 목화(木靴) 1개를 내려 주었다.


12月 24日[편집]

수릉에 거둥하다[편집]

○戊申/幸壽陵。

수릉(壽陵)에 거둥하였다.


주석[편집]

  1. 휘(諱)
  2. 지금의 성천
  3. 지금의 연안군
  4. 지금의 안성군
  5. 지금의 천안
  6. 지금의 포천
  7. 지금의 황해도 평산
  8. 교부
  9. 시험장 앞
  10. 향교의 교생
  11. 지금의 여주
  12. 지금의 한산
  13. 원나라
  14. 승지(承旨)
  15. 개성
  16. 태종
  17. 말 장수
  18. 고려 충숙왕 2년에 인도의 마갈타국(摩竭陀國)에서 온 도사(道師). 우리 나라에 와 법화(法化)를 펴고 왕사(王師)가 되었음.
  19.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 속성은 아(牙), 호는 나옹. 지공 화상(指空和尙)을 따라 심법(心法)의 정맥(正脈)을 받아 왔음. 지공·무학(無學)과 함께 삼대 화상(三大和尙)의 하나.
  20. 궁궐 안
  21. 의안대군 방석
  22. 김화(金化)
  23. 경주
  24. 배가 더부룩한 병
  25. 정도전의 자칭
  26. 잔 드리고 제향을 올리는 것
  27. 우왕(禑王) 14년(1388)
  28. 태종
  29. 악공(樂工)
  30. 싸움에 쓰는 큰 수레
  31. 손무(孫武)·오기(吳起)
  32. 주 선왕(周宣王) 때의 사람
  33. 주나라 선왕 때의 현신(賢臣)
  34. 흉노(匈奴)
  35. 지방에 관찰사(觀察使)·유수(留守)·병사(兵使)·수사(水使)·대장(大將)·통제사(統制使) 등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어 주던 절(節)과 부월(斧鉞). 절(節)은 수기(手旗)와 같고, 부월(斧鉞)은 도끼같이 만든 것으로 생살권(生殺權)을 상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