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강헌대왕실록/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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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年 春正月[편집]

1月 1日[편집]

눈비가 내리다. 백관을 거느리고 제정을 하례하고 조하는 받지 않다[편집]

○甲寅朔/雨雪。 上率百官賀帝正, 不受朝。 百官澆奠于神德王后殯殿。

눈비가 내렸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제정(帝正)을 하례하고 조하(朝賀)는 받지 아니하였다. 백관이 신덕 왕후(神德王后) 빈전(殯殿)에 요전(澆奠)을 드렸다.


1月 2日[편집]

형혹성이 태미의 단문으로 들어갔다가 병성 남방에 머물다[편집]

○乙卯/流星墜北方。 熒惑入太微端門, 退留屛星南。

유성(流星)이 북방에 떨어지고, 형혹성(熒惑星)이 태미(太微)의 단문(端門)으로 들어갔다가 병성(屛星) 남방으로 물러가 머물렀다.


백관이 왕후의 빈전에 나아가 계빈제를 행하다[편집]

○百官詣王后殯殿, 行啓殯祭。

백관이 왕후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계빈제(啓殯祭)를 행하였다.


1月 3日[편집]

신덕 왕후를 장례지내고 정릉이라 이름하다. 인안전에 반혼하고 혼전 도감을 설치하다[편집]

○丙辰/葬神德王后于聚賢坊北原, 號貞陵。 宗親百官釋服, 具朝服返魂於仁安殿後, 以白衣黑帶視事。 設王后魂殿都監。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취현방(聚賢坊) 북녘 언덕에 장례하고 정릉(貞陵)이라 이름하였다. 종친과 백관이 복(服)[1]을 벗고,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인안전(仁安殿)으로 반혼(返魂)한 뒤에, 백의(白衣)와 흑대(黑帶)로 정무를 보았다. 왕후의 혼전 도감(魂殿都監)을 설치하였다.


왜구의 괴수 상전과 어중 등이 울주의 지주사 이은과 반인 등을 잡아 도망가다[편집]

○倭寇魁相田於中等, 率其徒入蔚州浦, 知州事李殷給糧厚待之。 相田等疑爲誘陷, 執殷及伴人朴靑、記官李藝等逃歸。

왜구(倭寇)의 괴수 상전(相田)·어중(於中) 등이 그의 도당을 거느리고 울주포(蔚州浦)로 들어온 것을 지주사(知州事) 이은(李殷)이 식량을 주고 후히 접대하였더니, 상전 등은 〈도리어〉 꾀어서 함몰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이은(李殷)과 반인(伴人) 박청(朴靑), 기관(記官) 이예(李藝) 등을 잡아 가지고 도망해 돌아갔다.


1月 5日[편집]

도당에서 임금에게 연향을 올리다[편집]

○戊午/都堂享上。

도당(都堂)[2]에서 임금에게 연향(宴享)을 올렸다.


1月 6日[편집]

대사헌 민여익이 지중추원사 조견과 한성 윤 신효창을 탄핵하려다가 도로 탄핵당하다[편집]

○己未/大司憲閔汝翼劾知中樞院事趙狷、漢城尹申孝昌。 趙狷嘗節制合浦, 不能制寇; 孝昌時爲大司憲, 不能劾狷也。 汝翼私謂狷兄浚曰: “上欲憲司劾狷久矣。” 上聞之, 怒曰: “汝爲憲官, 劾有罪者, 何必托辭? 且狷功臣, 不可輕劾。” 欲下汝翼于獄, 宜城君南誾進曰: “狷及汝翼, 皆爲功臣, 何取何捨?” 乃命歸第勿出。 憲司尋劾, 旣而皆宥之。

대사헌 민여익(閔汝翼)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견(趙狷)과 한성 윤(漢城尹) 신효창(申孝昌)을 탄핵하였다. 조견은 합포(合浦)의 절제(節制)로 있었을 때, 왜구(倭寇)를 제어하지 못하였는데, 신효창은 당시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조견을 탄핵하지 못하였다. 이에 민여익이 조견의 형인 조준(趙浚)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성상께서 헌부로 하여금 견(狷)을 탄핵하고자 하신 지 오래였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헌관이 되어 죄가 있는 자를 탄핵하면 되었지, 하필 말[辭]을 핑계할 것은 무엇이냐? 또 조견은 공신이라 경솔히 탄핵하는 것은 불가하다."

민여익을 옥에 가두려고 하니,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나아가 아뢰었다.

"조견과 민여익은 모두 공신이온데, 누구는 취하고 누구는 버리시옵니까?"

그래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 있게 하고 헌부에 나오지 못하도록 명하였는데, 다시 탄핵하게 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모두 용서하여 풀어주었다.


1月 10日[편집]

달이 목성을 가리다[편집]

○癸亥/月掩木星。

달이 목성(木星)을 가렸다.


1月 15日[편집]

정릉에 거둥하다[편집]

○戊辰/幸貞陵。

정릉(貞陵)에 거둥하였다.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환관 조순을 고향에 안치하고 직첩을 회수하게 하다[편집]

○憲司上疏論宦官曺恂之罪。 其略曰:

恂性奸貪, 言行邪佞, 前朝僞辛亂政之時, 爲其腹心, 擅行威福, 招納賄賂, 恣爲不義。 今蒙聖上好生之德, 獲保首領, 寵侍左右, 誠宜洗心滌慮, 恭勤職務, 反懷貪奪無厭之計。 殿下嘗以中宮病篤, 施納佛神銀器衣服鞍馬, 恂皆托貿易抑取, 又懼事覺, 歸馬巫堂, 其奸詐反復, 眞穿窬之類也。 乞下恂於獄, 明正其罪, 收沒家産。

上止許放置其鄕。 憲司復上疏論恂受戶曹典書楊天植厚賄之罪, 上止許收其職牒。

헌부에서 소(疏)를 올려 환관(宦官) 조순(曹恂)의 죄를 논하였는데, 그 소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조순은 그 성질이 간특 탐오(貪汚)하고 언행이 교묘하여 아첨을 잘하옵니다. 고려 위조(僞朝) 당시 정치가 어지러웠을 때, 그들의 복심(腹心)이 되어 죄주고 상주는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했고, 널리 회뢰(賄賂)를 받아들이는 등 온갖 불의의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오늘날 성상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입사와 목숨을 보전하고, 다시 은총을 받아 좌우에서 시종하고 있으니, 마땅히 그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하고 공경하여 부지런히 그 직무를 봉행해야 할 터이온데, 도리어 한없이 탐해 빼앗으려는 계략을 품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중궁(中宮)의 병환이 위독하시므로 해서 불신(佛神)에게 시주하신 은기(銀器)와 의복·안마(鞍馬) 등을 조순이 모두 무역을 칭탁하고 강제로 탈취하고는, 또 이의 발각을 두려워하여 말을 무당(巫堂)에게 돌려 주었으니, 그의 간사한 반복은 정말 천유(穿窬)의 무리입니다. 바라옵건대, 조순을 옥에 내리시와 그 죄를 밝히시고 가산도 몰수하옵소서."

임금은 다만 그를 고향으로 방치(放置)하는 데 그치게 하였다. 그러자 헌부에서 다시 소를 올려, 조순이 호조 전서(戶曹典書) 양천식(楊天植)의 많은 뇌물을 받은 사실을 논란하니, 임금은 그의 직첩만을 도로 거두는 데 그치게 하였다.


풍해도 도관찰사가 도성 역사에 전미와 진태를 내주게 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豐海道都觀察使上言: “道內人民, 風水蟲蝗之災, 失農飢困, 今赴都城之役, 各自齎糧, 艱苦玆甚。 願給道內田米陳太。” 上命給之。

풍해도 도관찰사가 상언(上言)하였다.

"도내의 인민들이 풍수재(風水災)와 황충(蝗蟲)의 재해로 말미암아 농사를 실패하고 기아와 곤고에 시달리고 있사온데, 이제 도성의 역사에 각자 식량을 가지고 가게 되면, 그 곤란이 더욱 심하게 될 것이니, 원컨대 도내의 전미(田米)와 진태(陳太)를 지급하게 하옵소서."

임금이 명하여 이를 주게 하였다.


1月 16日[편집]

유성이 심성에서 나와 남녘으로 흐르다[편집]

○己巳/流星出心(火)〔大〕星, 南流。

유성(流星)이 심대성(心大星)에서 나와 남녘으로 흘렀다.


1月 22日[편집]

창성부원군 성여완의 졸기[편집]

○乙亥/昌城府院君成汝完卒。 汝完, 昌寧人, 版圖摠郞君美之子。 至元丙子登第, 拜藝文春秋檢閱, 累遷軍簿正郞, 按廉楊廣道。 以歷尙書右丞, 知刑部事、御史中丞、典法判事。 間出爲海州、忠州二牧使, 陞爲僉書密直、政堂文學。 國初, 以耆老拜檢校門下侍中、昌城府院君。 年八十九, 以病卒, 賜米豆百石, 禮葬之, 贈諡文靖公。 性簡潔, 不喜華麗, 敎子有法。 三子俱登第, 長石璘今爲議政府左政丞, 次石瑢開城留後, 次石因戶曹判書。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 졸하였다. 여완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판도 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의 아들이다. 지원(至元) 병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의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번 옮겨 군부 정랑(軍簿正郞)·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상서 우승(尙書右丞)·지형부사(知刑部事)·어사 중승(御史中丞)·전법 판사(典法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 중간에 해주(海州)·충주(忠州)의 두 목사(牧使)로 나갔고, 첨서 밀직(僉書密直)·정당 문학(政堂文學) 등 직에 승진되었다. 개국초에 나라의 기로(耆老)로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 창성 부원군이 되었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졸하니, 미두(米豆) 1백 석을 내려 주고 예장(禮葬)으로 장사하였으며,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여완은 그 성품이 간결(簡潔)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올라, 맏아들 성석린(成石璘)은 지금 의정부 좌정승이고, 다음 성석용(成石瑢)은 개성 유후(開城留後)이며, 그 다음 성석인(成石因)은 호조 판서이다.


역군 가운데 상을 당한 자와 병에 걸린 자 노약자를 놓아 보내다[편집]

○放役徒喪病老弱者。

역군 가운데에 상(喪)을 당한 자와 병에 걸린 자, 그리고 노약자(老弱者)는 놓아 보냈다.


1月 24日[편집]

강원도 양주를 부(府)로 승격시키다[편집]

○丁丑/陞江原道襄州爲府。 上之外親鄕也。

강원도 양주(襄州)를 승격시켜 부(府)로 만들었으니, 이는 임금의 외친(外親)[3] 본관이기 때문이었다.


오랑합족의 팔을속 등 5명과 오도리족의 동맹가첩목아 등 5명에게 비단 등을 내리다[편집]

○賜吾郞哈八乙速ㆍ甫里ㆍ仇里老ㆍ甫乙吾ㆍ高里多時等五人、吾都里童猛哥帖木兒ㆍ童所吾ㆍ馬月者ㆍ童於割周ㆍ豆乙於等五人, 各綵紬絹綵緜布苧布有差。

오랑합(吾郞哈)의 팔을속(八乙速)·보리(甫里)·구리로(仇里老)·보을오(甫乙吾)·고리다시(高里多時) 등 5명과 오도리(吾都里)의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동소오(童所吾)·마월자(馬月者)·동어할주(童於割周)·두을어(豆乙於) 등 5명에게 각각 채주견(綵紬絹)·채면포(綵緜布)·저포(苧布)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양주군을 승격시켜 부로 만들다[편집]

○陞楊州郡爲府。

양주군(楊州郡)을 승격시켜 부(府)로 만들었다.


의흥부에 사인소를 설치, 양반 자제를 교육하여 임용에 대비토록 하다[편집]

○置義興府舍人所, 凡大小兩班子壻弟姪, 皆屬之, 肄習經史、兵書、律文、算數、射御等藝, 以備擢用。

의흥부(義興府)에 사인소(舍人所)를 설치하여 모든 대소 양반(兩班)의 자·서·제·질(子壻弟姪)들을 이에 예속하게 하고, 경사(經史), 병서(兵書), 율문(律文)·산수(算數)·사어(射御) 등의 기예를 이습(肄習)시켜 장래의 발탁 임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1月 25日[편집]

형혹성이 태미 우액에 보이다[편집]

○戊寅/熒惑在太微右掖。

형혹성(熒惑星)이 태미(太微) 우액(右掖)에 보였다.


1月 27日[편집]

형혹성이 태미 서쪽 태양문 가운데에 나타나다[편집]

○庚辰/熒惑在太微西太陽門中。

형혹성이 태미 서쪽 태양문(太陽門) 가운데에 나타났다.


동대문에 거둥하여 옹성을 쌓을 자리를 살피다[편집]

○幸東大門, 觀甕城之基。

동대문에 거둥하여 옹성(甕城)의 기지를 관찰하였다.


1月 28日[편집]

진관사에 거둥하다[편집]

○辛巳/幸津寬寺。

진관사(津寬寺)에 거둥하였다.


유구·정신의·이직·함부림·조서·정구·허주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柳玽爲三司右僕射, 鄭臣義知中樞事, 李稷爲大司憲, 咸傅霖爲左散騎, 曺庶右散騎, 鄭矩左諫議, 許周司憲中丞。

유구(柳玽)로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를, 정신의(鄭臣義)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이직(李稷)으로 대사헌을, 함부림(咸傅霖)으로 좌산기(左散騎)를, 조서(曺庶)로 우산기(右散騎)를, 정구(鄭矩)로 좌간의(左諫議)를, 허주(許周)로 사헌 중승(司憲中丞)을 삼았다.


투항해온 왜적이 울주 지사 이은을 납치해간 일 때문에 삼남 절제사들을 죄하다[편집]

○命都堂各司及耆老, 會議崔雲海、李龜鐵、金贇吉、金英烈等罪。 初乞降倭至慶尙道蔚州浦, 賊魁羅可溫, 以子都時老、伴儻昆時羅, 納質於雞林府尹柳亮。 亮以疾不往見, 倭自惑, 執知蔚州事李殷逃去。 時雲海節制慶尙, 龜鐵節制忠淸, 贇吉節制全羅, 英烈節制京畿右道。 雲海違令, 以致逃逸, 龜鐵、贇吉、英烈皆不及期。 五道都統使金士衡執囚京山府, 馳報請罪。

도당(都堂)과 각사(各司) 및 기로(耆老)에게 명하여 최운해(崔雲海)·이귀철(李龜鐵)·김빈길(金贇吉)·김영렬(金英烈) 등의 죄를 의논하게 하였다. 당초에 항복을 청해 온 왜적이 경상도 울주포(蔚州浦)에 와서, 왜적의 괴수인 나가온(羅可溫)이 그의 아들 도시로(都時老)와 반당(伴黨) 곤시라(昆時羅)를 볼모로 삼아 계림 부윤(鷄林府尹) 유양(柳亮)에게 보낸 것을, 유양이 질병으로 나가 보지 않았더니, 왜적이 스스로 의혹한 나머지 지울주사(知蔚州事) 이은(李殷)을 납치하여 도망갔었다. 이때 최운해는 경상도 도절제사였고, 이귀철은 충청도 도절제사였으며, 김빈길은 전라도 도절제사, 김영렬은 경기우도 절제사였는데, 최운해가 영을 어긴 탓으로 도망하는 것을 놓쳐버렸고, 이귀철·김빈길·김영렬 등도 모두 그 기한에 미치지 못하여, 5도 도통사(五道都統使) 김사형(金士衡)이 이들을 경산부(京山府)에 잡아 가두고서 이 사실을 긴급 보고하며 그 죄를 청한 것이었다.


박자안을 전라도, 윤방경을 경상도, 조영무를 충청도 도절제사로 삼다[편집]

○以朴子安爲全羅道都節制使, 尹邦慶爲慶尙道都節制使, 趙英茂忠淸道都節制使。

박자안(朴子安)으로 전라도 도절제사를, 윤방경(尹邦慶)으로 경상도 도절제사를, 조영무(趙英茂)로 충청도 도절제사를 삼았다.


1月 30日[편집]

5도 도통사 김사형이 돌아오니 흥인문 밖까지 거둥하여 맞이하다[편집]

○癸未/五道都統使金士衡還, 上幸興仁門外迎勞。

5도 도통사 김사형이 돌아오니, 임금이 흥인문(興仁門) 밖까지 거둥하여 그를 맞아 위로하였다.


六年 二月[편집]

2月 1日[편집]

큰 바람이 불다[편집]

○甲申朔/大風。

큰 바람이 불었다.


2月 2日[편집]

문묘의 터를 살펴보게 하다[편집]

○乙酉/命都評議使司, 相文廟基。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문묘(文廟)의 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2月 3日[편집]

햇무리가 지다. 금성이 태미 서번 상상자리에서 나와 삼태 성중계 자리로 들어가다[편집]

○丙戌/日珥。 金星出太微西(番)〔蕃〕上相, 入三台中階。

해가 귀고리하였다. 금성(金星)이 태미(太微) 서번(西蕃)으로 나오고, 상상(上相)이 삼태(三台) 중계(中階)로 들어갔다.


2月 5日[편집]

유성이 헌원성 자리에서 나와 땅에 떨어지다[편집]

○戊子/流星長如一尺, 出軒轅落地。

유성(流星)의 길이가 1척 남짓한 것이 헌원(軒轅)으로 나와 땅에 떨어졌다.


2月 6日[편집]

동교에서 사냥하다[편집]

○己丑/上田于東郊。

임금님이 동교(東郊)에서 사냥하였다.


2月 8日[편집]

의안백 화와 좌정승 조준 등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다[편집]

○辛卯/命義安伯和、左政丞趙浚、奉化伯鄭道傳, 宴右政丞金士衡、謝恩使權仲和以下諸使臣, 㡱六亦與焉。 賜士衡犀帶。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좌정승 조준(趙浚)·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니, 사은사(謝恩使) 권중화(權仲和) 이하 여러 사신(使臣)과 구육(㡱六)도 이에 참예하였다. 김사형에게 서대(犀帶)를 하사하였다.


2月 9日[편집]

왜인이 전 판사 위충과 지울주사 이은 등을 돌려보내다[편집]

○壬辰/倭歸我前判事魏种、知蔚州事李殷等。

왜인이 전 판사(判事) 위충(魏种)과 지울주사(知蔚州事) 이은(李殷) 등을 돌려보내었다.


2月 10日[편집]

왜인 만호 나가온의 아들 도시로·곤시라·망사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癸巳/授倭萬戶羅可溫子都時老司正、昆時羅ㆍ望沙門副司正職, 仍賜衣冠。

왜인(倭人) 만호(萬戶) 나가온(羅可溫)의 아들 도시로(都時老)에게 사정(司正)을, 곤시라(昆時羅)·망사문(望沙門)에게는 부사정(副司正)을 제수하고, 인하여 의복과 갓[冠]을 하사하였다.


전 대언 유정현이 곡식 훔친 반인을 때려 죽인 일에 대한 사건 처리[편집]

○前代言柳廷顯以盜用家穀, 打伴人康仁信致死。 刑曹請罪, 上只令徵燒埋錢。

전 대언(代言) 유정현(柳廷顯)이 가곡(家穀)을 도용(盜用)하였다 하여 반인(伴人) 강인신(康仁信)을 때려 죽였으므로, 형조에서 죄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소매전(燒埋錢)[4]만을 추징하게 하였다.


2月 11日[편집]

근정전에서 조회를 받는데 임금이 구육을 위문하니 황공해하다[편집]

○甲午/上坐勤政殿受朝, 進㡱六至前, 慰問之。 㡱六不敢仰視, 流汗出涕而已。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앉아 조회를 받았다. 구육(㡱六)이 나아가 어전에 이르니 임금이 그를 위문하매, 구육은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땀을 흘리며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투항해온 왜인이 도망간 일로 최운해·이귀철 등을 잡아다가 국문하다[편집]

○執崔雲海、李龜鐵、金贇吉、金英烈等來, 下巡軍獄, 令臺諫刑曹鞫之。 獄成, 右政丞金士衡、宜城君南誾, 請減其罪。

최운해(崔雲海)·이귀철(李龜鐵)·김빈길(金贇吉)·김영렬(金英烈) 등을 잡아와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대간(臺諫)과 형조로 하여금 이를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옥사(獄事)가 이루어지니,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그 죄를 감해 주기를 청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 군인 징발과 수군 처우개선 등 군사에 관한 여러 문제에 대해 건의하다[편집]

○使司上言: “前朝之季, 各道軍民戶數無籍, 凡抄軍時, 妄意定數, 勒令充數, 作弊不小。 今各官軍民戶數, 已有成籍, 都節制使當以其籍付軍數, 當農隙之時, 各於其官, 訓鍊武藝, 有事則及時招致攻守。 如有軍官軍人不卽起送, 軍器衣甲不能堅實, 老弱軍人抄出起送者, 守令及摠牌頭目, 照律論罪後, 報都觀察使。 又都節制使, 聞寇將至, 逗遛不進者, 臨戰不爲盡力者, 無變起軍者, 彼敵數少盡數起軍者, 非時田獵者, 不緊公事, 軍官給馬道內橫行者, 觀察使糾察, 申聞論罪。 又戶口之數, 不可不知也。 各道戶籍, 率居人口, 已竝載錄, 各官守令, 不顧立法大體, 凡遇軍情及徒役事, 盡數抄出, 使不得農業, 以致凋瘁。 今後各戶, 同居各居勿論, 以子壻弟姪族親年六十以下十六以上者, 品官馬兵一員、奉足四名, 無職馬兵一名奉足三名, 步兵一名奉足二名爲定, 戶主名下施行。 無內外族親單丁, 以一般單丁奉足定給, 常時徒役, 不令奉足人各別差發。 有軍情事, 緊緩分揀, 奉足人多少, 酌量率行。 奴子數多率居者, 不給各別奉足。 各官守令如有緊急軍情, 率行外奉足人, 各別差發者, 論罪。 一, 自庚寅年以後, 海寇作耗, 沿海州郡, 悉皆蕭然。 近年以來, 營造兵船, 沿邊守禦, 賊不敢近, 居民土著, 戰艦之功, 誠爲最大。 各船軍官軍人, 長年騎船, 寄生水上, 甚爲可哀。 船內陸物諸緣及雜役, 專以騎船軍人備用, 苦役尤重。 所在各官, 不顧其弊, 騎船軍戶徭役, 指定侵勞, 騎船戶因此逃散, 軍數日減。 今後騎船各戶差役, 一皆減除, 完護如前。 條令不從守令及奸吏, 以王旨不從論罪。 其騎船軍戶內, 子壻及奉足定給人外, 挾持漏戶, 當差他役。 一, 軍法, 將兵者與士卒同甘苦, 時常存恤疾病, 盡情救護, 不令軍人離心, 乃可以臨敵立功。 各道兵船頭目, 以一時喜怒, 非法亂刑, 又累朔騎船, 瘴氣飢寒所(迫)〔逼〕成疾者、或身勞力瘁, 一二日困臥者, 以爲溫疫, 不爲救療, 氣息不絶者, 或棄無人之島, 或棄水中, 以致夭死。 雖在平時, 至於飮水, 不曾均給, 因此成病。 以如此等事, 不爲存恤, 軍人離心, 逢賊不肯用心, 接戰不得成功。 今後出令嚴禁, 如有得病軍人, 不輕救療, 病深難治者, 兵船到泊近處各官下陸, 令其官差人救療。 不幸有死亡者, 題栍立標, 埋葬接處, 病故辭緣, 報都觀察使, 傳報使司, 轉聞于上, 存恤其家, 限年除役。 不爲用心救療致死者, 各官差人及如前條令不從作弊萬戶千戶領船頭目, 依《大明律》內軍士撫馭無方條, 決杖一百, 邊鄙充軍。” 上從之。

사사(使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전조(前朝) 말기에 각도 군민(軍民)의 호수(戶數)의 기록이 없어서, 무릇 군인을 추릴 때, 함부로 수효를 배정해 놓고는 억지로 그 수효의 충당을 강요하여 폐단을 지은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제 각 고을의 군민(軍民) 호수를 적(籍)에 올려놓았사오니, 도절제사는 마땅히 그 장적(帳籍)에 의거하여 군의 수효를 작정해 주되, 농한기에는 각각 그 고을에서 무예(武藝)를 훈련하여 유사시에는 때에 맞게 이를 초치하여 공격 수비하게 하소서. 만일 군관(軍官)이나 군인을 즉시 기송(起送)하지 않거나, 군기(軍器)나 갑옷이 견고하지 않거나, 늙고 약한 군인을 추려서 기송한 자가 있을 때에는 그 수령 및 총패(摠牌)의 두목을 율(律)에 비추어 죄를 논단한 연후에, 이를 도관찰사에게 보고하게 하소서. 또 도절제사로서 구도(寇盜)가 장차 이른다는 말을 듣고도 머뭇거리고 즉시 나가지 않은 자나, 전쟁에 임하여 힘을 다하지 않은 자, 변고 없이 군을 일으킨 자, 상대방 적의 수효가 적은데도 전병력을 동원한 자라든가, 그 시기가 아닌데도 수렵(狩獵)한 자와, 긴급하지 않은데도 공무로 군관에게 말을 주어 도내를 횡행하게 한 자는, 관찰사가 이를 적발 계달하여 죄를 논단하게 하소서. 또 호구(戶口)의 수효는 불가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각도 호적에 데리고 사는 인구가 이미 다 등록되어 있는데도, 각 고을의 수령들이 그 입법의 근본 정신을 돌아보지 않고, 무릇 군사에 관계되거나 도역(徒役) 등의 일만 만나게 되면, 이들을 다 추려내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만들어 피폐를 가져오게 하고 있사오니, 금후로는 각호의 동거와 별거를 막론하고 그의 자(子)ㆍ서(壻)ㆍ제(弟)ㆍ질(姪)의 족친(族親)으로서 그 나이 60세 이하 16세 이상인 자에게는 품관(品官) 마병(馬兵) 1명에 봉족(奉足) 4명을, 직임이 없으면 마병 1명에 봉족 3명과, 보병 1명에 봉족 2명을 정하게 하되, 이를 호주의 이름 아래 시행하며, 내외간 족친이 없는 단정(單丁)에게는 일반 단정(單丁)의 예에 의하여 봉족을 정해 주되, 평상시의 도역(徒役)에는 봉족하는 사람을 따로 내보내지 못하게 하고, 군사와 관련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만 그 긴급 여부를 감안하여 봉족인의 다소를 참작해 헤아려서 인솔해 가게 하소서. 노속(奴屬)을 많이 인솔하고 사는 자에게는 별개로 봉족을 주지 말 것이며, 각 고을 수령이 혹 긴급한 병사 관계로 데리고 가는 이외의 봉족인을 따로 징발한 자는 그 죄를 논단하게 하옵소서.

1. 경인년 이후로 해적이 난동을 부려서 연해변의 주군(州郡)이 모두 다 소조(蕭條)하온데, 근년 이래 병선을 만들어 연변을 수비하고 막으매, 도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고, 거민들도 토착(土着)하여 사니 전함(戰艦)의 공이 참으로 큽니다. 각 병선의 군관(軍官)·군인(軍人)은 긴 세월을 두고 배를 타서 물위에 붙어 사니 심히 불쌍하온데, 배 안에서도 육물(陸物)에 대한 여러가지 일과 잡역(雜役)을 배타는 군인에게 시키니, 고역(苦役)이 과중하옵니다. 소재지의 각 고을에서는 그 폐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배 타는 군호(軍戶)에게 요역(徭役)을 지정하여 괴롭히오나, 배 타는 가호가 이 때문에 도망하여 흩어져서 군사의 수가 날마다 줄어드오니, 금후로는 배 타는 각 호의 차역(差役)은 일체 모두 면제하여 완전히 보호하되, 여전히 조령(條令)을 좇지 않는 수령과 간악한 아전은 왕지부종률(王旨不從律)로 논죄하고, 배 타는 군호(軍戶) 내의 아들·사위와 봉족(奉足)으로 정하여 준 사람 외의 협호살이하는 누호(漏戶)는 마땅히 다른 역사를 시킬 것.

1. 군법에 군사를 거느리는 자는 사졸로 더불어 고락(苦樂)을 함께하고, 항상 질병을 걱정하여 인정껏 구호해서 군인으로 하여금 마음이 떠나지 않게 하여야 적에 임하여 공을 세울 수 있사온데, 각도의 병선 두목은 한때의 희노(喜怒)로써 불법으로 남형(濫刑)하옵는데다 또 여러 달 배를 타서 장기(瘴氣)와 기한(飢寒)에 시달려 병이 난 자나, 혹은 몸이 피곤하고 힘이 지치어 하루이틀 곤하게 누어 있는 자를 온역(溫疫)이라 하여 구제하여 치료하지는 아니하고, 숨도 끊어지지 않은 자를 혹은 무인도에 버리고, 혹은 물속에 버리어 요사(夭死)하게 하며, 비록 평시에 있어서의 마시는 물까지도 고루 주지 않아서 이것으로 인하여 병이 되니, 이런 일을 살피고 애휼하지 않는다면, 군인은 마음이 떠나서 적을 만나도 마음을 쓰지 않고 접전하여도 성공을 하지 못하니, 금후로는 명령을 내려 엄금하고 만일 병을 얻은 군인이 있으면 구호 치료를 가볍게 하지 말고, 병이 깊어 치료하기 어려운 자는 병선이 대어 있는 근처 각 고을에 하륙하여, 그 관(官)으로 하여금 사람을 시켜 구호 치료하게 하고, 불행히 사망한 자가 있으면 팻말[栍]에 써서 표를 세워 근접한 곳에 매장하되, 병고(病故)에 대한 사연을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하여 사사(使司)에 전보(傳報)하고, 사사는 위에 전문(轉聞)하여 그 집을 존휼(存恤)하되 해를 한정하여 역사를 면제하고, 마음을 써서 구호 치료하지 않아서 죽은 자는 각관(各官)의 차인(差人)과 여전히 조령(條令)을 좇지 않고 폐해를 만든 만호(萬戶)·천호(千戶)와 배를 영솔하는 두목(頭目)을 《대명률(大明律)》 내의 군사무어무방(軍士撫馭無方) 조목에 의하여 결장(決杖) 1백에 처하여 변방에 보내어 군졸에 편입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月 12日[편집]

상의중추원사 유양이 왜괴의 아들 동시라 등 2인을 데리고 계림에서 오다[편집]

○乙未/商議中樞院事柳亮率倭魁子童時羅等二人, 來自雞林, 賜時羅衣。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유양(柳亮)이 왜괴(倭魁)의 아들 동시라(童時羅) 등 2인을 거느리고 계림(雞林)으로부터 오니, 동시라에게 옷을 내려 주었다.


2月 15日[편집]

임금이 인안전에 친히 제사하다[편집]

○戊戌/親祀仁安殿。

친히 인안전(仁安殿)에 제사하였다.


2月 16日[편집]

박자안을 경상·전라 도안무사로 삼다[편집]

○己亥/以朴子安爲慶尙、全羅都按撫使。

박자안(朴子安)으로 경상·전라 도안무사(都安撫使)를 삼았다.


2月 17日[편집]

좌정승 조준 등이 우정승 김사형을 위하여 잔치하니 술을 쓰도록 허락하다[편집]

○庚子/開國功臣左政丞趙浚等宴右政丞金士衡等, 上許令用酒。

개국 공신(開國功臣) 좌정승 조준(趙浚) 등이 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을 위하여 잔치하니, 임금이 술을 쓰도록 허락하였다.


2月 18日[편집]

최운해 등을 안변 진명포 등지에 유배보내고 수군에 편입시키다[편집]

○辛丑/上命流雲海于安邊鎭溟浦, 英烈于瓮津, 贇吉于靑海, 龜鐵于平壤, 皆充水軍。

임금이 명하여 최운해(崔雲海)를 안변(安邊) 진명포(鎭溟浦)에, 김영렬(金英烈)을 옹진(甕津)에, 김빈길(金贇吉)을 청해(靑海)에, 이귀철(李龜鐵)을 평양(平壤)에 유배하고, 모두 수군(水軍)에 편입하게 하였다.


2月 19日[편집]

정릉에 거둥하여 흥천사 역사를 둘러보다. 환자 김사행 등이 아첨하여 흥천사가 화려하게 지어지다[편집]

○壬寅/幸貞陵, 視興天寺役。 上之初建寺貞陵, 但以供朝夕香火耳。 宦者金師幸巧佞求媚, 窮極侈靡。

정릉(貞陵)에 거둥하여 흥천사(興天寺)의 역사를 살폈다. 임금이 처음에 정릉에 절을 세운 것은 조석의 향화(香火)만을 받들기 위함이었는데,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이 잔재주와 영리한 것으로 예쁘게 보이기를 구하여 사치와 화려한 것을 극진히 하였다.


2月 21日[편집]

밤에 북방에 흰 기운이 끼다[편집]

○甲辰/夜, 北方有白氣。

밤에 북방에 흰 기운이 있었다.


2月 22日[편집]

잡과 시험을 쳐서 명의 8인과 명률 7인을 뽑다[편집]

○乙巳/考試官趙浚、鄭道傳試取雜科明醫八人、明律七人。

고시관(考試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잡과(雜科) 명의(明醫) 8인과 명률(明律) 7인을 시험하여 취하였다.


2月 24日[편집]

귀의군 왕우의 졸기. 예장하고 시호를 내리다[편집]

○丁未/歸義君王瑀卒。 禮葬之, 贈諡景僖。 瑀, 恭讓君母弟, 主王氏祀者。 子珇、琯, 女適撫安君芳蕃。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가 죽으니 예장(禮葬)하게 하고, 경희(景僖)라 시호를 내려 주었다. 우(瑀)는 공양왕(恭讓王)의 모제(母弟)이며 왕씨(王氏)의 제사를 주장한 자였다. 아들은 왕조(王珇)와 왕관(王琯)이고, 딸은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에게 출가하였었다.


2月 25日[편집]

평주에 거둥하다[편집]

○戊申/幸平州。

평주(平州)에 거둥하였다.


유성이 천시원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가다[편집]

○流星出天巿東垣, 入西垣, 長二尺許。

흐르는 별이 천시 동원(天市東垣)에서 나와 서원(西垣)으로 들어갔는데, 길이가 2척쯤 되었다.


2月 26日[편집]

지진이 일어나다[편집]

○己酉/地震。

지진(地震)하였다.


2月 27日[편집]

햇무리가 지다[편집]

○庚戌/日暈。

햇무리하였다.


대마도에 가서 잡혀 있던 지울주사 이은을 데리고 온 박인귀 등에게 상을 내리다[편집]

○賜朴仁貴等五人米各十石, 令復其家。 初蔚州事李殷, 見執倭寇, 留對馬島。 仁貴等請往對馬島, 諭以恩信, 與殷等還。

박인귀(朴仁貴) 등 5인에게 쌀 각각 10석을 내려 주고, 그 집의 요역(徭役)을 면제하게 하였다. 처음에 울주사(蔚州事) 이은(李殷)이 왜구(倭寇)에게 잡혀가서 대마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인귀(仁貴) 등이 자청하여 대마도에 가서 은혜와 신의로 타일러서 이은(李殷) 등으로 더불어 돌아왔다.


2月 28日[편집]

고려 시중 경복흥의 묘에 치제하게 하다[편집]

○辛亥/上次于臨津, 其南有前朝侍中貞烈公慶復興墓。 上曰: “慶侍中, 慷慨淸直。 位侍中, 視予猶子, 予亦父事之。” 乃遣僉節制使趙思義致祭。

임금이 임진(臨津)에 머물렀는데, 그 남쪽에 전조(前朝)의 시중(侍中) 정렬공(貞烈公) 경복흥(慶復興)의 묘가 있었다. 임금이 말하였다.

"경 시중(慶侍中)은 강개(慷慨) 청직(淸直)하고 시중 벼슬에 있어서 나를 보기를 자식 같이 하고, 나도 또한 아버지 같이 섬기었다."

첨절제사(僉節制使) 조사의(趙思義)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투항한 왜인 구육과 반인들에게 쌀 의복 등을 내리다[편집]

○賜降倭㡱六米石三十、豆石二十, 伴人二名衣笠各一件。

투항한 왜인 구육(㡱六)에게 쌀 30석과 콩 20석을, 반인(伴人) 2명에게는 의복·갓[笠] 각각 한 벌씩을 내려 주었다.


2月 29日[편집]

수미포에 머물면서 화렵을 구경하다[편집]

○壬子/次壽美浦, 觀火獵。

수미포(壽美浦)에 머물면서 화렵(火獵)을 구경하였다.


2月 30日[편집]

송도에서 유숙하다[편집]

○癸丑/次松都。

송도(松都)에서 유숙하였다.


六年 三月[편집]

3月 1日[편집]

연복사에 거둥하다[편집]

○甲寅/幸演福寺。

연복사(演福寺)에 거둥하였다.


3月 3日[편집]

폭풍이 불고 밤에 동북쪽에 붉은 기운이 끼다[편집]

○丙辰/暴風。 夜, 東北有赤氣。

폭풍이 불고, 밤에 동북쪽에서 붉은 기운이 있었다.


3月 4日[편집]

내관을 보내어 경희공 왕우에게 치제하게 하다[편집]

○丁巳/遣內官金龍奇, 致祭于景僖公王瑀。

내관(內官) 김용기(金龍奇)를 보내어 경희공(景僖公) 왕우(王瑀)에게 치제하였다.


경천사에서 화엄 법석을 베풀어 신덕 왕후의 영을 위로하다[편집]

○幸敬天寺, 設華嚴法席, 薦神德王后。

경천사(敬天寺)에 거둥하여 화엄 법석(華嚴法席)을 베풀어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영을 위로하였다.


3月 5日[편집]

전 판사 김원호의 딸을 궁인으로 삼다[편집]

○戊午/以前判事金原浩女爲宮人。

전 판사(判事) 김원호(金原浩)의 딸로 궁인(宮人)을 삼았다.


3月 8日[편집]

안익·김희선·권근 등이 황제의 칙위 조서, 선유 성지, 어제시, 예부의 자문을 받들고 오다[편집]

○辛酉/參贊門下府事安翊、同知中樞院事金希善、藝文春秋館學士權近齎擎皇帝勑慰詔書及宣諭聖旨、御製詩、禮部咨文二道, 回自京師。 其勑慰曰:

使者至, 聞王首妃康氏薨, 嗚呼甚矣哉! 王必晨昏眷戀, 不能自已。 爲何? 昔化家爲國, 勤勞內助, 母儀三韓, 非康氏者誰? 今也人亡迹在, 此非眷戀不能自已者乎? 況昔存時, 王當宵衣之際, 康氏數更而省之; 旰食勤勞, 康氏節之而以奉歲月; 視朝之時, 康氏率宮嬪以送; 日暮也, 康氏率宮嬪秉燭而迎, 以歸寢處。 今也康氏長往, 鸞臺之淸鏡不張。 王晨朝, 稀人而送; 暮歸寢處, 顧問杳然。 但目宮嬪侍兒撫棺唏噓, 淚之不已者, 傷如之何? 嗚呼! 殯葬之後, 歲月如流, 靑蕪蔓塚, 狐兔往來乎其間, 旁近喬木, 老幹崢嶸。 日將暮也, 飛者比翼而(捷)〔棲〕于高柯, 樹因風而嗚嗚咽咽, 幽陰之澗水, 潺潺然而有聲。 人靜更深, 野郊寥寥然而寂寂, 蒿里之神, 遙歌於莽蒼。 當此時也, 首妃康氏神魂有知, 遙望宮闈, 寧不悽愴於窅漠之間? 若此, 王其懷之乎? 戀之乎? 康氏往矣, 王當自重。 故勑。

宣諭聖旨曰:

朝鮮國王, 我上出氣力。 洪武二十一年, 爾小國軍馬到鴨綠江, 起將來打這中國。 那時節, 李諱一發回去。 如今得了王高麗國, 改號朝鮮, 自然天道。 朝鮮國王至誠, 如今兩國之間, 秀才每戲弄, 不直不正。 以小事大, 事事都要至誠直直正正。 日頭那里起那里落? 天下只是一箇日頭, 慢不得日頭。 爾那里使臣再來時, 漢兒話省的著他來, 一發不省的不要來。 我這裏孫兒, 朝鮮國王孫兒做親肯的時節, 著他漢兒話省得宰相來。 我這裏說歸他。 先來的四箇秀才裏頭權近看的老實, 放回去。 這話朝鮮國王說與他。 那三箇新來的一箇饒不得。 爾這幾箇都回去, 留下的四箇行力, 一發都將去。

御製詩曰:

鴨綠江淸界古封, 强無詐息樂時雄。 逋逃不納千年祚, 禮義咸修百世功。 漢代可稽明在冊, 遼征須考照遺蹤。 情懷造到天心處, 水勢無波戍不攻。【右鴨綠江。】遷遺井邑巿荒涼, 莽蒼盈眸過客傷。 園苑有花蜂釀蜜, 殿臺無主兔爲鄕。 行商枉道從新郭, 坐賈移居慕舊坊。 此是昔時王氏業, 檀君逝久幾更張。【右高麗故京。】入境聞耕滿野謳, 罷兵耨種幾春秋? 樓懸邊鐸生銅綠, 堠集煙薪化土丘。 驛吏喜迎安遠至, 馹夫忻送穩長遊。 際天極地中華界, 禾黍盈疇歲歲收。【右使經遼左。】

三篇, 帝賜權近。 初, 近入朝, 帝賜對, 知近有學識, 命題賦詩二十四篇, 近應製。

王京作古:

王氏作東藩, 維持五百年。 衰微終失道, 興廢實關天。 慘澹城猶是, 繁華國已遷。 我來增歎息, 喬木帶寒烟。

李氏異居:

東國方多難, 吾王功乃成。 撫民修惠政, 事大盡忠誠。 錫號承天寵, 遷居作邑城。 願言修職貢, 萬世奉皇明。

出使:

出使承嚴命, 辭親作遠遊。 載馳焉告瘁? 靡盬每懷憂。 蕩蕩天門闢, 行行驛路悠。 願陳忠款志, 萬一達宸旒。

奉朝鮮命至京:

聖主龍興撫萬方, 遠人來貢有梯航。 鬱葱佳氣皇居壯, 煥赫文章帝業昌。 曉霧收開仙仗日, 天風吹送御爐香。 小臣獲被恩榮渥, 入侍丹墀近耿光。

道經西京:

千載箕封枕海門, 八條遺俗至今存。 峨峨遠岫圍平野, 袞袞長江繞古村。 萬里梯航常入貢, 三韓疆域永爲藩。 慇懃爲與居民說, 得遂生生是聖恩。

度鴨綠:

塞邑蕭條樹老蒼, 長江一帶隔遼陽。 皇風不限華夷界, 地理何分彼此疆! 任見波濤掀小艇, 欣瞻天日照遐荒。 誰知此去怱怱意? 願奉恩綸報我王。

由遼左:

鶴野漫漫道路長, 名藩碁布摠雄强。 遠方慕義修朝聘, 諸將宣威拓土疆。 駟馬敢期題柱志, 關人休笑棄繻狂。 幸今四海同文軌, 最好遊觀上國光。

航萊州海:

十丈風帆萬斛船, 雲開蒼海渺無邊。 星垂雪浪相涵映, 水拍銀河共接連。 可向半洋悲壯士, 不須三島問群仙。 舟中偃仰堪乘興, 自是浮槎便上天。

始古開闢東夷主:

聞說鴻荒日, 檀君降樹邊。 位臨東國土, 時在帝堯天。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後來箕子代, 同是號朝鮮。

相望日本:

東望洪濤外, 倭奴稟性頑。 未嘗霑聖化, 常自肆兇奸。 剽竊侵隣境, 偸生寄海山。 願將天討去, 問罪凱歌還。

金剛山:

雪立亭亭千萬峰, 海雲開出玉芙蓉。 神光蕩漾滄溟近, 淑氣蜿蜒造化鍾。 突兀岡巒臨鳥道, 淸幽洞壑秘仙蹤。 東遊便欲凌高頂, 俯視鴻濛一盪胸。

新京地理:

海國千年遇聖明, 我王歸附貢丹誠。 牧民寵受朝鮮號, 作室新開漢邑城。 一水繞南流蕩漾, 三山鎭北聳崢嶸。 區區地理何須說? 永荷皇恩樂太平。

辰韓:

三韓曾鼎峙, 千里困兵爭。 勝負力相敵, 兼幷功未成。 王公初擧義, 金氏遠輸誠。 自此至今日, 吾民得遂生。

馬韓:

渺渺馬韓地, 區區鯨海濱。 三方初割據, 一統竟和親。 鋒鏑千年後, 桑麻四野春。 況今逢聖代, 遠俗被同仁!

弁韓:

東國三分際, 民生久未安。 紛紛蠻觸戰, 擾擾弁、辰韓。 古壘悲風起, 荒臺澹月寒。 自從成統合, 彼此永交歡。

新羅:

伊昔赫居世, 開邦五鳳翠。 相傳千歲久, 粗保一偶偏。 却獻雞林土, 來朝鵠嶺天。 緜緜三姓祀, 永絶正堪憐。

耽羅:

蒼蒼一點漢羅山, 遠在洪濤浩渺間。 人動星芒來海國, 馬生龍種入天閑。 地偏民業猶生遂, 風便商帆僅往還。 聖代職方修版籍, 此邦雖陋不須刪。

大同江:

箕子遺墟地自平, 大江西折抱孤城。 烟波縹渺連天遠, 沙水澄明(澈)〔徹〕底淸。 廣納百川常混混, 虛涵萬像更盈盈。 霈然入海朝宗意, 正似吾王事大誠。

聽高歌於來賓【樓名。】:

萬國來賓會玉京, 高樓爲向路傍營。 酒熏和氣淪肌骨, 歌咽淸聲感性情。 風動佩環珠玉碎, 香飄舞袖綺羅輕。 遠人遊賞知多少, 爭似微臣此日榮。

閱伶人於重譯【樓名】:

遠客承恩出鳳城, 天街白日馬蹄輕。 上樓最愛軒窓逈, 擧酒貪看技樂成。 笑語詼諧誠可喜, 腰肢孌轉更堪驚。 如今得閱伶才巧, 大醉陶然荷聖情。

引觴南市, 酩酊而歸【南市樓名】:

百尺高樓壓市廛, 遊人登眺興悠然。 長街萬貨紛交錯, 華屋千甍遠接連。 屢引金觴看妙舞, 更聞瑤瑟賦新篇。 皇恩旣渥那辭醉? 酩酊歸來月上天。

開懷北市落魄而還【北市樓名】:

鐘阜山前北巿樓, 朱甍突兀控神州。 觀光遠客承恩至, 度曲佳人勸酒留。 縱飮開懷眞軼宕, 扶歸落魄亦風流。 沈酣德澤曾無比, 感激唯思粉骨酬。

醉仙暢飮, 遊目於江皐。【醉仙, 樓名】:

勝日遊觀上醉仙, 欄干徙倚向江天。 風煙縹渺連圻外, 雲水微茫接海堧。 美酒不辭成酩酊, 珍羞且得飽芳鮮。 一聲淸唱羈愁盡, 深感皇恩祝萬年。

鶴鳴再坐聞環佩而珊珊:

鶴鳴樓上久徘徊, 環佩珊珊緩步來。 已喜淸歌和寶瑟, 況看纖手捧金杯! 南臨帝甸山河壯, 北對天門日月開。 得被內臣宣聖澤, 遊街三日醉扶回。

帝嘉賞之, 令從仕文淵閣, 且賜御製, 蓋寵之也。 咨文, 一曰:

奉聖旨: 今後差使臣來時, 要通漢人言語的來, 不通漢人言語的不許來。

一曰:

禮部左侍郞張炳等欽奉聖旨: “自古上至人君, 次至分茅胙土之君。 開國承家, 必得正人君子, 方乃國昌, 首用小人, 必亂邦也。 卽今朝鮮國王, 因王氏數終, 天將更運, 人事造於下, 天道應於上, 而有三韓, 國號朝鮮。 民妥於市鄕, 儀仍本俗, 法守舊章, 有國之道, 全矣。 奈何不務深謀遠慮, 固建睦隣之道, 左右所用, 皆輕薄小人? 雖稱儒士, 實剽竊古人肌膚之理, 所以不能以德助王, 雖稱以小事大, 其行文也, 搜求搆禍典章, 實造兵殃於三韓, 委朝鮮國王無置身之地。 此等之徒, 用之何益! 我中國古昔聖臣, 君有好兵者, 聖臣以爲不然。 云何? 蓋爲隣邦有不相和睦者, 且修言修文修名修德修刑。 隣邦不善, 尙未肯勤民於遠, 又增修其德。 安敢上違天意, 下阻山川之靈, 而乃興師以殃良善! 今朝鮮每歲措表箋者, 以文詞而搆禍。 在我雖不以爲必然, 山川上下神祇, 有所知覺, 禍將有日, 必不可逃。 爾禮部移文朝鮮國王, 深思靜慮, 知朕所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안익(安翊)·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김희선(金希善)·예문춘추관 학사(藝文春秋館學士) 권근(權近)이 황제의 칙위 조서(勅慰詔書)와 선유 성지(宣諭聖旨)와 어제시(御製詩)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2통을 받들고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다. 그 칙위(勅慰)에 말하였다.

"사자(使者)가 이르러 왕의 수비(首妃) 강씨(康氏)가 죽었다는 말을 아뢰니, 심히 슬펐노라. 왕은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권련(眷戀)하게 생각하여 스스로 마지못할 것이다. 무슨 까닭일까? 옛날 집을 변화시켜 나라를 만들 때에 근로하여 내조(內助)하고, 삼한(三韓)에 국모로 있던 이가 강씨(康氏)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지금에는 사람은 죽고 자취만 있으니, 이것이 권련(眷戀)하여 스스로 마지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옛날 생존하였을 때, 왕이 새벽 일찍 옷을 입을 즈음을 당하면 강씨가 경루(更漏)를 여러 번 고쳐가며 살피고,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 강씨가 절도 있게 하여 받들며, 조회를 보는 날에는 강씨가 궁빈(宮嬪)을 거느려 배웅하고, 해가 저물면 강씨가 궁빈을 거느려 촛불을 잡고 영접하여 침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지금은 강씨가 영원히 가서 난대(鸞臺)의 맑은 거울을 베풀지 않으며, 왕이 새벽 조회에 나가도 보내는 사람이 없으며, 저물게 침소에 돌아와도 돌아보고 물을 데가 묘연(杳然)하고, 다만 궁빈(宮嬪)과 시아(侍兒)가 관(棺)을 어루만지며 슬퍼하여 눈물이 그치지 않는 것을 볼 뿐이니, 슬픔이 어떻겠는가? 슬프다! 장사를 지낸 뒤에 세월이 물 흐르듯하여, 푸른 풀은 무덤에 우거지고, 여우와 토끼는 그 사이에 왕래하며, 옆에 있는 교목(喬木)은 늙은 줄기가 우뚝 서 있고, 해가 저물려고 하면 새는 날개를 나란히 하여 높은 가지에서 깃들며, 나무는 바람에 불리어 목메어 울고, 컴컴한 속의 시냇물은 졸졸 소리를 내며, 사람은 고요하고 밤은 깊은데, 들판은 쓸쓸하게 고요하고, 호리(蒿里)[5]의 귀신은 푸른 들에서 멀리 노래한다. 이때에 수비(首妃) 강씨의 혼이 아는 것이 있다면 멀리 궁궐을 바라보고 어찌 멀고 아득한 사이에서 처창(悽愴)하지 않겠는가? 이 같은 것을 왕이 회련(懷戀)하는가? 강씨는 갔으니, 왕은 마땅히 자중하여야 하겠으므로 칙유(勅諭)하는 것이다."

선유 성지(宣諭聖旨)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 국왕(朝鮮國王)이여! 나는 아직도 기운이 난다. 홍무(洪武) 21년에 그대의 조그만 나라 군마(軍馬)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장차 이 중국을 치려 하였다. 그 시절에 이(李) 【휘(諱).】 가 한 번에 회군하여 지금 고려국에 왕노릇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고쳤으니 자연의 천도(天道)요, 조선 국왕의 지성인데, 지금 두 나라 사이에 수재(秀才)가 매양 농간을 부려 곧지 못하고 바르지 못하였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데는 일마다 지성을 요하며, 직직 정정(直直正正)하여야 할 것이니, 해가 어디에서 떠서 어디로 떨어지겠는가? 천하에는 한 개의 해가 있을 뿐이니, 해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대 나라에서 사신이 다시 올 때에는 한화(漢話)를 아는 사람을 보내고, 한화(漢話)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올 필요가 없다. 우리 손아(孫兒)와 조선 국왕의 손아(孫兒)의 성혼(成婚)하는 것을 승락할 때에는, 한화(漢話)를 아는 재상을 보내라. 내가 그 사람에게 말하여 돌려보내겠다. 먼저 온 4인의 수재(秀才) 중에서 권근(權近)만 노성하고 진실하기에 놓아 돌려보낸다. 이런 얘기를 조선 국왕이 그에게 말해 주라. 새로 온 세 사람 중 한 사람도 말을 할 줄 모르니, 그 몇 사람은 모두 돌려보낸다. 머물러 둔 4인의 행력(行力)은 한 번에 다 보내겠다."

어제시(御製詩)에는,

"압록강 맑고 지경은 옛 정한 대로,

강했어도 거짓 없이 시대의 영웅이라 즐겨한다.

도망친 죄인을 들이지 않는 1천 년의 복지,

예절과 의리 모두 백세의 공적 이루었네.

한나라의 정벌은 분명히 책에 있어 상고하겠고,

요나라의 정벌한 것[6] 남긴 자취 살펴야 할 것일세.

정회(情懷)는 하늘 중심에 성취된 듯,

물에는 파도 없고 수자리도 변동 없다." 【위는 압록강(鴨綠江).】

"우물과 동네 옮겨 가서 저자가 황량하여,

우거진 풀 눈에 가득 길손이 상심한다.

비원[園苑]에는 꽃이 있어 벌이 꿀 모아가고,

궁전과 누대(樓臺)에는 주인 없어 토끼의 고장 되었네.

행상(行商)은 길을 돌아서 새 성으로 가고,

앉은 장사 옮겨 살며 옛 동네 그리워한다.

이것이 옛날 왕씨의 기업(基業),

단군(檀君)이 가신 지 오래이니 몇 번이나 경장(更張)하였노." 【위는 고려(高麗)의 고경(古京).】

"지경에 들어서면 들에 가득 농사하는 노래 들린다.

군사를 파하고 김매고 심은 지 몇 춘추(春秋)인가.

수루(戍樓)에 달린 변탁(邊鐸)이 녹슬고,

망보(望堡)에는 재와 낙엽 몰려서 흙더미 되었네.

역리(驛吏)는 먼 길 편히 온 것 기쁘게 마중하고,

일부(馹夫)들 기쁘게 놀라고 좋아서 전송한다.

하늘 끝 땅 끝까지 닿은 중화(中華)의 경계,

벼와 기장 밭에 가득하여 해마다 거둔다." 【위는 사신이 요좌(遼左)를 지나며.】

하였는데, 이 3편(篇)의 시(詩)는 황제가 권근(權近)에게 준 것이었다. 처음에 근(近)이 입조(入朝)하니, 황제가 대화를 하고서 근(近)이 학식이 있는 것을 알고는, 제목(題目)을 명하여 시 24편(篇)을 짓게 하였다. 근이 명에 응하여 지었는데, 왕경작고(王京作古)란 제목에 대하여,

"왕씨(王氏)가 동녘 제후 되어,

5백 년 유지했더니,

쇠미하여 종내는 도(道)를 잃었으니,

흥하고 망하는 것 실로 하늘에 관계되네.

처참하게 성은 아직도 있건만,

번화하던 나라는 이미 옮겼소.

내 와보고 탄식만 더하는데,

높은 나무에 찬 연기 서렸네."

하고 이씨이거(李氏異居)란 제목에 대하여,

"동쪽 나라에 어려운 일 많았는데,

우리 임금 공 이루어,

백성을 무마하고 혜정(惠政)을 닦으며,

대국을 섬기는 데 충성 다했소.

나라 이름 지어주신 은총받고서,

사는 곳 옮기고 읍성(邑城) 건설하였소.

원컨대 직공(職貢)을 닦아,

만대로 황명(皇明)을 받드리이다."

하고, 출사(出使)라는 제목에 대하여,

"사신으로 나옴은 엄명(嚴命)을 받고서,

어버이 하직하고 먼 길 올랐습니다.

달려간다 어찌 피로함을 말하오리.

왕의 일이 견고하지 못하니 매양 근심될 뿐입니다.

시원스레 천문(天門)을 여셨는데,

가도가도 역로(驛路)는 멀기도 합니다.

원컨대, 충성의 뜻을 펴 놓아서,

만의 일이라도 황제께 통하고저."

하고, 봉조선명지경(奉朝鮮命至京)이라는 제목에 대하여,

"성인 임금 용처럼 일어나시어 만방(萬方)을 무수(撫綏)하시니,

먼 곳 사람 산 넘고 바다 건너 와서 조공합니다.

왕성한 상서 기운 황궁이 장(壯)하고,

빛나는 문장(文章)에는 제업(帝業)이 창성합니다.

새벽 안개 개이니 선장(仙杖)[7]이 햇빛에 빛나고,

하늘 바람 불어서 어로(御爐)의 향기 풍기네.

소신도 은혜와 영광 넓으심을 입어,

붉은 뜰 앞에 들어와 빛나는 광채 가까이 모셨네."

하고, 도경서경(道經西京)이란 제목에 대하여,

"천년된 기자(箕子)의 땅 바닷가에 걸쳤는데,

팔조(八條)의 끼친 풍속 지금도 남아 있네.

높다란 먼 뫼 평야에 둘러 있고,

좔좔 흐르는 긴 강 옛 마을 둘러 있소.

만리에서 산 넘고 바다 건너 들어와 늘 조공하옵고,

삼한(三韓) 나라 지경은 길이 제후국 될 것입니다.

은근히 거민(居民)들과 말하옵는 것,

생생(生生)을 이루는 것 그것이 성은(聖恩)이라 하였소."

하고, 도압록(渡鴨綠)이란 제목에 대하여,

"변방 고을 쓸쓸한데 나무만이 늙고 푸르러,

긴 강 한 줄기로 요양(遼陽)과 격해 있네.

황풍(皇風)은 중화(中華)와 동이(東夷)를 제한하지 않는데,

땅 이치 어이하여 이 경계를 나눴는가.

파도(波濤)에 작은 배 되는 대로 흔드는데,

천일(天日)이 멀고 거친 땅 비취는 것 기쁘게 바라봅니다.

누가 이번 가는 총총한 뜻 알으리까.

은혜로운 말씀 우리 임금께 알리려 원합니다."

하고, 유요좌(由遼左)라는 제목에 대하여,

"학들[鶴野][8]이 지리하게 길이 먼데,

이름 있는 고을들 바둑처럼 펼쳐 있어 모두가 크고 강합니다.

먼 곳에서 덕의를 사모하여 조빙을 닦고,

여러 장수 위엄 떨쳐 국토와 지경 개척합니다.

사마(駟馬) 기약한다고 다리 기둥에 어찌 쓸 수[題桂] 있으리.[9]

관문지기[關人] 기수(棄繻)[10]하는 미친 것을 웃지 마소.

다행히도 지금 사해(四海)가 문화를 같이하여서,

가장 좋은 일 대국에 관광하는 것이오."

하고, 항래주해(航萊州海)라는 제목에 대하여,

"열 길 돛대에 만곡(萬斛)들이 배,

구름 활짝 열리니 창해(滄海) 아득하여 가이 없네.

별이 물결에 드리워 서로 비치고,

물이 은하(銀河)에 부딪쳐 맞붙어 이었구나.

가다가 대양(大洋) 반쯤에서 장사(壯士)[11]를 슬퍼하리.

멀리 삼도(三島)[12]의 신선에게 물어 무엇하리.

배 안에서 흥겨워 누운 채 우러러보니,

두둥실 띄운 이 떼[槎] 하늘까지 가는 듯."

하고,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라는 제목에 대하여,

"듣자하니 황막한 그 옛날,

단군(檀君)이 단목가에 강림하시어,

동쪽 나라 왕위에 오르시니,

그때가 제요(帝堯)의 시절.

대를 전해온 것 몇인지,

햇수는 천년을 지났다 하오.

그 뒤에 기자(箕子)의 대(代)에도,

한가지로 조선(朝鮮)이라 이름하였소."

하고, 상망일본(相望日本)이란 제목에 대하여,

"동으로 바라보면 큰 파도 넘어,

왜놈[倭奴]이 있는데 성질도 완악하다오.

한 번도 성인(聖人)의 교화 못받아,

항상 흉악하고 간사합니다.

노략하고 도둑질로 이웃나라 침범하면서,

바닷가 산기슭에서 살아간다 합니다.

하늘의 뜻 받들어 토벌하여서,

죄를 묻고 개선(凱旋)하여 돌아오소서."

하고, 금강산(金剛山)이란 제목에 대하여,

"눈속에 우뚝하게 선 천만 봉우리,

바닷구름 헤치고 옥 연꽃이 섰네.

넘실대는 신비한 빛 창해(滄海)를 닮은 듯,

꿈틀대는 아득한 기운 조화(造化)를 모았는 듯.

우뚝 솟은 산부리는 조도(鳥道)를 굽어보고,

맑고 깊숙한 골 안에는 신선의 자취 감추었네.

동국(東國)에 놀면서 절정에 올라서,

큰 바다 굽어보며 가슴 한 번 씻고저."

하고, 신경지리(新京地理)란 제목에 대하여,

"바다 나라 천년 만에 성명(聖明)하신 임금 만나,

우리 임금 귀부(歸附)하여 단성(丹誠)을 바칩니다.

백성을 기르라 하여 조선 국호 받았고,

집 지어서 새롭게 한양성 개척했네.

한 물줄기 남으로 둘러 있어 넘실거려 흐르고,

세 산이 북쪽을 눌러 우뚝하게 솟아 있소.

구구한 지리를 무얼 말씀하리.

길이 황은(皇恩)을 입어 태평을 즐기오리다."

하고, 진한(辰韓)이란 제목에 대하여,

"삼한(三韓) 옛적에 솥발처럼 분립하여,

천리가 병쟁(兵爭)에 피곤하였었소.

이기기도 지기도 힘이 서로 비등하여,

통합하기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왕공(王公)이 처음 의거 높이 드시니,

김씨(金氏)도 멀리 정성으로 귀화하여,

그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백성 생업을 이루었습니다."

하고, 마한(馬韓)이란 제목에 대하여,

"작다란 마한[馬朝] 땅이,

구구하게 고래 노는 바닷가에 있었소.

세 방면을 처음에 분할하더니,

통일하려고 끝내는 화친하였소.

무기 날카롭던 천년 뒤에는,

뽕과 삼 네 들에 봄이 왔오.

하물며 지금은 성명한 시대 만나,

먼 백성 같은 인정(仁政) 입었습니다."

하고, 변한(弁韓)이란 제목에 대하여,

"동쪽 나라 셋으로 나뉘었을 때,

민생이 오래 편치 못했습니다.

분분한 만촉(蠻觸)[13]의 싸움,

시끄러운 변(弁)·진한(辰韓)이라 하였습니다.

옛 진터에 슬픈 바람이 일고,

거친 누대에는 흰 달이 차갑습니다.

통일을 이룬 뒤부터,

피차가 없어져 길이 기쁨을 나누옵니다."

하고, 신라(新羅)라는 제목에 대하여,

"그 옛날 혁거세왕(赫居世王),

오봉(五鳳)[14]년간에 개국했다 합니다.

대대로 전한 것이 천년이 되옵는데,

그대로 한 모퉁이를 보전하였소.

문득 계림(雞林) 땅을 가져다,

곡령(鵠嶺) 임금에 조공하여,[15]

면면(緜緜)하던 삼성(三姓)의 종묘,

영영 끊어진 것 참으로 가련합니다."

하고, 탐라(耽羅)란 제목에 대하여,

"푸르르고 푸른 한 점의 한라산(漢羅山)이,

만경창파 아득한 속에 멀리 있네.

사람이 별[星芒]을 움직여 바다 나라에 왔었고,

말은 용의 씨를 낳아서 천한(天閑)에 들어갔다오.[16]

땅은 궁벽되나 백성들이 업이 있어 살아가고,

바람이 편하면 장삿배가 겨우 오고가오.

성명의 시대에 직방(職方)에서 판적(版籍)을 꾸밀 때,

그 고장 누추하지만 부디 빠치지 마옵소서."

하고, 대동강(大同江)이란 제목에 대하여,

"기자(箕子)의 남긴 터 땅은 그대로 평야인데,

큰 강이 서쪽으로 꺾이며 외로운 성 싸 안았소.

연기 물결 아득하여 하늘에 닿은 듯 멀리 있고,

모래 물 맑고 밝아 밑바닥까지 청청합니다.

널리 일백 냇물[百州] 받아서 항상 좔좔 흐르고,

만상(萬像)이 비쳐서 다시 가득합니다.

힘차게 바다로 들어가 종주(宗主)에 모이는 뜻,

바로 우리 임금의 대국 섬기는 정성 그것입니다."

하고, 청고가어내빈(聽高歌於來賓) 【내빈은 누(樓)의 이름.】 이라는 제목에 대하여,

"만국(萬國)이 손으로 와서 옥경(玉京)에 모이니,

높은 누각 그대 위해 길가에 세워졌네.

술기운 훈훈하면 편한 생각 뼛속에 스며들고,

노랫가락 맑게 흘러 정서를 움직이네.

바람에 노리개 흔들리니 주옥(珠玉)이 부서지는 듯,

향기는 춤추는 소매에 나부껴 깁옷이 가벼웁다.

먼 곳 사람 놀며 관상함이 얼마나 되옵던가.

미신(微臣)의 이날 영광 같은 이 적으리라."

하고, 열영인어중역(閱伶人於重譯) 【중역은 누의 이름.】 이라는 제목에 대하여,

"먼 곳 나그네 은총 입고 봉성(鳳城)에 나서니,

큰 거리 한낮에 말굽도 가볍도다.

누각에 올라 가장 좋은 것 마루가 넓직하고,

술 들고서 보고픈 것 기악(妓樂)이 흥청함일세.

웃으며 말하는 재담 참으로 유쾌하고,

허리와 사지 부드럽게 도는 것 더욱 놀랍구나.

이제는 배우들의 교묘한 것 구경하고서,

거나하니 취한 것 성상의 은정이어라."

하고, 인상남시명정이귀(引觴南市酩酊而歸) 【남시(南市)는 누의 이름.】 라는 제목에 대하여,

"1백 자 높은 누각 저자 위에 솟았는데,

노는 사람 올라 볼 제 흥취도 유연(悠然)하다.

긴 거리에 만 가지 물화는 분분하게 교역되고,

화려한 집 천(千) 지붕 멀리 서로 연하였네.

금잔에 가득 부어 들면서 묘한 춤 구경하고,

옥비파 또 다시 들으면서 새 시를 읊었도다.

황은(皇恩)이 그처럼 넓으시니 어찌 취하는 것 사양하리.

명정해서 돌아오니 달이 중천에 떠 있었소."

하고, 개회북시낙백이환(開懷北市落魄而還) 【북시(北市)는 누의 이름.】 이라는 제목에 대하여,

"종부산(鐘阜山)앞에 북시루(北市樓) 서 있어서,

붉은 지붕 돌올하게 신성한 땅 자랑한다.

관광(觀光)하는 먼 데 사람 은총 받고 이르오니,

노래하는 예쁜 사람 술 권하며 붙들었소.

마음놓고 싫도록 마시오니 참으로 질탕(軼宕)하였는데,

정신 잃고 부축해 들어옴도 그 역시 멋이어라.

은택에 깊이 잠기옴은 전에는 없던 일,

감격한 마음 뼈를 가루하여 보답할 뿐입니다."

하고, 취선창음유목어강고(醉仙暢飮遊目於江皐) 【취선(醉仙)은 누의 이름.】 라는 제목에 대하여,

"좋은 날 관광하노라 취선루(醉仙樓)에 올라서,

난간에 의지하여 강 하늘 향해 보니,

바람·연기는 아득하게 서울 땅 밖으로 연해 있고,

구름·물 망망한 것 바다까지 접했도다.

좋은 술 명정하게 취함도 싫지 않은데,

진미에 향기롭고 신선한 것 배불렀네.

한 소리 맑은 노래 나그네 근심 사라져서,

황은(皇恩)에 깊은 것 감격하여 만년수 축원하오."

하고, 학명재좌문환패이산산(鶴鳴再坐聞環佩而珊珊)이라는 제목에 대하여,

"학명루(鶴鳴樓) 위에서 오래 배회(徘徊)하니,

패물찬 각시 사뿐사뿐 걸어온다.

고운 노래 옥비파에 반주한 것 기뻤는데,

고운 손 금잔을 받들 줄 보올건가.

남쪽으로 임한 곳 제국의 산하(山河)도 장할시고.

북으로 대하오니 천문(天門)에 일월(日月)이 밝았어라.

내신(內臣)이 성은 전달함을 얻어서,

사흘이나 거리에 놀고서 취하여 돌아왔다네."

하였다. 황제가 아름답게 여겨 상을 주고, 문연각(文淵閣)에 종사(從仕)하게 하였다.

또 어제시(御製詩)를 주었으니, 대개 총이(寵異)하게 한 것이었다. 그 자문(咨文)의 하나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금후로는 사신(使臣)을 보낼 때에는 한인(漢人)의 말을 통하는 사람을 보내고, 한인의 말을 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하고, 또 하나는 이러하였다.

"예부 시랑(禮部侍郞) 장병(張炳) 등이 공경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옛날부터 위로는 임금에 이르고, 다음은 분모(分茅) 조토(胙土)의 임금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열고 집을 이음에는 반드시 정인(正人) 군자(君子)를 얻어야 바야흐로 나라가 창성하니, 첫머리로 소인을 쓰면 반드시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지금 조선 국왕이 왕씨의 수가 다하고 하늘이 장차 운수를 고치려 함을 인하여, 인사(人事)는 아래에서 만들어지고 천도(天道)는 위에서 응하여 삼한(三韓)을 차지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백성들이 저자와 시골에 안돈되어 의례(儀禮)는 본 풍속을 인습하고 법은 옛 헌장을 지키니, 나라를 가지는 도가 온전하여졌도다. 〈그러나〉 어째서 깊은 꾀와 먼 생각을 힘써서 굳게 이웃과 친목하는 방도를 세우지 않고 좌우에 쓰는 것이 모두 경박한 소인이었는가. 비록 유사(儒士)라고 일컬으나, 실상은 옛사람들의 기부(肌膚)의 이치[理]만 표절하였으니 그 때문에 왕을 덕으로 돕지 못하는 것이고, 비록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긴다고 일컬으나 그 행문(行文)하는 것이 전장(典章)에 화를 만들기를 구하니, 실상은 삼한(三韓)에 병란의 앙화를 만드는 것이며, 조선 국왕을 몸둘 땅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무리들을 써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우리 중국의 옛날 성신(聖臣)은, 임금이 군사를 좋아하는 자가 있으면 성신이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왜 그런가 하면, 대개 이웃나라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게 되면 또 말을 닦고 글을 닦고 이름을 닦고 덕을 닦고 형벌을 닦아야 하고, 이웃나라가 착하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백성을 원방에 근로하게 하려 하지 않는다. 또 그 덕을 더 닦으면 어찌 감히 위로 천의(天意)를 어기고 아래로 산천의 영(靈)을 막아서 군사를 일으켜 선량한 백성에게 앙화를 끼칠 수 있겠는가? 지금 조선에서 매년 표전(表箋)을 짓는 자가 문사(文辭)로 화를 얽으니, 우리에게 있어서는 비록 반드시 그렇게 여기지 않지마는, 산천과 위아래의 신지(神祗)가 아는 것이 있다면, 화가 장차 올 날이 있어서 반드시 피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 국왕에게 이문(移文)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요하게 헤아려서 짐(朕)의 말한 것을 알게 하라."


3月 9日[편집]

햇무리가 지고 밤에 남쪽으로 붉고 흰 기운이 끼다[편집]

○壬戌/日暈。 夜, 南有赤白氣。

햇무리하고, 밤에 남쪽으로 붉고 흰 기운이 있었다.


3月 15日[편집]

상서사 판사 조준 정도전 등이 내관(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세우기를 청하다[편집]

○戊辰/尙瑞司判事趙浚、鄭道傳等請建內官之號。 賢儀二人, 一視正一品, 一視從一品。 淑儀二人, 一視正二品, 一視從二品。 贊德三人, 一視正三品, 二視從三品。 順成三人, 一視正四品, 二視從四品。 尙宮三人, 一視正五品, 二視從五品。 尙官三人, 一視正六品, 二視從六品。 家令四人, 二視正七品, 二視從七品。 司給四人, 二視正八品, 二視從八品。 司飾四人, 二視正九品, 二視從九品。

상서사 판사(尙瑞司判事)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이 내관(內官)의 호(號)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현의(賢儀) 2인에 하나는 정1품에 견주고, 하나는 종1품에 견주며, 숙의(淑儀) 2인에 하나는 정2품에 견주고, 하나는 종2품에 견주며, 찬덕(贊德) 3인에 하나는 정3품에 견주고, 둘은 종3품에 견주며, 순성(順成) 3인에 하나는 정4품에 견주고, 둘은 종4품에 견주며, 상궁(尙宮) 3인에 하나는 정5품에 견주고, 둘은 종5품에 견주며, 상관(尙官) 3인에 하나는 정6품에 견주고, 둘은 종6품에 견주며, 가령(家令) 4인에 둘은 정7품에 견주고, 둘은 종7품에 견주며, 사급(司給) 4인에 둘은 정8품에 견주고, 둘은 종8품에 견주며, 사식(司飾) 4인에 둘은 정9품에 견주고, 둘은 종9품에 견주게 하소서."


3月 16日[편집]

상의중추원사 유운을 명나라에 보내어 현비의 상사에 황제의 조의를 보내 준 데 감사하다[편집]

○己巳/遣商議中樞院事柳雲, 赴京謝恩。 奏曰:

臣妻康氏奄辭盛代, 緣係凶訃, 不敢奏聞。 今者陪臣安翊等, 回自京師, 欽奉勑慰聖旨, 天語切至。 欽此, 感激無已。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유운(柳雲)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사은(謝恩)하고 아뢰기를,

"신의 처(妻) 강씨(康氏)가 갑자기 성대(盛代)를 하직하였는데, 사연이 흉한 부음(訃音)에 관계되므로 감히 주문(奏聞)하지 못하였더니, 지금 배신(陪臣) 안익(安翊)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서 칙위(勅慰) 성지(聖旨)를 흠봉하오매, 천어(天語)가 간절하고 지극하오니 흠차(欽此) 감격하여 마지않습니다."

하였다.


3月 17日[편집]

간관이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에 대한 배례를 유후사에서 행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庚午/諫官上言: “拜表之禮, 不可行於草地。 願還留後司, 備儀行禮。” 上曰: “留後司亦行次也。”

간관(諫官)이 상언(上言)하였다.

"배표(拜表)하는 예를 초지(草地)에서 행할 수 없으니, 원컨대 유후사(留後司)에 돌아가 의식을 갖추어 예를 행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유후사(留後司)도 역시 행차(行次)인 것이다."


서북면 도순문사에 이첩하여 문서 없이 변경에서 화물 매매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다[편집]

○命都堂移牒西北面都巡問使, 禁無文憑行貨者, 以嚴經界。

도당(都堂)에 명하여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에게 이첩(移牒)하여 문빙(文憑)이 없이 화물을 매매하는 자를 금하고, 경계(經界)를 엄하게 하였다.


3月 18日[편집]

온천에서 고아들을 만나 보고 옷과 밥을 주게 하다[편집]

○辛未/上在溫泉, 有二兒乞食。 上令訊之, 乃喪父母無所依歸者。 命尙衣院給衣, 司膳給食。

임금이 온천(溫泉)에 있는데, 두 아이가 밥을 빌었다. 임금이 물어 보게 하니, 부모를 여의고 의귀(依歸)할 데가 없는 아이였다. 상의원(尙衣院)에 명하여 옷을 주고 사선(司膳)에게 밥을 주게 하였다.


3月 19日[편집]

목성이 여귀성과 적시성을 5일 동안 계속 범하다[편집]

○壬申/木星犯輿鬼、積尸至丁丑。

목성(木星)이 여귀(輿鬼)·적시(積尸)를 범하여 정축일에 이르렀다.


3月 20日[편집]

천신산에서 사냥하고 평주에 머물다[편집]

○癸酉/上獵于天神山, 次平州地。 見一女從行, 問之, 乃司僕之婢, 供其官吏者也。 卽命放還, 囚其判事李丕等五人, 翌日宥之。

임금이 천신산(天神山)에서 사냥하고 평주(平州) 땅에 머물렀다. 한 여자가 따라 다니는 것을 보고 물으니, 사복시(司僕寺)의 종[婢]으로 그 관리를 공궤하는 자이었다. 곧 명하여 놓아 돌려보내고 그 판사(判事) 이비(李丕) 등 다섯 사람을 가두었다가 이튿날 용서하였다.


함주에 있던 황조비의 능을 귀주 동쪽 임방 산등성이에 이장하다[편집]

○皇祖妣敬妃之陵在咸州, 術士上言當遷。 遣寧安君良祐, 遷安于歸州東壬山之原。

황조비(皇祖妣) 경비(敬妃)의 능(陵)이 함주(咸州)에 있는데, 술사(術士)가 옮겨야 한다고 상언하므로, 영안군(寧安君) 양우(良祐)를 보내어 귀주(歸州) 동쪽 임방(壬方) 산등성이에 옮겨 안장하였다.


3月 25日[편집]

서리가 내리다[편집]

○戊寅/隕霜。

서리가 내렸다.


통사 전 소감 박인귀 등이 대마도에서 돌아왔는데, 왜선 10척이 항복하기를 빌다[편집]

○通事前少監朴仁貴等來自對馬島, 倭船十隻乞降。

통사(通事) 전 소감(少監) 박인귀(朴仁貴) 등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왔는데, 왜선 10척이 항복하기를 빌었다.


3月 26日[편집]

서리가 내리다[편집]

○己卯/隕霜。

서리가 내렸다.


좌정승 조준과 정도전·남은 등에게 초립과 옥영자 등을 내려 주다[편집]

○賜左政丞趙浚草笠及玉纓子, 賜奉化伯鄭道傳、宜城君南誾草笠。

좌정승 조준(趙浚)에게 초립(草笠)과 옥영자(玉纓子)를 내려 주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에게 초립을 내려 주었다.


3月 27日[편집]

온천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다[편집]

○庚辰/上發溫泉還京。

임금이 온천(溫泉)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왜인의 항복은 받되, 만약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키울 것을 도당에 명하다[편집]

○上命都堂曰: “今慶尙道乞降倭人, 雖誠僞難知, 固當受降。 彼雖不誠, 我毋失信, 但當自强, 若彼先發爲寇, 卽當應機殄滅。”

임금이 도당(都堂)에 명하였다.

"지금 경상도(慶尙道)의 항복하기를 비는 왜인이 진실인지 허위인지는 비록 알기 어려우나, 마땅히 항복을 받아야 한다. 저들은 비록 진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신(信)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다만 마땅히 스스로 강하여 만일 저 사람들이 먼저 발동하여 도둑질을 하면, 곧 사기에 응하여 섬멸하여야 한다."


3月 28日[편집]

팔에 매를 매고 강음현과 개성현에서 사냥하다[편집]

○辛巳/上臂鷹田于江陰、開城縣。

임금이 팔에 매를 매고 강음(江陰)·개성현(開城縣)에서 사냥하였다.


六年 夏四月[편집]

4月 1日[편집]

안개가 끼다. 첫 물조기를 종묘에 천신하다[편집]

○癸未朔/霧。 以新石首魚薦宗廟。

안개가 끼었다. 새로 난 석수어(石首魚)를 종묘(宗廟)에 천신(薦新)하였다.


왜구 괴수 나가온이 병선 24척을 거느리고 항복하기를 청하다[편집]

○倭寇魁羅可溫, 率其兵船二十四艘請降。

왜구(倭寇)의 괴수 나가온(羅可溫)이 병선 24척을 거느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4月 3日[편집]

크게 번개와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다[편집]

○乙酉/大雷電以雨。

크게 우레와 번개를 하고 비가 내렸다.


4月 5日[편집]

대장군 김계수 등을 경상도에 보내 왜구 방어 계획을 세우게 하다[편집]

○丁亥/遣大將軍金季壽、前萬戶朴文崇于慶尙道, 考察防倭。

대장군 김계수(金季壽)와 전 만호(萬戶) 박문숭(朴文崇)을 경상도에 보내어 왜구 막는 계책을 고찰하게 하였다.


항복한 왜인 괴수 2인이 경상도 도관찰사에게 술을 대접하다[편집]

○降倭魁二人, 率其黨六人, 持酒享慶尙道都觀察使。

항복한 왜인 괴수 2인이 그 무리 6인을 거느리고 술을 가지고 경상도 도관찰사를 먹였다.


4月 6日[편집]

도성에 돌아와 종묘에 배알하고 궁으로 돌아오다[편집]

○戊子/上還都謁宗廟, 乃下輦。

임금이 도성에 돌아와서 종묘(宗廟)에 배알하고 연(輦)에서 내렸다.


왜괴가 관찰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먼저 양식을 줄 것을 청하니 쌀 2백석을 주다[편집]

○倭魁遣人二名, 言於觀察使曰: “我等萬戶三人, 各率一百人, 欲謁觀察使, 願先給糧。” 觀察使給米石二百。

왜괴(倭魁)가 사람 2명을 보내어 관찰사에게 말하였다.

"우리들 만호(萬戶) 3인이 각각 1백 인을 거느리고 관찰사를 뵙고자 하오니, 원컨대 먼저 양식을 주소서."

관찰사가 쌀 2백 석을 주었다.


나가온이 80인을 거느리고 밀양부에 이르니 관찰사 이지가 술을 대접하였으나 기습하려 함을 눈치채고 도망가다[편집]

○羅可溫請見, 觀察使許之。 羅可溫率其黨八十人, 至密陽府, 觀察使李至餉以酒食, 送可溫等十人于京, 餘皆還船。 都安撫使朴子安欲以軍船掩襲之, 倭覺之遂走, 子安追之不及。

나가온(羅可溫)이 뵙기를 청하니 관찰사가 허락하였다. 나가온이 그의 무리 80인을 거느리고 밀양부(密陽府)에 이르니 관찰사 이지(李至)가 술과 음식을 먹이고, 나가온 등 10인은 서울로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배로 돌려보내었다. 도안무사(都安撫使) 박자안(朴子安)이 군선(軍船)으로 이를 엄습하고자 하니, 왜인이 깨닫고 드디어 달아났는데, 자안(子安)이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4月 8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庚寅/霧。

안개가 끼었다.


왜적 방어를 위해 충청도 군사 5백명을 징발해 경상도·전라도에 보내다[편집]

○發忠淸道軍五百, 送于慶尙、全羅道。 備禦倭也。

충청도 군사 5백 명을 징발하여 경상도·전라도에 보내었으니, 왜인을 막는 데 대비한 것이었다.


4月 9日[편집]

정릉에 거둥하다[편집]

○辛卯/幸貞陵。

정릉(貞陵)에 거둥하였다.


4月 12日[편집]

항복을 종용하려 왜인들에게로 중을 보낸 한상질과 유양을 간관이 논핵하다[편집]

○甲午/諫官劾藝文春秋館太學士韓尙質、商議中樞院事柳亮。 始尙質觀察慶尙, 亮尹雞林。 亮言於尙質: “宜遣人於倭, 誘以禍福, 使之納降。” 乃遣僧義雲, 而倭乃逃歸, 故諫官問其遣僧之由。

간관(諫官)이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한상질(韓尙質)과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유양(柳亮)을 논핵하였다. 처음에 상질은 경상 관찰(慶尙觀察)로 있었고 유양(柳亮)은 계림 윤(雞林尹)으로 있었는데, 양이 상질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사람을 왜국에 보내어 화복(禍福)으로 달래어 항복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여, 중 의운(義雲)을 보냈는데, 왜인들이 도망해 돌아갔으므로, 간관이 중을 보낸 이유를 물은 것이었다.


간관이 밤에 풍악을 울리며 술을 마신 전 소감 최선 등의 죄를 청하다[편집]

○諫官上言: “前少監崔宣、前正言崔宏、前正郞李蟠等, 夜聚遊女, 動樂縱飮, 以干禁令, 且因使酒, 攔入人家, 打破家産。 且宣、宏當祖母在殯, 荒淫若此, 乞下攸司, 依律科罪。” 上從之, 特宥蟠。

간관(諫官)이 상언하였다.

"전 소감(少監) 최선(崔宣)·전 정언(正言) 최굉(崔宏)·전 정랑(正郞) 이반(李蟠) 등은

밤에 유녀(遊女)를 모으고 풍악을 울리며 마음대로 마시어 금령을 범하고, 또 술주정으로 인하여 남의 집에 난입(攔入)[17]하여 가산(家産)을 깨뜨려 버리고, 또 선(宣)과 굉(宏)은 조모가 빈소(殯所)에 있는 때를 당하여 거칠고 음란하기가 이와 같으니, 원컨대 유사(攸司)에 내려 율에 의하여 과죄(科罪)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으나, 특별히 반(蟠)을 용서하였다.


4月 14日[편집]

황제에게 진헌하는 금안교 안에 하늘 천자를 쓴 별안국 별감 이미충을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丙申/下別鞍局別監李美忠于巡軍獄。 美忠於進獻金鞍轎內, 書天字, 帝見之, 怒曰: “鞍, 人所騎也。 人騎於天, 可乎? 是侮朕也。” 焚其鞍。 然美忠於群鞍轎中, 別置進獻之轎, 標以天字, 非有他心, 故尋釋之。

별안국 별감(別鞍局別監) 이미충(李美忠)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미충은 진헌(進獻)하는 금안교(金鞍轎) 안에 천 자(天字)를 썼었다. 황제가 보고 노하여 말하기를,

"안장은 사람이 타는 것인데 사람이 하늘을 타는 것이 가한가? 이것은 짐(朕)을 모욕한 것이다."

하고, 그 안장을 불태웠다. 그러나 미충(美忠)이 여러 안교(鞍轎) 중에 진헌하는 가마를 따로 두고 천 자(天字)로 표한 것이요,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금 뒤에 석방하였다.


4月 16日[편집]

서북면의 흉년을 진휼하다[편집]

○戊戌/遣殿中少卿吳存志, 賑西北面饑。

전중 소경(殿中少卿) 오존지(吳存志)를 보내어 서북면의 흉년을 진휼하였다.


오도리 우적합 등 4인과 왜인 구육 등 5인에게 옷 1습씩을 내려 주다[편집]

○賜吾都里、亏狄哈等四人及降倭㡱六、都時老等五人各衣一襲。

오도리(吾都里) 우적합(亏狄哈) 등 4인과 항복한 왜인 구육(㡱六)·도시로(都時老) 등 5인에게 각각 옷 1습(襲)을 내려 주었다.


4月 17日[편집]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편집]

○己亥/謝恩使判三司事偰長壽、副使中樞院副使辛有賢、前義州都節制使陳忠貴、前戶曹典書楊天植等回自京師, 傳禮部咨, 曰:

本部欽奉聖旨: “中國周隣四夷, 遠近不等, 惟朝鮮密邇東陲, 比之他處, 甚爲切近。 前者, 王氏怠政而亡, 李氏新興, 數生邊釁, 朕與語再三, 終不能止。 恐久生兵禍, 實欲互爲姻親, 以妥兩國生民。 此意此慮, 已有年矣。 是以二十九年六月間, 但以行人, 以通此意。 使者歸, 聞王出迎, 朕將以爲必然姻親之事成矣。 三十年春, 朝鮮亦爲此事遣人, 至進鞍馬, 以表誠意。 次日驗鞍馬, 器獸皆疵。 觀物之所以, 初交尙此, 久必不然。 至君子良友各天一方, 將欲會而未能, 必千里神交而志通。 今朝鮮, 朕以誠往, 彼以詐應。 其千里神交而志通, 可乎? 事不斷其初, 後將必悔。 其朝鮮姻親之事, 難以再議。 爾禮部移文朝鮮, 罷姻親之議, 善待行人, 歸諭以毋生邊釁。”

又咨曰:

本部欽奉聖旨: “開國承家, 小人勿用。 朝鮮新造, 所用之人, 見在表箋, 此非三韓生靈之福, 乃三韓之禍首也。 曩古中夏受君命, 而列土者萬國, 能祿及子孫, 世守其土者罕矣。 何哉? 以其小人在側。 由是九伐之法用焉, 能與天朝同休者, 數國而已。 且鄭, 一小國耳。 初用人未當, 每受兵征, 後子産相鄭, 君子哉子産! 凡所移文, 諸侯方伯, 無不相好, 以其言不妄發, 意不乖違。 終子産而無兵禍。 云何? 蓋能敷誠意於諸侯方伯, 深思熟慮, 下筆精微, 故有草創討論修飾潤色。 如此而後方行, 安肯一字而侮慢於人者也! 今朝鮮國王李諱所用文人鄭道傳者, 於王之助, 何爲也? 王若不悟, 斯人必禍源耳。 今鄭摠、盧仁度、金若恒, 若在朝鮮, 必鄭道傳之羽翼。 卽因各人已招, 禍及其身矣, 王其審之。 若不精審, 國禍又將發, 假手於人。 爾禮部移文朝鮮國王, 深思熟慮, 以保三韓。”

偰長壽又傳宣諭, 曰:

二月初二日, 帝御右順門, 引見長壽等曰: “做親事, 爾見在孝服中, 待終制後年正月, 交人去做親。 李某沒分曉, 鄭道傳用他做甚麿? 鄭摠前日寫與翰林院, 道王妃歿, 要服齊衰。 他回道本國雖有喪事, 在朝廷不敢這般。 後到年節下都穿白衣入內, 又做鴨綠江詩, 說龍灣蕭索, 問之, 曰: “鴨江有箇龍灣。” 鄭道傳到這裏回去, 過山海衛對人說: ‘好便好不好’, 來搶一場。 爾國來的火者, 我宮院裏走我睡處, 喫的膳都管。 他要看爺娘, 我敎他去回來, 恁都打發打銀子。 他旣有爺娘, 只合齎發他爺娘。 將來這裏做甚麿? 他身上帶著一介靑的物、一介紅的物、一介柳木圈子。 拆圈子裏有一張紙, 滿寫西蕃字。 如今比裏有些殘達子, 我見去征他。 爾若著二萬人馬, 去出氣力, 我一點兒不疑, 爾却肯麿?” 午時, 宣至右順門, 曰: “先番鞍子拆開, 裏頭寫著字樣, 我又拆爾將來鞍子, 不知如何。” 衆內官各將所拆鞍具進, 一面雁翅板上左右, 皆倒寫天字, 一介坐兒裏書玄字, 一面坐兒裏畫十字。 帝起立親手把看, 復坐曰: “他怎麿這般小道兒? 我這裏寫文書, 但是天字都題起頭寫, 早是我不曾騎。” 長壽奏曰: “臣聞先進鞍子裏, 拆出字號。 臣領這鞍子時, 再三問管造人, 他說竝無。 臣放心將來, 管造人例著字號, 以識品第, 旣裝了, 便行刮去。 今管造人忘不刮去, 其罪何量! 臣到高麗, 今四十年。 恭愍王不必說了, 中間兩三介王臣, 不敢保其至誠, 如今王一心敬上, 不敢怠慢。” 帝曰: “爾這說不肯背主則是。 和我這裏無一介至意, 如何敢做親! 不敢做不爭做。 我實實的做親, 他却這般不停當, 怎的成! 鄭摠的家小, 他供的詞因別, 婦人供的別, 年歲月日都不同, 豈是他家小? 這家小還交回去。 爾謝恩馬, 親事旣不成, 難留帶回去。 鞍子, 著御馬監燒了, 金子五十七兩將去。 爾說王休生釁, 聽小人撥弄, 明日弄壞了。 義州萬戶, 本合送法司對問。 李【太祖諱。】發爾來, 這意思好, 我不問爾放還。 今後小心, 休生事因。” 備說得天下之由曰: “汝君得國, 亦猶是也。 天不與人不歸, 則其可以力取哉!”

사은사(謝恩使)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부사(副使)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유현(辛有賢)·전 의주 도절제사(義州都節制使) 진충귀(陳忠貴)·전 호조 전서(戶曹典書) 양천식(楊天植) 등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전하였다. 자문은 이러하였다.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또 자문에 말하였다.

"본부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나라를 열고 가업(家業)을 이음에 있어서 소인(小人)은 쓰지 말아야 하는데, 조선은 새로 개국하여 등용된 사람의 표전(表箋)을 보니, 이것은 삼한(三韓) 생령(生靈)의 복이 아니요, 삼한의 화수(禍首)이다. 옛날 중하(中夏)에서 임금의 명령을 받아 땅을 벌려 차지한 자가 만국(萬國)이지만, 능히 녹(祿)이 자손에게 미치어 대대로 그 땅을 지킨 자가 드물었다. 무슨 까닭인가? 소인이 곁에 있어 구벌(九伐)의 법을 쓰게 된 까닭이다. 천조(天朝)로 더불어 아름다움을 같이한 것은 두어 나라뿐이니, 저 정(鄭)나라는 한 작은 나라였다. 처음에 사람 쓰는 것이 마땅치 못하여 매양 군사의 정벌을 받았는데, 뒤에 자산(子産)이 정나라의 정승이 되매, 군자로구나. 자산이여! 무릇 이문(移文)에 대하여 제후(諸侯) 방백(方伯)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말을 함부로 발하지 않고 뜻이 어긋나고 어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산의 몸을 마치도록 병화가 없었으니, 무슨 때문인가? 대개 제후·방백에게 성의를 펴서 깊이 생각하고 익히 상량하여 붓을 내리기를 정미하게 하였기 때문에, 초창(草創)·토론(討論)·수식(修飾)·윤색(潤色)이 있었고, 이렇게 한 뒤에야 행하니, 어찌 한 글자라도 남에게 모만(侮慢)하려고 하는 것이 있겠는가? 지금 조선 국왕 이(李) 【휘(諱).】 의 문인(文人)인 정도전(鄭道傳)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왕이 만일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일 것이다. 지금 정총(鄭摠)·노인도(盧仁度)·김약항(金若恒)이 만일 조선에 있다면 반드시 정도전의 우익(羽翼)이 되었을 것이니, 곧 이들로 인하여 이미 화를 불러 그 몸에 미쳤을 것이다. 왕은 살피지어다. 만일 정하게 살피지 않으면 나라의 화가 또 장차 발하여 남에게 손을 빌릴 것이다. 너희 예부는 조선 국왕에게 이문하여 깊이 생각하고 익히 상량하여 삼한을 보전하게 하라’ 하였다."

설장수(偰長壽)가 또 선유(宣諭)를 전하였다.

"2월 초2일에 황제가 우순문(右順門)에 나아가 장수(長壽) 등을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성혼하는 일은 너희가 현재 효복(孝服) 중에 있으니, 종제(終制)하는 것을 기다려서 후년 정월에 사람을 보내어 가서 혼사를 정하겠다. 이모(李某)는 분간할 줄을 모른다. 정도전을 써서 무엇을 할 것이냐? 정총(鄭摠)은 전일 한림원(翰林院)에다 써서 주기를, 「왕비가 작고하였으니 자최를 입겠다.」고 하였다. 회답하기를, 「본국에 비록 상사가 있더라도 조정에서는 그리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런데도 뒤에 연절(年節)에 이르러 흰옷을 입고 궐내에 들어왔다. 또 압록강(鴨綠江)이란 시를 지었는데, 용만(龍灣)이 소색(蕭索)하다고 말하였다. 물으니, 「압록강에 용만이 있다.」 하였다. 정도전은 여기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산해위(山海衛)에 지나다가 사람을 대하여 말하기를, 「좋은 것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모르겠다.」 하여, 한 마당을 다투었다. 너희 나라에서 온 화자(火者)는 내 궁원(宮院) 안에서 왕래하고, 내가 거처하는 곳에서 먹는 음식을 모두 보살피는데, 제 부모를 만나 보기를 요구하기에, 내가 「갔다 오라.」고 말하고, 은자(銀子)를 모두 주었다. 제가 부모가 있으면 제 부모에게 편지나 보내면 그만이지 장차 거기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 사람의 몸에 한 개의 푸른 물건, 한 개의 붉은 물건, 한 개의 유목권자(柳木圈子)를 지녔는데, 권자를 열어 보니, 그 속에 한 장의 종이가 있어 서번(西蕃) 글자를 가득 썼다. 지금도 그 근방에 약간의 달자(達子)가 있는 모양이니, 내가 가서 그것을 정벌할 터인즉, 너희가 만일 2만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가서 힘을 쓴다면 내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겠다. 너희가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오시(午時)에 우순문에 이르러 선유하기를, ‘먼젓번 안자(鞍子)를 열어 보니 속에 글자를 썼는데, 내가 또 네가 가져온 안자를 열어 보면 어떠할지는 모르겠다.’ 하매, 여러 내관(內官)이 제각기 열은 안구(鞍具)를 내었는데, 하나는 안시판(雁翅板) 위 좌우에 모두 거꾸로 천자(天字)를 섰고, 하나는 안장 속에 현자(玄子)를 썼고, 하나는 얹는 곳에 십자(十字)를 썼었습니다. 황제가 일어서서 친히 손으로 잡아 보고 다시 앉아서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어째서 이렇게 나를 무시하는가? 그 속에 문자를 쓴 중에 다만 천자(天字)를 모두 첫머리에 썼으니 이것은 내가 탈 수 없다.’ 하였습니다. 장수(長壽)가 아뢰기를, ‘신이 먼저 바친 안자(鞍子) 속에서 자호(字號)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이 안자를 영수할 때에 두세 번 맡아서 만든 사람에게 물으니, 「하나도 없다.」고 말하기에, 신이 마음놓고 가지고 왔습니다. 맡아서 만드는 사람이 으레 자호(字號)를 붙이어 품제(品第)을 표하고 다 장식한 뒤에는 곧 긁어 없애는데, 지금 관조(管造)한 사람이 잊고서 긁어버리지 않았으니 죄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신이 고려(高麗)에 귀화한 지가 지금 40년인데, 공민왕(恭愍王)은 말할 것도 없고, 중간의 두세 임금도 신이 감히 그 지성을 보증하지 못하지마는, 지금 임금은 한마음으로 위를 공경하여 감히 태만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네 말이 주인을 배반하려 하지 않는 것은 옳으나, 내가 보기에는 그 속에 조금도 성의가 없으니 어떻게 감히 혼사를 정하겠는가? 감히 못하든지 하려고 하지 않든지 간에 나는 사실로 정혼을 하려 하였는데, 저쪽에서 저렇게 무성의하니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정총(鄭摠)의 가속의 공술하는 말과 딴 부인의 공술하는 말이 다르고, 연월일이 모두 같지 않으니, 어찌 그의 가속이겠는가? 이 가속은 모두 데려가라. 너의 사은하는 말[馬]은 혼사가 이미 성립되지 않아서, 머물러 두기 어려우니 가지고 가라. 안자(鞍子)는 마감(馬監)을 시켜 태워버렸다. 금자(金子) 57냥은 가지고 가라. 네가 왕에게 흔단을 내지 말라고 말하라. 소인의 농간을 들으니 다음날에는 일을 망칠 것이다. 의주 만호(義州萬戶)는 본래 법사(法司)에 보내어 대질하여 묻는 것이 합당하지마는, 이(李) 【태조의 휘(諱).】 가 너희를 보내어 왔으니 그 뜻이 좋다. 내가 묻지 않고 너희를 놓아 돌려보낸다. 그러나 금후로는 조심하여 일을 내지 말라.’ 하고, 인하여 천하를 얻는 이유를 갖추 설명하여 말하기를, ‘네 임금이 나라를 얻는 것도 역시 이것과 같을 것이다. 하늘이 주지 않고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힘으로 취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4月 18日[편집]

화성이 태미원 서쪽에 있었다[편집]

○庚子/火星在太微西藩上將南, 隔半尺。

화성(火星)이 태미(太微) 서번(西藩)에 있어 상장(上將)의 남쪽으로 반자[半尺]쯤 격하였다.


4月 19日[편집]

화성이 상장성을 범하다[편집]

○辛丑/火星犯上將。

화성(火星)이 상장(上將)을 범하였다.


4月 20日[편집]

정도전이 무고하여 양천식·설장수·권근을 탄핵하였으나 임금이 불문에 붙이다[편집]

○壬寅/憲司劾前戶曹判書楊天植, 又劾判三司事偰長壽、花山君權近。 初帝遣牛牛等, 徵鄭道傳, 道傳托病不行。 近白上曰: “撰表之事, 臣亦與焉。 願隨使赴京, 冀以辨明。” 上以未有徵命不許。 近再請, 上曰: “卿有老親, 又無帝命, 不忍遣也。” 近曰: “不待徵命而遣臣, 病不往者, 亦可免疑, 臣或見原。 被徵而往, 臣罪愈重矣。” 上乃許之。 時有物論, 嘉近之行, 而非道傳者。 道傳聞而心忌之, 言於上曰: “近, 李穡所愛門生也。 穡嘗在己巳年間, 訴上於帝而未得志。 今近固請以行, 必有異也, 請毋遣近。” 上不聽。 近旣行, 遣人於道, 賜黃金以贐。 及近蒙帝優禮遣還, 道傳嗾憲司, 劾近以鄭摠等皆被留, 獨得放還之故。 遂言於上曰: “摠等皆不得還, 獨近賞金遣之, 果如臣料, 請鞫之。” 上曰: “何以知賞金乎?” 道傳曰: “聞近持金而用之, 若非帝賜, 彼寒儒何緣得金?” 上笑曰: “雖寒儒豈無得金之理!” 蓋道傳不知金乃上之賜也。 道傳力請鞫之, 上曰: “當天子震怒之時, 自請而往, 能霽天威, 不復徵卿, 於國有功, 於卿有恩。 予欲賞之, 反請罪乎?” 乃命近就職, 道傳不敢復言。 天植、長壽, 亦道傳所忌也。 誣以入上國有所言也。

헌사(憲司)에서 전 호조 판서 양천식(楊天植)을 탄핵하고, 또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와 화산군(花山君) 권근(權近)을 탄핵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우우(牛牛) 등을 보내어 정도전(鄭道傳)을 부르니, 도전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근(近)이 임금께 아뢰었다.

"표(表)를 짓는 일은 신도 참예하였으니, 원컨대 사신을 따라 경사에 가서 변명을 하겠습니다."

임금께서 근을 부르는 명령이 없으므로 허락하지 않으니, 근이 두 번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경은 노모(老母)가 있고 또 황제의 명령이 없으니 차마 보낼 수 없다."

근(近)이 말하였다.

"부르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신을 보내면 병으로 가지 않는 자도 의심을 면할 수 있고, 신도 혹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마는, 부름을 당하여 가면 신의 죄가 더욱 무거워질 것입니다."

임금이 이에 허락하였다. 그때의 물론(物論)이 근의 가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도전(道傳)을 그르게 여기는 자가 있었다. 도전이 듣고 마음에 꺼리어 임금께 말하였다.

"근은 이색(李穡)이 사랑하던 제자인데 색이 일찍이 기사 년간에 주상을 황제에게 고자질하다가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지금 근이 청하여 가니, 반드시 이상한 것이 있으니 근을 보내지 마소서."

임금이 듣지 않았다. 근이 떠난 뒤에 사람을 중로에 보내어 황금을 노자로 주었다. 근이 황제의 우례(優禮)을 받고 돌아오매, 도전이 헌사(憲司)를 사주(使嗾)하여, 근은 정총(鄭摠) 등이 모두 억류를 당하였는데 혼자 방환을 얻는 까닭을 탄핵하게 하고, 드디어 임금께 말하였다.

"총(摠) 등은 모두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홀로 근은 금을 상주어 보냈으니 과연 신의 헤아림과 같습니다. 청하옵건대, 국문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어떻게 금으로 상준 것을 아는가?"

도전이 말하였다.

"듣자오니 근이 금을 가지고 쓴다는데, 황제가 준 것이 아니라면 저 빈한한 선비가 어떻게 금을 얻겠습니까?"

임금이 웃으며 말하였다.

"비록 빈한한 선비라도 어찌 금을 얻을 도리가 없으랴?"

대개 도전은 임금이 금을 준 것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도전이 힘써 국문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천자가 진로(震怒)하였을 때를 당하여, 자청하여 가서 능히 천위(天威)를 풀리게 하여 다시 경을 부르지 않았으니, 나라에도 공이 있고 경에게도 은혜가 있다. 나는 상을 주려 하는데 도리어 죄주기를 청하는가?"

근에게 직사에 나오기를 명하니, 도전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천식(天植)·장수(長壽)도 또한 도전이 꺼려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중국(中國)에 들어가서 말한 것이 있다고 무고하였었다.


궁궐 역사를 일체 중지하고 군사 양성과 양식 저축에 힘쓸 것을 명하다[편집]

○上下令都堂曰: “宮室營構, 大槪已備。 其未備者, 但待後日, 工役一皆停罷, 惟務養兵儲糧。”

임금이 도당(都堂)에 명령을 내렸다.

"궁실을 지은 것이 대개 갖추었으니, 미비한 것만 후일을 기다려 하고, 공역(工役)을 일체 정파(停罷)하여 오직 군사를 양성하고 양식을 저축하는 데에 힘쓰라."


4月 21日[편집]

정도전에게 명하여 궁궐 감역 제조에게 잔치하다[편집]

○癸卯/乃命領三司事和、奉化伯鄭道傳, 宴宮闕監役提調。

영삼사사(領三司事) 이화(李和)와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궁궐의 감역제조(監役提調)에게 잔치하였다.


양부에서 백성을 편하게 할 대책안을 진술한 데 대하여 사사에서 검토후 보고하게 하다[편집]

○命兩府各陳便民條畫, 都評議使司採擇申聞。

양부(兩府)에서 각각 백성을 편하게 할 조획(條劃)을 진술하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채택하여 상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4月 23日[편집]

양부 이하의 전임 품관에게 서울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보위하게 하다[편집]

○乙巳/令兩府以下前銜品官, 常居京衛王室。 兩府刻六月初一日, 嘉善刻八月初一日。

양부(兩府) 이하의 전함(前銜) 품관(品官)으로 하여금 항상 서울에 있어 왕실(王室)을 호위하게 하되, 양부(兩府)는 6월 초1일에 한정하고, 가선(嘉善)은 8월 초1일에 한정하였다.


왜인에게 잡혔다 도망온 섬라곡국 사신들에게 옷을 하사하다[편집]

○暹羅斛國使者林得章等六人, 爲倭所虜逃來, 賜得章等四人各衣一襲, 以及從人。

섬라곡국(暹羅斛國) 사자(使者) 임득장(林得章) 등 6인이 왜인(倭人)에게 잡혀갔다가 도망하여 왔으므로, 득장(得章) 등 4인에게 각각 옷 1습씩 하사하고 종인(從人)에게도 주었다.


4月 24日[편집]

왜괴 나가온이 12인을 거느리고 서울에 오다[편집]

○丙午/倭魁羅可溫, 率其黨十二人至京。

왜괴(倭魁) 나가온(羅可溫)이 그 당 12인을 거느리고 서울에 왔다.


4月 25日[편집]

회암사 등지에서 성변 기양 법석을 베풀고, 소격전에서 화성 독초를 베풀다[편집]

○丁未/遣判三司事李居仁于檜巖寺, 三司右僕射柳玽于光巖寺, 設星變祈禳消災法席, 檢校參贊門下府事崔融于昭格殿, 設火星獨醮。

판삼사사(判三司事) 이거인(李居仁)을 회암사(檜岩寺)에 보내고, 우복야(右僕射) 유구(柳玽)를 광암사(光巖寺)에 보내어 성변(星變)에 대하여 기도하여 재앙을 없애는 법석(法席)을 베풀고,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융(崔融)을 소격전(昭格殿)에 보내어 화성 독초(火星獨醮)를 베풀게 하였다.


간관이 사대부의 부도설치 금지 등 시무 및 서정쇄신책 10개조를 건의하다[편집]

○諫官上書言事:

一, 定都之初, 首建宗廟, 以奉時祀, 以薦時物, 報本之誠, 無所不至, 然四時之享, 每命大臣以攝行。 願自今, 除無時薦新之外, 四時大享, 必須親祼, 以明奉先之禮, 以盡報本之誠。 一, 士大夫家廟之制, 已有著令, 而專尙浮屠, 諂事鬼神, 曾不立廟, 以奉先祀。 願自今, 刻日立廟, 敢有違令, 尙循舊弊者, 令憲司糾理。 一, 五日一視朝, 徒有群臣朝謁之禮, 而無聽政啓事之儀。 且勤政殿, 實聽政出治之所, 每使浮屠, 誦經其中, 殊失名殿之義。 願自今受朝訖, 命百司勿論官品高下, 入啓時宜, 裁擇聽納。 一, 古者三公論道, 六卿分職, 官不必備, 惟其人。 今官制之繁, 上自廟堂, 下至庶司, 員數猥多, 名器甚濫, 眞所謂十羊而九牧, 一壺而十挈。 願汰冗官省員數, 以治天職, 以重名器。 一, 比因工役, 民失農業。 今都城旣築, 宮室旣營, 凡土木之役, 勿計緩急, 一皆停罷, 待歲豐平, 經營修葺, 未爲晩也。 又於今年, 公私田租, 量宜減收, 以報民功, 以厚民生。 一, 各道軍民所苦, 騎船爲最。 今以魚鹽之利, 以供軍食, 役使甚苦, 而糧餉不給, 故調發番遞之時, 擧家亡匿者, 比比有之。 願自今騎船軍糧, 依舊給之; 其魚鹽所利, 以爲贏餘, 以贍其身; 其節制、萬戶, 托名魚鹽, 役使困苦以自奉者, 痛懲以法。 一, 無賴僧人往返彼此, 誣妄多端, 至使變生禍胎。 願自今寄食閭里遊手遊方之輩, 勑令所在官, 痛行禁理; 其未受度牒者, 不許出家; 違者, 罪及父母師長。 一, 各道軍士番役更戍, 歲率一度, 誠若有便, 然遠方之人, 上番宿衛, 下番禦侮, 殆無寧日。 頃緣降倭, 自冬至夏, 不謀生業, 騎船下海, 勞苦斯極。 今宿衛之任, 幸有甲士, 其各道軍士, 願停宿衛, 休身養馬。 令觀察使, 春秋講武, 考閱精强, 如有邊警, 刻期而會, 誠爲便益。 一, 兵食不可偏廢也, 爲國之要, 在於足食。 願自今, 佛神之費、賜與之煩, 凡所橫費, 一皆減省, 以廣儲蓄, 以備不虞。 一, 山場水梁, 一國人民所共利者也。 或爲權勢, 擅執榷利者有焉, 甚非公義也。 願自今下令州府郡縣, 考其境內山場水梁, 如有專擅者, 則將其姓名, 一一告于憲司, 憲司啓聞科罪, 痛禁其弊; 守令有阿勢畏威, 匿不申報者, 罪同。

上兪允施行。

간관(諫官)이 글을 올려 일을 말하였다.

"1. 도읍을 정하는 처음에 첫머리로 종묘(宗廟)를 세워 시사(時祀)를 받들고 시물(時物)을 천신하니, 보본(報本)하는 정성이 이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시의 향사에 매양 대신을 명하여 섭행(攝行)하옵는데, 지금부터는 때없이 천신하는 것을 제외하고, 사시(四時)의 대향(大享)에는 반드시 친히 강신하여 봉선(奉先)하는 예를 밝히고 보본(報本)하는 정성을 다하소서.

1. 사대부(士大夫)의 가묘(家廟)의 제도가 이미 영갑에 나타나 있는데, 오로지 부도(浮屠)를 숭상하고 귀신을 아첨하여 섬겨, 사당을 세워서 선조의 제사를 받들지 않으오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날을 정하여 사당을 세우게 하되, 감히 영을 어기고 오히려 예전 폐습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헌사(憲司)로 하여금 규리(糾理)하게 하소서.

1. 5일에 한 번씩 조회를 보는데, 다만 여러 신하가 조알(朝謁)하는 예만 있고 정사를 듣고 일을 아뢰는 절차는 없습니다. 또 근정전(勤政殿)은 실로 정사를 듣고 다스림을 내는 곳인데, 매양 중으로 하여금 그 가운데에서 경(經)을 외우게 하니, 특히 대궐을 이름 지은 뜻을 잃는 것이오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조회를 받기를 마치면 백사(百司)에 명하여 관품(官品)의 고하를 물론하고 때의 마땅한 것을 들어와 아뢰게 하여 채택하여 청납(聽納)하소서.

1. 예전에는 삼공(三公)은 도(道)를 의논하고, 육경(六卿)은 직사를 나누되 관원을 반드시 갖추지 않고 오직 적합한 사람을 맡겼었는데, 지금은 관제의 번다한 것이 위로 묘당(廟堂)으로부터 아래로 서사(庶司)에 이르기까지 원수(員數)가 너무 많아서 명기(名器)가 심히 넘치니, 참으로 이른바, 양(羊) 열 마리에 목자(牧者)는 아홉 사람이나 되고, 병[壺] 하나에 끄는 사람은 열이나 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무용한 관직을 태거(汰去)하고 원수를 덜어서 천직(天職)을 다스리고 명기(名器)를 무겁게 하소서.

1. 근래에 공역(工役)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실농하였는데, 지금 도성이 쌓아졌고, 궁실도 영조(營造)되었으니, 무릇 토목(土木)의 역사는 완급을 따르지 말고, 일체 모두 정파하고 해가 풍년드는 것을 기다려 경영하고 수리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또 금년에는 공사(公私)의 전조(田租)를 적당히 감하여 거두어서 백성의 공을 갚고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하소서.

1. 각도의 군사와 백성이 괴롭게 여기는 것은 배 타는 것이 제일인데, 지금 어염(魚鹽)의 이익으로 군식(軍食)에 공급하매 역사는 심히 고되고 양식은 넉넉지 못하니, 그 때문에 조발하고 체번할 때가 되면 온 집이 도망하여 숨는 자가 가끔 있으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배 타는 군사의 양식을 전과 같이 주고 어염의 이익은 잉여(剩餘)를 만들어서 그 자신을 넉넉하게 하고, 절제사와 만호가 어염의 이름을 칭탁하여 괴롭게 역사시키어 제몸을 받드는 자는 법으로 엄히 징계하소서.

1. 무뢰한 중들이 여기저기 왕래하면서 여러가지로 속여 넘기어 변을 일으키고 화가 시작되는 데까지 이르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여리(閭里)에서 붙여 먹고 외방에서 놀고 있는 무리를 소재지의 관원에 칙령(勅令)하여 통렬히 금리(禁理)를 행하여 도첩(度牒)을 받지 않는 자는 출가(出家)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어기는 자는 죄가 부모·사장(師長)에게 미치게 하소서.

1. 각도의 군사가 역사에 체번하고 방수(防戍)에 교대하는 것이 1년에 대개 한 번이니 참으로 편한 것 같으나, 그러나 먼 지방의 사람은 상번(上番)하여 숙위(宿衛)하고, 하번(下番)하면 어모(禦侮)하여 거의 편할 날이 없습니다. 저번에 항복한 왜구로 인연하여 겨울부터 여름까지 생업을 돌보지 못하고 배를 타고 바다에 내려가 노고가 지극합니다. 지금은 숙위하는 책임이 다행이 갑사에게 있으니, 각도의 군사는 원컨대, 숙위를 정지하고 몸을 쉬고 말을 길러 관찰사로 하여금 봄 가을 강무(講武)에 강한 것을 고열(考閱)하게 하여, 만일 변경(邊警)이 있으면 기일을 정하여 모이게 함이 참으로 편익할 것입니다.

1. 군사와 양식은 한 쪽도 폐할 수 없고,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은 먹는 것을 족하게 하는 데에 있사오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불신(佛神)의 비용과 사여(賜與)의 번다한 것 등 모든 낭비를 일체 모두 감하고 생략하여 저축을 넓혀 불우의 변에 대비하소서.

1. 산장(山場)과 수량(水梁)은 온 나라 인민이 함께 이롭게 여기는 것인데, 혹 권세 있는 자가 마음대로 차지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일이 있으니, 심히 공의(公義)가 아닙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주부(州府)·군현(郡縣)에 영(令)을 내려 경내의 산장과 수량을 조사하여, 만일 마음대로 독점한 자가 있으면 그 성명을 일일이 헌사(憲司)에 보고하여, 헌사에서 계문(啓聞)하여 과죄(科罪)해서 그 폐해를 일체 금하고, 수령이 세력에 아부하고 위엄을 두려워하여 숨기고 보고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죄를 같게 하소서."

임금이 유윤(兪允)하여 시행하였다.


4月 26日[편집]

근정전 조회에 투항해 온 왜인 나가온과 섬라곡국 사신들도 서열하다[편집]

○戊申/上坐勤政殿受朝, 以降倭羅可溫, 序於朝班東八品班頭稍後, 暹羅斛人, 序於西八品班頭稍後。 賜羅可溫段子衣一襲、細布衣一襲, 幷紗帽銀帶靴, 其黨十二人, 各賜布衣一襲。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앉아 조회를 받으니, 항왜(降倭) 나가온(羅可溫)은 조반(朝班) 동8품(東八品) 반두(班頭) 조금 뒤에 서열(序列)하고, 섬라곡국(暹羅斛國) 사람은 서8품(西八品) 반두 조금 뒤에 서열하였다. 나가온에게 단자(段子) 옷 1습(襲)과 세포(細布) 옷 1습과 사모(紗帽)·은대(銀帶)·목화[靴]를 하사하고, 그 당류 12인에게도 각각 베옷 1습씩을 하사하였다.


4月 27日[편집]

이문화·노석주 및 투항해 온 왜인 나가온, 도시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己酉/以李文和爲左承旨, 盧石柱爲右副承旨兼尙瑞尹。 授降倭羅可溫宣略將軍, 其麾下都時羅等八人, 各領司正, 副司正職。

이문화(李文和)로 좌승지(左承旨)를, 노석주(盧石柱)로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상서 윤(尙瑞尹)을 삼고, 항왜 나가온(羅可溫)은 선략 장군(宣略將軍)을 주고, 그 부하 도시라(都時羅) 등 8인은 각각 영사정(領司正)·부사정(副司正)의 직을 주었다.


궁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授宮人職。

궁인(宮人)의 직을 주었다.


4月 28日[편집]

흥인문에 거둥하여 옹성을 둘러보다[편집]

○庚戌/幸興仁門, 觀甕城, 巡城至東小門乃還。

흥인문(興仁門)에 거둥하여 옹성(甕城)을 보고, 성을 순행하여 동소문(東小門)에 이르러 돌아왔다.


거상중의 이문화를 보주 상차에서 소견하다. 항복한 왜인들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지시[편집]

○遣宣差權專, 徵左承旨李文和于甫州喪次, 仍命專傳旨于都觀察使、都節制使曰: “倭人叛去, 若不能捕獲, 罪不可宥。”

선차(宣差) 권전(權專)을 보내어 좌승지 이문화(李文和)를 보주(甫州) 상차(喪次)에서 부르게 하고, 인하여 전(專)에게 명하여 도관찰사·도절제사에게 전지(傳旨)하였다.

"왜인(倭人)이 배반하고 갔는데, 만일 잡지 못하면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서반 6품과 동반 7품 이하의 기마 금지에 대해 사사에서 의논케 하다[편집]

○命都評議使司, 擬議西班六品、東班七品以下, 不許騎馬以聞。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하여, 서반 6품과 동반 7품 이하는 말을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을 마련하고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세자를 모시고 나가 가축을 쏘아 죽인 대장군을 탄핵하다[편집]

○大將軍南摯、將軍康有信陪世子出門外馳馬, 射殺人家羔鴨, 諫官劾之。

대장군(大將軍) 남지(南摯)와 장군(將軍) 강유신(康有信)이 세자(世子)를 모시고 문밖에 나가 말을 달려 남의 집 염소와 오리를 쏘아 죽이니, 간관(諫官)이 탄핵하였다.


六年 五月[편집]

5月 1日[편집]

일식이 일어나니 임금이 소복하고 일식을 구원하는 의식을 행하다[편집]

○壬子朔/日有食之旣, 上素服救食。

일식(日食)하여 다 먹히니, 임금이 소복(素服)하고 구식(救食)하였다.


병조에서 무과 출신자들의 서용 대칙을 수판하다[편집]

○兵曹受判: “武科出身者, 赴訓鍊觀, 試諸家兵書及武藝, 分爲三等, 依文科例, 以憑敍用。”

병조에서 수판(受判)하였다.

"무과 출신(武科出身)인 자는 훈련관(訓鍊觀)에 가서 제가(諸家)의 병서(兵書)와 무예(武藝)를 시험하여 3등으로 나누고, 문과의 예에 의해 빙거하여 서용(敍用)하라."


5月 2日[편집]

간관이 투항한 왜구의 처리를 잘못한 유양을 국문할 것을 상소하다[편집]

○癸丑/諫官上疏, 略曰:

竊見商議中樞院事柳亮, 前在雞林, 當倭寇投降之際, 單騎見賊, 誘以禍福, 使倭奴質子納款, 固當益勤不怠, 以成其功。 及倭船來泊之後, 托以疾篤, 利害之機, 曾不爲慮, 遣僧義雲, 俾生疑貳而逃歸, 又秘其僧往來之迹, 不肯現告於朝。 劾問其故, 游辭巧僞, 不現事情, 頗涉奸譎。 願令攸司, 收其職牒, 明鞫情由。

上止令外方付處, 以待義雲之出, 憑問閱實。

간관(諫官)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그윽이 보건대,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유양(柳亮)이 전에 계림(雞林)에 있을 때에, 왜구(倭寇)가 투항할 즈음을 당하여 단기(單騎)로 가서 적을 보고 화복으로 달래어, 왜노(倭奴)로 하여금 자식을 볼모[質子]로 바치고 정성을 다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더욱 부지런히 하고 게을리 하지 말아서 그 공을 이루어야할 터인데, 왜선이 와서 정박한 뒤에 병이 심하다는 핑계로 이해(利害)의 기미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중 의운(義雲)을 보내어 의심이 나서 도망하여 돌아가게 하였고, 또 중이 왕래한 형적을 비밀히 하여 조정에 나타내어 고하려 하지 않고, 그 까닭을 핵문하여도 말을 놀리는 것이 교묘하고 거짓되어 사정을 나타내지 않으니, 자못 간사하고 속이는 데에 가깝습니다.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직첩을 거두고 정상과 사유를 밝게 국문 하소서."

임금이 단지 외방에 부처하고, 의운(義雲)의 출현을 기다려 빙문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5月 4日[편집]

청주 절부 김씨를 정표하고 그 아들의 군역을 면제해 주다[편집]

○乙卯/淸州人別將趙德麟母金氏, 年十九, 喪其夫, 其父母欲奪志, 斷髮不從, 守節六十餘年。 牧使金自粹以聞, 旌表其閭, 蠲德麟軍役, 使之奉養。

청주(淸州) 사람 별장(別將) 조덕린(趙德麟)의 어미 김씨(金氏)는 나이 19세에 남편이 죽었는데, 부모가 그 뜻을 꺾으려 하매, 머리를 자르고 좇지 않으며 60여 년을 수절하였다. 목사(牧使) 김자수(金自粹)가 아뢰니, 그 마을을 정표(旌表)하고 조덕린의 군역(軍役)을 면제하여 봉양하게 하였다.


큰 비가 내려 경상도의 밭 1만결이 손실되다[편집]

○是月, 大雨, 慶尙道水損田幾萬結。

이달에 큰비가 내려 경상도에 물로 손실된 밭이 거의 1만 결(結)이나 되었다.


5月 5日[편집]

융무루에 올라 척석놀이를 구경하다[편집]

○丙辰/上登隆武樓, 觀擲石戲。

임금이 융무루(隆武樓)에 올라 척석놀이[擲石戲]를 구경하였다.


5月 6日[편집]

투항했다가 병선 약탈해 간 상만호를 없애어 우호 다지자며 대마도에 보낸 글[편집]

○丁巳/遣前司宰少監朴仁貴, 通書于日本對馬島。 書曰:

朝鮮國門下左政丞趙浚等, 寄書日本國對馬島守護李大卿足下。 本國與貴邦, 隔海相望, 素通隣好。 自庚寅以來, 貴治及一歧兩島無賴之人, 相聚爲寇, 侵掠邊境, 爲害不小。 惟我主上卽位, 憫念吾民無辜被害, 志欲殄滅頑兇, 拯濟邊民, 命沿海州郡, 修葺戰艦, 刻日以行。 年前寇魁等, 到寧海府丑山島請降, 主上嘉其來附, 不念舊惡, 處以蔚州, 給糧完聚, 不意自懷疑貳, 刼我守臣以走。 今年春, 又來請降, 主上宥其前罪, 命邊將待以厚禮。 其稱副萬戶、三萬戶者, 卽今見在京城, 給以第宅衣食, 以禮待之; 其稱上萬戶者, 到密陽, 宴犒加厚。 彼請還船所, 遣人護送, 乃又忽生疑貳, 刼掠軍船, 又復逃走。 旣而邊將以足下書上聞, 主上嘉之, 今遣前司宰少監朴仁貴, 知會彼上萬戶者, 旣與我背約, 又背土主之意, 是不惟稔惡於我, 乃足下之罪人也。 是宜熟計利害, 討除罪人, 以通和好, 幸甚。

전 사재 소감(司宰少監) 박인귀(朴仁貴)를 보내어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통서(通書)하게 하였다. 그 글에 이러하였다.

"조선국(朝鮮國)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 조준(趙浚) 등은 일본국 대마도 수호(守護) 이대경(李大卿) 족하(足下)에게 서신을 부치노라. 본국은 귀방(貴邦)과 바다를 격하여 서로 바라보고 있어 본래 서로 좋은 이웃으로 통했는데, 경인년 이래로 귀치도(貴治島)와 일기도(一岐島) 두 섬의 무뢰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도둑이 되어, 변경을 침략하게 되니 피해가 적지 않았다.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께서 즉위하시어 백성들이 무고(無辜)하게 피해 입는 것을 불쌍히 여기사 완흉(頑凶)을 섬멸하고 변방 백성을 구제하고자 뜻하였다. 이에 연해변(沿海邊)의 주군(州郡)에 명하여 전함을 수리하게 하고 날을 한정하여 행하려 하였는데, 연전에 도적의 괴수들이 영해부(寧海府) 축산도(丑山島)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주상께서 그 내부(來附)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기고 예전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시어, 울주(蔚州)에 처하게 하고 양식을 주어 완취(完聚)하게 하였더니, 뜻밖에 스스로 의심을 품어 우리의 수신(守臣)을 겁박하여 달아났고, 금년 봄에도 와서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주상께서 전 죄를 용서하시고 변장(邊將)에게 명하여 후한 예로 대접하게 하였다. 그 부만호(副萬戶) 삼만호(三萬戶)라고 칭하는 자는 현재 서울에 있는데, 집과 의식을 주어 예로 대접하고 있으나, 그 상만호(上萬戶)라는 자는 밀양에 이르러 후하게 잔치하여 호궤하였으되, 저들이 배로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호송하였는데, 또 갑자기 의심을 내어 군선(軍船)을 겁박 약탈하고 다시 도망하여 달아났다. 얼마 뒤에 변장이 족하의 글을 상문(上聞)하매, 주상께서 아름답게 여기어 지금 전 사재 소감(司宰少監) 박인귀를 보내어 통지하는 것이다. 저 상만호란 자는 이미 우리와의 약속을 배반하고 또 토주(土主)의 뜻에 위배되었으니, 이것은 우리에게만 죄악이 찬 것이 아니라, 곧 족하의 죄인이다. 마땅히 익히 이해를 헤아려 죄인을 쳐 없애고 화호(和好)를 통하면 다행하겠다."


5月 7日[편집]

경시서 승 김시용 등이 한낮에 저자를 열기를 청하다[편집]

○戊午/京市署丞金時用等, 請日中爲巿, 上從之。

경시서 승(京市署丞) 김시용(金時用) 등이 한낮에 저자를 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月 8日[편집]

큰비가 내리다[편집]

○己未/大雨。

큰비가 내렸다.


간관이 유양의 죄를 청하니, 중 의운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다[편집]

○諫官上疏請柳亮罪, 上曰: “義雲逃匿, 實爲荒唐。 且收職牒, 付處遐方, 以待義雲出, 閱實。”

간관(諫官)이 상소하여 유양(柳亮)의 죄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의운(義雲)이 도망하여 숨었다는 것은 실로 황당(荒唐)하고, 또 직첩을 거두고 먼 지방에 부처하였으니 의운이 출현하기를 기다려 사실을 조사하라."


5月 10日[편집]

간관이 다시 유양의 죄를 청하니 하옥시키고 국문케 하다[편집]

○辛酉/諫官復上疏請罪, 上乃下亮于獄, 命司憲府, 明鞫所犯, 分揀申聞。

간관이 다시 상소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에 유양을 하옥시키고, 사헌부에 명하여 밝게 범한 것을 국문하여 분간하고 상신하여 아뢰게 하였다.


5月 13日[편집]

사헌부 감찰과 창고를 맡은 관리가 업무상 마찰을 일으키자 모두 파직시키다[편집]

○甲子/監察金孝廉至豐儲倉, 以倉官處事之誤, 鞭其使令曰: “汝何不敎爾官員?” 倉使朴尙文曰: “然則監察亦受敎於所由乎?” 憲司劾尙文, 上曰: “倉官豈肯遽辱監察! 必監察先之也”, 孝廉、尙文俱罷。

감찰(監察) 김효렴(金孝廉)이 풍저창(豊儲倉)에 이르러 창관(倉官)이 처사를 잘못한 것을 가지고 그 사령(使令)을 채찍질하며 말하였다.

"그대는 왜 그대의 관원을 가르쳐 주지 못했는가?"

창사(倉使) 박상문(朴尙文)이 말하였다.

"그러면 감찰(監察)도 소유(所由)[18]에게서 가르침을 받는가?"

헌사(憲司)에서 상문(尙文)을 탄핵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창관(倉官)이 어찌 갑자기 감찰을 욕하려 하였겠는가? 반드시 감찰이 먼저 욕한 것이리라."

효렴과 상문을 모두 파직시켰다.


사헌부에서 노비 쟁송은 일체 변정 도감에 위임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司憲府上言: “奴婢爭訟, 一委辨定都監, 其成給公文, 付之都官。” 上從之。

사헌부에서 상언하였다.

"노비(奴婢)의 쟁송(爭訟)은 일체 변정 도감(辨定都監)에 위임하고 만들어 준 공문은 도관(都官)에 붙이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月 14日[편집]

왜적이 해주에서 노략질하다[편집]

○乙丑/倭寇海州。

왜적이 해주(海州)에서 도둑질하였다.


5月 15日[편집]

별이 왕량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니 지천사에서 소재 법석을 베풀다[편집]

○丙寅/有星出自王良星北流。 設禳災法席于支天寺。

어떤 별이 왕량성(王良星)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니, 재앙을 없애는 법석(法席)을 지천사(支天寺)에서 베풀었다.


왜구가 옹진진에 들어와 병선 2척을 불태우다[편집]

○倭入瓮津鎭, 焚兵船二隻。

왜구가 옹진진(甕津鎭)에 들어와 병선 두 척을 불태웠다.


5月 16日[편집]

본감의 곡식을 훔쳐 쓰고 화통군을 사사로이 사역시킨 군기감 승을 죄주다[편집]

○丁卯/憲司上言: “軍器監丞洪敉盜用本監米豆, 且私役火㷁軍。 請收職牒科罪。” 上從之。

헌사(憲司)에서 상언하였다.

"군기감 승(軍器監丞) 홍미(洪敉)가 본감(本監)의 쌀과 콩을 훔쳐 쓰고 또 화통군(火㷁軍)을 사사로이 사역시켰으니, 청하옵건대, 직첩을 거두고 과죄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月 17日[편집]

남의 아내를 간음하려고 칼로 위협한 선략 장군 안을귀를 죄주다[편집]

○戊辰/又上言: “宣略將軍安乙貴晝入前郞將金龜家, 欲奸其妻, 拔劍刼之。 其情甚惡, 請依律處決。” 上從之。

또 상언하였다.

"선략 장군(宣略將軍) 안을귀(安乙貴)가 낮에 전 낭장(郞將) 김구(金龜)의 집에 들어가 그 아내를 간음하고자 칼을 빼어 위협하였으니, 그 심정이 심히 악합니다. 청하옵건대, 율에 의하여 처결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 이직이 박상문 김효렴의 처벌과 관련하여 물러나길 청하다[편집]

○大司憲李稷詣闕請曰: “朴尙文、金孝廉請罪之失, 臣之罪也。” 召掌務侍史就職。

대사헌 이직(李稷)이 대궐에 나와 청하였다.

"박상문(朴尙文)·김효렴(金孝廉)에게 죄주기를 청한 잘못은 신의 죄입니다."

장무 시사(掌務侍史)를 불러 그 직임에 나아가게 하였다.


5月 18日[편집]

박실이 정안군 이방원에게 읍소하여 그의 아버지 박자안을 죽음에서 구하다[편집]

○己巳/遣巡軍千戶韓乙氣, 斬朴子安于軍中。 時子安追倭賊, 方至全羅道鎭浦, 以事干彼賊, 秘而不宣, 外人莫得知之。 其子實聞之, 至殿下邸, 適有義安君和等諸宗親, 詣殿下邸, 殿下出門迎接。 實涕泣請活父命, 殿下曰: “國家大事, 我將若何?” 諸宗親旣入而辭去, 殿下又出門送之, 實投地痛哭。 殿下心傷之, 欲與諸宗親, 偕詣闕以請。 諸宗親曰: “此國家秘事也。 上若問從何得知, 則何辭以對?” 殿下曰: “我將任其咎。” 卽俱詣闕, 令內官曺恂啓請之。 恂曰: “此秘事也。 諸宗親何得知之?” 殿下曰: “刑人殺人, 國之大事。 外人豈有不知之理乎?” 恂入啓。 上初聞之, 怒曰: “汝等以子安爲無罪乎?” 俄而, 命中樞院曰: “予欲末減子安之罪, 急召善騎知印, 移送文書。” 中樞院以沈龜壽啓, 卽命曰: “汝盡力疾馳, 及救子安之死。” 龜壽受命疾馳, 行路已過半而墜馬, 令驛吏代送其書。 書到之日, 官欲刑子安, 漆其面褫其衣, 刀刃已具。 忽望之, 於廣野有一人馳來, 以笠揮之, 官怪之, 停刑以待, 子安得不死。 實本無學術, 又非武藝之人, 而殿下賢其救父, 使掌禁旅, 位至二品。

순군 천호(巡軍千戶) 한을기(韓乙氣)를 보내어 박자안(朴子安)을 군중(軍中)에서 베이게 하였는데, 그때에 자안이 왜적을 쫓아 바야흐로 전라도 진포(鎭浦)에 이르렀다. 일이 저 적에 관계되므로 비밀히 하고 선포하지 않으니, 바깥 사람들이 알 수 없었다. 그 아들 박실(朴實)이 듣고 전하의 잠저(潛邸)에 이르렀다. 마침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 등 여러 종친이 전하의 잠저에서 나오니, 전하(殿下)가 문에 나와 영접하였다. 실이 울며 아비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하니, 전하가 말하였다.

"국가의 큰 일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여러 종친이 들어갔다가 하직하고 가니, 전하가 또 문에 나와 보내었다. 실이 땅에 엎어져 통곡하니, 전하가 마음으로 불쌍하게 여겨 여러 종친과 함께 예궐하여 청하게 하자 하니, 여러 종친이 말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비밀한 일인데, 상감께서 만일 어디서 아셨느냐고 물으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렵니까?"

전하가 말하였다.

"그 책임은 내가 지겠소."

곧 함께 예궐하여 내관(內官) 조순(曹恂)을 시켜 계청(啓請)하게 하니, 순이 말하였다.

"이것은 비밀한 일인데 여러 종친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하가 말하였다.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인데, 바깥 사람이 어찌 알지 못 할 리가 있겠는가?"

순이 들어가 아뢰니, 임금이 처음에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너희들은 자안(子安)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있다가 중추원(中樞院)에 명하였다.

"내가 자안의 죄를 말감(末減)하고자 하니, 급히 말 잘 타는 지인(知印)을 불러 문서를 이송(移送)하라."

중추원에서 심구수(沈龜壽)로 아뢰니, 곧 명하였다.

"네가 힘을 다하여 빨리 달리어 시간에 미치어서 자안의 죽음을 구제하라."

구수가 명을 받고 빨리 달리어 행하는 길이 이미 반이 지났는데 말에서 떨어져 역리를 시켜 대신 글을 보냈다. 글이 이르는 날, 관원이 자안을 사형하고자 얼굴에 칠을 하고, 옷을 갈아 입히고 칼날까지 갖추었다. 홀연히 바라보니 넓은 들에서 한 사람이 달려오며 입자(笠子)로 휘둘렀다. 관원이 괴이하게 여겨 형(刑)을 멈추고 기다려서 자안이 죽지 않게 되었다. 실(實)은 본래 학술이 없고 또 무예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전하가 그 아비 구한 것을 좋게 여겨 금려(禁旅)를 맡게 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왜구 방어를 잘 하지 못한 합포 군관을 처벌하도록 경상도에 지시하다[편집]

○上命都堂, 移牒慶尙道: “合浦軍官, 多年禦倭, 應變進退, 非不熟知。 今也倭賊數多下陸, 但以一身便否, 不顧大體, 欺侮將帥, 致失軍機。 倭賊逃走者, 逗遛不捕; 投降賈賣者, 捕捉致害。 宜置軍法, 且從輕典, 行首掌務, 各杖一百充軍, 職名申聞。”

임금이 도당(都堂)에 명하여 경상도에 이첩(移牒)하였다.

"합포(合浦)의 군관(軍官)은 다년간 왜구를 막아, 변에 응하여 진퇴하는 것을 익히 알지 않는 것이 아니나, 지금에 있어 수 많은 왜적이 하륙하였는데, 다만 한몸의 편하고 편치 않은 것으로 대체를 돌보지 않고 장수를 속여 군기(軍機)를 잃게 하였고, 왜적의 도망하여 달아나는 자를 머뭇거리고 잡지 않았으며, 투항하고 장사하는 자를 잡아서 해하였으니 마땅히 군법에 처지하여야 하겠으나, 우선 경한 법전에 따라 행수(行首)와 장무(掌務)를 각각 장(杖) 1백을 때려 군사에 편입하되 직명(職名)을 상신하여 아뢰라."


5月 21日[편집]

각도의 병마 도절제사를 파하고 각 진에 첨절제사를 두다[편집]

○壬申/罷各道兵馬都節制使, 置各鎭僉節制使, 率所屬附近州兵馬, 以備守禦, 令都觀察使, 考其勤怠。 慶尙道四鎭, 合浦、江州、寧海、東萊; 全羅道四鎭, 木浦、兆陽、沃溝、興德; 忠淸道三鎭, 蓴城、藍浦、伊山; 豐海道二鎭, 豐州、瓮津; 江原道二鎭, 三陟、杆城。

각도의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파하고 각진(各鎭)의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어 소속인 부근 고을[州]의 병마를 거느려 수어(守禦)에 대비하고, 도관찰사로 하여금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상고하게 하였다. 경상도는 4진(鎭)인데, 합포(合浦)·강주(江州)·영해(寧海)·동래(東萊)이고, 전라도의 4진은 목포(木浦)·조양(兆陽)·옥구(沃溝)·흥덕(興德)이고, 충청도의 3진은 순성(蓴城)·남포(藍浦)·이산(伊山)이고, 풍해도(豊海道)의 2진은 풍주(豊州)·옹진(甕津)이고, 강원도의 2진은 삼척(三陟)·간성(杆城)이다.


김사행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가락백에 봉하다[편집]

○以金師幸爲判敬興府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判司僕ㆍ司農ㆍ繕工監事、駕洛伯。

김사행(金師幸)으로 판경흥부사(判敬興府事)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겸 판사복·사농·선공감사(判司僕司農繕工監事) 가락백(駕洛伯)을 삼았다.


5月 22日[편집]

왜적에 포위된 선주성을 이성도의 부만호 김원계가 구원하다가 전사하다.[편집]

○癸酉/倭圍宣州城, 泥城道副萬戶金元桂, 領兵救之, 賊敗走。 元桂乘勝, 突入賊中, 爲賊所害。 上聞之痛悼, 命都堂鞫其麾下軍士不救者, 罪之。 又命都堂曰: “豐海、平壤、安州三道水軍萬戶, 不能捕倭, 敗績奔潰, 於法當誅。 其三道萬戶爲首者, 依律施行, 以嚴軍法。”

왜적이 선주성(宣州城)을 포위하니, 이성도(泥城道) 부만호(副萬戶) 김원계(金元桂)가 군사를 거느려 구원하여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원계가 이때를 타서 적의 가운데에 돌입하였다가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임금이 듣고 슬퍼하여 도당(都堂)에 명하여 그 휘하 군사의 구원하지 않은 자를 국문하여 죄주고, 또 도당에 명하였다.

"풍해(豊海)·평양(平壤)·안주(安州) 3도(道)의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왜적을 잡지 못하고 싸움에 패하여 무너져 달아났으니 법에 의해 마땅히 베어야 한다. 3도 만호의 머리 되는 자를 율에 의하여 시행하여 군법을 엄하게 하라."


5月 24日[편집]

크게 비가 내리다[편집]

○乙亥/大雨。

크게 비가 내렸다.


5月 27日[편집]

왜적이 용주에서 노략질하다[편집]

○戊寅/倭寇龍州。

왜적이 용주(龍州)를 도둑질하였다.


박자안을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는데, 윤방경·하윤이 연루되어 함께 투옥되다[편집]

○囚朴子安于巡軍獄, 以判門下府事權仲和爲委官, 同臺諫、刑曹鞫之。 子安辭及慶尙道都節制使尹邦慶、雞林府尹河崙, 幷召致于獄。

박자안(朴子安)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權仲和)로 위관(委官)을 삼고, 대간(臺諫)·형조(刑曹)와 함께 국문하니, 자안의 공사(供辭)가 경상도 도절제사 윤방경(尹邦慶)과 계림 부윤(鷄林府尹) 하윤(河崙)에게 미치었다. 모두 옥에 불러 오게 하였다.


5月 29日[편집]

장연에서 노략질하던 왜적을 만호 차승학이 막아 왜적 5명을 죽이다[편집]

○庚辰/倭寇長淵, 萬戶車承鶴禦之, 斬倭五級。

왜적이 장연(長淵)을 도둑질하니, 만호(萬戶) 차승학(車承鶴)이 막아서 왜적 5급(級)을 베었다.


전 상의문하부사 강시 등이 서울에 살라는 명령으로 대궐에 나와 숙배하다[편집]

○前商議門下府事姜蓍、前三司左使金得齊、前密直金先致ㆍ金用鈞ㆍ朴思貴, 以居京之令, 詣闕肅拜, 上嘉其老能及期, 命賜米, 仍給田宅。

전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강시(姜蓍), 전 삼사좌사(三司左使) 김득제(金得齊), 전 밀직(密直) 김선치(金先致)·김용균(金用鈞)·박사귀(朴思貴)가 서울에 살라는 명령으로 대궐에 나와 숙배하니, 임금이 그들이 늙었어도 능히 시기에 미친 것을 아름답게 여겨 명하여 쌀을 주고 인하여 전택(田宅)을 주었다.


六年 六月[편집]

6月 1日[편집]

삼군부를 지으라고 명하다[편집]

○辛巳朔/命營三軍府。

명하여 삼군부(三軍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6月 2日[편집]

전라도 관찰사가 수군 만호 최원충이 왜선 1척을 잡았음을 보고하다[편집]

○壬午/全羅道觀察使報: “水軍萬戶崔原忠捕倭船一隻。” 乃獻所奪軍器衣甲, 上曰: “原忠全船捕獲, 何無一生擒者?” 乃命親從護軍金瞻, 往究其由。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수군 만호(水軍萬戶) 최원충(崔原忠)이 왜선 한 척을 잡았습니다."

하고, 빼앗은 군기와 의갑(衣甲)을 바치었다. 임금이 말하였다.

"원충이 배를 송두리채 잡았으면 어째서 생금(生擒)한 자가 하나도 없는가?"

친종호군(親從護軍) 김첨(金瞻)을 보내어 가서 그 이유를 추궁하게 하였다.


서울에서 거주케 한 전임품관 중 기한을 맞추지 못한 전 문하부사 최렴 등에게 죄를 주다[편집]

○憲司上言: “在外品官居京侍衛, 已有定日, 前知門下府使崔濂、前和寧尹朴天祥、前密直全子忠ㆍ孫光裕等, 皆不及期。 請依敎旨, 收奪職牒, 籍沒財産。” 上從之。

헌사(憲司)에서 상언하였다.

"밖에 있는 품관(品官)이 서울에 살며 시위(侍衛)하는 데에 정한 날짜가 있는데, 전 문하부사(門下府使) 최염(崔濂), 전 화령 윤(和寧尹) 박천상(朴天祥), 전 밀직(密直) 전자충(全子忠)·손광유(孫光裕) 등이 모두 기일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청하옵건대 교지(敎旨)에 의하여 직첩을 수탈(收奪)하고 재산을 적몰(籍沒)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환관 김사행을 문묘 조성 제조로 삼다[편집]

○以宦官金師幸, 爲文廟造成提調。

환관(宦官) 김사행(金師幸)으로 문묘 조성 제조(文廟造成提調)를 삼았다.


6月 5日[편집]

용강현에 노략질한 왜선을 잡지 못한 병마 도절제사 이거이를 국문하다[편집]

○乙酉/倭寇龍岡縣, 兵馬都節制使李居易領兵追之, 賊船一隻, 値潮落閣岸, 不卽進捕。 上聞之, 遣巡軍知事吳季年, 鞫居易逗遛不戰之罪, 杖其麾下軍官。

왜적이 용강현(龍岡縣)에서 도둑질하니 병마 도절제사 이거이(李居易)가 군사를 거느려 쫓았다. 적선 한 척이 조수(潮水)가 떨어지는 것을 만나 언덕에 대어 있었는데, 곧 나가 잡지 않았다. 임금이 듣고 순군 지사(巡軍知事) 오계년(吳季年)을 보내어 거이(居易)의 두류(逗遛)하고 싸우지 않은 죄를 국문하고, 그 휘하 군관에게는 곤장을 때리게 하였다.


6月 8日[편집]

전사한 김원계에 관직을 추증하고 자손을 서용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戊子/諫官上言: “泥城萬戶金元桂, 聞賊圍宣州, 卽提孤軍, 倍道而馳, 以解其圍, 乘勝逐北, 遂入賊中, 爲賊所害。 元桂素有驍勇之才, 奮不顧身, 全城於幾陷, 以一身之死, 易萬民之生, 其功死且不朽。 願令攸司追贈官職, 又於宣州立祠奉祀, 敍用子孫, 以慰忠魂, 以勸後來。” 上從之。

간관(諫官)이 상언하였다.

"이성 만호(泥城萬戶) 김원계(金元桂)가 적이 선주(宣州)를 포위한 것을 듣고 곧 외로운 군사를 끌고 길을 배나 빨리 달려, 그 포위를 풀고 이긴 기세를 타서 패하여 달아나는 적을 쫓아 드디어 적중(賊中)에 들어갔다가 적에게 해를 당하였는데, 원계가 본래 효용(驍勇)한 재주가 있어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고 성을 거의 함락될 찰나에 온전히 하여, 한 몸의 죽음으로 만민의 생명을 바꾸었으니, 그 공은 죽었어도 썩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또 선주(宣州)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서용(敍用)하여 충혼을 위로하고 후대를 권장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月 9日[편집]

유양이 병들었으므로 보석하다[편집]

○己丑/柳亮病, 釋其囚。

유양(柳亮)이 병들었으므로 그 가둔 것을 보석(保釋)하였다.


6月 10日[편집]

예조 전서 정윤보를 성절사로 보내다[편집]

○庚寅/遣禮曹典書鄭允輔, 奉奏本赴京, 賀聖節。

예조 전서(禮曹典書) 정윤보(鄭允輔)를 보내어 주본(奏本)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사사에서 명나라 예부에 김적선의 아들이 아비 시신을 찾아 장사지내게 해주기를 요청하다[편집]

○都評議使司申禮部, 乞令金積善子自龜, 尋得父屍歸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예부(禮部)에 신청하여, 김적선(金積善)의 아들 김자구(金自龜)로 하여금 아비의 시체를 찾아 얻어서 돌아와 장사하게 하기를 빌었다.


6月 14日[편집]

정도전 남은 등이 군사 일으킬 계획을 했으나 조준이 반대하여 틈이 생기다[편집]

○甲午/判義興三軍府事鄭道傳嘗撰《五陣圖》及《蒐狩圖》以進, 上善之, 命置訓導官以敎之, 令各節制使、軍官、西班各品、成衆愛馬, 習《陣圖》, 又以通曉人, 分遣各道敎之。 時鄭道傳、南誾、沈孝生等, 謀興兵出境, 獻議於上, 抵左政丞趙浚之第諭之。 浚方疾病, 乃以輿進闕, 極言不可曰: “本國自古不失事大之禮, 且以新造之邦, 輕擧無名之兵, 甚爲不可。 雖以利害言之, 天朝堂堂, 無釁可圖, 臣恐擧事不集, 而變生不虞也。” 上聞之悅。 誾憤然曰: “兩政丞, 於出納斗升之事則可矣, 不可與圖大事也。” 由是誾等與浚有隙。 後誾搆浚於上, 上怒叱之。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오진도(五陣圖)》와 《수수도(蒐狩圖)》를 만들어 바치니, 임금이 좋게 여기어 명하여 훈도관(訓導官)을 두어 가르치고, 각 절제사(節制使)·군관(軍官), 서반 각품 성중 애마(成衆愛馬)로 하여금 《진도(陣圖)》를 강습하고, 또 잘 아는 사람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가서 가르치게 하였다. 당시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에 나가기를 꾀하여 임금께 의논을 드렸는데, 좌정승 조준(趙浚)의 집에 가서 유시(諭示)하였다. 준(浚)이 병으로 앓고 있다가 즉시 가마를 타고 대궐에 나와 극력 불가함을 아뢰었다.

"본국은 옛날부터 사대(事大)의 예를 잃지 않았고, 또 새로 개국한 나라로서 경솔히 이름 없는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심히 불가합니다. 이해관계로 말하더라도 천조(天朝)가 당당하여 도모할 만한 틈이 없으니, 신은 거사하여야 성공하지 못하고 뜻밖에 변이 생길까 염려되옵니다."

임금은 이를 듣고 기뻐하였다. 남은이 분연(憤然)히 아뢰었다.

"두 정승(政丞)은 몇 말 몇 되를 출납하는 데는 가하지마는 큰 일은 더불어 도모할 수 없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은(誾) 등이 준(浚)과 틈이 생겨 뒤에 은(誾)이 준(浚)을 임금에게 무함하니, 임금이 노하여 질책(叱責)하였다.


6月 17日[편집]

박자안을 삼척으로 귀양보내고 윤방경 하윤은 광주와 수원에 각각 안치하다[편집]

○丁酉/命巡軍誅朴子安, 尋命都承旨鄭澹往釋之, 止收職牒, 杖一百, 徒于三陟。 置邦慶于廣州, 河崙于水原。

순군(巡軍)에 명하여 박자안(朴子安)을 베이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도승지 정담(鄭澹)에게 명하여 가서 석방하되, 다만 직첩만 회수하고 장(杖) 1백에 삼척(三陟)으로 귀양보내고, 윤방경(尹邦慶)을 광주(廣州)에, 하윤(河崙)을 수원(水原)에 안치(安置)하게 하였다.


최운해·김빈길·이귀철·김영렬 등을 곤장을 때려 청해도 수군 등에 편입시키다[편집]

○遣巡軍官, 杖崔雲海一百, 移充靑海道水軍; 金贇吉九十, 移充黑林水軍; 李龜鐵九十, 移充安州水軍; 金英烈九十, 移充瓮津水軍, 皆收職牒。

순군관(巡軍官)을 보내어 최운해(崔雲海)에게 장(杖) 1백에 청해도 수군(靑海道水軍)으로 옮겨 편입하고, 김빈길(金贇吉)은 90대에 흑림 수군(黑林水軍)으로 옮겨 편입하고, 이귀철(李龜鐵)은 90대에 안주 수군(安州水軍)으로 옮겨 보충하고, 김영렬(金英烈)은 90대에 옹진 수군(甕津水軍)으로 옮겨 보충하고 모두 직첩을 거두게 하였다.


6月 18日[편집]

수군 만호 박원정이 병선 10척으로 왜선 24척과 싸우다 병선 6척을 잃다[편집]

○戊戌/西北面安州道水軍萬戶朴原廷率兵船十隻, 與倭船二十四隻戰, 兵船六隻見陷。

서북면 안주도(西北面安州道) 수군 만호(水軍萬戶) 박원정(朴原廷)이 병선 10척을 거느리고 왜선 24척과 싸우다가 병선 6척이 실함(失陷)되었다.


6月 20日[편집]

사헌부에 명하여 최염의 직첩과 재산을 도로 주게 하다[편집]

○庚子/命司憲府, 還給崔濂職牒財産。

사헌부에 명하여 최염(崔濂)의 직첩과 재산을 환급(還給)하게 하였다.


6月 21日[편집]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辛丑/日本九州節度使源了俊, 遣人來獻土物。

일본(日本)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6月 23日[편집]

인왕사에 거둥하여 내원당의 중 조생을 보다[편집]

○癸卯/幸仁王寺, 見內願堂祖生。

인왕사(仁王寺)에 거둥하여 내원당(內願堂) 조생(祖生)을 보았다.


시의에 적합하지 않아 예불을 받지 않겠다는 황제의 뜻을 전하는 명 예부의 서신[편집]

○柳雲回自遼東, 啓曰: “臣敬蒙差遣, 齎領謝恩進獻禮物馬匹, 四月二十一日, 到遼東, 蒙都司差官赴京奏聞去後, 住經四十二日。 至六月初三日, 欽差行人劉貴篪欽齎聖旨, 前來遼東, 對臣等開讀, 仍欽傳宣諭, 將進獻禮物馬匹, 盡行點數, 交付回還, 竝將到禮部左侍郞張炳書信一紙付臣, 臣欽依收領來了。” 其書曰:

爾者, 遼左使至, 言及朝鮮國王遣人致謝禮至境上, 本部卽時奏至尊, 有云: “朝鮮之國, 限山隔海, 風殊俗異, 天造地設, 本東夷之國。 然與中國相邇, 王者有道, 修睦隣之好, 禮尙往來, 撙節時宜而至, 是其當也。 今來云稱行謝禮, 未知中國以何恩意, 及於朝鮮, 致行謝禮? 況非時節, 禮不可納。 若欲妥生民於巿野, 不必頻勞使者, 往復艱辛, 以靜治國, 毋生邊釁。” 區區以至尊之至意答王, 王其圖之。

유운(柳雲)이 요동(遼東)에서 돌아와 아뢰었다.

"신이 공경하여 차견(差遣)을 입어 사은(謝恩)으로 진헌하는 예물을 싸 가지고 마필(馬匹)을 압령하여 4월 21일에 요동(遼東)에 이르렀사온데, 도사(都司)가 관원을 차견하여 경사(京師)에 가서 주문(奏聞)함을 입어, 떠나간 뒤에 42일을 머물러 6월 초3일에 이르렀는데, 흠차(欽差)한 행인(行人) 유귀지(劉貴篪)가 성지(聖旨)를 흠뢰(欽賚)하여 가지고 요동에 와서 신 등을 대하여 개독(開讀)하고, 인하여 선유(宣諭)를 흠전(欽傳)하고 진헌하는 예물과 마필을 모두 수(數)대로 점고하고 교부하여 돌려보내고, 아울러 예부 좌시랑(禮部左侍郞) 장병(張炳)의 서신 한 통을 신에게 주었습니다. 신이 흠의(欽依)하여 영수하여 왔습니다."

그 서신에는 이러하였다.

"근자에 요 좌사(遼左使)가 와서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사람을 보내어 사례(謝禮)하러 경상(境上)에 왔습니다.’ 하였소. 본부(本部)에서 즉시 지존(至尊)께 아뢰니, 분부하시기를, ‘조선국은 산으로 한계하고 바다로 격하여서 풍속을 다르게 하늘이 만들고 땅이 베풀어 놓았으니, 본래 동이(東夷)의 나라이다. 그러나 중국과 서로 가깝고 왕노릇 하는 자가 도가 있어 인국(隣國)과 친목하고 화호(和好)를 닦아 예로 왕래를 숭상하니, 시의(時宜)에 적합하게 맞추어 이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지금 와서 사례를 행한다고 청하니 알 수 없지만, 중국이 무슨 은의(恩意)를 조선에 미쳤기에 사례를 행하였는가? 하물며 시절이 아니니 예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만일 생민을 시정과 초야에서 편안히 하게 하려면 반드시 사자를 자주 수고로이 왕복하게 할 것이 아니라, 조용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려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라.’ 하셨소. 구구한 제가 지존의 뜻으로 왕에게 회답하는 것이니, 왕은 도모하소서."


6月 27日[편집]

왜적이 장산곶을 노략질하여 병선 10척을 불태우다[편집]

○丁未/倭寇長山串, 焚兵船十隻。

왜적이 장산곶(長山串)을 도둑질하여 병선 10척을 불태웠다.


경기좌·우도 수군 절제사에게 서북면 왜구를 추격하게 하다[편집]

○命京畿右道水軍節制使金乙寶、左道水軍僉節制使姜楊, 領其兵船及豐海道兵船, 追捕西北面倭寇, 遣商議中樞院事崔龍蘇, 賜醞以送之。

경기우도 수군 절제사(水軍節制使) 김을보(金乙寶)와 좌도 수군 첨절제사 강양(姜楊)에게 명하여 그 병선과 풍해도(豊海道) 병선을 거느려 서북면 왜구(倭寇)를 쫓아 잡게 하고,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최용소(崔龍蘇)를 보내어 술을 주어서 보냈다.


6月 28日[편집]

김주를 서북면 도찰리사로 삼아 왜적을 토벌하고 평양 궁터를 잡게 하다[편집]

○戊申/以門下侍郞贊成事金湊, 爲西北面都察理使, 監督水陸軍兵捕倭, 且相平壤宮基。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주(金湊)를 서북면 도찰리사로 삼아 수륙(水陸)의 군병(軍兵)을 감독하여 왜적을 잡게 하고, 또 평양(平壤)의 궁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6月 29日[편집]

일본 사자를 죽여 예물을 나눠 가졌던 수군 만호 최원충 등을 처형케하다[편집]

○己酉/遣判典農寺事金鼎卿于全羅道, 命之曰: “水軍萬戶崔原忠賊殺日本使者, 奪其禮物貲裝, 與軍士分之, 妄申捕賊, 死有餘辜。 往與金瞻, 同觀察使, 更加鞫問, 依律處決, 以徇各道, 籍沒家産, 其與謀者, 一皆隨坐。” 鼎卿至其道, 令順天府使鄭漬, 執原忠來, 原忠逃。 誅同謀者柳天隱等六人。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김정경(金鼎卿)을 전라도에 보내어 명하게 하였다.

"수군 만호(水軍萬戶) 최원충(崔原忠)이 일본(日本) 사자(使者)를 해하여 죽이고, 그 예물과 자장(貲裝)을 빼앗아 군사에게 나누어 가지게 하고 적을 잡았다고 속여 상신하였으니, 죽고도 남는 죄가 있다. 가서 김첨(金瞻)과 관찰사로 더불어 다시 국문을 가하여 율에 의하여 처결하여 각도에 고루 돌리고 가산을 적몰하고, 꾀에 참여한 자도 모두 따라서 좌죄하라."

정경이 그 도에 이르러 순천 부사(順天府使) 정지(鄭漬)로 하여금 원충(原忠)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원충이 도망하였다. 공모한 자 유천은(柳天隱) 등 여섯 사람을 목베었다.


六年 秋七月[편집]

7月 1日[편집]

우도 수군 첨절제사 이순이 포획한 왜인 5명을 올리다[편집]

○庚戌朔/右道水軍僉節制使李淳獻所獲倭人五名。

우도 수군 첨절제사(右道水軍僉節制使) 이순(李淳)이 잡은 왜인 5명을 올렸다.


7月 2日[편집]

봉화백 정도전과 의성군 남은에게 안마를 내려 주다[편집]

○辛亥/賜奉化伯鄭道傳、宜城君南誾鞍馬。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에게 안마(鞍馬)를 내려 주었다.


7月 3日[편집]

나세·최유경을 도추포사·도체찰사로 각각 임명, 풍해도와 서북면 연해의 왜적을 잡게 하다[편집]

○壬子/以參贊門下府事致仕羅世爲京畿、豐海道西北面等處都追捕使, 知中樞院事崔有慶爲京畿、忠淸道都體察使, 判禮賓寺事姜仲琳爲忠淸道敬差官, 率兵船捕倭于豐海西北沿海等處。 遣漢城尹曺益修, 賜醞諸將, 送之。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나세(羅世)로 경기(京畿)·풍해도(豊海道)·서북면 등처의 도추포사(都追捕使)를 삼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유경(崔有慶)으로 경기·충청도 도체찰사를 삼고,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강중림(姜仲琳)으로 충청도 경차관을 삼아 병선을 거느리고 풍해(豊海)·서북면 연해(沿海) 등처에서 왜적을 잡게 하고, 한성 윤(漢城尹) 조익수(曹益修)를 보내어 여러 장수에게 술을 내려 주게 하였다.


7月 4日[편집]

중랑장 신보안을 시켜 도찰리사 김주에게 술을 내리다[편집]

○癸丑/遣中郞將辛保安于西北面, 賜酒都察理事金湊, 仍命還京。

중랑장(中郞將) 신보안(辛保安)을 서북면에 보내어 도찰리사(都察理事) 김주(金湊)에게 술을 주게 하고, 인하여 서울에 돌아오도록 명하였다.


7月 5日[편집]

중들의 소송이 자주 일자, 절의 간각·노비·전지와 중의 수 등을 조사, 보고하다[편집]

○甲寅/上命都堂曰: “佛氏之道, 當以淸淨寡慾爲宗。 今住持各寺者, 務營産業, 至奸女色, 恬不知愧, 身死之後, 其弟子者, 有以寺社及奴婢, 稱爲法孫相傳, 以至相訟。 予自潛邸, 思革此弊。 今長慶寺僧定宜, 又稱法孫, 求慶尙慈化寺。 今當國初, 宜革此弊。 京中憲府、外方監司, 推究寺社間閣、奴婢、田地及大小僧人法孫奴婢之數以聞。”

임금이 도당(都堂)에 명하였다.

"불씨(佛氏)의 도는 마땅히 청정과욕(淸淨寡慾)으로 종지(宗旨)를 삼아야 할 터인데, 오늘날 각사(各寺)의 주지(住持)들이 힘써 산업을 경영하고 여색(女色)까지 간범하여 뻔뻔스럽게 부끄러운 것을 알지 못하고, 죽은 뒤에는 그 제자란 자들이 사사(寺社)와 노비(奴婢)를 법손(法孫)이 서로 전하는 것이라 하여 서로 소송하는 일까지 있다. 내가 잠저(潛邸) 때부터 이 폐습을 고치기를 생각하였다. 지금 장경사(長慶寺) 중 정의(定宜)가 또 법손(法孫)이라 일컫고 경상도의 자화사(慈化寺)를 청구하니, 지금 국초를 당하여 이 폐단을 고쳐야 하겠다. 서울 안에서는 헌부(憲府)가 외방에서는 감사(監司)가 사사(寺社)의 간각(間閣)·노비(奴婢)·전지(田地)와 대소 승인(僧人)·법손 노비(法孫奴婢)의 수를 조사하여 아뢰라."


7月 6日[편집]

서강에 거둥하다[편집]

○乙卯/幸西江。

서강(西江)에 거둥하였다.


7月 7日[편집]

진을서·신극공·신유현·장사정을 보내어 풍해도와 서북 연해의 왜적을 잡게 하다[편집]

○丙辰/以商議中樞院事陳乙瑞爲海道助戰都節制使, 中樞院副使辛克恭、辛有賢、張思靖爲助戰節制使, 捕倭于豐海西北沿海等處, 賜酒慰諭以送。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진을서(陳乙瑞)로 해도 조전 도절제사(海道助戰都節制使)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극공(辛克恭)·신유현(辛有賢)·장사정(張思靖)으로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를 삼아 풍해(豊海)·서북 연해(西北沿海) 등처의 왜적을 잡게 하고, 술을 주어 위유(慰諭)하여 보냈다.


7月 8日[편집]

갑사 이순백 등이 멋대로 군선을 타려고 절제사에게 반항하여 시비가 일다[편집]

○丁巳/甲士李順伯、魯玄守等, 自望騎船, 在龍山江, 抗言於節制使陳乙瑞等。 乙瑞等怒曰: “閫外之事, 將軍制之”, 欲加以軍法。 左右曰: “親軍也。 宜申請。” 上聞之, 命巡軍杖順伯等二人, 仍令騎船。

갑사(甲士) 이순백(李順伯)·노현수(魯玄守) 등이 제멋대로 배를 타고서 용산강(龍山江)에서 절제사 진을서(陳乙瑞) 등에게 반항하여 말하므로, 을서(乙瑞) 등이 노하여 말하였다.

"도성 밖의 일은 장군(將軍)이 통제한다."

군법(軍法)으로 가하려 하니, 좌우 사람들은 말하였다.

"친군(親軍)이니 마땅히 신청(申請)하여야 합니다."

임금이 이를 듣고 순군(巡軍)에 명하여 순백(順伯) 등 두 사람에게 곤장을 때리고 곧 배를 타게 하였다.


7月 9日[편집]

우인렬을 수군 도감전체찰사로 삼다. 임금이 용산강에 유숙하면서 잔치 베풀다[편집]

○戊午/以商議門下府事禹仁烈爲水軍都監戰體察使。 上幸龍山江留宿, 賜宴慰送, 翌日還。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우인열(禹仁烈)로 수군 도감전체찰사(水軍都監戰體察使)를 삼고, 임금이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여 유숙(留宿)하면서 잔치를 주어 위로하여 보내고 이튿날 환궁하였다.


7月 11日[편집]

순녕군 지·상의중추원사 이천우 등을 해로로 보내어 왜구를 잡게 하다[편집]

○庚申/遣順寧君枝、商議中樞院事天祐、僉節制使全英富ㆍ張哲等於海路, 率甲士、擲石軍騎船, 追捕倭寇。 命判中樞院事李懃, 持宮醞慰送。

순녕군(順寧君) 지(枝),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이천우(李天祐), 첨절제사(僉節制使) 전영부(全英富)·장철(張哲) 등을 해로(海路)로 보내어 갑사(甲士)·척석군(擲石軍)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왜구를 쫓아 잡게 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근(李懃)에게 명하여 궁중의 술을 가지고 위로하여 보내게 하였다.


7月 13日[편집]

동풍이 사흘 동안 불다[편집]

○壬戌/有東風三日乃止。

동풍이 불어 3일 만에 그치었다.


7月 16日[편집]

일본 구주 절도사가 토산물을 보내다[편집]

○乙丑/日本九州節度使遣人來獻土物。

일본(日本)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가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7月 18日[편집]

김주와 김사행을 시켜 서경 궁궐을 지으라고 했다가 심효생의 간언으로 중지하다[편집]

○丁卯/命門下侍郞贊成事金湊、宦官金師幸, 往營西京宮闕, 同知中樞院事沈孝生諫止之。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주(金湊)와 환관 김사행(金師幸)에게 명하여, 가서 서경(西京)의 궁궐을 경영하게 하였는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심효생(沈孝生)이 간하여 그쳤다.


7月 19日[편집]

왜괴 나가온의 아들 도시로가 죽자, 치제를 명하다[편집]

○戊辰/倭魁羅可溫子都時老死。 上命葬之, 遣人致祭, 可溫感泣。

왜괴(倭魁) 나가온(羅可溫)의 아들 도시로(都時老)가 죽었다. 임금이 명하여 장사하게 하고, 사람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니 가온이 감격하여 울었다.


7月 21日[편집]

항복한 왜인 망사문이 3사람을 거느리고 오니 옷을 하사하다[편집]

○庚午/降倭望沙門, 率三人來, 各賜衣。

항왜(降倭) 망사문(望沙門)이 세 사람을 거느리고 오니, 각각 옷을 하사하였다.


7月 22日[편집]

경기도 백성을 징발하여 회암사에 왕사 자초의 부도를 미리 만들게 하다[편집]

○辛未/徵畿民, 預造王師自超浮屠於檜巖之北。

경기(京畿) 백성을 징발하여 미리 왕사(王師) 자초(自超)의 부도(浮屠)를 회암사(檜岩寺) 북쪽에 만들게 하였다.


오랜 가뭄과 바람 때문에 절과 신사에 기도하게 하다[편집]

○遣人禱于佛宇神祠。 以久旱且風也。

사람을 보내어 불우(佛宇)·신사(神祠)에 기도하였으니, 오래 가물고 또 바람이 불기 때문이었다.


7月 24日[편집]

노비 변정 도감에서 신축년 이전 일로 송사를 제기한 전 밀직 조호에게 곤장을 치다[편집]

○癸酉/辨定都監杖前密直趙瑚八十。 以判禁辛丑年前事告狀也。

변정 도감(辨定都監)이 전 밀직(密直) 조호(趙瑚)에게 곤장 80을 때렸는데, 판금(判禁)에서 신축년 전 일로 고장(告狀)하였기 때문이었다.


7月 25日[편집]

노비 변정 도감에서 올린 노비 쟁송 판결에 관한 사의 19조목[편집]

○甲戌/辨定都監因憲司受判移關, 將壬申年以來各年所申條目與都監已曾受判禁令, 參酌合行事宜, 疏上十九條曰:

都評議使司以刑曹都官所申, 議得: 公私奴婢, 別立都監, 改給賤籍, 在前文籍, 一皆燒毁。 其中相爭奴婢, 理宜分揀成籍, 令主掌都官, 將去辛丑年以後相訟事, 來丙子年爲始, 限二年決給。 賤籍改成給, 古文燒毁, 永絶爭端, 深爲便益。 今以合行事宜, 條列于後。 一, 凡所訴良, 雖無良籍, 而賤籍不明, 且未曾役使者, 從良決折, 雖無賤籍, 而良籍不明, 累代使用者, 從賤決折。 一, 相爭奴婢, 一般使孫, 而傳來文字不明者, 分決使孫, 宗派不明者, 屬公。 一, 相爭奴婢, 同宗使孫不同訟, 而決後爭望者, 禁止。 一, 無子息人, 全爲繼嗣, 三歲前節付及遺棄小兒收養者, 卽同己子。 雖無傳繼明文, 其奴婢許令全給。 凡爲侍養者, 苟有傳得明文, 則從明文決給; 無明文者, 爲半決給, 一半許於本宗主祀及己身孝道親戚, 差等決給。 一, 以先亡同腹, 稱爲不孝, 其子息奴婢減給, 甚爲無理, 許令平均決給。 一, 妾子無傳繼明文者, 給七分之一。 其賤妾所生無明文而爭望者, 禁止。 一, 雖婢妾所生, 亦是骨肉, 而奴婢一例役使, 未便。 財主現存, 自己婢妾所生, 永放爲良, 以爲恒式。 一, 奴婢買主無後故亡者, 許於親戚決給, 賣者子孫, 毋得爭望。 一, 僧人旣爲辭親出家, 而俗人一例, 祖業奴婢爭望, 無理。 除父母處傳得外, 爭望者禁止, 身後毋得與他本宗分給。 一, 辛丑紅賊之亂, 公私文籍, 失亡殆盡, 眞僞混(殽)〔淆〕, 決折難便。 其辛丑前事相爭者, 竝皆禁止。 未分奴婢合執及他人奴婢濫執, 當身現存者, 理合陳告。 一, 被告人員不對隻者, 京中限二十日, 外方近道限一朔, 遠道限二朔, 不至者, 許於元告決給。 一, 大小兩班, 但以鄕中文字, 本鄕奴婢使用者, 許諸州郡陳告還給。 一, 無子息夫妻奴婢, 雖無文契, 亦許己身使用, 身後本孫許給。 夫與妻成文許給者, 從許與傳; 繼妻爲夫許與者, 但以印信手寸取信難便, 必有證筆的實, 然後方許決給; 其妻不守信者, 勿論文契有無, 卽還本孫。 一, 奴婢決事, 限年定體, 雖臺省刑曹及出使外官, 須於告狀內結銜, 使子姪及同宗使孫對隻, 獨身者, 許妻氏告狀, 爭訟人員, 於都監有親族相避者, 移房決給; 使孫相避者, 都官及憲司刑曹, 無相避處, 移送決折。 一, 所志納狀, 不定日限, 則奸巧之徒, 續續生謀, 亂雜呈狀者不無。 每節連五日一度納狀, 來戊寅年四月已後, 不許接狀。 一, 臺省刑曹法官外嘉善以下, 許於都監取辭決折。 一, 壓良爲賤者、微劣人奴婢奪占者、文字僞造使用者、決後奴婢仍執者、未分奴婢合執者、漏落奴婢全執者、分執奴婢據執者、典當奴婢永執者等、大小人員, 告狀前許令和論。 其不顧己非, 飾詐强辯, 亂法瞞官者, 以判旨不從, 兩府申聞科罪, 嘉善以下, 處決鑑後, 其中奸僞深重者, 已前使用奴婢, 亦令屬公。 當該官吏, 或以人情好惡與不曾用心考察者、所訟人妄稱誤決者, 竝依司憲府所申, 從重論罪。 一, 外方奴婢決折事, 觀察使擇其道內公明剛正者三四人, 於界首官差使員定體, 觀察使納狀, 行移差使員等, 一同聽斷, 決許文成給。 兩邊得失, 略擧花名、年歲載錄, 報觀察使, 其中若有誤決呈狀人, 則觀察使兩邊文證更考, 誤決丁寧, 則聽訟官從重決罪, 使用奴婢, 竝許沒官。 一, 其餘未盡事理, 續議申聞施行。

上曰: “良賤事, 賤籍明白者從賤, 於良於賤文籍不明者, 許令身良役賤, 定屬官司使令”, 餘皆允之。

변정 도감(辨定都監)에서 헌사(憲司)가 수판(受判)하여 이관(移關)한 것에 의하여, 임신년 이래로 각년의 상신(上申)한 조목과 도감(都監)이 이미 수판한 금령(禁令)을 가지고, 마땅히 행사할 사의(事宜)를 참작하여 19조(條)의 소(疏)로 올리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형조(刑曹)의 도관(都官)이 신청한 것으로써 의논하여 마련하기를, ‘공노비(公奴婢)·사노비(私奴婢)는 별도로 도감(都監)을 세워 천적(賤籍)을 고쳐 주되, 전에 있던 문적(文籍)은 모두 불태워 없애게 하고, 그 중에서 서로 다투는 노비로서 사리가 마땅히 분간하여 성적(成籍)해야 할 것은, 주장 도관(主掌都官)으로 하여금 지난 신축년 이후 서로 쟁송한 일을 가지고 오는 병자년부터 2년을 한도로 결급(決給)하여 천적(賤籍)을 고쳐 만들어 주게 하고, 묵은 문적은 태워 없애어 영구히 쟁단(爭端)을 근절시키는 것이 대단히 편익(便益)하겠다.’ 하여, 지금 행사(行事)에 합당한 조목을 아래에 열거합니다.

1. 무릇 소량(訴良)하는 것은 비록 양적(良籍)에는 없지만 천적(賤籍)에도 분명하지 않고, 또 일찍이 역사(役使)를 하지 않은 자는 종량(從良)으로 결절(決折)하고, 비록 천적(賤籍)에는 없지만 양적(良籍)이 분명하지 않고, 여러 대 사역한 자는 종천(從賤)으로 결절(決折)할 것.

1. 서로 다투는 노비로서 일반(一般)의 사손(使孫)[19]으로 전한 문자(文字)가 분명하지 못한 자는 나누어 결절하되, 사손의 종파가 분명하지 못한 것은 속공(屬公)할 것.

1. 서로 다투는 노비가 동종(同宗)의 사손(使孫)이면 함께 송사하지 못하게 하고, 판결된 뒤에 다투고 바라는 자도 금지할 것.

1. 자식이 없는 사람이 온전히 계사(繼嗣)를 위하여 세 살 전에 절부(節付)하였거나, 유기(遺棄)한 어린아이를 수양(收養)한 자는 곧 자기의 자식과 같으니, 비록 전계(傳繼)의 명문(明文)이 없더라도 그 노비를 전부 주게 하고, 시양(侍養)된 자는 만일 전하여 얻은 명문(明文)이 있으면 명문에 따라 결급(決給)하되, 명문이 없는 자도 반을 결급하고, 나머지 반은 본종(本宗)의 제사를 주장하거나 자기 자신에게 효도한 친척에게 차등있게 결급(決給)할 것.

1. 먼저 죽은 동복(同腹)을 불효(不孝)라고 일컬어서 그 자식에게 노비를 감하여 준 것은 심히 무리하니, 평균하여 결급하게 할 것.

1. 첩의 자식으로 전계(傳繼)한다는 명문이 없는 자에게는 7분의 1을 주고, 천첩(賤妾) 소생으로 명문이 없이 다투고 바라는 자는 금지할 것.

1. 비록 비첩(婢妾)의 소생이라도 골육이니 노비와 일례로 역사하게 함은 미편합니다. 재주(財主)가 현재 생존하여 있다면 자기 비첩(婢妾) 소생을 영구히 놓아 양민으로 만들도록 항식(恒式)을 삼을 것.

1. 노비를 산 주인이 자손이 없이 죽은 자는 친척에게 결급되도록 허가하되, 판 사람의 자손은 다투고 바라지 못하게 할 것.

1. 중은 이미 부모를 하직하고 출가(出家)하였으니, 속인(俗人)과 일례로 조업 노비(祖業奴婢)를 다투고 바람은 무리하니, 부모에게서 전하여 받은 것 이외는 다투고 바라는 것을 금지하고, 죽은 뒤에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고, 본종(本宗)에게 나누어 주게 할 것.

1. 신축년 홍적(紅賊)의 난리로 공사의 문적이 거의 다 없어져서 참인지 거짓인지 뒤섞여져 결절(決折)하기가 어려우니 신축년 전의 일로 서로 다투는 자는 모두 다 금지하고, 나누지 않은 노비를 합하여 차지한 자와 다른 사람의 노비를 함부로 차지한 자로서 현존한 자는 사리에 합하여 진고(陳告)할 것.

1. 피고(被告) 인원으로서 대척(對隻)[20]하지 않은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20일을 한도로, 외방의 가까운 도에서는 한 달을 한도로, 먼 도에서는 두 달을 한도로 하되, 이르지 않는 자는 원고(元告)에게 결급하는 것을 허가할 것.

1. 대소 양반(兩班)으로 향중(鄕中)의 문자만을 가지고 본향(本鄕)의 노비를 사용한 자는 여러 주군(州郡)에서 진고(陳告)하게 하여 도로 줄 것.

1. 자식이 없는 부처(夫妻)의 노비는 비록 문계(文契)가 없더라도 자기 일생 동안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게 하되, 죽은 뒤에는 본손(本孫)에게 허급할 것이며, 남편이 아내에게 성문(成文)하여 허급한 것은 허여(許與)한 것에 따라 전계(傳繼)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허여한 것은 인신(印信)·수촌(手寸)[21]만으로는 믿기 어려우니, 반드시 증필(證筆)의 적실한 것이 있은 연후에야 결급을 허가하고, 아내가 신(信)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문계(文契)의 있고 없는 것을 물론하고 곧 본손에게 돌려줄 것.

1. 노비를 결단하는 일은 해[年]를 한정하여 비록 대성(臺省)·형조(刑曹)와 출사(出使)한 외관(外官)이라도 반드시 고장(告狀) 안에 수결을 두어 자질(子姪)과 동종사손(同宗使孫)으로 하여금 대척(對隻)하게 하고, 독신인 자는 처씨(妻氏)의 고장(告狀)을 허락하되, 쟁송하는 사람이 도감(都監)에 상피(相避)되는 친족이 있으면, 방(房)을 옮기어 결급하고, 사손(使孫)에게 상피되는 자는 도관(都官)이나 헌사(憲司)·형조 중 상피되지 않는 곳에 옮겨 보내어 결절(決折)할 것.

1. 소지(所志)를 납장(納狀)하는 것은 날짜를 한정하지 않으면 간교한 무리가 계속하여 꾀를 내어 난잡하게 소장(訴狀)을 바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매 철마다 연 5일동안 한 차례 납장하게 하고, 오는 무인년 4월 이후에는 납장을 접수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

1. 대성(臺省)·형조의 법관 외의 가선(嘉善) 이하는 도감(都監)에서 공사(供辭)를 취하여 결절(決折)하도록 허락할 것.

1. 양인(良人)을 억압하여 천인(賤人)을 만든 자, 미약하고 용렬한 사람의 노비를 빼앗아 점유한 자, 문자(文字)를 위조하여 사용한 자, 결절(決折)한 뒤에도 노비를 그대로 붙잡고 있는 자, 나누지 않은 노비를 합하여 차지하고 있는 자, 누락된 노비를 전부 차지하고 있는 자, 나누어 가질 노비를 움켜잡고 있는 자, 전당(典當)잡힌 노비를 영구히 차지한 자 등의 대소 인원은 고장(告狀)을 올리기 전에 화해하여 의논하게 하고, 자기의 그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거짓을 꾸며 억지로 변론을 하여 법을 어지럽히고 관가를 속이는 자는, 판지(判旨)를 좇지 않는 것으로 양부(兩府)에 신문(申聞)하여 죄를 과(科)하되, 가선(嘉善) 이하는 처결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고, 그 중에서 간악하고 중한 자는 종전에 사용하던 노비(奴婢)도 나라에 귀속시키되, 당해 관리가 혹 사정(私情)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했거나 마음을 써서 고찰하지 않은 자, 소송하는 사람이 오결(誤決)이라고 함부로 말한 자는 모두 사헌부의 신문(申聞)에 의하여 중하게 죄를 논할 것.

1. 외방(外方)의 노비를 결절(決折)하는 일은 관찰사가 그 도내의 공명 강직한 사람 3, 4인을 뽑아서 계수관(界首官) 차사원(差使員)으로 정하고, 관찰사에게 바치는 장문(狀文)을 차사원에게 보내어 일동이 송사를 들어 결단하되, 판결 허가한 문서를 만들어 주어 양편의 잘잘못을 대강 성명과 연령을 들어 기록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게 하며, 그 중에 만일 오결(誤決)이라고 정장(呈狀)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찰사가 양편의 문서와 증거를 다시 상고하여, 오결한 것이 틀림이 없다면 송사를 들은 관리를 중하게 결죄(決罪)하고, 사용하는 노비를 모두 관가에 몰수하게 할 것.

1. 그 나머지 미진한 일은 계속 심의하여 신문(申聞)하게 하여 시행하소서."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양천(良賤)에 대한 일은 천적(賤籍)에 명백한 자는 천(賤)으로 하고, 양(良)에도 천(賤)에도 문적이 분명하지 않은 자는 몸은 양(良)으로 하고, 사역은 천(賤)으로 하여 관사(官司)의 사령(使令)으로 정하여 붙이라."

하고, 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였다.


제주 목사 이침이 재임할 동안 공적도 없고 토관의 딸에게 장가들어 탄핵당하다[편집]

○諫官上言: “前濟州牧使李忱, 在任三年, 無績可稱, 且其父子, 各娶土官之女。 觀其娶妻納婦, 則其他暗行不義, 從可知矣。 願令攸司, 科罪戒後。” 上止令收其職牒。

간관이 상언(上言)하였다.

"전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침(李忱)은 재임(在任)한 지 3년이로되 공적이라고 이를 만한 것이 없고, 또 그들 부자는 각각 토관(土官)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그 아내를 맞아들이고 며느리를 얻어들인 것을 볼진대, 기타 가만히 불의를 행한 것을 알 수 있으니,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죄를 과(科)하여 후래를 경계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의 직첩만 회수하게 하였다.


좌산기 함부림을 기복하도록 하였으나 예제를 따르기를 청하다[편집]

○左散騎咸傅霖, 奔父喪踰年, 命起復, 上書請從制, 上允之。

좌산기(左散騎) 함부림(咸傅霖)이 아비의 상사에 분상(奔喪)한 지 1년이 넘었으므로 기복(起復)을 명하였다. 글을 올려 예제(禮制)를 따르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전 교서감 왕미가 여종과 간통했는데, 이를 질투하여 여종을 죽인 아내를 데리고 도망하다[편집]

○前校書監王亹奸其婢, 其妻妬殺之, 棄諸道傍。 刑曹請罪, 亹率妻逃, 上命收職牒。

전 교서감(校書監) 왕미(王亹)가 그 종을 간통하니, 아내가 질투하여 죽여서 길옆에다 버렸다. 형조(刑曹)에서 죄주기를 청하니, 미가 아내를 데리고 도망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직첩을 거두게 하였다.


일본 육주 자사 다다량의 조신 의홍이 사자를 보내어 도당에 바친 글[편집]

○日本六州刺史多多良朝臣義弘, 遣使致書都堂。 其略曰: “海山阻隔, 徒引領而已。 今玆行人通竺等來, 獲承尊候動止, 忻慰。 且蒙辱書, 加以土宜, 拜賜感荷。 一歧、對馬島邊人侵耗之禁, 敢不奉敎!”

일본의 육주 자사(六州刺使) 다다량조신의홍(多多良朝臣義弘)이 사자를 보내어 도당(都堂)에 글을 바쳤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다.

"바다와 산이 험하고 막혀서 목을 늘이고 바랄 뿐이더니, 이제 행인(行人) 통축(通竺) 등이 와서 존후(尊候)의 동지(動止)를 얻어 들으오니 기쁘고 즐겁습니다. 또 주신 편지를 받고 겸하여 토의(土宜)를 주시오니 감사히 배사(拜賜)[22]하옵니다. 일기(一岐)·대마도(對馬島) 변방 사람들의 침노를 금하라는 것은 어찌 가르침을 받들지 않으오리까?"


六年 八月[편집]

8月 1日[편집]

원종 공신인 검교 전서 용희수의 빈소에 제사를 지내게 하다[편집]

○庚辰朔/上遣大將軍朴子靑, 賜奠於檢校典書龍希壽殯所。 希壽, 原從有勞者也。

임금이 대장군(大將軍) 박자청(朴子靑)을 보내어 검교 전서(檢校典書) 용희수(龍希壽)의 빈소(殯所)에 전(奠)을 내려 주게 하였다. 희수는 원종(原從)으로 공로가 있는 사람이었다.


경상도 전라도에 몇년 동안 수재와 한재가 겹쳐 시절에 따라 선물 바치는 것을 중지시키다[편집]

○都堂奉王旨, 移牒慶尙、全羅道: “比因水旱, 民失農業, 其趁節進膳, 一皆禁斷, 唯正朝誕日禮物, 亦隨宜進獻, 除觀察使外, 一皆禁斷。” 又令各道以時收蓄大小麥, 分給窮民耕種。

도당(都堂)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경상·전라도에 이첩(移牒)하였다.

"근년에 수재·한재로 인하여 백성이 실농하였으니, 시절에 따라 선물을 바치는 것을 일체 모두 금단하고, 정조(正朝)와 탄일(誕日)의 예물만은 형편에 따라 진헌(進獻)하되 관찰사를 제외하고는 일체 모두 금단하라. 또 각도로 하여금 제때에 대맥·소맥을 수축(收蓄)하여 궁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경종(耕種)하게 하라."


8月 3日[편집]

목성이 여귀성과 적시성에 접근하다[편집]

○壬午/木星犯輿鬼 積尸。

목성(木星)이 여귀성(輿鬼星)·적시성(積尸星)을 범하였다.


8月 5日[편집]

첨절제사 강사덕이 남포진에서 도둑질하던 왜적 8급을 베이고 노획한 병기를 바치다[편집]

○甲申/倭寇藍浦鎭, 僉節制使姜思德斬倭八級, 獻所獲兵器, 賜綺絹宮醞。

왜적이 남포진(藍浦鎭)에서 도둑질하니, 첨절제사(僉節制使) 강사덕(姜思德)이 왜적 8급(級)을 베이고 노획한 병기를 바쳤다. 기견(綺絹)과 궁온(宮醞)을 하사하였다.


8月 6日[편집]

오랜 가뭄으로 역사를 중지하고 인부들을 놓아 보내다[편집]

○乙酉/上以久旱, 命停土木之役, 放遣役徒。

임금이 오래 가물므로 명하여 토목(土木)의 역사를 정지하고 역도(役徒)들을 놓아 보냈다.


왜적을 쫓던 우인렬·진을서가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오다[편집]

○禹仁烈、陳乙瑞等, 追倭不及而還。

우인열(禹仁烈)·진을서(陳乙瑞) 등이 왜적을 쫓았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유구국 중산왕이 사신을 파견, 방물과 표류한 사람 9명을 함께 보내며 바친 글[편집]

○琉球國中山王察度, 遣使致書獻方物, 發還被擄及遭風人九名。 書曰:

兩儀合德, 四時分序, 群邦安樂, 萬物得所。 恭惟朝鮮國王殿下, 政致昇平, 德業隆盛, 仍且不泄邇不忘遠, 方推德澤, 寵惠隣邦, 敢不忻抃! 竊念愚蒙, 僻居海邦, 特修菲儀, 遣人馳獻。 只緣阻隔滄波, 末由親詣奉會, 但知仰德祝齡而已。 伏望仁慈鑑納。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어 글을 바치고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잡혀 있던 사람과 바람을 만나 표류한 사람 9명을 돌려보냈다. 서신은 이러하였다.

"양의(兩儀)의 덕이 합하매 사시(四時)가 차서 있게 나뉘고, 여러 나라가 편안히 즐기고 만물이 곳을 얻었습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승평(昇平)한 정치를 이루시고 덕업이 융성하온데, 또 가까운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고 먼 사람을 잊지 않아서 바야흐로 덕택을 미루어 이웃나라에 은혜를 입히오니, 감히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윽이 생각하건대, 어리석고 몽매하여 궁벽하게 바다 나라에 살아서 특별히 비의(菲儀)를 닦아 사람을 보내어 치헌(馳獻)하옵니다만, 창파가 막혀 있기 때문에 친히 가서 받들어 회합할 수가 없사옵니다. 다만, 덕을 앙모하고 수를 빌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인자(仁慈)하게 살피시어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왕조가 상중에 있으므로 우도 관찰사 박경에게 고려 태조를 제사하게 하다[편집]

○以王珇居父憂, 命右道觀察使朴經, 行前朝太祖之祭。

왕조(王珇)가 아비의 상중에 있으므로, 우도 관찰사 박경(朴經)에게 명하여 전조(前朝) 태조(太祖)의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


8月 8日[편집]

용산강에 거둥하여 새로 만든 병선을 시찰하다[편집]

○丁亥/幸龍山江, 視司水監新造兵船。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여 사수감(司水監)에서 새로 병선(兵船)을 만드는 것을 시찰하였다.


김사행이 토목 공사가 거의 끝나감으로 꼭 중지할 것이 없음을 아뢰다[편집]

○金師幸進言: “土木工役, 庶幾就成, 不必中止。” 上然之。

김사행(金師幸)이 진언(進言)하였다.

"토목의 공사가 거의 성취되었으니 반드시 중지할 것은 없습니다."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8月 9日[편집]

항복한 왜인을 외방에 나누어 두다[편집]

○戊子/分置降倭於外方。

항복한 왜인을 외방에 나누어 두었다.


진도를 가르칠 훈도관을 각도와 각진에 나누어 보내다[편집]

○分遣《陣圖》訓導官於各道各鎭。

진도(陣圖) 훈도관(訓導官)을 각도·각진(各鎭)에 나누어 보냈다.


삼군부로 하여금 날마다 시가에서 진법을 익히게 하다[편집]

○令三軍府日會節制使至散員, 於市街習陣。

삼군부(三軍府)로 하여금 날마다 절제사(節制使)에서 산원(散員)까지 모아 시가(市街)에서 습진(習陣)하게 하였다.


교하 이서 지방에 크게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다[편집]

○交河以西, 大雷電以雨。

교하(交河) 이서(以西)에서 크게 천둥과 번개하고 비가 내렸다.


8月 12日[편집]

노비 변정 도감에서 양첩 자손에게는 노비를 다 줄 것 등을 건의하다[편집]

○辛卯/奴婢辨定都監上言: “歷考古典, 大小宗嫡妾之法, 全以承家繼嗣爲重。 其有嫡室無後者, 妾子固當繼嗣。 乞於良妾子孫, 專給奴婢。 若良妾亦無子, 而自己婢妾有子者, 雖無傳繼明文, 宜減半給之, 一半屬公, 其娶他人之婢, 爲妾有子者, 只給七分之一, 餘竝屬公。” 上允之。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定都監)에서 상언하였다.

"예전 전장(典章)을 고루 상고하여 보면 대·소종(大小宗) 적첩(嫡妾)의 법은 온전히 집을 이어받아 계통을 잇는 것으로 중점을 삼았으니, 적실(嫡室)에서 무후(無後)한 자가 있으면 첩의 아들이 마땅히 계승하여야 하니, 바라옵건대 양첩(良妾)의 자손에게는 노비를 전부 다 주고, 만일 양첩이 또 자식이 없고 자기의 종첩이 자식이 있는 자는, 비록 전하여 계승한다는 명문(明文)은 없으나 마땅히 반을 감하여 주고 반은 속공(屬公)하고, 다른 사람의 종을 취하여 첩을 삼아서 자식이 있는 자는, 다만 7분의 1을 주고 나머지는 모두 속공(屬公)하소서."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8月 14日[편집]

변정 도감에서 전 안동 절제사 정영손이 노비문서를 변조한 죄를 청하다[편집]

○癸巳/辨定都監請前安東節制使丁令孫塗擦奴婢文書之罪。 令孫年過七十, 上止令收其職牒。

변정 도감(辨定都監)에서 전 안동 절제사(安東節制使) 정영손(丁令孫)이 노비(奴婢)의 문서를 개칠하여 뭉갠 죄를 청하니, 영손이 나이 70이 지났으므로 임금이 다만 그 직첩만 회수하게 하였다.


왜적이 용주를 노략질하다. 18일에 나세 등을 명하여 잡게 하다[편집]

○倭入寇龍州, 丁酉, 復命羅世等往捕之。

왜적이 용주(龍州)에 들어와 도둑질하므로, 18일에도 다시 나세(羅世) 등을 명하여 가서 잡게 하였다.


전 광주 목사 유호를 경사에 파견하다[편집]

○遣前光州牧使柳灝如京師。

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유호(柳灝)를 경사(京師)에 파견하였다.


경기 백성을 징발하여 도성을 수축하게 하다[편집]

○命徵畿內民, 修築都城。

명하여 경기(京畿) 안의 백성을 징발하여 도성(都城)을 수축하게 하였다.


좌산기 상시 조서에게 《서경》 홍범편을 써서 바치게 하다[편집]

○命左散騎常侍曺庶, 書《洪範》以進。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조서(曺庶)에게 명하여 〈《서경》〉 홍범(洪範)을 써서 바치게 하였다.


8月 20日[편집]

토성이 벌성 남쪽 제1성을 범하니 법석을 베풀다[편집]

○己亥/土星犯罰星南第一星, 集僧徒, 設祈禳法席。

토성(土星)이 벌성(罰星) 남쪽 제일성(第一星)을 범하였으므로, 승도들을 모아 기양(祈禳)하는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헌사에서 이지 등이 죄인의 재산을 실상대로 적몰하지 않았음을 아뢰다[편집]

○憲司上言: “慶尙道都觀察使李至及經歷崔關、都事李悌等, 籍前判開城府事朴天祥家財不實。” 上曰: “至本勤謹奉公, 今於慶尙, 亦有惠政。” 乃宥之, 放關、悌于邊郡。

헌사(憲司)에서 상언하였다.

"경상도 도관찰사 이지(李至)와 경력(經歷) 최관(崔關)과 도사(都事) 이제(李悌) 등이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박천상(朴天祥)의 집 재산을 적몰하기를 실상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至)는 본래 부지런하고 조심성 있게 봉공(奉公)하였고, 지금도 경상도에서 또한 혜정(惠政)이 있다."

하여 용서하게 하고, 관(關)과 제(悌)는 변군(邊郡)에 내쳤다.


8月 23日[편집]

서리가 내려 풀이 죽다[편집]

○壬寅/隕霜殺草。

서리가 내리어 풀이 죽었다.


제생원을 설치하다[편집]

○置濟生院, 令各道每歲輸納鄕藥材, 如惠民局例。

제생원(濟生院)을 설치하고 각도로 하여금 매년 향약재(鄕藥材)를 실어다 바치기를 혜민국(惠民局)의 예(例)와 같이 하였다.


전 판사 정점에게 척석군과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잡게 하다[편집]

○以前判事鄭漸, 領擲石軍及召募軍, 乘船捕倭, 幸龍山江親見之。

전 판사 정점(鄭漸)으로 척석군(擲石軍)과 소모(召募)한 군사를 거느려 배를 타고 왜적을 잡게 하고, 친히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여 보았다.


잡혀 갔던 본국인 남녀 19명, 왜인 3명, 중국인 2명 등이 일본에서 오다[편집]

○被擄本國男女十九人及倭三人、唐二人, 來自日本。

잡혀 갔던 본국인 남녀 19인과 왜인(倭人) 3인과 중국인 2인이 일본에서 왔다.


각도 감사에게 군민관과 교수관 등의 인사 고과 성적과 능력을 조사, 보고하게 하다[편집]

○令各道監司, 考其大小軍民官政績及儒醫學敎授官、驛丞能否, 開寫以聞。

각도 감사(監司)로 하여금 대소 군민관(軍民官)의 정치 성적과 유학(儒學)·의학 교수관(醫學敎授官)과 역승(驛丞)의 능하고 능하지 않은 것을 조사하여 기록하여 아뢰게 하였다.


8月 24日[편집]

형조에서 상장군 이부가 박사후의 노비를 증여받았다 하여 논죄하다[편집]

○癸卯/刑曹請上將軍李敷受朴思厚贈與奴婢之罪, 上以功臣, 止令停職。

형조에서 상장군(上將軍) 이부(李敷)가 박사후(朴思厚)가 증여(贈與)한 노비(奴婢)를 받은 죄를 청하니, 임금이 공신이라 하여 정직(停職)시키기만 하였다.


8月 25日[편집]

폭우가 내리다[편집]

○甲辰/暴雨.

폭우가 내렸다.


약간 의술에 정통한 일본 중 원해가 처자를 거느리고 오다. 관직과 성(姓)을 주다[편집]

○日本僧原海率妻子來。 稍精醫術, 命長髮, 授典醫博士, 姓平。

일본 중 원해(原海)가 처자를 거느리고 왔는데 조금 의술(醫術)에 정통하였다. 명하여 머리를 기르게 하여 전의 박사(典醫博士)를 주고 성(姓)을 평(平)이라 하였다.


경상도에서 수재 당한 군현의 공물과 조세를 감면하다[편집]

○蠲慶尙道水災郡縣貢賦。

경상도에서 수재를 당한 군현(郡縣)의 공부(貢賦)를 감면하였다.


창포 만호 박용수를 가두다[편집]

○囚槍浦萬戶朴龍壽。

창포 만호(槍浦萬戶) 박용수(朴龍壽)를 가두었다.


8月 26日[편집]

전 밀직 유준의 딸을 궁중으로 받아들이다[편집]

○乙巳/納前密直柳濬之女。

전 밀직(密直) 유준(柳濬)의 딸을 받아들였다.


8月 27日[편집]

회암사에 쌀 1백석을 하사하다[편집]

○丙午/賜檜巖寺米百石。

회암사(檜岩寺)에 쌀 1백 석을 하사하였다.


8月 28日[편집]

유구국 사자가 돌아가다[편집]

○丁未/琉球國使者還。

유구국(琉球國) 사자가 돌아갔다.


8月 29日[편집]

태일전을 파하여 소격전에 합하다[편집]

○戊申/罷太一殿, 合於昭格殿。

태일전(太一殿)을 파하여 소격전(昭格殿)에 합하였다.


8月 30日[편집]

왜적을 막지 못한 의주·안주·평양도의 수군 만호 3사람을 사형시키다[편집]

○己酉/斬義州、安州、平壤道水軍萬戶三人。 以不能捕倭也。

의주(義州)·안주(安州)·평양도(平壤道)의 수군 만호(水軍萬戶) 세 사람을 베었으니, 왜적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六年 九月[편집]

9月 1日[편집]

전백영을 서북면 선위사로 삼아 성 쌓을 만한 곳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다[편집]

○庚戌朔/以兵曹典書全伯英爲西北面宣慰使, 歷觀諸郡可城之地以聞。

병조 전서(兵曹典書) 전백영(全伯英)으로 서북면 선위사(西北面宣慰使)를 삼아 여러 고을의 성 쌓을 만한 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아뢰게 하였다.


9月 2日[편집]

전 좌도 수군 절제사 이희충의 졸기[편집]

○辛亥/前左道水軍節制使李希忠卒。 希忠, 永州人, 開城尹瑜之子, 門下平章頲之四世孫。 從仕前朝式目都監, 歷官至密直副使, 卒年五十四。 子膺, 佐命功臣, 今爲知議政府事。

전 좌도 수군 절제사(左道水軍節制使) 이희충(李希忠)이 졸(卒)하였다. 희충은 영주(永州) 사람인데 개성 윤(開城尹) 이유(李瑜)의 아들이요, 문하 평장(門下平章) 이정(李頲)의 4세손이다. 전조(前朝)에 벼슬하여 식목 도감(式目都監)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죽으니 나이 54세였다. 아들 이응(李膺)은 좌명 공신(佐命功臣)인데, 지금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었다.


9月 4日[편집]

경기우도 수군 절제사 김을보가 왜선 1척을 나포하여 적 14명을 죽이고 24명을 생포하다[편집]

○癸丑/右道水軍節制使金乙寶捕倭船一隻, 斬首十四級, 生擒二十四名以獻。 遣司農卿金輅, 賜綺絹宮醞。

우도 수군 절제사(右道水軍節制使) 김을보(金乙寶)가 왜선 1척을 잡아 머리 14급(級)을 베이고 24명을 생금하여 바치니, 사농 경(司農卿) 김로(金輅)를 보내어 비단과 궁온(宮醞)을 하사하였다.


9月 7日[편집]

명나라 사신에게 정도전을 데려 가라고 비밀히 권한 양첨식을 헌사에서 논죄하다[편집]

○丙辰/憲司上言: “楊添植與明使楊帖木兒、牛牛等, 屛人密言, 勸使臣率鄭道傳以歸。 且賂曺恂以匹帛奴婢, 謀免其罪, 然執死不服, 獄辭未成。 願籍沒家産, 徙諸海上, 終身不齒。” 上從之。

헌사(憲司)에서 상언하였다.

"양첨식(楊添植)은 명나라 사신 양첩목아(楊帖木兒)·우우(牛牛) 등으로 더불어 사람을 물리치고 비밀히 말하되, 사신에게 정도전(鄭道傳)을 데리고 돌아가라고 권하고, 또 조순(曹恂)에게 필백(匹帛)과 노비(奴婢)로 뇌물하여 그 죄를 면하려고 꾀하였으나, 죽기로 고집하고 승복하지 않아서 옥사(獄辭)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원컨대 가산을 적몰(籍沒)하고 해상(海上)으로 옮기게 하여 종신토록 조반(朝班)에 참예할 수 없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月 8日[편집]

좌승지 이문화에게 《서경》 홍범편을 강하게 하다[편집]

○丁巳/命左承旨李文和, 講《洪範》。

좌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서경》 홍범(洪範)을 강(講)하게 하였다.


9月 9日[편집]

이틀간 천둥과 번개가 치다[편집]

○戊午/雷電, 己未亦如之。

천둥과 번개하고, 초열흘날에도 그와 같았다.


9月 15日[편집]

참찬문하부사 조반과 영청주목사 이관 등을 하정사로 보내다[편집]

○甲子/遣參贊門下府事趙胖、前領淸州牧使李觀, 赴京賀明年正。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반(趙胖)과 전 영청주목사(領淸州牧使) 이관(李觀)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명년 신정(新正)을 하례하게 하였다.


9月 16日[편집]

수재와 한재로 실농한 경상도의 감사에게 구황에 힘쓰게 하다[편집]

○乙丑/命都堂曰: “慶尙道因水旱失農, 令其道監司, 罷月課軍器, 專務救荒。”

도당(都堂)에 명하였다.

"경상도는 수재·한재로 인하여 농사를 실패하였으니, 그 도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군기(軍器)를 월과(月課)하는 것을 파하고, 오로지 구황(救荒)하는 것을 힘쓰게 하라."


9月 17日[편집]

참찬문하부사로 치사한 나세가 출사하여 군대를 지휘하다가 죽다[편집]

○丙寅/參贊門下府事致仕羅世卒于軍。 年七十八。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나세(羅世)가 군(軍)에서 죽으니, 나이 78이었다.


9月 18日[편집]

군신에게 경복궁에서 잔치를 베풀다[편집]

○丁卯/宴群臣于景福宮。

군신(群臣)에게 경복궁(景福宮)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9月 19日[편집]

각도의 절에 사람을 보내어 전난을 막게 해달라고 비는 법석을 베풀게 하다[편집]

○己巳/遣人於各道寺社, 設鎭兵法席。

사람을 각도 사사(寺社)에 보내어 진병(鎭兵)하는 법석(法席)을 베풀게 하였다.


사사에서 6품 이상 관원이 태죄에 해당할 경우 직첩 거두지 말도록 건의하다[편집]

○都評議使司上言: “憲司劾六品以上官, 雖笞罪, 必收職牒, 實爲前朝弊法。 乞依朝廷律文, 凡內外大小軍民衙門官吏, 犯公罪該笞者, 官收贖; 凡文官犯私罪笞四十以下, 附過還職; 笞五十者, 解見任別敍之律; 六品以上員所犯罪狀, 準備推考, 以罪狀輕重, 杖以上罪申聞, 收謝牒鞫問; 笞罪不許收職牒, 以公緘問備, 罪狀緣由具錄, 呈使司量罪, 移文巡軍, 決笞還任。” 上從之。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상언하였다.

"헌사(憲司)에서 6품 이상의 관원을 탄핵하옵되, 비록 태죄(笞罪)라도 반드시 직첩을 거두는 것은 실로 전조(前朝)의 폐법이오니, 원컨대 조정(朝廷)의 율문(律文)에, ‘무릇 내외 대소 아문(衙門)의 관리가 공죄(公罪)를 범하여 태벌(笞罰)에 해당한 자는 관에 속(贖)바치게 하고, 무릇 문관(文官)이 사죄(私罪)를 범하여 태(笞) 40 이하인 자는 부과(附過)하여 환직(還職)하고, 태 50인 자는 현재의 직임을 해면하고 따로 서용한다.’는 율에 의하여, 6품 이상의 관원이 범한 죄상은 추고(推考)하여 죄상의 경중에 따라 장(杖) 이상의 죄는 신문(申聞)하여 사첩(謝牒)을 거두어 국문하게 하고, 태죄는 직첩을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공함(公緘)으로 죄상과 연유를 갖추 물어 기록하여, 사사(使司)에 바치어 죄를 헤아려 순군(巡軍)에 이문(移文)하여 결태(決笞)하고 환임(還任)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月 22日[편집]

성절일을 맞아 군신을 거느리고 축하하는 의식을 갖고 잔치하다[편집]

○辛未/聖節日, 上率群臣行賀禮, 仍宴群臣。 世子獻壽觴, 群臣呼千歲, 上曰: “今日爲皇帝祝壽耳。 乃爲寡人呼千歲可乎? 心實未安, 自今止之。”

성절일(聖節日)이므로 임금이 군신을 거느리고 하례를 행하고, 인하여 군신에 잔치하였는데, 세자가 수상(壽觴)을 올리고 군신들이 천세(千歲)를 불렀다. 임금이 말하였다.

"오늘은 황제를 위하여 축수하는 날인데 과인(寡人)을 위하여 천세를 부르는 것이 가한가? 마음으로 실상 미안하니 이제부터는 그만두게 하라."


9月 23日[편집]

상의중추원사 김적선의 아들이 중국 등주에가서 아비의 유골을 거두어 오기를 청하다[편집]

○壬申/商議中樞院事金積善子自龜, 請詣登州收父骨, 給譯者送之。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김적선(金積善)의 아들 김자구(金自龜)가 등주(登州)에 가서 아비의 뼈를 거두기를 청하니, 통역하는 사람을 주어 보냈다.


9月 24日[편집]

진관사에 거둥하여 서교에서 유숙하다[편집]

○癸酉/幸津觀寺, 次宿西郊, 甲戌還宮。

진관사(津觀寺)에 거둥하여 서교(西郊)에서 유숙하고 25일날 환궁하였다.


9月 27日[편집]

심씨를 왕세자의 현빈으로 삼고 책문과 인장을 하사하다[편집]

○丙子/上具公服坐正殿, 封沈氏爲王世子賢嬪。 命參贊門下李茂、中樞院學士鄭擢, 賜冊印。

임금이 공복(公服)을 갖추고 정전(正殿)에 앉아 심씨(沈氏)를 봉하여 왕세자의 현빈(賢嬪)을 삼고, 참찬문하(參贊門下) 이무(李茂)와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정탁(鄭擢)을 명하여 책(冊)과 인(印)을 하사하게 하였다.


六年 冬十月[편집]

10月 1日[편집]

근정전에 앉아 조회를 받다[편집]

○己卯朔/上坐勤政殿受朝。

임금이 근정전에 앉아 조회를 받았다.


일본 구주 절도사가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日本九州節度使使者, 與本國僧梵明, 來獻土物。

일본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의 사자와 본국의 중 범명(梵明)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동사(凍死)를 우려하여 풍해 서북 등지의 왜적 잡는 군인들을 돌아가게 하다[편집]

○上命都堂曰: “豐海西北等處捕倭軍人, 不耐風寒, 恐有凍死者。 亟令回船, 各還其家。”

임금이 도당(都堂)에 명하였다.

"풍해(豊海) 서북 등지의 왜적을 잡는 군인들이 풍한(風寒)을 견디지 못하여 얼어 죽는 자가 있을까 두려우니, 급히 배를 돌리어 각각 제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


10月 2日[편집]

광주에서 사냥하다[편집]

○庚辰/畋于廣州。

광주(廣州)에서 사냥하였다.


10月 4日[편집]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다[편집]

○壬午/雷電以雨。

천둥과 번개하고 비가 내렸다.


10月 5日[편집]

종묘에 고니 고기를 천신하다[편집]

○癸未/薦天鵝于宗廟。

천아(天鵝)를 종묘(宗廟)에 올렸다.


간관이 임금의 거둥은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야 할 것임을 간언하다[편집]

○諫官上言: “擧動, 人君之節, 不可不愼, 故出入有節。 凡有行幸, 必命有司所之者, 所以備儀衛而示尊嚴也。 往者再幸龍山江, 雖不先命攸司所之, 然不違於命將推轂之意, 亦爲美事。 前月出宿西郊, 又於前日出廣州, 信宿而還, 臣等未知所以行幸之意。 前於西郊, 烈風暴作, 今於廣州, 有雷電之變。 臣等以爲上天仁愛殿下, 譴告而修省之也。 伏望殿下, 敬天之怒, 恤民之隱, 凡有行幸, 動遵古法, 定其日期, 使臣民曉然知車駕所之, 且令後世, 有所持循, 幸甚。” 上然之。

간관(諫官)이 상언(上言)하였다.

"거동(擧動)은 인군(人君)의 절차이어서 삼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출입하는 데에 절차가 있으니, 무릇 거둥이 있으면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가는 곳을 명하는 것은 의위(儀衛)를 갖추어 존엄(尊嚴)한 것을 보이자는 것입니다. 지난번 두번이나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셨는데, 비록 유사에게 가는 곳을 명하지는 않으셨으나, 장수를 명하여 추곡(推轂)[23]한다는 뜻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또한 아름다운 일이 되나, 전달에는 서교(西郊)에 나가 유숙하시고 또 전일에는 광주(廣州)에 나가 이틀 밤을 유숙하시고 돌아오셨으니, 신 등은 거둥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에 서교(西郊)에서는 모진 바람이 사납게 일고, 오늘날 광주(廣州)에서는 천둥과 번개의 변이 있었으니, 신 등은 생각하건대, 하느님[上天]이 전하(殿下)를 인애(仁愛)하시어 꾸짖어 고하고 수성(修省)하게 함인가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노하심을 공경하고 백성의 불쌍한 것을 근심하여, 무릇 거둥이 있게 되면 반드시 예전 법을 따라서 그 날짜와 시기를 정하여, 신하와 백성으로 하여금 거가(車駕)의 가는 곳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 또 후세로 하여금 본받고 따를 것이 있게 하시면 심히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10月 6日[편집]

가례 도감을 설치하고 이화·조준·김사형·정도전 등으로 제조로 삼다[편집]

○甲申/設嘉禮都監, 以領三司事和、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奉化伯鄭道傳爲提調。

가례 도감(嘉禮都監)을 설치하여 영삼사사(領三司事) 이화(李和)·좌정승 조준(趙浚)·우정승 김사형(金士衡)·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으로 제조(提調)를 삼았다.


10月 7日[편집]

문묘 역소에 거둥하여 공사 감독 관원과 군인에게 술을 하사하다[편집]

○乙酉/幸文廟役所, 賜酒督役官及軍人。

문묘(文廟)의 역소(役所)에 거둥하여, 역사를 감독하는 관원과 군인에게 술을 하사하였다.


남은을 충청도에 보내어 순성 옛 개천의 개통 편리 여부를 살피게 하다[편집]

○遣宜城君南誾於忠淸道, 相重開蓴城舊渠便否。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을 충청도에 보내어 순성(蓴城)의 예전 개천을 다시 개통하는 것의 편하고 편하지 않은 것을 살펴보게 하였다.


10月 8日[편집]

감찰을 각도에 보내어 염분·염구·어량·수량을 조사하여 장부를 만들게 하다[편집]

○丙戌/分遣監察於各道。 愼以衷右道豐海道, 朴軒忠淸道, 崔滈慶尙道, 高休全羅道, 踏驗沿海州郡鹽盆、鹽區、魚梁、水梁, 量所出多少, 定其稅成籍。

감찰(監察)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되, 신이충(愼以衷)은 우도(右道)와 풍해도(豊海道)에, 박헌(朴軒)은 충청도에, 최호(崔滈)는 경상도에, 고휴(高休)는 전라도에 보내어 연해변에 있는 주군(州郡)의 염분(鹽盆)·염구(鹽區)·어량(魚梁)·수량(水梁)을 답사하여 소출의 많고 적은 것을 헤아려서 세(稅)를 정하여 장적(帳籍)을 만들게 하였다.


항복한 왜괴 구육에게 쌀과 콩을 하사하다[편집]

○賜降倭魁㡱六米豆五十石。

항복한 왜괴(倭魁) 구육(㡱六)에게 쌀·콩 50석을 하사하였다.


10月 10日[편집]

상장군 노조에게 대대로 봉작을 습봉하게 하고 왕씨로 복성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다[편집]

○戊子/以上將軍盧珇, 襲封特進輔國崇祿大夫、麻田郡、歸義君, 復姓王氏, 奉王氏祀。

상장군(上將軍) 노조(盧珇)를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로 특진(特進)시켜 마전군(麻田郡)의 귀의군(歸義君)을 습봉(襲封)하게 하고, 왕씨(王氏)로 복성(復姓)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10月 11日[편집]

탄신이므로 조하를 받고 군신에게 잔치를 베풀다[편집]

○己丑/上誕晨, 受朝賀, 宴群臣。

임금의 탄신(誕辰)이므로 조하(朝賀)를 받고 군신(群臣)에게 잔치하였다.


10月 12日[편집]

하윤·윤방경·안성·최견·김분 등을 용서하다[편집]

○庚寅/宥前雞林尹河崙、前都節制使尹邦慶及安省、崔蠲、金汾等。

전 계림 윤(雞林尹) 하윤(河崙)과 전 도절제사 윤방경(尹邦慶)과 안성(安省)·최견(崔蠲)·김분(金汾) 등을 용서하였다.


10月 13日[편집]

간관이 군량미 비축과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여 불의의 사고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辛卯/諫官上言: “節用足食, 王政之先務; 安不忘危, 有國之長慮。 苟於錢穀, 徒務一時之用, 昧於不虞之變, 實非爲國之良策也。 謹稽《周禮》, 司徒掌錢穀之數, 冢宰掌出納之命, 量入爲出, 不至妄費, 三年耕, 必有一年之蓄, 以通制國用。 恭惟殿下卽位, 于今六年。 設有軍旅之變, 則其有二年之畜, 而以支數十萬之卒乎? 食者, 三軍之司命。 糧餉不足, 則勇士百萬, 不足爲用; 鐵城千仞, 不足爲恃。 今國家改正田制, 上自供上, 下至各品之科, 國用軍資, 田有定式, 立法之意周矣。 近因創建新都, 用度浩繁, 經費不給, 其於廣儲畜備不虞之道, 誠有虧矣。 況忠淸、全羅、慶尙三道, 國用財賦之淵藪, 今以水旱之災, 民失農業, 財賦之入, 必減於舊額。 師旅之興, 在於不虞。 儻有邊警, 則糧餉之費, 何以應之? 臣等雖粗鄙寡識, 竊以此痛心。 幸於今年京畿兩道, 禾穀稍登。 願限今年、除宮庫、津驛、院館及衙祿寡婦之田外, 公私田租, 量宜公收, 以補軍資, 以濟一時之歉。 自今一切用度, 必須撙節, 倣乎《周禮》九式之制, 量入爲出, 以裕國用, 以備不虞。” 命都評議使司擬議申聞。 使司議得以聞曰: “各道宮庫、衙祿、津驛、院館之田及功臣田外, 公私田租, 一皆公收。” 上允之。

간관이 상언(上言)하였다.

"용도를 절약하고 양식을 족하게 하는 것은 왕정(王政)의 선무(先務)이고, 편안하여도 위태한 것을 잊지 않는 것은 나라를 가진 이의 원대한 생각이니, 만일 전곡(錢穀)에 대하여 한때의 쓰는 것에만 힘쓰고 불우(不虞)의 변에 어둡다면,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삼가 《주례(周禮)》를 상고하건대, 사도(司徒)는 전곡(錢穀)의 수를 맡고, 총재(冢宰)는 출납의 명을 맡아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여서 함부로 낭비하는 데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3년을 경작하면 반드시 1년의 저축이 있어서 나라의 용도를 통제(通制)하였습니다. 공경하여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즉위(卽位)한 지 지금 6년인데, 가령 군려(軍旅)의 변이 있다면 2년의 저축이 있어서 수십만의 군사를 공급할 수 있사옵니까? 먹는 것이란 삼군(三軍)의 사명(司命)[24]이니, 군량이 넉넉하지 못하면 용맹한 군사가 백만이 있더라도 쓰임이 될 수가 없고, 철옹성[鐵城]이 천 길[千仞]이 되더라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되옵니다.

지금 국가에서 전제(田制)를 개정하여 위로는 공상(供上)[25]으로부터 아래로 각품(各品)의 과전(科田)과 국용(國用) 군자전(軍資田)에 이르기까지 전토에 정한 법식이 있으니, 법을 세운 뜻이 주밀하나, 근자에 새 도성(都城)을 창건함으로 인하여 용도가 호번하여 경비가 넉넉하지 못하니, 저축을 넓히고 불우에 대비하는 도에 참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하물며, 충청·전라·경상 3도는 국용(國用)과 재부(財賦)의 연수(淵籔)인데, 지금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로 백성이 실농하였으니, 재부(財賦)의 들어오는 것이 반드시 예전 액수보다 덜할 것입니다. 사려(師旅)의 일어남은 뜻밖에 있는 것이니, 만일 변경(邊警)이 있다면 군량의 비용을 어떻게 수응하시렵니까? 신 등이 비록 거칠고 소박하고 아는 것이 적으나, 간절하게 이것으로 마음 아파합니다. 다행히 금년에는 경기(京畿) 양도(兩道)에 환곡이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원컨대, 금년에 한하여 궁고(宮庫)·진역(津驛)·원관(院館)·아록(衙祿)·과부(寡婦)의 전토를 제외한 공사전(公私田)의 조(租)를 알맞도록 공수(公收)하여서, 군자(軍資)를 보충하여 한때의 부족한 것을 구제하게 하고, 지금부터는 일체의 용도를 반드시 존절히 하여 《주례(周禮)》구식(九式)[26]의 제도를 모방하여서, 수입을 헤아려 가지고 지출하여 국용을 넉넉히 하고 불우에 대비하소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하여 연구하고 의논하여 상신하여 아뢰게 하니, 사사(使司)에서 의논하여 아뢰었다.

"각도의 궁고(宮庫)·아록(衙祿)·진역(津驛)·원관(院館)의 전토와 공신의 밭을 제외한 공사전조(公私田租)를 일체 모두 공수(公收)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10月 14日[편집]

순천 부사 정지를 참형에 처하다[편집]

○壬辰/誅順天府使鄭漬。

순천 부사(順天府使) 정지(鄭漬)를 목 베었다.


10月 15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癸巳/霧。

안개가 끼었다.


10月 16日[편집]

의흥 삼군부에서 군사를 동원할 때는 호부를 사용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甲午/義興三軍府具本啓曰:

漢之軍政, 始用羽檄, 以召天下之兵, 後用虎符, 以合郡國之信。 膠西欲擅發兵, 而弓高詰之; 嚴助以節發兵, 而郡守拒之。 其召兵也, 周密如此, 故人無奸心, 終漢之世, 晏然無事。 諸呂七國, 變生倉卒, 而備禦素具; 北胡南越, 連兵數年, 而邦本不搖, 蓋高祖出入兵間, 熟究利病, 其四百年之規模宏矣。 乞依此制, 令有司作虎符, 凡內外動兵之事, 敬奉王旨, 以符發之, 無符而召兵者, 以擅發論罪, 永以爲式。

上允之。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에서 계본(啓本)을 갖추어 아뢰었다.

"한(漢)나라의 군정(軍政)은 처음에 우격(羽檄)을 써서 천하의 군사를 불렀으나, 뒤에는 호부(虎符)를 써서 군국(郡國)의 신(信)을 합하여, 교서(膠西)에서 임의로 군사를 징발하려 하매, 궁고(弓高)가 이를 힐난하였고, 엄조(嚴助)가 절(節)을 가지고 군사를 발하매, 군수가 거절하였으니, 군사를 부르는 것은 주밀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간사한 마음이 없어서 한대(漢代)가 끝날 때까지 안연하여 일이 없었습니다. 여러 여씨(呂氏)와 칠국(七國)의 변이 창졸간에 생기었으나, 방비하고 막는 것이 본래 갖추어 있었고, 북호(北胡)와 남월(南越)이 군사를 연하기를 여러 해를 하였으나, 나라 근본이 흔들리지 않았으니, 대개 고조(高祖)가 군사 사이에 출입하여 이되고 병되는 것을 익히 강구하여 4백 년의 규모가 광대하였습니다. 원컨대, 이 제도에 의하여 유사로 하여금 호부(虎符)를 만들어서 무릇 안팎의 동병(動兵)하는 일은 공경하여 왕지(王旨)를 받들어서 호부로 징발하고, 호부가 없이 군사를 부르는 자는 천단히 징발하는 것으로 죄를 의논하도록 항식을 삼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상의중추원사 최용소를 흥천사에 보내어 소재 법석을 베풀다[편집]

○遣商議中樞院事崔龍蘇於興天寺, 設禳災法席。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최용소(崔龍蘇)를 흥천사(興天寺)에 보내어 재앙을 제거하는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새로 유비고를 설치하고 봉화백 정도전을 제조관으로 삼다[편집]

○新置有備庫, 以奉化伯鄭道傳爲提調官。

새로 유비고(有備庫)를 설치하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으로 제조관(提調官)을 삼았다.


10月 17日[편집]

순제성에 전운소를 설치하려다 중지하다[편집]

○乙未/南誾還自蓴堤城上言: “地中有石堅且廣, 未易鑿通水道。” 於是, 議置轉運所於其地, 命兩府耆老, 議其可否以聞。 議者多以爲不可, 遂罷。

남은(南誾)이 순제성(蓴堤城)으로부터 돌아와서 상언하되,

"땅속에 돌이 있어 단단하고 넓어서 수도(水道)를 파서 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므로, 이에 전운소(轉運所)를 그 땅에 두기 위하여 양부(兩府) 기로(耆老)에게 명하여 가부(可否)를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의논하는 이들이 많이 불가하게 여기므로 드디어 파하였다.


10月 19日[편집]

성 쌓는 인부를 돌려보내다[편집]

○丁酉/放築城夫。

성 쌓는 인부를 놓아보냈다.


10月 20日[편집]

조순을 용서하여 외방에서 종편하게 하다[편집]

○戊戌/宥曺恂, 外方從便。

조순(曹恂)을 용서하여 외방에서 종편(從便)하게 하였다.


10月 22日[편집]

임금이 병이 나서 부르자 곧바로 예궐하지 않은 전의감 관원 오경우·양홍달 등을 유배시키다[편집]

○庚子/上不豫, 召醫官而不卽詣闕, 上怒, 壬寅, 流典醫監官吳慶祐於靑海, 金之衍於瓮津, 張翼于寧海, 楊弘達于丑山。 旣而, 召還弘達。

임금이 편치 못하므로 의관(醫官)을 불렀는데, 곧 예궐하지 않았다. 임금이 노하여 24일에 전의감(典醫監) 관원 오경우(吳慶祐)를 청해(靑海)에, 김지연(金之衍)을 옹진(甕津)에, 장익(張翼)을 영해(寧海)에, 양홍달(楊弘達)을 축산(丑山)에 유배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홍달을 소환하였다.


10月 26日[편집]

정릉에 거둥하다[편집]

○甲辰/幸貞陵。

정릉(貞陵)에 거둥하였다.


마전현 부근 고을의 인부를 징발하여 고려 태조의 사당을 영건케 하다[편집]

○命右道都觀察使, 發麻田近縣丁夫, 營前朝太祖廟。

우도 관찰사에 명하여 마전(麻田) 근현(近縣)의 인부를 징발하여 전조(前朝) 태조의 사당을 영건하게 하였다.


10月 28日[편집]

전임 품관 중 기한에 맞추어 서울에 오지 않은 전 판서 정우 등을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丙午/命都堂點考赴京品官。 下前判書鄭寓、金乙生等四人于巡軍獄。 不及期也。

도당(都堂)에 명하여 서울에 온 품관(品官)을 점고(點考)하여 전 판서 정우(鄭寓)·김을생(金乙生) 등 4인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렸는데, 기한에 미치지 못한 때문이었다.


10月 29日[편집]

눈이 조금 내리다[편집]

○丁未/微雪。

조금 눈이 내렸다.


종묘의 동향 대제를 상의문하시부 도흥이 섭행하게 하다[편집]

○命商議門下府事都興, 攝行冬享大祭于宗廟。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도흥(都興)을 명하여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종묘(宗廟)에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각도의 군사 2만을 징발, 기일을 엄수하여 서울에 올라와 성을 쌓게 하다[편집]

○命都堂發各道軍二萬, 刻期赴京築城。 慶尙、全羅道正月二十日, 忠淸、豐海道正月十五日。

도당(都堂)에 명하여 각도의 군사 2만을 징발하여 기일을 엄수하여 서울에 올라와 성을 쌓되, 경상·전라도는 정월 20일까지, 충청·풍해도는 정월 15일까지로 하였다.


10月 30日[편집]

첫눈이 온 것을 하례하다[편집]

○戊申/賀新雪。

신설(新雪)을 하례하였다.


六年 十一月[편집]

11月 1日[편집]

간관이 위화도 회군 때 죄를 받은 사람들의 노비 문제에 대해 건의하다[편집]

○己酉朔/諫官朴信等上言: “前朝戊辰被罪之人家産奴婢及其黨附之人贈與奴婢, 竝屬於官所, 以懲惡而及其黨與也。 及殿下卽位, 誕敷寬恩, 被誅之人祖業奴婢, 悉還子孫, 獨贈與奴婢, 仍在於官, 役使之苦, 飢寒所逼, 隨卽逋亡。 卽令贈與者充立, 一奴之代立, 或至三四, 甚者, 贈與者未現, 則延及親戚證筆。 由是耗盡家産, 抱冤無告者頗多。 無乃失首從輕重之義, 有累於仁政乎? 願將上項受贈奴婢, 除文字現存奴婢外, 死亡逃避, 未推而代立者, 一皆放還, 敢有容隱使用者, 痛繩以法, 又將辨定都監屬公奴婢, 充補放還之數。” 上允之。

간관(諫官) 박신(朴信) 등이 상언하였다.

"전조(前朝)의 무진년에 죄를 당한 사람의 가산(家産)·노비(奴婢)와 당부(黨附)한 사람에게 증여한 노비를 모두 관(官)에 붙였으니, 악한 것을 징계하여 당여(黨與)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에 크게 관대한 은전을 펴서, 베임을 당한 사람의 조업노비(祖業奴婢)[27]를 모두 자손에게 돌려주었으나, 유독 증여한 노비는 그대로 관(官)에 두었는데, 역사의 괴로움과 굶주리고 추위에 부닥쳐 도망하게 되면 즉시 증여한 사람으로 하여금 보충하여 세우게 하여, 한종[一奴]의 대신 세우는 것이 혹 3, 4차에 이르고, 심지어는 증여한 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친척과 증필(證筆)에게까지 연루되게 하니, 이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고 원통함을 품고도 고할 데 없는 자가 매우 많사오매,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의 경중(輕重)에 뜻을 잃어서 어진 정사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윗 항의 증여를 받은 노비 중 현존(現存)하는 노비 문적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 사망하였거나 도망한 자는 추심(推尋)하지 말고, 대신 세운 자도 일체 모두 놓아 돌려보내되, 감히 숨겨서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법으로 다스리고, 또 변정 도감(辨定都監)의 속공(屬公)한 노비를 가지고 방환(放還)한 수를 보충하게 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였다.


외방 품관으로 70 이상 된 자와 생원 진사로 겨우 출신한 자의 환향을 허락하다[편집]

○命外方品官年七十以上者、疾病者、生員進士出身者, 竝許還鄕。 又命宴慰七十以上者, 遣之, 仍復其家。 其餘强壯者, 京中畿內, 自願居住。

외방(外方)의 품관(品官)으로 나이 70 이상 된 자와 질병이 있는 자와 생원(生員)·진사(進士) 출신인 자는 모두 환향(還鄕)하기를 허락하게 하고, 또 70 이상인 자는 위연(慰宴)을 베풀어 보내도록 명하되, 인하여 그 집의 부역을 면제하고, 그 나머지 강장(强壯)한 자에게는 경중(京中)과 기내(畿內)에서 자원에 의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11月 5日[편집]

밤에 비가 내리다[편집]

○癸丑/夜, 雨。

밤에 비가 내렸다.


11月 6日[편집]

정우 등을 석방하다[편집]

○甲寅/釋鄭寓等囚。

정우(鄭寓) 등 가둔 것을 석방하였다.


좌정승 조준에게 소목적을 하사하다[편집]

○賜左政丞趙浚蘇木笛。

좌정승 조준(趙浚)에게 소목적(蘇木笛)을 하사하였다.


11月 7日[편집]

강계권을 동북면에 보내어 경안백의 무덤을 이장하게 하다[편집]

○乙卯/遣象山府院君康繼權于東北面, 移葬慶安伯。

상산 부원군(象山府院君) 강계권(康繼權)을 동북면에 보내어 경안백(慶安伯)을 이장(移葬)하게 하였다.


중들을 내전에 모아 《금강경》을 읽게 하다[편집]

○集僧徒於內殿, 披讀《金經》。

승도(僧徒)를 내전(內殿)에 모아서 《금경(金經)》을 읽게 하였다.


11月 10日[편집]

고려 태조의 제향 전지와 공양군 비의 전지에서는 수조하지 말게 하다[편집]

○戊午/上命都堂曰: “前朝太祖祭享之田, 恭讓君妃盧氏之田, 毋公收。”

임금이 도당(都堂)에 명하였다.

"전조(前朝) 태조의 제향(祭享)의 전지와 공양군(恭讓君)의 비(妃) 노씨(盧氏)의 전지에서는 공수(公收)하지 말라."


서울에 거주할 품관에게 집터를 주도록 사사에 명하다[편집]

○命都評議使司, 給居京品官家基。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하여 서울에 사는 품관(品官)에게 가기(家基)를 주게 하였다.


11月 13日[편집]

햇무리가 지고 천둥하다. 지진이 일었다[편집]

○辛酉/日暈。 雷。 地震。

햇무리를 하고, 햇무리가 지다. 천둥이 치다. 지진이 발생하다.


11月 14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 지척도 분간할 수 없이 안개가 끼다[편집]

○壬戌/木稼。 自朝至暮, 咫尺不分人物。

상고대[木稼]하였다.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지척(咫尺)의 인물도 분별할 수 없었다.


일본 육주목 의홍이 중 영범·영확 편에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日本國六州牧義弘, 遣僧永範、永廓, 來獻土物。

일본국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중 영범(永範)·영확(永廓)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1月 15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癸亥/木稼。

목가(木稼)가 생겼다.


흥천사에 거둥했다가 지천사로 가다[편집]

○幸興天寺, 遂如支天寺。

흥천사(興天寺)에 거둥하고, 드디어 지천사(支天寺)로 갔다.


성절사 예조 전서 정윤보가 돌아오다[편집]

○賀聖節日使禮曹典書鄭允輔回自京師。

성절일(聖節日)을 하례하는 사신 예조 전서(禮曹典書) 정윤보(鄭允輔)가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다.


11月 16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甲子/霧。

안개가 끼었다.


11月 18日[편집]

이슬비가 내리다[편집]

○丙寅/小雨。

이슬비가 내렸다.


11月 19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丁卯/霧。

안개가 끼었다.


솔개가 남문 대들보에 들어왔다가 이틀 만에 죽다[편집]

○鳶入南門樑上, 二日乃死。

솔개[鳶]가 남문(南門)의 대들보 위에 들어와 이틀 만에 죽었다.


전 유후 성석린에게 길복을 입게 하다[편집]

○命前留後成石璘, 釋衰絰從吉。

전 유후(留後) 성석린(成石璘)에게 명하여 최질(衰絰)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게 하였다.


11月 23日[편집]

가랑비가 조금 내리다[편집]

○辛未/微雨。

가랑비가 조금 내렸다.


11月 24日[편집]

큰비가 내리다[편집]

○壬申/大雨。

큰 비가 내렸다.


11月 27日[편집]

큰비가 내리다[편집]

○乙亥/大雨。

큰 비가 내렸다.


11月 29日[편집]

선공감 정난의 기복 문제 때문에 장무 습유 황희에게 일을 보지 말게 하다[편집]

○丁丑/諫官不署繕工監鄭蘭起復依貼, 上召掌務拾遺黃喜曰: “何不署蘭起復?” 喜對曰: “蘭之職, 非要務也。” 上曰: “汝等恩於所知, 讎於所不知, 不公也。 汝勿視事。”

간관(諫官)이 선공감(繕工監) 정난(鄭蘭)의 기복(起復)하는 의첩(依貼)에 서명(署名)하지 않으니, 임금이 장무 습유(掌務拾遺) 황희(黃喜)를 불러 말하였다.

"어째서 난(蘭)의 기복(起復)에 서명하지 않는가?"

희(喜)가 대답하였다.

"난(蘭)의 직책은 중요한 임무가 아닙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아는 사람에게는 은혜롭게 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원수같이 하니 공정하지 못하다. 너는 일을 보지 말라."


11月 30日[편집]

좌산기 조서에게 명하여 장무만 제외하고 모두 정사를 보게 하다[편집]

○戊寅/命左散騎曺庶曰: “掌務外, 餘皆視事。”

좌산기(左散騎) 조서(曺庶)에게 명하였다.

"장무(掌務)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정사를 보라."


정총·김약항·노인도가 명나라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정윤보가 전하다. 정총·김약항의 졸기[편집]

○鄭摠、金若恒、盧仁度之妻, 以鄭允輔之言發喪。 上聞之曰: “帝若殺摠等, 禮部必有咨。 允輔之言, 未可信, 令禁之。” 摠字曼碩, 淸州人, 文簡公公權之子。 僞朝丙辰, 洪仲瑄知貢擧改擧法, 以詩賦設科, 摠登第一人。 年十九, 拜春秋檢閱, 歷臺諫應敎, 至大護軍。 己巳, 恭讓君立, 陞兵曹判書, 一時表箋, 多出其手。 自上潛邸, 歸心日久, 上卽位, 錄功爲一等, 授僉書中樞院事、西原君。 甲戌, 遷政堂文學, 改藝文春秋館太學士, 與鄭道傳同修《高麗國史》。 乙亥, 以請誥命赴京, 帝方怒國朝進表有回避字樣, 謂摠撰表拘留, 遣人取家小, 帝怒其非眞, 皆還之, 又遣使取鄭道傳。 道傳病, 權近請曰: “撰表之事, 臣實與焉。 臣今不逮而往, 容或見原, 逮而不往者, 亦且免疑, 臣若後日見逮而往, 臣罪反重。” 上遣之。 帝見近怒稍解, 命近及摠等, 日赴文淵閣, 聽諸儒講論。 將遣還, 俱賜衣, 令遊觀三日, 命題賦詩。 及陛辭, 近服賜衣, 摠以顯妃喪服素衣, 帝怒曰: “汝何心不服賜衣, 乃著素服?” 獨遣近還, 命錦衣衛鞫摠等。 摠惶懼逃遁, 被執而刑, 金若恒、盧仁度以摠故幷及。 上聞之悼甚, 諡文愍。 子二, 孝文、孝忠。

若恒字久卿, 光州人, 光城君鼎之子。 前朝辛亥登第, 歲癸丑, 拜典校注簿, 累遷至禮儀摠郞, 壬申, 陞司憲執義。 上卽位, 授右諫議大夫, 乙亥, 加成均大司成。 丙子, 朝廷以我表箋字樣違誤, 勑遣撰文者發來, 乃拜若恒中樞院學士赴京, 以鄭摠故及。 歲庚辰, 吉昌君權近上言: “若恒秉心剛直, 死於國事, 宜加追贈。” 我殿下命有司, 贈議政府贊成事、光山君, 階輔國崇政。 子二, 處、虛。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의 처가 정윤보(鄭允輔)의 말을 듣고 발상(發喪)하니, 임금이 듣고 말하기를,

"황제가 만일 총(摠) 등을 죽였으면 예부(禮部)에서 반드시 자문(咨文)이 있을 것이다. 윤보(允輔)의 말을 믿을 수 없다."

하고, 금하게 하였다.

총(摠)의 자(字)는 만석(曼碩)이요, 청주(淸州) 사람인데 문간공(文簡公) 정공권(鄭公權)의 아들이다. 위조(僞朝)의 병진년에 홍중선(洪仲瑄)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법을 고치어 시(詩)와 부(賦)로 과거를 보였는데, 총(摠)이 제일인(第一人)에 올랐다. 나이 19세에 춘추 검열(春秋檢閱)을 제수 받고, 대간(臺諫)·응교(應敎)를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고, 기사년에 공양군(恭讓君)이 서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승진하였는데, 한때의 표문(表文)·전문(箋文)은 많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임금의 잠저(潛邸) 때부터 마음을 돌린 지 오래였는데, 임금이 즉위하매 녹공(錄功)하여 1등을 삼아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서원군(西原君)을 제수하였다. 갑술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옮기어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로 고치고,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함께 편수하였다. 을해년에 고명(誥命)을 청하는 일로 명나라 서울에 갔었는데, 황제가 우리 나라 조정에서 표문(表文) 낸 것이 회피하는 자양(字樣)이 있음에 바야흐로 노하여, 총(摠)더러 표문(表文)을 지었다 하여 구류하고 사람을 보내어 처자를 데려갔는데, 황제가 진실이 아니라고 노하여 모두 돌려보내고, 또 사신을 보내어 정도전(鄭道傳)을 잡아가려 하였다. 도전(道傳)이 병이 들매, 권근(權近)이 청하기를,

"표문을 지은 일에는 실상 신도 참예하였사온데, 신은 지금 잡혀 가는 것이 아니므로 용서받을 수 있고, 잡혀 가지 않는 자들도 또한 의심을 면할 수 있겠지만, 신이 만일 후일에 잡혀 가게 되면 신의 죄는 도리어 중하여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보내었다. 황제가 권근을 보고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근(近)과 총(摠)에게 날마다 문연각(文淵閣)에 나가 여러 선비의 강론을 듣기를 명하고, 장차 돌려보내려 하여 함께 옷을 주고 사흘 동안 돌아다니며 구경하게 하고, 제목(題目)을 주어 시(詩)를 짓게 하였다. 뜰 아래에서 하직할 때를 당하여 근(近)은 내려 준 옷을 입었는데, 총(摠)은 현비(顯妃)의 상사로 흰옷을 입었었다. 황제가 노하여 말하였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내려 준 옷을 입지 않고 흰옷을 입었는가?"

근(近)만 돌려보내고 금의위(錦衣衛)에 명하여 총(摠) 등을 국문하게 하였다. 총은 두려워하여 도망하다가 잡히게 되니 형(刑)을 당했고, 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는 총(摠) 때문에 아울러 형을 당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심히 슬퍼하여 시호를 문민(文愍)이라 하였다. 아들은 둘인데 정효문(鄭孝文)·정효충(鄭孝忠)이다.

김약항(金若恒)의 자(字)는 구경(久卿)이요, 광주(光州) 사람인데 광성군(光城君) 김정(金鼎)의 아들이다. 전조(前朝) 신해년에 과거에 올라 계축년에 전교 주부(典校注簿)가 되고, 여러 번 옮겨 예의 총랑(禮儀摠郞)에 이르렀다. 임신년에 사헌 집의(司憲執義)에 승진하였는데, 임금이 즉위하매 우간의 대부(右諫議大夫)를 제수하고, 을해년에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을 가하였다. 병자년에 명나라 조정에서 우리의 표문(表文)·전문(箋文)의 글자 모양이 틀렸다 하여 글을 지은 자를 보내라고 칙유(勅諭)하였다. 이에 약항(若恒)으로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를 제수하여 명나라 서울에 가게 했는데, 정총(鄭摠) 때문에 화를 당하였다. 경진년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상언(上言)하기를,

"약항(若恒)의 마음가짐은 강직한데다 국사를 위해 죽었으니, 마땅히 추증(追贈)을 가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유사에 명하여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광산군(光山君)에 보국 숭록(輔國崇祿)의 위계(位階)를 증직하였다. 아들이 둘 있으니 김처(金處)와 김허(金虛)이다.


六年 十二月[편집]

12月 1日[편집]

밤에 비가 내리다[편집]

○己卯朔/夜, 雨。

밤에 비가 내렸다.


성명을 바꾸고 경외에 출입하던 고려 왕씨의 서얼 셋을 목 베다[편집]

○前朝王氏庶孽伯顔、延金、金萬等三人, 變姓名出入京外, 命臺諫刑曹鞫問誅之。

전조(前朝) 왕씨(王氏)의 서얼(庶孽) 백안(伯顔)·연금(延金)·금만(金萬) 등 세 사람이 성명을 달리 바꾸고서 경중과 외방에 출입하니, 대간(臺諫)·형조(刑曹)에 명하여 국문하여 목 베었다.


12月 2日[편집]

큰비가 내리다[편집]

○庚辰/大雨。

큰비가 내렸다.


12月 3日[편집]

밤에 동서방에 붉은 기운이 끼다[편집]

○辛巳/夜, 東西方有赤氣。

밤에 동서방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강릉도 쌀을 오대산과 금강산 여러 절에 보시하게 하다[편집]

○上命以江陵道米六百石, 施于臺山、金剛山諸蘭若。

임금이 명하여 강릉도(江陵道) 쌀 6백 석을 대산(臺山)·금강산(金剛山)의 여러 절에 시사(施舍)하게 하였다.


봉화백 정도전이 전에 천거한 효자 순손 등을 서용하기를 청하다[편집]

○奉化伯鄭道傳言於上曰: “屢下敎旨, 各擧孝子順孫公廉之士以聞, 而不卽敍用, 難以勸後。 願於京外敍用。”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임금께 상언(上言)하였다.

"여러 번 교지(敎旨)를 내려 각각 효자(孝子)·순손(順孫)과 공정 청렴한 선비를 천거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곧 서용하지 않으시니 뒤에 오는 사람을 권하기 어렵습니다. 원하옵건대, 경외(京外)에 서용하옵소서"


12月 4日[편집]

밤에 우레가 치다[편집]

○壬午/夜, 雷。

밤에 우레가 쳤다.


외방 품관을 돌려보내도록 도당에 명하다[편집]

○命都堂放還外方品官。

도당(都堂)에 명하여 외방 품관(品官)을 놓아 돌려보냈다.


12月 5日[편집]

겨울다운 날씨가 비로소 시작되다[편집]

○癸未/始有冬令。

비로소 동령(冬令)이 있었다.


12月 8日[편집]

형조에서 왕씨의 서얼인 약사노를 교살하다[편집]

○丙戌/刑曹絞藥師奴。 王氏之孼也。

형조에서 약사노(藥師奴)를 교살(絞殺)하였는데, 왕씨(王氏)의 서얼이었다.


12月 9日[편집]

밤에 건방에 흰 기운이 끼다[편집]

○丁亥/夜, 乾方有白氣。

밤에 건방(乾方)에서 흰 기운이 있었다.


12月 10日[편집]

유준에게 봉작하고 유관을 좌산기 상시로 삼다[편집]

○戊子/以柳濬爲特進輔國崇祿大夫、高興伯, 柳觀爲左散騎常侍。

유준(柳濬)으로 특진 보국 숭록 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고흥백(高興伯)을 삼고, 유관(柳觀)으로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를 삼았다.


노비 변정 도감에서 결절한 문적을 소각하길 청하였으나, 사사에 재검토를 명하다[편집]

○奴婢辨定都監請將已決折文籍, 隨卽燒毁, 上曰: “若決折明正則可矣, 不然, 必有冤枉。 使司更考決折是非, 又擇可燒毁文籍以聞。”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定都監)에서 이미 결절(決折)한 문적은 즉시 불에 태워 없앨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만일 결절(決折)한 것이 명백하고 공정하면 가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을 것이니, 사사(使司)에서 결절의 옳고 그른 것을 다시 상고하되, 또 소각하여 버릴 만한 문적을 가리어 아뢰라."


12月 13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辛卯/霧。

안개가 끼었다.


12月 15日[편집]

목성이 여귀에 들어가다[편집]

○癸巳/木星入輿鬼。

목성(木星)이 여귀(輿鬼)에 들어갔다.


양주 목장에서 강무하다[편집]

○講武于楊州牧場。

양주 목장(楊州牧場)에서 강무(講武)하였다.


고려 시중 유탁을 충정공으로 추시(追諡)하다[편집]

○追諡前朝侍中柳濯忠靖公。

전조(前朝) 시중(侍中) 유탁(柳濯)을 충정공(忠靖公)이라 추시(追諡)하였다.


용산강에 거둥하여 병선을 보다[편집]

○幸龍山江, 觀兵船。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여 병선(兵船)을 보았다.


12月 16日[편집]

조준·김사형·김사행에게 겸직 등을 제수하다[편집]

○甲午/以趙浚兼判義興三軍府事, 金士衡兼判司憲府事, 金師幸爲輸忠輔理功臣、判敬興府事、同判都評議使司事。

조준(趙浚)으로 겸 판의흥삼군부사(兼判義興三軍府事)를, 김사형(金士衡)으로 겸 판사헌부사(兼判司憲府事)를, 김사행(金師幸)으로 수충 보리 공신(輸忠輔理功臣) 판경흥부사(判敬興府事)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를 삼았다.


12月 17日[편집]

최영지를 서북면 도안무찰리사로 삼다[편집]

○乙未/以門下侍郞贊成事崔永沚, 爲西北面都安撫察理使。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최영지(崔永沚)로 서북면 도안무찰리사를 삼았다.


12月 18日[편집]

표·전의 계본을 잘못 쓴 사람을 빨리 보내고 조공은 3년마다 할 것을 통보한 중국 예부의 글[편집]

○丙申/千秋使柳灝、打角夫崔浩齎禮部尙書鄭沂書以來。 其書曰:

前者爲本國進賀表箋文內, 用字譏侮, 以此凡遇朝貢, 不許再用表箋。 今次將來啓本內用字, 又不停當, 此皆是所用秀才設機用意, 故將字樣聲響相似者, 輳成語句譏侮, 自生釁端。 豈朝鮮久長之道! 差來使臣, 且不放回, 止令打角夫一人還國, 以報王知。 將撰寫啓本人員, 發來回話, 方令使臣回國。 今後朝貢, 每三年來一次, 亦不必用奏啓本, 王當審之。

천추사(千秋使) 유호(柳灝)의 타각부(打角夫) 최호(崔浩)가 예부 상서(禮部尙書) 정기(鄭沂)의 글을 싸 가지고 왔다. 그 글에 이러하였다.

"전자에 본국에 진하(進賀)한 표·전문(表箋文) 안의 글자 쓴 것이 기롱하고 모독하였기 때문에, 무릇 조공(朝貢) 때를 당하더라도 다시 표·전(表箋)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가지고 온 계본(啓本) 안에 글자 쓴 것도 정당(停當)하지 않으니, 이것은 모두 등용된 수재(秀才)가 기교(機巧)를 가지고 의사를 써서 고의로 자양(字樣)과 성향(聲響)의 서로 비슷한 것을 가져다가 한데 모아 어귀(語句)를 만들어 기롱하고 만모(謾侮)하여 스스로 흔단을 만든 것이니, 어찌 조선의 장구한 도리이겠는가? 보내 온 사신은 또한 놓아 돌려보내지 않고 다만 타각부(打角夫) 한 사람만 환국하게 하여 왕에게 회보하여 알게 하는 것이니, 계본을 짓고 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회답하게 하면 사신을 환국하게 할 것이다. 금후로는 조공을 3년마다 한 번씩 보내고, 또한 주본(奏本)·계본(啓本)을 반드시 쓸 것 없으니, 왕은 마땅히 살피라."


12月 19日[편집]

정도전이 의원 오경우·김연지 등을 용서하길 청하다[편집]

○丁酉/奉化伯鄭道傳請曰: “京中醫者不多, 乞宥吳慶祐、金之衍等。” 上允之。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청하였다.

"서울 안에 의원이 많지 않으오니, 오경우(吳慶祐)·김지연(金之衍) 등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12月 20日[편집]

비와 우박이 내리다[편집]

○戊戌/雨雹。

비와 우박이 내렸다.


햇무리 지다. 건방에 붉은 기운이 끼다[편집]

○日珥。 乾方有赤氣。

해에 귀고리하고, 건방(乾方)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12月 22日[편집]

봉화백 정도전을 동북면 도선무찰리사로 삼는 교서[편집]

○庚子/以奉化伯鄭道傳, 爲東北面都宣撫巡察使。 敎曰:

予以否德, 承祖宗積累之德, 奄有東方, 六年于玆, 報本之誠, 實切于衷。 是用稽諸古典, 追王四代, 首建寢廟, 塋域之封, 悉皆除治, 享祀以時。 唯德陵、安陵, 邈在孔州, 道里遼遠, 奉祀之誠, 有所未盡。 每思修治, 以時享祀, 因循至今, 良用歉然。 卿學通古今, 才兼文武, 一代典章, 由卿制作。 今命卿爲東北面都宣撫巡察使, 卿其往也, 凡所以奉安園陵者, 悉從盛典, 擧行無遺。 繕完城堡, 以安居民, 量置站戶, 以便往來。 區畫州郡之境, 以杜紛爭; 整齊軍民之號, 以定等級。 自端州盡孔州之境, 皆隷察理使治內, 其戶口額數, 軍官材品, 具悉以聞。 所有便民條畫, 從宜擧行。 於戲! 奉先思孝, 人子之誠; 守命惟勤, 人臣之職。 往哉惟敬!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으로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를 삼고,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내가 부덕(不德)한 몸으로 조종(祖宗)께서 쌓으신 덕을 이어받아 동방(東方)을 차지한 지가 6년이 되었다. 그 근본을 잊지 않고 보답하려는 정성이 실로 마음에 간절하므로, 이에 고전(古典)을 상고하여 사대(四代)를 왕으로 추숭하고 첫머리로 침묘(寢廟)[28]를 세우고 영역(瑩域)의 봉한 것을 모두 깨끗이 다스리고 사시(四時)로 제사[享祀]지냈으나, 오직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멀리 공주(孔州)에 있어 길[道里]이 멀어서 제사를 받드는 정성을 다하지 못하였다. 매양 닦고 다스려서 향사를 사시(四時)로 지내기를 생각하였으나, 우물쭈물하며 지금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만족하지 못하였었다.

경은 학문이 고금을 통하고 재주는 문무를 겸하여 일대(一代)의 전장(典章)이 경으로 말미암아 제작되었으므로, 이제 경을 명하여 동북면 도선무순찰사를 삼으니 경은 갈지어다. 무릇 원능(園陵)을 봉안하는 것은 모두 성전(盛典)을 따라서 빠뜨림이 없이 거행하고, 성보(城堡)를 수축하여 거민을 편안하게 하되, 적당히 참호(站戶)를 두어 왕래를 편하게 하며, 주군(州郡)의 경계를 구획(區畫)하여 분쟁을 막고, 군민(軍民)의 호(號)를 정제하여 등급을 정하고, 단주(端州)로 부터 공주(孔州)의 경계가 다하도록 모두 찰리사(察理使)의 통치 안에 예속시키고, 그 호구의 액수와 군관(軍官)의 재품(材品)을 자세히 갖추어 아뢰되, 가지고 있는 백성을 편하게 할 조건을 편의에 따라 거행하라. 아아! 조상을 받들어 효도하기를 생각하는 것은 자식의 정성이요, 명을 지키어 오직 부지런히 하는 것은 신하의 직분이니 가서 공경할지어다."

하였다.


12月 24日[편집]

이지란을 도병마사로 삼아 동북면 도선무찰리사 정도전의 부행으로 삼다[편집]

○壬寅/以參贊門下府事李之蘭, 爲都兵馬使, 爲其副行。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으로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삼아서 부행(副行)을 삼았다.


권근이 원종 공신에 참여되기를 빈 상서문. 설장수와 함께 공신에 추록되다[편집]

○花山君權近上書曰:

臣本庸愚, 惟以文句末識, 得蒙殿下覆育之恩, 爲日久矣。 在前朝時, 狂妄觸法, 罪在不測, 幸賴聖慈, 曲加哀矜, 獲保性命。 臣於當時, 自謂從今至死之年, 皆是殿下之賜, 誓心告天, 粉糜圖報。 及値殿下受命龍飛之日, 大度匿瑕, 召還于朝, 擢置樞府, 俾參都堂, 官榮祿厚, 踰越涯分, 再造之恩, 昊天罔極。 常竊自念, 幸生聖朝開國之初, 濫荷爵命, 備員宰相, 而以無能, 未立寸功, 故不得與原從功臣數百餘人之列。 揆分則宜, 於心獨愧。 又竊自念, 聖君賢相功德之盛, 格于天地, 光于四海, 然必托於文臣之詞, 而後可以傳於後世。 今我殿下, 神功聖德, 度越前古, 文臣林立, 發揚讃頌, 洋洋盈耳。 雖典謨之所記、雅頌之所歌, 亦無愧矣。 尙且不鄙臣之淺陋, 命撰文詞, 臣乃盡心殫力, 敢效薄技, 以鋪張聖朝功德之懿。 是則臣於景運方興之際, 雖不得展絲毫之效, 其於傳播後世之事, 亦不可謂無所小補。 雖或得與原從之功數百餘人之下, 未必不可。 久蘊此懷, 瞻望天日, 然以自進自媒, 士女之醜行, 故不敢宣, 欲言復默, 有年于玆。 又竊自念, 臣之事君, 猶子事父, 子有所欲, 必言於父而無隱, 情親之至也。 今遇殿下覆育之慈, 如天廣大, 鴻纖之類, 靡不遂生, 幽遠之情, 靡不畢達。 愚臣安敢心有所懷, 嫌於自媒而不宣露, 徒抱怏鬱, 以自疏外於恢廓仁明之大度哉! 於是, 忘其自媒之醜, 敢陳臣所撰進之詞有關大體者一二于後, 伏惟聖慈垂察焉。 東北面, 王業所基根本之地也。 上國欲於鐵嶺立衛之時, 臣撰表文, 欽奉回咨曰: “鐵嶺之故, 王國有辭。” 由是國家更無東北之憂, 爲我臣僕, 以翊興運。 事雖在於前朝, 利實關於今日者也。 皇考桓王定陵之碑, 臣與鄭摠同奉敎撰; 開國功臣敎書之文, 悉皆臣所修改; 郊社宗廟之樂章, 定都營宮之文簿, 亦皆臣所撰選。 雖其文辭鄙俚, 然於開國之初, 事功之美, 足以傳於後世者也。 去年之冬, 留滯上國, 賀正使門下評理臣安翊、同知密直臣金希善等至, 敬承中宮訃音。 臣與鄭摠、金若恒、盧仁度等告翰林院, 以達帝聰, 故於臣等回還之日, 欽齎勑慰聖旨以來, 此乃古今絶無之盛典也。 臣與翰林官等, 每稱殿下事大之誠, 戊辰回軍之功, 故於宣諭, 丁寧以褒美之, 此亦我國臣民罔不懽忻之美事也。 丙子賀正之表, 臣獨修改, 而鄭道傳未嘗同修之, 故辨明之, 臣所欽齎宣諭及咨, 皆不復言道傳赴京之事也。 臣以海外小儒, 隨班翰林院中, 日赴文淵閣上, 旣賦應制之詩, 又蒙御製之賜, 使我朝鮮聲譽之美, 播於中華, 別有光於四夷諸國, 皆由殿下事大之誠, 感動天地之使然爾, 而自於臣身而發之, 豈不爲臣之大幸哉! 是在後日, 雖謂臣爲不辱命於奉使之日, 小有補於開國之初, 亦庶幾焉。 伏望聖慈, 恕臣自媒之醜, 憐臣獨愧之情, 俾臣之名, 得以托於原從之末, 不勝幸甚。 臣近無任兢慙戰汗之至。

上令都堂擬議申聞。 以近及判三司事偰長壽, 許爲原從功臣, 給之錄券, 乃曰: “前日稱下之時, 偶不及耳。” 時偰長壽亦上書請與原從。

화산군(花山君) 권근(權近)이 상서(上書)하였다.

"신은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은데, 오직 문구(文句)의 말식(末識)으로 전하의 부육(覆育)의 은혜를 입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전조(前朝) 때에는 미치고 망령됨으로 법에 저촉되어 죄가 있게 됨을 불측(不測)하였는데, 다행히 성자(聖慈)께서 곡진하게 애긍(哀矜)을 가하심에 힘입어 성명(性命)을 보존하였습니다. 신이 그 당시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제부터는 죽는 날까지 모두 전하께서 주심이라.’ 하여, 마음으로 맹세하고 하늘에 고하여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하기를 도모하였더니, 전하께서 천명을 받아 용처럼 날으시는 날을 당하여 큰 도량으로 하자(瑕疵)를 숨기시고, 조정에 소환하시어 발탁하여 추부(樞府)에 두어 도당(都堂)에 참여하게 하시었으니, 벼슬이 영화되고 녹이 후하여 분수에 넘치오매, 재조(再造)의 은혜가 하늘과 같이 끝이 없습니다. 항상 스스로 생각하기를 다행히 성조(聖朝)의 개국하는 처음에 나서 지나치게 작명(爵命)을 받고 재상의 한 사람이 되었으나, 재능이 없어 촌공(寸功)[29]도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수백여 인의 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분수를 헤아려보면 마땅하나, 마음에는 홀로 부끄럽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건대, 성군(聖君)과 현상(賢相)이 공덕(功德)의 성함이 천지에 이르고 사해(四海)에 빛나더라도 반드시 문신(文臣)의 말에 의탁한 뒤에라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의 신통한 공과 성스러운 덕이 전고(前古)에 탁월하와 문신이 숲처럼 들어서서 발양(發揚)하고, 찬송(讚頌)하여 양양(洋洋)하게 귀에 가득하니, 비록 전(典)·모(謨)의 기록한 것과 아(雅)·송(頌)의 노래한 것에 비교하더라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신(臣)과 같이 천박하고 고루한 자를 더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신에게 문사(文詞)를 짓는 것을 명하셨으니, 신이 이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감히 엷은 기예(技藝)를 바치어 성조(聖朝)의 공덕의 아름다움을 포장(鋪張)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의 큰 운수가 바야흐로 일어나는 즈음에 당하여, 비록 털끝만한 공효는 펴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세에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는 또한 작은 도움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비록 혹 원종 공신(原從功臣) 수백여 인 아래에 참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불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래 이 회포를 가지고 천일(天日)을 바라보았으나, 스스로 나오고 중매하는 것은 선비와 여자의 추한 행실이므로 감히 표현하지 못하고 말을 하려다가 다시 침묵한 것이 몇 해가 되었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건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자식이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비에게 말하여 숨김이 없는 것이 정(情)과 친(親)의 지극한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부육(覆育)의 인자하심이 하늘같이 광대하심을 만나서, 크고 작은 종류가 생(生)을 이루지 않음이 없고, 궁벽하고 먼 정이 다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리석은 신이 어찌 감히 마음에 소회가 있어도 스스로 중매하는 것을 혐의하여 표현하여 드러내지 않고 한갓 앙앙(怏怏)하고 울읍(鬱悒)함을 안고서 스스로 회확(恢廓)·인명(仁命)한 큰 도량에 소외(疎外)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스스로 중매하는 추함을 잊고 감히 신이 찬진(撰進)한 글 중에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것 한두 가지를 뒤에 진달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 살피시옵소서.

동북면(東北面)은 왕업(王業)이 기초한 곳이니 근본의 땅입니다. 중국(中國)에서 철령(鐵嶺)에 위(衛)를 세우고자 하였을 때에 신이 표문을 지었는데, 회자(回咨)를 흠봉(欽奉)하매 말하기를, ‘철령의 연고로 왕의 나라에서 말이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가에 다시 동북(東北)의 근심이 없을 것이니, 우리의 신복(臣僕)이 되어 일어나는 운수를 도우라’ 하였으니, 일은 비록 전조(前朝) 때에 있었으나, 이익은 실상 오늘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황고(皇考) 환왕(桓王) 정릉(定陵)의 비(碑)는 신과 정총(鄭摠)이 함께 하교(下敎)를 받들어 지은 것이옵고, 개국 공신(開國功臣) 교서(敎書)의 글도 모두 다 신이 닦아서 고친 것이오며, 교사(郊社)·종묘(宗廟)의 악장(樂章)과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경영하는 문부(文簿)도 모두 신이 짓고 뽑은 것이오니, 비록 그 글이 저속하고 상스럽기는 하나, 개국하는 처음에 사공(事功)의 아름다운 것은 족히 후세에 전할 것입니다.

지난해 겨울 중국에 머물러 있었을 때, 하정사(賀正使) 문하 평리(門下評理) 신(臣) 안익(安翊)과 동지밀직(同知密直) 신 김희선(金希善) 등이 와서 중궁(中宮)의 부음(訃音)을 공경하여 받들고, 신이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 등과 같이 한림원(翰林院)에 고하여 황제에게 통달하였기 때문에, 신 등이 회환하는 날, 칙위(勅慰)하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가지고 올 수 있었으니, 이것은 고금으로 한 번도 없었던 성전(盛典)이었습니다. 신이 한림관(翰林官)과 같이 매양 전하의 사대하는 정성과 무진년의 회군(回軍)한 공을 칭송하였기 때문에, 선유(宣諭)에 정녕(丁寧)하게 포미(褒美)하였으니, 이것도 우리 나라 신민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는 아름다운 일이옵고, 병자년의 하정(賀正) 표문은 신이 홀로 닦아 고쳤고, 정도전(鄭道傳)은 일찍이 함께 닦지 않은 것으로 변명하였기 때문에, 신이 싸 가지고 온 선유(宣諭)와 자문(咨文)에 모두 다시는 정도전이 경사(京師)에 온 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바다 밖의 작은 선비로 한림원(翰林院)의 반열을 따라 날마다 문연각(文淵閣) 위에 다달아 이미 응제(應制)하는 시(詩)를 지었고, 또 어제(御製)의 하사하심을 입어 우리 조선(朝鮮)의 성예(聲譽)를 아름다움으로 중화(中華)에 파전(播傳)하고, 특히 사이(四夷) 여러 나라에 영광이 있었으니, 모두 전하의 사대하는 정성이 천지를 감동함으로 말미암아 그리 된 것이오나, 신의 몸으로부터 발단시켰으니 어찌 신의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훗날 신더러 ‘봉사(奉使)하는 날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개국한 처음에도 조금은 보익함이 있었다.’고 이르더라도 될 만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이 스스로 중매하는 추함을 용서하옵시고, 신의 홀로 부끄러워하는 정상을 불쌍히 여기시어, 신의 이름을 원종(原從)의 끝에 부탁하게 하시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 근(近)은 황송하고 부끄럽고 떨리고 땀나는 지극함을 견딜 수 없사옵니다."

임금이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여, 근(近)과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을 허여하고, 녹권(錄券)을 주면서 말하였다.

"전날에 하등 공신을 칭할 때에 우연히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때에 설장수 또한 글을 올려 원종(原從)에 참여하기를 청하였었다.


12月 25日[편집]

유성이 정성 동쪽에서 나와 오차 서남쪽으로 들어가다[편집]

○癸卯/夜, 流星出井東, 入五車西南隅。

밤에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동쪽에서 나와 오차(五車) 서남 모퉁이로 들어갔다.


양부 정2품 이상에게 현량 5인씩을 천거하게 하다[편집]

○命兩府已上, 各擧賢良五人。

양부(兩府) 이상은 현량(賢良) 5인씩 천거하라고 명하였다.


일본 육주목의 사자가 돌아가니 박돈지를 회례사로 보내며 도당에서 회답하는 글[편집]

○日本國六州牧義弘使者永範、永廓還, 上以前秘書監朴惇之爲回禮使遣之。 都堂復義弘書, 略曰:

所諭大相國禁賊之事, 誠交隣繼好之美意也。 然一歧、對馬兩島之民, 恣行狡猾, 不遵禁令, 侵擾我疆, 以梗兩國和好之意, 亦且遠犯中國之境, 天下皆謂之島賊。 故我水軍將士, 靡不憤惋, 再三申請, 大備戰艦, 將欲往問厥罪, 掃淸海島, 永絶亂源。 聖上欲以文德綏遠, 而貴國亦遣使來聘, 諭以禁賊, 故姑寢其事。 閣下益以講和息民之義, 謀議於大相國, 禁制兇徒, 以篤隣好, 則休聲義槪, 聞於天下, 兩國和好之美, 垂於永世矣。

일본국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의 사자 영범(永範)·영확(永廓)이 돌아가니, 임금이 전 비서감(祕書監) 박돈지(朴惇之)를 회례사(回禮使)로 삼아 보냈다. 도당(都堂)에서 의홍(義弘)에게 회답하는 글의 대강은 이러하였다.

"편지에 말한 대상국(大相國)의 도적을 금하는 일은 참으로 이웃을 사귀고 화호(和好)를 계속하는 아름다운 뜻이나, 그러나 일기(一岐)·대마(對馬) 두 섬의 백성들이 교활한 짓을 자행하여 금령을 준수하지 않고 우리 지경을 침노하고 흔들어서 양국의 화호하는 뜻을 저해하고, 또 멀리 중국의 지경을 범하여 천하에서 모두 섬 도적이라고 하오. 그러므로 우리 수군 장사가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두세 번 신청하여 크게 전함을 준비하여 장차 가서 그 죄를 물어서 바다 섬을 깨끗이 쓸어버려 영구히 화의 근원을 끊어 없애고자 하나, 성상께서 문덕(文德)으로 먼 사람을 편안하게 하시고, 귀국에서 또한 사자(使者)를 보내어 내빙(來聘)하여 도적을 금하는 것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아직 그 일을 정지하는 것이니, 각하(閣下)는 더욱 화호를 강구하고 백성을 쉬는 뜻으로 대상국(大相國)에게 꾀하고 의논하여, 흉한 무리를 금하여 제재하여 이웃나라의 화호를 두텁게 하면, 아름다운 명예와 의로운 기개가 천하에 들릴 것이고, 두 나라 화호의 아름다운 것이 무궁하게 내려갈 것이오."


12月 26日[편집]

녹을 잘 나누어주지 못한 광흥창 관원 윤회 등을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甲辰/囚廣興倉官尹晦、李伯恭及監察崔伊于巡軍獄。 以頒祿時女官不及受也。 尋徵晦等祿, 以充典廐署之用。

광흥창(廣興倉) 관원 윤회(尹晦)·이백공(李伯恭)과 감찰 최이(崔伊)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으니, 녹(祿)을 나누어 줄 때에 여관(女官)이 미처 받지 못한 때문이었다. 곧 회(晦) 등의 녹을 징수하여 전구서(典廐署)의 용도에 충당하였다.


무진년(1388년) 이후에 시행된 규정을 모아 《경제육전》을 간행하다[편집]

○都堂令檢詳條例司, 冊寫戊辰以後合行條例, 目曰《經濟六典》, 啓聞于上, 刊行中外。

도당(都堂)에서 검상 조례사(檢詳條例司)로 하여금 무진년 이후에 합당히 행한 조례를 책으로 쓰게 하여 제목을 《경제육전(經濟六典)》이라 하여 임금께 아뢰고, 중외(中外)에 간행하였다.


12月 28日[편집]

표·전문의 계본을 쓴 예조 전서 조서를 보내며 중국 예부 상서에게 회답한 글[편집]

○丙午/上以崔浩齎來書, 遣通事郭海龍, 管送寫啓本人禮曹典書曺庶赴京, 仍復書于禮部尙書鄭沂曰:

打角夫崔浩回自京師奉承書諭, 讀之再三, 驚惶無措。 自洪武二十五年管國以來, 凡遇千秋節, 只依舊時字樣, 欽蒙聖恩, 保守小國, 敬上之心, 不敢小怠。 先此, 爲因秀才, 做表箋差了, 到如今常常惶恐憂慮, 何嘗一日暫忘于懷! 今啓本又差字樣, 此乃一是某愚拙, 二是小邦人言語字音, 與中國不同, 又不知朝廷文字體式及回避字樣, 致此差謬。 下情慙懼, 何可勝言! 謹差通事郭海龍, 管送寫啓本人曺庶赴京。 復恐後來文書又致差誤, 伏乞矜照聞奏, 將應合回避字樣, 頒與小邦, 俾永遵守。 幷諭三年一次朝貢, 竊念小邦, 去中國不遠, 若比他海外藩邦, 三年一次朝貢, 在臣子之心, 不敢自安。 更乞矜察幷聞, 許令依舊賀正聖節千秋, 一年三次朝貢, 幸甚。

임금이 최호(崔浩)가 싸 가지고 온 글에 의하여 통사(通事) 곽해룡(郭海龍)을 보내어 계본(啓本)을 쓴 사람 예조 전서(禮曹典書) 조서(曺庶)를 관송(管送)하여 경사(京師)에 이르게 하고, 인하여 예부 상서(禮部尙書) 정기(鄭沂)에게 회답하였다.

"타각부(打角夫) 최호(崔浩)가 경사에서 돌아오는 편에 유서(諭書)를 받들어 받아 두세 번 읽었으니 놀랍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홍무(洪武) 25년부터 나라를 관장(管掌)한 이래, 무릇 천추절(千秋節)을 만나면 다만 예전의 자양(字樣)에 의하였는데, 성은(聖恩)을 입어 작은 나라를 보전하여 지켰으니, 위를 공경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겠습니까? 저번에 수재(秀才)가 표전(表箋)을 지은 것의 차오(差誤)로 인하여 지금까지 항상 황공하고 근심하옵는데, 어찌 하루라도 생각에 잊었겠습니까마는, 이번의 계본도 자양(字樣)이 차오되었으니, 이것이 첫째는 내가 어리석고 졸한 까닭이요, 둘째는 소방(小邦) 사람의 언어(言語)·자음(字音)이 중국과 같지 않고, 또 조정 문자(文字)의 체식(體式)과 회피하는 자양을 알지 못하여 이런 차오를 가져온 것이니, 하정(下情)에 부끄럽고 두려운 것을 어찌 이루 말하겠습니까? 삼가 통사 곽해룡을 시켜 계본을 쓴 사람 조서(曺庶)를 관송하여 경사(京師)에 가게 하오나, 다시 후래의 문서가 또 차오를 이룰까 두려우니, 엎드려 바라건대, 불쌍히 생각하여 주문(奏聞)하여 응당 회피하여야 할 자양을 소방(小邦)에 나누어 주시어 영구히 준수하게 하소서. 또 3년에 한 차례씩 조공하라고 유시하셨으나,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중국으로 가기에 멀지 않으니, 만일 다른 해외 번방(藩邦)에 비교하여 3년에 한 번 조공한다면 신자(臣子) 된 마음에 스스로 편안할 수 없으니, 다시 바라옵건대, 긍찰(矜察)하여 아울러 아뢰어 전과 같이 하정(賀正)·성절(聖節)·천추(千秋) 때마다 조공하도록 허락하여 주시면 대단히 다행하겠습니다."


12月 29日[편집]

밤에 동서로 흰 기운이 하늘까지 뻗치다[편집]

○丁未/夜, 東西有白氣竟天。

밤에 동서(東西)에 흰 기운이 있어 하늘에 뻗치었다.


종묘 납향제 헌관이면서 삼사의 서약 의식에 지각한 설장수 등을 파면시키다[편집]

○判三司事偰長壽、三司右僕射李恬、戶曹典書李承源罷。 以宗廟臘享祭獻官不及與三司誓也。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李恬)·호조 전서(戶曹典書) 이승원(李承源)이 파면되었는데, 종묘 납향제(宗廟臘享祭) 헌관(獻官)으로 미처 삼사(三司)로 더불어 맹세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얼음이 얼지 않았다[편집]

○無氷。

얼음이 없었다.


일본 관서도 구주의 탐제 원도진이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구하다[편집]

○是月, 日本關西道九州探題源道鎭, 使人獻禮物, 求《大藏》。

이달에 일본 관서도(關西道) 구주(九州)의 탐제(探題)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시켜 예물을 드리고 《대장경(大藏經)》을 구하였다.


주석[편집]

  1. 상복
  2. 의정부
  3. 외가
  4. 매장에 소용되는 비용
  5.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들어가 머문다는 곳
  6. 요(遼)에 정벌한 것이란 고려 때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였으나 강감찬(姜邯贊) 장군에게 패한 사실을 말하는 것임.
  7. 천자의 의장(儀仗)
  8. 학야(鶴野)란 요동 평야를 가리켜 말한 것임
  9.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서쪽으로 갈 때에 승선교(昇仙橋)를 지나다가 다리 기둥에 쓰기를 "고거사마(高車駟馬)를 타지 않으면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그렇게 하고 돌아왔다. 사마(駟馬)란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이다.
  10. 수(繻)는 비단으로 만든 부신(符信)임. 한(漢)나라 종군(終軍)이 나이 18세에 박사 자제(博士子弟)로 뽑히어 관문(關門)을 들어가는데, 관리(關吏)가 종군에게 수(繻)를 주므로, 종군이 묻기를, "이것은 무엇하는 것인가." 하니, 관리가 말하기를 "다시 역마를 타고 돌아올 때에 합부(合符)해야 된다." 하였으나 종군이 이를 버리고 갔다. 뒤에 알자(謁者)가 되어서 절(節)을 세우고 나오니, 관리가 알아보고 "이 사자(使者)가 전에 수를 버리고 간 선비라." 하였다.
  11. 한(漢)나라가 항우(項羽)를 멸(滅)하매, 전횡(田橫)이 그 무리 5백 인을 데리고 해도(海島) 속으로 들어갔다가, 한나라에서 부르니 전횡이 낙양(洛陽)으로 나오다가 30리를 남겨 놓고 자살하였으므로, 그 무리 5백 인도 전횡의 죽음을 듣고 모두 자살하였다.
  12. 발해(渤海) 가운데에 있는 삼신산(三神山)
  13. 달팽이의 왼쪽 뿔 위에 있는 나라를 만(蠻), 오른쪽 뿔 위에 있는 나라를 촉(觸)이라 하는데, 지극히 하찮은 일로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함
  14. 신라가 개국한 것이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 원년(五鳳元年)이었음.
  15. 곡령(鵠嶺)은 송악산(松嶽山)을 말함이니,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였다는 말임.
  16. 황제의 마굿간. 제주도에서 말을 길러 그 중에서 뛰어난 말을 중국에 조공하였음
  17. 함부로 뛰어들어감
  18. 사헌부의 이속(吏屬)
  19. 조선조 때 유산(遺産)을 상속할 수 있는 일정한 범위의 친족(親族). 죽은 사람이 자녀가 없을 때에는 유산은 부계(父系)에 속한 형제자매에게, 형제의 자녀가 없을 때에는 종손이나 종손녀에게, 또 이런 사람이 없을 때에는 조부(祖父)의 백숙부나 고(姑)가 상속하였다. 자손이 없을 경우에 유산은 나라에 귀속되었다.
  20. 대질(對質)
  21. 수결(手決)
  22. 삼가 하사품을 받음.
  23. 추천
  24. 사람의 생명을 말함.
  25. 진상(進上)
  26. 제사(祭祀)·빈객(賓客)·상황(喪荒)·수복(羞服)·공사(工事)·폐백(幣帛)·추말(芻秣)·비반(匪頒)·호용(好用) 등에 대한 재용(財用)의 절도(節度)
  27.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노비
  28. 종묘(宗廟)·능원(陵園)의 앞 건물을 묘(廟), 뒤의 건물을 침(寢)이라고 함. 묘에는 조상의 위패(位牌) 또는 목주(木主)를 안치하고 사시(四時)에 제사지냈으며, 침에는 의관궤장(衣冠几杖)을 비치하였음.
  29. 작은 공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