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강헌대왕실록/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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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年 春正月[편집]

1月 1日[편집]

황제의 정조를 하례하고 백관의 조하를 받다. 일본 사자 등도 연회에 참여하다[편집]

○己酉朔/上具冕服, 率群臣賀帝正, 坐勤政殿, 受百官朝賀。 諸道軍民官, 各進方物, 吾都里、吾郞哈萬戶, 亦獻方物。 禮畢, 宴群臣, 日本國使者及一岐ㆍ對馬ㆍ覇家臺使人、吾都里ㆍ吾郞哈, 同赴宴, 極歡而罷。

○기유 삭/ 임금께서 면복을 갖춰 입고 군신을 이끄신 채 중국 황제의 설날을 축하하고, 근정전에 앉아 모든 벼슬아치들의 조하를 받았다. 여러 도 군민관이 따로따로 제 고장 특산물을 바치고, 오도리의 오랑캐 만호도 특산물을 바쳤다. 예식이 끝나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일본국 사자와 잇키ㆍ쓰시마ㆍ하카타에서 보낸 심부름꾼과 오도리ㆍ오랑캐 사람이 잔치에 참가하여 매우 즐긴 뒤 끝냈다.


1月 2日[편집]

오도리족과 오랑합족에게 옷을 내려 주다[편집]

○庚戌/賜吾都里、吾郞哈衣。

○경술/ 오도리족과 오랑캐족에 옷을 내려주었다.


전라도 도관찰사 민여익이 어머니의 병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편집]

○全羅道都觀察使閔汝翼, 以母病乞免, 辭意至切, 上允之。

○전라도 도관찰사 민여익이 어머니가 아프시기에 사직하기를 바라니 임금께서 허락하셨다.


1月 4日[편집]

임금의 건강이 편치 않았다[편집]

○壬子/上不豫。

○임자/ 임금께서 편찮으셨다.


1月 5日[편집]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편집]

○癸丑/上康復。

○계축/ 임금께서 다시 건강해지셨다.


1月 6日[편집]

진관사에 수륙재를 베풀다[편집]

○甲寅/設水陸齋于津寬寺。

○갑인/ 진관사에 수륙재를 베풀었다.


세자 이방석이 구궁으로 옮기다[편집]

○世子芳碩移於舊宮。

○세자 방석이 옛 궁전으로 옮겨갔다.


1月 7日[편집]

손흥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빈 유씨를 정경 옹주로, 김씨를 화의 옹주로 삼다[편집]

○乙卯/以孫興宗爲伊川君、東北面兵馬節制使、永興尹, 張子忠爲全羅道都觀察黜陟使, 崔永沚爲西北面都巡問察理使、平壤尹, 朴葳爲參贊門下府事, 嬪柳氏封貞慶翁主, 金氏爲和義翁主。 柳氏, 濬之女。 濬諂事宮人, 以其女見於上納之, 以前密直副使, 驟封高興伯。 金氏, 金海妓七點仙也。

손흥종(孫興宗)으로 이천군(伊川君) 동북면 병마 절제사 영흥 윤(東北面兵馬節制使永興尹)을 삼고, 장자충(張子忠)으로 전라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삼고, 최영지(崔永沚)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평양 윤(西北面都巡問察理使平壤尹)을 삼고, 박위(朴葳)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삼고, 빈(嬪) 유씨(柳氏)는 정경 옹주(貞慶翁主)를 봉하고, 김씨(金氏)는 화의 옹주(和義翁主)를 삼았다. 유씨는 유준(柳濬)의 딸인데, 준(濬)이 궁인(宮人)을 아첨하여 섬기어 그 딸을 임금께 보이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이고 전 밀직 부사(密直副使)로서 갑자기 고흥백(高興伯)을 봉하였다. 김씨는 김해(金海) 기생 칠점선(七點仙)이다.


근정전에서 화엄삼매참 법석을 베풀었는데 108명의 중이 참가하고 너무 사치스러웠다[편집]

○設《華嚴三昧懺》法席于勤政殿, 命諸倉庫設供具, 侈靡太甚。 宦者金師幸所爲也。 赴會緇徒百八。

근정전(勤政殿)에 화엄삼매참 법석(華嚴三昧懺法席)을 베풀고 여러 창고(倉庫)에 명하여 공구(供具)를 베풀었는데, 사치가 너무 지나치게 심하였으니,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의 한 짓이다. 회(會)에 참가한 중들이 1백 8명이었다.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최영지에게 궁온과 관교를 보내어 위로하다[편집]

○遣中樞院副使崔有慶, 奉宮醞及官敎, 宣慰西北面都巡問察理使崔永沚。 永沚不識字, 然性勤謹, 故上任之。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최유경(崔有慶)을 보내어 궁온(宮醞)과 관교(官敎)를 받들고 서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 최영지(崔永沚)를 선위(宣慰)하였다. 영지(永沚)는 글자를 알지 못하나, 성품이 부지런하고 조심성이 있기 때문에 임금이 신임하였다.


동북면 도선무찰리사 정도전에게 궁온을 내려 주다[편집]

○遣工曹典書李和尙, 賜醞于東北面都宣撫察理使鄭道傳。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화상(李和尙)을 보내어 동북면 도선무찰리사(都宣撫察理使) 정도전(鄭道傳)에게 궁온(宮醞)을 내려 주었다.


1月 9日[편집]

연복사와 안국사의 관에서 거두는 전조를 면제하다[편집]

○丁巳/許免演福、安國兩寺田租公收。

연복사(演福寺)와 안국사(安國寺) 두 절의 전조(田租)를 관(官)에서 거두는 것을 면제하도록 허락하였다.


얼음이 비로소 두껍게 얼어 저장하다[편집]

○氷始堅, 藏之。

○얼음이 이제 두껍게 얼었기에, 갈무리했다.


1月 11日[편집]

경상도의 어염 실태 조사를 수년 뒤로 미룰 것을 청하며 민정을 보고한 도관찰사의 글[편집]

○己未/慶尙道都觀察使傳報知永州事禹均陳言。 其言曰: “魚鹽, 有補於國用, 有急於民生, 不可廢也。 我國三面濱海, 魚鹽之利, 蓋已隨處取足矣。 然以倭寇侵竊, 邊鄙之民, 流移四散者, 積有年矣。 今我國家, 築城鑿池, 選將訓兵, 以嚴攻守, 以輯流亡, 故自近年, 流亡稍還, 得遂生業。 今乃分遣朝官, 沿海諸州公私魚鹽與各浦所産, 一皆考問, 備書公籍, 欲歲收其稅, 以備國用, 可謂良法矣。 然側聞海濱甫集之民, 聞是令下, 恐公家榷利爲患, 復爲流亡者, 比比有之。 予恐欲利於國, 而反無益也。 竊以爲姑待數年, 畜恒産重遷徙, 然後擧行是法, 未爲晩也。” 都堂上言以爲: “今年且依舊額收稅, 以待後年, 更考所出多寡, 酌定其稅, 以便民生。”

경상도 도관찰사(都觀察使)가 지영주사(知永州事) 우균(禹均)의 진언(陳言)을 전하여 보고 하였다.

"‘어염(魚鹽)은 국용(國用)에 도움이 있고 민생에 긴급하여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삼면(三面)이 바다에 접하여 있으니, 어염의 이익이 대개 이미 어디든지 충족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구(倭寇)의 침노와 도둑질 때문에 변방 백성들이 유이(流移)하여 사방으로 흩어진 것이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국가에서 성을 쌓고 못을 파고, 장수를 선택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공격하고 수비하는 것을 엄하게 하며,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안집(安輯)시키기 때문에, 근년부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차츰 돌아와서 생업(生業)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조관(朝官)을 연해변 여러 고을에 나누어 보내어 공사(公私)의 어염(魚鹽)과 각포(各浦)의 소산(所産)을 일일이 모두 조사하여 물어서, 갖추 공적(公籍)에 써서 해마다 세(稅)를 거두어 국용(國用)에 대비하려 하니, 좋은 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문을 듣건대, 바닷가의 겨우 모인 백성들이 이 영(令)이 내린 것을 듣고, 공가(公家)에서 이익을 독점하여 환(患)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떠돌아다니는 자가 많이 있으니, 나는 두렵건대, 나라에 이롭게 하려다가 도리어 이익이 없을까 생각됩니다.’ 하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아직 수년(數年)을 기다려 항산(恒産)을 축적(蓄積)하여 옮기기를 중하게 여긴 연후에 이 법을 거행하여도 늦지 않을까 합니다."

도당(都堂)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금년에는 아직 예전 액수에 의하여 세(稅)를 거두고, 후년을 기다려 다시 소출(所出)의 많고 적은 것을 조사하여 그 세(稅)를 작정(酌定)해서 민생을 편하게 하소서."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이 비로소 노비 변정 도감에서 일을 보다[편집]

○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始視事於奴婢辨定都監。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비로소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定都監)에서 일을 보았다.


1月 13日[편집]

궁성 쌓는 역졸에게 양식을 주다[편집]

○辛酉/命給糧宮城役卒。

명하여 궁성(宮城)을 쌓는 역졸(役卒)에게 양식을 주었다.


1月 14日[편집]

호조의 쌀·콩·명주를 내어 녹봉을 나누어 주는 데 보충하다[편집]

○壬戌/出戶曹米菽四萬六千石、紬百八十匹, 以補頒祿。

호조(戶曹)의 쌀·콩 4만 6천 석과 명주 1백 80필을 내어 녹을 나누어 주[頒祿]는 데에 보충하였다.


예문춘추관 태학사로 치사한 박형의 졸기[편집]

○藝文春秋館太學士致仕朴形卒。 形, 竹州人, 典理判書德龍子。 蚤知讀書, 魁成均試, 登第歷官臺諫代言。 僞朝庚申, 以密直使同知貢擧, 及國初, 拜藝文春秋館太學士, 至贊成事, 仍令致仕。 卒諡靖康。 子仲容, 登第官至提學, 以黨附林堅味死。

예문춘추관 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로 치사(致仕)한 박형(朴形)이 졸(卒)하였다. 형(形)은 죽주(竹州) 사람인데 전리 판서(典理判書) 박덕룡(朴德龍)의 아들이다. 일찍이 글을 읽을 줄을 알아 성균관시(成均館試)에 장원하고 과거에 올라, 대간(臺諫)·대언(代言)의 벼슬을 역임하고, 위조(僞朝) 경신년에 밀직 사(密直使)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국초(國初)에 미치어 예문춘추관 태학사를 제수받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고, 인하여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죽으매 시호(諡號)를 정강(靖康)이라 하였다. 아들은 박중용(朴仲容)인데 과거에 올라 벼슬이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임견미(林堅味)에게 당부(黨附)하였기 때문에 죽였다.


1月 15日[편집]

목성이 여귀에 들어가다[편집]

○癸亥/木星入輿鬼。

목성(木星)이 여귀(輿鬼)에 들어갔다.


오도리족의 어하리 등 4인에게 옷 한벌씩을 주다[편집]

○賜吾都里、於何里等四人衣各一襲。

오도리(吾都里) 어하리(於何里) 등 4인에게 각각 옷 한 벌씩을 내려 주었다.


도당에 있다가 몰래 옆방에 가서 바둑을 둔 유운·정용수 등이 탄핵당하다[편집]

○諫官劾中樞柳雲、鄭龍壽等。 雲及龍壽, 與商議門下都興、中樞金陞ㆍ李仁壽、學士趙禾、漢城尹申孝昌ㆍ宋㙉等, 坐都堂, 潛出翼室, 著碁爲戲。

간관(諫官)이 중추(中樞) 유운(柳雲)·정용수(鄭龍壽) 등을 탄핵하였으니, 운(雲)과 용수(龍壽)가 상의문하(商議門下) 도흥(都興), 중추(中樞) 김승(金陞)·이인수(李仁壽), 학사(學士) 조화(趙禾), 한성 윤(漢城尹) 신효창(申孝昌)·송전(宋㙉) 등과 더불어 도당(都堂)에 앉았다가 가만히 옆방[翼室]으로 나가서 바둑을 두어 희롱하였기 때문이었다.


1月 16日[편집]

도평의사사에서 호패법의 시행을 청했으나 행해지지 않다[편집]

○甲子/都評議使司請行號牌之法, 事竟不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호패법(號牌法)을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일이 마침내 행하여지지 않았다.


예문춘추관 태학사 유구의 졸기[편집]

○藝文春秋館太學士柳玽卒。 玽, 晋陽人, 知靈光郡事惠方子。 登第拜監察御史。 歲辛丑冬, 紅賊陷王京, 王南行至利川。 玽先至農庄, 以罇酒野獐, 獻于駕前, 玄陵顧謂柳淑曰: “毋忘玽今日之意。” 自是遇知, 歷官至右司議大夫。 歲癸丑, 出按慶尙, 入爲右常侍。 庚申, 拜密直副使, 庚午春, 出爲楊廣道都觀察使。 及本朝乙亥, 遷政堂文學, 遂至參贊門下府事, 上以爲原從功臣。 以正朝進表使, 赴京被留, 至丙子冬乃還, 病卒。 年六十四。 子謙。 將終, 戒之曰: “予以不才, 叨遇上知, 常以未報上德爲恨, 然予年過六旬, 位至二品, 亦何憾哉? 但以老母在堂, 未得終孝痛心。 爾率爾子, 奉養祖母, 如予在日。” 玽爲人勤儉, 不務外飾。 諡靖平。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유구(柳玽)가 졸(卒)하였다. 구(玽)는 진양(晉陽) 사람인데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유혜방(柳惠方)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제수받았다. 신축년 겨울에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시키니, 왕이 남쪽으로 행(行)하여 이천(利川)에 이르렀다. 구(玽)가 먼저 농장(農庄)에 이르러 통술[罇酒]과 들노루[野獐]를 거가(車駕) 앞에 드리니, 현릉(玄陵)[1]이 유숙(柳淑)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구(玽)의 오늘의 뜻을 잊지 말라."

이때로부터 알아줌을 입어 벼슬을 거쳐 우사의 대부(右司議大夫)에 이르렀다. 계축년에 나가서 경상도를 안찰(按察)하고, 들어와서 우상시(右常侍)가 되었으며, 경신년에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제수 받고, 경오년 봄에 나가서 양광도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었다. 본조(本朝) 을해년에 미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옮기어 드디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고, 임금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을 삼았다. 정조 진표사(正朝進表使)로 명나라 서울에 갔다가 억류를 당하여 병자년 겨울에야 돌아와서 병들어 죽었으니, 나이 64세였다. 아들은 유겸(柳謙)인데, 장차 죽으려 할 때에 경계하였다.

"내가 재주가 없는데 분에 넘치게 성상의 알아주심을 만나, 항상 성상의 덕을 갚지 못하는 것으로 한(恨)을 삼았다. 그러나 나이 60이 넘고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니 또한 무슨 유한이 있겠는가? 다만 늙은 어머니가 당(堂)에 계신데 효도를 마치지 못하니 마음이 아프다. 네가 자식을 거느리고 조모(祖母)를 봉양하기를 내가 있던 날과 같이 하라."

구(玽)의 사람됨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외식(外飾)을 힘쓰지 않았다.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라 하였다.


1月 17日[편집]

궁성 감독관의 장막이 연소되어 전 개성 윤 남성리가 죽다[편집]

○乙丑/賜酒宮城監督官。 夜, 役夫失火, 延燒北面監督幕。 前開城尹南成理, 因醉未出而死。

궁성(宮城) 감독관(監督官)에게 술을 내려 주었다. 밤에 역부(役夫)가 불을 내어 북면(北面) 감독막(監督幕)이 연소(延燒)되었는데, 전 개성 윤(開城尹) 남성리(南成理)가 술에 취하여 나오지 못해서 죽었다.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최영지에게 교서와 부월, 궁온을 내려 주다[편집]

○上遣前司水監朴有孫, 賜西北面都巡問察理使崔永沚敎書鈇鉞, 仍賜醞。

임금이 전 사수감(司水監) 박유손(朴有孫)을 보내어 서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 최영지(崔永沚)에게 교서(敎書)와 부월(鈇鉞)을 내려 주고, 인하여 궁온(宮醞)을 내려 주었다.


1月 20日[편집]

남문에 나가 궁성을 쌓을 터를 순시하다. 밤에 폭풍이 불고 큰 눈이 내리다[편집]

○戊辰/上出南門, 巡視宮城基地。 夜, 暴風大雪。

임금이 남문(南門)에 나가 궁성(宮城)의 기지(基地)를 순시하였다. 밤에 폭풍이 불고 큰 눈이 내렸다.


1月 21日[편집]

인왕사 내원당에 거둥하다. 당주 조생이 오대산에서 오다[편집]

○己巳/上幸仁王寺。 內願堂主祖生, 來自臺山。

임금이 인왕사(仁王寺)에 거둥하니, 내원당(內願堂) 당주(堂主) 조생(祖生)이 대산(臺山)에서 왔다.


1月 22日[편집]

지천사에 거둥하다. 도승통 설오가 금강산에서 오다[편집]

○庚午/上幸支天寺。 都僧統雪悟, 來自金剛山。

임금이 지천사(支天寺)에 거둥하니 도승통(都僧統) 설오(雪悟)가 금강산(金剛山)에서 왔다.


임금이 정릉에 가다[편집]

○上如貞陵。

임금이 정릉(貞陵)에 갔다.


지천사에서 성변 기양 법석을 베풀다[편집]

○設星變祈禳法席于支天寺。

성변(星變)을 기양(祈禳)하는 법석을 지천사(支天寺)에서 베풀었다.


1月 23日[편집]

중외의 이죄 이하 죄수를 용서하다[편집]

○辛未/宥中外二罪以下囚。

중외(中外)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용서하였다.


유운과 정용수에게 일 보기를 명하다[편집]

○命柳雲、鄭龍壽視事。

유운(柳雲)과 정용수(鄭龍壽)에게 일을 보기[視事]를 명하였다.


왕씨의 서얼로 무고당했던 흥도와 이를 무고한 이복양이 함께 풀려나다[편집]

○宥誣告人李復陽。 初復陽告於大司成卞仲良曰: “前朝王氏庶孽興道者, 變姓爲黃, 自河陽移密陽。 河陽監務魚淵、密陽府使朴尙絅、判官權簡等, 知而不告, 前持平李申、敎授官崔關等與之交通。” 仲良以聞, 上令臺諫刑曹鞫問。 興道曰: “予初妄姓王, 及王氏滅, 改爲黃。 然予實中樞院副使鄭擢奴李金。 逃役累年, 變此姓名。” 乃召擢見之, 是實。 於是皆宥之, 唯魚淵以有告興道王氏者, 不窮問, 杖流之。 刑官以復陽爲誣告請罪, 上曰: “復陽所告雖非實, 然其改姓王爲黃則是矣, 不可以誣告論。”

무고인(誣告人) 이복양(李復陽)을 용서하였다. 처음에 복양(復陽)이 대사성(大司成) 변중량(卞仲良)에게 고하기를,

"전조(前朝) 왕씨(王氏)의 서얼(庶孽) 왕흥도(王興道)란 자가 변성(變姓)하여 황씨(黃氏)로 하고 하양(河陽)으로부터 밀양(密陽)으로 옮겼는데, 하양 감무(河陽監務) 어연(魚淵)·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상경(朴尙絅)·판관(判官) 권간(權簡) 등이 알고서도 고(告)하지 않았고, 전 지평(持平) 이신(李申)·교수관(敎授官) 최관(崔關) 등은 더불어 교통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중량(仲良)이 아뢰었다. 임금이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 명하여 국문하니, 흥도(興道)가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공연히 왕씨로 성(姓)을 하였다가, 왕씨가 멸한 뒤에 고쳐서 황씨(黃氏)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실상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탁(鄭擢)의 종[奴] 이금(李金)인데, 여러 해 동안 구실[役]을 도피하느라고 이 성명(姓名)으로 변(變)한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탁(擢)을 불러 보이니 사실이었다. 이에 모두 용서하고, 어연(魚淵)만은 흥도(興道)가 왕씨라고 고한 자가 있는데도 끝까지 케어묻지 않았기 때문에 장(杖)을 때려 귀양보냈다. 형관(刑官)이 복양(復陽)을 무고(誣告)라 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복양의 고한 것이 비록 사실은 아니나, 성(姓)을 왕씨를 황씨로 고친 것은 사실이니 무고로 의논할 수 없다."


1月 24日[편집]

중흥사와 억정사의 전지에 대한 조세를 면제하다[편집]

○壬申/上命都堂, 特免重興、億正二寺田租公收。

임금이 도당(都堂)에 명하여 특별히 중흥(重興)·억정(億正) 두 절에 대한 전조(田租)의 공수(公收)를 면제하였다.


선략 장군 동다로를 오도리족의 상천호로 삼고 중추원의 직첩을 주다[편집]

○以宣略將軍童多老, 爲吾都里上千戶, 給中樞院牒。

선략 장군(宣略將軍) 동다로(童多老)로 오도리(吾都里) 상천호(上千戶)를 삼고 중추원(中樞院)의 직첩(職牒)을 주었다.


선주와 평양에 성을 쌓게 하다[편집]

○命西北面都巡問察理使崔永沚, 城宣州、平壤。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최영지(崔永沚)에게 명하여 선주(宣州)·평양(平壤)에 성을 쌓게 하였다.


각품 녹과전의 수를 더 늘려 정하라고 명하다[편집]

○命都堂, 加定各品祿科田數。

도당(都堂)에 명하여 각품(各品)의 녹과전(祿科田)의 수를 더 정하였다.


1月 26日[편집]

여러 도에 명하여 명나라에 세공으로 바칠 종마 50필을 바치게 하다[편집]

○甲戌/令諸道索進朝廷歲貢種馬五十匹。

여러 도(道)에 명하여 명나라에 진헌(進獻)할 세공(歲貢) 종마(種馬) 50필을 색출하여 바치게 하였다.


지울주사 이은을 대마도까지 따라가 살려낸 아전 2사람의 향역을 면제하다[편집]

○免蔚州吏李陶、朴焉鄕役。 初倭寇虜知蔚州事李殷而去, 陶、焉從行, 至對馬島得活。 慶尙道都觀察使李至陳請, 允之。

울주(蔚州)의 아전 이도(李陶)·박언(朴焉)의 향역(鄕役)을 면제하였다. 처음에 왜적이 지울주사(知蔚州事) 이은(李殷)을 잡아가매, 도(陶)와 언(焉)이 따라가서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살려내었었다. 경상도 도관찰사(都觀察使) 이지(李至)가 진달하여 청하니 윤허하였다.


복령사와 해인사의 전지에 대한 조세를 면제하다[편집]

○諭都堂, 免福靈、海印二寺田租公收。

도당(都堂)에 유시(諭示)하여 복령(福靈)·해인(海印) 두 절에 대한 전조(田租)의 공수(公收)를 면제하였다.


1月 29日[편집]

흰기운이 하늘에 뻗치다[편집]

○丁丑/白氣竟天。

흰 기운[白氣]이 하늘에 뻗쳤다.


광주 북교에서 새로 길들인 매를 놓는 것을 구경하다[편집]

○上如廣州北郊, 觀放新鷹。

임금이 광주(廣州) 북교(北郊)에 가서 새로 길들인 매[鷹]를 놓는 것을 구경하였다.


조서 부모에게 쌀과 콩을 내려 주다[편집]

○賜曺庶父母米菽百石。

조서(曺庶)의 부모에게 쌀·콩 1백 석을 내려 주었다.


七年 二月[편집]

2月 1日[편집]

간관 유관 등이 중신 외에는 기복(起復)을 쉬 허락치 말 것을 건의하다[편집]

○戊寅朔/諫官柳觀等上書曰:

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故大小臣僚, 勿論時散, 許終其制, 其有關係要務者, 奪情起復, 已有著令。 竊見無職守無關係者, 不顧聖制, 習循故常, 僅滿百日而卽吉, 或以白衣白笠, 奔走於朝路, 恬不爲愧, 非惟有乖於聖制, 實有累於明時之盛典, 風俗之薄, 不可不慮也。 且起復云者, 起於衰絰, 復其舊職之謂也。 人臣有才兼將相, 身佩安危, 則所謂國家重臣, 不可一日而無者也, 又有被堅執銳, 對敵陷陣者, 則國家所宜畜養, 以備不虞者也。 起復之權, 誠有所不得已者也。 明明盛朝, 人材輩出, 以待選用者, 不爲乏人。 豈可以頑忍無恥, 自除其服以媒進者, 必須起復, 以充內外之職任哉? 若當有事之時, 則從變禮, 勿計文武, 固當釋衰絰而從王事, 其在平時, 豈可不遵常制哉? 願自今將相之臣, 關係至重外, 勿許起復, 其宿衛武臣, 特命奪情, 以任其事, 如有不待終制, 而自除衰絰者, 痛繩以法, 兼禁本司本州陳請起復之例, 以抑僥倖, 以厚人倫。

上允之。

간관(諫官) 유관(柳觀)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삼년상(三年喪)은 천하의 공통된 상례(喪禮)입니다. 그러므로 대소 신료(臣僚)는 시임(時任)[2]과 산관(散官)을 물론하고 상제(喪制)를 마치도록 허락하고, 긴요한 정무(政務)에 관계가 있는 자는 탈정기복(奪情起復)[3]시키도록 이미 정하여진 법령이 있는데, 가만히 보건대, 직수(職守)도 없고 관계되는 바도 없는 자가 성인(聖人)의 제도를 돌보지 않고, 묵은 습관에 따라서 겨우 백 일만 차면 길복(吉服)을 입고, 혹은 백의(白衣)·백립(白笠)으로 조로(朝路)에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사오니, 성인의 제도에만 어그러질 뿐이 아니라, 실로 밝은 시대의 성전(盛典)에도 누(累)가 되오니, 풍속의 박한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기복(起復)이라고 말하는 것은 최질(衰絰)에서 일어나서 예전 직사(職事)를 회복한다는 말입니다. 신하 된 자가 재주가 장상(將相)을 겸하고 몸이 안위(安危)에 달려 있으면, 이른바 국가의 중신(重臣)이니 하루라도 없을 수 없는 사람이요, 또 갑옷을 입고 칼날을 잡아 적을 대적(對敵)하고 진(陣)을 함락시키는 자가 있다면, 국가에서 마땅히 길러서 불우(不虞)에 대비하여야 할 것이니, 기복(起復)하는 권도(權道)가 진실로 부득이한 바가 있지마는, 밝고 밝은 성조(盛朝)에 인재(人材)가 배출되여 뽑아 쓰기를 기다리는 자가 없지 아니하온데, 어찌 완악(頑惡)하고 부끄러움이 없이 스스로 그 복(服)을 벗고 나오는 자를 반드시 기복(起復)하여 중외(中外)의 직임(職任)에 보충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일이 있는 때를 당하면 변례(變禮)에 따라서 문무(文武)를 따질 것 없이 마땅히 최질(衰絰)을 벗고 왕사(王事)에 종사하여야 하겠지마는, 평시에 있어서는 어찌 상제(喪制)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는 장상(將相)의 신하로서 관계가 지극히 중한 것 외에는 기복(起復)을 허락치 마시옵고, 숙위(宿衛)하는 무신(武臣)은 특별히 탈정(奪情)을 명하여 그 일을 맡기시고, 만일 상제(喪制)를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최질(衰絰)을 벗는 자가 있으면 엄히 법으로 다스리고, 겸하여 본사(本司)와 본주(本州)에서 기복(起復)을 진청(陳請)하는 예(例)를 금하여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꺾고 인륜(人倫)을 두텁게 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였다.


2月 3日[편집]

헌사에서 검교와 치사한 사람의 녹봉을 폐지하도록 건의하다[편집]

○庚辰/憲司請罷檢校及致仕之食祿者。

헌사(憲司)에서 검교(檢校)와 치사(致仕)한 사람의 녹(祿) 먹는 자를 파하기를 청하였다.


동북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이 주·부·군·현의 명칭을 정하여 아뢰다[편집]

○東北面都宣撫巡察使鄭道傳分定州府郡縣之名, 遣從事崔兢以聞。 安邊以北、靑州以南, 稱永興道, 端州以北、孔州以南, 稱吉州道, 令東北面都巡問察理使統治之。 又置端州以北州府郡縣及各站路官吏。 吉州道, 察理使一, 令史十二、兩班子弟, 知印六、兩班子弟, 使令百姓二十。 吉州牧, 官使一, 令史十二, 使令二十五, 日守兩班十五, 州司長史二, 副長史四、五品以下, 司吏六、兩班, 徒隷十五百姓。 左右翼, 各千戶一, 百戶六, 統主十二。 端州, 知事一, 令史十, 使令二十, 日守兩班十, 郡司長史二, 副長史三, 司吏四, 徒隷十。 左右翼, 各千戶一, 百戶四, 統主八。 鏡城郡, 知事一, 令史六, 使令十五, 日守兩班八, 郡司長史二, 副長史二, 司吏二, 徒隷八。 左右翼, 各千戶一, 百戶四, 統主八。 慶源府, 使一, 令史以下, 同端州。 靑州府使一, 令史以下同端州。 甲州, 知事一, 令史以下, 同鏡城。 各站, 司吏二, 日守兩班五, 館夫五, 急走人五, 馬夫十五。 洪原新翼站改新恩站, 平浦站仍舊名。 靑州多灘台站改五川站, 所應居台站改居山站。 端州時時里站改施利站, 波獨只站改碁園站, 仇麻耳站改麻谷站。 吉州西之委站改臨溟站, 藥水站仍舊名, 明間站改明原站。 鏡城郡朱外站改朱村站, 吾老村站改吾村站, 在城站改龍城站, 加夫台站改富家站。 慶源府時反站改時原站, 翁口站改翁丘站, 在城站改江陽站。 豫州、原興合爲一郡, 改號預原, 知事一。 咸州任內洪獻改洪原, 縣令一。

동북면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이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명칭을 나누어 정하고, 종사(從事) 최긍(崔兢)을 보내어 아뢰었는데, 안변(安邊) 이북 청주(靑州) 이남은 영흥도(永興道)라 칭하고, 단주(端州) 이북 공주(孔州) 이남은 길주도(吉州道)라 칭하여 동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고, 또 단주(端州) 이북의 주·부·군·현과 각 참로(站路)의 관리를 두되, 길주도(吉州道)는 찰리사(察理使) 1명, 영사(令史) 12명, 양반 자제(兩班子弟) 지인(知印) 6명, 양반 자제 사령(使令) 백성(百姓) 20명, 길주목(吉州牧)은 관사(官使) 1명, 영사 12명, 사령 25명, 일수양반(日守兩班)[4] 15명, 주사 장사(州司長史) 2명, 부장사(副長史) 4명, 5품(品)이하의 사사(司使) 6명, 양반 도례(兩班徒隷) 15명의 백성(百姓)이며 좌·우익(左右翼) 천호(千戶) 각각 1명, 백호(百戶) 6명, 통주(統主) 12명이고, 단주(端州)는 지사(知事) 1명, 영사 10명, 사령 20명, 일수양반 10명, 군사 장사(郡司長史) 2명, 부장사 3명, 사사 4명, 도례 10명, 좌·우익 천호 각각 1명, 백호 4명, 통주 8명이고, 경성군(鏡城郡)은 지사 1명, 영사 6명, 사령 15명, 일수양반 8명, 군사 장사 2명, 부장사 2명, 사사 2명, 도례 8명, 좌·우익 천호 각각 1명, 백호 4명, 통주 8명이고, 경원부(慶源府)는 사(使) 1명, 영사 이하는 단주(端州)와 같으며, 청주부(靑州府)는 사(使) 1명, 영사 이하는 단주(端州)와 같고, 갑주(甲州)는 지사(知事) 1명, 영사(令史) 이하는 경성(鏡城)과 같으며, 각참(各站)에는 사사 2명, 일수양반 5명, 관부(館夫) 5명, 급주인(急走人) 5명, 마부(馬夫) 15명이고, 홍원(洪原)의 신익참(新翼站)은 신은참(新恩站)으로 고치고, 평포참(平浦站)은 예전 이름 그대로 하며, 청주(靑州)의 다탄태참(多灘台站)은 오천참(五川站)으로 고치고, 소응거태참(所應居台站)은 거산참(居山站)으로 고치며, 단주(端州)의 시시리참(時時里站)은 시리참(施利站)으로 고치고, 파독지참(波獨只站)은 기원참(碁園站)으로 고치고, 구마이참(仇麻耳站)은 마곡참(麻谷站)으로 고치며, 길주(吉州)의 서지위참(西之委站)은 임명참(臨溟站)으로 고치고, 약수참(藥水站)은 예전 이름 그대로 하며, 명간참(明間站)은 명원참(明原站)으로 고치고, 경성군(鏡城郡)의 주외참(朱外站)은 주촌참(朱村站)으로 고치고, 오로촌참(吾老村站)은 오촌참(吾村站)으로 고치며, 재성참(在城站)은 용성참(龍城站)으로 고치고, 가부태참(加夫台站)은 부가참(富家站)으로 고치며, 경원부(慶源府)의 시반참(時反站)은 시원참(時原站)으로 고치고, 옹구참(翁口站)은 옹구참(翁丘站)으로 고치며, 재성참(在城站)은 강양참(江陽站)으로 고치고, 예주(豫州)와 원흥(原興)은 합하여 한 고을[郡]을 만들어 이름을 예원(預原)으로 고치고, 지사(知事)는 1명이며, 함주(咸州)의 임내(任內)인 홍헌(洪獻)은 홍원(洪原)으로 고치어 현령(縣令) 1명으로 하였다.


배구를 길주 내승 자목소 제거, 이회를 단주 자목소 제거로 삼다[편집]

○以靑州府使裵矩爲吉州內乘孶牧所提擧, 知端州事李薈爲端州孶牧所提擧。

청주 부사(靑州府使) 배구(裵矩)로 길주(吉州)의 내승 자목소(內乘孶牧所) 제거를 삼고, 지단주사(知端州事) 이회(李薈)로 단주 자목소(端州孶牧所) 제거(提擧)를 삼았다.


천변 기양 법석을 장의·지천·안암·왕흥 등 4절에서 베풀다[편집]

○設天變祈禳法席于藏義、支天、安巖、王興等四寺。

천변(天變)을 기양(祈禳)하는 법석(法席)을 장의(藏義)·지천(支天)·안암(安巖)·왕흥(王興) 등 네 절에 베풀었다.


2月 4日[편집]

하정사가 중국 등주에서 제왕(齊王)의 저지를 받고 돌아오다[편집]

○辛巳/賀正使趙胖、副使李觀至登州, 被齊王阻回。 除進獻方物外, 盤纏布物, 盡爲所取。

하정사(賀正使) 조반(趙胖)·부사(副使) 이관(李觀)이 등주(登州)에 이르러 제왕(齊王)의 저지를 당하여 돌아왔는데, 진헌(進獻) 방물(方物)을 제외하고 반전(盤纏)[5]과 포물(布物)은 모두 빼앗기었다.


임금이 봉화백 정도전에게 글을 보내며 송헌 거사로 자신의 호를 정하다[편집]

○上號松軒居士。 上謂左承旨李文和曰: “予聞前朝忠肅王稱居士, 致書醴川君權漢功。 予亦欲於奉化伯, 稱居士致書, 何以爲號?” 文和對曰: “上之潛龍時軒號何如?” 上曰: “可。” 遂以松軒爲號。

임금이 송헌 거사(松軒居士)로 호(號)를 하였다.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전조(前朝)의 충숙왕(忠肅王)이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예천군(醴川君) 권한공(權漢功)에게 글을 보내었다. 나도 또한 봉화백(奉化伯)에게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글을 보내려고 하는데, 무엇으로 호(號)를 할까?"

하니, 문화가 대답하였다.

"상감의 잠룡(潛龍) 때의 헌호(軒號)[6]가 어떠합니까?"

임금이,

"좋다"

하고, 드디어 송헌(松軒)으로 호를 하였다,


2月 5日[편집]

유성이 헌원에서 나와 땅에 떨어지다[편집]

○壬午/夜, 流星長如一尺, 出軒轅落地。

밤에 길이가 한 자[尺]가량이나 되는 유성(流星)이 헌원(軒轅)에서 나와서 땅에 떨어졌다.


단주와 영흥에서 금을 캐게 하다[편집]

○令田希吉採金于端州、永興。

전희길(田希吉)을 시켜 단주(端州)와 영흥(永興)에서 금을 캐게 하였다.


동북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에게 보내는 서신. 옷과 술을 내려 주다[편집]

○遣中樞院副使辛克恭, 爲東北面都宣慰使, 以書賜衣酒都宣撫巡察使鄭道傳。 其書曰:

相別日久, 思想殊深。 欲遣辛中樞往問行役, 崔兢適來, 備知動止, 稍自慰解。 玆將襦衣一領, 以備風露, 領納爲幸。 李參贊、李節制使處, 俱寄襦衣各一領, 幸說與眷戀之意。 餘在辛中樞。 春寒, 若時自保, 以旣邊功。 不具。 松軒居士書。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극공(辛克恭)을 보내어 동북면 도선위사(東北面都宣慰使)를 삼아 글[書]을 가지고 가서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에게 옷과 술을 내려 주었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서로 작별한 지가 여러 날이 되니 생각하는 바가 매우 깊다. 신중추(辛中樞)를 보내어 가서 행역(行役)[7]을 묻고자 하였더니, 최긍(崔兢)이 마침 와서 동지(動止)를 갖추 알게 되니 조금 위로되고 풀린다. 이에 저고리[檽衣] 한 벌로써 바람과 이슬을 막게 하는 것이니 영납(領納)하면 다행이겠다. 이 참찬(李參贊)과 이 절제사(李節制使)에게도 함께 저고리 한 벌씩을 부치는 바이니 권련(眷戀)하는 뜻을 말하여 주기 바란다. 나머지는 신중추의 구전(口傳)에 있다. 춘한(春寒)에 때를 순(順)히 하여 스스로 보전해서 변방의 공(功)을 마치라. 갖추지 못한다. 송헌 거사(松軒居士)는 쓴다."


2月 6日[편집]

궁성을 순시하고 감독을 잘못한 감독관 수십인을 태형에 처하고, 박위를 도제조에 임명[편집]

○癸未/上巡視宮城, 笞不能監督官數十人。 以參贊門下府事朴葳爲都提調, 使考察能否。

임금이 궁성(宮城)을 순시(巡視)하고 능하지 못한 감독관(監督官) 수십 인을 태형(笞刑)에 처하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葳)로 도제조(都提調)를 삼아서 능하고 능하지 못한 것을 고찰하게 하였다.


헌사에서 반록 착오의 책임을 물어 삼사 좌복야 안익 등의 죄를 청하다[편집]

○憲司請三司左僕射安翊等罪曰: “廣興倉使柳善、注簿鄭尙周任頒祿之務, 剩計報三司, 而翊及三司諮議安以寧等, 掌出納之任, 不察而剩與之, 俱各失職。 請皆罷職不敍。” 上允之, 乃以翊年老, 再奉使上國, 特宥之。

헌사(憲司)에서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안익(安翊) 등의 죄를 청하여 말하였다.

"광흥창 사(廣興倉使) 유선(柳善)과 주부(注簿) 정상주(鄭尙周)가 반록(頒祿)하는 사무를 맡아 남게 계산하여 삼사(三司)에 보고하였는데, 익(翊)과 삼사 자의(三司諮議) 안이령(安以寧) 등이 출납(出納)하는 책임을 맡고도 살피지 않고 남게 주었으니 모두 각기 직책을 잃었습니다. 청하옵건대, 모두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임금이 윤허하고, 익(翊)은 나이 늙고 두 번이나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갔었으므로 특별히 용서하였다.


2月 8日[편집]

도성 남문이 이루어지니 임금이 시찰하다[편집]

○乙酉/都城南門成, 上往觀之。

도성(都城)의 남문(南門)이 이루어졌으므로, 임금이 가서 보았다.


설장수·이염·안익에게 일을 보기를 명하다[편집]

○命偰長壽、李恬、安翊視事。

설장수(偰長壽)·이염(李恬)·안익(安翊)에게 일을 보기[視事]를 명하였다.


2月 10日[편집]

궁성을 순시하다[편집]

○丁亥/上巡視宮城。

임금이 궁성을 순시하였다.


2月 11日[편집]

축성을 감독했던 각도 수령을 돌려보낼 것을 명하다[편집]

○戊子/命還各道守令監役築城者。

각도의 수령(守令)으로 성 쌓는 역사를 감독하였던 자를 돌려보내도록 명하였다.


문무 각품에게 궁성 쌓는 돌을 바치게 하다[편집]

○命文武各品, 納築宮城石。

문무(文武) 각품(各品)에게 궁성(宮城)을 쌓는 돌을 바치도록 명하였다.


영삼사사 권중화에게 광주에서 종 만드는 것을 감독케 하다[편집]

○命領三司事權仲和, 監鍾鏈於廣州。 以白金五十兩竝鑄, 乃成。

영삼사사(領三司事) 권중화(權仲和)를 명하여 광주(廣州)에서 주종(鑄鐘)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백금(白金) 50냥을 넣어 주조(鑄造)하여 성공하였다.


2月 12日[편집]

우박이 내리다[편집]

○己丑/雨雹。

우박이 내리었다.


임금이 광주 북교에 거둥하여 놓친 매를 잡으러 다녔다[편집]

○上幸廣州北郊, 追逸鷹。

임금이 광주(廣州) 북교(北郊)에 거둥하여 놓친 매(鷹)를 쫓았다.


2月 13日[편집]

광주에서 돌아오다[편집]

○庚寅/至自廣州。

광주(廣州)에서 돌아왔다.


2月 14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辛卯/木稼。

목가(木稼)하였다.


지천사에서 천변 기양 법석을 베풀고, 또 오사충을 장의사에 보내어 십이인연 법석을 베풀다[편집]

○設天變祈禳法席于支天寺, 又遣寧城府院君吳思忠于藏義寺, 設十二因緣法席。

천변(天變)을 기양(祈禳)하는 법석(法席)을 지천사(支天寺)에 베풀고, 또 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 오사충(吳思忠)을 장의사(藏義寺)에 보내어 십이인연(十二因緣)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2月 15日[편집]

나무에 얼음이 얼다[편집]

○壬辰/木氷。

목빙(木氷)[8]하였다.


성을 순시하다[편집]

○上巡城。

임금이 성(城)을 순시하였다.


2月 16日[편집]

진양에 우거 중인 유구국 산남왕 온사도가 소속 15인을 거느리고 오니 의복과 양식을 주다[편집]

○癸巳/琉球國山南王溫沙道率其屬十五人來。 沙道見逐於其國中山王, 來寓晋陽, 國家歲給衣食。 至是, 上以失國流離, 賜衣服米菽, 存恤之。

유구국(琉球國)의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가 그 소속 15인을 거느리고 왔다. 사도(沙道)가 그 나라의 중산왕(中山王)에게 축출당하여 우리 나라의 진양(晉陽)에 와서 우거(寓居)하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해마다 의식(衣食)을 주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유리(流離)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의복과 쌀·콩을 주어 존휼(存恤)하였다.


동북면 도선무사 정도전이 경원부에 성을 쌓다[편집]

○東北面都宣撫使鄭道傳, 城慶源府。

동북면 도선무사(都宣撫使) 정도전(鄭道傳)이 경원부(慶源府)에 성을 쌓았다.


경상도 도관찰사 이지가 서울에 장적이 있는 도내 품관의 서울행을 줄여줄 것을 청하다[편집]

○慶尙道都觀察使李至上書:

道內大小品官, 名載居京之籍者, 往還之際, 馬多困斃。 今復有令刻日赴京, 故有傾家買馬者。 臣竊謂當今無事之時, 誠宜務農養兵, 以備不虞。 今若督責赴京, 使人馬困耗, 農事失時, 殊爲未便。 況本道前年失農, 裹糧亦難? 除孝廉茂才可備擢用外, 限今年各安其鄕, 務農養兵。

上下都堂曰: “到京孝廉茂才可用者, 更加遴選, 具名以聞, 餘皆放還。”

경상도 도관찰사(都觀察使) 이지(李至)가 상서(上書)하였다.

"도내(道內)의 대소 품관(品官)으로서 이름이 서울에 사는 장적(帳籍)에 실려 있는 자가 왕복할 때에 말이 지쳐서 죽는 일이 많사온데, 지금 다시 날짜를 정하여 서울에 오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에 가산(家産)을 기울여서 말을 사는 자가 있사오니, 신은 생각하옵건대, 지금 일이 없는 때를 당하여 진실로 마땅히 농사에 힘쓰고 양병(養兵)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만일 서울에 올라오라고 독촉하여 사람과 말이 지쳐 허약하여지고, 농사가 때를 잃게 하면 대단히 옳지 못합니다. 하물며, 본도(本道)는 지난해 실농(失農)하여 과량(裹糧)[9]하기가 또한 어렵사오니, 효행(孝行)이 있고 청렴하며 재덕(才德)이 있어 탁용(擢用)에 대비할 만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금년을 한하여 각각 그 시골에 편안히 있게 하여 농사에 힘쓰고 양병(養兵)하게 하소서."

임금이 도당(都堂)에 내리고 말하였다.

"서울에 온 사람으로 효행이 있고 청렴하며 재덕이 있는 쓸 만한 사람은 다시 선발하여 이름을 갖추어 아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보내라"


경기우도 도관찰사 박경이 기선군의 처우개선과 수군 징발 문제에 대해 도당에 올린 글[편집]

○右道都觀察使朴經, 致書都堂曰:

騎船軍累月仍騎, 或因嵐瘴之毒, 或因飢寒之逼, 身勞力瘁, 一二日困臥, 則以謂瘟疫, 恐相傳染, 可以免死者, 不加救療, 或棄於島嶼, 或投於海水, 以致夭扎〔夭札〕, 興怨傷和, 可勝嘆哉! 雖閑習舟楫者, 多令致死, 令其各州, 充立其額, 弊亦不貲。 願自今於海道, 分遣醫員, 以時救療, 毋致夭死。 其有殞命者, 某州某名人某月日隕命, 埋于某地, 具錄立標, 使其家求葬之, 轉聞于上, 復其家。 水軍萬戶千戶, 以所管軍籍之中, 富强者, 私自放還, 多取賄賂, 惟以貧寒老稚留防, 値有賊兵, 自知羸弱難當, 詐稱海暗風逆, 故避不戰。 由是有戰艦之名, 無戰艦之實。 願令無時點檢, 其主將, 雖一卒私自故放者, 當以法論。

都堂啓聞, 上允之。

우도(右道) 도관찰사(都觀察使) 박경(朴經)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렸다.

"기선군(騎船軍)이 여러 달 계속하여 배를 타서 남기(嵐氣)와 장기(瘴氣)의 독(毒)으로 인하여, 혹은 기한(飢寒)에 쪼들림으로 인하여 몸이 지치고 힘이 다하여, 하루 이틀 동안 곤(困)히 누워 있으면, 온역(瘟疫)이라 하여 서로 전염될까 두려워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자도 치료를 가하지 않고 혹은 섬에 버리고, 혹은 바닷물에 던져서 요사(夭死)하게 하여 원망을 일으키고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오니, 참으로 탄식할 일입니다. 비록 배에 익숙한 자라도 많이 죽게 만들고 각 고을로 하여금 그 액수(額數)를 보충하여 세우게 하오니, 폐해가 또한 적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해도(海道)에 의원을 나누어 보내어 때때로 구료(救療)하여 요사(夭死)하지 말게 하고, 목숨을 잃는 자가 있으면 아무 고을의 아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어서 아무 땅에 묻은 것을 갖추 기록하여 표목(標木)을 세워서, 그 집으로 하여금 찾아서 장사(葬事)하게 하고, 위에 전문(轉聞)하여 그 집을 복호(復戶)[10]하소서.

수군(水軍) 만호(萬戶)·천호(千戶)가 자기가 관할하는 군적(軍籍) 가운데에서 부강(富强)한 자는 사사로이 방환(放還)하여 주고 많은 뇌물을 받고, 오직 빈한한 사람과 늙은이·어린이로써 머물러 방수(防戍)하게 하오니, 적병을 만나면 스스로 파리하고 약하여 당해내기 어려운 것을 알기 때문에, 거짓 바다가 컴컴하다느니, 바람이 역풍(逆風)이라느니 하여 고의로 피하고 싸우지 않사오니, 이 때문에 전함(戰艦)의 이름은 있어도 전함의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무시(無時)로 점검(點檢)하게 하여, 그 주장(主將)이 비록 한 사람의 군사라도 사사로이 고의로 놓아주는 자는 마땅히 법으로 의논하소서."

도당(都堂)에서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2月 17日[편집]

이지를 중추원 사, 오몽을을 보성군, 이문화를 도승지로 삼다[편집]

○甲午/以慶尙道觀察使李至爲中樞院使, 以林敬代之; 以江原道都觀察使吳蒙乙爲寶城君, 以崔龍蘇代之; 李文和爲都承旨。

경상도 관찰사 이지(李至)로 중추원 사(中樞院使)를 삼고 임경(林敬)으로 대신하였으며, 강원도 관찰사 오몽을(吳蒙乙)로 보성군(寶城君)을 삼고 최용소(崔龍蘇)로 대신하였으며, 이문화(李文和)로 도승지(都承旨)를 삼았다.


항복한 왜인 만호 구육·나가온·곤시라 등의 이름을 고치고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以降倭萬戶㡱六, 改名藤六, 爲宣略將軍、行中郞將; 羅可溫改名林溫, 爲宣略將軍、行郞將; 帶來人望沙門改池門, 爲宣略將軍、行別將。 昆時羅改藤昆, 沙門吾羅改吳文, 三寶羅平改張寶, 吾音甫改信吾, 望時羅改張望, 玄準改藤賢, 阿時羅改表時, 皆授散員。

항복한 왜인 만호(萬戶) 구육(㡱六)을 등육(藤六)으로 이름을 고치어 선략 장군 행 중랑장(宣略將軍行中郞將)을 삼고, 나가온(羅可溫)을 임온(林溫)으로 개명(改名)하여 선략 장군 행 낭장(宣略將軍行郞將)을 삼고, 데리고 온 사람 망사문(望沙門)은 지문(池門)으로 개명하여 선략 장군 행 별장(宣略將軍行別將)을 삼고, 곤시라(昆時羅)는 등곤(藤昆)으로 개명하고, 사문오라(沙門吾羅)는 오문(吳文)으로 개명하고, 삼보라평(三寶羅平)은 장보(張寶)로 개명하고, 오음보(吾音甫)는 신오(信吾)로 개명하고, 망시라(望時羅)는 장망(張望)으로 개명하고, 현준(賢准)은 등현(藤賢)으로 개명하고, 아시라(阿時羅)는 표시(表時)로 개명하여 모두 산원(散員)을 제수하였다.


2月 18日[편집]

법석에 쓰는 명건저포를 추포로 바꾼 사약 황재중을 정직시키다[편집]

○乙未/司憲府劾: “司鑰黃在中竊取支天寺天變祈禳法席命巾苧布, 易以麤布。 請收職牒, 鞫問決罪。” 上只許停職。

사헌부(司憲府)에서 사약(司鑰) 황재중(黃在中)이 지천사(支天寺)의 천변 기양 법석(天變祈禳法席)에 쓰는 명건저포(命巾苧布)[11]를 훔쳐서 추포(麤布)로 바꾸었다고 탄핵하고, 직첩(職牒)을 거두고 국문(鞫問)하여 결죄(決罪)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다만 정직(停職)만을 허락하였다.


대사헌 이직 등이 겸임할 사람을 제외한 검교는 없앨 것을 건의하다[편집]

○大司憲李稷等上言: “臣等竊惟, 設官分職, 將以授任責效。 今當開國之初, 檢校之職, 不宜仍舊。 願自今除潛邸時勳舊耆老及書雲典醫必須兼任人外, 檢校致仕, 一切汰去。” 上允之。

대사헌(大司憲) 이직(李稷)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벼슬을 베풀고 직책을 나누[設官分職]는 것은 장차 임무를 주고 공효를 이루게 하자는 것이온데, 지금 개국초(開國初)를 당하여 검교(檢校)의 직(職)을 예전대로 둘 것이 아니옵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잠저(潛邸) 때의 훈구(勳舊)·기로(耆老)와 서운(書雲)·전의(典醫)로 반드시 겸임(兼任)할 사람을 제외한 검교(檢校)는 치사(致仕)하게 하여 일체 태거(汰去)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였다.


2月 20日[편집]

궁성을 순시하다[편집]

○丁酉/上巡視宮城。

임금이 궁성을 순시하였다.


2月 21日[편집]

광주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한 종을 보다[편집]

○戊戌/上幸廣州, 觀新鑄鍾。

임금이 광주(廣州)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한 종(鐘)을 보았다.


환자 조순을 부르다[편집]

○召宦者曺恂。

환자(宦者) 조순(曹恂)을 불렀다.


2月 23日[편집]

궁성을 순시하다[편집]

○庚子/上巡視宮城。

임금이 궁성을 순시하였다.


간관 박신 등이 다시 황재중의 직첩을 거두고 처벌할 것을 청하다[편집]

○諫官朴信等上請曰: “竊見司憲府所申, 司鑰黃在中, 以鼠破麤布, 易天變祈禳命巾苧布, 請收職牒, 依律鑑後, 殿下只許停職。 臣等竊惟, 人臣之罪, 莫甚於欺君。 在中本以賤隷, 特蒙聖恩, 官至四品, 榮幸極矣。 乃當殿下克謹天戒之時, 敢生攘竊之計, 以累殿下修省之誠。 其利則一匹布耳, 其罪則欺天罔上, 不可輕宥。 伏望依憲府所申, 收其職牒, 依律鑑後, 從本定役, 以懲其罪。” 上曰: “小竪之罪, 何足深責!”

간관(諫官) 박신(朴信) 등이 상청(上請)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신한 것을 보건대, 사약(司鑰) 황재중(黃在中)이 쥐가 쏠은 추포(麤布)로 천변(天變)을 기양(祈禳)하는 명건저포(命巾苧布)를 바꾸었다 하여, 직첩을 거두고 율(律)에 따라 처벌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기를 청하였사온데, 전하께서 다만 정직(停職)만을 허락하셨사오나,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신하 된 자의 죄는 임금을 속이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재중(在中)은 본래 천례(賤隷)로서 특별히 성은(聖恩)을 입어 벼슬이 4품에 이르렀으니 영행(榮幸)이 극진합니다. 전하께서 천계(天戒)를 조심하시는 때를 당하여 감히 몰래 훔치는 꾀를 내어 전하의 수성(修省)하는 정성을 더럽혔사오니, 그 이익이란 한 필의 베이지마는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인 죄는 가볍게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헌부(憲府)의 상신에 의하여 그 직첩을 거두고 율에 따라 처벌하여 뒷 사람을 경계하고, 본색(本色)에 따라 구실을 정하여 그 죄를 징계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소수(小竪)의 죄를 무얼 깊이 책망할 것이 있는가?"


유성이 천시 동원에서 나와 서원으로 들어가다[편집]

○流星出天市東垣, 入西垣, 長二尺許。

유성(流星)이 천시 동원(天市東垣)에서 나와 서원(西垣)으로 들어갔는데, 길이가 2척 정도나 되었다.


순녕군 지 등에게 갑사를 거느리고 궁성 역사를 독려하게 하다[편집]

○命內廂節制使順寧君枝、中樞院副使李天祐等, 率甲士分督宮城之役。

내상 절제사(內廂節制使) 순녕군(順寧君) 지(枝)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이천우(李天祐) 등에게 명하여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궁성의 역사를 나누어 독려하게 하였다.


2月 25日[편집]

궁성을 순시하다[편집]

○壬寅/上巡視宮城。

임금이 궁성을 순시하였다.


합문 인진사 원상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다[편집]

○納(閣)〔閤〕門引進使元庠女于後宮。

합문 인진사(閤門引進使)[12] 원상(元庠)의 딸을 후궁(後宮)에 들이었다.


2月 26日[편집]

궁성을 순시하다[편집]

○癸卯/上巡宮城。

임금이 궁성을 순시하였다.


임금의 진영을 함주 선원전에 봉안하다[편집]

○遣藝文春秋館太學士成石璘, 奉安上影于咸州濬源殿。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임금의 진영(眞影)[13]을 함주(咸州)의 준원전(濬源殿)에 봉안하였다.


밤에 지진이 일어나다[편집]

○夜, 地震。

밤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간관 박신 등이 조순을 부르지 말 것을 건의하다[편집]

○諫官朴信等上言: “竊聞殿下, 命召曺恂, 馳驛赴京。 恂之爲人, 奸詐足以蒙蔽聰明, 言辭足以變亂是非, 雖無所犯, 實明時所當逬逐者也。 況在年前, 欺罔攘竊, 以負殿下, 其罪昭然? 臣等與憲司交章請罪, 殿下只令安置其鄕, 不厭衆心。 況今未及期年, 而又召還, 非惟前日奸惡之罪未懲, 後日弄權逞欲之弊, 詎可勝言? 且以殿下剛明之鑑, 必謂不墜其計, 然於懲惡去佞, 實有歉焉。 伏望殿下, 亟收前命, 仍舊廢置。” 上曰: “內竪, 無可使傳命。”

간관(諫官) 박신(朴信)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듣자옵건대, 전하께서 조순(曹恂)을 명소(命召)하여 역마(驛馬)를 달리어 서울로 올라온다 합니다. 순(恂)의 사람 됨이 간사(奸詐)한 것은 족히 총명(聰明)을 가릴 만하고 언사(言辭)는 족히 시비(是非)를 변란(變亂)할 수 있사오니, 비록 범(犯)한 바가 없더라도 실로 밝은 시대에 마땅히 방축(放逐)해야 할 자입니다. 하물며, 연전(年前)에 기망(欺罔)하고 도둑질하여 전하를 저버렸사와 그 죄가 소연(昭然)하여 신 등이 헌사(憲司)와 더불어 번갈아 글을 올리어 죄주기를 청하였사오나, 전하께서 다만 그 시골에 안치(安置)하게 하였사오니,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1년도 다 못되어서 또 소환하시니, 오직 전날의 간악한 죄가 징계되지 못할 뿐 아니라, 후일의 권세를 부리고 욕심을 부리는 폐단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또 전하의 강명(剛明)하신 지감(知鑑)으로 반드시 그 술책에 떨어지시지 않으시겠지마는, 악한 것을 징계하고 간사한 것을 버리는 데에는 실로 결함이 있는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급히 전명(前命)을 거두시고 예전대로 폐하여 두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내수(內竪) 중에 명령을 전달시킬 만한 자가 없다."


2月 27日[편집]

궁성을 순시하다[편집]

○甲辰/巡視宮城。

궁성을 순시하였다.


서북면 선주 이북의 기민을 진휼하다[편집]

○賑西北面宣州以北飢民。

서북면의 선주(宣州) 이북의 기민(飢民)을 진휼하였다.


2月 28日[편집]

고 사재감 서인비를 제사한 글[편집]

○乙巳/遣將軍延嗣宗, 祭故司宰監徐仁庇。 其文曰:

人情莫親於故舊, 恩禮無異於始終。 玆用恤典, 以示寵榮。 爾仁庇勤儉之資, 足以幹事; 驍勇之才, 足以禦侮。 嘗自潛邸, 扞衛我躬, 勤勞旣久, 誠意彌篤。 是賜原從之號, 充宿衛之列。 雖未參於華秩, 豈敢忘其厚意! 忽聞哀訃, 良用爲悲。 特遣將軍延嗣宗, 致祭柩前。 爾其不昧, 諒我至懷。

장군(將軍) 연사종(延嗣宗)을 보내어 고(故) 사재감(司宰監) 서인비(徐仁庇)에게 제사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인정(人情)은 고구(故舊)보다 더 친한 것이 없고, 은례(恩禮)는 시종(始終)에 다름이 없다. 이에 휼전(恤典)을 써서 총영(寵榮)을 보이는 것이다. 너 인비(仁庇)는 근검(勤儉)한 자질이 족히 일을 보살필 만하고, 효용(驍勇)한 재주는 족히 적을 막을 만하다. 일찍이 잠저(潛邸) 때로부터 내 몸을 호위하여, 근로(勤勞)한 지가 이미 오랜데, 성의(誠意)는 더욱 두터웠다. 그래서 원종(原從)의 호(號)를 주고 숙위(宿衛)의 열(列)에 채웠다. 비록 화질(華秩)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어찌 감히 그 후의(厚意)를 잊으랴! 홀연히 슬픈 부음(訃音)을 들으니 참으로 슬프다. 특별히 장군 연사종(延嗣宗)을 보내어 널[柩] 앞에 치제(致祭)하노니, 네가 어둡지 않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생각하라."


2月 29日[편집]

평주 온천에 가기 때문에 종묘에 고하다. 종묘 남쪽에 산을 만들다[편집]

○丙午/上以如平州溫泉, 告于宗廟, 見廟南造山速成, 喜之, 賜衣于監督官李懃。

임금이 평주(平州) 온천(溫泉)에 가기 때문에 종묘(宗廟)에 고하였다. 종묘의 남쪽에 산을 만드는 것이 속히 이루어진 것을 보고 기뻐하여, 감독관 이근(李懃)에게 옷을 내려 주었다.


원상의 딸을 남복을 입혀 거가를 따르게 하다[편집]

○以元庠女服男衣隨駕。

원상(元庠)의 딸을 남복(男服)을 입혀서 거가(車駕)를 따르게 하였다.


각도 주현의 지응(支應)하는 것을 불허하다[편집]

○司憲府上請勿許各道州縣支應, 上從之。

사헌부(司憲府)에서 각도(各道) 주현(州縣)의 지응(支應)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글과 옷과 술을 내려 준 데 대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이 감사하는 글[편집]

○東北面都宣撫巡察使鄭道傳奉箋謝恩曰:

書傳一札, 承聖訓之丁寧; 衣自九天, 稱臣身之長短。 又將宣醞, 賜以朋樽, 感與愧幷, 淚從言出。 竊念臣性識庸暗, 學問荒蕪。 動遭毁謗之交騰, 幾致性命之難保。 幸蒙上聖之扶佑, 獲全微喘之生存。 爰從潛邸之時, 以至開國之日。 心勞力瘁, 思欲效尺寸之忠; 智劣才疎, 愧略無絲毫之補。 今者, 親承明命, 祗謁先陵。 城邑之基尙存, 人民之業未復。 徵丁夫以來集, 兼晝夜以經營。 非曰不日而成, 可謂浹旬而畢。 是乃本於孝思之至切, 抑亦出於聖算之深長。 念臣何功, 得霑重眷! 玆蓋伏遇主上殿下, 推誠以御其下, 錄善不遺其微, 遂令睿恩, 及於陋質。 臣謹當爰咨爰度, 宣惠澤於一方; 載寢載興, 倍祈傾於萬壽。

동북면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이 전문(箋文)을 받들어 사은(謝恩)하였다.

"글은 일찰(一札)을 전하였으니 성훈(聖訓)의 정녕(丁寧)함을 받자왔고, 옷은 구천(九天)에서 내리었으니 신의 몸의 장단(長短)에 맞았나이다. 또 선온(宣醞)을 붕준(朋樽)으로 내리셨으니, 감사한 것은 부끄러움과 겹치옵고 눈물은 말을 따라 나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신은 성품이 어리석고 학문이 거칠어, 꿈쩍하면 훼방이 번갈아 일어남을 만나 거의 성명(性命)을 보전하기 어렵게 되었사온데, 다행히 성상(聖上)의 도움을 입어 잔명(殘命)의 생존(生存)을 보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잠저(潛邸) 때로부터 개국(開國)하는 날에 이르도록 마음과 힘을 다하여 척촌(尺寸)의 충성을 바치고자 하였사오나, 지혜가 용렬하고 재주가 소루하와 조금도 사호(絲毫)의 보탬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옵니다. 이번에 친히 밝은 명령을 받자와서 공연히 선릉(先陵)에 참알(參謁)하였습니다. 성읍(城邑)의 터[基]는 상존(尙存)하오나 인민의 생업은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와서 모아 밤낮으로 경영(經營)하였습니다. 불일성지(不日成之)[14]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사오나, 열흘이 넘어서 끝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효사(孝思)의 지극하고 간절한 데에 근본한 것이옵고, 또한 성산(聖算)[15]의 심장(深長)한 데서 나왔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신이 무슨 공(功)이 있기에 중한 은총에 젖으리이까! 이것은 대개 주상 전하께서 성심(誠心)을 미루시어 아랫사람을 어거하고 착한 것을 기록함에 작은 것을 빠뜨리지 않으심을 만나, 드디어 성스러운 은혜를 변변하지 못한 몸에 미치게 하신 것이오니, 신이 삼가 마땅히 묻고 헤아려서 혜택을 한 방면에 선포하고, 자나깨나 만수(萬壽)에 기원(祈願)함을 배(倍)나 더하겠나이다."


2月 30日[편집]

회암사에 거둥하다. 동북면의 사시 대향으로 인한 강원도 회양 등지의 폐해를 줄이게 하다[편집]

○丁未/幸檜巖寺, 見王師自超, 次于楓川。 召都承旨李文和曰: “江原道觀察使吳蒙乙所申排鎭, 事雖可慮, 猶緩也。 淮陽、金化、金城等州郡, 因東北面四時大享、使臣往來, 不多月日, 凋弊之言, 甚可寒心。 四時大享, 固不可廢, 何以免於凋廢? 以此問於右政丞金士衡。” 士衡對曰: “州郡本是路傍, 凋廢已久。 若許蠲免其甚苦難支之事, 又減小臣諸節往來之數, 庶得蘇息。”

회암사(檜巖寺)에 거둥하여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보고, 풍천(楓川)에 머물러서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불러 말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오몽을(吳蒙乙)이 상신(上申)한 배진(排鎭)하는 일은 염려는 되기는 하나 급한 일은 아니고, 회양(淮陽)·김화(金化)·금성(金城) 등 고을은 동북면(東北面)의 사시 대향(四時大享)으로 인하여, 사신(使臣)이 왕래하는 것이 월일(月日)이 많지 않은데, 조폐(凋弊)된다는 말은 대단히 한심하다. 사시 대향을 폐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 하면 조폐를 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에게 물으라."

사형이 대답하였다.

"여러 고을이 본래 길 옆에 있어서 조폐한 지가 이미 오랩니다. 만일 심히 괴롭고 지대(支待)하기 어려운 일은 감면하고, 또 소신(小臣)과 여러 사절(使節)의 왕래하는 수를 줄이면 거의 소식(蘇息)될 것입니다."


七年 三月[편집]

3月 1日[편집]

소마동에 거가를 멈추고 김사형·남은 등과 창업할 때의 일을 담론하며 즐기다[편집]

○戊申朔/至所磨洞駐駕, 與右政丞金士衡、宜城君南誾, 論潛邸相得之情及開國勤勞之事, 酒杯相屬, 親如平昔。 行至長湍, 命應敎李慥, 製文致奠于前朝侍中慶復興墓。 夜, 上夢作詩, 其下聯曰: “鼓鍾聲振通中外, 正是三韓萬世基。”

소마동(所磨洞)에 이르러 거가(車駕)를 머무르고,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과 더불어 잠저(潛邸) 때의 서로 친숙하던 정(情)과 개국(開國)하느라고 근로(勤勞)하던 일을 담론(談論)하며 술잔을 서로 주고받아 친하기가 옛날과 같았다. 행(行)하여 장단(長湍)에 이르러 응교(應敎) 이조(李慥)를 명해서 글을 지어 전조(前朝)의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의 묘(墓)에 치전(致奠)하게 하였다. 밤에 임금이 꿈에 시(詩)를 지었는데, 그 아래 연귀(聯句)는 이러 하였다.

"북소리와 종소리가 울리어 중외(中外)에 통하니,

정히 삼한(三韓) 만세(萬世)의 기지(基地)여라."


3月 3日[편집]

궁성 쌓는 인부들을 돌려보내고 죽은 자의 집은 3년 동안 복호하게 하다[편집]

○庚戌/命放宮城役徒。 其病死者, 摠五十四名, 令所在官各給米菽, 復其家三年。

궁성을 쌓는 역도(役徒)들을 놓아보내도록 명하였다. 병들어 죽은 자가 모두 54명인데,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각각 쌀·콩을 주고 그 집을 3년 동안 복호(復戶)하게 하였다.


대사헌 이직 등이 환관 조순을 그대로 안치하도록 상언하였으나 윤허치 않다[편집]

○大司憲李稷等上言: “奄臣曹恂, 當顯妃病亟之際, 內外之臣, 驚懼奔走, 殿下軫 慮, 祈禱未遑, 而恂乃懷貪黷, 陰取祈命所施銀器衣服馬匹, 納諸其家。 欺天罔上, 罪不容誅, 而恂幸蒙殿下好生之德, 得保首領, 退還其鄕, 於恂身得此至矣。 曾未期年, 召還京師, 聞者莫不驚駭。 雖不加罪, 依舊廢置, 以終其身。”

上曰: “李匡耳聾, 出納予言, 多致差誤, 欲令恂代之。 如恂不可, 誰可使者!” 遂不允。

대사헌(大司憲) 이직(李稷)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엄신(奄臣)[16] 조순(曹恂)이 현비(顯妃)의 병환이 급한 때를 당하여 중외(中外)의 신하가 놀랍고 두려워서 분주(奔走)하고, 전하께서 깊이 염려하시어 기도(祈禱)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순(恂)이 탐(貪)하고 더러운 생각을 품고 몰래 명(命)을 비는 데에 베푼 은기(銀器)·의복(衣服)·마필(馬匹)을 훔치어 제 집으로 들여갔으니,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어 죄가 목을 베임에서 용서될 수가 없는데도, 순(恂)이 다행히 전하의 호생지덕(好生之德)[17]을 입어서 머리를 보존하여 그 시골로 돌아갔으니, 순의 몸에 있어서는 이것을 얻은 것이 지극합니다. 일찍이 1년이 못되어 서울로 소환하셨으니 듣는 자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죄는 더하지 않더라도 전과 같이 폐(廢)하여 두어서 그 몸을 마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李匡)은 귀가 먹어서 내 말을 출납(出納)하는 데에 많이 차오(差誤)를 가져 오므로 순(恂)으로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다. 만일 순이 불가하다면 누가 부릴 만한 자인가?"

하고 드디어 윤허하지 않았다.


3月 4日[편집]

대간 낭리의 사령이 너무 많다며 서울로 돌아갈 것을 명하다[편집]

○辛亥/命臺諫郞吏曰: “郞吏使令煩多, 皆可還京。” 都承旨李文和曰: “臺諫不可以煩多, 還送。” 上曰: “縱令隨駕, 亦無臺省所與。”

대간(臺諫)의 낭리(郞吏)에게 명하였다.

"낭리의 사령(使令)이 너무 많으니 모두 서울로 돌아가라."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가 아뢰었다.

"대간(臺諫)은 번다(煩多)하다고 하여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비록 거가(車駕)를 따르게 하더라도 대성(臺省)이 참여할 데는 없다."


3月 5日[편집]

얼음이 얼다[편집]

○壬子/氷。

얼음이 얼었다.


대간의 낭뢰인 허지와 전시 등이 사령 수를 줄여서라도 임금을 호가하겠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補闕許遲、雜端田時等進曰: “臣等多使令者, 無非爲上也。 然以爲煩多, 則願減數扈駕。” 上曰: “業已遣還, 不宜更請。” 初臺諫侍從者各一員, 至是盡還。

보궐(補闕)[18] 허지(許遲)와 잡단(雜端)[19] 전시(田時) 등이 진언(進言)하였다.

"신 등이 사령(使令)이 많은 것은 모두가 성상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너무 번다하다면 수를 감하여 호가(扈駕)하기를 원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미 돌려보냈으니 다시 청할 것이 없다."

처음에 대간(臺諫)의 시종하는 자가 각각 한 사람이었는데 이때에 와서 모두 돌려보냈다.


3月 6日[편집]

얼음이 얼다[편집]

○癸丑/氷。

얼음이 얼었다.


도승지 이문화가 대간의 낭리를 다 돌려보낼 수 없다고 하다가 책망을 듣다[편집]

○都承旨李文和復言於上曰: “行在所, 不可無臺諫郞吏, 盡還恐爲不可。” 上曰: “所司當欲除弊, 自多率從, 豈爲除弊!”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가 다시 임금께 아뢰었다.

"행재소(行在所)에 대간(臺諫)의 낭리(郞吏)가 없을 수 없사오니 다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소사(所司)에서 마땅히 폐(弊)를 없애려고 해야 할 터인데, 자신이 솔종(率從)이 많으니 어떻게 제폐(除弊)가 되겠는가?"


임금의 초상을 계림부에 봉안하다[편집]

○遣判三司事偰長壽, 奉安上影于雞林府。 上在留後司, 命刑曹典書李貴齡等視事。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를 보내어 임금의 진영(眞影)을 계림부(鷄林府)에 봉안(奉安)하였다. 임금이 유후사(留後司)에서 형조 전서(刑曹典書) 이귀령(李貴齡) 등에게 명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3月 7日[편집]

조준에게 부임 인사를 하지 않은 강은과, 세자부의 책을 바꾸어내려 한 민안인이 탄핵되다[편집]

○甲寅/諫官劾藝文春秋館學士姜隱、前敎授官閔安仁。 隱新受職堂參之日, 獨右政丞金士衡上府後, 左政丞趙浚坐府, 隱不復行參禮, 直坐其次。 浚謂經歷右諫議尹思修曰: “姜學士何不行參禮?” 安仁嘗以家藏《綱目通鑑》, 獻前朝世子, 傳在今世子府。 安仁托奄人姜仁富, 欲以他冊換出, 世子以二冊, 示正字右拾遺黃喜。 喜復於世子曰: “新冊不如舊冊。” 世子遂不許。 思修、喜言於同舍郞, 皆劾之。

간관(諫官)이 예문춘추관(藝文春秋官) 학사(學士) 강은(姜隱)과 전 교수관(敎授官) 민안인(閔安仁)을 탄핵하였다. 은(隱)은 새로 직임(職任)을 받고 당참(堂參)하는 날에, 홀로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만이 부(府)에 오르고 뒤에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이 부(府)에 앉았는데, 은(隱)이 다시 참례(參禮)를 행하지 않고 바로 좌차에 앉았다. 준(浚)이 경력(經歷) 우간의(右諫議) 윤사수(尹思修)에게 이르기를,

"강 학사(姜學士)가 어째서 참례를 행하지 않는가?"

하였다. 안인(安仁)은 일찍이 제 집에 있는 《강목통감(綱目通鑑)》을 전조(前朝)의 세자(世子)에게 바쳤었는데, 전하여져서 지금의 세자부(世子府)에 있으므로, 안인(安仁)이 환자(宦者) 강인부(姜仁富)에게 부탁하여 다른 책과 바꾸어 내려고 하였다. 세자가 두 가지 책을 정자(正字) 우습유(右拾遺) 황희(黃喜)에게 보이니, 황희가 세자에게 사뢰기를,

"새 책이 묵은 책만 못합니다."

하였으므로, 세자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사수(思修)와 희(喜)가 동사랑(同舍郞)에게 말하여 모두 탄핵한 것이었다.


3月 9日[편집]

얼음이 얼다[편집]

○丙辰/氷。

얼음이 얼었다.


이천우를 보내어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최영지에게 관모와 병기를 주고 선주·평양 성의 수축 상황을 보게 하다[편집]

○遣中樞李天祐, 賜西北面都巡問察理使崔永沚冠帽兵器, 且令視宣州、平壤城修築之形。

중추(中樞) 이천우(李天祐)를 보내어 서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 최영지(崔永沚)에게 관모(冠帽)와 병기(兵器)를 주고, 또 선주(宣州)와 평양(平壤) 성(城)의 수축한 형상을 보게 하였다.


왕명을 어긴 궁성 감축관 정의·강회중 등 13인을 가두다[편집]

○囚宮城監築官鄭義、姜淮仲等十三人。 初命都城造築都監, 放役徒, 又以金湊、金師幸之言, 命輸軍資, 造成材木, 而後放之。 都監以前命放役徒, 湊等聞于上, 囚之。

궁성(宮城) 감축관(監築官) 정의(鄭義)와 강회중(姜淮仲) 등 13인을 가두었다. 처음에 도성 축조 도감(都城築造都監)에게 역도(役徒)들을 놓아보내라고 명하고, 또 김주(金湊)와 김사행(金師幸)의 말을 듣고 군자감(軍資監)을 조성(造成)할 재목을 운반 한 뒤에 놓아보내라고 명령하였었는데, 도감(都監)이 먼저 명령으로 역도들을 놓아보냈다. 그러므로 주(湊) 등이 임금께 아뢰어 가두게 된 것이었다.


3月 10日[편집]

유후사의 수창궁과 성을 수리하지 않았다 하여 유후 이원굉 등을 파면하다[편집]

○丁巳/上在留後司, 以壽昌宮及城子不修, 罷留後李元紘、副留後李沃, 以中樞院使崔有慶、副使辛克恭代之。

임금이 유후사(留後司)에서 수창궁(壽昌宮)과 성(城)을 수리하지 않았다 하여, 유후(留後) 이원굉(李元紘)과 부유후(副留後) 이옥(李沃)을 파면하고, 중추원 사(中樞院使) 최유경(崔有慶)과 부사(副使) 신극공(辛克恭)으로 대신하였다.


3月 11日[편집]

임금이 금교역 남교에 이르다[편집]

○戊午/上至金郊驛南郊。

임금이 금교역(金郊驛) 남교(南郊)에 이르렀다.


정의·강회중 등을 태형에 처하여 환임하게 하다[편집]

○笞鄭義、姜淮仲等, 還任。

정의(鄭義)와 강회중(姜淮仲)을 태형(笞刑)에 처하여 환임(還任)하게 하였다.


역참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안릉과 덕릉의 사시 제향을 청해도 찰리사가 섭행하게 하다[편집]

○命都評議使司曰: “安陵、德陵在慶源府, 遣使往來, 驛路受弊。 四時之祭, 宜令靑海道察理使攝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하였다.

"안릉(安陵)과 덕릉(德陵)이 경원부(慶源府)에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왕래하기 때문에 역로(驛路)가 폐(弊)를 받게 되니, 사시(四時)의 제향(祭享)을 청해도(靑海道) 찰리사(察理使)로 하여금 섭행(攝行)하게 하라."


3月 13日[편집]

온천에 이르다[편집]

○庚申/上至溫泉。

임금이 온천(溫泉)에 이르렀다.


3月 14日[편집]

얼음이 얼다[편집]

○辛酉/氷。

얼음이 얼었다.


3月 15日[편집]

산채를 종묘에 천신하다[편집]

○壬戌/遣使薦山菜于宗廟。

사신을 보내어 산채(山菜)를 종묘(宗廟)에 천신(薦新)하였다.


3月 17日[편집]

제주 축마 별감 김계란이 양마 8필을 바치다. 김사형에게 말 한 필을 내리다[편집]

○甲子/濟州畜馬別監金桂蘭來獻良馬八匹, 賜右政丞金士衡馬一匹。

제주(濟州) 축마 별감(畜馬別監) 김계란(金桂蘭)이 좋은 말 8필을 와서 바쳤으므로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에게 말 한 필을 내려 주었다.


제주인 고여충을 축마 별감으로 삼고 제주 만호에게 비단과 술을 내리다[편집]

○以濟州人高汝忠, 爲畜馬別監。 賜濟州萬戶金天伸綺絹二匹、內醞二百甁, 仍賜汝忠母米菽三十石。

제주(濟州) 사람 고여충(高汝忠)으로 축마 별감(畜馬別監)을 삼고, 제주 만호(濟州萬戶) 김천신(金天伸)에게 비단 2필과 내온(內醞) 2백 병을 주고, 인하여 여충(汝忠)의 어미에게 쌀·콩 30석을 주었다.


제주에 세공마 백 필과 소 백 두를 바치게 하다[편집]

○命濟州歲貢馬一百匹、牛一百頭。

제주(濟州)에 명하여 세공마(歲貢馬) 1백 필과 소 1백 두(頭)를 바치게 하였다.


3月 19日[편집]

서북면 도순문사 최영지가 배알하다[편집]

○丙寅/西北面都巡問使崔永沚來謁。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 최영지(崔永沚)가 내알(來謁)하였다.


광주에서 새로 종이 주조되었으므로 백악과 목멱산에 제사를 지내다[편집]

○廣州新鑄鍾成, 設祭於白岳、木覓。

광주(廣州)의 새로 주조(鑄造)한 종(鐘)이 이루어졌으므로 백악(白岳)과 목멱(木覓)에 제사를 베풀었다.


3月 20日[편집]

목성이 여귀와 적시를 범하여 7일간 머물다[편집]

○丁卯/木星犯輿鬼 積尸, 留至壬申。

목성(木星)이 여귀(輿鬼)와 적시(積尸)를 범(犯)하여 26일까지 머물러 있었다.


정도전과 이지란이 복명하니 치하하다. 남은이 절제사를 혁파할 것을 진언하다[편집]

○東北面都宣撫巡察使鄭道傳、都兵馬使李之蘭等復命, 各賜鞍馬, 仍賜宴。 上謂道傳曰: “卿之功浮于尹瓘矣。 瓘只是築九城樹碑而已, 卿區畫州郡站路, 以至官吏名分, 莫不定制, 令朔方道無異諸道, 功不細矣。” 又謂宜城君南誾曰: “忠言逆耳, 利於行。 卿等宜言之無諱。” 因問都承旨李文和曰: “逆耳之言, 必自臺諫來。 予性頗急, 或未優容, 惟爾在左右, 敢言勿懼。” 誾進言曰: “上在潛邸, 不曾握兵, 何有今日? 如臣者亦無能保矣。 當開國之初, 令諸功臣掌兵可也, 今卽位已久, 宜革諸節制使, 合爲官軍, 庶爲萬全。” 上曰: “孰謂南誾爲無實! 此言誠始終之戒也。”

동북면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과 도병마사(都兵馬使) 이지란(李之蘭) 등이 복명(復命)하니 각각 안마(鞍馬)를 주고, 인하여 잔치를 내려주고 임금이 도전에게 일렀다.

"경의 공(功)이 윤관(尹瓘)보다 낫다. 윤관은 다만 구성(九城)을 쌓고 비(碑)를 세운 것뿐인데, 경은 주군(州郡)과 참로(站路)를 구획(區劃)하고 관리의 명분(名分)까지 제도를 정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삭방도(朔方道)를 다른 도(道)와 다를 바가 없이 하였으니 공이 작지 않다."

또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에게 일렀다.

"충성된 말이 귀에는 거슬리나 행실에는 이로우니, 경들은 마땅히 말하여 숨기지 말라."

인하여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분부하였다.

"귀에 거슬리는 말은 반드시 대간(臺諫)에서 오지! 내 성품이 매우 급해서 혹 너그럽게 용납하지 못하니, 네가 좌우(左右)에 있어서 과감하게 말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은(誾)이 진언(進言)하였다.

"상감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일찍이 군사를 장악(掌握)하고 있지 않았던들 어떻게 오늘날이 있사오며, 신 같은 자도 또한 보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개국하는 처음을 당하여 여러 공신(功臣)으로 하여금 군사를 맡게 한 것은 가하였지마는, 지금 즉위(卽位)하신 지가 이미 오래오니, 마땅히 여러 절제사(節制使)를 혁파하고 합하여 관군(官軍)을 만들면 거의 만전(萬全)할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누가 남은(南誾)을 무실(無實)하다 하는가? 이 말이 진실로 시종(始終)의 경계이라."


사헌부에서 거친 말과 행동을 한 송결을 탄핵하다[편집]

○司憲府劾侍史宋潔。 潔麤鄙無學, 坐本府, 令府吏取其新造鐙, 置案上, 擧示參臺監察曰: “此鐙佳否?” 監察趙啓生言諸同列, 不祗迎。

사헌부(司憲府)에서 시사(侍史) 송결(宋潔)을 탄핵하였다. 결(潔)이 거칠고 더럽고 상스러우며 배운 것이 없는데, 본부(本府)에 앉아서 부리(府吏)로 하여금 새로 만든 등자(鐙子)를 가져오게 하여 안상(案上)에 놓고 들어서 참대 감찰(參臺監察)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이 등자가 좋은가 나쁜가?"

감찰(監察) 조계생(趙啓生)이 동렬(同列)에게 말하여 지영(祇迎)하지 않았다.


3月 21日[편집]

임금이 온천을 떠나 천신사에 이르다[편집]

○戊辰/上發溫泉, 至天神寺。

임금이 온천(溫泉)을 떠나서 천신사(天神寺)에 이르렀다.


3月 22日[편집]

목촌교에 이르다[편집]

○己巳/至木村郊。

목촌교(木村郊)에 이르렀다.


제주의 축마 점고사 등이 와서 우마의 등록 장부를 바치다[편집]

○濟州畜馬點考使呂稱、監察朴安義等來獻牛馬籍。 馬四千四百十四匹, 牛一千九百十四頭。

제주(濟州)의 축마 점고사(畜馬點考使) 여칭(呂稱)과 감찰(監察) 박안의(朴安義) 등이 와서 우마(牛馬)의 장적(帳籍)을 바쳤는데, 말이 4천 4백 14필이고 소가 1천 9백 14두였다.


전 밀직사 김선치의 졸기[편집]

○前密直使金先致卒。 先致, 尙州人, 判宗簿寺事君實之子。 仕前朝, 初拜散員, 遷至郞將。 壬午, 從全羅道都巡問使柳濯禦倭寇, 擊殺數十人。 壬辰, 判官羅州, 有巨室壓珍島郡吏爲賤者, 卽決爲良。 入爲都官、吏部二郞中, 出按全羅、楊廣二道。 辛丑, 以將作監, 從西北面都元帥李巖禦紅寇, 至于西京, 賊勢甚熾, 諸將爲懼。 都元帥使先致, 焚府庫, 欲使賊無敢資糧, 先致曰: “若焚府庫, 賊無資糧, 卒入國中, 非計也。” 都元帥怒責之。 大將安祐在傍徐曰: “此言似矣。” 都元帥乃從之。 是冬, 賊陷松都, 先致從其兄得培, 與諸將克復京城。 明年, 拜衛尉、判事, 累遷至密直副使。 僞朝甲寅, 同知密直, 乙卯, 陞崇敬尹。 戊午, 年六十一, 封洛城君, 仍賜推忠保節贊化功臣號。 壬戌, 退居尙州, 丁丑, 赴京, 上老之, 賜米命還。 至是, 卒于家, 年八十一。 子三人, 錘、銓、鈞。

전 밀직 사(密直使) 김선치(金先致)가 졸(卒)하였다. 선치(先致)는 상주(尙州) 사람인데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김군실(金君實)의 아들이다. 전조(前朝)에 벼슬하여 처음에 산원(散員)을 제수 받았다가 옮기어 낭장(郞將)에 이르고, 임오년에 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 유탁(柳濯)을 따라 왜구를 막아서 수십 인을 쳐 죽이었다. 임진년에 나주 판관(羅州判官)이 되었는데, 세력가[巨室]에서 진도(珍島) 군리(郡吏)를 강제로 천인(賤人)을 만든 자가 있으므로 곧 처결(處決)하여 양인(良人)을 만들었다. 들어와서 도관(都官)·이부(吏部)의 낭중(郞中)이 되었고, 나가서 전라(全羅)·양광(楊廣) 두 도를 안찰(按察)하였으며, 신축년에 장작감(將作監)[20]으로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 이암(李巖)을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막았는데, 서경(西京)에 이르니 적의 기세가 대단히 치성(熾盛)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였었다. 도원수가 선치(先致)를 시켜 부고(府庫)를 불태워서 적으로 하여금 양식을 의뢰할 데가 없게 하려 하니, 선치가 말하였다.

"만일 부고를 불태워서 적의 식량을 의뢰할 데가 없으면 급히 나라 안으로 들어올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도원수가 노하여 꾸짖으니 대장(大將) 안우(安祐)가 옆에 있다가 천천히 말하였다.

"이 말이 그럴듯하다."

도원수가 그대로 따랐다. 그해 겨울에 적이 송도(松都)를 함락하니, 선치가 그의 형 김득배(金得培)를 따라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경성(京城)을 극복(克服)하였다. 이듬해에 위위 판사(衛尉判事)[21]를 제수 받고 여러 번 옮기어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고, 위조(僞朝) 갑인년에 동지밀직(同知密直)이 되었으며 을묘년에 숭경 윤(崇敬尹)에 승진하였다. 무오년에 나이 61세로 낙성군(洛城君)에 봉하여졌고, 인하여 추충 보절 찬화 공신(推忠保節贊化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임술년에 상주(尙州)에 퇴거(退居)하였다. 정축년에 서울에 이르니 임금이 늙은이로 여기어 쌀을 주고 돌아가기를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집에서 죽으니 나이 81세였다. 아들이 세 사람인데, 김추(金錘)·김전(金銓)·김균(金鈞)이다.


3月 23日[편집]

유후사에 이르니, 좌정승 조준이 영알하다[편집]

○庚午/至留後司, 左政丞趙浚迎謁。

유후사(留後司)에 이르니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이 영알(迎謁)하였다.


3月 24日[편집]

4도의 주군에 유후사 성과 새 도성을 나누어 책임 보수하도록 맡기다[편집]

○辛未/分屬四道州郡於留後司城及新都城, 以時修補。 京畿右道、豐海道屬留後司, 左道、忠淸道屬新都。

4도(道)의 주군(州郡)을 유후사성(留後司城)과 새 도성(都城)에 나누어 붙여서 때때로 성을 수보(修補)하게 하였는데, 경기우도(京畿右道)와 풍해도(豊海道)는 유후사(留後司)에 붙이고, 경기좌도와 충청도는 신도(新都)에 붙이었다.


3月 25日[편집]

이죄 이하를 사유하다[편집]

○壬申/宥二罪以下。

이죄(二罪) 이하를 용서하였다.


도평의사사가 임진강 배 위에서 임금께 진향하는데 서풍이 거세게 불다[편집]

○都評議使司享上於臨津船上。 西風大起, 塵沙眛目。 世子及大臣, 迎謁碧蹄驛。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임진강(臨津江) 선상(船上)에서 임금께 진향(進享)하였는데, 서풍(西風)이 크게 일어 티끌과 모래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세자와 대신이 벽제역(碧蹄驛)에서 영알(迎謁)하였다.


3月 26日[편집]

온천에서 돌아오다[편집]

○癸酉/至自溫泉。

온천(溫泉)에서 돌아왔다.


3月 28日[편집]

궁성을 순시하다[편집]

○乙亥/上巡視宮城。

임금이 궁성을 순시하였다.


3月 29日[편집]

헌사에서 모친상 중에 길복을 입고 녹을 받은 민중리 등을 탄핵하다[편집]

○丙子/憲司劾檢校中樞院副使閔仲理、迎日監務盧植、鹽場官趙以道、司僕注簿陸晋等以爲: “仲理丁母憂, 無特旨, 從吉受祿, 非人子之道。 請收職牒, 流于外方, 終身不齒。 以道、植, 私置鹽盆, 聞敬差官至毁盆。 請收職牒, 處之外方。 晋奉使全羅, 增乘驛馬。 幷收職牒, 依律決罪。” 命置仲理于其鄕, 杖以道, 植, 流于外, 宥晋。 初晋上言: “冬日牧丹嘉卉等物, 多在全羅諸島。” 於是, 命晋以往。 晋得之來獻, 上嘉納, 賜廐馬一匹。

헌사(憲司)에서 검교(檢校)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민중리(閔仲理)·영일 감무(迎日監務) 노식(盧植)·염장관(鹽場官) 조이도(趙以道)·사복 주부(司僕注簿) 육진(陸晉) 등을 탄핵하여 말하였다.

"중리(仲理)는 모상(母喪)을 당하여 특별한 명령도 없이 길복(吉服)을 입고 녹(祿)을 받았으니, 인자(人子) 된 도리가 아니옵니다. 청하옵건대, 직첩을 거두고 외방에 귀양보내어 종신토록 등용하지 마시옵고, 이도(以道)와 식(植)은 사사로이 염분(鹽盆)을 설치하였다가 경차관(敬差官)이 온다는 말을 듣고 염분을 헐어 버렸사오니, 청하옵건대, 직첩을 거두어 외방에 처하고, 진(晉)은 전라도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역마(驛馬)를 증가하여 탔사오니, 아울러 직첩을 거두고 율(律)에 의하여 죄를 결단하소서."

명하여 중리(仲理)는 그 시골에 두게 하고, 이도(以道)와 식(植)은 곤장을 때려 외방에 귀양보내게 하고, 진(晉)은 용서하였다. 처음에 진(晉)이 상언(上言)하기를,

"동일목단(冬日牧丹)과 아름다운 풀들이 전라도(全羅道)의 여러 섬에 많이 있습니다."

하였으므로, 진(晉)을 명하여 가게 하였는데, 진이 이를 얻어 가지고 와서 바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고, 구마(廐馬) 한 필을 주었었다.


왕사 자초가 회암사를 하직하고 용문사로 가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王師自超請辭檜巖寺, 欲往龍門, 不允。

왕사(王師) 자초(自超)가 회암사(檜巖寺)를 하직하고 용문사(龍門寺)로 가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제주사람 변우와 강희 등이 양마를 바치다[편집]

○濟州人邊祐、姜熙等, 獻良馬, 各賜綺絹。

제주(濟州) 사람 변우(邊祐)와 강희(姜熙) 등이 좋은 말을 바치니, 각각 비단을 내려 주었다.


각도 기민을 진휼하게 하다[편집]

○命賑各道飢民。

각도의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도록 명하였다.


이달은 가물었다[편집]

○是月, 旱。

이달에 가물었다.


七年 夏四月[편집]

4月 1日[편집]

정릉에 가다[편집]

○丁丑朔/如貞陵。

정릉(貞陵)에 갔다.


4月 3日[편집]

목성이 적시성을 범하다[편집]

○己卯/木星犯積尸。

목성(木星)이 적시(積尸)를 범하였다.


궁성 감역관 정의 등 16인을 귀양보내다[편집]

○流宮城監役官鄭義、姜淮仲等十六人于外方。

궁성 감역관(宮城監役官) 정의(鄭義)와 강회중(姜淮仲) 등 16인을 외방에 귀양보내었다.


각도 경차관이 어량의 장부를 만들고 세를 거두어 유비창에 들이다[편집]

○各道敬差官籍魚梁收稅, 納有備倉。

각도의 경차관(敬差官)이 어량(魚梁)의 적(籍)을 만들어서 세(稅)를 거두어 유비창(有備倉)에 들였다.


간관 박신 등이 관작을 줄이고 녹과전을 감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諫官朴信等上言: “前朝之季, 官爵冗濫, 兩府之數, 多至七十。 殿下卽祚, 減而省之, 然未十年, 數至五十有六。 竊見周官之制, 唯以三公六卿, 治天下, 今朝廷亦以六部治之。 惟我國家, 地不過千里, 宰相之多, 不啻倍蓰, 旅進旅退, 名器甚濫。 雖不能取法周官及朝廷, 願汰商議之職及藝文春秋館新設之職, 漢城府亦置一尹, 自餘小官, 可汰可幷者, 令有司詳定施行。 且忠信重祿, 雖爲勸士之道, 蓄積備虞, 實爲國家之長計。 殿下以祿俸未足, 命戶曹給田司, 加定祿科之田, 誠爲厚矣。 然諸道之田, 除各科已定外, 軍資所屬, 不過十萬餘結, 而每因陳損, 租入實少。 若移定祿科, 則非特乏於蓄積, 中外年例之用, 亦且不足矣。 儻有邊警, 何以應之? 況原定祿科租稅, 難以轉輸, 尙且後期。 今又加定, 則民力不支矣。 願令三司, 考其原額, 量減祿科, 勿以軍資之田加定, 以備蓄積, 以裕民力。” 上曰: “兩府當商量減省。”

간관(諫官) 박신(朴信)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전조(前朝)의 말엽에 관작(官爵)이 쓸데없이 많아서, 양부(兩府)의 수효가 많기가 70에 이르렀었는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에 감(減)하여 줄였사오나, 10년이 되지 못하여 수효가 56에 이르렀습니다. 주관(周官)의 제도를 보건대, 오직 삼공(三公)·육경(六卿)으로 천하를 다스렸사옵고, 지금 명나라 조정에서도 또한 육부(六部)로 다스리는데, 오직 우리 나라는 땅이 천리에 불과하면서도 재상(宰相)의 많기가 배(倍)나 될 뿐만 아니어서, 떼로 나오고 떼로 물러가니 명기(名器)가 심히 넘치옵니다. 비록 주관(周官)과 명나라 조정은 본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원하옵건대, 상의(商議)의 직임(職任)과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신설한 직책을 없애고, 한성부에도 또한 윤(尹) 하나만을 두고, 그 나머지 작은 벼슬은 없애고 합병할 수 있는 것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상정(詳定)하게 하여 시행하소서. 또 충신 한 사람에게 녹(祿)을 중하게 하는 것이 비록 선비를 권하는 방도는 되오나, 저축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하는 것이 실(實)은 국가의 좋은 계책이 되옵니다. 전하께서 녹봉(祿俸)이 부족함으로써 호조(戶曹)와 급전사(給田司)에 명하여 녹과전(祿科田)을 더 정하게 하셨으니 참으로 후(厚)한 일입니다. 그러하오나 여러 도(道)의 밭이 각과(各科)의 이미 정한 것을 제외하면 군자(軍資)에 속하는 것이 10만여 결(結)에 불과하온데, 매양 묵고 손실[陳損]된 것으로 인하여 조(租)로 들어오는 것이 실상은 적사오니, 만일 녹과(祿科)로 옮기어 정한다면 축적(蓄積)에만 절핍(絶乏)이 생길 뿐 아니라, 중외(中外)의 연례(年例)의 용도도 또한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변경(邊警)이 있다면 무엇으로 응하겠습니까? 하물며, 원래 정한 녹과(祿科)의 조세(租稅)도 수운(輸運)하기가 어려워서 오히려 시기가 뒤지고 있사온데, 지금 또 더 정한다면 민력(民力)이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삼사(三司)로 하여금 그 원래 액수를 상고하여 녹과를 알맞게 감(減)하고, 군자전(軍資田)으로 더 정하지 말아서 저축에 대비하고, 민력을 유족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양부(兩府)에서 상량(商量)하여 감하여 덜라."


4月 4日[편집]

광주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한 종을 보다. 군사 1,300명을 동원, 서울 종각 아래에 옮기다[편집]

○庚辰/幸廣州觀新鑄鐘, 賜提調權仲和鞍馬。 以左右道軍一千三百名, 輸至市街樓下。 初, 命鑄鐘, 尋構樓于市街, 以權仲和、李恬爲提調官。 恬剛愎自用, 不聽人言, 三鑄未成, 上專屬仲和。 仲和博採衆議, 又騁巧思, 一擧鑄成, 上喜, 有是賞。

광주(廣州)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鑄造)한 종을 보고 제조(提調) 권중화(權仲和)에게 안마(鞍馬)를 내려주고, 좌·우도(左右道) 군사 1천 3백 명을 풀어서 시가(市街)의 누(樓) 아래에 수운(輸運)하여 놓았다. 처음에 종을 주조하라고 명하고, 조금 있다가 시가(市街)에 누(樓)를 짓고 권중화와 이염(李恬)으로 제조관을 삼았었는데, 염(恬)은 성질이 강퍅(剛愎)하여 제 마음대로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아서, 세 번이나 주조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오로지 중화(仲和)에게 맡기니, 중화가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청취하고, 또 교묘한 생각을 써서 한 번에 주조하여 만드니, 임금이 기뻐하여 이 상(賞)이 있었던 것이었다.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이 지은 종의 명(銘)과 그 서문[편집]

○命藝文、春秋館學士權近, 作鐘銘。 其序曰:

惟朝鮮受命之三年, 定都于漢水之陽, 越明年, 始營宮寢, 其夏, 命攸司鑄大鐘。 旣成, 建閣于大市街以懸之, 所以勒成功垂鴻休也。 自昔有國家者, 建大功定大業, 則必銘于鐘鼎, 故其休聲鏗鍧, 聳動後人之耳目。 且於通都大邑之中, 晨昏撞擊, 以嚴人民作息之限, 鐘之用大矣。 恭惟我殿下, 自在潛邸, 德望日隆, 天命人心之歸, 自有不能已者。 群賢勵翼, 咸効其智力, 而一朝代高麗氏而有之, 宵旰軫慮, 立經陳紀, 以基子孫萬世之太平, 功可謂建而業可謂定矣。 是宜銘之, 昭示後來。 且《易》曰: “天地之大德曰生,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 曰仁。” 言聖人以天地生物之心爲心, 而擴充之, 故能保有其位。 是天人雖殊, 其心則一也。 今我殿下, 卽位之日, 兵不血刃, 中外晏然, 民之苦於虐政者, 皆知有生生之樂。 是則好生之德, 蔑以加矣。 是尤不可不銘也。

銘曰:

於穆我王, 受命溥將。 聿來新邑, 于漢之陽。 昔在松都, 國步斯蹙。 我王代之, 除虐以德。 民不見兵, 會朝淸明。 賢智効力, 躋于太平。 遠近如歸, 旣庶旣繁。 乃鑄厥鐘, 乃聲晨昏。 我功我烈, 是勒是鐫。 鎭于新都, 於千萬年。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學士)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종(鐘)의 명(銘)을 지었는데, 그 서문(序文)은 이러하였다.

"조선(朝鮮)이 천명(天命)을 받은 지 3년에 도읍을 한수(漢水) 북쪽에 정하고, 이듬해에 비로소 궁침(宮寢)[22]을 경영하고 그해 여름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큰 종을 주조하여 이미 완성되매, 큰 시가(市街)에 누각(樓閣)을 세워서 달았으니, 성공한 것을 새기고 큰 아름다움을 길이 전하자는 것이다. 옛날로부터 국가를 차지한 자가 큰 공을 세우고 큰 업(業)을 세우면 반드시 종(鐘)과 솥[鼎]에 새기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소리가 갱갱(鏗鏗) 굉굉(鍧鍧)하여 후인(後人)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시키고, 또 통도(通都)와 대읍(大邑) 가운데에서 새벽과 어둘 무렵에 쳐서 인민의 일어나고 쉬는 시한(時限)을 엄격하게 하니, 종의 쓸모가 크다. 공경하여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로부터 덕망(德望)이 날로 높아져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귀부(歸附)가 저절로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어진 사람들이 힘쓰고 보좌하여 모두 그 지력(智力)을 다해서 하루아침에 고려씨(高麗氏)를 대신하여 차지하고, 소의 한식(宵衣旰食)하며 생각을 다하여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베풀어서 자손 만대의 태평을 기초하였으니, 공(功)은 세워졌고 업(業)은 정하여졌다고 이를 만하겠다. 이것을 마땅히 새기어 밝게 후래(後來)에 보여야 하겠다. 또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천지(天地)의 대덕(大德)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대보(大寶)를 위(位)라고 하는데, 무엇으로 위(位)를 지키는가? 그것은 인(仁)이다.’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천지(天地)의 생물지심(生物之心)으로 마음을 삼아서 확충(擴充)하기 때문에 능히 그 위(位)를 보유(保有)함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나 그 마음은 한가지인 것이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시는 날에 군사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중외(中外)가 편안하고 조용하여, 백성이 학정(虐政)에 시달리던 자가 모두 생생(生生)의 낙(樂)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호생(好生)의 덕(德)이 더할 수가 없으므로 이것을 더욱 명(銘)하지 않을 수 없다."

명(銘)에는 이러하였다.

"심원(深遠)하신 우리 임금께서 천명을 받은 것이 넓고 컸다. 이에 와서 새 도읍을 세우니 한수(漢水) 북쪽이었다. 옛날 송도(松都)에 있었을 때에 국운(國運)이 쭈그러들어, 우리 임금께서 이를 대신하여 포학을 덕으로 제거하였다. 백성이 전쟁을 보지 못하고 일조(一朝)에 청명(淸明)하여졌고,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힘을 다하여 태평을 이룩하여 놓았다.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귀부(歸附)하여 이미 많아졌고 이미 번성하여졌다. 이에 저 종(鐘)을 주조하여 새벽과 저녁에 소리를 울리게 하고, 내 공(功)과 내 업(業)을 이에 새기고 이에 파낸다. 신도(新都)를 진압하는 것이 천만년이리라."


삼사에 명하여 염세 및 어량과 고깃배의 세금을 조사하게 하다[편집]

○命三司, 同各道敬差官, 點煮海燔沙鹽稅多少及魚梁船稅多少。

삼사(三司)에 명하여 각도의 경차관(敬差官)과 함께 바다를 졸이[煮海]고 모래를 굽[燔沙]는 염세(鹽稅)의 다소(多少)와, 어량(魚梁)과 선세(船稅)의 다소(多少)를 조사하게 하였다.


양천이 분명치 않은 자에 대한 처리 방법 등을 노비 변정 도감에 지시하다[편집]

○上令都承旨李文和, 傳旨都堂曰:

近者辨定都監請申良賤之事, 其良籍明白者從良, 賤籍明白者從賤, 良賤之籍俱不明者, 決爲身良役賤, 定屬官司使令。 今宣州站及寧州站屬, 文契不明者, 訴良於辨定, 又以不明決爲身良役賤, 還屬兩站, 則賤隷如一, 役使必矣。 年代旣久, 永作奴婢, 其冤抑可得伸乎? 自今其良籍不明者, 毋屬外方各郡, 若京中各司使令、城門院館把直, 許令定屬, 其有特立奇功者, 宜受職賞, 其女子與外孫, 永爲良人。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도당(都堂)에 전지(傳旨)하였다.

"근자에 변정 도감(辨定都監)에서 신청한 양천(良賤)에 대한 일은, 양인(良人) 적(籍)이 명백한 자는 양인(良人)이 되게 하고, 천인(賤人)의 적(籍)이 명백한 자는 천인(賤人)이 되게 하며, 양천(良賤)의 적(籍)이 함께 명백하지 못한 자는 몸은 양인(良人)이 되게 하고 역(役)은 천역(賤役)으로 결정하여 관사(官司)의 사령(使令)으로 정속(定屬)시킨다 하였는데, 지금 선주참(宣州站)과 영주참(寧州站)에 소속된 문적[文契]이 명백하지 못한 자가 변정 도감에 양인(良人)으로 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또 문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몸은 양(良), 역(役)은 천(賤)으로 결정하여 도로 두 참(站)에 소속시키면 반드시 천례(賤隷)와 똑같이 역사(役使)시킬 것이니, 연대가 오래되면 영영 노비(奴婢)가 될 것이다. 그 원통하고 억울함을 펼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양적(良籍)이 분명하지 못한 자는 외방 각 고을에 소속시키지 말고, 경중(京中) 각사(各司)의 사령(使令)과 성문(城門)·원관(院館)의 파직(把直) 같은 것에 정속(定屬)시키도록 허락하여, 특별히 보기드문 공(功)을 세운 자가 있으면 마땅히 벼슬과 상(賞)을 주고, 그 딸자식과 외손은 영구히 양인이 되게 하라."


4月 5日[편집]

임금이 마전포에서 돌아오다[편집]

○辛巳/上至自麻田浦。

임금이 마전포(麻田浦)에 돌아왔다.


4月 6日[편집]

간관이 아일마다 조회 받을 것과 종 운반을 대장(隊長)에게 시킬 것을 아뢰다[편집]

○壬午/諫官朴信等詣殿庭以聞曰: “古昔帝王, 每日臨朝, 親決萬機。 今國朝以六衙日視朝, 尙且廢朝, 于今累月矣。 願自今每當衙日, 坐正殿受朝, 以親萬機。 且時方農月, 寸陰猶惜。 今發農民, 轉輸大鐘, 誠爲未便。 願令隊長、隊副轉輸。” 上曰: “所言然矣。 然以微疾, 天氣尙寒, 未克視朝, 將如請矣。 其輸鐘之弊則余亦深慮矣。 令出有日, 郡縣必有招集矣。” 乃命禮曹曰: “自今每朝衙, 典書以下入庭班定, 然後余出視朝。”

간관(諫官) 박신(朴信) 등이 대궐 뜰에 나아와서 아뢰었다.

"옛날 제왕(帝王)은 매일 조정에 임하여 친히 만기(萬機)를 결단하였사온데, 지금 국조(國祖)에서는 여섯 아일(衙日)을 당하면 정전(正殿)에 앉아 조회를 보는데도, 오히려 조회를 폐한 것이 지금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매양 아일(衙日)을 당하면 정전(正殿)에 앉아 조회를 받고 만기(萬機)를 친히 하소서. 또 때가 바야흐로 농삿달이어서 촌음(寸陰)도 오히려 아끼옵는데, 지금 농민을 발하여 큰 종(鐘)을 운반하오니 참으로 미편(未便)하옵니다. 원하옵건대, 대장(隊長)·대부(隊副)로 하여금 수운(輸運)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말한 바가 옳다. 그러나 조금 병(病)이 있고 천기(天氣)가 아직 차서 조회를 보지 못하였다. 장차 청(請)한 것과 같이 하겠다. 종(鐘)을 운반하는 폐단은 나도 또한 심려(深慮)하나, 명령이 나간 지가 며칠이 되었으니, 군현(郡縣)에서 반드시 소집(召集)하였을 것이다."

이에 예조(禮曹)에 명령하였다.

"이제부터 매양 조회하는 아일(衙日)에 전서(典書) 이하가 뜰에 들어와서 반열(班列)을 정한 연후에야, 내가 나가서 조회를 보겠다."


4月 8日[편집]

서리가 내리다[편집]

○甲申/霜。

서리가 내리었다.


익명서를 만들어 전 현령 이적을 무고한 김귀생을 사지를 찢어 조리 돌리다[편집]

○前散員金貴生爲匿名書, 誣前縣令李迪謀亂, 事覺, 支解以徇。 初貴生與迪, 爭奴婢有隙, 及都堂得匿名書, 訊迪曰: “汝讎爲誰?” 迪曰: “唯貴生耳。” 都堂卽使人執貴生, 搜其家, 果得匿名書草。

전 산원(散員) 김귀생(金貴生)이 익명서(匿名書)를 만들어 전 현령(縣令) 이적(李迪)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誣告)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지(四肢)를 찢어서 조리 돌리었다. 처음에 귀생(貴生)이 적(迪)과 더불어 노비(奴婢)를 가지고 다투어 틈이 생겼었는데, 도당(都堂)에서 익명서(匿名書)를 보고서 적(迪)을 신문하기를,

"네 원수가 누구냐?"

하니, 적(迪)이 말하기를,

"오직 귀생뿐입니다."

하였으므로, 도당(都堂)에서 곧 사람을 시켜 귀생(貴生)을 잡고 그 집을 수색하였더니 과연 익명서(匿名書)의 초본(草本)을 얻었다.


4月 9日[편집]

서북면 영원진을 영청현에 합하여 영녕현으로 개청하다[편집]

○乙酉/以西北面寧遠鎭, 合永淸縣, 號永寧縣。

서북면(西北面) 영원진(寧遠鎭)을 영청현(永淸縣)에 합하고 이름을 영녕현(永寧縣)이라 하였다.


4月 10日[편집]

천둥치고 눈이 내리다. 임금이 마전포에 가다[편집]

○丙戌/雷雪。 上如麻田浦。

천둥이 치고 눈이 내렸다. 임금이 마전포(麻田浦)에 갔다.


4月 11日[편집]

서리가 내리다[편집]

○丁亥/霜。

서리가 내렸다.


양가 도승통 상부가 중이 술마시는 것을 금할 것을 청하다[편집]

○兩街都僧統尙孚上請禁僧飮酒, 上令憲司痛禁, 犯者, 長髮充軍。

양가 도승통(兩街都僧統) 상부(尙孚)가 중[僧]이 술 마시는 것을 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헌사(憲司)로 하여금 엄히 금(禁)하게 하고, 이를 범(犯)하는 자는 머리를 길러 충군(充軍)하게 하였다.


4月 13日[편집]

동교에 거둥하여 목마장을 시찰하다[편집]

○己丑/幸東郊, 視牧馬場。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목마장(牧馬場)을 시찰하였다.


4月 14日[편집]

여장(女裝)으로 박수 노릇하며 백성들을 속인 복대를 복주하다[편집]

○庚寅/妖人卜大伏誅。 卜大, 文州人, 服女服爲覡, 惑亂愚民。

요인(妖人)[23] 복대(卜大)가 복주(伏誅)를 당하였다. 복대(卜大)는 문주(文州) 사람인데, 여복(女服)을 입고 박수 노릇을 하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혹란(惑亂)시켰다.


4月 15日[편집]

종루에 거둥하여 종 다는 것을 보다[편집]

○辛卯/幸鐘樓, 觀懸鐘。

종루(鐘樓)에 거둥하여 종을 다는 것을 보았다.


겸 서운 주부 김서가 월식을 예측하여 아뢰었는데 끝내 월식이 없었다[편집]

○兼書雲注簿金恕啓月蝕, 卒不食。

겸 서운 주부(兼書雲注簿) 김서(金恕)가 월식(月食)을 아뢰었는데, 끝내 먹히지 아니하였다.


4月 16日[편집]

임금이 조회를 보다. 산남왕 온사도가 조회에 참석하다[편집]

○壬辰/上視朝。 山南王溫沙道等朝謁。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 등이 조회하여 뵈었다.


경복궁 왼쪽 산등성이의 소나무가 마르다[편집]

○景福宮左岡松枯, 命撤近岡人家。

경복궁(景福宮) 좌강(左岡)의 솔[松]이 마르므로, 그 가까이 있는 인가(人家)를 철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4月 17日[편집]

대마도 사자가 오다[편집]

○癸巳/對馬島使者來。

대마도(對馬島) 사자(使者)가 왔다.


월식을 오보한 김서를 견책하고 늦게 논죄한 헌부의 관리에게 일을 보지 말게 하다[편집]

○諫官朴信等上疏曰:

兼書雲注簿金恕推算月蝕, 以告禮曹, 而卒不食。 恕職專推步, 今乃昏迷天象, 以誣國人, 不可不懲。 願令攸司收其職牒, 依律科罪。

至是, 疏上未啓, 上召諫官、憲司、刑曹, 責之曰: “日官失於推步, 當論其罪, 所司法官, 置而不問, 罪亦均矣。 金恕之謬, 人所共見, 尙且不言, 寡人之失德, 宰相之有過, 詎能言乎?” 雜端田時對曰: “掌務侍史臣尹彰, 被譴在家, 臣等皆未視事, 不敢以聞。” 刑曹正郞柳榮門對曰: “刑曹曾有敎旨, 未敢彈劾。” 補闕許遲對曰: “疏已上矣。” 上猶以諫官請罪爲晩, 令朴信、許遲毋視事, 及見疏, 罪恕如申。

간관(諫官) 박신(朴信) 등이 상소(上疏)하였다.

"겸 서운 주부(兼書雲注簿) 김서(金恕)가 월식(月食)을 추산(推算)하여 예조에 고하였으나 끝내 월식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서(恕)는 직책이 추보(推步)를 전문으로 하면서, 이제 천상(天象)에 혼미(昏迷)하여 나라 사람들을 속이었사오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직첩을 거두고 율(律)에 의하여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이때에 이르러 소(疏)는 올렸으나 아직 아뢰지는 않았으므로, 임금이 간관(諫官)·헌사(憲司)·형조(刑曹)를 불러 꾸짖었다.

"일관(日官)이 추보(推步)를 잘못하였으니 마땅히 그 죄를 의논하여야 할 터인데, 맡은 바 법관(法官)이 내버려두고 묻지 않으니 죄가 또한 같다. 김서(金恕)의 잘못은 사람들이 함께 다 보는 것인데 오히려 말을 하지 않으니, 과인(寡人)의 실덕(失德)과 재상(宰相)의 과실을 어찌 말하겠는가?"

잡단(雜端) 전시(田時)가 대답하였다.

"장무(掌務) 시사(侍史) 윤창(尹彰)이 견책을 당하여 집에 있으므로, 신 등이 모두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형조 정랑(刑曹正郞) 유영문(柳榮門)은 대답하였다.

"형조에 일찍이 교지(敎旨)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탄핵하지 못하였습니다."

보궐(補闕) 허지(許遲)는 대답하였다.

"소(疏)를 이미 올렸습니다."

임금이 오히려 간관(諫官)이 죄주기를 청한 것이 늦다 하여 박신(朴信)과 허지(許遲)로 하여금 일을 보지 말게 하였는데, 소(疏)를 보고 나서 서(恕)를 죄주기를 상신(上申)한 대로 하였다.


4月 18日[편집]

헌부에게 일을 보게 하다[편집]

○甲午/命憲司視事。

헌부(憲府)에 일을 보도록 명하였다.


4月 19日[편집]

오랜 가뭄 때문에 산천에 비를 빌다[편집]

○乙未/以久旱, 禱雨于山川。

오래 가물었기 때문에 산천(山川)에 비를 빌었다.


4月 20日[편집]

정도전과 권근을 성균관 제조로 삼아 3관 유생 등을 모아 경사를 강습케 하다[편집]

○丙申/以奉化伯鄭道傳、花山君權近, 爲成均館提調, 令集見任、閑良、四品以下儒士及三館儒生, 講習經史。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화산군(花山君) 권근(權近)으로 성균관(成均館) 제조(提調)를 삼아, 현임(現任)·한량(閑良) 4품(品) 이하의 유사(儒士)와 삼관(三館)의 유생(儒生)을 모아 경사(經史)를 강습(講習)하게 하였다.


4月 21日[편집]

종묘·사직·원단과 용추에 비를 빌다[편집]

○丁酉/禱雨于宗廟、社稷、圓壇及諸龍湫。

종묘(宗廟)·사직(社稷)·원단(圜壇)과 여러 용추(龍湫)[24]에 비를 빌었다.


환관 이광에게 궁금 숙위의 일을 맡기고, 조순에게는 왕명의 출납 등을 맡게 하다[편집]

○以宦官李匡, 掌宮禁宿衛、考察申聞等事, 曺恂掌出納命令、大臣待遇等事, 恒令侍衛。 上敎恂曰: “汝之罪惡, 以臺諫所言視之, 則雖城門, 不可復入。 況宮禁乎? 汝其改過謹愼。”

환관(宦官) 이광(李匡)으로 궁금(宮禁)의 숙위(宿衛)를 고찰하고 신문(申聞)하는 등의 일을 맡게 하고, 조순(曹恂)으로 명령을 출납(出納)하고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등의 일을 맡아, 항상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임금이 순(恂)에게 하교(下敎)하였다.

"너의 죄악이 대간(臺諫)의 말한 바로써 본다면, 비록 성문(城門)이라도 다시 들어 올 수가 없는데 하물며 궁금(宮禁)이겠느냐? 너는 허물을 고치고 근신(謹愼)하라."


형률의 적용이 엄정하게 시행되도록 하는 방안을 형조에서 건의하다[편집]

○刑曹典書柳觀等上言: “刑獄之官, 人命所繫, 不可不謹。 昔皋陶之爲士師也, 象以典刑, 而流宥五刑, 鞭作官刑, (朴)〔扑〕作敎刑, 而金作贖刑。 蓋刑者, 輔治之具, 聖人之所不得已也。 人之犯法者, 重而入於五刑, 則以其法罪之; 輕而入於鞭(朴)〔扑〕之刑, 則亦以其法罪之, 至於或重或輕而情可矜法可疑, 則流以宥之, 金以贖之, 而欽恤之意, 悉存乎其間, 誠萬世用刑者之準則也。 由是觀之, 五刑有流宥而無金贖, 至周穆王, 始有五刑之贖, 非古制也。 後世因之, 遂使富者免罪, 而貧者受刑, 甚非聖人制刑之本意也。 蓋人之罪, 入於輕而可疑, 則贖之, 以開其自新之路可也, 至於重而可疑者, 亦得以贖之, 則人輕犯法, 而將有不勝其弊矣。 願自今人有犯杖六十、徒一年以上罪者, 雖情法可疑, 勿許其贖, 止用徒流以宥之, 隨其罪之輕重, 而異其地之里數, 以懲奸(究)〔宄〕, 其犯斷放已下罪者, 亦情法可疑, 然後贖之, 則庶乎不悖於律文, 而有合於古制矣。 其計贓之罪, 考之於律, 監守自盜者, 贓滿四十貫, 則當極刑。 今以常布五匹, 折一貫, 則布二百匹, 乃當四十貫也。 人有盜二百匹而極刑, 甚可憫也。 且使杖一百者, 贖布三十匹, 則有輕刑之失, 非所以用刑之中也。 乞以常布十五匹, 當錢一貫, 則盜六百匹以上, 乃當極刑, 而杖一百者, 贖布九十匹, 刑贖亦得輕重之宜矣。 又考於律, 人之犯法, 至多端也, 而律無正條者, 十常八九。 處罪失其輕重, 由玆以出, 不可不慮也。 古語曰: ‘畫地爲獄, 議不入; 刻木爲吏, 期不對。’ 此皆嫉吏之甚, 悲痛之辭也。 吏以刑獄出身, 君子之所羞稱也。 故治獄者, 率多無學之人, 不能精熟律文, 以當其任; 爲掌刑之官, 又不肯留意於律文, 凡人罪出入高下, 一委於律學之人。 此所以照律之際, 不能酌輕重之宜, 以致當輕者反重, 當重者或輕。 豈特有乖於法律? 其感傷和氣爲不小矣。 願自今人有犯罪, 律無正條者, 比於近似之律, 若本罪輕而律重者, 減幾等; 本罪重而律輕者, 加幾等, 皆以啓聞取旨, 然後施行。 其已行之事, 皆載于書, 積以歲月, 則法律自然成書, 而刑無難決之患矣。” 命都堂擬議, 請如刑曹所申。

형조 전서(刑曹典書) 유관(柳觀)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형옥(刑獄)의 관리는 인명(人命)이 매여 있어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적에 고요(皐陶)가 사사(士師)가 되었을 때에 전형(典刑)으로 보이고 오형(五刑)[25]을 귀양[流]으로 용서하며, 편(鞭)[26]으로 관형(官刑)을 만들며, 복(扑)[27]으로 교형(敎刑)을 만들며, 금(金)으로 속형(贖刑)을 만들었사오니, 대개 형(刑)이란 것은 다스림을 보좌하는 제도이므로 성인(聖人)도 마지 못하여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법을 범한 것이 중하여 오형(五刑)에 들면 그 법으로 죄를 주고, 경(輕)하여 편복(鞭扑)의 형에 들면 또한 그 법으로 죄를 주며, 혹 중하거나 혹 경하거나, 정상이 불쌍하고 법에 의심나는 것은 귀양으로 용서하고, 금(金)으로 속죄(贖罪)하거나 하여, 흠휼(欽恤)하는 뜻이 모두 그 사이에 들어 있사오니, 진실로 만세(萬世)에 형(刑)을 쓰는 자의 준칙(準則)이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오형(五刑)에 유유(流宥)는 있어도 금속(金贖)은 없었는데, 주 목왕(周穆王)에 이르러 비로소 오형(五刑)의 속(贖)이 있었으니, 예전 제도가 아닙니다. 후세에 이를 인습하여 마침내 부유한 자는 죄를 면하고 가난한 자는 형(刑)을 받게 하였으니, 대단히 성인(聖人)의 형(刑)을 제정한 본의(本意)가 아닙니다. 대개 사람의 죄가 경(輕)한 데에 들어서 의심스러우면 속(贖)하게 하여 자신(自新)하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가하옵지마는, 중(重)하고 의심스러운 자를 또한 속(贖)하여 준다면 사람이 법을 범하는 것을 경(輕)하게 여기어 장차 그 폐단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사람이 장(杖) 60, 도(徒) 1년 이상의 죄를 범한 자는 비록 정상과 법이 의심스럽더라도 속(贖)을 허락하지 말고, 다만 도(徒)와 유(流)를 써서 용서하되, 그 죄의 경중에 따라서 그 땅의 잇수(里數)를 달리 하여 간궤(奸宄)한 자를 징계하고, 단방(斷放) 이하의 죄를 범한 자도 또한 정상과 법이 의심스러운 연후에야 속(贖)하여 주면 거의 율문(律文)에 어그러지지 않고 예전 제도에 합할 것입니다.

장물(贓物) 계산에 따르는 죄는 율(律)에 상고하면 감수(監守)하는 자가 스스로 도둑질한 자는 장물이 40관(貫)이 되면 극형(極刑)을 당하게 되어 있사온데, 지금 상포(常布) 5필(匹)을 1관(貫)으로 계산하면, 베[布] 2백 필이 40관에 해당하오니, 사람이 베 2백 필을 도둑질하고서 극형을 당하는 것은 대단히 불쌍한 일입니다. 또 곤장 1백을 때릴 자를 베 30필로 속(贖)을 받는다면 형(刑)을 가볍게 하는 잘못이 있사오니, 형을 쓰는 중도가 아닙니다. 비옵건대, 상포(常布) 15필로 돈[錢] 1관(貫)에 해당하게 하면 6백 필 이상을 도둑질한 자라야 극형에 해당하게 되고, 곤장 1백을 때릴 자는 베 90필을 속(贖) 받으면 형(刑)과 속(贖)이 또한 경중의 마땅함을 얻을 것입니다.

또 율(律)에 상고하면 사람이 법을 범하는 것이 지극히 여러가지이온데, 율에는 똑바른 조문[正條]이 없는 것이 십상팔구(十常八九)나 되어서, 죄를 처결하는 데에 경중을 잃는 것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오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전 말에 이르기를, ‘땅을 그어서 옥(獄)을 만들더라도 들어가지 않기를 의논하고, 나무를 새기어 아전[吏]을 만들더라도 대(對)하기를 기약하지 않는다.’ 하였사오니, 이것은 모두 아전을 미워하기를 심하게 하는 비통한 말입니다. 아전이 형옥(刑獄)으로 출신(出身)하면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옥(獄)을 다스리는 자가 대개는 무식한 사람이 많아서, 율문(律文)을 자세하게 익히 알아서 그 임무에 당하지 못하옵고, 형(刑)을 맡은 관리가 되어도 또 율문에 유의하려고 하지 않아서, 무릇 사람의 죄의 출입(出入)과 고하(高下)를 한결같이 율학(律學)을 한 사람에게 맡기오니, 이것이 율을 적용할 때에 경중(輕重)의 적당함을 참작하지 못하여 마땅히 경하게 할 자는 도리어 중하게 되고, 마땅히 중하게 할 자는 혹 가볍게 되는 까닭입니다. 어찌 다만 법률에만 어그러질 뿐이겠습니까?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되, 율에 똑바른 조문[正條]이 없는 것은 근사(近似)한 율에 비교하여, 만일 본죄(本罪)는 경한데 율이 중한 것은 몇 등(等)을 감(減)하고, 본죄는 중한데 율이 경한 것은 몇 등을 더하여, 모두 계문(啓聞)하여 재가를 받은 연후에 시행하게 하옵고, 이미 시행한 사건은 모두 글에 실어서 세월(歲月)을 쌓으면, 법률이 자연히 글이 되어서, 형벌이 처결하기 어려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도당(都堂)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형조(刑曹)에서 품신(稟申)한 것과 같이 하기를 청하였다.


4月 22日[편집]

능침에 제사하고 돌아온 정탁에게 술을 내려 주다[편집]

○戊戌/遣金師幸, 賜酒于中樞院副使鄭擢。 時承命往祭陵寢而還。

김사행(金師幸)을 보내어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탁(鄭擢)에게 술을 내려 주었으니, 이때에 명을 받고 가서 능침(陵寢)에 제사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4月 23日[편집]

큰 바람에 새로 지은 군자고가 무너지다[편집]

○己亥/大風, 新作軍資庫頹。

큰 바람이 불어서 새로 지은 군자고(軍資庫)가 무너졌다.


고 시중 조민수의 재산과 곡식을 돌려주도록 도당에 명하다[편집]

○命都堂, 給還故侍中曺敏修財穀。

도당(都堂)에 명하여 고(故) 시중(侍中) 조민수(曹敏修)에게 재물과 곡식을 주어 돌려보내었다.


궁궐의 도색을 다시 하다. 도색에 쓰인 기름이 400말이었다[편집]

○命改漆宮闕, 用明油四百斗。

궁궐을 고쳐 칠하기를 명하였는데, 명유(明油) 4백 두(斗)를 썼다.


단주 이북 각 고을의 군량으로 천 석을 경원부에 수운하고, 병선 10척을 두만강에 배치하다[편집]

○命都堂, 輸端州以北州郡軍餼一千石于慶源府, 又泊兵船十艘于豆滿江, 置新翼萬戶府于慶源府之界。

도당(都堂)에 명하여 단주(端州) 이북 주군(州郡)의 군량(軍糧) 1천 석을 경원부(慶源府)에 수운(輸運)하고, 또 병선 10척을 두만강에 정박시키고 신익 만호부(新翼萬戶府)를 경원부의 경계에 두었다.


4月 24日[편집]

계룡산에 진눈깨비가 내리다[편집]

○庚子/雨雪于雞龍山。

계룡산(鷄龍山)에 눈이 내렸다.


4月 25日[편집]

오랜 가뭄 때문에 죄수를 석방하다. 도랑을 치고, 흩어져 있는 시체를 묻어 주게 하다[편집]

○辛丑/以久旱, 宥二罪以下。 命有司修渠溝, 掩骼埋胔。

오래 가물므로 이죄(二罪) 이하를 용서하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도랑[溝渠]을 수축하게 하였으며, 해골을 엄토(掩土)하고 시체를 묻게 하였다.


4月 26日[편집]

개성 유후사의 성을 지키는 군관을 3백 40명으로 정하다[편집]

○壬寅/定開城留後司守城軍官三百四十。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의 수성 군관(守城軍官)을 3백 40명으로 정하였다.


좌·우 정승 조준과 김사형에게 신도 팔경 병풍 한 면씩을 주다. 정도전의 팔경시[편집]

○賜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新都八景屛風各一面。 奉化伯鄭道傳製進八景詩。

一曰畿甸山河: 沃饒畿甸千里, 表裏山河百二。 德敎得兼形勢, 歷年可卜千紀。

二曰都城宮苑: 城高鐵甕千尋, 雲繞蓬萊五色。 年年上苑鶯花, 歲歲都人遊樂。

三曰列署星拱: 列署岧嶢相向, 有如星拱北辰。 月曉官街如水, 鳴珂不動纖塵。

四曰諸坊碁布: 第宅凌雲屹立, 閭閻撲地相連。 朝朝暮暮煙火, 一代繁華(宴)〔晏〕然。

五曰東門敎場: 鐘鼓轟轟動地, 旌旗旆旆連空。 萬馬周旋如一, 驅之可以卽戎。

六曰西江漕泊: 四方輻輳西江, 拖以龍驤萬斛。 請看紅腐千倉, 爲政在於足食。

七曰南渡行人: 南渡之水滔滔, 行人四至鑣鑣。 老者休少者負, 謳謠前後相酬。

八曰北郊牧馬: 瞻彼北郊如砥, 春來草茂泉甘。 萬馬雲屯鵲厲, 牧人隨意西南。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에게 신도 팔경(新都八景)의 병풍(屛風) 한 면(面)씩을 주었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팔경시(八景詩)를 지어 바쳤는데, 첫째는 기전(畿甸)의 산하(山河)였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기전(畿甸) 천리,

표리(表裏)의 산하가 1백 둘이로다.

덕교(德敎)의 형세를 얻어 겸하였으니,

역년(歷年)이 천년[千紀]은 점칠 수 있도다."

둘째는 도성(都城)과 궁원(宮苑)이었다.

"성(城)은 철옹성(鐵甕城)[28] 천 길[千尋]이나 높고,

구름은 봉래(蓬萊)의 오색(五色)으로 둘렸도다.

연년(年年)이 상원(上苑)[29]의 꾀꼬리와 꽃,

세세(歲歲)에 도성(都城) 사람들이 유락(遊樂)하도다."

셋째는 열서 성공(列署星拱)이었다.

"벌여 있는 관서(官署)는 높고 우뚝하여 서로 향하니,

마치 여러 별들이 북신(北辰)을 둘러싼 것 같도다.

달빛 새벽에 관가(官街)는 물과 같은데,

옥가(玉珂)[30]는 울리나 가는 티끌 일지 않는도다."

넷째는 제방(諸坊)의 기포(碁布)였다.

"제택(第宅)은 구름 위에 치솟아 우뚝 서 있고,

여염(閭閻)은 땅 위에 가득차 서로 연하였으니,

아침저녁 피어오르는 연화(煙火),

일대(一代)의 번화(繁華)가 찬연하구나."

다섯째는 동문(東門)의 교장(敎場)이었다.

"종(鐘)과 북[鼓]은 요란하게 울리어 땅을 움직이고,

정기(旌旗)는 펄럭이어 공중에 연하였도다.

만마(萬馬)가 주선(周旋)하는 것이 한결같으니,

몰아서 전장에 나갈 만하도다."

여섯째는 서강(西江)의 조박(漕泊)이었다.

"사방(四方)이 서강(西江)에 모여드니,

용(龍)같이 날치는 만곡(萬斛)의 배로 나르는도다.

천창(千倉)에 붉게 썩는 것을 보려무나.

정치하는 것은 먹이가 족한 데에 있도다."

일곱째는 남도(南渡)의 행인(行人)이었다.

"남쪽 나루의 물 도도히 흐르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행인 성(盛)하게 이르도다.

늙은이는 빈몸이고 젊은이는 졌으니,

노래 불러 앞뒤에서 화답하도다."

여덟째는 북교(北郊)의 목마(牧馬)였다.

"바라보면 저 북교(北郊) 숫돌과 같은데,

봄이 오면 풀은 무성하고 샘은 달구나.

만마(萬馬)가 구름처럼 모이고 까치처럼 날뛰는데,

목인(牧人)은 멋대로 서(西)로 갔다 남(南)으로 갔다 하도다."


4月 27日[편집]

원단과 산천에 비를 빌다[편집]

○癸卯/禱雨于圓壇及山川。

원단(圜壇)과 산천(山川)에 비를 빌었다.


4月 28日[편집]

종루에 거둥하여 종소리를 들어보고 흥천사에 가서 사리전 터를 보다[편집]

○甲辰/幸鐘樓, 撞鐘而聽之, 遂如興天, 觀舍利殿基。

종루(鐘樓)에 거둥하여 종을 쳐서 소리를 듣고, 드디어 흥천사(興天寺)에 가서 사리전(舍利殿)의 터를 보았다.


4月 29日[편집]

예문춘추관 학사 안경량의 졸기[편집]

○乙巳/藝文春秋館學士安景良卒。 景良, 順興人, 判門下府事宗源第二子。 溫良篤實, 處事精詳。 觀察忠淸道, 巡問西北面, 民愛之, 聞其卒, 有爲之食素者。 妾子曰民秀。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學士) 안경량(安景良)이 졸(卒)하였다. 경량(景良)은 순흥(順興) 사람인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종원(安宗源)의 둘째 아들이다. 온량(溫良)하고 독실(篤實)하며, 처사(處事)하는 것이 정(精)하고 자세하여 충청도(忠淸道)를 관찰(觀察)하고 서북면(西北面)을 순문(巡問)하였는데, 백성들이 사랑하여 그의 죽음을 듣고 식소(食素)를 행한 자도 있었다. 첩의 아들이 있는데 안민수(安民秀)이다.


벌레가 종묘 북쪽 산의 솔잎을 먹다[편집]

○蟲食宗廟北山松葉, 發五部人捕之。

벌레가 종묘(宗廟) 북쪽 산의 솔잎을 먹으므로 오부(五部)의 사람들을 징발하여 잡았다.


이달은 가물었다[편집]

○是月, 旱。

이달에 가물었다.


七年 五月[편집]

5月 1日[편집]

흥천사 북쪽에 사리전을 건축하도록 명하다[편집]

○丁未朔/上如興天寺, 命營舍利殿三層于寺北, 募各領隊長隊副自願者五十人, 給糧赴役。

임금이 흥천사(興天寺)에 가서 사리전(舍利殿) 3층을 흥천사의 북쪽에 건축하도록 명령하고, 각영(各領)의 대장(隊長)과 대부(隊副)로 자원하는 사람 50명을 모집하여 식량을 주어 부역(賦役)에 나오게 하였다.


5月 2日[편집]

큰 바람이 불다[편집]

○戊申/大風。

큰 바람이 불었다.


영성부원군 오사충이 금주하기를 청하다[편집]

○寧城府院君吳思忠上書請禁酒, 從之。

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 오사충(吳思忠)이 글을 올려 금주(禁酒)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별이 동북방에 떨어지다[편집]

○星隕東北方。

별이 동북방에 떨어졌다.


5月 3日[편집]

큰 바람이 불다. 가회방 인가에서 불이 나 집 143채와 요물고를 태우다[편집]

○己酉/大風。 嘉會坊人家失火, 延燒一百四十三家, 料物庫亦災。 上見火嘆曰: “旱旣太甚, 火災又爾, 我罪伊何? 第宮闕之役, 不可輕輟, 以至勞民耳。”

큰 바람이 불었다. 가회방(嘉會坊)의 인가(人家)에서 불을 내어 불길이 이웃으로 번져서 1백 43가(家)를 태웠는데, 요물고(料物庫)[31]도 또한 불에 탔다. 임금이 화재(火災)를 보고 탄식하였다.

"가뭄이 이미 대단히 심한데 화재가 또한 이와 같으니, 내 죄가 무엇이란 말인가? 다만 궁궐의 역사는 가벼이 중지할 수 없어 백성을 괴롭히는 데 이르렀을 뿐이다."


가뭄 때문에 《운우경》을 흥복사에서 강설하게 하다[편집]

○以久旱, 講《雲雨經》於興福寺; 以松木枯槁, 設祈禳法席於蓮花寺。

오랫동안 가물므로 《운우경(雲雨經)》을 흥복사(興福寺)에서 강설(講說)하게 하고, 소나무가 말라 죽은 이유로서 재앙을 빌어 물리치는 법석(法席)을 연화사(蓮花寺)에서 베풀게 하였다.


불이 났던 집에 띠를 차등있게 주다[편집]

○命都堂, 給茅於失火之家有差。

도당(都堂)에 명하여 불이 났던 집에 띠[茅]를 차등이 있게 주도록 하였다.


간관이 재변의 원인이 잦은 역사에 있음을 지적하다[편집]

○諫官上言曰: “《經》曰: ‘敬天之怒, 無敢戲豫; 畏天之威, 于時保之。’ 伏見近年以來, 水旱相仍, 民失其業, 飢饉流亡者, 頗多有之。 至于今歲, 自春徂夏, 恒陽不雨, 赤地千里, 旣失播種之期, 又無麰麥之收, 凡在臣庶, 罔不咨嗟。 宸衷軫念, 靡神不擧, 祈禱之誠至矣, 尙不能感動天意, 旱魃尤甚。 乃於前日, 暴風大作, 火延百有餘家, 禍及雞犬, 以至上供之廩, 亢陽之災極矣, 天之爲變大矣。 昔成湯遇旱而懼, 反躬自責曰: ‘政不節歟? 使民疾歟? 何以不雨至此極也? 宮室營歟? 讒夫昌歟? 何以不雨至此極也?’ 夫以成湯之聖, 而自責若是其至, 故天乃雨, 而終不爲民害。 竊伏惟念, 卽位以來, 連歲興役, 民不休息。 殿下深念其弊, 只令工匠及遊手、僧徒, 供億以役之, 然諸處服役之人, 不下數千。 其離妻子遠父母, 數年勞苦之怨, 豈不召傷和氣乎? 人之言曰: ‘將建萬世之基, 則區區小弊, 不足爲慮。’ 臣等以爲萬世之基, 不必遽成於一時也。 幸今宮寢旣成, 都城已築, 休養數年, 然後以訖其功, 亦未晩也。 願殿下, 敬天之怒, 以成湯之心爲心, 凡土木營繕, 一切停罷, 令赴役之民, 各還其父母妻子之養, 則勞苦懷歸之怨息, 而和氣庶可應矣。 請罷宮闕造成都監, 以其事務, 歸於繕工監, 循名責實, 以裕民力。” 上命放逃僧代立者及有妻子僧二十七、未成才工匠五百四十五。

간관(諫官)이 상언(上言)하였다.

"경서(經書)에,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여 감히 즐거이 놀지 못하며,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 시기에 보전해야 된다.’ 하였사온데, 삼가 보오니, 근년 이후에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서로 잇달아 발생하여 백성들이 그 직업을 잃고 굶주려 유망(流亡)하는 사람이 자못 많이 있게 되었습니다. 금년에 이르러 봄부터 여름이 다 가도록 늘 볕만 쪼이고 비는 오지 않으므로, 천 리 땅에 초목이 자라나지 않아서 이미 씨앗을 뿌릴 시기를 놓치고 또한 보리의 수확도 없게 되었으니, 무릇 신민(臣民)에게 있어서는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임금께서 마음속으로 매우 염려하시니 신(神)에게 제사를 거행하지 않은 데가 없이 기도(祈禱)의 정성이 지극하였는데도 오히려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가뭄이 더욱 심하였고, 전일에는 폭풍이 크게 일어나서 불이 번져 1백여 가(家)를 태우고 닭과 개에까지 화(禍)가 미치며 임금에게 공궤(供饋)하는 창고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가뭄의 재앙이 극도에 달했으며, 하늘의 재변(災變)을 내림이 컸던 것입니다. 옛날에 탕왕(湯王)은 가뭄을 만나 두려워하여 자신을 반성하고 스스로 꾸짖기를, ‘정사(政事)가 절차를 잃었는가? 백성으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하였는가? 아니면 어째서 비가 오지 않음이 이같은 극도에 이르렀는가? 궁실(宮室)을 건축하였는가? 참소하는 사람이 기세가 강성한가? 아니면 어째서 비가 오지 않음이 이같은 극도에 이르렀는가?’ 하였습니다. 대저 탕왕(湯王)의 성군(聖君)으로서도 자기 잘못을 꾸짖음이 이와 같이 지극했던 까닭으로, 하늘이 그제야 비를 내려서 마침내 백성의 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만히 삼가 생각해 보건대, 전하(殿下)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 해마다 역사(役事)를 일으켜 백성이 휴식하지 못하게 되니, 전하께서 그 폐단을 염려하여 다만 공장(工匠)과 놀고 있는 사람과 중들로 하여금 양식을 공급하여 복역(服役)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곳에 복역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 넘으니, 그들이 처자(妻子)를 떠나 오고 부모를 멀리 두고서 몇 해 동안 노고(勞苦)하게 된 원망이 어찌 화기(和氣)를 손상시키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은, ‘장차 만세(萬世)의 터전을 세우게 되니, 구구한 작은 폐단은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마는, 신(臣)의 생각으로는 만세(萬世)의 터전을 반드시 한때에 갑자기 성취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 궁궐의 정침(正寢)이 이미 이루어졌고 도읍의 성이 이미 축조(築造)되었으니, 두서너 해 동안 휴양한 후에 그 공역(工役)을 마치게 하더라도 또한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여 탕왕(湯王)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가져 모든 토목(土木)의 영선(營繕)은 일체 정지하고, 부역(賦役)에 나오는 백성으로 하여금 각기 그 부모와 처자(妻子)의 양육에 돌아가게 한다면, 고생하면서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원망이 그치게 되어 화기(和氣)가 응하게 될 것입니다. 청하옵건대, 궁궐 조성 도감(宮闕造成都監)을 폐하고 그 사무를 선공감(繕工監)에 귀속(歸屬)시켜 명칭에 좇아 실상을 책임지워 백성의 힘을 펴게 하소서."

임금이 명하여 도망한 중을 대신 선 사람과 처자(妻子)가 있는 중 27명과 기술이 익숙하지 못한 공장(工匠) 5백 45명을 놓아보내게 하였다.


남원과 광주의 판관을 도태시키다[편집]

○汰南原、光州判官。

남원(南原)과 광주(光州)의 판관(判官)을 도태(淘汰)시켰다.


5月 5日[편집]

궁성 남문에 거둥하여 척석놀이를 구경하다. 죽고 상한 사람이 많았다[편집]

○辛亥/幸宮城南門, 觀擲石之戲。 節制使趙溫領擲石軍, 判中樞院事李懃領諸衛隊副, 分爲左右相擊, 至于日晩, 死傷頗多。

임금이 궁성(宮城)의 남문에 거둥하여 돌을 던져 싸우는 놀음을 구경하였다. 절제사(節制使) 조온(趙溫)은 척석군(擲石軍)을 거느리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근(李懃)은 여러 위(衛)의 대부(隊副)를 거느리고 좌우편으로 나누어 서로 쳐서, 해가 질 때까지 하였으니, 죽고 상한 사람이 자못 많았다.


요물고를 새로 짓다[편집]

○新作料物庫于宮城之內。

새로 요물고(料物庫)를 궁성 안에 지었다.


5月 6日[편집]

우박이 내리고 폭풍이 불다[편집]

○壬子/雨雹暴風。

우박이 내리고 폭풍이 불었다.


내온을 도당에 내려 주다[편집]

○命宦者李匡, 賜醞于都堂。

환자(宦者) 이광(李匡)에게 명하여 내온(內醞)을 도당(都堂)에 내리게 하였다.


5月 10日[편집]

《대장경》 목판을 강화 선원사에서 운반하여 왔으므로 임금이 용산강에 거둥하다[편집]

○丙辰/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禪源寺。

임금이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였다. 《대장경(大藏經)》의 목판(木版)을 강화(江華)의 선원사(禪源寺)로부터 운반하였다.


5月 11日[편집]

비가 내리다[편집]

○丁巳/雨。

비가 내리었다.


5月 12日[편집]

비가 내리다[편집]

○戊午/雨。

비가 내리었다.


《대장경》 목판을 지천사로 운반하는데 군사 2천 명을 동원하다[편집]

○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

대장(隊長)과 대부(隊副) 2천 명으로 하여금 《대장경》의 목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운반하게 하였다.


《대장경》 운반의 의장 행렬[편집]

○命檢校參贊門下府事兪光祐行香, 五敎兩宗僧徒誦經, 儀仗鼓吹前導。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유광우(兪光祐)에게 명하여 향로(香爐)를 잡고 따라오게 하고, 오교(五敎)·양종(兩宗)[32]의 중들에게 불경을 외우게 하며, 의장대(儀仗隊)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서강에 거둥하여 전라도에서 온 곡식 운반선을 시찰하다[편집]

○幸西江, 觀全羅道漕舶。

임금이 서강(西江)에 거둥하여 전라도에서 온 조선(漕船)을 시찰하였다.


5月 13日[편집]

비가 내리다. 유성이 자미 동원에서 나와 허성 분야로 들어가다[편집]

○己未/雨。 流星出自紫微東垣, 入虛星。

비가 내리었다. 유성(流星)이 자미 동원(紫微東垣)으로부터 나와서 허성(虛星) 분야를 들어갔다.


경기좌도와 충청도 각 고을에 지시하여 도성 보수를 시기에 맞추어 시행케 하다[편집]

○令左道、忠淸道州郡, 以時繕完都城。 城圍九千七百六十七步有奇。

경기좌도(京畿左道)와 충청도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시기에 맞추어 도성(都城)을 보완(補完)하게 하니, 성의 둘레가 9천 7백 60보(步)가 조금 넘었다.


흥천사 감주 상총이 선·교 양종의 영수를 뽑아 사찰을 주관케 할 것 등을 건의한 글[편집]

○興天寺監主尙聰上書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其所以壽君福國安民則一。 洪惟殿下承宿願力, 相地建都, 百司旣修, 庶職已和。 次於都城之內, 創立佛寺, 賜號興天, 修禪本社, 其敬信佛祖, 望報龍天之意, 至深切矣。 爰命山野僧尙聰主席, 臣敢不精白此心, 弘揚正法, 以盡祝釐之職哉! 夫佛寺門中, 參禪爲最。 若上根之人, 不日成功, 發明大智。 其或未然, 正擧話頭之際, 佛祖歡喜, 龍天敬信。 前朝之季, 禪與敎, 利名是饕, 爭占名刹, 其修禪衍敎處, 僅存一二, 豈國家創立裨補之本意乎? 祖師眞覺有言曰: “禪道延國祚, 智論鎭隣兵。” 夫豈無徵而欺我哉? 願殿下繼今, 於禪敎之中, 擇有道德才行可爲領袖者, 主諸中外名刹, 而使宗禪者說禪秉拂, 主敎者講經談律, 令其後進, 禪則《傳燈》拈頌, 敎則經律論疏, 追節講習, 積以年月, 宏才碩德, 無寺無之。 雖然旣稱本社, 則其中外名刹, 宜倣松廣之制, 皆爲本社之屬, 互相糾察, 則其於作法祝釐, 雖欲陵夷, 不可得已。 比來作法之規, 皆慕華僧而不得其專, 所謂畫虎不成, 反類狗者也。 臣謹按松廣祖師普照遺制, 講而行之, 著爲常法, 且使僧徒熏修朝夕, 庶幾上報殿下弘道之恩。 伏望頒布中外, 垂於不朽, 則豈不萬萬利於國家也哉!

上從之。

흥천사(興天社)의 감주(監主) 상총(尙聰)이 글을 올리었다.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오라, 그것이 임금을 장수(長壽)하게 하며, 나라를 복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넓게 생각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전생(前生)의 원력(願力)을 받들어 땅을 보아 도읍을 세워, 모든 관사(官司)가 이미 정돈되고, 여러 직무가 이미 화합(和合)하여졌는데, 다음에 도성(都城)의 안에 절을 처음 세워 흥천(興天)이란 칭호를 내리시고 본사(本社)에서 선(禪)을 닦게 하시니, 그 불조(佛祖)[33]를 공경하고 믿어서 용천(龍天)[34]에게 보답이 있기를 바라는 뜻은 지극히 깊고 간절하셨습니다. 이에 산야승(山野僧)인 상총(尙聰)에게 명하여 주석(主席)으로 삼게 하시니, 신(臣)이 이 마음을 아주 결백하게 하여 정법(正法)을 널리 드날려 복을 축원하는 직책을 다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대저 불사(佛寺)의 문중(門中)에서는 참선(參禪)이 제일이오니, 상성(上性)의 사람이라면 몇 날 걸리지 않아서 성공하여 투철한 지혜를 발명할 수 있고, 그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바르게 화두를 낼 즈음에 불조(佛祖)가 환희(歡喜)하고 용천(龍天)이 경신(敬信)하게 되는 것이오나, 고려 왕조의 말기에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 이익과 명예만을 탐내어 유명한 사찰(寺刹)을 다투어 차지하여 그 선(禪)을 닦고 교(敎)를 넓히는 곳은 겨우 한두 개만이 남아 있었으니, 어찌 국가에서 비보 사찰(裨補寺刹)을 창건한 본뜻이겠습니까? 조사(祖師) 진각(眞覺)[35]이 말씀하시기를, ‘선도(禪道)는 국운(國運)을 연장시키고, 《지론(智論)》[36]은 이웃나라의 병란(兵亂)을 진압한다.’ 하였는데, 대체 어찌 증거가 없이 우리를 속이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선종과 교종 중에서 도덕과 재행(才行)이 영수(領袖)가 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서울과 지방의 유명한 사찰(寺刹)을 주관하게 하되, 선(禪)을 맡은 사람에게는 선(禪)을 설명하면서 불자(拂子)[37]를 잡게 하고, 교(敎)를 주관한 사람에게는 경(經)을 강(講)하고 율(律)을 설명하게 하여 그 후진(後進)들로 하여금 선종(禪宗)은 《전등록(傳燈錄)》[38]의 염송(拈頌)을, 교종(敎宗)은 경·율(經律)[39]의 논소(論疏)를 절(節)을 따라 강습시켜, 세월이 오래가면 뛰어난 인물과 덕망이 높은 인물이 어느 절에도 없는 데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미 본사(本社)라 일컬었으니 그 서울과 지방의 유명한 사찰도 마땅히 송광사(松廣寺)[40]의 제도를 모방하여 모두 본사(本社)의 소속으로 삼아서 서로 규찰(糾察)하게 한다면, 그 법을 만들어 복을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비록 점점 쇠퇴(衰頹)하고자 하더라도 되지 않을 것인데, 근래에는 법을 만드는 규정이 모두 중국 중을 받들어 본받고 그 단독의 결정을 얻지 못하게 되니, 이른바 ‘범을 그리려다가 되지 않으매 도리어 강아지를 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송광사의 조사(祖師)인 보조(普照)[41]의 남긴 제도를 강(講)하여 이를 시행하고 기록하여 일정한 법으로 삼고, 또한 중의 무리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감화 수련하게 한다면, 위로는 전하께서 불도(佛道)를 세상에 널리 펴게 한 은혜를 보답할 것이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중앙과 지방에 반포(頒布)하여 영구한 세대에 전하게 한다면 어찌 대단히 국가에 이롭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月 14日[편집]

서리가 내리다[편집]

○庚申/隕霜。

서리가 내렸다.


천추절 계본을 잘못 쓴 3사람을 추가 압송하라는 예부의 편지와 조서 및 곽해룡의 문초장[편집]

○被留使臣曺庶從人崔祿, 齎禮部侍郞張炳書及曺庶、郭海龍招狀, 回自京師。 書曰:

大明禮部侍郞張炳致意于朝鮮國王。 曩者, 我至尊卽寶位, 握乾符統中夏, 代元爲君。 由是遣使飛報四夷, 故高麗國王卽遣使以修睦隣之好。 雖曰稱臣入貢, 實乃請和, 以妥三韓之生靈也。 然我至尊, 奉天勤民, 豈肯以兵强天下? 諭之曰: “毋生邊釁。” 後懇切以請, 禮儀常憲, 遵守施行, 我至尊固諭之曰: “儀從本俗, 法守舊章。” 今數十年矣。 自始至今, 切戒毋生邊釁, 未嘗以兵强爾國, 强爲約束。 今王代前王王氏爲君, 又幾年矣。 其毋生邊釁之諭, 未審王曾諦聽者乎? 雖然自王卽位以來, 以釁隙之言、擾邊之釁, 已聞搆釁之原。 假以入貢使者, 暗說我邊守, 以財賄賂我無知。 以此觀之, 漢、隋、唐、遼、金、元此數代, 其主宰三韓者, 纔有微釁, 其前諸帝, 奮然興師, 其生靈受害, 又非淺淺事。 事雖往古, 靜思兵禍, 孰不寒心! 今王疊生釁隙, 我至尊又將昭告于上下神祇, 何也? 非敢以血氣之勇爲之, 惟恐彼此有傷生靈, 故不爲也。 況古人布令陳詞, 而不循於和睦者, 尙不敢勤兵於遠征。 今王數數生邊釁於我朝, 我至尊因邊釁之憂, 已遣使祭告于海岳山川一次矣。 彼國奄人歸, 已令王知, 今王人神皆不畏。 是以昔者, 簒人之國爲奇, 不以有天命之爲懼, 專以譎詐爲常, 中國與爾三韓密邇, 彝倫之道, 纔有訛謬, 安有不責之於禮乎! 雖責之如是, 實乃敎人臣不敢妄爲。 王乃惡其所責, 專以爲讎, 暗侮不絶。 若從爾所爲, 王國專尙此謀, 敎人不臣, 謀爲不已。 如王者繼踵相至, 王雖在位, 亦何益哉? 今從王之徒, 皆輕薄白面書生, 不以道助王, 皆剽竊中國聖賢經傳, 斷章取義, 翻作戲侮之詞, 得罪于上下神祇, 又何贖哉? 今曺庶所供, 尙有執筆同謀相侮者三人, 特致意于王, 王其審之發來。 其曺庶狀招曰: “有本國前禮曹正郞尹珪、成均司成孔俯、禮曹正郞尹須, 與曺庶, 俱係秀才。 洪武三十年八月間, 有尹珪等對庶言說: ‘去年大明皇帝, 取俺每撰箋的金若恒每赴京去了。 如今有判三司事偰長壽回來說: 「大明皇帝都留下不放, 他每回來好生怪, 俺每這裏將進的鞍子, 都拆毁了, 他每這幾箇好歹不放回來。 如今殿下十一月千秋, 俺每王好歹將禮物去進, 必要啓本, 俺每這裏商量計較, 尋幾箇音同的字樣, 安在裏面, 看中國可有好秀才看得出來。」’ 各人依聽, 商議於殿下千秋啓本內, 故寫千秋節使字樣譏侮, 差判典儀寺事柳灝、司譯院判官鄭安止、打角夫崔浩齎進赴京。 不期本年十二月十九日, 有原根差同柳灝赴京打角夫崔浩齎禮部文書回還, 要作寫啓本的人來回話。 當有同商議作啓本譏侮人尹珪、孔俯、尹須, 却於王根前告說, 然是俺每四箇商議, 作寫中間, 都是曺庶主張。 有王至本月二十五日, 喚司譯院事郭海龍, 押送庶。 當分付郭海龍: ‘爾曾赴京多遍, 好生省得那裏言語, 去年差爾送金若恒赴京。 後使臣盧仁度、鄭摠、吳世謙赴京, 不見發回, 恐防那裏留下他, 每引路征取俺每地方。 如今差爾伴送曺庶赴京, 若見他每討箇仔細回來, 與俺知道。’ 以此就差郭海龍, 伴送到京回話打聽。” 今蒙送問招狀是實。

其郭海龍狀招, 竝與曹庶相同。

억류당한 사신 조서(曺庶)의 종인(從人) 최녹(崔祿)이 예부 시랑(禮部侍郞) 장병(張炳)의 서신과 조서(曺庶)와 곽해룡(郭海龍)의 초장(招狀)을 가지고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그 서신에 말하였다.

"대명(大明)의 예부 시랑(禮部侍郞) 장병(張炳)은 조선 국왕에게 뜻을 전달합니다. 지난번 우리 지존(至尊)[42]께서 보위(寶位)에 올라 건부(乾符)[43]를 잡아 중국을 통일하고 원(元)나라를 대신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사신을 보내어 사이(四夷)의 나라에 빨리 알렸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고려 국왕이 즉시 사신을 보내어 이웃나라와 서로 화목하는 교제를 맺게 했으니, 비록 신하라 일컫고 들어와 조공(朝貢)한다 하지마는, 실상은 화친하기를 청하여 삼한(三韓)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황제께서는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을 위안하게 되니, 어찌 즐거이 군대로써 천하에 강함을 보이겠습니까? 고려 국왕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키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후에 간절히 예의(禮儀)와 상헌(常憲)을 준수(遵守) 시행하겠다고 청하므로, 우리 황제께서는 거듭 유시(諭示)하기를, ‘예의는 본디 풍속대로 따라 하고, 법은 예전에 시행하던 전장(典章)을 지켜라.’고 한 지가 지금 수십 년이나 되었는데,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하지 말도록 간절히 경계하고, 일찍이 군대가 그대 나라보다 강한 것으로써 강제로 약속시키지는 아니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왕은 전대의 왕인 왕씨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왕노릇을 하여 임금이 된 지가 또 몇 해가 되었는데, 그 변방의 흔단을 발생시키지 말라는 유시(諭示)를 왕께서는 일찍이 자세히 들으셨는지 미심하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왕이 즉위한 이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말과 변방을 소란시킨 흔단(釁端)으로써 불화의 원인을 만들어, 입공(入貢)하는 사자(使者)로써 가칭(假稱)하고서 우리의 변방 관수(官守)를 몰래 달래고 재물로써 우리의 무지(無知)한 관원에게 뇌물을 쓴다는 말을 이미 들었는데,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한(漢)·수(隋)·당(唐)·요(遼)·금(金)·원(元)나라 등 이 몇 세대(世代)에서는 삼한(三韓)을 주재하는 사람이 겨우 약간의 불화(不和)만 있더라도, 그 전대의 여러 황제들은 분연(奮然)히 군사를 일으켜서 그 백성들이 해를 입었으니, 또한 작은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은 비록 예전이지마는 전쟁으로 인한 재화를 고요히 생각해 보건대, 누가 마음이 선뜩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왕이 불화(不和)한 일을 거듭 발생시키는데도, 우리 황제께서 또 장차 천신(天神)·지기(地祇)에게 밝게 고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감히 혈기(血氣)의 용맹으로써 일을 처리하지 않는 것은 다만 피차간(彼此間)에 백성이 상함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까닭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옛날 사람은 영(令)을 포고(布告)하고 문사(文詞)를 진술하였는데, 화목에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도 오히려 먼 지방을 정벌하는 데는 감히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왕은 자주 우리 조정에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켰으므로, 우리 황제께서는 변방 흔단의 근심으로 인하여 이미 사자(使者)를 보내 해악(海岳)과 산천(山川)에 한 차례 제사를 지내어 고하게 하였습니다. 저나라의 엄인(奄人)[44]이 돌아가서 이미 왕에게 알게 하였는데도, 지금 왕은 사람과 신(神)도 모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예전에 남의 나라를 찬탈(簒奪)하는 것으로써 기특한 일로 여겨 천명(天命)이 있음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오로지 속임수로써 정상(正常)으로 여기는데, 중국이 그대의 삼한(三韓) 나라와 매우 가까우니 이륜(彝倫)의 도리가 조금이라도 틀린 점이 있다면 어찌 책망하지 않는 예절이 있겠습니까? 비록 이와 같이 책망하더라도 실상은 곧 신하로서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음을 가르친 것인데, 왕은 이에 그 책망한 것을 싫어하여 오로지 원수로 여기고 몰래 모욕함이 끊이지 않으니, 만약 그대의 하는 대로 따른다면 왕의 나라는 오로지 이런 꾀만 숭상하게 되어 사람들에게 신하의 직분을 지키지 않는 것을 가르쳐 그 꾀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왕과 같은 사람이 잇달아 서로 이르게 된다면 왕이 비록 왕위에 있더라도 또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지금 왕을 시종(侍從)하는 무리들은 모두 경박하고 경험이 없는 서생(書生)으로서 도리로써 왕을 도우지는 아니하고, 모두 중국 성현(聖賢)들의 경전(經傳)을 표절(剽竊)하여 원작자의 본의(本意)는 무시하고 자기의 소용되는 부분만을 따서 마음대로 해석하여 뒤집어 희롱하고 모욕하는 문사(文詞)를 만들어 천신(天神)·지기(地祇)에게 죄를 얻었으니, 또한 어찌 속죄(贖罪)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조서(曺庶)의 공술(供述)한 것도 오히려 집필(執筆)에 함께 모의하여 상모(相侮)한 사람 3명이 있으므로, 특별히 왕에게 뜻을 전달하니, 왕은 그것을 살펴서 보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서(曺庶)의 문초장(問招狀)에는 말하였다.

"본국(本國)에 전 예조 정랑(禮曹正郞) 윤규(尹珪)와 성균 사성(成均司成) 공부(孔俯) 및 예조 정랑 윤수(尹須)가 있었는데, 나 조서(曺庶)와 모두 수재(秀才) 출신이다. 홍무(洪武) 30년 8월 무렵에 윤규(尹珪) 등이 나 조서(曺庶)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지난해에 대명(大明)의 황제가 우리의 찬술(撰述)한 전문(箋文)을 가져가고 김약항(金若恒)이 북경(北京)에 달려갔었는데, 지금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돌아와서, 「대명(大明) 황제(皇帝)가 김약항(金若恒)을 억류해 두고 놓아보내지 아니한다. 이상하게도 우리가 진상(進上)한 말안장[鞍子]을 모두 부셔버리고 그들 몇 사람을 좋게 놓아보내지 아니한다.」고 이야기하더니, 지금 〈황태자〉 전하(殿下)의 11월 천추절(千秋節)에는, 「우리 왕이 좋게 예물(禮物)을 가져가서 바칠 것이면 반드시 계본(啓本)을 요구할 것이니, 우리는 상량(商量) 계교(計較)하여 몇 개 음동(音同)한 글자를 골라서 계본(啓本)의 이면(裏面)에 꽂아 넣어, 중국(中國)에서 훌륭한 수재(秀才)가 있어 이것을 알아내는가를 보자.」고 각 사람이 합의하고, 전하(殿下)의 천추 계본(千秋啓本) 안에 짐짓 천추절사(千秋節使)의 자(字)를 써서 기모(譏侮)를 하고는,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유호(柳灝)와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정안지(鄭安止) 및 타각부(打角夫) 최호(崔浩)를 시켜 계본(啓本)을 가지고 경사(京師)로 가게 하였더니, 뜻밖에 본년(本年) 12월 19일에 원근(原根)이란 차사(差使)가 유호(柳灝)의 경사에 갈 때의 타각부(打角夫) 최호(崔浩)와 함께 예부 문서(禮部文書)를 가지고 와서 계본(啓本)을 짓고 쓴 사람의 해답을 요구하였다.’고 하였다. 그 당시 같이 상의(商議)하여 계본(啓本)을 지어 기모(譏侮)를 한 사람으로서 윤규(尹珪)·공부(孔俯)·윤수(尹須)가 왕과 원근(原根)의 앞에서 사유의 전말을 알려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 네 사람이 상의(商議)해서 짓고 쓰는 중간에 모든 것이 이 조서(曺庶)가 주장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왕은 본월 25일에 이르러 사역원사(司譯院事) 곽해룡(郭海龍)을 불러 나 조서(曺庶)를 압송(押送)한 것이다. 그 당시 왕은 곽해룡에게 분부(分付)하기를, ‘너는 그전에 북경(北京)에 여러 번 가서 그곳의 언어를 잘 알 것이므로, 지난해 너를 시켜 김약항(金若恒)을 호송하여 경사(京師)로 가게 한 것이다. 후에 사신 노인도(盧仁度)·정총(鄭摠)·오세겸(吳世謙)이 경사에 갔었는데 돌려보내지 아니하니, 그 곳에서 그들을 억류하여 길잡이로 만들어서 우리 땅을 정벌해서 취해 갈 것을 방비해야 할 것 같다. 지금 너를 시켜 조서(曺庶)를 반송(伴送)하여 경사(京師)에 보내니, 만약 그들을 보거든 자세한 것을 듣고 돌아와서 나에게 알려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곽해룡을 시켜 조서 나를 반송(伴送)하여 북경에 이르러 해답을 하고 소식을 들어 보도록 한 것이다."

지금 예부(禮部)에서 보내 온 조서(曺庶)의 문초장(問招狀)은 실제 그러했고, 그 곽해룡(郭海龍)의 문초장(問招狀)도 모두 조서의 것과 서로 같았다.


5月 15日[편집]

서리가 내리다. 유성이 왕량성에서 나와 북방으로 흐르다[편집]

○辛酉/隕霜。 流星出王良星, 北流。

서리가 내리었다.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에서 나타나 북방으로 흘러갔다.


역마를 폭력을 써서 빼앗은 일과 관련해 검교 전서 이응 등을 귀양보내다[편집]

○流檢校典書李鷹于咸州, 宣略將軍金龍三于江華, 池波顔于押戎牧子, 敬興少尹李得恒于瓮津, 囚宣略將軍金延祐于巡軍獄。 鷹等皆潛邸原從之人。 鷹告歸東北面, 刼奪驛馬, 侵擾傳舍, 龍三等偕行不禁。 上聞之, 卽命巡軍, 追捕下獄, 各流于外。 右道程驛使宣允沚、銀溪驛丞田得敬, 以無文憑給馬, 決笞。

검교 전서(檢校典書) 이응(李鷹)을 함주(咸州)로 귀양보내고, 선략 장군(宣略將軍) 김용삼(金龍三)을 강화(江華)로, 지파안(池波顔)을 압륭 목자(押戎牧子)로, 경흥 소윤(敬興少尹) 이득항(李得恒)을 옹진(甕津)으로 귀양보냈으며, 선략 장군 김연우(金延祐)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이응(李鷹) 등은 모두 임금의 잠저(潛邸) 때 원종(原從)한 사람인데, 이응은 작별하고 돌아가면서 동북면에서 역마(驛馬)를 폭력을 써서 빼앗고 전사(傳舍)[45]를 소란하게 하였는데도, 김용삼(金龍三) 등이 같이 가면서 금지시키지 않았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순군(巡軍)에게 명하여 쫓아가 잡아 와서 옥(獄)에 가두고 각기 외방(外方)으로 귀양보냈다. 우도 정역사(右道程驛使) 선윤지(宣允沚)와 은계 역승(銀溪驛丞) 전득경(田得敬)은 증거될 만한 문서가 없는데도 말을 내준 이유로써 태형(笞刑)을 집행하였다.


5月 16日[편집]

양부에 명하여 시정의 잘잘못과 백성들의 고충을 아뢰게 하다[편집]

○壬戌/命兩府, 陳時政得失、生民利病以聞。

양부(兩府)[46]에 명하여 시정(時政)의 잘되고 잘못된 점과 백성의 이로운 일과 폐단된 일을 진술하여 아뢰게 하였다.


소나무가 말라 죽고 서리가 내린 것 때문에 도성 감역관 등을 사유하다[편집]

○上以主山松樹枯槁, 且夏月降霜, 命都承旨李文和, 傳旨使司曰: “向者, 貶外都城監役官, 皆宥其罪, 金恕決罪還任。 凡貶外員人, 具罪狀輕重以聞。” 使司聞命, 乃復曰: “殿下旣恐懼修省, 時政得失、民間利病, 宜加咨訪。” 上從之。

임금이 서울 주산(主山)의 소나무가 말라 죽고, 또 여름철에 서리가 내린 이유로써 도승지 이문화(李文和)를 명하여 사사(使司)[47]에게 전지하였다.

"지난번에 외방(外方)으로 폄직(貶職)된 도성 감역관(都城監役官)을 모두 그 죄를 용서하고, 김서(金恕)는 죄를 결정하여 본래의 직책으로 다시 임명하며, 무릇 외방(外方)으로 폄직된 원인(員人)에 죄상의 경하고 중한 것을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게 하라."

사사(使司)에서 명을 듣고 이에 복명(復命)하였다.

"전하(殿下)께서 이미 두려워하고 반성(反省)하였으니, 시정(時政)의 잘되고 잘못된 점과 민간의 이로운 일과 폐단 되는 일에도 마땅히 물어야 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백관과 기로들이 공부 등 3인을 경사로 보내는 문제를 의논하다[편집]

○會百官耆老于朝, 議孔俯等三人赴京可否。 議者多以赴京爲言, 唯西原君韓尙敬等十數人, 以爲不可。 左諫議大夫鄭矩等言: “君令臣供, 禮之常也。 然勢有不得已, 則禮有時而變焉。 今見曺庶、海龍之招, 與夫禮部致意之辭, 其爲諼甚矣。 蓋千秋賀禮, 非始於去年, 奏啓字樣, 不異於曩日, 而上國之怒, 發自丁丑, 其設機運謀, 必有以也。 且曺庶與孔俯等三人, 不爲戲侮, 非唯一國臣民所共知也, 皇天后土, 實所明鑑。 上國羅織虛妄, 刼取其辭, 而有三人發來之命。 止此三人則遣之可也, 又取三人之辭, 而羅織罪名, 則必有難從之命。 其將何以應之? 今日遣此三人, 明日又遣十人, 而國家終安且平, 則固當遣之, 今乃明知其諼, 而曲從其命, 先示刼弱, 則恐貽後日之悔也。 願殿下且留三人, 具奏陳乞, 則庶有感悟之理。” 上與左政丞趙浚等議之, 猶豫未定。

백관(百官)들과 기로(耆老)를 조정에 모아서 공부(孔俯) 등 3인을 경사(京師)로 가게 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의논하게 하니, 의논하는 사람이 경사로 가는 것을 옳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는데, 다만 서원군(西原君) 한상경(韓尙敬) 등 열 몇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 정구(鄭矩) 등은 아뢰었다.

"임금이 명령하면 신하가 봉사(奉仕)하는 것은 예절의 떳떳한 것입니다. 그러나 형세가 부득이한 일이 있게 되면 예절도 때에 따라 변경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조서(曺庶)와 곽해룡(郭海龍)의 문초장(問招狀)과 예부(禮部)의 의사를 전달하는 문사(文辭)를 보건대, 그것이 기만(欺瞞)함이 심한 편입니다. 대개 천추절(千秋節)의 하례(賀禮)가 지난해에 처음으로 한 것도 아니며, 주계(奏啓)의 글과 양식이 지난날 보다 다른 것도 아닌데, 상국(上國)의 노여움은 정축년부터 일어났으니, 그 기략(機略)을 베풀어 모계(謀計)를 운용(運用)함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또 조서와 공부 등 3인이 희모(戲侮)를 하지 않은 것은 다만 온 나라 신민(臣民)이 다 같이 알 뿐만 아니라, 천지의 신명(神明)께서 실로 밝게 굽어보시는데, 상국(上國)에서 거짓을 꾸며서 그 공사(供辭)를 위협해 취하여 3인을 오라는 명령이 있으나, 이 3인에게 그친다면 이들을 보내는 것도 옳겠지마는, 또 3인의 공사(供辭)를 취하여 죄명을 꾸며서 만든다면 반드시 복종하기가 어려운 명령이 있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대응(對應)하겠습니까? 오늘 이 3인을 보내고 내일 또 10인을 보내어 국가가 마침내 편안하고 평온하게 된다면 진실로 마땅히 보내겠지마는, 지금 명백히 그 기만(欺瞞)을 알면서도 그 명령을 임시변통으로 우리의 의사를 굽혀 따라서 먼저 겁내고 약한 것을 보이게 된다면 후일의 뉘우침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우선 3인을 머물러 두고, 사정을 자세히 갖추어 빈다면 느끼어 깨닫게 되는 이치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좌정승 조준 등과 이 일을 의논하였으나 망설이고 결정짓지 못하였다.


5月 17日[편집]

정의·강회중 등을 사유하다[편집]

○癸亥/宥鄭義ㆍ姜淮仲等十六人、李龜鐵ㆍ金英烈ㆍ閔中理等二十二人。

정의(鄭義)와 강회중(姜淮仲) 등 16인과 이귀철(李龜鐵)·김영렬(金英烈)·민중리(閔中理) 등 22인을 유사(宥赦)하였다.


효렴과 무재로 천거된 이들을 불러보고 실효가 없는 70여 명을 보내다[편집]

○命都承旨李文和, 引見各道孝廉茂才, 放其無實效者七十餘人。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각도(各道)의 효렴(孝廉)[48]과 무재(茂才)[49]를 불러 보고 그 실효(實效)가 없는 사람 70여 명을 내보냈다.


5月 18日[편집]

유비고를 처음 설치하고 도평의사사에 내린 전지[편집]

○甲子/初置有備庫。 上命都承旨李文和, 傳旨于使司曰: “宋藝祖於國用之外, 別立內庫, 似爲私藏也。 然嘗語近臣曰: ‘軍興飢饉, 須預爲備。 臨事厚斂, 非長策也。’ 又曰: ‘朕憫八州之民久陷夷虜, 使蓄滿五百萬緡, 以贖山後諸郡。’ 然則宋祖內帑之立, 公也, 非私也。 自是貨泉金帛, 分命有司, 專職守也; 參驗定數, 防滲漏也。 今予置有備庫, 所以專應軍需。 其所入錢穀布貨, 令三司會計, 量入爲出, 如有兵興, 臨時啓聞, 量宜調度, 永爲恒法。”

유비고(有備庫)를 처음 설치하고, 임금이 도승지 이문화에게 명하여 사사(使司)에 전지하였다.

"송 태조(太祖)는 국용(國用) 외에 별도로 내고(內庫)를 세웠으니 자기 개인의 저장을 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찍이 측근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군량(軍糧)과 기근(飢饉)에는 모름지기 미리 준비해야 되는 것이니, 일에 다달아 조세(租稅)를 과중하게 징수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짐(朕)이 8주(州)의 인민이 오랫동안 오랑캐에게 함몰(陷沒)된 것을 민망히 여기어 5백만 민(緡)[50]을 저축하여 산후(山後)[51]의 여러 군(郡)을 교환하도록 하겠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송 태조가 내탕(內帑)을 세운 것은 공용(公用)이고 사용(私用)은 아니다. 이로부터 화천(貨泉)과 금백(金帛)을 유사(有司)에게 나누어 명령한 것은 직수(職守)를 전임(專任)시킨 것이고, 정수(定數)를 참험(參驗)한 것은 새어나감을 막은 것이다. 지금 내가 유비고(有備庫)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군수(軍需)에 대응(對應)하기 때문이니, 그 수입되는 전곡(錢穀)과 포화(布貨)를 삼사(三司)로 하여금 회계(會計)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도록 하고, 만약 전쟁이 발생하는 일이 있으면 임시에 계문(啓聞)하여 적당히 조절(調節)하도록 하고, 이것을 항구적인 법으로 삼게 하라."


흥천사에 거둥하여 사리전 지을 터를 시찰하고 조속한 완성을 부탁하다[편집]

○上幸興天寺, 觀舍利殿築基, 謂監役提調金湊曰: “貞陵與料物庫, 不必速成。 此殿願營久矣, 今不畢功, 恐後有沮之者。 宜速考成, 以償吾願。” 遂還宮, 與柳曼殊、都興、柳雲等爲擊毬之戲。

임금이 흥천사(興天寺)에 거둥하여 사리전(舍利殿)을 건축할 기지(基地)를 시찰하고, 감역 제조(監役提調) 김주(金湊)에게 일렀다.

"정릉(貞陵)과 요물고(料物庫)를 빨리 만들 필요는 없으며, 이 사리전(舍利殿)은 건축을 원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일을 마치지 않으면 후일에 이를 저지(沮止)시킬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마땅히 빨리 성취하여 나의 원망에 보답하라."

드디어 궁궐에 돌아와서 유만수(柳曼殊)·도흥(都興)·유운(柳雲) 등과 더불어 격구(擊毬)의 놀이를 하였다.


5月 20日[편집]

복업인 이백안 등이 요동에서 오다[편집]

○丙寅/復業人李伯顔ㆍ夫介、盲人金孝道, 來自遼東, 賜衣糧。

복업인(復業人) 이백안(李伯顔)·부개(夫介)와 장님 김효도(金孝道)가 요동(遼東)으로부터 오니, 의복과 양식을 내려 주었다.


5月 21日[편집]

최영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양부의 상의 등 10명을 감원하다[편집]

○丁卯/以崔永沚爲判三司事, 成石璘門下侍郞贊成事, 禹仁烈、柳曼殊商議門下府事, 成石瑢司憲府大司憲。 減兩府商議十員、漢城尹一員、藝文春秋館太學士二員、學士二員。

최영지(崔永沚)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성석린(成石璘)을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우인열(禹仁烈)과 유만수(柳曼殊)를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로, 성석용(成石瑢)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고, 양부(兩府)의 상의(商議) 10원(員), 한성 윤(漢城尹) 1원, 예문춘추관 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 2원, 학사(學士) 2원을 줄이었다.


5月 22日[편집]

중 108명을 모아 소재 법석을 베풀고 5일 만에 그치다[편집]

○戊辰/聚僧百八, 設消災法席, 五日而罷。

중 1백 8명을 모아서 재앙을 없애는 법석(法席)을 베풀고 5일 만에 그치었다.


박천강과 전자충을 사유하다[편집]

○宥朴天祥、全子忠。

박천상(朴天祥)과 전자충(全子忠)을 유사(宥赦)하였다.


5月 23日[편집]

유성이 자미에서 나와 영성 분야로 들어가다[편집]

○己巳/流星出紫(薇)〔微〕, 入靈星。

유성(流星)이 자미(紫微)에서 나와 영성(靈星) 분야로 들어갔다.


5月 24日[편집]

임금이 병환이 나다[편집]

○庚午/上不豫。

임금이 병환이 났다.


5月 25日[편집]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편집]

○辛未/上康復。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대마도에 잡혀 갔던 8명과 귀화하는 왜인 9명이 함께 오다[편집]

○對馬島被擄人八名, 與倭人九名來, 使各還其家; 分處倭人于州縣, 各賜衣糧。

대마도(對馬島)에 사로잡혀 갔던 사람 8명이 왜인(倭人) 9명과 더불어 오니, 그들에게 각기 그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왜인은 주현(州縣)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여 각기 의복과 양식을 내려주었다.


5月 26日[편집]

유성이 남쪽 두성에서 나와 기성 분야로 들어가다[편집]

○壬申/流星出南斗, 入箕星。

유성(流星)이 남쪽 두성(斗星)에서 나와 기성(箕星) 분야로 들어갔다.


우현보의 직첩 및 가산과 그 아들의 직첩을 돌려주다[편집]

○命都堂, 還給禹玄寶職牒家産及其子洪富、洪康職牒。

도당(都堂)에 명하여 우현보(禹玄寶)의 직첩(職牒) 및 가산(家産)과 그 아들 우홍부(禹洪富)·우홍강(禹洪康)의 직첩을 돌려 주었다.


전희길이 동북면 단주에서 금 4돈쭝을 캐 바치다[편집]

○田希吉往東北面端州, 以軍人八十名, 採金九日, 得四錢以獻。

전희길(田希吉)이 동북면 단주(端州)에 가서 군인 80명으로써 금을 캔 지 9일 동안에 4돈쭝[錢]을 얻어서 바치었다.


5月 28日[편집]

우승지 김육이 양마 1필을 바치니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다[편집]

○甲戌/右承旨金陸, 獻良馬一匹, 賜鞍馬。

우승지 김육(金陸)이 좋은 말 1필을 바치니, 안장 갖춘 말을 내려 주었다.


각도에 금주령을 철저히 지키도록 엄하게 명을 내리다[편집]

○申嚴各道酒禁之令。

각도에 술을 금하는 영을 거듭 엄하게 하였다.


5月 29日[편집]

왕세자의 현빈이 아들을 낳다[편집]

○乙亥/王世子賢嬪生男。

왕세자의 현빈(賢嬪)이 아들을 낳았다.


七年 閏五月[편집]

閏5月 1日[편집]

사관에게 왕위에 오른 때부터의 사초를 바치게 하다[편집]

○丙子朔/上命史官, 令進卽位以來史草。 上問都承旨李文和曰: “當時史記, 君王未得見, 何也?” 文和對曰: “史, 直書不諱。 若君王大臣自見, 則恐有諱忌, 不直書故也。” 上曰: “予亦知史法如是。 然有唐太宗故事, 予欲見之。 史臣强逆之, 豈爲臣之義乎? 當開史庫, 無遺以進。”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왕위에 오른 때부터 이후의 사초(史草)를 바치게 하고, 임금이 도승지 이문화에게 물었다.

"그 당시의 역사 기록을 군주가 보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문화가 대답하였다.

"역사는 사실대로 바로 써서 숨김이 없어야 하는데, 만약 군주와 대신(大臣)이 스스로 보게 된다면 숨기고 꺼려서 사실대로 바로 쓰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한 까닭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나도 또한 역사 쓰는 법이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역사를 본 옛일이 있으니, 내가 이를 보고자 하는데, 사신(史臣)이 굳이 이를 거역한다면 어찌 신하 된 의리이겠는가? 마땅히 사고(史庫)를 열어서 빠짐없이 바쳐야 될 것이다."


閏5月 2日[편집]

개성현을 폐지하고 개성 유후사에 예속시키다[편집]

○丁丑/罷開城縣, 隷開城留後司。

개성현(開城縣)을 폐지하고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에 예속(隸屬)시키었다.


모친 상 중 상복을 벗고 변정 도감에 송사를 낸 권지 교감 허지신을 탄핵하다[편집]

○權知校勘許之信丁母憂, 自脫衰絰, 訟辨定都監, 諫官劾而囚之。

권지 교감(權知校勘) 허지신(許之信)이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스스로 최질(衰絰)[52]을 벗고 변정 도감(辨定都監)에 송사(訟事)를 하니, 간관(諫官)이 탄핵하여 가두었다.


閏5月 3日[편집]

공부 등을 중국에 보내지 말라는 우산기 상시 변중량 등의 상소[편집]

○戊寅/右散騎常侍卞仲良等上疏曰:

前日以尹珪、孔俯、尹須等發遣事, 收百官可否, 臣等悉陳利害, 具本啓聞, 今乃欲令三人前赴朝廷, 自就辨明。 臣等竊謂, 事大之禮則然矣, 應變之計, 則似有未便, 不可雷同, 再瀆天聰。 自殿下踐祚以來, 事大之誠, 有加無已, 上國反以謂戲侮, 吹毛求疪, 察察於文詞之間, 旣拘留鄭摠、金若恒、盧仁度、柳灝等, 又責取曺庶、郭海龍戲侮間諜之辭。 夫三人戲侮, 實非其情, 至於間諜之言, 尤不可以口舌辨明。 迹其所以, 設機運謀, 必有以也。 且三人去留雖輕, 我國之勢, 從而輕重。 雖曰今姑送之, 以觀其變而後圖之, 然前此反復之命, 無一不從, 尙且譴責猶是也, 何待後變而後知之? 若以我國天設險阻, 曲從非義之命, 先示刼弱之勢, 則恐繼有難從之命, 其將何以應之? 況上國喜怒大計, 安有決於蕞爾書生去留之間哉? 願從變例, 留此三人, 具狀辨明其冤, 一以示自强之勢, 則拘留使臣, 庶有速還之理矣。 其曾被拘留鄭摠、金若恒、宋希靖、吳珍、楊遇、盧仁度、吳世謙、權乙松、柳灝、鄭安止、曺庶、郭海龍等家, 時加存問, 優養父母妻子, 以示仁愛。

上下其疏都堂, 擬議以聞。 都堂皆以發遣觀變聞。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 등이 상소(上疏)하였다.

"전일에 윤규(尹珪)·공부(孔俯)·윤수(尹須) 등을 발송(發送)시킬 일로써 백관(百官)들에게 가부(可否)을 의논하게 하므로, 신 등이 이해(利害)를 자세히 진술하여 주본(奏本)에 갖추어 계문(啓聞)하였는데, 지금 3인으로 하여금 조정(朝廷)[53]에 나아가서 스스로 변명시키고자 하니, 신 등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대국(大國)을 섬기는 예절로서는 그렇겠지마는, 임기응변(臨機應變)하는 계책으로서는 불편한 점이 있을 듯하므로, 주견이 없이 남의 의견에만 좇아 어울릴 수가 없어서 다시 임금의 귀를 번거롭게 합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대국(大國)을 섬기는 정성이 더욱 더하여 그치지 않았는데도, 상국(上國)에서는 도리어 희모(戲侮)했다고 하면서 남의 잘못을 일부러 찾아 내려고 문사(文詞)의 사이를 세밀하게 살펴서 이미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유호(柳灝) 등을 구류(拘留)하고, 또 조서(曺庶)와 곽해룡(郭海龍)의 희모(戲侮)·간첩(間諜)의 문사(文辭)를 취하기를 요구하는데, 대저 3인이 희모(戲侮)했다는 것은 실로 그 실정이 아니며, 간첩(間諜)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말로서는 변명할 수가 없으니, 그것이 그렇게 된 까닭을 상고한다면, 기략(機略)을 베풀고 모계(謀計)를 운용(運用)함이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또 3인의 떠나고 머무는 것은 비록 가볍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형세가 이에 따라 가볍고 무겁게 될 것이니, 비록 지금 잠정적으로 보내어 그 변고(變故)를 보고 난 후에 이를 도모한다고 하지마는, 그러나 이보다 먼저 반복(反復)한 명령을 한 가지라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견책(譴責)이 이와 같은데, 어찌 후일의 변고를 기다린 후에 이를 알겠습니까? 만약 우리 나라가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험조(險阻)로써 옳지 못한 명령에 임시변통으로 우리의 의사를 굽혀 좇아 먼저 겁내고 약한 형세를 보인다면, 잇따라 따르기 어려운 명령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그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하물며, 상국(上國)의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큰 계책이 어찌 조그마한 서생(書生)의 가고 머무는 사이에서 결정되겠습니까? 원컨대, 변례(變例)를 따라서 이 3인을 머물러 두고 장계(狀啓)를 갖추어 그 원통함을 변명하여 한편으로 우리의 강한 형세를 보인다면, 구류(拘留)된 사신도 빨리 돌아올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일찍이 구류당한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송희정(宋希靖)·오진(吳珍)·양우(楊遇)·노인도(盧仁度)·오세겸(吳世謙)·권을송(權乙松)·유호(柳灝)·정안지(鄭安止)·조서(曺庶)·곽해룡(郭海龍) 등의 집에 때때로 위문하고, 부모와 처자(妻子)를 후하게 길러 인애(仁愛)를 보이소서."

임금이 그 소(疏)를 내려 서로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도당(都堂)에서는 모두 발송(發送)하여 변고를 보게 하도록 아뢰었다.


저주한 김견 등 4명이 참형을 당하다[편집]

○中和郡呪咀人金堅等四人, 伏誅。

중화군(中和郡)에 사는 저주(咀呪)한 사람 김견(金堅) 등 4명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閏5月 4日[편집]

흥천사에 거둥하여 새로 건축한 도평의사사 청사를 시찰하다[편집]

○己卯/幸興天寺, 遂如都評議使司新造廳, 觀之。

임금이 흥천사(興天社)에 거둥하여 마침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새로 건축한 청사(廳舍)에 가서 이를 시찰하였다.


閏5月 6日[편집]

세자전 남문에서 왕손의 복을 내리는 신에게 초례를 베풀다[편집]

○辛巳/命永嘉府院君權僖, 設王孫開福神醮禮于世子殿南門。

영가 부원군(永嘉府院君) 권희(權僖)에게 명하여 왕손(王孫)의 개복신(開福神) 초례(醮禮)를 세자전(世子殿)의 남문(南門)에서 베풀게 하였다.


청주 목사 김자수가 흉년인 이 해의 맥세를 면제해주기를 청한 글[편집]

○淸州牧使金自粹以年饑, 陳書于監司, 請免今年麥稅。 其書曰:

今使司以旱甚年饑, 下令州郡, 隨宜救荒, 若使一有餓莩, 當該官吏, 痛懲慢官之罪。 其憂國愛民之意, 藹然言外, 讀之至再, 惕然恐懼, 固當奉行。 竊伏惟念, 愛民雖切, 若無實惠, 皆空言也。 昔漢文帝預賜當年租稅之半, 以勸農民。 後賢美其實惠之及民, 此所以爲漢文也。 國家收租, 每當六月之初, 小麥告熟, 便卽收之, 以輸京倉, 謂之先納, 年例也。 今年則自三月不雨, 以至今月, 雖間月一雨, 入土未及數寸, 尋卽開霽, 亢陽之烈, 日甚一日。 以故大小麥實, 悉爲損耗。 卽(令)〔今〕飢民, 嗷嗷待哺, 尙不能充其腹, 況望其秋耕之種乎? 然則所謂先納, 何從而徵納乎? 乞今年先納, 一皆蠲免, 以寬民力, 則實惠之及民, 莫此爲切, 救荒之要務, 莫此爲急。 郡守之任, 職在分憂, 所見民瘼, 不容不言, 敢昧死以請, 伏望轉聞施行。

監司傳報, 都堂是其議, 聞于上, 減諸道麥稅。

청주 목사(淸州牧使) 김자수(金自粹)가 연사(年事)가 흉년이 든 이유로써 감사(監司)에게 글로 진술하여 금년의 맥세(麥稅)를 면제해 주기를 청하여 말하였다.

"지금 사사(使司)에서 가뭄이 심하여 연사(年事)가 흉년이 든 이유로써 주군(州郡)에 영을 내리어 적당한 데 따라 흉년을 구휼(救恤)하게 하되, 만약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는 자가 있으면 해당 관리는 관부(官府)의 명령을 소홀히 한 죄로써 엄격하게 징계한다 하여, 그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 말 밖에 풍기고 있으니, 이를 두 번이나 읽으매 삼가 두려워서 진실로 마땅히 받들어 시행해야 되겠습니다. 가만히 삼가 생각하옵건대, 백성을 사랑함이 비록 간절하더라도 만약 실지의 은혜가 없으면 모두 빈말인 것입니다. 옛날에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그해 조세(租稅)의 반을 미리 내려 주어 농민을 권장했으므로, 후현(後賢)이 그 실지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게 된 것을 칭찬했으니, 이것이 한나라 문제(文帝)가 된 이유입니다. 국가에서 조세(租稅)를 거둠이 매양 6월 초기에 밀이 익을 때를 당하면, 문득 즉시 이를 거두어 경창(京倉)에 수송하고는 이를 선납(先納)이라고 하는 것이 해마다 하는 예(例)입니다. 금년은 3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서 이달까지 이르게 되고, 비록 한 달씩 걸러 한 번 비가 왔으나 흙에 들어감이 두서너 치[寸]에 미치지 못하고, 조금 후에 곧 날씨가 개게 되어 가뭄의 맹렬함이 날마다 더 심하니, 이 까닭으로 보리·밀의 열매가 모두 감손(減損)되었습니다. 지금 굶주린 백성이 슬피 울면서 먹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 배를 채워 주지 못하는데, 하물며 가을 밭갈이의 종자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른바 선납(先納)이라는 것은 어디서 징수해 바치게 하겠습니까? 원컨대, 금년의 선납은 일체 모두 감면시켜 백성의 힘을 펴게 한다면, 실지 은혜의 백성에게 미친 것이 이보다 더 긴절한 것이 없을 것이며, 흉년을 구휼(救恤)하는 긴요한 사무도 이보다 더 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군수(郡守)의 임무는 직책이 임금의 근심을 나누는 데 있는데, 본 바의 백성의 고통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감히 죽기를 무릅쓰고 청하오니, 삼가 전하여 아뢰어 시행되기를 바랍니다."

감사가 전하여 보고하니, 도당(都堂)에서 그 의논을 옳게 여겨 임금에게 아뢰어 여러 도(道)의 맥세(麥稅)를 감면해 주었다.


창고에 있는 곡식을 다 내어 백성을 진휼케 하다[편집]

○慶尙道觀察使請賑飢民。 左政丞趙浚等啓曰: “饑饉之民, 各道皆是。 如皆賑之, 廩無餘蓄, 奈何?” 上曰: “廩有粟, 則盡發賑之。”

경상도 관찰사가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기를 청하니, 좌정승 조준 등이 아뢰었다.

"굶주린 백성은 각도마다 모두 이와 같은데, 만약 모두 이를 진휼한다면 창고에 남는 저축이 없을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임금이 대답하였다.

"창고에 곡식이 있으면 다 내어 백성을 진휼하라."


閏5月 7日[편집]

비가 내리다[편집]

○壬午/雨。

비가 내렸다.


아버지를 구타한 사노 오마대를 목베게 하다[편집]

○私奴吾麻大, 歐其父, 命斬之。

사노(私奴) 오마대(吾麻大)가 그 아버지를 구타하였으므로, 명하여 이를 목 베게 하였다.


閏5月 9日[편집]

비가 내리다[편집]

○甲申/雨。

비가 내렸다.


경상도의 조선 20척이 도착하여 정박 중이므로 임금이 서강에 거둥하다[편집]

○上幸西江。 慶尙道漕船二十艘到泊。

임금이 서강(西江)에 거둥하였는데, 경상도의 조선(漕船) 20척이 도착 정박하였다.


閏5月 10日[편집]

비가 내리다[편집]

○乙酉/雨。

비가 내렸다.


물시계를 종루에 설치하다[편집]

○置更漏于鍾樓。

경루(更漏)를 종루(鐘樓)에 설치하였다.


閏5月 11日[편집]

영평 백운산에 피빛 비가 내리다[편집]

○丙戌/雨血于永平白雲山。

피비가 영평(永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리었다.


간언을 수렴하고 공역을 그만두며 불교 배척할 것 등을 아뢴 이지의 상소[편집]

○上閱兩府所上書, 皆以亟罷土木之役, 汰去女官宦官之職, 早朝聽政, 親君子退小人爲言, 知中樞院事李至之言尤切。 其略曰:

親君子遠小人。 《書》曰: “三公論道經邦。” 又曰: “朝夕納誨, 以輔台德。” 古之賢君, 或夜半前席, 以迎賢士, 其勤如此。 今殿下接見大臣之日少, 故經綸之言, 不得上達。 伏望日接賢士大臣, 講論治道, 則弊無不革, 利無不興, 而小人自退矣。 一, 納諫諍開言路。 《書》曰: “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古先哲王, 聖不自聖, 置諫臣於左右, 一動一靜, 莫不規諫, 而從之也如流。 今也諫臣疎外, 殿下之得失、民情之休戚, 無自而得達。 願使諫臣輪番日侍, 言無不行, 諫無不聽, 則下情上達, 無雍蔽之患矣。 一, 嚴禁衛。 古之人君, 深居九重之內, 晝必居外, 夜必居內, 以順天時, 以嚴內外。 今也偏居別殿, 與戎士暱近, 甚可慮也。 願殿下, 高拱法宮, 順天時嚴內外, 動靜以法, 宿衛有嚴。 一, 罷工役。 《語》曰: “禹卑宮室, 而盡力乎溝洫。” 古之人君, 非不欲美其宮室也, 惟恐其傷財害民, 不敢輕役。 今農月不雨, 而民罹饑饉, 災變屢興, 甚可畏也。 願京都各處營繕之役, 一皆停罷, 姑待歲稔, 使畢其功。 或以營繕過度、無時役民爲納忠者, 斥之。 一, 斥浮屠。 浮屠事, 聖人所戒。 其爲道也, 滅絶人倫, 置身物外, 以虛無怪誕之說, 誑人耳目, 或稱(茄)〔伽〕藍, 或稱裨補, 營繕百端。 緇衣之流, 總如林木, 坐食民力, 或造佛像, 或印佛書, 作衣鉢供安居, 述願文稱緣化, 橫行中外, 誑誘愚民, 甚者刼從之, 糜有限之産, 塡無窮之欲, 國家之深患也。 安有作罪者, 賄賂於佛而可免乎? 願收其願文, 禁其緣化, 或以內帑納賂於寺, 或內殿祈禳等事, 亦皆禁斷, 小心翼翼, 恐懼修省, 則諸福畢至, 何賴乎浮屠? 其或宰相士大夫宦官之類, 敢以營繕浮屠之事進言者, 痛懲放斥。 一, 鍊軍額。 外方水軍, 初定軍額, 父爲左領, 子爲右領, 兄爲左領, 弟爲右領, 又有一丁則給他人爲餘丁, 故民甚苦之。 或被擄於倭賊, 或敗船於漕轉, 或因長番騎船, 不堪其役, 逃潰相續, 軍額日減。 令其州郡, 剋期充數, 侵擾百端, 州郡騷然。 願令州縣, 其額數內, 時立軍及官軍新接人等, 充其額數, 改鍊軍籍, 其州未盡充額者, 減其元數。 又一戶內, 有二三其丁者, 立軍一名; 四五其丁者, 左右二名, 以次詳定, 雖有餘丁, 莫給他人, 則庶可寬民力矣。 一, 汰冗官。 忠信重祿, 所以勸士也, 今也食祿煩冗, 不可不汰。 其檢校、翁主、宅主、女官等職, 一行汰去。 且今之外方, 加定祿田, 轉輸之功尤難, 皆令除之, 則可以厚於忠信, 而民無愁歎矣。

上命下都堂, 罷宮闕造成都監, 以其事務歸于繕工監, 放京外工匠。檢校各品與宮主、翁主、宅主、女官停祿, 唯開國功臣妻·母翁主, 特許頒祿。 又使都承旨李文和, 問于使司曰: “卿等所言雖切, 然不直書其事、直指其人, 而以微諷, 何也?” 又曰: “予於往日, 不視朝衙者, 以有疾病, 不能早起故也。 自今吾當力疾視朝矣。”

임금이 양부(兩府)에서 올린 글을 열람하니, 모두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빨리 그만두고 여관(女官)과 환관(宦官)의 관직을 도태 제거할 것이며,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정사를 청단(聽斷)하고, 군자를 친근히 하고 소인을 물리치는 것으로써 말하였는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지(李至)의 말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군자를 친근히 하고 소인을 멀리 할 것이니, 《서경(書經)》에 ‘삼공(三公)은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린다.’ 하고, 또 ‘조석으로 가르쳐서 나의 덕을 보좌하라.’ 하였습니다. 옛날의 현명한 군주는 혹은 밤중의 앞자리에서 현명한 선비를 맞이하였으니 그 부지런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전하(殿下)께서 대신(大臣)을 접견하는 날이 적은 까닭으로 경륜(經綸)의 말이 위에 통하지 못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날마다 현명한 선비와 대신을 접견하여 정치하는 방법을 강론한다면, 폐해는 고쳐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이익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어져서, 소인은 저절로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1. 간언(諫言)을 받아들여서 신하로서 임금에게 말을 올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될 것입니다. 《서경》에 ‘나무가 먹줄을 맞으면 바르게 되고, 임금이 간언(諫言)을 따르면 성스럽게 된다.’ 하였는데, 옛날의 현철한 군왕은 성스러움이 스스로가 성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간하는 신하를 좌우에 두고 한 번 움직이는 것과 한 번 정지하는 것도 규간(規諫)을 하게 하여, 이에 따르기를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빨리 순종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간하는 신하가 소외(疎外)되었으므로, 전하의 잘하고 잘못한 일과 민정(民情)의 즐거움과 근심되는 일이 어디로부터 통할 데가 없게 되었으니, 원컨대 간하는 신하로 하여금 차례로 번을 들어 날마다 모시게 하여, 말하는 것은 시행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고 간하는 것은 듣지 않는 것이 없게 한다면, 아랫사람의 사정이 위에 통하여 임금의 총명이 가리워지는 폐단은 없을 것입니다.

1. 궁금(宮禁)의 호위를 엄격하게 할 것입니다. 옛날의 군주는 구중 궁궐 안에 깊숙이 거처하여, 낮에는 반드시 밖에 거처하고 밤에는 반드시 안에 거처하여 천시(天時)에 순응하고 내외(內外)의 한계를 엄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별전(別殿)에 치우치게 거처하면서 병사(兵士)들과 너무 친근하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정전(正殿)에 팔짱을 끼고 높이 앉아서 천시(天時)에 순응하고 내외(內外)의 한계를 엄하게 하여, 동정(動靜)을 법대로 하고 숙위(宿衛)를 엄하게 할 것입니다.

1. 공역(工役)을 그만두게 할 것입니다. 《논어(論語)》에 ‘우왕(禹王)은 궁실은 낮게 짓고 구혁(溝洫)[54]에 힘을 다하였다.’ 하였으니, 옛날의 군주는 그 궁실을 화려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마는, 다만 그것이 재물을 손상시키고 백성을 해치는 것이 두려워서 감히 공역(工役)을 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지금 농사철에 비가 오지 않아서 백성이 기근(饑饉)을 만나고 재변(災變)이 자주 일어나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원컨대, 서울 각 곳의 영선(營繕)의 공역은 일체 모두 정지시켰다가 잠정적으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그 공역을 마치게 할 것입니다. 혹은 영선(營繕)을 정도에 지나치게 하여 일정한 때없이 백성을 노역(勞役)하는 것으로써 충성을 바치는 사람은 이를 물리칠 것입니다.

1. 불교(佛敎)를 배척할 것입니다. 불교에 관한 일은 성인(聖人)이 경계한 바입니다. 그 도(道)는 인륜(人倫)을 끊고 세상 밖에 몸을 두고는 허무·괴탄(怪誕)의 설(說)로써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속여서 혹은 가람(伽藍)이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비보사찰(裨補寺刹)이라 일컫기도 하여, 온갖 방법으로 사찰(寺刹)을 건축하여 승려(僧侶)의 무리가 숲처럼 많아서 하는 일 없이 백성의 힘에 먹게 되고, 혹은 불상(佛像)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불서(佛書)를 인쇄하기도 하여 의발(衣鉢)을 만들어 안거(安居)에 제공하고, 원문(願文)을 기술하여 연화(緣化)를 일컫고는 서울과 지방에 마음대로 다니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게 되며, 심한 것은 위협해 따르게 하여 한정이 있는 재산을 소비하여 한이 없는 욕심을 채우게 되니 국가의 큰 근심입니다. 어찌 죄지은 사람이 부처에게 뇌물을 바치고서 면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그 원문(願文)을 회수하고 그 연화(緣化)를 금하게 하며, 혹은 내탕(內帑)으로써 절에 뇌물을 바치고, 혹은 내전(內殿)에서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치게 하는 등의 일도 또한 모두 금단(禁斷)시키고, 조심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반성한다면, 모든 복이 다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불교에 힘입겠습니까? 그 혹시 재상(宰相)·사대부(士大夫)·환관(宦官)의 무리들도 감히 사찰(寺刹)을 건축하는 일로써 말을 올리는 사람은 엄격히 징계하여 내쫓게 할 것입니다.

1. 군사의 정원(定員)을 마련(磨鍊)할 것입니다. 외방(外方)의 수군(水軍)은 처음에는 군사의 정원을 정하여 아버지가 좌령(左領)이 되면 아들은 우령(右領)이 되고, 형이 좌령이 되면 아우는 우령이 되게 하였으며, 또한 장정(壯丁)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여정(餘丁)을 삼게 한 까닭으로 백성이 심히 이를 괴롭게 여겼으며, 혹은 왜적(倭賊)에게 사로잡히기도 하고 혹은 조운(漕運)하는 데 배가 부서지기도 하고 혹은 장기간 번(番)을 들어 배 타는 일로 인하여, 그 노역을 감내하지 못해서 도망하는 사람이 서로 잇따르게 되어, 군사의 정원이 날로 줄어들므로, 그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기일에 맞추어 수효를 채우게 하여, 온갖 방법으로 침해하여 소요를 일으키니, 주군(州郡)이 떠들썩하옵니다. 원컨대, 주군에 명령하여 그 정원 수효 내의 시립군(時立軍)과 관군(官軍)의 신접인(新接人) 등에서 그 정원 수효를 충당하여 군적(軍籍)을 고쳐 마련(磨鍊)하고, 그 고을에서 정원을 다 충당하지 못하는 것은 그 원 수효를 줄이게 하며, 또 1호(戶) 내에 그 장정(壯丁)이 2, 3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으면 군사 1명만 세우게 하고, 그 장정이 4, 5명이나 되는 사람은 2명을 자유롭게 정하여 차례대로 상정(詳定)하되, 비록 남은 장정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 못하게 한다면 백성의 힘을 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쓸데없는 관원(官員)을 도태(淘汰)시킬 것입니다. 충신(忠信)으로 대우하고 봉록(俸祿)을 후하게 해 줌은 관인(官人)을 권려(勸勵)하는 것인데, 지금은 봉록(俸祿)을 먹는 사람이 난잡하게 많으니 도태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검교(檢校)와 옹주(翁主)·택주(宅主)[55]·여관(女官) 등의 관직은 일체 도태 제거할 것입니다. 또 지금의 외방(外方)에서 녹전(祿田)을 더 정하매 운반하는 일이 더욱 어렵게 되니, 모두 이를 제거하게 한다면 충신(忠信)에 후하게 되어 백성이 근심과 탄식이 없어질 것입니다."

임금이 명하여 도당(都堂)에 내리어 궁궐 조성 도감(宮闕造成都監)을 폐하고 그 사무를 선공감(繕工監)에 귀속(歸屬)시키게 하며, 서울과 지방의 공장(工匠)을 놓아 보내고 검교(檢校)의 각 품관(品官)과 궁주(宮主)·옹주(翁主)·택주(宅主)·여관(女官)은 녹(祿)을 정지하게 하되, 다만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처(妻)·모(母)인 옹주(翁主)에게는 특별히 녹(祿)을 주도록 하였다. 또 도승지 이문화로 하여금 사사(使司)에 묻기를,

"경 등의 말한 것이 비록 간절하지마는, 그러나 그 사실을 바로 쓰지 않고 그 사람을 바로 가리키지 않고는 은근히 풍자(諷刺)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고, 또 말하였다.

"내가 지난날에 아침 일찍 조정에 나가서 정사를 보지 않은 것은 질병이 있어 능히 일찍 일어나지 못한 까닭이었으니, 지금부터는 내가 마땅히 병을 견디어 조회를 보도록 할 것이다."


閏5月 12日[편집]

임금이 양정에 앉아 양부에서 올린 글에 대해 조목조목 대답을 내리다[편집]

○丁亥/上坐涼亭, 各擧陳言, 逐條而答。 或引咎自責, 或歸咎詰責, 皆書于陳言之末, 下于都堂。 左政丞趙浚等啓曰: “宮闕及城門已成間閣者, 限十日訖功罷役。” 上不允。

임금이 양정(涼亭)에 앉아서 진술한 말을 각기 들어 조목을 따라 대답하되, 혹은 허물을 자기가 지고 스스로 꾸짖기도 하고, 혹은 허물을 신하들에게 돌려 힐책(詰責)하기도 한 것을 모두 진술한 말의 끝에 써서 도당(都堂)에 내리었다. 좌정승 조준 등이 아뢰었다.

"궁궐과 성문(城門)이 이미 간(間)과 각(閣)이 이루어 진 것은 10일 동안만 한정하여 일을 마치고 공역(工役)을 그만두게 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閏5月 13日[편집]

큰비가 내리다[편집]

○戊子/大雨。

큰비가 내렸다.


閏5月 14日[편집]

각도에 명하여 창고의 쌀과 콩을 나누어 주고 보리로 바치게 하다[편집]

○己丑/令各道發倉米菽, 分給於民, 貿納牟麥, 將給民爲種。

각도에 명령하여 창고의 쌀과 콩을 내어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보리를 바꾸어 바치게 하였으니, 장차 백성에게 주어서 종자로 하게 함이었다.


閏5月 15日[편집]

이름을 속여 다른 사람의 노비를 쟁송한 김을남 등을 처벌하다[편집]

○庚寅/前郞將金乙南等冒名爭訟他人奴婢, 事覺抵罪。 刑曹上言: “奴婢辨定都監移送內, 車承道、金乙南等飾詐爭訟, 奸僞敗露。 都監問其緣故, 取其招辭, 車承道等陳其根脚, 至於指斥乘輿, 罪深欺罔。 故將同黨參外人等, 拷問已訖。 其參上員人, 非職牒收取, 本曹不得親問, 其來久矣。 臣謹具其由, 上章陳請, 未蒙兪允。 竊謂生殺與奪, 乃人君之事, 非臣等所得而專也。 若不允下, 臣等將何所措置哉? 今殿下, 昔在潛邸, 族親奴婢, 宜曰我家之事, 以爲避嫌, 今登寶位, 四境之內, 莫非臣妾, 待之之道, 安有彼我之殊? 殿下固當親執威柄, 凡刑賞與敓, 勿間親疎, 一與衆人共之, 有何不可? 若以親故, 不於此時, 明示條章, 臣等罔攸稟令, 固非貽厥孫謀之道也。 願下前章, 令臣等鞫問始末, 一依律文處決。” 疏上, 下都堂擬議。 以車承道、金乙南、金日磾等, 依律處決。

전 낭장(郞將) 김을남(金乙南) 등이 이름을 속여 다른 사람의 노비(奴婢)를 쟁송(爭訟)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죄의 경중(輕重)의 따라 형벌을 받게 되니, 형조에서 말씀을 올리었다.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定都監)으로 이송(移送)하는 중에 차승도(車承道)와 김을남(金乙南) 등이 거짓을 꾸며 송사를 하여 간사한 거짓이 폭로되므로, 도감(都監)에서 그 연고(緣故)를 묻고 그 초사(招辭)를 받으니, 차승도 등이 그 근각(根脚)을 진술하면서 임금님까지 지척(指斥)하는 데 이르러, 죄가 임금을 속이기까지 하였으므로, 같은 무리 참외인(參外人)[56] 등을 고문하여 이미 마쳤으며, 그 참상 원인(參上員人)[57]은 직첩(職牒)을 수취(收取)한 사람이 아니면 본조(本曹)[58]에서 친히 고문할 수 없음이 그 전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신(臣)이 삼가 그 사유를 갖추어 글을 올려 진술하여 청하였는데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사람을 살리고 죽이며 주고 빼앗는 것은 곧 군주의 일이므로, 신 등이 전결(專決)할 수 없는 것이온데, 만약 임금께서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면 신 등이 장차 어떻게 조치하겠습니까? 지금의 전하께서 옛날에 잠저(潛邸)에 계실 적에는 족친(族親)의 노비(奴婢)는 마땅히 ‘우리 집안의 일이므로 혐의를 피한다’고 하셨겠지마는, 지금은 왕위에 올라 온 나라 안의 사람이 신첩(臣妾)이 아닌 자가 없으니, 이들을 대우하는 도리가 어찌 남과 다름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친히 위력(威力)의 권한을 잡아 모든 사람을 형벌하고 상주며 관직을 주고 빼앗는 것을, 친근하고 소원한 차별이 없이 일체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한다면 어찌 옳지 못함이 있겠습니까? 만약 친근한 이유로써 이 시기에 명백히 조장(條章)을 보이지 않는다면, 신 등은 명령을 받을 것이 없사오니, 진실로 자손들에게 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원컨대 전일의 법령을 내리어 신 등으로 하여금 시말(始末)을 국문하여 한결같이 형률 조문에 의거하여 처결(處決)하게 하소서."

소(疏)가 올라가매 도당(都堂)에 내리어 재량(裁量)하게 하니, 차승도·김을남·김일제(金日磾) 등을 형률에 의거하여 처결(處決)하였다.


동북 쪽 변방을 침략하려는 육청 우지개를 정벌케 하다[편집]

○東北面都巡問使報: “陸靑亏知介來欲寇邊。” 上卽下旨, 令水軍萬戶全承桂, 領永興、靑海道兵船, 往征之。 又令安撫使金承霔, 領陸地軍官, 往擊之。

동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보고하였다.

"육청(陸靑)의 우지개(亐知介)가 변방에 침구(侵寇)하고자 합니다."

임금이 즉시 교지를 내려 수군 만호(水軍萬戶) 전승계(全承桂)로 하여금 영흥(永興)·청해도(靑海道)의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정벌하게 하고, 또 안무사(安撫使) 김승주(金承霔)로 하여금 육지의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치게 하였다.


남을 저주한 성주 사람 임문화 등 8인을 참형에 처하다[편집]

○成州人任文和妻子八人詛呪, 事覺伏誅。

성주(成州) 사람 임문화(任文和) 처자(妻子) 8인이 남을 저주(詛呪)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閏5月 16日[편집]

임금이 궁성 동문에서 역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대신들을 힐난하다[편집]

○辛卯/上望見宮城東門之上有役者, 召所掌官問曰: “余用宰相陳言, 罷工役。 今尙役之, 何也?” 對曰: “宮城役人未盡放者, 因使司之牒, 令蓋瓦耳。” 上曰: “余業已罷役, 更不上請役之, 過矣。” 卽令李文和, 傳旨于都堂曰: “自宮闕起役, 至今未罷者, 但爲有未畢處耳。 若畢則不復役民, 因循至今, 旱氣太甚。 頃者擇農夫皆放之, 只留僧徒及諸色匠人耳, 今强請罷役, 余亦强從之。 余之因循未罷者非是, 則旣下罷役之命, 卽放之宜也。 猶且不放, 仍使之, 則余之前日所未罷而因循者, 亦非好事, 不得已也。 然則强請罷之, 無乃有過乎? 何獨不論其過!” 時右政丞金士衡因謁告在家, 獨政丞趙浚聞命, 無以應之, 但言臣有罪耳。 又詰李至曰: “所上陳言一款內, 斥浮屠云: ‘或有宰相士大夫宦官之類, 敢以營繕浮屠進言者, 痛懲放斥。’ 卿指當時所營之寺而言乎? 指未來之事而言歟? 若曰指未來, 則如今舍利殿土木之役久矣。 何不聞見斥言乎? 若曰指當時之事, 則其在宰相士大夫宦官之中, 進言者爲誰? 明白以陳。” 至懼對曰: “臣但謂佛氏之道, 有害於治國。 只倣古人之言, 以塞求言之指耳。 不指未來, 不指當時, 亦未知進言者爲誰。” 文和以是復, 上笑曰: “其未對也宜矣。 汝之致詰, 誠强矣。 余若積日默不敢說, 則彼必勞慮成疾矣, 爾可更以余意往解之。 余旣誠心求言, 豈敢惡聞而難之乎? 第所言之事, 不合時務耳。 雖然以言不中罪之, 則非求言之道也, 余且優容之。 卿等平心易氣, 愼勿以寡人之怒爲疑, 凡寡躬闕失、國家利病, 悉心面啓。 若後有可言之事, 而憚今日之致詰, 不肯直言, 豈爲臣之義也!” 諸宰相, 皆詣闕謝。

임금이 궁성(宮城) 동문 위에 역사하는 사람이 있음을 바라보고 맡은 관원을 불러 물었다.

"내가 재상(宰相)의 진술한 말을 들어 공역(工役)을 그만두게 하였는데, 지금도 아직 역사를 시키니 무슨 이유인가?"

그가 대답하였다.

"궁성의 역인(役人) 중에 다 놓아 보내지 않은 사람을 사사(使司)의 통첩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개와(蓋瓦)하게 한 것뿐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벌써 역사를 그만두게 했는데, 다시 청하지 않고서 이들을 사역한 것은 잘못이다."

이에 즉시 이문화로 하여금 도당(都堂)에 전지하게 하였다.

"궁궐의 역사를 시작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그만두지 못한 것은 다만 다 마치지 못한 곳이 있기 때문인데, 만약 마쳤다면 다시 백성을 사역하지 않을 것이다.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면서 지금까지 이르렀는데, 가뭄이 너무 심하므로 지난번에 농부를 가려 모두 이를 놓아 보내고 다만 중들과 제색(諸色) 장인(匠人)만 남겨 두었을 뿐인데, 지금 역사를 그만두기를 굳이 청하므로 나도 또한 마지못하여 따랐다. 내가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면서 그만두지 않은 것이 옳지 않다면, 이미 역사를 그만두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즉시 놓아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오히려 또한 그들을 놓아 보내지 않고서 그대로 사역했고, 내가 전일에 그만두게 하지 않고 머뭇거린 것도 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마지못하여 한 것이니, 그렇다면 그만두기를 굳이 청한 것은 잘못이 있지 아니한가? 어찌 유독 그 잘못은 논하지 않는가?"

이때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이 휴가를 얻어 집에 있었는데, 홀로 정승 조준이 임금의 명령을 들었으므로 응답할 수가 없어서 다만 신(臣)이 죄가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또 이지(李至)를 힐책(詰責)하였다.

"올려 진술한 말의 한 가지 항목 내에, ‘불교를 배척한다고 말하면서 혹은 재상(宰相)·사대부(士大夫)·환관(宦官)의 무리들이 감히 사찰(寺刹)을 건축하자고 말을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엄격히 징계하여 내쫓게 하라.’고 하였는데, 경(卿)이 이 당시에 건축하는 절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미래의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만약 미래의 일을 가리킨 것이라 한다면, 지금의 사리전(舍利殿)의 토목(土木) 역사는 오래 되었는데 어찌 배척하는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만약 이 당시의 일을 가리킨 것이라 한다면, 그 재상·사대부·환관 중에서 말을 올린 사람이 누구인가? 명백히 진술하라."

이에 이지가 두려워하면서 대답하였다.

"신은 다만 부처의 도(道)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해가 있다고 생각하여, 다만 옛날 사람의 말을 본받아 임금께서 신하의 바른말을 구하는 뜻에 책임을 면한 것뿐이며, 미래의 일을 가리킨 것도 아니고 당시의 일을 가리킨 것도 아니며, 또한 말을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이문화가 이 말로써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지 못한 것이 마땅하다. 그대의 힐책(詰責)한 것이 진실로 강경하였구나! 내가 만약 여러 날 동안 잠잠히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근심이 되어 병이 날 것이니, 그대는 다시 내 뜻으로써 가서 해명(解明)하여 주어라. 내가 이미 성심으로 신하의 바른말을 구했는데, 어찌 듣기를 싫어하여 이를 힐난(詰難)하겠는가? 다만 말한 일이 시무(時務)에 합하지 않는 것뿐이다. 비록 그러하나, 말이 맞지 않은 이유로써 죄준다면 신하의 바른말을 구하는 방법이 아니다. 내가 또한 우대해 용납하니, 경(卿) 등은 심기(心氣)를 평이(平易)하게 가져서 결코 과인(寡人)의 노한 것으로써 의심하지 말고, 무릇 내 몸의 과실과 국가의 이로움과 병통되는 것을 마음에 있는 대로 면대(面對)해 아뢰게 하라. 만약 후일에 말할 만한 일이 있는데도 오늘날에 힐책당한 것을 꺼려서 바른말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면 어찌 신하된 의리이겠는가?"

여러 재상들이 모두 대궐에 나아와서 사과(謝過)하였다.


예조에서 탈정 기복된 사람의 행례 절차 등에 대해 아뢰다[편집]

○禮曹上言: “父母三年喪內, 奪情起復者, 出依貼後, 軟角幞頭、黲紫袍、皀角帶, 行謝恩肅拜、堂參及本司堂上官之禮後, 其於大朝會及拜表、迎詔、冠帶時, 不許隨班。” 從之。

예조에서 말씀을 올리었다.

"부모의 삼년상 안에 탈정 기복(奪情起復)된 사람은 나가서 의첩(依貼)을 받은 후에 연각복두(軟角幞頭)·참자포(黲紫袍)·조각대(皂角帶)차림으로 사은 숙배(謝恩肅拜)하고, 당참(堂參)과 본사(本司) 당상관(堂上官)의 예(禮)를 행한 후에 그 대조회(大朝會)와 배표(拜表)·영조(迎詔) 관대(冠帶) 때에는 조반(朝班)에 따르게 하지 마소서."

그대로 따랐다.


관리를 파견하여 충청도와 풍해도의 병선·군기·갑옷의 상태를 검열하게 하다[편집]

○分遣監察金庚ㆍ鄭愷于忠淸、豐海道, 點視兵船及軍器衣甲。

감찰(監察) 김경(金庚)과 정개(鄭愷)를 충청도와 풍해도(豊海道)에 나누어 보내어 병선(兵船)과 군기(軍器)·갑옷을 점검 시찰하게 하였다.


만호·천호·백호 등 수군의 품계를 정하다[편집]

○設水軍官職。 萬戶三品以上, 千戶四品以上, 百戶六品以上, 皆以武資差。 國家以騎船軍官, 寄命水上, 勞苦終身, 特設之。

수군(水軍)의 관직을 설치하되 만호(萬戶)는 3품 이상을, 천호(千戶)는 4품 이상을, 백호(百戶)는 6품 이상을 모두 무관(武官)의 관자(官資)로써 임명하였다. 국가에서 배 타는 군관(軍官)이 물위에서 생명을 의탁하여 종신토록 고생하는 이유로써 특별히 이를 설치하게 하였다.


11세 어린 아이를 강간한 사노 잉읍금을 교형에 처하다[편집]

○私奴芿邑金, 强姦十一歲女, 絞。

사노(私奴) 잉읍금(芿邑金)이 11세 계집아이를 강간하였으므로,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閏5月 18日[편집]

정도전 이지란 설장수 성석린 등을 불러 위로하고 잔치하다[편집]

○癸巳/置酒于北涼亭, 召奉化伯鄭道傳、參贊門下李之蘭、月城君偰長壽、門下贊成事成石璘, 以勞奉使之行。 判門下府事沈德符、領三司權仲和、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宜城君南誾侍宴, 極歡而罷。

북쪽 양정(涼亭)에 술자리를 준비하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참찬 문하(參贊門下) 이지란·월성군(月城君) 설장수(偰長壽)·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성석린(成石璘)을 불러서 명령을 받들어 사신으로 갔던 일을 위로했는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심덕부(沈德符)·영삼사(領三司) 권중화(權仲和)·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잔치에 배석(陪席)하여 한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閏5月 19日[편집]

옛 과주의 아록 인리전 135결을 유비고에 소속시키다[편집]

○甲午/古果州衙祿人吏之田一百三十五結, 屬有備庫, 令其庫奴營田。

옛 과주(果州) 아록 인리(衙祿人吏)의 전지 1백 35결(結)을 유비고(有備庫)에 소속시키고, 그 고노(庫奴)로 하여금 전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閏5月 20日[편집]

각영의 위와 정, 공장 및 승도들을 사리전 역사에 나가게 하다[편집]

○乙未/令各領尉正及工匠僧徒, 皆赴舍利殿役。

각영(各領)의 위(尉)·정(正)과 공장(工匠)·승도(僧徒)로 하여금 모두 사리전(舍利殿)의 역사에 나가게 하였다.


閏5月 21日[편집]

대간의 간언 때문에 이른 새벽에 임금이 조회를 보다[편집]

○丙申/昧爽視朝。 臺諫嘗以不視朝聽政爲言, 故坐勤政殿, 設庭燎, 命都承旨李文和曰: “兩府百官言事者, 直進面啓。” 至午鼓乃退。

이른 새벽에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대간(臺諫)이 일찍이 조회를 보고 정사를 청단(聽斷)하지 않는다고 말을 한 까닭으로,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앉아서 대궐 뜰에 화롯불을 피우게 하고, 도승지 이문화에게 명하였다.

"양부(兩府)의 백관(百官)이 정사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은 바로 나아와서 면전(面前)에서 아뢰고 정오(正午)에 이르러 북이 울리면 물러가게 하라."


산남왕 온사도 등 7인이 조회에 참여하다[편집]

○山南王溫沙道等七人朝參。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 등 7인이 조회에 참예하였다.


의흥 삼군부에서 숙위 순작 아조의 출석 등 부위군의 근무상태를 점검하여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아뢰다[편집]

○義興三軍府上言曰: “府衛者, 衛內捍外之事, 不可緩也。 今十司上大將軍以下員將, 其於宿衛、巡綽、衙朝等事, 無因闕進者, 初犯二犯, 懲罰還任, 三犯者, 具罪啓聞, 下尙瑞司削職, 擇有武才者代之。” 允之。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에서 말씀을 올리었다.

"부위(府衛)란 것은 궐내(闕內)를 호위하고 외적(外敵)을 방어하는 일에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십사(十司)의 상장군(上將軍)·대장군의 원장(員將)[59]들은 그 숙위(宿衛)·순작(巡綽)·아조(衙朝) 등의 일에 아무런 이유없이 출근을 빠뜨린 사람 중에서, 초범(初犯)과 이범(二犯)은 징계 처벌하되 본래의 직책으로 다시 임명하고, 삼범(三犯)인 사람은 죄를 상세히 계문(啓聞)하여 상서사(尙瑞司)에 내리어 관직을 삭탈(削奪)하고서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을 뽑아 이를 대신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閏5月 26日[편집]

새벽에 아조를 보며 면전에서 중요한 정책을 직접 아뢰게 하다[편집]

○辛丑/上昧爽坐勤政殿, 禮官唱拜, 命止之曰: “衙日視朝, 不必爲受禮也。” 仍命禮曹曰: “各司細事, 不必親決, 治國治民可言之事, 宜各面啓。” 各官皆惶恐不能進。 上問鄭道傳曰: “余所言何如?” 道傳對曰: “然矣。” 上又詰之曰: “群臣嘗責我不視朝, 今日何無一人面啓?” 道傳曰: “臣請以鄙語喩之。 朋友宴會, 本欲相與唱和, 先唱實難。 況君前啓事, 豈易乎?” 上曰: “然。” 於是, 大司憲成石瑢啓曰: “常用五升布, 重而難輸, 麤而不用。 密織十尺爲一匹, 則輕且可用。” 上曰: “如此之法, 筆之於書以聞。” 令都評議使司擬議施行。 刑曹典書柳觀啓曰: “人之氣稟, 鷙悍剛果, 柔懦怯弱, 至不同也。 故或有眞盜, 耐其捶楚, 終不招承, 或被誣告, 不忍苦毒, 猥自誣服, 人之情僞, 至難辨也。 掌刑吏, 唯務服人之名, 不顧人命之重, 乃設法外之刑, 而多方訊之, 罪未著於案上, 身已斃於梃下。 雖眞盜, 若不招承而斃, 猶有嫌於決獄, 而況無辜致命, 冤抑豈小乎? 乞令中外用刑者, 止依律文, 以行拷問, 其法外之刑, 一切禁斷。 雖依律文拷問, 亦於一日之內, 不過三四問, 常令辨其辭色, 驗其證佐, 要明其眞僞, 不得妄加捶撻。” 上嘉納, 下都堂, 令中外施行。

임금이 이른 새벽에 근정전에 앉았는데 예관(禮官)이 배례(拜禮)하라고 창(唱)하니, 이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아일(衙日)에 조회 볼 때는 반드시 배례를 받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내 예조에 명하였다.

"각 관사(官司)의 자질구레한 사무는 반드시 친히 결재하지 않을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말할 만한 일은 마땅히 각기 면전(面前)에서 아뢰게 하라."

각 관원이 모두 황공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임금이 정도전에게 물었다.

"내가 말한 것이 어떠한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임금이 또 그를 힐책(詰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일찍이 내가 조회를 보지 않는다고 책망하더니, 오늘은 어찌 한 사람도 면전(面前)에서 아뢰는 이가 없는가?"

도전이 아뢰었다.

"신(臣)은 속된 말로써 이를 비유한다면, 벗들이 연회할 적에 서로 창화(唱和)하고자 하더라도 먼저 노래를 부르기란 실로 어려운 것이온데, 하물며 임금 앞에서 정사를 아뢰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

이에 대사헌 성석용(成石瑢)이 아뢰었다.

"늘 사용하는 오승포(五升布)는 무거워서 운반하기가 어렵고, 발이 굵어서 쓰이지 않는데 촘촘히 짠 10척(尺)을 1필로 삼는다면 가볍고 쓸 만하겠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와 같은 법은 글에 써서 아뢰라."

라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하여금 상량(商量)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형조 전서(刑曹典書) 유관(柳觀)이 아뢰었다.

"사람의 타고난 기질이 강하고 사납고 굳세고 과단성이 있기도 하며, 유순하고 나약하고 겁이 많기도 하여 아주 같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혹은 참으로 도둑질을 하고도 그 매질함을 견디어 마침내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지 않기도 하며, 혹은 무고(誣告)를 당하고도 매질의 고초를 참지 못하여 함부로 스스로 무복(誣服)하기도 하니, 사람의 실정과 거짓은 지극히 분변하기가 어렵습니다. 형벌을 맡은 관리는 다만 사람을 복죄(服罪)시켰다는 이름만 힘쓰고 사람 생명의 중함을 돌보지 않고서, 이에 법 밖의 형벌을 설치하여 온갖 방법으로 신문하여 죄가 문서 위에 나타나기 전에 몸은 이미 막대기 아래에서 죽게 되니, 비록 참 도적이라도 만약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지 않고서 죽었다면 오히려 죄를 판결하는 데 혐의가 있을 것인데, 하물며 죄도 없이 생명을 잃게 되면 원통하고 억울함이 어찌 적겠습니까? 원컨대, 중앙과 지방의 형벌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만 형률 조문에만 의거하여 고문(拷問)을 행하게 하고, 그 법 밖의 형벌은 일체 금단(禁斷)시킬 것이며, 비록 형률 조문에 의거하여 고문하더라도 또한 하루 안에는 서너 번의 고문에 지나지 않게 하며, 항상 그 말과 얼굴빛을 분변하고 그 증거를 증험하여 참과 거짓만 밝히게 할 것이며, 함부로 매질을 가하지 말게 하소서."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이를 들어서 도당(都堂)에 내리어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아조 후 해가 돋기 전에 대신들을 불러 잔치하다[편집]

○命司憲府, 每衙朝後, 各於本司衙門就仕, 有他務者則必告憲司, 乃就其任。 日未出, 還入內, 坐內樓, 召左右政丞及奉化伯鄭道傳、宜城君南誾設酌, 皆醉, 上亦酒酣, 因論開國之事, 崔雲海蒙宥之非。

사헌부에 명하여 매양 아조(衙朝) 후에는 각기 본사(本司)의 아문(衙門)에 출근하고, 다른 사무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헌사(憲司)에 고하고서 그제야 그 임무를 보게 하였다. 해가 돋기 전에 임금이 궐내(闕內)에 다시 들어와 내루(內樓)에 앉아 좌정승·우정승과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어 모두 취하였다. 임금도 또한 술이 취하여 이내 건국(建國)한 일과 최운해(崔雲海)의 사유(赦宥) 입은 그릇된 일을 논하였다.


閏5月 28日[편집]

양주 목장에서 《진도》를 훈련시키다[편집]

○癸卯/習《陣圖》于楊州牧場。

양주 목장(楊州牧場)에서 《진도(陣圖)》를 연습하였다.


閏5月 29日[편집]

정도전이 표전 문제로 인한 황제의 입조 명령을 저어하여 《진도》를 연습케 하다. 당시 시대적 상황[편집]

○甲辰/亦如之。 初帝以表辭爲欺侮, 辭連鄭道傳, 勑令入朝。 道傳稱疾不赴, 恐將有問罪之擧, 獻謀於上曰: “軍士不可不知兵法。” 遂撰《陣圖》上之, 令諸道節制使及軍士, 定爲約束, 遽令肄習, 鞭笞士卒, 人多怨之。

또 《진도(陣圖)》를 연습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표사(表辭)로써 기모(欺侮)했다고 하여 공사(供辭)가 정도전에게 관련되어 칙지(勅旨)로써 입조(入朝)하게 하니, 도전이 병이 났다고 일컫고 가지 않았는데, 장차 죄를 묻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계책을 올리었다.

"군사들은 병법(兵法)을 알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침내 《진도(陣圖)》를 찬술(撰述)하여 올리고, 여러 도(道)의 절제사(節制使)와 군사들로 하여금 약속을 정하여 갑자기 연습하게 하고 사졸(士卒)을 매질하니, 사람들이 이를 원망하는 이가 많았다.


노모 봉양을 위해 제주 판관을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한 김과의 진정전[편집]

○濟州判官金科, 上陳情箋曰:

義莫大於君臣, 而情莫急乎母子。 君臣之義、母子之情, 竝行不悖, 則天下國家之道, 何以加此? 恭惟主上殿下, 當潛邸之時, 不鄙臣斗筲之才, 擢置臣於幕府, 踐祚之初, 仍除臣爲親軍衛都事, 復命屬於三軍府鎭撫, 兼稱下於原從功臣和、英等列。 自是厥後, 累遷祿秩, 至戶曹佐郞, 恩至渥也。 臣嘗以盡命竭力, 仰報聖恩之萬一爲心, 夙夜奉職, 未嘗或怠。 丙子春三月, 遭家不幸, 臣父遘疾, 臣嘗藥無暇, 乞辭職事。 夏四月, 臣父辭世, 臣守墳三載, 雖朝夕哭泣之際, 而戀闕之情, 豈敢斯須忘哉? 終制之後, 願得京外, 效毫髮於明時, 是臣日夜犬馬之戀也。 五月二十有一日, 擢臣除濟州判官, 兼敎授之職, 益荷上德, 感祝慶幸, 卽欲赴官。 然臣所慮者, 臣母今已七十五歲, 衰老褥疾, 朝夕難保。 臣旣以三年守墳, 久闕奉養, 今又離母, 赴於絶域, 則定省隔音問疎, 豈唯臣之戀母? 亦恐母之念我而益病也。 是則臣心豈得安於所職哉? 《傳》曰: “移孝爲忠。” 今臣年三十有八, 臣事殿下之日長, 子孝老母之日短, 此臣所以仰陳辭免之意也。 伏望憐臣卑懇, 儻改差臣於陸地之任, 令母子音問不絶, 則雖抱關擊柝之務、荷戈執殳之役, 臣何敢憚, 終養老母之後, 雖終身從事於絶域, 亦何敢辭? 伏惟上慈改差, 以明孝治, 則君臣之義, 母子之情, 庶可竝行而不悖矣。

上許免其任。

제주 판관(濟州判官) 김과(金科)가 진정전(陳情箋)을 올리었다.

"의리는 군신(君臣)보다 큰 것이 없고 정리는 모자(母子)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군신의 의리와 모자의 정리가 둘이 다 같이 행하면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면, 천하 국가의 도리가 어찌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신(臣)처럼 국량(局量)이 작은 사람을 천대하지 않으시고 신을 막부(幕府)에 발탁해 두었으며,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이내 신을 임명하여 친군위 도사(親軍衛都事)로 삼고, 다시 명하여 삼군부 진무(三軍府鎭撫)에 소속하게 하고 겸하여 원종 공신(原從功臣) 이화(李和)·이영(李英) 등의 반열(班列)에 끼이게 일컫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그 후에는 여러 번 녹질(祿秩)을 옮겨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이르렀으니 은혜가 지극히 후한 편입니다. 신은 일찍이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임금님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우러러 보답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직책에 힘써서 일찍이 혹시도 게으른 적이 없었습니다. 병자년 봄 3월에 가운(家運)의 불행함을 당하여 신의 아버지가 병이 발생했는데, 신이 약을 맛볼 여가가 없으므로 직사(職事)를 사면(辭免)하기를 청했었습니다. 여름 4월에 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므로 신이 3년 동안을 분묘(墳墓)를 지켰는데, 비록 조석으로 곡읍(哭泣)하는 시기이지만 대궐을 사모하는 정리는 어찌 감히 잠시 동안이라도 잊었겠습니까? 상제(喪制)를 마치고 난 후에는 외직(外職)을 얻어서 태평한 세상에 조그만 공적이라도 세우기를 원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밤낮으로 임금에게 향한 정성입니다. 5월 21일에 신을 발탁하여 제주 판관(濟州判官)으로 임명하고 교수(敎授)의 직책까지 겸무하게 하시니, 더욱 임금의 은덕을 입게 되어 감축(感祝)하고 경행(慶幸)하옵니다. 즉시 임소(任所)로 가고자 하였으나, 신의 염려되는 것은 신의 어머니가 지금 이미 75세이온데, 늙고 쇠약하여 병석(病席)에 누워 조석으로 생명을 보전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미 3년 동안이나 분묘(墳墓)를 지키고 있어 오랫동안 봉양을 못하였사온데, 지금 또 어머니를 떠나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면 혼정 신성(昏定晨省)이 사이가 뜨고 음문(音問)[60]이 드물게 될 것이니, 어찌 다만 신이 어머니를 사모하는 것뿐이겠습니까? 또한 어머니도 신을 생각하여 더욱 병이 심할까 염려되오니, 이렇게 되면 신의 마음이 어찌 맡은 직책에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대의 기록에, ‘효도를 미루어 충성을 한다.’ 하였는데, 지금 신의 나이는 38세이므로 신하로 전하를 섬길 수 있는 시일은 장구하고 자식으로서 늙은 어머니를 효도할 수 있는 시일은 단촉(短促)하니, 이것이 신이 사면(辭免)할 의사를 우러러 진술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신의 하찮은 간청을 불쌍히 여기시고 혹시 신을 육지의 임무에 고쳐 임명하여 모자(母子)로 하여금 음문(音問)이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비록 문을 지켜 야경(夜警)하는 임무와 창을 메고 몽둥이를 잡는 천역(賤役)이라도 신이 어찌 감히 꺼리겠습니까?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마친 후에는 비록 종신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地域)에 종사(從事)하게 되더라도 또한 어찌 감히 거절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임금께서 신을 고쳐 임명하여 효도로써 세상의 다스림을 밝히신다면, 군신(君臣)의 의리와 모자(母子)의 정리가 둘이 다 같이 행하면서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그 임무를 사면하도록 허가하였다.


七年 六月[편집]

6月 1日[편집]

아조에 백관들이 정열했는데 조회를 보지 않고 대신들을 서루에서 불러 보다[편집]

○乙巳朔/百官就位班齊, 上不視朝, 召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奉化伯鄭道傳、宜城君南誾于西樓。 浚等請復翁主、宅主、女官祿捧〔祿俸〕, 上曰: “業已止之, 不可改也。” 浚等再請, 不允。

백관(百官)들이 자리에 나아와서 반열(班列)을 정제했는데, 임금이 조회를 보지 아니하고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을 서루(西樓)로 불렀다. 조준 등이 옹주(翁主)·택주(宅主)의 여관(女官) 녹봉(祿俸)을 그전대로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미 이를 중지시켰으니 고칠 수 없다."

조준 등이 다시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도당에서 참알하는데 코를 골고 잔 문하 시랑 찬성사 우인열을 탄핵하다[편집]

○東西三品以下, 參謁於都堂。 門下侍郞贊成事禹仁烈踞床鼾睡, 諫官劾之。

동반(東班)·서반(西班)의 3품(品) 이하의 관원이 도당(都堂)에서 참알(參謁)하는데,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우인열(禹仁烈)이 평상에 걸터앉아 코를 골며 자므로, 간관(諫官)이 이를 탄핵하였다.


6月 3日[편집]

공부 등 3인을 경사로 압송하며 중국 예부 시랑에게 회답한 서신[편집]

○丁未/遣前判典客寺事鄭連, 管押成均祭酒孔俯、禮曹正郞尹須、前禮曹正郞尹珪等赴京。 上諭三人曰: “操心以正, 天必祐之。” 三人再拜而出。 答書禮部侍郞張炳曰:

朝鮮國王, 端肅奉復禮部侍郞鈞侍。 五月二十八日, 曺庶從人崔祿, 回自京師, 特蒙書諭及粘連曺庶等招狀, 謹已知審, 驚懼無措。 某欽蒙聖恩, 諭臣: “體天牧民, 永昌後嗣。” 常想盡忠奉上, 保守小邦, 傳子傳孫, 以期報効。 何敢造生釁端, 自招愆尤? 柳灝齎進啓本, 雖曺庶所寫, 只依舊本, 字樣寫進, 未知近年有合回避字樣, 以致差誤, 豈敢故安譏侮字樣! 郭海龍專不識字, 粗習華語, 俾押送曺庶去。 某豈敢敎他打聽? 某若有此, 天地鬼神, 豈肯容之? 招裏指攀尹須、尹珪、孔俯三人, 都不通中國語音, 雖會寫字, 又不深知文義, 竝不曾管寫啓本, 只是同在一衙行, 以此指他。 今奉書諭, 不敢遲延, 都令赴京分訴, 伏望鈞慈奏聞, 以惠遠人。

전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정연(鄭連)을 보내어 성균 좨주(成均祭酒)[61] 공부(孔俯)·예조 정랑 윤수(尹須)·전 예조 정랑 윤규(尹珪) 등을 압송(押送)하여 경사(京師)로 가게 하고, 임금이 세 사람에게 유시(諭示)하였다.

"마음을 정직하게 가지면 하늘이 반드시 그대들을 도울 것이다."

세 사람이 두 번 절하고 나갔다. 예부 시랑(禮部侍郞) 장병(張炳)에게 서신을 회답했는데, 그 서신에는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은 엄숙히 예부 시랑균시(鈞侍)[62]에게 회답합니다. 5월 28일에 조서(曺庶)의 종인(從人) 최녹(崔祿)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서 서유(書諭)와 덧붙인 조서(曺庶) 등의 초장(招狀)을 받아 보고, 삼가 이미 상세히 알았으므로 놀라고 두려워하여 몸둘 바가 없습니다. 모(某)는 삼가 황제의 은혜를 입어 신(臣)에게, ‘하늘의 뜻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고, 항상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받들고 소방(小邦)을 보전해 지켜서 자손에 전하여 은혜를 갚기 위해 힘을 다하라.’고 개유하였으니, 어찌 감히 흔단(釁端)을 만들어 스스로 허물을 초래(招來)하겠습니까? 유호(柳灝)가 가져 가 올린 계본(啓本)은 비록 조서(曺庶)가 쓴 것이지마는, 다만 구본(舊本)의 글자 모양에 의거하여 써서 올렸을 뿐이고, 근년에 마땅히 회피(回避)해야만 될 글자 모양이 있음을 알지 못하여 틀리게 된 것이니, 어찌 감히 고의로 기모(譏侮)하는 글자를 꽂아 두었겠습니까? 곽해룡(郭海龍)은 전혀 글자는 알지 못하고 중국말만 대강 익혔으므로, 그로 하여금 조서(曺庶)를 압송(押送)해 가도록 한 것인데, 모(某)가 어찌 감히 그 사람에게 들어 보도록 명령했겠습니까? 모(某)가 만약 이런 일이 있다면 천지와 귀신이 어찌 이를 즐거이 용납하겠습니까? 공초(供招) 안에 지칭(指稱)한 윤수(尹須)·윤규(尹珪)·공부(孔俯) 3인은 전연 중국의 어음(語音)은 통하지 못하니, 비록 글자를 쓸 줄은 알더라도 또 글 뜻은 깊이 알지 못하므로 모두 일찍이 계본(啓本)을 맡아 쓰지 않았으나, 다만 이 사람이 함께 한 아행(衙行)해 있으므로 그를 지명(指名)한 것입니다. 지금 서유(書諭)를 받들어 감히 지연(遲延)시킬 수가 없으므로 모두 그들로 하여금 경사(京師)에 가서 나누어 호소하게 하니, 삼가 바라건대, 균자(鈞慈)[63]께서는 황제에게 잘 주문(奏聞)하여 먼 나라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역사에 쓸 양곡을 사사로이 쓴 문묘 조성 감독 박하를 탄핵하다[편집]

○前淮陽府使朴遐監文廟造成役, 私用役糧四石, 事覺。 憲司請收職牒, 依律科罪, 上只令收職牒徵其米。

전 회양 부사(淮陽府使) 박하(朴遐)가 문묘(文廟)를 조성(造成)하는 역사를 감독하다가 역사에 쓸 양곡(糧穀) 4석(石)을 사사로이 썼는데, 일이 발각되었다. 사헌부에서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처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다만 직첩을 회수하고 그 쌀만 추징(追徵)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술 마신 흥복사 중 사근을 환속시키길 청하다[편집]

○興福寺僧斯近飮酒事覺, 憲司請還俗充軍。

흥복사(興福寺)의 중 사근(斯近)이 술을 마셨다가 일이 발각되니, 헌사(憲司)에서 도로 속인(俗人)이 되게 하여 군대에 편입하기를 청하였다.


관내 사람의 뇌물을 받은 연산 부사 어맹유를 국문하다[편집]

○延山府使魚孟游受管內人賄, 事覺, 收職牒鞫問。

연산 부사(延山府使) 어맹유(魚孟游)가 관내(管內) 사람의 뇌물을 받았다가 일이 발각되니,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국문(鞫問)하였다.


사헌부에서 보석되었다가 병이 나은 유양을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다[편집]

○憲司復劾柳亮曰: “亮前日有罪未決, 只令保放。 今病已愈, 宜廣求義雲, 以辨事情, 病愈久矣, 未嘗求得辨明。 請更鞫問, 明正其罪, 以懲奸惡。” 命除拷問, 詳加詰訊以聞。

사헌부에서 다시 유양(柳亮)을 탄핵하였다.

"유양은 전일에 죄가 있는데 판결을 하지 않고 다만 보석(保釋)하게 했습니다. 지금 병이 이미 나았으니, 마땅히 널리 의운(義雲)을 찾아서 사정을 변명해야 될 것인데, 병이 나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일찍이 찾아서 변명하지 않으니, 청하옵건대, 다시 국문(鞫問)하여 그 죄를 밝게 처단하여 간악한 사람을 징계하소서."

명하여 고문(拷問)은 하지 말고 상세히 힐문(詰問)하여 아뢰게 하였다.


6月 5日[편집]

김승·정진·김희선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己酉/以金陞爲同知中樞院事, 鄭津爲中樞院副使。 津, 道傳子也。 金希善爲原州牧使。

김승(金陞)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정진(鄭津)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삼았다. 정진은 정도전의 아들이다. 김희선(金希善)을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삼았다.


사헌 시사 윤창과 우보궐 허지에게 정무를 보게 하다[편집]

○令司憲侍史尹彰、右補闕許遲視事。 彰, 須之兄也。 孔俯將行, 啓曰: “尹須赴京, 其兄彰, 以譴在家不仕, 請復職以慰母心。” 上令彰等視事曰: “益勤乃職。”

사헌 시사(司憲侍史) 윤창(尹彰)과 우보궐(右補闕) 허지(許遲)로 하여금 정무(政務)를 보게 하였다. 윤창은 윤수(尹須)의 형이다. 공부(孔俯)가 장차 길을 떠나려 하면서 아뢰었다.

"윤수(尹須)가 경사(京師)로 가는데 그 형 윤창이 견책(譴責)을 당하여 집에 있으면서 출근하지 못하오니, 청하옵건대 그를 복직(復職)시켜 그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소서."

임금이 윤창 등에게 정무(政務)를 보도록 하면서 말하였다.

"그대의 직책에 더욱 근실히 하라."


다시 개국 공신의 어머니와 아내로서 옹주·택주인 경우에는 녹봉을 내리게 하다[편집]

○令廣興倉復賜開國功臣母妻翁主宅主祿俸。

광흥창(廣興倉)에 명령하여 다시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어머니와 아내인 옹주(翁主)·택주(宅主)의 녹봉(祿俸)을 내리게 하였다.


내관 조순과 전 판삼사사 우현보의 직첩을 주게 하다[편집]

○召憲府掌務, 給內官曺恂及前判三司事禹玄寶職牒。

사헌부의 장무(掌務)를 불러서 내관(內官) 조순(曹恂)과 전 판삼사사(判三司事) 우현보(禹玄寶)의 직첩(職牒)을 주게 하였다.


6月 6日[편집]

백관이 반열을 정돈했는데도 조회 보지 않고 흥천사에 거둥하다[편집]

○庚戌/百官就位班齊, 上不視朝, 幸興天寺, 觀舍利殿經營。

백관(百官)들이 자리에 나아와서 반열(班列)을 정제(整齊)했는데도 임금은 조회를 보지 않고, 흥천사(興天社)에 거둥하여 사리전(舍利殿)의 건축을 시찰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6月 7日[편집]

정릉 수호군인 최백안·부개 등이 비행을 저질러 충군하다[편집]

○辛亥/以靑海道人崔伯顔ㆍ夫介等七戶, 移置果州, 爲貞陵守護軍, 各給田二結, 使之安業。 伯顔、夫介等爲惡不已, 徙沿邊充軍。

청해도(靑海道) 사람 최백안(崔伯顔)과 부개(夫介) 등 7호(戶)를 과주(果州)에 옮겨 두고, 정릉(貞陵)의 수호군(守護軍)으로 삼아 각기 전지(田地) 2결(結)씩을 주어 그들에게 안심하고 직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는데, 백안과 부개 등이 나쁜 짓을 하여 그치지 않으므로 연변(沿邊) 지방으로 옮겨 군대에 편입시키었다.


노비 쟁송 문제로 노상에서 행패부린 차승도에 대하여 형율의 적용을 엄격히 하라는 임금의 교시[편집]

○刑曹申: “有車承道者, 所訟奴婢未決, 路上聚其黨, 歐擊奪物, 律無正條。” 上曰: “白晝聚黨, 打人奪物, 是謂强盜。 謂無正條, 何也? 如刑官, 當擇博通之儒及更事之輩, 充之可也。 何其不明也! 爲刑官者, 依律折衷, 封章請罪, 宥不宥, 予當審之。 大抵一國之境, 皆一家, 何有厚薄? 予但喜公平, 不喜偏倚。”

형조에서 차승도(車承道)란 사람이 송사(訟事)한 노비(奴婢)가 판결이 나지 않아서 노상(路上)에서 그 무리를 모아 구타하여 물건을 빼앗은 것이 형률에 규정된 조례(條例)가 없다고 품신(稟申)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대낮에 무리를 모아 사람을 구타하고 물건을 빼앗은 것은 이것을 강도(强盜)라 하는데, 규정된 조례가 없다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형관(刑官)은 마땅히 널리 사물에 통달한 선비와 일에 경험 있는 무리를 뽑아서 이에 충원(充員)해야 될 것인데, 어찌 그 일에 밝지 못한가? 형관(刑官) 된 사람은 형률에 의거해 절충(折衷)하여 장소(章疏)를 봉해 올려 죄를 청하면, 사유(赦宥)하고 사유하지 않는 것은 내가 마땅히 이를 살필 것이다. 대저 한 나라의 경내(境內)는 모두 한 집안인데, 어찌 후(厚)함과 박(薄)함의 차별이 있겠는가? 나는 다만 공평한 것만 좋아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6月 10日[편집]

요동에 사로잡혀 갔던 김송이란 사람이 연왕의 몽고군 격퇴 소식을 전하다[편집]

○甲寅/遼東被虜人金松逃來告曰: “蒙古軍向遼東, 燕府王率師攻擊敗之。 遼王領兵將行, 予亦充軍而行, 中路逃來。” 賜衣食安業。

요동(遼東)에 사로잡혀 갔던 사람 김송(金松)이 도망해 와서 고하였다.

"몽고(蒙古) 군사가 요동(遼東)을 향하여 가니, 연부왕(燕府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이를 요동에서 패퇴(敗退)시켰습니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출발하려 하므로, 나도 또한 군대에 편입되어 가다가 중로에서 도망해 왔습니다."

의복과 음식물을 내리고 안심하고 직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6月 11日[편집]

서북면 도순문사가 중국 사신이 옴을 아뢰니, 유운을 보내 영접케 하다[편집]

○乙卯/西北面都巡問使報: “朝廷使臣來。” 遣敬興尹柳雲, 齎內醞迎慰。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보고하였다.

"조정(朝廷)의 사신이 나옵니다."

경흥 윤(敬興尹) 유운(柳雲)을 보내어 내온(內醞)을 가지고 가서 영접해 위로하게 하였다.


부역의 폐단을 간했던 이지에게 궁성 남문의 역사를 마치게 책임지우다[편집]

○命中樞院使李至, 監督宮城南門之役。 至嘗極諫工役之弊, 忤上旨。 至是, 上聞使臣之來, 少與役徒, 使之監督, 刻日責功。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지(李至)에게 명하여 궁성(宮城) 남문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이지가 일찍이 공역(工役)의 폐단을 힘써 간(諫)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중국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역도(役徒)를 적게 주어 그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고서 기일을 정하여 준공(竣功)을 책임지웠다.


6月 12日[편집]

조준 등이 사초를 올리려 하자 사관 신개가 불가함을 말하며 올린 상소[편집]

○丙辰/監藝文春秋館事趙浚等欲以前朝恭愍王至恭讓君已修實錄及自殿下壬申年以來史草收納, 監進史官申槪等上疏曰:

竊惟古者列國, 各有史官, 君上之言行政事, 臣僚之是非得失, 皆直書不諱。 故當代君臣, 秘其時史, 以遺後世, 而於號令言動之際, 因以爲戒, 而莫敢爲非, 其置史之意深矣。 昔唐太宗謂房玄齡曰: “前世史官所記, 不令人主見之, 何也?” 玄齡對曰: “史官不虛美不隱惡, 人主見之必怒, 故不敢獻也。” 太宗乃命玄齡, 撰次以進, 玄齡編爲實錄, 書成上之, 而語多微隱。 夫以太宗之賢, 宜無嫌於直書, 玄齡一代之明相, 猶且隱避, 不敢直書。 況後世之君, 或不及太宗, 而欲見時史, 則佞諛之臣, 豈啻玄齡之隱避乎? 恭惟殿下, 凡所施爲, 動法三代, 而近日特下敎旨, 欲觀時史, 臣等聞敎祗懼。 竊謂唐太宗見之, 而不免後世之譏。 此乃太宗之失德, 豈殿下之所當法乎? 歲在乙亥, 殿下亦欲觀覽而遂止, 一代之立法嚴矣, 萬世之公論得矣。 今又有是命, 臣等未知欲觀其是非, 以爲後世之戒乎? 欲閱虛實, 以正其訛謬乎? 抑亦考其未盡記者, 而使之悉書乎? 若以爲後日之戒, 則宜觀古昔聖賢之遺書, 以鑑其治亂興亡之迹。 何必覽時史, 然後知戒乎? 欲正其訛謬, 則爲史臣者, 固當廣詢博訪, 必眞知其實, 然後書之。 豈錄其風聞臆見浮誕之事, 以欺後世哉? 以爲使之悉書, 則國制自充修撰, 以至直館, 各據見聞, 錄爲史草。 其數十人之見聞, 豈皆遺失而不錄哉? 臣等未知殿下之覽史, 欲何爲也? 竊伏惟念, 創業之君, 子孫之所儀刑也。 殿下旣覽時史, 則繼世之君藉口, 必曰: “我考之所爲也, 我祖之所爲也。” 更相繼述, 習以爲常, 則史臣誰敢秉直筆乎? 史無直筆, 而示美惡垂勸戒之意晦矣, 則一時君臣, 何所忌憚而修省乎? (則)今日覽史之擧, 殆非貽厥孫謀之道也。 且當聖代, 明良相遇, 政敎號令, 盡善盡美, 皆可師法, 輝映簡策。 苟殿下一覽之, 恐後世之人必將曰: “時君所親覽也, 其史臣豈肯直書乎”, 則使殿下盛德大業, 反爲虛文, 而無以取信矣。 豈非有累於明時之盛典乎? 伏望特留神念, 下兪允之旨, 停覽史之命, 公道幸甚。

上不允, 卽命曰: “今所以親覽者, 非欲觀善惡之迹。 壬申卽位之時, 君臣之間, 潛相言語, 率多史臣之所不知也。 李行嘗爲知申事, 其記事亦不直, 其他史臣, 焉能盡知君臣之言語乎? 前朝恭愍王已來已修之史及壬申年以來史草, 擇出以進。”

감예문춘추관사(監藝文春秋館事) 조준 등이 고려 왕조의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공양군(恭讓君)[64] 때까지는 이미 《실록(實錄)》을 편수(編修)했으므로, 전하(殿下)의 임신년(壬申年)[65]으로부터 그 이후의 사초(史草)를 거두어 임금이 보도록 바치고자 하니, 사관(史官) 신개(申槪) 등이 소(疏)를 올리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옛날에 열국(列國)이 각기 사관을 두고 임금의 언행(言行)·정사(政事)와 신하의 시비 득실(是非得失)을 모두 바른 대로 쓰고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그 시대의 임금과 신하는 그 시대의 역사를 숨겨서 뒷세상에 전하였으므로, 호령(號令)과 언어·행동의 즈음에 이로 인하여 경계로 삼아 감히 그릇된 짓을 하지 못하였으니, 그 사관(史官)을 설치한 뜻이 깊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방현령(房玄齡)에게 이르기를, ‘앞 시대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을 임금에게 보지 못하게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현령이 대답하기를, ‘사관은 거짓으로 칭찬하지 않으며 나쁜 점을 숨기지 않으니, 임금이 이를 보면 반드시 노하게 될 것이므로 감히 임금에게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태종은 이에 현령에게 명하여 순서대로 편찬하여 올리게 하니, 현령이 《실록(實錄)》을 편찬하여 만들어 책이 이루어지매 이를 올렸지마는, 말이 은근히 숨긴 것이 많았습니다. 대저 태종의 현명으로서는 마땅히 바른 대로 쓰는 일에 싫어할 점이 없을 것인데도, 현령 같은 한 세상의 명철한 재상이 오히려 사실을 숨기고 피하여 감히 바른 대로 쓰지 못했는데, 하물며 뒷세상의 군주들은 태종에게 미치지 못하면서도 그 시대의 역사를 보고자 한다면, 아첨하는 신하가 어찌 현령의 사실을 숨기고 피하는 것뿐이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모든 하는 일이 문득 삼대(三代)[66]를 본받는데, 근일에는 특별히 교지(敎旨)를 내려서 이 시대의 역사를 보고자 하므로, 신 등은 교지를 듣고는 삼가하고 두려워합니다.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당나라 태종도 이를 보고 뒷세상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곧 태종이 덕망을 잃은 일로써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본받을 일이겠습니까?

을해년에 전하께서 또한 이를 관람하고자 하셨다가 마침내 그치고 말았으니, 일대(一代)의 입법(立法)이 엄했으며 만세(萬世)의 공론(公論)이 성취되었는데, 지금 또 이러한 명령이 있게 되니, 신 등은 알지 못하지마는, 그 옳고 그른 것을 보아서 뒷세상의 경계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거짓과 실상을 열람하여 그 이치에 틀린 점을 바루고자 하는 것입니까? 추측하건대, 또한 그 다 기록되지 못한 것을 상고하여 그것을 다 쓰도록 하려는 것입니까? 만약 훗날의 경계로 삼고자 한다면, 마땅히 옛날의 성현(聖賢)의 남긴 글을 보고서 그 치란 흥망(治亂興亡)의 자취를 살펴보면 될 것인데, 어찌 반드시 이 시대의 역사를 보아야만 경계할 줄을 알겠습니까? 그 이치에 틀린 점을 바루고저 한다면, 사신(史臣)된 사람이 진실로 널리 묻고 찾아서 반드시 그 사실을 참으로 알아낸 후에야 이를 쓰게 되는데, 어찌 그 풍문(風聞) 억견(臆見)과 부박(浮薄) 허탄(虛誕)한 일을 기록하여 뒷세상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사실을 다 쓰도록 하려고 한다면, 나라의 제도에 충원(充員)된 수찬(修撰)으로부터 직관(直館)에 이르기까지 각기 보고 들은 것에 의거하여 사초(史草)를 기록하여 만들게 되니, 그 수십 인의 보고 들은 것이 어찌 모두 빠뜨려져서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신 등은 알 수 없습니다만, 전하께서 역사를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일입니까?

가만히 삼가 생각하옵건대, 창업(創業)한 군주는 자손들의 모범이온데, 전하께서 이미 이 당시의 역사를 관람하시면 대를 이은 임금이 구실을 삼아 반드시, ‘우리 선고(先考)께서 한 일이며 우리 조고(祖考)께서 한 일이라.’ 하면서, 다시 서로 계술(繼述)하여 습관화되어 떳떳한 일로 삼는다면, 사신(史臣)이 누가 감히 사실대로 기록하는 붓을 잡겠습니까? 사관(史官)이 사실대로 기록하는 필법(筆法)이 없어지므로서 아름다운 일과 나쁜 일을 보여서 권장하고 경계하는 뜻이 어둡게 된다면, 한 시대의 임금과 신하가 무엇을 꺼리고 두려워해서 자기의 몸을 반성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에 역사를 관람하는 일은 아마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전해 주는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태평한 시대를 당하여 현명한 군주와 충량(忠良)한 신하가 서로 만나서 정교(政敎)와 호령(號令)이 더할나위 없이 좋고 아름다워서 모두가 모범할 만하여 간책(簡策)에 빛나게 되었는데, 진실로 전하께서 이를 한 번 보시고 난다면, 아마 뒷세상의 사람들이 반드시, ‘그때 임금이 친히 보신 것이니 그 사신(史臣)이 어찌 즐거이 사실대로 쓰겠는가?’ 할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전하의 성대한 덕망과 업적(業績)으로 하여금 도리어 거짓 글이 되어 신용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니, 어찌 태평한 시대의 성대한 전례(典禮)에 누(累)가 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특별히 뛰어나신 생각을 두어 윤허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리어, 역사를 보시려는 명령을 정지시키시면 공도(公道)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서 즉시 명령하였다.

"지금 친히 관람하고자 하는 것은 착하고 악한 행실의 자취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년의 왕위에 오를 때에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몰래 서로 이야기한 말을 대부분 사신(史臣)이 알지 못한 것이 많다. 이행(李行)이 일찍이 지신사(知申事)가 되었을 때에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 또한 바르지 못했으니, 그 외의 사신이 어찌 능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이야기한 말을 다 알겠는가? 고려 왕조 공민왕으로부터 그 이후로는 이미 편수한 역사와 임신년 이후의 사초(史草)를 가려 내어서 바치게 하라."


회안군의 위세를 믿고 남의 여종을 빼앗으려 한 종 석구지를 목베다[편집]

○懷安君芳幹奴石仇知, 至司水注簿李恒家, 憑主作威, 欲奪其婢。 刑曹鞫問上請, 命斬之。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의 종 석구지(石仇知)가 사수 주부(司水注簿) 이항(李恒)의 집에 이르러, 주인의 세력을 믿고 위세를 부려 그 여종을 빼앗고자 하였으므로, 형조에서 국문(鞫問)하여 위에 청하니, 명하여 이를 목 베게 하였다.


6月 13日[편집]

전 좌사의 대부 문익점의 졸기. 목화씨를 우리 나라에 처음 들여와 재배하게 된 내력[편집]

○丁巳/前左司議大夫文益漸卒。 益漸, 晋州江城縣人。 父淑宣登第不仕, 益漸承家業讀書。 恭愍庚子, 登科, 調金海府司錄。 癸卯, 以諄諭博士, 陞左正言, 爲計稟使左侍中李公遂書狀官, 赴元朝。 將還, 見路傍木緜樹, 取其實十許枚, 盛囊以來。 甲辰, 至晋州, 以其半與鄕人典客令致仕鄭天益, 種而培養, 唯一枚得生。 天益至秋取實至百許枚, 年年加種, 至丁未春, 分其種以給鄕里, 勸令種養。 益漸自種, 皆不榮。 胡僧弘願到天益家, 見木緜感泣曰: “不圖今日, 復見本土之物。” 天益留飯數日, 因問繰織之術, 弘願備說其詳, 且作具與之。 天益敎其家婢, 織成一匹。 隣里傳相學得, 以遍一鄕, 不十年, 又遍一國。 事聞, 洪武乙卯, 召益漸爲典儀注簿, 積官至左司議大夫。 卒年七十。 至國朝, 以議者之言, 贈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 子三, 中庸、中實、中啓。

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졸(卒)하였다. 익점(益漸)은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경자년[67]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 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胡]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緜)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을묘년[68]에 익점을 불러 전의 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본국의 조정에 이르러 의사(議事)하는 사람의 말로써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강성군(江城君)으로 증직(贈職)하였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문중용(文中庸)·문중실(文中實)·문중계(文中啓)이다.


6月 15日[편집]

흥천사에 거둥하여 사리탑을 구경하다[편집]

○己未/上幸興天寺, 觀舍利塔。

임금이 흥천사(興天寺)에 거둥하여 사리탑(舍利塔)을 구경하였다.


귀의군 왕우의 노비 판결을 잘못한 변정 도감 관리를 폄직시키고 꾸짖다[편집]

○貶辨定都監副使朴抵生、判官宋興等, 爲東西窯監役。 初故郞將任之伯、孫得光等, 與歸義君王瑀訴良, 抵生等以歸義君爲王琮妹夫。 上以爲: “抵生等以人所共知, 尙不精察, 其他決訟不明, 從可知矣。” 仍敎提調南在、李茂、韓尙敬等曰: “爲立辨定都監, 只欲明辨。 如此不明, 罷之仍舊如何? 田制旣正, 人心已定, 獨奴婢一事, 骨肉相殘, 怨讟日興, 君臣共議, 別立都監, 使明辨眞僞, 以伸冤抑, 今十三房決訟不明。 予嘗曰: ‘都監各房, 如有錯誤, 必先罪卿等’ 者, 非欲加罪卿等, 欲卿等傳諭各房, 俾無不公。 今此錯誤, 是誰之過歟?” 在等無以應。

변정 도감(辨定都監) 부사(副使) 박저생(朴抵生)과 판관(判官) 송흥(宋興)을 폄직(貶職)시켜 동·서요(東西窰) 감역(監役)으로 삼았다. 처음에 죽은 낭장(郞將) 임지백(任之伯)과 손득광(孫得光) 등이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와 더불어 노비(奴婢)로서 양민(良民) 될 것을 호소하니, 저생(抵生) 등이 귀의군(歸義君)으로써 왕종(王琮)의 매부(妹夫)로 삼았다. 임금이 생각하기를, 저생(抵生) 등이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도 오히려 자세히 살피지 않으니, 그 외의 송사(訟事)를 처결(處決)한 것이 명백하지 못함은 이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고 하여, 이내 제조(提調) 남재(南在)·이무(李茂)·한상경(韓尙敬) 등에게 명하였다.

"변정 도감(辨定都監)을 세운 것은 명백히 분변하고자 한 것인데, 이와 같이 명백하지 못하니, 이를 폐지하고 그전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는가? 전제(田制)가 바르게 되매 인심이 이미 안정되었는데, 유독 노비(奴婢) 한 가지 일 때문에 부모 형제 사이에 서로 해치고 원망과 비방이 날로 일어나므로, 군신(君臣)이 함께 의논하여 별도로 도감(都監)을 세워 참과 거짓을 명백히 분변하여 원통하고 억울함을 펴게 했는데, 지금 13방(房)이 송사를 판결한 것이 명백하지 못하다.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도감(都監)의 각 방(房)이 만약 착오(錯誤)가 있게 되면 반드시 경(卿) 등을 먼저 죄주겠다.’고 한 것은, 경(卿) 등에게 죄를 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경 등에게 각 방에 전유(傳諭)시켜 공변하지 않음이 없도록 함이었는데, 지금 이같은 착오는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남재 등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첨서 이직을 보내어 사신의 행차를 위로하게 하다[편집]

○遣簽書李稷, 奉醞往勞使臣行次。

첨서(簽書) 이직(李稷)을 보내어 내온(內醞)을 받들고 가서 사신의 행차를 위로하게 하였다.


6月 18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壬戌/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말을 증여받고 민전을 빼앗은 수군 절제사 김을보를 탄핵하다[편집]

○豐海道行臺監察鄭愷啓聞: “水軍節制使金乙寶, 受管下軍贈馬, 且奪民田爲營田, 請罪之。” 上以乙寶防禦有功, 令還任。

풍해도(豐海道)의 행대 감찰(行臺監察) 정개(鄭愷)가 계문(啓聞)하였다.

"수군 절제사 김을보(金乙寶)가 관하(管下) 군사가 증여한 말을 받고, 또 민전(民田)을 빼앗아 영전(營田)으로 삼았으니 이를 죄주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김을보가 적을 방어하는 데 공로가 있음으로써 본래의 직책으로 다시 임명하였다.


노비의 몸값을 올려 정하다[편집]

○刑曹都官上言: “凡奴婢價, 多不過五升布一百五十匹, 馬價則至四五百匹, 是重畜輕人, 於理不順。 願自今凡奴婢價, 勿論男女, 年十五以上四十以下者, 四百匹; 十四以下四十一以上者, 三百匹, 論定買賣, 永爲恒法。 其在逃役價, 則每一名一朔, 五升布三匹。 年月雖多, 不過其直。” 上允之。

형조 도관(刑曹都官)에서 말씀을 올리었다.

"무릇 노비(奴婢)의 값은 많아도 오승포(五升布) 1백 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 값은 4, 5백 필에 이르게 되니, 이것은 가축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을 경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거슬리는 일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노비의 값은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세 이상에서 40세 이하인 자는 4백 필로 하고, 14세 이하와 41세 이상인 자는 3백 필로 하여 매매(賣買)를 논정(論定)하기로 하고, 이를 일정한 법으로 삼게 하며, 그 현재 도망 중에 있는 노비의 역가(役價)는 매 1명마다 1개월에 오승포 3필로 하고, 연월(年月)이 비록 많더라도 그 값에 지나지 않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초가을에 친히 종묘에 강신제를 지내기로 하다[편집]

○禮曹啓: “孟秋, 親祼宗廟。” 上允之。

예조에서 아뢰었다.

"초가을에는 종묘(宗廟)에 친히 강신제를 지내소서."

임금이 윤허하였다.


6月 19日[편집]

피비가 영평 백운산에 내리니 소재 법석을 베풀게 하다[편집]

○癸亥/雨血于永平白雲山, 遣寧城君吳思忠, 設法席禳之。

피비가 영평(永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리니, 영성군(寧城君) 오사충(吳思忠)을 보내어 법석(法席)을 베풀고 재앙을 물리치게 하였다.


6月 20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甲子/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사헌부에서 유양을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다만 재산을 적몰하고 귀양보내다[편집]

○憲司具啓請加刑柳亮鞫問, 明正其罪, 上曰: “如所啓, 則亮必死矣, 寧失不經。” 只許籍沒流外。

사헌부에서 장계(狀啓)를 갖추어 유양(柳亮)에게 형벌을 가하여 국문(鞫問)하고 그 죄를 명백히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아뢴 대로 한다면 유양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차라리 상도(常道)에 어그러지는 대로 하겠다."

이에 다만 재산을 적몰(籍沒)하고 외방(外方)에 귀양보내게 하였다.


6月 21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乙丑/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중국 사신이 서원군에 이르니 내온을 가지고 가 위로하게 하다[편집]

○朝廷使臣至瑞原郡, 上令內臣李匡、通事李賢, 送醞迎勞, 贈以衣服笠靴。

조정(朝廷)의 사신이 서원군(瑞原郡)에 이르니, 임금이 내신(內臣) 이광(李匡)과 통사(通事) 이현(李賢)으로 하여금 내온(內醞)을 가지고 가서 영접 위로하고 의복·갓·신을 주게 하였다.


6月 23日[편집]

남문에 거둥하여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잡기와 채붕을 관람하다[편집]

○丁卯/幸南門, 觀使臣迎逢雜伎及彩棚。 都堂出迎曙驛迎慰, 使臣遇都堂甚倨, 指所齎文曰: “皇帝親諭。”

임금이 남문에 거둥하여 사신을 영접하는 잡기(雜伎)와 채붕(彩棚)을 관람하였다. 도당(都堂)에서 영서역(迎曙驛)에 나가서 사신을 영접 위로하니, 사신이 도당(都堂)을 대우함이 심히 거만하여, 가지고 온 글을 가리키면서,

"황제의 친유(親諭)라."

하였다.


6月 24日[편집]

반송정에서 중국 사신을 영접하다. 신귀생을 보낸다는 예부의 자문과 그의 행패[편집]

○戊辰/上率百官, 出迎使臣于盤松亭, 百官具公服, 迎至闕(廷)〔庭〕。 使臣上殿, 上跪, 使臣親(受)〔授〕書一封, 乃禮部咨。 其咨曰:

爲閽者申貴生復還本國事, 本部左侍郞張炳等, 欽奉聖旨: “洪武二十五年, 曾於朝鮮國, 索取火者數十人, 入於內庭, 意在授之以職, 使周旋內庭, 管領諸事於內外, 無所不知。 此所以開誠心待朝鮮如此也。 是後以此人, 數爲使者詣本國, 不期王李【上諱。】者, 無誠心相合之意。 朕將前數十人閽者, 仍發還本國, 只有申貴生一名, 幼而無知, 留養數年, 使有知, 然後發還。 貴生聰敏, 朕之所爲, 無所不知, 其以貴生, 日不離左右。 今貴生歸, 諭之曰: ‘旣達本國, 在此間時, 耳曾聞何事, 目曾見何事, 盡云之於爾王, 毋過云毋匿云。’ 爾辦事若干年, 賜大銀一箇、段一對、鈔二十錠。” 欽此移咨。

開讀訖, 上與申貴生行頓首禮。 上不親勞, 命贊成事禹仁烈、迎接使柳雲等慰之。 貴生不悅, 不飮酒, 臣僚皆疾貴生欺侮無禮。 初, 貴生至義州, 凡接人, 皆用華言, 人不知其爲本國人。 指所齎物曰: “賜與。” 迎接使柳雲至, 亦謂其物曰: “賜與”, 高置卓上, 坐則拔劍以守, 行則駄馬先驅, 佩劍而隨之。 雲老而怯, 不敢詳問, 傳報都堂曰: “使臣實是華人, 齎賜物來。” 都堂聞于上, 及是, 方知其非。 貴生以其受賜之物, 稱爲賜與, 雲誤傳也。

임금이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반송정(盤松亭)에 나가서 사신을 영접하였다. 백관들은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사신을 맞이하여 대궐의 뜰에 이르렀다. 사신이 전상(殿上)에 오르니 임금이 친히 꿇어앉았다. 사신이 친히 서신 1봉(封)을 주었는데 이는 곧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었다. 그 자문에 이러하였다.

"환자(宦者) 신귀생(申貴生)이 다시 본국(本國)으로 돌아가는 일 때문에 본부(本部)071) 의 좌시랑(左侍郞) 장병(張炳) 등이 삼가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았는데, 그 칙지에, ‘홍무(洪武) 25년(1392)에 일찍이 조선국에서 화자(火者)072) 수십 인을 찾아 가지고 내정(內廷)에 들어오게 한 것은, 그 의도가 관직을 임명하여 내정(內廷)에 거처하면서 여러가지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는 데 있었으니, 국내와 국외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것이 성심으로 조선을 대우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후에는 이 사람으로써 자주 사자(使者)로 삼아 본국(本國)에 나아가게 했으나, 조선왕 이성계(李成桂)란 사람이 성심으로 서로 합하려는 의사가 없었다. 짐(朕)은 전의 수십 인의 환자(宦者)를 이내 본국(本國)으로 돌려보냈는데, 다만 신귀생(申貴生) 1명만이 있어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수년 동안 남겨 길러 아는 것이 조금 있게 한 후에 돌려보내는 것이다. 귀생은 총명하고 민첩하여 짐(朕)의 하는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것은 귀생이 날로 내 좌우(左右)를 떠나지 않은 때문이다. 지금 귀생이 돌아가는데, 그에게 개유하기를, 「본국(本國)에 도착하거든 이곳에 있을 때 귀로는 일찍이 무슨 일을 들었으며, 눈으로는 일찍이 무슨 일을 보았는지 너의 국왕에게 다 말하되, 지나치게 말하지도 말며 숨겨서 말하지도 말아라.」 하고, 「네가 몇 해 동안 일을 처리했으므로 대은(大銀) 1개와 단(段) 1대(對)와 초(鈔)073) 20정(錠)을 내려 준다.」’ 하였습니다. 삼가 이것을 이자(移咨)합니다."

이를 읽기를 마치매, 임금이 신귀생과 더불어 돈수례(頓首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친히 위로하지 않고서 찬성사(贊成事) 우인열(禹仁烈)과 영접사(迎接使) 유운(柳雲) 등에게 명하여 귀생을 위로하게 하니, 귀생이 기뻐하지 않으며 술도 마시지 아니하므로, 신료(臣僚)들은 모두 귀생의 속이고 업신여김과 예의가 없음을 미워하였다. 처음에 귀생이 의주(義州)에 이르러, 무릇 사람들을 접대하면서 모두 중국말을 쓰므로, 사람들은 그가 본국(本國)074) 사람인 줄은 알지 못하였다. 가지고 온 물건을 가리키면서,

"사여(賜與)한 것이다."

하고, 영접사(迎接使) 유운(柳雲)이 그 곳에 이르니, 또한 그 물건을 가리키면서,

"사여(賜與)하는 것이다."

하고, 탁자(卓子) 위에 높이 두고, 앉을 때는 칼을 뽑아 들고 이를 지키며 갈 때는 이를 실은 말을 먼저 달리게 하고는, 칼을 차고 이를 뒤따라 갔다. 유운은 늙었으므로 겁을 내어 감히 자세히 묻지도 못하고, 도당(都堂)에 전해 보고하였다.

"사신은 실상 중국 사람인데 사물(賜物)을 가지고 왔습니다."

도당(都堂)에서 임금에게 아뢰니, 이때에 와서야 그 그릇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귀생은 그에게 내려 준 물건을 일컬어 사여(賜與)한 것이라 하였는데, 유운이 잘못 전했던 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진도》 강습 상황을 점검하게 하다[편집]

○上遣宦者朴英文於全羅、慶尙道, 點視《陣圖》講習能否。

임금이 환자(宦者) 박영문(朴英文)을 전라도와 경상도에 보내어 《진도(陣圖)》의 강습을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자세히 시찰하게 하였다.


6月 29日[편집]

사헌부에서 신분에 따라 의복의 색깔을 정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癸酉/憲司上言: “先王衣服之制, 尊卑有等, 正間之色, 不可紊亂也。 我國家上下服用, 尙未有章。 願自今進上服用, 皆正色, 凡男女黃色灰色縞素之衣, 一皆禁斷。” 上允之。

사헌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선왕(先王)의 의복 제도는 존비(尊卑)의 등급이 있으므로, 정색(正色)과 간색(間色)을 문란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가에서는 상하(上下)의 의복이 아직 복장(服章)[69]이 없사오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진상(進上)하는 의복은 모두 정색(正色)으로 하고, 모든 남녀들은 황색과 회색(灰色)과 흰색 옷은 모두 금단(禁斷)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서북면 여러 주군에 큰 물이 지다[편집]

○西北面順州、慈州、江東、德州、殷州、平壤等州郡大水。

서북면의 순주(順州)·자주(慈州)·강동(江東)·덕주(德州)·은주(殷州)·평양(平壤) 등 주군(州郡)에서 큰물이 졌다.


七年 秋七月[편집]

7月 1日[편집]

조회를 보지 않다. 사헌 잡단 전시를 옥에 가두다[편집]

○甲戌/上不視朝。 囚司憲雜端田時于巡軍獄。

임금이 조회를 보지 못하였다. 사헌 잡단(司憲雜端) 전시(田時)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7月 3日[편집]

신귀생을 청화루에서 접대하다[편집]

○丙子/上享申貴生於淸和樓。

임금이 신귀생(申貴生)을 청화루(淸和樓)에서 접대하였다.


7月 4日[편집]

신귀생이 고향인 영흥으로 돌아가다[편집]

○丁丑/申貴生歸其鄕永興。

신귀생(申貴生)이 그 고향인 영흥(永興)으로 돌아갔다.


7月 5日[편집]

순릉과 경안백 능실의 화려함을 사사로이 비난한 전시를 귀양보내고 박수기·황희 등을 폄직시키다[편집]

○戊寅/流田時于甲州。 初工曹典書劉旱雨, 回自東北面, 至時家, 時問東北面事, 旱雨答曰: “純陵遷葬, 石羊石虎石室欄干, 極爲侈麗。” 時曰: “若國君陵室則可矣, 純陵如此, 無乃過乎?” 旱雨曰: “敬安伯陵室亦如此。” 時曰: “純陵且猶不可。 況敬安之墓, 豈可同於陵寢哉?” 旱雨又以濬源殿創立之事言之, 時曰: “長生殿已成矣, 濬源殿不必作也。 典書不得辭其責矣。” 旱雨以時之言聞, 上怒, 命刑問時, 且鞫相與論說者, 時曰: “予以意問旱雨耳, 無與論說者。” 及加重刑, 乃曰: “黃喜、朴竪基。” 又問之, 曰: “妻父柳爰廷、叔父田宥及趙和、申孝昌、尹莘達等十餘人。” 上曰: “時在言官, 凡有弊瘼, 義當陳請。 曾不一言, 乃與雜人, 私相謗訕, 罪孰大焉? 然且宥之, 只令流外。 朴竪基、黃喜職在言官, 不供其職, 私議國事, 宜皆斥于外。” 流時于甲州, 貶竪基鏡城敎授官, 黃喜慶源敎授官。 以柳爰廷開國功臣, 尹莘達原從功臣, 俱勿論, 餘皆得免。

전시(田時)를 갑주(甲州)로 귀양보내었다. 처음에 공조 전서(工曹典書) 유한우(劉旱雨)가 동북면으로부터 돌아와서 전시의 집에 이르니, 전시가 동북면의 일을 묻는지라 한우(旱雨)가 대답하였다.

"순릉(純陵)[70]을 옮겨 장사하는데 석양(石羊)·석호(石虎)·석실(石室)의 난간이 매우 사치하고 화려합니다."

전시가 말하였다.

"국군(國君)의 능실(陵室)이면 될 수 있겠지마는, 순릉(純陵)이 이와 같음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한우가 말하였다.

"경안백(敬安伯)의 능실(陵室)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전시가 말하였다.

"순릉(純陵)도 또한 오히려 옳지 못한 일인데, 하물며 경안(敬安)의 무덤이 어찌 능침(陵寢)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한우가 또 준원전(濬源殿)을 창립한 일을 말하니, 전시가 말하였다.

"장생전(長生殿)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준원전(濬源殿)은 지을 필요가 없는데, 전서(典書)가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우가 전시의 말로써 위에 아뢰니, 임금이 노하여 전시를 형문(刑問)하게 하고, 또 서로 더불어 논설(論說)한 사람을 국문(鞫問)하게 하니, 전시가 말하였다.

"나의 의사로써 한우에게 물었을 뿐이고 더불어 논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에 중한 형벌을 가하게 하니, 그제야 말하였다.

"황희(黃喜)와 박수기(朴竪基)입니다."

또 물으니 말하였다.

"처부(妻父) 유원정(柳爰廷)·숙부 전유(田宥)와 조화(趙和)·신효창(申孝昌)·윤신달(尹莘達) 등 10인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전시가 언관(言官)으로 있으니, 무릇 없애기 어려운 폐해(弊害)가 있으면 의리상 마땅히 진청(陳請)해야 될 것인데도, 일찍이 한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에 잡인(雜人)과 더불어 사적으로 서로 나를 비방했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러나 우선 이를 사유(赦宥)하여 다만 외방(外方)에 귀양보내게 하고, 박수기와 황희는 직책이 언관(言官)에 있으면서 그 직책을 충실히 하지 않고 사적으로 나라 일을 의논했으니 마땅히 모두 외방(外方)으로 내쫓아야 되겠다."

이에 전시를 갑주(甲州)로 귀양보내고, 박수기는 경성 교수관(鏡城敎授官)으로, 황희는 경원 교수관(慶源敎授官)으로 폄직(貶職)시켰으며, 유원정(柳爰廷)은 개국 공신(開國功臣)이며, 윤신달(尹莘達)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인 이유로써 모두 논죄(論罪)하지 말게 하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죄를 면하게 하였다.


7月 8日[편집]

각도에 도관찰출척사를 보내고, 정담·변중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辛巳/下各道都觀察黜陟使。 崔有慶京畿右道, 張至和忠淸道, 全伯英豐海道。 以鄭澹爲中樞院副使, 卞仲良右副承旨, 李詹吏曹典書, 趙庸諫議大夫, 金汾成均樂正。 庸於國初, 以病辭成均祭酒, 退居甫州, 敎授子弟, 有是命。 汾以金扶之言, 訴於左政丞趙浚, 以前寺丞受此職。

각도(各道)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내려보내었으니, 최유경(崔有慶)은 경기우도(京畿右道)로, 장지화(張至和)는 충청도로, 전백영(全伯英)은 풍해도(豐海道)로 내려보냈다. 정담(鄭澹)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변중량(卞仲良)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이첨(李詹)을 이조 전서(吏曹典書)로, 조용(趙庸)을 간의 대부(諫議大夫)로, 김분(金汾)을 성균 악정(成均樂正)으로 삼았다. 조용은 건국 초기에 병으로써 성균 좨주(成均祭酒)를 사임하고 물러가 보주(甫州)에 살면서 자제(子弟)들을 교수(敎授)하고 있었는데, 이번의 명령이 있었다. 김분은 김부(金扶)의 말로써 좌정승 조준에게 호소하여 전 시승(寺丞)으로써 이 직책을 받게 되었다.


조준·김사형·정도전이 신귀생의 난동을 막은 내시 조순을 남은의 집에서 접대하다[편집]

○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奉化伯鄭道傳, 享宦者曹恂于南誾之第, 皆贈馬一匹。 恂自被召之後, 尤得寵幸, 上宴申貴生之日, 貴生醉欲拔刀, 恂卽止之, 浚等以是享之。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이 환자(宦者) 조순(曹恂)을 남은(南誾)의 집에서 접대하고 모두 말 1필을 증여(贈與)하였다. 조순은 부름을 받은 후로부터 더욱 임금의 사랑함을 얻게 되었다. 임금이 신귀생(申貴生)을 위하여 연회를 개최한 날에 귀생이 술이 취하여 칼을 빼고자 하는데, 조순이 즉시 이를 말렸으니 조준 등이 이 일로써 조순을 접대한 것이었다.


7月 11日[편집]

조준을 비방한 김부를 목베다. 요동 공략 문제로 조준 김사형과 남은 정도전 일파 간에 알력이 있다[편집]

○甲申/誅監察金扶, 杖監察皇甫琠, 笞注簿李養修。 初, 扶與琠, 飮酒於新監察金仲誠家, 過趙浚第曰: “雖作大家, 何能久居? 後必爲他人有矣。” 琠聞之, 說與養修, 養修言於金汾。 汾, 浚之門人, 以告浚。 浚聞于上, 上怒曰: “浚開國元勳, 與國同休戚。 扶以浚爲不久, 是以朝鮮社稷爲不久也。” 命亟置極刑。 人有勸浚上請免死者, 浚逡巡不卽詣闕, 扶已死乃止。 國人以浚不卽詣闕請免, 薄浚。 琠、養修以不直告於朝, 決罪有差, 罷監察同扶飮酒者十八人。 上謂都承旨李文和曰: “向者田時亂言, 必有主議者, 予疾問事官不明, 皆宥之。 今金扶又有亂言, 金汾告之, 宜賞職。” 初, 南誾與鄭道傳比, 陰有攻遼之議。 誾密言於上曰: “趙浚、金士衡每有異議。” 適田時以陵室之事在逮, 言及柳爰廷、趙和、申孝昌。 爰廷, 浚之相厚者, 趙和其姪, 孝昌, 士衡之外甥, 故鞫問田時, 欲其連及, 時無言及。 上以誾所嘗親信, 不罪之。

감찰(監察) 김부(金扶)를 목 베고, 감찰 황보전(皇甫琠)은 장형(杖刑)을 집행하고, 주부(注簿) 이양수(李養修)는 태형(笞刑)을 집행하였다. 처음에 김부가 황보전과 더불어 새 감찰 김중성(金仲誠)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조준의 집을 지나면서 말하였다.

"비록 큰 집을 지었지마는 어찌 능히 오래 거처할 수 있겠는가? 후일에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될 것이다."

황보전이 이 말을 듣고 이양수에게 이야기했더니, 이양수가 김분(金汾)에게 말하였다. 김분은 조준의 문인(門人)이므로 조준에게 알리니, 조준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에 임금이 노하여 말하였다.

"조준은 개국 원훈(開國元勳)으로서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걱정을 같이할 사람인데, 김부가 조준을 오래 가지 못한다고 했으니, 이것은 조선 사직(社稷)을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이에 명하여 김부를 빨리 극형(極刑)에 처하게 하였다. 어느 사람이 조준에게 임금께 김부의 죽음을 면하도록 청하기를 권고하는 자가 있었으나, 조준이 머뭇거리면서 즉시 대궐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김부가 이미 죽었으므로 그만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조준이 즉시 대궐에 나아가서 김부의 죽음을 면하도록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조준을 박정(薄情)하게 여기었다. 황보전과 이양수는 바른대로 조정에 알리지 않은 이유로써 죄를 차등이 있게 결정하고, 감찰로서 김부와 함께 술을 마신 사람 18명을 파면시키었다. 임금이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일렀다.

"지난번 전시(田時)가 난언(亂言)할 적에 반드시 의논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나, 내가 죄인을 신문하는 관원이 명백하게 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모두 사유(赦宥)했는데, 지금 김부가 또 난언(亂言)이 있는 것을 김분(金汾)이 이를 알렸으니, 마땅히 관직을 상으로 줄 것이다."

처음에 남은이 정도전과 더불어 친근하여 몰래 요동(遼東)을 공격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남은이 임금에게 비밀히 말하였다.

"조준과 김사형이 매양 이의(異議)가 있습니다."

때마침 전시(田時)가 능실(陵室)의 일로써 체포되어 있는데, 유원정(柳爰廷)·조화(趙和)·신효창(申孝昌)에게 말이 미치게 되었다. 유원정은 조준과 서로 후하게 지내는 사람이고, 조화는 그의 조카이며, 신효창은 김사형의 외생(外甥)인 까닭으로, 전시를 국문(鞫問)하여 그들에게 관련되게 하려고 하였으나, 전시가 언급(言及)함이 없었다. 임금이 남은은 일찍이 친근하고 신임하는 사람임으로써 그를 죄주지 아니하였다.


7月 14日[편집]

우란분재를 흥천사에서 베풀다[편집]

○丁亥/設盂蘭盆齋于興天寺。

우란분재(盂蘭盆齋)[71]를 흥천사(興天寺)에서 베풀었다.


7月 19日[편집]

하윤·이정보·김분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壬辰/以河崙爲忠淸道都觀察黜陟使, 李廷俌左道都觀察使, 金汾禮曹議郞。

하윤을 충청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삼고, 이정보(李廷俌)를 좌도 관찰사로, 김분(金汾)을 예조 의랑(禮曹議郞)으로 삼았다.


7月 22日[편집]

오봉산이 무너지다[편집]

○乙未/五峯山崩。

오봉산(五峰山)이 무너졌다.


7月 25日[편집]

《진도》 강습을 게을리 한 각 진(鎭)의 훈도관과 첨절제사를 벌주다[편집]

○戊戌/宦者朴英文來啓曰: “各(陣)〔鎭〕俱不能習《陣圖》, 惟羅州鎭稍習。” 上怒, 卽命囚各鎭訓導官, 且命論決各鎭僉節制使不能之罪。

환자(宦者) 박영문(朴英文)이 와서 아뢰었다.

"각 진(陣)이 모두 《진도(陣圖)》를 익히지 못하고 있는데, 다만 나주진(羅州鎭)만이 조금 익히고 있습니다."

이에 임금이 노하여 즉시 각 진(鎭)의 훈도관(訓導官)을 가두도록 명하고, 또 각 진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능히 감독하지 못한 죄를 논결(論決)하도록 명하였다.


7月 26日[편집]

호조 급전사에서 관리들이 전지를 직접 답험하여 새로 계량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己亥/戶曹給田司上言: “前朝之季, 紀綱紊亂, 田制先毁, 豪强兼幷, 骨肉相訟, 公私俱竭, 故於己巳年間, 京畿及五道田, 幷行打量作丁。 然當其時, 算術未熟, 刻期畢事, 致有輕重失中, 或至遺漏, 濱海之地, 亦未及量。 乞分遣朝官與諸州守令踏驗, 令觀察使考察, 以千字字號作丁, 以收其稅。 兩界之田, 都巡問使亦以一牛日耕多少改量, 其守令及委差之官, 不肯用心踏驗者, 依戶律決罪, 罷職不敍。 都觀察使、都巡問使, 失於覺察者, 申聞論罪。” 上允之。

호조의 급전사(給田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기강(紀綱)이 문란하여 전제(田制)가 먼저 무너지니, 호강(豪强)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아 합치고, 부자 형제의 사이가 서로 송사(訟事)하여 국가와 민간이 모두 곤궁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기사년[72] 무렵에 경기(京畿)와 5도(道)의 전지(田地)를 모두 타산(打算)하여 정(丁)[73]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계산하는 기술이 익숙하지 못하여 시기를 한정하여 일을 마치게 되매, 경중(輕重)이 적중(適中)하지 못하고 혹은 빠뜨린 것도 있게 되며, 바다 가까운 땅은 또한 미처 계량(計量)하지도 못하였으니, 원컨대 조관(朝官)을 나누어 보내어 여러 고을 수령(守令)들과 더불어 답험(踏驗)하고, 관찰사로 하여금 고찰(考察)하여 천자문(千字文)의 자호(字號)로써 정(丁)을 만들어 그 세(稅)를 거두게 하고, 동서 양계(兩界)의 전지는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또한 소[牛] 하루갈이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고쳐 계량(計量)하게 하되, 그 수령(守令)과 사무를 맡은 관원이 마음을 써서 답험(踏驗)하기를 즐겨 하지 않는 사람은 호율(戶律)에 의거하여 죄를 결정하고 관직을 파면시켜 서용(敍用)하지 않게 하며, 도관찰사(都觀察使)와 도순문사(都巡問使)로 각찰(覺察)하지 않는 사람은 신문(申聞)하여 논죄(論罪)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7月 27日[편집]

폭풍이 불고 우박이 오다[편집]

○庚子/暴風雨雹。

폭풍이 불고 우박이 왔다.


일본 비전주 준주 태수 원경이 예물을 바치다[편집]

○日本肥前州駿州太守源慶, 使人獻禮物。

일본 비전주(肥前州) 준주 태수(駿州太守) 원경(源慶)이 사람을 시켜 예물을 바쳤다.


흥천사에 거둥하다[편집]

○上幸興天寺, 觀浮屠塔。

임금이 흥천사(興天寺)에 거둥하여 부도탑(浮屠塔)을 구경하였다.


전라도 경상도 각 진의 첨절제사 중 《진도》에 통하지 않은 자를 매질하다[편집]

○遣巡軍千戶金天益于全羅、慶尙道各鎭, 笞僉節制使不通《陣圖》者。

순군 천호(巡軍千戶) 김천익(金天益)을 전라도와 경상도의 각 진(鎭)에 보내어 첨절제사(僉節制使)로서 《진도(陣圖)》에 통하지 않은 사람을 매질하게 하였다.


경기좌도와 충청도 군사에게 궁성을 수축하게 하다[편집]

○以京畿左道及忠淸道軍三千七百人, 修築宮城。

경기좌도(京畿左道)와 충청도의 군사 3천 7백 명으로써 궁성을 수축하였다.


7月 29日[편집]

임금이 병환이 나다[편집]

○壬寅/上不豫。

임금이 병환이 났다.


七年 八月[편집]

8月 1日[편집]

여러 왕자와 남은·이무·상장군 등이 《진도》를 익히지 않은 까닭을 묻다[편집]

○甲辰朔/命憲司, 問諸王子及宜城君南誾、參贊門下府事李茂、上ㆍ大將軍等, 不習《陣圖》之故。

사헌부에 명하여 여러 왕자와 의성군(宜城君) 남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무(李茂), 상장군·대장군 등이 《진도(陣圖)》를 익히지 않는 까닭을 묻게 하였다.


8月 2日[편집]

신덕 왕후의 초상을 인안전에 봉안하다[편집]

○乙巳/安神德王后影子于仁安殿。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영자(影子)를 인안전(仁安殿)에 봉안(奉安)하였다.


충청도 도관찰사 하윤과 경기좌도 관찰사 이정보에게 교서와 부월을 주다[편집]

○坐西涼亭, 以敎書鈇鉞, 親授忠淸道都觀察使河崙、京畿左道觀察使李廷俌。

임금이 서쪽 양정(涼亭)에 앉아 교서(敎書)와 부월(鈇鉞)로써 충청도 도관찰사 하윤과 경기좌도 관찰사 이정보(李廷俌)에게 친히 주었다.


8月 3日[편집]

임금이 병환이 나다[편집]

○丙午/上不豫。

임금이 병환이 났다.


8月 4日[편집]

사헌부에서 《진도》를 익히지 않은 삼군 절도사 등 292인을 탄핵하다[편집]

○丁未/憲司、承旨以不習陣圖, 劾三軍節制使、上ㆍ大將軍、軍官等二百九十二人。

사헌부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진도(陣圖)》를 익히지 않은 이유로써 삼군 절도사(三軍節度使)와 상장군·대장군·군관(軍官) 등 2백 92인을 탄핵하였다.


8月 6日[편집]

임금이 병환이 나다[편집]

○己酉/上不豫。

임금이 병환이 났다.


경상도 도관찰사가 실농을 이유로 노비 송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도록 청하다[편집]

○慶尙道都觀察使林整報: “自夏及秋不雨, 禾穀不稔。 且停奴婢決訟, 以待民拾橡栗秋耕之後。” 上以限年事, 不允。

경상도 도관찰사 임정(林整)이 보고하였다.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아서 벼가 익지 않았으니, 잠정적으로 노비(奴婢)의 송사 판결을 정지하고서 백성이 상수리와 밤을 줍고 가을갈이를 한 후까지 기다려야 되겠습니다."

임금이 연사(年事)가 한정되었다는 이유로써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8月 7日[편집]

강권으로 서울 시위 군관들은 모두 《진도》를 익히게 하다[편집]

○庚戌/諸道《陣圖》敎訓者至, 各杖一百。 乃選通《陣圖》者五人, 分遣各道。 京中侍衛軍官, 無不習《陣圖》者。

여러 도(道)의 《진도(陣圖)》를 교훈(敎訓)하는 사람에게 각기 곤장 1백 대를 치게 하고, 이내 《진도(陣圖)》를 통한 5인을 뽑아서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니, 서울에 시위(侍衛)하는 군관(軍官)으로 《진도(陣圖)》를 익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8月 9日[편집]

대사헌 성석용이 《진도》를 익히지 않은 모든 지휘관의 처벌을 건의하다. 정도전 등이 요동 공략에 대해 조준을 설득하려다가 실패하다[편집]

○壬子/大司憲成石瑢等上言: “殿下命武臣講習《陣圖》, 有年矣, 節制以下大小員將, 不自講習, 廢厥職矣。 其兩府罷職, 前銜則職牒隨品收取, 遞降一等; 五品以下, 決笞鑑後。” 上曰: “節制使南誾、李之蘭、張思吉等, 開國功臣; 李天祐, 今爲內甲士提調; 義安伯和、懷安君芳幹、益安君芳毅、撫安君芳蕃、寧安君良祐、永安君【上王舊諱。】、順寧君枝、興安君李濟、靖安君【我殿下諱。】, 王室至親; 柳曼殊、鄭臣義等, 原從功臣, 皆未可議罪, 其當該麾下, 俱各決笞五十; 李茂罷職; 外方諸鎭節制使不習《陣圖》者, 皆杖之。” 初鄭道傳、南誾, 日見乎上, 勸以攻遼, 故使習《陣圖》如此其急。 先是, 左政丞趙浚謁告, 道傳、誾詣浚第曰: “攻遼之擧, 今已定矣, 公勿復有言。” 浚答曰: “予居開國元勳之列, 豈有負殿下? 殿下卽位之後, 因遷國創始, 民困土木之役, 未見仁愛之施, 怨咨斯極, 糧餉不給。 安有率其怨民, 而能濟事者哉?” 謂道傳曰: “萬一予與閣下, 率諸道之民以征, 其疾視也久矣, 豈肯用命乎? 吾恐身亡國敗, 不及遼而至矣。 病勢方熾, 未能興造, 願諸公以臣言復于上。 疾愈, 臣當親啓。” 厥後浚力諫, 上從之。

대사헌 성석용(成石瑢) 등이 상언하였다.

"전하(殿下)께서 무신(武臣)들에게 《진도(陣圖)》를 강습하도록 명령한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도, 절제사(節制使) 이하의 대소 원장(大小員將)들이 스스로 강습하지 아니하고 그 직책을 게을리 하오니, 그 양부(兩府)의 파직(罷職)된 전함(前銜)은 직첩(職牒)을 관품(官品)에 따라 수취(收取)하되 1등을 체강(遞降)시킬 것이며, 5품 이하의 관원은 태형(笞刑)을 집행하여 뒷사람을 감계(鑑戒)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절제사(節制使) 남은·이지란(李之蘭)·장사길(張思吉) 등은 개국 공신(開國功臣)이고, 이천우(李天祐)는 지금 내갑사 제조(內甲士提調)가 되었으며,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익안군(益安君) 이방의(李芳毅)·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영안군(寧安君) 양우(良祐)·영안군(永安君) 〈이방과(李芳果)〉 【상왕(上王)의 예전 이름.】 ·순녕군(順寧君) 지(枝)·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 【우리 전하(殿下)의 이름.】 은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이고, 유만수(柳曼殊)와 정신의(鄭臣義) 등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므로 모두 죄를 논의할 수 없으니, 그 당해 휘하(麾下) 사람은 모두 각기 태형(笞刑) 50대씩을 치고, 이무(李茂)는 관직을 파면시킬 것이며, 외방(外方) 여러 진(鎭)의 절제사(節制使)로서 《진도(陣圖)》를 익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곤장을 치게 하라."

처음에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陣圖)》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좌정승 조준이 휴가를 청하여 집에 돌아가 있으니,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殿下)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遼東)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그 후에 조준이 힘써 간(諫)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흥천사에 거둥하여 신덕 왕후를 위해서 올리는 불공을 관람하다[편집]

○幸興天寺, 觀神德王后薦會。

임금이 흥천사(興天寺)에 거둥하여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천회(薦會)[74]를 관람하였다.


8月 10日[편집]

계림군 김균의 졸기[편집]

○癸丑/雞林君金稛卒。 稛, 雞林人。 恭愍庚子, 中成均試不第, 屬近侍, 與趙浚爲友。 浚當國, 累遷至典法判書。 開國之際, 引與同盟, 爲翊戴功臣, 加中樞院副使。 病卒。 子孟誠、仲誠、季誠。

계림군(雞林君) 김균(金稛)이 졸(卒)하였다. 김균은 본관(本貫)이 계림(雞林)[75]이다. 공민왕경자년[76]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으나 과거(科擧)에 급제하지 못하다가 근시(近侍)에 소속되어 조준과 친구가 되었는데, 조준이 국정(國政)을 맡으매,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전법 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개국(開國)할 즈음에는 조준이 그를 추천하여 함께 동맹(同盟)하여 익대 공신(翊戴功臣)이 되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가자(加資)되었다. 병들어 졸(卒)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김맹성(金孟誠)·김중성(金仲誠)·김계성(金季誠)이다.


8月 13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丙辰/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금성과 화성이 헌원성 분야로 들어가다[편집]

○金、火入軒轅。

금성(金星)과 화성(火星)이 헌원성(軒轅星)의 분야로 들어갔다.


봉산에서 별의 괴변을 막기 위한 제사를 베풀고 금경 소재 도량을 행하다[편집]

○設解怪祭於峯山, 又行《金經》消災道場。

해괴제(解怪祭)를 봉산(峰山)에서 베풀고, 또 금경 소재 도량(金經消災道場)을 행하였다.


신덕 왕후 대상재를 흥천사에서 베풀다[편집]

○設神德王后大祥齋於興天寺, 都堂別行于興福寺。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대상재(大祥齋)를 흥천사(興天寺)에서 베풀었는데, 도당(都堂)에서는 흥복사(興福寺)에서 별도로 행하였다.


왕후의 능을 지킨 이서와 강인부의 집을 정표하고 상을 내리다[편집]

○以李舒爲參贊門下府事, 姜仁富爲商議中樞院事, 旌表其居曰忠臣之閭, 賜鞍馬衣笠金帶。 初舒及仁富守后陵, 服喪三年。

이서(李舒)를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삼고, 강인부(姜仁富)를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삼고서, 그 거처를 정표(旌表)하여 충신(忠臣)의 여(閭)라 하고 안장 갖춘 말과 의복·갓·금대(金帶)를 내려 주었다. 처음에 이서와 강인부가 왕후(王后)의 능(陵)을 지키고 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었었다.


세자 이방석이 길복을 입다[편집]

○世子芳碩卽吉。

세자(世子) 이방석(李芳碩)이 길복(吉服)을 입었다.


8月 14日[편집]

임금이 병환이 나다[편집]

○丁巳/上不豫。

임금이 병환이 났다.


8月 15日[편집]

광양부원군 이무방의 졸기[편집]

○戊午/光陽府院君李茂芳卒。 茂芳, 光陽人。 字釋之, 贈贊成事仁英之子。 性廉淡孤苦, 讀書登第, 仕前朝歷官中外, 以廉介見稱。 知事淳昌, 友人過者請土物, 公解所佩鞘子, 屬吏賣以塞請, 客愧而去。 其爲獻納, 權臣金鏞求見, 托辭不往。 廉悌臣拜侍中, 公曰: “辛丑之亂, 棄母而出, 且不隨駕, 豈宜作相!” 終不署告身。 及爲掌令, 玄陵葬魯國公主。 執義當封陵, 以俗諺封陵者不達, 托故不仕, 公以次封之惟謹, 玄陵重之, 陞爲判典校, 再遷大司憲, 尋陞密直提學, 號推忠佐命功臣。 出爲雞林尹, 有惠政, 流亡復業, 召拜政堂文學。 甲寅春, 知貢擧。 恭愍薨, 居閑十六年。 壬申, 門生趙浚當國, 薦爲檢校門下侍中、光陽府院君。 卒年八十。 上輟朝, 諡文簡。 子稔、安國。

광양 부원군(光陽府院君) 이무방(李茂芳)이 졸(卒)하였다. 무방(茂芳)은 본관이 광양(光陽)이고 자(字)는 석지(釋之)이니, 증 찬성사(贈贊成事) 이인영(李仁英)의 아들이다. 성품이 청렴 담박(淡泊)하여 혼자 고생하면서 글을 읽어 과거(科擧)에 올랐고, 고려 왕조에 벼슬하여 중앙과 외방에 관직을 지나면서 청렴하고 결백한 것으로써 칭찬을 받았다. 지순창사(知淳昌事)로 있을 때에 친구로서 지나가던 자가 토산물(土産物)을 청구하므로, 공(公)이 자기가 차고 있던 칼집을 풀어서 아전에게 부탁하여 토산물을 사서 그의 청을 이루어주니, 손님이 부끄러워서 가버렸다. 그가 헌납(獻納)이 되었을 때 권신(權臣) 김용(金鏞)이 보기를 청하니 어떤 일을 핑계하면서 가지 않았으며, 염제신(廉悌臣)이 시중(侍中)에 임명되니, 공이 말하기를,

"신축년의 난리에 어머니를 버리고 나갔으며 또 대가(大駕)를 따라가지 않았으니, 어찌 재상(宰相)이 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았다. 장령(掌令)이 되어서는 현릉(玄陵)[77]이 노국 공주(魯國公主)를 장사하는데, 집의(執義)가 마땅히 능(陵)을 봉분(封墳)해야 되는데도, 속언(俗諺)에 능(陵)을 봉분하는 사람은 현달(顯達)하지 못한다 하는 이유로써 사고를 핑계하고 출근하지 않으니, 공이 차례로써 봉분(封墳) 짓기를 신중히 하였다. 이에 공민왕이 그를 존중하여 판전교(判典校)로 승진시키고 다시 대사헌에 천직(遷職)되었다. 얼마 후에 밀직 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되고 추충 좌명 공신(推忠佐命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나가서 계림 윤(鷄林尹)이 되어 인애(仁愛)를 베푼 정사를 하니, 유망(流亡)한 사람이 그전의 직업으로 돌아왔다. 임금에게 불리어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갑인년 봄에는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었다. 공민왕이 훙(薨)하니 한가하게 있은 지가 16년이나 되었다. 임신년[78]에 문생(門生) 조준이 국정(國政)을 맡게 되자 그를 천거하여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 광양 부원군(光陽府院君)이 되었다가 이때에 졸(卒)하니, 나이 80세였다. 임금이 조회를 폐하고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리었다. 아들이 있으니 이염(李稔)과 이안국(李安國)이다.


8月 17日[편집]

천변지괴 때문에 오대산 상원사와 금강산 표훈사에 법석을 베풀다[편집]

○庚申/以天變地怪, 設法席于臺山上元、金剛山表訓等寺。

천변(天變)과 지괴(地怪)가 있으므로, 법석(法席)을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元寺)와 금강산(金剛山) 표훈사(表訓寺) 등의 절에 베풀었다.


8月 19日[편집]

삼성재를 석왕사에서 행하다[편집]

○壬戌/行三聖齋于釋王寺。

삼성재(三聖齋)[79]를 석왕사(釋王寺)에서 행하였다.


8月 20日[편집]

금성과 목성이 서로 접근하다[편집]

○癸亥/金、木相犯。

금성(金星)과 목성(木星)이 서로 범하였다.


8月 21日[편집]

폭우가 내리고 번개와 천둥이 치다[편집]

○甲子/暴雨震電。

폭우(暴雨)가 내리고 천둥 소리가 나고 번개가 치었다.


좌정승 조준이 소격전에서 임금의 장수를 비는 초례를 베풀다[편집]

○左政丞趙浚爲上設請命醮禮於昭格殿。

좌정승 조준이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비는 초례(醮禮)를 소격전(昭格殿)에서 베풀었다.


8月 22日[편집]

붉은 기운이 동쪽으로부터 성시를 가로지르다[편집]

○乙丑/赤氣自東橫流城巿。

붉은 기운이 동쪽에서 성시(城市)로 흘러 들어왔다.


8月 23日[편집]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며 무지개가 나타나다. 화성이 헌원성을 범하다[편집]

○丙寅/雷電雨雹。 虹見坤方。 火犯軒轅左角。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며 무지재가 곤방(坤方)에 나타났다. 화성(火星)이 헌원성(軒轅星)의 왼쪽 모퉁이를 범하였다.


상왕이 초례를 베풀어 임금의 목숨을 빌고자 소격전에서 재계하다[편집]

○時, 上王欲爲上設醮, 請命致齋于昭格殿。

이때 상왕(上王)[80]이 임금을 위해 초례(醮禮)를 베풀어 목숨을 빌고자 하여 소격전에서 재계하였다.


8月 25日[편집]

유성이 항성 자리에서 나와 남두성 자리로 들어가다[편집]

○戊辰/流星出亢入南斗。

유성(流星)이 항성(亢星)에서 나와 남두(南斗)로 들어갔다.


8月 26日[편집]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편집]

○己巳/奉化伯鄭道傳、宜城君南誾及富城君沈孝生等, 謀害諸王子, 不克伏誅。 初, 上以靖安君開國之功, 諸子無與爲比, 特賜世傳東北面加別赤五百餘戶。 其後, 以諸王子及功臣, 爲各道節制使, 分管侍衛兵馬, 靖安君全羅道, 撫安君芳蕃東北面。 於是, 靖安君以加別赤讓芳蕃, 芳蕃受而不辭。 上知之, 亦不責還也。 道傳、誾等謀欲擅權, 貪立幼孼, 謂孝生孤寒易制, 譽其女有婦德, 請爲世子芳碩嬪。 與世子母兄芳蕃、姊夫興安君李濟等同謀, 多樹黨與, 將欲去諸王子。 暗嗾宦者金師幸密啓, 請依中朝諸皇子封王之例, 分遣諸王子於各道, 上不答。 其後, 上諷諭靖安君曰: “外間之議, 汝輩不可不知, 宜諭諸兄戒愼之。” 道傳等又嗾散騎卞仲良, 上疏請罷諸王子兵權至再三, 上不允。 卜者安植曰: “世子異母兄, 有天命者非一。” 道傳聞之曰: “卽當除之, 何患乎?” 義安君和知其謀, 密告靖安君。 至是, 宦者曹恂傳旨曰: “予病深, 不欲接人, 惟世子外毋得入見。” 師幸、恂皆其黨也。 道傳、誾、孝生、判中樞李懃、前參贊李茂、興城君張至和、星山君李稷等, 托以省問上疾, 日夜聚松峴誾妾家, 相與密謀。 令芳碩、濟及親軍衛都鎭撫朴葳、左副承旨盧石柱、右副承旨卞仲良, 在內稱上病篤急, 召諸王子入, 則以內奴及甲士攻之, 道傳、誾等外應, 約以己巳擧事。 先是, 靖安君密謂知安山郡事李叔蕃曰: “姦黨在平時, 固無疑矣, 伺上違豫, 必生變。 予若召汝, 則宜速來。” 至是, 閔無咎以靖安君命, 召之而至。 時上病劇, 靖安君及益安君芳毅、懷安君芳幹、淸原君沈悰、上黨君李伯卿、義安君和及李濟等, 皆會宿勤政門外西廊。 至是日晡時, 閔無疾詣靖安君邸, 入與夫人偶語良久, 夫人急召奴小斤曰: “汝速詣闕, 請公來。” 小斤曰: “諸君皆會一廳, 奴將何辭以告?” 夫人曰: “汝以我胸腹卒痛奔告, 則公當速來矣。” 小斤牽馬詣西廊, 具告之, 義安君贈以淸心蘇合等藥曰: “宜速往治之。” 靖安君卽還邸。 俄而無疾復來, 與君及夫人鼎立, 密語良久。 夫人執君之衣, 請勿詣闕, 君曰: “豈可畏死不詣? 且諸兄皆在禁中, 不可不使知之。 若有變, 則我當出來擧兵, 以觀國人之心也。” 乃拂衣而出。 夫人追及戶外曰: “愼之愼之。” 日已昏矣。 時命罷諸王子所領侍衛牌, 已十餘日矣, 唯芳蕃摠兵如舊。 靖安君初罷兵, 盡燒營中軍器。 至是, 夫人潛備兵仗爲應變計。 李茂素有中立之計, 密以誾等謀, 嘗告靖安。 至是, 隨無疾來謁, 少頃先去。 茂, 無疾之近姻也。 竹城君朴苞亦往來其間, 暗伺彼之動靜。 於是, 靖安君命無咎, 使叔蕃備兵甲宿于本邸門前辛克禮家待變, 乃詣闕入西廊直宿。 諸君皆不留馬, 獨靖安君使小斤秣馬西廊後。 芳蕃將入內, 靖安君呼之, 芳蕃搔首逡巡, 不應而入。 至初夜, 有人自內出曰: “上疾劇欲避病, 諸王子速入內。 從者竝勿許入。” 和、琮〔淙〕、濟先出立庭, 靖安君與益安、懷安、上黨諸君暫立戶內密語。 舊制, 宮中諸門, 夜必張燈, 至是, 見宮門無燈, 益疑之。 和及濟、琮〔悰〕先入內, 靖安君稱腹痛, 出西廊門外入廁, 坐思良久。 益安、懷安等走出, 呼靖安君者再, 君曰: “諸兄是何高聲呼耶?” 乃立, 以兩袖拍之曰: “勢不得已也。” 卽馳馬出宮城西門, 益安、懷安、上黨皆步走。 唯上黨能及靖安君馬, 益安、懷安或仆躓。 靖安君使馬天牧, 召芳蕃曰: “請出來從我。 厥終, 彼亦不全汝矣。” 芳蕃臥內廊房, 見天牧起坐, 聞訖還臥。 芳蕃傔從, 皆無賴之徒, 唯事射御, 且妄欲謀移儲位久矣。 一日, 謂芳蕃曰: “吾等已緣中宮, 使公得代芳碩位, 敎命將至矣。 請毋出以待。” 芳蕃信而不出外, 人哂之。 靖安知其不相容故召之, 不從。 靖安君到本邸洞口軍營前路駐馬, 呼叔蕃, 叔蕃率壯士二人, 甲而出, 益安、上黨、懷安父子, 亦得騎馬。 有李居易、趙英茂、辛克禮、徐益、文彬、沈龜齡等, 皆歸心靖安者也。 至是, 與無咎、無疾皆會, 騎兵纔十, 步卒纔九人。 乃出夫人所備鐵槍, 中折分與軍士, 諸君從者及各人奴僕十餘, 皆執杖, 獨小斤把劍。 君馳至纛所北路, 呼叔蕃曰: “今日之事, 若之何?” 叔蕃對曰: “事已至此, 不須懼也。 請出軍號。”【方言言的。】 君命以山城二字。 行及三軍府門前, 以待天命。 芳碩等聞變, 欲率兵出戰, 令軍士禮賓少卿奉元良, 登宮南門, 覘軍衆寡, 自光化門至南山, 鐵騎彌滿。 芳碩等懼不敢出, 時人以爲神助。 君又呼叔蕃曰: “如何則可?” 叔蕃對曰: “到姦黨會所, 以兵圍而火之, 出者輒殺可矣。” 夜二鼓, 將過松峴, 叔蕃奔馬告曰: “此小洞, 卽誾妾家也。” 靖安君駐馬, 先使步卒小斤等十餘人, 圍其家, 有鞍馬數匹, 在其門外, 奴僕皆睡, 道傳、誾等, 張燈會坐言笑。 小斤等窺戶未入, 忽有三矢, 相繼落屋瓦, 有聲。 小斤等還出洞口, 問矢之所從來, 叔蕃曰: “我矢也。” 令小斤等還入圍之, 火其隣家三處, 道傳等皆逃匿, 孝生、懃、至和等皆見殺。 道傳逃入其隣前判事閔富家, 富告曰: “有皤腹者入吾家。” 君知其爲道傳, 乃令小斤等四人捕之。 道傳伏閨中, 小斤等叱之出外, 道傳持尺劍, 不能行步, 匍匐而出。 小斤等叱令棄劍, 道傳投劍出門曰: “請勿殺? 願一言而死。” 小斤等曳出至靖安君馬前。 道傳曰: “昔者公旣活我, 願今亦活之。” 昔者, 指壬申歲也。 君曰: “汝爲朝鮮奉化伯, 顧不足耶? 何爲惡至是也!” 令斬之。 初夫人欲自至君所立處, 同其禍敗, 徒步而出, 君麾下士崔廣大等, 力諫止之間, 奴金夫介, 以道傳笠劍來, 夫人乃還。 道傳有子四人。 游、泳聞變赴急, 爲游兵所殺, 湛自刎於家。 初, 湛告於父曰: “今日之事, 不可不告於靖安君也。” 道傳曰: “我旣背高麗, 今又背此附彼, 人雖不言, 獨無愧於心乎?” 李茂出門, 中流矢, 乃曰: “我李茂也。” 步卒將殺之, 靖安君曰: “勿殺。” 乃與之馬。 誾率伴人河景、崔沄等逃竄, 稷乘屋詐爲奴僕, 作滅火狀, 仍得逃免。 闕內人望見松峴火焰漲天, 奔告于上, 宮中衛士鼓角而噪。 李天祐自其家, 率伴二人, 將赴闕, 馬天牧望之, 追及於安國坊洞口曰: “非天祐令公乎?” 天祐不答。 天牧曰: “令公不答而去, 則矢可畏也。” 天祐曰: “汝非馬司直乎? 何呼我耶?” 天牧答曰: “靖安君與諸王子, 會于此矣。” 天祐趨詣靖安君, 且曰: “今擧此事, 何不早使我知之?” 靖安君遣朴苞、閔無疾, 召左政丞趙浚, 浚猶豫, 使卜者筮其去就而不卽赴, 又使叔蕃促之。 靖安君迎至中路, 浚已與右政丞金士衡來, 帶甲伴人多從之。 到嘉會坊洞口橋, 步卒以兵把截曰: “唯兩政丞入。” 浚、士衡等下馬, 趨而過橋, 靖安君曰: “卿等何不憂李氏社稷?” 浚、士衡等, 驚懼跪于馬前。 君曰: “道傳、誾等, 貪立幼孼, 欲剪除我同母兄弟。 我是以爲弱者先手也。” 浚等叩頭曰: “彼之所爲, 吾輩未嘗知也。” 君曰: “如此大事, 宜告國家, 今日之事勢, 迫不暇告耳。 公等宜速合坐。” 石柱、仲良在闕內使人呼都承旨李文和、右承旨金陸于家。 文和奔詣問曰: “上體若何?” 石柱曰: “上疾篤, 今夜子時, 欲避病于西小涼亭。” 於是, 諸承旨俱詣勤政門。 都鎭撫朴葳, 立於勤政門, 高聲呼曰: “軍士來否?” 文和問曰: “此時避御乎? 何吹角耶?” 葳曰: “何謂避御? 奉化伯、宜城君會處, 有數多軍馬, 圍而火之, 故吹角耳。” 先是, 靖安君謂叔蕃曰: “勢力則不可敵矣。 斬道傳、誾等, 然後我四五兄弟, 駐馬于三軍府門前, 以觀國人之心。 人心不從則已, 翕然從之, 則我輩得生。” 至是, 靖安君還到三軍府門前駐馬, 夜已四鼓, 素所注意者, 相繼來集矣。 贊成柳曼殊率子原之, 謁馬前, 靖安君曰: “何故來耶?” 曼殊曰: “聞上將移御臣家, 今不移御。 且聞有變, 故急來, 欲侍衛耳。” 曰: “甲而來乎?” 曼殊曰: “否。” 卽與之甲, 令立馬後。 天祐告曰: “曼殊乃道傳、誾之黨, 不可不殺。” 靖安君曰: “不可。” 懷安及天祐等强之曰: “如此倉卒之際, 衆議不可沮也。” 靖安君顧謂叔蕃曰: “勢難得已”, 命數其罪。 曼殊卽下馬, 執靖安君馬轡曰: “我當白之矣白之矣。” 靖安君令從者解之, 曼殊猶堅執不解, 小斤以小刀刺頷下, 曼殊仰倒, 乃斬之。 靖安君謂原之曰: “汝無罪, 可歸家矣。” 懷安追斬于禮賓門前。 浚、士衡等, 入坐都評議司。 靖安君意謂: “芳碩等若率衛士, 出宮門交戰, 則我軍少, 勢將却矣。 若稍却, 則合坐諸相, 當在彼軍之後, 而或從彼矣。” 使人言於都堂曰: “我兄弟在路上, 而諸相入坐都堂, 不可。 宜卽移坐于雲從街上。” 遂令禮曹, 促會百官。 親軍衛都鎭撫趙溫, 亦直宿闕內, 靖安君使人召溫及朴葳。 溫聞命, 卽以麾下甲士牌頭等, 出謁馬前, 葳不應良久, 不得已佩劍而出, 靖安君溫言以待。 葳見軍勢弱, 乃告曰: “凡諸處分, 乞待天明。” 其志以謂天明, 則兵弱之形著, 而衆心不附矣。 靖安君使赴都堂, 懷安請于君, 使人斬之。 靖安君命溫, 盡出宿衛甲士, 溫卽遣牌頭等入闕, 盡以宿衛甲士出。 於是, 勤政殿以南甲士盡出, 脫甲棄兵, 命各自歸家。 初李茂見兵勢弱, 詐稱恍惚, 使人扶持, 白於靖安君曰: “中箭處痛甚, 請就都堂兒房休息。” 君曰: “可。” 小頃, 茂聞朴葳見誅, 卽還出。 翌日雞鳴, 上召石柱入內, 黎明, 又召文和, 文和詣西涼亭。 世子與芳蕃、濟、和、良祐、淙、樞相張思吉ㆍ張湛ㆍ鄭臣義等, 皆已入內。 自諸君樞? 幢瀉넙?憖 下至內奴, 皆被甲帶劍, 唯曹恂及金陸、石柱、仲良不甲。 石柱傳旨文和曰: “製敎書。” 文和請辭。 石柱曰: “倣韓山君所製誅三元帥敎書之意, 製之可也。” 文和曰: “君知之乎?” 石柱曰: “破賊之功, 一時之或有, 無君之心, 萬世之不宥, 是其詞也。” 文和曰: “今之罪魁, 誰歟?” 石柱曰: “罪魁則更稟于上, 可先起草。” 督之急。 文和執筆曰: “君亦解屬文, 以親稟之意製之, 我當書之。” 石柱製曰: “某某等潛圖不軌, 欲害開國元勳某某等, 以漏洩被捉, 皆令就戮, 其刼從黨與, 皆宥不問。” 草成, 石柱齎草入啓, 上曰: “姑待兩政丞來, 擬議頒之。” 已而, 都堂率百官聞于上曰: “道傳、誾、孝生等結黨陰謀, 欲害我親勳, 以亂我國家。 臣等事迫, 不及以聞, 已得誅除, 願上勿驚。” 李濟方在側, 復于上曰: “諸王子起兵, 共誅誾等, 禍將及。 臣請以衛士出攻。” 上曰: “勿憂。 禍豈及汝?” 和亦止之曰: “自中事也, 不必相戰。” 濟拔劍睥睨者數矣, 和安然不動。 時永安君爲上禱病, 致齋于昭格殿, 聞變潛率一奴, 縋城而出, 步至豐壤, 隱於金仁貴家。 靖安君使人尋之, 迎到宮城南門外, 日將昃矣。 時人皆欲請於上, 以靖安君爲世子, 靖安君固讓, 請以永安君爲世子。 永安君曰: “當初建開國, 至於今日之事, 皆是靖安之功, 我不可爲世子。” 靖安君讓益固曰: “欲定國本, 當在嫡長。” 永安君曰: “然則我當有以處之。” 於是, 靖安君令都堂, 率百官上疏曰: “立嫡以長, 萬世之經。 殿下捨長立幼, 道傳等挾世子, 欲害諸王子, 禍在不測, 幸賴天地宗社之靈, 亂臣伏誅。 願殿下立嫡長永安君爲世子。” 疏上, 文和讀訖, 世子亦在側。 上良久曰: “皆吾子也, 何不可之有!” 顧謂芳碩曰: “於汝便矣。” 上卽允下。 在內諸相問何事, 文和答曰: “易世子也。” 石柱封敎草, 使文和署名, 文和不受, 次請和, 亦不受, 次請坐中諸相, 皆不受。 文和曰: “君之所製書, 何不自署乎?” 石柱曰: “諾。” 乃署名袖之。 旣而, 石柱入內承命出曰: “敎書改寫速下。” 文和曰: “何以改之?” 石柱曰: “開國功臣道傳、南誾等, 潛圖不軌, 謀害王子宗室, 今已漏洩, 功不掩罪, 已皆就戮, 其刼從黨與罔治。” 使仲良書以進。 上令侍女扶起押訖, 還臥病劇, 欲吐未吐曰: “如有物在咽(侯)〔喉〕間不下。” 靖安君令軍器直長金謙, 開武庫出甲槍, 授火㷁軍百餘人, 軍勢稍振。 甲士申龍鳳入闕, 傳靖安君言曰: “興安君、撫安君, 各歸私第。 義安君以下, 何不出來?” 諸君相目不言。 更督之, 和以下皆出。 悰由宮城水門逃出, 獨鄭臣義遲留, 促之乃出。 都堂請出芳碩, 上曰: “旣已判付, 出去何害!” 芳碩泣辭, 賢嬪牽衣而哭, 芳碩拂衣而出。 初議置遠方, 出宮城西門。 李居易、李伯卿、趙璞等, 議于都堂, 使人殺于道。 都堂又請出芳蕃, 上謂芳蕃曰: “世子則已矣, 汝不過置遠方耳。” 芳蕃將出宮城南門, 靖安君下馬入門內, 携手語曰: “誾等旣剪除我輩, 則汝亦終不免, 故我招之。 汝何不從耶? 今雖出外, 未幾必還矣。 好去好去。” 將置通津, 過楊花渡, 宿渡丞館。 芳幹與李伯卿等, 又議於都堂, 使人殺之。 靖安君聞芳碩、芳蕃之死, 密謂叔蕃曰: “柳曼殊, 予尙欲保全, 況骨肉乎? 居易父子, 不告於我, 議於都堂, 戕害我同氣。 今人心未定, 故我隱忍不敢示怒也。 汝毋出此言。” 軍士執仲良、石柱及南贄等以出。 仲良仰視靖安君曰: “我注意於公, 今已數年矣。” 君曰: “彼口亦肉也。” 贄, 誾之弟, 時爲右廂節制使。 竝囚于巡軍, 而追斬于路。 李濟出, 靖安君謂濟曰: “可歸本家。”

上遂策永安君爲世子, 敎曰:

立嫡以長, 萬世之經; 宗子維城, 寡人之望。 惟爾父身嘗開國, 捨長立幼, 乃以芳碩爲世子, 不獨予昵愛不明之過, 道傳、誾等, 亦不得辭其責矣。 當其時, 若以楚國愛少之誡, 據經廷諍, 予敢不從? 如道傳輩, 不惟不諍, 猶恐其不立。 日者, 道傳、誾、孝生、至和等, 潛圖不軌, 搖亂根本, 幸賴天地宗社之佑, 罪人伏誅, 王室再安。 芳碩禍胎, 不可留置國都, 放諸東裔。 予旣悔前日之過, 又因百僚之請, 庸建爾爲王世子。 於戲? 克明其德, 無忝爾所生; 往盡乃心, 鎭撫我社稷。

乃命文和、金陸, 出謁世子。 世子召文和曰: “內無可侍衛者, 爾速還入內。” 文和卽還入。 曺恂宣世子命曰: “除侍女及內奴外, 餘皆出之。” 文和亦出, 世子曰: “爾何出來?” 文和具告其由, 世子曰: “非謂汝也, 宜速還入侍。” 又令上將軍李敷, 入內侍衛。 上命曹恂, 賜世子笠子鞍馬, 世子入內。 濟歸私第, 翁主謂濟曰: “吾與公, 往靖安君邸, 則必獲生矣。” 濟不聽。 昏時, 軍士追至殺之。 靖安君聞之乃驚, 卽呼鎭撫田興曰: “興安君死矣, 奴婢必將逃散。 汝率軍士十餘人, 到興安家斂屍。 勑奴婢曰: ‘若有散者, 後必重罪。’” 興至其家, 使侍婢入告曰: “勿驚。 我是靖安君鎭撫也。” 乃庀斂屍諸事, 一如所命, 翁主感泣。 南誾逃出城水門, 隱於城外圃幕, 沄、景等左右扶持, 暫不離焉。 誾欲詣巡軍, 沄等止之, 誾曰: “道傳爲人所憎, 故見誅, 我無憎之者。” 自詣巡軍門外見斬。 殿下卽位, 以景、沄忠於所事, 俱加擢用。 靖安君與諸王子, 張幕於監巡廳前, 會宿三日。 其後入宿三軍府, 至世子受內禪後, 各還私第。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과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여러 왕자(王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정안군(靖安君)의 건국(建國)한 공로는 여러 왕자들이 견줄 만한 이가 없음으로써 특별히 대대로 전해 온 동북면 가별치(加別赤) 5백여 호(戶)를 내려 주고, 그 후에 여러 왕자들과 공신(功臣)으로써 각도(各道)의 절제사(節制使)로 삼아 시위(侍衛)하는 병마(兵馬)를 나누어 맡게 하니, 정안군은 전라도를 맡게 되고,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은 동북면을 맡게 되었다. 이에 정안군이 가별치(加別赤)를 방번에게 사양하니, 방번은 이를 받고 사양하지 않았는데, 임금도 이를 알고 또한 돌려주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자 하여 어린 서자(庶子)를 꼭 세자(世子)로 세우려고 하였다. 심효생은 외롭고 한미(寒微)하면 제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여, 그 딸을 부덕(婦德)이 있다고 칭찬하여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빈(嬪)으로 만들게 하고, 세자의 동모형(同母兄)인 방번(芳蕃)과 자부(姉夫)인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등과 같이 모의(謀議)하여 자기편 당(黨)을 많이 만들고는, 장차 여러 왕자들을 제거하고자 몰래 환자(宦者) 김사행(金師幸)을 사주(使嗾)하여 비밀히 중국의 여러 황자(皇子)들을 왕으로 봉한 예(例)에 의거하여 여러 왕자를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임금이 정안군에게 넌지시 타일렀다.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여러 형들에게 타일러 이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것이다."

도전 등이 또 산기 상시(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을 사주(使嗾)하여 소(疎)를 올려 여러 왕자의 병권(兵權)을 빼앗기를 청함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점(占)치는 사람 안식(安植)이 말하였다.

"세자의 이모형(異母兄) 중에서 천명(天命)을 받을 사람이 하나뿐이 아니다."

도전이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곧 마땅히 제거할 것인데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가 그 계획을 알고 비밀히 정안군에게 알렸다. 이때에 이르러 환자(宦者) 조순(曹恂)이 교지(敎旨)를 전하였다.

"내가 병이 심하니 사람을 접견하고 싶지 않다. 다만 세자 외에는 들어와서 보지 못하게 하라."

김사행과 조순은 모두 그들의 당여(黨與)이었다. 정도전·남은·심효생과 판중추(判中樞) 이근(李懃)·전 참찬(參贊) 이무(李茂)·흥성군(興城君) 장지화(張至和)·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 등이 임금의 병을 성문(省問)한다고 핑계하고는, 밤낮으로 송현(松峴)에 있는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서 서로 비밀히 모의하여, 이방석·이제와 친군위 도진무(親軍衛都鎭撫) 박위(朴葳)·좌부승지(左副承旨) 노석주(盧石柱)·우부승지(右副承旨) 변중량(卞仲良)으로 하여금 대궐 안에 있으면서 임금의 병이 위독(危篤)하다고 일컬어 여러 왕자들을 급히 불러 들이고는, 왕자들이 이르면 내노(內奴)와 갑사(甲士)로써 공격하고, 정도전과 남은 등은 밖에서 응하기로 하고서 기사일에 일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이보다 먼저 정안군은 비밀히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李叔蕃)에게 일렀었다.

"간악한 무리들은 평상시에는 진실로 의심이 없지마는, 임금이 병환이 나심을 기다려 반드시 변고를 낼 것이니, 내가 만약 그대를 부르거든 마땅히 빨리 와야만 될 것이다."

이때에 와서 민무구(閔無咎)가 정안군의 명령으로써 이숙번을 불러서 이르게 되었다. 이때 임금의 병이 매우 급하니 정안군과 익안군(益安君) 이방의(李芳毅)·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청원군(淸原君) 심종(沈淙)·상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와 이제(李濟) 등이 모두 근정문(勤政門) 밖의 서쪽 행랑(行廊)에서 모여 숙직(宿直)하였는데, 이날 신시(申時)에 이르러 민무질(閔無疾)이 정안군의 사저(私邸)에 나아가서 들어가 정안군의 부인(夫人)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하니, 부인이 급히 종 소근(小斤)을 불러 말하였다.

"네가 빨리 대궐에 나아가서 공(公)을 오시라고 청하라."

소근이 대답하였다.

"여러 군(君)들이 모두 한 청(廳)에 모여 있는데, 제가 장차 무슨 말로써 아뢰겠습니까?"

부인이 말하였다.

"네가 내 가슴과 배가 창졸히 아픔으로써 달려와 아뢴다고 하면 공(公)께서 마땅히 빨리 오실 것이다."

소근이 말을 이끌고 서쪽 행랑에 나아가서 자세히 사실대로 알리니, 의안군(義安君)이 청심환(淸心丸)과 소합환(蘇合丸) 등의 약을 주면서 말하였다.

"마땅히 빨리 가서 병을 치료하십시오."

정안군이 사저(私邸)로 즉시 돌아오니, 조금 후에 민무질(閔無疾)이 다시 와서 정안군 및 부인과 함께 세 사람이 서서 비밀히 한참 동안을 이야기하다가, 부인이 정안군의 옷을 잡고서 대궐에 나아가지 말기를 청하니, 정안군이 말하였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궐에 나아가지 않겠소! 더구나 여러 형들이 모두 대궐안에 있으니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가 없소. 만약 변고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나와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될 것이오."

이에 옷소매를 떨치며 나가니, 부인이 지게문 밖에까지 뒤따라 오면서 말하였다.

"조심하고 조심하세요."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이때 여러 왕자들이 거느린 시위패(侍衛牌)를 폐하게 한 것이 이미 10여 일이 되었는데, 다만 방번(芳蕃)만은 군사를 거느림이 그전과 같았다. 정안군이 처음에 군사를 폐하고 영중(營中)의 군기(軍器)를 모두 불에 태워버렸는데, 이때에 와서 부인이 몰래 병장기(兵仗器)를 준비하여 변고에 대응(對應)할 계책을 하였던 것이다. 이무(李茂)는 본디부터 중립(中立)하려는 계획이 있어 비밀히 남은 등의 모의(謀議)를 일찍이 정안군에게 알리더니, 이때에 와서 민무질을 따라와서 정안군을 뵈옵고 조금 후에 먼저 갔다. 이무는 무질의 가까운 인척(姻戚)이었고, 죽성군(竹城君) 박포(朴苞)도 또 그 사이를 왕래하면서 저쪽의 동정(動靜)을 몰래 정탐하였다. 이에 정안군은 민무구에게 명령하여 이숙번으로 하여금 병갑(兵甲)을 준비하여 본저(本邸)의 문 앞에 있는 신극례(辛克禮)의 집에 유숙하면서 변고를 기다리게 하고는, 그제야 대궐에 나아가서 서쪽 행랑(行廊)에 들어가서 직숙(直宿)하였다. 여러 군(君)들은 모두 말을 남겨 두지 않았으나, 홀로 정안군만은 소근을 시켜 서쪽 행랑 뒤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다. 방번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정안군이 그를 부르니, 방번이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리다가 대답하지 않고 들어갔다. 밤 초경(初更)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안으로부터 나와서 말하였다.

"임금께서 병이 위급하여 병을 피하고자 하니, 여러 왕자들은 빨리 안으로 들어오되 종자(從者)는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오."

화(和)·종(淙)·제(濟)가 먼저 나가서 뜰에 서고, 정안군은 익안군(益安君)·회안군(懷安君)·상당군(上黨君) 등 여러 군(君)들과 더불어 지게문 밖에 잠시 서서 있다가, 비밀히 말하기를,

"옛 제도에 궁중(宮中)의 여러 문에서는 밤에는 반드시 등불을 밝혔는데, 지금 보니 궁문에 등불이 없다."

하면서, 더욱 의심하였다. 화(和)와 제(濟)·종(淙)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으나, 정안군은 배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서쪽 행랑 문밖으로 나와서 뒷간에 들어가 앉아서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는데, 익안군과 회안군 등이 달려나오면서 정안군을 두 번이나 부르니, 정안군이 말하기를,

"여러 형님들이 어찌 큰소리로 부르는가?"

하고, 이에 또 서서 양쪽 소매로써 치면서 말하였다.

"형세가 하는 수가 없이 되었다."

이에 즉시 말을 달려 궁성(宮城)의 서문으로 나가니 익안군·회안군·상당군이 모두 달아나는데, 다만 상당군만은 능히 정안군의 말을 따라오고 익안군과 회안군은 혹은 넘어지기도 하였다. 정안군이 마천목(馬天牧)을 시켜 방번을 불러 말하였다.

"나와서 나를 따르기를 바란다. 그 종말에는 저들이 너도 보전해 주지 않을 것이다."

방번이 안 행랑 방에 누웠다가, 마천목을 보고 일어나 앉아서 이 말을 다 듣고는 도로 들어가 누웠다. 방번의 겸종(傔從)은 모두 불량(不良)한 무리들로서 다만 활 쏘고 말 타기만 힘쓸 뿐이며, 또한 망령되이 세자(世子)의 자리를 옮기려고 꾀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느날 방번에게 일렀다.

"우리들이 이미 중궁(中宮)에 연줄이 있어 공(公)으로 하여금 이방석(李芳碩)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 교명(敎命)이 장차 이르게 될 것이니, 청하건대 나가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방번이 이 말을 믿고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를 비웃었다. 정안군은 그들이 서로 용납하지 못한 줄을 알고 있었던 까닭으로 방번을 나오라고 불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정안군이 본저 동구(本邸洞口)의 군영(軍營) 앞길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이숙번을 부르니, 이숙번이 장사(壯士)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갑옷 차림으로 나왔으며, 익안군·상당군·회안군 부자(父子)도 또한 말을 타고 있었다. 또 이거이(李居易)·조영무(趙英茂)·신극례(辛克禮)·서익(徐益)·문빈(文彬)·심귀령(沈龜齡)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정안군에게 진심으로 붙좇는 사람인데, 이때에 이르러 민무구·민무질과 더불어 모두 모였으나, 기병(騎兵)은 겨우 10명뿐이고 보졸(步卒)은 겨우 9명뿐이었다. 이에 부인이 준비해 둔 철창(鐵槍)을 내어 그 절반을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여러 군(君)의 종자(從者)들과 각 사람의 노복(奴僕)이 10여 명인데 모두 막대기를 쥐었으되, 홀로 소근만이 칼을 쥐었다. 정안군이 달려서 둑소(纛所)[81]의 북쪽 길에 이르러 이숙번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어찌하면 되겠는가?"

숙번이 대답하였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호(軍號) 【방언(方言)에 말마기[言的]라 한다.】 를 내리기를 청합니다."

정안군이 산성(山城)이란 두 글자로써 명하고 삼군부(三軍府)의 문앞에 이르러 천명(天命)을 기다리었다.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光化門)으로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정예(精銳)한 기병(騎兵)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이 신(神)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정안군이 또 숙번을 불러 말하였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숙번이 대답하였다.

"간당(姦黨)이 모인 장소에 이르러 군사로써 포위하고 불을 질러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문득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밤이 이경(二更)인데, 송현(松峴)을 지나다가 숙번이 말을 달려 고하였다.

"이것이 소동(小洞)이니 곧 남은 첩의 집입니다."

정안군이 말을 멈추고 먼저 보졸(步卒)과 소근(小斤) 등 10인으로 하여금 그 집을 포위하게 하니, 안장 갖춘 말 두서너 필이 그 문 밖에 있고, 노복(奴僕)은 모두 잠들었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은 등불을 밝히고 모여 앉아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근 등이 지게문을 엿보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화살 세 개가 잇달아 지붕 기와에 떨어져서 소리가 났다. 소근 등이 도로 동구(洞口)로 나와서 화살이 어디서 왔는가를 물으니, 숙번이 말하였다.

"내가 쏜 화살이다."

소근 등으로 하여금 도로 들어가 그 집을 포위하고 그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하니, 정도전 등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으나, 심효생·이근(李懃)·장지화 등은 모두 살해를 당하였다. 도전이 도망하여 그 이웃의 전 판사(判事) 민부(閔富)의 집으로 들어가니, 민부가 아뢰었다.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정안군은 그 사람이 도전인 줄을 알고 이에 소근 등 4인을 시켜 잡게 하였더니, 도전이 침실(寢室) 안에 숨어 있는지라, 소근 등이 그를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하니, 도전이 자그만한 칼을 가지고 걸음을 걷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 등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니, 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 밖에 나와서 말하였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소근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의 말 앞으로 가니, 도전이 말하였다.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예전이란 것은 임신년을 가리킨 것이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不足)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이에 그를 목 베게 하였다. 처음에 정안군의 부인이 자기 스스로 정안군이 서서 있는 곳까지 이르러 그와 화패(禍敗)를 같이하고자 하여 걸어서 나오니, 정안군의 휘하사(麾下士) 최광대(崔廣大) 등이 극력으로 간(諫)하여 이를 말리었으나, 종 김부개(金夫介)가 도전의 갓과 칼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부인이 그제야 돌아왔다. 도전이 아들 4인이 있었는데, 정유(鄭游)와 정영(鄭泳)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급함을 구원하러 가다가 유병(遊兵)에게 살해되고, 정담(鄭湛)은 집에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다. 처음에 담(湛)이 아버지에게 고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정안군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전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고려(高麗)를 배반했는데 지금 또 이편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홀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이무(李茂)가 문밖으로 나오다가 빗나가는 화살을 맞고서 말하였다.

"나는 이무이다."

보졸(步卒)이 이무를 죽이려고 하니, 정안군이 말하였다.

"죽이지 말라."

이에 말을 그에게 주었다. 남은은 반인(伴人) 하경(河景)·최운(崔沄) 등을 거느리고 도망해 숨고, 이직(李稷)은 지붕에 올라가서 거짓으로 노복(奴僕)이 되어 불을 끄는 시늉을 하여 이내 도망해 빠져 나갈 수 있었다. 대궐 안에 있던 사람이 송현(松峴)에 불꽃이 하늘에 가득한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임금에게 고하니, 궁중(宮中)의 호위하는 군사들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고함을 쳤다. 이천우(李天祐)는 자기 집에서 반인(伴人) 2명을 거느리고 대궐로 가는데, 마천목(馬天牧)이 이를 바라보고 안국방(安國坊) 동구(洞口)에까지 뒤쫓아 가서 말하였다.

"천우 영공(天祐令公)이 아닙니까?"

천우가 대답하지 않으므로, 천목(天牧)이 말하였다.

"영공(令公)께서 대답하지 않고 가신다면 화살이 두렵습니다."

천우가 말하였다.

"그대가 마 사직(馬司直)이 아닌가?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가?"

천목이 대답하였다.

"정안군께서 여러 왕자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천우가 달려서 정안군에게 나아가서는 또 말하였다.

"이번에 이 일을 일으키면서 어찌 일찍이 나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정안군이 박포(朴苞)와 민무질을 보내어 좌정승 조준을 불러 오게 하니, 조준이 망설이면서 점(占)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거취(去就)를 점치게 하고는, 즉시 나오지 않으므로, 또 숙번으로 하여금 그를 재촉하고서, 정안군이 중로(中路)에까지 나와서 맞이하였다. 조준이 이미 우정승 김사형과 더불어 오는데 갑옷을 입은 반인(伴人)들이 많이 따라왔다. 가회방(嘉會坊) 동구(洞口)의 다리에 이르니, 보졸(步卒)이 무기(武器)로써 파수(把守)해 막으며 말하였다.

"다만 두 정승만 들어가십시오."

조준과 김사형 등이 말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지나가매, 정안군이 말하였다.

"경 등은 어찌 이씨(李氏)의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는가?"

조준과 김사형 등이 몹씨 두려워하면서 말 앞에 꿇어앉았다. 이에 정안군이 말하였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꼭 세우려고 하여 나의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을 제거하고자 하므로, 내가 이로써 약자(弱者)가 선수(先手)를 쓴 것이다."

조준 등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였다.

"저들의 하는 짓을 우리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이같은 큰일은 마땅히 국가에 알려야만 될 것이나, 오늘날의 일은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알리지 못하였으니, 공(公) 등은 마땅히 빨리 합좌(合坐)[82]해야 될 것이오."

노석주(盧石柱)와 변중량(卞仲良)이 대궐 안에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와 우승지 김육(金陸)을 그들의 집에 가서 불러 오게 하니, 문화(文和)가 달려와 나아가서 물었다.

"임금의 옥체(玉體)가 어떠하신가?"

석주(石柱)가 말하였다.

"임금의 병환이 위독하므로 오늘 밤 자시(子時)에 병을 피하여 서쪽 작은 양정(涼亭)으로 거처를 옮기고자 한다."

이에 여러 승지들이 모두 근정문(勤政門)으로 나아갔다. 도진무(都鎭撫) 박위(朴葳)가 근정문에 서서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군사가 왔는가? 안 왔는가?"

문화가 물었다.

"이때에 임금이 거처를 피하여 옮기는가? 어찌 피리를 부는가?"

박위가 말하였다.

"어찌 임금이 거처를 피하여 옮긴다고 하겠는가? 봉화백(奉化伯)과 의성군(宜城君)의 모인 곳에 많은 군마(軍馬)가 포위하고 불을 지른 까닭으로 피리를 분 것뿐이다."

이보다 먼저 정안군이 숙번에게 이르기를,

"세력으로는 대적할 수 없으니, 정도전과 남은 등을 목 벤 후에 우리 형제 4, 5인이 삼군부(三軍府)의 문 앞에 말을 멈추고 나라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아서 인심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한결같이 쭉 따른다면 우리들은 살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정안군이 돌아와 삼군부(三軍府)의 문 앞에 이르러 말을 멈추니, 밤이 벌써 사경(四更)이나 되었는데, 평소에 주의(注意)하던 사람들이 서로 잇달아 와서 모였다. 찬성(贊成) 유만수(柳曼殊)가 아들 유원지(柳原之)를 거느리고 말 앞에 와서 배알(拜謁)하니, 정안군이 말하였다.

"무슨 이유로 왔는가?"

만수(曼殊)가 말하였다.

"듣건대, 임금께서 장차 신(臣)의 집으로 옮겨 거처하려 하신다더니 지금 옮겨 거처하지 않으셨으며, 또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와서 시위(侍衛)하고자 한 것입니다."

정안군은 말했다.

"갑옷을 입고 왔는가?"

만수가 말하였다.

"입지 않았습니다."

즉시 그에게 갑옷을 주고 말 뒤에 서게 하니, 천우가 아뢰었다.

"만수는 곧 정도전과 남은의 무리이니 죽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옳지 않다."

이에 회안군과 천우 등이 강요하여 말하였다.

"이같이 창졸한 즈음에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저지(沮止)시킬 수 없습니다."

정안군이 숙번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형세가 그만두기가 어렵겠다."

하면서, 그 죄를 헤아리게 하니, 만수가 즉시 말에서 내려 정안군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서 말하였다.

"내가 마땅히 자백(自白)하겠습니다."

정안군이 종자(從者)를 시켜 말고삐를 놓게 하였으나, 만수는 오히려 단단히 잡고 놓지 않으므로, 소근(小斤)이 작은 칼로써 턱 밑을 찌르니, 만수가 고개를 쳐들고 거꾸러지는지라, 이에 목을 베었다. 정안군이 원지(原之)에게 이르렀다.

"너는 죄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회안군이 뒤따라 가서 예빈시(禮賓寺) 문 앞에서 목을 베었다. 조준과 김사형 등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들어가 앉았는데, 정안군은 생각하기를, 방석 등이 만약 시위(侍衛)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궁문(宮門) 밖에 나와서 교전(交戰)한다면, 우리 군사가 적으므로 형세가 장차 물러갈 것인데, 만약 조금 물러가게 된다면 합좌(合坐)한 여러 정승(政丞)들이 마땅히 저편 군사의 뒤에 있게 될 것이므로, 혹시 저편을 따를까 여겨, 사람을 시켜 도당(都堂)에 말하였다.

"우리 형제가 노상(路上)에 있는데, 여러 정승들이 도당(都堂)에 들어가 앉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마땅히 즉시 운종가(雲從街) 위에 옮겨야 될 것이다."

마침내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백관(百官)들을 재촉해 모이게 하였다. 친군위 도진무(親軍衛都鎭撫) 조온(趙溫)도 또한 대궐 안에 숙직(宿直)하고 있었는데, 정안군이 사람을 시켜 조온과 박위(朴葳)를 부르니, 조온은 명령을 듣고 즉시 휘하(麾下)의 갑사(甲士)·패두(牌頭) 등을 거느리고 나와서 말 앞에서 배알(拜謁)하고, 박위는 한참 동안 응하지 않다가 마지 못하여 칼을 차고 나오니 정안군이 온화한 말로써 대접하였다. 박위는 군대의 세력이 약한 것을 보고 이에 고하였다.

"모든 처분(處分)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의 뜻은 날이 밝으면 군사의 약한 형세가 나타나서 여러 사람의 마음이 붙좇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정안군이 그를 도당(都堂)으로 가게 했는데, 회안군이 정안군에게 청하여 사람을 시켜 목 베게 하였다. 정안군이 조온에게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갑사(甲士)를 다 나오게 하니, 조온이 즉시 패두(牌頭) 등을 보내어 대궐에 들어가서 숙위하는 갑사를 다 나오게 하였다. 이에 근정전 이남의 갑사는 다 나와서 갑옷을 벗고 무기(武器)를 버리니, 명하여 각기 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처음에 이무(李茂)가 군대의 세력이 약한 것을 보고는 거짓으로 정신이 흐리멍덩하다고 일컬으면서 사람을 시켜 부축하고서 정안군에게 아뢰었다.

"화살 맞은 곳이 매우 아프니 도당(都堂)의 아방(兒房)[83]에 나아가서 휴식하기를 청합니다."

정안군은 말하였다.

"좋다."

조금 후에 이무는 박위가 참형(斬刑)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도로 나왔다. 이튿날 닭이 울 적에 임금이 노석주를 불러 대궐로 들어오게 하고, 이른 새벽에 또 이문화를 부르니, 문화가 서쪽 양정(涼亭)으로 나아갔는데, 세자와 방번·제(濟)·화(和)·양우(良祐)·종(淙)과 추상(樞相)[84]인 장사길(張思吉)·장담(張湛)·정신의(鄭臣義) 등이 모두 벌써 대궐에 들어와 있었다. 여러 군(君)과 추상(樞相), 대소내관(大小內官)들과 아래로 내노(內奴)에 이르기까지 모두 갑옷을 입고 칼을 가졌는데, 다만 조순(曹恂)과 김육(金陸)·노석주·변중량만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석주가 문화에게 교지(敎旨)를 전하여,

"교서(敎書)를 지으라."

하니, 문화가 사양하기를 청하므로, 석주가 말하였다.

"한산군(韓山君)[85]이 지은 주삼원수교서(誅三元帥敎書)[86]의 뜻을 모방하여 지으면 된다."

문화가 말하였다.

"그대가 이를 아는가?"

석주가 말하였다.

"적을 부순 공로는 한 때에 혹 있을 수 있지마는, 임금을 무시한 마음은 만세(萬世)에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문사(文詞)이다."

문화가 말하였다.

"지금의 죄인의 괴수(魁首)는 누구인가?"

석주가 말하기를,

"죄인의 괴수는 다시 임금에게 품신(稟申)하겠으니 먼저 글의 초안(草案)부터 잡으라."

하면서, 독촉하기를 급하게 하였다. 문화가 붓을 잡고 쓰면서 말하였다.

"그대도 글을 지을 줄 아니, 친히 품신(稟申)하려는 뜻으로써 지으면 내가 마땅히 이를 쓰겠다."

이에 석주가 글을 지었다.

"아무아무[某某] 등이 몰래 반역(反逆)을 도모하여 개국 원훈(開國元勳)을 해치고자 했는데, 아무아무 등이 그 계획을 누설시켜서 잡히어 모두 죽음을 당했지만, 그 협박에 따라 반역한 무리들은 모두 용서하고 문죄(問罪)하지 않는다."

초안이 작성되자 석주가 초안을 가지고 들어가서 아뢰니, 임금이 말하였다.

"잠정적으로 두 정승이 오기를 기다려 의논하여 이를 반포(頒布)하라."

조금 후에 도당(都堂)에서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도당(徒黨)을 결합(結合)하고 비밀히 모의하여 우리의 종친 원훈(宗親元勳)을 해치고 우리 국가를 어지럽게 하고자 했으므로, 신 등은 일이 급박하여 미처 아뢰지 못하였으나 이미 주륙(誅戮) 제거되었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놀라지 마옵소서."

이제(李濟)가 그때 임금의 곁에 있다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여러 왕자들이 군사를 일으켜 함께 남은 등을 목 베었으니, 화(禍)가 장차 신에게 미칠 것입니다. 청하옵건대, 시위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공격하겠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화(禍)가 어찌 너에게 미치겠는가?"

화(和)도 또한 말리며 말하였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이에 이제가 칼을 빼어 노려보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화(和)는 편안히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이때 영안군(永安君)이 임금을 위하여 병을 빌어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齋戒)를 드리고 있었는데,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는 몰래 종 하나를 거느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나와 걸어서 풍양(豐壤)에 이르러 김인귀(金仁貴)의 집에 숨어 있었다. 정안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찾아서 맞이하여 궁성(宮城) 남문 밖에 이르니, 해가 장차 기울어질 때였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임금에게 청하여 정안군을 세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정안군이 굳이 사양하면서 영안군을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영안군이 말하였다.

"당초부터 의리를 수립(樹立)하여 나라를 세워서 오늘날의 일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이것이 정안군의 공로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 없다."

이에 정안군이 사양하기를 더욱 굳게 하면서 말하였다.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적장자(嫡長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안군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처리함이 있겠다."

이에 정안군이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소(疏)를 올리었다.

"적자(嫡子)를 세자로 세우면서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인데, 전하(殿下)께서 장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웠으며, 도전 등이 세자(世子)를 감싸고서 여러 왕자들을 해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처지에 있었으나,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社)의 신령에 힘입게 되어 난신(亂臣)이 형벌에 복종하고 참형(斬刑)을 당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적장자(嫡長子)인 영안군(永安君)을 세워 세자로 삼게 하소서."

소(疏)가 올라가매, 문화가 이를 읽기를 마치었는데, 세자도 또한 임금의 곁에 있었다. 임금이 한참 만에 말하였다.

"모두 내 아들이니 어찌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방석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너에게는 편리하게 되었다."

하고는, 즉시 윤허를 내리었다. 대궐 안에 있던 정승들이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문화가 대답하였다.

"세자를 바꾸는 일입니다."

석주(石柱)가 교초(敎草)를 봉하여 문화로 하여금 서명(署名)하게 하니, 문화가 받지 않으므로, 다음에 화(和)에게 청하였으나 또한 받지 않으므로, 다음에 자리에 있던 여러 정승들에게 청하여도 모두 받지 아니하였다. 이에 문화가 말하였다.

"그대가 지은 글을 어찌 자기가 서명(署名)하지 않는가?"

석주는,

"좋다."

하면서, 이에 서명하고 이를 소매 속에 넣었다. 조금 후에 석주가 대궐에 들어가 명령을 받아 나오면서 말하였다.

"교서(敎書)를 고쳐 써서 빨리 내리라."

문화가 말하였다.

"어떻게 이를 고치겠는가?"

석주가 말하였다.

"개국 공신(開國功臣) 정도전과 남은 등이 몰래 반역(反逆)을 도모하여 왕자와 종실(宗室)들을 해치려고 꾀하다가, 지금 이미 그 계획이 누설되어, 공이 죄를 가리울 수가 없으므로, 이미 모두 살육(殺戮)되었으니, 그 협박에 따라 행동한 당여(黨與)는 죄를 다스리지 말 것입니다."

변중량(卞仲良)으로 하여금 이를 써서 올리니, 임금이 시녀(侍女)로 하여금 부축해 일어나서 압서(押署)하기를 마치자, 돌아와 누웠는데, 병이 심하여 토하고자 하였으나 토하지 못하며 말하였다.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정안군이 군기 직장(軍器直長) 김겸(金謙)을 시켜 무기고(武器庫)를 열고 갑옷과 창을 내어 화통군(火㷁軍) 1백여 명에게 주니, 군대의 형세가 조금 떨치었다. 갑사(甲士) 신용봉(申龍鳳)이 대궐에 들어가서 정안군의 말을 전하였다.

"흥안군(興安君)과 무안군(撫安君)은 각기 사제(私第)로 돌아갔는데, 의안군(義安君) 이하의 왕자는 어찌 나오지 않는가?"

여러 왕자들이 서로 눈짓하면서 말하지 아니하므로, 다시 독촉하니, 화(和) 이하의 왕자들이 모두 나오다가, 종(淙)은 궁성(宮城)의 수문(水門)을 거쳐 도망해 나가고, 정신의(鄭臣義)만이 오래 머무르므로 이를 재촉하니, 그제야 나왔다. 도당(都堂)에서 방석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미 주안(奏案)을 윤가(允可)했으니, 나가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방석이 울면서 하직하니, 현빈(賢嬪)이 옷자락을 당기면서 통곡하므로, 방석이 옷을 떨치고서 나왔다. 처음에 방석을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기로 의논했는데, 방석이 궁성(宮城)의 서문을 나가니, 이거이(李居易)·이백경(李伯卿)·조박(趙璞) 등이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도중(道中)에서 죽이게 하였다. 도당(都堂)에서 또 방번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방번에게 일렀다.

"세자는 끝났지마는 너는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방번이 장차 궁성(宮城)의 남문을 나가려 하는데, 정안군이 말에서 내려 문안에 들어와 손을 이끌면서 말하였다.

"남은 등이 이미 우리 무리를 제거하게 된다면 너도 또한 마침내 면할 수가 없는 까닭으로, 내가 너를 부른 것인데, 너는 어찌 따르지 않았는가? 지금 비록 외방에 나가더라도 얼마 안 되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잘 가거라. 잘 가거라."

장차 통진(通津)에 안치(安置)하려고 하여 양화도(楊花渡)를 건너 도승관(渡丞館)에서 유숙하고 있는데, 방간(芳幹)이 이백경(李伯卿) 등과 더불어 또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방번을 죽이게 하였다. 정안군이 방석과 방번이 죽었단 말을 듣고 비밀히 이숙번에게 일렀다.

"유만수(柳曼殊)도 내가 오히려 그 생명을 보전하고자 했는데, 하물며 형제겠는가? 이거이(李居易) 부자(父子)가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고서 도당(都堂)에게만 의논하여 나의 동기(同氣)를 살해했는데,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까닭으로 내가 속으로 견디어 참으면서 감히 성낸 기색을 보이지 못하니, 그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

군사들이 변중량·노석주와 남지(南贄) 등을 잡아 가지고 나오니, 변중량이 정안군을 우러러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공(公)에게 뜻을 기울이고 있은 지가 지금 벌써 두서너 해 되었습니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저 입도 또한 고기덩이다."

또 남지는 남은의 아우로서 이때 우상 절도사(右廂節度使)가 되었는데, 모두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가 뒤에 길에서 목을 베었다. 이제(李濟)가 나오니, 정안군이 이제에게 일렀다.

"본가(本家)로 돌아가라."

임금께서 마침내 영안군(永安君)을 책명(策命)하여 세자로 삼고 교지(敎旨)를 내리었다.

"적자(嫡子)를 세우되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이며, 종자(宗子)는 성(城)과 같으니 과인(寡人)의 기대(期待)이다. 다만 그대의 아버지인 내가 일찍이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장자(長子)를 버리고 유자(幼子)를 세워 이에 방석(芳碩)으로써 세자로 삼았으니, 이 일은 다만 내가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일 뿐만 아니라, 정도전·남은 등도 그 책임을 사피(辭避)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에 만약 초(楚)나라에서 작은 아들을 사랑했던 경계로써[87] 상도(常道)에 의거하여 조정에서 간(諫)했더라면, 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정도전 같은 무리는 다만 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세자로 세우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였다. 요전에 정도전·남은·심효생·장지화 등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국가의 근본을 요란시켰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社)의 도움에 힘입어 죄인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고 왕실(王室)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방석(芳碩)은 화(禍)의 근본이니 국도(國都)에 남겨 둘 수가 없으므로 동쪽 변방으로 내쫓게 하였다. 내가 이미 전일의 과실을 뉘우치고, 또 백관(百官)들의 청으로 인하여 이에 너를 세워 왕세자로 삼으니, 그 덕을 능히 밝혀서 너를 낳은 분에게 욕되게 함이 없도록 하고, 그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사직(社稷)을 진무(鎭撫)하라."

이에 문화와 김육(金陸)에게 명하여 나가서 세자를 알현(謁見)하게 하니, 세자가 문화를 불러 말하였다.

"대궐 안에 시위(侍衛)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빨리 대궐 안으로 도로 들어 가라."

문화가 즉시 도로 들어가니, 조순(曺恂)이 세자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시녀(侍女)와 내노(內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모두 밖으로 나가게 하라."

문화가 또 나오니, 세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 나오는가?"

문화가 그 사유를 상세히 아뢰므로, 세자가 말하였다.

"그대를 이르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빨리 도로 들어가 시위(侍衛)하라."

또 상장군 이부(李敷)로 하여금 대궐 안에 들어가 시위(侍衛)하게 하니, 임금이 조순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갓과 안장 갖춘 말을 내려 주었다. 세자가 대궐 안으로 들어 갔다. 이제(李濟)가 사제(私第)에 돌아가니, 옹주(翁主)가 이제에게 일렀다.

"내가 공(公)과 함께 정안군의 사저(私邸)에 간다면 반드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듣지 않더니, 저녁때에 군사들이 뒤따라 와서 그를 죽이었다. 정안군이 이 소식을 듣고 그제야 놀라서, 즉시 진무(鎭撫) 전흥(田興)을 불러서 말하였다.

"흥안군(興安君)이 죽었으니 노비가 반드시 장차 도망해 흩어질 것이다. 그대가 군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흥안군 집에 이르러 시체를 거두게 하고, 노비들에게 신칙하기를, ‘만약 도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후일에 반드시 중한 죄를 줄 것이다.’ 하라."

전흥이 그 집에 이르러 시비(侍婢)를 시켜 들어가 고하기를,

"놀라지 마시오! 나는 정안군의 진무(鎭撫)입니다."

하고는, 이에 시체를 염습(斂襲)하는 모든 일을 한결같이 정안군의 명령대로 하니, 옹주(翁主)가 감격하여 울었다. 남은은 도망하여 성(城)의 수문(水門)을 나가서 성밖의 포막(圃幕)에 숨으니, 최운(崔沄)·하경(河景) 등이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남은이 순군옥(巡軍獄)에 나아가고자 하니, 최운 등이 이를 말리므로, 남은이 말하였다.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받았던 까닭으로 참형(斬刑)을 당하였지마는,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이에 스스로 순군문(巡軍門)밖에 이르렀다가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전하[88]께서 왕위에 오르매, 하경과 최운은 섬기는 주인에 충성했다는 이유로써 모두 발탁 임용하게 되었다. 정안군이 여러 왕자들과 함께 감순청(監巡廳) 앞에 장막을 치고 3일 동안을 모여서 숙직하고, 그 후에는 삼군부(三軍府)에 들어가 숙직하다가, 세자가 내선(內禪)096) 을 받은 후에 각기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정도전·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의 졸기[편집]

○道傳字宗之, 號三峯, 安東奉化人, 刑部尙書云敬之子。 前朝恭愍庚子, 中成均試, 壬寅, 中同進士, 累遷至通禮門祗(侯)〔候〕。 丙午, 連喪父母, 廬墓終制。 辛亥, 召拜太常博士。 恭愍親享宗廟, 道傳按圖製樂器。 遷禮儀正郞、藝文應敎, 進成均司藝。 甲寅, 恭愍薨, 乙卯, 殘元使者至境上, 道傳曰: “先王決策事明, 今迎元使不可。 且元使欲加我罪名而赦之, 其可迎乎?” 時宰不聽, 道傳强言之, 見怒貶會津。 甲子, 賀聖節使鄭夢周, 擧爲書狀官赴京, 還拜成均司成。 丁卯, 乞郡爲南陽府使。 戊辰, 上當國, 召拜大司成, 屢獻計, 陞密直提學、知貢擧。 爲十學都提調, 敎詳明太一諸算法, 移藝文提學, 作《胗脈圖訣〔診脈圖訣〕》。 己巳, 與趙浚等, 請革私田。 恭讓立, 陞三司右使, 以中興功臣封忠義君。 庚午, 陞政堂文學。 尹彛、李初誣罔之獄作, 道傳力主其議, 鄭夢周言於上, 寢之。 道傳以計稟使如京。 辛未, 上言刑賞得失, 恭讓不能容, 貶羅州。 壬申, 召還, 與南誾等定計推戴。 上卽位, 策勳爲一等, 加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 又以計稟使如京, 陞判三司事、兼判三軍府事。 爲三道都統使, 作《陣圖》、《蒐狩圖》、《經國典》、《經濟文鑑》。 又作樂歌, 有《夢金尺》、《受寶籙》、《文德》、《納氏》、《靖東方》等曲。 與鄭摠等, 修撰《高麗國史》。 封奉化伯, 階特進崇祿。 丙子, 同知貢擧, 始用初場講經之法。 丁丑, 宣撫東北面, 定州郡名, 築孔州城。 戊寅春, 還, 上迎勞以厚。 道傳天資聰敏, 自幼好學, 博覽群書, 議論該洽, 常以訓後生闢異端爲己任。 嘗窮居偃仰, 自謂有文武才。 從上至東北面, 道傳見號令明肅、卒伍整齊, 進而密言曰: “美哉此軍, 何事不可濟?” 上曰: “何謂也?” 道傳對曰: “謂擊倭寇于東南方耳。” 營前有老松一株, 道傳請留詩松上, 白而書之曰: “蒼茫歲月一株松, 生長靑山幾萬重。 好在他年相見否? 人間俯仰便陳蹤。” 及開國之際, 往往醉中微誦曰: “不是漢高用子房, 子房乃用漢高。” 凡可以贊襄者, 靡不謀之, 卒成大業, 誠爲上功。 然以量狹, 多忌且怯, 必欲害其勝己, 報其宿憾, 每勸上殺人立威, 上皆不聽。 所撰《高麗史》, 恭愍以後筆削, 多不以實, 識者非之。 初道傳師事韓山李穡, 與烏川鄭夢周、星山李崇仁爲友, 情好實深。 後欲納交趙浚, 讒毁三人, 以成仇怨。 又以外祖禹延妻父金戩, 嘗爲僧, 潛奸奴樹伊妻, 生一女, 是爲道傳外祖母。 禹玄寶子孫以戩姻族, 熟聞其說。 道傳當初除拜, 告身淹滯, 謂爲玄寶子孫, 揚說使然, 積其憤怨。 及其得志, 必欲陷玄寶一門, 釀成其罪, 陰嗾居正等, 殺其三子及崇仁等伍人。 乃與南誾等, 欲挾幼孼, 恣行己志, 謀害宗親, 身與三子, 俱及於死。 誾, 晋州宜寧人, 檢校侍中乙蕃之子。 恭愍甲寅, 中成均試, 僞朝庚申, 拜社稷壇直。 乙丑, 倭寇作耗三陟郡, 城小且危, 難其守, 誾自薦以行。 旣到郡, 寇猝至, 誾開城門, 率十餘騎突出擊之, 寇敗走。 事聞, 以司僕正召還。 戊辰, 從上至威化島, 與趙仁沃等, 獻回軍之議, 且密謀推戴, 以上嚴謹, 不敢發言。 旣還, 密言於殿下, 殿下戒以勿言。 己巳, 拜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 庚午, 陞密直副使。 壬申, 恭讓信讒疑忌, 事且不測, 殿下乃召誾, 令與素歸心者, 密議推戴。 及上卽位, 拜判中樞院事, 賜奮義佐命開國功臣之號。 累遷至參贊門下府事、兼判尙瑞寺事、右軍節制使。 丁丑, 封宜城君。 誾性豪邁無檢束, 自幼好奇計, 開國之際, 功在上列。 然以不學識闇, 贊成康氏奪嫡之計, 遂與道傳等, 圖擅國柄, 欲去宗親, 卒及於禍, 年四十五。 子四, 景壽、景祐、景福、景祉。 孝生, 順天富有人, 知錦州仁立之子。 僞朝庚申, 中成均試。 癸亥, 登乙科第二人, 由堂後積官至掌令。 以世居全州, 素歸心於上, 得與開國功臣之列。 自中丞出按慶尙, 陞中樞院副使。 又爲慶尙道都觀察使, 制造兵器, 人稱精巧。 官至藝文館大提學、富城君。 年五十。 子道源。 葳, 密陽人。 初仕恭愍, 以至僞朝, 歷仕中外, 見稱才能。 金海、晋州、雞林、永興, 皆其所歷。 屢擊倭寇, 國家知有將略, 累遷至密直副使。 出鎭合浦, 領舟師攻破對馬島。 及上卽位, 朴仲質等在逮辭及, 臺諫連章請置極刑, 上營救俾全。 陞參贊門下府事, 命典禁軍。 至是, 諸王子召之, 率甲士出闕門遲回, 以至於死。 子耆。 曼殊, 文化人, 右副代言總子。 恭愍朝, 爲寶馬陪行首, 癸卯, 拜將軍, 累遷至密直副使。 丁巳, 從上豐海道, 擊倭寇, 戊辰, 從上至威化島, 與議回軍, 拜知門下, 稱爲回軍功臣。 庚午, 拜門下評理, 辛未, 兼鷹揚軍上護軍。 及上卽位, 稱爲原從功臣, 拜商議門下府事。 及是, 率其子源之至, 罔知進退, 皆及於死。 子三人, 長卽源之, 次隱之、衍之。

정도전의 자(字)는 종지(宗之), 호(號)는 삼봉(三峰)이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봉화(奉化)이니, 형부 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경자년[89]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을 짓고 상제(喪制)를 마치니,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宗廟)에 제향(祭享)하니, 도전이 도(圖)를 상고하여 악기(樂器)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禮儀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로 옮겨서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승진되었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훙(薨)하여, 을묘년에 북원(北元)의 사자(使者)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先王)[90]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明)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元)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罪名)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宰相)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會津)으로 폄직(貶職)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賀聖節使) 정몽주(鄭夢周)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國政)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密直提學)과 지공거(知貢擧)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十學都提調)가 되어 상명(詳明)·태일(太一) 등 여러 산법(算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겨서 《진맥도결(診脈圖訣)》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私田)을 혁파(革罷)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中興功臣)으로써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승진되고, 윤이(尹彝)·이초(李初)의 무망(誣罔)한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賞與)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羅州)로 폄직(貶職)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推戴)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功勳)을 책정(策定)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判三司事兼判三軍府事)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가 되어 《진도(陣圖)》·《수수도(蒐狩圖)》·《경국전(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제작하고, 또 악가(樂歌)를 지었으니,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문덕(文德)·납씨(納氏)·정동방(靖東方) 등의 곡(曲)이 있었다. 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수찬(修撰)하였다. 봉화백(奉化伯)으로 봉해지고, 관계(官階)는 특별히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初場)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宣撫)하여 주군(州郡)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孔州城)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該博)하였으며, 항상 후생(後生)을 교훈하고 이단(異端)[91]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文武)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整齊)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軍營)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詩)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개국(開國)할 즈음에 왕왕 취중(醉中)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漢) 고조(高祖)가 장자방(張子房)[92]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撰述)한 《고려국사(高麗國史)》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加筆)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와 성산(星山) 이숭인(李崇仁)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趙浚)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外祖父) 우연(禹延)의 처부(妻父)인 김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外祖母)이었는데, 우현보(禹玄寶)의 자손이 김진(金戩)의 인척(姻戚)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遲滯)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居正) 등을 사주(使嗾)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남은은 본관이 진주(晉州) 의령(宜寧)이며 검교 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의 아들이다. 공민왕갑인년[93]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폐왕(廢王) 경신년에 사직단 직(社稷壇直)에 임명되었다. 을축년에 왜구(倭寇)가 삼척군(三陟郡)에 침구(侵寇)하니, 성이 작고 또한 위태하므로 지키기가 어려웠는데, 남은이 자천하여 가게 되었다. 이에 삼척군에 도착하니, 왜구가 창졸히 이르는지라, 남은이 성문을 열고 기병(騎兵) 10여 명을 거느리고 졸지에 쑥 나가서 공격하니, 왜구가 패하여 달아났다. 이 사실이 위에 알려져서 사복 정(司僕正)의 관직으로써 불려 돌아왔다. 무진년에 임금을 따라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군사를 돌이키려는 의논을 올렸으며, 또 비밀히 임금으로 추대(推戴)하기를 모의하였으나, 임금께서 엄숙하고 근신하신 이유로써 감히 말을 내지 못하였다. 이미 돌아와서는 비밀히 전하(殿下)에게 말하니 전하께서 말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기사년에 응양군 상호군 겸 군부 판서(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에 임명되고, 경오년에 공양왕이 참소를 믿고 의심하고 시기하여 일이 또한 예측할 수가 없게 되니, 전하께서 이에 남은을 불러 평소부터 진심으로 붙좇는 사람들과 더불어 비밀히 임금을 추대(推戴)하기를 의논하게 하였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되고 분의 좌명 개국 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의 칭호를 내리었다.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참찬문하부사 겸 판상서사사 우군 절도사(參贊門下府事兼判尙瑞司事右軍節度使)에까지 이르렀다. 정축년에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다. 남은은 천성이 호탕하고 비범하여 검속(檢束)이 없었으며 어릴 때부터 기이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개국(開國)할 즈음에는 공이 상등의 반열(班列)에 있었지마는, 그러나 배운 것이 없어 식견이 우매한 때문에 강씨(康氏)가 적통(嫡統)을 빼앗으려는 계책을 찬성하여서, 드디어 정도전 등과 더불어 국권(國權)을 마음대로 하여 종친(宗親)을 제거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화(禍)에 미치어 죽게 되니, 나이 45세였다. 아들은 네 사람으로 남경수(南景壽)·남경우(南景祐)·남경복(南景福)·남경지(南景祉)이다.

심효생(沈孝生)은 본관이 순천(順天) 부유(富有)이며 지금주(知錦州) 심인립(沈仁立)의 아들이다. 폐왕(廢王) 경신년[94]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계해년에 을과(乙科)에 제 2인에 올라 당후관(堂後官)[95]으로부터 관직을 오랫동안 하여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대대로 전주(全州)에 거주했던 때문에 평소부터 임금에게 마음을 두어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班列)에 참여하게 되었다. 중승(中丞)에서 외직(外職)으로 나가 경상도 안무사(慶尙道按撫使)가 되었다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승진됐으며, 또 경상도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어 병기(兵器)를 제조하니, 사람들이 그 정교함을 칭찬하였다.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부성군(富城君)에 이르고, 나이는 50세였다. 아들은 심도원(沈道源)이다.

박위(朴葳)는 본관이 밀양(密陽)이다. 처음에 공민왕에게 벼슬하여 폐왕(廢王) 때까지 이르렀는데, 중앙과 지방 관직에 두루 벼슬하여 재능(才能)으로써 칭찬을 받았으며, 김해(金海)·진주(晉州)·계림(鷄林)·영흥(永興)이 모두 그의 지내온 고을이다. 여러 번 왜구(倭寇)를 공격했으므로 국가에서 그가 장수의 지략(智略)이 있음을 알고 여러 번 천직(遷職)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으며, 나가 합포(合浦)를 지켰는데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서 대마도(對馬島)를 쳐부수었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박중질(朴仲質) 등이 체포되어 공사(供辭)가 그에게 관련되므로, 대간(臺諫)이 연달아 소(疏)를 올려 극형(極刑)에 처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변명하여 구하므로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승진되어 금군(禁軍)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여러 왕자들이 그를 부르니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대궐 문에 나가서 어정거리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은 박기(朴耆)이다.

유만수(柳曼殊)는 본관이 문화(文化)로 우부대언(右副代言) 유총(柳總)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보마배행수(寶馬陪行首)가 되었으며, 계묘년에 장군에 임명되어 여러 번 천직(遷職)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정사년에 임금을 따라 풍해도(豊海道)에서 왜구(倭寇)를 쳤다. 무진년에 임금을 따라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다가, 군사를 돌이키자는 의논에 참여하여 돌아와서 지문하(知門下)에 임명되니 회군 공신(回軍功臣)이라 일컬어졌다. 경오년에 문하 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고 신미년에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 겸직되었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 일컫고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아들 유원지(柳源之)를 거느리고 이르렀으나 진퇴(進退)를 알지 못하여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맏아들은 곧 유원지(柳源之)이고 다음 아들은 유은지(柳隱之)와 유연지(柳衍之)이다.


남재가 화를 면하다. 난을 평정하고 내린 교지[편집]

○政堂文學南在, 誾之兄也。 嘗奉命禱祀于松嶽, 聞變自還, 謁于諸王子。 有欲竝罪者, 我殿下曰: “在素不與誾同心, 不可連及。 其歸我第。” 上乃下敎曰:

洪武二十九年六月十一日, 皇帝遣內使楊帖木ㆍ宋孛羅ㆍ王禮、尙寶寺丞牛牛等官, 諭以催督鄭道傳以來。 時, 道傳方患鼓脹而莫能興。 又於洪武三十年四月十七日, 準禮部咨, 欽奉聖旨節該: “今朝鮮國王所用文人鄭道傳者, 於王之助, 何爲也? 王若不悟, 斯人必禍源耳。” 欽奉告諭丁寧, 將欲發遣, 道傳病尙未痊, 是用因循。 玆者病愈, 長男諱告予以爲: “道傳宜起發赴京。” 道傳憾其言, 乃與三軍節制使南誾及小男芳碩、妻父沈孝生、姻親張至和等潛謀, 挾小男芳碩, 欲害諱等, 幾傾社稷, 尙賴天地祖宗之佑, 已伏其罪。 今長男諱, 性行純謹, 志存忠孝, 宜爲世子, 且大小臣僚, 闔辭以請。 於洪武三十一年八月二十七日, 告于宗廟, 立以爲後。 於戲! 君親無將, 罪人黜伏。 嫡嗣旣定, 社稷安寧。 屬玆靖亂立儲之初, 宜示推恩宥罪之典。 除道傳黨與外, 自洪武三十一年八月二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二罪以下, 咸宥除之。

정당 문학(政堂文學) 남재(南在)는 남은의 형이다. 일찍이 명령을 받들어 송악(松嶽)에 도사(禱祀)하다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서 여러 왕자를 알현(謁見)하였으나, 같이 죄주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지라, 우리 전하(殿下)가 말하였다.

"남재는 평소에 남은과 마음을 같이하지 아니했으니 연관시켜 미치게 할 수 없다."

임금이 이에 교지를 내리었다.

"홍무(洪武) 29년(1396) 6월 11일, 황제가 내사(內使) 양첩목(楊帖木)·송패라(宋孛羅)·왕예(王禮)와 상보시 승(尙寶寺丞) 우우(牛牛) 등 관원을 보내어 정도전을 독촉하여 오도록 유시(諭示)했는데, 이때 도전이 바야흐로 고창증(鼓脹症)을 앓아서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또 홍무(洪武) 30년 4월 17일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에 삼가 받든 황제의 칙지(勅旨)에 의하면, 그 내용에 ‘지금 조선 국왕이 임용(任用) 한 문인(文人) 정도전이란 사람은 왕의 보좌에 있어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왕이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반드시 화(禍)의 근원이 될 것이다.’ 하였다. 삼가 고유(告諭)가 친절하심을 받자와 장차 파견(派遣)하고자 하였으나, 도전이 병이 아직 낫지 않으므로 그대로 있게 되었다. 지금은 병이 나았으므로 장남(長男) 이방과(李芳果)가 나에게 고하기를, ‘도전을 마땅히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도전이 그 말에 원한을 품고 이에 삼군 절제사(三軍節制使) 남은과 소남(小男) 방석(芳碩)의 처부(妻父)인 심효생(沈孝生)과 인친(姻親) 장지화(張至和) 등과 몰래 모의(謀議)하여 소남(小男) 방석의 세력을 믿고 방과(芳果) 등을 해치고자 하여 사직을 거의 위태롭게 할 뻔했으나, 오히려 천지와 조종(祖宗)의 도움에 힘입어 이미 죄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게 되었다. 지금 장남 방과는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고 근신하며 뜻은 충효(忠孝)에 있으므로 마땅히 세자가 될 만하고, 또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전부 말을 올려 청하니, 홍무(洪武) 31년 8월 27일에 종묘(宗廟)에 고하고 세워서 후사(後嗣)로 삼는다. 아아! 군친(君親)은 반역할 수 없어서 죄인이 복죄(伏罪)되고 적사(嫡嗣)가 이미 정해지매 사직(社稷)이 안녕하게 되었다. 이러한 난리를 평정하고 세자를 세우는 초기에 있어서 마땅히 은혜를 미루어 죄인을 용서하는 은전(恩典)을 보여야 될 것이니, 도전의 당여(黨與)를 제외하고는 홍무(洪武) 31년 8월 27일 이른 새벽 이전에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사형(死刑)·교형(絞刑) 이하의 죄는 모두 사유(赦宥) 면제하게 한다."


상산군 강계권과 정도전의 아들 정진 및 그 일당을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囚象山君康繼權、順寧君枝、寶城君吳蒙乙、知中樞院事鄭臣義、大將軍康澤、道傳子津及黨與于巡軍。

상산군(象山君) 강계권(康繼權)·순녕군(順寧君) 지(枝)·보성군(寶城君) 오몽을(吳蒙乙)·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신의(鄭臣義)·대장군 강택(康澤)·정도전의 아들 정진(鄭津)과 그 당여(黨與)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귀의군 왕조와 그의 아우 왕관이 죽다[편집]

○歸義君王珇及其弟琯死。

귀의군(歸義君) 왕조(王珇)와 그 아우 왕관(王琯)이 죽었다.


조사의·이염 등을 옥에 가두고 정진 등을 충군하고 이조 등을 귀양보내다[편집]

○囚前僉節制使趙思義、三司右僕射李恬、完城君李伯由、吏曹議郞李慥于巡軍。 以鄭津及康澤充全羅水軍, 大將軍韓珪、孫原萬、宋千佑, 充慶尙水軍, 司僕卿李寶劒、將軍任得邦, 充江原水軍, 前將軍河承海, 充豊海水軍, 睦仁海、朴、李千祐, 充靑海水軍。 流李慥于興德鎭, 康繼權于角山, 鄭臣義于寧海鎭, 吳蒙乙于伊山鎭, 將軍趙洪、前將軍李登于蓴城鎭, 軍資監金宇、禮賓少卿奉元良于藍浦鎭。 宥金師幸及趙思義等二十一人。

전 첨절제사(僉節制使) 조사의(趙思義)·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李恬)·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이조 의랑(吏曹議郞) 이조(李慥)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정진(鄭津)과 강택(康澤)을 전라 수군(全羅水軍)에 충군(充軍)하고, 대장군 한규(韓珪)·손원만(孫原萬)·송천우(宋千佑)를 경상 수군(慶尙水軍)에 충군(充軍)하며, 사복경(司僕卿) 이보검(李寶劍)과 장군 임득방(任得邦)은 강원 수군(江原水軍)에 충군(充軍)하고, 전 장군 하승해(河承海)를 풍해 수군(豊海水軍)에 충군(充軍)하고, 목인해(睦仁海)·박미(朴𢒺)·이천우(李千祐)는 청해 수군(靑海水軍)에 충군(充軍)하며, 이조(李慥)를 흥덕진(興德鎭)으로, 강계권(康繼權)을 각산(角山)으로, 정신의(鄭臣義)를 영해진(寧海鎭)으로, 오몽을(吳蒙乙)을 이산진(伊山鎭)으로, 장군 조홍(趙洪)과 전 장군 이등(李登)을 순성진(蓴城鎭)으로, 군자감(軍資監) 김우(金宇)와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남포진(藍浦鎭)으로 귀양보내고, 김사행(金師幸)과 조사의(趙思義) 등 21인을 사유(赦宥)하였다.


8月 29日[편집]

병이 차도가 있어 임금이 서쪽 침실로 옮기다[편집]

○壬申/上移于西寢室, 疾小間。

임금이 서쪽 침실(寢室)로 옮겨 거처하니 병이 조금 차도(差度)가 있었다.


교서감 유두명과 감승 장윤화를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囚校書監柳斗明、監丞張允和于巡軍。

교서감(校書監) 유두명(柳斗明)과 감승(監丞) 장윤화(張允和)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七年 秋九月[편집]

9月 1日[편집]

해가 오색을 띠다. 낮과 밤에 성괴가 나타나다[편집]

○癸酉朔/日有五色。 金星晝見。 夜, 流星出奎, 火入婁。

해가 오색을 띠었다.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는 유성(流星)이 규성(奎星)·화성(火星)에서 나와 누성(婁星)의 분야로 들어갔다.


세자에게 동쪽 침실에 들어가게 하다[편집]

○命世子入于東寢室。

세자에게 명하여 동쪽의 침실(寢室)에 들어가게 하였다.


임금이 수정포도를 먹고 싶어 했는데 경력 김정준이 바치다[편집]

○上思食水精蒲萄, 命曹恂傳旨世子及諸王子曰: “予則無父, 圖畫影子, 以寄思慕。 予雖衰憊, 尙有氣息, 爾等幸矣。 今也疾彌留, 欲食水精蒲萄。” 世子及諸王子皆號泣, 卽令上林園史韓幹, 旁求于留後司及畿內左道。 經歷金廷雋齎山蒲萄經霜半熟者一箱以進, 上大悅。

임금이 수정포도(水精葡萄)를 먹고 싶어 하여, 조순(曹恂)을 명하여 세자와 여러 왕자에게 교지를 전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므로 영자(影子)를 그려서 사모(思慕)하게 되는데, 내가 비록 쇠약하나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너희들은 다행한 편이다. 지금 병이 오래 낫지 아니하여 수정포도를 먹고자 한다."

세자와 여러 왕자들이 모두 소리를 높여 울면서 즉시 상림원 사(上林園史) 한간(韓幹)에게 명하여 유후사(留後司)[96]와 기내 좌도(畿內左道)에 널리 구하였는데, 경력(經歷) 김정준(金廷雋)이 산포도가 서리를 맞아 반쯤 익은 것을 한 상자를 가지고 와서 바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였다.


세자비 김씨를 덕빈으로 봉하다[편집]

○封世子妃金氏爲德嬪。

세자비(世子妃) 김씨(金氏)를 봉하여 덕빈(德嬪)으로 삼았다.


김정준을 전농 판사로 삼다. 친왕자를 공으로, 종친을 후로, 정1품을 백으로 봉하다[편집]

○陞廷雋爲典農判事。 始以親王子爲公, 諸宗親爲侯, 正一品爲伯。 益安公中軍節制使, 懷安公左軍節制使, 今殿下右軍節制使, 福根奉寧侯, 良祐寧安侯, 李伯卿上黨侯, 沈淙靑原侯。 李和判門下府事、兼領義興三軍府事、義安公, 沈德符領三司事、靑城伯, 趙浚左政丞、平壤伯, 金士衡右政丞、上洛伯, 權仲和醴泉伯, 成石璘門下侍郞贊成事、判戶曹事, 李之蘭門下侍郞贊成事、判刑曹事、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靑海君, 李茂參贊門下府事、判禮曹事、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 張思吉參贊門下府事、判工曹事、義興三軍府右軍節制使、永嘉君, 趙璞參贊門下府事, 河崙政堂文學, 李居易參知門下府事, 趙英茂判中樞院事、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 趙溫中樞院使、義興三軍府左軍同知節制使, 金輅同知中樞院事、義興三軍府右軍同知節制使, 張思靖商議中樞院事, 李天祐同知中樞院事、兼兵曹典書、義興侍衛司上將軍、知三軍府事, 鄭擢中樞院學士, 張哲中樞院副使, 南在宜寧君, 李文和仍都承旨、兼尙瑞尹。

김정준(金廷雋)을 승진시켜 전농 판사(典農判事)로 삼았다. 비로소 친왕자(親王子)를 공(公)으로 삼고, 여러 종친을 후(侯)로 삼고, 정1품(正一品)을 백(伯)으로 삼았다. 익안공(益安公)을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로, 회안공(懷安公)을 좌군 절제사(左軍節制使)로, 지금 전하를 우군 절제사(右軍節制使)로, 복근(福根)을 봉녕후(奉寧侯)로, 양우(良祐)를 영안후(寧安侯)로, 이백경(李伯卿)을 상당후(上黨候)로, 심종(沈淙)을 청원후(靑原侯)로, 이화(李和)를 판문하부사 겸 영의흥삼군부사(判門下府事兼領義興三軍府事) 의안공(義安公)으로, 심덕부(沈德符)를 영삼사사(領三司事) 청성백(靑城伯)으로, 조준(趙浚)을 좌정승 평양백(平壤伯)으로, 김사형(金士衡)을 우정승 상낙백(上洛伯)으로, 권중화(權仲和)를 예천백(醴泉伯)으로, 성석린(成石璘)을 문하 시랑찬성사 판호조사(門下侍郞贊成事判戶曹事)로, 이지란(李之蘭)을 문하 시랑찬성사 판형조사 의흥삼군부 중군 절제사(門下侍郞贊成事判刑曹事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 청해군(靑海君)으로, 이무(李茂)를 참찬문하부사 판예조사 의흥 삼군부 좌군 절제사(參贊門下府事判禮曹事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로, 장사길(張思吉)을 참찬문하부사 판공조사 의흥 삼군부 우군 절제사(參贊門下府事判工曹事義興三軍府右軍節制使) 영가군(永嘉君)으로, 조박(趙璞)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하윤(河崙)을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이거이(李居易)를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로, 조영무(趙英茂)를 판중추원사 의흥 삼군부 중군 동지절제사(判中樞院事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로, 조온(趙溫)을 중추원사 의흥 삼군부 좌군 동지절제사(中樞院使義興三軍府左軍同知節制使)로, 김로(金輅)를 동지중추원사 의흥 삼군부 우군 동지절제사(同知中樞院事義興三軍府右軍同知節制使)로, 장사정(張思靖)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이천우(李天祐)를 동지중추원사 겸 병조 전서 의흥 시위사 상장군 지삼군부사(同知中樞院事兼兵曹典書義興侍衛司上將軍知三軍府事)로, 정탁(鄭擢)을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로, 장철(張哲)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남재(南在)를 의령군(宜寧君)으로 삼고, 이문화(李文和)를 그전대로 도승지로 삼아 상서 윤(尙瑞尹)을 겸무하게 하였다.


이염·유두명·장윤화의 죄를 용서하다[편집]

○宥李恬、柳斗明、張允和。

이염(李恬)·유두명(柳斗明)·장윤화(張允和)를 사유(赦宥)하였다.


9月 3日[편집]

한간이 수정포도를 바치다. 왕의 병이 이로부터 회복되다[편집]

○乙亥/韓幹得水精蒲萄來獻, 上喜甚, 賜米十石。 上每喉渴, 嘗一二箇, 疾自此康復。

한간(韓幹)이 수정포도(水精葡萄)를 구하여 와서 바치므로,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쌀 10석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매양 목이 마를 적엔 한두 개를 맛보니, 병이 이로부터 회복되었다.


환관 김사행의 목을 베어 삼군부 문에 매달다[편집]

○斬宦官金師幸, 梟首三軍府門。 師幸有巧思, 以營造宮室, 務悅君心。 在前朝, 以影殿之役, 誤玄陵, 今當國初, 又蒙寵幸, 官至駕洛伯、兼判都評議使司事, 出入內禁, 常以肩輿行。 死之日, 人皆快之。

환관(宦官) 김사행(金師幸)을 목 베어 삼군부(三軍府) 문에 매어달게 하였다. 사행(師幸)이 교묘한 생각이 있어 궁실을 영조(營造)하는 일로써 임금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만 힘썼다. 고려 왕조 때에도 영전(影殿)의 역사(役事)로써 공민왕을 그릇되게 하였는데, 지금 건국 초기를 당하여 또한 총행(寵幸)을 입어 벼슬이 가락백(駕洛伯) 겸 판도평의사사사(兼判都評議使司事)에 이르렀으며, 내금(內禁)을 출입하면서 항상 견여(肩輿)를 타고 다니었다. 그가 죽는 날에 사람들이 모두 이를 통쾌하게 여기었다.


9月 4日[편집]

김사행과 함께 궁궐 수리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하여 김주를 영주로 귀양보내다[편집]

○丙子/流商議門下府事金湊于寧州。 湊嘗與師幸, 同掌營繕, 務極精巧, 以勞民力。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김주(金湊)를 영주(寧州)로 귀양보내었다. 김주가 일찍이 김사행(金師幸)과 더불어 같이 영선(營繕)을 맡아 극도로 정교하기만을 힘써서 백성의 힘을 괴롭게 했기 때문이었다.


9月 5日[편집]

달이 토성을 범하다. 여러가지 성변이 있었다[편집]

○丁丑/月犯土星。 流星出句陳西流, 又出五車入八穀。 金在太微右掖門中。

달이 토성(土星)을 범하고, 유성(流星)이 구진(句陳)[97]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가고, 또 오차성(五車星)에서 나와 팔곡성(八穀星)의 분야로 들어가고, 금성(金星)이 태미성(太微星)의 우액문중(右掖門中)에 있었다.


왕위를 세자에게 선양하고자 하여, 이첨이 교서를 지어 바치다[편집]

○上謂都承旨李文和曰: “予罹疾病, 久未聽政。 一日萬幾, 其可廢乎? 念至於此, 病益深矣。 今欲傳位于世子, 平心療疾, 以延餘生。 爾其命文臣, 製敎書以進。” 文和卽命吏曹典書李詹製進。

임금이 도승지 이문화에게 일렀다.

"내가 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정사를 청단(聽斷)하지 못했지마는, 하룻동안에도 만가지 일이 발생하니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생각이 이에 이르게 되매 병이 더욱 더하게 되었다. 지금 세자에게 왕위를 전해 주고 마음을 편안히 먹고 병을 치료하여 여생(餘生)을 연장하고자 하니, 그대가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교서(敎書)를 지어서 바치게 하라."

문화가 즉시 이조 전서(吏曹典書)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교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왕위 전수를 태묘와 중국 경사에 알리다. 세자에게 친히 양위하는 교서를 내리다[편집]

○命領三司事沈德符, 告于太廟曰: “予以不穀, 承祖宗之德, 撫有臣庶, 于今七載, 年衰病作, 庶務叢劇, 難于宵旰, 恐多遺失。 王世子芳果, 身居嫡長, 夙著仁孝, 且當開國之初, 贊襄弘多。 爰命以位, 俾奉孝祀, 敢申昭告。” 又遣判三司事偰長壽、禮曹典書金乙祥, 如京師奏曰: “臣自少役於軍旅, 感患風濕疾證, 見今年紀衰老, 早暮難任庶事。 有長男芳果, 性資純謹, 志性端方, 堪托後事, 効力東陲。 謹於洪武三十一年九月初五日, 委令權署國事, 伏候明降。

上令近侍內官扶起, 召世子。 世子具公服, 詣上前伏地, 上親授敎書, 世子受納懷中。 其書曰:

王若曰, 余以否德, 承祖宗之蔭, 奉天子之靈, 肇造邦家, 撫有臣庶, 于今七年。 乃緣久於軍旅, 蒙犯霜露, 迨今年衰疾作, 難於宵旰, 庶務叢劇, 恐多遺失。 惟爾王世子芳果, 身居嫡長, 夙著仁孝, 且當開國之初, 贊襄弘多, 一國臣民, 咸共知之。 肆於洪武三十一年九月初五日, 告于宗廟, 乃命以位。 爾其率由典章, 親君子遠小人, 視聽無一己之偏, 好惡公國人之論, 無敢或荒, 無敢或怠, 永綏厥位, 以昌後嗣。 於戲! 爾父薄德, 雖不足效, 先聖之道, 布在方冊, 夙興夜寐, 爾尙敬哉!

次召左右政丞, 亦具公服以入。 上曰: “我今傳位于世子, 卿等戮力輔治, 毋墜大業。” 乃以傳國寶授之, 次命李文和, 陪世子以出。 左右政丞奉寶前導, 文和陪世子至勤政殿。 世子改服絳紗袍、遠遊冠, 卽王位, 受百官賀禮。 改諱曰曔。 以冕服率百官, 上父王尊號曰上王, 率百官拜賀。

영삼사사(領三司事) 심덕부(沈德符)에게 명하여 태묘(太廟)에 고하였다.

"내가 착하지 못한 사람으로 조종(祖宗)의 덕을 계승하여 신민(臣民)을 통치한 지가 지금 7년이나 되었는데, 나이 많으매 병이 발생하고, 여러가지 사무가 많고 복잡하여 아침저녁으로 정사에 부지런하기가 어려우므로, 빠뜨려진 것이 많을까 염려되나이다. 왕세자 이방과(李芳果)는 자신이 적장(嫡長)의 처지에 있어 일찍부터 인덕(仁德)과 효도로서 나타났으며, 또한 개국(開國)의 초기를 당하여 나를 보좌한 일이 많았으므로, 이에 왕위에 오르기를 명하여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감히 분명하게 고하나이다."

또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와 예조 전서(禮曹典書) 김을상(金乙祥)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상주(上奏)하였다.

"신(臣)이 젊을 때부터 군려(軍旅)에 노역하여 풍습병(風濕病)을 앓았는데, 지금 연기(年紀)가 쇠로(衰老)하여 일찍 늙게 되매, 여러가지 사무를 맡기가 어렵습니다. 장남(長男) 방과(芳果)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근신하며, 의지와 행동은 단아(端雅)하고 정대(正大)하므로 뒷일을 부탁하여 동쪽 변방에서 있는 힘을 다할 만합니다. 삼가 홍무(洪武) 31년 9월 초5일에 세자에게 국사(國事)를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였으니, 삼가 황제의 명령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임금이 근시 내관(近侍內官)으로 하여금 부축해 일으키게 하고 세자를 부르니, 세자가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임금의 앞에 나아와서 땅에 엎드리었다. 임금이 친히 교서(敎書)를 주니, 세자가 받아 품속에 넣었는데, 그 교서에 이러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조종(祖宗)의 음덕(蔭德)을 계승하고, 천자(天子)의 존엄(尊嚴)을 받들어 국가를 처음 세워 신민(臣民)을 통치한 지가 지금 7년이나 되었는데, 군려(軍旅)에 오래 있음으로 인하여 서리와 이슬을 범하여, 지금에 와서는 나이 많고 병이 발생하여 아침저녁으로 정사에 부지런하기가 어렵겠으므로, 여러가지 사무의 많고 번잡한 것을 빠뜨린 것이 많을까 염려된다. 다만 너 왕세자 방과(芳果)는 자신이 적장(嫡長)의 지위에 있어 일찍부터 인덕(仁德)과 효도를 나타냈으며, 또한 개국(開國)의 초기를 당하여 나를 보좌한 일이 많은 것은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모두 이를 알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홍무(洪武) 31년 9월 초5일에 종묘(宗廟)에 고하고 왕위에 오르기를 명하니, 너는 전장(典章)을 따라 행하여 군자를 친근히 하고 소인을 멀리 하며, 보고 듣는 것은 자기 한 사람의 편사(偏私)를 없게 하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나라 사람들의 공론(公論)에 따라 감히 혹 폐기(廢棄)하지도 말며, 감히 혹 태만하지도 말아서, 그 지위를 영구히 편안하게 하여 후사(後嗣)를 번성(繁盛)하게 하라. 아아! 너 아버지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비록 본받지 못할 것이지만, 선성(先聖)의 도(道)가 간책(簡冊)에 실려 있으니,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는 항상 공경할 것이다."

다음에는 좌정승과 우정승을 부르니, 또한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세자에게 왕위를 전해 주니, 경 등은 힘을 합하여 정치를 도와서 큰 왕업(王業)을 퇴폐(頹廢)시키지 말게 하라."

이에 전국보(傳國寶)를 그들에게 주고, 다음에는 이문화에게 명하여 세자를 모시고 나오게 하였다. 좌정승과 우정승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이문화가 세자를 모시고 근정전(勤政殿)에 이르렀다. 세자가 강사포(絳紗袍)와 원유관(遠遊冠)을 바꾸어 입고 왕위에 올라 백관(百官)들의 하례(賀禮)를 받고 이름을 고쳐 경(曔)이라 하였다. 면복(冕服) 차림으로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부왕(父王)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상왕(上王)이라 하고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절하면서 치하(致賀)하였다.


덕빈을 덕비로 책봉하고 민제·조박·이숙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封德嬪爲王德妃。 以我殿下, 兼判尙瑞司事, 閔齊三司右僕射, 趙璞兼大司憲, 李居易參贊門下府事、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 趙英茂參贊門下府事, 趙溫商議門下府事, 朴苞知中樞院事、義興三軍府右軍同知節制使, 馬天牧大護軍, 李叔蕃右副承旨。

덕빈(德嬪)을 책봉하여 덕비(德妃)로 삼고, 우리 전하를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무하게 하였으며, 민제(閔霽)를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로 삼고, 조박(趙璞)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겸무하게 하였으며, 이거이(李居易)를 참찬문하부사 의흥 삼군부 중군 동지절제사(參贊門下府事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로, 조영무(趙英茂)를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조온(趙溫)을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로, 박포(朴苞)를 지중추원사 의흥 삼군부 우군 동지절제사(知中樞院事義興三軍府右軍同知節制使)로, 마천목(馬天牧)을 대호군(大護軍)으로, 이숙번(李叔蕃)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삼았다.


9月 7日[편집]

붉은 기운이 있었다. 상왕이 이방석 등을 위하여 소선을 들다[편집]

○己卯/有赤氣。 上王爲芳碩等素膳, 都評議使司請進肉膳。

붉은 기운이 있었다. 상왕(上王)이 이방석(李芳碩) 등을 위하여 소선(素膳)을 드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육선(肉膳)을 올리기를 청하였다.


신덕 왕후 영정을 정릉으로 옮겨 봉안케 하다[편집]

○移安神德王后影于貞陵。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영정(影幀)을 정릉(貞陵)으로 옮겨 봉안(奉安)하게 하였다.


이첨 등에게 명하여 경사에서 경계될 만한 것을 찬집, 상절을 만들어 바치게 하다[편집]

○命吏曹典書李詹、右諫議趙庸、前知善州事鄭以吾等, 撰集經史所載有關君心政治者, 詳節以進。

이조 전서(吏曹典書) 이첨(李詹)과 우간의(右諫議) 조용(趙庸)과 전 지선주사(知善州事) 정이오(鄭以吾) 등에게 명하여 경사(經史)에 기재된 임금의 마음가짐과 정치에 관계된 것을 찬집(撰集)하여 상절(詳節)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


9月 9日[편집]

상왕이 흥천사 부도의 공역을 마치라는 명을 임금에게 전하다[편집]

○辛巳/上王傳命于上曰: “興天寺浮屠, 平日所願成者, 令畢其功。”

상왕(上王)이 임금에게 명령을 전달하였다.

"흥천사(興天寺)의 부도는 평소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니 그 공역(工役)을 마치게 하라."


9月 10日[편집]

밤에 부엉이가 경복궁 북원에서 울다[편집]

○壬午/夜, 鵂鶹鳴于景福宮北園。 上王移居于北涼亭。

밤에 부엉이가 경복궁(景福宮) 북원(北園)에서 울므로, 상왕(上王)이 북쪽 양정(涼亭)으로 옮겨 가서 거처하였다.


9月 11日[편집]

금성이 태미원의 단문으로 들어가다[편집]

○癸未/金入太微垣端門。

금성(金星)이 태미원(太微垣)의 단문(端門)으로 들어갔다.


9月 12日[편집]

유성이 연도에서 나와 허성 자리로 들어가다[편집]

○甲申/流星出輦道入虛。

유성(流星)이 연도(輦道)에서 나와 허성(虛星)의 분야로 들어갔다.


왕위에 오른 것을 제릉에 고하게 하다[편집]

○遣奉寧侯福根, 告卽位于齊陵。

봉녕후(奉寧侯) 복근(福根)을 보내어 왕위에 오른 것을 제릉(齊陵)[98]에 고하게 하였다.


도평의사사에게 오고와 칠궁의 출납 사무를 맡게 하다[편집]

○五庫七宮錢穀, 始令都評議使司, 掌其出納。

오고(五庫)와 칠궁(七宮)의 전곡(錢穀)을 비로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하여금 그 출납(出納)의 사무를 맡게 하였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토로한 정탁과 박포를 귀양보내다[편집]

○流鄭擢于淸州, 朴苞于竹州。 苞定社後, 自以爲功不在諸臣之下, 怏怏不平, 乃與擢語曰: “茂雖與定社之列, 而功不滿於人心, 且反覆難測。” 判中樞金輅聞之, 言於趙英茂, 告于我殿下, 啓于上。 上怒, 俱貶。 初茂中立觀變, 以爲去就, 卒與功臣, 識者譏之。

정탁(鄭擢)을 청주(淸州)에 귀양보내고, 박포(朴苞)를 죽주(竹州)에 귀양보내었다. 박포가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후에 스스로 공로가 여러 신하들의 아래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불만을 품고 불평하면서, 이에 정탁에게 이야기하였다.

"이무(李茂)가 비록 정사 공신(定社功臣)의 반열(班列)에 참예했지마는, 공로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고, 또 이랬다저랬다 하므로 예측하기 어렵다."

판중추(判中樞) 김로(金輅)가 이 말을 듣고 조영무(趙英茂)에게 말하여 우리 전하(殿下)에게 알려서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폄직(貶職)시키었다. 처음에 이무(李茂)가 중립(中立)하여 변고를 관망(觀望)하면서 거취(去就)를 생각하다가 마침내 공신(功臣)에 참예하게 되니,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였다.


태묘에 고유하고, 정전에 앉아 즉위 교서를 반포하다[편집]

○上自庚辰齋戒, 丙戌, 備法駕詣太廟幄次。 丁亥, 上親祼以告卽位訖, 出於幄次, 受群臣賀, 駕還坐正殿, 頒敎旨:

王若曰, 恭惟上王, 應天順人, 肇造邦家, 立經陳紀, 爲法萬世。 不幸奸臣鄭道傳、南誾等, 夤緣用事, 潛謀擅權, 貪立幼孼, 欲爲後嗣, 以奪長幼之序, 以亂嫡庶之分, 離間我骨肉, 相煽生變, 禍在不測。 幸賴天地宗社之靈, 有以陰相, 忠臣義士, 盡心効力, 奸黨伏誅, 國步載安。 伏値上王失豫彌留, 謂予小子身居嫡長, 堪托後事, 乃命以位。 予以否德, 慄慄危懼, 讓至再三, 終不獲辭。 於洪武三十一年九月初五日丁丑, 卽位于勤政殿, 越十日丁亥, 躬服袞冕, 祀于宗廟。 顧惟上王, 厭煩萬機, 俾付予小子, 願以一國, 奉養惟永, 各司供上, 諸道進獻, 一如在位之日。 玆當更始之初, 宜布惟新之化。 其在洪武三十一年九月十五日昧爽已前, 除大逆强盜、蠱毒魘魅、謀故殺人及道傳、南誾黨與外, 已發覺未發覺, 咸宥除之。 敢以宥旨前事, 相告言者, 以其罪罪之。 凡有便民事宜, 條列如左。 一, 宗社之祭, 當盡誠敬。 陳設酌獻之具, 務要精潔, 禮文樂章, 務要中節, 毋敢不恭。 一, 文宣王, 百王之師, 釋采之禮, 當致精潔, 毋或不虔。 一, 箕子受封朝鮮, 實基風化, 前朝始祖, 統合三韓, 俱有功東民, 宜置祭田, 以時致祀。 一, 天之視聽, 實自乎民。 其有不便於民者, 其亟除之, 以副予敬天勤民之意。 一, 君臣一體, 義同休戚。 大小臣僚, 於諸時政得失, 民生利害, 盡言不諱, 小民冤抑未伸者, 亦許進告。 一, 崇儉去奢, 爲治之本。 宮中鹵簿、衣服、器皿, 務從儉約, 其有以奢侈爲媚者, 憲司罪之。 一, 近因遷都營繕, 民生良苦。 凡中外土木之役, 一皆停罷, 務令休息。 一, 今年春夏, 旱蝗相仍。 聞海濱州郡, 尤被其災, 予甚痛焉。 發倉移粟, 以行賑濟, 毋或遲緩, 庶令赤子, 免於溝壑。 租稅, 隨其損傷多少, 蠲減其數。 一, 《六典》, 爲治之具。 宜令六曹, 講求命官之意, 各盡其職, 毋敢或怠。 一, 騎船軍, 爲國禦侮, 寄命水上, 艱苦尤甚。 兵曹宜考各道軍戶人口多少, 每三丁立一軍, 分爲二番, 輪番更代, 其家許免他役。 一, 火㷁軍及其人之役, 亦爲艱苦。 戶曹宜考各官鄕吏之數及官寺奴婢之數, 隨其多少, 更定其額, 以均勞逸。 一, 屯田之法, 始自屯軍塞下, 非役平民。 除水陸屯軍且耕且戰外, 役事平民, 號稱屯田者, 一皆罷之。 一, 賦役不均, 深爲害民。 自今有不得已事, 仰都評議使司, 按諸道土田廣狹、人口多少, 差等分定。 諸道監司, 以州府郡縣土田人口、廣狹多少, 差等分定; 守令以各戶土田人口, 差等分定, 庶無不均之嘆。 其鰥寡孤獨、疲癃殘疾無同居者, 全免。 一, 農桑, 衣食之源, 民命所關。 其令諸道監司, 分督郡縣, 冬初築堤堰禁火焚, 孟春植桑木, 仲夏植桑椹, 毋敢或怠。 一, 內自成均五部, 外至各道, 皆有敎官, 所以養成人材, 宜以時考察, 勿令或怠。 一, 民生休戚, 在守令賢否。 朝官六品以上, 各擧所知, 具其出身來歷, 仰都評議使司, 詳加考察, 乃令之任。 監司嚴加黜陟, 所擧非人, 罪及擧主。 一, 貧民負債, 勿論布穀, 一本一利, 不許加徵。 違者, 本利具沒官論罪。 一, 前朝之季, 俗尙侈靡, 宴享齋會, 必用遐方難繼之物, 式至于今, 餘風未殄。 其金銀、珠玉、眞彩絲、花段子等物, 一皆禁斷。 一, 前朝之季, 始置別鞍色, 反淩逼工曹, 殊失命官之意。 宜行革去。 一, 私宰牛馬, 當有禁令, 宜令漢城府掌之。 一, 魚梁川澤, 司宰監所掌, 勿令分屬司饔, 以一出納; 山場草枝, 繕工所掌, 勿令私占, 輕定其稅, 以便民生。 一, 繕工、司水所納柴炭, 司僕所納穀草, 民甚苦之。 宜令攸司, 更定所費, 俾無前弊。 一, 屬公奴婢, 每人立役, 致使飢寒, 不免逃匿。 自今每二口役一口, 俾無失所; 其身故者, 勿令本主充立; 年滿六十者, 放役。 每十口擇一口, 分爲頭目, 使之管屬, 若有逃亡, 責其頭目。 一, 名實不可相混。 除表箋外, 公私書狀, 毋得用表紙。 長興庫所納, 隨其所用, 亦宜更定。 一, 平民栽種菓實竹木, 官司不給其直, 公然取用, 一皆禁斷。 各官皆置菓園, 栽植供用。 一, 七十歲以上耆老, 正朝誕日等關係慶事外, 許免隨班朝謁, 以副予敬老之意。 一, 外方吹鍊鐵物, 全委軍器監。 其原定月課數目外, 毋得濫費。 一, 兵者凶器, 正朝誕日賀禮, 近以軍器進獻, 一皆禁斷。 一, 郡縣貢物, 隨其土産, 更定其額, 其不産之物, 許免收納。 一, 倉庫宮司, 全委三司, 掌其出納。 一, 冗官不可不汰。 仰都評議使司, 詳議申聞, 務求實效。 一, 該載不盡事理, 仰都評議使司, 續議申聞擧行。

임금이 경진일로부터 재계(齋戒)하고 병술일에 법가(法駕)를 갖추어 태묘(太廟)의 악차(幄次)에 나아갔다. 정해일에 임금이 친히 강신제(降神祭)를 지내어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기를 마치고, 악차(幄次)에 나와서 여러 신하들의 하례(賀禮)를 받고, 어가(御駕)가 돌아와 정전(正殿)에 앉아서 교지(敎旨)를 반포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삼가 생각하건대, 상왕(上王)께서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에 순응하여 비로소 국가를 세우고 강기(綱紀)를 베풀어 만세(萬世)에 모범을 보였는데, 불행히도 간신(奸臣) 정도전과 남은 등이 연줄을 타서 권세를 부리고 몰래 권력을 마음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워 후사(後嗣)로 삼고서 장유(長幼)의 차례를 빼앗고 적서(嫡庶)의 구분을 문란시키고자, 우리 형제를 이간시켜 서로 선동하여 변고를 발생시켜서 화(禍)가 불측할 지경에 있었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祀)의 신령이 몰래 도와주고 충신 의사(義士)들이 마음과 힘을 다함에 힘입어, 간악한 무리들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고 나라의 운명이 편안하게 되었다. 삼가 상왕(上王)께서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으므로, 내 소자(小子)가 몸이 적장(嫡長)의 지위에 있어 뒷 일을 능히 부탁할 만하다고 여겨, 이에 왕위에 오르라고 명하시었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이므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사양할 수 없게 되어, 홍무(洪武) 31년 9월 초5일 정축에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에 오르고, 열흘이 지난 정해일에 몸소 곤복(袞服)을 입고 면류관(冕旒冠)을 쓰고서 종묘(宗廟)에 제사지내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상왕께서 제왕의 정치에 염증이 나서 나 소자(小子)에게 맡겼으니, 원컨대 한 나라로써 영구히 봉양(奉養)하겠으므로 각 관사(官司)의 공상(供上)과 여러 도(道)의 진헌(進獻)은 한결같이 상왕이 왕위에 계시던 날과 같이 할 것이다. 지금 혁신(革新)하는 초기를 당하여 마땅히 새로운 교화(敎化)를 선포해야 될 것이니, 그 홍무(洪武) 31년 9월 15일 이른 새벽 이전에 있었던 대역(大逆)·강도(强盜)·고독(蠱毒)[99]·염매(魘魅)[100]와 고의로 살인(殺人)한 것과, 정도전·남은의 당여(黨與)를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던 것이든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사유(赦宥) 면제하니,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로써 서로 고발해 말하는 사람은 그 고발한 죄로써 처벌하게 할 것이다. 무릇 백성에게 편리한 사의(事宜)를 조목별로 열거(列擧)하면 아래와 같다.

1.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제사는 마땅히 성심과 공경을 다하여, 진설하는 작헌(酌獻)의 기구는 정결하기를 힘쓰고, 예문(禮文)과 악장(樂章)은 절차에 맞도록 힘써서 감히 불공(不恭)함이 없게 할 것이다.

1. 문선왕(文宣王)[101]은 백대(百代) 제왕의 스승이니, 석채(釋菜)[102]의 제례(祭禮)를 마땅히 정결하게 하고 혹시라도 삼감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기자(箕子)는 조선(朝鮮)에 봉토(封土)를 받아 실제로 풍화(風化)의 기초를 닦았으며, 고려 왕조의 시조(始祖)는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모두 동방 백성에게 공로가 있으니, 마땅히 제전(祭田)을 두어 사시(四時)에 제사를 지내야 될 것이다.

1. 하늘의 보고 듣는 것은 실상 백성에게 있으니, 그 백성에게 불편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빨리 제거하여, 내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뜻에 부합하게 할 것이다.

1. 임금과 신하는 한 몸이니 의리상 기쁨과 근심을 같이하게 된다.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은 시정(時政)의 잘되고 잘못된 점과 민생(民生)의 이롭고 해되는 점에 있어서 할 말을 다하여 숨기지 말며, 소민(小民)의 원통하고 억울하여 풀리지 못한 것은 또한 나아와서 고하게 할 것이다.

1.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치함을 버리는 것은 정치하는 근본이니, 궁중(宮中)의 의장(儀仗)과 의복·기명(器皿)은 검소함을 따르게 할 것이며, 그 사치로써 아첨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헌부에서 이를 처벌하게 할 것이다.

1. 요사이 도읍을 옮겨 궁궐을 건축함으로 인하여 백성의 생계가 진실로 고생이 되니, 무릇 중앙과 지방의 토목(土木)의 역사는 일체 모두 정지시키어 백성들로 하여금 휴식하게 할 것이다.

1. 금년은 봄과 여름에 한재(旱災)와 황재(蝗災)가 서로 잇달아 바닷가의 주군(州郡)에는 더욱 그 재해를 입었으니, 내가 심히 상심(傷心)된다. 창고를 열고 곡식을 옮겨 진제(賑濟)를 시행하되, 혹시 더디어 늦추지 말고 백성들로 하여금 도랑과 골짜기에서 죽게 됨을 면하게 할 것이며, 조세(租稅)는 그 손상(損傷)의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그 수량을 감면하게 할 것이다.

1. 《육전(六典)》은 정치하는 법령이니, 마땅히 육조(六曹)로 하여금 관직을 임명하는 뜻을 강구(講求)하게 하여, 각기 그 직책을 다하여 감히 혹시라도 태만함이 없게 할 것이다.

1. 배 타는 군사는 나라를 위하여 외모(外侮)를 막아 물 위에서 목숨을 붙이고 있으므로 고생이 더욱 심하니, 병조(兵曹)에서 마땅히 각도의 군호(軍戶)와 인구의 많고 적은 것을 상고하여 매 3정(丁)에 군인 1명을 세워 두 번(番)으로 나누어 윤번(輪番)으로 교대(交代)하게 하고, 그 집은 다른 요역(徭役)은 면제하게 할 것이다.

1. 화통군(火㷁軍)과 기인(其人)[103]의 역(役)도 또한 고생이 되니, 호조(戶曹)에서 마땅히 각 고을 향리(鄕吏)의 명수(名數)와 관시(官寺)·노비의 명수를 상고하여 그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그 정원을 다시 정하여, 그 수고와 편안함을 균등하게 할 것이다.

1. 둔전(屯田)의 법은 변새에 군사를 주둔시킨 것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평민(平民)을 노역시킨 것은 아니니, 수상(水上)과 육지(陸地)에서 주둔하는 군사가 경작하면서 전쟁하기도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평민(平民)을 역사(役事)시키면서 둔전(屯田)한다고 칭호하는 것은 일체 모두 이를 폐지하게 할 것이다.

1. 부역(賦役)이 고르지 못한 것은 매우 백성에게 해로우니, 지금부터는 부득이한 일이 있으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시켜 여러 도(道)의 토지의 넓고 좁음과 인구의 많고 적은 것을 조사하여 차등이 있게 나누어 정하게 하고,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는 주·부·군·현(州府郡縣)의 토지와 인구의 넓고 좁음과 많고 적은 것으로써 차등이 있게 나누어 정하게 하며, 수령(守令)들은 각호(各戶)의 토지와 인구로써 차등이 있게 나누어 정하게 한다면, 균등하지 않다는 탄식은 없게 될 것이며, 그 늙어서 아내가 없는 사람이나 늙어서 남편이 없는 사람, 어려서 부모가 없는 사람,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과 노쇠하여 느른한 사람, 폐질(廢疾)이 있는 사람으로서 동거(同居)하는 사람이 없는 자는 전체를 면제하게 할 것이다.

1. 농업과 양잠은 의식(衣食)의 근원이고 백성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니, 그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들로 하여금 군현(郡縣)을 나누어 독려하여 초겨울에는 제방(堤防)을 쌓고 화재(火災)를 금하게 할 것이며, 첫 봄에는 뽕나무를 심고, 5월 달에는 뽕나무의 열매를 심게 하여 감히 혹시라도 태만하지 말게 할 것이다.

1. 서울 안의 성균관(成均館)과 오부 학당(五部學堂)으로부터 서울 밖에서는 각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교관(敎官)이 있는 것은 인재(人材)를 양성하기 때문인 것이니, 마땅히 때때로 고찰(考察)하여 그들로 하여금 혹시 태만하지 말게 할 것이다.

1. 백성의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守令)의 유능과 무능에 매여 있으니, 조관(朝官)의 6품(品) 이상은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여 그 출신 내력(出身來歷)을 갖추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시켜 상세히 고찰(考察)하게 하여, 이에 그 임무를 맡기게 하고, 감사(監司)는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는 일을 엄격히 시행하여, 천거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면 죄를 천거한 사람에게 미치게 할 것이다.

1. 가난한 백성의 부채(負債)는 베[布]와 곡식을 논할 것 없이 본전(本錢) 하나에 이식(利息) 하나를 계산하여 더 징수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본전과 이식은 관청에 몰수하고 죄를 논단(論斷)하게 할 것이다.

1. 고려 왕조의 말기에는 풍속이 사치를 숭상하여 연향(宴享)과 재회(齋會)에는 반드시 먼 지방의 이어 쓰기 어려운 물건을 쓰게 되어서 지금까지 이르고 남아 있는 풍습(風習)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 금은(金銀)·주옥(珠玉)·진채사(眞彩絲)·화단자(花段子) 등 물건은 일체 모두 금단(禁斷)하게 할 것이다.

1. 고려 왕조의 말기에 처음으로 별안색(別鞍色)[104]을 설치했는데, 도리어 공조(工曹)의 권한을 침범하게 되니, 전혀 관직을 임명한 뜻을 잃었으므로 마땅히 제거해야 될 것이다.

1. 사사로이 소와 말을 도살하는 것은 마땅히 금령(禁令)이 있어야 될 것이니,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이를 관장하게 할 것이다.

1. 어량(魚梁)과 천택(川澤)은 사재감(司宰監)의 관장한 바이니, 사옹원(司饔院)에 분속(分屬)시키지 말게 하여 출납(出納)을 통일하고, 산장(山場)과 초지(草枝)는 선공감(繕工監)의 관장한 바이니, 사점(私占)을 하지 말게 하고 그 세(稅)를 헐하게 정하여 백성의 생계를 편리하게 할 것이다.

1. 선공감(繕工監)과 사수감(司水監)에 바치는 시탄(柴炭)과 사복시(司僕寺)에 바치는 곡초(穀草)는 백성이 이를 심히 괴롭게 여기니, 마땅히 맡은 관사(官司)로 하여금 다시 소비하는 것을 정하여 전일과 같은 폐단이 없게 할 것이다.

1. 관청에 소속된 노비(奴婢)는 사람마다 역(役)을 서서 그들로 하여금 배고프고 춥게 하여 도망해 숨게 됨을 면치 못하게 하니, 지금부터는 매 2인에 1인을 사역시키어 안정된 처소를 잃지 말게 하며, 그 자신이 죽은 사람은 본주인에게 충당해 세우지 말게 하고, 나이 만 60세가 된 사람은 역(役)에서 방면(放免)하게 하며, 매 10인에 1인을 뽑아 나누어 두목(頭目)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소속을 관장하게 하되, 만약 도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두목(頭目)을 책망하게 할 것이다.

1. 명칭과 실상이 서로 혼잡해서는 안 되니,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제외하고는 공사(公私)의 서장(書狀)은 표지(表紙)를 쓰지 못하게 할 것이며, 장흥고(長興庫)에 바치는 것은 그 소용에 따라 또한 마땅히 다시 정해야 될 것이다.

1. 평민(平民)이 심은 과실과 대나무를 관사(官司)에서 그 대금을 주지 않고 공공연히 가져다 쓰는 것은 일체 모두 금단(禁斷)하고, 각 관사(官司)에서 모두 과원(菓園)을 설치하고 심어서 용도에 공급하게 할 것이다.

1. 70세 이상 되는 늙은이는 정조(正朝)와 탄일(誕日) 등 경사(慶事)에 관계되는 외에는 조반(朝班)을 따라 조알(朝謁)하는 것은 면하도록 하여, 나의 노인을 공경하는 뜻에 부응하게 할 것이다.

1. 외방(外方)에서 제련(製鍊)하는 철물(鐵物)은 전적으로 군기감(軍器監)에 맡겨서 그 본래 정한 월과(月課)의 수목(數目) 외에는 함부로 허비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 병기(兵器)는 흉기(凶器)이므로, 정조(正朝)와 탄일(誕日)의 하례(賀禮)에 군기(軍器)로써 바치는 것은 일체 모두 금단(禁斷)하게 할 것이다.

1. 군현(郡縣)의 공물(貢物)은 그 토지의 생산에 따라 다시 그 액수(額數)를 정하고, 그 생산되지 않는 물건은 수납(收納)을 면제하게 할 것이다.

1. 창고와 궁사(宮司)는 전적으로 삼사(三司)에 맡겨 그 출납(出納)을 관장하게 할 것이다.

1. 쓸데없는 관원은 도태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하여 상세히 의논하고 신문(申聞)하여 실제의 효과를 찾도록 할 것이다.

1. 여기에 기재된 중에서 미진한 사리(事理)는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계속해 의논하여 신문(申聞)해서 거행하게 할 것이다."


9月 17日[편집]

하윤과 조박에게 《사서》에 구두점을 쳐서 바치게 하다[편집]

○己丑/命知經筵事政堂文學河崙、兼大司憲趙璞曰: “予欲覽四書, 點節以進。”

지경연사 정당 문학(知經筵事政堂文學) 하윤(河崙)과 겸 대사헌(兼大司憲) 조박(趙璞)에게 명하였다.

"내가 《사서(四書)》를 보고자 하니 구절(句節)마다 점(點)을 쳐서 바치라."


정사 공신의 등급을 정하여 내린 교지[편집]

○上與我殿下, 論第定社功臣。 命都承旨李文和傳旨曰:

國家創業未久, 誠宜端本正始, 以凝天命, 傳祚萬世。 不幸奸臣道傳、誾等, 當上王失豫彌留之際, 欲挾幼孼爲亂, 謀害我諸兄, 幾覆我已成之業, 禍在不測。 義安公和、益安公芳毅、懷安公芳幹、殿下諱、上黨候李伯卿、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參贊門下府事李茂ㆍ趙璞、政堂文學河崙、參贊門下李居易、參知門下趙英茂, 奮忠決策, 定難反正, 載安宗社, 功勞重大, 永世難忘。 寧安侯良祐、靑原侯沈淙、奉寧侯福根、門下侍郞贊成事之蘭、參贊門下思吉、商議門下趙溫、判中樞院事金輅、前商議中樞朴苞、前中樞院學士鄭擢、同知中樞院事天祐、商議中樞思靖、同知中樞張湛、中樞院副使張哲、右副承旨叔蕃、上將軍克禮、大將軍無咎、戶曹議郞無疾等, 推誠協贊, 定難反正, 載安宗社, 功勞重大, 永世難忘。 褒賞之典, 有司擧行。

임금이 우리 전하[105]와 더불어 정사 공신(定社功臣)의 등급을 논하고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교지를 전하였는데, 그 교지는 이러하였다.

"국가에서 창업(創業)한 지가 오래 되지 않으니, 진실로 근본을 바루고 시초를 바로 잡아 천명(天命)에 안정하고 국조(國祚)를 만세(萬世)에 전해야 될 것임에도, 불행히 간신(奸臣) 정도전과 남은 등이 상왕(上王)께서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는 시기를 당하여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난을 일으켜 우리 여러 형제를 해치려 하고, 우리의 이미 이루어진 왕업(王業)을 전복(顚覆)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는데,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익안공(益安公) 이방의(李芳毅)·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전하(殿下) 이방원(李芳遠)·상당후(上黨候) 이백경(李伯卿)·좌정승 조준(趙浚)·우정승 김사형(金士衡),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무(李茂)·조박(趙璞), 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河崙)·참찬 문하(參贊門下) 이거이(李居易)·참지 문하(參知門下) 조영무(趙英茂)가 충성을 분발하여 계책을 결정하고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되게 하고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공로가 중대하여 영구한 세대에 이르러도 잊을 수가 없겠다. 영안후(寧安侯) 양우(良祐)·청원후(靑原侯) 심종(沈淙)·봉녕후(奉寧侯) 복근(福根)·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이지란(李之蘭)·참찬 문하(參贊門下) 장사길(張思吉)·상의 문하(商議門下) 조온(趙溫)·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김로(金輅)·전 상의중추 박포(朴苞)·전 중추원 학사 정탁(鄭擢)·동지 중추원사 이천우(李天祐)·상의중추(商議中樞) 장사정(張思靖)·동지중추(同知中樞) 장담(張湛)·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장철(張哲)·우부승지(右副承旨) 이숙번(李叔蕃)·상장군 신극례(辛克禮)·대장군 민무구(閔無咎)·호조 의랑(戶曹議郞) 민무질(閔無疾) 등은 성심을 써서 보좌하고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시키고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공로가 중대하여 영구한 세대에 이르러도 잊을 수가 없겠다.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맡은 관원은 이를 거행하라."


9月 18日[편집]

성절 하례를 행하다[편집]

○庚寅/上率群臣, 行聖節賀禮。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성절(聖節)의 하례(賀禮)를 행하였다.


금성이 태미원 상장을 범하다[편집]

○金星犯太微上將。

금성(金星)이 태미 상장(太微上將)을 범하였다.


사헌부에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가산 적몰을 청했으나 과전만 회수하게 하다[편집]

○憲司請籍沒鄭道傳、南誾、沈孝生、張至和、李懃等家産, 我殿下言於上, 止收科田。

사헌부에서 정도전·남은·심효생·장지화(張至和)·이근(李懃) 등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기를 청하니, 우리 전하(殿下)께서 임금에게 말하여 다만 과전(科田)만 회수하게 하였다.


간관이 유신(儒臣)을 스승 삼고 엄인의 관직을 제한할 것 등 7개항에 대해 건의하다[편집]

○諫官上言: “殿下新卽寶位, 事必師古, 求言圖治。 臣等幸在言官, 謹以管見條列, 伏惟裁擇施行。 一, 師者, 師其道也。 前朝崇信浮屠, 以僧爲師, 殊失古制。 願自今, 擇大臣年高德邵者爲師, 以革因襲之弊。 一, 奄人之任, 灑掃宮闈而已。 前朝之季, 濫受朝官, 或處相府, 氣勢日驕, 以至於妨賢病國。 願自今, 官不過三品, 不許朝官, 如有異績, 賞以金帛; 內竪, 官不過五品, 亦不許朝官。 一, 史官, 掌記時事。 願自今日侍左右。 一, 告身之法, 必更歷臺省, 所以考才行分貴賤也。 今也四品以上, 直授官敎, 賢不肖或至於混淆, 賤隷得側於朝班。 願自今, 兩府已上, (宜)〔依〕舊官敎; 嘉善已下, 令臺省署出告身。 一, 古者, 羲、和世官; 醫不三世, 不服其藥。 願自今, 書雲典醫, 俾世其官, 以精其業。 一, 不曉漢語者, 不許司譯院官; 不通兵書者, 不許訓鍊觀職。 一, 外方閑良, 官以孝廉, 茂才居京者, 不見敍用, 淹延歲月, 弊固不細。 願擇可用者用之, 其餘各還鄕里。” 上曰: “四品以上, 姑以前例行之。”

간관(諫官)이 상언(上言)하였다.

"전하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시매, 일은 반드시 옛날 것을 본받아 신하의 바른말을 구하여 정치를 도모하옵는데, 신(臣) 등이 다행히 간관의 직책에 있으므로 삼가 좁은 소견을 조목별로 열거(列擧)하오니, 삼가 재택(裁擇)하여 시행하옵소서.

1. 스승[師]이란 것은 그 도(道)를 모범하는 것입니다. 고려 왕조에서는 불교를 숭상하고 믿게 되어 중으로써 스승으로 삼아, 전연 옛날의 제도를 잃었던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대신 중에서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을 뽑아 스승으로 삼아 예전대로 행하는 폐단을 개혁할 것이며,

1. 엄인(奄人)[106]의 임무는 궁위(宮闈)를 소제하는 것뿐인데, 고려 왕조의 말기에는 조관(朝官)으로 함부로 임명하여, 혹은 상부(相府)[107]에 거처하여 기세가 날로 교만하게 되어, 현인(賢人)의 등용을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까지 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관직은 3품(品)에 지나지 못하게 하고 조관으로 임명하지도 못하게 하되, 만약 특이한 공적이 있으면 금과 비단으로써 상주게 할 것이며, 내수(內竪)[108]는 관직이 5품에 지나지 못하게 하고, 또한 조관(朝官)으로 임명하지도 못하게 할 것입니다.

1. 사관(史官)은 시사(時事)의 기록을 관장하고 있으니,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좌우에 모시게 할 것이며,

1. 고신(告身)의 법이 반드시 대성(臺省)을 거쳐야 하는 것은 재주와 덕행을 상고하여 귀하고 천한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때문인데, 지금은 4품 이상의 관원에게는 바로 관교(官敎)[109]로 임명하여 현명하고 불초(不肖)한 사람이 혹 혼잡하게 되고 천례(賤隷)들이 조관(朝官)의 반열(班列)에 끼이게 되니,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양부(兩府)[110] 이상의 관원은 그전대로 관교로 하고, 가선(嘉善) 이하의 관원은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고신(告身)을 서경(署經)하게 할 것입니다.

1. 옛날에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111]는 관직을 세습(世襲)했으며, 의원(醫員)은 3대(代)를 계속하지 않으면 그 약을 복용(服用)하지 않았으니,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서운관(書雲觀)과 전의(典醫)는 그 관직을 세습하게 하여 그 사무를 정밀히 학습하게 할 것이며,

1. 중국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역원(司譯院)의 관직에 임명하지 말고, 병서(兵書)를 통달하지 못하는 사람은 훈련관(訓鍊觀)의 관직에 임명하지 말게 할 것이며,

1. 외방(外方)의 한량관(閑良官)이 효렴(孝廉)과 무재(茂才)로써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서용(敍用)되지 못하면서 세월만 오래 끌고 있으니, 폐단이 진실로 작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대, 임용할 만한 사람은 뽑아서 임용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각기 향리(鄕里)로 돌아가게 하소서."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4품 이상의 관원은 잠정적으로 전례(前例)로써 이를 시행하라."


9月 21日[편집]

유성이 직녀성 자리에서 하고성 자리로 들어가다[편집]

○癸巳/流星出織女入河鼓。

유성(流星)이 직녀성(織女星)의 분야에서 하고성(河鼓星)의 분야로 들어갔다.


강계권 한규 등 수 십인의 직첩을 회수하고 전민(田民)을 관청에 소속시키다[편집]

○康繼權、韓珪、鄭臣義、鄭津、康澤、李慥、吳蒙乙、李䇕、辛克恭、張允和、洪有龍、辛克溫、柳隱之、柳衍之、朴耆、康仲卿等, 謝貼收取, 田民屬公; 李枝、南實、沈道源、李伯由、鄭東石、貴生等四十三人, 外方付處。 又流李得芬于吉州; 金湊謝貼收取, 田民屬公; 尹祥田民屬公, 外方付處。

강계권(康繼權)·한규(韓珪)·정신의(鄭臣義)·정진(鄭津)·강택(康澤)·이조(李慥)·오몽을(吳蒙乙)·이수(李䇕)·신극공(辛克恭)·장윤화(張允和)·홍유룡(洪有龍)·신극온(辛克溫)·유은지(柳隱之)·유연지(柳衍之)·박기(朴耆)·강중경(康仲卿) 등의 사첩(謝貼)을 수취(收取)하고 전민(田民)은 관청에 소속시켰으며, 이지(李枝)·남실(南實)·심도원(沈道源)·이백유(李伯由)·정동석(鄭東石)·이귀생(李貴生) 등 43인은 외방(外方)에 부처(付處)시켰으며, 또 이득분(李得芬)은 길주(吉州)로 귀양보내고, 김주(金湊)는 사첩(謝貼)을 수취(收取)하고 전민(田民)은 관청에 소속시켰으며, 윤상(尹祥)은 전민을 관청에 소속시키고 외방(外方)에 부처(付處)시켰다.


9月 22日[편집]

신의 왕후 기재를 장의사에서 베풀다[편집]

○甲午/設神懿王后忌齋於藏義寺。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기재(忌齋)를 장의사(藏義寺)에서 베풀었다.


9月 26日[편집]

각도 절제사가 도(道)에서 공급받는 늠료를 정하다[편집]

○戊戌/使司稟旨, 定諸道節制使道受料之數。 軍官伴黨十五、從人十五、大小馬各十五匹, 留營軍官五十、從人五十、大小馬各五十匹、軍器打造工匠三十七名。

도평의사사에서 임금의 교지를 받아 각도의 절제사가 도(道)에서 공급[料]을 받는 수를 정하였으니, 군관반당(軍官伴黨)이 15명, 종인(從人)이 15명, 크고 작은 말이 각각 15필이고, 유영 군관(留營軍官)이 50명, 종인(從人)이 50명, 크고 작은 말이 각각 50필, 군기(軍器)를 만드는 공장(工匠)이 37명이었다.


9月 28日[편집]

큰바람이 불다[편집]

○庚子/大風拔木飛瓦石。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과 돌이 날아갔다.


9月 29日[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