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태평천하/제14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해 저무는 만리장성

[편집]

만일 오늘이 우리한테 새것을 가져다주지 않고 어제와 꼬옥 같은 것만 되풀이를 한다면, 참으로 우리는 숨이 막히고 모두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와 같으면서도(어제 치면서도 더 자라난) 한 다른 오늘 치를 우리한테 가져다주고,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하는 동안 인간은 늙어 백발로, 백발은 마침내 무덤으로…… 이렇게 하염없어도 인류는 하루하루 더 재미있어 간답니다.

그렇듯 반가운 새날이 시방 시작되느라고 먼동이 휘엿이 밝아 옵니다.

날이 밝으면서 뚜우 여섯점 고동이 웁니다. 이 여섯점 고동에 맞추어 우리 낡은 윤직원 영감도 새날을 맞느라고 기침을 했습니다.

대단 부지런하고, 이 첫새벽(여섯점)에 일어나는 부지런은 춘하추동 구별이 없이, 오십 년 이짝 지켜 오는 절대의 습관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잠이 깨자 맨 먼저 머리맡의 놋요강을 집어 들고, 밤사이 피에서 걸러 놓은 독소를 뽑습니다. 신진대사라니, 새날이 새것을 들여다가 새생명을 떨치기 위하여 묵은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묵은 것의 배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절절 절절, 쏟아져 나오는 액체를 윤직원 영감은 연방 손바닥으로 받아 올려다가는 눈을 씻고, 받아 올려다가는 눈을 씻고 합니다. 매일 아침 소변으로 눈을 씻으면 안력이 쇠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부터 일러 오던 말인데, 윤직원 영감은 시방 그 보안법(保眼法)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십 년을 두고 해 내려오는 것인데, 만일 꼬노리야라도 앓았다면 장님이 되었기 십상이겠지만, 요행 그렇진 않았고, 소변보안법의 덕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미상불 안력이 아직도 좋아서, 원체 잔글씨만 아니면 그대로 처억척 보는 건 사실입니다.

누구, 의학박사의 학위논문거리에 궁한 이가 있거들랑 이걸 연구해서「뇨(尿)에 의한 시신경(視神經)의 노쇠방지(老衰防止)와 및 그 원리에 관하여」라는 것을 한번 완성시킨다면 박사 하나는 받아 논 밥상일 겝니다.

윤직원 영감은 이윽고 안약장사를 울릴 그 보안법을 행하고 나서는, 자리옷을 여느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담뱃대에 담배를 붙여 뭅니다.

푸욱푹 피어 오르는 담배 연기가 아직도 한밤중인 듯 전등불이 환히 켜져 있는 방 안으로 자욱이 찹니다. 말도 없고 소리도 없고, 인간이란 단 하나뿐, 사람이 심심하다기보다도 전등과 방 안의 정물(靜物)들이 도리어 무료할 지경입니다.

담배가 반 대나 탔음직해서는 삼남이가 부룩송아지 같은 대가리를 모로 둘러, 사팔눈의 시점(視點)을 맞추면서 방으로 들어섭니다. 손에는 빨병을 조심조심 들고…….

아침마다 하는 일과라, 삼남이는 들고 들어온 빨병을 말없이 내바치고, 윤직원 영감 또한 말없이 그걸 받아 놓더니, 물었던 담뱃대를 뽑고 연상 서랍에서 소라껍데기로 만든 잔을 꺼냅니다.

졸졸 졸졸 놀면한 게, 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게, 어쩌면 마침 데운 정종 비슷한 것을 잔에다가 그득 따릅니다.

이것이 역시 오줌입니다. 하나, 여느 오줌은 아니고 동변(童便)이라고, 음양을 알기 전의 어린애들의 오줌입니다.

동변을 받아 먹으면 몸에 좋다는 것도, 오줌으로 보안을 하는 것과 한 가지로 옛날부터 일러 내려오던 말입니다. 그걸 보면 요새 그, 오줌에서 호르몬이라든지 무어라든지 하는 약을 뽑는다는 것도 노상 허황한 소리는 아닌 듯싶고, 만일 그게 사실이라고 하면 오줌에 들어 있는 호르몬을 발견해 낸 명예는 아무리 해도 우리네 조선 사람의 조상이 차지를 해야 하겠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오줌을 그처럼 두루 이용하는데, 일찍이 삼십 년 전 오줌보안법으로 더불어 이 오줌 장복(長服)도 시작했던 것입니다.

시골서는 동변쯤 받아 먹기가 매우 편리했지만, 서울로 오니까는 그것도 대처(도시)의 인심이라, 윤직원 영감 말따나, 오줌도 사먹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이웃의 가난한 집으로 어린애가 있는 데를 물색해서 그 어린애들의 아침 자고 일어난 오줌을 받아 오기로 특약을 해두었습니다. 그 대금이 매삭 이십 전…… 저편에서는 삼십 전은 주어야 한다는 것을, 대복이가 십 전만 받으라고 낙가(落價)를 시키다 못해, 이십 전에 절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줌 특약을 해두고는, 새벽이면 삼남이가 빨병을 둘러메고서 오줌을 걷어 오는 것이고, 시방도 바로 그 오줌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빨병에서 오줌을 따르는 동안, 삼남이는 마침 생을 한 뿌리 껍질을 벗깁니다.

이건 바로 쩍쩍 들러붙는 약주술로 해장이나 하는 듯이, 쪽 소리가 나게 오줌 한 잔을 마시고, 이어서 두 잔, 다시 석 잔, 석 잔을 마시자 삼남이가 생 벗긴 것을 두 손으로 가져다 바칩니다.

"그년의 자식이 엊저녁으 짜게 처먹었넝개비다! 오줌이 이렇게 짠 걸 보닝개……."

윤직원 영감은 상을 찌푸리면서 생을 씹습니다.

오줌이란 본시 찝찔한 것이지만 사람의 신경의 세련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삼십 년이나 두고 매일 아침 먹어 온 윤직원 영감은 그것이 조금 더 짜고, 덜 짜고 한 것까지도 알아맞힙니다.

"……빌어먹을년의 자식이 아마 간장을 한 종재기나 처먹었넝가 부다!"

"오늘버텀은 간장 한 종재기씩 멕이지 말라구, 가서 말히라우?"

과연 간장을 한 종지씩 먹어서 오줌이 짜고, 그래서 영감님으로 하여금 더 짠 오줌을 자시게 한다는 것은, 삼남이로 앉아 볼 때에 그대로 묵인할 수가 없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야―야, 구성 읎넌 소리 내지두 마라! 누가 너더러 그런 참견 허라냐?"

"그럼, 구성 읎넌 소리 안 히라우!"

"참, 너두 딱허다!"

"얘."

삼남이는 물에 헹구어다 두려고 빨병과 소라잔을 집어 듭니다.

"약 대리냐!"

"얘."

"약, 잘 부아서 대려! 어제 아침 치는 약이 너머 졸았더라!"

"얘."

삼남이가 나간 뒤에 윤직원 영감은, 이번에는 보건체조(保健體操)를 시작합니다.

두 다리를 쭈욱 뻗고, 두 팔을 위로 꼿꼿 뻗쳐 올리는 게 준비동작.

그 다음에 발부리를 목표로, 그것을 붙잡으려는 듯이 허리 이상의 상체와 뻗쳐 올린 두 팔을 앞으로 와락 숙입니다. 그러나 이내 도로 폅니다. 그리고는 또 숙였다가, 도로 또 펴고…….

이렇게 계속해 숙였다가는 펴고 폈다가는 숙이고, 몸이 비대한데 배가 또한 커서 좀 힘이 드는 노릇이긴 하나, 하나, 둘, 셋 연해 세어가면서 쉰 번을 채웁니다. 쉰 번을 채우니까, 아니나다를까 맨 처음에는 어림도 없던 것이, 뻗은 발부리와 숙이는 손끝이 마침내 맞닿고라야 맙니다.

간단한 ××강장술(强壯術) 비슷하다고 할는지. 하니 그럴 바이면 라디오 체조를 하는 게 좋지 않으냐고 하겠지만, 그거야 젊은 애들이나 할 것이지, 노인이 어디 점잖지 않게시리…….

후줄근하게 땀이 배고 약간 숨이 가쁜 것을, 앞 미닫이를 열어 놓고 앉아서 서늑서늑한 아침 바람을 쏘입니다.

날은 훨씬 밝았고, 바람 끝이 소스라치게 싸늘합니다.

"허― 날이 이렇기!"

혼자 걱정을 하는데, 마침 대복이가 아침 문안삼아, 오늘 하루의 일을 협의할 겸 건너왔습니다.

"이, 날이 이렇기 냉히여서 큰일 안 났넝가?"

"글씨올시다!"

대복이는 문안인사도 할 사이가 없고, 공순히 꿇어앉습니다.

"……이러다가 되내기(된서리)나 오는 날이면 큰일나겄는디요."

"나두 허느니 말이네……! 하누님두 원, 무슨 심청이람 말이여. 서리두 서리지만, 우선 늦베〔晩種稻〕가 영글〔結實〕이 들 수가 있어야지! 그러잖이두 그놈의 수핸지 급살인지 때민에 도지〔賭租〕를 감히여 달라고 생지랄덜을 허넌디!"

가을로 접어들면서, 윤직원 영감과 대복이가 노상 걱정을 하게 된 것이 금년 추숩니다. 농형(農形)이 대체로 풍년은 풍년이지만, 전라도에 수해가 약간 있었고, 윤직원 영감네 논도 얼마간 해를 입었습니다. 어느것은 겨우 반타작이나 되겠고, 어느것은 사태와 물에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서, 벼 한 톨 추수는커녕 그 논을 다시 파 일구는 데 되레 물역이 먹게 생겼습니다.

이것은 지난 백중 무렵에 대복이가 실지로 내려가서 보고 온 것이니까, 노상 소작인들의 엄살로만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기야 그렇다고 해도 윤직원 영감은 내밀 배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논으로 말하면 죄다 도조를 선세(先稅)로 정했으니까 상관이 없다. 소작계약에도 씌어 있지만, 흉년이 들어서 추수가 덜 났다거나 또 아주 없다거나 하더라도, 선세인만큼 소작인은 정한 대로 도조를 물어야 경우가 옳지 않으냐.

만약 흉년이라고 도조를 감해 주기로 든다면, 그러면 그 반대로 풍년이 들어서 벼가 월등 많이 나는 해는 도조를 처음 정한 석수(石數)보다 더 받아도 된단 말이냐? 그때에 가서 도조를 더 물라면 물 테냐? 물론 싫다고 할 것이다. 거 보아라. 그러니까 흉년 핑계를 대고서 도조를 감해 달라고 하는 것은 공연한 떼다.'

매우 지당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경위는 빠질 게 없는데, 윤직원 영감의 말대로 하면,

'세상이 다 개명을 해서 좋기는 좋아도, 그놈 개명이 지나치니까는 되레 나쁘다. 무언고 하니, 그 소위 농지령이야, 소작조정령이야 하는, 천하에 긴찮은 법이 마련되어 가지고서, 소작인놈들이 건방지게 굴게 하기, 그래 흉년이 들든지 하면 도조를 감해 내라 어째라 하기, 도조를 올리지 못하게 하기, 소작을 떼어 옮기지 못하게 하기…….'

이래서 모두가 성가시고 뇌꼴스러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땅 가지고 내 맘대로 도조를 받고, 내 맘대로 소작을 옮기고 하는데, 어째서 도며 군이며 경찰이 간섭을 하느냐?'

이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고, 해서 불평도 불평이려니와 윤직원 영감한테는 커다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던 것입니다.

아무튼 싹수가, 줄잡아야 천 석은 두웅둥 뜨게 되었고(물론 배짱대로야 버티어는 보겠지만 도나 군이나 경찰의 권유며 간섭에는 항거를 해서는 못쓰니까 말입니다) 그러자니 생으로 배가 아파 요새 며칠 대복이와 주종이 맞대고 앉으면 걱정이 그 걱정이요, 공론이 어떻게 하면 묘한 꾀를 써서 소작인들을 꼼짝못하게 하여 옹근 도조를 받을까 하는 그 공론입니다.

그런데 우환중에 날이 이렇게 조랭(早冷)을 해서, 벼의 결실을 부실하게까지 하려 드니 더욱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대복이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는 참에, 삼남이가 약을 달여 짜가지고 들여다 놓습니다. 삼과 용을 주재로 한 보약입니다.

오줌도 먹고 보건체조도 하고, 좋은 보약도 먹고 해서 어떻게든지 몸을 충실히 하여 오래오래 살고 싶은 게 윤직원 영감의 크고 큰 소원입니다.

만석의 부를 그대로 누리면서(아니, 자꾸자꾸 더 늘려 가면서) 오래오래 백 살 이백 살, 백 살 이백 살이라니, 천 살 만 살(아니 천지가 무궁할 테니, 그 천지로 더불어 무궁토록)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 이 가산을 남겨 두고, 이 좋은 세상을 백 살을 못 살고서 죽어 버리다니, 그건 도저히 원통하고 섭섭해 못 할 노릇입니다.

옛날의 진시황(秦始皇)은 영생불사를 하고 싶어, 동남 동녀 오천 명을 동해의 선경으로 보내어 불사약을 구하려고 했다지만, 우리 윤직원 영감도 진실로 그만 못지않게 영생의 수명을 누리고 싶습니다.

하기야 걸핏하면 머, 내가 앞으로 오십 년을 더 살겠느냐, 백 년을 더 살겠느냐, 다직 한 십 년 더 살다가 죽을걸…… 어쩌구 육장 이런 소리를 하곤 하기는 합니다.

물론 그것이 천지의 공도(公道)요 하니까 사실도 사실이겠지만, 윤직원 영감은 비록 말은 그렇게 할 값에, 마음은 결단코 앞으로 한 십 년 그거나 더 살고서 죽고 싶진 않습니다.

절대로 영생불사…… 진시황과 같이, 간절하게 영생불사를 하고 싶습니다.

윤직원 영감이 재산을 고이고이 지키면서 더욱더욱 늘리고, 일변 양반을 만들어 내고자 군수와 경찰서장을 양성하고 하는 것은, 진시황으로 치면 오랑캐를 막아 진나라를 보전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던 역사적이요 세계적인 그 토목사업과 다름없는 역사적인 정신적 토목사업입니다.

만리의 장성을 높이 쌓아, 나라를 천지로 더불어 길이길이 지키고, 나는 불사약을 먹어 이 나라의 주재자로 이 영광을 무궁토록 누리고…… 하자던 진시황과, 만석꾼의 가산을 더욱 늘려 가면서 천지로 더불어 길이길이 지키고, 양반을 만들어 가문을 빛내되, 나는 오줌을 먹고 보건체조를 하고 보약을 먹고 하여, 이 집안의 가장으로 이 영광을 무궁토록 누리고…… 하자는 윤직원 영감과, 그 둘은 조금도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럭저럭 여덟시가 되자, 윤직원 영감은 안으로 들어가서 조반을 자시고 나와, 다시 그럭저럭 아홉시가 되었습니다.

하늘은 씻은 듯이 맑고 햇볕은 향기롭습니다. 정히 좋은 날이요, 윤직원 영감한테는 그새와 마찬가지나, 새로이 행복된 오늘입니다. 오후쯤 해서는 올챙이와 말이 얼린 수형 조건으로 오천구백오십 원을 주고서 칠천 원짜리 수형을 받아, 일천오십 원의 이익을 볼 테니, 그 중 일백오 원은 구문으로 올챙이를 주더라도 구백사십오 원이고 본즉, 오늘도 벌이가 쑬쑬하여 기쁘고.

그런데 오늘은 또 춘심이와 다아 이러쿵저러쿵하게 될 날이어서, 이를테면 특집호화판(特輯豪華版)입니다.

행복과 만족까지는 모르겠어도, 윤직원 영감 이외의 다른 식구들도 죄다 평온무사한 것만은 적실합니다.

태식이는 골목 구멍가게에 나가서 맘껏 오마께를 뽑고 사먹고 하니, 무사태평을 지나 오히려 행복이고.

경손이는 간밤에 춘심이로 더불어 랑데부를 하면서, 이 원 돈을 유흥하던 추억에 싸여 시방 학과에도 여념이 없는 중이고.

서울아씨는『추월색』을 일찌감치 들고 누웠으니, 오만 시름 다 잊었고…….

뒤채의 두 동서는 바느질에 여념이 없는 중, 박씨는 남편 종수가 오늘은 집에를 들어오겠지야고 안심코 기다리고…….

고씨는 새벽 세시가 지나 술이 얼큰해 들어오더니 여태 태평몽이고…….

동소문 밖 ××원 별장에서는 종수가 배반이 낭자한 요리상 앞에 기생들과 병호로 더불어 역시 태평몽이고…….

옥화는 간밤의 일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뭘 집 한 채와 패물과 또 현금으로 이삼천 원 몽똥그렸으니, 발설이 되어 윤주사와 떨어져도 그다지 섭섭할 건 없다고 안심이고.

윤주사도 도합 사천오백 원을 마작으로 펐으나 오천 원도 채 못 되는 것, 술 사먹은 폭만 대면 그만이라고 새벽녘에야 든 잠이 시방 한밤중이요, 자고 있으니까 동경서 온 그 전보의 사단도 걱정을 잊었고…….

다 이렇습니다. 그렇고 다시 윤직원 영감은…….

윤직원 영감은 오정 때에 오라고 한 춘심이를 어째 다뿍 늘어지게 오정 때에 오라고 했던고. 또, 제 아범이 앓는다고 불려갔으니 혹시 못 오기나 하면 어찌하노 해서, 바야흐로 등이 단 참인데, 웬걸 아홉시 치는 소리가 때앵땡 나자 고년이 씨근버근 해뜩반뜩 달려들지를 않는다구요!

어떻게도 반가운지! 윤직원 영감은 앞미닫이를 더럭 열면서 뛰어나오기라도 할 듯이 엉덩이를 떠들썩, 커다란 얼굴에다가 하나 가득 웃음을 흩트립니다.

"어서 오니라…… 아범은 앓넌다더니 인재 갱기찮어냐?"

"내애, 인저 다 나았어요……."

춘심이는 (속으로 요옹용 하면서) 토방에 가 선 채 방으로 들어가려고도 않습니다.

"……어서 나오세요, 반지 사러 가게요……."

"헤헤헤! 그년이 이저빼리지두 안힜네……! 그래라, 가자! 제엔장 맞일……."

"내가 그걸 잊어버려요? 밤새두룩 잠두 아니 잔걸! 아, 오정 때 오라구 허신 걸 아홉점에 왔다면 고만이지 머어…… 어서 옷 입으세요!"

"오―냐, 끙……."

윤직원 영감은 뒤뚱거리고 일어서서 의관을 차립니다.

"……반지 파넌 가게서 쬐깐헌 여학생이 반지 찐다구 숭보면 어쩔래?"

"남이 숭보는 게 무슨 상관 있나요? 나만 좋았으면 고만이지……."

"으응, 그리여잉! 그렇다먼 갱기찮지!"

"갠찮기만 해요? 머……."

"오냐 오냐!"

괜히 속이 굴져서 말이 하고 싶으니까 입을 놀리겠다요.

어제 오후 부민관의 명창대회에 가던 때처럼, 탕건 받쳐 통영갓에, 윤이 치르르 흐르는 안팎 모시 진솔것에, 하얀 큰 버선에다가 운두 새까마니 간드러진 가죽신에, 은으로 개대가리를 한 개화장에, 합죽선에 이렇게 차리고 처억 나섭니다.

덜씬 큰 윤선 옆에 거룻배 하나가 붙어서 가는 격이라고나 할는지, 아무튼 이 애인네 한 쌍은 이윽고 진고개 어귀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마다 모두들 윤직원 영감을 한 번씩 짯짯이 보면서 지나갑니다. 더구나 때묻은 무명 고의 적삼에 지게를 짊어지고 붉은 다리를 추어 올린 요보가 아니면, 뒷짐지고 흰 두루마기에, 어둔 얼굴에, 힘없이 벌린 입에, 어릿거리는 눈으로 가게를 끼웃끼웃, 가만히 들어와서는 물건마다 한참씩 뒤적뒤적하다가 슬며시 나가 버리는 센징들만이 조선 사람인 줄 알기를 십상으로 하던 본전통 주민들은, 시방 이 윤직원 영감의 진고개 좁은 골목이 뿌드읏하게시리 우람스런 몸집이며 위의 있고 점잖은 얼굴이며 신선 같은 차림새 하며가 풍기는 얌반상의 위풍에 그만 압기라도 되는 듯, 제각기 눈을 흡뜨고서 하― 입을 벌립니다.

좀 심한 천착인 것 같으나, 윤직원 영감으로 해서 조선 사람에도 요보나 센징말고 조센노 얌반상이 있다는 것을 그야말로 재인식했다고 할 수가 있겠고, 따라서 윤직원 영감 자신은 그 필요는커녕 도리어 긴찮은 일로 여기는 것이지만(그렇기 때문에 애꿎이) 조선 사람을 위해 무언의 만장 기염을 토한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앞을 서서 가던 춘심이가 초입을 조금 지나 어떤 귀금속상점 앞에 머무르더니, 진열창 속을 파고 들여다봅니다. 제가 눈익혀 두었던 그 칠 원 오십 전짜리 반지를 찾는 속인데,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보이질 않습니다.

낙심이 되어, 어쩔까 하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윤직원 영감을 데리고 그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섭니다.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

구경도 할 겸, 점원들이 있는 대로 대여섯 일제히 합창을 하고 나섭니다.

춘심이는 점원 하나를 상대로, 권번에서 배운 토막일어를 이용하여, 문제의 칠 원 오십 전짜리 반지를 찾습니다.

"네에! 그건입쇼……!"

답답히 듣고 있던 점원은 척 조선말로 대응을 합니다.

"……그건 마침 다 팔렸습니다마는, 그거 비슷하구두……."

점원은 부지런히 진열장을 안에서 열고, 빨갱이 파랭이 노랭이 깜쟁이, 모두 올망졸망 알룽달룽, 반지가 들어박힌 곽을 꺼내다 놓더니, 그 중 빨갱이 한 놈을 뽑아 춘심이를 줍니다.

"이것이 썩 좋습니다. 아까 말씀하시던 거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뽄두 이뿌구, 돌두 빛깔이 곱구…… 네헤."

춘심이가 받아 들고 보니, 아닌게아니라 요전 치보다 더 이쁘고 좋아 보입니다. 다시 왼쪽 무명지에다가 끼어 보니까는, 아주 맞춤으로 꼭 맞습니다.

"이거 사주세요."

춘심이는 정가표가 실 끝에서 아른거리는 반지를 손에 낀 채, 윤직원 영감의 코밑에다가 들이댑니다.

"그게 칠 원 오십 전이라냐? 체―참, 손복허겄다!"

윤직원 영감은 두루마기 자락을 젖히고 염낭끈을 풀려다가 점원을 돌아봅니다.

"……이게 칠 원 오십 전이라먼 너머 과허니 조깨 깎읍시다?"

"아니올시다! 이건 십 원입니다, 네헤."

"엉? 이게 십 원이여……? 아―니, 너 머시냐, 칠 원 오십 전짜리 산다더니, 십 원짜리를 골르냐?"

"그래두 그건 죄다 팔리구 없다는걸요, 머……."

"그럼 못 사겄다! 다런 디루 가던지, 이담날 오던지 그러자!"

"난 싫여요! 이거가 꼬옥 맘에 드니깐 이거 사주세야지, 머……."

"에이! 안 될 말!"

윤직원 영감은 조그마한 걸상에서 커―다란 엉덩이를 쳐듭니다.

"머, 이 원 오십 전 상관이올시다! 네헤……."

점원이 알심 있게 만류를 하던 것입니다.

"……앉으십쇼. 이게 십 원이라두 칠 원 오십 전짜리보다 갑절이나 물건이 낫습니다. 몸두 훨씬 더 굵구요, 네헤."

"그리두 여보, 원……."

"아 그리구, 할아버지께서 손녀애기 반질 사주시자면 좀 쓸 만한 걸루, 네헤."

죽일놈입니다. 아무리 모르고 한 소리라지만, 글쎄 애인끼리를 할아버지요 손녀아기라고 해놓았으니, 욕치고는 이런 욕이 어디 있겠습니까?

윤직원 영감은 그렇다고, 너 이놈! 그건 무슨 고연 소린고! 이렇게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 속으로만 창피해 죽겠는데, 그러나 춘심이는 되레 재미가 있다고 생글생글 웃습니다.

"난 머, 이거 꼭 사주어예지 머, 난 싫여요!"

싫다고 하니 다아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허! 거 참…… 으음! 거 참!"

윤직원 영감은 마지못해 도로 앉습니다. 그 두 마디의 탄성이 역시 의미가 심장합니다. 첫마디는 춘심이의 위협에 대한 항복이요, 다음 치는 할아버지와 손녀아기가 다시금 창피하다는 소리구요.

"그래서? 꼭 그놈만 사야 헌담 말이냐?"

"네에, 헤헤……."

"여보, 쥔양반?"

"네에, 헤."

"사기넌 삽시다. 헌디, 즘 과허니 조깨만 드을 냅시다."

"에누린 없습니다. 네헤. 머, 십 원이라두 비싼 값이 아니올시다. 네."

"머얼 안 비싸다구 그리여! 잔말 말구서 팔 원만 받우!"

"하아, 건 안 되겠습니다. 이건 꼭 정가대루 받아두 이문이 별루 없습니다, 네…… 에 또 저어 기왕 점잖어신 어른께서 말씀하신 거니, 이십 전만 덜해서 구 원 팔십 전에 드리지요, 네헤."

"귀년시리 시방 우넌 소리 허니라구! 팔 원만 받어요, 팔 원."

"아, 이런 데 와선 그렇게 에누릴 않는 법이에요! 생선장순 줄 아시나 봐!"

춘심이가 핀잔을 주는 소립니다. 그러고 보니 윤직원 영감도, 이년아 너는 잠자코 있지 않고서 무얼 초라니처럼 나서느냐고 한바탕 욕을 해야 할 텐데 억지 춘향이가 아니라 애먼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어떻게 손녀아기더러 쌍스런 입잣을 놀립니까.

"야―야, 그런 소리 마라! 세상으 에누리 읎넌 흥정이 어디 있다데야? 나넌 나라에 바치넌 세전〔稅納〕두 에누리를 허넌 사람이다!"

점원은, 농담을 잘하는 재미있는 할아버지라고 빈들빈들 웃고만 있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꿈싯꿈싯, 염낭에서 돈을 암만큼 꺼내어 조심해서 세어 보고 만져 보고 또 들여다보고 하더니 별안간 남 깜짝 놀라게시리,

"옜소! 팔 원 오십 전이요. 나넌 인재넌 몰루……."

하고 말과 돈을 한꺼번에 내던지고는 몸집까지 벌떡 일어섭니다.

"……가자, 인재넌 다아 되얐다. 어서 가자!"

점원은 기가 막혀서 엉거주춤, 사뭇 붙들듯, 안 된다고 날뜁니다.

다시 한 시간은 넘겨 승강을 했을 겝니다. 마구 싸우다시피 구 원 십 전에 그 반지를 뺏어 가지고 가게를 나오니까 열한시가 훨씬 넘었습니다.

진고개를 빠져나와 전차정류장으로 광장을 건너가면서, 춘심이는 손에 낀 반지를 깨웃깨웃, 못 견디게 좋아합니다.

"춘심아?"

"내애?"

해뜩 돌려다보고 웃으면서 또 반지를 들여다봅니다.

"반지 사서 찌닝개 좋냐?"

"거저 그렇죠, 머……."

"저런년 부았넝가! 이년아, 나넌 네 때민에 돈 쓰구 망신당허구 그맀다!"

"망신은 왜요?"

"아, 그 녀석이 할아버지가 머? 손녀애기를 어쩌구 않더냐?"

"해해, 해해해해."

"아무튼지 인재넌 내 말 듣지?"

"내애."

"흐음, 아무렴 그래야지. 저어 이따가 저녁에― 에……."

"내애."

"일찌감치 오니라, 응?"

"내애!"

"날 돌르먼 안 되야?"

"내애."

"꼬옥?"

"글쎄, 걱정 마세요!"

"으음."

"저어 참, 영감님?"

"왜야?"

"우리 저기 미쓰꼬시 가서, 난찌 먹구 가요?"

"난찌? 난찌란 건 또 무어다냐."

"난찌라구, 서양 즘심 말이에요."

"서양 즘심?"

"내애, 퍽 맛이 있어요!"

"아서라! 그놈의 서양밥, 말두 내지 마라!"

"왜요?"

"내가 그년의 것이 좋다구 히여서, 그놈의 디 무어라더냐 허넌 디를 가서, 한번 사먹다가 돈만 내버리구 죽을 뻔히였다!"

"하하하, 어떡허다가?"

"아, 그놈의 것 꼭 소시랑을 피여 논 것치름 생긴 것을 주먼서 밥을 먹으라넌구나! 허 참……."

윤직원 영감이 만약 전감이 없었다면 춘심이한테 끌려가서 그 서양 점심을 먹느라고 한바탕 진고개에 있어서의 조선 정조를 착실히 나타냈을 것이지만, 요행 그 소위 쇠스랑 펴놓은 것―---포크에 대한 반감의 덕으로 작파가 되었습니다.

종로 네거리에서 춘심이를 일단 작별하면서, 또다시 두번 세번 다진 뒤에 계동 자택으로 돌아오니까, 마침 뒤를 쫓듯 올챙이가 수형 할인을 해 쓴다는 철물교다리의 강씨를 데리고 왔습니다. 대복이도 가타고 했고, 당장 칠천 원 수형을 받고 오천구백오십 원 소절수를 떼어 주었습니다. 따로 일백오 원짜리를 구문으로 올챙이한테 떼어 준 것은 물론이구요.

강씨와 올챙이를 돌려보내고 나니까, 드디어 오늘도 구백사십오 원을 벌었다는 만족에 배는 불룩 일어섭니다.

간밤에 창식이 윤주사가 마작으로 사천오백 원을 펐고, 종수가 이천 원짜리 수형을 병호한테 야바위당했고, 이백여 원 어치 요리를 먹었고, 그리고도 오래잖아 돈 이천 원을 뺏으려 올 테고 하니, 윤직원 영감이 벌었다고 좋아하는 구백여 원의 열 갑절 가까운 구천여 원이 날아갔고, 한즉 그것은 결국 옴팡장사요, 이를테면 만리장성의 한 귀퉁이가 좀이 먹는 것이겠는데, 그러나 윤직원 영감이야 시방 그것을 알 턱이 없던 것입니다.

다시 그리고, 이따가 저녁에 춘심이를 사랑하게 될 행복에 이르러서는 침이 흥건히 괴어 방금 뚜―우 오정 소리를 듣고도 이어 점심을 먹으러 들어갈 여념이 없이, 술에 취하듯 푹신 취해 버렸습니다.

마침 그땝니다. 마당에서 별안간 뚜벅뚜벅 들리는 구두 소리에 무심코 미닫이의 유리 쪽으로 내다보노라니까, 웬 양복가랭이가 펄쩍거리고 달려들지를 않는다구요!

어떻게도 놀랐는지, 벌떡 일어서서 안으로 피해 들어갈 체세를 가집니다.

요마적 양복쟁이라고는 좀처럼 찾아오는 법이 없지만, 어찌하다가 더러 찾아온다치면 세상 그거같이 싫고 겁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 없이 뱀을 섬뻑 만나면 대개는 깜작 놀라 몸이 오싹해지고, 반사적으로 적의(敵意)와 경계의 자세를 취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오래오랜 조상, 즉 사전인류(史前人類)가 파충류의 전성시대에 그들의 위협 밑에서 수백만 년을 항상 공포와 투쟁과 경계를 하고 살아오는 동안, 그것이 어언간 한 개의 본능이 되어졌고, 그러한 조상의 피가 시방도 우리 인류의 몸에 흐르고 있는 때문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럴듯한 해석이고, 한데, 윤직원 영감이 양복쟁이가 찾아오게 되면 우선 먼저 놀라 우선 먼저 피하려 드는 것도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미년 이후 한동안, 소위 양복청년이라는 별명을 듣는 사람들한테 그놈 새애까만 육혈포 부리 앞에 가슴패기를 겨냥대고 앉아 혼비백산, 돈을 뺏기던 일…… 그렇게 돈 뺏기고 혼이 나고 하고서도, 다시 경찰서의 사람들한테 이실고실 참고 심문을 당하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던 일…….

지방의 유수한 명망가라고 해서 그네들과 무슨 연락이 있을 혐의는 아니었고, 범인 수사에 필요한 심문을 하던 것인데, 일 당하던 당장 혼백이 나갔던 윤직원 영감이라 대답이 자꾸만 외착이 나곤 해서 피차에 수고로웠습니다.

치가 떨리고 이가 갈리는 게, 언제고 섬뻑 찾아드는 양복쟁이던 것입니다.

그러한 위험객말고도, 다시 생명보험회사의 외교원…….

누구나 돈냥 있는 사람은 다 겪어 본 시달림이지만, 윤직원 영감도 많이 당했습니다.

하기야 윤직원 영감 당자는 나이 많으니까 가입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가로되 자제 몫으로, 가로되 손자 몫으로, 가로되 무슨 몫으로, 이렇게 조릅니다.

윤직원 영감의 대답은 매우 신랄해서,

"게 여보! 원 아무런들 날더러 자식 손자 보험 걸어 놓구서, 그것 타 돈 먹자구 그것덜 죽기 배래구 앉었으람 말이오?"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만 소리에 퇴각할 사람들이 아니요, 찰거머리처럼 붙어 앉아서는 쫀드윽쫀득 졸라 댑니다.

이처럼 파기증을 생으로 내주는 게 역시, 불쑥 찾아오는 양복쟁이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기부를 받으러 오는 패…….

대개 민간의 교육사업이나 또는 임시 임시의 빈민 혹은 이재민의 구제사업인데, 그들이 찾아와서는 사연을 주욱 이야기한 후, 그러니 영감께서도…… 이렇게 청을 합니다.

윤직원 영감은 다 듣고 나서는, 시침 뚜욱 따고 대답입니다.

"예에! 거 다아 존 일이지요. 히여야 허구말구요…… 그런디 나넌 시방 나대루 수십 년지간 해마닥 수수백 명을 구제허구 있으닝개루, 그런 기부나 구제애넌 참예를 안 히여두 죄루 가던 안 헐 티닝개루 구만둘라우!"

"네에! 거 참 매우 장하십니다! 사업은 무슨 사업이신지요?"

객은 듣던 바와는 다르다고 탄복해서, 아무튼 그 사업 내용을 수인사로라도 물어 볼밖에요.

"예에…… 내가 시방 한 만 석 가량 추수를 허우. 그러구 작인이 천 명 가까이 되지요. 그러닝개 천 명 가까운 작인덜한티다가 논을 주어서, 농사를 히여 먹구 살게 허넝게 구제허구넌 큰 구제 아니오?"

이 말에 웬만한 사람은 속으로 웃고 진작 말머리를 돌리겠지만, 좀 귀가 무딘 패는 더욱 탄복을 하여 묻습니다.

"네에! 그러면 근 천 명 되는 소작인들한테 소작료를 받지 않으시구 논을 무료루 내주시는군요? 네에! 허어!"

"아―니, 안 받으먼 나넌 어떻게 허구……? 원 참…… 여보 글씨, 제 논 갖구 앉어서 도지두 안 받구 그냥 지여 먹으라구 내주넌 그런 빙신천치두 있다우?"

윤직원 영감은 이렇게 당당히 나무랍니다.

듣는 사람은 분반(噴飯)할 넌센스나 또는 농담으로 돌리겠지만, 윤직원 영감 당자는 절대로 엄숙합니다.

지주가 소작인에게 토지를 소작으로 주는 것은 큰 선심이요, 따라서 그들을 구제하는 적선(積善)이라는 것이 윤직원 영감의 지론이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의 신경(神經)으로는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논이 나의 소유라는 결정적 주장도 크지만 소작경쟁이 언제고 심하여, 논 한 자리를 두고서 김서방 최서방 이서방 채서방 이렇게 여럿이, 제각기 서로 얻어 부치려고 청을 대다가는 필경 그 중의 한 사람에게로 권리가 떨어지고 마는데, 김서방이나 혹은 이서방이나 또는 채서방이 나에게로 줄 수 있는 논을 최서방 너를 준 것은 지주 된 내 뜻이니까, 더욱이나 내가 네게 적선을 한 것이 아니냐……? 이것이 윤직원 영감의 소작권에 의한 자선사업의 방법론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그리하여 자기가 찬미하는, 가령 경찰행정 같은 그런 방면의 사업에다가 자진하여 무도장(武道場) 건축비를 기부한다든지 하는 외에는 소위 민간측의 사업이나 구제에는 절대로 피천 한푼 내놓질 않는 주의요, 안 할 사람인데, 번번이들 찾아와서는 졸라 대고 성가시게 하고 하는 게 누군고 하면, 역시 양복쟁이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골서 이래로 근 이십 년 각종 양복쟁이에게 위협과 폐해와 졸경을 치르던 윤직원 영감인지라, 인류의 조상이 수백만 년 동안 파충류와 싸우고 사느라 그들을 대적하고 경계하고 하는 본능이 생겨 그 피가 시방 우리의 몸에까지 흐르고 있듯이, 윤직원 영감도 양복쟁이라면 덮어놓고 적의가 솟고, 덮어놓고 싫어하는 제이의 본능이 생겨졌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그래서 방금 뚜벅거리고 달려드는 양복가래쟁이를 보자마자, 엇 뜨거라고 벌떡 일어서서 뒷문을 열고 안으로 피신을 하려는 참인데, 그러나 시기는 이미 늦어 양복쟁이가 앞 미닫이를 연 것이 더 빨랐습니다.

화가 나서 홱 돌려다보니까, 요행으로 낯선 양복쟁이가 아닌 게 안심은 되었지만, 속아 놀란 것이 그 담에는 속이 상합니다.

"야, 이 잡어 뽑을 놈아, 지침이나 좀 허구 댕기라!"

방금 동소문 밖 ××원 별장의, 그야말로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부터 돌아오는 종숩니다.

욕은, 담배 한 대 피우는 정도로 언제나 먹어 두는 것, 아무렇지도 않아하고 조부에게 절을 한자리 꾸벅,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무엇 허러 또 올라왔냐?"

"볼일두 좀 있구, 그래서……."

"볼일이랑 게 별것 있간디? 매양 돈이나 뺏으러 쫓아왔지……? 권연시리 돈 소리 헐라거던 아예 내 눈앞으 뵈지두 말구 가삐리라!"

이렇게 발등걸이를 당하고 보니, 종수는 마치 샘고누의 첫 구멍을 막힌 격이라 말문이 어디로 열릴 바를 몰라 잠시 고개만 숙이고 대답이 없습니다.

"대체 너넌 그년의 군순지 막걸린지넌 어떻게 되넌 심이냐? 심이!"

화가 아니 났더라도 짐짓 난 체해야 할 판, 이윽고 재떨이에 담뱃대를 땅따앙, 음성도 역정스럽던 그대로 딴 조목을 들어 지천을 합니다.

"……응? 그놈의 군수 하나 바래다가 고손자 × 패겄다, 네엔장맞일!"

십 년 계획이라 속은 말짱하면서도, 주마가편이라니 재촉을 해, 십 년보다 더 속히 되면 속히 될수록 좋은 노릇이니까요. 그러나 이 말에서 종수는 언뜻 돈 발라 낼 꾀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건 염려 없어요. 그러잖어두 이번에 그 일 때문에 겸사겸사해서……."

"응? 거 듣너니 반간 소리다……! 그래서? 다 되얐냐?"

단박 풀어져서 좋아합니다. 참으로, 아기같이 천진난만한 할아버집니다.

"오라잖어서 본관 사령은 나올려나 봐요!"

"그리여? 참말이냐?"

"네에."

"그렇다먼 작히나 좋겄냐! 그런디 그 담에, 참말루 군수는 은제 되냐?"

"그건 본관이 된 댐엔, 다아 쉬어요!"

"그렇더래두 멫 해 있어야 될 것인디?"

"한 사오 년이……! 그런데 저어……."

"응?"

"이번에 계제에 한 이천 원 좀, 들여야 일이 수나롭겠어요!"

"그러먼 그렇지! 그러먼 그리여!"

윤직원 영감은 펄쩍 뜁니다. 마침 옛날의 그 혼란스럽던 판임관, 그리고 그 웃길 주임관, 그들의 금테 두른 양복, 금장식한 칼, 이런 것을 손자 종수에게 입혀 놓고 양반의 위풍을 떨치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비록 시방은 그러한 제복이 없어는졌을망정 판임관이면 금테가 한 줄, 다시 주임관으로 군수가 되면 금테가 두 줄, 이렇대서 한참 좋아하는 판인데 밉살머리스럽게 돈 소리를 내놓고 앉았으니, 그만 정이 떨어지고, 또다시 부아가 버럭 나던 것입니다.

"……잡어 뽑을 놈! 권연시리 돈이나 협잡질헐라닝개루, 시방 쫓아올라와서넌, 씩둑꺽둑, 날 돌라 먹을라구 그러지야? 누가 네 속 모를 줄 아냐? 글씨 일 다아 되얐다면서 무슨 돈이 이천 원이나 드냐? 들기를……."

"지가 쓸려구 그러는 게 아니에요!"

"늬가 안 쓰구, 그러먼 여산(廬山) 중놈이 쓴다냐?"

"선삿감으루 금강석 반질 하나 살려구 그래요!"

"뭐어……? 아―니 세상에 이천 원짜리 반지가 어디 있으며, 또오 있다구 치더래두, 그 사람은 그걸 손꾸락으다 찌구 베락을 맞이라구, 이천 원짜리 반지를 사다가 슨사를 헌담 말이냐? 죽으머넌 썩을 놈의 손꾸락으다가, 아무리 귀골이기루서니 이천 원짜리를 찌다께, 베락 맞일 짓이 아니여! 나넌 보닝개루 구 원 십 전짜리두 버젓허니 좋기만 허더라…… 대체 누가 조작이냐. 네 소견이냐? 누가 시켜서 그러냐?"

"군수 영감이 그러세요. 저 거시키, 요전번 올라왔을 때 마침 지전 씰 만났었는데, 할아버지두 잘 아시잖어요? 왜 저 총독부 내무국에 있는 그 지전 씨!"

"그래서?"

"구경을 나온 길인지, 부인허구 아이들을 모두 데리구 미쓰꼬시루 들어오는 걸 만났더래요. 퍽 반가워하면서, 제 말두 묻구, 잊어버리던 아니 했노라구…… 그러면서 같이 산볼 하자구 해서 미쓰꼬시 안을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마침 귀금속부에 갔다가 지전 씨 부인이 이천 원짜리 금강석 반지를 내논 것을 보더니, 퍽 가지구퍼 하더래나요? 그러니깐 지전 씨가 웃으면서, 나두 사주구는 싶어두 어디 돈이 있느냐구. 그러니깐 부인이 여간 섭섭해하는 기색이 아니더래요. 그런 때 군수 영감은 자기가 돈만 있었으면 단박 사서 선살 했으면, 다른 때 만 원을 들인 것보다두 생색이 더 나겠는데, 원체 자기한테는 지닌 게 없기두 했지만 큰돈이라 생심을 못 했다구……."

"그러닝개루 그걸 너더러 사서 지전 씨네 집으다가 슨사를 허라더람 말이여?"

"네에, 마침 또 꼭지가 물러 가는 눈치구 하니깐, 이 계제에 그래 뒀으면 유리할 것 같다구요……."

윤직원 영감은 말없이 담배만 빽빽 빨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같기도 합니다. 또 어떻게 생각하면 종수의 야바위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이 아닌 것을 거짓말로 잘못 넘겨짚고서 그 벼락 맞을 선사를 않고 보면 일을 낭패시키는 것이 될 테니, 차라리 속는 셈 잡고 돈을 내느니만 같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마침내 들고 말았습니다.

"모르겄다! 나는 시방 돈이래야 톡톡 털어서 천 원밖으 읎으닝개, 그놈만 갔다가 무얼 사주던지 말던지, 네 소견대루 헐라먼 히여라. 나는 모른다!"

자기 말대로 나라에 바치는 세납도 에누리를 하거든, 종수가 청구하는 운동비를 어찌 깎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종수는 조부의 그러한 성미를 잘 알기 때문에 한 자국 더 뛰어, 천 원 소용을 이천 원으로 불렀으니 종수가 선숩니다.

윤직원 영감은 대복이를 불러, 천 원 소절수를 씌어 도장을 찍어 아주 현금으로 찾아다가 종수를 주라고 시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오늘 구백사십오 원 번 것이 오십오 원 새끼까지 치어 가지고 도로 나가는구나 생각하니, 매우 섭섭하고 허망했습니다.

제13장

맨 위로

제1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