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十二國 |
칠십이국 |
通典 云 朝鮮 之遺民分爲七十餘國皆地方百里 後漢書 云 西漢 以 朝鮮 舊地初置為四郡後置二府法令漸煩分爲七十八國各萬户 馬韓 在西有五十四小邑皆稱國 辰韓 在東有十二小邑稱國 卞韓 在南有十二小邑各稱國 |
《통전(通典 )》의 기록을 보면, “조선에 남아 있는 백성은 모두 70여 나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나라 모두가 사방 백 리였다”고 했다. 《후한서》에는 말하기를,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에는 네 군(郡)을 두었다가 후에는 두 부(府)를 두었는데, 법령이 점점 번거로워지자 78나라로 나누게 되었고 나라가 각각 만호(萬户)였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작은 읍을 차지했는데 모두 나라라 불렀고,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어 12개의 작은 읍을 차지했는데 마찬가지로 각 읍을 나라라 불렀으며,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어 12개의 작은 읍을 차지했는데 각각 나라라 불렀다”고 했다. |
樂浪國 |
낙랑국 |
前漢時始置樂浪郡 應邵曰故朝鮮國也 新唐書注云平壤城古漢之樂浪郡也 國史云 赫居世三十年 樂浪人來投 又第三弩禮王四年 高麗第三無恤王伐樂浪滅之 其國人與帶方北帶方投于羅 又無恤王二 |
전한(前漢) 때에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가 이르기를 옛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다. 《신당서(新唐書)》의 주(注)에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 하였다. 《국사(國史)》에 이르기를 혁거세(赫居世) 30년(기원전 28년)에 낙랑인(樂浪人)들이 와서 투항하였고,[1] 또 (신라의) 3대 노례왕(弩禮王) 4년(27년)에 고구려의 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쳐서 이를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2]또 무휼왕 2 |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에는 “三十年 [...] 樂浪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盜 可謂有道之國 吾儕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 乃引還” (30년(기원전 28년)[...]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라고 되어 있어 낙랑이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고 기술하였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에는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즉위 14년(37년)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다.)라고 하고 있어 시기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