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행하는 것을 소학에 따랐으며, 합천 야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무오사화(1498) 때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유배되었으며, 조광조에게 자기의 학문을 전하였다. 갑자사화 때에 처형당하였으며, 그 후 중종 때 도승지·좌의정, 선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김교헌金敎獻(1868~1923)대종교의 제2대 교주. 경주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를 지냈다. 그 후 대사성을 거쳐, 1909년 규장각에서 부제학을 지냈다. 이듬해 대종교에 들어갔으며, 3·1운동 이후 교도들을 지휘하였으며 교단의 본사를 만주로 옮겼다.
김 구金絿(1488~1533)조선의 문신·서예가. 자는 대유, 호는 자암, 본관은 광산이다. 부제학이 되어 좋은 정치를 시도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김 정 등과 함께 투옥되어 귀양살이 끝에 돌아왔는데, 부모가 다 죽은 뒤였다. 아침 저녁으로 산소에 가서 통곡하여 풀이 다 말라버렸으며, 그 해에 병을 얻어 죽었다. 조선 초기 4대 서도가 중의 한 사람으로, 저서로는 『자암집』이 있다.
김 구 동상
김 구(金九)
김 구金九(1876~1949)독립운동가·정치가. 아명은 창수, 호는 백범,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독학을 하다가 12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17세 때 소년 훈장이 되었으며, 동학당에 가입하여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다. 1896년,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모으기 위해 안악으로 가던 도중, 일본 육군 중위 스치다를 죽인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898년 탈옥하였다. 1909년 안중근 의사와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해주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뒤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어 총독정치가 실시되자, 양기탁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신민회가 열렸을 때 황해도 대표로 참가하였다. 남만주 무관학교 설립 기금을 모집하다가 안명근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1915년, 가출옥되어 상하이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 등을 역임하였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 사건을 지휘하였으며, 장제스의 요청에 의해 난징에서 만나 중국 군관학교에 한인 무관양성소의 특설 허락을 받아 사관 100여 명을 양성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으며, 미국 교관을 청하여 광복군을 훈련시켰다. 8·15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창설과 함께 당수가 되었으며, 민족 통일 총본부 부총재·민주의원 총리를 역임하였다. 1947년, 과도 정부에 반대하고 남북 협상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 통일의 원칙을 계속 주장하였다. 1949년, 서울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저격당하였다. 저서로 『백범일지』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연설하는 김규식
김규식金奎植(1877~1952)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우사, 본관은 청풍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으며, 한일합방과 동시에 해외로 망명하였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이 되어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였다. 1921년, 독립군의 근거지인 만주로 돌아와 혁명군을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어 이범석과 함께 활약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있다가 귀국하여 반탁운동의 선두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김 구와 함께 남북 협상에 참석했으나 성과를 못 보았다. 그 후 정치활동에서 물러났으며, 6·25전쟁 때 납북되어 만포진에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외국인을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