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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권30.pdf/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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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켰으며, 셰익스피어의 권위자였다고 한다. 저서에 영문 시집 『양쯔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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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

김규진金奎鎭(1868~1933)서화가. 자는 용삼, 호는 해강이며 남평에서 출생하였다. 중국에 유학하여 명승고적을 둘러본 후, 그곳에서 그림과 서예를 배웠다. 조선 말기까지 영친왕의 스승으로 있었으며, 시종원 시종장을 지냈다. 예서·행서·해서·초서 등에 능하였으며 묵화를 잘 그렸다. 우리 나라 최초로 '서화 연구회'를 조직하여 미술 발전에 공헌하였다. 산수화로는 창덕궁 희정당의 벽화가 유명하다. 그 밖에 「외금강 만물상도」 「해금강 총석정도」가 있다.

김균정金均貞(?~836)신라의 왕족으로 원성왕의 손자. 애장왕 때 대아찬이 되었고 헌덕왕 때 시중이 되었다. 웅천 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으며, 희강왕이 죽고 왕세자가 없자 종제인 헌정의 아들 제륭과 왕위를 다투다가, 김 명·이 홍 등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 우징(신무왕)이 왕위에 오르자, 성덕 대왕으로 추존되었다.

김기두金箕斗조선 고종 때의 기계 제작가. 대원군의 명으로 강 윤과 함께 군용품으로 면제 배갑·포군의 철모·학우 조비선·목탄 증기갑함·수뢰포 등의 군기를 제조하였다. 1880년, 김홍집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후에 그의 조카인 김재우도 구리와 피혁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다.

김기림金起林(1908~?)함북 학성 출생. 호는 편석촌. '국인회' 회원. 니혼대학 문예 예술과와 일본 도후쿠제대 영문과 졸업. 1930년대에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한 이론가이자, 실제 창작을 실험한 시인이기도 하다. 6·25 당시 납북되었으며, 시집으로 『기상도』(1935),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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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

김기수金綺秀(1832~?)조선의 정치가. 자는 계지, 호는 창산, 본관은 연안이다. 1875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강화도 조약 이후 근세 한일 교섭상 최초의 통신사로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는 참판을 역임했으며, 필명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시 「영매」 등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가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뒤 일기문 형식으로 쓴 「일동기유」 「수신사 일기」 등은 일본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새롭게 하여 후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기진金基鎭(1903~1985)소설가·평론가. 호는 팔봉,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였다. 재건 국민운동 중앙회장을 역임했고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경향 문학의 선도자로서 일본 도쿄에서 조직된 '토월회'에도 관계하였다. 신문사 및 영화회사 일에도 종사했고, 1930년까지는 문예 평론가로서 크게 활약하여 경향 문학의 지도적인 평론 등을 집필하였다. 1936년 카프(KAPF) 해체기까지가 그의 문학 활동의 중요한 시기였다. 문화 훈장 국민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소설 「결혼」 「전도양양」, 수필집 『심두잡초』 『김팔봉 수필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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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의 그림 「소와 여인」

김기창金基昶(1913~2001)동양화가. 아호는 운포·운보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8세 때에 열병으로 청각을 완전히 잃었으나, 선천적인 재능과 인내로 이를 극복하고 김은호에게 동양화를 배웠다. 1932년부터 조선미술전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특선을 하였고 추천작가를 지냈다. 1963년, 상파울루 국제 미전에 한국 대표로 출품했으며, 1965년 뉴욕의 '아시아의 집'에서 부인 박내현과 함께 부부 미술전을 열어 좋은 평을 받았다. 그는 동양화의 신경지를 개척하여 독특한 정취를 나타내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외국에도 널리 소개되었다. 저서로 수필 『화방여적』이 있다.

김기형金基瀅(1884~?)독립운동가. 호는 해악, 별명은 현구이며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하였다. 1914년, 만주로 건너가 문화 운동에 종사하였다.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다. 그 후 김 구·여운형과 '노병회'를 조직하였고, 한국 독립당 간부로 활약하다가 중경에서 죽었다.

김 낙金樂(?~927)고려의 개국공신. 927년에 후백제의 견훤과 공산(지금의 대구)에서 싸우다가 포위된 왕 건이 위급해지자, 신숭겸과 함께 왕 건을 구하고 전사하였다. 고려가 개국되자 2등 공신이 되었고, 태조는 지묘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었다. 예종은 그와 신숭겸을 추도하는 향가 「도이장가」를 지었다.

김남조金南祚(1927~ )시인.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