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해상의 설악·월성의 금오 등지를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47세에 안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세조 때 변절하여 여섯 신하를 일러바친 영의정 정창손에게 길에서 면박을 주기도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이정은·남효온·안응세·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홍산의 무량사에서 죽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금오신화』 『매월당집』 『십현담 요해』 등이 있다.
김 식金湜(1482~1520)조선의 성리학자. 자는 노천, 호는 사서, 본관은 청풍이다. 성리학에 밝았으며 중종 때 현량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조광조·김안국·기 준 등과 도학 소장파를 이루어 제도개혁과 교화 시험을 촉진하는 한편, 중종반정 때 공신이 된 훈구파 76인에 대한 공을 삭제하고, 토지와 노비를 빼앗는 등 과격한 정치를 하였다. 마침내 훈구파의 남 곤·심 정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키자 그는 거창으로 가서 「군신천세의」라는 시를 짓고 자살하였다.
김신국金藎國(1572~1657)조선의 문신. 자는 경진, 호는 후추, 본관은 청풍이다. 선조 때 생원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자기 아우가 적병에게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영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다. 이듬해 문과에 합격하여 검열을 지낸 뒤, 권 율의 종사관이 되었고 어사로 관서지방을 순시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인이 소북과 대북으로 갈라지자, 소북의 우두머리로 대북을 공격하다가 벼슬을 빼앗겼다. 그 후 다시 벼슬에 올라 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금의 사신과 화의 조약에 대해 결정을 보았다. 병자호란 때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1637년, 소현 세자가 인질로 선양으로 갈 때 모시고 갔다.
김안국의 필적
김안국金安國(1478~1543)조선의 명신. 자는 국경, 호는 모재, 본관은 의성이다. 조광조·기 준 등과 함께 김굉필의 제자로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 유학파를 형성하였다. 연산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박사·예조참의를 지냈다. 한때 경상 감사가 되어 영남에 가 있을 때, 모든 읍의 향교에다 『소학』을 나누어주어 가르치게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다시 서울에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이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거의 다 잡혀 죽을 때, 겨우 죽음을 면하고 관직에서 쫓겨나 이천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후에 다시 등용되어 좌찬성·대제학 등을 지냈다. 저서로 『모재집』 『모재가훈』 『동몽선습』 『여씨향약』 등이 있다.
김안로金安老(1481~1553)조선의 권신. 자는 이숙, 호는 희락당, 본관은 연안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냈다. 기묘사화 후 이조판서로 승진되었으나 남 곤·심 정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심 정 일파의 축출에 성공하여 다시 예조판서로 등용되어 심 정·이 항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경빈 박씨와 복성군 미를 죽이는 등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허 항·채무택과 함께 '정유 3흉'이라 한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 왕후를 폐하려 하다가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중종의 딸 효혜 공주의 남편인 연성위 김 희가 아들이다. 저서로 『용천 담적기』가 있다.
김알지가 태어났다고 하는 경주의 계림
김알지金閼智(65~?)경주 김씨의 시조. 65년(탈해왕 9), 왕이 금성 서쪽에 있는 숲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표공을 시켜 가보게 했는데,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 울고 있으므로 왕이 친히 가서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 아이가 나왔다. 이 때부터 시림을 계림이라 하고 왕이 이 아이를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라 했다고 전한다. 그의 7대손이 신라 왕실의 외손으로서 미추왕이 되었다.
김 억
김 억金億(1893~?)시인. 호는 안서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 대학 문과를 중퇴하였다. 1918년부터 「태서문예신보」를 통하여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베를렌·보들레르 등의 상징시를 번역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