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중외일보에 「노다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장하였다. 도시 서민층의 생활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농촌의 토속적인 인간상을 형상화하여 우리 나라 단편 소설의 새 경지를 개척하였다. 단편 소설로 「금따는 콩밭」 「산골 나그네」 「동백꽃」 등이 있다.
김 육金堉(1580~1658)조선의 학자·정치가. 실사구시의 선구자로 자는 백후, 호는 잠곡, 본관은 청풍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사로 청에 다녀왔다. 소현 세자가 선양에 인질로 잡혀갔을 때 보양관으로 따라갔다 온 뒤 우부빈객이 되었다. 1650년, 대동법 실시 문제로 김 집과 논쟁을 벌이다가 퇴직하였다. 그 후 효종 때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공물법을 폐지하고 그 대신 곡물과 천으로 세금을 내는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마침내 1651년 충청도에, 6년 뒤에는 전라도 연안 지방에 실시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한흥일이 구해온 서양의 새로운 달력을 보고 우리나라의 구식 달력을 개정하자고 건의하여 1653년부터는 '시헌력'이라는 새 달력을 시행하였다. 교통수단에 있어서는 수레를 만들어 그때까지 말로 운반하던 불편을 없애고 논에 물을 대는 데도 수차의 사용을 주장하여, 1644년 황해도와 평안도에 실시하게 하였다. 한편, 1651년 상평통보를 만들 것을 건의하여 서울 서북 지방에서 쓰게 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제학은 후에 유형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 『황명기략』 『송도지』 『팔현전』 『국조명신론』 등이 있다.
김윤경金允經(1894~1969)국어학자. 호는 한결,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연희전문학교 문과와 일본 릿쿄 대학 사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배화여고와 정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된 후 광복될 때까지 옥살이를 하였다. 광복 후 조선어학회 상무 이사가 되었으며,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한양대학교 문리과 대학장으로 있었다. 1963년, 문화 훈장을 받았으며 평생을 한글 연구와 후배 양성에 바쳤다. 저서에 『조선 문자 및 어학사』 『나라 말본』 『용비어천가 강의』 등이 있다.
김윤식
김윤식金允植(1835~1922)조선의 정치가·학자. 자는 순경, 호는 운양, 본관은 청풍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황해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1881년, 영선사로서 청에 갈 때 60여 명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가서 신식 무기와 과학 기계의 제조법을 배우게 하였다. 또한 어윤중과 함께 이홍장을 만나 한미 수호 조약 체결을 토의했다. 이듬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의 군대를 요청하여 난을 가라앉히고, 강화에 진무영을 설치하여 신식 군대 8백여 명을 길러냈다. 189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김옥균 일파를 제거하여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러시아와 수호 통상 조약을 맺어 거문도 사건을 처리하였다. 1887년, 민비의 친러 정책에 반대하여 민영익과 함께 대원군의 집권을 모의하여 유배되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의 외무대신이 되어 개혁정치에 힘쓰다가, 1896년 아관파천과 함께 친러파 내각이 성립되자, 민비의 시해 음모를 사전에 알고도 방관했다는 탄핵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특사로 풀려났다. 경술국치에 협력한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칭호를 받았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독립 청원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하여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당시의 손꼽히는 문장가로 청아하고 고귀한 멋을 풍기는 간결한 문장이 특색이다. 저서로 『운양집』 『음청사』 『속음청사』 등이 있다.
김윤식金允植(1936~ )평론가·국문학자. 서울 출생.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문학사 방법론 서설(序說)」 「역사와 비평」으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이후 「최재서론」 「임화연구」 「해외문학파고」 「30년대 소설론의 양태」 등을 발표했다. 그의 비평활동은 1960년대 작가들의 문학사적 의의를 밝히는 일선비평적인 측면과 개화기 이후의 한국비평사를 다시 복원하는 학문적인 면을 다 같이 포함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근대한국문학연구』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한국현대시론비판』 『김윤식선집』 등이 있다.
김응하
김응하金應河(1580~1619)조선의 무신. 자는 경의, 본관은 안동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동생 응해와 우애가 지극하여 향리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25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박승종이 호남 지방 관찰사로 내려갈 때 비장으로 따라가 근엄하게 행동하였다. 광해군 때 명의 건주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에 군사를 청하였다. 이에 김응하는 강홍립의 부하로 명나라 장군 유정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 정벌에 나섰다. 유정이 패하여 자살하자 김응하는 부하 3천을 거느리고 적의 군사 6만과 대치하여 고군분투하다가, 별안간 태풍이 일어나 모래 속에 휩싸이게 되자 군사들이 흩어졌다. 그는 홀로 싸우다가 적병에게 포위되어 전사하였다. 명 황제가 요동백을 봉하고 처자에게 백금을 내려주었으며, 우리 조정에서도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김응환 「칠보대」
김응환金應煥(1742~1789)조선의 화가. 자는 영수, 호는 복헌, 본관은 개성이다. 화원으로서 상의별제를 지냈다. 1788년,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을 구경한 후 그림을 그리고 돌아왔다. 이듬해, 어명을 받고 지도를 만들 목적으로 몰래 일본에 건너가려 하다가 부산에서 병사하였다. 이 때 김홍도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였는데, 장사를 치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