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페이지: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권30.pdf/39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이 페이지는 아직 교정을 보지 않았습니다

용천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1년 미국 로체스터 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학교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되었다 1972년 천문학회 감사, 1973년 물리학회 이사, 1978년 이론 물리 및 화학 연구회 부회장이 되고, 1982년 과학 저술인협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저서에 『자연과학 개론』 등이 있다.

이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는 자유 저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되었습니다.
김정희
이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는 자유 저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되었습니다.
김정희의 그림 「묵란도」
이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는 자유 저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되었습니다.
김정희의 글씨

김정희金正喜(1786~1856)조선의 문신·서예가·금석학자. 자는 원춘, 호는 완당·추사, 본관은 경주이다.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규장각 대교를 지냈으며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24세 때,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의 베이징으로 가서 그곳의 대학자인 옹방강·완 원으로부터 재능을 크게 인정받았다. 한편, 금석학과 서예·도서·시문·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금석학이란 쇠붙이나 돌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여 역사적인 사실을 밝혀 내는 학문으로서,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 비석을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힌 것이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중국의 소 식·구양 순 등의 글씨를 연구하여 독특한 추사체를 이룩하였으며, 난초·대나무·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저서로는 『금석과안록』 『완당집』 등이 있으며, 그림으로 『묵죽도』 『묵란도』 등이 있다.

김제남金悌男(1562~1613)조선의 문신. 자는 공언, 본관은 연안이며 선조의 장인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연천 현감을 거쳐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그의 딸이 선조의 계비(인목 대비)가 됨으로써 연흥 부원군이 되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목 대비가 낳은 영창 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이이첨 등의 모함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의 아들 셋도 화를 입었고, 부인과 어린 아들 천석만이 화를 면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이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는 자유 저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되었습니다.
김조순의 초상화

김조순金祖淳(1765~1831)조선의 문신. 자는 사원, 호는 풍고, 본관은 안동이다.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에 이르렀다. 순조의 장인이 되어 영안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기초를 마련했다. 후에 세자 교육의 책임을 맡았으며, 정순 대비의 명으로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30여 년 간이나 어린 순조를 보좌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운 탓으로 그의 소실인 기생 나합의 손아귀에 국가가 농락되는 등의 폐단이 있었으며, 그의 집권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한 나라의 정치가 일가의 부귀영화에 이용되어 이후 국정은 몹시 어지러워졌다.

김종서金宗瑞(1390~1453)조선의 무신. 자는 국경, 호는 절재, 본관은 순천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우정언·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야인들의 변경 침입을 물리쳤으며,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여 야인의 정세를 보고하여 그 비변책을 건의했으며, 예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었다. 1449년, 『고려사』가 공정치 못하다고 하여 왕명으로 고쳐 편찬하게 되자, 지춘추관사로 총책임을 맡아 간행하였다.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황보 인·정 본 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하였다. 여러 재상 가운데 '대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신하였다. 1453년, 왕위를 노리던 수양 대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대역 모반죄로 죽음을 당함으로써 계유정난의 제1차 희생자가 되었다. 영조 때에 벼슬이 다시 주어졌으며, 저서로 『제승방략』이 있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조선의 성리학자. 자는 계온, 호는 점필재, 본관은 선산이다. 밀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에 경연관·이조참판·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거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