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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권30.pd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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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람마다 대개는 살해되었으므로, 결국 원에 군사를 요청해서 고려의 김방경과 함께 제주도를 정복하였는데, 이때 그는 자살하였다.

김헌창金憲昌(?~822)신라의 반신. 원성왕의 후손으로 애장왕 때 시중에 올랐다가 무진주·청주 도독을 지냈다. 헌덕왕 때 웅천주 도독이 되었으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데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한때 무진주·완산주·금관경 등을 장악하여 장안국이라 칭하고 왕이 되었다. 그 후 신라 관군에게 패하자 웅천주에서 자살하였다. 그 후 825년 그의 아들 김범문이 다시 난을 일으키다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김 현金現신라 호원사를 지은 설화적인 인물. 원성왕 때, 복을 빌기 위하여 홍륜사에 간 그는 탑 주위를 돌다가 뒤따르는 처녀와 정을 나누고 그녀가 사는 곳으로 갔는데, 그녀가 갑자기 호랑이로 변했다. 이 처녀 호랑이는 죄를 많이 지어서 하늘로부터 벌을 받아 죽게 된 몸이라, 이왕이면 김 현에게 공을 세우고 죽기를 청하며 그에게 한 가지 꾀를 일러 주었다. 어느 날, 성 안에 사나운 호랑이가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자, 왕은 호랑이를 잡아오는 자에게 상금과 벼슬을 내린다고 하였다. 김 현은 호랑이를 잡아오겠다고 자원하여 호랑이를 추격하였다. 그러자 호랑이는 다시 처녀로 변하여 자기가 죽은 뒤 절을 세워 줄 것을 청하고는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김 현은 상금과 벼슬을 받았으며 호랑이의 청에 따라 절을 지어 그 넋을 위로하였는데, 호랑이가 원해서 지은 절이라 하여 '호원사'라 이름지었다.

김 현金炫(1942~1990)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 본명은 김광남. 전남 진도 출생.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불문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불문학을 전공. 1990년에 간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서울대 불문과 교수를 역임했다. 1970년대의 대표적인 문학지였던 『문학과 지성』에 동인으로 참여하여 문학평론의 전문화를 이룬 대표적인 평론가이다. 대학 재학중인 1962년 『자유문학』에 평론 「나르시스트 시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불문학자로서 바슐라르, 사르트르, 프로이트, 푸코 등 프랑스 문학이론의 거장들을 국내에 소개했으며, 「프랑스 비평사」(1982), 「제네바학파 연구」(1986) 등을 통해 프랑스 문학이론을 정리하기도 했다. 국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 김윤식과 함께 『한국문학사』(1973)를 공동집필하고, 『한국문학의 위상』(1977)이라는 입문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김현승金顯承(1913~1975)시인.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경부터 시작을 계속하다가 해방 직전부터 침묵을 지켰고, 6·25전쟁 직후부터 다시 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숭일중학교 교감, 조선대·숭전대 교수, 한국 문인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감각적 언어망을 통한 참신한 서정으로 생의 예지를 추구한 시를 썼다. 제1회 전남문화상을 수상했다. 작품집 「김현승 시초」, 시로는 「견고한 고독」 「옹호자의 노래」 「절대 고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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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김형석金亨錫(1920~ )수필가·철학자. 평남 대동 출생. 1943년 일본 조치대학 철학과 졸업. 수많은 철학적 수필을 발표하여 독자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1959년 간행한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수필은 현대인의 삶의 지표를 제시하기 위해 기독교적 실존주의를 배경으로 현대의 인간 조건을 추구하여, 부드럽고 시적인 문장으로 엮어 독자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수필집으로 『영원과 사랑의 대화』 『오늘을 사는 지혜』 『현대인과 그 과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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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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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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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그림 「무동」

김홍도金弘道(1745~?)조선의 화가. 자는 사능, 호는 단원, 본관은 김해이다.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영조 때, 왕세손의 얼굴을 그려서 그의 놀라운 솜씨를 보였다. 그의 그림은 한국적인 풍취가 드러나고 서민적인 체취와 독창적인 신선한 조형미가 담겨 있다. 1781년 정조의 초상화가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왕의 명령으로 금강산 풍경을 그렸다. 1789년 왕의 명령으로 김응환과 함께 일본으로 가던 도중, 부산에서 김응환이 죽자 혼자서 쓰시마섬에 가서 섬 지도를 그려서 바쳤다. 1795년 오륜행실도의 삽화와 판화를 그렸으며, 그 밖에도 여러 선비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정교하고 호탕한 작품으로서 현재 남아 있는 그림들은 그가 20세 무렵에 그린 것들이다. 그의 성격은 부드러운 가운데 소탈하여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