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들은 그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 불렀다. 그의 「투견도」는 서양화의 음영 기법을 사용하여 더욱 찬탄을 받고 있다. 작품으로 「선동취적도」 「청앵도」 「소림명월도」 「신선도 병풍」 「무동」 등이 있다.
김홍집의 필적
김홍집金弘集(1842~1896)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경능, 호는 도원, 본관은 경주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로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882년 한미·한영·한독 통상 조약 체결과 제물포 조약 체결에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전권대신이 되어 한성조약을 체결한 뒤 사임하고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의 침투가 표면화되자, 그 힘을 빌려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는 총리대신이 되어 '홍범 14조'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국가 체계를 세우고 갑오경장의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서광범 등 극단적 친일파와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새로운 박정양 내각이 탄생했다. 박정양 내각이 새로 세력을 뻗기 시작한 구미 열강에 친근하려는 정책으로 기울어지자,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 황후를 죽인 후 김홍집 내각을 개편하였다. 일본의 압력으로 단발령 시행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에게 규탄을 받았고, 1896년 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여 아관파천으로 친러파 내각이 조직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무너지고 많은 대신들이 피살되었으며, 그도 광화문에서 살해되었다. 저서로 『이정학재집』이 있다.
김환기金煥基(1913~1973)화가. 전남 무안 출신으로 호는 수화이다. 1936년 니혼 대학 미술학부를 마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해방 후 신사실파를 창설하고, 1952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1957년 파리·니스·브뤼셀 등에서 계속 개인전을 가졌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초대 예술원 회원을 역임하였다.
김활란
김활란金活蘭(1889~1970)여성 교육가. 본명은 기득, 호는 우월, 세례명은 헬렌이다. 경기도 인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웨슬리언 대학을 거쳐 보스턴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를 받았다.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와 학감을 지냈다. 1931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돌아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일제의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학교를 끝까지 지켰다. 유엔 총회 한국 대표와 유네스코 한국 대표로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또한 공보처장, 코리아 타임스 사장, 아시아 반공 연맹 이사, 대한 적십자사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대한민국 문화 포장과 막사이사이 공익 부문상을 받았으며,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다락방상을 받았다. 1961년 총장직을 정년 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 이사장이 되어 평생 독신으로 우리나라의 여성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죽은 후 대한민국 1등 수교 훈장이 수여되었으며, 저서로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이 있다.
김황원金黃元(1045~1117)고려의 문신·시인. 자는 천민, 본관은 광양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고시(古詩)에 이름을 날려 해동의 제일인자라 일컬어졌다. 한림원에 있을 때 요의 사신을 시(詩)로써 맞아 존경을 받았으며, 예종 때 요에 가는 길에 북부지방 백성들이 굶주려 있는 것을 알고는 나라의 식량을 풀어 그들을 구했다. 귀국 후에 예부시랑·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김효원의 필적
김효원金孝元(1532~1590)조선의 문신. 자는 인백, 호는 성암, 본관은 선산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영남에 내려가 이 황, 조 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이조참의 심의겸이, 전에 그가 윤원형의 집에서 지낸 사실을 들추어 권력가에 아첨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그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천거되자, 이번에는 그가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정식으로 충돌하여 조선의 당파 싸움의 근원이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건천동이므로 효원 일파는 동인이라 불렸으며, 심의겸의 집은 정동이라 그 일파를 서인이라 하였다. 당파 싸움이 커질 것을 염려한 부제학 이 이의 조정으로 김효원은 지방으로 밀려나 10년 동안 한직에 머물러 있다가,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 부사로 승진하여 재직중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 『성암집』이 있다.
김 훤(1234~1305)고려의 문신. 자는 용회, 본관은 의성이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원에 갔을 때, 임 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우자, 원 황제는 세자 담(후에 충렬왕)을 동안공으로 책봉하고 군사를 보내어 임 연 일당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에 김 훤은 원의 황제에게 세자가 공으로 책봉되면 국내 민심이 임 연에게 기울어진다고 주장하여 중지케 하였다. 그가 금주 방어사로 있을 때 방 보가 난을 일으켜 진도에 있는 삼별초와 합세하려는 것을 경주 판관 엄수안 등과 함께 이를 토벌하였으며, 삼별초의 남은 무리가 경상도에 쳐들어온 것을 막은 공으로 예부 낭중·도호부사에 올랐다. 1275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전라도 부부사가 되어 부임하던 도중, 청호역에서 전라도 관찰사인 노경륜이 서울로 보내는 뇌물을 빼앗아서 나라에 바친 일로 양주 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충선왕이 세자로 원에 있을 때 그를 받들다가 귀국하여 찬성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