壇君論 (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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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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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壇君의 古傳
壇君은 朝鮮人文의 肇祖로 닐컷게 된 만콤 그 傳說의 起原이 ᄯᅩ邃古에 屬하얏스리니 이는 朝鮮人의 民族的成立이 아득한 녯적임과 가치 무엇이든지 그 種姓의 榮耀를 爲하는 說話가 잇지아니치 못하얏슬것으로써도 넉넉히 짐작할 바이다 다만 前하야는 記錄의 述이 일즉 열리지 못하고 後하야는 佛敎의 實德論的融攝과 儒敎의 常識論的 斥否가 大又久하얏슴을 말미암아서 外國에서처럼 古傳說의 完形全傳이 거의 업슴은 學者로 하야곰 朝鮮의 歷史及文化의 時間的優越과 空間的雄渾을 부지중 ᄭᅡᆨ가 생각하게 함이 크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러나 散珠를 收綴하고 隱形을 磨光하야 蕪穢한 史園에 向上의 一路를 通하면 朝鮮이 決코 稽古上의 貧戶가 아님을 안다 傳說일 법하야도 神話일 법하야도 아모보담도 못하지 아니한 人文起原의 어린 歷史들 가젓슴을 알면 ᄯᅩ 그것이 마찬가지의 傳說이지마는 남보담 지나는 事實的背景에 彩色되어 잇슴을 알게 된다 |
단군은 조선 인문의 시조로 일컫게 된 만큼 그 전설의 기원이 또 아득한 옛날에 속하였으리니 이는 조선인의 민족적 성립이 아득한 옛적임과 같이 무엇이든지 그 신분제도의 영광을 위하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써도 넉넉히 짐작할 바이다. 다만 전대(前代)에는 기술(記述)이 일찍 이루어지지 못하고 후대에는 불교의 실덕론(實德論)적인 통섭과 유교의 상식론적 배척이 크고 또한 길었음으로 말미암아서 외국에서처럼 완전성을 갖춘 고전이 거의 없음은 학자로 하여금 조선의 역사 및 문화가 시간적으로 우월하고 공간적으로 웅장하여 막힘이 없음을 부지중 깎아 생각하게 함이 컸다. 그러나 흩어진 구슬을 꿰고 숨은 모습을 갈고 닦아 잡초가 무성한 역사의 정원에 향상의 길로 통하면 조선이 결코 옛적의 가난한 집이 아님을 안다. 전설일 법하여도 신화일 법하여도 어느 것에도 못하지 아니한 인문 기원의 어린 역사를 가졌음을 알면 또 그것이 마찬가지의 전설이지만 남보다 나은 사실적 배경에 채색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
壇君傳의 原形 ⎯⎯ 最古態가 어ᄯᅥ한 것인지는 시방 무론 徵驗할 길이 업다 시방 우리의 가진 바 그 直接表現的 最古徵憑인 者는 高麗國 義興華山 曹溪宗 麟角寺 迦智山下 普覺國尊으로 닐컷는 一然禪師(西紀 一二〇六 ⎯ 一二八九)의 撰인 『三國遺事』에 거두운 그 一傳이니 三國遺事는 그 名과 가치 三國의 遺聞軼事를 收載한 것으로 金富軾의 『三國史記』[1] (西紀 一一四五년 撰成)를 後하기 凡 百餘[2]年後의 記錄이다 三國遺事는 필시 當時 文籍의 淵叢이던 佛門傳來의 材料로써 三國史記의 闕漏를 補述하기 위하야 撰輯된 것이니 『史記』가 儒家的常識論(상식론)에 繩縛되여서 무슨 標準에 依한 劃一的 取捨를 加함에 對하야 『遺事』는 佛敎人的融通性으로써 古樸純實하게 素材를 거두어 노핫슴이 어ᄶᅵ 탐탐한지를 모를 일이다 後世의 眼으로써 古代의 事를 觀함은 三國史記의 내용을 퍽 疏略하게 만드럿지마는 佛敎方面에 流傳한 그 一部가 간혹 『遺事』의 中에 徵考됨을 우리는 못내 다행해야 할 적이 퍽 만히 잇다. |
단군전의 원형 ⎯⎯ 가장 오랜 형태가 어떠한 것인지는 지금 물론 입증할 길이 없다. 지금 우리의 가진 바, 그 직접표현된 가장 오랜 증거는 고려국 의흥화산 조계종 인각사 가지산의 보각국존으로 일컫는 일연 선사(서기 1206~1289)가 편찬한 《삼국유사》에 싣은 한 편이 있으니 삼국유사는 그 이름과 같이 삼국의 흘러들은 얘기와 누락된 얘기를 수록한 것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서기 1145년 편찬 완성)가 나오고 약 100년 후의 기록이다. 삼국유사는 필시 당시 문서가 총집결하던 불교계에서 전래하던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국사기의 누락된 것을 보완하여 서술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이니, 《삼국사기》가 유가적 상식론(常識論)에 얽매어 모슨 표준을 위한 획일적인 선별을 가함에 대하여, 삼국유사는 불교도의 융통성으로서 고지식하고, 순박하며 순진하고 참되게 소재를 싣고 있음이 어찌나 탐탐한지를 모를 일이다. 후세의 눈으로서 고대의 일을 봄으로써 삼국사기의 내용을 퍽 간소하게 만들었지만, 불교 방면에 내려온 그 일부가 간혹 삼국유사 중에 밝혀지고 헤아려지는 것을 우리는 무척 다행이라고 할 경우가 퍽 많이 있다. |
『遺事』는 開卷第一을 『紀異』의 編으로 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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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徃二千載, 有壇君王倹,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15]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堯의 避諱代用字』同時, 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 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則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 雨師雲師, 而主穀主命, 主兵, 主刑, 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基未實), 都平壤城 (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武의 避諱代用字〕王卽位, 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唐輩矩傳云, 高麗本孤竹國 (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莵, 樂浪, 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設(漢書則眞, 臨, 樂, 玄四郡, 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 |
고조선 왕검조선 《위서(魏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壇君) 왕검(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는데 중국의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제석[16]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환웅은]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다스리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산(山)과 태백산(山)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 사람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태백은 곧 묘향산[17]이다-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이 곳을 신시라 불렀다.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 생명 · 질병 · 형벌 · 선악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항상 빌었다. 이에 환웅은 신령한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보내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를 받아서 먹었다. 삼칠일(三七日, 21일)간 금기를 지킨 곰은 여자로 변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기원했다. 환웅은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결혼하였더니, [웅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단군 왕검이다. [그는] 당고(唐高)[18]가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庚寅)년- 당의 요(堯)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인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까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혹은 방홀산(方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불렀다. 그는 여기서 1천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武王)[19]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당나라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는 본디 고죽국(孤竹國)이었는데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에게 봉함으로써 조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이를 삼군(三郡)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이 삼군이 현도(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 이다. 《통전(通典)》에는 또 이런 말이 있다. 《한서(漢書)》에는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사군(四郡)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삼군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
- ↑ 원문은 ‘紀’이나, 오자임이 명백하다.
- ↑ 원문은 ‘許’이나, 오자임이 명백하다.
- ↑ 삼국유사 원문은 "圗"
- ↑ 삼국유사 원문은 "噐"
- ↑ 삼국유사 원문은 "圗"
- ↑ 동아일보 원문에는 "注(生?)炎"라고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원문에 따라 수정하였다.
- ↑ 삼국유사 권1에는 기이편 외에도 왕력 편도 있다.
- ↑ 《논어》(論語) 〈술이(述而)편〉 七之二十 참조.
- ↑ 하늘이 제왕(帝王)이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祥瑞)로운 징조(徵兆). 임금의 명령(命令)
- ↑ 도참(圖讖). 미래(未來)의 길흉(吉凶)에 관(關)하여 예언(豫言)하는 술법(術法)이나, 또는 그러한 내용(內容)이 적힌 책(冊). 미래기ㆍ정감록 따위
- ↑ 하도(河圖). 옛날 중국(中國) 복희씨(伏羲氏) 때에 황하(黃河)에서 용마가 지고 나왔다는 쉰 다섯 점의 그림. 우 임금 때의 낙서(洛書)와 함께 주역(周易) 이치(理致)의 기본(基本)이 되었다.
- ↑ 낙서(洛書).중국(中國)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이 홍수(洪水)를 다스렸을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영묘(靈妙)한 거북의 등(等)에 쓰여 있었다는 글. 《서경》(書經)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본(原本)이 되었다하며, 팔괘(八卦)의 법도 여기서 나왔다 함
- ↑ 백제는 중국 고대 전설 중의 오제(五帝)의 하나이다. 천하의 서방(西方)을 관장한다.
- ↑ 《삼국유사》 〈권제1〉
- ↑ 동아일보 원문은 關이나 삼국유사 원문에 따랐다.
- ↑ 제석(帝釋) 또는 제석천(帝釋天, 산스크리트어 शक्र,Śakra)은 범왕(梵王)과 함께 불법(佛法)을 지키는 신(神)이다.
- ↑ 일연의 이러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학계는 태백산이 곧 묘향산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다. 태백산 참조.
- ↑ 중국 신화의 오제(五帝) 중 하나인 요(堯) 임금을 말한다.
- ↑ 서주 무왕 희발(西周 武王 姬發, ? ~ 기원전 1043년?)은 주나라(周)의 초대 군주로서, 성(姓)은 희(姬), 이름은 발(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