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關係)가 있는 것이며 그 자신(自身)이 『유림외사(儒林外史)』에 나오는 한 사람인만큼 그의 시(詩)가 『유림외사(儒林外史)』의 조풍적(嘲諷的) 본령(本領)에서 득력(得力)을 한 것도 사실(事實)일 것이다.
그러므로 뜻있는 사랑의 풍자(諷刺)는 그냥 매도(罵倒)하는 것만이 아니고 통곡(痛哭)인 것이며 경박(輕薄)이 아니라 지한극통(至恨極痛)이 어쩔 수 없이 터저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이런 기술(技術)에는 확실(確實)히 두보(杜甫)나 백거이(白居易)보다 별다른 일면(一面)에서 문제시(問題詩)를 쓴 것이 수(數)없이 많으나 여기서 일일(一一)히 예(例)를 들 수 없으되 금화(金和)의 시(詩)에 혁신적 정신(革新的精神)이 풍부(豊富)하다는 것은 그가 자기(自己)의 『초우집(椒雨集)』에 쓴 것을 보면
- 이 한권(卷) 책자(冊子)는 시(詩)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시(詩)라고 할 것 같으면 군중(軍中)에서 쓴 모든 작품(作品)이 말은 비록 통쾌(痛快)한 것이나 벌서 옛 사람들의 돈후(敦厚)한 풍격(風格)을 버렸고 더욱 요즘 선배들의 배조(排調)하는 법(法)이 아니랴. 그러므로 오늘날 제공(諸公)들이 이러니저러니 하든 바요 또 이러한 오배(吾輩)에 한묵(翰墨)이 있다는 것이 휴지와 맞잽이나 그러나 그도 또한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드는 데야 어찌 하리요.
이러한 의미(意味)에서 50년(五十年)의 시단 이면(詩壇裡面)에서 그를 한 개 중요(重要)한 지위(地位)에 둔다는 것은 절대(絕對)로 고이할 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50년간(五十年間)의 사(詞)는 어떠한 것이냐 하면 모다 몽창(夢窓)(오문영(吳文英))파(派)에 중독(中毒)되어서 아무런 가치(價値)도 없는 것이므로 여기서 토론(討論)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四
1840년(一八四〇年) 아편전쟁 이래(鴉片戰爭以來)로 중간(中間)에 1860년(一八六○年)의 영불연합군(英佛聯合軍)이 천진(天津)을 돌파(突破)하고 북경(北京)에 들어와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워버린 전사(戰事)를 경과(經過)한 뒤 중흥(中興)의 전쟁(戰爭)에는 서양인(西洋人)의 조력(助力)을 얻은 바 많었으므로 사리(事理)에 현명(賢明)한 사람들은 차차 서양(西洋) 각국(各國)이라는 것을 중요시(重要視)하게 되었으니 1861년(一八六一年) 청정(淸廷)은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란 것을 설치(設置)하였고 다시 1867년(一八六七年)에는 『동문관(同文館)』을 설치(設置)하였으며 학생(學生)을 외국(外國)에 파견(派遣)하여서 그들의 정책(政策)들을 배워오게 하였는데 당시(當時)의 완고(頑固)한 사회(社會)에서는 차종(此種) 정책(政策)에 극력(極力)으로 반대(反對)했으므로 동문관(同文館)은 좋은 학생(學生)을 얻지도 못하고 외국(外國)에 파견(派遣)한 학생(學生)들 중(中)에는 더욱 사람을 얻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19세기(十九世紀) 말년(末年)부터 번역사업(飜譯事業)이 점점(漸漸) 발달(發達)하게 되었으니 전교사(傳敎士)들 중(中)에도 『이제마태(李提摩太)』 같은 이는 중국문사(中國文士)들의 조력(助力)을 얻어서 불소(不少)한 서적(書籍)을 번역(翻譯)하였고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문사(文士) 왕도(王韜) 같은 이도 이 사업(事業)에는 중요(重要)한 한 사람의 선봉(先鋒)이 되었었다.
그러나 당시(當時)의 번역사업(飜譯事業)이란 그 범위(範圍)가 그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