었으니 우리가 설복성(薛福成)의 쓴 증문정공(曾文正公)막부빈료(幕府賓僚) (용암문편사(庸菴文編四)) 1편(一篇)을 읽어보면 가(可)히 알수 있는 것은 당시(當時) 학자(學者)에도 전태길(錢泰吉), 유육숭(劉毓崧), 유수회(劉壽會), 이선란(李善蘭)(산학가(算學家)), 화형방(華蘅芳)(산학가(算學家)), 손의언(孫衣言), 유월(兪樾), 막우지(莫友芝), 대망(戴望), 성용경(成蓉鏡), 이원도(李元度) 같은 이라든지 문인(文人)으로는 오민수(吳敏樹) 장유쇠(張裕釗), 진학수(陳學受), 방종성(方鍾誠), 오여륜(吳汝綸), 여서창(黎庶昌), 왕사탁(汪士鐸), 왕개운(王闓運) 같은 이가 모다 그의 막부(幕府) 속에 있었는 만큼 증국번(曾國藩)의 세력(勢力)이 몇십년(十年) 동안 중국(中國)에 영향(影響)한 것도 그다지 고이할 바는 아니나 그러나 이 일련(一聯)의 사람들이 문학사상(文學史上)에 있어서는 한 사람도 예외(例外) 없이 아무런 공헌(貢獻)도 없었는 것이다. 그저 연수(年壽)가 최고(最高)하고 명예(名譽)가 최대(最大)하기로는 유월(兪樾) 왕개운(王闓運) 오여륜(吳汝綸) 등(等) 세 사람 만한 이가 없었으나, 유월(兪樾)의 시(詩)나 문(文)이 아무런 가치(價値)도 없는 것이고 왕개운(王闓運)은 말로는 일대(一代)의 대사(大師)라고 했으나 그의 고문(古文)이란 설복성(薛福成)만도 못한 것이며 (시(詩)는 논외(論外)) 오여륜(吳汝綸)만이 사상(思想)이 조금 새로운 데가 있었으므로 그의 영향(影響)은 비교적(比較的) 크다고는 하겠으나 그도 그자신(自身)의 문장(文章)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조성(造成)해온 후진인재(後進人才)에 있었으니 엄복(嚴復)이나 임서(林紓)가 모다 그의 문하(門下)에서 나와서 그들의 영향(影響)이 그 자신(自身)보다 훨신 더 큰 것이었다.
이에 평심서기(平心叙氣)하고 말하면 고문학(古文學)중(中)에는 자연(自然) 『고문(古文)』이란 것이 (한유(韓愈)로부터 증국번(曾國藩) 이하(以下)에 이르기까지의 고문(古文)) 가장 정당(正當)하고 가장 유용(有用)한 문체(文體)인데 연려문(聯麗文)의 병폐(病弊)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되지 못한 당송팔가(唐宋八家) 이하(以下)의 고문(古文)하는 사람들은 주태한위(周泰漢魏)로 돌아가기를 망상(妄想)하여 만드면 만들수록 통(通)하지 못하고 고체(古體)를 뜨면 뜰수록 용처(用處)가 없이 되어 다만 문학계(文學界)에서 『사통비통(似通非通)』의 가(假)짜 골동품(骨董品)을 보태 놓았을 뿐이었다. 당송팔가(唐宋八家)의 고문(古文)과 동성파(桐城派)의 고문(古文)의 장점(長點)은 그들이 통(通)할 수 있는 청담(淸淡)한 문장(文章)을 지어내는 데 있고 가골동품(假骨董品)을 만들려고 망상(妄想)치 않었는데 동성파(桐城派)를 배운 고문(古文)하는 사람들은 대다수(大多數)가 그래도 『통(通)』한다는 데까지는 되었고 한 발 더 나가면 『응용(應用)』할 수 있는 문자(文字)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동성파(桐城派)의 중흥(中興)이 비록 아무런 공헌(貢獻)은 없었다고 하드래도 또한 아무런 해(害)로운 곳도 없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때로는 『위도(衛道)』의 성현(聖賢)으로 자처(自處)하여 방동수(方東樹) 같은 이는 한학(漢學)을 공격(攻擊)하고 임서(林紓) 같은 이는 신사조(新思潮)를 공격(攻擊)했으되 그런 것쯤은 소위(所謂) 『재도문학(載道文學)』이란 데 중독(中毒)이 되어서 분수(分數)도 모르고 떠든 것이고 동성파(桐城派)의 영향(影響)이 고문(古文)으로 하여금 『통(通)』한다는 데 힘쓴 것과 그후(後) 2,30년(二三十年) 동안 겨우 『응용(應用)』한다는 데 예비(預備)한 그 한 가지 공로(功勞)만은 매몰(埋沒)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