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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와 전망/러시아 사회구성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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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1931) 제1장 「러시아 발전의 특수성」

러시아 역사의 가장 불변적이며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이 나라의 완만한 발전 속도에 있으며, 따라서 그 결과로서 후진적인 경제, 원시적인 사회 구조, 낮은 문화 수준 등을 들 수 있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아시아계 이주민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던, 이 광활하고 거친 평원의 주민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자연적 조건들 자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유목민들과의 싸움은 거의 17세기말까지 계속되었다. 겨울에는 혹한을, 그리고 여름에는 가뭄을 몰고 오는 바람에 대한 싸움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모든 발전의 기반인 농업은 원시적인 조방적(extensive:단위 면적의 땅에서의 생산량이 적은, 거친 경작 형태의 원시적 영농 방식 -역주) 방법을 통해서 발전했다. 즉, 북부 지방에서는 전적으로 산림을 벌채하거나 태우는 방식이었으며, 남부 지방에서는 개간되지 않은 초원들을 마음대로 개척하는 방식이었다. 자연의 정복은 밀도 있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단지 확산적으로만 이루어졌던 것이다.

서구의 야만인들이 로마 문명의 폐허 위에 정착해서는 그토록 많은 고대의 자산들을 자신들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재료로 활용하고 있는 동안, 동구의 슬라브인들은 그들의 삭막한 초원 위에서 어떠한 과거의 문화적 유산도 물려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이전에 그 초원에 살고 있던 민족들의 수준은 그들 자신의 수준보다도 훨씬 더 낮았던 것이었다. 곧 자신들의 자연적 경계선에 봉착하게 된 서구의 민족들은 경제적 및 문화적 중심지인 상업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동쪽 평원의 주민들은 협소함을 느낄 때마다 산림을 더욱 깊숙이 뚫고 들어가거나 변방에 위치한 초원 쪽으로 산개해 갔다. 서구에서는 농민들 중 가장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분자들은 수공업자와 상인, 그리고 자치 도시의 시민들이 되었다. 동구에서는, 적극적이고 대담한 자들 중의 일부는 상인이 되었지만, 그러나 대다수는 코자크 기병이나 국경수비대원 흑은 변방의 개척민이 되었다. 사회분화 과정은 서구에서는 가속화되었으나, 동구에서는 지체되었으며 또한 이 같은 영토 팽창 과정을 통해서 희석화되었다. 표뜨르 1세(대제)와 동시대인인 비꼬(Vico:18세기 초에 활약한 이태리의 역사가-역주)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러시아의 짜르는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나태한 정신을 지닌 국민을 통치하고 있다. " 러시아인들의 "나태한 정신"은 경제 발전 속도의 정체성, 계급관계의 무정형성, 내부 역사의 빈약함 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집트, 인도, 중국의 고대 문명들은 충분히 자율적인 성격을 지녔었으며, 또한 저급한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의 수공예품들이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세부까지도 완결된 형태로 사회관계들을 정립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지속성을 지녔었다. 러시아는 비단 지정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낀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서쪽의 유럽과도 차이가 있었으나 또한 동쪽의 아시아와도 달랐다 :러시아는 상이한 시기마다, 상이한 양상으로 둘 중의 어느 한편에 접근하곤 했던 것이다. 아시아로부터 밀려들어온 따따르인(Tatar:러시아에서는 몽고인을 이렇게 부른다-역주)에 의한 오랜 질곡은 러시아의 국가 구조에 중요한 요소로 남게 되었다. 서구는 이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적이었으나 그와 동시에 일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자신의 형성 과정에서 동양을 모델로 삼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언제나 서구로부터 가해지는 군사적 및 경제적 압력에 대처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역사가들이 러시아에는 봉건 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최근의 연구들은 오히려 봉건 시대가 존재했음을 명확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러시아에서의 봉건 시대의 본질적인 요소들은 서구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즉 러시아에서의 봉건 시대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입증하는데 그토록 기나긴 과학적 논쟁들이 필요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러시아의 봉건제는 불완전한 형태였으며, 무정형적이었고 또한 문화적 유산들을 거의 남겨 놓지 못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후진국은 선진국들이 성취한 물질적 및 이념적 진보에 동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진국이 선진국들을 노예처럼 졸졸 따라가는 것, 즉 선진국들이 과거에 밟아 온 모든 단계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꼬 및 최근 그의 계승자들의 이론인 역사발전의 순환에 관한 이론은 전자본주의적인 고대 문화들이 보여 주고 있는 반복적인 현상에 대한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경험들에도 기초하고 있다. 항상 새로운 문명 근원지에서 제반 문화적 단계들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것은 실제로는 그러한 역사 과정 전체의 지역적 및 시대적 특수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바로 그러한 조건들에 대한 획기적인 진보를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발전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마련해 주었으며,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실현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의 여러 형태들이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반복될 가능성이 배제되는 것이다. 후진국은 비록 선진국들을 따라가도록 끔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선진국들의 과거의 발전과 동일한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후진적인 상황이 갖는 특권은-그 같은 특권은 존재하게 마련인데 -그 나라의 국민이 어떤 일련의 중간적인 단계들을 건너뛴 채로 선진국들에 의해서 이미 마련된 모든 발전의 성과들을 특정한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수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후진국은 그러한 방식으로 선진국의 발전을 수용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미개인들이 그들의 활을 버리고 총을 잡는다면, 그것은 단숨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활로부터 총으로 발전하기까지 필요했던 모든 과거의 역사들을 단번에 뛰어넘는 것이다.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개척한 유럽인들은 거기서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독일이나 미국이 경제적으로 영국을 앞질렀다면, 그것은 바로 그 나라들의 자본주의가 뒤늦게 출발한 결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 반면, 영국의 석탄 산업의 고질적인 혼돈 상태는-맥도널드(MacDonald:영국 노동당의 지도자로서 1924, 1929~35년에 걸쳐 수상을 역임하였다-역주) 및 그의 추종자들의 소심한 머리가 그러하듯이 -영국이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패권을 쥐고 있던 대가이다. 역사적으로 후진적인 나라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역사 발전 과정의 다양한 국면들의 독특한 결합으로 귀결된다. 후진적인 나라에서의 발전의 전체적인 모습은 불규칙하고 복합적이며 결합적인 특징을 띠는 것이다. 물론, 중간 단계들을 건너뛸 수 있는 가능성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경제적 및 문화적 수용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더구나 후진국은,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도입한 발전의 성과들을 자신의 낮은 문화적 수준과 맞추기 위해서, 종종 빌려 온 것들을 하향 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러한 동화과정 자체도 일종의 모순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뾰뜨르 1세의 치하에서 특히 군사 및 공업에 관한 서구의 기술과 지식의 부분적인 도입이 농노제를-노동의 조직화의 기본 형태로서 -더욱 강화시키게 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인 것이다. 유럽식에 의거한 군대의 무장과 유럽으로부터의 차관은-양자 모두 보다 발전된 문화의 산물들임이 틀림없다-제정체제의 강화로 귀결되었으며, 이러한 제정 체제의 강화는 역으로 러시아의 발전을 지체시켰던 것이다.

역사의 이성적인 법칙은 현학적인 도식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역사 전개 과정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인 발전 리듬의 불균등성은 후진국들의 운명 속에서 가장 첨예하게 그리고 가장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외부적인 압력의 가혹한 채찍질 밑에서 후진적인 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도록 끔 강요당하는 것이다. 발전 리듬의 불균등성이라는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으로부터 또 다른 법칙이 도출되는데, 적당한 명칭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결합 발전의 법칙(the law of combined development)이라고 부르겠다. 다양한 단계들의 응축, 상이한 국면들의 융합, 낡은 형태들과 보다 현대적인 형태들의 아말감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물론, 이 법칙이 내포하고 있는 물질적인 내용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러시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일반적으로 말해서, 뒤늦게 문명의 대열에 끌려들어온 모든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보다 부강한 유럽의 압력 아래서 러시아 국가는 국가 자원 가운데-서구와 비교해 볼 때-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소모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을 더욱 가중된 궁핍 상태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산계급의 토대까지도 약화시켰다. 그러나 또한 유산계급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국가는 법적 강제 조치 등을 통해서 그들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 특권화되고 관료화되어 버린 이 계급은 결코 완전한 성장을 이룩할 수 없었으며, 러시아 국가는 아시아의 전제 군주제와 보다 가까운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스크바 공국의 짜르들이 16세기 초부터 공식적으로 채택한 비잔틴적인 전제 군주제는 궁정 귀족들(dvoryane)의 도움을 통해서 봉건적 대귀족들(boyare)을 굴복시켰으며, 농민을 궁정 귀족들에게 농노로 안겨 줌으로써 이들의 충성심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비잔틴적 전제 군주제는 뻬제르부르끄(peterburg) 시대로, 즉 절대군주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 전개과정의 후진성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즉, 16세기 말 무렵부터 시작된 농노제는 17세기에 비로소 정착되었으며, 농노제가 가장 번창한 것은 18세기였다. 그리고 186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전제 군주제의 형성 과정에서 귀족 다음으로 무시 못할 역할을 한 것은 사제 계급이었다. 그러나 사제들은 오직 국가에 대한 일종의 종복으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했을 뿐이다. 러시아에서 교회는 서구의 가톨릭 교회가 도달했던 지배적인 위치로까지 상승한 적이 결코 없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절대 군주들에 대한 영적인 신하의 역할에 만족했으며, 또한 그러한 역할로부터 자신의 겸손에 대한 보상을 찾았던 것이다. 주교와 대주교들은 단지 세속적인 권력 체계내의 하급자로서만 어느 정도 권력을 향유했다. 짜르가 새로 바뀔 때마다 교회의 총대주교도 바뀌곤 했다. 수도가 뻬제르부르끄로 이전되었을 때, 국가에 대한 교회의 종속은 훨씬 더 굴종적인 것으로 되어 갔다. 요컨대, 약 20만 명 정도의 세속 사제와 수사들이 일종의 종교 경찰의 자격으로서 관료 집단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가로서 신앙의 문제에 관한 정교회의 독점권과 재산 및 수입 등이 보다 일반적인 세속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후진적인 나라의 메시아 사상이었던 슬라브파의 교리는, 러시아 민중과 그들의 교회는 근원적으로 민주주의적인 반면 지배계급의 러시아는 뽀뜨르 1세에 의해서 이식된 독일식의 관료 체제라는 생각에 근거해서 자신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 이와 유사한 주제를 놓고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치 후진적인 노예들이 그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노예 수업을 받는 데에 보다 개화된 다른 노예들의 도움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는 양, 튜튼족(원래 게르만 민족의 한 일파로서 이 문장에서는 독일인을 지칭함-역주)의 바보들은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 :프러시아의 절대주의적 "계몽 군주"로서, 여기서는 러시아의 뽀뜨르 1세 역시 절대주의적 "계몽 군주"였음을 참조할 것-역주)의 전제 정치를 프랑스인들의 탓으로 돌렸다." 이 짤막한 논평은 슬라브파의 낡은 철학의 정곡을 찌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최신의 학설들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비단 봉건 러시아뿐만 아니라 고대 러시아 역사 전체의 특징이기도 한 문화의 빈약함은 전형적인 중세 도시가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다. 러시아의 수공업은 농업으로부터 분리되지 못했으며 전반적으로 지방적인 가내 수공업(kustari)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 왔던 것이었다. 과거 러시아의 도시들은 상업과 행정 및 군사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귀족 신분인 지주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소비의 중심지였으나 생산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한자동맹(the Hanstatic.League:14세기 중엽부터 17세기까지 존속했던 독일 북부 도시들의 상업 동맹~역주)과 관계하고 있었으며 또한 따따르인의 통치를 결코 겪어 본 적이 없는 노브고로뜨(Novgorod:862년에서 1478년까지 존재한 러시아의 중세 국가로서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역주)조차도 상공업 도시라기보다는 단지 상업 도시였을 뿐이다. 물론, 러시아 전역에 걸쳐 다양한 지방들에 분산되어 있던 소규모적인 농촌 가내 수공업들은 넓은 활동 범위를 지닌 중개상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 상인들은 결코 사회 생활에서 서구의 중소 부르조아지가 차지하고 있던 것과 비견될 만한 위치를 점유할 수 없었다. 서구의 중·소 부르조아지는 동업조합(길드;guild)내의 장인들, 상인들 및 실업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들의 주변에 위치한 농촌과는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상업의 주된 통로는 모두 국경을 넘는 것으로서,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외국의 상업 자본을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따라서 서구의 도시들과 러시아의 촌락들 사이에서 중개상 역할을 하는 러시아 상인들의 모든 활동에 일종의 반(反)식민지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이러한 경제적 관계는 러시아의 자본주의 시대까지 계속 발전되어 왔으며,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전쟁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러시아 국가가 아시아적 형태의 모습을 띠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이와 같은 러시아 도시의 빈약함에 있었다. 특히 도시의 빈약함은 종교 개혁의 가능성을 배제시켰다. 다시 말해서, 바로 그 때문에, 봉건적이고 관료적인 러시아 정교회를 부르조아 사회의 요구에 적합한 모종의 보다 근대적인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 교회에 대한 투쟁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개별 종파의 형성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은 구교 신봉파(starove.chestvo)의 운동이었다. (17세기 중반 교회의 전례(典禮)를 개정·통일시키려는 짜르의 개혁안에 반대하여 일어난 보수 종파의 운동으로서, 국가 교회로부터의 이탈을 꾀했으나 국가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 역주)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약 15년 전에, 러시아에서는 우랄 지방의 코자크족들과 농민들 및 농노적 노동자들(농노로부터 충원되는 강제부역 노동자들로서, 이들은 당시 이 지방에 집중되어 있던 국가 소유의 작업장들의 중요한 노동력이었다-역주)의 운동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뿌가쵸프(Pugatchov)의 반란이다. 이 위협적인 민중의 반란이 혁명으로 전환될 수 없었던 것은 대체 무엇이 결핍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제3계급(The 3rd Estate.평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산업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 전쟁은 혁명으로 발전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촌의 종교적 분파들도 종교개혁으로까지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뿌가쵸프의 반란은 결과적으로, 귀족의 권익을 수호하는 관료적 절대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화시켰다. 귀족 계층이 어려움에 처한 이 때, 절대주의는 다시 한번 더 그들의 수호자로서의 진가를 충분히 발휘했던 것이다. 뾰뜨르 1세에 의해서 정식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유럽화는 19세기 내내 갈수록 지배계급, 즉 귀족의 요구가 되었다. 1825년, 이러한 요구를 정치적으로 일반화시키려는 귀족 출신의 지식인들이 절대 왕권을 제한할 목적으로 군사적 모반을 계획했다. 이것은 귀족 가운데 진보적인 인자들이, 발전하고 있는 서구 부르조아지에 자극 받아, 러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3계급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한 시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체제를 귀족의 특권적 통치 기반과 결합시키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농민 봉기를 촉발시키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모반은 단지 고립된 일군의 뛰어난 장교들의 계획으로만 남아 있었으며, 그들이 거의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상과 같은 것이 12월당원(Decabrist:데까브리스뜨)들의 반란이 갖는 의미인 것이다.

귀족 계급 중에서 최초로 농노적인 노동을 자유 임노동으로 대체시키자는 의견을 내세운 자들은 공장을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이었다. 또한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수출량이 증가함에 따라 그 같은 의견은 더욱 지지 기반을 얻게 되었다. 1861년, 자유주의자 지주들을 지지 기반으로 한 귀족 관료 체제는 농노 해방령과 농업 개혁 조치들을 단행한다. 무기력한 러시아의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시행되는 동안 한결같이 비굴한 모습으로 들러리를 선다. 제정 체제가 러시아의 본질적인 문제인 농업 문제를 아주 탐욕스럽고 교활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것은 프러시아의 군주 체제가 향후 10년간에 걸쳐서 독일의 본질적인 문제, 즉 독일 민족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한 방법보다도 훨씬 더 비열한 것이었다. 어느 한 계급의 문제를 다른 계급이 떠맡아 해결한다는 것은 바로 후진적인 나라에 고유한 결합 방식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결합 발전의 법칙은 러시아 공업의 역사와 그 특성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다. 늦게 출발한 러시아의 공업은 선진국들이 거쳐온 발전의 전 과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가장 근대적인 기술들을 자신의 후진적인 상태에 알맞게 적용시킴으로써 발전의 궤도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경제 발전은 전체적으로 수공업적 조합의 시대나 매뉴팩처의 시대를 건너뛰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업의 개별 분야들에서도, 서구에서 수십 년이 걸렸던 기술 발전의 몇몇 단계들을 부분적으로 건너뛰었다. 이 덕택에 러시아의 공업은 몇몇 기간 동안은 아주 급속히 발전했다. 1905년 혁명부터 제1차 세계대전사이에 러시아의 공업 생산은 거의 두 배나 증가했다. 이것은 몇몇 러시아 역사가들에게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발전의 정체성이라는 신화를 폐기해 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토록 급속한 발전의 가능성은 바로 후진성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었으며, 이 후진성은-애석하게도-구체제를 일소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이 구체제 러시아의 유산으로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 수준은 본질적으로는 그 나라의 노동생산성을 기준으로 한다. 그리고 노동생산성은 그 나라의 전체 경제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에 달려 있다. 제정 러시아가 번영의 정점에 도달했던 1차 대전 직전에, 러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국의 8분의 1 내지 10분의 1 정도밖에 안 되었다. 러시아의 취업 인구 중에서 5분의 4가 농업에 종사한 반면, 미국에서는 농민 1명당 공업 노동자 2.5명 꼴의 비율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소득 격차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못 된다. 또한, 여기에다 추가로, 1차 대전 직전, 100 평방킬로미터당 철도의 길이는 러시아가 0.7km, 독일이 11.7km, 오스트리아-헝가리가 7km 였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비교 계수들 역시 이와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합 발전의 법칙이 가장 예리하게 드러나는 곳은 바로 경제 분야이다. 러시아의 농업은 혁명 전까지는 대부분 거의 17세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반면, 러시아의 공업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기술과 자본주의적 구조 덕택에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며,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들을 능가하기조차 했다. 1914년 당시, 미국의 경우 100명 미만의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소기업들이 전체 공업 노동자의 35%를 고용하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의 경우 그 비율은 17.8%밖에 안 되었다. 100명에서 1,000명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중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는 상대적 비중은 두 나라 모두 대체적으로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1,000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기업의 경우, 미국은 전체 노동자의 17.8%를 차지한 반면, 러시아에서는 그 비율이 무려 41.4%였던 것이다. 더구나, 공업 중심 지역의 경우 그 수치는 더욱 높아진다. 뻬뜨로그라뜨 지역은 44.4%, 그리고 모스크바 지역은 57.3%나 되었다. 만일 러시아의 공업과 영국, 또는 독일의 공업을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위와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1908년 저자에 의해서 최초로 확인된 이러한 사실은 후진적인 러시아 경제에 대해서 학자들이 통상 제시하고 있는 진부한 도식으로는 설명되기 힘든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러시아 경제의 후진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후진성을 단지 변증법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산업 자본과 금융적 자본의 융합은 역시 러시아에서도 이루어졌다. 그것도 너무나 완벽하게 이루어져서 어떠한 다른 나라에서도 그와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공업이 은행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은 실제로는 그것이 서유럽의 금융시장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공업(금속, 석탄, 석유 분야들)은 거의 전적으로 외국 금융자본 밑에 놓여 있었으며, 이러한 외국 자본들은 자신들을 위해 러시아내에 은행 지점망을 설치했다. 경공업도 중공업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에 투자된 모든 자본들의 약 40% 정도를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비율은 기간산업 분야에서는 훨씬 더 올라갔다. 러시아의 은행과 기업이 발행한 주식의 지분에 의한 경영 통제권은 외국에 있었으며, 영국, 프랑스, 벨기에의 자본이 확보한 지분이 독일 자본의 지분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고 우리는 아무런 과장 없이 단언할 수 있다.

러시아의 공업이 형성된 조건과 또 그 구조 자체가 이 나라의 부르조아지의 사회적 성격과 그들의 정치적 특징을 결정지었다. 공업의 과도한 집중화 현상은 그 자체로 이미 자본주의의 주도 계층과 민중사이에 어떠한 중간적인 계층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에 덧붙여서, 가장 중요한 공장들, 은행들, 운송회사들은 외국인의 소유였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들 외국 자본가들은 러시아로부터 이윤을 거둬 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국의 의회 내에서의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러시아에서의 의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고무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종종 그러한 투쟁에 대해서 반대했던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 정부가 행한 비열한 역할을 상기해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바로 이 같은 사실들이 러시아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고립 및 반민중적 성격을 규정짓는 기본적인 요인들이었다. 러시아의 부르조아지는 그들의 맹아기에는 어떠한 개혁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왜소했다. 그리고 혁명을 주도해야 할 순간이 도래했을 때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발전의 전 과정에 걸쳐서, 노동계급이 배출되는 곳은 수공업적 조합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농업 분야였다. 즉,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영국에서처럼 과거의 무거운 전통을 힘겹게 끌고 가면서 수세기에 걸쳐서 조금씩 조금씩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과 유대 및 사회관계에서의 급격한 변화를 통해서, 그리고 바로 가까운 과거의 관습들과의 급격한 단절을 통해서 비약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그리고 특히 제정 체제의 혹심한 억압 밑에서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혁명적 사고의 가장 대담한 결론들을 쉽게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후진적인 러시아의 공업이 자본가 조직의 최신 용어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는 언제나 이처럼 짧은 형성 과정을 되풀이하는 상황에 있었다. 금속 공업 분야에서는-특히 뻬쩨르부르끄의 경우-농촌과 완전히 단절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노동자들이 형성되어 가고 있던 반면, 우랄 지방에서는 여전히 반농 -반프롤레타리아적인 요소들이 우세했다. 농촌은 매년 모든 공업 지역들에다 새로운 노동력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와 그들이 배출되는 사회적 근원지 사이에 항상 밀접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무능력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및 농민과 맺고 있던 관계들로부터 직접 야기된 것이었다. 부르조아지는 노동자들에게 지신의 뒤를 따르도록 인도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일상 생활에서 부르조아지와 적대적으로 대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일찍부터 그들의 목적에 보다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이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 부르조아지는 농민을 이끌어 갈 능력 역시 없었다. 왜냐하면 부르조아지는 대지주들과 공통된 이해관계로 묶여 있었으며, 따라서 기존의 토지 제도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동요시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러시아 혁명의 촉발이 지연된 것은 단지 연대기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이 나라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청교도혁명이 이루어졌을 당시 영국의 인구는 약 550만 명 정도였으며, 그 중에서 50만 명 가량이 런던에 살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의 전체 인구는 2,500만 명이었으며, 파리에는 고작 50만 명밖에 살지 않았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경우, 전체 인구는 약 1억 5천만 명이며, 그 중 300만 명 이상이 뻬뜨로그라뜨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다. 더구나 이러한 단순한 수치상의 비교 이면에는 훨씬 중요한 사회적 차이점들이 숨어 있다. 17세기의 영국이나 18세기의 프랑스에는 우리 시대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프롤레타리아가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1905년 러시아의 경우, 도시와 농촌을 포함한 노동의 전 분야에 걸쳐서 노동계급의 수는 이미 1,000만 명을 돌파했던 것이다. 여기다 만일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시킨다면, 그 수는 2,500만 명 이상이 될 것이며, 이것은 대혁명 당시 프랑스의 전체 인구의 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혁명의 주도 세력은 크롬웰(Cromwell) 군대의 억센 수공업자들과 자영 농민들로부터 출발하여 파리의 상뀔롯뜨(Sans-culottes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급진 소시민 및 대중-역주)들을 거쳐서 베쩨르부르끄의 공업 노동자들로 변화해 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혁명의 사회적 메카니즘, 그 방법들, 그리고 따라서 그 목적들까지도 급변해 나갔던 것이다.

1905년의 사건은 1917년의 두 혁명, 즉 2월혁명과 10월 혁명의 서곡이었다. 이 서곡 속에는 이미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모든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단지 그 당시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전면적으로 부각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러일전쟁은 제정체제를 뒤흔들어 놓았다. 대중 운동을 위협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자유주의자 부르조아지는 제정체제에 경종을 울렸다. 부르조아지와는 독자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그들과 대립하면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soviet:평의회)들을 조직했다. 이렇게 해서 소비에트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농민들로 말하자면, 토지의 쟁취를 위해 농촌 전역에서 봉기들을 일으켰다. 농민들뿐만 아니라 군대내의 혁명적인 인자들까지도 소비에트를 지향해 갔으며, 이러한 소비에트는 혁명의 물결이 가장 고양된 순간에는 권력을 놓고 제정 체제와 공개적인 대결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역사의 무대에 공개적으로 나타난 모든 혁명적 세력들은 경험과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제정을 동요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자마자, 보란 듯이 혁명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민중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이러한 노골적인 결별은-그 이후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지식인 단체들 중의 대다수를 부르조아지가 지도함에 따라서 그 단절의 폭은 더욱 심화되어 간다-제정체제의 유지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즉, 정부가 선별적으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보다 충성스러운 사병들을 징집해서는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학살적인 탄압을 가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정체제는 비록 몇 군데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무사히 1905년의 시련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충분히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곡과 앞으로 도래할 드라마 사이에 위치한 11년 동안의 역사 발전은 세력 관계에서 어떠한 변화를 유발시킨 것일까? 이 기간 동안, 짜르의 체제는 역사적 요구들과는 더욱 상반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부르조아지는 경제적으로 더욱 강력해졌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그들의 힘은 과도한 공업 집중화 및 외국 자본의 역할 증대에 의거한 것이었다. 1905년의 교훈에 영향을 받은 부르조아지는 보다 보수적으로 그리고 보다 용의주도하게 되어 간다. 이미 과거에도 하찮은 것이었던, 중소부르조아지의 상대적인 비중은 훨씬 더 축소되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안정된 사회적 기반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일시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으나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지식인들의 종속은 급격히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에게 하나의 강령, 하나의 깃발, 하나의 지향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계급은 오직 짧은 역사를 지닌 프롤레타리아뿐이었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에게 제기된 막중한 과제들은 필연적으로 특수한 혁명 조직, 즉 단숨에 민중을 결집시킬 수 있으며 또한 노동자의 지도하에 그들을 혁명적 행동으로도 나아가게 만들 수 있는 조직의 지체 없는 건설을 촉진시킨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1905년의 소비에트는 1917년에 와서는 엄청난 발전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소비에트는 단순히 러시아의 역사적 후진성으로부터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결합 발전의 산물이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가장 공업화한 나라인 독일의 프롤레타리아조차 1918~19년의 혁명적 고양기에 소비에트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조직 형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자명한 일일 것이다.

1917년 혁명의 당면 목표 관료적 군주제의 타도에 있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과거의 고전적 부르조아 혁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혁명에서는 집중화된 공업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새로운 계급이 명백히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들은 새로운 조직 및 새로운 투쟁 방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결합 발전의 법칙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즉, 다 낡아빠진 중세적인 건물을 붕괴시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혁명은 불과 몇 달만에 프롤레타리아 및 그들의 선두에 선 공산당에 의한 권력쟁취를 실현시켜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당면 과제들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러시아 혁명은 민주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나라 전역에 소비에트들을 조직하고 거기에 병사들과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농민들을 가담시키고 있던 반면, 부르조아지는 여전히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인가 아니면 소집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흥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의 사태의 추이가 보여 주듯이, 우리들은 이 문제를 훨씬 구체적인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혁명 이념과 혁명의 형태에 관한 역사적 발전 과정 속에서 소비에트가 차지하는 위치를 규정해 보자.

17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일종의 종교 개혁을 구실로 한 부르조아혁명이 발생했다. 자신의 기도서에 따라 마음대로 기도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한 투쟁은 국왕과 귀족들, 교황과 주교들에 대한 투쟁과 동일시되었다. 장로교도들과 청교도들은 그러한 투쟁이야말로 지상에서의 자신들의 이익을 신의 섭리의 확고한 보호 아래 놓는 일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계급의 투쟁 목적은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성경의 해석 및 교회의 전례(典禮)에 관한 문제들과 불가분적으로 얽혀 있었다. 대서양 너머로 이주해 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로써 봉인된 전통을 함께 가지고 갔다. 기독교의 해석에서 앵글로-색슨족이 보여 주는 실로 활기찬 다양성은 바로 이러한 역사로부터 기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은 소위 "사회주의자" 각료들이 성서를 근거로 해서 자신들의 비겁함을 정당화시키는 광경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겁자들은 17세기에 그들의 선조들이 그러한 자유를 위해서 실로 용감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개혁을 건너뛴 나라인 프랑스에서는, 국가교회의 자격을 지닌 가톨릭교회는 대혁명 전까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혁명은 부르조아 사회의 합목적적인 표현을 성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추상적인 원리 속에서 발견했다. 프랑스의 현 지도자들이 쟈꼬뱅주의를 아무리 증오할지라도 쟈꼬뱅들의 급진적인 표현을 빌려 자신들의 보수적인 통치 행위를 은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로베스피에르(Robes Pierre)와 같은 인물의 가차없는 행동 덕택인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낡은 사회를 전복시킨 것은 그들이 현재 빌려 쓰고 있는 구호들이었던 것이다.

모든 위대한 혁명들은 부르조아 사회의 새로운 단계 및 그 사회의 제반 계급들의 의식에서의 새로운 변화를 표현해 주었다. 프랑스가 종교 개혁을 건너뛴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순전히 형식적인 민주주의(즉, 부르조아 민주주의-역주)를 건너뛰었다. 낡은 시대 전체에 대해서 봉인을 찍어야만 했던 볼셰비키 당은, 혁명의 과제를 정식화하는 데 있어서 성서나, “순수" 민주주의라는 세속화된 기독교 형태가 아니라 계급간에 존재하는 물질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체제는 이러한 물질적 관계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솔직하며 가장 명쾌한 표현을 부여해 주었다. 노동계급의 지배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소비에트 체제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체제가 장차 어떠한 역사적 시련들을 겪게 될지라도, 그것은-과거에 종교 개혁이나 순수 민주주의가 그러했던 것처럼-대중의 의식 속에 이미 확고부동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