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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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이 키타이스카야의 중심지에 있자 방이 행길편인 까닭에 창 기슭에 의자를 가져가면 바로 눈 아래에 거리가 내려다 보인다. 삼층 위의 창으로는 사람도 자그만하게 보이고 수레도 단정하게 보이며 모든 풍물이 가뜬가뜬 그 자신 잘 정돈되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쉴새없는 요란한 음향은 어디선지도 없이 한결같이 솟으면서 영원의 연속같이 하루 하루를 지배하고 있다. 이른 새벽 침대 속으로 들려오는 우유를 나르는 바퀴소리에서 시작되는 음향이 점점 우렁차게 커지면서 밤중 삼경을 넘어 다시 이른 새벽으로 이어질 때까지 파도소리같이 연속되는 것이다. 인간생활에는 반드시 음향이 필요한 모양이다.

나는 이 삼층의 전망을 즐겨해서 방에 머무르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창가 의자에서 지내기로 했다. 아침 비스듬히 해가 드는 거리에 사람들의 왕래가 차츰차츰 늘어가려 할 때와 저녁 후 등불 켜진 거리에 막 밤이 시작되려 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때이다. 조각돌을 깔아 놓은 두툴두툴한 길바닥을 지나는 마차와 자동차와 발소리의 뚜벅뚜벅 거칠은 속에 신선한 기운이 넘쳐 들리고 여자들의 화장한 용모가 선명하게 눈을 끄는 것도 이런 때이다. 그러나 반드시 또렷한 주의와 목적이 없이 다만 하염없이 그 어지럽게 움직이는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동안에 번번이 슬퍼져 감을 느낀다. 이유를 똑똑히 가리킬 수 없는 근심이 눈시울에 서리워진다. 인간생활은 또 공연히 근심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 근심의 곡절을 따져 낼 수 없는 것이, 그 짧은 여행이 원래 걱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어서 고향에 불행을 두고 떠난 것도 아니요 눈앞에 불행이 놓인 것도 아닌 까닭이다. 마음에 드는 거리를 실컷 보고 입에 맞는 음식을 실컷 먹으면서 흡족할 때까지 소풍을 하면 그만인 것이요, 또 그 요량으로 떠났던 여행인 것이나 마음은 반드시 무시로 즐겁지마는 않다. 호텔 아래편 식당에는 늙은 보이의 은근한 시중과 함께 기름진 버터며 로서아 수프며 풍준한 진미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나 그 깨끗한 식탁을 대하면서도 어딘지 없이 마음 한구석이 답답한 것은 웬일일까. 며칠만에는 식당으로 내려가기조차 귀찮아서 방 보이에게 분부해 늦은 아침식사는 대개 방에서 빵과 커피로 대신하게 되었다. 초인종으로 보이를 불러 그릇을 치우고는 다시 창에 가서 의자에 앉곤 한다. 행길에는 사람들이 훨씬 늘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가는 길과 목적을 뉘 알수 있으랴. 나는 키타이스카야 거리를 사랑한다. 사랑하므로 마음에 근심이 솟는 것일까.

“왜 이리도 변해 가는구 이 거리는. 해마다.”

변해 간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듯 시선은 초점을 잃고 아득해 간다.

지금 눈 아래의 거리는 사실 벌써 작년 여행에 본 그 거리는 아니다. 각각으로 변하는 인상이 속일 수 없는 자취를 거리에 적어간다. 오고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변했거니와 모든 풍물이 적지 아니 달라졌다. 낡고 그윽한 것이 점점 허덕거리며 물러서는 뒷자리에 새것이 부락스럽게 밀려드는 꼴이 손에 잡을 듯이 알려진다. 이 위대한 교대의 인상으로 말미암아 하얼빈의 애수는 겹겹으로 서리워 가는 것이다.

“나는 이 변화를 보러 해마다 오는 것일까. ─ 이 변화를 보러.”

혼자 속으로 생각하자는 것이 그만 남에게 들려주는 결과가 되었다. ─ 우연히 등뒤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던 까닭이다. 노크를 듣고 보이인 줄만 알고 콧소리를 질렀더니 살며시 들어와 선 것이 뜻밖에도 유우라이다. 돌아다보고 나는 놀랐다.

“왜 놀라세요.”

“너무도 의외여서.”

“오겠다구 약속하지 않았어요.”

“약속 받은 것은 나두 기억하지만. ─ 아무리 약속을 했기로서니.”

“말을 어기는 사람인 줄 아세요. 밤까지 별로 일두 없구 해서 일찌감치 나서 봤지요.”

“하얼빈의 변화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

하며 다시 창을 향하니 유우라도 의자를 끌어다가 탁자 맞은편에 앉는다.

“어쩌는 수 없는 일이죠. 될 대로 되는 수밖엔요.”

철없는 무관심일까. 대담한 체관일까. 표정 없는 순간의 그의 눈이 아름답다. 슬픈 얼굴보다도 평온한 그 얼굴이 얼마나 더 효과적이었을까.

“─ 보세요. 저 잡동사니의 어수선한 꼴을. 키타이스카야는 이제는 벌써 식민지예요. 모든 것이 꿈결같이 지내가 버렸어요.”


유우라는 판타지아에서도 으뜸가는 용모였다. 불끈 뜨는 커다란 눈이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서도 어디인지 어린 태가 드러나 보인다. 몸도 작고 팔다리도 소녀같이 애잔하다.

“폴란드 태생인 어머니의 피를 받아서 그런지 나두 여기서는 외국 사람 같은 생각이 난답니다.”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볼에 새까만 점을 붙이고 의자에 앉은 그의 모양은 밤 홀의 분위기와 꼭 어울리건만 그로서 보면 그 자신도 또한 그 홀에서는 한 사람의 이국인이란 말일까. 그렇다고 듣고 보면 딴은 그는 가령 무대 위에서의 노래나 무용이나의 짤막한 연기를 고집스럽게 열심히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의 그의 자태는 속일 수 없는 한 사람의 이국인의 그것이다. 조금 어색스러우리만치 잠자코 앉아서 무대로 향한 눈동자에 주의보다는 명상을 담고 있는 모양은 참으로 그 자리에서는 서먹서먹하게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밴드가 울리면 한자리에 앉았던 리이나와 끼고 일어나 춤을 추는 것이 여자끼리라 그런지 부드럽고 익숙하게 보이건만 나와 결게 되면 그만 발이 걸리고 몸이 끌리면서 주체스럽게 어긋나 버린다. 반드시 내 춤이 어색한 까닭이 아니라 유우라의 심중이 복잡한 탓이려니 생각한다. 복잡한 심사로는 주의의 방향을 어거할 수 없는 모양이다.

유우라가 잠깐 자리를 비인 새 리이나가 묻지 않는 말로 동무의 비밀의 한 토막으로 들려준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이었을까.

“유우라는 홀에서 독판 점잖은 척은 해두 실상은 ─”

“훌륭한 얼굴이 아니요. 기품이 있고 명상적인 것이.”

“실상은 작년까지 니이싸에 있었다나요. 거리에선 다 알죠.”

재빠르게 지껄이는 어조에 날카로운 적의가 펀적임을 나는 놀랍게 여기며 리이나의 얼굴을 쏘아붙인다. 리이나는 조금도 동하는 기색 없이 담배 연기를 천정으로 뿜어 올린다. 나는 들을 말을 들었는지 안들을 말을 들었는지 분간할 수 없어 ─ 순간의 놀램과는 반대로 마음은 즉시 침착하게 비어 감을 느낀다.

니이싸는 결코 명예롭지 못한 곳이다. 유우라는 몸에 찍혀진 그 지옥의 치욕의 표징은 평생을 가야 벗어질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런 치명상을 몸에 입지 않으면 안되리만큼 절박했던 것인가.

“판타지아로서는 이같이 불명예로운 일은 없어요. ─ 행여나 우리 모두를 유우라와 같은 부류의 여자인줄 생각들 할까봐서 겁이 나요.”

이런 리이나의 불평이 그로 하여금 유우라의 비밀을 털어놓게 한 것일까. 그의 어세는 의외에도 격하고 세다.

“그러나 리이나와 유우라는 누구보다두 친한 사이가 아니요.”

“우정과 신분은 다른 것이니까요. 신분만은 서로 확적히 해두는 것이 옳지 않겠어요.”

카바레는 즐거운 곳만도 아니다. 사람 사람의 가슴속에는 심리의 갈등과 감정의 거래가 거미줄같이 잘게 드리워 그것을 목도하고 경험함은 답답하고 피곤한 일이다 더욱이 유우라들의 일건에 관해서는 나는 결코 행복된 입장에 서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유우라가 나같은 뜬 나그네를 그렇게 수월하게 찾아온 것을 구태여 그의 그런 허름한 신분의 탓이라고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고 다만 약속을 지키자는 그의 교양의 발로라고 여기면 그만이어서 함께 거리에 나왔을 때에도 나는 그와 나란히 선 것을 그다지 부끄러워할 것이 없었다.

키타이스카야를 강 쪽으로 걸어가다가 왼편으로 고부라져 들어간 비교적 한산한 부두구(埠頭區) 일대의 주택지대를 거니는 것이 또한 나의 기쁨의 하나이다. 마당같이 넓은 행길에는 느릅나무의 열이 두 줄로 뻗쳐 있고 양편의 주택은 대개가 보얀 계란빛으로 되어서 침착하고 고요한 뒷골목인 셈이다. 대체 느릅나무와 보얀 집과 교당의 둥그런 지붕과 종소리를 제한다면 하얼빈의 운치로는 남을 것이 무엇일까. 부두구의 가로수 그늘을 지나면서 집 문패의 노서아 문자를 차례차례 서투르게 읽어 가는 것이 아이다운 기쁨을 자아내게 한다. 어느 집이나 넓은 뜰이 달렸고 나무와 화초가 화려하다. 옥수수와 강낭콩을 심은 뜰도 있어서 어느 고장에서나 전원의 풍경으로는 이에 미치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불란서 영사관예요.”

수풀 속에 커다란 이층집이 들여다보이는 문간에 이르렀을 때 유우라는 나의 주의를 일깨웠다.

규모가 클 뿐이지 집 모양이 사택과 다를 것 없는 것이 흥미를 끈다. 민주주의 문화의 표시인 것일까.

“변한 것은 키타이스카야뿐이 아니라 이 영사관두 어제와는 다르답니다.”

“독일과의 싸움에 졌으니까 말이지.”

“불국과의 연락이 끊어진 까닭에 돈두 안 오구 통신두 맥히구 해서 영사의 가족들은 요새 와선 생활조차 곤란이라나요. 자동차를 팔았느니 지니구 있는 보석까지를 넘겼느니 ─ 신문은 가지가지의 소식을 전해요.”

“세상은 변하라구 생긴 모양이야.”

불란서 영사관을 몇 집 지내 놓고가 또 바로 화란(和蘭) 영사관이다. 규모는 조금 작으나 나뭇가지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조촐한 집이 그 구역에서는 제일 단정한 듯하다. 화단에는 새빨간 샐비어가 한창 찬란하게 피어 있다. 그러나 철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음은 웬일인가.

“아주 폐쇄해 버렸단 말인가.”

“폐쇄한 셈이죠 관원들은. ─ 뒤꼍 한 간으로 살림을 줄이곤 거의 전체를 어떤 회사에게 빌려 주었다니까요.”

“영사관이 셋집이 됐다.”

닫혀진 철문 속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유우라와 함께 천천히 그 앞을 떠났다.

머리 속이 아찔해지면서 느릅나무의 푸른 잎새가 눈 속에 엉겨붙을 듯이 압박해 온다. 수수께끼나 풀고 있는 듯 오후의 골목은 고요하다. 깨끗하게 정돈된 행길 위에 우리들의 발소리만이 저벅저벅 울린다.

나는 혼란한 머리 속을 수습하느라고 잠시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는 없었다. 순간의 착각에서 깨어난 듯이 나는 내 육신이 제대로 멀쩡한 것을 새삼스럽게 신기하게 느낀다. 행길도 수풀도 집들도 제대로 늘어서 있다. 있든 모양대로 그대로 있는 것이다.

“유우라두 혹 그런지 ─ 난 가끔가다 현재라는 것에 대해 커다란 놀람과 의혹이 솟군 하는데.”

“현재가 왜 이런가 하구 말이죠.”

유우라도 내 마음속에 떠오르고 있는 생각의 정체를 옳게 살핀 모양이었다.

“가령 ─ 이 행길은 왜 반드시 이렇게 났을까 ─ 집들은 왜 하필 이런 모양일까 ─ 이 거리는 왜 꼭 지금 같은 규모로 세워졌을까 ─ 하는 생각……”

“키타이스카야는 왜 지금같이 변하구 불란서 영사관은 왜 저 모양이 되구 했나 말이죠.”

“더 가까이 ─ 손가락은 왜 하필 다섯 가락일꼬, 네 가락이면 어떻구 여섯 가락인들 어떻단 말인구 ─ 얼굴에만 두 눈이 박히지 말구 뒤통수에 하나 더 있던들 어떻다 말이구 ─ 배꼽이 옆구리에 붙으면 왜 못쓸까. ─ 내 머리는 왜 검구 ─ 유우라의 눈은 왜 푸른지…….”

나는 얼마든지 내 의혹의 예를 들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내게는 모두 수수께끼인 것이다.

“학자들은 진화의 법칙으로 설명하구 필요의 이치를 따지지만 ─ 손가락이 여섯인들 그다지 거추장스럽구 불필요할 것이 무언구. 그따위 옅은 설명보다두 내가 알구 싶은 건 창조의 진의 ─ 무슨 까닭으로 하필 현재의 이 우연한 결정이 있게 되었는가 ─ 현재가 이미 우연일 때 현재와 다른 우연의 결정을 생각할 수 없을까 ─ 내 머리가 노래졌대두 좋은 것이구 이 행길이 남쪽으로 났대두 무방한 것인걸 다만 우연한 기회로 말미암아 다르게 결정된 까닭에 지금의 이 머리 이 행길로 변한 것이 아닐까 ─ 그러기 때문에 지금보다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구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구……”

“당신은 무서운 회의주의자예요. 그러니까 언제나 그런 우울한 얼굴을 지니구 있죠.”

“나는 지금 왜 이곳으로 여행을 왔구 유우라는 왜 나와 걷구 있구……”

“너무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안타까울 뿐이죠 괜히. 사람의 힘에 부치는 것을 생각함은 자연에 대한 반역이 아닐까요. 괴로운 마음은 그 반역에 대한 벌이겠죠.”

유우라는 마치 타이르는 듯도 한 부드러운 목소리다.

문득 고개를 드니 먼 맞은편 나무 사이에 교회당의 둥근 지붕이 솟아 보인다. 그 의젓하고 엄숙한 자태는 전지전능자의 위엄을 보이자는 것일까. 지붕 위의 높이 솟은 십자가는 회의주의자인 나를 꾸짖고 있는 것일까.


송화강가로 나가 긴 둑을 걸어 요트 구락부에 이르러 덱 팔라에 앉으니 넓은 강이 바로 눈 아래에 무연하게 열린다.

팔라에는 식사하는 손님들이 거의 꼭 차 있고 홀 안 부대에서는 벌써 오후 여섯 시가 되었는지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는 그 음악을 하얼빈의 큰 사치의 하나라고 아까워한다. 식사하는 사람들이 그 음악을 대단히 여기는 것 같지도 않고 첫째 그것을 이해하고 즐기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차이코프스키의 실내악은 개발에 편자같이 어리석은 군중의 귀를 무의미하게 스치면서 아깝게도 흐른다. 하얼빈은 이런 사치를 도처에서 물같이 흘리고 있다.

보이에게 음식을 분부하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유우라는 내가 지니고 온 쌍안경으로 강 위와 건너편 태양도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정탐하고 있다. 이곳저곳에다 정신없이 초점을 맞추면서 연방 미소를 띤다.

굉장한 것을 발견했다고 히히덕거리며 한 곳을 손가락질하고 쌍안경을 내게 주는 것이나 그의 눈과 내 눈은 시력이 다른 까닭에 나는 내 눈에 맞도록 초점을 다시 조절하지 않으면 안된다. 눈에 대고 함부로 나사를 돌리노라면 두 개의 렌즈 속에 혹은 태양도의 붉은 지붕이 들어오고 베란다에 나앉은 가족들이 들어오고 물에서 헤엄치는 남녀의 자태도 어리워 온다. 강 위를 닫는 유람선 이층에는 사람들이 빽빽이 붙어 섰고 기슭에 댄 조그만 어선 속에는 평화로운 부부의 자태가 보인다. 남편이 낚시질하는 한편에서 수영복을 입은 아내는 책을 읽고 있다. 책의 작은 활자가 바로 내 손에 쥐어 있는 듯이도 똑똑히 비취어 온다. 아내가 문득 고개를 돌린 것은 남편이 고기를 낚았다고 소리를 친 까닭이다. 뱃전에 흰 고기가 푸득푸득 뛰면 부부는 미소와 흥분으로 고요하던 뱃속에 한동안 생기가 넘친다. 이 단란의 풍경은 아무리 오래 보아도 싫지 않다. 아마도 이날 강에서는 제일가는 풍경이었으리라.

쌍안경으로 그토록 히히덕거리고 기뻐하던 유우라언만 보이가 날라다가 식탁 위에 늘어놓는 음식 그릇을 보고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음은 웬일이었을까.

각각 접시에다가 음식을 논아 놓고는 포크를 드는 대신 여전히 담배를 피운다. 맥주잔을 권해도 간신히 입술에 대는 정도로 들었다가는 놓는다.

“이런 진미가 입에 맞지 않는다니. ─ 이 집 요리는 하얼빈서두 유명하다는데.”

혼자만 식도를 움직이기가 미안해서 이렇게 말하면 유우라는,

“도모지 식욕이 없답니다.”

“담배를 너무 피우니까 그렇지.”

“담배를 피워서 식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식욕이 없으니 담배밖엔 피울 것이 없어요.”

카바레에서도 그는 담배가 과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무시로 연기를 뿜는 것이다. 손가락 끝이 익은 누에같이 노오랗다.

“어서 그른 소리 안할 테니 ─ 음식을 많이 먹구 몸 좀 주의해요. 그 팔목의 꼴이 무어요. 황새같이 가느니.”

“몸이 좋아져선 뭘 하게요.”

종이접시에 논아 담은 음식의 반도 못 치우는 그의 식량이다.

팔라를 나와 문간에서 모자를 찾을 때 나는 늙은 보이에게 은전 한 입을 쥐어 주다가 문득 어디선가 본 얼굴 같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뜰로 내려섰다.

“옳지, 스테판. ─ 어쩌면 저렇게 스테판과 같은 얼굴일까.”

그 늙은 보이는 ─ 이름이 무엇일까, 흔한 이완이나 안톤일까 ─ 모습이 스테판과 흡사한 것이다. 스테판은 판타지아의 변소를 지키는 늙은 보이이다. 손님의 손에 물을 부어주고 수건을 빌려 주는 보이이다.

하얼빈에는 왜 이다지도 도처에 늙은 보이가 많으며 그들의 얼굴이 또한 비슷비슷한 것인가. 불그스름한 바탕에 주름이 거미줄같이 잡히고 머리카락이 흰 것이 모두가 스테판 같고 이완 같고 안톤과 흡사하지 않은가 ─ 생각하면서 나는 스테판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취한 손님이 비틀비틀 변소에서 나와 수도 앞에 서면 스테판은 빙글빙글 웃으며 가까이 와 컵에 준비해 두었던 물을 손에 끼얹어 주고 손에 들었던 수건을 내민다. 손님이 손을 훔치고 날 때면 다시 빙글빙글 웃으며 얼굴을 똑바로 본다. 그 웃음에는 뜻이 있다. 돈푼을 던져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알고 보면 그 웃음을 띠인 얼굴이 원숭이같이 교활하고 불쾌하게 여겨지는 것이나 그러나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이 하룻밤의 그의 필요한 수입이 됨을 생각할 때 미워할 수만도 없는 것이다. 하얼빈의 수많은 보이들 중에서도 스테판같이 천하고 가엾은 사람은 없을 법하다. 내게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주게 된 것도 그 까닭일지 모른다.

뜰에는 초록이 신선하고 화단이 깨끗해서 제물로 휴게소를 이루었다. 흰 벤치가 놓여 있는 나무그늘로 가서 유우라와 함께 걸어앉으면서도 나는 스테판의 인상을 떨어버릴 수가 없다. 스테판을 생각하면 한 가지 미안한 일이 있었던 까닭도 있다.

“난 스테판에게 조그만 죄를 진 게두 같구려.”

내 말에 유우라는 내 얼굴을 듬직이 바라보면서,

“그날 밤에 팁을 좀더 못 주었던 것 말이죠. 그 말씀을 벌써 몇 번 되풀이하시는 셈에요. 하룻밤에 한 번 두 번 그만이지 어떻게 번번이야 주겠어요.”

“그래두 스테판은 그것을 바라는 표정이던데.”

몇 번째 출입이었던지 나는 잔돈이 없었던 까닭에 그의 미소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전 한 장을 덤석 주지 못했던 것은 확실히 나의 인색한 탓이라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지전 한 장쯤이 그의 그 은근한 태도에 대해서는 그다지 과하고 불필요한 보수는 아니었을 것이니 말이다. 나는 확실히 지전을 아꼈던 것이다. 없는 잔돈을 찾다가 그만 부끄럽게도 그의 앞을 비슬비슬 물러서는 수밖에는 없었다. 생각할수록 미안한 일이었다.

“암마를 줘두 좋기는 하겠지만 어디 세상에 그렇게 관대한 손님이 있어요.”

유우라는 나를 위로하려고 애쓰는 눈치인 듯도 하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스테판의 신세 이야기는 도리어 더한층 내 마음을 울리게 되었다.

“하긴 스테판은 그렇게 푼푼이 모아서 본국으로 갈 노자를 맨들구 있답니다. 한푼이래두 더 긴하긴 하죠.”

“본국으로.”

“그는 소비에트로 가야 하구 가기를 원하고 있어요.”

“흐음. 그럼 변소에서 버는 한푼 한푼이 십만리 먼 길을 주름잡는 한 킬로 한 킬로의 찻삯이 된단 말이지.”

“그렇게 그는 평생의 꼭 한 가지 그 원을 위해서는 어떤 비굴한 웃음이든지 띠이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럼 난 더 미안한 셈이 되게.”

“스테판의 꿈은 먼 곳에 있답니다. 눈앞에는 아무것두 없어요.”

“유우라의 꿈은?”

나는 뒤미처 물으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강을 내다보았다. 누런 탁류가 아득하게 넓고 무수한 배가 혹은 움직이고 혹은 서 있다.

나는 문득 ─ 밑도끝도없이 문득,

“스테판은 혹시나 유우라의 아버지나 아닐까.”

하고 느끼자 공연히 내 스스로 그 당돌한 생각에 놀라면서 고개를 돌려 유우라를 보았다.

역시 강을 바라보고 있던 유우라는 그 내 거동을 눈치채임인지 얼굴을 돌려 함께 나를 본다. 나는 그의 복잡한 마음속을 그 시선만으로는 읽을 길이 없다. 그는 그 수심스런 눈을 보낼 곳이 없는 듯 다시 강으로 던지면서,

“강을 바라보면 저는요 ─.”

들릴락 말락 목소리가 가늘다.

“─ 언제나 죽구 싶은 생각뿐예요.”

“주 죽다니.”

나는 모르는 결에 목소리를 높이면서 황새같이 가는 그의 팔목을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아예 그런 위험한 생각은 ─”

하면서 생각하니 유우라야말로 나보다도 몇 곱절 웃길 가는 회의주의자였던 것이다. 무시로 담배만을 먹고 식욕이 없고 황새같이 여윈 그는 속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죽다니 아예 그런.”

거듭 외이는 내 말투는 죽음을 생각함은 되려 사치한 생각이라는 것,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사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뜻을 표시하자는 것이었으나 유우라가 받은 뜻은 무엇인지를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다시 죽음을 장황하게 설명함은 내 맡은 일도 아닐 법하다.

“마지막 판에는 언제나 그걸 생각하군 해요. 그것만이 즐거운 일이예요.”

내가 내 딴의 생각에 잠겨 있듯 유우라도 역시 그 자신의 생각의 껍질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 껍질 속으로는 국외의 다른 사람은 비집고 들 길이 없다. 죽음 이외의 무슨 말로 대체 나는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일까.

팔라에서는 여전히 답답한 음악이 들려 오고 강은 저녁 빛 속에 점점 흐려간다. 사람을 싣고 섬으로 건너가는 이층의 유람선이 저무는 속에서 먼 세상의 것같이 아득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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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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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