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원행/제5부
101. 폭풍우 지난 뒤
[편집]애라와 면후는 한경의 밤을 곱이 샅샅이 뒤졌으나, 겨우 단서로 얻은 것은 본연의 알지 못할 집 번지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애라는 신대륙을 발명한 탐험가처럼 기뻐하였다. 그의 생각은 두 남녀가 꼭 거기서 사랑의 꿈을 꾸는 중이라고 믿은 까닭이다. 면후의 표정은 이와 반대로 냉정하였다. 첫째 압록강 건너간 범인을 체포하는 것이 용이한 일도 아니오. 더군다나 봉천까지 갔다면 사면이 뺑소니 칠 길뿐이다.
조선 안에서 그렇게 영리하고 민첩하게 활약하던 철호를 만주 벌판에 내놓고 잡으려면, 약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조선 안에서 알 만한 처소에 가서 묵을 리도 만무하고, 더구나 영사관 근처에서 두리번거리고 날 잡아가소 할 바보가 아닌 것을 그는 잘 안다.
모호한 주소 발견으로 기뻐할 면후는 아니었었다.
"애라! 그들이 거기에 있을 듯싶은가?"
면후는 대머리를 두로 한 번 쓰다듬으며 묻는다.
"내 생각에는 꼭 있을 것 같은데요……."
애라는 복수에 타오르는 눈으로 면후의 맘을 비추어 보려는 것같이 천천히 보며 대답한다.
"글쎄……. 한 의문이야! 어디 수배를 해보지!"
면후의 대답은 선선치 못하였다. 이러하면서도 그는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였다.
'형사대를 급히 파견하여볼까?', '영사관에다 의뢰하여 체포를 할까?'
이 두 가지가 면후의 머릿속을 채웠다.
한참 묵묵히 앉아서 생각하는 동안에 그의 생각은 다시 돌았다. 애라는 그의 표정을 보고 좀 불쾌한 생각이 났다. 저 대머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니 그의 유쾌하고 불유쾌한 것이 자기의 감정에 아무것도 충동을 일으킬 것이 없다만, 그래도 그가 이런 경우에 쌀쌀한 표정을 보이는 것은 필연코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라고 의심하매, 그의 자존심은 그런 표정 보기를 허락지 않았다.
애라는 벌떡 일어났다.
"이제 그만 돌아가지요. 이 위에 더 얻을 것도 없을 터이니……."
면후도 따라 일어났다.
"나는 경찰부로 갈 터이오. 그러면 먼저 가시구려."
이것은 길을 여기서부터 갈라 가자는 말이었다. 애라는 알아차렸다.
"그러면 천천히 오셔요. 저 먼저 갈 터이니……."
애라는 이렇게 말을 던지고 면후의 집을 나섰다.
애라가 나간 뒤에 흔들어 놓은 방 안을 우두커니 살펴보고 있는 홍면후의 머릿속도 방 안이나 지지 않게 산란하였다.
'철호와 한경이가 봉천 그 번지로 갔다 하여도 지금까지 철호가 그 곳에 있을 리도 만무하고, 한경이만이 남아 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섣불리 형사대를 보내고, 영사관에 의뢰해서 체포에 착수하였다가 정말 범인은 못 붙들고, 애꿎은 한경이만 걸리면 이게 무슨 모양이냐. 불쌍한 누이동생 하나를 위하여 지금까지 하여온 멍텅구리가 한 번 더 되어볼까?' 그러나 이것도 지금 면후의 형편으로는 못할 일이었다. '애라가 미워하는 것은 철호보다도 한경이다. 한경이가 잡힐까 무서워하여 이 사건을 흐지부지한 것을 만일 애라가 알게 되면, 고 암상스러운 솜씨에 무슨 짓을 하여서라도 우리 남매의 얼굴에 똥짓을 할는지도 알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경이가 철호와 부동하여 자기를 농락하고, 필경에는 배반하고 도망 하던 그때의 분노 그대로 하면, 만일 한경이가 곁에 있었던들 얼굴 바닥이라도 할퀴었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내고 불같이 쳐 받치던 분의 불길이 그 세력을 얼마만큼 알고 보니, 골육의 사랑이란 것이 그 틈을 타서 다시 움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종자인지도 모르는 딴 남인 애라를 앞세우고 골육의 방에 침입해서 저와 같이 방 안을 수라장을 만들어 놓은 자기가 우스운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공공한 사건을 위하여 한 일이다 하고, 눈을 감고 속으로 가만히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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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애라는 굴속처럼 음침한 면후의 표정이 보기 싫어서 급히 그 집을 나섰다. 나서면서 한참 동안은 발을 멈추고 생각하다가, 그 집 앞으로 지내는 인력거를 돌려 타고 백마정으로 향하였다. 유치장 구경을 한 뒤로는 이번이 첫 출근이었다. 카페 안에는 별로 변한 모양이 없다. 역시 붉은 술, 푸른 술이 진열장에 늘어놓였고, 대리석 테이블이 번듯이 누워 있다. 낮이 조금 지나서 명랑한 햇빛이 물들인 유리창으로 스며들어 와서 아른 거리고 있다. 손님은 하나도 없고, 여러 동무들만 한편 테이블을 중심 삼아 콧노래를 부르고 앉았다.
한편 벽 체경에 문 열고 들어서는 애라의 그림자를 발견한 그들은 벌떡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아이 참! 이게 웬일이야. 어제도 안 오구……."
"그 일이 어떻게 되었어요? 어제 홍 과장한테 전화로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겠지요. 지금은 막 아이 짱 이야기를 하는 중이랍니다."
"어째든 무사한 것이 제일 좋구먼……."
여러 동무들은 이와 같이 인사를 한다.
"너무 걱정들을 하게 해서 퍽 미안합니다. 운수가 불길하면 다 그러합니다. 대수롭지 못한 일에 그만 유치장 구경까지 하였지요."
애라는 될 수 있는 대로 평온한 얼굴을 지어 가지고 대답하였다.
"신색이 좀 틀렸군요."
"그렇게 보니까 그런 거지요. 편히 이틀이나 쉬었는걸요."
이와 같은 인사를 뒤에다 남기고 애라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철호와 고순일이가 만났던 광경, 또 철호, 한경이, 면후, 자기가 모 여서 음모 하던 광경, 모든 평일의 일이 눈앞에 현연히 떠올랐다. 결국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말 것을 서로 속여먹느라고 애쓰던 것이 우습기도 하였다.
"아이구! 보기 싫어!"
그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다시피 하고 발길을 돌이켰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말 좀 하오!"
이 층에서 나려오는 애라에게 눈짓을 하며 말하고 가까이 오는 이는 란 짱이었다.
애라는 발을 멈추고, 다만 바라보는 눈으로 말을 대신하였다.
"이리 좀 와요……."
란 짱은 또 눈으로 군호를 한다. 애라는 란 짱을 따라 보기도 싫던 이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한편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란 짱은 아래층에다 주의하는 시선을 던지며,
"아이 짱! 그게 어떻게 된 일이예요?"
하고, 애라의 얼굴에서 무엇을 발견하려는 것같이 찬찬히 바라본다.
"무엇이 말이에요?"
애라는 란 짱의 묻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사실을 말 하기가 거북하였다.
"웬일인지 오늘 아침에 또 이상스러운 사람이 왔겠지요."
"이상스러운 사람이라니?"
애라는 깜짝 놀랐다. 그의 심경이 이삼 일 동안에 바늘끝같이 날카로워진 까닭이다.
"이상스러운 사람이라면 유우쓰야와 같은 사람으로 알겠지만 그이는 아니에요."
유우쓰야와 이상한 남자는 카페에서 평일부터 철호에 대하여 공통으로 쓰는 별명이었다. 이상한 사람이라 함에 애라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우쓰야는 도무지 보이지 않고, 어떤 말쑥한 양복쟁이가 이틀 동안이나 연해 와서 아이 짱 이야기를 자꾸 묻겠지요. 출생이 어디며, 지금까지 무엇 하고 지냈으며, 어떠한 남자와 친근히 지내며, 지금 집은 어디며, 이 새에 안 오는 것은 어떤 이유이며, 그러고 나중에는 홍면후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겠지요. 나보고 뿐 아니라, 여러 일본 계집애 보고도 딱지를 떼고 덤벼서 모조리 물어보겠지요. 아주 기분이 와루이わるい해서 죽을 뻔했지요."
란 짱은 한숨에 말을 내놓고는 숨이 가빴다.
애라는 괴상한 생각이 났으나, 이 자리에 황망히 굴 것은 아니었다. 다시 냉정을 회복한 뒤에,
"그래서 무어라 대답했소?"
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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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하고 란 짱은 아래층을 또 심하게 내려다본다.
"그럴 것도 없는 것을 괜히 그러셨군요. 아는 대로 말을 해주지 그랬어요."
애라가 이렇게 말은 하였으나, 그 눈에는 나의 내력을 아는 사람이 누구 란 말이냐 하는 안심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아이 짱의 내력을 내가 안다기로 천만부지 모르는 사람에게 일없이 꼬아 바칠 거야 무엇이란 말이오. 나를 그런 바보로만 아시는구려?"
란 짱은 동무의 내력을 다른 사람에게 말치 않은 것이 큰 신의나 지켰다는 것같이 호기 있게 말한다.
"그 사람도 꽤 심심한 모양이구려! 남의 여자의 내력만 조사하고 다니니. 이상한 일도 참으로 많지!"
애라가 지금까지 자기의 내력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항용 찻잔이나 먹으러 들어온 손님들은 의례히 무슨 호구 조사나 하랴는 것같이, 나이 얼마나 되었느냐, 가족이 몇이냐, 본집이 어디냐 하고 성가스럽게 물었다. 이러할 때마다 애라는
"어데 한 번 알아내 보구려! 틀리면 내가 말하지요."
하고, 웃음으로 말끝을 흘려버리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백마정의 란 짱의 존재는 역시 한 의문으로 있는 곳에 큰 값이 있었던 것이다. 손님들도 대개는 그의 내력은 결단코 알지 못할 것으로 탕쳐 버렸었다. 다른 사나이가 자기 내력을 묻는다는 것이 평일 같으면 예사로 여겨 한 귀로 흘러버리고 말 것이나, 남이 알까 두려워할 사건으로 유치장 구경까지 한 이후의 일이라 맘이 얼마만큼 켕겨서 묻는 사람이 어떠한 종류의 사람인 것을 물었든 것이다.
"대체 어떠한 이딥까? 그래도 대강 짐작은 있었을 터이지요?"
"아마 신문 기잔가 봐요. 말 걸치는 보법이 그럴듯하더군요. 알고는 대답 아니 할 수 없도록 여러 가지로 슬쩍슬쩍 말을 걸치더군요."
이것은 무심코 내놓은 말이지만, 홍면후와 철호의 관계를 대강은 어느 정도까지 말하였다는 의미로 애라에게 들렸다. 요 계집아이가 제 말로는 하나도 대주지 않았다고 장담은 하였지만, 실상은 이 말 저 말 듣는데 넘어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나 아니하였나 하는 의심이 났다.
"아마 홍 과장 이야기는 하였지요. 나에게는 상관없는 이니까. 그러 고철호 씨 이야기도."
"부지런히 다닌다는 말만은 하였지요."
란 짱의 얼굴에는 이런 말도 괜히 했나 보다 하는 빛이 보인다.
"말해도 아무 관계 없어요. 철호 씨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디까?"
"거저 어떠한 남자가 다니더냐고만 묻지, 철호니 무엇이니 하는 말은 아니 묻더군요."
애라는 철호의 이야기를 부질없이 내놓았다고 후회하였다.
"웬일인가요? 자꾸 와서 그렇게 물으니 갑갑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되 물었더니, 이 카페는 조선 천지를 한 번 떠들썩하게 이름을 울릴 것이라고 웃으면서 말을 합디다. 웬 까닭인지 몰라요?"
란 짱의 눈에 호기심이 흘렀다.
"두고 봐야 알지요."
애라는 사건이 거저 비밀리에서 흐지부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의 생각에는 이 일이 신문 지상에 떠들리어 천하의 시청(視聽)이 자기에게로 모이는것도 매우 흥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차라리 그 신문 기자를 자기가 스스로 만나보고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이때에 아래서 란 짱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란 짱은 아래로 내려가더니 다시 바삐 올라와서.
"그 이상한 양복쟁이가 또 왔군요."
하고 가쁜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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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지런히 출근하는구려! 그것도 제멋이니 내버려두구려!"
애라의 태도는 란 짱과는 정반대로 매우 침착해 보였다.
"저 양복쟁이가 만일 만나보자 하면 무어라 대답할까요? 없다고 할까요?"
란 짱이 이층으로 뛰어올라 온 의미를 알았다. 란 짱조차 자기에게 큰 죄나 비밀이 있는 것처럼 황망히 굴고 쉬쉬하는 것이 비록 자기를 위해 하는 일이지마는. 애라에게는 도리어 불쾌한 생각을 일으켰다.
"없다는? 왜 없다고 해여 있다고 하구려."
애라의 말끝이 송곳같이 뾰족하였다.
"그러면 있다고 하지!"
란 짱은 조금 무람한 듯이 얼굴빛이 붉어지며.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연일 찾아와서 괴롭게 굴던 신문 기자 비슷한 사람이 또 왔다는 란 짱의 보고를 듣고도, 애라는 눈도 깜짝하지 않은 것같이 외면으로는 보였으나, 실상인즉 그의 가슴 고동은 얼마만큼 높았다.
신문기자가 이번 사건을 알게 되었단 것은 애라에게는 짐작하기 어려운 괴상한 일이었다. 이번에 직접으로 책임을 가지고 참여한 이외 사람이 이것을 벌써 알게 된 것은 웬일일까? 애라는 의심이 바짝 생겼다. 홍면후가 벌써 알 리가 만무하다. 책임상 그런 말을 함부로 내놓은 결과가 어떻게 될 것쯤은 넉넉히 짐작할 위인이다. 그러면 고순일이가 발설을 하였을까? 그가 사건의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현재 유치장에서 썩고 있지 않으냐? 말할 기회가 없다. 그러면 애라 자신이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었던가? 그런 기억이 없다. 이 사건이 세상에 퍼진 것은 필연코 까닭이 붙은 일이다. 애초부터 이번 사건을 계획적으로 만들어서 면후와 자기의 관계를 이 세상에 폭로시키려 함이던가? 여러 가지로 애라는 생각하여 보았지만, 여러 가지가 다 아귀에 들어맞지 않는다.
"내가 미리 내려가서 신문 기자란 이의 눈치를 좀 떠볼껄!"
애라는 혼자 중얼거리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시 주저앉았다. 흥분한 이때에 쓸데없이 이 말 저 말 지껄이다가 말의 발목이나 붙들리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때에 이층으로 올라오는 구둣소리가 들리더니, 청년 신사의 머리가 층층대 난간 사이로 나타났다. 애라는 본체만체하고 발끝을 가벼이 굴러가며 가늘게 입속 노래를 하였다. 양복 신사의 뒤에는 란 짱이 따랐다.
그들은 바로 애라의 곁 테이블에 걸터앉는다. 애라는 직업상으로 숙이는 머리는 이 남자에게도 아니 숙일 수 없었다.
"란 짱! 이이가 아이 짱이지!"
양복 신사는 서슴지 않고 란 짱더러 묻는다.
"네. 그렇습니다."
애라는 란 짱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앞질러 말을 걸쳤다.
"뭐 하려고 여러 번 왔다가 못 뵈었지요."
하고, 신사는 궐련을 슥 내었다.
란 짱은 기다렸다는 것같이 성냥을 그어댔다.
"저 같은 사람을 보러 오셨다고요? 감사합니다."
애라는 몸을 의자로 던지고, 말은 신사에게로 던졌다.
신사의 얼굴에는 이것 참 듣던 말과 같구나 하는 표정이 나타난다. 란 짱을 시켜 음식을 주문한 뒤에 그는 애라의 곁으로 자리를 가까이 옮기며 말을 붙인다.
"당신의 성화는 벌써부터 잘 들었습니다만, 뵈옵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카페 백마정에서 웨이트리스 노릇 한 뒤로 이렇게 공손하게 말 걸치는 손님을 본 적이 애라로서는 몇 번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처음 보는 이라도 대게는 반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허게요. 심하면 해라를 붙이었다. 이렇게 말을 공손하게 쓴 사람은 철호요. 그 다음은 이 신사였다.
애라는 점차 흥미를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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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란 짱이 올라왔다.
"란 짱! 미안하지만 조용히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 하고. 신사는 란 짱이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좋을 의사를 보인다.
"천만에 재미를 해서 안 되었군요."
란 짱은 조금 무렴한 듯 얼굴이 붉어가지고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란 짱이 대체 못할 말이 무엇인가요? 란 짱! 그대로 이리 와요." 하고, 애라는 내려가는 란 짱을 짐짓 불렀다. 그러나 란 짱은 대답도 없이 나가버린다.
"애라 씨!"
부르는 소리가 매우 정중하다.
애라는 깜짝 놀라 시선을 신사의 얼굴에다 던졌다.
"이런 말씀을 물으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홍면후의 끄나풀이란 소문이 굉장하니 참말입니까?"
이글버글한 목소리 가운데에 조금 야유가 섞이었다.
애라의 얼굴은 별안간 희푸르러졌다. 그리고 눈동자는 눈 한가운데에 박힌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눈썹은 꼿꼿하고, 그 주위는 불붙은 것같이 붉어졌다. 그리고 안면 근육은 만경이 된 것처럼 조금씩 씰룩거린다. 두 입술은 코 밑에다 한 일一자를 그렸다.
이렇게 변한 애라의 얼굴을 슬쩍 바라본 신사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희푸르든 애라의 얼굴에 혈색이 조금 돌더니.
"지금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해보셔요."
하고, 신사의 얼굴을 최면술 거는 사람같이 노려본다.
"다시 해야 그 말이지요. 당신이 형사과장의 끄나풀이라고요."
신사는 애라의 매서운 표정에 조금도 반응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애라의 얼굴은 다시 희푸르러졌다. 이번에는 두 손도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노하실 것은 도무지 없지요. 여자는 교제가 넓으면 들을 말, 못 들을 말, 별별 애매한 말도 듣는 법이니까. 그런 것이 사실이 아니면 그만 이겠지요."
"대체 그런 말을 제게 물을 권리가 당신에게 있습니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너무 실례가 아닌가요?"
애라는 떨리는 입술로 겨우 움직였다.
"권리! 말을 할 자유쯤이야 누구에게든지 있겠지요. 내 자유로 물어본 것이지, 무슨 권리가 있대서 그런 것은 아니지요.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사는 자기 손수 술을 따르며 눈을 아래로 뜨고 평온하게 말한다.
"물어볼 말도 분수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모욕을 해도 정도가 있어야 하지요."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을 나는 우리 동지로 생각해서 물은 말이지, 그럴 리가 있나요. 천천히 내 말을 좀 들어보시구려. 그렇게 노하지 말구요."
매우 추근추근하다.
"다 듣기 싫어요! 동지! 그러면 당신이 끄나풀이란 말이요? 나는 끄나풀이 아니니까. 당신의 동지가 못 된단 말이에요."
애라의 말소리는 날카로웠다. 분 나는 그대로 하면 테이블을 박차고 신사의 하이칼라 머리를 잡아 흔들고 싶었던 것이다.
신사는 입으로는 술을 넣고, 귀로는 애라의 말을 넣더니,
"큰일을 하실 분이 그렇게 성미가 조급해서 어떻게 합니까? 잠깐 참으시고 이야기나 합시다."
어디까지든지 애라를 농락하려는 태도이다. 애라는 얼굴이 한참 동안 푸르락 누르락 하더니, 그는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얼굴에 제 빛이 돌며 자리에 다시 걸터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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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애라가 다시 의자에 몸을 던지자, 신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러고 모자를 머리에 얹고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돈 일 원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는다.
애라는 웬일인지 몰라 잠깐 두리번거렸다.
사람을 죄인 취조하는 것같이 처음에는 닦달하던 그가 별안간 이렇게 일어날 줄은 짐작치 못한 일이다.
그의 애라더러 노하지 말고 실컷 이야기나 하여보자고 한 앙큼한 말이 그 꼬리를 애라의 귓바퀴에 아직도 서려 있는 것은. 결국 말 듣는 상대자를 일부러 놀려보고 모욕해보려는 행동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애라의 얼굴은 다시 붉었다. 아무 말 없이 노기 띤 시선에다 모멸을 섞어 신사의 정면을 쏘았다.
신사는 태연한 태도로
"너무 여러 말을 물어서 미안하게 되었소."
하고,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저보셔요. 하실 말씀이 있다 하시더니 웬일이에요?"
앉았던 의자를 뒤로 밀어 치우고 테이블 앞에 꼿꼿이 서 있는 애라는 석고소상(石膏塑像) 같다. 간단한 말이지만, 그 여운은 서리가 쳐 있는 것같이 싸늘하게 들린다.
"그렇게 간단히 할 이야기가 아니니까, 이 담 기회에 충분히 합시다."
신사는 아래로 향하는 발을 잠깐 멈추고 말없이 층층대를 총총 내려간다.
애라는 도깨비에게 홀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볼 뿐이다.
애라가 지금까지 여러 싱거운 남자를 겪어보았지만, 이렇게 싱거운 사람을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싱거운 일의 새 기록이었다.
나려가는 녀석의 뒤통수를 잡아끌어 올려다가 어째서 다른 여자의 근본을 탐문하고 다니며, 어떠한 이유로 홍면후의 끄나풀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볼까 하다가 그대로 두고 보았다. 도리어 이편에서 무슨 맘에 끌리는 일이나 있어서 그러하는 것인가 하는 약점을 그에게 보이기가 싫었다. 그 의자 존심이 허락지 않은 까닭이다. 애라는 다만 코웃음으로 그를 전송할 뿐이었다.
애라는 신사를 보낸 뒤에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신문기자! 그럴듯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신문 기자라면 좀 더 다정히 굴면서 말을 들을 것이오. 이와 같이 여자의 속을 확 뒤집어서 모욕을 느끼도록 해놓고 슬쩍 갈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나 눈치 빠르게 노는 것이며, 사람의 달음달음이 신문사 같은 데서 많이 단련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러할 수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신문 기자인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도 역시 경찰서나 헌병대의 끄나풀일까? 만일 그러하다면 끄나풀로는 제법 때가 벗은 끄나풀이었다. 홍면후와 감정이 있는 끄나풀? 그렇지 않으면 철호의 동지? 여러 가지로 의심하기를 마지않았다.
애라는 이와 같이 한참 생각하는 동안에 며칠 동안 곤비한 까닭 이었던지 현기증이 났다. 앞에 있는 화분, 포스터, 담배 재떨이, 모든 것이 엷은 별을 통하여 보는 것같이 희미하여 보였다. 그는 눈을 감았으나, 역시 모든 광경이 활동사진 필름처럼 그의 눈앞에서 아롱거린다. 애라는 머리를 조금 흔들어 정신을 차렸으나, 머리만이 새로이 아플 뿐이다. 암만해도 괴상한 일이었다. 이러한 경우에 의논할 만한 곳은 역시 홍면후였었다. 홍면후의 끄나풀이라 하니, 홍면후가 유치장이나 감옥으로 아니 가는 이상, 자기가 다시 그런 곳으로 들어갈 리야 없겠지만, 사람의 일을 누군가 알 수 있으랴! 불안을 아니 느낄 수 없다. 그는 넋 잃은 사람처럼 가만히 앉았다가 아래 층으로 내려가서 전화통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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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애라는 전화로 홍면후를 불러냈다. 조금만 조용하면 괴상한 양복쟁이가 와서 자기들의 비밀을 알려고 애쓰던 것과 또 금번 사건의 비밀한 내용을 대강 짐작하고 있는 것을 대강이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여러 동무가 전화에 매우 주의를 하는 모양 같아서 하는 수 없이 그저 급한 사건이 생겼으니 속히 만나보았으면 좋겠다는 뜻만을 말하였다.
이 전화를 받은 홍면후는 반갑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실책이 세상에 탄로가 되었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번쩍 났다. 무슨 일이든지 소위 예감과 직각(直覺)을 미신에 가깝다 할 만큼 숭상하며 내려온 홍면후로서, 애라의 전화를 받고 이건 벌써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선뜻 일어날 때에, 그는 벌써 맘으로는 자기의 일이 끝장날 것을 예감하였던 것이다.
"전화로는 말씀할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애라는 면후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곧 딴 장소를 정하고 그곳에서 만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애라의 집으로 바로 갈 터이니 잠깐 기다리라고 서둘러대는 것이 면후로도 단단히 켕기는 모양이 분명하였다.
애라는 홍면후와 원남동 자기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까지 애라가 홍면후에게 먼저 전화 거는 것을 본 기억이 없는 백마정 동무들도 이상한 생각이 나는지 귀를 기울여가며 슬슬 애라의 동정을 살피다가, 애라가 수화기에서 손을 떼고 돌아설 때에 서로 눈을 주며 입을 삐죽 거리는 모양이다.
"왜 그이가 그대로 가우?"
란 짱은 양복 신사가 예기한 시간보다 빨리 나간 것이 큰 괴상한 일이나 같이 눈을 이상하게 뜨고 묻는다.
애라는 묻는 말에 별로 대답도 하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왔다. 여러 사람에게 이상한 시선의 세례를 받는 것이 자기의 자존심을 짓밟힌 듯하게 생각한 까닭이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잠깐 발을 굴러가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그대로 벌떡 일어나서 아래로 내려갔다. 어쩐지 애라는 물에 기름 도는 듯한 자기가 이 카페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온 것을 알았다. 이번 사건이 무사히 타협이 되든지, 그렇지 않고 세상에 떠들리게 되어 얼굴을 들고 지낼 수 없게 되든지, 여하간에 카페의 여급 생활도 그만두자! 이 카페 생활을 그만둔다면 장래의 생활을 어이할까? 카페에 와서 이러한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굶어 죽을 리는 없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고용 노릇 하더라도 밥이야 얻어먹겠지만, 사람은 밥만 먹자고 사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밥 밖에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밥만 먹는 것이 사람의 제일 큰 욕망이라면 감옥에 들어가서 콩밥을 얻어먹고 살수도 있는 것이오. 정조를 팔아서라도 밥은 먹을 수 있고, 거지 노릇을 하더라도 입은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 눈으로 보아서는 허영의 생활이오. 정조 파는 생활인 카페 웨이트리스가 되어서 책상과 책상으로 웃옷을 헤치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밥이야 못 얻어먹을 리가 있느냐.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애라로서는 그럼 직한 이유를 가졌다. 세상에서 바라보는 애라와 애라가 바라보는 애라는 물론 달랐다. 그는 자기의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눈물을 지었던 것이다.
108. 양실
[편집]애라를 실은 인력거는 황금정길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질 듯이 달아난다. 그의 생각은 그 바퀴보다도 더 빠르게 돌았다. 인력거를 편히 타고 이리로 저리로 쓸데없이 헤매고 다니는 자기가 우스웠다. 대체 이게 무슨 까닭이냐? 애라가 요렇게도 어리석었던가? 제 꾀에 제가 먼저 넘어가서 사랑 잃고 처신 떨어뜨리고, 어찌 되었든 어리석은 일이다. 필경은 끄나풀 말까지 듣게 되었구나. 사실 오늘 해온 것이 끄나풀 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애라는 인력거 위에서 '끄나풀! 끄나풀!' 하고, 몇 번이나 혼잣말로 중얼대는지 몰랐다. 또다시
"애라의 신세도 말씀 아니다. 인제는 끄나풀 소리까지 듣게 되었구나……."
하는 조소가 한길의 전차, 자동차, 우마차, 자전거 등 시끄러운 합창보다도 더 날카롭게 귀를 찌르는 것 같았다.
애라는 듣기 싫다는 것같이 귀를 막았으나, 맘에서 일어난 그 소리가 귀와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이냐. 밖으로 흘러가지 않는 것만큼 더 분명히 들릴 뿐이었다.
애라는 자기 집에 돌아와서는 바로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몸을 던졌다. 며칠 동안 흥분한 상태를 계속한 까닭인지 자리에 누운 몸이 수백 길 위에 떠올랐는지, 수십 길 땅 밑에 파묻혔었는지, 알 수 없이 한갓 권태를 느꼈다.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지낸 뒤에 홍면후가 아무 말 없이 들어왔다.
애라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오늘도 아마 직무로 오셨나 봐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슥 들어오시는 게……."
하고 웃는 얼굴을 지었으나, 전과 같이 매 잡고 생기가 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바쁜 세상에 말 경제도 좀 해야지! 항상 그렇게 허물을 차리고 지낼 것이 무어람……."
이렇게 말하는 홍면후의 사색도 어쩐지 말씀이 아니다. 첫째 대머리가 평일보다는 기름기가 도는 것 같고. 들어간 눈이 더 깊어 보였다.
"무슨 소식이나 들으셨어요?"
애라는 홍면후가 앉기도 전에 묻는다.
"소식이 무슨 소식? 대관절 급히 만나야 하겠다는 사건은 뭐야?"
면후는 애라의 곁으로 가까이 온다.
"큰일 났습디다. 애라 같은 사람은 평일에 아무 성명도 없는 이니까. 이번 길에 한 번 번쩍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게 될지 모르지만. 당신 일이 탈이에요. 아마 영의정이나 한 것같이 호기를 부리시던 형사과장 지위도 내놓으셔야 될걸요……."
"어째 그래? 까닭을 말해야지!"
"까닭은 간단하지요."
"간단하다니?"
"이 세상에는 소위 비밀이란 아마 없나 봐요."
"비밀이 없다니?"
"이번 사건을 벌써 알고 있는 이가 있겠지요."
"누가 알아? 그럴 리가 있나?"
면후는 다른 사람이 알 리가 없다고 부정은 하였으나, 만일 이 일이 발각 되면 자기의 지위란 우습게 될 것이다. 카페의 여자에게 침흑하여 필경은 여러 가지 파란을 일으켰다는 것도 남부끄러운 일이오. 더욱이 친누이 한 경이가 설교시국(說敎時局) 표방 강도의 애인이었던 것은 큰 범인을 일부러 해외로 도망시켰다는 당국의 혐의를 면키 어려운 일이다. 이 비밀이 탄로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109
[편집]홍면후의 속으로 캥기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기색을 지어 가지고
"그럴 리가 있나?"
하고, 거드름 빼는 화상이 몹시도 얄미웠다. 그리하여 애라는 웃음을 한편 볼에 넣고 말하였다.
"그러기에 걱정이지요. 그럴 이치가 없는데 그러하니까 이상하단 말이지요."
"암. 애라의 애인이 또 하나 있는 게지!"
홍면후는 농담 비슷하게 내던진 말이지만, 애라는 그것을 농담으로 주웠다가 그대로 내던질 수 없었다.
"뭐예요? 애인이 또 생겼다? 참으로 좋은 일이지오."
홍면후의 한 말이 전날 자기의 비밀을 일일이 철호에게 애라 네가 고자질 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미로 애라의 귀를 찌른 까닭이다.
"이건 다 농담이고, 이번 사건을 알고 있단 이가 누구야?"
면후는 다시 정색을 한다.
"세상에 비밀이 있는 줄 아셔요? 어림없다니. 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던가! 모든 일이 눈감고 야옹 하는 셈이에요."
애라는 어디까지 자기의 음침한 구석을 알 사람이 누구이냐 하는 자신 있는 듯한 면후의 태도를 웃었다.
"쥐고 새고, 밤이고 낮이고 간에 아는 사람이 누구란 말이야?"
"알려주면 애라를 매수하듯 한 번 매수해보려고 그러셔요?"
"그야 매수를 하든지 매수를 당하든지 간에, 그것은 그때에 보아야만 알 일이겠지!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 무슨 말이람!"
이 비밀은 물론 홍면후 한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이 아니오. 애라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일이다. 첫째, 홍면후의 끄나풀이 되었었던 그 여자라 하는 그 한 말만 해도, 그가 사회에 얼굴을 번듯이 내놓지 못할 것이다. 허영심과 공명심이 상당히 있는 애라가 자기의 일생에 큰 관계가 있는 이번 사건의 탄로에 대하여 이와 같이 태연한가 하는 것은 홍면후로도 풀기 어려운 의문이었다. 애라는 다시 얼굴을 고쳐 가지고 백마정에 갔다가 란 짱에게 들은 말 ─ 이틀 없는 동안에 웬 신사가 자주 찾아와서 애라를 찾던 것 ─ 과 방금 전에 그 신사가 또 찾아와서 자기를 놀리고 갔다는 이야기를 대강대강 말하였다. 홍면후의 얼굴에도 얼마만큼 진심으로 무엇인지 생각 하는 기색이 나타나며, 그 신사를 만나볼 생각이 나서
"그 신사가 또 오지나 않을까?" 하고 물었다.
"다시 오고 안 올 것을 내가 어찌 알겠소만, 하는 태도로 보면 다시 만나 보잖을 것 같더군요."
아무리 애라 자신이 설혹 못난 여자기로서니 다시 만나볼 생각이 있으면 그렇게 무두무미(無頭無尾)하게 돌아갈 리가 없다고 애라는 생각하였었다.
"그게 누굴까? 신문 기자나 아닙니까?"
"암만해도 신문 기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무엇……?"
"글쎄, 철호의 동지나 아닌지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애라는 말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쓸데없는 말을 괜히 한 것이었다.
"철호의 동지?"
면후의 귀가 번쩍 뜨인 모양이다.
"왜? 또 좀 옭아 넣어보시게요?"
"참말이야? 얼굴이 어떻게 생겼어?"
면후는 딱지를 떼고 들어 덤빈다.
"철호의 동지는 아닌 것 같습디다."
"말을 대중할 수가 없군. 이랬다저랬다."
"대중 있는 말만 하면 누가 좋아하게요?"
지금까지 자기의 한 말을 대중하다가는 면후 당신은 큰 낭패요 하는 의미였다.
"그자를 좀 보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할까?"
"좀 어려운 일인데요, 정 보려면 오늘부터 백마정 쿡 노릇을 좀 해보시지요."
면후는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무엇을 잠깐 생각 하더니,
"그러면 이렇게 할까?"
하고, 말을 꺼냈다.
110
[편집]"오늘 밤이나 내일에는 그자가 필연코 또 한 번 찾아올 것 같으니, 애라가 어떠한 수단을 쓰든지 그자를 꼭 붙들어놓고 곧 내게 통지를 하는 게 어때?"
"무슨 굉장한 지혜나 내시는 줄 알았더니, 꾀라고 낸 것이 겨우 그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노?"
"그가 만일 안 오면 어떻게 하나요?"
"안 올 리가 없어. 나 시키는 대로 하구려!"
"와도 일을 모두 그르쳐놓고, 이것을 좀 보려무나 하오면 어떻게 해요?"
"그럴 리가 없어……. 애라더러도 물론 자세한 말을 안 묻고 슬쩍 눈치만 보고 간 것을 보아도 짐작할 일이 아니야? 사람이 괜히 예민하게 구는 구려……."
"누가 예민하게 굴어요? 한 번 퍼진 말을 어떻게 거두어들이려고 그러시우? 일이 다 글렀으니 면직당하기 전에 어서 사직을 하시구려. 퇴직 금량이나 그거나 마저 찾으시게……. 괜히 어름어름 덮어버리려고 헛 애쓰지 말고요!"
"면직이 무슨 면직이람? 공무를 위해서 일을 처치하려다가 좀 실수하기도 예사지!"
면후는 애라의 말이 한갓 빈정대기 위하여 빈정대는 것이 아닌 것을 아는 까닭에 많이 좀 불유쾌하였지만, 자기의 공생애(公生涯)의 약점만은 그에게 보이기 싫어서 조금 엄격한 빛을 양미간에 발랐다.
그러나 애라에게는 이것이 더 우스웠다.
"좀 실수……? 말씀은 좋구려! 설교 강도 괴청년에게다 돈과 누이를 처매어서 소개장까지 써서 압록강을 곱게 건너보낸 것이 실수예요?"
"애라까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되우? 괜히 까불지 말고 그 청년 신사가 어떤 인지 알아보기나 하자고."
"글쎄 일이 다 어긋난 뒤에 만나면 무슨 소용이에요? 일이 틀리기 전에 어떻게 귀정을 내야 할 게 아닙니까?"
"일이 다 어긋난 뒤라니?"
"오늘이라도 신문에다 된 소리 안 된 소리 지껄이어놓으면 큰일이 아닌가요? 암만해도 형사과장의 운명이 다 된 것 같아요."
애라는 면후의 기색을 살핀다.
"아니야. 그 청년이 애라에게 무슨 야심이 있는 게야. 그렇지 않으면 벌써 이 세상에 발표했겠지 그대로 두었겠소? 애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이가 그렇게 예민하담? 한 번 위협을 하는 게야. 눈치를 사람이 좀 잘 채야지……."
"눈치? 내가 야심이 있다구?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에요? 형사 과장 영감!"
"별안간에 이게 무슨 말이오?"
면후는 조금 황망한 기색이 보인다.
"그러니까 그 청년을 다시 포로로 만들어서 영감께다 바치라는 말씀인가요? 만일 철호 짝이 되면 어떻게 합니까? 이번에는 이천 원으로는 안 될 걸요. 적어도 오천 원은 가져야 할걸요."
애라는 맨 처음부터 홍면후의 호의에 등을 대보려는 생각은 깨알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일이 이상스럽게 이리저리 얽히고, 철호와 한경에게 곱다랗게 속은 분풀이를 할 생각에, 하는 수 없이 그와 모든 것을 상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면후의 하는 일에 대하여 비판할 이지조차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다시 면후에게 이용을 당한다면 이용해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은 터이다.
"이번에는 돈으로 해서는 안 되어……. 수단으로 해야지!"
"수단? 내게는 돈 없이는 아무 수단도 쓸 수 없으니까요. 돈 안 쓰고, 수단 잘 쓰는 명형사 과장! 어디 수단을 써보십시오."
"좌우간 애라가 수단을 쓰든지 내가 돈을 쓰든지 간에. 어떠한 자인지 화상을 좀 보게 하란 말이야……. 응…… 나는 바쁘니 갈 테야. 그러고 봉천에는 벌써 전보로 수배해놓았으니 금명간 소식을 알겠지!"
홍면후는 벌떡 몸을 일으킨다.
111. 양실
[편집]홍면후가 총총히 돌아간 뒤에 애라는 피곤한 몸을 다시 자리 위에 던졌다.
봉천으로 수배를 했다는 면후의 말이 아직도 애라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두 연놈이 쇠고랑을 차고 여러 사람의 시선 가운데에서 목욕을 하며 돌아오겠구나. 아! 통쾌한 일이다. 사람을 속여도 분수가 있게 속여 야할 것이 아닌가. 제 신변 위험을 그렇게 생각하여준 사람의 호의를 배반해도 정도가 있음직하지 않은가. 다른 여자가 목숨을 걸고 일을 꾸며놓은 효과를 저 혼자 차지하여 가지고, 더구나 애인을 달고 달아나다니! 이렇게 생각하매 애라는 이가 절로 떨리었다. 항상 사람에게서 느끼는 환멸을 비애처럼 사람의 생각을 감정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은 없다. 애라는 문득 한숨을 지었다.
"세상살이란 그런 게지. 누구를 믿어? 나는 나대로 온전히 사는 것이 옳겠지!"
이와 같은 단념이 그의 흐린 눈을 다시 맑게 할 때에 명후와 부동이 되어가지고 한경의 방을 수색한 것과 의심나는 주소까지 발견해준 일이 후회되었다.
만일 그들이 봉천에서 붙들린다면 어떻게 될까? 쇠고랑을 차고 여러 승객의 조소, 모멸 가운데로 수천 리의 기차 여행을 할 것이다. 그러고 여러 해동 안 감옥에서 썩게 될 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일시의 원풀이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이 청춘을 그대로 희생케 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한 것이 철호를 사랑한 까닭일까? 만일 그렇다 하면 여자의 사랑받은 철호야말로 횡액에 걸린 사나이다.
애라는 이와 같이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돌아다니는 동안에 나의 철호에 대한 사랑이 참사랑이라 하면 그가 내게 어떠한 짓을 하든지, 어떠한 학대를 하든지 그를 용서하여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원수를 원수로만 갚는다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고 주저하는 맘을 가라앉혔다.
그러면 지금에 급히 전보라도 쳐서 피신하기를 권할까?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아무리 형사과장의 세력이 자기의 신변을 보호해준다 할지라도, 철호와 한경이가 붙들리어 와서 모든 죄상이 법정에 나타날 때에 철호와 공모 하여 홍면후의 돈 이천 원을 사기한 죄는 면치 못할 것이다. 철호와 한경을 붙들게 한 것은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셈이었다. 이렇게 애라가 후회도 하였지만, 이 후회도 때가 이미 늦었다.
참으로 봉천에 수배를 하였을까? 철호와 한경이가 잡혀 오는 날은 홍면후의 모든 못생긴 짓이 발각되는 날이다. 첫째, 상당한 지위에서 활동하는 관헌이 일개 카페 여자에게 눈이 어두워서 큰 범죄인이 앞에 있어도 잡지는 못하고, 도리어 여비와 소개장을 제공하고 만 것은 그의 일생일대의 수치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면 홍면후에게 그만한 주책이 없을까? 필연코 수배는 하지 않고 자기가 재촉하고 위협하는 까닭에, 거저 우물쭈물할 수 없어서 수배를 하였다 대답한 것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매 맘이 좀 놓였다. 수배를 하였는지 아니하였는지 한번 더 다져 물어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애라는 몸을 벌떡 일으켜 밖으로 나와서 홍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경찰부에는 없었다. 백마정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거기도 여기 아니 왔다 한다. 애라는 하는 수 없이 만일 홍면후가 거기 오거든 잠깐 기다려 달라 부탁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생각에는 면후가 바로 백마정에 가서 웨이트리스에게 자기 찾아왔던 손님의 행동을 물어봄 직한 까닭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막 의복을 갈아입을 때이다. 체전부가 편지 한 장을 전한다. 이것은 철호의 필적이었다.
112
[편집]편지를 받아 든 애라의 손은 가늘게 떨리었다. 그러고 가슴은 울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밉다고 할는지 반갑다고 할는지, 형용하여 말할 수 없는 느낌이 머리에서 곤두질을 쳤다. 애라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는 것같이 편지 겉봉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섰다가 허청거리는 발길을 겨우 끌어서 방으로 들어섰다. 무슨 뜻으로 편지를 하였을까? 이 편지 한 장이 자기의 운명을 영원히 결정할 듯한 예감으로 그는 가슴이 가득 찼다. 뜯어보기에 일종의 공포를 아니 느낄 수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뜯어볼까 망설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겉봉을 곱게 떼었다.
"그리운 동지 애라 씨!"
이것이 첫 문구였다. 애라는 구역이 왈칵 났다. 동지가 무슨 동지! 이 무슨 말라 미치는 더러운 수작이냐! 편지를 내던질까 하다가 그래도 눈이 다시 그 다음 줄로 옮겼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원망하고 있을 것을 압니다. 저에겐들 피와 눈물이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있는 피 있는 눈물조차 가진 사람, 제 맘대로 쓸 수 없는 것이 학대받는 우리의 부평(浮萍) 같은 생활인가 합니다.
애라 씨!
오늘부터 당신을 불러 동지라 해도 관계없겠지요. 모든 동지 가운데에 당신처럼 우리의 일을 충실히 보아준 동지는 없습니다. 다만 당신과 나의 생각이 다른 것은 여기에 있는 줄 압니다. 당신뿐 아니라 일반 여자의 생각과 다른 것이 즉 이것인 줄 압니다. 여자는 사랑을 위하여는 모든 것을 희생하지만, 남자는 자기의 사업을 위하여서는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남자 가운데에도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여성 같은 남자가 있고, 여성 가운데에도 사업을 위하여는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남자 같은 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보면 제 열정으로 제 몸을 태워버리는 이는 여자에게 많고, 제 이지로 열정의 불을 꺼버리는 이는 남자에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말이 결단코 여성을 모욕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를 희생 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든지 존경치 않을 수 없는 거룩한 행동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제 몸을 희생하는 것이나, 사업을 위하여 사랑을 희생한다는 것이나, 그 근본정신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른 것은 하나는 이기적이오. 하나는 이타적인 것입니다. 이기나 이타나 궁극에 가서는 마찬가지라 생각하겠지만, 행동하는 과정에서는 천양지간으로 다릅니다.
애라 씨! 존경하는 우리 동지!
당신이 이 말을 들으시면 응당 노하시리다. 사실 나는 당신을 퍽이나 이용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순전히 당신을 이용할 생각만으로 당신을 가까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한때는 당신의 가진 모든 것 가운데에 제일 보배인 그 대쪽 같은 성격의 미에 매우 정신을 차리려면서도 끌려가고 말았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지금에는 아주 잊었단 말도 아닙니다. 한때에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당신과 함께 도회의 생활을 하여볼까 하고 퍽이나 생각을 하였었습니다만, 당신의 성격은 어디를 가든지 한곳에서 오래 자리 잡고 한 남자의 날개 밑에서 단꿈을 계속할 당신이 아닌 것을 충분히 짐작하는 까닭에, 그러한 세상에서 이르는 연애 생활만은 단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격이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의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거기에서 일생을 고이 지낼 수 있다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자기를 아는 이는 자기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뜻과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주 들 어느 곳에다 쳐놓는다 한들, 이것이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그런 것은 당신의 열정에서 넘어 나온 로맨틱한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애라 씨! 진실한 동지 애라 씨!
지금까지 위에서 한 말이 나의 충정이지만, 그것을 당신이 믿지 않을 큰 이유가 될 것을 한경이가 어째서 따라갔을까 하는 것이겠지요."
여기에 애라의 눈이 이르자, 그의 얼굴은 다시 희푸르러졌다.
113
[편집]한경이는 애인인 철호를 따라갈 것이오. 철호는 애인인 한경이를 데리고 달아난 것이다. 거기에 딴 이유가 붙을 리가 없다. 충정이 다 말라비틀어진 말이냐! 그러면 아직까지도 나를 잊지 않는단 말인가. 그러나 다만 동지로서 잊지 않는다는 말인가. 애라는 다시 그 마음을 읽었다.
"소위 사랑이란 것은 한 운명인 줄 압니다. 한경이와 함께 여기로 올 줄은 평일에 짐작도 못하였던 일입니다. 경성에 있는 것이 위태위태하여 일시의 화를 피하여 국외로 몸을 빼어 나오게 한 것뿐이외다. 지금도 생각 하면 소위 돈푼이나 가진 자식들이 베개를 높이 하고 편한 잠을 이룰 것이니 얄밉고 분이 납니다마는, 그들의 편한 잠을 이룰 동안도 그다지 길지 못할 것을 명언하여둡니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한경이가 만주까지 오게 된 것은 계획적이 아니었던 것만 양해하여준다면, 철호가 그렇게 배신행위를 하지 않는 자라고 믿을 맘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믿음들을 애라씨에게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동지! 진실한 동지 애라 씨!
우리는 분 날 때에 어려운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사람의 심리는 이상한 것입니다. 극도로 절망을 느낄 때 극도로 분하고 슬픈 일을 당할 때에 사람은 흔히 심기가 일전하는 것입니다. 이 철호에게서 느낀 절망이 당신의 발길을 지금까지 걸어온 정반대의 방면으로 옮겨놓게 하였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만일 그랬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립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아주 말하면 당신의 역한 맘에 영영 홍면후의 손발이 되어 배반당한 원수를 갚아보자고 그 일을 위하여 행동하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거야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애라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어쩌면 편지까지도 요렇게 앙큼하게 할까? 얄미운 생각이 더욱 새로웠다.
"애라 씨! 동지인 애라 씨!
우리같이 방랑 생활을 하는 자는 사랑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맘의 애인이 아니라 생활을 같이한 애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의 말하 는바와 같은 생활이 우리에게는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에게 고정한 생활이 있을 리가 어찌 있겠습니까? 오늘은 만주, 내일은 서백리아로, 어제는 조선에 있었던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가정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으로 동지는 있을지언정 애인은 없습니다. 행동을 같이하는 것이 우리의 신변에, 우리의 일에 해를 끼칠 듯하면 우리는 동지들끼리는 언제든지 서로 길을 나누게 됩니다. 한경이가 비록 저를 따랐었다 할지라도, 어느 날 어느 곳에서 어떻게 이별하게 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만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과 길이 같이 되었다 할지라도 역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부평 같은 생활에서 어찌 조그마한 인생의 향락이 계속될 수 있겠습니까? 경성에서 지낼 일을 생각하면 역시 하룻밤의 꿈이었던 것입니다. 꿈이라도 괴로운 꿈이었습니다. 아! 괴롭던 꿈!"
애라의 희푸르러진 뺨으로 구르던 두어 방울 눈물이 편지를 가만히 두드렸다. 애라로서는 오래간만에 흘린 눈물이었다.
"동지! 애라 씨!
어떠한 기회에 어떻게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시일은 모릅니다. 내일에 들어갈는지, 모레에 들어갈는지, 명년에 들어갈는지. 십 년 후에 들어갈는지, 영영 고토를 밟아보지 못하고 만주 들에다가 시체를 널게 될는지, 이것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끼리나마 서로 축복을 합시다. 불쌍한 우리들이 서로 저주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무서운 일입니다. 이 글을 쓰고 이 글보다도 먼저 내가 고랑을 차고 장거리 여행을 하게 될는지 누가 압니까? 그러나 최후까지 먹고 있는 맘을 말하는 것이 당신에게 대한 나의 의무인 줄 압니다. 한경이와도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손을 나누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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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지금까지 읽고 난 편지가 애라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져 그의 한편 무릎을 덮었다. 그는 머리를 아래로 숙이고 한참 생각하다가 다시 떨어진 편지를 주워 모아 봉투에 넣어 책상 위에 던졌다. 그러고는 자리 위에 드러누웠다.
일이 갈수록 묘하게 되었다. 참으로 한경이와 공모하고 나를 속인 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 하면 그들을 원망하여 기어이 원수를 갚으려고 앞장을 서서 덤빈 자기의 좁은 도량을 스스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카페에서는 웨이트리스 노릇을 하는 애라이지만, 무슨 일에든지 사리를 잘 생각하고 황급히 굴지 아니하는 것이 여러 동무들의 존경을 받아오던 목포였었다.
이것이 모두 지금까지 그가 겪어온 경험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에는 사리를 가려서 충분히 생각할 여유도 없어, 덮어놓고 원망을 하고 저주를 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무사히 타협하여 자기의 위신이나 잃지 않아 볼까? 사랑 잃고, 처신 잃고, 양실兩失이 아니냐! 그러나 잃어버린 이 두 가지를 다시 찾기는 벌써 시기가 늦었다. 만주 벌판에서 방랑하는 애인을 다시 찾을 수도 없거니와, 이 일이 벌써 제삼자의 귀에 들어갔으니, 오늘밤에 폭로가 될는지, 내일 아침에 폭로가 될는지, 벌써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애라의 처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도 만주로 갈까? 그것이 창피한 꼴 피하는 데는 제일 상책이다."
애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람의 맘이 어쩌면 이렇게 약할까? 방금 편지 한 장의 달콤한 수작에 뭉치었던 뱃속이 봄날 얼음장 풀리듯 풀려서 만주를 갈까? 아니다. 이게 무슨 못생긴 수작이냐. 철호의 더러운 냄새를 맡으러 가는 것같이. 안 될 말이다. 죽어도 만주는 그만두자. 또한 이곳을 떠난다 하여도 돈냥이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수중에 별안간 돈이 놓여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며칠 동안 주선을 하여야 할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에 일은 벌써 글러서 다시 수습할 수 없는 곳으로 자기는 떨어지고 말 것이다. 참으로 딱한 일이었다. 이제는 분한 생각보다 딱한 생각이 앞을 섰다. 아무 소문 없이 며칠 동안만 무사히 넘기기를 빌었다.
한참 동안 여러 가지로 마련을 해보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공중전화로 홍면후를 불렀다. 그는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한다. 또다시 백마정으로 걸어 보았다. 면후가 십 분 전에 잠깐 들렀으나, 애라의 전하는 말대로 조금만 기다려 달라 하였으되, 그는 바쁘다 핑계하고 그대로 나가버렸다고 한다.
'잠깐 기다리라 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가버렸담. 그것도 사내 탓 할 수 없어…….'
애라는 이렇게 중얼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면후가 곧 자기 있는 곳으로 오지나 않나 하고 애라는 기다렸다. 사실 면후를 이렇게 기다려본 적이 처음이었다. 애라도 제 일에 켱기면 할 수 없구나 하고, 그는 고적한 웃음을 지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면후가 보이지 않았다. 애라는 지금에는 면후가 아니오는 것보다, 오늘 저녁 신문에 이번 사건이 폭로나 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한결 더 높았다. 그는 밖에다 귀를 기울여 신문 배달의 방울 소리를 찾았다.
방울 소리조차 그의 가슴을 갑갑하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그의 기다리든 방울 소리가 들렸다. 애라는 기다리든 님의 발소리나 들은 것같이 밖으로 뛰어나와 신문 배달을 불러 신문을 한 장 사 들었다. 그러나 그 신문에는 자기에 관련된 일은 하나도 보도되지 않았다. 조금 맘이 놓였다. 그러나 아직도 딴 신문이 몇 종류나 있다. 애라로는 제일 무섭고 더러운 생각이 나는 것은 홍면후의 끄나풀 노릇 한다는 소리였다. 철호의 편지를 보고 그런 말은 들을 것이 더욱 무서운 생각이 났다. 그런 말을 듣고 상을 타는 것보다, 차리라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징역을 살고 싶었다.
한참 동안 문밖에서 방황을 하다가 그 앞으로 지나가는 《서울일보》를 샀다. 받아 들고 들어오다가 2면 첫 기사에 시선이 갔다. 걷던 두 발이 별안간 땅에 붙어버렸다. 그리고 얼굴빛이 핼쑥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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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신문 머리기사로 커다란 제목을 붙이어 전 경성을 횡행하던 설교 강도는 국경을 넘어서 만주에 몸을 감춘 행적이 있다는 것과, 그가 물샐틈없이 경계 하는 국경을 무사히 빠져나간 이면에는 정탐소설 이상의 괴상한 사실이 들어 있다는 듯하다는 것과, 경찰부에서는 그의 연루자로 카페의 여급과 주의자 고순일이를 검거하여 엄중 취조하는 중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것만으로는 물론 충분한 기사라 할 수 없었다. 분명히 이름이 나타난 것은 고순일 뿐이요, 애라, 철호, 한경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설교 강도의 연루자로 검거를 당한 것이 사실이니까, 이러한 기사만으로는 별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 제일 맘에 두려웠던 것은 홍면후의 끄나풀이 되어 철호 잡는 데에 보조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정탐소설 이상의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하다는 말뿐이오, 지금까지 지낼 일을 일일이 폭로시킨 것은 없다.
애라의 얼굴에는 다시 혈색이 좀 돌았다. 숨을 내려 쉬고 방으로 들어왔다. 끄나풀이란 말이 발표되지 않은 것만 다행이었다. 이 말로 해서 그가 만일 세상의 오해를 사면 잘해야 물 위에 기름이 될 것이오. 잘못하면 신명까지 영영 망치고 말 것을 염려한 애라가 모를 리가 만무하다. 그러하다고 근심을 아주 놓을 수도 없었다. 젊은 양복쟁이의 묻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이가 신문 기자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묻고 간 뒤에 바로 이렇게 신문에 날 리가 없다. 그는 《서울일보》 기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 어째서 홍면후의 이번 사건에 멍텅구리 노릇 한 것을 폭로 시키지 않았을까? 홍면후의 끄나풀이란 말은 다만 나의 뱃속을 떠보려고 물었던 말이었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의문에 애라는 머리가 아팠다. 좌우간 면후 대머리나 왔으면 어떻게 된 셈을 알아 볼 것을, 그도 오지 않으니 참 갑갑한 일이다 하고 그는 신문을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이면 한문자란(閑文字欄)에 그의 눈이 이르자, 그의 얼굴은 다시 핼쑥하여졌다. 정말 거기에 이번 설교 강도 탈출 사건에 대하여 가뭇없이 교묘하게 홍면후의 실패담을 써놓았다.
비두가 벌써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내지 않고, 그러하였다면 어찌할까 하는 가정, 이를테면 아래서 폭로를 시켰다. 그 한문자의 기사는 이러하였다.
"서울에서 신출귀몰하는 설교 강도가 생겼다 하고, 그의 애인이 어느 카페의 웨이트리스라 하자. △ 그러고 설교하는 강도를 잡으려고 고심초사하는 형사 과장이 역시 그 카페의 시국 표방 설교 강도가 사랑하는 웨이트리스에게 뜻을 두었다 하자. △ 그 관계가 곁에서 보기가 혼자로서는 아까울 만큼 재미도 있으려니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카페의 여자가 애인인 설교 강도를 국외로 피신시키기 위하여 형사과장을 곱다랗게 속이어 난관을 넘어갈 때에 무사통과 하려는 소개장과 게다가 또 수천 원이라는 거대한 기밀비까지 얹어서 탈출시켰다 하자. △ 그러고 그 탈출시킨 동기는 카페에서 이 사내 저 사내의 완롱물로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만주의 황원(荒原)에 가서 단출한 스위트 홈을 이루려는 데에 있었다 하자. △ 그러나 달아난 사내 설교 강도는 카페 여자에게는 맘이 적고, 형사 과장의 누이를 더 사랑하였던 까닭이었던지, 정말 달아날 때에는 모든 계획을 하여 준 카페 여자는 내던지고, 형사과장의 누이를 달고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하자. △ 이와 같이 속은 줄을 비로소 깨달은 형사과장은 아픔을 깨물고, 이 사건에 관계된 카페 여자와 또 하나 심부름꾼을 달고 쳤다 하자. △ 그러다가 그 여자도 역시 설교강도에게 속은 것이라 동정하게 되어 석방을 하고, 그 다음에는 속은 남녀가 한 덩어리가 되어 날마다 달아난 설교 강도를 붙들려고 고심참담을 한다고 하자. △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까? △ 멍텅구리 형사과장의 지위도 얼마 가지 못 하려니와, 카페 여자의 전정도 말이 아니라고 누구든지 생각하겠지. △ 설교 강도와 형사과장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충복할 만한 수완을 가진 카페 여자야말로 아주 호걸이다. 그의 지금까지 밟은 길이 소설적이라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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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 기사 가운데에는 이 다음 이 사실이 사회의 표면에 나타날 그때에는 카페 여자의 내력과 이 사건의 비밀을 소상하게 보도하겠다는 암시가 은근히 들어 있었다.
애라는 자기의 지금까지 사생애(私生涯)가 비록 폭로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만, 끄나풀의 누명 아래에서 자기의 정체가 폭로 되는 것은 암만 생각해보아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또한 카페 같은 곳으로 유랑하여 다니는 여자라 하여 되잖은 상상과 억측으로 붓끝 돌아가는 대로 끼적거려 놓으면, 그도 또한 문제였다. 대체 어찌해서 다른 사람의 귀에 이번 일이 들어갔을까? 참으로 괴상하여 견딜 수 없다.
애라는 신문을 앞에 놓고 일이 걱정했던 바와 같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이제로부터 어떻게 할까 생각하였다. 홍면후가 사직을 하고, 자기는 범인 탈주시킨 공모자로 다시 체포가 되고, 고순일이는 편지 가지고 다닌 죄로 얼마 동안 고생을 하고, 정말 죄지은 철호와 한경이는 넓은 들에서 자유로 방랑을 하고, 참으로 괴상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좌우간 홍면후와 만나서 어떻게든지 선후책을 일러 달라고 말해볼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애라의 홍면후 기다리는 맘은 더욱 초조하여졌다. 만일 이 신문을 홍면후가 보았다면, 그의 일생일대에 큰 관계 되는 일이니, 애라에게로 뛰어올 것은 의심 없는 일이었다. 초조히 굴던 애라는 다시 맘을 늦추어 먹고 면후 오기만 기다렸다.
전등불이 켜질 무렵이다. 밖에서 급히 돌아오는 발자취 소리가 났다. 의심 없는 면후의 발소리였다. 마루에 발을 올려놓기도 전에,
"애라!"
하고 황망히 부르며,
"일이 기어이 이렇게 되었구려!"
하고 방으로 들어온다.
그의 대머리가 어쩐지 오늘은 유난히 반드러워 보였다. 그러고 얼굴에 해쓱한 기운이 조금 돌았다.
"그러기에 내가 무어라 말합디까? 한 번 세상에 공포된 것을 걱정을 하면 무얼 해요."
이렇게 말하는 애라의 태도는 비교적 침착하였다.
면후는 방 윗목에 쪼그리고 앉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할 수 있나. 모두 운명이니까, 내가 내 꾀에 넘어갔으니까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다만, 애라는 암만해도 그대로 두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하고는, 천정을 바라보고 무엇인지 생각한다.
면후로 지금에 취할 태도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철호를 놓아 보낸 것은 여자를 잘못 신용한 것이니, 일시의 과실이라 하여 모든 책임을 애라에게 지우고, 자기는 발을 빼어야 할 것이오. 또 하나는 모든 책임을 자기가 가지고, 애라와 설교 강도와는 아무러한 연락이 없었던 것 같이 타협을 지어야 할 것이다. 애라에게 책임을 지우자 하니 그가 너무 가엾다. 지금까지 자기의 취한 태도와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별안간 딴전을 놓는 것은 인정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의 직무상 철호와 연락 관계가 있는 줄은 번연히 알면서 애라를 그대로 도망을 시키고, 자기 혼자 멍텅구리 노릇을 할 수도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한참 생각하다가 면후는 결심한 듯이,
"여보, 애라! 당신 얼마 동안 피신을 좀 못하겠소? 그동안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이 일을 무사히 해결할 터이니까……."
하고, 애라의 동정을 살핀다.
"어떻게 무사히 될 수 있을라고요. 설교 강도의 애인이니까, 저는 어디까지든지 그 책임을 지고 콩밥을 먹게 되면 달게 먹지요. 그것이 당신의 끄나풀 노릇을 했단 말 듣는 것보다 낫겠지요."
애라도 무엇을 결심한 것같이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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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콩밥이 그렇게 먹고 싶거든 얼마든지 먹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야."
홍면후는 모처럼 보였던 호의가 아무러한 효험이 없게 되니 조금 역심이 났다.
"콩밥이 먹고야 싶겠소만, 안 먹으면 안 되겠으니 하는 말이에요."
애라는 탄식하듯 말을 던졌다.
홍면후는 애라의 이와 같은 태도에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 철호를 잡아넣고 자기의 발을 빼려고 앞장을 서서 덤비던 그가 별안간 이게 웬일일까? 필연코 곡절이 있는 일이라 하여 애라의 동정을 햇불 눈으로 살폈다.
그의 눈은 애라의 책상 위로 갔다. 배 불룩한 봉투가 놓였다. 애라의 기분이 별안간 전환된 것은 저 봉투 까닭이 아닐까?
"여보, 애라! 저게 무슨 편지야? 보아도 괜찮지?"
하고, 홍면후는 손을 내밀었다.
"안 돼요. 남의 편지에 왜 손을 대셔요?"
하고, 애라는 홍면후의 손을 막았다.
물론 애라가 조금 전에 보고 내던진 철호의 편지였다. 실상은 애라도 그 편지를 홍면후에게 보일까 말까 속으로 망설거리던 터이다. 조금만 홍면후가 아무 말 없이 있었다면, 애라가 손수 그 편지를 집어서 보여주었을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홍면후가 미리 손을 내놓는 바람에 애라는 토라진 것이다.
애라의 성미를 잘 아는 홍면후는 웃고 그대로 손을 끌어들였다.
애라는 그 편지를 집어서 책상 서랍에 넣고는
"이 편지는 이대로 가만히 둘 테니까, 이 다음에 가택 수색을 할 때에 오셔서 보셔요. 네?"
하고, 빙그르 웃는다.
홍면후의 맘은 더 켕겼다.
"괜히 쓸테 없는 말 말고, 보아서 관계없을 것이면 좀 보여주구려."
"모든 것은 이 편지 한 장이 해결할 것이니까, 요다음 공판석에서나 나오게 되겠지요."
"미리 보아두어서 좋을 일이면 보는 게 좋잖아! 그러지 말고 이리 내놓구려!"
"안 돼요. 이것은 내 비밀이니까요."
"이 판에 비밀이 또 무슨 비밀이람?"
"비밀 중에도 비밀이니까 안 돼요."
"그렇게 비밀이면 그만두는 수밖에 없겠지."
하고, 홍면후는 몸을 일으켰다.
홍면후의 태도가 별안간 변한 것을 보고 애라는 이상한 생각이 났지만, 그러면 편지를 보여줄 터이니 앉으시오 할 그는 아니었다.
"왜 그러셔요? 앉아서 걱정이나 좀 더 합시다 그려."
"내야 걱정될 것이 무엇 있나."
"모양만 좀 창피하게 되었지요."
"창피할 것도 없지. 남자가 여자의 사랑을 받으려다가 이런 일을 좀 당하는 것도 예사야."
"이런 일을 예사로 아십니까? 예사라면 이런 일을 여러 번 경험 하셨겠습니다 그려! 나는 요렇게 옳게 보기는 이번이 처음인데요."
"여보! 쓸데없는 수작은 그만두고, 이번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이나 걱정을 하구려."
홍면후는 무엇을 결심한 것같이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간다.
애라는 홍면후의 성미를 잘 들여놓는 것이 이러한 경우에 자기에게는 불리한 줄 알지만, 그렇다고 달아나는 그에게 가 부를 수는 없었다.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방 안에 앉은 채 그대로.
"잘 가십시오."
하고 인사를 하였다. 모처럼 방침이나 의논해볼까 한 것이 모두 틀리고만 것이다.
'아! 나는 나대로 행동을 하자. 조그마한 권력을 의뢰할 이 없다. 그래도 이십여 년 동안 자기의 손으로 살아온 애라다. 어찌해서 비릿비릿한 생각을 하였던고' 그는 후회하였다. '다만 콩밥을 먹어도 좋다. 별 경우를 입어도 좋다. 이 세상에 사내 녀석으로 믿을 놈이 몇 놈이나 되냐? 모두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여자를 장난감 삼는 그들이 아닌가. 내게는 면후도 없고, 철호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118. 고백
[편집]면후가 불쾌한 얼굴로 돌아간 뒤에 애라는 무서운 생각이 났다. 그이 앞에서는 콩밥을 기쁘게 먹겠다고 장담하였지만, 하루 동안의 유치장 생활의 경험으로 보아도 불같은 자기의 성미에 거기에서 얼마 동안 배겨 낼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억지로 못할 일이니, 당하는 대로 당해보자고 단념을 하고 하룻밤을 지냈다. 물론 잠이 잘 올 리가 없었다. 이제 형사 가오나, 저제 형사가 오나 하여 주의가 늘 문밖으로 갔다.
그러나 그가 샐 무렵 피곤에 못 이기어 눈이 저절로 붙을 때에도 형사는 오지 않았다. 그러면 무사히 된 모양인가 하고 안심을 하려다가, 그는 이 뒷일을 보아야 할지 하고 놓이는 맘을 다시 움켜쥐게 되었다. 밤새도록 생각한 것은 역시 어떻게 하면 조선을 벗어날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옷 벌이나 챙겨 들고 나서면 그만이겠지만, 그곳에 발이 붙는 그때에 무엇을 할까? 역시 카페냐? 이 생활을 벗어나자고 지금까지 노력한 결과가 또다시 그런 곳으로 발길을 몰아넣게 하는 것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냐! 더구나 홍면후의 끄나풀이란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둘러쓴 채 해외로 도주를 했다가 뉘 손에 이 생명조차 바치게 되려고? 그는 생각다 못하여 아침 일찍이 서울일보사를 찾아갔다. 백마정으로 와서 자기의 내력을 물어보던 청년 신사를 만나볼까 생각한 까닭이다.
애라는 오늘에는 화장도 하지 않고 그대로 수수하게 차리고 나섰다.
서울일보사 앞에 당도하였을 때는 오전 아홉 시 반이 조금 지났을 때다. 애라는 정녕코 그 신사가 서울일보사 기자인 것이 분명타고 믿은 까닭에 아침부터 온 것이지만, 사실은 그 청년의 이름도 모르고, 또는 그가 이 신문사에서 어떠한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짐작만 대고 온 것이었다.
애라는 신문사 앞에서 어칠거리었다. 그가 만일 그 신문사에서 일을 본다면 밤새 그에게 큰 사고가 없는 이상 필연코 출근 시간에는 이 문으로 들어가겠지 하고, 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멀찍이 어서 일일이 점검하고 섰었다. 출입하는 신문사원과 행인들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모여들어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는 눈을 공중으로 올리고 참았다. 그 가운데에는 낯익은 사람들도 보였지만, 인사할 정도는 물론 아니었다.
그래서 섰다가 걷고, 섰다가 걸었다. 열 시가 지나도록 그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 사내가 이 신문사에 있는 이가 아니었던가, 자기의 직감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할 리가 없었다. 만일 그 사내가 이 신문사에 있지 않다면. 그런 신문 기사가 날 리가 없다. 정 기다리다 그 사내가 아니 오면 신문사에 들어가서 그 신문 책임자에게 이 기사의 출처를 보면 대강 짐작할 일이다 하여 애라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맘을 먹었다.
이때에 저편 지나 정류장에서 바쁜 걸음으로 이곳을 행하고 오는 신사가 있다. 그는 분명히 어제 백마정에 왔던 양복쟁이다. 애라는 대단히 기뻤다.
그 신사를 만난 것보다는, 자기의 상상이 꼭 들어맞았단 것이 더 기뻤다.
애라는 해쓱한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띠어 가지고 그 사내가 걸어오는 편으로 걸어갔다. 그 사내는 모자에 손을 가만히 닿아 목례를 하고, 약간 미소를 보인다. 그 미소에는 네가 켕겨서 왔구나, 여기에서 카페의 퀸이 아침부터 방황할 줄은 몰랐지, 이곳에 어찌해서 온 줄은 나는 다 알아 하는 표정이었다.
"잠깐 저 좀 보셔요."
애라는 그를 불렀다.
"네? 무슨 말씀이오?"
사내는 발을 멈추었다.
119
[편집]"좀 여쭐 말씀이 있어요."
"그러면 이리로 들어오시오."
하고, 사내는 앞을 서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리로 들어오시오."
사내가 들어오라는 곳은 편집국이었다. 사람이 이목이 번거하여 자세한 말을 하기 어려울 듯하여 애라는
"좀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는데요."
하고, 걸음을 조금 주춤하였다.
"좀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는데요."
하고, 걸음을 조금 주춤하였다.
"그러면 잠깐 기다리시오."
하고, 사내는 문을 닫고 들어가더니 모자를 벗고, 가방을 놓고 다시 나와서 건너편 어두컴컴한 낭하를 돌아 응접실로 인도한다.
방 안이 조용하여 말하기는 매우 적당하였다.
애라는 기침을 한 번 한 뒤에.
"저를 기억하시겠지요?"
하고,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네. 기억하구말구요."
"어제는 너무 실례를 했어요. 용서해주셔요."
"용서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늘 석양에 백마정에 들릴까 했더니 당신이 오셨습니다 그려."
"제가 켕기는 일이니까 제가 와야 옳잖습니까? ……그런데 저 이런 말씀을 여쭈어 실례가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선생님의 성함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해서 한 삼십 분이나 오시기를 기다렸어요."
"퍽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어제 신문 기사 때문에 오셨지요?"
사내는 애라의 말을 앞질러 말하고는 다시 명함 한 장을 꺼내놓으며,
"저는 이렇습니다. 성명도 여쭙지 못해서 너무 실례했습니다."
하는 그의 태도는 어제는 물론이오, 방금 문간에서 만날 때보다는 훨씬 겸손하고 다정하였다.
애라의 생각에서도 양복쟁이라는 일종의 멸시에 가까운 맘은 조금 적어졌다. 《서울일보》기자요. 신사인 김준경이란 생각이 애라의 머리에 첫 번 도장을 단단히 찍었다.
"김 선생! 이야기가 조금 길 것 같은데, 바쁘시지 않으셔요?"
애라는 미리 다졌다.
"그렇게 바쁘지는 않습니다. 한 시간가량은 관계없습니다. 만일 그 이상 시간이 걸릴 이야기면 오늘 이후에 다시 만나 뵈어도 좋겠지요."
"그도 좋겠지만요. 저는 오늘 오후가 어떻게 될는지. 한 시간 뒤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처지에 있지 않습니까? 김 선생도 다 아시지 않으셔요? 지금 제 뒤를 따라서 온지도 알 수 있습니까?"
"무리라구요? 이새에 사람 잡히는 것이 확실한 증거만 있어 되는 줄 압니까? 혐의만 있으면 잡아다가 경을 쳐주는 판인데. 카페에서 웃음 파는 여자쯤이야 어떻게든 못 올까. 가겠습니까?"
하고, 애라는 핸드백에서 무엇인지 끄집어낸다. 책상 위에 그 전날 신문이 나타났다.
김준경은 얼굴빛이 조금 이상스럽게 변할 뿐이오. 아무 말이 없다.
"김 선생! 제가 이러한 것을 가지고 온 것은 무슨 질문을 해보자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어제 선생이 오셔서 하신 말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해요.
카페에서 웃음 파는 여자라고만 생각하시지 말고, 제 충정을 생각하셔서 잘 말씀을 하여 주셔요."
김준경은 아무 말 없이 애라의 행동만 자세히 살필 뿐이다.
"이 기사는 선생님이 쓰신 것이지요?"
"그야 누가 했는지 간에 물을 말씀이 있거든 그것부터 말씀하시지오."
"물론 김 선생이 쓰셨겠지요?"
"쓴 사람을 그렇게 알려고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김 선생이 계신데 다시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을 그랬습니다."
애라는 미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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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 기사 누가 쓴 것을 알아 무얼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준경은 묻는다.
"쓰신 그분에게 무슨 질문을 한다든지, 취소를 해 달라 한다든지 하는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거저 그 일 내용을 하도 잘 아시는 것이라서 거저 여쭈어볼까 한 것이에요."
애라는 조금 음성을 낮추어 다정한 뜻을 보였다.
준경은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한다.
애라 생각에는 조금만 더 단단히 족치면 어떠한 동기에서 그 기사를 쓰게 되었다는 이유가 사내의 입에서 나올 듯하여 여러 가지로 수단을 한 번 부려 볼까 하였다. 제가 사내인 이상 내 수단에 아니 넘어갈 리가 없다. 형사 과장도 넘어갔고, 철호도 넘어갔다. 백면서생인 일개 신문 기자가 아니 넘어갈 리가 없다.
그러나 어찌한 일인지 자기의 충정에서 나오는 말 이외에 딴 소리 하기가 맘에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어제 백마정에서 처음 만날 때부터 필연코 이 사내가 철호와는 막역의 친구로서 자연히 알게 되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일을 주밀하게 생각하는 철호의 일이라, 그가 계획적으로 이 사내에게 일러주어서 홍면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자 함이나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이 애라의 머리에 번갯불처럼 지나갔었다. 철호의 편지를 보건대, 그가 일부러 일을 이렇게 만들 이치는 만무한 일이라고 애라는 그 의심과 갈리기에 밤새도록 매우 노력을 해왔었다. 그러면 막역지우일까?
오늘 아침에 이와 같이 신문사로 찾아온 것은 사실 김준경과 담판을 하랴던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힘을 빌어서 이번 일을 어떻게 피어보자는 것도 아니었다. 어제까지 저주하고, 지금도 오히려 입고 원망스러운 생각이 떠나지 않은 철호이지만, 그래도 그의 막역지우이었으면 좋겠다고 비는 생각이 애라의 가슴에 차올라서, 그것이 증기기관의 증기처럼 애라를 서울신문사까지 밀어다 놓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호의를 가지고 면회하러 온 사람을 선선히 대접하는 상대자의 태도가 애라의 맘에는 얼마만큼 따분하기도 하여, 요것을 한 번 춤을 추어 볼까 하고 여러 번 생각하다가, 암만해도 그리할 수가 없었던지, 애라는 묻는 말에 거짓을 섞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대자는 애라의 묻는 말에 대답을 매우 조심해 보이며 대답하기 어려운 때는 다만 침묵과 웃음으로 수작을 할 뿐이었다.
"김 선생! 사람이 진정으로 제 속으로 피할 때에. 이것을 듣는 사람은 거짓말로 듣는 것처럼 쑥스럽고 싱거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거짓말을 참말로 알아듣는 것보다 말하는 사람에게 죄 될 일은 없겠지요."
준경에게는 역시 곧이듣지 않더라도, 참말을 하는 것이 좋은 모양이었다.
"김 선생! 철호 씨하고 퍽 친하신 사이가 아니셔요?"
이렇게 묻는 애라의 눈은 거슴프레하였다.
"애라 씨 모르는 철호의 친한 친구가 있을라구요."
준경의 눈에서 미소가 흘렀다.
이 말이 애라에게는 철호와 막역의 사이란 말로 들리었다. 상대자가 분명히 철호가 친한 친구란 말을 승인한 것이었다.
"제가 모를 철호의 친구가 있을 것은 김 선생이 어떻게 알으셔요? 괜히 너무 비웃지 마셔요. 갈 바를 모르고 헤매게 된 저같이 불쌍한 여자도 한번이라도 좋으니 사람의 진정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려주셔요. 지금까지 저는 진정에서 나오는 사내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이번이나 진정인가, 요다음이나 진정일까 한 것이 오늘까지의 신세를 요렇게 만들어놓았어요. 철호 씨만은 진정으로 알았더니, 그도 역시 그러한 남자이었던가요?"
애라는 눈을 책상 위에다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테이블보를 만지작 거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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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애라의 산호같이 고운 입술과 수정같이 맑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음성과 시선은 곧 음악이요 미술이었다.
준경이는 황홀한 정신을 다시 자기에게 불러들인 뒤에,
"그렇게 남성을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어째서 남자의 일이라면 이와 같이 알려고 애를 쓰시오?"
하고 묻는다.
"거기에 저의 고민이 있어요. 거기 제 생각과 같은 모순이 있는 줄 알아요. 이번 일도 말씀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문에다가 가령, 이를테면 하고 기사를 쓰셨지만, 세상에 그런 일이 어다 있습니까? 모든 것을 죽을힘을 써서 만들어놓으니까, 어떤 계집하고 도망을 하다니요. 생각해보면 눈이 캄캄해져요. 그때에 분함 그대로 하면 죽일 생각이 났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상일이란 모다 꿈결 같습니다그려! 애초에 철호 씨를 사랑할 때에 저의 일평생을 나 같은 쪼그마한 계집을 위해서 희생하도록 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어요. 철호 씨를 사랑하게 된 동기가 아주 불순하였을는지도 알 수 없지만, 마음으로 모든 것을 뉘우치고 그런 불순한 생각을 씻어버린 오늘에, 저는 조금도 양심에 부끄러울 것은 없어요. 그렇지만 마음으로 고통 받는 일이 하나 있어요. 이것은 아무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에요."
하고, 애라는 한숨을 내쉰다.
준경은 호기심이 바짝 났다.
"무슨 고통입니까?"
"이 일은 선생도 모르실 것이에요. 철호 씨가 한경이를 달고 달아난 그 당시에는 분격한 마음에 홍면후의 끄나풀이 되다시피 한경의 방을 뒤져서 그들이 도망해 갔음 직한 봉천의 주소까지 일러주었지요. 지금에 와서 괜히 그런 짓을 했다고 후회하지만, 소용 있는 일입니까? 어떠한 잇끝에 빠져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 양심에 부끄러울 것은 없다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란 어디 그렇습니까? 어제 선생이 오셔서 저더러 끄나풀이란 말은 그러한 내용을 알고 하신 것인지, 짐작만 대고 하신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 마음에 찔렸는지 온종일 고통으로 지냈어요."
준경은 애라의 이러한 하소연을 들어가는 동안에 어쩐지 자기도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차라리 철호에 관계된 이야기를 하나도 숨길 것 없이 토파하는 것이 옳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깊어갔다. 애라가 이와 같이 아침 일찍이 찾아온 것이 자기를 일개 신문 기자로만 알지 않고, 그 위에 더 어떠한 기대를 자기에게 둔 것이나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자기로서도 자기의 성심성의를 가지고 상대하는 것이 사람다운 일이다. 좌우간 조금 동정을 더 보아서 이 여자에게 불행이 돌아오지 않도록 일을 일러주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와 같이 면후와 함께 일을 의논할 결과가 어떻게 될 것까지는 생각지 못하였어요."
"그때에 무슨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분풀이하자는 것뿐이었지요."
"그것이 조금 덜 생각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람은 항상 분격한 경우에 난처한 일이 닥쳐올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괜히 세상 사람들에게 속만 보이는 일을 하셨지요. 그래도 애라 하면 당신에게로 주목이 가는 것쯤이야 스스로 아셔야 합니다. 지금 당신이 이렇게 찾아와서 나와 이야기 한 것도 벌써 다른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홍면후와 그와 같이 매일 추측이 되고, 서로 전화질을 하고, 술을 먹고야 세상 사람이 색안경을 당신에게 아니 향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이렇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이지, 철호 군과는 퍽이나 친합니다. 그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너도 설교 강도나 아니냐 하고 묻겠지만, 철호는 결단코 설교 강도가 목적이 아니라고, 사람의 현실을 극단으로 부정한 결과가 세상을 한 번 떠들썩하게 만들어놓고, 헛웃음을 한 번 쳐보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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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저 같은 사람을 이렇게 잘 일러주시니 감사한 말씀을 뭐라고 여쭐 수 없어요. 사람의 직감같이 무서운 것은 없어요. 어쩐지 어제 뵈올 때도 그럴듯해서 퍽이나 이상한 일도 많다고 생각했어요. 제 딴에는 오늘은 기어코 좀 알아보아 여러 가지로 지도를 듣겠다고 찾아뵈러 온 것이에요. 그렇게 진정을 말씀해주셔서 고마운 말씀을 무어라 여쭈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애라는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이 반가웠다. 철호는 애라의 애인이었다.
애인의 친구를 만나서 반갑지 않을 리 없었다. 하물며 애인의 친구가 어디까지든지 애인을 보호하여주는 아름다운 우정의 소유자요. 또한 그의 기상은 쾌활한 가운데에도 점잖은 맛이 있고, 순진한 가운데에도 유머가 있어 보이고, 남자답게 어글어글한 가운데에도 간 얇은곳이 있는 외형을 가진 그에게 서랴.
애라는 한 시간 후에 어떻게 되며. 내일에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은 잊어버린 듯 그의 얼굴에는 기쁨에 넘치는 미소가 흘렀다. 이와 같이 천진스러운 기분으로 사람을 대한 일이 별로 없던 애라한테서 김준경이 역시 어떠한 자기의 상상한 이상의 매혹을 느끼는 것은 극히 자연한 일이었다.
"애라 씨를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만났으니 말씀이올시다마는, 처음부터 철호 군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로 의심을 가지기는 가졌었지만, 그가 서울을 떠들썩하게 한 진범이란 것은 이번의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지요. 확실한 것은 철호가 친히 한 편지로 알았지요."
"철호 씨가 김 선생에게도 편지를 하였어요? 저에게도 이런 편지가 왔어요."
애라는 잊었던 것이 문득 생각난 것같이, 이때에야 비로소 신문과 같이 가지고 왔던 철호의 편지를 꺼내었다.
"그 편지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런 편지를 그렇게 들고 다니시다가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오? 퍽 대담하십니다."
준경은 편지를 보고 깜짝 놀란다.
"저 같은 조그만 여자에게 대담 여부가 있겠습니까마는, 마음을 한번 작정하니까 그렇게 무섭고 겁나는 일이 별로 없더군요. 징역을 가게 되면 징역을 가고, 도망을 치게 되면 도망질을 치고, 죽게 되면 죽지요. 별 수 있습니까?"
애라는 한숨을 지우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할 일이에요. 그렇게 일을 되어가는 대로 둘 것 같으면, 저 같은 사람을 찾아와서 신문의 기사의 출처까지 물을 필요가 무엇 있겠습니까? 필연코 어떻게든지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나보고자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계시겠지요?"
라고, 준경은 웃음을 짓는다.
애라는 준경이가 자기를 농락하는 말이나 아닐까 하여 조금 불쾌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이 말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고 항의를 제출할 수는 없었다.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생각한 대로 마음의 한편 구석에는 어떻게든지 무사히 타협을 지어서 만주 벌판에 가서 한 번 자유스럽게 놀아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어느 정도까지 털어놓고 말 하는 이때에 준경에게 못할 말이 따로 있으랴 하고 새로운 용기가 났다. 만일 준경이가 다만 농락하자는 의미이면 설교 강도 이철호와 친한 벗이란 것과 그동안의 모든 비밀 안다는 것과 내게 말할 리가 만무한 것이라 하여, 모든 것을 숨김없이 토파(吐破)하자는 생각이 난 것도 역시 자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선생님께는 이번 일에 대해서 좋은 의견이 계시겠지요?"
애라는 준경의 입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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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별로 의견이라 할 만한 것은 없어요. 다만 애라 씨의 거저 되어가는 대로 살면 살고, 죽으면 죽는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는 것이 자기의 일에 대해서 너무나 무성의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요."
준경이도 이 일에 대해서 이러할 만한 방책은 없는 모양이다.
"저는요. 이번 일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지내온 일이 모두 그러했어요. 말하자면 자기의 일에 너무나 성의가 없고, 책임이 없어서 아마 이 지경이 된 모양이에요. 그렇지만 천성이 요 모양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좀 잘 지도해 주셔요."
애라는 웬일인지 양같이 순해졌다. 여러 동무 여자를 대할 때에는 공작같이 굴었고, 여러 남자 손님을 대할 때는 칼날같이 쌀쌀하였던 그 여자이다. 이 며칠 동안에 한풀이 죽은 것은 사실이다.
"홍면후와의 지금까지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준경은 잠깐 동안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더니 묻는다.
"홍면후와의 관계가 어떠하였느냐구요? 선생님! 저의 지난날의 아픈 기억을 너무 불러일으키지 마셔요. 거저 지금부터 어떻게 하라고만 말씀 하셔요."
애라는 면후의 이야기가 나오면 다시 흥분이 되었다.
"그 관계를 알아야 이번 사건이 어떻게 결말 될 것을 알 것이 아닌가요?"
"별일 없어요. 선생님의 아시는 그것 외에는 특별한 관계는 없어요."
애라는 평일부터 다른 사람에게 지난날의 생활이 어떠하였느냐는 물음을 받을 때처럼 불쾌한 생각이 날 때는 없었다. 그때에는 반드시 "저는요, 어제 한 일도 곧 잊어버리는 사람이이니까, 몇 달 전이나 몇 해 전에 지낸 일을 어떻게 기억할 수가 있겠어요? 그런 말씀은 그만두고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시지오." 하고, 상대자의 입을 봉쇄해버려 왔었다.
그러고 상대자가 조금 유식하여 보이면, 그는 여배우가 무대 위에서 대사를 외우듯이 "애라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가 있을 따름 입니다. 카페에서 술 따르는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러한 생활이 있을 따름이니까, 아무 말씀도 말고 거저 술이나 많이 잡수십시오." 하고, 그들을 입심으로 녹여 보내던 터이었다.
선천적으로 지난 일 말하기 싫어하는 애라는 준경의 묻는 말도 그만 거절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이 애라가 그의 과거 말하기를 꺼리는 것은 그의 과거가 너무 비참한 까닭이다. 차마 남의 앞에 내놓고 말할 거리가 되지 못한 까닭이다.
자기 혼자 생각해도 얼굴이 붉고 가슴이 아팠다.
애라는 압록강 연안 조그마한 고을에서 고고(呱呱)의 소리를 낸 뒤 로부터, 일찍이 부모를 잃고 사촌의 집에서 자라다가, 학대가 심하여 그 집을 도망하여 서울로 올라와서 부잣집의 아이를 보아가며, 그 집 딸에게 새새 틈틈으로 공부하던 것과 얼굴 어여쁜 것이 원수가 되어 그 집주인에게 필경 정조 유린을 당하여 그 정조 값을 받아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얼마 동안 마음 놓고 학창 생활을 하던 것과 일본에서 아내 있는 학생과 연애를 하게 되어 여러 해 동안 고민으로 지내다가. 그 사내에게 필경은 냉대를 당하고 생활할 길이 없어 홧김에 카페에 몸을 던져 홍등과 녹주에 날마다 신경의 첨단을 더욱 날카롭게 갈고 지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철호를 만나 정을 붙여오다가 필경은 유치장 구경을 하였고, 장차 형무소에 신세를 지게 될는지 모르게 된 오늘까지, 지난 모든 일이 옛 기억을 불러일으킨 애라로 하여금 유쾌한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애라가 과거를 말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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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준경이는 애라의 맘을 짐작한 듯이, 그와 홍면후와의 관계를 애라가 말 한 그 이상 더 묻지 않고 철호의 편지를 집어 들며,
"이 편지를 보아도 아무 관계 없습니까?"
하고 묻는다.
"보셔도 좋아요. 너무 기다리니까. 제가 요령만 말씀할까요?"
애라는 현지의 전부를 준경에게 다 보이기는 맘에 싫었다. 다만 한 경이와 갈리겠다는 것과 방랑하는 사람은 연애도 할 수 없다는 것과 한경이와 도망한 것은 계획적이 아니요, 우연한 결과였었다는 것과 될 수만 있으면 애라도 만주 근방으로 따라오라는 것, 몇 가지만은 자기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어제 실문 기사를 쓴 준경에게는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준경이는 편지를 슬슬 나려 보더니,
"애라 씨! 이것만은 철호 군의 진정인가 합니다. 이것이 군의 속임 없는 당신에 대한 기분인 줄 압니다."
하고는 무엇인지 생각한다.
"선생님! 이것만이 철호 씨의 참말일까요? 그러며 이것 외에는 모두 거짓이었단 말씀인가요?"
하고, 애라는 속은 것이 원통한 듯 눈이 흐려진다.
"그런 의미로 말씀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이 세상에 펴내놓지 못할 형편인 만큼, 마음도 우울해서 자기의 속맘을 발표치 못하고 지낼 것이겠지요. 악의를 가지고 자기의 진정을 말하지 않는다거나, 사람을 속이려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당신이 철호 군의 모든 것을 사랑 한다면, 그러한 것을 모두 양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될까요? 제 생각이 퍽이나 천박했던 것이에요."
애라는 원망하는 맘에 철호와 한경이 잡아 올 계획하던 자기의 천박한 생각을 다시 부끄러워하였다.
"그 맘은 천박하니 고상하니 하고 평할 수 없어요. 벌써 연애를 한다는 것이 평범한 우리들의 타고난 십자가이니까. 아무 말 없이 지내는 것이 옳겠지요. 며칠 동안 애라 씨의 하신 행동을 그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고 앙탈한 데에 지내지 못한 것이에요."
"참 그런 것인가 봐요. 그런데 철호 씨한테서 무어라고 편지가 왔어요? 말씀해도 관계없으면 말씀해주셔요."
"별말 없어요. 다만 애라 씨의 장래 일에 대해서 이야기뿐이더군요."
"그 편지 좀 보여주실 수 없을까요?"
"보셔도 별말은 없고, 저는 그런 편지는 잘 보관해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 장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단 말은 없어요?"
"자세한 말은 없고요. 이번 사건에 애라 씨가 필연코 오해를 해서 일평생을 그르치고야 말 염려가 있으니, 자네 수단껏 어떻게든지 그 여자의 얼굴이 이 사회에 번듯이 내놓도록 하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애라는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그러고 목이 메어 말이 잘나오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명상에 깊었다.
이 말이 참말인가? 철호의 입에 붙은 수작이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 하면 다만 사랑을 하나 얻기 위하여 천박하게 굴었던 것이 맘에 찔려서 견딜 수 없었다.
"선생님은 그런 편지를 받으시고 어째서 그런 기사를 쓰셨어요? 그러면 세상사람 눈이 모두 제게로 오지 않겠습니까?"
애라는 원망하듯 물었다.
"항상 생각을 그렇게 하시니까. 가끔가다가 실수를 하시지요. 어찌 해서 했다는 것은 내 직무상 비밀이니까 말씀할 것은 없어요. 좌우간 이 신문 기사로 해서 애라 씨의 일이 무사히 되면 그만이 아닌가요? 신문 때문에 제일이 잘 펴지리라는 것은 잘 짐작 못할 말씀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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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철호의 편지와 신문 기사에 애라의 토라진 마음이 다시 돌아선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일이었다. 사랑을 빼앗긴 그때의 그 맘 그대로 갔었다면 끄나풀이란 좋지 못한 이름 아래 일평생을 그대로 지내었을는지 누가 보장할 것이냐. 그러나 그는 맘을 돌리어 자기의 한 일을 후회하였다. 그는 역시 세상이 무서웠던 것이다. 세상 사람이 좌편을 향하면 자기는 우편으로 몸을 돌리겠다 하는 앙큼한 생각이 그에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동안에 그도 역시 세상 사람을 따라 좌편을 향하고 만 것이다.
"애라 씨의 일이 펴지고 아니 펴지는 것은 전혀 홍면후의 태도 여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기사를 보고 홍면후가 마음을 어떻게 먹게 되었는지 다만 그것이 금후의 구경거리겠지요. 애라 씨가 깜짝 놀라서 신변을 매우 주의하고 이곳까지 나를 찾아와서 상의라도 해보겠다는 것도 역시 이 기사 까닭인 줄 압니다. 여러 말씀 할 것 없이 애라 씨는 당분간 피신을 하시고 어떻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선생님! 어제 홍면후도 저더러 얼마 동안 피신만 하면 모든 일이 무사히 펴지도록 해주마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저는 피신하기가 싫어요. 이왕에 당할 일이면 미리 당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홍면후도 그런 말을 하였어요? 그도 역시 눈물이 있고. 피가 있는 사람입니다. 제 손으로 친누이를 징역 살리고, 사랑하던 여자를 고생시킬 생각이 없겠지요. 다만 미운 이가 철호이겠지만, 만주의 황원으로 굴레 벗은 말같이 뛰어다닐 철호를 아무리 미워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사건은 홍면후가 함구만 하면 너무나 막연해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도 어떤 요량이 있어서 한 말이겠지요."
"지금 피신을 하면 더욱 의심을 받지 않겠어요?"
"의심 받는 거야 할 수 없겠지요. 의심만 받으면 그만이지만, 당신을 잡아다가 한 번 족치면 있던 벌 없던 일이 모두 쏟아져 나올 터이니. 그러면 일이 더욱 시끄럽게만 될 터이니까 잠깐 피신하는 게 좋겠지요."
준경은 문 앞을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말만 안 하면 그만이 아니에요. 피한다는 것은 어쩐지 못생긴 생각이 납니다 그려."
"그러한 객기 부리지 말고 얼마 동안 조용한 곳에서 일 되어가는 것을 관망하는 게 좋겠지요. 그러고 한 번 붙들리어 가서 속에다 비밀을 넣고 견딜 줄 압니까? 그런 것을 지금 세상 형편을 모르는 아가씨나 할 생각입니다."
하고, 준경이는 시계를 꺼내어 본다. 벌써 한 시간 이상이 지나갔다.
애라는 준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전날 경찰부에 붙들리어 가서 처음에는 혀를 깨물고라도 모든 사실을 딱 잡아떼었지만, 하루의 고생에 어느덧 모든 것을 활활 불어버리고 만 것이 아니냐. 그리고 취조실의 그 끔찍끔찍한 광경에 머리끝이 쭈뼛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어디로 갈까요?"
애라는 당분간 피신하려야 할 곳도 없었다.
"그것은 제게 다 맡기시면 얼마 동안은 염려 없도록 해드릴 터이니까……."
하고, 준경은 명함 한 장을 끄집어내어 소개장을 하나 써 내놓는다.
이번 일은 이렇게 해서 설혹 무사히 넘길 수 있다 할지라도, 지금까지의 깨어진 가슴의 아픔을 안고 아직도 먼 청춘을 보낼 일이 애라에게는 무엇보다도 걱정이었다.
"김 선생님! 저는 이렇게 구차히 세상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렇게 욕되는 생을 억지로 구하는 것이 퍽이나 우습지 않아요?"
애라의 말소리는 슬픔으로 흐려져 버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인생이란 언제든지 이러한 것 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자유조차 없는 것이 인생의 정체입니다. 당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무 말 말고 며칠만 있어 봅시다."
애라는 갑자기 치밀고 올라오는 슬픔을 억제한 뒤에, 준경이와 작별하고 서울일보사를 나섰다. 해는 벌써 중천에 높이 올라오고, 사람의 걸음은 바빴다.
126. 어디로 가나
[편집]인심의 동요하고 정지하는 것은 봄날의 연못물 같다. 실바람에도 삽시간에 물결이 넘실거렸다가 그 바람이 가기만 하면 다시 거울 같은 얼굴을 봄들에 내놓고 따뜻한 햇빛의 키스에 도취한다.
늦은 봄 이후로 경성 천지를 소연케 하던 시국 표방의 설교 강도 사건도 지금에 와서는 별로 말하는 사람도 없다. 어느덧 세상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평생에 두 번도 만나기 어려운 큰 파란을 만나서 그 가운데에서 헤매게 된 몇몇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애라, 홍면후, 한경, 고순일, 김준경 등이었다.
오랫동안 일광도 맘대로 보고 지내지 못하던 애라는 전신에 끼얹히는 희푸른 달빛을 띄고 경성 거리에 얼굴을 내놓게 되었다. 몇 달 동안의 숨은 생활이 여러 가지를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첫째, 시간의 힘이 위대한 것을 심심하게 느끼었다. 사람의 어려운 문제는 모두 시간이 해결할 뿐이다. 맘을 단단히 먹고 참아보자는 신념이 굳어졌다. 그가 김준경의 소개장을 쥐고 사람의 눈을 속여 몸을 감춘 지 사흘 만에 한경이가 봉천에서 붙들리어 경성으로 압송되어 있단 말을 들었고, 사흘 만에 홍면후가 사직원을 제출 하였으나 그동안 공로가 많다 하여 지방 경찰 경찰서로 전직을 시킨다는 말을 들었고, 그 뒤로는 한참 동안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고순일이는 예심으로 넘어가고, 한경이는 방면이 되었단 말을 들었다. 물론 철호가 어떻게 되었단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한경이가 쉽게 석방된 이유는 설교 강도 사건에 한 증인은 될 수 있으나, 공범이 아닌 것이 판명된 데 있다 한다. 사실 홍면후의 이면 운동도 비교적 맹렬하였거니와, 편지로 연락을 해주던 고순일이가 모든 것을 절대로 부인하고, 다만 애인 동지의 관계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주장하여 말 한 까닭이었다. 사실 공범이란 증거나 지정불고(知情不告)라 하는 그러한 증거가 충분치 못한 까닭이었다. 만일 죄가 있다면 애인 철호를 따라간 것뿐이었다. 홍면후가 무사히 되고, 한경이가 놓여나오고, 고순일만이 예심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애라로 하여금 이 세상에 얼굴을 다시 내어놓아도 관계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만, 애라 자신은 몸이 자유롭게 된다는 그것만이 그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일을 기회로 자기의 생활을 한 번 근본적으로 고쳐볼까 하는 요구가 무엇보다도 더 맹렬하였다. 얼마 동안 들어앉아 있는 사이에 그의 생각은 눈을 뜨고 있는 이상 반드시 그곳으로 모이고 말았다. 이번 일의 하회를 보아 만주 근방으로 방황을 할까. 그렇지 않으면 구멍가게라도 벌여놓고 그날그날의 생활을 계속하며 뒷날을 기다려볼까? 합당한 사람이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시집을 갈까? 모든 것이 다 맘대로 되지 않으면 이 세상을 한 번 번쩍 떠들어놓고 목숨을 끊어버릴까?
이러한 가운데에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철호였었다. 만일 철호가 저러고 다니다가 불행히 붙들리어 와서 여러 해 동안 철창에서 신음한다면, 그의 이 세상에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고 그럭저럭 지내볼까? 자기도 죄를 무릅쓰고 같은 감옥에서 서로 보지는 못할지라도, 한 공기를 호흡하며 그리운 정을 나누어볼까? 그러나 한경이가 있지 않은가? 만일 한경이만이 없다면 그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오. 다시 철호의 맘을 자기에게 붙들어 맬 자신도 없는 것은 아니나, 한경이가 있는 이상 그것은 인정상에 차마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남자 하나를 두 여자가 다툰다는 추태를 다시 이 세상 사람에게 알리기 싫었다.
이러한 생각으로 그는 얼마 동안을 지내다가, 세상이 그리운 생각이 날마다 더하여 오늘 밤에는 청초한 조선 의복을 입고, 있는 처소를 뛰어나온 것이었다. 한경이가 어찌하여 철호와 둘이 달아났다가 혼자 붙들리어 왔을까? 이유는 철호의 편지로 미리 알은 것이지만, 그러한 비참한 일을 당한 한 경이가 불쌍한 생각이 날 뿐 아니라, 그의 철호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변한 것이 무엇일까가 더 애라의 꽁무니를 들썩이게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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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가을 밤 하늘은 몹시도 맑았다. 막 갈은 칼날같이 처참한 맛조차 있다.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달밤의 거리 정조, 모두가 기쁜 것도 같고 모두가 슬픈 것도 같았다. 온밤을 이 달빛 아래서 헤매고 싶었다. 애라는 아무쪼록 등불을 피하여 조용한 곳을 걸었다. 달빛도 아까웠지만, 사람의 눈도 무서웠다.
여덟 시 반이 넘었을 때에 애라는 한경이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한 경이는 물론 놀랐다. 그동안에 한경에게는 애라의 존재가 한 의문이었다. 준경이를 통하여 애라가 어떻게 있다는 것은 알기는 알았지만, 이와 같은 밤중에 별안간 자기의 문을 두드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가 이와 같이 몸을 세상에 내놓기는 시기가 아직 이르다고 한경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한경이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애라를 맞아들였다.
애라도 한경이와 같이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시끄럽게 하였다. 그러나 한경이가 밉다는 생각은 평일보다 적었다. 그저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그러고 한경이가 맞아들이는 이 방이 곧 자기가 전날 홍면후의 앞장을 서서 온 방을 뒤져내어 한경의 주소를 발견하던 방이다. 양심에 무엇인지 찔리는 것을 아니 느낄 수 없다. 이것도 지난날 꿈꾸던 때 운명의 장난이었던가 하고, 맘을 평범하게 먹고 방 안으로 선뜻 들어서서 주인의 권하는 자리에다 몸을 실었다.
주인을 만난 방 안은 다시 정돈이 되어 소쇄한 맛이 넘치었다. 전날 흩으러 놓았던 행적은 보려야 볼 수 없다.
애라와 한경이는 다 같이 머리를 숙인 채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애라가 먼저 말을 냈다.
"세상일이란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나 봐요."
"마음대로 된다면 이 세상에 무슨 불평이 있겠어요. 제 욕심 채우려고 모두 바드득거리는 것이겠지요."
하고, 한경이도 눈을 아래로 감으며 대답하였다.
한경이가 지금에 먹고 있는 자기의 진정을 서로 토파해서 양해할 만한 사람은 자기와 같은 경우에서 가슴을 졸이고 있는 애라밖에 다시없을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조그마한 적개심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로 다투던 목적물이 없어진 이상, 서로 미워하고 저주하고 원망할 이유도 없다. 그의 이지가 그렇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철호 씨는 어떻게 되었어요?"
애라는 여러 가지로 생각다가 입을 떼었다.
"철호 씨 말씀이에요? 저와 갈린 뒤에는 지금까지 소식을 듣지 못 했어요."
한경이는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애라 생각에는 한경이가 아무리 신교육을 받아서 속이 트인 여자라 할지라도, 애인과 함께 달아났다가 애인에게 버려진 배 되어 홀로 잡히어 온 것을 부끄러워하여 대답을 주저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한경이는 조금도 그러한 빛을 나타내지 않는다. 한경이는 애라가 어떠한 사람인 것을 철호를 통하여 알았고, 지금의 결심이 어떠한 것을 준경을 통하여 대강 들어 두었던 까닭에, 그가 일부러 찾아와서 서로의 진정을 토파하고 서로 위로하자는 뜻을 잘 양해하고 있다.
"저같이 못난 여자는 없어요. 본래가 카페에서 술이나 따르던 여자이니 무슨 소견이 있겠습니까만, 이번 일에는 아주 제가 어떻게 못생겼다는 것을 알았어요. 저 때문에 여러 사람이 쓸데없이 고생하신 것 같아요. 나는 다른 이의 행복을 파괴하는 사람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아무러한 희망도 없이 다른 사람의 생활을 자꾸 깨뜨리는 죄는 필경 받고야 말겠지요."
하고, 애라는 한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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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세상에 행복스러운 생활이 얼마나 있는 줄 아셔요? 생각해보면 결국은 모두가 불행뿐이겠지요. 저도요, 어떠한 때에 행복스럽다고 혼자 기뻐한 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마는, 그것도 하룻밤의 꿈보다도 오히려 짧았어요. 사람은 아마 바깥에서 오는 여러 가지 힘의 놀림감 노릇을 충실히 하다가 그대로 일생을 마치고 마는 것인가 봐요."
한경이도 이번 사건 이후에 그의 맘이 퍽이나 센티멘털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철호를 따라 국경을 벗어날 때는 한갓 사랑의 승리에 맘이 취하여 온 세계가 자기를 위하여 있는 것 같았다. 만주의 거친 들이 낙원같이 보였다. 그들을 실은 기차는 자기들을 그 낙원으로 운반하려고 가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다만 맘에 남아 있는 것은 오랫동안 철호를 위하여 노력 하던 애라의 실망한 얼굴이었다.
그때에도 한경은 승리의 기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미안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더욱이 기쁨의 길을 떠나면서도, 수심의 구름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철호의 우울한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장래에 대한 불안을 아니 느낀 바도 아니었다. 신의주, 안동현의 난관을 무사히 통과하여 만주의 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 울을 벗어난 맹수와 같이 어떠한 상쾌를 느끼게 될 철호의 기색은 더욱 우울해 보였다.
한경이는 철호가 애라를 남겨두고 온 것이 맘에 걸려서 저러는 것이라 하여 조그마한 질투까지 느끼었던 것이다. 한경 자신이 역시 미안한 생각 이 날 때에, 철호 당인의 생각은 오죽하랴 하여 그의 맘을 이해하기에 한참 동안 애를 썼었다. 이러한 생각을 할 때마다 한경의 맘 한편에는 장래의 위태한 생각이 뭉게뭉게 여름 구름처럼 펴올랐다. 밤이 깊어 사면이 잘 보이지 않으나, 기차는 자꾸자꾸 어둠을 헤치고 달아날 뿐이다.
이웃 승객들의 잠이 한참 곤해 보일 때에, 철호는 한참 동안 무엇을 생각하더니,
"한경 씨! 어디로 갈까요?"
하고 물었었다.
한경이는 별안간 이 말을 왜 물을까 의심하여 철호의 안색을 살피면서,
"가기는 어디로 갑니까? 예정한 곳으로 가야 하지요."
하였었다.
예정한 곳이란 물론 봉천 가모천당의 한경의 친구 집이었다.
그러나 철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곳이 어떠한 곳인 줄 알고 그러시오? 화약을 지고 굴로 들어가는 셈이 아니오? 당신 혼자는 혹 지금까지 우정으로 얼마 동안 보호해줄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들이 이 꼴을 하고 들어가 보시오. 영사관 순사의 공명만 높여줄 것이니까."
하였다.
한경이는 철호의 말이 물론 옳다고 하였다. 그러면 어찌해야 좋을까 철호에게 물었더니, 철호는 서슴지도 않고
"우리는 여기서 길을 갈립시다."
하였다.
한경이는 눈물이 나오기 전에 앞이 캄캄하였다. 이게 무슨 박정한 말이야! 사고무친한 만주 들에 와서 서로 갈리다니, 이것은 참으로 청천에 벽력 같은 말이었다. 한경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이 희었다 푸르렀다 하는 것을 철호는 냉정한 얼굴로 보더니,
"한경 씨! 운동가에게 사랑만을 향락할 시간이 없는 줄 압니다. 한경씨도 우리의 동지인 이상, 그것만은 양해하실 줄 압니다. 한 사람의 외로운 방랑도 잘못하면 일생에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받기 쉽지 않아요? 우리들이 이러고 다닌다는 것은 너무나 사려가 적은 일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조그마한 애처로운 생각이 나 그리운 정을 못 이기어 인생 일대의 일을 그르치면 어떻게 하겠소? 이러한 시기일수록 우리의 머리에서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니까, 여기서 후일을 기약하고 갈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하고 철호의 말에 한경의 눈에서는 눈물이 거두어졌던 것이다. 새로운 정신이 났다. 조선 안에서 이 말을 하지 못하고, 어찌하여 여기까지 와서야 이 수작을 내놓을까? 자기를 역시 조선을 탈주하려는 수단으로 썼던 것이로구나, 결국 이용을 당한 것이로구나 할 때에 눈이 번쩍 아니 떠질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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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그러면 좋을 대로 하지요."
이렇게 말하는 한경의 얼굴은 서리 어린 낙엽처럼 쌀쌀하여졌었다.
"조금치라도 내 말을 야속하게 생각하거나, 오해를 해서는 안 돼요. 모든 것이 시기 문제이니까. 얼마 동안만 나를 위해서 고생을 좀 하시구려."
철호는 어린아이 달래듯이 한경이를 달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호의 맘을 한 번 짐작한 한경의 맘이 그 자리에서 풀어질 리가 만무하였다.
"제 걱정은 마시고, 몸 편히 지내시다가, 또 운수 좋은 바람이 불거든 그때에 다시 뵙지요. 철호 씨의 하시는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게 아니니까, 조금도 어떻다고 생각하실 것 없이 마음 놓으셔요."
입으로 이렇게 대답하는 한경이의 마음은 무한히 아팠었다. 한경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돌았다. 철호의 눈에도 얼마만큼 젖어 보였다. 눈물 머 금은 눈으로 눈물 머금은 눈을 서로 바라볼 때에, 그들의 가슴에는 일종의 감격이 뛰어놀았던 것이다. 한경이는 철호의 무릎에 퍽 거꾸러지며,
"그러면 만주 넓은 들에 와서는 서로 헤어져 지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부자유할까요?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을까요?"
하고, 흑흑 느껴 울었던 것이다.
"사람을 사랑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되는 줄 아시오? 맘대로 사랑할 수 없으면서 사랑을 하려면 사람만 못생겨 보이는 것이니까. 우리는 결단코 달콤한 사랑의 구속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알아들으셨소? 우리에게는 사랑보다 좀 더 큰 사명이 있으니까, 사랑에다 일평생을 희생하여서는 안 됩니다."
"네. 알아들었어요. 그러나 저는 어떻게 할까요? 무엇을 할까요?"
한경이는 머리를 들고 눈물을 닦으며 탄식하듯 말하였었다.
"당신은 본국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얼마 동안 계시다가 기회를 보아 본국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조선에는 여자 일꾼이 적으니까, 돌아가셔서 착실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철호의 말은 힘 있게 울리어 왔다. 그러나 이것을 한경이는 자기를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못하여 애쓰는 철호의 맘 전부의 발표로 알 수는 없었다. 무엇이지 하나가 풀리지 않은 그대로 맘 한편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아! 남자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본국에서는 어째 그러한 사정 이야기가 없다가, 만주 들 어둔 밤에야 이 수작을 내었을까? 아! 나도 남자더라면…….'
하는 생각이었다.
한경이는 눈물을 거둔 뒤에 단단히 맘을 먹고 봉천을 두어 정거장을 앞두고 철호와 작별을 하였다. 철호는 번개같이 기차를 내린 뒤에, 차창을 향하여 수건을 두어 번 흔든 뒤에, 그대로 사람 가운데에서 그림자가 사라지고 말았다. 꿈이라도 이렇게 허망한 꿈이 어디 있으랴! 한경이는 철호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고, 외로운 자기를 발견할 때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한경이는 눈물을 머금고 봉천 친구의 집을 찾아들어 후한 대접 아래 사흘을 무사히 지내었다. 그동안에 철호에게서 편지나 오지 않았나 하고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다만 하나의 위안이요 희망이었었다. 엽서로 간단한 안부는 하였지만, 장래에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조금도 말하지 않았다. 한경이는 본국에 들어갈 것 없이 이곳에서 직업을 얻어 가지고 자활을 하여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도 짧은 꿈 가운데의 희망이었다. 한경이는 물건을 사러 길에 나갔다가 도중에서 영리한 형사에게 붙들리어 친구에게 작별할 틈도 없이 본국으로 압송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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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한경이는 애라에게 철호를 따라 본국을 탈출한 이후에 이야기를 토파 할까 말까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필경에는 이러한 이야기를 그대로 가슴에 감추어 두는 것이 서로 양해하자고 밤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같은 처지에서 헤매는 동성에게 너무나 불충실한 태도라 자기의 맘을 스스로 꾸짖고, 본국을 떠나던 일로부터, 형사에게 잡혀 오던 이야기를 사실대로 일일이 말하였다. 말하는 가운데에서도 한경이가 압록강을 건너올 때의 이야기에는 두 여자가 다 같이 울었다.
철호와 신의주에서 단단한 취체(取締)를 무사히 겪고, 압록강을 건너서며 숨을 내려 쉬고 뒤를 한 번 돌아볼 때에, 한경의 가슴에서는 행복이 춤을 추었던 것이다. 압록강아! 다시 너를 건널 시절이 언제나 올는지 모르나, 만일 온다면 그때에는 이 차 안에 웃음을 하나 가득 싣고 소리칠 터이다. 너 부디 잘 있거라 하고 건넜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답게 드린 말이 아직 귀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그날 밤 차 중에서 애인을 눈물로써 보내었고, 사흘 뒤에는 납석(蠟石)으로 깎아 만든 듯한 고운 팔에 쇠고랑의 녹이 묻은 채 압록강을 도로 건너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바였다. 한경이는 말없이 흐르는 물을 차창으로 바라보고, 차라리 몸을 그곳에 던져 모욕이나 면할까 하였으나, 그러할 자유조차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경의 고백에 애라도 문득 눈물이 솟았다.
"한경 씨!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애라에게 한경이가 자기의 연적이었다는 생각은 벌써 잊었다. 그의 눈에는 똑같이 불쌍한 두 여자가 비추었을 뿐이다.
"저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한경이는 새로운 눈물을 애라로 인하여 자아내게 되었다.
"저는요. 이새에는 목숨이 그다지 아깝지 않은 생각이 날마다 더해가는 것 같아요. 이렇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이렇게 살아서 무엇을 합니까?"
애라는 한숨으로 눈물을 거둔다.
"애라 씨! 우리는 어째서 여자로 태어났을까요? 일생에 제일 불행인 것이 여자로 태어난 것인 줄 알아요. 참으로 남자들처럼 무책임한 이는 없어요. 저는요. 지금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어요……."
하고 한경이는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무엇을 생각하다가,
"제 몸은 벌써 홑몸이 아닌 모양이에요. 한 생명이 이곳에서 날마다 자라는 것 같아요."
하고, 배를 가리킨다.
"벌써, 저걸 어째!"
애라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한경의 말이 남의 말로 듣기지 않았다.
"암만해도 나는 성모 마리아가 되는 모양이에요."
한경이는 눈물을 씻고, 빙그레 눈웃음을 보인다. 이것은 결단코 반가운 웃음이 아니었다. 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슬프고, 고적이 들어 보였다.
애라는 한경의 이 말 한마디에 깊었던 꿈이 일시에 깨뜨려졌다.
"한경 씨!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겠어요?"
"하는 수 있어요? 저는 충실한 어머니가 되는 수밖에 별수 있나요?"
한경이는 한숨을 섞어 대답하고 벽장을 바라본다. 벽에는 철호의 사진이 걸리었다.
애라의 눈도 자연히 그곳으로 갔다.
"얼음 같은 남자! 고추 같은 사내!"
모든 저주의 말이 애라의 입가에서 휘돌았다.
아! 나는 아직 철호의 자식의 노예가 아니 되었구나. 다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정체 알 수 없는 감정이 곤두질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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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만주 들 넓은 곳에다 가련한 여자를 홀로 방황하게 내던지고, 제 몸 혼자의 안전을 위하여 종적을 구름처럼 헤쳐 버린 철호를 한경이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여자다운 생각을 애라가 양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보다도 한경이가 몹시 불쌍한 생각이 났다.
"한경 씨! 아직까지도 철호 씨를 잊지 못하시는 모양입니다."
하고 애라는 물어보려다가, 이것은 도리어 쑥스러운 일이라 하여 다만 사진을 바라보며,
"철호 씨는 운동가로는 충실한 사람이 될는지 모르지만, 여자의 애인으로는 믿을 수 없는 사내예요. 누구든지 그를 사랑한다면, 일평생에 애 아니타는 날이 없겠지요, 네?"
하고 물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우리에게는 사랑할 여유가 없다. 사랑은 사람을 얽어매는 쇠사슬이다. 그 쇠사슬을 조심해야 된다. 사랑은 절대의 것이 아니다, 사랑할 수 있는 동안만 사랑하면 그만이다 하던 말이 대단히 의미가 깊었던 것 같아요. 이제 하는 수 있습니까? 지금부터 그의 앞일을 위해서 축복이나 해주지요."
하고, 한경이는 다시 철호의 사진을 바라본다.
"그렇게 축복할 맘이 생길까요? 암만해도 얄미운 생각이 앞서는데요."
애라에게는 한경의 처지에서 축복을 한다는 것이 한 의문으로 있었다.
"귀엽고 반가운 사람만을 위해서 축복하려는 것이 아니겠지요. 저주를 하면서도 축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많이 있으니까요."
한경이는 다시 눈물을 머금었다.
애라는 한경이의 철호에 대한 감정이 어떠한 것을 다 알았다. 그는 벌써 뱃속에 들어 있는 새로 나올 생명으로 거절 못할 힘이 철호와 그의 사이 단단히 붙들어 맨 것이었다. 이 위에 더 여러 가지로 말하는 것은 한경의 아픈 곳을 자꾸 주무르는 것과 같을 뿐 아니라, 자기의 마음의 상처에다 다시 철을 찔러보는 것이라 하여 잠깐 동안은 잠자코 앉아 있는 동안에, 애라에게서 새로운 의심이 돌았다.
"한경 씨! 서울일보사에 있는 김준경이란 이를 알으셔요?"
"김준경 씨? 알고말고요. 알아도 여간 아는 것이 아니지요. 철호 씨 와는 아주 막역지우랍니다. 철호 씨는 지금에도 난처한 경우면 반드시 준경 씨의 지혜를 빈답니다. 그렇지만 자기 일 계획은 말하지 않지요. 이번 일을 비교적 이렇게 깨끗하게 뒤를 맺은 것도 아마 김준경 씨의 힘이겠지요. 우리가 실연의 고통을 못 이기어 한때의 분한 맘으로 아주 반동으로 나아갔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말에 애라는 얼마만큼 가슴이 찔렸다. 그대로 있었다면 끄나풀의 때를 벗지 못하고 일평생을 지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진심으로
"친절하고 다정한 분이에요."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호 씨는 그런 뒷일까지라도 생각합니다그려! 아주 무서운 남자예요."
하고 애라는 철호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무섭고말고요. 차돌 같고, 못덩이 같고, 얼음 같은 이지요."
한경이도 철호의 사진을 바라본다.
두 여자의 네 눈이 벽으로 모여들 이때이다.
마루 위에서 구두 소리가 선적 들리며 앞 미닫이가 드르르 열리었다.
"애라! 그동안 어디 가서 쳐 박혔다 나왔어! 이리 나와!"
이렇게 말하는 양복쟁이는 경찰부의 순사였었다. 애라가 종적을 감춘 뒤로부터 그 향방의 탐사를 맡아 가지고 한경의 집을 매우 주의하던 형사였었다.
애라는 자기의 운명이 닿을 곳까지 닿은 것을 알았다. 아무 말 없이 희푸른 얼굴로 일어났다. 끄나풀의 때를 육체의 고통이 없이 어찌 벗으랴 하고 맘을 위로하였다.
한경도 따라 일어섰다.
"한경 씨! 잠깐 동안 못 뵈올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동안 안녕히 계셔요."
"어서 나와……. 잔소리는 그만 해두고……."
하는 형사의 호통이 끝나자. 애라는 고개를 숙이고 형사의 앞을 섰다.
한경이는 책상 위에 그대로 쓰러져서 흑흑 느껴 울었다. 벽에 걸린 철호의 사진은 이것을 웃었다.
밤은 벌써 깊었다. 자동차의 사이렌이 기다란 골목을 길게 울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