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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반이 지나서야 차는 경성역에 닿는다. 중간에서 연해 더디 오는 북행을 기다려 엇갈리곤 하느라고 번번이 오래씩 충그리고 충그리고 하더니, 삼십 분이나 넘겨 이렇게 연착을 한다.

개성서 경성까지 원은 두 시간이 정한 제 시간이다. 그만 거리를 항용 삼십 분씩 사십 분씩은 늦기가 일쑤다. 요새는 직통열차고 구간열차고 모두가 시간을 안 지키기로 행습이 되었기 망정이지, 생각하면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바로 앞자리에 돌아앉았던 중스름한 양복신사 둘이가, 내릴 채비로 외투를 입노라 모자를 쓰노라 하면서, 역시 그런 이야기다.

“등장 가얄까 보군!”

베레모자 신사가 혼잣말하듯 하는 소리고, 다른 국방복짜리는 마침 시계를 꺼내 보면서

“꼬옥 삼십오 분 꽈먹는걸!”

“세상은 바쁘다구 디리 뛰어 달아나는데, 찬 되려 천천히 완보시니!”

“춘향 문전 당도하니, 신가?”

“참 그래! 기차란 여객비행기가 생긴 뒤루야 벌써 쇠달구지 푼수니깐…….”

기차가 춘향전과 동일지담이라니, 실없이 재미있는 감각이었다.

어느덧 조선바닥에서도 증기기관의 스피드를 한 시대 낡은 문명으로 느끼게쯤 되고…… 세태의 변천이란 미상불 쉽기도 한 것이다.

내가 기차라고 생긴 형용을 처음 비로소 타보느라, 그 요절할 광경을 하던 지가 겨우 삼십 년이 될까 말까 하다.

일곱 살 적인지 여덟 살 적인지(보명의숙이라고) 학교엘 명색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때 시절론 아직 학령 미만이었으나 얼뚱애기로 샘동이라, 형들이 다니고 이웃집 아이들이 다니고 하니까 덩달아 따라 다니면서, 1 2 3학년을 시간마다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 장난과 놀기가 주장이요 공부란 괜히 벌제위명이었지만, 아무튼지 학도는 학도였었다.

하루는 그러자, 가을이던 듯싶은데, 전교(사십여 명!) 학도가 일제히 세 분 선생님의 인솔 아래, 읍에서 시오리 상거의 술메란 곳으로 기차 구경을 가게 되었었다.

그 좋은 설도에 그런데, 나와 내 또래로 몇은 어리고 위태하다고,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드는 것이었었다.

될 뻔이나 한 말이어야지. 한바탕 학교가 떠나가게 떼를 내떨었더니, 마침 xxx선생이 그래 그래 하고 웃으면서, 달래서 손목을 이끌고 맨 앞참을 서주었다.

xxx선생이라면 지금도 그의 구레나룻 소담하고 끔직 상냥스럽던 얼굴이(어언 삼십 년이로되) 선연히 눈앞에 밟힌다. 어웅하니 그 순하디 순한 눈엔 언제나 정이 솔깃한 미소를 머금고, 꼬옥 살뜰스런 아버지처럼 우리를 귀애해 주었다.

xxx선생은 그 뒤에 미구하여, 학교가 보통학교로 갈리자 이내 번쩍 번쩍 금테 두르고 환도 차고 새로이 부임하는 판임관 교장에게 주인 자리를 내주고서, 표연히 자기는 고을을 떠났었다.

한참 그때가 일한합병 직후라, 재래 학교들이 차차로 공립보통학교로 바뀔 즈음인데, xxx선생은 발을 벗다시피 나서서, 우리 보명의숙도 남에게 뒤지지 않고 얼른 승격이 되게 하느라고 무척 애를 썼더라고 한다. 그러고, 승격이 된 다음엔 응당 자기는 교장 자리로부터 물러나가야 할 줄 모르잖아 번연히 짐작은 했으면서도 종시 정성껏 그렇게 일을 서둘렀더라고 한다.

그가 떠나던 날, 그 날의 정경은, 어린 속에도 퍽은 마음 언짢도 하더라니, 가장 잊혀지지가 않는다.

훠얼씬 동구 밖까지 배웅을 나간 우리들 학도 일동과 고을의 여러 어른들의 석별을 받으면서, 오래도록 그는 차마 나뉘지 못해했다. 그래도 얼마만인지는 하릴없이, 발길을 돌려놓으면서 또 한 번 전별의 말을 두루 이르면서, 강잉해 여럿과 떨어져 자행거는 타려고도 않고 끄는 채, 천천히 걸어가다가는 돌아다보고 조금 가다가는 돌아다보고, 하다가 기어코 손길이 얼굴로 올라가서는 눈을 씻고, 또 씻고, 내내 자주 씻어쌓고, 그러는 동안, 호젓하니 가고 있는 모습은 차차로 차차로 가늘어 마침내 저 멀리로 아득히 스러지고.

우리는 소리를 내서 울고 있었다. 어른들도 여럿이 그대로 처져서 눈물을 씻는 이도 있었다.

며칠이 지나서는, 금테 모자에 금테 양복에 ‘부지깽이’ 칼을 찬 판임관 교장이 부임을 했다.

○○공립보통학교라는 문패가 커다랗게 갈려 붙고 ‘학도’는 ‘생도’로 변했다. 책상이며 칠판 같은 것을 개비하고, 명년이나 내명년쯤은 학교를 새로 훌륭하게 짓는단 소문도 들렸다.

여러 가지 규율이 많이 생기고, 겸하여 엄해졌다. 학과와 시간이 늘고 생도도 늘었다. 여생도도 생겼다. 선생님네 수효가 늘었다.

이리하여 학교는 면목을 일신, 규모가 째고 공부가 공부다와지고 했다. 한말로 하자면, 좋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xxx선생처럼, 또 그 시절처럼 임의롭고 정답고 한 줄은 아예 모르겠었다.

xxx선생이 떠나기 조금 전에, 풍금을 한 채(나중에야 알았지만, 자기 사사돈으로, 정표삼아) 사 들여논 것이 있었다.

우리는 두고두고 그 풍금에 맞추어,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이런 창가를 배웠었다. 그런 때면 문득, 가고 없는 xxx선생의 생각이 나서, 활발스런 ‘학도야 학도야’가 이상히 구슬프곤 하기도 했었다. 근자엔 듣자니 아직도 전주 땅 어딘가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호호 백발에, 평화한 여생을 지내고 있다고.


요란을 떨면서 뒤끓어 구경─견학을 가던 그 기차라는 게 무어냐 하면, 소위 모래차라고, 흙과 자갈을 파 실어나르는 뚜껑 없는 화물차였었다. ‘솜리’서 군산까지 지선이 놓이는데, 공사가 거진 준공이 되어 모래차 그놈이 사석을 실어다가는 연해 선로바닥을 돋구던 참이었었다.

드디어 기차를 옆에 딱 당해서 보니, 듣더니 보다도 더 놀랍고 신기했다. 아마 검정 황소가 열 바리, 라니 스무 바리도 넉넉해 보이는 그 덜씬 큰 시꺼먼 화통이, 용솟음 같은 검은 연기를 풍풍 들이 뿜어올리면서, 시이 피이 시이 피이, 남 경풍을 하라고 소래기를 빽 빽, 앞걸음질 뒷걸음질을 벼락 치듯 오락가락.

기운은 그런데, 얼마나 센고 하면……, 여산서 우리 집으로 연자방아를 싣고 온 통나무수레, 그놈 열 곱은 내게 생긴 큰 수레가 주욱 연달려서 열두 개, 거기다간 일꾼들이 수백 명이서 산을 까뭉갠 흙이며 자갈이며를 수북수북 퍼 실어놓았고. 한 것을, 화통이 살금살금 기어오더니, 부룩송아지가 장난을 하는 것처럼 대가리로 직신 한편 머리를 떠받아. 하더니, 빽 소리를 지르고는 그대로 죄다 달아가지고서 씽씽 줄달음질이었다. 그 육중한 수레 열두 채를 한꺼번에 다…… 그러면서도 마치 허깨비나 다루듯, 힘 하나 안 들이고 거뿐 거뿐.

그러니 화통이 그 녀석이 그만큼이나 기운이 셀 지경이면, 우리게 남산이라도 정통으로 칵 한번 들이받는다면, 단박에 구멍이 뻥하니 맞창이 뚫어지고 말 것 같았다.

날래기는 또 어찌 그리 날래며…… 눈 깜짝할 동안인데 어느 겨를에 저편 산모룽이에 가 서서는 흙을 푸고 섰고. 나는 새도 못 따른다더니 참 그럴 성 불렀다.

그렇게 날랜 놈이니 한바탕 타고 내달린다면, 약간 자행거 꽁무니나 타보던 맛하고는 어림도 아니요. 사람이 금새 날개가 돋친 듯 시원하고 고숩고, 천하 그런 재밌을 데라곤 없으련 싶었다.

대가리 굵은 학도들이 연방 임(任)×× 선생을 졸라대는 것이었었다. 어서 말을 해서 차를 좀 태워 달라고.

물론들, 차를 타보고 싶은 것도 타보고 싶은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임×× 선생을 끕끕수를 주자는 노릇이었었다.

이 임×× 선생이라는 이가, 시방은 근처의 다른 학교에서 버젓하니 교장까지 되어가지고, 그만큼 관록도 생기고, 다 점잖도 하고, 또한 더러 만난다치면 깜박 서로 반갑기도 하고 한 터이지만, 처음 그때 우리 학교로 와서 한동안은 지질한 못난이 구실을 했었다.

임×× 선생 두루마기 같다는 별명이 생길 만큼 유명한 그 무르팍 지는 돔방 두루마기를 입고, 괜시리 한손으로 상고머리한 귀 뒤를 만질락말락 해싸면서

“애─애─, 나는 애─, 이 사람은 애─, 충청도 서천서 오났는데, 애─, 임××라는 사람인데 애─, 아무것두 모르는 사람인대, 애─, 아무것두 모르는 사람인대, 애!”

이것이 그가 전교 학도들 앞에 나서서 부임한 인사를 하느라고 하던 거동이었었다.

첫 현신이 그쯤 시쁘디 시쁜데다가, 두고 보자니 사람이 공중 덤비기만 하고, 자기 말따나 과연 아무것도 몰랐다. 군산서 이년제의 간이농업학교를 그 해 봄에 방금 졸업을 하고 온 참이더라고.

웬만한 산술 문제를 못 풀고는 곧잘 망신을 했었다, 어려운 한문 글자 때문에 딱한 홍안을 당하기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연 학도들은 데데한 선생이라 하여 그를 넘보게 되고, 따라서 심복을 않고서 예사 이르는 말도 잘 듣지를 않으려고 들고, 선생은 그러나, 선생으로서의 존엄을 여겨서라도 학도놈들을 억눌러 굴복을 시켜야만 하겠으니 부득불 매질이 잦지 않을 수가 없고, 그러느라니 가뜩이나 인심을 잃어, 알량한 그의 돔방 두루마기로 더불어 때리기 잘하는 선생으로 더욱 호가 나고. 처음 몇해 동안은 그리하여 잔뜩 학도들은 임×× 선생과 등갈이 져가지고 야속히도 못볼 상으로 사사이 그를 미워하고 했다.

아직 그때만 해도 상투쟁이와 머리채를 늘어뜨린 학도가 대부분이었었다. 임×× 선생은 그런데 누구보다도 강경히 삭발을 주장하고, 심심하면 한 놈씩 두어 놈씩 붙들어다간 가위로 싹둑싹둑 머리를 잘라주곤 했다.

학도들은 실상인즉 부형네가 금을 하는 고로 자진해서 감히 낙발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속으로는들 은근히 좋아는 하면서도 한갓 배짱이 안 맞는 임 ×× 선생이 그러는 노릇이라서 겉으로는 늘 싫어하고 반대를 하고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도 제법 상급학년이 되었을 적이고, 마침 한문 시간인데

“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신체발부수지부모불감훼상효지시야].”

이 대문을 가지고 한참 이 양반이 신이 나서 설명을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 가서 결론까지. 그러므로 인자 된 도리에 다만 머리터럭 하날지라도 함부로 잘라버린다든지 해서는 결단코 효도가 아니라고.

옳다구나 우리는 와아 벌떼처럼 떠들고 나서서 질문을 했다. 그렇게 머리터럭 하나라도 함부로 잘라버리거나 상하거나 해서는 효도가 아닌걸, 어째서 그러면 선생님은 우리들더러 머리를 깎으라고는 가르치며, 강제로 깎아는 주며 하느냐고, 그와 같은 옛 성현의 교훈에 어그러지는 일이 아니냐고.

무어, 꼼짝달싹도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얼굴이 빠알개 가지고 열적게 빙그레 웃으면서 손은 연해 상고머리한 귀 뒤를 만질락 말락, 고개를 요리 깨웃 조리 깨웃, 언제고 대답이 막히든지 곤란한 경우를 당하면 으레껏 하는 버릇이었다.

“그을쎄에…….”

이윽고 한마디 해놓고는 또다시 그 열적은 웃음에 빨간 얼굴로 손은 귀 뒤를 만질락 말락, 고개를 요리 깨웃 조리 깨웃 해쌓기를 마지않더니 필경은(암만해도 모르겠다는 듯) 한단 소리가

“따안 참! 그으래애 참!…….”

마침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와끄르 들이 손뼉을 치면서 교실이 떠나가게 함성을 질러 우리들의 승리를 기뻐했다. 참으로 어떻게도 통쾌하든지.

“가만써 가만써!…….”

그는 팔을 저으면서 달래듯 우리를 제지시킨 후에 다짐을 두는 것이었었다.

“……그럼 내애, 이따가 저녁에에, 자알 생각해 개애구우, 내일!…… 내일 오나서 대답허께, 응?”

시방 와서 곰곰 생각하면 그는 일면 끔찍이 고정하고도 선량한 양반이었었다. 그런 좋은 양반인 것을 그대도록들 성화를 먹이고 가지가지로 괄대를 하고 하다니. 물론 한다는 짓이 무엇 하나고 눈에 고이며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었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무조건 하고서 어른을 이겨내고 싶은 소년다운 악동 심리의 탓도 없었던 것이 아니고, 하기는 했다지만 하여튼지 모두들 죄로 갈 짓이었지, 상 탈 소행은 아니었었다.

그는 비단 그 ‘머리터럭과 효도문제’만이 아니라 아무 때 무슨 일이고 자기가 그 당장에 대답을 못하는 것을 되는 대로 어물어물 얼버무려 넘기는 법은 없었다.

질지심스럽게 학도들은 기회만 있으면 임×× 선생을 시달려 주기가 일이었다. 아주 궁벽하고 까다로운 산술 문제를 가만히 알아가지고 와서는 풀어달라고 내놓기, 또 누구들은 한 문장 읽은 걸 유세로 논어니 맹자니 심하면 시전이니 서전이니 하는 따위에서 괴상스런 한 대문을 뽑아가지고는 뜻을 알으켜 달라기.

약간 땅띔도 못할 게 많아서 번번이 임×× 선생은 땀을 뻘뻘 흘려야했고, 그러나 땀은 흘린 보람도 없이(원체가 계획적인 난문제인데다가 원체가 또 짧은 밑천이라) 대개는 해답을 못하고서 그만 무렴을 당해야 하고 했었다. 그걸 보고는 학도놈들은 좋아라고 은근히 속으로, 혹은 막 대 놓고, 갈채를 하고 앉았고.

그럴 적마다 임×× 선생은 창피한 것 상관 않고(일 테면 ‘머리터럭과 효도 문제’처럼) 반드시 이따가 저녁에 잘 생각을 해가지고 내일 와서 대답을 해주마고 항복 겸 언질을 두곤 했지, 일찍이 그런 곤경을 만나 한번이라도 어름더름 아무렇게나 둘러대려고 든 적은 없었다. 그러고는 자기가 원 연구를 했던지 하다못해 다른 선생한테 훈수를 받아서라도, 하여커나 약속한 대로 이튿날 떳떳이 대답을 들려주곤 했었다.

가령 ‘머리터럭과 효도문제’만 하더라도(아마 밤을 새워가면서 궁리 궁리했던 모양) 썩 기발한 답변을 장만해 가지고 와서 도리어 우리를 옴나위 못하게 해놓았었다.

“자아 제군! 자아 요거 요거…….”

두 손을 쳐들어 손끝마다 손톱을 짚어 보이면서 의기양양, 우선 우리들더러 묻는 것이었었다.

“……요거 손톱! 요 손톱은 어째들 깎나? 손톱은. 또오 발톱이랑……, 응?”

단박 그걸로써 우리는 다신 더 할 말이 없었다. 우리 학도들은 반드시 위생을 해야 했었다. 또 ‘문명사회’에 나가서 활동을 하자면 신체가 활발해야 했다. 이것이 우리 학도들의 ‘개화사상’이었었다. 그리고 이 ‘개화사상’에 어그러지는 생각을 가진다든가 행동을 한다든가 해서는 우리 학도들은 큰 수치였었다.

손톱을 어째서 깎느냐?

위생을 하기 위한 또 ‘문명사회’에 나가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기 위한 우리 학도들의 ‘개화사상’ 때문이다.

저 ‘청인’들처럼 손톱을 한 치씩이나 길러가지고 시꺼먼 때꼽이 끼게 해서는 도저히 위생이 아니고 그것에 걸리적거려서 활발한 활동을 할 수가 없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식하고 아무 할 일도 없는 ‘야만인들이’ 하는 짓이다.

머리는 그런데, 머리채를 땋는다든가 상투를 틀어 탄탄 망건을 쓴다든가 하면, 손톱을 기르는 것보다도 더 위생이 아니고 활발한 활동에 방해가 되고, 따라서 머리를 깎지 않는 것은 우리 학도들의 ‘개화사상’에 크게 어그러지는 것이요, 크게 수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학도들은 손톱을 깎는 것보다도 더 필요하게 머리를 깎아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머리를 깎는 것은 손톱을 깎는 것이 결단코 불효와는 상관이 없음과 마찬가지로 역시 조금치도 불효가 되지를 않는 것이다.

누가 설명을 해줄 며리도 없이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러고 우리 반에서 버쩍 그 뒤로 머리를 자원해서 깎는 학도가 는 것도 알고 보면 다 거기서 우러났다고 해야 할 것이었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자리에서만이라도 임××선생한테 감복하는 마음이 생겼더냐 하면 막상 아니었었다. 진리와 사람은 흔히 따로따로인 것인지, 아무리 그가 사리에 옳고 귀에 솔깃한 말을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데데하고 시뻐 보일 뿐이었었다.

이렇듯, 그야말로 문제인물의 임×× 선생인데, 그날 술메로 기차 견학을 가던 날은 말을 그만 너무 쉽게 했다가 또 한바탕 욕을 보는 참이었었다. 사람이 좋기나 하지 좀 뒷생각이 없는 편이어서 전후 생각 못하고 냉큼 쉬운 소리를 했다가는 뒷갈망을 못해 졸경을 일쑤 치르곤 했었다.

읍에서 술메까지 나가는 동안 학도들은 누누이 선생님들을 졸랐었다. 기차를, 구경도 구경이지만, 한번 어디 타보았으면 좋겠다면서, 어떻게 좀 그래 볼 도리가 없을 꺼나고, 학도들 가운데 따로이 벌써 실물을 구경은 한 몇몇이 있었고, 그만큼(인제는 타보고 싶을 만큼) 파겁이 되었대서 먼저 그와 같은 청을 내자 다른 학도들도(기차란 건 사람이 타는 물건의 일종이니라 하는 개념만은 가지고 있던 터라) 모두들 거기에 찬동을 했던 것이다.

xxx선생이나 또 한 분 진(陳) 선생이나는 자신이 없는 듯 글쎄 글쎄 하면서 확실한 대답은 하지를 못했다. 하는 것을 유독 임×× 선생이 떨떨거리고 장담을 했었다.

“임×× 선생님! 꼭요오?”

한다치면 시원시원

“아암!…… 내가 말허믄 돼애!”

하고 또 누가

“태워줄까요?”

한다치면

“태워 주구말구우!…… 내가 말허믄 돼애!”

연성 이렇게.

이렇게 연성 식은 죽 먹듯 수월한 대답을 해싸면서 죄다 떠안던 양반이 정작 현장엘 당도해서는 흰소리가 어디로 쑥 들어가고서 혼자서 비잉빙 뒤로만 나가 돌고 있었다. 학도 녀석들은 그러니 이첨저첨 해서 조르며 빈정거리며 할밖에.

“가만써어! ‘그 기차(汽車)’ 일러루 오나거더언!”

우선 이런 핑계를 대면서 당장의 면급을 해야 했었다.

이윽고 차는 흙을 다 푸고는 우르릉털그렁 다시 돌아오더니 피이 숨을 내쉬면서 멈춰 섰다. 인제는 그래서 죽느냐 사느냐 할 판인데(진소위 절처에 봉생이더라고) 여지껏 아무 소리도 않던 xxx선생이 겅중겅중 가까이 가더니 화통으로 대고 무슨 이야긴지 건네기 시작했다.

“내가 말 안해두 돼애!”

더럭 반가워서 임×× 선생의 입으로부터 제풀에 나오는 말이었었다.

짖궂은 학도 녀석들이 저희끼리 주거니받거니 그 입내를 낸단 소리가

“내가 말 허믄 돼애!”

“내가 말 안해두 돼애!”

“아, 내가 말 허믄 돼애!”

“아, 내가 말 안해두 돼애!”

xxx선생의 교섭은 곧 여의하여 우리는 마침내 당세의 경이를 몸으로써 치르기까지 할 수가 있었다. 신기하고 무시무시하고 즐겁고 한 품이 요새 같으면 소학교 아이들에게 비행기를 태워 준대도 노상 그렇도록은 흥분할 법이야 없을 것이었었다.

화통에 달린 바로 첫째 칸으로 우리는 죄다 올라탔다. 나는 흔들려서 떨어지든지 하면 안된다고 맨 복판에다가 모셔 앉히었다. 그러고서도 셋째형과 진 선생이 좌우에서 잔뜩 붙들고는 또 그러고서도 눈을 감으라고 성화를 했다. 바깥을 내다보면 어지럼이 나서 못쓴다고.

이르는 대로 듣지 않고서 눈을 감았다 떴다 했더니, 에이 안되겠다고 손바닥이 와서 두 겹 세 겹으로 꽉 덮여버렸다.

억지엣 장님이 되어 귀만 기울이고 앉았느라니까 이윽고 빽 소리를 지르더니 피이 하면서 슬며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풍풍, 덜그렁덜그렁 소리가 차차로 잦았고, 그러나 몸이 재게 흔들리는 것 외에는 얼마나 빨리 닫는지는 감각을 할 길이 없었다.

퍽 오랜 듯도 싶고 어쩌면 바로 순간인 듯도 싶고 하여 잘 대중을 할 수가 없는데

“다 왔다아!”

하면서 몸과 눈을 해방시켜 주었다. 아까 먼저에 흙을 싣고 와서 푸던 거기였었다.

내려서서는 저마다들 느낀 바를 지껄였다. 귓바퀴로 바람이 앵앵 지나가더라는 둥, 들판이 뱅뱅 돌더라는 둥, 산이 휙휙 뒷걸음질을 치고 달아나더라는 둥, 어지러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는 둥.

경이 그 다음엔 자연 호기심이 솟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이치로 화통이 녀석이 그다지도 기운이 항우같이 세며, 그다지도 날래게 달리며 하는고, 보아야 ‘함진애비’처럼 시꺼먼 검정칠을 한 두 사람이서 기계를 놀리고 있을 뿐, 어느 구석에 그런 조화가 들었을 성싶은 데라곤 없었다.

xxx선생이 화통 옆으로 주욱 우리를 모아 세우고 설명을 해주었다.

석탄이라고 숯 비슷한 걸 때서 저 둥그러니 긴 가마 속으로 물을 끓인다. 김이 오를 것이 아니냐. 오르는 김을 이 조그마한 통 속으로 들여보낸다. 그 힘으로 저 몽둥이가[피스톤이] 연방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그 바람에 몽둥이가 바퀴를 돌린다. 제군도 일상 보지만 가마솥에서 밥이 한참 넘을 때면 그 무거운 쇠소댕이 들썩들썩 떠들리지 않더냐. 그게 바로 김의 힘이다. [제임스 와트라는] 서양 사람이 우연히 물 끓는 차관 뚜껑이 달싹거리는 걸 보고서 그 이치를 깨닫고는 연구를 하여 증기기관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그 증기기관을 배에다가 쓰면 화륜선이요, 수레에다가 쓰면 이와 같은 기차가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러한 의미이었던 성싶으나 도저히 그때 당시의 지능 정도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끓는 물에서 오르는 김이 어쩌니 그런 무서운 기운을 가지느냐면서 도무지 곧이가 들리질 않았다. 그보다는 아무래도 달리 무슨 조화가 붙은 것만 같았다. 학도 된 체면에 차마 드러내 놓고 말은 못했어도, 정녕코 그 화통 속에다가 귀신을 잡아넣었거니 했었다.

이것이 겨우 1910년 때의, 내가 겪은 바 기차에 대한 ‘괴담’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 알뜰한 기관차에 흙투성이의 트럭일망정 눈으로 실체를 보고 직접 타기까지 하고 했었으나 차라리 ‘문명한’ 축이었다고 할 것이다. 누구라더냐 촌 학자님인가 한 분은 제자들이 기차를 구경하고 와서 집채만한 수렌데 자행거보다 열 곱절도 더 빨리 달아나더라고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원 그럴 이치가 있느냐면서, 자아 이 사서삼경 어느 대문에 자행거보다 빠른 수레가 있느니라고 쓰였느냐면서, 준절히 일장의 책망을 했다는 것이 역시 그 당시의 일이다.

계룡산은 닭의 형국이요 기차는 지네 직성이 되어서 ‘연산 팥거리’ 그 앞을 지날 때면 줄곧 발이[바퀴가] 눌어붙어 꼼짝을 못하고 섰는 것을 화통이 하나가 더 달려와서야 가까스로 떼어놓곤 한단 소리도 또한 호남본선이 갖에 개통되었을 무렵의 ‘전설’이다

이래 삼십 년.

철도교통은 당나귀보다도 더 수나로와졌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그야말로 거미줄 치듯 기차선로가 사통오달로 깔려가지고 있다. 남북 간선마다 매일 다섯 급행 여섯 급행씩 왕복을 한다. 시속 70킬로의 특급열차도 마침내 현신을 했다.

중학시절 지리 시간에 런던과 버밍검 80마일을 단 한 시간에 기차 통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하던 건 인제는 옛말삼아서 해도 좋다. 흙달구지 같은 ‘모래차’를 몇 십 간 통 눈 가리고 껴안겨 앉아 타보고서 사뭇 세기의 경이를 느끼던 나는 서울서 부산까지 천릿길을 여섯 시간 사십 분에 달리는 제18열차를 조금도 신기스러함이 없이 타고 다닐 수가 있다. 그러면서 오히려 기차쯤 한 시대 낡은 교통수단으로 느리고 갑갑하대서 불편해하며 하찮이 여기기를 다 한다. 하되 그것이 불과 삼십 년 동안의 변천인 것이다.

그야 현대의 삼십 년이면 노상 적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인 것이 그 삼십 년 안의 일이니 전고 없이 옹골진 나이를 먹어온 시대라 할 것이다. 세계지도 장사들이 그새 몇 번째 판을 뜯어 고쳐야 했으며 런던과 파리에 망명한 폐제와 폐왕이 몇 명이길래. 아인슈타인이 상식이 되고 융커란 놈은 시속 육백 킬로고. 그러고 그밖에 이것저것 이 구석 저 구석의 허다하고도 놀라운 변천과 파란과 아울러 발전과…….

이렇듯 세상이 다른 방면에 있어서 치른 흐벅진 변화와 진보를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조선바닥의 철도 교통의 고만 발달은 차라리 더딘 셈이라고도 할 것이다. 아마 텔레비전이 도회지 가정의 전등만큼이나 널리 퍼지고, 주부는 골목쟁이 구멍가게에 나가서 오전어치 움파 한 단과 십전어치 태양열(太陽熱) 한 덩이를 사다가 찌개를 끓이고 할 만큼은 ‘문명’이 훨씬 보급이 되었어야 했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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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앞에서 전차를 내려서자 먼저 눈에 뜨이느니 장속같이 밴 사람의 사태다.

날이 매우 풀려서, 나도 벌써 봄 외투를 갈아입고 나선 터이매, 한결 사람이 길로 나다닐 철은 철이다. 겸해서, 시기가 한참 입학시험을 치는 고패라, 향객들이 많이 모여들어 가지고 부푸는 관계도 있을 것이다. 우선 나부터도 그런 소간으로 불려올라온 나그네.

양복 맵시가 어딘지 좀 촌스럽고, 무단히 바빠해 보이는 신사네들 하며, 금시 손가락이라도 입에 물듯 어릿어릿 돌아다니면서 구경에 팔렸는 소년들. 개개이 모두가 그 손님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절적인 현상은 그만두고서도 서울 거리에 사람이 붇는 품이란 원체가 대단했다. 전에야 아무리 봄이요 입학시기라고 해도 이대도록 범람하는 법은 없었다.

이번이, 한 달 전인 요 앞서보다 과히 더해 보이는 줄은 물론 모르겠다. 또, 요 앞서번이 그 앞서번보다 별반 더해 보이는 줄은 역시 몰랐다. 그러나 작년 삼월 이맘때에다 대면 시방은 아주 완구히 종로바닥이 벅차 보인다.

칠십만 인구였던 가늠만 하고서 그 수효를 표준하여 식량 배급 마련을 했더니 자꾸만 오착이 나고 나고, 할 수 없이 호구조사를 새로이 해본 즉, 자그마치 구십삼 만이더라고.

사오 년 동안에 이십만 명이 늘었으니, 별안간 거리가 이쯤 붐벼 보이기도 괴이찮은 말일 것이다.

인구는 백만에 가까워 현대적인 대도시의 항렬에 올랐다면서도, 종로 뒷골목과 및 그 근처의 여관 명색들은 예나 다름없이 민망스럽다.

김(金)군은 까맣게 앉아서 기다렸던지, 내 음성을 알아듣고는 풀쩍 뛰어나왔다. 평소에 진중한 사람으로 너무 그렇게 서두는 양이, 일은 벌써 불길해 둔 성싶었다.

“형님, 수고하오!”

소처럼 씨익 웃으면서 인사와 치하를 하는 것이나 역시 기색은 한껏 침울했다 또 그도 그려니와, 같이 따라나서는 동생아이의 핼쓱하니 풀죽은 얼굴하며가, 오늘 오정에 발표를 하는 ××중학의 입학시험 결과가(예상은 하고 있다던 말대로) 막상 여의치 못했음을 짐작하겠었다. 내가 맡아야 할 책임이 다시금 걱정스러웠다.

어제 오후 저물게, 김군에게서 시외전화가 왔었다. 이번에 동생아이를 데리고 올라와서, ××중학과 ××중학 두 군데를 시험을 치게 한 것이, ××중학은 벌써 낙방이 되고 ××중학도 내일이 발표라지만 전혀 가망이 없노라고. 모레는 그래서, 마지막으로 ××중학을 한 번 더 쳐보도록 하겠는데, 그러나 영영 미덥지가 못하니 불가불 어떻게든지 힘을 좀 써주어야 하겠다고.

나 같은 주변과 교제 솜씨에, 요샛날 그 어마어마한 중등학교 입학의 응원이네 운동이네,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소임이어서, 통히 갸랑이 없고 자신이 없노라고 일단 모피를 꾀하여 보았었다. 김군은 그러나 무던히 막막한 모양으로, 누누이 말을 하면서, 기어코(옹색스런 청병을) 고집했었다. 피차간 범연한 사일세 말이지, 하다가 못할 값에 지레 못한다고 끝끝내 방색만 하고 앉았을 수는 없는 노릇이요 해서, 아무려나 이렇게 올라는 왔던 것이다.

올라와서 보니 이렇게 코가 빠져가지고 있고, 실상은, 오늘 발표를 한다던 ××중학에 요행 합격이 되었으면 김군이야 물론 말할 것도 없고, 나 역시 결과가 번연히 민망하기나 할 그 일 서두리를 않고서 무사하려니 하여, 은근히 바라기를 마지 않았었다.

“저놈의 아알 저, 어찌겠소!…….”

김군이 짜증 비슷이 하는 말이었다. 그러고는 그 끝에 걱정이

“……잘못하다, 아알 버리쟁이겠소!”

아이를 버린단 소리도 노상 엄살은 아닐 듯싶었다.

작년에도 서울서 두 곳, 개성서 한 곳 도합 세 곳을 친 것이 세 곳 다 떨어졌었다.

그때, 마지막 셋째번 적에 개성으로 내려왔을 때에는, 그만해도 아이가 여간만 원기가 없고 시달려 보이는 게 아니었었다.

그러고는 금년에도 벌써 두 곳을 쳐서 두 곳 다 떨어지고서, 내일이면 다시 세 번째를 또 쳐야 하던 것이었었다.

이즘 중등학교 입학의 경쟁시험이라는 것이 고만 연령과 체력의 소년들에겐(부득이 한 번쯤으로도) 힘에 부치는 피로요 흥분이어서, 매우 무리한 부담이 아니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 것을, 거듭 이태씩이나 두고 번번이 세 차례씩이나 연해서 그 곡경을 치르게 하다니, 완연히 이건 학대라고 해도 가할 것이었다.

심신의 피로와 쇠약도 쇠약이려니와, 연거푸 이태 동안 여섯 번이나 낙제를 했으니 여간만 낙망이 되고 염증이 나지를 않을 것이었다. 그러고도, 인제 명년, 다시 내명년이면 내명년, 두고두고 얼마를 겪어야 하는고 해서, 딱 아주 질색을 하겠을 터, 자연, 입학시험이라면 겁부터 나고, 공부라는 것에 대하여 일종의 혐오를 느끼게 되지 않질 못 할 것이었다. 그러나마, 소학교의 성적이라도 과히 나빴다면 막시 모르지만, 본디가 중은 훨씬 넘었고, 더욱이 작년 일 년을 독실히 재수를 해서 실제의 실력이 많이 늘기까지 했다는데야.

이런 일, 저런 일 두루 생각하면 우리가 중학에 들 무렵만 해도 참으로 어수룩한 시절이었었다. 이십 년 저짝 그 당시야 관립학교가 그저 2대 1 정도로 경쟁이랄 것이 있는 성했지, 사학은 지망자 수효가 모집정원과 비등하기가 보통이었었다. 개중에는 오히려 정원이 다 차지를 못해서 백지답안짜리도 입학이 되는 학교까지 없잖아 있곤 했었다. 그만큼, 말하자면 편코 호강스러웠다.

나이도 항용 스무 살 안팎으로 수염이 시껌시꺼먼 아이아범이 수두룩했고, 어린 축에 끼던 내가 열일곱이나 먹었었다. 요새처럼 열세 살 네 살짜리는 경동(京童) 가운데나 약간 더러 있었지, 지방 학생은 썩 드물었다.

지금 저애가 그런데 열세 살. 아직도 어머니 아버지 곁에서 세상모르고 응석이나 부리면서 중학 공부를 하더라도 할 나이지, 멀리 이렇게 타관엘 나와서 갖추 그런 고생을 하기엔 너무도 연약하고 가엾은 정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잠시도 한 자리에 진득히 붙어 있지를 못하고서 한참 장난질을 친다 뛰어나가서 달리며 논다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그 낫세였다. 그렇건만 마치 중병이나 앓고 난 아이처럼 창백한 얼굴에 하나도 신명이라곤 없이 한편 구석으로 소곳하니 비껴 앉아서는 어른들의 눈치만 말긋말긋 여살피고 하는 양이 하도 애처로워 못 보겠었다.

그런 깐으로 해서라도 어떻게든지 이번 ××중학만은 입학이 되도록 해주고 싶은 생각은, 김군의 동생이라는 관계와는 따로이 새삼스럽게 간절하나, 그게 도무지 망연하여 더욱 마음에 딱하기만 할 뿐이었다.

××중학이면 아는 선생으로 이××군이 있기는 있었다. 무관한 처지요 하니 찾아가서, 말이야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아마도 그 밖엔 오직 도리가 없을 성불렀다.

그러나 대체가 뒷줄로 대고 주선이니 무어니 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어서 가령 교장이나 교무주임한테다가 청질을 하더라도 별 신통한 효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인데야 황차 한낱 여느 교원으로 무슨 그다지 도움직한 힘이 있으련 싶질 않았다. 혹시 그도 한 달이고 보름이고 미리 앞당겨서라면 모르거니와 내일이 시험날인데 다 늦게 오늘 겨우, 더욱이 이렇게 시험이 박두해서는 선생을 만나재도 졸연히 만나지를 못한다니 당장 그것부터가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김군은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서 교정으로 들어섰다. 역시 면회사절이라고 써붙인 종이쪽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없는 뱃심을 부려 명함을 내밀고 이군을 찾았더니 바빠서 못 만난다는 것이었다.

극장엘 갔다가 만원패를 보고서도 이내 물러가지 못하는 그런 심경이었으리라, 잠시 앞뜰에서 어칠어칠 그러다간 또 뒤뜰로 향해 돌아드는데, 세상은 이래서 더러는 요행스럽고 재밌다는 것인지, 마침 변소로 연한 복도를 이군이 비죽이 웃으면서 걸어나오고 있으니 말이었다.

“개성 촌사람이 남의 학굔 멋 허러 와서 앞뒤로 비잉빙 도는 거야?”

“자네 그 영리한 걸 보니, 오늘 소간이 우선 마음 든든허이!”

그 옆 숙직실로 따라 들어갔다.

“모초럼 올라와서 자넬 안 찾는대서야 도리가 아니겠길래…….”

“누군지 몰라두 어여 수험번호나 알으켜 주구 가요! 자네꺼정 열일곱째니 그런 줄이나 알구서…….”

“자네가 그렇게꺼정 세돌 하는 줄은 몰랐지! 교장보담두 나으이그려?”

“글쎄 고쓰까이헌테 청을 다아 지른대잖나!…… 꼭 죽겠어! 빠안히 아무 변통수 없는 걸 가지구들…….”

“난 그럼 아야 말을 내지두 마는 게 옳겠군!”

“되려 비쌔요! 누가 무서할 줄 알구?”

“1703. 내 ‘생질’놈일세. 떨어지는 날이면 생초상이 두엇은 날 형편이니 알아서 하게나!”

“일가집 어떤 마나님은, 내 허리끈에다 목을 매겠다구?”

이군은 수첩에다 번호를 적어놓고 나더니, 안색을 다시 하여가지고 진정을 말해주되, 자네의 청이요 바로 생질이라고 하니 부탁받은 열일곱 가운데 누구보다도 제일 정성은 써보도록 하마고. 그러나 첫째 왈 성적이 웬만해서 문제될 범위 안에는 들어야 하고, 그렇지만 또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내 주장이 여럿의 의견과 일치해야 하고. 그런데 그 내 주장이란 것이 실상인즉 한심하기 짝이 없느니라고.

갈리면서 이군은 또다시 되는 날 될 값에 믿질랑은 말고 있으라고 뒤를 눌렀다. 그러나 나는 안 되는 날 안될 값에 믿고 기다리니 그리 알라고 둘러 다졌다.

궁금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군은 그만만 해도 우선은 조금 마음이 뇌는 눈치였고, 그러고는 문득 그 끝에 하는 소리였다.

“이렇기이 힘으 씨여서야 뉘 공부시키 먹겠소! 우리 중학으 들 때야 어디…….”

“세상이 그만침 좋아지질 않았소? 그게 다아 좋은 세상으루 나가는 ‘급행요금’이어든!”

“무스개 좋은 세상이겠소? 나 원!”

“그거야 우리가 평갈 하는 말이고, 새세대 사람들은 다르거든!…… 차차루 세상이 조옴 좋아지우?”

“말두 마우다! 형님 은제 그리 늙었소?”

“허허! 늙었지! 정히 늙은 거 이상이지!”

“쯔쯔! 사십두 못 먹구 그리 늙소? 한참 때 앵이요?”

“소위 겉늙었다구 하는 걸지!…… 저 무엇이냐, 인생사십(人生四十)이 태지리(太支離)한데 빈병상수 부잠이(貧病相隨不暫移)라구 안했소? 머리를 두를 곳 없는 생애거니 하자니깐 자연 인생이 부질없기만 하구, 지리한 생각만 들구! 그러니 생으루 겉늙은 거 아니요?”

“그기 다아 도회지서만 사는 ‘세멘트 병’이오!”

“건 농군의 인식 부족! 둔한 공식관념!”

재동 네거리에서 안동 육거리를 바라고 내려오느라면 별궁을 채 못 미쳐 바른손 편으로 일컬어 ‘장송루’라는 한 가구의 청요리집이 있다.

줄행랑 본의 조선 고옥을 겉만 뜯어고쳐 유리창을 해 달고 유리문을 내고 문설주하며 기둥과 연목 등엔 푸른 페인트칠을 하고 한, 심히 그 어설픈 문간을 비롯하여 영락없이 추녀 끝에 가 쌍으로 매달린

包辨酒色[포변주색]

應時小賣[응시소매]

의 금자박이 검정 팻조각이랄지, 찌부러진 처마 위에 덜씬 커다랗게 올라앉은 간판이랄지, 무릇 북촌이면 거기 아무데서나 흔히 만나곤 하는 썩 전형적인 청요리집의 한 집이었다. 그게 그런데 좀더 으슥한 거리나 골목이라면 몰라도 좌우와 건너편이 모두 들뭇들뭇 여러 층짜리 벽돌집에다가 훤칠한 근대식 점포들이 즐비한 상가의 번화한 한복판이 되고 보니 그 틈사구니에 가서 좌정을 하고 있는 한 채의 근천스런 청요리집 ‘장송루씨의 행색이란’ 한결 초라한 것이지만 일변 무던히 또 주제넘어 보이기도 한다. 그 주제넘음을 짜장 겸손하는 듯 길로부터 약간 물러나서 ××××관의 비죽 내민 뒷그늘로 넌지시 비껴 앉았는 양은 일종 애교라고도 할는지.

하여튼 그래서 실상은 잘 주의나 하기 전엔 여기에 이런 집이 있으려니 여기지도 않는 그 장송루요, 나만 하더라도 인연이랄 것이 있자면 노상 없지는 않은 터이면서 무심코 그대로 지나쳤을 참인데 김군이 그러자 주춤하고 가던 걸음을 멈춰 섰다.

점심 요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아까 낮에는 하도 속이 상해서 점심도 여태 안 먹었노라면서.

나도 비로소 딱 시장한 줄을 알았다.

구중중한 한 방으로 들어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자니 휘이 방안이 둘러보이면서 옛일이 절로 생각되지 않지 못했다.

“이 집이 이래 보여두 이 도회선 유서 깊은 청요리집이야!”

“오랐소?”

“내가 중학에 입학하러 올라왔을 적에두 있었으니깐 얼마나 오란진 몰라두 이십 년은 넘겠지!…… 이뭉스럽게 뒷문이 있거든!”

“오오!……많이 댕겼소?”

“곰보피취, 또오 세상 장난꾼, 신봉근, 성찬호, 이렇게 모두 얼려서 한때 많이 댕겼지! 그래두 술은 안 먹었드라우! 주머니 털림 해가지군 밤에 살며시 뒷문으루 들와선, 으레껏 뎀뿌라 잡채 탕수육에 우동이나 짜장면을 시켜서 먹군 했어두…… 아마 그 무렵에 이 근처 계동으루 재동 안국동으루 수송동으루 하숙을 허구 있던 학생 치구서 이 장송루 뒷문 속을 모르는 학생은 베랑 없을 거야!”

장승 같은 하인이 차를 따라 주고는 음식 분별을 듣고 나간다. 따끈한 차맛이 옛날 그땐 성싶었다.

“한번은 축구대횔 나갔다 돌아오는데, ……지끔은 이렇게 훅 불면 날아가게 생겼어두 그때야 당당헌 축구선수가 아니댔소!”

“금시초문 앵이요!”

“시뻐허지 말아요!”

“후보선수 앵이댔소?”

“자꾸만 시방!…… 선수허구두 쎈터 하푸드라오?”

“우승기 탔소?”

“이년급 때버틈 졸업허두룩 대범 육칠찰 대회 출전을 했는데, 그 육칠찰 한 번두 울구 돌아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럼 그렇지!”

“허허! 울었다니 참 생각이 나오만, 이건 야구대회 적야. 배재허구 결승을 하다간 꿍 졌지. 뽀올은 그래두 한 개 뺏어 가지구 왔겠나. 이걸 비단 보재기에 놓아서 쟁반에다 받쳐 들군…… 옳아! 바루 그이가 작고하신 나원정 선생이댔어! 얌전허구두 좋은 으런이댔는데!…… 아 그래 그 나원정 선생이 뽀올을 그렇게 받쳐들군 응원을 나갔다 돌아온 전교 학생을 집합을 시켜 놓구서, 선생님들두 물론 죄다 나서구. 해가 지굴랑 그 좋은 구변에 한바탕 비통한 격려 연설을 하는데, 채 몇 마디 가지두 않어서 와악 그만 울음이라! 학생 전부가. 울음이 통곡으루 변하지! 당자 나선생이 목이 메더니 울음소리지! 선생님네가 모주리 눈을 씻지! 필경은 저어 낡은 옛날 옛날의 우승기 하나가 있는 걸 끄내다간 패전한 그 뽀올허구 함끼 선두에 세워 가지군 학굘 앞뒤루 떼모하면서 교가를 부르구!…….”

감회가 솟쳐 잠깐 말은 멈추고 차를 마시는데 김군도 곰곰이 듣고 앉았다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좋은 때요!”

“좋은 때구말구! 남헌테 진다는 것이 그렇게두 원통허구!…… 그렇지만 원통한데 끊지들 않구서 피가 끓구 기운이 솟구!…… 그 기운 다아 어디루 갔는지!”

“좀 건강할 도리르 하오?”

“인전 건강했자 인간이나 주접스러질 꺼!…… 늙으면 젊을 땔 추억하는 재미루 산다구 않소? 걸루 만족하는 게 옳지!”

“쯔쯔! 영 아주 늙은이 행세르 하자 드오?”

“어떡허겠소! 맘이 지레 그런 걸!…… 괜히 탓해쌓지 말구 허허!…… 늙은이 회고담이나 또 들어볼료?”

“……….”

“그래 그 축구대횔 나갔다, 처억 준결승꺼정 붙어가지군, 의기양양해서 시방 돌아오는 길야. 인솔잔 조××선생!…….”

“그 양반이 참 상기두 거기 신문사…… 문직이 그거르 하오?”

“지끔은 아냐!…… 그 으런이 육십만세 후에 학굘 고만두구서 간도루 가선 몇 해 동안 고생 지질히 했드라우. 그리군 도루 환고향을 해서 대다 못해 걸 직업이라구 붙들었던 모양인데 미상불 츰엔 보기 안됐드군! 그렇지만 그런 소절을 거리껴 않는 게 역시 그이의 무인(武人)다운 솔직한 승품이 아니요?”

배갈과 나조기가 들어왔으나 나는 가뜩이 낮술이요 해서 잔을 치워놓고 김군이 혼자서 자작을 기울여야 했다.

축구대회는 그때가 사년급 적이요 가을이었으므로 나로서는 마지막 출전이었었다. 마침 그런데 선수가 나 말고도 절반 이상이 졸업반이어서 이번이야말로 최후 겸 최초 겸 그러고 졸업기념을 겸해서, 기어이 우승기를 타야만 하느니라고들 벼르던 판이었었다. 여러 해를 두고 늘 패전만 해오던 나머지라, 그런데다 상하 없이 승벽들은 유난할 시절이겠다, 선수 자신들은 물론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학교 전체의 기대가 또한 대단했었다. 오죽했으면 그 천연스런 교주 선생이 다 자기 자택에서 선수 합숙을 시켜 줄 지경이었으니, 했던 것이 아무려나 우선 준결승까지는 붙어놓았겠다. 잔뜩 어깻바람들이 나가지고는 일행이 시방 조×× 선생의 인솔을 받아 운동장에서 합숙소로 돌아오는 그 길이었었다.

조×× 선생은 당시 유명한 그 몽둥이를 처억 어깨에 메고는 앞참을 서서 씽씽 걸어가고, 우리는 주욱 그 뒤를 따르고 하여 마악 이 앞을 지나는 참인데, 그러자 이 양반이 별안간 우리를 휙 돌려다보더니 그 재빠른 말로

“느이들 시장허잖니?”

하고 묻는 것이었었다.

하루에 열 끼를 먹었어도 또 먹으라면 좋아할 먹성들인데 얼른 대답은 안 나왔을망정 누구 하나 마단 소리는 할 턱이 없었다.

설마 그렇더라도 청요릿집으로 데리고 들어갈 줄은 천만 뜻밖이었었다. 호떡 아니면 설렁탕, 잘해야 계란이나 몇 꾸러미 사주려니 했었지. 그때만 해도 백주대도 상에서 선생이 학생들을 거느리고 어엿이 청요리 집엘 들어갈 수가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하던 노릇이었었다. 하물며 남달리 엄하기로 이름난 우리 학교에서.

경기에 진다 치면 누구보다도 분해하고 원통해하는 이가 조××선생이었었다. 그만큼 혹시 더러 이기든지 하면 제일 신이 나서 기뻐하는 이가 또한 조×× 선생이었었다. 그날도 우리가 준결승에까지 붙는 걸 보고는 여간만 좋아를 하는 게 아니었었다. 그러고 너무도 기쁘고 좋아서 한바탕 우리를 파격의 호강을 시켜주고 싶은 생각이었을 것이었다.

아무턴 그래서 우리는 미처 호떡이냐 설렁탕이냐쯤 여기며 처분 내리기를 기다리고 섰는데, 느닷없이 이 양반이 몽둥이를 번쩍 들어 이 집을 가리키면서

“그럼, 우동 사먹구 가자!”

하고는 주적주적 앞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었었다.

우리는 모두들 정신이 얼떨떨할밖에. 그러나 이내, 하 이게 웬 고등 대접이냐고 반가워하면서 우우 따라설밖에.

그러면서도 어쩐지 모양이 좀 안된 것 같고, 그래 문득 생각이 나서 무심결에 불쑥 나온 말이었었다.

“선생님! 저 뒷문 있습니다!”

했더니, 이 양반이 휙 돌려다보고는 비죽 웃으면서

“끼놈! 많이 댕겼구나!”

아뿔싸. 혀를 날름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여럿은 와끄르 웃어젖히고.

이 집과 이 집 뒷문을 두고서 그런 순박하고 즐거운 추억도 있지만, 훨씬 그 전엔 한 번…… 앞문으로 들어와서는 뒷문으로 슬쩍 빠져, 급한 화망을 면하던 아슬아슬한 에피소드도 없지가 않았다.

    1. 3

이튿날.

아침 일찌감치 ××중학의 교정엘 와서 보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풍속’이었다. 모집정원이 150명이요 실상은 120명을 경쟁시험으로 뽑는다는데 지망자 수효가 1,800 몇 명이라는 것이었다. 15대 1이 넘는 셈이었다.

모두가 열두어 살로부터 열네댓 살 그 어림의 소아들이었다. 그놈들이 어느새 벌써 같은 제 또래를 열다섯이나 이겨내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격렬하고 심각한 ‘싸움’에 참예를 하여온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자매 데리고 온 그 애들의 부형들의 초조하고 근심스런 얼굴이 동정스럽기보다는 어쩐지 잔인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교무주임이나 되는 듯싶은 한 교원이 아이들이 집합한 앞으로 단 위에 올라서서 라우드 스피커를 통하여 인사 겸 일장의 훈시를 준다.

제군이 이렇도록 다수히 우리 학교에 지원을 해주어서 얼마나 우리 일동은 진심으로 기쁜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마음 같아서는 제군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죄다 우리 학교로 맞아들이고 싶은 생각은 간절한 바가 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를 못하여 본의는 아니나마 제군으로 하여금 경쟁을 하게 해서 그중 극히 적은 일부분만을 뽑지 않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부디 유감이 없도록 제군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남에게 지지 말고 영광스런 우리 학교의 학생이 되어 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형식적인 일편의 외교사령이라니보다도 간곡한 진정으로 들려, 성명이 누군가 싶을 만큼 고마웠다.

두 시간은 기다려서야 김군의 동생아이가 시험장으로부터 나왔다. 오늘은 필기시험 한 가지뿐이어서, 데리고 교문 밖으로 나오면서, 김군이 연해 물어쌓는다. 무어라고 물으며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지 나는 깜깜속이었으나 김군이 저윽이 안심해하는 눈치로 보아 과히 잡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재동 네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버스정류장에서 박(朴)정순 여사를 만났다. 깜박 반가웠다. 박정순!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아마 ××사 이후 처음인가 보았다.

그도 반기면서

“안녕허시나요?”

하는 인사 쩨도 옛과 다르지 않았다. 고개는 쳐들고 허리만 굽히면서 관음보살처럼 웃는 눈이랑.

본디도 두루스름하니 밉지 않고 좋게 생긴 색시였지만, 그동안 훨씬 몸피가 불고 얼굴도 처녀 적보다 흠뻑 다 피어, 삼십 고패의 자리잡힌 ‘아씨’태가 푸짐했다. 그러했기 때문에 자연 옛날의 신식 차림새에다 대면 발뒤축 치렁치렁, 푸욱신 쌔는 긴 치마와 솜버선 맵시가 아주 제대로 얼리고 점잖스러 보였다.

손목을 잡고 섰는 댓살박이 어린아이는 그의 아들이리라.

“유치원 다니냐?”

머리를 쓸어주면서 귀애해도, 낯을 가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고개를 파묻는다.

“상기두 개성 기시나요?”

“네에, 아직…….”

대답은 하면서도, 내가 개성으로 가서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랐다.

“가끔 올라오시나요?”

“종종 이렇게 올라오군 한답니다!”

그는 내 거취를 불필히 알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묻지 않아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일종의 사교이었을 것이고, 그만큼 그는 태도에 가서 마음의 여유가 드러나던 것이었었다.

이렇듯 그의 좋은 신수와 더불어 마음의 성숙하고 침착된 포즈에서 문득 느끼겠기를, 행복스럽게 잘 사는 거다 하는 안심 비슷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면서 뒤미처 역시 이 여인은 그렇게 된 것이 다행이요, 또한 옳은 일이었구나 싶었다.

박정순 그는 일찍이, ××사의 한 권솔로 잠시 동안 우리들의 오두간한 생활에 참예를 했다가, 부질없이도 우리들 몇몇(숭이, 영이, 나 이렇게) 젊은 가슴에 커다란 슬픔을 묻어주던 여인이었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만 울었을 뿐이 아니라, 짜장 엉엉 울기까지 했었다. 수염 난 녀석들이 애들처럼 울었었다. 그게 바로 어느 해 늦은 봄, 사의 식구들이 통 쓸어서 창의문 밖 세금정으로 전춘놀이를 나갔던 날이었다.

모래사장에 솥을 걸어놓고 두 부인사원과 뒤섞여 사내들이 모두 걷어붙이고서 밥을 짓는다 반찬을 장만한다 술을 데운다, 술꾼은 안주도 익기 전에 벌써 취한다. 아무려나 처음은들 명랑하고 유쾌했었다.

잔치가 애벌 한물이 지나면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비는 아니라도 상심 있는 사람의 비회를 돕기 알맞을 만큼 구죽죽 심란스런 비였었다.

이윽고 술이 거나하니 취한 숭이가 웬 것인지 큐삐를 한 놈 모랫바닥에다가 파묻으면서 저는 그걸로 제 청춘을 장사지내노라고 중얼중얼 중얼거리고 있더니, 이렇게

“나느은 나─는 내 청춘으을 내 청추은을!…… 노─하노 노─하노, 별가리 긁자 노─하노오오오오!”

이렇게 그러더니, 흑흑 설움이 복받쳐올라, 그대로 퍼버리고 앉아서 울음을 울어대는 것이었었다.

진작부터 울고 싶어 못하겠던 내가 같이서 붙들고 울었다. 영이가 오더니 숭이를 목을 얼싸안고 울었다.

동료들은 한갓 취흥이거니 여길 따름이었었다. 사실 또 맑은 정신으로야 남이 점직해서라도 차마 울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슴 저 깊이, 부지할 수 없는 설움이 서려, 마음은 자나깨나 줄곧 울고 있을 그 무렵이었었다.

××사 그 당절의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퍽들도 초라하였다. 의식이 초라할 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의탁할 바를 모르고 삭막하였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꺼칠하니 야위고 얼어붙은 삼동과 같은 우리였었다. 그러했건만서도 청춘이란 건 꽤 분수를 모르고 주제넘은 생각을 가지려 하는 것이던 모양이었다. 도저히 박정순 그는 우리들의 그렇듯 메마른 생활에다 대면 훨씬 한 떨기의 환히 핀 꽃이었었다. 이 꽃을 우리는 연모를 했던 것이었었다.

번화한 꽃이 무얼 바라고 어설픈 ‘토양’에 길이 만족할 며리가 없는 노릇, 박정순은 그리하여 좋은 세계를 찾아서, 미구에 우리들의 주위로부터 떠나고 말았다. 참으로 그는, 한때 길을 잘못 들어 우리들의 가난한 문전엘 잠시 들렀던 것뿐이었었다. 했던 것이, 그 스스로는 본의도 악의도 아니면서 우리들의 가슴에 크낙한 상처를 끼쳐 주었던 것이었었다.

한때는 야속한 생각도 없지는 못했었다. 종작없는 가십을 곧이듣고서 불쾌하여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대로의 길을 걸어갔었다.

하마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숭이는 그 뒤로 이내 좋은 아낙을 맞아, 딸까지 낳고 몸은 더 뚱뚱해졌고, 평생에 즐기던 (연극) 연출을 하며 재미를 보면서 유유자적 지내고 있고.

영이는 그 역시 쉬이 잘 결혼을 했고, 심경이 변하여, 시도 문학도 작파하고는 법학 공부를 떠나더니 시방은 서도로 가서 석탄을(제말따나, ‘검정 다이아’를) 캐고 있고. 그러고 나는, 셋 중에는 매앤 빠져 종시 방황하는 인생인 채 어느덧 마음만 한껏 겉늙었고.

우연히 그러자, 하룻날은 길에서 이렇게 박정순을 주쩍 만났던 것이다. 그때 이후 처음이었다.

푼수 이상으로 반가웠다. 그토록 반가울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와 같은 안심과 다행을 그에게서 느끼리라곤 막상 생각 밖엣 일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와 더욱이나, 그를 원망을 한다든지 섭섭해한다든지 하는 마음은 조금치도 없다. 따라서, 오히려 담담하니 범연했어야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좋은 신수와 더불어 마음의 성숙하고 침착된 양을 보고서, 행복스럽게 잘 살거니 하여 안심 비슷한 즐거움을 느끼었다. 그러면서, 역시 이 여인은 그렇게 된 것이 다행이요 옳은 일이었거니 싶어했다.

무엇이 가르치는 너그러움인고, 선량인고, 혹시 조그마한 달관으로부터 우러남이나 아닐는지.

내가 아직껏 그에게 미련이 있고 그를 연모하기 때문이라면야, 흔한 그저 센티멘탈이었지 별것이 아닐 것이었다. 하나, 역시 그런 것은 남아 있지를 않고. 적실히, 조그마하나 달관은 달관일 성부르다.

만일 그러고, 달관일진댄 한낱 지나간 연애에서만일 것이 아니라, 내 생활까지를 포함한, 널리 세상 범백사에 그와 같은 마음으로써 임할 수는 없을 것인지.

客來問我興亡事[객래문아흥망사]

笑指蘆花月一船[소지노화월일선]

이 경지를 일찍이는 매우 부러워했었다. 아마 이와는 좀 다른, 그러나 더 나은 경지일 것이다.

김군이 저만치서 기다리고 섰다가, 비죽이 웃으면서 누구냐고 묻는다.

“옛날 애인!”

“어째 결혼 앵이했소?”

“농군은 할 수 없어! 연앨 하면 반드시 결혼하란 법인가?”

“열맹이 앵이 여는 곡식으 무스개 심으겠소?”

“따안!”

“정, 연애르 좀 하우다?”

“인전 또, 연앨 하라?”

“젊어진다 않소?”

“오오!…… 그렇지만 늙은 사람은 연애가 돼지질 않거든!”

“우리 행경도로 오우다! 많소잉, 소만씩 한 기…….”

“그 소만씩한 색시들이 날 무얼 보구 좋대겠소!”

“서울양반 앵이요!”

“허허!…… 사실은 또, 베랑 그리, 젊어지구 싶지두 않어!”

“어째?”

“주접을 피워야 한다니!”

오늘도 거리에는 깔리듯 사람이 넘쳤다. 날씨는 어제보다도 훨씬 더 풀려 완구히 봄인 듯 포근하다. 문득, 어디 잔디밭이나 찾아가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실컷 생각에 잠겨 누워 뒹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김군을 꼬였더니 좋다고 해서, 같이 덕수궁으로 향을 잡았다.


(1940, 10, 6, 안양서)


(註) 제2절 끝에, 흑선으로 메꾸어진, 문장 닿지 않는 대문이 있다. 이 대문은 3·1운동 때에 독립신문을 돌리다 형사에게 쫓기던 사연인데, 일정 때라, 검열에서 삭제를 맞아 그렇게 된 것이다. (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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