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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후한서/권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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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靈帝初,烏桓大人上谷有難樓者,眾九千餘落,遼西有丘力居者,眾五千餘落,皆自稱王;又遼東蘇僕延,眾千餘落,自稱峭王;右北平烏延,眾八百餘落,自稱汗魯王:並勇建而多計策。中平四年,前中山太守張純畔,入丘力居眾中,自號彌天安定王,遂為諸郡烏桓元帥,寇掠青、徐、幽、冀四州。五年,以劉虞為幽州牧,虞購募斬純首,北州乃定。

13헌제(獻帝) 초평(初平, (190~193년)) 연간에 구력거(丘力居)가 죽자, 아들 누반(樓班)의 나이가 어리고 종자(從子) 답돈(蹋頓)이 무력과 지략을 가졌으므로, 대신하여 즉위하여 삼군(三郡)을 거느리고 가지니, 무리들이 모두 그의 호령(號令)을 따랐다. 건안(建安, (196년 ~ 220년)) 초, 기주목(冀州牧) 원소(袁紹)가 전장군(前將軍) 공손찬(公孫瓚)과 더불어 서로 대립하여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답돈이 사신을 보내 원소를 뵙고 화친을 구하고, 마침내 병사를 보내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공격하여 이를 깨뜨렸다. 원소는 거짓으로 꾸며 답돈·난루(難樓)·소복연(蘇僕延)·오연(烏延) 등에게 모두 선우(單于)의 인수(印綬)를 하사(下賜)하였다. 그 뒤 난루·소복연은 그 부중(部衆)을 거느리고 누반을 선우로서, 답돈을 왕으로서 받들었다. 연후에 답돈은 큰 계책을 가졌다. 광양(廣陽) 사람 염유(閻柔)는 어려서 오환·선비 속에 숨어 있었으니, 그 종족이 믿게 되는 바가 되었고, 염유는 선비의 무리를 의지하여 오환 교위(烏桓校尉) 형거(邢舉)를 죽이고, 그를 대신하였다. 袁紹因寵慰柔,以安北邊。더불어 원소의 아들 원상(袁尚)이 패하자, 답돈에게로 달아났다.[1] 이때, 오환으로 달아난 유주(幽州)·기주(冀州)의 관리와 백성이 10만여호였고, 원상은 그의 병력을 믿고, 중국을 다시 도모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조조(曹操)는 하북(河北)을 평정하였고, 염유가 선비·오환을 이끌고 귀부(歸附)하니, 조조는 곧 염유를 교위(校尉)로 삼았다. 건안(建安) 12년((207년)), 조조가 스스로 오환을 정벌하여, 유성(柳城)에서 답돈을 대파하고 그를 참수하였으며, 포로 20여만명을 복종시켰다. 원상은 누반·오연 등과 함께 모두 요동(遼東)으로 달아나자,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이 (이들의 목을) 모두 쳐서 (조조에게) 이를 보냈다. 그 남은 무리 만여 부락은 모두 중국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이른다.

14 鮮卑者,亦東胡之支也,別依鮮卑山,故因號焉。其言語習俗與烏桓同。唯婚姻先髡頭,以季春月大會於饒樂水上,飲讌畢,然後配合。又禽獸異於中國者,野馬、原羊、角端牛,以角為弓,俗謂之角端弓者。又有貂、豽、鼲子,皮毛柔蝡,故天下以為名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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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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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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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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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5년 음력 1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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