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대사 선포의 권능과 효력에 대한 마르틴 루터 박사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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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선포의 권능과 효력에 대한 마르틴 루터 박사의 논쟁
1517년 10월 31일
-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하신 때로부터 신자들은 일생에 걸쳐 회개하여야 한다.
- 이 말은 고해성사와 같이 성직자가 인정하는 고백과 속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 그것은 아직 내면의 회개를 뜻하지 않으며, 뿐만 아니라 육신의 고통을 외부로 끄집어 내지 못하기에 내면의 회개가 될 수도 없다.
- 그러므로 자기 혐오가 계속되는 한 형벌 역시 계속되며, 이것이 참된 회개이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 교황은 감면을 의도할 수도 없고, 그의 권한이나 교회법에 의한다고 하여도 어떠한 형벌도 감해줄 수 없다.
- 교황은 하느님이 이미 사하신 것과 사하시리라 승인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죄도 감해줄 수 없다. 물론 확실히 교황은 자기 스스로가 심판한 것에 대하여는 사면을 행사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경우에 행사되는 그의 사죄권이 비웃음을 산다면, 죄는 온전히 용서받지 못한 채 남는 것이다.
- 하느님은 만사에 겸손하지 못한 채 그의 대리인에 불과한 성직자에게만 복종하는 자의 죄를 사하지 않으신다.
- 교회법에 있는 형벌은 산 사람에게만 적용되며 부과되는 것이지 죽은 자에게 부과되는 것은 아니다.
- 그렇기 때문에 교황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성령은 언제나 그의 포고문에서 죽은 자와 필요성에 대한 예외조항을 두게 한다.
- 성직자가 임종을 맞은 자에게 연옥의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 교회법에 있는 형벌이 연옥의 형벌로 바뀐 것은 주교들이 잠든 사이에 쭉정이가 뿌려졌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증거이다.
- 종전에는 교회법에 있는 보속이 사죄 이후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의 시험으로서, 사죄 이전에 이루어졌다.
- 죽음으로서 죽은 자는 모든 보속에서 해방된다. 그들은 이미 교회법의 계율에 대해 죽었고, 그와 연계한 권리를 갖는다.
- 죽어가는 사람에게 있어 불완전한 영성의 건강함이라 일컬어지는 불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사랑이 적을수록 두려움도 크다.
- 두려움과 공포는 달리 말할 것 없이 그 자체로서 절망의 공포에 몹시 가까운 연옥의 형벌을 지속하는 것에 필적한다.
- 지옥, 연옥, 천국의 구분은 절망, 근접한 절망, 안전의 보장에 대한 구분으로 보인다.
- 연옥에 갖힌 영혼은 절망을 줄이고 사랑을 늘려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그들이, 말하자면, 사랑을 늘려야할 이점의 밖에 놓여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이성적이나 성서에 비추어 보아도 증명할 수 없어 보인다.
- 또한, 우리가 그것이 확실하다 하여도, 그들 즉 최소한 그들 모두가 그들에게 내려질 축복을 보장받았는지를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어 보인다.
- 따라서, 교황이 선포하는 “모든 형벌에 대한 완전한 사죄”는 실제로 “모든”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그 자신이 심판한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 따라서 교황의 대사로서 모든 사람들의 형벌을 사죄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하며 설교가들이 발행하는 대사는 잘못이다.
- 그가 교회법에 따라 연옥에 갇힌 영혼을 사한다고 하여도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치뤄야 할 형벌을 줄 수는 없다.
- 만일 어떤 이에게 모든 보속을 사죄하여 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이러한 사죄는 극히 적은 사람에게나 가능할 것이다.
- 따라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형벌에 연계된 무분별하고 목소리만 높은 약속을 받을 뿐이다.
- 연옥에 대해 일반적으로 교황이 갖는 권한은 어떠한 주교나 부제가 특별히 자신의 교구에 대해 갖는 권한과 같을 뿐이다.
- 교황이 연옥에 갇힌 영혼에게 부여하는 사죄는 잘해 보아야 그가 갖고 있지 않은 열쇠의 권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구(轉求)하는 것일 뿐이다.
- 설교가들은 돈 통에 동전이 딸랑거리며 떨어지는 순간, 연옥의 영혼이 날아오른다고 말한다.
- 확실히 돈 통에 동전이 딸랑거리며 떨어지는 순간, 이득과 탐욕은 늘어나지만, 교회의 전구에 대한 응답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일 뿐이다.
- 성 세베리노나 파스칼의 전설에서 보이듯 연옥 속의 영혼이 모두 구제받기를 원하는 지 누가 아는가?
- 아무도 그의 회개가 신심이 깊은지 알 수 없으며, 온전한 사면을 받았는지도 알 수 없다.
- 진정으로 참회하는 자는 드물고, 진정으로 대사를 받는 사람도 드물다. 이러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 고해 사제 특전 증서[* 1]를 가졌다는 이유로 자신이 진정 구원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를 가르친 자와 함께 영원히 비난받을 것이다.
- 사람들은 교황의 사면이 인간이 하느님께 화해하여 얻는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이라는 말에 대해 경계하여야 한다.
- 이러한 “사면의 은총”은 오직 성사 보속의 형벌에 의한 것이고, 사람이 정한 것이다.
- 고해 사제 특전 증서가 있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설교사는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벗어난 자이다.
-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면증이 없어도 죄와 벌로부터 온전히 사면받을 권리를 갖는다.
-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사면증 없이도, 하느님이 그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축복을 받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부여하는 사면과 (교회의 축복과 함께하는) 전례는 무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이는 주어진 사죄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 아무리 영민한 신학자라 할 지라도 사람들에게 사죄의 양과 진정한 회개를 동시에 설복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 진정한 회개는 형벌을 찾고 사랑하나, 관대한 사죄는 형벌을 약하게 하여 그것을 싫어하게 하거나, 최소한, (싫어할) 기회를 쥐어줄 뿐이다.
- 교황의 대사[* 2]는 사람들이 마치 그것이 다른 사랑에 의한 선행보다 가치가 있는 것마냥 잘못 알지 못하도록 주의 깊게 설교되어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이 고해 사제 특전 증서를 사들이는 것이 어떠한 자비로운 행위를 대신하지 못한다고 배워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를 구하고,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이 고해 사제 특전 증서를 사는 것보다 좋다고 배워야 한다.
-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을 행함으로서 자라고 사람은 그로 인해 나아지나, 고해 사제 특전 증서는 사람을 나아지게 하지 못하고 형벌만을 피하게 할 뿐이다.
- 그리스도인들은 필요한 자를 보고도 그를 지나쳐 (돈을 주고) 고해 사제 특전 증서를 사면, 교황으로부터 사죄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진노를 사는 것이라 배워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필요보다 더 가진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가족들이 필요한 것을 위해 보관할 일이지, 고해 사제 특전 증서를 사느라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워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고해 사제 특전 증서를 사는 것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일 뿐, 계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의 대사를 받기 위해 그들의 돈보다는 경건한 기도가 더 필요하며, 갈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의 대사가 그것에 믿음을 걸지 않을 때 유용하며, 그로 인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는다면 오히려 해로운 것임을 배워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이 대사 설교가들이 강요하는 것을 안다면, 그는 자기 양들의 살과 뼈, 그리고 가죽으로 지어 올리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재로 돌리는 편을 택하리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전을 팔아서라도 감언이설로 고해 사제 특전 증서를 팔아대는 행상인들에게 갈취당한 많은 이들에게,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의 돈으로 갚을 것이란 점을 배워야 한다.
- 고해 사제 특전 증서에 쓰인 구원의 보장은 교황이나 그 대리인이 자신의 영혼을 그것에 건다 하여도 헛된 것이다.
- 몇몇 성당에서 고해 사제 특전 증서를 설교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에는 침묵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적이자 교황의 적이다.
- 같은 설교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같은 시간 동안 또는 더 오랫동안 고해 사제 특전 증서를 설교하는 것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훼손되었다.
- 교황은 하찮은 고해 사제 특전 증서가 하나의 낱말, 구절, 장으로 찬양될 때마다 위대한 복음은 백 배의 낱말, 구절, 장으로 설교되어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의지임을 보여야 한다.
- 교황이 베푸는 대사인 “교회의 보물”은 그리스도의 사람들 사이에서 충분히 거론되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 수많은 잡상인이 이 보물들을 그리 쉽게 내놓지 않고 긁어 모으는 것은 이것이 세속의 보물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이다.
- 이들 가운데 어느 것도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가 아닌데, 교황이 없더라도, 이들은 언제나 속한 사람에게는 은혜와 십자가를 주며, 속하지 않은 사람에겐 죽음과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 성 라우렌시오는 교회의 보물이란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이라 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속한 시대에 쓰이던 말을 인용한 것이다.
- 우리는 신중하게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바로 그 보물이라 말한다.
- 분명한 것은 형벌과 예약된 일들의 사면에 대해서 교황의 권능은 스스로에게 족한 것이다.
- 진정한 교회의 보물은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에 의한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 그러나, 이 보물은 자연히 가장 싫은 것인데, 첫째가 꼴찌가 되게[* 3] 하기 때문이다.
- 한편, 대사의 보물은 참으로 받아들인 만 한데, 꼴찌가 첫째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복음의 보물은 예전부터 부유한 사람을 낚고자 하는 그물이다.
- 대사의 보물은 지금 사람의 부를 낚고자 하는 그물이다.
- 설교가들이 “가장 큰 은총”이라 울부짓는 대사는 이렇듯 그들의 이익이나 도모하게 되었다.
- 거기에 아직 남은 진실이라고는 하느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신심에 비해 보잘 것 없이 작은 은총 뿐이다.
- 주교와 부제는 모든 존중을 받으며 교황의 대사를 대리할 권한을 받는다.
- 그러나, 그들은 이 설교자들이 교황으로부터 받은 대리권 대신 자신들의 꿈을 설파하지는 않는지 온 눈과 귀를 집중하여 경계하여야 한다.
- 교황의 대사의 진실에 반하여 설교하는 자는 파문되어 마땅하며 저주받아야 한다!
- 그러나, 욕망과 대사 설교가의 면허권에 반하여 경계하는 자는 축복받아야 하리라!
- 교황은 단지 대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훼손하고자 하는 자들에 대해 일갈할 수 있다.
- 그러나, 그보다 더 대사를 핑계로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훼손하고자 하는 자들에 대해 일갈하여야 할 것이다.
- 교황의 대사를 그리 엄청난 것으로 생각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거나 성모님을 범한다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 미친 짓이다.
- 우리는 대신에 교황의 대사는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없앨 수 없으며 여전히 유죄임을 말한다.
- 심지어 성 베드로가 지금 교황이라고 하여도 더 큰 은총을 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성 베드로나 교황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대신에 지금의 교황이나 그 어떤 교황도 그의 처분에 의해 더 큰 은총을 지닌다고 말한다. 지혜로서, 복음으로서, 권능으로서, 치유의 은총으로서, 기타 등등 … 이것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 4]에 기록되어 있다.
- (대사 설교가들이) 교황의 팔에 장식된 십자가와 자신들이 세운 것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고 하는 말은 모독이다.
- 그러한 말을 사람들 사이에 퍼트리고 다니는 주교와 부제, 신학자들은 다음에 답해야 할 것이다.
- 고삐 풀린 대사 설교가들은, 배운 사람이라 할 지라도, 중상모략 뿐만 아니라 평신도의 약삭빠른 질문에서조차 교황의 권위를 구해내기 어렵게 만든다.
- 지혜로서: -- “왜 교황님께서는 거룩한 사랑과 그곳에 있는 영혼들의 절박한 요청을 위해 연옥을 비우시지 않습니까? 성당을 지을 그 하찮은 돈을 쫓아 무한한 영혼을 그리 두시나요? 전자의 이유가 더 절박하고, 후자는 하찮은 것입니다.”
- 또한: -- “왜 죽은 자를 위한 위령 미사가 계속되지요? 그리고 왜 그들이 내는 헌금은 돌려주지도 않고 거절되지도 않나요? 이미 회복되었다고 하니 잘못된 기도인데요?”
- 또한: -- “무엇이 하느님과 교황의 새로운 신앙인가요? 불경한 자들이 돈으로 연옥을 빠져나와 하느님의 경건한 우방이 되는 동안, 그것이 필요한 경건하고 신실한 영혼은 그대로 있다고 하면, 그게 순수한 사랑에 무슨 득이 되겠습니까?”
- 또한: -- “왜 오래 전에 폐기되어 사문화된 교회법의 회개 조문이, 마치 살아있어 효력이 있는 것처럼, 이제 와서 대사를 부여하는 근거가 되었나요? ”
- 또한: -- “왜 오늘날 어떤 부자들보다 더 부자인 교황이 자신의 돈이 아니라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성당을 지으려 하나요?”
- 또한: -- “온전한 회개로 완전한 대사와 참여의 권리를 가진 이들에게 교황은 무슨 참여와 사면을 준다고 하는 건가요?”
- 또한: -- “만일 교황이 지금 하루에 한 번씩 하고 있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대사와 참여를 하루에 백 번씩 한다고 하면, 어떤 더 큰 축복이 교회에 내려오나요?”
- “교황이 사면으로 돈보다는 영혼의 구원을 살핀 이후, 왜 교황은 대사를 통한 사면을 중지한 거죠? 둘의 효력이 같은 건가요?”
- 이러한 논쟁을 억압하고, 오로지 평신도의 양심을 탄압하며, 합리적 이유로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와 교황은 적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그리스도교도의 불행을 자아낸다.
- 만약, 따라서, 고해 사제 특전 증서가 교황의 정신과 마음에 따라 설교된 것이라면, 이 모든 의심은 이미 해결된 셈이다. 아니,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평화를, 평화를”이라고 말하는 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떨어지라, 거기에는 아무런 평화도 없다.
-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십자가, 십자가”라며 말하는 저 모든 선지자들이 행하는 축복, 거기에는 어떤 십자가도 없다.
- 기독교인들은 형벌과 죽음과 지옥을 지나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훈육되어야 한다.
- 그리고 그들은 보장된 평화를 통해서 보다는 많은 고난을 통해서 천국에 들게 되리라 확신하여야 한다.[* 5]
역자 주
[편집]- ↑ confessionalia: 고해 성사를 받아줄 신부를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증명서
- ↑ Apostolic pardons, 교황에게 주어진 권한으로서 이루어지는 대사
- ↑ 마태오 복음 20장 16절, 공동번역을 따름
-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 28-29절(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직책을 두셨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요 셋째는 가르치는 사람이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은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 등입니다. 모두가 다 사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가르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 사도행전 14장 22절 (공동번역) 그들은 각 도시에서 신도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