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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정치기구〔서설〕[편집]

臨時政府-政治機構〔序說〕

임시정부는 3·1운동의 결과로 탄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3·1 민족운동은 단순한 민족적 저항운동만이 아니고 새로운 국가탄생을 위한 국가적인 창조운동이란 기능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민족적 저항위에서 탄생된 국가질서인 임시정부는 1910년 이전의 전통 왕조에로의 복고적(復古的)인 회복이 아니고 새로운 근대국가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전진 위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임시정부는 영토와 국민을 식민상태로 빼앗긴 채 독립된 주권을 강조하며 탄생되었다는 그 민족주의적인 성격과 아울러, 한민족이 최초로 세운 민주적 근대 정치질서였다는 근대국가적인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3·1 민족운동의 결과 그 모습을 보였던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국내의 한성정부(漢城政府), 노령(露領)의 국민의회(國民議會), 워싱턴의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서북간도(西北間島)의 군정부(軍政府) 및 기타 조선민국 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 등 가운데에서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건립되어 1945년(民國 27) 환국시까지 그 정통성을 지켜왔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세칭 上海臨時政府)를 가리킨다.

즉 조선민국 임시정부와 신한민국 임시정부는 기록에만 보일 뿐 그 기능은 발견되어 있지 않으며, 미주(美洲)의 한성임시정부는 의회(議會)를 갖지 않고 외교활동만 벌이다 사라졌으며, 노령의 국민의회는 상해임시정부와 그 통합교섭에서 양보하고 해산하였으며, 1919년 4월 23일 한성에서 국민대회 결과 생겨난 한성정부는 동년 9월 6일에 상해정부의 제3회 임시의정원회의(臨時議政院會議)의 결의로써 그 기능과 정통성이 상해정부의 그것 속에 통합·일체화되었다. 여기서 임시정부는 그 정통성이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독점·단일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임시정부의 정치기구는 1919년 4월 11일 최초로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과 같은 해 9월 11일 개정·공포된 대한민국헌법(大韓民國憲法)을 통하여 그 기능과 성격이 법제화되었다. 즉, 민국(民國) 1년 4월 11일 임시정부의 제헌의회의 성격을 지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 의하여 통과된 임시헌장상(臨時憲章上)의 정치기구는 우선 민주공화제란 기본질서(제1조) 밑에서 의정원(議政院)이란 우수한 입법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제 민주정치제도를 구현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기구는 입법부(臨時議政院)와 행정부(國務院)로 크게 구분되었으며, 국무원을 구성하는 총리이하 내무·외무·재무·법무·군무·교통·국무원비서장 7개부서는 모두 의정원에 의해서 선출되어, 의정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책임내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아직 정식으로 의회를 갖지 못하고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 이하의 정부조직과 평정관(評政官)의 제도와 같은 일종의 무임소 국무위원회만을 가지고 있던 한성정부의 약법(約法)내용에서도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제1조:단체는 민주제, 제2조:政體는 대의제). 그러나 아직 대통령과 같은 원수의 기능이 확립되지 않았던 당시의 체제에서는 의정원 의장이 국민의 대표로서, 그리고 국무원이 최고의 통치기구로서 그 실질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성정부를 통합한 후에 이루어진 대한민국헌법(1919년 9월 11일 공포, 8장 58조, 우리나라 헌법의 모태)을 통하여 임시정부의 정치기구는 입법(議政院), 사법(法院), 행정(國務院) 등이 완전히 분립된 근대적인 3권분립 정치제도로 확립되었다. 즉 행정부조직으로는 국가를 대표하며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국무원제도가 있었다. 대통령은 입법부인 의정원에 의하여 선출되나(12조) 그것은 다시 매년 의정원 정기회의의 소집권을 가짐으로써(22조) 행정부와 입법부간의 균형·견제를 취하게 하였으며 또 대통령은 국무총리 이하 내무·외무·군무·재무·법무·학무·교통·노동 등 총장·총판(總瓣) 등에 대한 임명권과 이들 국무원(國務員)들과 정부위원들(무임소 국무원)로 구성되는 국무원(國務委員會)을 주재함으로써(35조) 명실공히 행정부의 수반을 이루고 있었다. 입법부인 의정원은 각 지역별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는 의원(경기·충청·경상·전라·함경·평안도 및 中國領 교포 각 6인, 강원·황해 및 美洲 교포 각 2인)으로 구성되며 이 의정원은 입법, 예산심의, 고급공무원 임명동의 등 본래적 입법기능 외에도 국민의 청원심의 및 대통령·국무원 등에 대한 탄핵권(彈劾權) 등 광범한 의회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의회내의 발언에 대한 면책특권(免責特權) 등 근대의회제의 제도적 장점을 모두 구비하고 있었다.

이같은 정치기구는 1944년의 개정 약헌(約憲)에서는 더욱 의회중심적 내각책임제 성격으로 전진하고 있었으니, 여기서는 의정원이 민국의 최고권력기관(12조)으로 확립되고, 의원의 수는 250인으로 임기는 2년으로 결정되었고, 그 기능에는 종전의 입법부 기능 이외에 다시 위헌심사권(違憲審査權)과 선거위반에 대한 최고재판권까지(21조) 더욱 부여되고 있었고 여기에 대하여 행정부는 대통령이 사라지고 위원회와 주석(主席)으로 이루어지는 국무위원회로 개편되며, 이때 이들은 의정원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신임투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즉 의정원과 국무위원회의 엄격한 분리(겸직금지), 국무위원회의 주석 이하 전국무위원회에 대한 의정원의 선출권과 신임투표권, 의정원에 부여된 국민청원심의권·위헌심사권 및 선거재판권, 그리고 의정원 의장 및 부의장의 당적(黨籍) 금지 등의 특징에서 임시정부의 정치기구는 입법부 우월의 책임정치를 실현하려는 근대 책임내각제적 대의정치의 한국적인 한 실천과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崔 昌 圭>

의정원[편집]

議政院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기관. 1919년 4월 10일 프랑스 조계(租界)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개회된 제1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회의는 임시헌장(臨時憲章) 10개조를 의정(議定)·선포하였다. 임시의정원의 결의로써 선포된 임시헌장 제1조에서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란 기본질서를 채택했고, 제2조에서 의정원이란 입법기구가 중심이 되어 의회제 민주정치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임시의정원은 다음날인 11일에 각 지방 대표회를 개최하여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의장에는 이동녕(李東寧)을 선임, 이어서 임시독립사무소에서 선포한 관제를 개정하여 집정관제(執政官制)를 폐지하고 헌법을 개정하였다. 또한 임시 의정원은 4월 10일에 선출된 국무원을 개편하여 총리이하 내무·외무·법무·재무·군무·교통 등 6개부서를 선출하였고, 이들 6개부서는 모두 의정원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책임내각제적(責任內閣制的)인 성격을 띠었다. 동월 12일 의정원법을 제정하여 의원을 지방회에서 선거하기로 하고 내지(內地) 8도, 노령(露領), 중국령(領), 미주(美洲)의 11개 지방선거구로 나누어 지방선거회에서 각각 대의원을 투표·선출하였으며, 이어서 국내에 있는 국민대회에 대하여 임시의정원의 성립을 포고키로 결의하여 내외활동의 통일을 기하려고 했다.

한성정부(漢城政府)를 통합한 후에 성립된 대한민국임시 헌법에는 근대적인 3권분립(三權分立)의 정치제도가 확립되었다. 임시헌법에 의하면 의정원은 대통령을 선출하고 반면에 대통령은 의정원을 소집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어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의정원의 직권은 21조에 나타나 있는바 ① 일체의 법률안의 의결, ② 임시정부의 예산 의결, ③ 전국의 조세·화폐제도와 도량형의 준비 의정, ④ 공채(公債) 모집과 국고부담에 관한 사항 의결, ⑤ 임시대통령의 선거, ⑥ 국무원과 주외(駐外) 대사·공사의 임명동의, ⑦ 선전·강화(宣戰講和)와 조약체결의 동의 등 입법기관의 본래적 기능 외에도 국민의 청원수리(請願受理), 관리의 수회(收賄) 및 기타 위법사건의 사리(査理), 대통령의 탄핵(彈劾) 또는 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의정원의 의원은 내란·외환(外患)의 범죄를 저지르거나 현행범이 아니고는 회기중에 체포되지 않으며, 원내에서의 언론 및 표결에 관하여 원외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 특권을 가지는 등 근대 의회제도의 여러 가지 속성을 구비하고 있었다.

1944년에 개정된 헌법에서는 의회중심적인 내각책임제의 성격이 더욱 진전되어 의정원은 임시정부의 최고권력기관으로 확립되었고, 종래의 입법부의 기능 외에도 위헌심사권(違憲審査權)과 선거위반에 대한 최고재판권까지 부여되어 있었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의정원은 입법부 우월의 책임정치를 실시하려는 근대적 대의정치의 한국적인 수용 및 실천과정으로 성립되었던 것이다.

국무원[편집]

國務院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행정부. 대한민국 1년(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은 정부조직중 행정부인 국무원을 구성하여 입법부인 의정원과 더불어 정치기구를 둘로 크게 나누었다. 국무원의 구성은 총리 이하 내무·외무·재무·교통·군무·법무 총장과 국무원비서장의 7개부서로 나누어졌으며, 당시 국무총리로는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국무원은 임시정부의 통치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에 임시의정원은 관제를 개정하여 집정관제(執政官制)를 폐지하고 국무원의 구성중 국무원 비서장제도 폐지하였다. 이와 같이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의 차장제(次長制)를 개정하여 위원제를 실시하기로 하였으나 정부의 수반인 국무총리 이승만 및 국무위원의 부재로 국무원은 사실상 공백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내무총장으로 선임된 안창호(安昌浩)가 미주에서 상해로 와 임시정청(臨時政廳)을 설치하고 국무총리대리를 겸임하면서 차차 변화하였다.

한성정부(漢城政府)를 통합한 후 임시정부는 정부 개조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국무원 수반의 칭호라는 중대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차제에 근본적으로 정부를 개편하자는 논의가대두하여 국무원에서는 1919년 8월 28일에 임시헌법 개정안과 정부개조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그 결과 임시정부의 정치기구는 입법·사법·행정 등이 완전히 분립된 근대적인 정치제도로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 의정원이 주권행사의 주체였던 것이 이제는 대통령이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의정원에서 선임하였던 각원(閣員)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었다. 또한 내각이 개조되고 국무총리 및 총장·총판(總辦)들이 취임하여 정무를 보게 되었다. 국무원은 대통령 이하 국무총리, 내무·외무·군무·재무·법무·교통총장, 노동국 총판으로 구성되어 행정사무 일체를 처리하여 그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국무원에서 의정(議政)하는 중요사항은 ① 법률·명령·관제·관규(官規)에 관한 사항, ② 예산·결산 또는 예산외 지출에 관한 사항, ③ 국사에 관한 사항, ④ 조약 및 선전·강화에 관한 사항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