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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중국의 사상/제자백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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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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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子百家-思想

주(周)가 동으로 천도한 후부터는 종주권이 쇠약해짐에 따라 제후들이 방자하게 되어 약육강식이 잇달아 일어나자 중국 천하는 소란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 또는 선진시대(先秦時代)라 부르며,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제자백가를 음양가(陰陽家)·유가(儒家)·묵가(墨家)·명가(名家)·법가(法家)·도가(道家)의 6가로 분류하고, <한서(漢書)> <예문지>에 의하면 6가 이외에 종횡가(縱橫家)·잡가(雜家)·농가(農家)·시부가(詩賦家)·병가(兵家)·수술가(數術家)·방기가(方技家)의 8가를 추가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백가들은 모두 이 위기를 구출하려는 의도와 목적 아래서 일어난 것이며, 철학사상에 특히 기여한 것은 유가·도가·묵가·법가·명가 등이다.

유가는 유교, 유학, 공교(孔敎)라고도 불리며, 공자(孔子)를 시조로 중국의 전통적인 정교일치(政敎一致) 사상을 받들고, 인(仁)의 도덕을 최고 이념으로 하여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목적으로 하는 윤리학·정치학으로서, 동양 철학사상의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이다. 공자의 '인'은 인간심정에 고유한 자애(慈愛)의 마음을 확충하는 것, 즉 극기복례(克己復禮)로 완전한 인격을 이룬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으로서 그 발단은 친자지간(親子之間)의 사랑(慈愛)으로부터 시작하며, 나아가서는 형제, 가정, 사회, 국가, 인류에게까지 미치는 사람의 길(人道)이며, 이것은 사람의 본성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한다. 공자는 인도를 닦아서 천도(天道)에까지 이르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역설하였다. 공자의 인(仁)은 부처의 자비(慈悲)나 예수의 박애(博愛)와 비슷한 내용을 갖고 있는 개념이지만, 그 도(道)는 어디까지나 윤리로서의 인도(人道)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공자는 종교인과는 달리 현생(現生)의 삶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공자와 자사(子思)를 이은 맹자(孟子)는 공자의 도를 조술(祖述)하고, 성선설(性善說)에 의한 4덕(四德)과 4단(四端)을 역설하였다. 즉,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고유한 덕이 있다고 한다. 또 선천적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을 주장하고, 또 인의의 정치 즉 왕도(王道)로써 치국 평천하를 이룰 것을 강조하였다. 전국시대 말에는 순자(荀子)가 나와 역시 공자를 이었으며, 특히 예(禮)로써 혼란한 천하를 질서있게 바로잡으려 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맹자와 순자는 도덕뿐만 아니라 경세사상을 부르짖음으로써 왕도정치에 있어 인민의 경제적 생활기반을 마련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유가의 경전(經傳)으로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4서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5경이 있다.

도가는 일명 '황로학(黃老學)' '노장학(老莊學)'이라고도 한다. 도가의 시조(?) 노자(老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함으로써 유가의 예악(禮樂), 형정(刑政)의 형식주의를 반대하고 어린 아이의 천진성으로 복귀하여 무위자연의 사회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노자의 이른바 도덕(道德)은 보통 말하는 도덕(Virtue)이 아니고, 유가의 이른바 인의(仁義)라는 도덕의 상위개념으로서 도(道, Tao)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는 형이상학적 본체임과 동시에 인성론(人性論)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뒤이어 전국시대에 장자(莊子)가 나와 도가철학의 인식론적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만물제관(萬物齊觀) 시비양행론(是非兩行論)을 고조하여 가치의 전환을 부르짖음으로써 평등·자유·무욕을 강조했다. 열자(列子)도 노자를 이어 형이상학적으로 기화(氣化)를 상론하고, 허무청정(虛無淸淨) 전성보전(全性保眞)을 주장함으로써 은둔주의로 기울어졌으며, 이 계통에 있는 양주(楊朱)는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하여 이기쾌락주의(利己快樂主義)적인 독선에 빠졌다. 유가가 중국 고래의 전통적인 적극적 면을 계승하여 형성된 것과 반대로 도가는 그 소극적 면을 이어 무위자연의 사상체계를 이룬 것이다. 후세의 도교(道敎, Taoism)는 후한(後漢) 때 노자를 천존(天尊)으로 받들어 조직한 종교이지만, 도가 자체는 종교가 아니다.

묵가는 묵자(墨子)를 시조로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유가의 형식주의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천(天)이 만민을 겸애(博愛의 뜻)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도 서로 겸애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리사욕을 타파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절검(節儉)과 근로(勤勞)를 내세웠다. 묵가는 천귀(天鬼)사상을 중심으로 종교적 색채를 띠었으며, 또 3표(三表) 논리로써 경험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이 경향은 후세 별묵(別墨)이라 불리우며, 논리학파의 사공파(事功派)로 분파되었고, 사공파는 다시 전도파(傳道派), 실행파(實行派) 및 기타로 나누어졌다. 실행파는 묵자의 역행주의(力行主義)를 이어 허행(許行)·진상(陳相) 등의 철저한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무위자연 사상으로 흘렀다.

법가는 관자(管子)를 시조로 신불해(申不害)와 상앙을 거쳐 한비자(韓非子)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법가는 정치철학과 그 실천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어 천하통일을 도모하려는 학파다. 관자는 공리(功利)와 법치(法治)를 겸한 사상가이며 또 실행가였다. 신불해는 패도(覇道)의 술(術)에 밝고, 상앙은 패도의 법(法)에 뛰어났으며, 이 술과 법은 한비자(韓非子)에 이르러 종합되어져 형명법술(刑名法術)의 학으로 완성되었다. 한비자의 학은 유·도·법(儒道法)의 종합으로써 이루어졌다.

명가는 논리학파로서 등석(鄧析), 혜시(惠施), 공손룡, 윤문(尹文) 및 별묵(別墨) 등이 있다. 명가는 개념 즉 명(名)과 대상 즉 실(實)의 불일치를 교정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등석은 양가의설(兩可之說) 즉 이율배반율(二律背反律)과 무궁의 사(無窮之辭)로써 유명하며, 혜시는 변설(辯說)로써 만물평등을 주장했으며, 공손룡은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으로 유명하다.

이 밖에 강병책(强兵策)으로 손무(孫武), 오기(吳起)가 걸출하였고, 손빈, 범려도 유명하였으며, 귀곡자(鬼谷子)에게서 배운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웅변술로써 합종연형(合縱連衡)을 주장했다. 그리고 자가독선(自家獨善)을 고집한 은자(隱者)들로서 신선도를 닦는 신선가(神仙家), 음양5행을 논하는 음양가(陰陽家), 방기(方技), 술수(術數) 등이 있었다.

<裵 宗 鎬>

유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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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家-思想

유가는 본래 춘추시대말부터 전국시대에 걸쳐서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한 학파에 불과했으나 한왕조(漢王朝)의 권력 안정과 함께 그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서 중시되어 중국의 정치사상 중에서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에 왕조 정치 체제가 존속한 2천년 동안 유학은 국가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교학(敎學=儒敎)으로서 정통사상의 지위를 계속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유학은 각 시대의 정치 상황이나 다른 사상과는 관계에 대응하여 그 내용을 변화·전개하고 있다.

'유(儒)'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유약(柔弱)을 의미한다든가 '수(須=鬚, 턱수염)'와 통하여 노인(老人)을 의미한다든가의 말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묵가(墨家)나 법가(法家)와 같은 타학파의 사람들이 이하 서술하는 것 같은 성격의 학파를 가리켜서 붙인 명칭인 듯하다.

유가사상의 특질을 요약하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學), 환언하면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며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己)를 수(修)한다'함은 개개인에 있어서의 도덕성을 신뢰하여 그것을 정직하게 신장(伸長)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은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유가에서는 자기의 도덕성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사람을 군자라 하여 존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소인이라 하여 배척했다.

'덕(德)'의 양성을 위해서 유가는 '배우는'일과 '아는'일을 중시한다. 그 학습 대상은 궁정(宮廷)같은데 보존되어 있는 옛 예악의 관례나 고사(故事)를 전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이다. 그것들의 전통을 배움으로써 그 형식에 포함된 고인(古人)의 정신을 회득하려 한다. 따라서 전통적 형식을 (保守)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해 나가려고 한다.

그 점은 '천(天)'이나 '귀신(鬼神)'(死後의 靈魂)에 대한 태도에도 일관(一貫)되어 있다. 인간의 도덕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인력(人力)을 초월한 '천(天)의 위력'이나 '귀신(鬼神)'의 재앙 등은 무시해야 할 것이나 유가는 전대 이래의 그것들에 대한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 '천(天)'은 역시 운명을 지배하는 것이요, 귀신은 공경하나 멀리 해야 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렇지만 유가의 이상은 이러한 '나(己)를 닦는다(修)'는 일만으로는 안 된다. <대학(大學)>에 있는 것과 같이 '몸을 닦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집을 가지런히 하고(齊家),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천하를 평(平)하게 하는 데(平天下)' 도달해야 한다. 필경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 학문의 궁극의 목표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은 어디까지나 '치자(治者)'를 위한 학(學)이다. '치자'라는 것을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료를 포함한다. 그러한 '치자'의 자격을 갖는 계층에 대하여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백성이 다스려질까를 말하는 학문이 유학이다. 그 경우 중시된 것이 법률에 의하여 백성을 엄하게 통치하는 것보다는 교화에 의하여 저절로 백성을 치자의 의욕(意慾)하는 방향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한 교화의 측면을 구비한 학설을 자칭할 때 우리들은 대체로 '유학(儒學)' 이라는 말보다는 '유교(儒敎)' 라고 하는 말을 쓴다. 따라서 '교화(敎化)의 학(學)' 으로서의 유교는 결코 개인의 정신적 구제를 목적으로 삼는 종교와는 다르다.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구극(究極)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유가는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권력을 처음부터 무시한다거나 그로부터 도피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치자' 계급의 일원이 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때에도 정치가 유가류(儒家流)의 교화의 선(線)에 따라서 행하여지는 일을 기대한다. 그런 점에서 너무 무도한 정치에 대하여는 용감하게 비판을 가하는 일도 있으며 신구왕조의 교체를 '혁명(革命)' 이론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역할도 과감히 한다.

이상과 같은 성격을 갖는 유가사상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있어서는 당연히 타학파의 맹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혈연관계를 중시하고 예악 등의 의례를 존중하는 학설은 겸애(兼愛)와 상현(尙賢)·비악(非樂)·절장(節葬) 등을 주장하는 묵가(墨家)에 의하여 비판되고 인간의 도덕성에 신뢰의 기초를 두는 학설은 군주권력의 일원적 강화(一元的 强化)를 지향하는 법가(法家)에 의하여 배격되었다. 또 '치자'의 일원이 되어 이상적 정치 실현에 광분하는 태도는 인위적인 노력의 한계나 허무함을 깨달은 도가로부터 조소를 받았다. 그러한 비판이나 조소 속에서 전통과 중용(中庸)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유가였다고 할 수 있다.

유가사상은 또한 타학파의 비판·공격에 견디기 위하여 타학파의 학설의 장처(長處)를 섭취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예컨대 전국말(戰國末)의 순자(荀子)는 법가나 도가의 이론을 교묘하게 유가의 체계 속에 받아들였으며, 한대(漢代)의 동중서(董仲舒)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나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을 대폭적으로 채택하여 시대의 요청에 순응하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정정(政情)의 불안정이 계속된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에는 유가사상은 불교나 노장사상(老莊思想)의 공격을 받았지만 후에 불(佛)·노(老)에 대한 유가의 '도통(道統)'의 자각이 당대(唐代)중기에 일어나 송대(宋代)에 이르러 불·노의 장점을 취하여 신유학(新儒學=성리학 性理學)을 성립시켰다. 청말(淸末)의 중국이 위기에 빠졌을 무렵 서양의 입헌군주제(入憲君主制) 등을 공양학(公羊學)의 체계에 포괄해 설명한 캉유웨이(康有爲)의 학설이 출현한 것도 이상과 같은 유가사상의 자기중심적인 전개의 한 양상이다.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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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

중국 춘추시대의 노국(魯國)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연대기를 공자가 비판·수정한 책으로 춘(春)과 추(秋)는 1년을 의미한다. 노나라 은공(隱公)의 즉위 원년(전 722)에서 시작하여 애공(哀公) 14년(전 481)에 이르는 12대 240여 년간을 취급한 것이 그 내용이다. 이 기간에 노나라를 중심으로 일어난 여러 가지 정치사건, 예컨대 각국(各國)간의 전쟁이나 회맹(會盟), 중요 인물의 내왕·사망은 물론 일식·홍수(洪水)·대설(大雪) 등의 기상이변 현상도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대에는 노나라 이외의 진(晋)이나 초(楚)에도 자국(自國)의 사관의 기록이 있었던 것 같으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노(魯)의 <춘추>뿐이다. 그것은 바로 후세의 유학의 주석가(註釋家)들에 의하여 <춘추>가 역사에 대한 공자의 도덕적 비판이 담겨 있는 책으로서 존중되었으며 한대 이후에는 오경(五經)의 하나로 손꼽히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춘추>의 본문은 지극히 간결한 것이다. 예를 들면 모두(冒頭)에는 '은공 원년 춘왕정월(隱公元年春王正月)'이라는 일부(日附)만이 있을 뿐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양씨(公羊氏)의 해석을 모은 <공양전(公羊傳)>을 보면 '원년이란 무엇인가? 임금의 즉위의 처음해라는 것이다. 봄이란 무엇인가? 일년의 처음이다. 왕이라 함은 누구인가?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왜 왕의 정월이라고 하는가? 일통(一統)의 의의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문답체의 해설을 상세히 전개하고 있다. <춘추>의 간결한 기사 속에 들어 있는 공자(孔子)의 진의를 해명하는 것이 <공양전>의 의도다. <춘추>에는 이 외에 <곡량전(穀梁傳)> <좌씨전(左氏傳)>이 현재에 전해지고 있어 <공양전>과 아울러 <춘추3전(春秋三傳)>이라고 칭한다. <춘추> 경문도 이들 3전 속에서 각기 전해져 왔다. <곡량전>은 대체로 <공양전>과 비슷하여 <춘추>의 서법을 논리적으로 해설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으나 <좌씨전>만은 성질을 조금 달리한다. <좌씨전>(약하여 <左傳>이라고도 한다)에도 경문의 서법(書法)의 해설이 있으나 그의 특색은 풍부한 춘추시대의 사화(史話)에 있다. 동시대의 사화를 각국별로 편집한 <국어(國語)>라고 하는 서책에 대하여 <좌씨전>은 그러한 사화(史話)를 연대순으로 배열하여 <춘추>경문의 '전(傳)'의 형식으로 정비하고 있다. 그 작자는 공자와 동시대의 좌구명(左丘明)이라는 설이 있으나 믿어지지 않는다. 전국시대 중기경에 위(魏)의 사관 좌씨(左氏)인 그 누구에 의하여 <좌시전>의 원형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말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현재의 <좌씨전>에는 전한말(前漢末)의 유흠(劉歆)등이 추가 정리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춘추>경문만으로는 모를 사건의 배경이 <좌씨전>의 서술로써 파악되는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한다.

선공(宣公) 2년(전 607)의 조(條)에 '추구월 을축(秋九月乙丑)진(晋)의 조돈이 그의 임금 이고(夷皐=靈公)를 죽였다(殺)'라는 경의 기사가 있다. <좌씨전>에 의하면 "진의 영공의 무도함을 간쟁(諫爭)한 조돈이 영공에게 살해되게 된 것을 피하여 국도(國都)에서 망명하였을 때 일족인 조천(趙穿)이 영공을 암살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진의 사관은 조돈이 그 임금을 시(弑)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조돈이 그것에 이의를 진술하자 사관은 "재상이라는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국군(國君)을 시(弑)한 일족(一族)의 조천(趙穿)을 주살하지 않는 것은 그와 일미(一味)임을 의미한다"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중국 고대의 사관에는 사실 그것의 서술보다도 도의적 책임의 소재를 분명하게 하는 책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노국 사관의 기록인 <춘추>에 손을 대어 이른바 '필주(筆誅)'를 가하여 세상의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두렵게 하였다고 이르는 것도 이와 같은 사관의 전통에 기여한 것이라고 하겠다.

<공양전>의 내용은 전한시대(前漢時代)에는 동중서(董仲舒), 후한시대에는 하휴(何休)에 의하여 확대해석과 동시에 추가 정리되어 '공양학(公羊學)'으로서 성립하였다. 단지 '공양학'은 그 후의 중국 학술사상으로는 떨치지 못하였고 청조(淸朝) 말년 중국의 위기에 즈음하여 그의 혁명설 등이 주목되어 부활하였다. 한편 <좌씨전>은 진의 두예(杜預)에 의해 주(註)가 집성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국어(國語)>,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과 아울러 한문학(漢文學)의 고전(古典)으로 고래로부터 애독되어 오고 있다.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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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 (기원전 551/552∼전479)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 유교의 조사(祖師). 성은 공(孔),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孔子) 혹은 공부자(孔夫子)는 그에 대한 존칭이다.

공자의 인물상은 전(前) 2세기의 한대 이후 유교를 정치의 원리로 앞세운 왕조 정치가 2천년에 걸쳐 중국에서 계속되는 동안에 현저하게 왜곡되어 왔다. 우리들은 그와 같이 공자를 성인(聖人)화한 유학자들의 부가물(附加物)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공자의 본래의 인물과 생애를 바로 알 수 있다.

공자의 전기로서 가장 오래 되고 또한 종합되어 있는 것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살고 있던 때는 아직 유교가 정치의 구석구석에까지 완전히 행해지지 못한 시대였지만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묘사된 공자상은 일종의 성인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제사의 흉내를 내면서 놀았다든지 젊었는데도 고사(故事)에 통하였다든지 주(周)에 가서 노자와 회견하였다고 하는 등 신변에서부터 이미 공자를 특이한 인물로 꾸며서 치켜 세우려는 점이 농후하다. 50세경이 되어 노국의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권력자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하였다든지 노국의 정공(定公)과 제(齊)의 경공(景公)과의 사이에 열린 협곡(夾谷) 회의에서는 제측(齊側)이 내놓은 내이(萊夷)의 악인(樂人)을 물리쳤다고 하는 사적 등은 <순자(荀子)>가 묘사한 성인공자상(聖人孔子像)과 공통통하고 있다. 특히 사마천의 경우에는 공자가 노를 떠나서 14년간이나 제국을 유랑한 시절에 진(陳)·채(蔡)나 광(匡)의 지방에서 재난에 봉착한 것을 중시하고 있다. 불우한 속에서 자기의 사명감을 잃지 않은 공자에게 느낀 사마천의 공감이 거기에 담겨져 있다.

사실 그와 같은 공자 성인화의 경향은 이미 전국(戰國) 중기의 맹자에서 시작되고 있다. 맹자는 자기 자신이 주의 문왕(文王)으로부터 공자에게 전해진 도를 계승하는 자라고 자임하고,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었기 때문에 세상의 난신(亂臣)·적자(賊子)가 두려워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맹자가 그와 같이 공자를 현창(顯彰)한 것은 그만큼 공자(또는 유가)의 평가가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묵가는 유가의 가족 혈연주의(家族血緣主義)·예악 중시설(禮樂重視說) 등을 부정하고 공자를 공모(孔某)라고 멸칭하여 그의 비행을 폭로하고 있다. 또 세상의 질서를 예악에 의하여 회복하려고 하는 공자 일문(孔子一門)의 움직임을 헛된 노력이라 하여 냉소하는 기풍도 장자 계통의 도가에서는 일반적이었다. 그와 같은 풍조속에서 맹자는 홀로 안간힘을 다해 공자의 선양에 노력한 것이다. 그런 것에 비교하면 공자 일문의 어록집(語錄集)인 <논어(論語)>에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성인화되지 않은 공자의 생생한 인격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 많다. 공자는 자기의 생애를 돌이키면서 자기의 정신적인 성장의 자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15세에 학문에 뜻을 세웠고, 30에 섰고 40에 혹(惑)되지 않고 50에 천명(天命)알 알고 60에 이순(耳順)하고 70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쫓아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공자는 나면서 곧 성인이었던 것은 아니요, 그를 둘러싼 국가나 가정의 환경 속에서 의혹하고 번뇌하면서 점차로 자기 신념을 만들어 쌓아 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가 35세 때 노의 도읍인 곡부(曲阜)에서 대사건이 일어났다. 군주인 소공(昭公)이 권력자인 귀족 계평자(季平子)를 타도할 군사를 일으켰으나 소공측이 패하여 소공은 이웃나라인 제(齊)에 망명하게 되었다. 계평자와 소공의 대립 상태는 소공이 망명지에서 사망할 때까지 8년간 계속되었지만, 춘추시대의 각국에서 빈발한 이러한 국군(國君)과 유력한 귀족과의 분쟁사건에 대하여 과연 공자는 어느 쪽이 정당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일까. 공자(孔子)는 아마도 명분상으로는 국군인 소공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만, 실제로는 이와 같은 정권의 분열상태 가운데 곤혹(困惑)하고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이러한 정치적 격동과 긴장을 체험하는 가운데 공자에게는 독자적 신념이 형성되어 갔다. 그것은 효(孝)·제(悌)라고 하는 육친간의 감정을 인간관계 일반의 기본에 놓고 예양의 정신을 정치의 원리에까지 높이면 목전의 정치나 사회의 혼란한 질서가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이상(理想)의 정치를 공자는 주(周) 초기의 주공의 정치속에서 발견했다. 공자는 이와 같은 자기의 신념을 노에 돌아온 만년에 자기의 주위에 모인 제자들에게 설명하였다. 제자들의 다수는 전고(典故)에 능통한 노인으로부터 제도나 예의에 관한 지식을 얻은 후 그의 추천에 의하여 유력한 정치가의 주변에서 벼슬을 하려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은 지식 그것보다도 정치에 대한 견식이었고 난세에 처(處)하는 태도였다. 그는 의(義)를 높이 보아 이상적인 군주를 구하는 군자(君子)를 이(利)로 인해 움직여지는 '소인(小人)'과 엄격하게 분별한다. 따라서 군자와 소인과의 사이에는 도의적 차이가 있을 뿐으로 출신 계층이나 지식의 다소의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의 교설의 특징은 이와 같이 제자들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을 요청한 점에 있다. 춘추시대 중기경까지의 씨족제에 있어서는 사람들의 행동 규범은 족(族)이라고 하는 혈연의 틀에 묶여 있었다. 그러한 혈연적인 주박(呪縛)으로부터 효·제를 중심으로 한 인(仁)의 개인적 도덕적 분리한 곳에 공자의 교설의 의의가 있다. 물론 그 '인도(人道)'는 은(殷)·주시대 이래의 '천(天)'·'명(命)'·'귀신(鬼神)' (사후의 영혼)에 대한 신앙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소위 천도의 밑에 일정한 '인도'의 영역을 설정하고 있었다.

공자의 교설의 대상은 치자의 일원이 될 가능성을 가진 선비 계층이었다. 당시의 선비는 본래의 귀족에서 몰락한 자, 서민에서 대두한 사람 등 각층의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치자가 될 가능성을 갖는 점에서 피치자인 백성과는 구별된다. <논어(論語)>중에 '백성은 말미암게 할 뿐이요 알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도 이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백성은 결코 정치의 주체가 아니고 객체에 불과하였다.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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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전한 어록집(語錄集) 20편이다.

<논어>의 명칭에 대해 '공자와 제자와의 대화'(=論)와 '공자의 말(=語)'로 된 것을 표현한 것이라든가 어(語)를 논(論)되었을 때에는 별다른 명칭이 없었으나 후한 시대 이후에 '논어'라 하여 경서에 준한 취급을 받았고, 더욱이 송대 이후는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중시되어 우리나라나 일본에도 지대한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이후는 예수회 선교사를 통하여 유럽에도 소개되었다. 다만 유교의 성전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생의 지혜를 뜻깊게 말한 고전으로서 널리 애독되고 있는 책이 <논어>이다.

<논어>에서 가장 많은 것은 '자왈(子曰)'을 앞세운 공자의 말이다. 예컨대 개권(開卷) 첫째에 "공자 가라사대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데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대목이 있다. 학문의 목적은 입신출세(立身出世)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의 충실을 얻는 데 있다는 공자 일문의 학문 정신을 간결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밖에 "공자 가라사대 아침에 도를 얻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라든가, "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대의(大義)를 밝히고 소인은 이(利)를 밝힌다"는 따위의 깊은 인생관찰이 뒷받침된 명언(名言)들도 많이 나온다

다음으로 제과들과의 문답형식의 글들도 있다. "한마디의 말로써 종신토록 행할 것이 있겠습니까?"라는 자공(子貢)의 물음에

"곧 서(恕)인저,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지니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말하는 서(恕)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충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공자 일문에서 중시한 "타인을 생각해 준다"는 의미이다. 또 공자의 대답은 같은 질문, 예컨대 '효(孝)란 무엇인가' '인(仁)이란 무엇인가' '정치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묻는 인물과 상황에 따라 표현을 달리해서 대답해 주었다. 질문자는 이른바 제자들에 한정되지 않고 노(魯)의 군주(君主) 애공(哀公)이나, 실권자이자 귀족인 계강자(季康子) 등도 등장한다. 그 중에는 그러한 문답 형식을 더욱 정교하고 충실하게 묘사한 300자를 넘는 장편(長編)도 있다. <논어(論語)>에는 또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臣)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와 같이 공자가 죽음 등에 대하여는 언급하려 하지 않은 태도를 간결하게 서술한 장(章)이 있다. 특히 공자의 구체적인 동작이나 생활습관이 종합 서술되어 있는 것이 <향당편(鄕黨篇)>이다. 공자의 말하는 방법, 보행하는 방법, 입는 방법, 먹는 방법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자(有子), 증자(曾子)와 같은 제자들의 말도 기록되어 있다. "나는 하루에 나의 몸을 세 번 살핀다. 남을 위하여 괴함을 불충(不忠)하지 않았는가, 붕우(朋友)와 사귐에 신실치 못하지 않았는가, 충분히 익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친 일은 없었는가" 라고 한 유명한 말도 증자의 말이다. 또 자공(子貢), 자장(子張), 자하(子夏) 등의 말도 <자장편(子張篇)>에 기록되어 있다.

<논어>의 각 편(篇)들은 무질서하게 편집·배열되었다고 하는 극단적인 주장들도 있으나, 체계적인 것은 아니라 하여도 20편의 각편에는 어느 정도의 주제가 인정될 경우가 있으므로 역시 처음에는 편(篇)마다 묶여졌고 그것이 차츰 집적(集積)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팔일편(八佾篇)> 에는 예에 대한 말이 많고 <이인편(里人篇)>에는 인(仁)에 대한 말이 많고 <공야장편(公冶長篇)> <옹야편(雍也篇)>은 제자의 인물평, <향당편(鄕黨篇)>은 공자의 동작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다만 편(篇)의 이름은 각편의 모두(冒頭)의 두 글자 내지 세 글자를 기계적으로 취한 것뿐이어서 편명과 내용과는 관계가 없다.

각편의 형식과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편의 성립한 연대에 전후의 차가 있음을 상정(想定)하는 연구도 더러 있다.

어떻든 전한(前漢)의 초기경에는 현재의 모양으로 종합된 '논어'가 존재하지 않았음은 확실하며, 후한의 장우(張禹)나 정현(鄭玄)의 교정을 거쳐 현재의 20편본이 성립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논어>의 주(註)에는 고주(古註)·신주(新註)의 두 가지가 있다. 위(魏)의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 10권이 있고, 양(梁)의 황간(皇侃)이 거기에 <의소(義疏)>를 더하였다. 한편 신주(新註)는 송(宋)의 주자(朱子)가 쓴 의 <논어집주(論語集註)>가 대표적인 것으로 단순한 문자의 해석이 아니고 공자의 정신의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명대(明代) 이후 주자학(朱子學)이 과거시험의 정규 시험과목이 되면서 주자의 주(註)를 다시 해설한 주석본이 많이 출현했다. 고·신 양주를 포괄한 것으로서는 유보남(劉寶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가 있다.

공문의 2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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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門-二流派

공자의 문인은 많아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만도 70명을 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제자로는 자로(子路), 염유, 유약(有若), 안회(顔回), 중궁(仲弓), 자공(子貢), 자하(子夏), 자유(子遊), 증자(曾子) 등이 손꼽힌다.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사후에 분파된 것 같다. <한비자(韓非子)>의 <현학편>에 의하면, 유가에는 자장(子張), 자사(子思), 안씨(顔氏), 맹씨(孟氏), 칠조(漆雕), 중량씨(仲良氏), 손씨(孫氏), 악정씨(樂正氏) 등의 8파(八派)가 있었다. 또 <맹자>에 의하면 공자 몰후(沒後)에 자하, 자장, 자유의 3인이 상의하여 유약을 스승의 후계자로 하려고 하였을 때 증자가 강력하게 반대한 일이 기록되어 있어, 이 8파는 다시 2파 즉 증자의 파와 자유, 자하의 파로 나누어진 것 같다.

증자는 공자 사후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공자 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켜 씨족제하(氏族制下)에서의 도덕규범으로서의 효를 중시하였다. 그의 생각을 이어받은 사람이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이다.

자사는 '천(天)'이라는 종교적 관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와 도덕을 규제하였다. 그것을 '성(誠)'이라고 이름 지어 철학의 중심에 두고 만물의 근본인 '도(道)'와 일치한다고 했다. 자사의 학통을 계승한 것이 맹자(孟子)이다.

맹자는 인(仁)·의(義) 라는 것을 주장하지만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자사와 한 가지로 종교적 천(天)과 밀접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 인간성의 이해, 즉 성선설(性善說)의 제출이다. 그의 정치론의 목적은 당시 붕괴되어 가던 봉건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후에 송대가 되어 선진 유가(先秦儒家)의 도통(道通=유학 전도의 계통)이 강조됨으로써 공자(<논어(論語)>), 증자(<대학(大學)>), 자사(<중용(中庸)>), 맹자(<맹자(孟子)>)라고 하는 계보가 중시되어 4서의 성립을 보았다.

한편 자유, 자하의 파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예(禮)라고 하는 외적 규범을 중시한 일, 그리고 그 양자에도 차이가 있음을 순자도 지적하고 있다. 유가의 자사, 맹자(孟子)를 통렬히 비판한 사람이 순자인데, 그는 자궁(子弓-子遊라고 하는 말도 있다-의 학통을 이은 것 같고, 또 인간성의 이해에 있어서 종교적 천(天)의 속박에서 탈각하여 성악설을 제출하였으며 예를 강조하였다. 순자의 사상은 송 이래 이단적인 학이라 하여 부당하게 취급되어 왔으나 근년에 이르러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선진 유가의 두 줄기의 흐름은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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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子 (기원 전505∼전436)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이며 유가(儒家)에 속한다.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 증자(曾子)는 그에 대한 존칭이다.

남무성(南武城) 출신. 공자의 만년의 제자로서 공자보다도 46세 연하이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하여 공자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의 언행은 <논어>에 몇 조목이 보이며, 또<대대례기(大戴禮記)>의

증자10편 및 <효경(孝經)>은 그의 저작이라고 인정된다.

그는 당시 진행 중에 있던 봉건제의 붕괴를 제지시키기 위하여 '효(孝)'라고 하는 씨족제로부터 생긴 도덕을 강조하였다. "하루에 세 번 내 몸을 살펴본다"고 하여 공자 사상의 근본을 충서(忠恕)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여 공자 사상의 계승자로서의 그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증자의 학통은 자사, 맹자에로 발전하여 유가의 도통을 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다하였다.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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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

원래 <예기(禮記)>의 1편이었으나 송대가 되어 유교의 기본 자료의 하나로서 주목되었다. 특히 주희(朱憙)는 <논어> <중용(中庸)> <맹자>와 이 <대학>을 4서(四書)라 하여 공자 <논어(論語)>-증자 <대학(大學)>-자사 <중용(中庸)>-맹자<맹자(孟子)>라고 하는 선진 유가의 도통을 구성하였다.

주희(朱憙)는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지어 내용을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경은 공자의 말이고 전은 증자가 그것을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대학>을 증자의 저작이라고 하는 데 별달리 논증된 바 없으며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대학>의 작자를 맹자의 학통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순자의 학통에 소속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서로 엇갈려 정설은 없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맹자의 학통에 소속하는 사람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어떻든 이 대학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기부터 한대 초기 사이에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그 내용은 학문의 목적과 순서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다. 목적으로는 '명덕(明德)을 밝게(明)한다, 백성과 친한다(親民), 지선(至善)에 머무른다(止)'는 3덕을 든다. 그에 이르는 순서로서 '앎에 이름(致知)은 사물을 구명함(格物)에 있고, 사물이 구명된 뒤에 앎에 이르고 (知至), 앎에 이른 뒤에 뜻이 진실되고(意誠), 뜻이 진실된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心正),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이고(身修), 몸이 닦인 뒤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家齊), 집안이 가지런해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國治),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태평케 된다(天下平)' 고 하여, 인식론(격물치지)으로부터 도덕론(성의·정심·수신=誠意·正心·修身)으로, 다시 정치론(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으로 나아가는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 여덟 항목에 대하여 <시경(詩 )>이나 <서경(書 )> 등의 고전(古典)을 가지고 해설하고 있으나, 요컨대 이 책의 목적은 인식론(認識論)과 도덕론과 정치론과의 체계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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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思 (기원 전 492∼전 431)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며 유가에 속한다. 공자의 손자, 아버지는 백어(伯魚). 이름은 급(伋), 자사(子思)는 자이다. 공자의 고제(高弟)인 증자의 유심주의 철학(唯心主義哲學)을 이어받았고, 그것이 맹자에게 이어져서 선진 유가(先秦儒家)의 유력한 한학파를 형성하였다. <중용(中庸)>은 그 자신 혹은 그의 학파의 저작으로 인정된다. 그 밖에 <자사자(子思子)> 23편이 그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나 산실(散失)되어 현재는 그것이 어떠한 책인지 분명하지 않다.

<중용>에 의하면 그는 '천(天)'이라는 주대 이래의 종교적 관념을 이어 발전시켰다. 특히 '성(誠)'이라는 생각을 도입해 그 체계의 중심을 두고 유심주의 철학을 구성하여 유가사상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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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

원래 <예기(禮記)> 중의 1편이었으나 남북조(南北朝) 이후 불교가 성해지는 데 따라서 유가측에서도 철학적 체계를 필요로 하므로 이때부터 유학자들이 이 책에 주목하게 되었다. 더욱이 송대에 들어와서는 주희(朱憙)가 자사(子思)의 저작으로 보아 <논어(論語)>, <대학(大學)>, <맹자(孟子)>와 함께 4서(四書)의 하나로 하는 동시에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지어 선진(先秦)유가의 도통(道通)을 알 수 있는 기본 자료로 간주한 이래로 중요시되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자사(子思)가 송에서 재난을 만났을 때 중용(中庸)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이 자사 혹은 그 학통에 속하는 사람에 의하여 저작된 것이라는 견해가 현재 거의 정론으로 되어 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자사의 저작으로서 <자사자(子思子)> 23편이 있고 이 <중용>은 현재 <예기>에 수록되어 있는 '표기(表記)' '치의(緇衣)' '방기(坊記)' 등과 그 <자사자(子思子)>의 일부분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주희(朱憙)는 <중용>을 33장으로 나누어 전체를 일관된 저작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주로 중용이라는 것에 대하여 말한 제2장으로부터 제20장 처음까지가 <중용>의 본문이고, '성(誠)'이라는 것을 말한 제1장 및 20장 이하는 본문을 해설한 것이라고 한다. 제2장의 "군자는 중용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때에 알맞게 하고, 소인의 반중용은 소인으로 기탄(忌憚)이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중용이라는 도덕이 군자(지배계급)의 것임을 보이고 있어 그 계급적인 입장을 알 수 있다. 중용이란 한편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천(天)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에 좇는 것을 도(道)라고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이른다'(1章) 라고 한 것과 같이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주대(周代) 이래의 종교적 관념인 천(天)과 밀접하게 관계지어 설명하고 있다. 다시 "성(誠)은 하늘의 도(道)요, 성(誠)하려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20章) '성(誠)' 은 물(物)의 종시(終始)이니, 성(誠)하지 않으면 물(物)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성함을 존귀하게 여긴다'(25章)라고 하여 성을 그 체계의 중심에 놓았다.

성(誠)이라 함은 인간의 심중에 있어서 희로애락으로서 작용을 나타내기 이전의 완전한 도덕이다. 그것이 인간은 물론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에 갖추어졌다고 본다. '성(誠)'이 "물건을 이룬다" 고 하는 것은 분명히 객체적 사상을 그 아래에 두려고 하는 것이다. 도 "성(誠)은 면(勉)치 아니하여도 맞고, 사(思)치 아니하여도 얻어 조용히 도(道)에 맞으니(그러한 사람이) 성인(聖人)이라"고 하여 성(誠)이 도(道)와 일치함을 말하고 '중용'과 '성'을 관련시켰다. 요컨대 인간성의 이해에 있어서, 천(天)의 관념에 기본하여 성(誠)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이 만물의 근본인 도(道)와 일치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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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 (기원 전 390∼전305)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유가에 속한다. 이름은 가(軻), 자는 자거(子車) 혹은 자여(子輿)이다. 맹자의 전기에 대하여는 분명치 않은 점이 많다. 생몰(生歿)에 대하여도 이설(전 389∼전 305,전 372∼전 289)이 있다. 공자의 출신지인 노(魯)에 가까운 추국(鄒國) 출신이라 한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의 고사(故事)에 의하면 어릴 때에 부친을 잃고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모친에 대한 일화가 여러 가지 알려져 있으나 그대로 믿을 만하지는 않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門人)에게 배웠다고 했고, 또 자사에게 직접 배웠다고 하는 말도 있으나 자사의 문인설이 정론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것으로 보든 맹자의 학문 형성에 증자, 자사의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인정될 것이다. 맹자는 처음에 추(鄒)의 임금에게 벼슬하고 있었으나, 뒤에 그의 사상을 실천에 옮기려고 제(齊)의 선왕(宣王), 등의 문공(文公), 양(梁)의 혜왕(惠王) 등의 제후 사이를 유세(遊說)하였다. 또 당시의 학문의 중심지, 제(齊)의 직하(稷下=城下)에서 머물며 그곳 유학자들과 논쟁한 것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에 어느것도 채용되지 않았고 만년은 문하인 만장(萬章) 등과 함께 제자의 교육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저술로서 <孟子> 7편이 있고 그 밖에 <맹자외서(孟子外書)> 4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맹자는 묵자(墨子)의 학설이나 도가의 일파인 양주(楊朱)의 학설이 환영을 받았던 시기를 맞아, 공자의 학문을 발양(發揚)하고 양주, 묵자의 주장을 비판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인간성의 이해에 있어 증자, 자사의 생각을 계승하고 종교적 천(天)의 관념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어서 소위 성선설을 제창하였다. 그 때문에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능력을 중시, '양지양능(良知良能)' 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양지양능 이라는 것은 사람에게는 나면서 타고난 능(能)과 지(知)가 갖추어져 있어서 일상 행동에서 육친(肉親)에게 친하고 손위 어른을 존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仁)·의(義) 라는 것으로, 이에 의하여 인·의 가 사람에게 고유(固有)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입증한다. 또 사람은 누구든지 남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악을 미워하는 마음,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 시비(是非)의 마음을 갖고 있다 하면서 이것을 '인(仁)·의(義)·예(禮)·지(智)'라고 하는 네 가지 도덕의 드러남(四端)으로 보고, 그는 이것을 인간의 본성(本性)이라 했다. 인간이 이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타고난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이것을 확충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지 덕성을 높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한 까닭이지만 아무리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여도 악이 생기는 것은 귀나 눈이 외부의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람에게 수양이 요구된다. 구체적으로는 '방심(放心)을 구(求)한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는 것이다. '방심(放心)을 구(求)한다'는 것은 사람이 외물에 유혹되지 않게 욕심을 적게 하는 일이요, '호연지기'라는 것은 선행을 할 수 있는 행동력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善)하다는 것이 선천적인 것이라고 하는 규정이다. 이것은 맹자가 천(天)의 이해에 있어서 종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 바로 그것 때문에 인간이 천(天)에서 독립한 존재로는 있을 없다고 하는 생각을 결지했다. 그는 성선설(性善說)에 바탕을 둔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정치, 즉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지 않는 정치(仁政)를 행하는 것이 왕도(王道)라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그 인정(仁政)은 경계로부터 시작된다. 경계가 바르지 않으면 정전(井田)이 같지 않고 곡록(穀祿)이 평(平)하지 못하다. 그런 까닭으로 "폭군오리(暴君汚吏)는 반드시 그 경계를 어지럽게 한다"라고 하여 농지의 경계를 정확하게 하도록 했다. 이것은 당시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군주가 무력에 의하여 토지의 집중화를 밀고 나와 입회지(入會地)마저 군주 개인의 재산으로 삼고 있는 상황에 반대한 것이다. 또 위정자가 사람들의 의식(衣食)을 충분하게 하고 노인·유아를 보호하는 일도 인정(仁政)이므로 그것을 완수해야 비로소 왕자(王者)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왕자가 되어 왕도를 수행하는 자는 인(仁)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안되나, 그러나 인을 갖추지 않은 사람도 존재한다. 여기서 생기는 것이 사회의 분업(分業)이라는 생각이다. 마음으로 수고를 하는 자와 힘으로 수고를 하는 자를 나누어, 마음으로 수고를 하는 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힘으로 수고를 하는 자는 사람에게 다스려진다는 것은 맹자의 주장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맹자의 이른바 '민본(民本)'의 주장인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이에 다음 가고 임금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도 사회분공론(社會分功論)에서 진술한 "힘을 쓰는 자는 사람에게 다스려지고 남을 공양한다"라고 하는 백성이 갖는 역할을 중요시한 입장에서의 발언일 뿐, 결코 민권을 신장하려고 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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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인 맹자와 그 제자들의 언론을 기록하고 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맹자는 제자인 만장(萬章) 등과 공자의 학설을 밝히기 위하여 <맹자> 7편을 지었다 한다. <맹자>에 최초로 주해를 붙인 조기(趙岐, 後漢 사람)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의심한 사람은 한유(韓愈)이다. 그는 맹자의 사후 제자인 만장(萬章), 공손축(公孫丑) 등이 스승의 말을 모아 편집한 것일거라고 하였다. 청대의 역사가 최술(崔述)은 맹자의 사후까지 생존하고 있었던 제후를 시호(諡號)로 부르고 있는 점, 편중(篇中) 만장, 공손축의 2인의 제자는 존칭인 '자'를 이름 뒤에 붙이지 않은 점 등으로 해서 이 두 사람에 의하여 편집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요컨대 맹자의 사후 그 학파에 속하는 사람이 편집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책의 편수(篇數)에 대하여 <사기>에는 7편이라고 하였고,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에는 11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기(趙岐)는 <맹자제사(孟子題辭)>에서 7편이라고 하였고, 다시 "외서 4편(外書四篇)·성선변(性善辯)·문설(文說)·효경·위정(爲政)이 있으나 내용이 얕고 내편(內篇)과는 관계없는 것 같아 후세의 사람이 맹자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한서> <예문지>의 11편이라는 것은 <맹자> 7편에 <외서>의 4편을 더한 수일 것이다. 다만 이 <외서>의 4편은 현재 산실되어 볼 수는 없다. 7편이라는 것은 양혜왕편 제1 (梁惠王篇第一)·공손축편 제2 (公孫丑篇 第二)·등문공편 제3(藤文公篇 第三)·이루편 제4(離婁篇 第四)·만장편 제5(萬章篇 第五)·고자편 제6(告子篇 第六)·진심편 제7(盡心篇 第七)인데 각편 각기 상하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전부 14편이 된다. 편명은 <논어>와 같이 편수(篇首)의 말을 그대로 취한 것으로 내용을 표시한 것은 아니다. 제1편 양혜왕편은 양의 혜왕과 회견한 때의 문답에서 시작하여 양(梁)의 양왕(襄王), 제(齊)의 선왕(宣王), 추(鄒)의 목공(穆公), 등(藤)의 문공(文公), 노(魯)의 평공(平公) 등과의 회견이 기록되어, 맹자가 유세하며 순회한 나라와 제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거기에는 이 편의 지어진 목적과 특히 이 편이 최초에 놓이게 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 이(利)를 버리고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일이라든지, 왕자로서 인정(仁政), 왕도(王道)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 설파되었다. 인정(仁政)이란 성선설(性善說)에 기초를 둔 남을 생각해 주는 정치를 행하는 것이다. 공손축편은 제자인 공손축과의 대화로서 제(齊)의 일이 기록되었고, 등문공편에서는 등(藤)에서의 일이 기록되었는데, 거기서의 주제는 양혜왕편(梁惠王篇)과 대략 같아 군주의 행할 왕도(王道)에 대한 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의 이루(離婁)·만장편(萬章篇)은 제자와의 대화를 통하여 '인의(仁義)의 도(道)'에 대하여 설명하고, 특히 만장편은 상고시대의 성왕인 요(堯)나 순(舜)에 대한 설화가 많다. 고자편(告子篇)에서는 타학파의 사상가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성선설이 심화되었다. 최후의 진심편(盡心篇)에서는 선성(善性)과 천명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특히 최후의 장에서 500년마다 성인(聖人)이 출생하는 일이라든가, 그동안 끊임없이 계속된 도통(유학 전도의 계통)을 승계하는 일은 공자로부터 100년 후에 출생한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라고 자기의 결의를 표명했다. <맹자>의 최후에 이 장을 두는 것은 전체를 맺는 것으로는 서로 잘 조화되는 것인 만큼 편집자가 의식적으로 배열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맹자>의 문장은 <논어>에 비하면 긴 문답체가 많고, 그 중에서도 제후 제자 타학파와의 의론은 그 서술에 박력이 있으며, 문장은 부드럽고 설득력이 있어 논설을 진행하는 방법의 교묘함이 대단하다. <맹자>가 한대(漢代)에는 <순자(荀子)> 등과 함께 유가의 한 책에 불과했었으나 당대에 한유(韓愈)가 이 <맹자>에 주목한 다음 특히 남송(南宋)의 주희(朱憙)가 <맹자>를 공자 ― 증자 ― 자사의 유가의 도통을 잇는 것이라 하여 <논어> 및 <대학(大學)>, <중용>과 더불어 4서(四書)의 하나로 주석을 붙임으로써 유가사상사에 있어서 부동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맹자까지도 성인인 공자에 이어지는 인물(亞聖)로서 존중케 되었다.

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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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사상가로 이름은 부해(不害)이다. 고자의 사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인간성 이해에 대한 맹자와의 논쟁이 <맹자>속에 인용되고 있어 그의 사상을 약간이나마 알 수 있다. 고자는 생(生)을 성(性)이라 한다든가 식(食)과 색(色)은 성(性)이라고 하여 타고난 기질 그대로의 식욕과 성욕이라고 하는 동물과 같은 생리적인 욕구의 현상을 성(性)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론으로서 그는 성은 선(善)도 악(惡)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맹자는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인간의 타고난 도덕성, 즉 인의(仁義)라 하여 동물과 구별하려고 하였다. 다시 고자에 의하면 본성(本性)은 비유컨대 재료의 나무이며, 인의(仁義)는 만들어진 바구니 같은 그릇이다. 인간이 인의를 행하는 것은 나무의 재료로 굽혀서 만들어진 기구와 같은 것이라 했고, 또 본성을 구비치는 물에 비유하여 동쪽으로 흐르게 하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흐르게 하면 서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이 본성은 처음부터 선이라고도 악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자기의 아우는 사랑하지만 타인의 아우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따위의 차이가 있는 그것은 그것이 내적 감성을 주로 하기 때문이며, 연장자를 존경할 경우 타인이라도 존경하는 것은 그것이 외적 사실을 주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인(仁) 은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것을 인정하지만 의는 어디까지나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들은 맹자가 관념적 입장에 선 종교적 천(天)의 위치에서 인간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과 날카롭게 대립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두 사람의 의론이 끝까지 평행선을 이루었던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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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子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며 유가에 속한다. 이름은 황(況), 순경(荀卿) 당시 사람들의 존칭이다. 조(趙)의 출신, 50세 때 제(齊)에 가서 당시 할술계의 중심지였던 직하(稷下)의 지도자로서 세 번 제주(祭酒=學政을 맡은 장관)라는 지위에 취임했다. 이런 일은 일시 침체하여 있던 제(齊)의 사상계에 활기를 불어 넣는 일이 되었다. 후에 초(楚)로 가서 대신인 춘신군(春申君)의 추천에 의하여 난릉(蘭陵)이라는 지방의 장관이 되어서 선정을 베풀었으나 춘신군이 암살되어(전238) 관직을 그만두었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했을 때(전 221)에도 아직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공자와 자궁(子弓) 혹은 자유(子遊)로부터 배웠으며 동시에 타학파의 이론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순자(荀子)의 문하에는 유가로서 한초(漢初)에 <시경>을 전한 부구백(浮邱伯), 법가(法家)의 한비(韓非), 진(秦)의 재상이 된 이사(李斯)가 있다. 순자의 사상에서 제일 주목되는 것은 천(天)의 이해일 것이다. 그것은 종래의 유가의 종교적 천(天)의 이해에서 탈각하여 자연현상으로서 파악한 것이다. 그 결과 순자는 인간성 이해에 있어서 내재적 요인이었던 천(天)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었다. 맹자의 인간성 이해가 끝까지 종교적 천(天)의 제약하에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근본적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 그의 이른바 성악설은 이 천(天)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성악설로 예의도덕의 선천성(先天性)을 부정하고 성(性)과 위(僞)로 나누어 성을 타고 나면서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위를 후천적 노력으로 보았다. 여기서부터 인간성의 평등(平等)을 인정하려고 하는 생각을 간취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성악설에 기본하여 위(僞)와 예(禮)가 강조되었다. 이 예(禮)라는 것은 사람의 일상의 규율은 물론, 나라의 제도·법령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예의 습득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 설파되었다. 또 예가 시대에 의하여 변화되어야 함을 인정하여 선왕(先王)보다도 후왕(後王)을 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점이 순자를 유가와 법가의 교량 역할을 한 인물로 보는 이유이다. 그는 한나라에서는 유가의 정통적 인물로 보았 으나, 송대(宋代)에 도통론(道通論)이 창도되어 성악설이 비난받으면서부터 유가의 이단자로 간주되어 오랫동안 부당하게 평가되어 왔다. 정당한 지위를 획득하는 데는 청말(淸末)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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筍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의 사상가 순자(荀子)의 언론을 모은 것이다. <순경신서(荀卿新書)>, <손경자(孫卿子)>라고도 불린다. 전부 32편이다. 본래는 322편이었던 것을 한대에 유향(劉向)이 중복되는 290편을 제거하여 32편으로 정착시켰다. <순자(荀子)>에 처음으로 주석을 한 것은 당(唐)의 양량(楊凉)인데 32편을 20권으로 나누었고 순서도 조금 변경하였다. 양량·이후 송학(宋學)의 발흥과 함께 4서의 도통이 중시되어 <순자>는 이단의 서적으로서 오랫 동안 배척되었다. 내용은 철학·심리·도덕·논리·교육·정치·경제·전략·사상가 비판 등에 미쳤고, 운문(韻文)·설화에 대해서도 기재돼 있고, 내용은 각부분에 걸쳐 문체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동일인의 저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최초의 '권학(勸學)', '수신(修身)' 편은 개인의 수양을 논하였는데, 좋은 환경 속에서 양사(良師)를 따라서 유가의 경전을 배우고 예를 지키는 일에 의하여 인격이 완성된다고 한다. '성악' 편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인간은 악을 좋아하고 이(利)를 좇기 쉬우므로 예를 배워서 '위(僞) → 인위(人爲)'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앞서 말한 '권학' 편에 기술하고 있다. '천론(天論)', '비상(非相)', '정론(正論)'편은 전통적 사고, 미신, 숙명론의 타파를 기도해 본 것이다. 특히 천론은 천(天)에 대한 종교적 이해에서 벗어나 천(天)을 인간생활과는 무관계한 자연 존재라고 인정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인간성의 참된 이해가 가능토록 한 점에서 유가사상사에 있어서 특필해야 할 의의를 갖는다. '정명(正名)' 편은 논리와 인식의 문제에 대하여, '해폐(解蔽)'편은 방법론의 문제에 대하여, '악론(樂論)'편은 음악 이론에 대하여, '왕제(王制)' '부국(富國)'편은 사회에 있어서의 정치적 원칙을, '의병'편은 군사 이론에 대하여 각각 기술하고 있다. '비12자(非十二子)' 편은 공자, 자궁에 대해 존경하는 태도를 보인 외에 자사, 맹자 등을 포함한 12명의 사상가를 비판한 것인데 선진 제자(先秦諸子)의 사상을 알게 하는 점에서 귀중한 기록이다. '성상(成相)'편은 민가의 체재를 취하여 순자의 정치사상을 서술한 것이며, '부(賦)'는 그의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양량(楊凉)이 19권과 20권에 수록한 각편('大略'에서 '堯問'까지의 6편)은 순자의 후학의 기록으로 여겨진다.요컨대 이 책은 순자의 사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진 유가(先秦儒家) 사상의 총괄서로서 큰 의의를 가진다.

묵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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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家-思想

전국시대에 묵가(墨家)는 유가와 병립하는 유력한 학파였다. 맹자는 묵자와 양주(楊朱)의 사설(邪說)이 유행되고 있는 데 분격하고 있었으며 한비자(韓非子)도 '세상의 현학은 유儒)와 묵(墨)이다'라고 하였다. 한대 초기에는 학자를 통칭하여 '유묵'이라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후 중국의 사상계에 있어서는 유가사상만이 역대 왕조의 공인을 받아서 비상하게 번영하고 묵가사상은 이단사상이라 하여 배격되었다. 묵가사상 및 그 원전(原典)인 <묵자(墨子)>에 대한 재평가가 청조의 권위가 동요한 19세기 말에 시작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묵자는 처음에 유가에 나아가 배웠다고 하지만 그의 사상은 거의 유가사상에 반대되고 있다. 유가가 부모형제들의 혈연관계를 윤리의 기본에 두는 데 반하여, 묵가는 그러한 차별에 관계하지 말고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였다(兼愛論). 유가가 인재의 등용에 있어 덕의 유무를 기준으로 하여 군자와 소인의 차별을 엄격히 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농민이건 상공업자건 구애할 것 없이 재능있는 자는 계속해서 등용하라고 하였다(尙賢論). 유가가 관혼상제나 일상의 의식을 중시하는 데 대하여 묵가는 군주의 긴요하지 않은 지출을 덜고(節用論), 궁중 음악 등은 그만두고(非樂論) 장례의식 등도 간소하게 하라고 하였다(節葬論). 유가가 인간의 도덕적 실천(人道)을 중히 여기면서도 오히려 인력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천도(天道)나 천명(天命)을 인정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일체 명(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非命論), 인간의 행위의 선악은 모두 귀신에게 감시받으며, 귀신은 정확하게 그에 대응하여 상벌을 내린다고 한다(明鬼論). 유가가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을 중요시하고 어느 군주를 섬기느냐 하는 판단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하위자(下位者)는 상위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며(尙同論), 인간 중의 최상위인 천자(天子)도 천(天)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였다(天志論). 이러한 특징을 구비한 묵가사상은 개조(開祖)인 묵자가 이끄는 집단이 성벽의 수축이나 방어작전 등에 종사하는 공인(工人)의 집단이었다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것은 유가의 사상이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토론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묵가사상은 묵자의 사후 그 지위를 이은 수령(首領) 밑에 결속한 집단의 내부로부터 서서히 정리되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묵자(墨子)>는 그 집단 활동의 결정(結晶)인 것이다.

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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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子 생몰 연대 미상. 공자(孔子) 보다 조금 늦은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활약한 묵가(墨家)의 개조(開祖). 이름은 적(翟)이며 송(宋) 또는 노(魯)의 태생이라고 전해진다. 묵(墨)이라는 성은 자자(刺字)의 형(刑)을 받은 죄인의 출신을 표시한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깎고 갓을 쓰지 않았으며, 맨발에 짚신으로 돌아다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의관에 위의(威儀)를 바르게 한 상류계층 출신은 아니고, 아마도 각지의 국군의 의뢰를 받아서, 성벽의 수축이나 방어작전에 종사하는 공인(工人) 집단의 수령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묵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초왕(楚王)은 공수반(公輸般)이 발명한 운제라는 공성기계를 사용하여 송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묵자는 노에서, 10일간 주야를 달려와 공수반(公輸般)과 도면 위(圖上)에서 공방작전을 전개한 끝에 공수반의 공격 수법을 무력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수반이 자기를 살해하려는 것을 안 묵자는 "송(宋)을 공격하여도 송의 성벽에는 자기의 제자 금활리(禽滑梨)가 300인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묵자가 인솔하는 집단은 도성의 수축이나 방위라는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묵자의 법(法)'이라든가 '묵자의 의(義)'라고 불리는 규율 밑에서 굳게 결집하여 있었다. 묵자 사후 그 수령의 지위는 거자(巨子) 라고 불리는 후계자에 의해 전국말까지 대대로 계승되어 오면서 그 집단원은 거자(巨子)의 명에 헌신적으로 복종하였다. 묵자는 처음에 유학을 배웠다고 하나 뒤에 그것을 탈각하고 혈연적 폐쇄주의를 타파하여 사람들이 널리 서로 사랑할 것(兼愛主義), 자기 국가의 이익 본위의 전쟁을 그칠 것(非攻主義), 신분을 불문하고 재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할 것(尙賢主義), 쓸데없는 의례적 낭비를 절약할 것(節用節葬主義)등 유가의 학설과 상반되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뒤에 맹자로부터 '사람의 도를 무시하는 금수의 가르침이라'하여 비난과 공격을 당함으로써 이후 중국에서는 19세기 말에 이르도록 묵자사상은 이단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묵자의 주장에는 춘추전국시대의 변동을 사회의 밑바닥에서 경험한 자의 솔직한 소리가 반영되어 있다. 그 점에서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그 겸애론·비공론(非攻論) 등은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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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子 중국의 전국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묵가 집단에 의하여 집대성된 저작집. 일부는 개조(開祖)인 묵자 자신의 언론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그의 후배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저작으로 추측된다. 원래 71편이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53편이다. <묵자(墨子)>의 제편(諸篇)은 그 내용에 의하여 다음의 다섯으로 분류된다. ① '친사(親士)'부터 '삼변(三辯)'까지의 7편, 이것은 묵가의 잡론집이다. ② '상현(尙賢)'부터 '비명(非命)'까지의 23편, 이것은 묵가의 주요 사상으로 이 책의 핵심을 이룬다. ③ '경(經)' '경설(經說)' '대취(大取)' '소취(小取)' 6편, 이것은 말의개념이나 표현의 논리를 분석한 것이다. ④ '경주(耕柱)'로부터 '공수(公輸)'까지의 5편, 이것은 개조 묵자의 언행·사저집으로 공자를 논란한 비유(非儒)편도 이 부류에 들어 있다. ⑤ '비성문(備城門)' 이하의 11편, 이것은 묵가의 방어전술을 적은 것이다. 이들 중에서 ③류는 일괄하여 묵변(墨辯)이라고도 호칭되는데 기하학·광학·역학 등에 관한 명제(命題)도 포함하는 특색 있는 중국 고대의 논리학의 부분이다. 또 ⑤류는 성의 방어전술에 필요한 병기·기구·설비·자재의 제작이나 취급하는 법을 논한 이색적인 부분으로서 성의 방어를 청부하는 묵자 집단의 특성을 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묵자>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유가(儒家)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을 갖는 ②류일 것이다. 즉 '상현(尙賢)' 은 관리의 임용에는 신분·직업에 구애하지 않고 넓게 문호를 개방하여 인재를 구하라고 말하였고, '상동(尙同)'은 상위자(上位者)의 명령에 하위자는 복종하여 부강을 달성할 것을 말하였고, '겸애(兼愛'는 자국과 타국, 자가와 타가의 차별을 없애고 사람은 널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비공(非攻)'은 전쟁이 불의이며 백성에게 해로움을 주장하고, '절용(節用)' '절장(節葬)'은 군주의 의례적인 사치에 반대한 것이다. '천지(天志)'는 천(天)을 최고의 존재로 하여 천자(天子) 이하 이에 순종할 것을 말한 것이고, '명귀(明鬼)'는 사람의 사후의 영혼의 실재를 강조하여 그 상벌을 두려워하라고 말한 것이다. '비악(非樂)'에서는 궁정음악(宮廷音樂)이 백성의 이익에 배반됨을 말하였으며, '비명(非命)'에서는 숙명관을 배제하여 사람의 근면한 영위에 대하여 귀신은 반드시 보상을 준다고 말하였다. 이것들 10론(論)에는 각기 상·중·하의 3편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가 분실, 23편이 남아 있다. 상·중·하 각편은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조금씩 자구나 사상 내용에 상위(相違)함이 있어 묵가의 주장의 변천이나 분파의 자취를 더듬을 수가 있다. <묵자>는 맹자에 의하여 이단사상으로 배격당한 이래 추종자를 거의 갖지 못하였으나, 청조(淸朝)의 고증학의 전성 속에서 재인식되어 손이양의 <묵자간고>와 같은 우수한 주석서가 제작되었다.

도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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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家-思想

유가(儒家)사상과 아울러 후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도가사상이다. 도가사상은 노자(老子)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노자는 공자보다 선배로서 공자는 일찍이 노자에게 예를 배운 일이 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이것이 후대 유가의 사고방식에 매우 대립적 입장에 서는 사상인데도 <논어(論語)>나 <맹자(孟子)> 중에는 도가사상에 대하여 말한 바가 없다.

맹자 시대에 유가에 대립한 것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었다. 오늘날 양주는 도가의 일파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논어>에도 <맹자>에도 노자에 관한 사항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당초 유가와 강하게 대립한 학파는 묵가였다. 그 때문에 노자는 공자보다 훨씬 뒤의 전국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학자도 있다(馮友蘭의 말). 그렇지만 <논어(論語)>를 읽으면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떠합니까"라고 물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憲問扁). "원(怨)을 갚는 데 덕으로써 한다"는 것은 <노자(老子)>에 보인 말이다(63장). 또 "무위(無爲)로써 다스린 분은 순(舜)이었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노자>의 '무위'를 생각게 한다. 또 <논어>의 증자(曾子)의 말에 '도를 지녀(有)도 없는 듯 덕이 실하여도 허(虛)한 것 같이'라는 말이 있다(泰伯篇). 유무(有無), 허실은 이것 역시 <노자>에서 자주 보는 대립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논어>에 노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확실하지만 노자적인 사고법이 전연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전설에 의하면 노자는 초(楚=楊子江 남쪽의 대국)의 사람이라고 한다. 남방 초국 문화는 북방의 문화와 처음부터 달랐다. 북방의 풍토에서 생긴 <시경(詩經)>과 초(楚)의 풍토에서 생겨난 초사(楚辭)를 비교하여 읽어보면 그 다름을 알 수 있다. 초사의 대표작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읽으면 초조(焦燥)해 하고 있는 굴원에 대하여 굴원의 누이가 고독한 성실함을 지키지 말고 세속 사람들과 동화(同化)되는 것이 좋다고 타이른 말이 있다. 초사의 하나인 '어부사(漁父辭)'에서 홀로 결백함을 지키려 고민하는 굴원(屈原)에게 어부는 세속의 진애(塵埃)와 탁한 것을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참으로 도가적이다. <논어(論語)>에는 초(楚)의 광인(狂人)을 가장한 접여(接輿)라는 인물이 정치의 이상에 불타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공자에게 지금의 정세는 정치에 종사하는 것이 위험하니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초(楚)나라 격조의 노래로 비판하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은 예로 볼 때 초(楚)의 지방에는 옛부터 도가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인생관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가사상도 그러한 사회적, 지리적 배경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노자(老子)>에 실린 글은 때때로 압운(押韻)을 갖고 있다. 그것은 철학시로서 전해진 것이 어느 시기에 산문으로 정리된 것같이 느낌을 주기도 한다. <노자>의 사상을 노자 개인의 철학으로만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거기에는 많은 인생의 철학이 압축·집약되어 있는 것 같다. 남방 초에서 발생한 생활철학, 그것을 전한 철학시(哲學詩)가 어느덧 <노자>에 종합된 말로 응축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철학은 인생 경험을 많이 쌓아 올린 노옹(老翁)의 말이라 하여 추앙되다가 나중에 아예 노자(老子)라는 개인의 철학처럼 굳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가사상은 인간에게 분수를 지키고 무욕(無欲)하는 생활을 하라고, 또 정치적 혼란에 직면해서는 은둔자로 생활하는 등 일견(一見)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가르쳐 절대적인 가치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현상세계의 어쩔 수 없는 모순이나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지혜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 사상은 후대에 있어서 문학자에게 많이 애호되었다. 예컨대 도연명(陶淵明)의 시(詩)에 보이듯이 훌륭한 인생의 지혜를 말하는 문학작품을 낳았다. 또 그 사상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화되었을 때 불교철학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禪)과 도가의 사상과는 근저에 있어서 통하는 것이 있다. 또 한편 도가의 철학에 불교의 형태를 받아들여서 민중종교로서의 도교가 성립하였다. 후세의 중국 민중사회에 도교가 준 영향은 크다. 도가사상은 예컨대 감필체(減筆體)라고 칭하는 공간의 가치를 귀하게 여긴 수묵화나 무도의 일종인 권법에도 영향을 주었고 지극히 중국적인 동시에 지극히 동양적인 유현(幽玄)한 특성을 낳는 근원이 되었다. 도가에 대해서는 오늘날 아직도 알 수 없는 점이 여러 가지 있다. 그것은 주로 은자의 철학으로서 설명되기 때문에 주장한사람의 성격도 분명하지 않다. 현재 중국 학자들의 평가에 의 하면 도가사상은 몰락 귀족의 사이에서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그 철학에는 준열한 역사와 풍토 위에서 생활한 서민들의 지혜도 혼입되어 있다고 생각하나 몰락 귀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노장의 철학을 사랑하여 뛰어난 시를 지은 도연명(陶淵明)도 몰락 귀족이었다. 도가의 시조로 여겨지는 노자(老子)의 사고방식에는 유물적(唯物的)인 요소도 보였지만 장차 그 사상은 열자(列子)에서 장자(莊子)를 거치면서 매우 유심적(唯心的)인 철학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그 사상 내용은 참으로 동양적이며 또한 전인류의 지혜로서도 손색없는 독특하고 훌륭한 철학인 것이다.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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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노자로 상정되는 인물이 3인이 있다고 하였다. (老子 韓非列傳). 첫째로 이이(李耳, 자는 담(聃=老聃)를 들었다. 그는 초나라 사람으로 공자가 예(禮)를 배운 사람이며, 도덕의 말 5천여 언(言)을 저작한 사람인데 그의 최후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음에 든 사람은 역시 공자와 동시대의 노래자(老萊子)로서 저서는 15편 있었다 한다. 세 번째 든 것은 주(周)의 태사담이라는 사람으로 공자의 사후 100년 이상 경과한 때에 진(秦)의 헌공과 회담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은군자(隱君子)'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노자라고 하는 이는 은자로서 그 사람됨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후세에 노자라고 하면 공자에게 예를 가르쳤다고 하는 이이(李耳)를 생각하는 것이 상례이나, 이이라고 하는 인물은 도가의 사상이 왕성하던 시기에 그 사상의 시조로서 공자보다도 위인(偉人)이었다고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전설일지도 모르겠다. 펑유란(馮友蘭)은 노자가 전국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지만 노자에게 특정 개인을 상응시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벌써 종교적 신앙에 빠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마천이 요약한 바 노자는 은군자(隱君子)라고 결론 지은 것은 사가(史家)로서 올바른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노자의 말이라고 하여 오늘날 <노자>(<老子 道德經>이라고도 한다) 상·하 2권 81장이 남겨져 있다. 거기서 기술되고 있는 사상은 확실히 도(道)의 본질, 현상계의 생활하는 우수한 철학인 것이다. 예컨대 도를 논하여 이렇게 말한다.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기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자랑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의 수장(首長)이지만 자기를 만물의 주재로는 하지 않는다'(10장). 이런 사고는 만물의 형성·변화는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예정된 목적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노자의 말에 나타난 사상은 일반적으로는 유심론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펑유란은 도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해는 뛰어난 것이다. 또 '도(道)는 자연(自然)을 법(法)한다'(55장)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이론은 유가(儒家)의 천인감응(天人感應) 의 미신적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자가 보인 인생관은 "유약한 자는 생(生)의 도(徒)이다" (76장). "유약은 강강(剛强)에 승한다."(36장)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때문에 도에 가깝다"(8장), "천하의 유약하기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78장) 등의 구절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나를 내세우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 세상과 함께 사는 일을 권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을 사람들은 겸하부쟁((謙下不爭) 이라고 하는 말로써 환언(換言)하고 있다. 노자는 또 "도(道)는 일(一)을 생하고 일은 이(二)를 생하고 이는 삼(三)을 생하고 삼은 만물을 생한다."(42장)고 하는 식의 일원론적인 우주생성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확실히 유심적인 것이다.

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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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尹 주(周)의 철학자. 성은 윤(尹). 이름은 희(喜)이다. <사기>에 의하면 노담(老聃)은 주(周)의 쇠함을 보고 주를 떠나려고 관소(關所)에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인 윤희(尹喜)에게 권고받아 <도덕경> 5천여 언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 관령 윤희가 즉 관윤(關尹)으로 노자의 제자가 된다고 한다. <장자(莊子)>의 '천하편(天下篇)'에 관윤의 말이라 하여, 사람은 아집(我執)을 버리면 자연(自然)대로의 동작이 발휘된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동(動)하기 물과 같고, 그 고요함이 거울과 같으며, 적(寂)함이 청(淸)과 같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불이편(不二篇)'에는 '관윤(關尹)은 청(淸)을 귀히 여긴다'고 평하고 있다.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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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子 이름은 어구(禦寇). 정(鄭)의 은자로서 기원전 4세기경의 사람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열자(列子)> 8편이 남아 있으나 그것은 후세의 위작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열자(列子)>의 사상을 남긴 부분도 분명히 있다. <열자>의 황제편을 보면 열자가 관윤(關尹)과 나눈 담화가 기재되어 있으므로 관윤을 통하여 노자의 사상을 배운 사람이 아닌가 한다. 노자는 현상의 본원을 도(道)라고 불렀으나 열자는 도를 태역이라고 바꾸어 불러 천지만물을 생성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도가적 우주론을 노자 이상으로 깊게 구축한 것이 열자이다. 그리하여 우주간의 흐르는 법칙을 좇아 사는 것이 인간의 진실된 삶의 방법이라고 했다. <열자>의 '천서편(天瑞篇)'에 "정(靜)하고 허(虛)하면 그 거(居)를 얻으리라"하는 말이 있으나 <여씨춘추> '불이편(不二篇)'에는 "열자는 허(虛)를 귀히 여긴다"는 일언으로 평한다. 저 유명한 '우공이산(愚公移山)' '기우(杞憂)'의 이야기는 <열자(列子)>에 실려 있는 우화(寓話)로서 <장자(莊子)>와 함께 도가적 우화가 풍부한 서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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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朱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자(字)는 자거(子居). 위(衛)의 사람이다. 양주(楊朱)의 전기도 매우 애매하다. 묵적(墨翟)과 아울러 그의 설이 천하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맹자(孟子)>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4세기로부터 3세기에 걸쳐 그 학설이 유행했던 것 같다. 펑유란(馮友蘭)은 도가사상의 출현을 묵자(墨子) 이후였다고 생각하여 양주(楊朱)를 그 시초를 삼으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양주의 학설은 <맹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및 <여씨춘추>, <회남자> 등에 보인다. 양주(楊朱)는 하나의 생명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생활의 모든 것은 이 하나의 생명을 기르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한다. 생명의 주체는 '나(我)'다. 그 '나'를 소중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노자(老子)는 무아를 말하여 무아속에 개인의 존속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양주는 노골적으로 무엇이든 나를 위해서만 해야 한다는 위아(爲我)설을 말하였다. 그것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묵자(墨子)가 말하는 '겸애'의 생각과는 대조적이다. 양주의 이 주장은 한 마디로 '전성보진(全性保眞)'의 설이라고 평가받고 있다(<淮南子>氾論訓의 楊朱評). <여씨춘추> '불이편(不二篇)'에 양주를 평하여 '양생(楊生)은 나(己)를 귀히 한다'고 이르는 것도 양주사상의 특색을 한 마디로 논한 것이다.

직하의 도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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稷下-道家

제(齊)의 위왕(威王)·선왕(宣王) (전357∼전301) 때 제의 국도에 많은 학자가 모여 세상에서 '직하의 학(稷下學)' 이라고 호칭되는 학문의 성시가 도래했다. 도가에는 팽몽(彭蒙), 전병(田騈), 신도, 환연(環淵) 등이 있었다. 팽몽은 전병, 신도의 선생이 되는 듯하다. 팽몽, 전병, 신도의 학설에 대해서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 해설이 있고 전병, 신도, 환연에 대해서 <사기(史記)> '맹자(孟子) 순경(荀卿) 열전'에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연은 전병, 신도의 스승이었다는 말도 있다. <사기>는 이외에 접자(接子)라고 하는 도가의 이름도 든다. <장자> '천하편(天下篇)'에 의거하면 팽몽, 전병, 신도는 만물을 제(齊)하는 것을 도(道)라 하면서, 지(知)를 버리고 자기를 떠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에 대해 자기를 버리고 만물과 동화할 필요를 논하여 무아의 입장을 취한 것이긴 하지만 무아이면서 나를 세운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역시 양주의 위아(爲我)를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만물을 제(齊)한다고 하는 것은 장자의 근본사상의 하나인데 그 싹이 이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사기>에 의하면 신도는 조나라 사람으로 <십이론>을 지었다고 한다. 오늘날 불완전하나마 <신자>라고 하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후인이 모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병, 접자(接子)는 제나라 사람이라 하고 환연은 초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전병은 진병(陳騈)이라고도 하며, 환연에는 <상하편(上下篇)>이라고 하는 저서가 있었다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직가(稷家)의 묵가에 송견, 윤문(尹文)이라고 하는 두 학자가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이 묵가이면서도 도가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고 있었음은 주의할 만한 일이다. 송견, 윤문(尹文)은 '금공침병(禁攻寢兵)'을 창도하였다고 <장자> '천하편(天下篇)'에서 말하고 있다. 그것이 곧 묵가(墨家)의 사상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욕과천(情慾寡淺)'의 설을 창도했다고 <장자> '천하편'에 말했고, <순자(荀子)> '정론편(正論篇)'에서 송견은 모멸당해도 욕으로 삼지 않음을 주장, 이 마음이 사람을 전쟁으로부터 멀리하는 근본이라 생각했다 한다. '정욕과천(情慾寡淺)' '견모불욕(見侮不辱)'의 생각은 참으로 도가적이다. 그들은 묵가의 전쟁부정론의 근본에 도가적 생각을 도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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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철학자. 이름은 주(周), 자는 자휴(子休). 송(宋)의 몽현(蒙縣)사람. 일설에는 양(梁)의 몽현(蒙縣) 사람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몽현의 '칠원(漆園)의 아전(吏)'이던 장자는 <사기(史記)>에 의하면, 제(齊)의 선왕(宣王)과 동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직하(稷下)의 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행동을 기록한 일화를 종합하여 보면 맹자보다 조금 후인 기원전 3세기의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사기>에 의하면 장자의 학통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노자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10여만 언의 '우언(寓言)'을 기록하여 노자의 도를 밝혔다고 한다. 오늘날 <장자(莊子)>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내편 7편은 주로 장자의 손으로 된 것이라 하여 장자의 사상을 아는 기본 자료로 간주된다. 외편·잡편은 장자의 후학의 무리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장자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제물론(齊物論)과 양생주론(養生主論)·소요유론(逍遙遊論)이다. 장자는 천지는 나와 아울러 생(生)하므로 만물은 나와 일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체의 이(理)에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만물을 차별하여 시비를 벌이고 있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전체를 보지 않고 한 국부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한가지여서, 죽는 것은 다만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세상의 현상은 한편으로 가한 것이 있으면 한편으로 불가한 것이 존재한다. 가부의 평가는 일방으로 편벽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천지만물을 투철하게 보면, 가(可)도 없고 불가(不可)도 없이 만물은 모두 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버리고 만물에 동화하는 일 그것이 인간존재의 참된 존재 방법이며 궁극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명한 제물론(齊物論)으로서, 이러한 생각은 직하(稷下)의 도가에서 발하여 다시 더 철학적으로 심화된 것이다. 장자(莊子)는 또 '양생주(養生主)' 편에서 "선을 하여도 명(名聲)에 가까이 함이 없이 몸(身=眞)을 보전할지어다"고 한다. 이 말은 양주가 말하였다는 전성보진(全性保眞)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다시 '소요유(逍遙遊)'편에서는 명(名)과 공(功)과 기(己)를 버리고 상대적 가치평가의 입장에서 떠나 천지의 사이를 소요하라고 설파한다. 이것은 시비의 판단이나 피아상대(彼我相對)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떠났을 때 비로소 천지만물과 일치하여 자연의 진성(眞性)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주만물에 미치는 도(道)의 본원의 자세를 말함에 있어서 장자는 여러 가지 우화를 인용하여 교묘하게 철학적 논지를 심화하여 간다. '소요유(逍遙遊)'에서는 붕(鵬)이라는 새를 매미와 뱁새로 대비시킨다. 그리하여 한정된 자기 세계에서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대의 세계를 떠난 곳에서 보면 취할 것이 못되는 견해라고 하는 것을 교묘하게 예증(例 )하여 간다. 또 '제물론(齊物論)'에서는 어느날 장주(莊周)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나비가 된다. 그 때에 장주가 나비로 된 것인지 나비가 장주로 된 것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었으나 참으로 유유하여 기분이 매우 좋았다고 하는 말을 하여 제물(齊物)의 경지를 설명하였다. 그러한 우화들은 훌륭한 픽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자(莊子)>는 철학서로서 우수할 뿐 아니라 문학서로서도 뛰어났다. 외편·잡편에서도 장자의 후학은 다시 많은 우화로 장자의 사상을 설명하는 동시에 공자의 무리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희화화(戱畵化)한 비판을 가하였다. <장자>에 이르러 유가에 대항의식은 강렬하였다.

명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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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家-思想

춘추전국시대의 사회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사물이나 사물의 실태와 그 호칭과의 사이에 복잡한 엇갈림이 생기게 되었다. 예컨대 '군(君)'이라는 말을 보면 그것이 옛날 노예적 봉건사회의 군장(君長)을 뜻할 경우도 있고, 유가가 주장하는 왕도적 군주를 뜻할 때도 있고, 신흥의 봉건 지주계층의 정치적 주권자를 뜻할 때도 있다. 각각 다른 개념에 의하여 군(君)을 논한다면 갖가지의 혼란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실태와 호명(呼名)을 바로 하려는 명실의 논의가 생겼다. 한편 또 여러 가지 발상을 하나의 논리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논리학이 필요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열국 사이를 유세하며 책모(策謨)를 안출하려면 논리를 전개해서 궤변마저 농(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명가'라고 불리는 일파의 논리학자들이 출현하였다. 명가에서는 명실을 바로하려고 하는 명실론의 방향과 그리스의 소피스트들과 같이 궤변술을 연구하는 두 흐름이 혼재하였다. 명가의 출발은 춘추시대의 정(鄭)의 대부(大夫) 등석(鄧析)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등석은 자산(子産=公孫僑)과 함께 정국의 국정에 임하였으나, 자산이 지은 법령의 자구해석을 둘러싸고 일일이 자산과 다투어 마침내 자산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등석은 자산이 정한 법에 대하여 변호사적 입장에서 법령의 확대해석을 용허하지 않고 법의 불비를 찔러 자산과 논쟁했던 것이다. 자산은 우수한 정치가로서 공자로부터 존경받은 사람이었으나 그 자산(子産)에게 논리를 구사(驅使)하여 등석은 저항하였다. 등석의 저라고 전해지는 <등석자(鄧析子)>가 오늘날 남아 있으나, 그것은 후인이 편집한 것이지 등석이 지은 것은 아니다. 등석에 대해서는 <여씨춘추(呂氏春秋)> '이위편(離謂篇)'에 설명되어 있다. 명실론은 <묵자(墨子)>의 '귀의편(貴義篇)'에 '명(名)'과 '취(取)'의 문제를 놓고 '명'은 개념적 지식, '취'는 사실에 즉(卽)한 구체적 인식으로 '취'야말로 제일의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가치관이 변동하는 사회에서는 '실(實)'을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묵가의 이러한 생각은 바로 묵가 후학의 논리학으로 발전하였다. 제(齊)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였는데, 그 위왕(威王), 선왕(宣王) 시대(전357∼전301)에 천하의 학자를 초대하여 잘 대접하였다. 또 도성(都城)의 남문을 직문이라고 하였는데 이 직문 아래에 초빙한 학자의 저택을 짓게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이 시기의 학술을 직하(稷下)의 학이라고 하였다. 이 직하에 모여든 학자 중에는 묵가의 송견과 윤문(尹文)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개념의 분석을 왕성하게 행한 듯한데, 그것을 별유(別宥)라고 칭하였다(<莊子> '天下篇'). 유(宥)라 함은 구역의 뜻이니 개념의 경계를 변별하는 것이 즉 '별유'이다. 송견·윤문의 후배에 공손룡(公孫龍)이 있었다. 묵가(墨家)의 논리학을 해설한 것이 <묵자>중의 '묵경(墨經)'편이다. 묵경은 경상(經上)·경하(經下) 및 경설상(經說上)·경설하(經說下)·대취(大取)·소취(小取)의 6편으로 되었고 묵가의 후학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 중에 공손룡의 궤변을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작된 시대는 혜시(惠施), 공손룡보다 후인 것 같다. 공손룡이 묵가와 관계가 깊었던 것은 이것으로 알 수 있다. 궤변적 논리학은 혜시(惠施)에서 시작되어 공손룡(公孫龍)에 의하여 깊어진 것이지만, <공손룡자(公孫龍子)>에 보이는 공손룡의 이론('白馬는 말이 아니다' 등)은 얼른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그 논리의 구성이나 발상 방법이 근대과학의 수학이나 물리학의 논증 방식이나 발상에도 견줄 만하다. 다만 중국에서는 이러한 궤변이 단순한 궤변술에 그치고 말았을 뿐이다. 전국 말기의 종횡가(縱橫家)라고 칭하는 유세가들은 이런 유(類)의 궤변술을 상당히 많이 활용하였다. 그렇지만 이 명가의 사고방식이나 논리의 형성 방법이 과학사상으로 전개한 일은 전부터 없었다. 중국인은 별로 추상적인 이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고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길 바란다. 따라서 명가의 설은 공손룡(公孫龍) 이후 학술적으로 거의 발전하지 못하였고 근근히 묵가의 후학에 의하여 '묵경(墨經)'이 정리된 것에 그쳤다. 그러나 명실론은 그 후 순자(荀子)에게 받아들여져 이후 유가의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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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施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철학자로 장자의 친구로 알려져 있다. 혜시(惠施)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에 전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제설을 종합하면 혜시는 송나라 사람으로서 양나라 혜왕(惠王) 밑에서 벼슬하여 법전을 만든 일도 있고, 혜왕 몰후에는 양왕(襄王) 밑에서 9년간 벼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자와 대를 같이 하였음을 <장자(莊子)>에서 알 수 있다. <장자>의 '천하편(天下篇)'에 의하면 혜시의 저서는 다섯 수레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저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설은 <장자> '천하편(天下篇)'이나 <순자> '불구편(不苟篇)' 에 언급된 내용을 중심으로 근근히 알 수가 있다. <한비자(韓非子)> '칠술편(七術篇)'에 의하면 혜시도 또한 묵가였던 것 같다. 혜시(惠施)의 궤변은 그 논제가 표시되어 있을 뿐 해설이 없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모르지만 공간론에 흥미를 가졌던 것 같다. '두께(厚) 없는 것은 쌓지 못하겠지만 그 크기는 천리(千里)'

등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학상(數學上)으로 말하는 점(点)은 얼마를 쌓든지 점이지만 공간에는 무한의 점이 존재하고 하나의 점속에는 또 우주가 있다고 하는 것을 논한 것일까. "나는 천하의 중앙을 안다. 그것은 연(燕)의 북이며 월(越)의 남이다"라는 논제도 있다. 천하의 중앙은 이론상으로는 하나 밖에 없으나 그것은 최북단의 나라인 연(燕)의 북이라도 좋고 최남단의 나라인 월(越)의 남에 있어도 좋다. 요컨대 중심을 어느 곳에서 보는가에 의하여서 공간의 넓어짐이 변경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널리 만물을 사랑하면 천하가 일체로다'라고도 한다. 이 생각은 역시 묵가(墨家)의 겸애설을 논리적으로 전개시킨 것인 듯하다. 이상, 혜시(惠施)의 궤변은 <장자>의 천하편'(天下篇)'에 소개된 것을 인용한 것이다.

공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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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孫龍

자는 자병(子秉)이며 조나라 사람이다. 조(趙)의 평원군(平原君)에 벼슬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기원전 3세기 중엽까지 활약한 사람 같다. 묵가의 송견, 윤문의 후배라 하며 그 궤변은 '묵경'에도 해설되어 있으므로 혜시(惠施)와 같이 묵가의 동지라고 생각된다. 혜시의 궤변론에 대하여 공손룡이 독자적인 궤변을 떨쳐서 응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장자(莊子)> '천하편'에는 공손룡이 궤변 21조를 실었고, <열자(列子)>의 '중니편(仲尼篇)'에는 8조를 실었다.

공손룡의 궤변으로 유명한 것은 '알에 털(毛)이 있다' '백마(白馬)는 말이 아니다, 견석(堅石)은 돌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알에 털이 있다'는 말은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론을 결론적으로 집약한 것인 듯하다.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논제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말이라는 것은 형상에 이름을 붙인 것이요 백(百)이라고 함은 색(色)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색에 이름을 붙인 것과 형상에 이름을 붙인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런 까닭으로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또 "만일 사람이 말을 구하였을 때는 황마(黃馬)나 흑마(黑馬)도 되겠지만, 백마를 구하였을 경우에는 황마·흑마로는 주문에 맞지 않는다.

설령 백마를 말이라고 한다면 황마·흑마도 말인 이상 어느 것을 가져와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도 황마·흑마를 가져오는 것으로는 합당하지 않는다 하면 백마가 말이라고 하는 가정(假定)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마는 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 논리에는 확실히 속임수가 있다. 그러나 형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색(質)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동일하게 논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그 나름대로 옳을 수 있다. 같은 논리로 "단단한 돌은 돌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외에 공손룡은 "비조(飛鳥)의 그림자는 아직까지 움직인 일이 없다"라고도 한다. 그림자는 물건의 정지의 순간에 비치는 것이기 때문에, 비조의 그림자라고 할지라도 정지의 순간의 점의 연속인 까닭에 비조의 그림자는 아직까지 움직인 일이 없다고 한다. 공손룡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여 <공손룡자(公孫龍子)> 6편이 남아 있다.

법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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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家-思想

봉건제(封建制)에서 군현제(郡縣制)로 이행하고 있었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씨족제(氏族制)적 봉건국가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 유가의 덕치사상에 반대하고 새로운 법치사상에 의해 중앙집권국가를 만들려고 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들은 사상가로서 학파를 형성하였다기보다 실제 정치가로서 활약하였기 때문에 문헌상으로 그 자취를 살핀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덕치(德治)에 중점을 두는 사상과 법치(法治)에 중점을 두는 사상은 이미 춘추시대부터 대립되고 있었다. 춘추 말기 정(鄭)의 재상이었던 자산(子産)은 법령의 조문을 명문(銘文)으로 하는 동기(銅器)를 만들었다(전536). 이것은 중국에 있어서 성문법 공포의 최초로서 씨족제적 봉건국가의 체질 변혁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같은 경향은 제(齊)의 재상을 지낸 안영(晏孀)에게서도 보인다.

전국시대에 처음으로 법치를 주장한 인물에 이회, 오기(吳起), 상앙, 신불해(申不害) 및 신도 등이 있다. 그들은 법가 사상의 선구자들이다.

이들의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이 전국 말기에 나타난 한비(韓非)였다. 그는 법(法), 권술(權術), 권세(權勢)를 중시하여 중심에 법을 두고 '권술'과 '권세'를 유기적으로 결부시켰다. 신불해(申不害)의 '권술(權術)'에 대한 생각, 상앙의 법에 대한 생각, 신도의 권세(權勢)에 대한 생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법체계를 만들어냈다. 그는 원래 유가의 순자에게 사사하여 그 예(禮)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비(韓非)의 생각은 중앙집권을 도모하려는 군주의 이익과 일치하였으며, 씨족제를 유지하려는 귀족들과는 충돌하였다. 후에 진시황(秦始皇)이 그를 중용하려고 하였으나 이사(李斯)에게 시기를 당해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그대로 진(秦)의 실제 정책에 취해져서 진제국의 형성에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

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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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子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의 재상이던 관중(管仲)의 저작으로 믿어졌으나 현재로는 전국시대 제(齊)에 모인 사상가들의 언행을 전국시대부터 전한(前漢) 때까지 현재의 형태로 편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관중(管仲), 이름은 이오(夷吾). 제(齊)의 공자(公子) 규(糾)에게 벼슬하여 후에 환공(桓公)과 적대관계였으나 환공의 신하 포숙(鮑叔)의 추천에 의하여 환공의 신하로서 재상이 된 후 제를 춘추시대의 5대 강국 중 제일 가는 강국으로 만든 공적을 세웠다. 관중은 제에 있어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며, 또 제의 직하(稷下)는 전국 시대의 학술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거기에 모인 학자들이 관중에 청탁하여 <관자>를 만든 것인 듯하다.

이 <관자>는 원래 86편이었으나 10편은 분실되고 76편이 현존한다. 전체가 <경언(經言)>, <외언(外言)>, <내언(內言)>, <단어(短語)>, <구언(區言)>, <잡편(雜篇)>, <관자해(管子解)>, <경중(輕重)>의 8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관자해>는 <경언>의 해석이겠지만 다른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분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경언>이 다른 부분보다 오래 된 것임은 인정되기 때문에 <국어(國語)>, <좌전)> 등의 관중에 관한 기록과 서로 보충하여 합하면 관중을 알기 위한 사료(史料)로 삼을 수 있다.

그 내용은 정치·법률·제도·경제·군사·교육·철학 등 다방면에 걸쳤고, 특히 시대의 변화로 인한 예(禮) 사상의 무력화에 대하여 그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으로 구제하려는 도가와 권력에 힘입는 현실적인 법을 도입하려는 법가의 사상과의 관련이 이 관자(管子)에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에 유가(儒家)·묵가(墨家)·병가(兵家)·농가(農家)·음양가(陰陽家) 등 여러 종류의 학설이 혼입되어 있어 이 점으로 보아도 <관자>가 한 학파의 저술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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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産 (전585경-전522)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정국(鄭國)의 재상. 이름은 교(僑), 자산(子産)은 자. 공손교(公孫僑)라고 호칭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정(鄭)의 귀족 출신이다.

당시의 정치는 귀족에게 주도권이 장악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중앙집권을 목표로 하는 군주에 있어서는 큰 장애가 되었었다. 자산이 출생한 것은 귀족 상호간의 다툼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군주와 귀족과 신흥 사서인(士庶人) 간에 균형이 잡혀진 시기였다. 거의 동시에 제(齊)에서도 하급 귀족 출신의 안영이 나와 국정을 좌우하였다.

귀족 출신인 자산은 나라의 재상으로 뛰어난 견식과 합리적인 사고에 의하여 귀족정치의 폐해를 꿰뚫어보고 국내에 평화를 이룩하였다. 국외적으로는 대립하는 북방의 진(晉)과 남방의 초(楚), 2대 강국에 끼여 있었지만 그의 시책에 의하여 소강(小康)을 보전할 수가 있었다. 그는 국내의 귀족간의 항쟁에 대해 혹은 중립 혹은 역이용하는 등 갖가지의 방법을 써서 나라의 유지에 노력했다. 토지제도를 개혁하였고, 경지를 정하여 강제적으로 계획적 농업행정을 단행하고 세제의 개혁을 행하였다. 특히 유명한 것은 처음으로 법령의 조문을 명문(銘文)으로 하는 동기(銅器)를 만든 것이리라(전536). 진(晋)의 귀족인 숙향(叔向)은 이것에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씨족제하에 있어서의 형벌은 임금의 덕과 믿음에 의지해야 하는데, 성문법(成文法)을 공포하면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전통과 정면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신장(伸長)하고 있던 사서인의 세력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종래의 귀족 중심의 예에 대한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오래지 않아 진(晋)에서도 법을 성문화하여 공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신흥세력의 신장을 말하는 것이다.

상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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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390-전338)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정치가. 위(衛)의 왕족 출신.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앙, 상(商)은 후에 진(秦)에서 받은 봉지(封地)에 따른 성씨이다. 맹자(孟子)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처음에 위(魏)에 벼슬하였으나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고, 그곳을 떠나 진(秦)의 효공(孝公)에게서 벼슬하여 왕에게 변법(變法)을 건의했다. 그것은 가족제도를 개혁하여 대가족 제도를 분해하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고 중앙집권을 도모한다. 소가족에 알맞은 토지제도를 개혁한다. 그렇게 되면 국가에 의한 경지(耕地)와 과세(課稅)의 장악이 용이해진다. 도량형(度量衡)의 통일과 부락(部落)제도의 강화, 군공(軍功)에 따른 수상(授賞) 등과 함께 이 개혁에 의하여 진(秦)은 중앙집권의 실효를 거두어 강대해져 갔다. 그러나 이 개혁은 진의 귀족의 저항을 초래하여 기원전 338년 효공(孝公)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하면서 그는 체포되어 거열(車裂)의 형(刑)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상앙의 개혁안이 후에 진(秦)·한(漢)의 중앙집권국가 형성의 기초가 된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앙의 저서로서 <상군서(商君書)>가 전하여지고 있다. <상군서>는 그의 자저라고 볼 수는 없고 상앙의 법치사상을 승계한 후학이 상앙에 가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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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非 (?-전233)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로 법가(法家)에 속한다. 전기는 분명치 않다. 한(韓)의 공자(公子). 출생년은 알 수 없다. 법가사상의 집대성자로서 전국 제자(戰國諸子)의 최후의 한 사람이다.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유가의 덕치주의를 배척하고 성악설과 예설(禮說)을 계승하여 중앙집권을 도모하는 전정국가(專政國家)의 정치이론을 세웠다. 한비(韓非)는 멸망 직전에 있었던 모국 한(韓)의 전도를 근심하여 신불해(申不害), 상앙을 모방한 변혁안을 제출하였으나 채택되지 못하였다. 후에 진왕(秦王) 정(政-始皇)이 그 안을 보고 한비(韓非)의 저서임을 알고 그를 초청하려 하였기 때문에 기원전 234년 한(韓)의 사자(使者)로서 진에 갔으나 이사 등의 모략을 받고 다음 해 옥중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그가 우선 문제로 삼는 것은 한 국가에서 군주의 위치와 국내에 존재하는 토호세력에 대해서다. 토호세력은 군주와 서민과의 사이에서 도당(徒黨)을 조직하고 국가질서를 파괴하여 중앙집권을 도모하는 군주에게는 큰 장애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서민의 구리심(求利心)을 국가이익과 합치시키는 일에 힘써 상벌효과와 법치사상을 중시하였다. 그의 법치사상은 법(法)을 중핵으로 하여 권술(權術)과 권세와의 3결합(三結合)으로 되어 있다. 그는 신불해가 권술을 주장하고, 상앙이 '법'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둘 다 한편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르는 법(法)이라 함은 성문화되어 공포된 법을 가리키는 것이며, 권술이라 함은 군주가 흉중에 간직한 군신을 통어하는 방법이다. 또 신도가 말한 권세라고 하는 것을 취하여 법치(法治)가 인치(人治)보다 우수하다는 것과 법과 권세가 보합(補合)함을 말하였다. 한비(韓非)는 자연발생적인 민간질서보다 인위적인 국가질서를 추구하였다. 법은 그 경우의 지주이고, 권술은 실제의 시행방법이며, 권세는 시행자 자신의 태도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그의 사후 얼마 안 되어 진(秦)의 정치에 채용되어 마침내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한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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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非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한비와 그의 학파의 저작으로 55편이다. 원래 '한자(韓子)'라고 불렀으나 당대(唐代)에 한유(韓愈)가 한자(韓子)라고 호칭됨에 서로 혼동되지 않도록 이 책을 <한비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기(史記)>에 진시황(秦始皇)이 <고분(孤憤)>, <오두>를 보고 대단히 감복한 것이 기록되어 이 책이 한(韓)의 멸망을 근심한한비(韓非)의 대책으로서 이뤄진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비자(韓非子)>는 <초견진(初見秦)>이라는 편으로 시작되었고, 이어 <존한(存韓)>이 놓여 있으며, 또 속에는 노자의 해석으로 생각되는 것도 있어 그 성립 시기와 작자는 한 시기에 한 사람에 의해 저술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중에서 한비(韓非)가 "고분(孤憤)·<오두>·<내외저(內外儲)>·<세림(說林)> 등 전부 10여만 언을 저작하였다"고 기록한 후 한비의 전기를 이런 등등의 편을 기준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비자(韓非子)> 55편 중에서도 <고분>·<오두>·<내외저>·<세림>의 각편을 한비(韓非)의 자저로 인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고분>, <오두> 및 <현학> 3편만을 한비의 자작으로 보는 것이 정론(定論)으로 되어 있다. <고분(孤憤)>에서는 당시 사문(私門)의 권세가 만연되어 국가의 질서가 어지러워진 상태를 기술했다. <오두>의 두는 나무 속에 들어박혀 내부에서 파먹는 벌레를 뜻하는데, 그 벌레와 같이 내부에서 나라를 좀먹는 것이라 하여 학자(學者)·언담자(言談者)·대검자(帶劍者)·환어자(患御者)·상공민(商工民) 등 오자(五者)를 들고 있다. 학자라 함은 인의나 겸애를 주장하고 옛날을 숭상하는 유자(儒者) 묵자(墨者)를 지칭한다. 언담자라는 것은 합종·연형(連衡)을 꾀하여 제국을 순회하는 유세가(遊稅家) 등을 말한다. 대검자라 함은 국가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유협(遊俠)의 무리를 말하고, 환어자(患御者)라 함은 사문(私門)에 종사하여 군역(軍役)을 빠지는 등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말한다. 상공민이라 함은 상인(商人)을 말한 것인데 자기는 활동하지 않고 농민의 재산을 탐하여 얻는 사람, 이들은 모두 국가 통제의 한계 외에 있어서 중앙집권을 도모하려는 군주에서 장해가 되는 자들이었다. <현학(顯學)>에서는 주로 유자(儒者)·묵자(墨者)의 해로움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상 3편 이외에 그 학파의 학설과 토론을 기록한 것에 <난(難)1-4>, <난세(難勢)>, <문변(問辯)>, <문전(問田)>, <정법(定法)>이 있다. 각편 모두 타학파의 주장을 소개하고 거기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밖에 이 학파가 전한 설화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설화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한다. <세림(說林) 상·하>, <내저설(內儲說) 상·하>, <외저설(外儲說) 좌상, 좌하, 우상, 우하>, <십과(十過)> 등이 있다. 또 도가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후기의 법가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인 <주도(主道)>, <양확(楊確)>, <해로(解老)>, <유로(喩老)>등이 있다. 또한 <해로>, <유로>의 2편은 가장 오래된 <노자(老子)>의 주해로서 때로는 이것을 한비학파와는 전연 관계 없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이 책은 선진 법가사상의 총합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병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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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家-思想

춘추전국시대 열국간의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군사에 관한 사상·지식·기술에 관련된 서적이 차츰 나타났다. 그런 저술을 한데 묶어 병가(兵家)라고 칭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기재되어 있는 <오손자 병법(吳孫子兵法)> 82편과 <제손자(齊孫子)> 89편이다. <오손자(吳孫子)>는 춘추시대의 군사 사상가 손무(孫武)의 저작이라 하고, <제손자(齊孫子)>는 전국시대의 손빈(孫 )의 저작이라 한다. 현재는 다만 <손자(孫子)>13편이 남아 있을 뿐인데 13편의 <손자(孫子)>가 <오손자(吳孫子)>인지 <제손자(齊孫子)>인지는 예로부터 이론(異論)이 있다. 그러나 <손자(孫子)> 13편 중에는 병거이천승(兵車二千乘)이라든가, 10만의 병사를 규모로 하는 용병법(用兵法)을 설명한 것과 그 속에 나오는 장군이 춘추시대 사람이 아닌 점 등으로 보아 현존의 <손자(孫子)>는 대규모 전쟁이 행해졌던 전국기(戰國期)의 것으로서, 아마도 <제손자>의 작품일 가능성이 짙다. 다만 일부에는 <오손자>의 기록도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까닭으로 현존하는 13편의 <손자>는 예로부터 <손자>라는 명칭하에 전래된 두 종류의 책 중 <제손자>를 주재료로 한 발췌본(拔萃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병가는 본래부터 군사사상·군사지식·군사기술을 논하는 것이지만, 그 사고방식의 기저에는 법가적인 것이 강하게 내재한다. 예컨대 현존의 <손자>에 있어서 전쟁에 승리를 얻기 위한 5개 조건을 <5사(五事)>로서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도의에 부합해야 하는 것, 둘째 천(天)의 시(時)에 좇을 것, 셋째 땅의 이(利)에 좇아야 할 것, 넷째 우수한 장군을 얻는 것, 다섯째 엄정한 조직·규율을 가질 것이라고 하였다(計篇). 이 다섯째의 설명은 법가의 사상에 통하는 것이다. <손자>에 기록되어 있는 것 중에서 다음 말은 유명하다. "적(彼)을 알고 나(己)를 알면 백전(百戰)이 위태하지 않고 저를 모르고 나만 알 뿐이면 일승일패(一勝一敗)한다. 저를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면 백전이 다 위태롭다."(謀攻篇) 이것은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과 나의 내부 모순을 변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됨을 말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무릇 용병의 법은 나라를 온전히 함을 상으로 삼고, 다른 나라를 격파함은 이에 다음 간다. 또 군사를 온전히 함을 상으로 삼고, 타국의 군사를 격파함은 이에 다음 간다.(中略) 따라서 백전백승하는 것은 최선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서도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善)이다."(謀攻篇) 이 사고방식 속에는 도가적 발상도 있으나 단지 군사상의 관점에서만 용병(用兵)을 말하지 않고 정치의 연장선에서 '용병'을 말하는 곳에 <손자>의 군사사상의 본질이다. 이외에 병가의 현존하는 주요한 책으로는 <육도(六韜)>와 <오자(吳子)>가 있다.

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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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韜 주(周)의 여망(呂望=太公望)의 저서라고 하나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만들어진 책인 것 같다.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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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子

13편.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손빈의 저작을 주로 하면서 춘추시대의 손무(孫武)의 설도 채택한 병법서의 다이제스트판이다. 손빈의 빈은 이름이 아니다. 발을 잘리는 형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손빈이라고 했다. 병가의 가장 대표적인 책이다.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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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子

6편. 전국시대의 오기(吳起)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 병법을 전하는 문인에 의하여 후대에 저작된 것이다.

농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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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家-思想

춘추전국시대에 있던 농가사상에는 기술과 사회사상에 관한 것 두 방면의 것이 있으나 여기서는 후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주례(周禮)>, <관자(管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속의 몇몇 편에 농업 생산기술에 대하여 말한 기록이 있다. 사회사상가로서 저명한 농가는 허행(許行)이다. 허행은 춘추시대의 등(藤)나라에 살면서 수십인의 문인에게 농업생산에 의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주장하였다. 허행이 있는 곳으로 곧 송(宋)에서 진상(陳相)을 주령(主領)으로 하는 수십인이 달려 왔다. 허행의 무리들은 농업신(農業神)이기도 하고 상고(上古)의 전설적인 제왕이기도 한 신농(神農)의 교(敎)라고 하는 것을 기치로 삼아 국군(國君)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것을 설파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商人)의 농민에 대한 이윤추구를 배척하였고 그에 저항하였다. 허행의 무리는 농업생산에 필요한 공구생산 등의 수공업자 역시 노동에 종사하는 자라 하여 그 존재의 의의를 인정하였다.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에 의하여 자신의 생활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결과에 의한 잉여(剩餘)는 각자 노동자의 소유에 귀속시킨다. 이렇게 해만 천하는 균평(均平)하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공상적(空想的) 사회사상에 가까운 면이 있으나, 당시 점차로 강고해진 열국 봉건지주의 부궁강병책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종횡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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縱橫家-思想

종횡가란 열국(列國)을 돌아다니며 독특한 변설로 책략을 도모하는 사람들로 열국의 연합체를 조직시켜 그 힘의 밸런스를 이용해서 권력을 쟁취하려는 사상가들을 말한다. 그 시조는 귀곡선생(鬼谷先生)이라 한다. 귀곡선생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사람인 왕후를 가리킨다. 하남성(河南省)의 귀곡(鬼谷)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귀곡선생이라고 한다. 병가(兵家)인 손빈도 그 문인이었다는 말이 있으나, 귀곡선생의 문인으로서 가장 저명한 활동가는 소진(蘇秦), 장의(張儀) 두 사람이다. 오늘날 <귀곡자(鬼谷子)> 12편이 존재하나 그것이 귀곡선생의 저서라고 하는 확증은 없다. 소진(蘇秦)은 낙양(洛陽) 사람이다. 당시 점차로 강대해진 진(秦)에 대하여 연(燕)·한(韓)·위(魏)·조(趙)·제(齊)·초(楚)의 6국이 연합하여 진(秦)에 대항할 것을 득의에 찬 변설로 열국에 설파하였다. 이것을 합종설(合縱說)이라고 한다. 소진의 이 책략 때문에 진은 15년간 침략을 정지하였다. 소진의 동생인 소대(蘇代)도 소진과 힘을 합쳐서 합종(合縱)의 성립에 노력하였다. 장의(張儀)는 위(魏)의 사람으로 소진과 함께 귀곡선생에게 배웠다. 소진·소대의 합종설에 대하여 6국이 연합, 진에 복종하여 섬길 것을 주장한 연형설(連衡說)을 열국에 주창하였다. 한때 합종설의 세력에 패하여 위로 돌아가 그 재상이 되었으나 얼마 후에 그의 연형설이 승리하였다. 이에 합종설의 주장자인 소진은 제(齊)에서 암살되었다. 종횡가의 무리는 책모(策謀)를 다해 지배자 계층간에 권력 투쟁을 야기시켜 놓고, 그 권력 투쟁을 이용하여 정권을 확보하는 일을 목표로 하였다.

음양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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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陽家-思想

음양이원(陰陽二元)과 5행(五行)을 조합하여 신비적인 종교철학을 쌓은 것이 음양가이다. 음양과 5행을 조합하여 한 개의 철학 체계로 만든 것은 제(齊)의 추연(騶衍)이라고 한다. 그리고 음양가는 이 추연으로 대표된다.

추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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鄒衍

기원전 3세기경의 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사람이며 한편 추연(鄒衍)이라고도 쓴다. 맹자보다 조금 뒤의 사람이다. 제나라 땅은 전통적으로 미신적·주술적·신비적 사상의 경향이 강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중국 재래의 5행사상(五行思想)과 음양2원론(陰陽二元論)을 교묘하게 조합하여 소위 음양5행사상을 구축하였다. 추연의 저서라고 하여 <추연(鄒衍)> 49편, <추자종시(騶子終始)> 56편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추연의 철학으로 유명한 것은 소위 '5덕종시설(五德終始說)'과 '적현신주설(赤縣神洲說)'이다. '5덕종시설'이라 함은 왕조(王朝)는 그 왕조에 부여(附與)된 5행의 덕의 운행논리(運行論理)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흥폐가 교체된다고 하는 일종의 신비적 역사철학이다. 진(秦)을 수덕의 왕조(水德王朝)라 하고, 그 이전의 4조(四朝)를 황제(黃帝)=토덕(土德), 하(夏)=목덕(木德), 은(殷)=금덕(金德), 주(周)=화덕(火德)에 배치하여 5행상극의 이론대로 각 왕조는 다음에 나타난 왕조에게 타도될 운명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물은 5행상극의 최후의 것으로서 왕조순환은 수덕(水德)의 구유자(具有者)인 진(秦)에 그친다고 하여 진왕조의 정통성 및 절대성을 말하였다. 적현 신주설(赤縣神洲說)이라 함은 전우주는 81주(洲)인데 그 중의 9분의 1인 9주를 점거하고 있는 것이 적현신주(赤縣神洲)라고 이르는 중국의 토지라는 주장이다. 일종의 신비적인 우주철학이다. 9주설(九洲說)은 <서경(書經)> <우공편(禹貢篇)>에 쓰인 것이다. 9(九)는 궁(窮)으로 통한다. 그 9(九)와 9(九)를 승(乘)하여 우주를 설명하려는 단순한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하는 바는 역시 신비적 주설(呪說)이다. 추연(鄒衍)이 말한 5덕종시설(五德終始說)은 얼마 안 되어 진(秦)이 망하고 한왕조(漢王朝)가 출현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또 새로운 한대(漢代)의 왕조론에 의하여 권력의 교체를 설명, 역사의 예언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추연(鄒衍)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는 음양과 5행의 조합은 한대에 더욱 복잡·세밀해져서 자연현상이나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 심지어 정령(政令)의 방식에까지 그 논리가 이용되게 되었다.

잡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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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家-思想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제설(諸說)을 절충 해설하여 집대성한 것이 소위 잡가(雜家)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있다.

여씨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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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氏春秋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의 사실상의 아비 여불위(呂不韋)가 많은 학자를 집합하여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사상을 절충·통합시키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정령(政令)의 참고서로 한 것이 <여씨춘추>이다.

26권이 있는데 12기(十二紀) 8람(八覽)·6론(六論)으로 나누어진다. 취급한 학설 중에는 도가(道家)의 것이 가장 많고 유(儒)·병(兵)·농(農)·법가의 설도 섞여 있다. 이것을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은 이 12기(十二紀)의 요약이라고 한다.